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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5. 파도의 리듬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일상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마치 어느 작은 극장에 홀로 어둠 속에 앉아 내 이야기가 은막에 비추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흑백 무성영화로 말이다. 얼마 전, 해안가를 따라 자전거 산책을 나섰다. 주변 풍경을 이리저리 훑어보다 천사가 보였다. 그는 어느 높고 하얀 벽 위에 서서 땅을 굽어보고 있었다.

 

입구에는 두 개의 여인 석상이 자리했다. 그 표정만 보고도 맞게 찾아왔음을 알았다. 바로 공동묘지였다. 그저 궁금해서 들르는 게 실례가 아닐까 싶어 조심히 걸음을 옮기며 들어섰다. 그곳에는 묘지기 아저씨가 가지를 치며 홀로 한낮의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벽 하나를 넘어섰을 뿐인데, 시간이 묘비를 따라 지면에 차분히 가라앉은 느낌이다. 햇살 따스한 봄날, 주택가 바로 옆 공원에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잠들었다.

 

누구나 이렇게 죽고 잊힌다는 걸 새삼 떠올렸다. 등 뒤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던 불안이 잠시 자취를 감춘다. 항상 따라붙어 다녀, 그것이 불안이었다는 것마저 가끔 잊곤 하는, 사소하면서도 사소하지 않은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결국 언젠가는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결말로 나를 떠나거나 내가 떠나보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마치 저 멀리서 다가오는 파도가 해변에 다다르면 푸른 거품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라스팔마스로 온 지 어언 한 달이 지났다. 아침에 커피를 마신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다녀온다. 장을 봐온다. 가끔 미겔과 외식을 한다. 해변 산보도 종종 나선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상이 도시의 풍경으로 자리잡아간다. 말과 행동, 주변 길과 사물이 낯섦을 잃어간다.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 속내를 잘 모르지만, 삶이 다시 낯설어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미겔에게 잠시 섬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스페인 남부도시와 리스본, 포르토를 둘러보겠다며. 섬이 그리울 거라고 덧붙였다. 세비야로 떠나는 점심, 미겔이 라자냐륾 만들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빵을 하나 싸줬다. 세비야에 도착하면 늦은 밤이라 먹을거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단다. 비행기에서든 세비야 숙소에서든 챙겨 먹으란다.

 

익숙한 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삶이 멀어지면서 가까워진다. 익숙해진 불안을 다시금 낯설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에 미겔은 나를 서퍼(Surfer)라고 불렀다. 인생을 서퍼처럼 산다고, 흐름에 몸을 내맡기며 사는 것 같다고 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가 싶었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모래사장에 떠밀릴 때까지는 끝없이 일렁일 게다.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는, 그러면서 또 새로운 불안을 찾아가는 그 리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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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10

478

 

 

 

사실 30분이라는 시간이 많을 정도로 이곳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자세히 생각을 해보면 내가 이미 꿈이라고 인식을 하는 시점부터 일어나게 되어있으니까. 평상시에도 자다가 꿈이라는 걸 인식하자마자 모두 일어나게 되지 않는가? 당연히 거기서도 일어날 수 없다면 완벽하게 몽마를 원망해야지.

 

그러므로 지금 아리엘의 존재가 깨어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꿈의 주도권을 네가 잡고 있으니 일어나지 못하는 거잖아. 그리 간단한 거였는데 아주 가까운 문제점을 배제할 뻔했네.”

 

“저도 이곳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모르니 어쩔 수 없잖아요. 25분남았어요.”

 

“그 전에 너와 내가 봉인 되었는데 어째서 내 꿈으로 네가 이송이 되는 거야?”

 

“천성적인 본능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리엘의 대답은 자신의 이성과는 관계 없이 내 꿈으로 들어왔다는 소리를 하려는 모양이다. 자신도 난감한 얼굴로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오히려 내가 한숨을 쉬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몽마로 바꾸는 건 켈모리아가 한 실수 중에 가장 큰 실수일거야. 그전에 세피르를 아르트리옴과 분리시키는 걸 먼저 해야 할 텐데...”

 

“세피르가? 아르트리옴과 합쳐지다뇨?”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카멜롯 지하에 있는 검은 존재가 너의 다른 인격으로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지만, 세피르가 그 안에 뛰어들어가서 뭘 했는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이야기 해주는 걸 까먹었어.”

 

만약 세피르를 제대로 구출한다면 나부터 구해달라는 소리를 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봉인되기 전에 말하지 못한 게 너무 많았을까? 솔직히 봉인이 해제된 기념으로 루니아 누나가 요리하는 것은 막아달라는 말도 해야 했고, 잡화점 청소는 아침에 꼭 한번씩 해야 한다는 것과, 마당청소를 할 때는 요즘 많이 더우니까 물을 뿌려가면서 해야 한다는 것도...

 

아직까지 너무 많은 일이 남아있는데, 이별이라는 것이 정말 무섭긴 하나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적은 없었는데, 머릿속에서는 분명 떠나갈 사람은 떠나가고 올 사람은 온다는 생각을 확실하게 하고 있던 내가, 돌아올 수 있는 짧은 이별에 이렇게 안절부절 할 정도라니.

 

지금은 아리엘이 불안해 하니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가기 위해 6번째 양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이 안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니?”

 

“메에~”

 

“아니. 몽마가 있으니 내가 스스로 못나간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그러니 몽마를 먼저 현실로 내보내야 내가 나갈 수 있을 거 아냐?”

 

“메에?”

 

지금 이 양의 울음소리와 사람이 대화할 때 목소리 톤을 비교했을 때.“그래서?”라는 말과 매우 흡사했다. 이 양은 지금 나와 별다른 이야기를 하기 싫다는 듯이, 울타리를 넘어가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 대체 다른 양들은 다 넘어가는 울타리를 6번째 양은 못 올라가는 이유가 뭘까?

 

“그러니까 울타리에 있을 때 제대로 점프나 뛰라고! 이 망할 양아!”

 

나도 모르게 6번째 양을 걷어차버렸다. 마법과 마나를 운용할 수 없는 내 몸은 그저 일반인보다 아주 살짝 조금 아픈 발차기. 하지만 양은 발로 차이자마자 거대한 울음소리와 함께 죽기살기로 도망치면서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어라? 뛰어넘었다.”

 

“메에.”

 

저 안에 다른 양들이 나와서 6번째 양을 맞이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자. 아리엘은 허탈한 웃음소리와 함께 말하기를...

 

“카일 씨. 의외로 난폭하네요.”

 

“조용히 해.”

 

“그래도 조금만 뒤에서 밀어주면 저 멀리 도약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게 정답인가 봐요.”

 

조금만 밀어준다는 그 말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양을 보고 있자니 내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것 같아, 다시 뒤를 돌면서 탈출할 궁리를 위해 바닥에 누웠다.

 

“뭐하세요?”

 

“혹시 몰라? 이러고 자고 있으면 현실에서는 봉인이 풀린 상태로 깨어날지?”

 

“방금 전까지 제가 방해가 되어서 꿈에 못 깨어난다는 말은 누가 했던가요?”

 

“그러니 내 말은 혹시 모르냐는 말이야. 세상에는 조금만 밀어줘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천지야.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알아서 하겠지.”라고 방치를 한다면, 그 순간부터 저 6번째 양처럼 멀리 떨어지고 도태되는 존재로 전락하지.”

 

아리엘의 말이 사라진 것으로 보면 켈모리아에게 많이 밀려졌을 것이다. 학원의 비서가 되어가고 마족이 되어가면서, 그리고 얼떨결에 미스 카멜롯까지 되어가면서, 혼자인 줄 알았던 사람이 쭉 둘러본다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는 걸 깨닫는 것.

 

당연히 나도 똑같다.

너무 밀려서 절벽으로 떨어질 뻔했다만 그 경험이 양식이 되었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널 밀어줄 테니 이곳에서 빨리 나가자.”

 

“네? 밀어준다니?”

 

“내가 이곳에서 잠이 들 때 키스만 하도록 해. 다른 거 하면 정말로 때린다?”

 

“푸훗! 보통 그런 상황은 반대 아닌가요?”

 

“시끄러워. 이건 어쩔 수 없는 협력일 뿐이니. 나도 머릿속에서 거대한 내적 갈등과 지금 당장이라도 내 초자아가 당장 그 말을 철회하라고 울부짖고 있단 말이야. 제길...아리엘은 대체 얼마나 어장을 부풀려야 만족하는 거냐.”

 

“카일 씨야 말로 얼마나 많은 하렘인원을 만들어야 만족할 건가요?”

 

음...아리엘에게 이렇게 들어서 할 말이 없지만, 내 경우에는 의도한 것이 아니라 사고로 인해 어쩌다 보니 생성되었다고 해야 하나. 생각을 해보면 정상적인 만남이 없다고 생각했다.

 

“싫으면 안 해도 돼. 아니 다시 생각을 해보니 좋아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뭔가 부작용이 가장 크게 일어날 거 같으니까.”

 

“부작용이 뭔가요? 사람을 약물 취급하지 말아줄래요?”

 

내 오른쪽 귀에 걸린 티르빙을 만지작거리며 잠깐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티르빙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야! 안본 사이에 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를 꼬신 거야? 형씨는 정말 능력자구나?”

 

아마 이런 말을 했겠...

 

“잠깐?! 티르빙 너 지금 말했냐!”

 

귀걸이에서 오랜만에 불빛이 들어오면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호쾌하게 들려오는 어린 음성은 지금 당장 들려오고 있었다.

 

“이 공간은 영적인 에너지까지 모아주고 있으니까, 지금 당장 갈기갈기 찢어진 내 영혼을 일시적으로 용접했다는 의미겠지.”

 

“그보다! 그 동안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체 뭐야?”

 

“그야 내 영혼은 네가 힘을 사용할 때마다 갈기갈기 찢어지거든. 어느 순간 형씨와 이야기 하지 못하고 사라져서 많이 놀랐다고 생각하는데?”

 

1년간의 공백으로 지금 티르빙이 말하는 사실에 매우 놀라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티르빙을 내가 사용할수록 영혼이 찢겨진다는 소식은 몰랐는데, 그걸 왜 먼저 말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걸 먼저 이야기 하지 않았던 거야?”

 

“그야. 형씨는 항상 사건과 사고가 터졌으니까, 주춤할 시간도 없는데 그런 말을 해서 성장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 안 그래?”

 

내 얼굴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이 어울릴까? 아니면 오랜만에 만났으니 반가운 얼굴이 어울릴까?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할 테니, 티르빙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내가 이곳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내 마나를 흡수하고 이곳에서 본 모습으로 돌아와봐.”

 

“지금? 오랜만에 해볼까나?”

 

흔쾌히 납득하면서 마나를 흡수하고 사람의 모습으로 성장한 티르빙이,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7세 남자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외투를 벗어서 티르빙에게 입혀주고 자신의 팔과 다리를 오랜만에 확인하고 있는 티르빙은, 기쁜 듯이 이리저리 점프를 하고 있었다.

 

“이야! 마지막 한 조각까지 흩어졌을 때는 두 번 다시는 이런 모습으로 될 줄은 몰랐는데, 지금은 이렇게 살아 움직이니까 인생을 다시 살고 싶어진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넌 그 안에서 계속 살면 되잖아. 어차피 나는 이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다루지 못하거든.”

 

“그런데 형씨. 궁금한 게 하나가 있는데? 잠깐 말해도 될까?”

 

“뭔데?”

 

오랜만에 나타나더니 궁금한 것은 많은지 질문을 마구자비로 하기 시작했다.

 

“저 뒤에 있는 어린애에게 손대는 건 범죄라고?”

 

“안 댔어! 그리고 진짜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잖아!”

 

티르빙도 아리엘을 의식했는지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아리엘을 잠깐 부를 겸.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고 본래 말하고 싶었던 것을 내뱉었다.

 

“지금 형씨 몸 안에 있는 거. 마나가 맞는 거야?”

 

“마나가 맞냐고 물어봐도 지금 내가 어떻게 들춰낼 수 없다만?”

 

“마나라고 보기에는 거대한 에너지가 담겨있는 거 같은데? 0.1%만 흡수해도 내가 붕괴될 뻔했다고?”

 

아리엘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던가?

 

“아리엘. 지금 눈을 강화해서 내가 어떤 마나를 지니고 있는지 알려주겠어?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도 티르빙이 내 마나를 흡수하고 변했으니까.”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구나. 이제 남에게 진단해달라고 할 정도로 낡은 건가?

 

“태양 빛처럼 백색광이네요. 조금만 쳐다봐도 실명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신성력은 백색인데 지금 카일 씨의 몸 안에 있는 것은 너무 눈이 부셔요.”

 

“무슨 소리야. 설마. 지금 3개의 자원에 내 몸 속에서 융합한 거야? 내가 핵융합 발전기냐? 아니면 누군가가 마법카드로 융합을 사용한 거야?”

 

“하지만 제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고요? 설마...신이 되어가는 거 아니에요?”

 

아니. 신이 되어가고 있는 현상으로 이런 경우는 없다. 천계는 신성력 하나로 이어져있으니까. 이렇게 융합이 된 경우는 창조신 이외에...시나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큰일이라면 이 몸으로는 그 거대한 에너지를 감당할 자신이 없고, 제대로만 사용할 줄 안다면 어마어마한 능력이 될지도 모른다.

 

당연히 지금 봉인이 풀려서 나가자마자 붕괴 당할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원래 이 안에 들어가 있으면 리셋이 되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마법도 페어링마저 전부 다 끊어졌지만, 마나마저 본래 상태로 돌아올 수 없나 보다.

 

“파워 업이 파워 업이 아닌듯한 파워 업은 난생 처음 들어봤네. 이러다 온 몸이 파업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형씨. 예나 지금이나 말장난은 최악이구만...”

 

티르빙이 나를 보며 안쓰러워 하는 표정을 지을 줄 몰랐는데...

 

“시끄러워! 아무튼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자. 그리고 티르빙은 그 안에 있으면 초기상태로 그 안에 계속 있을 수 있잖아? 그러니 우리 따라 밖에 나오지 말고 그 안에서 살라고?”

 

“음.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양들도 많이 있고. 그럼 길을 열어줄 테니 피를 줄래?”

 

티르빙은 활짝 웃으면서 백색의 단발이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르는 바람에 이끌리고 있을 때. 오른팔을 티르빙 쪽으로 건넸다. 어려 보여도 역시 물리는 건 상당히 아프고, 피를 목에 상쾌하게 넘겨가며 맛을 음미하는지 한동안 내 오른팔을 풀어주지 않았다. 강한 붉은 눈이 빛을 발하며 뜨자마자, 바닥에서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커다란 구멍이 나기 시작했고, 나와 아리엘은 멍하니 그 구멍 밑바닥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기 통과하면 체셔가 나오는 거냐?”

 

“엘리스와 더불어 이상한 나라에 빠지는 건 아닐까요?”

 

“둘 다 중얼거리지 말고 잘 가도록 해.”

 

 

나와 아리엘의 등을 살짝 떠미는 소리는 툭,하고 튀어나왔지만, 앞으로 떨어져야 할 깊이를 모르는 우리는 마음의 준비도 안 되었는데 떠밀어버린 티르빙을 저주하며, 거대한 비명소리와 함께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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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워프레임을 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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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9

477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시간은 열쇠가 아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 석상 안에서 언제 나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나와 아리엘은 빨리 문을 열리길 기다리면서 방금 전에 들었던 사회자와 각본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모든 것은 각본에 의해 지정된 전개라는 말을 켈모리아에게 들었다고 했다. 100번이상 회귀를 한 것도 결국 지루한 각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쾌락주의자의 이상행위라고 하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리고 켈모리아는 이번 싸움을 포기하는 행동을 취했다는 것이, 머릿속에 나타날 수 있는 결론.

 

그러면 지금까지 이것만 100회이상 일어난 일인가? 세계가 부셔지고 만들어지는 것이 100회이상이 아니라면 지금은 어떤 결말을 향해 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켈모리아의 경우에는 엘티노스를 넘어 영웅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을 테니, 실질적으로 주 목표가 영웅을 뛰어넘는 것. 부 목표가 반복되는 회귀를 부수는 것이 되겠지.

 

“꽤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어. 이 정도로 내 머리가 돌아가본 적은 처음이야. 각본가와 사회자라...유랑극단의 인원은 어릿광대, 맹수 조련사, 각본가, 사회자. 이렇게 4명이 있었지.”

 

“어릿광대와 맹수 조련사가 저희를 도와주는 이유도, 그저 각본에 그렇게 적혀있기 때문이라고 켈모리아가 말했어요. 그러니 지금은 이 봉인에서 빨리 풀려서 카일 씨와 해결하지 않으면...”

 

“해결? 미안하게도 나는 이제 이곳에서 나가면, 마법을 못쓰는 민간인으로 완벽하게 전직하게 된다고?”

 

“네? 그건 또 무슨 자다가 트롤의 허파가 빠지는 소리에요?”

 

트롤도 허파가 빠지면 생명이 위급하다고...

터무니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상황설명을 요구하는 주홍빛의 눈이 나를 쏘아봤다. 빠르게 고개를 돌린 아리엘의 은색비단은 아름다운 곡예를 하듯이 따라왔고, 숨길게 없는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이곳은 엘티노스 씨가 만든 봉인장치야. 네가 가진 마신의 힘을 봉인하고 본래 마족으로 되돌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먹는 일이라고, 원래는 너를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던 속셈이었지만, 내가 이렇게 들어가면서 너는 마족으로 유지하며 위급상황에 곧바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도록 보존하는 것이며, 나의 경우에는 그 동안 잘 유지해왔던 모든 마법과 페어링, 어쩌면 모든 계약과 낙인이 사라지게 돼. 모든 것을 잃는다고 봐야 할 거야. 지금도 그 상태라서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은 너에게 의존하는 거라고.”

 

“그런...말도 안 되는...그럼 내가 카일 씨를 지배해서 여장을 시킬 수 있다는 소리인가요?”

 

“눈을 반짝이며 무시무시한 소리 하지마. 아무리 여름이라고 하지만 더위를 날리기 위해서 그런 소리를 한다면, 정말 귀신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아니, 솔직히 지금까지 만나온 것이 좀 많아서 귀신이 찾아와도 안부인사는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나를 여장시킨다는 말부터 계획, 행동, 범죄까지 모두 금지야.”

 

“칫!”

 

저런 고운 얼굴로 혀를 찰 줄이야.

그런데 의외로 잘 어울리는 건 뭘까? 귀엽다고 해야 하나?

무의식적으로 아리엘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면서 다시 허세가 2000%담긴 말을 내뱉었다.

 

“마법과 모든 계약을 잃었지만, 지금까지 겪어온 고생과 경험, 지식은 나의 가치가 되어주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나중에 모든 것을 잃어도 그리 걱정하지는 말아라. 살아갈 길은 궁리만 하면 어떻게든 나오니까. 지금 켈모리아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숨어있겠지.”

 

“숨어요?”

 

아리엘은 나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귀엽게 반응을 하고 있지만 그 눈에서는 분노가 아니라 슬퍼하는 눈을 하고 있었으니.

 

“나에게 묻지 말고 좀 머리 속으로 생각해. 켈모리아는 이번 카멜롯에서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어. 그리고 이 사건은 검은 높새바람에 의해 천칭들의 모임이 주목을 하게 되면서, 지금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켈모리아를 당장이라도 화형을 시키지 못해 안달이 나겠지. 신인류에 이어서 유난히 세계의 평화가 자주 흔들리니 상당히 예민할거라고?”

 

비록 내가 엘티노스에게 한 소리 들었을 때의 첫 부분을 응용했지만, 아리엘은 그래도 자신을 받아줬던 켈모리아의 따듯한 모습에 더욱 마음이 끌리고 있나 보다. 이런 세계로 와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시원할 정도로 받아주고, 힘의 사용방법을 알려줬으니 부모를 생각하는 아이의 모습인 걸까.

 

“너도 아직 어리네. 빅터와 같이 다니려면 10년은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전 이미 어른이라고요. 머릿속에서는 이미 세상물정에 대해 다 알고 있고, 아직까지 지식이 쌓이고 있어요.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카일 씨를 습격할 수 있으니 잘 때 조심하시죠?”

 

“잡화점을 안 열어주면 되지.”

 

“릴리스와 같이 갈 건데요?”

 

결계 그리는 방법이 뭐였더라?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을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머리와 몸은 기억하고 있지만 정작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 결계를 그리기 위해선, 중급 이상의 마법석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여전히 강한 정신방어네요. 카일 씨는 저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야 당연하지. 네가 비록 몽마라서 남을 홀린다고 할지라도, 내 체질은 월식 때문에 뒤틀려버렸으니까. 뻔해 보이는 유혹이나 함정 같은 건 걸리지 않는다는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습을 받거나 습격을 받죠. 그것도 밤에.”

 

“마지막 단어를 강조해서 안 좋은 기억을 들쑤시지마.”

 

지금까지 당해왔던 것을 생각하기 싫으니, 빠르게 빠르게 기억을 덮어 눌렀다.

 

“그리고 너는 빅터와 잘 지내고 있는데 다른 남자에게 손을 대려고 하다니, 나의 경우에는 기혼자라고? 여자가 여러 남자에게 손을 뻗는 거 아냐.”

 

“그래도 그 발언 좀 이상하지 않아요?”

 

뜬금없이 날아온 아리엘의 발언에 한숨을 내쉬며 “뭐가?”라고 대답해줬다. 그래도 지금은 흥미진진하니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는데.

 

“카일 씨는 모두의 카일 씨잖아요? 그‘모두’에 저도 포함되어있는 거 아닌가요?”

 

“그럼 너는‘모두’의 아리엘이냐? 이상한 모두 다 같이 하는 마블을 할 거면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려.”

 

“제가 모아온 백장미에 싸인이나 하시죠?”

 

말뚝이 심장에 박힌 것같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저 말뿐인데 몸이 진짜로 아프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만 같았다.

 

“너도 그 이상한 흑장미인지 뭔지 찍고도 아무렇지 않는 거냐?”

 

“카일 씨가 백장미를 찍도록 협력하는 것뿐이니까요. 빅터는 이미 탄탄한 근육과 훈훈한 이미지를 띈 얼굴이 여장에 방해되지만, 카일 씨는 트릭스 씨와 비슷하게 최소한의 근육만으로 어마어마한 힘을 내면서도, 중성적인 외모에 의외로 여장이 잘 어울리는 몸을 지니셨으니까요. 만약 맨 처음에 카일 씨에게 구조가 되었다면, 저는 잡화점에 눌러 살면서 여장을 시킬 기회를 모색했겠죠.”

 

“너를 맨 처음에 구조한 것이 빅터라서 정말 다행이군.”

 

아리엘이 어설프게 남장해서 찍는 그 이상한 잡지는, 나를 백장미 찍게 만드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소리인가. 루니아 누나와 레이나 씨가 어떻게 애를 버려놨길래, 순수하고 착했던 시절의 아리엘이 그립기까지 하네. 어라? 손수건이 어디 있더라? 눈물이 나오려고 해.

 

“농담은 이 정도로 끝낼까요?”라고 자신의 치마를 툭툭 털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묻는 곳이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이곳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도 찾은 것일까? 아리엘의 작은 고개는 나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6번째 양이 있는 장소라면 꿈의 세계라고 보면 편하겠네요. 어째서 엘티노스 씨가 카일 씨의 마법과 페어링을 모조리 소비시키면서, 저를 몽마로 남겨두려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어요.”

 

이제야 알았다는 소리는 지금까지 나와 대화를 하면서, 이곳을 어떻게 나가야 할지 궁리를 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냥 포기하고 시간이나 때울 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리엘은 서서히 자신의 명치부근에 손을 올리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옷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법학원의 교복이 아니라, 움직이기 편한 활동복.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나와 비슷하게 검은 바지와 회색으로 된 가죽외투. 외투 안에는 검은 블라우스가 자리잡고 있었다. 민무늬이기 때문에 아무런 특징도 없고, 수수한 모습의 차림으로 바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저기. 아무리 옷이 없다고 해도, 나처럼 스타일 없이 입으면 안 돼. 나의 경우에는 언제나 실용성을 우선시로 하기 때문에...”

 

“저도 실용성 우선인데요? 카일 씨의 옷을 복사하듯이 바꾼 이유라고 한다면, 마법학원의 복장은 치마가 짧아서 아슬아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증명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바꿔버린 것도 있어요.”

 

아리엘은 몽마니까 꿈의 세계에서는 힘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강한 의지로 이곳에서 깨어나고 싶다는 염원을 이루는 것이,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는 건가?

 

“제 힘은 아직까지 작용하니까. 카일 씨와 저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 거에요. 다만, 부작용이 있으니 미리 방지를 할까요? 아니면 부작용을 나중에 해소할까요?”

 

뭘지? 뭘 골라도 내가 손해인 것 같은 제안은?

 

“그 부작용이 무엇인지 알려줘야 그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지 않을까?”

 

대답을 들은 아리엘은 순간 눈빛이 요망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이미 느낌이 오기 시작했고, 어설픈 계략에 너무 어설프게 말려 들어가버린 나를 내가 저주하기 시작하며 귀는 마저 내용을 들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우선 둘 중에 하나를 고른다고 하셨으니, 설마 카일 씨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는 없고. 제 생각에는 이공간에서 깨어나려면 상당한 양의 정기가 필요한데? 어떻게 지불하실 건가요?”

 

정기를 어떻게 지불하냐고 물어봐도, 화폐처럼 꺼내서 줄 수도 없는 노릇인데,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 어쩌잔 걸까? 치켜 뜨는 눈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낳았다.

 

“좋아. 다른 해결방안을 생각하자. 아무리 꿈속이라고 해도 너의 도움 말고 다른 방법으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네가 무리해서 힘을 사용해 이곳에서 꺼내준다는 말은 없는 걸로 하고, 나의 명석한 두뇌가 제대로 일하길 기대하면서 귀엽게 바라보는 포즈는 그만둬.”

 

합리적인 판단은 이쪽이 더 빨랐...

 

“30분이에요. 30분동안 못나가면 강제로 카일 씨의 정기를 흡수하고 밖으로 나갈 거에요. 게다가 지금은 약간 춥기도 하고, 릴리스가 눈에 불을 키고 카일 씨를 원하는 이유도 알고 싶고...”

 

다고 생각을 했는데, 느닷없이 떨어진 선전포고 때문에, 생각의 속도는 시공간을 뚫어버릴 정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채찍질을 해봐도 제대로 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리엘마저 나를 가볍게 여기면, 유일한 도피처인 꿈에서마저 6번째 양과 이별하고, 정기 공급소가 될 것만 같은 불안한 미래를 만들지 않기 위해...

 

이미 무시무시할 정도로 처참한 이명이 붙었는데, 창고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난잡한 별명이 붙었는데, 내가 그 흔한 감자도 아니고!

 

“우선 실험을 하자. 30분동안 할 게 많으니 좀 기다려.”

 

 

기발하지 않지만 아주 간단한 것부터 실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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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보다가 잠을 못자서 지금 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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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팔년생 추억팔이

달팽이

이슬비가 내린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한다. "달팽이 잡으러 가자." 준비물은 종이컵과 뚜껑 역할을 할 구멍 뚫린 랩이다. 집을 나서자 비 냄새가 난다. 물비린내 혹은 달팽이 냄새라고도 불렀다. 달팽이 출몰 지역은 아파트 화단, 놀이터, 단지 내 외진 숲 정도이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나뭇잎 주위를 살펴본다. 달팽이들이 눈에 띈다. 달팽이 집이 큰 녀석, 작은 녀석 다양하다. 무늬 또한 가지각색이다. 챙겨 온 종이컵에 달팽이를 담는다. 이슬을 머금은 나뭇잎도 몇 장 넣어준다.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나뭇잎에 구멍이 뚫려있다. 똥을 싼다. 녹색 똥이다. 나뭇잎을 먹었으니 초록색인가 보다. 신기하다. 용기 내어 달팽이 더듬이도 건드려 본다. 왼쪽, 오른쪽. 건드리는 동시에 줄어든다. 

 

여기저기 달팽이 잡으러 온 친구들을 마주친다. 서로의 종이컵을 들여다본다. "와 엄청 많네?", "네 건 왜 이렇게 크냐?" 종이컵이 아닌 유리컵이나 대접을 들고 온 녀석들도 보인다. 서로의 달팽이를 꺼내본다. 나뭇잎에 올려놓고 누가 빨리 가나 지켜본다. 달팽이들은 몰랐겠지만 일종의 레이스이다. 느릿느릿 나뭇잎을 먹으며 움직인다. "내 거랑 바꿀래?" 달팽이를 교환하기도 한다. 

 

달팽이 채집을 마친 후 집에 온다. 조심스럽게 종이컵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조금 더 큰 공간으로 옮겨줘야겠다. 대접에다 옮겨 놓는다. 분무기로 열심히 수분 보충을 해준다. 며칠이 지나니 덩그러니 달팽이 집만 보인다. 죽은 것이다. 

 

그 이후로 달팽이를 잡지 않는다. 아니 잡긴 잡는다. 집으로 모셔 오지 않는다. 잡고 다시 자연에 놓아준다. 우리 때문에 고통받았을 달팽이들에게 미안하다. 

 

그 시절엔 길가에 죽어있는 달팽이들 흔적이 많았다. 달팽이를 밟지 않기 위해 땅만 보고 다니기도 했다. 지금은 죽어있는 달팽이를 보기 힘들다.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달팽이 자체를 보기 힘들다. 시대만 변한 줄 알았는데 생태계도 변했나 보다. 

 

비 오는 날 옛날에 살던 동네에 가면 다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아이들한테는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달팽이가 변했는지 내가 변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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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4. 포장을 풀며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다. 어딘가 꾸깃꾸깃 뭉쳐 있던 기억들이 천천히 일어선다. 여행이라는 핑계로 잠시 가려놓은 이야기다.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줄거리일까. 어디서부터 놓쳤을까. 나는 이 이야기 어디쯤 있는 걸까. 그 다음은 어디로 이어질까. 아무튼 눅진한 곰팡이가 소복히 피었을 것만 같은, 우리 사회 저 어둔 장막에도 이제 볕이 서서히 가닿기 시작했다. 3월, 드디어 봄이 왔다고들 한다.

 

라스 팔마스에는 카사 데 콜론(Casa de Colon)이 있다. 콜럼버스 박물관이다. 라스 팔마스와 콜럼버스의 첫 만남은 1492년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1차 항해에서 여기 라스 팔마스에 머물렀다. 연이은 원정에서도 카나리아 제도는 배를 정비하고 물자를 공급하는 기착지로서 활용됐다고 한다. 박물관 1층에는 콜럼버스가 탄 배의 모형과 선실 내부, 항해물품 등을 전시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까지의 항로와 그 배경 및 일정을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다.

 

예상은 했었지만, 박물관은 카나리아 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지하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유물을 모아 놨고, 2층에서는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몇몇 그림과 카나리아 제도의 지도 및 모형 등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박물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쩌면 정반대로 콜럼버스의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인디언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자기들의 왕국과 땅, 자유, 목숨, 아내 그리고 집을 유린당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스페인 사람들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로 죽어가고, 말발굽에 뭉개지고, 칼로 동강나고, 개에게 먹혀 찢기고, 산 채로 묻혀 죽고, 온갖 고문으로 고통 받는 가운데… ‘생존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서 굶어죽었다.”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에 동참한 스페인의 역사가 라스 카사스의 증언이다. 그러나 카사 데 콜론에서 이는 사실관계를 논하기에 앞서 그 누구도 묻지 않고 그 누구도 답하지 않는 ‘없는 이야기’다.

 

여기 카나리아 제도의 원주민, 관체족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겪을 고난을 한 발 앞서 겪었다. 총칼을 앞세운 학살, 전염병 창궐, 강제 노동, 자원 착취, 종교와 법률과 언어의 강요 등 ‘콜럼버스의 교환’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말이다. 이제 이 섬에서 그들 존재의 흔적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누군가에게 불편한 기억도 함께 말이다.

 

사실은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실수는 없었다고, 실패도 잘못도 없었다며 애써 눈감아보려는 그런 시도 말이다. 그것이 죄책감이라면 아마 더욱 간절해질 것이다. 맥락이 다를 순 있지만 언제부턴가 지나간 모든 순간이 의미 있다거나 필요했다는 등의 긍정 어린 말이 거북해졌다. 뭐랄까, 애써 포장한다는 느낌일까. ‘그것들’을 작은 상자에 고스란히 담아 마트료시카처럼 더욱 큰 상자에 수차례 옮겨 담고 각종 리본 장식과 포장지로 꽁꽁 싸맨다. 누가 보더라도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말이다. 심지어 포장한 사람도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로.

아주 가끔 마음을 톡 하고 놓아본다. 허송세월도 많이 했고, 무의미한 순간도 있었고, 없었으면 좋을 뻔한 이야기도 있었다고 말이다. 맞아, 그땐 내가 잘못했지라며. 그러면 억지로 쥐어짜낸 의미나 변명이 이내 고개를 숙이며 후드득 떨어진다. 그렇게 드러난 그 앙상하고 볼품없는 생의 무늬가 차라리 한결 편해 보일 때다.

 

카사 데 콜론에서 돌아오는 길, 포장을 싸기보다는 풀어가는 데 익숙해지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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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팔년생 추억팔이

딱지치기

"딱지도 파냐?" 아버지가 딱지 치던 시절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문지로 접으면 될 것을." 나도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한다. "이건 그런 딱지가 아니라니까." 진짜 그런 딱지가 아니다. 유행하는 만화의 장면들과 캐릭터들로 도배된 딱지다. 두께도 흐물거리지 않고 종이 재질도 딱지 치기에 알맞다. 이런 번쩍번쩍한 딱지를 신문지 딱지와 비교하니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번쩍번쩍한 자태는 오래가지 못한다. 빈티지로 탈바꿈할 단계가 남아있다. 고이 접은 딱지를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 친다. 그리고 밟는다. 꾹꾹 밟는다. 비빈다. 살짝 찢어도 보고, 공기도 불어 본다. 번쩍번쩍하였던 모습은 점점 거칠어진다. 빈티지 작업이 끝난 후엔 아버지 시절 신문지 딱지보다 더 오래된 딱지로 변해있다. 

 

딱지 좀 쳐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 빈티지 작업의 이유를. 그렇다. 너덜너덜하고 납작해진 딱지는 잘 넘어가지 않는다. 이 녀석들은 딱지치기 대결에 있어 '수비용' 딱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 '공격용' 딱지엔 테이프를 감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전쟁 나가기 전 전사들처럼 딱지들은 고된 훈련과 무장을 하는 것이다. 

 

딱지치기는 전투다. 딱지는 자존심이다. 봉지에 딱지를 가득 담고 동네를 활보하며 딱지를 따러 다닌다. 잘 만들어진 '수비용' 딱지 하나 내려놓으면, 딱지 한 봉지 쓸어 가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 믿었던 딱지가 넘어가는 순간 그동안 쓸어 담았던 딱지를 다시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진다. 열심히 키워놨던 딱지가 적이 되어 버티고 있다. "그동안 딴 거 다 줄 테니 그 딱지만 다시 돌려주면 안 돼?" 때론 비굴해지기도 한다. 잘 키운 딱지 하나 열 딱지 부럽지 않은 격이다. 이렇게 수 없이 내려치다 보니, 어깨 운동이 저절로 되던 시절이었다. 

 

지금만큼은 아닐지라도 컴퓨터 게임과 다양한 장난감이 즐비했었다. 그런데 딱지치기라니.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던 때였다. 유행은 돌고 돈다. 아버지 시절 신문지 딱지가 만화 딱지로 변해서 돌아왔듯, 만화 딱지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 앞에 나타나게 될지 기대된다. 

 

문득, 어딘가 창고에 틀어박혀 숨 쉬고 있을 딱지 전사들이 떠오른다. 시멘트 바닥에 신명 나게 밟히고 패대기 쳐진 대가가 고작 이거라고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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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8

476

 

 

 

경우에는 이 싸움은 오래 끌고 최후의 최후까지 끌려갈지도 모르는 순간이지만, 켈모리아의 잘못된 판단으로 100배는 더 가까이 빠르게 단축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내 수명도 왠지 모르게 100배 더 단축이 된 기분이 들었는데, 무시무시할 정도로 허약해진 몸에 어떤 보양식을 집어넣어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잘난 엘티노스와 전설의 영웅을 넘겠다는 켈모리아가 3개의 자원을 합치는 일을 하지 않는 이유라면, 내가 몸으로 철저하게 체험중인 부작용 때문이겠지.

 

“신랑! 방금 그건 뭐야!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루시피나는 경악해서 달려오고 침착함을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다짜고짜 나를 붙잡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24시간 전의 내 신체로 되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신과 밀접한 힘의 대가는 의외로 작았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형체가 사라져버린다거나, 몸이 붕괴해서 절명을 맞이한다거나, 젤나가가 되어 온 우주의 생명을 퍼트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잠깐? 마지막은 생각해보니 의외로 할만한 일 같은데?

 

“뭐. 지금이라도 쉬어두면 대략 2주 정도는 살 수 있을 것 같네요. 루시피나.”

 

“불길한 소리 하지 말고! 어째서 그런 무모한 일을 아무런 상의도 없이 하는 건데!”

 

“아니. 그야 느닷없이 떠올랐으니 상의할 틈도 없이 도박을 걸은 거죠. 우선 켈모리아의 존재를 지우기는 했는데 이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존재를 지운다는 것은 그에 합당한 대타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의 기억에서도 남아있지 않으며, 이사벨 씨에게 물어보면 여동생에 대한 추억이 없어져 있다.

 

“그런데 묘하네요. 분명 켈모리아에 대한 존재를 지웠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거지?”

 

당연히 제거를 담당한 내 기억에서도 지워져야 할 텐데. 어째서 지금 내 머릿속에 떠나가지 않는 것일까? 덤으로 어처구니 없게 일어서는 켈모리아의 몸은 주변을 둘러보며 상쾌하게 말했다.

 

“이야~ 정말 다행이야.”

 

“뭐가 다행이야! 방금 전까지 사라지기 위해서 입자화로 날아가고 있었는데!”

 

“응? 아. 그거? 다행히도 내 안에 있는 다른 존재만 날아간 것 같은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롱기누스의 창은 육체가 아닌 영혼을 파괴하는 힘. 그럼 잠깐 동안 다른 인격을 불러오면 되는 일이지 않을까? 유체이탈이라는 마법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니까.”

 

다른 인격?

아까부터 무슨 소리지?

 

“음. 확실히 기억이 안 나네? 분명 누군가가 날아간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내 안에 어떤 마법이 사라졌느냐 하면, 그것도 기억이 안 나네?”

 

내가 롱기누스의 창으로 마법을 발동하기 전에, 켈모리아를 흉내 내는 누군가로 바꾼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 켈모리아 안에 받쳐주고 있는 어떠한 것은 사라졌지만, 대체 내가 뭘 지워버린 거지? 기억이 나지 않고 서야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궁금증을 풀려면 기억을 해야 하지만 전혀 나지 않는다.

 

“뭔지 몰라도 비열한 수를 써서 잠깐 동안 피했다는 건가.”

 

자세히 켈모리아의 몸을 살펴봐도 여전히 입자가 하늘 위로 승화하듯 올라가고 있지만, 실제로 몸에는 어떠한 이상현상도 보이지 않았다. 흙먼지로 더럽혀진 드레스를 가볍게 손으로 털면서 다음 마법을 준비하려고 할 때.

 

“음? 마법이 나오지 않아? 그렇구나! 근본적인 걸 부수고 지나가서 어쩔 수 없네. 이제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 되어버린 거구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켈모리아의 손 앞에는 어떠한 마법진도 나타나지 않았고, 마나 또한 뭉쳐지지 않았다. 황혼<Dusk>을 맞은 이후로 모든 마법이 사라진 켈모리아는 잠깐 고민하듯이 고개를 올려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고, 짧은 시간 안에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삶의 낙이 사라져버렸네. 이제 마법의 지배자라는 칭호도 없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거잖아?”

 

말은 저렇게 부정적으로 해도 켈모리아의 표정에서는 해방감을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마법에 관한 모든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 소유하는 것을 버리는 것으로 자신이 자유가 되었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허탈감일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아리엘에게 속박되었던 저주가 없어졌다는 소리이고, 노아스에게 걸려있던 저주도 풀렸는지 정령왕들이 있는 지역은 잠잠해졌다.

 

“신랑. 우선 돌아가자.”

 

루시피나의 품이 오늘따라 따듯하고 포근해서 의식을 잃어버릴 뻔했지만, 아직 내 일정은 끝나지 않았으니, 지금 저 멀리서 다가오는 아리엘을 보자마자, 루시피나에게 할 말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루시피나. 엘티노스가 만든 석상...지금 제 뒤에 소환해줄 수 있나요?”

 

“그 몸으로는 무리야! 차라리 내가 같이 봉인될게! 그러니 신랑은 내가 봉인에서 풀렸을 때만이라도 나를 맞이해줬으면 좋겠어.”

 

급하게 내 뒤에서 떠나는 루시피나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앉혔다.

 

“지금 그 석상이 수명이 얼마 안 남은 저에게 최고의 변수가 될 수 있는 거에요. 봉인에서 풀려나면 제 몸은 마법을 사용하기 전으로 리셋이 될 테니까. 수명이 단축되어버린 이 기이한 부작용도 같이 나아지겠죠.”

 

“신랑은 그걸 계산하고 그 바보 같은 자폭을 한 거야?”

 

“자폭이라니. 제대로 한방 먹였는데...”

 

루시피나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크다고 생각했는데, 뺨에서 흐르는 눈물을 살짝 닦아줬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는 나를 보고 안심을 한 건지. 아니면 나의 의지에 체념을 해버린 건지. 손바닥으로 자신의 남은 눈물을 훔쳐낸 루시피나의 얼굴은 나를 강하게 바라봤다.

 

울지 않으려는 거겠지만...

 

“그럼 잘 다녀와야 해.”

 

“잘 다녀올게요. 루시피나. 잡화점 멤버에게는 대신 전해주세요. 당분간 여행 좀 떠나고 온다고요. 그리고 카멜롯에서 벗어날 때 켈모리아도 같이...”

 

“알았어. 대신 꼭 돌아오는 거다?”

 

죽어야만 낫는 켈모리아의 쾌락주의는 마법이 사라지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으니, 분노에 휘말려서 막말했던 그때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건 둘째치고 내 등 뒤에 석상이 열리면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검은 날개를 가진 아리엘은 노을을 연상하게 만드는 눈동자에선 여전히 나를 재우기 위해 다가가는 모습이었다.

 

양손을 뻗어서 나에게 다가오는 아리엘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한숨으로 푹푹 나오기 시작했는데, 내 뒤에 있는 석상에 아리엘과 같이 봉인이 된 이후에도, 밖에 있는 레시아와 시나가 잘 해줄지 의문이다.

 

“자. 낮잠시간이다.”

 

아리엘이 자각하지 않고 계속 나에게 다가왔을 무렵. 아리엘을 끌어당기면서 석상을 향해 몸을 뒤로 날렸다. 밖의 풍경은 그대로 닫혀나가면서 좋은 꿈을 꾸는 걸까?

 

“메~”

 

눈을 깜빡였더니 6번째 양이 내 앞에서 울타리를 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넘어가려고 했는데 무시무시할 정도로 잘 안 넘어간다고 해야 할까? 내 옆에는 오랜만에 키가 작은 아리엘이 누워있었다.

 

마신이 되어 난장판이 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밖에는 아리엘의 다른 인격을 제압하느라 고군분투를 하고 있겠지. 그래도 엘티노스가 직접 천계에서 내려왔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켈모리아는 나 때문에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봉인을 당하는 것뿐이니까. 나중에 레시아에게 다시 마법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하면 되겠지. 게다가 체질은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 마나는 금방금방 다시 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라? 카일 씨?”

 

“잘 잤어? 아리엘? 아니. 지금은 자고 있는 상태니까. 잘 자는 중이냐고 물어봐야 했나?”

 

“여긴 어디에요?”

 

“엘티노스가 만든 석상 안이야. 강제로 마신이 된 너를 되돌리고 있는 작업 중이지. 나의 경우에는 3개의 자원을 합친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들어온 거고.”

 

여전히 사태파악이 안 되어 주변을 둘러보는 소녀는 이윽고...

 

“그럼 현실은 카일 씨와 밀실 플레이를?”

 

“아냐.”

 

정색하면서까지 부정하게 만드는 건 아리엘을 상대하면서 처음이다.

 

“그나저나 켈모리아는 어떻게 됐죠? 분명 저는 켈모리아 때문에 폭주를 하긴 했지만...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누군가에 의해 단순히 농락당한 것뿐이지!”

 

흥분하면서 소리치고 있는 아리엘의 어깨를 억눌러가며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무섭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켈모리아는 살아있어. 그보다 농락이라고? 100번 이상 윤회를 거듭한 것과 지금까지 벌여온 일을 생각하면 혼자서 행한 것처럼 보이는데?”

 

“유랑극단이 남아있어요.”

 

유랑극단은 해체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릿광대와 맹수 조련사가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유랑극단은...”

 

“아직 각본가와 사회자가 남아있어요. 어릿광대와 맹수 조련사는 각본에 따라 움직이면서 방황하는 것뿐이지. 사실은 그 모든 게 계획된 거라고요!”

 

“설마 이렇게까지 오는데 각본대로라면, 지금 이렇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각본에 쓰여있다는 소리인가?”

 

아리엘의 굳은 표정을 보자마자, 나 또한 등 한줄기에 얼음 꽃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이 다음이 또 있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이 뭔가 잘못된다는 소리일까?

 

“봉인이 빨리 풀려야 밖의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눈을 감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다니.”

 

“그보다. 이곳에서 빨리 탈출해야죠!”

 

“탈출은 불가능해. 게다가 나가면 나는 마법을 전혀 못쓰는 사람으로 되돌아가.”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그러니까 아까 켈모리아와 싸운 내용을 더욱 상세하게 알려준 결과로, 아리엘의 고운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는 이러했다.

 

“미쳤어요! 신랄하게 자살을 택하는 경우는 또 뭐에요!”

 

“아니. 그래도 결과는 모두 좋았으니까. 살아있는...”

 

“카일 씨는 잡화점의 멤버들이 모두 기다리잖아요! 모든 것을 잃은 저와는 다르게!”

 

모든 것을 잃었다?

 

“혹시 네가 폭주를 해서 마법학원에 있는 사람들이라던가, 빅터 등. 다른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네...제 부주의로 모두 사라졌을 거에요. 마법 기동반은 저와 엇갈렸으니까 안전하다고 해도, 밀리아나 다른 사람들은...”

 

“그거라면 걱정하지마. 지금 밖에서는 너의 다른 인격...아르트리옴이라고 하는 게 더 빠른가? 그 녀석만 잘 해결되면 모두가 잠에서 깨어날 거야. 마법 기동반은 지금쯤 널 되돌리기 위해서, 잡화점 멤버와 합심해서 싸우고 있을 거고.”

 

“그럼 다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확실히 전부 죽지 않았어. 아니 죽었다는 것도 이상하지. 검은 존재에게 침식당하고 있지만 되돌아올 수 있는 상태라고 봐. 적어도 내가 마법을 버리기 이전에 봐왔던 상황이니까.”

 

“그럼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이 이곳까지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을 잃은 줄만 알았던 사람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쌓여있는 문제는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이곳에서 얼마 동안 있어야 해방이 될 수 있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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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때리다 늦었어요.

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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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7

475

 

 

 

숨을 고를 필요도 없다. 마법에 영창을 시작하지도 않는 마법의 지배자라는 이명. 그 이름에 걸맞게 켈모리아의 손 끝에서는 마법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빛에 눈을 빼앗긴 다면 곧이어 찾아올 화염으로 뒤섞인 창에 맞는 것이고, 서투르게 움직이면 다른 마법이 몸을 덮치겠지. 나를 상대할 때는 그런 잔재주는 통하지 않았으니.

 

볼펜처럼 보이는 특이한 기구로 뒷부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Oh Yeeeeees!

 

언젠가 이것도 음성을 좀 바꿔줘야 할 텐데.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아. 기초마법이라던가 그런 건 카일에게 전혀 닿질 않네. 설령 맞는다고 해도 항마의 축복이 지켜줄 테니까. 이런 마법은 가장 비효율적이라는 걸까?”

 

지루한 표정의 켈모리아의 몸에서 바다 빛의 파도가 몰아치기 시작했고, 나도 바다 빛의 파도를 허공에서 만들어냈다. 서로 새벽<Daybreak>을 사용하면서 어느 쪽의 마나가 더 빨리 소비되는지 자웅을 겨루는 것은 결코 아니며...

 

-파앙!

 

내 볼을 스쳐나간 마탄이 순수한 힘겨루기에 방해를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더러운 짓도 할 수 있는 것은 쾌락주의자의 특권이 아니다. 본래 켈모리아의 성격이 좀 비정상적으로 현실적인 시각인 것뿐. 곧 죽게 생겼는데 이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

 

나도 용병시절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꾀를 꾸민 것처럼...평범하게 이기는 것이 지루하거나 볼품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발상부터 기발하지 않으면 저쪽에게 밀린다.

 

“그러면 죽지 않게 조심하라고?”

 

“보통 촌각을 다투는 싸움에서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을 텐데!”

 

급격한 파동을 쏘아 보내는 켈모리아의 손을 피하면서 생각을 했지만, 켈모리아의 새벽을 상쇄하는 걸로 마나를 전부 소진하고 있는 반면, 나와 다르게 다른 마법을 사용할 정도로 여유가 넘쳐난다는 소리.

 

켈모리아의 경우에는 마나도 그렇고 마법도 그렇고 역시 정면대결은 위험하구나. 그렇다면 나는 좀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이야! 루시피나!”

 

“대화재의 시!”

 

거대한 불길이 나와 켈모리아를 뒤덮기 시작했다. 나 혼자의 마나로 켈모리아의 새벽을 견뎌낼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마나를 빌리는 것이 유효한 방법. 당황한 표정으로 대부분의 마나가 소비 되면서, 켈모리아 근처의 마나가 대폭 감소했다.

 

““대화재의 시는 카멜롯 전역을 태워도 이상할 리가 없는 광역마법. 그 마법을 켈모리아 혼자 집중해서 막아낸다면, 상대적으로 이쪽이 우위를 점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은 최악의 악수를 꺼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뒤에서 불길을 조종하는 루시피나에게 이상이 생긴 듯이 식은 땀을 흘리며 동요했다. 붉은 두 눈빛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다급하게 외치기를...

 

“신랑! 도망쳐!”

 

“블랙홀!”

 

우주에 있어야 할 것이 왜 내 앞에 있는 거냐! 시공간 마법으로 조종해낸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염력으로 압축해서 제어하는 거라면, 내가 손을 댈 수 없는 노릇인데. 어마어마한 속도로 흡입하는 검은 구멍은, 중앙에서 뻥 뚫린 체 희생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기, 흙, 나뭇잎을 먹으며 점점 몸을 키워나가고, 곧이어 돌을 들어서 삼키는 만행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기프트피어스를 들고 블랙홀을 향해 눌렀다.

 

-Oh Yeaaaaaaah!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목소리를 빨리 바꾸고 싶은 마음에, 버튼을 강하게 짓누르며 블랙홀의 크기를 줄였다. 새벽을 전개하면서도 블랙홀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칠 정도면 지금쯤 강물에 흘러내려와 바다를 이루고 있겠지.

 

마법사를 마법으로 이기려고 하는 내 잘못인가?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 검을 들고 돌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에 대한 대비는 이미 끝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은 어디에 있는 걸까?

 

방금 전에 우주에서 날아왔던 거대한 괴수를 찢어놓았던 그 빛이 켈모리아에게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지금 당장 루나와 이야기 할 방법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잠깐?

그걸 왜 남에게 부탁을 하는 거지?

오히려 내가 새로 만들면 되는 것을?

 

“그럼 계속해서 가볼까?”

 

전방에서 모습이 사라졌다. 옆과 뒤쪽에서 소름 치는 것과 동시에 티르빙을 검으로 만들어서 방어했다. 방어자세에서도 거대한 충격이 오고 갔는데, 새벽<Daybreak>이 여전히 출렁이며 다가왔고, 켈모리아의 신체에서 푸른 전류가 튀기 시작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걸 실감했다.

 

“터치!”

 

장난스럽게 나를 살짝 치고 갔지만 비스듬하게 몸을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보 같은 마법소녀 옷 앞에 포인트로 달려있던 거대한 리본이 까맣게 그을리며 날아가버렸다.

 

“어라? 왜 변신이 풀리지 않는 거지?”

 

“그야 저는 마법소녀가 아니라 다른 이들 때문에 불행하게 여장을 당한 거니까. 여전히 내 성별에 대해 헷갈린다고 한다면, 지금 당장 외우는 게 좋을 거야. 잡화점의 주인은 남자라고.”

 

“어머나? 몰랐어. 너무 잘 어울려서 말이지.”

 

“그래서 잠깐 부탁인데 새벽을 꺼줄 수는 없을까? 옷을 좀 갈아입고 싶거든.”

 

켈모리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장한 옷으로는 너무 하늘하늘 거리기도 하고, 너무 예쁜 것을 치중했는지 굽이 살짝 높은 신발이니 힘들었다. 서로 바다 빛의 마나가 허공으로 사라지고, 잠깐 동안 옷을 갈아입었는데 검은 면바지와 검은 가죽외투를 입었다.

 

“여전히 검은 거 좋아하네? 집에 그거 밖에 없는 거 아냐?”

 

“그나마 검은 색이 무난하거든.”

 

다른 곳에 공간이동을 하면서 켈모리아는 말을 걸어오는 여유를 보였지만, 지금 구두나 부츠가 아니라 가벼운 신발을 신었으니, 근접전에서도 어느 정도 보안이 되겠지.

 

“아리엘을 되돌린다면 어떻게 할 거야?”

 

왜 느닷없이 저런 질문을 하는 거지?

 

“글쎄. 적어도 다른 사람이 보호해줄 때까지는 데리고 있는 것이 맞지만, 이미 적임자를 찾아서 내가 데리고 있을 필요는 없어 보여. 그러니 이제 질문이 끝났다면 그 이상한 번개마법을 사용해도 괜찮아.”

 

“그래? 너무 여유가 넘치는데?”

 

다시 빛의 속도처럼 움직이는 푸른 스파크가 켈모리아가 지나간 길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흔적과 자취를 남기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 벌써부터 손바닥이 날아왔지만 시공의 눈을 개안한 뒤에, 날아오는 손바닥의 팔을 옆으로 빗겨 쳤다.

 

“빛의 속도로 움직여도 프레임단위로 늘려버린다면, 사람의 눈으로 직시할 수 있을 만큼 느려진다고!”

 

새벽을 휘두른 주먹이 켈모리아의 복부를 강타했고, 주먹에 남아있는 미약한 힘의 반동으로 자연스럽게 왼쪽 주먹으로 이동하며 정권을 내질렀다. 오른손으로 막아내기 위해 얼굴을 가린 켈모리아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저 뒤로 날아가고 나서, 붉은 구두의 굽이 날아가면서 바닥을 스크래치 냈다.

 

“시공간술사에 대한 개념은 아무래도 카일 쪽이 제대로 잡고 있는 것 같아.”

 

“좋은 스승 때문이지.”

 

그리고 서서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시공의 눈을 개안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내 몸은 안 좋아지니. 시공의 눈을 닫고 상황을 살펴봤지만 내가 주먹을 강타하는 동안, 켈모리아에겐 그 어떠한 치명타도 되지 않았다.

 

“복부는 바람마법을 이용해서 쿠션을 만들어 닿지 않게 하고, 정권을 막았던 손바닥에는 이미 새벽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마법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군.”

 

“정답. 나는 육체강화마법이 특기인 언니하고 옛날부터 많이 싸웠거든. 근접전에는 오히려 이쪽이 환영하고 있지.”

 

켈모리아는 나의 해답에 빨간펜으로 “참! 잘했어요!”라고 써주고 싶은 모양인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투시에 마법을 만드는 행위는 제대로 미친 행위 중에 하나지만, 지금은 미친척하고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어라? 마나를 그렇게 많이 사용해도 되는 거야? 마법사들은 단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작지만 효율을 중시하는데?”

 

“때로는 도박이 필요한 법이지. 요즘 인생에 도박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겠어?”

 

“그래도 지금 사용할 마법은 마나가 너무 많이 들겠네? 시전하다가 쓰러질 것 같은데?”

 

그건 사용하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마나와 더불어 내 안에 있는 신성력과 마기마저 모조리 섞을 거니까.

 

“신랑! 그러면 안 돼! 마법에 기초되는 자원은 한가지씩이라고! 그렇게 마구자비로 넣으면 폭주가 일어날 거야!”

 

루시피나가 저 뒤에서 소리치며 말리려고 했지만, 켈모리아의 사심이 가득한 결계가 루시피나의 앞길을 막았다.

 

“그러면 도박을 해보도록 해?”

 

“오히려 이 시간을 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모든 자원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것은 엘티노스의 자서전에도 쓰여져 있는데, 손쉽게 말해 마법사, 사제, 흑마법사 세 명이 모이면 가능한 자살행위라고 했다. 폭주로 인한 거대한 폭발은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모조리 태워나가고, 소멸시키면서 지도를 바꿀 정도이지만, 성공적으로 융합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버틸만한 마법을 만들거나, 신적인 보물들을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3가지의 자원을 중재하기 위해, 티르빙을 롱기누스의 창으로 변형시키면서, 내 앞에 태양보다 밝은 듯한 거대한 빛의 구체를 내리 찍었다. 티르빙으로 인해 검은 색으로 물들었던 창은, 빛의 구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하얗게 탈색하기 시작했고, 그걸 잡고 있던 내 몸마저 빛이 나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3개의 자원이 섞여 조화를 이루면,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게 되는 독자적인 에너지라니.”

 

황홀하게 보고 있는 켈모리아 앞에 창 끝을 겨누며 발동언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황혼<Dusk>”

 

거대한 빛은 창 끝에서 순식간에 뿜어져 나와, 켈모리아의 마법방패와 복부, 그 뒤에 있는 결계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검은 거대괴수의 몸까지 뚫어내면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켈모리아는 자신의 복부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분명 막았을...”

 

“새벽으로 몸을 두르면서 막아내도 소용 없어. 이미 신을 뛰어넘는 에너지니까. 엘티노스 자서전에도 없던 정보야. 3가지의 자원이 뭉치면 이런 일이 되는 거지. 과거로 회귀마법을 사용할 거면, 내가 롱기누스로 흡수하기 전에 갔어야지.”

 

힘 없이 축 늘어진 켈모리아는 외견상 아무런 상처가 없지만, 롱기누스는 상대의 영혼을 꿰뚫고 부수는 힘. 지금은 황혼의 힘을 이어받아 상대의 본질마저 부순 것이다.

 

“더 이상의 회귀는 없어. 그 지루한 일생에서 쾌락주의자밖에 될 수 없었던 저주받은 나날도 이제 끝이야. 이제 환생 같은 건 불가능 할 테니까.”

 

본래의 모습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이 내 몸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윽! 쿠학! 콜록! 콜록!”

 

입에 비릿하면서도 끈적이는 짠맛. 이미 유혈을 토해내고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이 시야가 흐려지고, 온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위험하다며 생각하지도 않았던 행동을 인간이 해냈다.

 

다만, 그 대가는 톡톡히 치르고 있는데.

몸이 많이 피폐해진 터라, 지금 당장 안정을 취하고 쉬어도 얼마 못살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이런 거 사용하지 말아야지...”

 

온 몸의 마나가 제대로 모이지 않고, 롱기누스의 창은 다시 귀걸이 형태로 바뀌어 버렸다. 정말 한 순간. 3개의 자원이 합쳐져서 새로운 자원을 만들고, 롱기누스로 그 힘을 흡수했을 때. 지식과 이해가 초월범위까지 닿아있었고, 한정적으로 창조신과 버금가는 힘을 얻었다.

 

태초에는 마나와 신성력, 마기가 모두 합쳐졌다는 최초의 발상이,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가버렸다. 그리고 켈모리아를 공격했던 그 순간, 그녀의 과거 회귀는 100번 이상 이루어낸 업적이야 말로 아리엘의 탄생이었으며, 아리엘을 자신의 밑으로 두고 싶은 이유라면 단순한 변덕이었겠지.

 

서서히 싸늘해지는 켈모리아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웃음이 피어 올랐다.

 

“회귀도 못하고 환생도 불가능하다. 그럼 이 지루한 저주에서 겨우 해방될 수 있는 거구나.”

 

 

존재가 소멸한다는 의미는 죽어서 가죽을 남고,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잊혀져 버린다는 소리. 그런 잔혹한 죽음 앞에서도 서서히 사라지는 자신의 손을 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내 머릿속은 수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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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일격필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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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3. 어중간해진다는 건

 

눈길 돌리는 곳마다 풍경이 아롱아롱 흐리다. 미겔은 이를 깔리마(Kalima)라고 불렀다. 언제부터일진 알 수 없지만, 사하라 사막이 제 몸을 동남풍에 조금씩 벗겨가며 섬을 감싸 왔다. 란사로테 섬에 내리면서, 카나리아 제도가 유럽보다 아프리카에 가깝다는 걸 실감했다. 스페인 내륙으로부터는 약 1,000km이지만 모로코로부터는 불과 100km 남짓이라는 걸 말이다.

 

우리가 숙소로 머문 곳은 티아구아다.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작은 시골 마을이다. 가옥은 대부분 1층이며 어디나 하얀 외벽에 초록색 대문을 달았다. 허허벌판 사막에 구멍이 숭숭 뚫린 화산암이 흔하다. 18, 19세기에 화산폭발로 섬의 상당 지형이 바뀌었다는데 지금도 활화산이다. 그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이 섬으로 몰려들고 있지만, 아마 이 마을은 연중 어느 때라도 외지인이 한 자리 수에 그칠 것만 같은 그런 조용한 동네다.

 

숙소 주인장 카를로스 아저씨는 필요한 게 있으면 대문에서 “카를로스, 카를로스”라고 부르기만 하란다. 주변에는 산책로와 농업 박물관이 있다며 꼭 한 번 찾아가보라고 일러줬다. 다음날, 동네 한 바퀴 돌 겸 자연스레 농업 박물관을 찾아갔다. 1840년부터 지금까지 쓰이는 실제 농가라고 한다. 집안 곳곳에 닭과 병아리가 돌아다니고 외양간에는 낙타와 염소가 여물을 먹는다. 그 옛날 농가의 살림살이와 건물 내외부 구조와 환경 등을 그대로 뒀다. 곳곳에 걸린 액자에는 마을의 지난 역사가 흑백으로 담겼는데 오래 머물진 않았다. 지금의 바깥 풍경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농가 한편에는 와인 양조장이 자리했다. 주변 포도밭에서 직접 수확하여 만든 와인이다. 바람이 강하고 비가 잘 내리지 않아 농사짓기가 쉽지 않은 섬이다. 포도 재배 방법이 다른 곳과 사뭇 다른 이유다. 여기서는 포도나무를 비옥한 화산재 토양에 묻고 그 주변에 돌담을 쌓는다. 이 돌담을 소코(Zoco)라고 하는데, 바람이 습기를 거둬가는 것을 막는다. 와인 시음을 권하기에 화이트 와인을 부탁했다. 술을 잘 알지 못함에도 텁텁한 기운 하나 없는 깔끔한 뒷맛이 한동안 기억에 남았다.

 

사실 술보다도 곁들여 나온 다과에 더 눈길이 갔다. 모호(Mojo)라는 카나리아 제도 특유의 소스와 함께 크래커에 치즈를 얹었다. 치즈도 여기서 직접 기르는 염소로부터 나왔다. 모호(Mojo)는 크게 붉은색을 띄는 모호 로호(Mojo Rojo)와 초록색을 띄는 모호 베르데(Mojo Verde)로 나뉜다. 모호 로호에는 파프리카 가루, 토마토, 홍고추 등이 들어가는 반면, 모호 베르데는 아보카도, 고수, 청고추 등 푸른색 채소와 허브로 만들어진다. 여기서는 보통 감자를 소금물에 껍질째 삶아서 모호에 찍어 먹는데, 파파스 아루가다스(Papas Arrugadas)라고 카나리아 제도의 전통 음식이란다.

 

미겔은 자신이 꿈꾸던 휴일이란다. 몇 찾아오지 않는 조용한 농가, 햇살 따듯한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며 한낮을 보내는 것 말이다. 아마 마을 분들은 박물관이 아니라 누구네 농가로 부를 것만 같다. 우리도 관광객이 아니라 옆동네에서 이따금 마실 오는 이웃으로 생각할지도.

 

한낮의 열기가 수그러들 쯤, 박물관을 나서 다시 동네산보를 이어갔다. 한 두 개의 언덕을 빼고는 나무도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 펼쳐졌다. 고개만 돌리면 해안에 자리한 이웃 마을도 눈에 훤히 들어왔다.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서 굽이치는지도 말이다. 사실 길을 벗어나도 별다른 장애물이 없어 어디로 걸으나 마찬가지였다. 그간 여러 사람이 다녀서 땅이 조금 더 탄탄할 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미겔이 문득 자신이 점점 아웃사이더가 되어간다고 말했다. 히피가 되겠다고 선언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마드리드의 다른 친구들은 그럴 듯한 가정을 꾸리고 번듯한 직장을 다닌단다. 그에 비해 자신은 마흔이 넘도록 부동산, 잡지, 자전거, 관광홍보 등 이리저리 일을 옮겨가다가 출퇴근 개념을 상실한 프리랜서로 굳어지고 있단다. 이어서 그는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아마 이런저런 여러 분야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을 거라고 뒤이었다. 취미라고 하기에도 뭐하고 직업으로 삼기에도 애매한 지점에 말이다.

 

그럼에도 미겔은 다시 돌아가도 똑같을 거라고 말한다. 그때그때마다 괜찮은 선택을 했다며. 알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럴 수 있다고. 가만 보면 어중간한 경계에 놓여 있는 이들은 나름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그럴듯한 시기에 그럴듯한 배경으로 졸업과 취직, 결혼을 이어가며 사회에 자리 붙여가는 사람들의 비슷비슷한 굴곡보다는 그 다채로운 빛깔이 좀 더 넓게 퍼져 있을 것만 같다.

 

 

어느덧 하얀 달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며 깔리마가 붉게 물들었다. 한낮이나 한밤보다는 이런 시간이 더 아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낮이 밤이 서로에게 고이 스며들어가는 시간에,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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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6

474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내 뼈가 부러졌는지 확인하기 전에, 남자로 다시 되돌아갔으니 확인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바보 같은 마법소녀 옷은 왜 남자일 때 입어야 하는 가?’에 대해선 양피지 80장 분량의 논문이 필요할 정도로 고찰을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간단한 티셔츠와 바지 위에, 뼈로 이루어진 경갑을 입고 있는 상태. 그런데 나더러 프릴이 바보같이 달린 저 옷을 입으라고?

 

절대로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을 할 수 없어요. 엘티노스 씨도 그렇고 이걸 입는 건 루니아 누나가 입어야 할 정도로 기묘한 옷이니까요. 어째서 제가 이걸 입어야 하는지 타당한 이유를 말하면 생각만 해보도록 하죠.”

 

“그야. 아리엘의 정신을 번쩍 차리기 위해서는 네가 여장을 하고 있어야 하거든.”

 

“무슨 근거에요!”

 

내 여장과 아리엘이 제정신으로 되돌아오는 거와 무슨 상관이길래?

 

“뭐. 애석하게도 아리엘의 생각으로는 네가 평상시에 있는 모습보다는, 여장한 모습이 가장 반응을 이끌어내기 쉽기도 하고, 그때마다 폭주해서 너를 인형이라던가 애완동물로 만들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냐?”

 

“아니. 폭주한 사실까지는 알고 있는데...잠깐만? 생각해보니 아리엘은 루니아 누나보다 더 한 애였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롱기누스로 제거할까요?”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살려서 지금 아리엘을 살려놓는다면, 언젠가 나의 평화와 평온을 단숨에 때려부수는 위험인물로 머리에서 지정했지만, 엘티노스의 일리 있는 말과 나를 썩어버린 사과를 보듯이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저 애를 살리는 게 목적이라며? 그런데 롱기누스로 대뜸 죽이면 되겠냐? 그리고 아리엘은 살아있는 편이 가장 좋다면서, 저 안에 있는 세피르라던가 저 뒤에 있는 신수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그렇긴 하죠...잠깐? 신수요?”

 

“삑삑!”

 

“으아악! 젤나가 맙소사! 엘티노스 씨! 혼종이에요! 혼종이 나타났어요! 지금 당장 아둔의 창에 연락해서 첫 번째 자손을 이쪽으로 좀 불러주세요! 아니면 그냥 아몬이라도 괜찮으니까 제발 저 존재를 공허속으로...잠깐? 저게 신수라고요?”

 

아까 전의 공격적인 성향과는 달리 느긋하게 엘티노스 어깨에 올라오면서,“삑삑!”하고 울기 시작했다. 그 뒤에 하얀 뱀이 따라오면서 의기양양한 어조로 내 귀를 때렸다.

 

“어떻습니까? 카일 씨. 제가 저 기이한 뱁새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하하!”

 

“자, 잘했어. 그런데 어떻게 친구가 된 거야?”

 

“아. 그건 말이죠. 저번에 잡화점에 갔을 때 기괴한 하얀 책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불쏘시개로 사용할까? 생각해서 미리 삼켜놨었는데, 때 마침 저 뱁새가 절 추격해와서 그 책들로 공격하기 위해 뱉었는데, 알고 보니 카일 씨가 여장해서 찍혀있는 백장미라는 책이...으아아아아악!”

 

머리와 꼬리를 붙잡고 이제 찢어져라 늘리고 있었다. 나의 분노로는 하얀 뱀을 찢을 수 없는 걸까? 고무처럼 쭉쭉 늘어나는 기괴한 느낌에, 땅바닥에 냅다 던져버리고는 왼발을 빠르게 움직여서 뱀의 머리를 밟고 천천히 생각했다.

이 녀석을 대체 어떻게 제거해야 하지?

 

“아, 아무튼! 그 책 때문에 제정신을 찾았는지 도와주겠다고 따라온 거에요!”

 

백장미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는 말이 내 귀에 흘러 들어왔고, 허탈한 감각이 머리에서 한숨으로 치환해버리는 놀라운 기적이 시행되는 순간, 내가 여장을 하면 아리엘의 정신이 되돌아온다는 그 말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기 보단 저 신수는 맨 정신인 것 같던데?”

 

“삑삑!”

 

“이건 대체 뭐라는 거냐?”

 

하얀 뱁새가 울고 있어서 하얀 뱀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빨리 여장을 하지 않으면 근육질 몸매로 코브라 트위스트를 걸어버리겠다고 하는데요?”

 

그게 신수가 할 소리냐?

 

“사건이 이렇게 심각한데 제가 여장을 한다는 그런 여유가 어디에 있나요?”

 

천천히 저 옷으로부터 떨어지는 거다. 머리에서는 타당할 정도로 당연한 말을 잡아 늘려서 시간을 최대한 벌고, 말과는 다르게 행동으로는 점점 아무도 모르게 멀리 멀리 떨어지는 것.

 

“게다가 저는 잡화점의 주인으로 조만간 잡화점을 열어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그렇게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이런 바보 같은 일 때문에, 지금 해야 하는 아리엘의 구출작전을 이렇게 소홀히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지금은 모두가...”

 

“주인. 그 뒤로 도망간다면 루시피나와 루니아가 제압을 하고 옷을 갈아 입힐 것을 명하겠노라.

 

제길. 레시아가 벌써 눈치를 챈 건가?

 

“하하핫! 제가 왜 도망을 간다고 생각하나요?”

 

태연하게...모두를 속이는 행동과 여유로...1초라도 긴장이 늦춰지면 그때가 찬스다.

 

“저는 잠깐 물을 마시기 위해 잡화점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이에요.”

 

“물통은 마스터의 허리 쪽에 있지 않습니까?”

 

“내 물통은 비어있...”

 

“마스터의 물통은 아직까지 70%용량이 저장되어있습니다.”

 

...이거 어쩔 수 없겠는데?

 

“크하핫! 이것이 나의 도주경로...”

 

***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른 반사속도와 타이밍 때문에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지금은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분위기에도 꼭 그렇게 여장을 시켜야만 했을까? 지금 내 주변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루니아 누나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지만, 이 분노를 과연 누구에게 풀어야만 할까?

 

지금 이 분노는 천 개의 태양보다 더 뜨겁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 같은...

 

“역시 주인이로군. 그 전에 이 고양이 귀도 착용한다면...냐아아아앗!”

 

순식간에 검은 고양이의 귀를 낚아채서 잡아 늘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비명과 앞발로 이리저리 휘둘러 할퀴려고 했지만, 이리저리 울리는 레시아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천히 그리고 터져나올 것만 같은 분노를 짓누르며 소리를 냈다.

 

“무슨 고양이 귀를 착용해요? 절 여기서 얼마나 더 비참한 꼴로 만드시려고? 나중에 돌아오게 된다면 레시아를 교육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주인은 그렇게 안 봤는데 짐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니.”

 

“네? 느닷없이 짜증나게 무슨 소리죠?”

 

“짐을 교육한다면 그래도 단 둘만 있을 때 느긋한 밤이 좋...냐아아아앗!”

 

뭘 착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거에 레프리시아를 교육할 때처럼 훈계를 하겠다는 소리다. 지금에 와서 그게 통할지 잘 모르겠지만...

 

“마스터. 냥캣 말고 저를 먼저 교육시켜주시죠. 가급적이면 상냥하게...”

 

-덥썩! 꽈아아아악!

 

“너도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생각하는 교육과는 거리가 좀 머니까 조용히 해.”

 

“마스터. 여전히 아이언 클로는 아픕니다. 그러니 좀 풀어주시죠.”

 

세상의 멸망이 눈 앞에 찾아와도 농담을 할 줄은...

 

“그런데 지금 이 모습으로 아리엘에게 붙잡힌다면, 무시무시한 일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오?”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루니아 누나가 입을 열자. 천천히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으로는 역시 지금 당장 롱기누스를 사용해서...

 

“아니. 내가 만든 봉인 장치에 들어가면 어차피 둘 다 의식을 잃게 될 거야. 그 안에서 제 2차 창작물이 나올법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그런데 공간이 협소한 곳에서 여장한 남자와 여자 둘만 있다니. 의외로 부럽네.”

 

“뭐가 부러워요? 저는 재능을 다 포기하는데.”

 

“재능이 아니라 마법만 포기하겠지. 그래도 마나를 끌어 모으는 체질은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 언제라도 마왕에게 부탁하면 다시 마나의 활로를 열 수 있을 거야.”

 

“그 전에 페어링이 끊어지게 되면 레시아와 시나는...”

 

검은 고양이와 하얀 올빼미를 바라보며 걱정하는 것이 있었으니.

 

“걱정 말거라 주인. 짐과 비둘기는...”

 

“올빼미 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다 똑같지 않는가?”

 

“다릅니다.”

 

이래서 내가 걱정한다는 거야. 내가 없으면 죽어라 싸울 것 같으니까. 지금 하얀 올빼미와 검은 고양이가 서로 파문의 호흡을 하고 있는데, 내가 없으면 이제 누가 말리냔 말이지...

 

“모두 싸우면 안 돼요오. 사이 좋게 지내셔야죠오? 화해의 기념으로 제가 만든 쿠키를...”

 

“아니다! 루니아! 우린 배도 고프지 않고 싸우지도 않았노라!”

“그 기괴한 무지개 빛 음식은 머나먼 시공 속으로 던져버리시길 바랍니다.”

 

당분간은 나 없이도 잘 지낼 것 같지만, 사역마가 아니게 되면 레시아는 다시 마계로 가야하고, 시나의 경우에는 본래의 차원으로 되돌아가거나, 천계에서 머물고 있겠지만...지금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할까?

 

아무래도 저 둘 때문에 느긋함이 옮았는지, 별 쓸 때 없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본래의 일에 집중을 하자면, 핑크 빛의 바보 같은 마법소녀 복장으로 여장을 해서, 아리엘의 의식을 차리냐 마느냐 실험을 좀 하다가, 엘티노스가 만든 석상으로 유인해서 같이 들어간다.

 

“누가 보면 무식한 자폭공격을 그대로 실현하는 줄 알겠네요.”

 

“그런 자폭공격을 먼저 생각한 게 너야.”

 

지금쯤이면 카멜롯에 있는 모든 괴수들이 자고 있을까? 슬슬 시간이 되었으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티노스 씨. 행운 좀 빌어줘요. 신이잖아요.”

 

“얼마나 많은 여자에게 둘러 쌓이려고 내가 행운을 빌어주냐? 시끄럽고 빨리 해결이나 하러 가.”

 

엘티노스의 어처구니 없는 대답을 듣고 한숨을 내쉬며, 카멜롯으로 다시 향하고 있을 무렵.

 

“마법학원 쪽으로 이동하는 걸 보니, 결계가 해제 된 건가?”

 

작은 뱁새는 조그마한 몸집으로 내 주변을 계속 날아다니면서, 길을 알려주고는 있었는데 마법학원 방향으로 나를 계속 이끌면서, 정신 사나울 정도로 “삑삑!”이라는 소리만 계속 울려 퍼졌다.

 

“알았어. 지금 가고 있잖아. 대체 뭐가 그리 바쁘길래?”

 

“어서 와. 카일. 어라? 지금은 마법소녀 복장이네? 나를 위한 걸까?”

 

생글생글하게 웃고 있는 켈모리아가 정면에 서서 맞이해주고 있었다. 붉은 색 드레스는 흠집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계 안에서 잘 지냈으리라 생각했지만, 왜 지금 결계에서 나왔을까?

 

“반 강제로 입혀진 것뿐이지 너를 위한 건 아냐.”

 

“그래? 그래서 지금은 아리엘을 봉인하러 온 건가? 그거 정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감동의 장면인걸?”

 

지금은 켈모리아를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다른 계획이 무산이 되는 걸까?

 

“그보다 괜찮을까? 아리엘은 마신이 되어서 그나마 저주가 발동하지 않고 있지만, 마족이 되면 곧바로 저주가 발동할 거야?”

 

“저주라고? 정말 쓸 때 없이 저주를 잘 사용하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저주인데? 아니면 내가 직접 포장까지 뜯어야 확인이 가능하던가?”

 

켈모리아의 저주마법은 어처구니 없게도 너무 강한 건 사실. 아리엘을 봉인시키는 것과 동시에 죽거나 내 목숨을 위협하는 저주를 걸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리엘을 봉인하기 전에 새벽<Daybreak>으로 정화하고 난 다음인가?

 

엘티노스가 만들어준 석상 안에서도 발동되는 저주라면 귀찮아지니까.

그걸 알고 켈모리아는 지금...

 

“그렇네. 날 죽이기 위해 나타난 거군.”

 

“카일의 새벽은 모든 것을 해제해버리는 무자비한 능력이잖아? 의도적으로 응집된 마나를 해제한다면, 당연히 내가 걸어놓은 저주마법까지 해제하겠지. 하지만 아리엘은 마신에서 되돌아오면 저주가 발동되어야 내가 좀 더 편해지거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죽일 수 밖에 없지. 노아스!”

 

“이프리트! 실피드!”

 

땅의 정령왕을 소환하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프리트와 실피드를 불렀다.

 

“이프리트. 실피드. 정령왕의 일은 너희들끼리 해결하도록 해. 나는 저 앞에 있는 이상한 쾌락주의자에게 한방 먹이고 와야 하니까.”

 

“한방 먹이고 오다니? 카일 씨도 정말 대담하시...아야야야야!”

 

 

전투 전에 실피드가 쓸 때 없는 농담을 하자마자, 아이언 클로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는데, 되도록이면 진지한 부분에서 농담으로 무마시키려는 행동은 눈치껏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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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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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3 프란치스카의 공개일기

광명동굴 나들이 [2017.0716. 일]

* 무척이나 더운 날 우리 가족은 집에서 가까운 광명동굴로 나들이를 갔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시로 적으려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동굴테마파크 광명동굴은 

1910년 한국이 일본에 주권을 빼앗겨 앓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 남자들에게 강제로 이 동굴에서

금, 은을 구하라고 해서 광부들이 열심히 일해 만들어 졌다네. 

  

처음 광명동굴에 갔을 때는 차가 막혀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광명동굴을 못 갔지만 이제는 갔다오니 속이 시원하네.

밖은 너무 더웠지만 동굴은 냉장고처럼 시원했다네.

 

광명동굴에는 아름다운 것과 신기한 게 많았다네. 

레이저 쇼를 보며 와와~ 소리를 질렀다네. 시원한 폭포소리는 내 속을 뻥하고 뚫어 주었다네.

무시무시한 용은 길이가 40미터가 넘는다네. 천장에서 또로록 떨어지는 물을 받아 엄마에게 확 뿌렸다네.

물고기들이 특히 제일 신기 했다네.

손을 집어 넣어서 물고기들을 만졌을 때에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할 정도로 황홀했다네. 

 

광명동굴을 갔을 때 내 기분은 너무나도 행복했다네.

이처럼 동굴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

다음에는 어른이 되어 와서 와인동굴에서 꼭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네~

(고백하자면 와인을 세 모금 마셨다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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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5

473

 

 

 

사람의 한마디로 많은 것이 엇갈리기 시작한다면, 지금의 상황도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이유. 그 이유야 말로 나와 아리엘이 같이 봉인 된다는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휘두른 검은 고양이가 큰 소리로 내 머리 위에서 외쳤다.

 

“혼자서 들여보내면 되는 것 아닌가? 차라리 시공의 눈을 개안해서 아리엘을 유인한 다음에...”

 

“그걸 시도하려고 했는데, 시공간의 흐름을 볼 수 있어도 그건 신들에게는 무시할 수 있는 분야겠죠. 그 전에 아리엘에게 붙잡히면 모든지 끝날 테니, 제가 아리엘에게 붙잡히는 미끼로 그 안에 들어간다면, 제가 없는 동안 밑에 있는 검은 존재...아마도 세피르가 폭주를 할 것 같으니, 그것만이라도 제대로 막아낸다면 그 다음은 알아서 풀릴 거에요.”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은 겨우 하루를 벌었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곳에서 기습적으로 공격이 들어온 몬스터들을 다시 카멜롯에 귀환시켜버렸고, 저곳은 정말로 괴물들의 본거지가 되어버린 이상, 마법학원에 있는 결계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 지금은 무너지지 않기를 원하고 있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켈모리아가 고생을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마스터.”

 

하얀 올빼미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내 시선을 옮겼다.

 

“그 봉인하는 곳에 들어가면 마스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야. 뭐...똑같이 봉인 되는 거지. 아리엘이 각성하기 전으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가니까, 나도 아마 마법을 발현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해. 사역마에 대한 링크도 전부 다 잘려나갈 거고, 시공간 마법까지 열어놨던 저의 마법들은 모조리 봉인 되겠죠. 아니면 두 번 다시 사용하지 못하거나.”

 

이런 충격적인 말을 담담하게 해서 좋지 않은 이유라면, 주변에서 충격을 너무 크게 받는 것일까? 내 입장에서는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준 거지만, 검은 고양이는 나를 바라만 보면서 아무런 말도 못했고, 시나야 말로 충격의 늪에 빠졌다고 볼 정도로 뚫어져라 응시만 할 뿐이었다.

 

“어. 그러니까...그렇게 충격 받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그럴 줄 알고 사역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연이 닿을 수 있게, 이런 반지들을 모조리 선물했다는 그 사실은 잊으면 안 되죠.”

 

“그래도 지금까지의 주인의 재능과 잠재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높았노라! 신의 영역에 가까운 한계까지 인간의 몸으로 제대로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마신 하나를 봉인하기 위해서는 크나큰 위험이 따르잖아요. 세상이 쑥대밭으로 되기 전에 사람 하나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거에요. 게다가 제가 언제 죽는다고 했어요? 지금까지 쌓여있던 마법을 모두 포기하고 평화로운 삶을 되찾는 게 중요하죠.”

 

지금 생각한 것 중에서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소한의 피해를 입으면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할 수 있는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죽는 것도 아니고 엘티노스의 말처럼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이 일이 완전하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

 

이거야 말로 베스트 아닌가?

다른 사람이 보면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겠네.

...물론 100%확률로 감동하지 않겠지만.

 

“주인. 다시 생각해보거라. 짐이라면 주인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노라. 오히려 지금 아리엘을 살리기 위해 주인이 이렇게 고군분투를 할 이유가 있는가?”

 

“만일 봉인이 풀려서 본연의 아리엘로 되돌아간다면, 켈모리아가 기습을 해도 가볍게 받아 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영혼부터 이미 다른 아이라서 봉인에서 막 깨어나도 힘이 없는 저와 달리, 아리엘은 마신이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거에요.”

 

그러면 이제 슬슬 엘티노스 씨에게 연락할 차례인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너희들은 아침드라마 찍기 바쁜 거냐? 그보다 남자가 한번 마음을 먹었다는데 그 주변에 있는 여자들은 밀어줘야지.”

 

연락하기도 전에 뒤편에서 심드렁한 소리와 함께, 심판자와 발키리의 호위를 받고 하늘에서 강림하는 상급신...이라기 보단 그냥 아저씨처럼 옷을 입은 엘티노스 씨를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천계에서 성녀의 그릇에 담겨 우아하게 강림하는 여신들과는 달리, 정말 자유로운 신이 아닐 수 없었다.

 

“엘티노스 씨.”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상에 내려올 수 있는 것인가?”

 

반가운 나의 어조와는 정 반대로 경계하면서 따지는 듯한 어조로 레시아가 입을 열자. 엘티노스는 머리를 긁으면서 한탄하고 있었다.

 

“그야. 허락 받았으니까.“마신 때문에 난장판 될 것 같으니 제가 잠깐 내려가서 확인 좀 하겠습니다.”라고 창조주님께 간청해서 이곳까지 내려왔다. 꼬마 마왕.”

 

“짐은 꼬마 마왕이 아니니라! 이 대륙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시끄러워. 지금의 카일...아니, 지금은 카린으로 말해줘야 하나? 아무튼 카린이 마음이 넓어서 계속 설득하고 있었지, 나 같았으면 때려서라도 말을 듣게 만들었어.”

 

“저기. 엘티노스 씨. 그래도 여자를 때린다는 거는...”

 

“입술로 때렸지.”

 

아. 그렇군. 깊게 파고 들지 말자.

은근슬쩍 내 볼에 자신의 입술을 들이 밀려고 하는 엘티노스 씨의 얼굴을 붙잡고, 연락하기도 전에 나에게 먼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제가 연락할 때 봉인할 물건만 내려 보내주시면 될 텐데, 지금 이곳에 온 이유는...?”

 

“네가 아리엘과 동귀어진으로 봉인되면 그 밑에 폭주하는 애를 내가 막아야 하니까. 켈모리아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영웅행세를 하기 전에, 내가 직접 막아내야 하지 않겠냐? 게다가 저 밑에는 세피르라는 녀석과 더불어 아르트리옴도 같이 있으니까. 정확하게 보자면 저 검은 존재가 아르트리옴이야.”

 

“그 마신 아르트리옴이요?”

 

“정확하게는 아리엘의 다른 인격. 창조된 마신이라고도 하지만, 실제 모습은 아리엘의 부정적인 인격이 저곳에 다 보였다고 생각하면 돼. 지금은 겉으로 날아다니며 모두를 재우는 아리엘이 통솔하고 있지만, 여기서 문제로 모든 감정을 제어하는 이성이 사라지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본능에 몸을 맡겨서 미쳐 날뛰겠죠. 아! 그래서 폭주를 하게 되는구나! 그런데 세피르는 왜 저 안에 융합한 거에요?”

 

엘티노스는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보고도, 모든 이들의 생각을 모조리 읽어내어 단서를 찾는 기묘한 행위를 했고, 명확한 해답을 전수해주는 것이야 말로 방정식에 대입하듯 쉽게 알려주고 이해를 시켜줬다.

 

지금이 전쟁 중인 줄도 모르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서 엘티노스에게 질문을 하자. 가여운 얼굴을 하면서 카멜롯을 바라보더니 한마디를 했다.

 

“그야 아리엘이 좋아서 구해주려고 한 거 아니냐. 그러다가 잘못 되어서 부정적인 감정에 먹혀버린 거지. 너도 뇌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굴려서 제대로 된 대답을 알아내려고 고민 좀 해봐라.”

 

엘티노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굵은 손가락이 내 이마를 살짝 밀치면서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확실하게 모든 것을 상황정리를 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는 엘티노스의 모습을 보자, 그의 전성기 시절에 어떻게 세상의 멸망으로부터 지켜냈는지, 그의 일면을 아주 조금 엿본 것처럼 가슴 한편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자신감이 솟구쳤다.

 

“어차피 아리엘은 네가 끌고 들어가서 봉인한다는 건 변하지 않지만, 이제부터 그 주변에 대해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리도록 하지. 모두 전선에서 전부 물러나게 해. 아니, 차라리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으라고 전해줘. 검은 높새바람도 듣고 있지? 내가 있는 지점에 동상도 떨어뜨리면서 전선에서 이탈하라는 방송과 텔레파시를 부탁해. 아마 내 이름으로 말을 하면 좀 이상하니까. 지금 잡화점의 주인인 카일의 이름을 대면서 모두 철수시켜.”

 

“잠깐만요! 제 이름을 대면서 철수를 시키다니!”

 

“그럼 영희를 시킬까?”

 

“그건 또 무슨 말...아니, 잠깐 그 시답지 않는 개그로 댁이 먼저 죽을래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나의 자신감과 감동을 물어내!

 

“너도 이제 슬슬 카린의 모습에서 되돌아와. 아리엘과 정면에서 대결하려면 거대한 마나를 품는 여성의 몸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날렵하고 빠른 움직임을 할 수 있는 남자의 몸으로 싸워야 할 거야. 어차피 마나라고는 람파시나가 모조리 다 사용하는 바람에, 거덜나버렸으니까 슬슬 그 모습으로 이루어내야 할 목표를 완료했다고 생각해.”

 

시나가 카멜롯 일대의 과거를 안리아스의 수정구로 녹화하면서, 나의 마나를 거의 다 사용했다는 것까지 말하지 않고 다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웅이라는 이름은 어딜 가서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대신. 남자로 돌아갈 때 이 옷이나 입어라.”

 

“이게 무슨 옷인데요?”

 

“그야 당연히 마법소녀의 옷이지.”

 

“남자가 여성용 옷을 입고 뭐하라고!!!”

 

엘티노스는 능글맞게 검은 고양이와 하얀 올빼미에게 다가가더니, 조용한 말로 속삭이고 있었는데, 나의 강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청력으로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렇군. 일리가 있는 말이로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군요.”

 

음흉하게 웃는 듯한 고양이의 얼굴. 그리고 뭔가 납득을 해버린 듯한 시나의 대답에 불길함을 한 가득 껴안고 있었다.

 

“주인. 남자의 모습으로 입기 싫으면 지금의 모습으로 입어도 상관이 없다.”

 

“어째서 제가 그 옷을 입는다는 전재로 되는 건데요?”

 

“다만, 마스터가 여성의 모습으로 봉인이 된다면, 봉인이 풀렸을 때는 남은 일생을 그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이걸 지금 당장 마스터에게 입힐 것이며, 남자로 입을 것이지 여자로 입을 것인지 결정해주시길 바랍니다.”

 

이건 또 무슨 협박이야?

지금 전쟁하고 있는 중 맞지?

그런데 나는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여장을 할지, 여성으로 살지에 대한 선택지를 해야 하냐고? 도대체 어떤 사람이 싸우기 전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먼저 걱정해야 하냐고!

 

...나밖에 없나?

 

“왜 이게 이렇게 된 거에요?”

 

정확한 이유는 엘티노스가 잘 알고 있을 테니, 혹시라도 이게 다른 작전의 개요라고 생각되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면 내가 어느 정도 납득을 하고 사약 먹는 기분으로 여장이라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이것은 모두 작전이니까.”라는 마음으로 합리화를 하면서 나를 자살 직전으로 내몰지 않기 위해서...

 

“전쟁 중에 찍는 카일의 여장이라고 한다면, 백장미에서도 베스트니까. 백장미의 모토는 언제나‘자연스러움에서 묻어 나오는 리얼리티.’라고 하잖아? 그래서 어떤 녀석이 계속 도촬을 하는 거고.”

 

“그 빌어먹을 잡지 하나 때문에 나를 망칠 셈이야! 그리고 누구야! 도촬하는 녀석!”

 

“자자. 시끄럽고 여자로 살기 싫다면 여장을 하면 되잖아. 빨리 옷이나 갈아입고 나를 찾아오도록 해. 당연히 사역마와 더불어 지금 저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레드 드래곤과 여기사도 포함하고.”

 

저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레드 드래곤과 여기사?”

 

“신라아아아앙!”

“카리이이이인!”

 

“망할!”

 

이미 속도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떨어지고 있는 여자 둘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빨리 명계로 가는 방법 중 하나일 터. 나는 몇 번이나 이런 불행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 다음에는 어디서? 언제?

 

“나에게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정말적인 외침을 무시하고 어마어마한 충격이 내 온몸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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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사 엘티노스가 등장했다.

효과는 미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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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1. 사전에 사과를

 

‘그란 카나리아로 이사했다. 남는 방이 하나 있다. 온다면 환영이다.’

 

“한국사람이구나?”

“아니, 스페인 사람.”

“오, 스페인 사람은 또 어떻게 만났대?”

 

글쎄, 복숭아랄까. 자세한 날짜나 장소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복숭아만큼은 확실하다. 5년 전, 여름방학을 틈타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그 어딘가다. 작은 개울 하나가 흘렀고, 미겔은 씻고 있던 복숭아 하나를 내게 건넸다. 별 말 없이 열흘 가량을 동행하고는 그는 회사로, 나는 학교로 복귀했다. 그 후로는 아주 이따금씩 이메일로 서로의 근황을 짤막하게 나눴다. 회사를 이직했다거나, 만나는 사람이 있다거나, 나라 경제가 망해가고 있다거나 등등.

 

3개월을 답했다. 무비자 체류 기한을 넘길 수는 없으니까. 다만, 왜 떠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그냥' 혹은 '답답해서'다. 또 다른 월급살이를 하루빨리 찾아 연명해야 하는 일시적 백수에게는 아마 사치에 가까울 것이다.  게다가 휴양지라니... 

​사실 어떻게든 그럴듯한 추임새를 넣어보려 했는데, 허사였다. 목적이라는 게 애초에 만들어진다기 보다는 나타나는 쪽에 더욱 가까운 건지도. 아무튼 주변에서는 부럽다고만 하는데, 속내는 썩 그렇지 않다. 솔직해질수록 여행은 힐링보다는 도피나 망각을 닮아갔고 결국엔 ‘하아, 모르겠다’로 끝마쳤다.

 

제1식: 케이준 치킨을 곁들은 감자샐러드, 데친 야채와 밥을 곁들인 삼계찜, 라임향 리코타치즈 무스케이크, 버터, 소프트 롤빵.

제2식: 훈제 치킨 슬라이스를 곁들인 샐러드, 굴소스를 곁들인 에그누들과 생강소스 곁들인 볶은 닭고기, 오예스 초코렛 파이, 버터, 호밀롤빵.

 

하릴없이 기내식 리플렛을 읽다가 괜한 문구에 눈길이 머문다. ‘메뉴에서 뭔가 부족하면 우리는 사전에 사과드립니다.’ 재료가 부족해지기 전에 미리 사과를 드린다는 이야기인가 싶어 몇 번을 재차 읽었다. 맞다. 수면부족이 틀림없다. 기압차에 따른 두뇌활동 둔화인지도.

 

왼편에는 지젝을 연상케 하는 외모의 러시아 아저씨가 이륙할 때부터 잠에 시달렸다. 심지어 포크를 쥔 채 식사를 하다가도 꾸벅꾸벅 졸았다. 앞좌석에 닿을 것만 같은 아저씨 뱃살을 옆눈으로 흘끔 훔쳐보다 생각도 않던 화장실이 간절해졌다. 서울에서 모스크바, 모스크바에서 마드리드, 마드리드에서 그란 카나리아. 거진 하루에 가까운 이동 시간 동안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여행을 떠나기 3일 전 타로를 펼쳤다. 딱히 기대할 바도 없지만, 궁금한 건 궁금하니까. 흐름을 살펴보니, 바보카드가 눈에 띈다. 구름 하나 없는 화창한 날씨, 어느 젊은이가 절벽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는다. 소풍일까. 표정도 해맑고 몸짓도 가볍다. 아마 나는 곧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문을 열어젖힐 것이다. 신선한 만큼 무모한, 또는 무모한 만큼 신선한 문을.

 

대학교 때 어느 교수님은 자신이 겪은 혹은 지켜본 짤막한 일화를 거의 매수업마다 들려주셨는데,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인생은 어떤 거창한 게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 뒤바뀐다고.

다행히 마드리드행 비행기에서는 옆자리가 비어 있는 창가 쪽에 앉았다. 이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가 금세 점점이 박힌 무수한 불빛으로 넘실거렸다. 도시 하나 하나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주황색 열대어처럼 그란 카나리아를 향해 헤엄친다. 어찌 될지 모르지만, 아니, 모르기 때문에 일단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랄까. 나뿐만 아니라, 미겔을 비롯하여 이 떠남에 연루된 모든 이들에게도.

    

​하늘에는 별자리를 그려볼 만큼 무수한 별들이 오래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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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2. 파도를 세어보는 시간

 

언제부턴가 바다 가까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이따금 마음 한 편 허전할 때 파도 소리 하나둘 세어보는 밤바다의 풍경을 말이다. 도시인으로서는 누구나 한 번쯤 품을만한 낭만일 것이다. 공항을 떠나는 차 안에서 혹시나 해 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미겔은 대문에서 걸어서 5분이면 해변이 나온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그저 어느 작은 해변일 줄 알았는데 큰 오산이었다.

 

골목 하나, 정말로 집 앞에서 골목 하나만 돌면 바다가 보였다. 라스 칸테라스 해변이다. 도시와 바로 붙어 있을뿐더러, 한겨울에도 15도 이하로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따듯한 날씨 덕에 북유럽 사람들이 많이 찾는단다. 3km 정도 길이의 해변 산책로에는 서핑, 일광욕, 거리 악사, 모래 조각 작품, 노천카페의 수다 등 해변의 고즈넉한 여유가 줄줄이 이어졌다.

 

가까이 살펴보면 해변은 ‘La Puntilla’, ‘Playa Grande’, ‘Playa Chica’, ‘Peña la Vieja’, ‘Puntabrava’, ‘La Cícer’ 등 다섯 곳으로 나뉘어 있다. 풍경이 눈에 익을 때쯤에는 저마다의 개성을 찾는 재미를 들렸다. 가령, ‘Peña la Vieja’에는 썩 괜찮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지, ‘La Cícer’의 파도는 다른 데보다 조금 더 거세네, 거리 음악은 ‘La Puntilla’에서 듣는 게 편하지 라는 식으로.

 

이 해변의 또 다른 특색은 ‘La Barra’로 불리는 화산암 위주의 암초 지형이다. 해안으로부터 일정 거리 떨어져서 길게 늘어져 있는데, 큰 파도를 막아줄뿐더러 물놀이하는 이들이 바다 멀리 떠내려가는 걸 잡아준다. 아마 글로벌 비영리단체 환경교육재단으로부터 해양 안전, 환경 관리, 수질 등을 기준으로 선정하는 ‘블루플래그’를 받는 데 있어서 꽤 큰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어린아이부터 주름 가득한 노인까지 누구나 편히 바다에 몸을 적시며 머물렀다.

 

저녁 무렵에는 해변 왼편 끝에 자리한 대강당까지 걷곤 했다. 라스 팔마스에서 태어난 테너 알프레도 크라우스를 기념하는 클래식 공연장이다. 오스카 투스케가 건축했다는데 등대를 닮았다. 처음에는 멀리서 건물 경관조명을 보고는 실제 등대인 줄 알고 찾아갔을 정도다. 대강당 주변을 서성이다 도시에 땅거미가 내려앉고 불빛이 점점이 모일 때면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파도를 세는 게 일상이 되어 갔다. 어딘가를 나서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해변을 곁에 뒀다. 대부분 흐린 날이었고 바람은 비스듬히 불어왔다. 파도가 부서지고 다시 밀려오는 걸 세어보며 섬의 저녁을 맞이했다. 가만히 귀기울이면, 섬이 무어라 말을 건네올 것만 같았다.

 

섬으로 떠나면서, 프랑수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종종 머릿속에 떠올렸다. 소년원을 빠져나와 길 아닌 길을 끝없이 달음박질하던 앙투안을 따라가 보려 애썼다. 그렇게 다다른 어느 해변, 앙투안은 바닷물에 몇 걸음 적시고는 이내 곧 돌아섰다. 아무 말 없이 카메라를 응시하던 그의 눈빛이 깊숙이 번진다. 라스 칸테라스 해변을 홀로 묵묵히 걷다 보면, 때로 그날 앙투안이 마주한 파도가 여기에도 찾아왔을까 싶어 마음이 괜스레 일렁이다 먹먹해질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