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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저글링

 

 

 

 

    더없이 청량한 나날이지만 괜시리 헛헛해지는 마음은 숨길 수가 없다. 쫓기듯 떠나 보낸 시간들을 돌아보며 생각한다. 나는 혹시 마지막 반전 혹은 일탈을 기다리는 것일까.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평범한 직장인에게 일상은 도전이자 생존이니까. 가정, 직장, 친구, 건강, 그 어느 하나 놓치기가 힘들다. 적당한 느슨함과 긴장감으로 내게 주어진 것들을 골고루 챙겨야만 비로소 하루하루가 탈 없이 돌아갈 수 있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저글링을 닮았다. 공 몇 개를 번갈아 공중에 던지며 돌리는 저글링을. 저글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의 궤적이라 한다. 쏘아 올린 공이 얼마나 정확하고 일정한 반원을 그리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는 것. 그러나 아직 공이 손에 익지 않은 나는 채 몇 번 던지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공은 영 마음 먹은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떨어진 공들을 주으러 다니는 시간이 태반이고, 막상 공중에 띄운 시간은 정말 찰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 잠깐의 순간이 선사하는 몰입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손에 쥐어진 서너 개의 공을 놓지 않아야만 맛볼 수 있는 환희처럼, 우리의 삶을 비추는 밝은 조명 역시 하루하루 평범하게 보이는 일상을 끌어안았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선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늘 하루 조금 더 힘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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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소개팅

 

 

 

 

    그는 내 말이 다 끝날 때까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무슨 이유에선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아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제로는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내가 내뱉는 한 음절이 바깥의 공기와 만나 이루는 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마치 해가 가장 긴 날의 낮에 서 있는 누군가의 늘러붙은 그림자 같았다. 아마 내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다음 음절을 쥐어짜내고 있지 않았더라면, 늘어지는 말소리에 취해 의자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천상에서의 1분은 지상에서의 백 년인가 천 년인가와 같다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영원한 잠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게 된 거라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 그러니까 천국에서 온 이 남자가 가진 시간의 힘이 나를 압도하여 순식간에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이 지나가버린 거다. 잠 든 내 몸 위로 먼지가 쌓이고, 나는 점점 잿빛으로 변해간다. 그가 손가락으로 나를 살짝 건드리는데, 내 몸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런데, 여긴 사먹는 음료수보다 공짜 보리차가 더 맛있네요.”

 

  갑작스레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앞쪽을 바라보았다. 물컵을 흔들며 나를 바라보는 남자가 앞에 앉아 있었다. 투명한 유리컵이라 반 조금 안 되게 남아 있는 보리차가 보였다. 나는 깨어나야 하는 것이다. 몽상夢想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굳게 다물었던 건조한 입술을 힘겹게 열고, 그에게 무얼 먹고 싶냐고 말했다. 실은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오라는, 나 자신을 향한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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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사랑하다

 

 

 

 

    드라마 <밀회> 7화에는 선재(유아인)가 모텔방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는 순전히 혜원(김희애)의 말, 그러니까 "집이라는 데가, 가끔은 직장 같을 때도 있단다." 라는 그 말 때문에 하는 행동이다. 보통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집에서까지 쉬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마음이 아픈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쉼표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ATM기를 통해 확인한 통장 잔액은 채 20만원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여기에서 제일 좋은 방"을 보여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은 되어서, 선재는 안심한다.
 

 

 

 

  영화 <희극지왕>에서 사우(주성치)는 창녀인 피우(장백지)와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잠든 그녀의 곁에 자신의 코 묻은 전 재산과 꾸깃한 연기교본을 놓고 돌아선다. 가난한 엑스트라인 그는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간절하게 배우가 되기를 소망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하지만 자신이 본 여자들 중 가장 예쁜 피우를 사랑하게 된 그는, 그녀를 위해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당신을 먹여 살리겠노라고 용기 내어 소리쳐 보지만, "당신 앞가림이나 잘해, 바보!" 라는 답변을 남긴 채 떠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사우는 마음이 쓰리다. 돌아선 그녀는 그가 준 돈과 시계, 연기교본을 끌어안고 엉엉 운다.

 

 

 

 

  선재의 모텔방과 사우의 연기교본은 순수한 사랑과 진심의 상징이다. 영화 <서유기-선리기연>에서처럼 당신이 내 몸 속으로 들어가 심장을 볼 수는 없을 테니, 당신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싶은 거다. 사랑은 그런 거다. 없으면 없는 만큼 내어주는 것. 그러니까 가진 게 없는 사람에게도 사랑은 사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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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산행(山行)

 

 

 

 

 

    “그만 그만! 내려줘!”

 

  나도 모르게 악다구니를 쓰고 만다. 지나가던 산 손님들이 히죽거린다. 몸을 거꾸로 서게 하는 인버전 테이블(일명 ‘거꾸리’라 불리는 운동기구)의 각도가 슬그머니 조정된다. 옆을 슬쩍 보니 아버지가 내 등을 받치고 서 있다.

 

  “아빠 있잖아. 무서워하지 마.”

 

 

 

 

 

  서른, 회사를 옮겼다. 그것도 연봉을 엄청나게 깎으면서 말이다. 물론 자의에 의한 결정이었다. 나에게는 돈보다 내 여유와 만족이 더 중요했다. 누군가는 철딱서니 없는 선택이라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일 아닌 것엔 참 정확하고 이성적이니까. 타인의 꿈이나 생각, 목표, 가치관을 재단의 대상으로 삼아 줄자나 가위 따위를 들이대는, 아주 못생긴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것이 현실의 세상이니까. 하지만 나는 내 영혼을 갉아 먹히는 일에 더 이상 동참할 수 없었다. 한없이 시들시들해진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을 매듭지었다. 이게 내 하향이직(下向移職)의 시시한 전말이다.

 

  스스로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살아왔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나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가치판단에 매우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렇게 굳힌 결심이 반드시 최선의 결론이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철옹성 같던 마음도 나이 앞자리가 바뀌니 결국 야들야들해져, 남들의 눈과 입에 내 만족감의 일부를 맡기게 되니 말이다.

 

  씩씩하고 당당하게 前 직장을 박차고 나왔지만, 사실 나는 심하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특히 가장 가까운 타인인 가족들의 시선과 표정에 일희일비하며 체한 듯 지내야 했다. 부모님과 남동생 모두 나에게 아무런 타박을 주지 않았지만, 잊었다 싶으면 다시 떠오르는 장녀로서의 책임감과 동생에게 좋은 선물 하나 사주지 못하게 된 누나로서의 민망함이 나를 괴롭혔다.

 

  그런 복합 미묘하고도 못생긴 감정 탓에 한동안 주말에 외출도 자제하고 지냈더니, 가족들이 대뜸 산에 가자며 두꺼운 옷을 던져준다. 등산이 그렇게 좋대, 살랑살랑 웃는 어머니 뒤로 눈을 찡긋 하는 동생과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친 아버지의 등이 보인다.

 

 

 

 

 

  어느새 거리가 벌어진 등산 고수, 어머니와 남동생의 자취를 쫓으며 열심히 걸어본다. 하지만 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크고 작은 돌부리에 자꾸만 걸려 새끼강아지마냥 캉캉거린다. 다행히 내 옆에는 그가 함께 걷고 있다. 평소보다 보폭을 줄여 딸의 엉성한 걸음에 박자를 맞추어주는, 나의 아버지.

 

  여기 있는 건 국산 소나무가 아니야. 아빠 어릴 땐 기온이 영하 20도로 떨어지는 날이 많아서, 바깥에서 놀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면 언 발이 녹느라 간질간질 했었어. 저기 보이는 건 골프연습장인데, 공이 이쪽까지 넘어와 등산객들을 괴롭게 할까 봐 이렇게 산길에 철조망을 만들어 놨나봐. 조금 뒤에 쉼터가 하나 나오니까, 거기에 앉아서 다 같이 커피 마시자. 믹스도 있고 원두도 있어, 취향대로 골라 마시면 돼.

 

  딸은 그저 ‘응, 응.’ 하는 무뚝뚝한 대답만을 내뱉을 뿐인데, 아버지는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온다. 묘하게 화제의 중심을 비켜나간 듯한 우리의 대화는, 공허하지만 배려가 가득하고 군데군데 애정이 묻어 있다. 언쟁 없이 느슨하게 이어지는 말의 화음 위로 평온함이 밀려든다.

 

  “아빠 있으니까 넘어져도 괜찮지만, 힘들면 이거 잡아.”

 

  집에서 들고 온 기다란 나무 지팡이를 쑤욱 내밀며, 아버지가 앞서 걷기 시작한다. 두 걸음 정도의 거리는 딸의 걷는 속도를 고려한 배려의 폭이다. 어떤 대답이 돌아오든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가 쏟아낸 질문들처럼, 애초에 내가 내린 결론은 중요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나의 결정을 오롯이, 아버지는 믿어주고 있구나. 나는 슬며시 그가 내민 나무 봉을 잡아 본다. 신기하게도 겨울의 차가운 온도가 아닌 사람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꽉 움켜쥐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