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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3

437

 

 

 

어처구니 없게도 티아가 나를 과거로 내던져버리면서 막상 알아서 돌아오라고 연락을 받은 지 1주일이 지났을 무렵. 꾸준하게 신체를 과거로 돌려보내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과거 시간대에 있는 티아에게 따지면서 현재로 가는 방법이 있었지만, 지금 당장 내가 돌아가기에는 어린 레프리시아가 눈에 밟혔다. 혼자서 살아갈 힘을 넘어서 마왕의 길에 오르도록 하는 것이 이번에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음. 역시나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혼잣말을 늘어뜨리면서 초목이 모두 파괴되고 그을린 자국만 남은 장소를 바라보며, ‘내가 진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 멧돼지를 사냥하고 있는 게 맞는가?’라고 의문이 3번씩이나 반복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레프리시아와 함께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마기가 희미해져서 곧 사라진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나 때문에 몸 안에 누적되어있는 마기가 레프리시아를 성장시킨 것.

 

게다가….

 

“선생님! 멧돼지를 잡아왔어요!”

 

“멧돼지에게 무슨 마법을 날리면 그게 암흑물질로 되는 거냐.”

 

미다스의 사촌이라도 되는 마냥, 사냥을 하면 전부 암흑물질이 되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만약 주기적으로 내 신체를 과거로 보내지 않았다면, 영양실조로 금방 시들어서 죽어버리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고 있겠지. 게다가 마계공작이 있는 인간마을에 보호자나 레프리시아를 가르칠 다른 선생님을 구할 이유는 없고, 레시아가 어느 정도 성장을 했을 경우 다른 마을에서 찾아주는 것이 좋다.

 

덤으로 그 마을에는 윤회의 조각을 얻을 수 있는 정보나, 아니면 과거에 있는 티아에게 찾아가서 현재로 돌려달라고 하면 좋은 계획이라고 볼 수 있지.

 

“그 멧돼지도 나중엔 네가 다 먹어라. 인간이 먹기에는 이미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니다.”

 

“선생님은 배 안고픈 거에요?”

 

“아사직전의 거지가 저걸 본다면 식욕이 사라져서 굶어 죽을 걸?”

 

암흑물질의 일부를 뜯어먹고도 아무렇지도 않는 레프리시아를 보면서 다시 생각을 했는데, 루니아 누나의 요리는 저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는 소리지? 예전에 레시아가 루니아 누나의 요리를 먹고 기절했었으니까.

 

“선생님?”

 

앞에 있는 레프리시아의 붉은 눈망울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면서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내리면서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나를 걱정하려고 하다니. 1억하고도 2천만년 더 걸리는 짓을...너는 지금 어떻게 혼자서 살아갈지 궁리를 잘 해둬야 해.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니까. 물론 네가 스스로 일어나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는 나나, 아니면 다른 보호자들이 알아서 돌봐줄 거라고 생각해.”

 

“선생님이 계속 곁에 있어주면 안 돼요?”

 

레프리시아의 작은 손은 여전히 바지자락을 잡고 불쌍하게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늘 말해왔듯이 나는 미래에서 건너왔어. 내가 미래로 가게 된다면 계속 같이 있어주지는 못해. 내가 나의 시간대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너를 보살펴주긴 할 거야.”

 

이렇게 말해주면서도 계속 같이 있어 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시아에게 제안을 했다.

 

“그럼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정하자.”

 

“가위바위보?”

 

아직 어린 시절이라서 가위바위보를 모르는 건가? 어쩔 수 없이 상세하게 나는 주먹을 쥐면서 가위바위보에 대한 규칙을 설명했다. 3가지 형태에 따라 물고 물리는 간단한 경쟁은 어린 레프리시아가 이해하는데 5초의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가위바위보야 말로 약자나 강자를 나누지 않고, 손만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한 투쟁이라는 거야. 지금의 나와 레프리시아의 전력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마법으로 대련을 한다면 십중팔구로 지게 되겠지만. 이런 가위바위보를 통해서 간단한 손 모양으로 날 이길 수 있다는 거지.”

 

“해볼게요. 그런데 뭘 정하는 거에요?”

 

레프리시아의 질문에 예약된 단어들을 입으로 내뱉었다.

 

“가위바위보에서 네가 이기면 너의 소원대로 어디에 가지 않고 계속 곁에 있을 거야. 다만, 내가 이긴다면 너는 빠른 시간 안으로 강해져서 날 뛰어 넘어야 해. 그렇든 그렇지 않든 나는 돌아갈 기회가 된다면 곧바로 사라질 거야.”

 

그렇게 가위바위보를 시작했고 작은 손이 가위를 냈을 때 나는 주먹을 내서 이겼다.

잠깐? 이겼어? 드디어 레시아에게 1승을 가져갔다고?

승률이 그나마 0%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올랐다니!

비록 어린 시절의 레시아지만 그래도 이긴 게 어디야!

 

“크크큭! 크하하하핫!”

 

기쁨에 통제되지 않는 나는 광소를 온 세상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사실 시작부터 약속을 지키지 않을 생각으로 멋대로 이야기 한 거지만, 졌을 때는 뭔가 수많은 대비책을 생각해야 했는데, 이겼으니까 그런 까다로운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상황을 봐서 내가 돌아가도 별 탈이 없을 정도로 레프리시아가 성장을 하면 그때 돌아간다.

 

“우으...”

 

“자. 레프리시아. 벌칙이야.”

 

“벌칙?”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그 사람은 벌칙을 받게 되어있지. 아까 내가 제안한 거하고는 별개의 내용이니까. 이건 꼭 참고하도록 해.”

 

나는 레프리시아의 볼을 꼬집으면서 살짝 늘렸다. 말랑말랑한 볼이 늘어나기 시작함에 따라 레프리시아의 목소리와 비명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아파! 아파요! 선생님! 아프다니까요!”

 

“매번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이렇게 당할 것이다! 어떠냐! 가위바위보에 무서움이!”

 

벌칙이 끝나자 빨개진 두 볼을 어루만지며 달래고 있는 레프리시아의 모습을 뒤로 하고, 슬슬 마을로 내려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마을로 내려가는 이유는 레프리시아에게 세상을 구경시켜준다는 목적보단, 지금 당장 돈을 구할 곳이 없어서 벌어들일 수단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한들 대체 뭘 하면서 돈을 벌지?”

 

“원래 산에서 허름한 집으로 거처를 삼은 이유는 자급자족을 하기 위함이 아닌가요? 선생님이라면 분명 욕심도 없고 수수하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애석하게도 인간은 욕구와 욕망에 이끌려 사는 동물이란다.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한 경우가 많지.”

 

레프리시아와 손을 잡고 마을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마법이야기라면 마법이야기,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세상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내가 일부러 피하고 있는 이야기라면 나에 관련된 모든 것. 마을에 있는 시장에는 정말 마계공작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부한 먹거리나 옷들이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를 섬기는 사람들은 보물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았는데, 마계공작의 영토라서 그 영향이 일반사람들에게도 끼치는 모양이다. 그걸로 사치를 하게 되고 유흥에 써버린다면 이 마을의 순환구조는 대략적으로 파악완료.

 

“이곳은 돈을 벌어먹고 살기에는 좀 힘든 구조였군. 정말 네 말대로 그냥 산에 올라가서 자급자족하고 사는 게 더 좋겠다.”

 

어쩔 수 없이 한 바퀴만 돌고 해산하려고 했을 때.

 

“혹시 여행자이신가요? 최근에 이상한 사람이 출몰한다고 들었는데?”

 

내 앞에는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주변에 있는 마을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으로 보아 나는 조용히 말했다.

 

“색욕의 공작인 아스모데우스로군.”

 

무의식적으로 레프리시아의 강하게 붙잡고 직시하게 시작했다. 하늘 빛의 눈동자와 짙은 푸른 색의 머리는 가르마를 한쪽으로 내고 앞머리를 빗어 올려서 고정이라도 시켰는지 광택이 나기 시작했다.

 

“설마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만으로도 눈치채시다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통 머리부터 조아리며 살려달라고 비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오해를 사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혹시나 딸 아이 앞이라고 허세를 부린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허세를 부리는 건 내 앞에 있는 상대의 빈틈을 만들기 위해서지.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보다, 이 아이를 노리고 온 거라면 이곳이 사라져도 좋다는 생각을 좀 해둬야 할 거야? 너희들 마왕군은 어차피 오합지졸이니까.”

 

마왕군을 거론하자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은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희 마왕군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혹시라도 물어보는데 마족은 아니신 것 같고...?”

 

“인간은 맞아.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애는 마족이 맞지.”

 

“그런데도 인간이 마족을 기르시다니 꽤나 무섭겠네요. 마족은 언제 어디서든 지식이 쌓이기 시작하는 생물. 인간에 대한 추잡함이나 불결함에 대해 알게 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먹어 치우려고 할 것 같은데요? 마족의 힘의 원천은 남을 희생시키는 것이니까요.”

 

잔인하게 웃고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시선은 나에게서 레프리시아에게 옮겨졌다.

 

“어린 아가씨? 이런 인간 밑에 길들여지면 훌륭한 마족이 될 수 없단다.”

 

미묘하게 빛나고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눈과 마주한 레프리시아는 급하게 내 다리 뒤에 숨었다.

 

“어라?”

 

“미안하게도 너의 매료를 뿌리치고 나에게 숨은 걸로 보아, 나에게 길들여져도 훌륭한 마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승리의 미소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승리는 이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보면 되겠지.

 

“설마 이런 시시한 말싸움으로 나에게 말을 걸은 거라면 무척이나 실망할 것 같은데. 아스모데우스. 나를 멈춰 세운 이유라도 있지 않던가?”

 

“멈춰 세운 이유는 언제까지나 장래가 유망한 그 어린 소녀를 제 밑으로 위함일 뿐.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제 매료에도 걸리지 않을 만큼 성장한 아이라면 더욱 더 탐이 나긴 하군요.”

 

탐이 난다는 것은 레프리시아가 나중에 마왕이 될 그릇이란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는 건가? 확실히 지금 20대 중반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성이지만, 얼마나 살아왔는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오래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쪽은 이 아이의 잠재능력을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나 봐?”

 

“당연하죠. 제 매료를 피해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상급마족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라면 오히려 저의 반려가 되어, 저의 야망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죠.”

 

“반려? 난 그 결혼 반대인데?”

 

귀걸이에 있던 티르빙을 빼낸 뒤에 사브르로 변형시키고 아스모데우스에게 겨누며 말했다.

 

“시아버지에게 잘못 보이면 큰일난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나? 애초에 너 같은 녀석에게 이 아이를 맡길 바에, 서벌캣에게 던져서 새로운 프렌즈를 만들어주는 게 좋겠어.”

 

마계공작에게 이런 식으로 막 나가는 사람은 없겠지만...그래, 있다면 나 하나 뿐이겠지만,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레프리시아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싸울 준비를 하려고 하고 있었다. 상대도 나도 전력차이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섣부르게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 아스모데우스가 현명하다면 지금은 순순히 물러날 것이다.

 

굳게 다짐한 내 눈을 마주하며 한숨을 내쉰 아스모데우스 옆에,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서 나를 더 기겁하게 만들었다.

 

“아스모데우스 님. 슬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아. 릴리스 미안해. 친절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

 

 

달빛보다 요염한 기다란 은발, 남자가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보라 빛의 눈동자. 그런 릴리스가 내 앞에서 적대하며 아스모데우스에게 곁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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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식스 시즈하다 늦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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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2

436

 

 

 

인간계로 왔다는 증거로는 마나들이 나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 마나와 친화력이 뛰어난 몸이 내 주변으로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하면서, 돌아가는 방법도 듣지 못하고 과거에 온지 대략 1시간정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과거로 간다는 것은 의외로 위화감이 송곳처럼 온 몸을 찌르기 시작하는데, 그건 내가 과거를 섣불리 건드려서 미래를 바꾸면 안 되기 때문인데, 마티가 과거에서 얼마나 많이 고생을 했는지 나도 이제 슬슬 공감하고 있었다.

 

“마계에서 대체 얼마나 못 먹었길래, 빈 그릇이 천장을 받칠 새로운 기둥이 되어버린 거냐?”

 

성장기라고는 하지만 저 어린애의 뱃속에 다 들어갔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대략 50인분을 혼자서 처리하는 모습에 그나마 비상금으로 들고 온 20골드가 전부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어차피 나도 시공간술사라서 레시아 몰래 만든 아공간이 존재하긴 하는데, 거기에는 비상금과 루니아 누나의 폭주에 대비해서 갈아입을 남성용 옷이 있었다.

 

시공간술사는 3개의 시간대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으니, 현재 있던 재화를 과거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좋았다.

 

“배부르냐?”

 

“맛있어. 따듯해. 흐윽…!”

 

너무 맛있어서 우는 거냐. 이 나이에 있던 레프리시아는 얼마나 감수성이 풍부한 거야? 게다가 마나로 눈을 강화해서 상대의 마기를 체크해봐도 터무니 없이 작은 마기였다. 확실히 마계에서 나를 습격할 때도 마법이 아니라 몸을 던져서 습격을 해왔으니까. 마땅한 선생이 없다는 소리가 되겠군.

 

“내 생각으로는 네가 살아가는 것 중에 2가지 방법이 있어.”

 

“2가지?”

 

똘망똘망하게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을 가신 소녀에게 방향성을 제시했다.

 

“하나는 네가 제대로 살 수 있을 때까지 너를 가르칠 스승을 찾는 것. 지금 마계에는 네가 살기에는 너무 잔혹한 세상이야. 그 바보 같은 약육강식에서 어이없이 생명이 사라지는 꼴은 듣기만 해도 끔찍하니까. 두 번째는 너를 보호해줄 사람을 찾는 거야. 보호해줄 사람을 찾는다면 어떻게든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하고, 죽고 죽이는 삶에서 아주 살짝 떨어져서 지낼 수 있어. 어느 하나의 조건이라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꽤나 힘든 일이 되겠지.”

 

“오빠는 못하는 거에요?”

 

“그럼 당연...잠깐? 너 뭐라고?”

 

“오빠는 내 스승이나 보호자가 될 수 없냐고 물었는데...”

 

잠깐이나마 거대한 한숨 패키지가 내 머릿속으로 찾아와서 받아야 했다. 내가 실로 걱정하는 건 지금 레시아가 너무 순진하게 굴고 있다는 점에서, 이걸 바꿔야 할지 말아야 할지 꽤나 큰 고민이었다.

 

“내가 여기에 장기체류라도 가능했으면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나는 언제 어디서든 미래로 갈 수 있는 시간여행자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마족보다 더 잔인한 것은 인간이야. 인간 중에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덜 나쁜 사람하고 또 다른 하나는 무지막지하게 나쁜 사람이지.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은 없어. 좋은 사람이라고 보이는 것은 그만한 메리트가 있기 때문에 본성을 숨기는 거야. 그 좋은 사람도 다른 타인이 봤을 때는 언제든지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단다.”

 

“그럼 오빠는 저에게 무슨 메리트가 있어서 좋게 보이는 거에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말 하나 안지는 건 여전하군.

 

“그렇네. 우선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줄 수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마계가 변해서 인간과 기술협력을 한다거나, 천계에 갑자기 쳐들어가서 휴전을 맺을 수만 있다면, 인간과 마계가 서로 싸우는 일을 멈추고, 마계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겠지. 만약 네가 마왕이 되어서 마계를 바꾸겠다고 할 수도 있잖아? 지금 마계는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어린 레프리시아는 작은 손에 들린 포크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설마 내가 마왕이 되라고 부추긴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만...

 

“지금 마계에 가장 큰 문제점은 마왕이라는 직책이 세습되는 구조라는 거지. 마왕은 인간계에 피해를 주고 용사와 여신이 그 마왕을 죽인다. 그러면 그 마왕의 후손은 인간에 대한 증오를 품고 마왕이 되어 다시 인간계에 피해를 준다.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는 원한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인간이 마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거나. 지금 있는 마왕을 탄핵하고 다른 마왕으로 바꾸거나. 그것뿐이네. 의외로 새로운 사람이 일을 더 잘하거든.”

 

무지한 지도자를 내몰아내고 새로운 지도자가 제대로 이끌어가는 세상에는 미래가 있는 법. 여전히 내 쪽으로 쏟아질 듯한 그릇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어. 카일? 들려?]

 

티아의 텔레파시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시공간술사만 가능한 텔레파시인데. 제대로 작동하려나?]

 

[들리긴 해. 그래서 나는 언제 미래로 갈 수 있는 거야?]

 

[아. 그게 좀 문제가 생겼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에 설마 미래가 바뀌고 있다거나, 모순이 생겨서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건가?

 

[너무 급하게 과거로 보내버리는 바람에,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방법은 카일이 알아서 찾아야 할 것 같아.]

 

티아에게 들은 통보로는 내가 미아가 되어버렸다는 소리였다.

 

[아니. 네가 이쪽으로 와서 현재로 픽업한다는 경우도 있잖아?]

 

[부탁해!]

 

오늘따라 머리가 아파지려고 하는데 기분 탓은 아니겠지? 티아가 나를 이곳에 남겨놓은 이유가 있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는 법. 그렇게 되면 내가 어린 레프리시아를 잠깐이나마 돌봐주면서 현재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보호자나 너의 스승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이제서야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찾았거든.”

 

“이유?”

 

내가 있는 시간대에는 없지만 과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윤회의 조각을 찾아야 한다. 윤회의 조각은 뒤틀린 시간을 원상복구 시켜주는 물품. 혹은 자신에게 찾아온 시공간적 재앙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준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간 축을 원래대로 되돌려주는 물품이니까.

 

“윤회의 조각을 찾기 전까지는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 주기마다 내 신체를 과거로 백업해서 계속 이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 이곳에서 1분 1초라도 늙어서는 안 되니까.

 

“그러면 이제 슬슬 움직이자. 계속 앉아 있다가는 소가 되니까.”

 

“저는 소가 안 되는데요. 오빠.”

 

“그리고 그 오빠소리 하지마. 선생이라고 불러. 안 그래도 세간의 눈이 좋지 않는데 너라도 좀 협력해라.”

 

“알았어요. 선생님...”

 

그럼 이제 누구에게 윤회의 조각을 받아올 수 있을까? 시간의 여신에게 “어. 저 여기 잘못 왔는데 제발 좀 돌려보내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아 그러니? 돈 내놔.”라고 들을 것 같아서 가기가 싫다. 시간은 금이라는 소리가 있지만 그럴 바에는 30초안에 세계가 멸망하는 곳으로 떠나갔으면...

 

어쨌든 잠깐 임시거처로 쓸만한 집이라고 한다면, 인간과 마계 사이에 있는 색욕의 공작의 영지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과거에는 대체 누가 색욕의 공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시무시할 만큼의 마성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가 들었다. 한 번이라도 만나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걸을 정도. 생각을 해보면 이때 용사들도 너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 마을은 격전지가 될 거라 생각했다.

 

아까 어린 레프리시아에게 밥을 먹였던 이 마을이...

 

“그럼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임시 거처라도 만들어야겠군. 현재 색욕의 공작은 아스모데우스인가?”

 

소녀는 여전히 내 바지자락을 붙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해서 나는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산으로 올라가자니 야생동물과 마물들이 들끓고 있어서 그 위치로 잡았는데, 이건 레시아의 훈련을 도와주는 것도 있고 다른 이들이 쉽게 접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내가 보이는 시야에서 활동하는 게 좋을 거다. 인간 마을 하나를 붙잡고 있는 색욕의 공작이 있는 곳은, 의외로 짐승 같은 사람들이 천지에 널려있으니까. 표식을 지닌 마계공작들이 그 성향과 동화하도록 주변을 자연스럽게 물들이는 것.”

 

생각을 해보니 내가 지금 이 모습으로 돌아다닌다면 기록에 너무 자세히 남겠구나.

 

여장은 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남자로 보일 만큼 중성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커다란 붉은 색상의 로브와 머리길이가 어깨까지 오는 블론드 색상의 가발을 착용했다. 변장을 하기 위해 일부는 숨겨놨는데, 확실히 챙겨오는 걸 잘 한 것 같다.

 

“멀리서 볼 때는 꽤나 헷갈리겠지?”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요? 선생님?”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지. 이런 모습이야 말로 상대방을 방심시키기 위함이야.”

 

본심은 과거의 내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있는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업은 시작되었으니까. 지금 당장 이 허름한 집부터 수리하도록 하자.”

 

마침 누군가가 쓰다 버린 듯한 집이 보여서, 조금만 보수를 하고 마법으로 결계를 펼친다면, 생활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레프리시아의 마법 향상을 위해 마법으로 나무를 자르라고 하고, 근력향상을 위해서 직접 도끼로 잘라보라고 시키려고 했지만, 지금은 너무 무리가 있어서 내 옆에 보조역할로 수행하는 것으로 눈감아줬다.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밤에는 레프리시아에게 마법을 알려주는 걸로 하고...외벽을 세웠다면 내부청소를 해야 하지만, 여태까지 잡화점을 청소해오면서 달인의 경지까지 올라가버린 나에겐, 지금 쌓여있는 고물덩어리나 쓰레기 더미는 좌표마법으로 옮기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말하는데, 너 혼자 있을 때는 아스모데우스 앞에서는 절대로 서면 안 된다.”

 

“그건 왜요?”

 

“당연한 걸 내 입에서 나오게 하지 마라. 매료를 당하니까 그렇지! 아직까지는 네 스스로가 자의적으로 풀 수 있는 정신력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해. 수상한 사람이 나쁜지 착한지를 떠나서 이상한 집으로 나도 모르게 따라 들어간다는 거야. 애초에 어린 아이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도 최악이지만...”

 

정신방어가 제대로 되지 않은 레프리시아인 것 같아서 노파심에 말을 해줬다.

 

“조심할게요. 선생님.”

 

또박또박 말을 잘 하는 레프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다만, 계속해서 느끼는 위화감이라고 전해진다면, 현재의 레시아와 여기 과거에 있는 레프리시아의 압도적인 전력차이는 어떻게 된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지금 시간적인 모순을 낳는 결과가 되지 않을지.

 

“제발 내가 돌아갔을 때는 왠 괴물 하나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시간적인 모순이라면 티아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서 해결하도록 하자. 티아도 시공간술사이니까 그 시간대에서도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잠깐 집도 지어서 피곤한 터라 낡은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데, 내 옆에 버젓이 누워서 올려다 보고 있었다. 레프리시아에게 “왜?”라고 물어보자.

 

“아뇨. 왠지 근처에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것도 있고 친숙한 기분이 들어서요.”

 

“마나의 축복을 받은 체질은 그 사람 주변에서 마나가 소용돌이치고 있지. 게다가 나는 마기와 신성력도 담을 수 있는 몸이니까. 마기마저 휘몰아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이곳은 인간계와 마계의 경계선이니까.”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상 부모도 없고 지탱할 사람도 없는 레프리시아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나라서, 지금 이렇게만 옆에 붙어있어도 심리적으로 많은 안정이 되고 있는 거다. 그 결과로는 누워서 2분정도 대화를 이어 나아가려고 했는데 편안하게 자고 있는 레프리시아의 얼굴. 어린 아이가 마계에서 풀이나 먹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하는 모습은 종족을 불문하고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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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1

435

 

뜬금 없지만 옛날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빗살무늬토기는 기원전부터 나타났다고 전해지는데.

그릇 표면에 빗살같이 길게 이어진 무늬가 보여져서 빗살무늬토기라고 한다.

만약 그 빗살무늬토기를 발견하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사역마에게 무기로...!

-월요일이 좋다며 노래 부르고 있던 검은 고양이를 본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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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넷째 주 곧 있으면 파이론 근처에 열려있는 용사들의 연회가 마무리되고, 신성제국인 아우리온 국경 안에 있는 도시 ‘시나론’으로 인구 대이동을 할 준비를 마치고 있을 때. 잡화점에서는 규칙을 깨고 오늘 하루는 오전부터 열어야 했다. 새벽에 깜빡하고 잠이 들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지금 용사들이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많은 물품을 사들이기 시작했으니,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는 지금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자의 비약인 엘릭서부터 끓인 물에 그나마 향을 더해주는 허브까지 팔려나가는 것. 꽉 채워진 잡화점의 제고를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 내 목적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어째서 잡화점을 열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알아냈다. 생각을 해보니 아침에 잡화점 근처로 오는 사람이 전혀 없었으니까.

 

“주인. 그냥 문을 닫는 것이 어떠한가? 파리들만 들어오기 시작한다.”

 

“엘티노스가 낮에만 작동하는 대결계로 만들어놨나?”

 

“그보다 비니스 여신이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충돌시킨다는 물증을 잡아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닌가?”

 

“일단 벌어먹고 살아야죠.”

 

검은 고양이가 빗살무늬토기에 머리가 끼어있는 상태로 앞발을 핥기 위해 들어올렸다가, 천천히 내리고는 나에게 기우뚱한 모습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보다 저 빗살무늬토기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물어본들, 그냥 잡화점 물품에 있어서 이렇게라도 써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마음에...

 

“그런 하찮은 독백이나 할 시간이 있으면, 이거나 벗겨주고 말하거라. 짐이 월요일이 좋다는 노래를 부르자마자 슬램덩크로 짐의 머리에 이상한 거나 꽂아 넣다니?”

 

“빗살무늬토기는 이상한 게 아닙니다. 냥캣. 그건 기원전에서 사람들이 살아온 문화에 관련된...”

 

“시끄럽다! 비둘기!”

 

“올빼미입니다.”

 

하얀 올빼미가 날아오면서 검은 고양이에게 태클을 걸어왔다. 사소한 것만으로도 물과 기름처럼 싸우는 이 앙숙관계도 어느 정도 완화된 것이 이거라니. 어쨌든 지금은 비니스 여신과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떤 범죄자라도 “네. 제가 그랬습니다. 잡아가주세요.”라고 실토하지 않는다.

 

최소한 빠져나갈 구멍 하나라도 만들어서 도망치는 것이 모든 생물의 심리.

 

“그런 틈을 남기지 않고 잡는 것이 중요하지만, 상대는 여신에다가 검은 높새바람이라는 단체가 있다. 잘못하면 모든 이들에게 적이 될 수 있는 이 섬세한 문제는 일이 결국 모두 터져야 움직일지. 초기에 무리를 하더라도 진압을 해야 할지.”

 

“어떻게든 인류의 적이 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섣부르게 여신을 시해하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요. 게다가 그 마신이 하는 말에는 뭔가 꺼림칙한 것이 걸려있으니까요.”

 

뒤에서는 작은 요정날개로 이리저리 활공하고 있는 요정들의 여왕인 티아 메르세데스의 말을 듣고, 차분하게 대답을 하고 있는 나는 단 한가지 의문...잠깐만? 왜 여기 있지?

 

“티아? 언제 온 거야?”

 

“그러니까 짐이 말하지 않았는가. 파리가 들어오니까 문 좀 닫으라고.”

 

검은 고양이는 여전히 머리 위에 있는 빗살무늬토기를 때어내지 못하고 있는 체 투정을 부리고 있을 무렵. 티아가 빗살무늬토기를 쓰고 있는 레시아의 머리를 이리저리 돌면서 환호하고 있었다.

 

“와아! 카일 드디어 시공간마법에 대해 이해력이 높아졌구나! 빗살무늬토기하고 마왕님의 머리를 공간으로 접착시킬 줄이야. 이래서는 물리적으로는 절대로 때어낼 수 없고, 마법적인 면에서는 공간마법만으로는 부족하지. 왜냐하면 공간마법으로 억지로 때어내도 그 시간으로 다시 돌려보내기 때문이니까.”

 

“요정전쟁<Fairy War>에서는 이기고 왔나 보네. 그나저나 너무 오래 걸린 거 아냐?”

 

“곰돌이 인형을 잔뜩 얻고 백장미까지 얻었거든.”

 

그래 테디 베어로 시작된 페어리 워에 전리품으로 백장미라는 기묘한 잡지까지 얻었다고? 요즘 백장미가 너무 많이 퍼지고 있는 것 같은데? 뭐 그 바보 같은 잡지는 내가 거론하는 일은 없으니까 다른 이야기로 하도록 하자.

 

“그래도 카일은 비니스 여신에 대해 너무 매정한 거 아냐? 비니스 여신은 카일을 한번 살려준 여신이라고? 아니면 카일은 남의 말만 듣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슬슬 카일도 성장을 많이 했는데, 한 번쯤은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른 관점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 말만 쉬운 거지. 아이디어가 없으면 그거 나름대로 골치가 아픈 건데. 그러니까 지금 잡화점 아공간에서 노래연습하고 있는 엘티노스나, 느닷없이 내 꿈에서 기타를 내려찍는 마신 아르트리옴의 주장을 모두 뒤로 날려버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생각이란 건가?

 

“그냥 쉬고 싶은데.”

 

“...카일?”

 

아니 솔직히 이런 일은 정말 용사들이나 영웅들이 해야지. 잡화점에서 그냥 물품을 팔아야 하는 상인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냐는 그런 지극히 정상적인 관점으로 말했는데. 티아가 엄청나게 경멸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손바닥만한 작은 체구에서 어마어마하게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나는 잠깐 움츠리기 시작했고, 티아는 목소리를 높여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만들어줬다.

 

“과거로 간다는 생각은 해본 거야?”

 

“과거를 돌아가려면 드로리안이 필요하지 않나? 괜히 과거로 가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말이지?”

 

“괜찮아. 어차피 조금만 보고 오는 건데. 시험 삼아 과거로 한번 다녀와볼래?”

 

나보다 더 뛰어난 시공간술사인 티아가 이렇게 말한다면 시도할 가치는 있다. 과거로 가서 방관자 놀이나 하면 되는 일이니까. 생각을 길게 잡을 필요 없이 비니스가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만 알아내면 된다.

 

“좋아. 우선 예행연습을 할 겸 시험 삼아 과거로 갈게. 그래서 얼마나 걸려? 티아?”

 

“지금.”

 

지금?

 

***

 

과거로 간다는 건 나 혼자뿐이라는 말을 왜 하지 않은 걸까? 게다가 장소도 마기가 한 가득 모여있는 마계라서 마기를 마나로 정제하려고 했는데, 지금쯤이면 레시아와 시나의 페어링이 전부 일시적인 차단 되었으니까. 정제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독자적인 마법으로만 살아야 하는 건가? 페어링은 끊어져도 체질이 바뀌는 경우는 없으니 마기를 다행히 담을 수 있구나.”

 

과거 마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주변을 둘러봐도 갈라진 대지와 생명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허허벌판에 태양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검은 구름들. 이런 곳에서는 약자들이 먹히고 강자들만 살아남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곳에서 살아남는 자체가 강자니까.

 

“인, 인간!”

 

아무리 과거라고 해도 레시아가 집권하는 마계가 아니니까.

 

“그 피와 살을 나에게 받쳐라!”

 

아마 이게 당연하겠지. 날아오고 있는 작은 생명체라고 해도 마족은 마족이니 적당히 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마기로 이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없으니까. 그냥 평소에 마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써볼까?

 

“방패.”

 

-파아앙!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지만 검은 방패에 막혀버리는 바람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정지된 체 어마어마한 고통을 감내하려는 듯 천천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마기로 응용하는 마법에도 기본적으로는 방패나 화살은 사용할 수 있다는 실험을 성공했지만, 천천히 흐느끼기 시작하던 습격자는 이내 어마어마한 울음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먹이가 날 때렸어!”

 

마계에서는 인간=먹이감이라는 공식이 있지만, 공식은 늘 깨지라고 있는 법이지. 어린 소녀의 목소리로 울고 있었으니 어른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그리 좋지 않았다. 물론 지금 저 아이가 나보다 더 오래 살았을 지도 모르겠으나, 겉모습으로는 얼마든지 어른처럼 보여야 하는 법.

 

“자. 날 건들인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주지.”

 

어른답게 어린 아이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하는데...

잠깐? 이 소녀 낯이 좀 익다?

 

“엄마! 아빠! 살려주세요! 못된 인간이 저를 먹으려고 해요!”

 

“인간은 마족을 먹지 않아! 어째서 식인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인간에게 엉망진창으로...!”

 

“거기까지 해! 그보다 이름이 뭐지?”

 

마족중에서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한 사람은 딱 한 명밖에 모르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걸어보니 대답은...

 

“레, 레프리시아. 인데요?”

 

얼마나 과거로 날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다행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60년 내외로 이동한 것과, 아직 마계가 통합되기 전이니까 마계공작들이나 마왕이 모두 사나울 시기였다. 덤으로 인간계로 침입하는 마족들은 너무 제각각 놀고 있으니까. 천계에서 파견 나온 발키리와 심판자. 그리고 갯지렁이 수보다 더 많은 용사들에게 토벌 당하고 있는 시기인가.

 

“그렇군. 레프리시아라. 이제 최후를 맞이할 준비는 됐겠지?”

 

“히끅! 사...살려주세...”

 

평상시에 레시아에게 하도 당하고 살아서 그런가. 본심이 아닌 말이 튀어나왔지만 평상시의 내 분위기로 인해 잔뜩 겁먹고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아하니, 빠른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농담이야. 그보다 여기는 마계 맞지?”

 

“그런데요? 누, 누구시죠?”

 

“나는 미래에서 온 T-800이라고 한다. 아니, 그냥 존 스미스라고 하는 게 더 좋은가? 뭐 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확실할 정도로 알 필요는 없어. 그냥 나는 아주 잠깐 이곳에 놀러 온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너에게는 우선 기억소거부터 시작하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보고 있지만, 기억소거 마법은 내가 사용할 수 없으니 물리적으로 뇌에 충격을 가한다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아픈 건 싫어요!”

 

작은 몸으로도 최소한의 저항을 하고 있는 레프리시아에게 죽지 않고 단기기억을 만들 정도의 힘 조절을 할 수 있을 지가 더 문제인데. 게다가 어린애가 기본적으로 하지 말라고 부탁을 하면 들어주는 것이 인간적인 모습이다.

 

“대신 나와 만난 것은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그러면 나는 다른 곳에 가볼 테니까. 너는 알아서 잘 살도록 해.”

 

그런데 나는 언제 현재로 다시 되돌아가지?

이 허허벌판을 그냥 돌아다니면 위험한 일인데.

 

“이런 우울한 곳에서 살 수 있다는 자체가 기묘하네. 옆에는 그 흔하다는 슬라임마저 살기 힘들다니.”

 

“슬라임은 없고 마족들은 많은데.”

 

“넌 대체 뭘 먹고 사는 거냐?”

 

“가끔 자라난 풀이라던가...마기를 흡수하고 사는데...”

 

정상적인 요리는 먹지 못하고 사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마계에서는 요리를 할만한 곳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인간계로 나아가야 할 것 같은데.

 

“이 근방에 인간계로 갈 수 있는 장소가 어디 있지? 그 나이에 자라난 풀이나 먹고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우선 제대로 된 먹거리라도 먹여야겠네.”

 

“하지만, 마족은 지금 인간의 최대의 적인데...”

 

“그런 인간에게 꼭 붙어있는 이유는 뭔데?”

 

어린 레프리시아는 내 바지자락을 붙잡고 가만히 입을 열지 않았다. 나도 지금 마족에게 있어선 최대의 적인 인간이니까. 하지만 레프리시아는 나에게 되묻기 시작했다.

 

“그럼 어째서 저에게 음식을 먹여주려고 하는 거죠?”

 

“어리잖아.”

 

“이상한 인간...”

 

아마 지금 시간대라면 데모르테가 자신의 남편을 죽이고 여신으로 올라갔을 무렵이니. 레프리시아 홀로 마계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시간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혀 이야기 해주지 않았는데...

 

설마 내가 개입되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내 본명은 이야기 하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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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48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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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쓰는 단편선

사랑 쓰레기통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다. 끝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것에 한계가 존재한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눈앞의 A를 보았다. 무어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목에 핏대까지 세웠다.

“아니 그래서 말이야. 그 부장 놈이.”

오늘도 같은 하루의 연속이다. 어김없이 만나봐야 불평이나 듣는 처지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턱을 괴고 A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한 시간? 두 시간? 얼마나 또 들어야 하는 걸까? 아니 그전에 내가 이런 얘기를 왜 들어야 하는 걸까?

“내 말 듣고 있어?”

A가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다. 물론 듣고 있다. 하지만 좀처럼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A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일방통행인 대화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대화라는 것은 본래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이지 않나? 아니 적어도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건 대화라고 볼 수 없다. 그저 지껄이는 말에 불과하다. A가 내뱉는 말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가시가 박히듯이 내 몸을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점점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A가 말하면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이건 대화가 아니었다. 대화라기보다 파블로프의 개 같은 거다. 그래. 개 같은 경우다.

“정말 회사 다니는 것도 그렇고 힘들어 죽겠다니까. 매일 부장 놈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난리지. 선배 놈은 뭐든 안하고 넘기려고만 하지.”

A는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그 이후에 나올 얘기는 안 봐도 뻔했다. 동기 놈들은 아부나 하고 힘든 일은 자기한테 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내기를 해도 좋다. 아니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질 것이다.

“그리고 동기 놈들은 맨날 아부만 한다니까? 짜증나 죽겠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다를 바 없었다. 언제나 같은 불평이었다.

“그러면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때? 그렇게까지 힘들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A의 미간이 좁아졌다. 목에 핏줄을 내세우며 이를 갈았다. 잡아먹을 듯이 내게 다가왔다.

“장난해? 요즘 세상에 취직하기 얼마나 힘든데. 알잖아? 지금 이 회사 들어오려고 하는데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미안.”

고개를 숙였다. 뭐가 미안한지 왜 고개를 숙이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숙였다. 이제는 습관처럼 고개가 내려갔다. 내가 무어를 잘 못했고 무어가 문제인지는 상관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인과관계와는 상관없이 나의 고개를 저절로 내려가야 했다. A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오늘도 자동으로 내려갔다.

힘든 것은 이해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사회생활이라는 게 쉬운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그 속에 있는 사람 관계란 늘 힘든 법이다. 때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일을 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개자식들과 함께 살아가야하는 법이다. 이해되었다. 충분히 힘들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 건 아니다.

“아아. 짜증나 죽겠네.”

A가 또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또 불만 사항들을 얘기하려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어째서 그걸 나에게 푸는 건가? 그 점에 관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나에게 말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아무리 이 자리에서 들어준다 한들 해결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 악화만 될 것이다. 원래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썩어가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가장 좋은 해결법은 문제가 되는 사람과 얘기를 해보던가 아니면 스스로 나서서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애초에 A는 내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고민을 털어놓는 것도 충고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화풀이 대상이 필요할 뿐이다. 자신의 감정을 뱉을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아니. 그리고 오늘 또 무슨 일이 있었냐면.”

A에게는 문제 해결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불만만 가득할 뿐이다. 이렇게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비록 오늘 기분이 좋아진다 고해도 내일 또 다시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그리고 난 또 그 이야기를 듣고 있겠지.

A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무슨 얘기를 하는 지 뻔했다. 의자에 기대어 A를 보았다. 무어를 저리 열심히 얘기하는지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선배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

“그게 다 내 잘못이라는 거 있지? 참 어이가 없어서. 일은 지가 벌려놓고 책임은 나보고 지라는 거야 뭐야?”

“응.”

어렸을 때 우리 집에 고장 난 라디오가 있었다. 테이프를 넣으면 맨날 같은 구간만 반복되는 바보 같은 라디오였다. 그 라디오 이런 기분이었을까? 바보 같다.

“너무하네.”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하네. 어쩌면 지금 내가 A에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A는 그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목청을 키웠다.

“그치?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그 사람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렇게 오늘도 A의 투덜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만나지도 않았는데 기운이 쏙 빠졌다. 어찌된 게 만나기 전보다 더 피곤했다. 그런 나와 달리 A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이 신경에 거슬렸다.

“아~ 그래도 말하고 나니까 속 시원하네.”

해맑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A를 쳐다보았다. 그렇구나. 너는 상쾌하구나. 나는 최악인데.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이런 생활을 반복하는 걸까? 처음에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연인의 힘든 점을 들어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있잖아. 넌 내 생활은 궁금하지 않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라?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세 시간이었다. 무려 세 시간을 얘기하고 나왔다. 그 시간 동안 질리도록 떠들면서 나에 과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의 하루가 어땠는지, 힘든 것은 어땠는지 단 한마디도! 오직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A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째서 모르는 걸까? 하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하도 힘드신 양반이니 그럴 만도 하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감도 잡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힘들고 인생 사는 게 힘들어서 나 따윈 신경 쓰지 못하니까.

“내가 직장에서 어땠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그런 거 궁금하지 않아?”

“뭐야? 갑자기 왜 그래?”

A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띵하고 머리가 울렸다. 뒷골이 당겨오면서 온 몸의 피가 머리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넌 말이야. 항상 너 힘든 것만 말하잖아. 그걸 듣는 내가 어떨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쩌면 한계가 온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언제까지 이런 것이 지속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터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나도 몰랐다.

“오늘따라 왜 그래?”

A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게 나에게 온갖 불평불만을 하면서도 내 얘기는 듣고 싶지 않구나. 정작 나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구나. 웃음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입에서 후후하고 웃음소리가 계속 새어나왔다. 바보 같다. 이런 사람을 연인이라고 사귀고 있었다니…….

“오늘따라? 그렇구나. 너에게는 오늘따라 그렇겠지. 그런데 생각해봐. 언제 한번이라도 나한테 힘든 일 있냐고 물어본 적 있어? 늘 그랬어. 넌 항상 너 힘든 것만 말해왔지 내게 관심 따윈 없었어.”

한번 터진 말들은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점점 목청이 올라갔다. 이를 악물고 A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참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듣고 A가 발끈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내게 다가왔다. 얼굴을 들이밀고 다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연인사이면 그 정도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면 뭐 그런 거 얘기했다고 기분 나쁘다는 거야?”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모르고 있구나. 아니 알려고 하지 않구나. 사실 마음 한구석으로 알아차려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A에게 나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A의 투정을 듣는 나날이 그저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 힘든 일이 있으면 애기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런 걸로 화를 내고 그래? 오히려 연인이면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발악을 하는 A를 보자 정이 뚝 떨어져 나갔다. A에게 나는 무엇인걸까? 사랑하는 연인? 감정을 버리는 쓰레기통?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 그렇구나. 당연한 거구나.”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앞으로의 미래. 지금보다도 힘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회사에 입사하고 난 뒤 고통 따윈 앞으로의 일에 비하면 작은 티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내 모습이 보였다. 한숨을 내쉬며 A의 이야기를 듣는 내 모습. 어쩔 수 없이 맞장구나 치는 내 모습. 정작 나 힘든 건 하나도 말 못하는 내 모습. 그런 바보 같은 모습만 눈앞에 그려졌다.

“우리 헤어지자.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

눈을 뜨고 A를 밀어냈다. 가로등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지겨웠다. 씨익거리는 숨소리도 모든 것이 지겹다.

발걸음을 옮겼다. A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다. 더 이상 A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자, 잠깐. 헤어지자니? 너무한 거 아니야? 겨우 불평 좀 했다고 이러는 거야? 나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A가 내 앞으로 달려왔다. 양 손을 크게 펼치고는 내 앞길을 막았다. 그런 A를 지나가려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A가 나를 놔주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A의 어깨를 붙잡았다.

“겨우 불평? 넌 정말 너 밖에 모르는구나.”

A를 밀어냈다. 아까와는 다르게 세게 밀었다. 덕분에 A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랑? 넌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니? 지난 몇 개월 동안 단 한번이라도 달랐던 적이 있니? 전화를 해도, 만나서 얘기를 해도 힘들다는 말만 하고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잖아. 매일 사람 기운이나 빼놓고. 게다가 무슨 얘기만 하면 뭘 아냐고 소리치고. 너는 양심도 없니?”

A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난 네 감정을 담는 쓰레기통이 아니야. 그럴 거면 집에 가서 인형이랑 얘기해.”

발걸음을 옮기자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너무했나한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먼 미래, 한숨을 내쉬는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A의 곁을 지나갔다. 길을 걸어갈수록 A의 울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리고 어느 샌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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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

기름막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내 존재의 의미가 그의 감상에 대한 리액션을 위한 것인 듯 대하곤 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풍부한 표현력과 넓은 배경지식을 가졌었고 그것들을 늘어놓으며 나를 가르치길 좋아했다.

'세상에 너 같은 감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어쩜 그런 방식으로 관찰하는 창의적인 생각을...!'

 이런 반응 몇 가지면 몇 시간이라도 떠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도 내가 감탄할 때마다 그가 더 흥이 올라 얘기하는 모양이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대화의 흐름은 나에게 공허함만 가져다 주었다. 킬링타임용 영화를 보아도, 맛있는 케이크를 먹어도, 뜬금없이 귀여운 모양의 구름을 보아도 나의 생각, 나의 기분, 나의 상태는 없었다. 오직 그의 생각, 그의 기분, 그의 상태만 입혀져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우리'는 없고 그의 껍데기를 덮어쓴 나만 있었다. 기름막으로 둘러싸인 물방울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막의 빈틈으로 수분이 새어나가 쭈글쭈글한 기름막만 남게 되어 불쾌함이 되었다.

 누군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다. 나는 빠르게 적응했고 아무렇지 않았다. 늘 있는 불행에 슬퍼하는 것은 나를 파먹는 짓이라고 어리석은 합리화를 반복하며 나를 곪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영화를 보고 나와 영화가 어땠는지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특히 신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항상 기회를 뺏겼던 첫 감상을 드러낼 수 있었기에 그에 충실하게, 하지만 적당히 절제된 내용으로 답했다. (그의 감상이 나와 같다면 그가 말할 내용을 남겨두려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던 그가 불쑥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당신 얘기만 해요?"

 

기분이 크게 나쁘진 않았다. 불쾌함의 역치가 한껏 높아져 있었기에 별다른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생각이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이런 대화를 해선 안된다.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그를 그만 보는 것.

이 간단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너무 많이 돌아온 느낌이었다. 돌고 돌다 너덜해진 감정은 슬퍼할 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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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7 - 9

434

 

 

 

느긋하게 자고 있을 상황이 아니지만 춘곤증이 몰려와서 쓰러진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 점심을 먹었으니 식곤증이라고 해야 할까? 아까 전에 아이니스에게 태클을 거는 바람에 체력이 소모가 되어서 그런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보금자리는 결국 의자에 앉아서 자는 걸로 해결해야 했다. 우선 4시간이나 5시간만자고 일어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니, 낮잠을 1시간이나 2시간정도 자고 일어나면 그나마 피로가 풀린다. 책상 위에서 베니를 베개로 삼아 자고 있을 때.

 

“Beep! Beep! 난 양이얌!”

 

6번째양이 내 앞에서 리듬을 타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생각을 좀 해보니 이 꿈은 분명 내가 꾸는 꿈이 아닐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양이 노래나 부르는 꿈을 꾸겠나?

 

“어이 6번째양. 너는 대체 왜 나타나는 거야?

 

“메에~”

 

“아까 잘만 말했잖아! 여기서 이상하게 돌려 말하지 말라고!”

 

다시 동물의 울음소리로 돌아가버린 6번째 양에게 소리를 쳐도, 돌아오는 것은 다시 푸른 초원에서 맞이하는 허무함. 여전히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는 양 때를 보면서 나는 다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레시아는 어째서 나를 늑대라고 표현을 한 것인가?

 

“내가 늑대였다면 이곳에 있는 양이 전부 도망갔겠지. 양치기를 잘못 말하는 거 아냐?”

 

“양치기라. 그래도 카일 군에게는 그게 잘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지.”

 

하긴 내가 잡화점을 운영하는 사람인데.

 

“근데 누구세요?”

 

회색 후드티를 입고 있는 남성이 느닷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거만하게 주머니 속으로 양손을 집어넣어 내려다보고 있더니, 느닷없이 기타를 들어올리면서 나에게 외쳤다.

 

“모두 준비 됐습니까!”

 

-콰지직!

 

내 얼굴에 급속도로 내려가는 기타를 피해 옆으로 구르면서, 처참하게 부셔진 기타 조각들을 보고 조금만 늦게 피했다면, 내 머리마저 산산조각 나서 같이 터져나갔으리라. 한번에 인간에서 시체로 변할 뻔한 나는 정체도 모르는 남자에게 소리질렀다.

 

“대체 무슨 짓이에요!”

 

“내 귀여운 여동생인 아리엘을 너 같은 녀석에게 넘겨줄 수 없다!”

 

“아리엘이 거기서 왜 나와! 그만하라고! 기타는 이미 내구도가 0이란 말이에요!”

 

이것은 분명 내 꿈이 아니라 누군가로 인해 이곳으로 끌려온 것뿐이라고 생각하자니, 지금 당장이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티르빙을 무기로 변환시켰다. 내 앞에 있는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렇군. 설마 설마 했는데 말이야.”라고 중얼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정말 하늘이 무심하기도 하지? 어째서 네가 무기를 뽑을 수 있을까?”

 

“그야 살기 위해서 무기를 뽑은 게 맞잖아요? 꿈속에서도 죽임을 당할 바에 차라리 죽이고 상쾌하게 깨어나는 것이.”

 

“아니. 그게 아니라. 어째서 너는 꿈속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냐는 거야.”

 

꿈속에서 마법을 왜 사용할 수 있냐고? 그야 당연히 꿈속에서 마법을 사용하겠다고 간절히 소원을 빌면 우주에서 마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나?

 

“아리엘은 몽마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체내에서 마나를 직접 생성해서 사용할 수 있는 특이체질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런 아리엘도 꿈속에서는 정기를 사용해서 공상을 구현하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너는 유독 이 장소로 출현을 자주하는데 이곳이 정확하게 뭐 하는 곳인지 알기나 하고 오는 거야?”

 

6번째 양의 서커스를 보러 오는 공간이 아닌 건가?

 

“그보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아리엘에 대해 어떻게 아느냐는 건데요? 설마 당신이 마신 아르트리옴이에요?”

 

“그래. 내가 바로 아리엘의 오라버니인 아르트리옴이야. 그러니 나는 너에게 내 여동생은 줄 수 없는데?”

 

“여동생이라니? 아리엘이 그 소리 할 때마다 걷어차려고 하지 않아요?”

 

“본 적 있는 거야?”

 

자칭 오라버니라는 녀석인가?

그 애도 무시무시하네. 마신을 자신의 포로로 둘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무튼 이 공간은 대체 어떤 공간이길래 저기 있는 기타 파괴자가 나에게 화를 내는 걸까.

 

“이곳은 보통 인간이 올 수 없는 공간이야. 릴리스와 함께 이곳을 내가 만들었으니까. 차기에 신에게 부름을 받는 아이들이 이곳에 찾아와서 맹약을 나누는 공간이지. 저기 있는 6번째 양은 대체 왜 있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저기 있는 6번째 양은 그냥 있다는 걸로...

 

“그럼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맹약을?”

 

“응~ 아니야~”

 

마신 아르트리옴은 느긋하게 내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아 그럼 왜 내가 여기에 계속 왔었냐고! 저기 있는 6번째 양이 날 꼬드긴 것도 아니잖아!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아르트리옴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대체 그 많은 여자들을 다 거느리고도 뭐가 부족해서 맹약까지 받으려고 하냐? 사기캐릭터가 될 거냐? 이 녀석이 평상시에 엘티노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더니 언제나 비어있고 공허한 척을 하네. 너만 힘의 균형이 필요 없어?”

 

“아니. 힘의 균형이 필요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상상하는 것이 무궁무진하잖아요? 이해를 좀 해줘야 하지 않아요?”

 

아르트리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뭐 됐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라고 한 뒤에, 본론으로 넘어가려는 건지 헛기침을 하고는 나에게 말했다.

 

“한가지 확실하게 해둘까? 지금 엘티노스는 너와 같이 있는 거지? 지금 잡화점에 있는 아공간에서 말이야.”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이면 너에게 엘티노스의 봉인을 빨리 풀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싶군. 천계 쪽에 상황이 좀 급격하게 변하면서 아슬아슬할 것 같거든.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천계에 있는 어릿광대가 들킬 것 같아. 지금 비니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서 말이지.”

 

“비니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요?”

 

그리고 내 귀에 천천히 속삭이는 아르트리옴.

그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아무래도 비니스가 천계의 1인자가 된 것 같다. 비공식적이긴 하지.”

 

비니스가 천계의 1인자가 된 소식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었지만, 어째서 비공식적이라는 말이 나타났는지 의문일 뿐. 머릿속에서 질문할 것이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우리스 여신이 무슨 수로 비니스 여신에게 1인자를?”

 

“그거야 당연히 신도들의 인지도지.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아우리스 교가 대부분이라고 하지만 그건 공식적인 지표일 뿐이고. 실제로는 검은 높새바람이 공작을 한 것이 좀 많은지 대부분은 비니스를 믿고 있거든. 엘티노스가 창설한 검은 산들바람도 비니스 여신의 명령으로 창설한 거였는데, 필요가 없어진 것을 알고 해체시켰잖아?”

 

“그건 들었는데. 그게 왜?”

 

“이런? 평상시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더니 지금은 뉴런이 다 끊어졌나? 왜 이렇게 이해를 못하지? 어쨌든 엘티노스가 검은 산들바람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비니스의 입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엘티노스가 빠른 시일 내로 해체한 것뿐이야. 지상의 인간들이 비니스를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비니스가 꾸미려는 짓을 알아차렸으니까.”

 

“역시 비니스가 악신인 거죠?”

 

“아니. 비니스는 ‘전’악신이지. 지금은 악신을 부르려고 하는 것뿐.”

 

여전히 모르겠다.

 

“애초에 마신과 악신은 서로 부부라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건 인간들이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지만, 사실 연인에 가까울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나갔어. 다만, 비니스가 용사를 보고 “내 취향이야! 악신은 이제 그만둬야지!”라고 바람을 피기 전까진 말이지. 그 이후로 악신의 자리는 지금까지 공석.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것이 딱 한가지 있어.”

 

항상 생각을 하는 거지만, 신과 여신의 뇌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고 싶다. 용사가 자신의 취향이라고 악신을 그만두고 생명의 여신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소리잖아. 물론 인간계에서 몰래 내려와서 사람들 사이에 질병을 치료해주는 등. 여러 가지 좋은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데 악신은 지금도 안 나오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아리엘이 소환된 것일 수도 있어. 맹약에 따라 마신의 피를 이어받아서 아리엘은 여신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거든. 그 와중에 켈모리아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마족으로 변해서 그 기간이 연장한 것뿐이지. 악신의 자리는 아리엘이 예약한 사실은 변함이 없어. 사실상 몬스터가 배회하는 숲에서 고블린들에게 무참히 난도질을 당해 죽을 운명이었는데. 이상하게 꼬이더라고?”

 

아르트리옴의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라는 성취감보다는 분노가 머릿속에 가득했다.

 

“애가 죽지 않았는데 뭐가 그렇게 아쉬워!”

 

“그렇게 화내지마. 아리엘이 내 아내로 올 수 있는 시기가 연장이 되어서 슬퍼하는 이유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니까. 아리엘은 다른 세계에서 제물로 받쳐지는 운명이란 건 알고 있지? 영겁의 노래를 조사했으면 알 수 있으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설마?”

 

영겁의 노래가 다른 세계로 날아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영겁의 노래와 계약을 맺은 아리엘이 이곳으로 왔으니까. 조만간 세계가 겹치는 재앙이 펼쳐진다는 소리인가?

 

“너는 다른 세계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적대적일까? 우호적일까? 애초에 아리엘이 넘어온 것도. 영겁의 노래가 넘어간 것도. 비니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실험 같은 거야. 이 세계는 균형이 일정해서 평화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로 평화롭기 때문에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쳐지고 있어.”

 

아르트리옴은 자신의 오른손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면서 한탄해 하듯 계속 말을 이어나갈 때. 푸른 초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나를 조용히 지나갔다.

 

“게다가 마왕이 하필 그 모양이어서 투쟁의 시기는 없어지고, 강력한 적의 세력을 만들자는 비니스의 계략은 너희들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지. 보통은 아무것도 몰랐다가 사건이 터진 뒤에 뒤늦게 움직여서 겨우겨우 회복을 하는 것이 히어로의 일이지만, 너희들의 경우에는 초기 조치가 너무 확실하게 잘 해서 그런지. 악당이 비밀병기의 설계도를 만들기도 전에 해치워버린 기분이야. 당연하게도 너희들을 제대로 조율하고 있던 엘티노스가 일을 잘한 경우도 있지.”

 

어째서 비니스는 투쟁을 바라는 걸까?

그 답은 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평화가 계속 유지되면 신들의 존재가 잊혀지기 때문이겠네요?”

 

“정답.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힘들 때만 의지할 곳을 찾지. 그 대상은 작은 동물부터 위대한 창조신까지 모두. 천계에서 신과 여신이 인간에게 그렇게 눈독을 들이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용사에게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때마다 강해지는 특성은 신들에게 전수받은 능력이기 때문이야. 비록 나는 마신이라서 음험한 오컬트 무리들이나, 시체협회라는 네크로멘서들의 협회에게 힘을 받는 터라 약한 편이지만. 생명의 여신과 최초의 여신은 인기가 높거든.”

 

결국 비니스는 더 많은 힘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세계를 이곳으로 전이시킬 생각인가보다.

 

“그럼 전이에 대해 혼란이 생길 경우. 용의자들은 누가 되는 거죠?”

 

“당연히 너와 켈모리아가 되겠지. 시공간능력을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은 너희 둘밖에 없으니까. 여신들이 너희 두 명을 지목하면 광신도들이 좋다고 뛰어올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이 필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까지 올 수 있으니까. 힘내라고?”

 

 

아르트리옴의 말을 끝까지 들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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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은 하고 싶고...

써주지는 않고...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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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

그저 그런 남자

 그는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남자이다. 그저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게 그 흔한 여자 친구도 없고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집에 계신 그의 어머니와 몇 안 되는 친구들뿐이다. 다니는 곳도 그저 그런 직장과 집, 기껏해야 단골 호프집. 난 언제나 그와 함께해야 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는 나를 통해 세상을 본다. 고로 나도 그가 보는 세상을 본다. 아무것도 왜곡시키지 않고 그저 그가 좀 더 편하게, 세세하게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사실 이런 그의 안경인 나도 그저 그런 안경이다. 굳이 특이점을 꼽자면 그의 코는 낮은 편이어서 내가 콧등을 타고 흐를 때마다 왼손잡이인 그가 왼손으로 나를 고쳐 매 왼쪽 다리의 칠이 좀 벗겨졌다. 이런 모습으로 그와 같이 그저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나는 항상 불만이었다. 


 오늘도 야근에 피곤한 눈을 꿈뻑이며 그는 버스를 탔다. 그가 꾸벅대며 조는 탓에 난 그의 무릎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그것밖에 볼 수 없었다. 역시나 무료한 날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일어섰다. 창밖을 보진 못했지만 안내방송을 들었지 싶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뻗은 손을 걷으려는 찰나. 


 아. 그가 고꾸라졌다. 


 졸다 일어나 몽롱한 정신에 그만 발을 헛디뎠다. 나 또한 콧등에서 미끄러졌다. 나를 고쳐 쓰고 걷는 그의 걸음걸이는 영 정상이 아니다. 그는 절뚝대는 오른쪽 다리를 끌고 택시를 탔다. 다친 것은 안쓰럽지만 하루가 길어진 탓에 나는 내심 신이 났다. 택시 안에서 그는 연신 양쪽 창을 번갈아 보았다.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길인 탓이다. 

 

 곧 응급실로 들어가 접수를 했다. 이름도 쓰고 주소도 쓰고 주민등록번호도 썼다. 5번 침대에 배정받아 간신히 몸을 뉘었다. 병원 천장은 참 하얗다. 불은 참 밝다. 그리고 그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귀여운 여자아이가 보였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두툼한 패딩 점퍼.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붙어 앉아 조잘거리고 있었다. 들리지는 않지만 바삐 움직이는 입술 모양새가 꽤 시끄러웠다. 

 그때 간호사가 와서 뭐라 묻기 시작했다. 그도 대답을 했고 간호사는 이내 다시 건너편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그는 간호사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간호사가 돌아간 모퉁이를 보고 있었다. 

 난 아이가 보고 싶었다. 그 정도 어린아이는 자주 볼 수 있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의 손의 반도 안 되는 손으로 침대 난간을 잡고 꼼작거리는 모습을 또 보고 싶었다. 난 그가 보는 것만 봐야 하는 내 신세가 원망스러웠고, 단 한 번이라도 내 의견을 묻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는 것 같다. 그때 다시 아까 그 간호사가 보였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다 접질린 다리 때문인지 움찔하였고, 간호사가 등을 받쳐주었다. 나는 살짝 밀려 올라갔다. 게다가 살짝 떨리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은 그가 샤워를 하고 몸을 닦고 나와 나를 쓰고 거울을 볼 때이다. 그때 본 그의 얼굴에 지금의 안면근육 움직임을 더해 상상해보자니 상상으로 밖에 접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다 간호사 옆의 의사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난 다시 콧등을 타고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간호사가 뻔지르르하게 생긴 의사와 함께 온 것이다. 키는 그보다 훤칠하고 코도 높은 것 같고, 안경은 쓰지 않았다. 의사를 한번 훑는가 싶더니 이윽고 다시 간호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의사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도 간호사만 보았다.

 한낱 안경인 내가 봐도 그는 간호사의 맘에 들지 못할 것 같다.

간호사도 썩 예쁘장한 얼굴은 아니지만 생글생글 웃는 게 호감 형이다. 그는 그저 그런, 어쩌면 그저 그렇지도 못한 남자이고, 차라리 저 뺀질이 의사 쪽이 더 어울릴 것이다.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린 모양이 꼭 바람둥이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뭐 어떠랴. 의사는 다른 간호사를 불러 뭔가를 지시하더니 생글생글 간호사와 가버렸다. 두 번째로 온 간호사가 그의 다리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다시 천장을 보기 시작했다.

 

 치료를 마친 그는 다시 택시를 타고 집 앞 골목길 입구에서 내렸다. 늘 다니는 길이었다. 2분이면 집에 도착해 늘 보던 어머니를 마주할 것이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가로등 불빛은 노을을 흉내 낸 것만 같았다. 노을이 지고 덮치는 어둠처럼 그의 그림자도 바닥을 드리웠다. 

 

 그는 아마 아까 의사가 수고했다는 의미로 두드린 간호사의 어깻죽지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