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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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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을 살고 있던 나는 과연 정상을 위해 도약하는가? 아니면 절벽에서 추락하는가? 그걸 알아내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걸 꿋꿋하게 보여주겠다고 절벽에서 밀어버린다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기분이 수 십 차례나 맴돌게 된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람을 마주할 때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멋대로 사고하는 바가 있다.

 

그래도 지금은 내 멋대로라도 생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루니아 누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카일~ 아~”

 

“제가 먹을 수 있다니까요.”

 

“소녀는 언니가 받아주는 걸 먹어야 한답니다아!”

 

“남자거든요!”

 

정말로 중요한 듯하면서도 불필요한 포지션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통 4사분면으로 모든 기준을 나누는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사람의 기준은,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이익이 존재하고 무엇보다 합이 잘 맞아서 행복해야 한다. 반대로 가장 중요하지 않고 가장 불필요한 사람이라면, 손해만 있고 같이 있으면 매우 불편한 것. 그것들이 각각 1사분면과 3사분면에 속해있다고 했을 때. 루니아 누나의 경우는 확실하게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받아먹고 있는 케이크가 내 입 안에서 뭉개지는 동안,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빠져나가 여장을 풀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기로 하자.

 

“잡화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이가 좋네요.”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는 비꼬는 말투겠지만, 앞에 루니아 누나와 루비아가 있는 한, 리제로트는 매우 부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홍조를 띠면서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세상 하나 없어져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평행세계 모두가 사라지니까, 지금 내 개인적인 감정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참기로 하자.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래도 지금은 케이크를 받아먹으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고분고분하게 받아먹는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루니아 누나가 주는 케이크를 받아먹지 않으면, 커다란 사건 하나를 더 만드는 셈이 되니까, 얌전히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 사실상 케이크는 좋아하긴 하지만, 수틀리면 또 다른 난장판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얌전하게...

 

“자. 아~ 하세요. 안 하면 또 다시 구속을 하고 질질 끌고 갈 겁니다.”

 

“루비아. 케이크를 준다면 준다는 건 고맙지만, 너도 좀 먹는 게 어때?”

 

“저는 이미 충분히 먹고 있습니다.”

 

아니, 절대로 충분히 먹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시켜놓고 나에게만 다 먹이고 있잖아. 초콜릿 케이크도 한 조각만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접시만 5개가 쌓였다.

 

그리고...

 

“그 공허한 눈으로 먹고 있다고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거든! 너 여태까지 케이크조각 하나도 먹지 않고, 나에게만 퍼 먹이고 있잖아!”

 

“퍼 먹이다라는 표현은 너무 남성적이니, 여성스러운 단어로 떠 먹여준다는 표현으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애초에 말하는 것에 대해 남성적과 여성스러움이 뭐가 중요해!”

 

“그렇게 제가 먹는 모습이 보고 싶다면 차라리 저에게도 떠먹여주시죠?”

 

“접시까지 다 넣어줄 테니 입 벌리고 있...크앗!”

 

살기를 감지한 것일까? 루니아 누나는 포크 뒷부분으로 내 이마를 때렸다. 다만, 내 주관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때렸다는 게 아니라, 강타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겠지. 뇌를 흔드는 충격이 아직까지 머리에서 뛰어 놀고 있는 동안, 매우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리제로트와 다른 손님들.

 

이게 뭐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상황인가?

 

“그래서 리제로트 양은? 우리 카일의 뭐죠오?”

 

“은인이에요. 적어도 제가 레이베리아로부터 살려줬죠. 그 이후에는 뜨거운 밤을 보낸...”

 

“그 어느 누구도 살려준 은인과 뜨거운 밤을 보내지 않아. 알아들어?”

 

“절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

 

“헛소리 말고! 제대로 이야기를 하란 말이야!”

 

소리지르는 것도 목에 한계가 있는데, 조만간 득음을 할 지경이다. 한숨이 기가 막히게 튀어나가는 동안 리제로트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의 친구는 당신의 은인에게 암살하려고 시도하잖아요?”

 

“네가 아이리스를 인형으로 만든 게 시작지점이잖아.”

 

“그때는 너무 귀여워서 그만...”

 

귀여우면 모두 인형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냐? 한숨이 한 가득 나오게 되는 답변을 들었지만, 리제로트는 잡화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인형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불안감도 살짝 맺히기 시작했다. 다만, 그런 일을 하기 전에 리제로트가 오히려 굴복하게 되지 않을까?

 

잡화점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내가 걱정을 따로 안 해도 될 정도라니.

아니지. 내가 걱정을 끼치는 입장이었네.

 

“인형으로 만드는 게 무슨 재미가 있나요오?”

 

“그야 제 말에 복종하잖아요.”

 

잡화점에 돌아가기 전까지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을 것 같은 루니아 누나가, 리제로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굴러오는 질문을 보기 좋게 받아 친 리제로트의 대답에, “흐응~ 그렇군요오.”라고 입을 열었다.

 

“말에 복종한다는 의미는 잘 알고 있는지요오?”

 

“말에 복종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제 명령에...”

 

“아뇨오. 당신은 타인의 진심을 여태껏 모르고 살아왔다는 말이에요오.”

 

얼어붙기 시작했다.

루니아 누나의 분위기는 항상 극과 극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럴 때마다 항상 무서워 죽겠다. 천진난만하고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바보 같은 일을 벌여도, 루니아 누나의 본 모습을 보통 사람이 견딜 일은 없으니까.

 

리제로트가 쥐고 있던 컵이 살짝 떨기 시작했다.

 

“사람의 진심이 왜 필요한 거죠?”

 

“당신의 그 나락 같은 삶을 벗어나기 위함이죠오.”

 

나락 같은 삶이란 소리에 또 다시 리제로트는 흠칫하고 놀란다. 옆에 있던 월터가 그에 동요했는지, 얼어붙는 살기가 우리 주위를 몰아치기 시작했고, “월터. 가만히 있어.”라며 리제로트의 당돌한 한마디가 분위기를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다.

 

“조만간 싸움이 일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글레이프니르를 꺼낸 루비아 씨가, 다시 상황을 보고 서서히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그보다 그거 주머니에서 꺼내는 거였어?

 

그 밧줄이 그렇게 작은 주머니에 다 들어가던가?

 

“루비에몽이라고 불러주시죠.”

 

“남의 생각을 읽고 거기에 맞게 태클 걸어달라고 자신을 꾸미지 말라고!”

 

저럴 때마다 내 정신이 대나무 헬리콥터를 타고 저 멀리 날아간다. 그러나 내가 루비아와 대화를 주고 받아도, 루니아 누나와 리제로트는 서로 공방전을 하느라 바쁜데, 자세한 이야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달그락!

 

“웃기지 마세요! 당신이야 말로 저에 대해 뭘 안다는 거에요!”

 

“저는 카일의 누나이기 이전에 기사단장이랍니다아. 많은 사람들을 봐오면서 이끌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지요오. 당신도 근본적으로 착한 아이이긴 하지마안, 우리와 함께 걸어가기 위해선 자신의 능력을 버려야 해요오. 바로 저 뒤에 있는 집사 인형도 같이 말이죠오.”

 

태연하게 자신의 모든 힘을 포기하라는 루니아 누나. 그걸 부정하는 리제로트 사이에는 불길한 기운이 맴돌기만 했다.

 

“다른 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조금 더 조용하게 이야기 해주시길 바랍니다.”

 

일하는 종업원에게 한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

 

“그걸 줄이면 갑분싸가 됩니...”

 

“제발 내 생각 읽고 멋대로 입 열지 말아줄래!”

 

루비아는 내 생각 하나하나 전부 다 읽는 게 가능한 건가? 호문쿨루스의 특수능력이 언제부터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게 되었을까? 티르야 말로 최고의 연금술사다운 제작솜씨다.

 

“이건 티르와 관계 없습니다.”

 

“제발 같은 태클 3번 걸기 전에 자중할 수는 없는 거냐?”

 

“없습니다.”

 

“자중하라고!”

 

속도가 빠른 공방전은 이곳도 마찬가지. 각기 다른 토론대회나 만담대회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서 이쯤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게다가 나는 중대한 사명이 있으니, 이런 한가로운 곳에서 케이크나 강제로 받아먹으며 앉아있을 위인이 못 된다. 애초에 여장 당한 상태인데, 그 옷까지 저주받아서 벗지를 못하고 있으니, 지금 당장 저주를 풀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한단 말이지.

 

“저는 슬슬 자리에 일어나도 될까요?”

 

“안돼요오. 카일은 누나와 백장미를 촬영해야 한다고요오.”

 

대체 왜 백장미를 찍자고 하는 거냐.

 

“백장미를 찍기 전에 전 이 옷의 저주부터 풀고 싶다고요. 일단 저주를 풀어야...”

 

“다른 여성의류도 입기 때문이죠오?”

 

“아니라고!”

 

도대체 어떤 남자가 다른 여장을 하기 위해 저주를 푼다는 건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그러니 루니아 누나의 사고방식은 정상범주에서 벗어나있다. 결국 비정상중의 비정상은 루니아 누나인...

 

-파악!

 

“켁!”

 

뭔가가 빠르게 날아와 내 머리를 힘껏 때렸다. 가만히 보니까 별이 5개정도 떠있는 걸 보면, 어디 돌침대가 생각나는데...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는 언제까지나 정상이랍니다아. 오히려 카일이 비정상이 아닐까요오? 자신의 귀여움을 멀리 퍼트릴 생각을 하지 않고, 숨기시려고 하시다니이...혹시! 즐길 사람만 즐기라는 뜻의 배려인가요오?”

 

“호수 같은 배려 좋아하시네! 어떻게 자매끼리 남의 생각을 읽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에 능통한 것부터가 비정상이거든요!”

 

애초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비정상이라는 소문이 들리긴 했는데, 루니아 누나 또한 붉은 눈을 가지고 있다. 모두 주변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을 보면, 거기를 멀리하고 집을 가까이 하는 편이 좋다.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천성적으로 착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가까이 해도 좋답니다아~”

 

“내 생각 좀 그만 읽어!!!”

 

본래 독백은 남들에게 읽히라고 하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그전에 리제로트에게 무슨 의도로 그런 말 했는진 잘 모르겠지만, 지금 싸우자는 의도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싸워도 득이 없는 건 저 소녀도 잘 알고 있답니다아. 다만, 저는 카일에 대해 1%라도 위험을 없애기 위해 그리 말한 것이지요오.”

 

나를 생각해서 말했다는 말은 진심이겠지.

이전에 리제로트는 나를 납치했던 전과가 있으니까, 더 이상 나에게 위험이 되지 않도록 인형들을 포기하라는 것. 아마 인형을 만드는 그 자체를 포기하라는 거니까, 자신의 초능력을 포기하라는 셈이 된다.

 

내가 알던 인형사 사브누아는 영혼을 집어넣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리제로트는 인간의 영혼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영혼이 없을 때야 말로 가장 순수해! 그러니 귀여운 아이들을 순수한 채로 남아야 한다고!”

 

영혼이 없는 게 순수해?

그러니까 아무것도 담지 않은 그릇자체가 보기 좋다는 건가?

 

“그건 꽤 기발한 헛소리네.”

 

저 말을 듣자마자 내 입에서 자동반사마냥 튀어나갔다.

 

“영혼이 없는 상태가 가장 순수하다고? 그래서 내 딸을 그렇게 만들었냐!”

 

그저 본능적으로 외친 소리. 다른 시간대일지 몰라도 카렌을 지키지 못했던 무기력한 자신. 그리고 엉망이 된 카렌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분노가 리제로트에게 단번에 몰아쳤다. 오늘의 일을 과거까지 끌고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내 분노에 반응한 마나들이 주변을 요란하게 뒤흔들었다.

 

“넌 정말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의 의뢰를 들어주기 위해 이곳에 있지만, 말 한마디를 듣고 내가 정말 무르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잘못하지 않았다는 듯한 그런 소리를 한번만 더 하면...

 

내 분노를 마주한 리제로트에게 성큼 다가가선 나지막하게.

그리고 최대한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내 모든 걸 걸고 너 하나만큼은 꼭 죽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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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 회사는 쉬는 날이 없을까요?

요즘은 그나마 페이스 조절을 하는 거 같았는데,

일정이 당겨진 거 비해, 다른 업체에서 아직까지 일할 준비가 안 되었다니...

 

조만간 백수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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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말

오늘이 지나야

그대 혼자 놀이터에서 뭐 하나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가고 울고있어요

그대 이야기 들어줄게 내게 와요

 

가능한 한 내게 말해주면 좋겠어

내가 멍청해서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요

 

위로가 필요한 날이라면

토닥토닥 안아주고

밤새도록 하소연 들어줄게요

 

그대 슬픈 기억 모두 다 내가

삼킬테니 눈물 가득한 눈빛으로 보지말아요

삶이란게 원래 그래요

세상 내가 가장 불행한 것 같아도

 

그대 곁에 언제까지나 내가 있을게

혼자 흔들리게 두지 않을게요

기운내요

오늘을 살아야 내일이 오잖아요

 

 

많이 힘들었죠

부은 두 눈에 헝클어진 머리

당장이라도 잡지 않으면

안 괜찮을 것 같아

 

몸 마음이 지친 날이라면

스르르르 기대봐요

그대만의 배게가 되어줄게요

 

그대 슬픈 기억 모두 다 내가

삼킬테니 눈물 가득한 눈빛으로 보지말아요

삶이란게 원래 그래요

세상 내가 가장 불행한 것 같아도

 

그대 곁에 언제까지나 내가 있을게

혼자 흔들리게 두지 않을게요

기운내요

오늘이 지나야 내일이 오잖아요

 

 

누구나 각자의 이유로

아픈 삶을 살아가죠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요

살다보면 살아있어 고마운 순간이

꼭 올거랍니다

 

그대 슬픈 기억 모두 다 내가

삼킬테니 눈물 가득한 눈빛으로 보지말아요

삶이란게 원래 그래요

세상 내가 가장 불행한 것 같아도

 

그대 곁에 언제까지나 내가 있을게

혼자 흔들리게 두지 않을게요

기운내요

오늘을 살아야 내일도 살잖아요

 

 

# 모두들 수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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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평화

 

평화 Peace

: 갈등 없이 평온하고 화목함

 

 

평화는 눈이 내리는 걸 지켜보는 거야. 평화는 누군가를 아프게 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평화는 네 자신의 모습 그대로인 거야.

                                                                                              - 토드 파, <평화 책(The Peace Book)> 中

 

 

 

 

포털 사이트에 평화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최상단에 연관검색어로 대한민국 대통령과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름이 함께 묶여 뜬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두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던 금단의 선. 그 모호하면서도 진하디 진한 선을 손잡고 넘나든 남과 북 두 정상의 몇 걸음이 평화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했나 보다.

 

사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것은 유일한 개인으로서 내 정체성을 확고히 해주는, 매우 유의미한 행위다. 내가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나누며 산다. 언제든 선을 그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

 

하지만 선을 긋는다는 것은 그 선 너머에 존재하는 누군가에 대해 알아가기를 멈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선을 거두는 순간 관심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시의時宜를 잃은 관념이 생긴다. 현재와 미래가 포함되지 않은 관념은 딱딱하게 굳어져 곧 편견이 된다. 무관심의 밭에서 자의적 기준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라난 편견은 이미 그어놓은 선 위로 더 진하고 더 강력한 선을 덧그린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선은 지우기가 힘들어진다. 선 위에서 경쟁과 갈등을 즐기지만, 반복되는 전쟁은 때때로 나를 지치게 한다.

 

평화는 바로 그 균열에서 싹을 틔운다. 하루하루 일어나는 싸움은 견딜 수 있지만, 삶 전체가 온통 갈등으로 범벅이 된다고 상상하면 두렵고, 외롭고, 암담해진다. 선을 긋고 나에 대해 골몰함으로써 내가 특별하다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인지했다면, 선을 지워도 그 사실은 변함없다는 것 역시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에게 애정과 확신을 가진 사람은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나 아닌 타인을 적으로 삼는 일 따위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리고 사실, 세상에 완벽하게 갈라져 있는 건 없다. 바다가 끝나는 곳을 땅이라 부르고, 땅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바다가 펼쳐진다. 평화의 실마리는 생각보다 원초적인 것에서 발견되곤 한다. 확실하고 단단한 내 바운더리를 벗어나 그동안 시선이 닿지 않았던 곳을 내다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떠도는 소문이 아닌, 나 자신을 믿고 미지의 것을 경험해보려는 용기.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땅 위에서 별다른 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언가 다른 게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력. 마지막으로 미지의 것을 마침내 발견했을 때, 눈에 비치는 그 대상을 다른 판단이 끼어들 새도 없이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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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부정하다

 

부정하다 否定--

: 어떤 것을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거나 옳지 않다고 반대하다

 

 

생은 자기완성을 위하여 자기부정을 하는 것이다.

                                                                                       - 함석헌, <함석헌 전집 2 : 인간혁명의 철학> 中

 

 

 

 

엄마의 건강에 빨간 불이 켜진 뒤부터 우리는 교환일기를 쓰고 있다. 중학생 때 친구와, 대학생 때 남자친구와 함께 써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도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어렵다. 과거 그들과의 일기가 긍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요즘 우리의 노트에는 반쯤 그늘이 져 있다. 우울감에 물든 엄마는 펜 끝에 대롱대롱 검은 잉크와 더 검은 생각을 매달고 지낸다. 과거에 대한 회한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만든다. 어제의 어둠은 오늘을 뛰어넘어 며칠, 몇 달, 몇 년까지 자기영역을 확대한다.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딸의 애정 어린 희망은 거센 자기 부정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엄마의 담장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담장 너머를 엿본다. 검은 잉크는 언젠가 다 쓰기 마련이고, 그걸 다 쓰고 나면 새 것으로 갈아 끼울 수 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푸른 바다를 닮았거나 소나무 냄새가 나는 잉크를 넣어버릴 생각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긍정도 부정만큼이나 힘이 강하다는, 설익은 믿음 하나로 견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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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4

튀니스는 해안에서 이어지는 내륙 호수 기슭에 위치한 도시였다. 마그레브 끝단에 형성된 이곳은 옛 카르타고 시절부터 북아프리카의 무역 중심지로서 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수많은 민족이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힘을 겨뤘고 무수한 통치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좁은 해협을 따라 반나절이면 몰타에 다다를 정도로 유럽과 가까웠기에 오스만은 바르바로사를 지원해 주었고 바르바로사는 오스만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며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실현해 나갔다. 카를 5세는 북아프리카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트리폴리에 이어 튀니스가 함락되자 그들의 만행을 더 이상 못 본 체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지중해의 패권을 제자리에 돌려놔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튀니스는 철옹성같은 성채였다. 성벽 앞으로는 바다로 이어지는 호수가 있어 해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해적들은 포로로 잡은 노예들을 성벽 지하 깊숙한 감옥에 던져 두었다. 그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을 대하듯 하루에 한 번 철창 문을 열고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가축처럼 노예 시장에 세워 큰 돈을 받고 노예 상인에게 팔아 버렸다. 철창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의 눈은 공포심으로 가득했다. 날마다 꾸는 악몽으로 사람들은 서로에게도 적대감을 품었다.
지하 감옥은 어둡고 축축했으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거나 바닥을 기어가는 벌레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며칠 동안 이곳에서 먹은 거라고는 빵 한 조각이 다였다. 발레트는 다리를 끌어당겨 두 팔로 무릎을 감쌌다. 소름끼치는 차가운 공기가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족쇄를 찬 손과 발은 점점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발레트는 맞은편에 앉은 지아니를 보았다. 지아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초록 눈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 했다. 5년간의 갤리선 생활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지아니의 몸은 젊은 성인 남자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그는 다른 노예들과는 달랐다. 그에게 절망이나 원망의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지아니에게는 어떤 압력에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발레트는 나디아에게도 오빠와 같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쾅! 저 멀리서 어렴풋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트는 벽에 귀를 갖다대었다. 로메가스가 다가오려하자 발레트는 손을 들어 막았다. 소리는 전보다 더 크고 가깝게 들려왔다. 쾅! 발레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로메가스와 지아니도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대포 소리는 분명하고 선명하게 튀니스를 뒤흔들었다.
"함대가 왔어! 에스파냐에서 함대가 왔어. 로메가스!"
발레트는 로메가스에게 소리치며 그를 얼싸안았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눈물을 흘렸고 신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발레트는 지아니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힘껏 서로의 어깨를 잡았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말소리가 감옥 밖으로 빠져나갔다. 발레트는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그들은 성벽 아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족쇄 찬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에스파냐군이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해적들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에스파냐 함선은 항구의 요새에 무차별적으로 포를 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성벽이 뚫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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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지금

 

지금 Now

: 말하는 바로 이때

 

 

마치 내 안으로 여행이라도 떠난 듯이, 내 마음속 아득한 곳에 있는, 내가 지금 느끼는 단조로움과는 매우 다른, 오래된 시골집의 단조로움을 기억한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는지 아니었는지 말해야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서 살았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였다. 그 삶과 지금의 삶은 비교 불가능한 다른 삶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中

 

 

 

 

오래된 친구와 만날 때면 늘 듣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가 좋았어”라는 말.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연신 잔을 채우고 이리저리 신나게 부딪쳐도, 어쩐지 그 말은 뼛조각처럼 마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나를 찌른다. 왜 우리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그때’를 ‘좋았다’고 말하며 그리워하는 걸까. 영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그 말이 단순히 과거에 대한 자기긍정이 아니라 지금의 자기 자신을 반대편에 올려놓고 둘을 저울질하다 결국 지나간 시간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버리는 이상한 계산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5년 전, 1년 전, 그리고 오늘의 ‘그때’가 가리키는 시점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겹쳐지면서도 분리되어 있다. 어찌됐든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도 얼마 후면 ‘좋았던 그때’가 된다는 것이다. 이미 손에 쥐고 있어 언제나 가벼운 것처럼 여겨지는 지금을, 비교도 경쟁도 없이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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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3

둥, 둥, 둥!!!
검은 얼굴의 해적은 손을 높이 들어 북을 내리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노를 저어라! 더 힘껏!"
발레트는 이를 악 물고 족쇄 찬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생존 앞에서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앞 사내의 등에 긴 채찍이 내리꽂혔다. 사내의 손에서 노가 떨어지자마자 곧 사정없는 매질이 이어졌다.
"계속 저어요."
지아니가 정면을 응시한 채 표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땀이 비가 오듯 흘러 내렸다. 지하 선실은 덥고 습했다. 발레트는 강렬한 태양이 그리워졌다. 빌구의 성벽 위에서 마셨던 포도주가 간절히 생각났다. 금빛의 스케베라스산과 붉은 바다, 함께 했던 사람들. 다시 한번 그곳에서 몰타의 풍경을 보고 싶었다. 지아니의 말이 옳았다. 버텨야 했다.
발레트는 북소리에 집중했다. 북을 치는 해적의 손이 더욱 빨라졌고 노는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해적들의 엉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레트는 라골레타 항에 가까이 왔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항구는 북아프리카의 관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괴괴한 모습이었다. 트리폴리를 무참히 함락시킨 해적의 잔인함을 피해 아랍 지도자는 이미 도망쳐 버린 후였고 튀니스 주민들은 해적들을 상대로 감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힘쓰지 않고 라골레타 항에 입성했다. 부족 대표들은 해적에게 튀니스 요새를 내어주고 말았다.
갤리선 노예들은 모두 족쇄를 찬 채로 배에서 내렸다. 발레트는 트리폴리에서 사로잡힌 후로 처음 두 발로 땅을 딛고 섰다. 다른 배에서 내린 노예들 사이로 로메가스가 보였다. 로메가스는 걸음을 멈추고 발레트를 쳐다보았다. 발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오랫동안 걷지 못한 탓에 지아니는 다리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 휘청거리는 그를 발레트가 붙잡자 해적은 둘 사이를 떼어놓으며 지아니의 등을 밀쳤다. 검은 얼굴의 해적은 발레트를 노려보며 허리춤에 찬 칼을 만졌다. 발레트는 족쇄를 끌며 앞으로 걸었다. 이제 마그레브의 튀니스는 해적의 도시가 되었다.

 

 

지중해의 바람이 갑판 위로 몸을 내민 안드레아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갔다.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몰타에서 경험한 짧은 환희 뒤에는 텅 빈 허전함만이 남았다. 눈을 감으면 애처로운 얼굴로 항구를 뛰어다니는 나디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드레아는 마지막 순간을 지울 수 없었다. 성 요한 기사단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숨을 내쉬었다. 트리폴리에서 살아남은 자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요새는 해적이 장악하고 있고 대다수의 주민과 병사는 죽임을 당했다.
'에스파냐에는 다른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갤리선은 바르셀로나를 향하고 있었다. 제노바는 일찍이 상업으로 도시가 형성된 곳이었다.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으나 베네치아와의 세력 다툼에서 패배한 후 밀라노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게 쇠퇴의 길을 걷던 제노바에게 에스파냐의 카를 5세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그는 제노바의 용병 대장 도리아를 해군 총독으로 삼고 제노바의 자립을 도와주었다. 카를 5세는 해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필요했다. 도리아 또한 용병으로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쪽으로 움직이는게 당연했다. 북아프리카에 관심을 두지 않던 카를 5세도 더는 바르바로사의 도를 넘는 행위를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전군을 바르셀로나에 집결시켰다.
안드레아는 도리아가 이끄는 해군 선단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는 금융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다의 삶을 택했다. 돈을 저울질하는 것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피오르 삼촌은 늘 그가 동경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어린 안드레아에게 바다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였다.
안드레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파도는 저항없이 순순히 길을 내주었고 돛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바람은 지중해의 서쪽으로 배를 실어 보냈다.

 


바르셀로나는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 집합한 갤리선과 무장 상선으로 가득차 있었다. 원정에 필요한 수많은 물자를 배에 적재하는 선원들로 항구는 발을 디딜 틈도 없었다. 카를 5세는 튀니스까지 점령한 바르바리 해적으로 인해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튀니스는 시칠리아까지 배로 하루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해적은 제국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그것은 광활한 영토를 거느린 카를 5세의 자존심에 금이 가게 만든 사건이었다. 더구나 바르바로사는 오스만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카를 5세는 이번에야말로 지중해가 기독교도의 것임을 단단히 일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튀니스 원정은 대규모의 함선과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교황은 자금을 내어 선단을 조직하였고 릴라당은 세계 최고의 무장 상선인 성 안나호를 바르셀로나로 보냈다. 도리아가 이끄는 제노바 해군도 바르셀로나 항에 들어섰다.
안드레아는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에스파냐 해군에게 트리폴리에 관한 다른 정보가 들어왔는지 알아보았다. 에스파냐 수비대장 멘데스는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병사들과 성 요한 기사들은 갤리선 노예로 넘겨졌다는 얘기가 들렸다. 사망자 명단에 발레트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보면 포로로 잡혔을 확률이 높았다. 해적의 습격이나 해전으로 포로가 된 기독교도나 이슬람교도는 갤리선 노예로 보내져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해전으로 배가 침몰하면 제일 먼저 목숨을 잃는 건 노예들이었다. 그렇기에 각국의 갤리선에는 노를 저을 노예가 항상 필요했고 노예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안드레아의 눈에 성 요한 기사단의 무장 상선 성 안나호가 들어왔다. 돛대에는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 때 창설된 성 요한 기사단은 귀족의 자제들로 구성된 의료 기사단으로 출발했다. 기사는 청빈, 순결, 순종을 평생토록 맹세했고 기사단에 남은 생을 바쳤다. 안드레아는 트리폴리 요새가 함락되지 않았다면 튀니스 원정에서 발레트를 동맹군으로 만날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성당에서 기도한다는 나디아의 말을 떠올렸다. 우두커니 서 있는 안드레아의 앞뒤로 짐을 맨 선원들의 분주한 발걸음만 오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