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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9

488

 

 

 

우리가 찾으려고 하면 불쑥 찾아와서 어처구니 없이 충격적인 말만 내뱉은 어릿광대의 행동이라면, 평소처럼 나에게 들러붙으려고 하는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릿광대가 다가가기도 전에, 레시아가 분노로 터지기 직전이었기에 추가적인 정보를 듣지 못하고 새벽이 넘어가버렸고, 그런 레시아를 달래기 위해 레시아가 잠드는 동안, 어마어마한 투정과 응석을 받아줘야만 했다.

 

그 결과가 지금 내 모습일까?

같은 이불 속에서 꿈지럭거리고 있는 레시아가 검은 고양이가 아닌, 인간형의 모습으로 내 옆에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편하게 숙면하기 위한 나의 계획이라면, 한풀이건 뭐던 일단 다 받아주고 자연스럽게 마왕성으로 보내는 거였는데...

 

10대 중반의 외형을 지닌 레시아.

카리스마보다는 거만함이 느껴지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에서는 그 거만함마저 귀여움으로 환원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이미지를 가진 여자애가 마왕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대략 60년정도는 살아왔다.

 

“선생님...가지...마세요...”

 

여전히 이별의 순간만큼은 잠꼬대로 기억을 하고 있는 모습에 애처롭기까지 보였는데, 만일 자신의 스승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괴물 같은 천재적인 녀석들 밖에 없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자신을 잠시나마 이끌어준 스승을 기억한다. 보통은 자신의 부모님이 되어야겠지만...

 

그나저나...

분명 잘 때 고양이 모습이었는데?

기묘하군.

 

“어라? 주인. 벌써 일어나는 건가? 아직도 해가 중천이니 조금 더 눈을 붙이는 것을 요구하노라.”

 

“왜 제가 더 자야 하는 거에요.”

 

“주인은 신부이니까. 짐의 아침키스로 일어나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거다.”

 

“뭐가 당연해요. 대체 그건 어느 마법소녀 세계관에서 나올법한 의식인데요? 아직도 잠꼬대하고 싶다면 레시아가 계속 자요. 영원히.”

 

엉망진창인 논리로 나에게 들이대고 있는 소녀는 마왕답지 않는 말을 자연스럽게 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조금이라도 방심하고 있으면, 말 그대로 농락당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터.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 여김 없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서...

 

-쪽!

 

“아침인사 대신 볼에 키스를 했어! 신랑!”

 

뒤에 다가오는 복병을 너무 늦게 눈치챘다. 태양과 같은 미소를 띠고 너무나도 상쾌한 얼굴로, 산뜻한 움직임과 함께 주방에 들어가는 루시피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볼에 여전히 따듯한 감촉이 남아있기에, 내 오른뺨을 가린 손은 뇌의 명령을 거치지 않고 움직였다. 온 몸이 너무 놀래서 경직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을 때.

 

-쪽!

 

“레시아! 뭐 하는 거에요!”

 

부스스한 붉은 눈을 하면서도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일명 ‘레시아 논리’를 앞장세웠다.

 

“옛말에 오른뺨을 맞으면 왼편으로 돌리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 오른쪽 볼에 키스를 받으면, 왼쪽 볼에도 키스를 받아야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정해진 법칙이니라.”

 

“그건 다른 성서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그 성서를 제멋대로 변이시켜서 이상한 혼종을 만들지 말라고요.”

 

“어째서 주인은 짐이나 다른 여성이 애정표현을 하는데도 싫다는 내색을 하는 건가?”

 

그거야 당연히...

 

“그...언젠가 보답을 해야 하잖아요. 한 가득 모아서...”

 

받은 것이 있다면 10배로 갚으라는 말이 있으니까. 잠깐 시선을 돌린 이유라면 내가 이런 말 하기에도 소름이 끼치기 때문이니까. 당연하게도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당장 멸망할 것만 같은 이 세상을 살려내는 것이니까. 평화가 온다면 언젠가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짝 치켜 뜬 눈을 하고 있는 레시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내 귀에 다 들릴 정도로 작게 입을 열었다.

 

“츤데레~”

 

“시끄러워요. 아이언 클로가 날아가기 전에.”

 

얄밉게도 살짝 웃으면서 “쿡쿡!”하고 웃는 소리까지 완벽할 정도로 요망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마스터.”

 

어디선가 시나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지금 머릿속에서 처리중인“기상할 때 존재하면 안 되는 가장 위험한 장소 TOP10”중에서 3위정도에 속하는 내 이불 속을 빠르게 들췄더니, 백은을 지닌 머리카락이 내 배를 거의 뒤덮고 있는 상태였다.

 

어째 무겁다고 생각했더니 컨디션이 안 좋은 게 아니라...

 

“비, 비둘기! 이 녀석! 어째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냐!”

 

“올빼미입니다. 냥캣. 그리고 오랜만에 마스터 곁에서 자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백은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했을 때.

 

-쪽!

 

“아니! 너도 하는 거냐!”

 

위화감과 긴장감이 내 목에 집중되어 왼손으로 목을 가렸을 때는, 이미 시나의 입술이 떠난 후였다.

 

“냥캣이 했으니 저도 못할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하지만 양쪽 볼은 이미 다른 2명이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에다 해야만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가장 사랑스러운가요?”

 

“사랑스럽고 아니고를 떠나서, 너희 둘은 나에게 애정을 보이는 것조차 전쟁이냐?”

 

“언젠가 마스터가 우리들에게 보상을 해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애정이란 마일리지를 하루에 2씩 차곡차곡 쌓으면, 제가 다치거나 병에 걸렸을 때, 약값이나 병원비로 거액의 애정이 나온다는 소리지요.”

 

“실비보험드는 소리하고 있네! 그전에 분신이 아니라 본체가 온 것 같은데, 밖에 있는 시간은 그럼 전부 멈춘 거야?”

 

시나는 다른 이야기로 빠지는 것을 눈치채고 건성으로 대답만 했다.

 

“멈춰있습니다. 제가 밖에서 시간을 억지로 움직여도, 3일 뒤에는 모든 공간이 다 날아갈 테니까요. 그건 그렇고, 저에게 대한 애정은 어떤 식으로 표현할 예정입니까? 그 예정된 날에 따라서 저도 예쁘게 마스터 앞에서 서고 싶으니까요.”

 

“마스터라니...이미 페어링도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그럼 서방님?”

 

시나의 눈이 번뜩하는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준비해온 단어. 그리고 살짝 수줍은 목소리가 가미되어 폭발적인 파괴력이 내 정신을 강타했다.

 

“마스터라 불러라 그냥. 잠깐 생각해보니까 그 호칭을 견뎌내기에는 손발의 내구도가 강하지 않아.”

 

“그럼 짐도 주인이라 부르지 말고 여보라고?”

 

“그러기엔 제 손발의 내구도가 강하지 않다고요. 만약 시공간의 저편으로 날아가는 제 손과 발을 어떻게 책임지실 거에요?”

 

“우서가 책임질 것이다.”

 

그럼 안 되잖아.

납치하는 스킬이 늘어서 이제 부위별로 납치하는 거냐?

 

“하아암~ 잘 잤다. 어라? 빛의 여신님도 이곳에 있네?”

 

릴리스의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는데, 레시아와 시나가 각각 오른쪽과 왼쪽 시야를 손바닥으로 막으면서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릴, 릴리스! 옷은 입고 자라고 하지 않았는가!”

“맞습니다. 그런 모습을 마스터에게 보이면 실례입니다.”

 

“하지만 잘 때 옷을 입고 자는 건 왠지 불편하지 않아? 적어도 실크로 된 이불을 감싸는 느낌을 제대로 알려면 맨 살이 최고라고? 부드럽고 꼭 안겨있는 기분이...

 

“시끄럽다! 당장 옷을 입어라! 색욕의 공작!”

“당장 옷을 입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정화하겠습니다!”

 

“알았다고요. 카일은 내가 어떻게 돌아다녀도 신경 쓰지 않고 멀쩡하게 말할 것 같은데.”

 

투정을 부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릴리스의 목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두 눈은 광명을 찾은 듯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사물을 하나 둘씩 인지하기 시작했다.

 

“방금 뭐가 지나갔길래 제 눈을 가린 거에요?”

 

“제길. 릴리스 이 녀석. 몽마의 여왕이라서 그런 뇌쇄적인 몸으로 주인의 시선을 빼앗으려 하다니.”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서로 한마디씩 주고 받으면서 안심을 하고 있었으나, 무슨 일이 터졌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카일 씨? 잡화점에 있는 목욕탕은 너무 크네요?”

 

“어째서 너까지 이곳에 있는 거냐?”

 

“그야 당연히 밖에 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시간이 정지하게 되니까요. 이 사건이 해결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해서, 릴리스에게 이야기도 해보았고 세피르가 꿈의 미로를 관리하고 있으니, 밖의 상황을 알 수 있으니까요.”

 

잡화점을 밝게 비추는 빛에 반사되고 있는 자신의 은발을 신경 쓰면서 물기를 말리고 있었다. 임시거처로 활용만 한다고 하니 한숨을 쉬고 내 할말을 하기 시작했다.

 

“꿈의 미로는 현실세계와 영향을 전혀 안받는 거냐?”

 

“꿈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죠. 당연히 시간이 정지되면 꿈의 미로에 갇힌 사람들은 전부 사라지겠지만, 쉽게 말해 의식의 전송이 되지 않아서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니, 세피르의 연락을 받아서 지금은 모든 사람들의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이에요.”

 

꿈은 현실이 아니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나 공간이 날아가도 그 영향을 받지 않기에, 몽마는 한정적인 꿈의 공간에서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다는 소리로군. 그걸 이용하면 해결법은 보이지 않아도 시간을 벌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꿈과 같은 방법이다.

현실은 불가능하니까.

 

“어차피 지금은 3일안으로 시간을 찾아야 하니, 그 기간 동안 사고 치면 안 된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아리엘은 볼을 부풀리면서 노을을 연상하게 만드는 눈이, 손을 대면 베일 정도로 날카롭게 변했다. 애써 시선을 돌려 레시아와 시나가 빤히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며, 두 사람을 보고“왜요?”라고 말하자...

 

“여전히 이상한 곳에서 마음이 너그럽지 않는가? 그렇게 한 명을 더 채워야 속이 풀리는 것인가?”

“마스터는 역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잘 알았으니 한 마디만 하자면, 그럴 의도는 전혀 없으니 안심하시죠.”

 

한숨을 내쉬면서 달래주려고 했는데...

 

“아니. 주인이 그럴 의도가 없어도...”

“방심하면 마스터가 당할 겁니다.”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은 루시피나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아리엘의 모습을 쫓아 눈이 이동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은 흡사 눈알이 튀어나와 그 방안까지 쫓아갈 기세였고, 일부러 내가 헛기침을 하면서 주변의 분위기를 바꿨다.

 

“지금의 문제는 시간을 되찾는 거잖아요?”

 

“하지만 주인. 사회자가 날려먹은 시간을 어떻게 찾아올 것인가? 그게 더 문제이지 않는가?”

 

애석하게도 날아간 시간을 찾는 방법은 없다고 보면 되지만, 어릿광대의 말을 듣고 힌트를 얻은 것이 있다.

 

“레시아. 어제 어릿광대가 하는 말을 들었죠?”

 

“그 증오스러운 도둑고양이의 말을 짐이 왜 들어야 하는가?”

 

고양이는 레시아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릿광대는 3일 뒤에 공간이 사라질 것이라고 알려줬잖아요.”

 

“확실히 그건 들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걸 집어볼 일이 있는가?”

 

가능성이 조금 있는 사실이라면...

 

“지금 사회자는 완벽하게 시간을 날리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날아간 것처럼 감추고 있다는 것이라 생각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그렇다면 마스터의 말씀은?”

 

“애초에 시나가 시간을 강제로 움직이는 것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시간을 완전히 날려먹었다면 시나와 티아마저 멈춰버려야 할 거야. 아니면 이 공간이 같이 사라져버리거나.”

 

하지만 시나는 외각에서 힘을 사용해 시간을 움직이고, 아직까지 시간의 개념을 지닌 어릿광대의 말을 보아. 시간을 몰래 빼돌리며 숨기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공간을 날릴 수 있으면 바로 날릴 것이지 왜 3일이 필요할까요? 사회자는 이미 검은 존재와 합쳐져서 신적인 존재를 뛰어넘었을 터인데?”

 

상급 신을 넘어 손가락만 움직여도 모든 것이 뒤바뀐다.

의지만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다시 태어날 정도의 힘이다.

하지만 공간을 지우는데 3일동안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할 것일 테니...

 

“만약에...아주 만약에...시간을 숨겨놓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어디일까요?”

 

 

내가 던진 질문에 레시아와 시나는 아무런 말도 안하고, 깊은 고민의 늪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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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새니까 피곤하네요.

워프레임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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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3 프란치스카의 공개일기

지리산 칠선계곡 [2017.0806]

 

해가 쨍쨍 내리쬐는 무더운 날, 나와 엄마는 함양에 사는 작은 이모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긴 여행을 떠났다. 작은 이모는 함양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신다. 사촌인 난슬언니는 중학교 3학년, 종민오빠는 초등학교 6학년이다.

 

우선 우리는 광명역에서 대전행 KTX를 타고 약 40분 정도 걸려 대전역에서 내렸다. 기차에는 나는 엄마와 묵찌빠도 하고 지겨우면 잠도 잤다. 창문 밖 풍경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대전역에서 내렸으니 이제 함양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러 가야 한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배가 아팠다. 가까운 화장실로 가서 똥을 누려고 했으니 변비에 걸렸는지 똥이 나오지 않았다. 버스 시간이 촉박해서 어쩔수 없이 배가 불편한 채로 택시를 타고 대전 버스터미널에 갔다. 나는 똥이라도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아서 불안했지만 엄마는 버스에 늦을까봐 불안했다. 버스표를 끊고 버스를 타려고 할 때 까먹고 있던 배가 갑자기 또 아팠다. 이 때가 버스시간 달랑 5분 전이었다. 엄마는 이제 불안함을 넘어서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버스터미널에 있는 약국에 가서 소화제를 샀다. 버스출발 2분 전! 우리는 쌩쌩 달려서 버스 출발 직전에 겨우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휴~~ 똥이 쏙 들어갔다.  

 

1시간 20분 후 함양 버스터미널 도착! 드디어 작은이모와 종민오빠를 만났다. 난슬언니는 한 달에 두 번 가는 논술학원에 가야해서 함께 하지 못했다. 우리는 빨리 점심을 먹고 내가 원하고 기다렸던 해가 쨍쨍 내리쬐는 불타는 날에 가기 딱 좋은 계곡에 풍덩! 들어갔다. 처음에는 물이 차가워서 좀 추웠지만 조금 버티다 보니까 금새 괜찮아졌다. 아참! 그 계곡 이름은 '지리산 칠선계곡' 이다. 왜 '철산' 계곡도 아니고 '칠산'도 아닌 '칠선' 계곡이냐면 일곱 명의 선녀들이 그 계곡에 왔다가서이다. 나와 종민이 오빠는 계곡에서 아주 신나게 놀았다. 나와 종민이 오빠는 다이빙도 아주 높은 절벽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듯이 재미있게 했다. 엄마는 내가 바위에 부딪힐까봐 걱정이 돼서 계속 조심하라고 하셨다. 스노클링을 끼고 물고기를 구경하고 계곡바닥에 있는 예쁜 모양의 돌을 모았다. 그런데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했던 하트모양의 돌맹이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아쉬웠다.

 

지리산 칠선 계곡에서 놀다보니 햇님이 심술을 부리다가 구름에 가려서 달아나 버린 것 같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는 난슬언니도 함께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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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8

487

 

 

 

엽기적인 여장이 끝나고 난지 2시간정도가 흐른 뒤였다. 잡화점은 장사를 해야 하니까 비울 수 없다는 것은,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 방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부정적인 사고를 잡화점에게 쏟아 부어버렸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달래봐도,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적어도 가위바위보에 져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일보다 더 좋은 그 무언가...

 

-파지직!

 

내 밑에 책상이라도 있었는지 몸을 받아내지 못하고, 연약하게 부러져버린 나무의 잔재들이 주변 넓게 퍼졌다. 여전히 승률은 0%정도를 기록하고 있는데, 과거로 가서 어린 레시아에게 가위바위보를 이겼던 것을 생각하면 정확하게 0%는 아니지만, 1%가 안 될 정도로 승률이 처참하다.

 

“주인은 여전히 가위바위보를 잘 못하는군. 지금쯤이라면 벌써 수천, 수만 번의 목숨이 날아갔으리라 생각하노라.”

 

분명 1/3확률로 이기고, 지고, 비기는 것이 가능한 놀이에서, 이기는 것은 전혀 없고 지고 비긴 것만 있는지 나도 의문. 그보다, 내가 1년동안 레시아에게 무슨 사기라도 당하고 사는 게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아무튼 모두가 자고 레시아가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사이에, 마왕이라서 잠을 적게 자도 된다고 하지만, 잡화점에서는 항상 눈을 감고 자는 듯한 검은 고양이의 목소리가, 졸리지도 않는지 생생하게 내 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인은 왜 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지 잘 모르겠다. 짐이라면 잡화점을 뜯어고쳐서라도, 이 바보 같은 차원을 벗어나는 길을 물색했을 터인데, 주인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을 꺼리는 것인가?”

 

“차원이동에 대해서 레시아가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거 아니에요? 다른 장소로 가서 자원이 있다고 한들, 이곳처럼 마법이 발달되어있는 장소가 아닐지도 모르고, 이곳과 비슷한 곳이 아니라 전혀 맞지 않는 환경이라면, 거대한 중량에 못 이겨서 짓눌려버리거나, 원인도 모르는 병에 걸려서 죽어버리거나, 자기장이 너무 강하거나 약해서 몸에 이상현상이 올 수 있다고요?”

 

“짐은 마왕이니 괜찮다.”

 

“기본적으로 저부터 생각하고 발언하면 안 될까요?”

 

레시아도 이곳이 그리 싫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처럼 마왕의 입장이 옅고 인간과 함께 공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과를 얻어낸 장소도 많지 않으니까. 이곳이 살기 좋은 이유라면, 어처구니 없게도 내 앞에 있는 검은 고양이가 만들어낸 업적이다. 사실상 인간들은 마물에 대해 부정적인 틀로만 보고, 천계와 마계는 오래 전부터 싸워왔으니 인간이 천계의 편에 붙는 걸 기회로, 마족을 모조리 몰아낼 생각을 했으니까.

 

내가 모르는 시간 속에서 레시아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결정으로...당연히 그 방법이 좀 날로 먹는 방법이긴 했지만, 어쨌든 공존을 이루어낸 결과물을 모조리 버리고, 이 땅에서 벗어나 새로운 땅을 찾아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당연히 병적인 이유라던가 환경적인 면에서는 마리아가 비슷한 차원을 몇 개 알고 있다고 하니, 그곳으로 날아가도 상관은 없지만, 한 때 레프리시아의 선생님으로서 조금 더 노력을 하고 발상의 전환을 겪게 해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생각을 좀 하죠. 시간을 없애도 시간을 찾으면 그만이잖아요?”

 

“없어진 시간을 어떻게 찾는가? 주인은 언제나 이상한 말을 한다. 나중에는 이상한 양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대체 왜 양이 나오는...아니. 진짜! 정말로! 재미없으니까! 제발 좀 그 바보 같은 말장난 그만해요!”

 

대체 누구에게 배워온 거냐.

누군지 몰라도 그 쓸 때 없는 말을 알려준 녀석의 혀부터 뽑아야지.

 

“그래서 주인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없지 않는가? 이곳은 결국 멸망하기 마련이니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좋다.”

 

“레시아의 선생님은 불가능한 문제가 있으면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라고 하던가요? 어떻게 마왕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웃기네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해버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 비아냥거리는 태도와 이미 모든 게 다 끝났으니, 뒤집어 엎어버리자는 모습을 보아하니 욱해서 나왔는데...

 

“주인. 선생에 대해서 거론하지 말거라.”

 

“정말 어처구니 없지 않아요? 아니면 레시아를 가르친 선생님의 교육방식이 잘못 됐거...”

 

-파아악!

 

내가 나를 욕하는 것도 웃겼지만, 레시아의 발톱이 내 옆에 있는 벽을 잘라버리면서, 어마어마한 살기를 뿜어냈다. 나를 거의 죽일뻔한 어릿광대를 처음 마주했을 때, 이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릴만한 양이 그대로 나에게 직격코스로 날아오고 있었는데, 사실상 지금까지 용사 중에 단 1명만 레시아 앞에 서 있는 이유를 알게 된 순간이다.

 

“선생에 대해서 거론하지 말지어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어떠한 분노보다 지금 것이 가장 컸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시아는 화만 낼 줄 아는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남의 생각까지 고려할 줄 아는 이상한 마왕이다.

 

“주인이 더 이상 짐의 선생을 모욕하지 않는다면, 짐도 주인의 생각에 맞춰서 불가능할 법한 시간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법을 생각하도록 하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곳을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곳이니라. 대부분 마물과 인간은 전쟁을 해야 하니 말이다. 기껏 찾아온 평화로운 삶을 부수는 것은 주인이 싫어하는 것인지 않는가?”

 

“그래도 냉정하게 거기까지 생각해주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저도 레시아의 선생님을 모욕하지 않도록 하죠.”

 

순순히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그러자 레시아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작은 앞발을 핥았다. 그 전에 자학을 하는 것은 내 스스로가 그만둬야 할 항목 중에 하나이기에, 계속해서 말한다면 어느 순간 자괴감이 들어서 인생살기 싫어지지.

 

“그런데 주인은 이런 일을 어째서 짐과 같이 해결하려고 하는가? 루시피나와 루니아, 마리아도 있노라. 오히려 시공간마법에 관련된 것은 티아라는 요정도 있다.”

 

“시공간에 문제가 생겼다면 오히려 티아가 이쪽으로 달려왔겠죠. 하지만 지금은 티아가 없다는 것을 보아, 티아가 있는 장소와 우리 쪽의 장소가 단절되어버린 거에요. 단순히 시간만 멈췄다면 티아가 나타날 수 있지만, 우리는 완전히 시간이 없어졌으니까요. 어렵게 말하면 우리는 완전한 3차원이 되어버린 것이며, 시간까지 같이 있는 티아의 공간은 4차원이란 소리에요.”

 

선은 1차원, 면은 2차원, 그리고 공간이 3차원이며, 시간까지 같이 있는 것이 4차원. 억지로 시나가 밖에서 우리를 움직일 수 있게 도와주고 있지만,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도 저 앞에 있는 동상처럼 멈춰버릴 것이다.

 

“4차원에 대해서는 모두가 생소하지 않는가? 시간축을 보면서 통제할 수 있는 자들은 없으니까.”

 

“마왕이 어떻게 그걸 알아요?”

 

“잊었느냐? 짐은 운이 좋게도 마왕이니라. 주인이 심심풀이로 마리아에게 잡다한 책을 받고 있으나, 사실은 짐이 그걸 먼저 읽고 주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인정하면, 그때야말로 주인이 읽을 수 있는 것이니라. 그보다 시간을 4차원으로 두는 것은 한가지의 예시일 뿐. 솔직히 짐도 모르는 좌표이기 때문에 설명할 방법이 없노라. 우리가 귀환마법을 사용하거나 좌표마법을 사용할 때도, 3차원을 기초로 하지 않는가? 만약 시간까지 가능했다면, 그것은 이미 시간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는 시간을 임시로 4차원의 마지막 부분으로 대입을 해서 해결해야겠지?”

 

무슨 마왕이 저래?

나중에 상대성 이론까지 나오는 거 아냐?

 

“대입을 해서 해결하던 아니던...아무튼 문제는 시간을 찾는 방법이겠죠? 그러면 이제 잡화점의 물품에 시간과 관련이 있는 것이 있어야 할 텐데. 모든 땅에 마나와 마기, 신성력을 합친 새로운 에너지로 한 가득 채운다거나.”

 

“그런 일을 하다간, 우리가 전부 죽어도 해결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하긴. 마법석도 못 이기고 다 부셔졌는데.

지금에 와서 증폭기라던가 제어장치로 어떻게 할 수 있을 만한 에너지가 아니지.

그렇다고 내가 희생하기에는 무리가 보인다.

 

아마 잡화점 멤버가 생각할 때.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할 방법은 2가지인데.

첫 번째는 각본가를 찾는다.

두 번째는 다른 공간에서 시간을 찾아서 쓴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 외각에서 시간을 움직이게 하는 시나에게 감사해야 할 지경이네요. 그런데 시나가 만약 시간을 움직이게 하지 않고 멈췄다면, 오히려 각본가도 같이 멈춰서 종말을 맞이했을 텐데. 유랑극단인지 뭔지 하는 애들은 생각이 있는 애들이래요?”

 

‘말 그대로 그냥 다같이 죽어버리자!’라고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졌다. 고민의 늪에 빠져서 한참을 허우적거렸을 때. 배에서 뭔가 기이한 압박감이 전해져서, 시야를 밑으로 내려다 보고 있자니, 검은 앞발을 이용해서 꾹꾹 누르면서 붉은 눈을 지닌 레시아가 올려다보았다.

 

“레시아. 그 모습으로 계속 있으니까 종종 자신이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고양이들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겐 이러지 않는다. 애초에 인간형으로 변하면 주인이 부담스러워서 긴장하지 않는가? 부부인데도 불구하고 붙어있어야 하는 모습은 동물형태라니.”

 

“인간형이라던가 동물형이 있다면, 마왕상태는 따로 있는 거에요?”

 

“기본적으로 인간형태가 1단계 변신이고, 짐의 경우에는 총 5단계까지 변신할 수 있다.”

 

아무리 변신합체 로봇이라도 5단계는 못해.

어떻게 변신을 하면 5단계까지 할 수 있냐?

어디 5층석탑이라도 되는 거냐?

 

“차고로 짐의 본 모습은 꽤나 흉측한 모습이니 보이고 싶지 않으니, 변신하라고 재촉하지 말지어다.”

 

“안 할게요.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라고는 안 해요.”

 

“그래야 짐의 신부지.”

 

“남자는 신랑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나는 남자이지만 여자에게 신부라고 불려지고 있는 게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새벽에, 느닷없이 잡화점에 노크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자동으로 움직이는 몸을 이끌었고, 내가 일어나려고 하자마자 레시아는 내 배에서 카운터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런 시간에 손님이 있다는 것은 당연해야 하지만, 워낙 사람이 잘 안 와서 그런지 내가 더 긴장이 되었을 무렵. 문은 자연스럽게 문고리가 비틀리고, 위에 있는 종은 손님이라고 확인했는지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여운 어릿광대가 왔습니다!”

 

당차게 들어온 어릿광대는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기나 긴 고민에 빠지는 동안, 어릿광대는 나와 레시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귀엽지 않으니 나가겠습니다!”

 

“아냐! 들어와! 나가지마!”

 

유랑극단의 한명인 어릿광대가 제 발로 찾아왔다는 뜻이라면, 무언가 전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 당연한 법.

 

“마침 찾고 있었는데 잘 되었군. 유랑극단 중에서 사회자가 시간을 날려먹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당연히 그것에 대해 찾아온 거야. 자기야.”

 

“그 호칭은 제발 한 명만 써줬으면 좋겠는데.”

 

릴리스도 나를 부를 때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어릿광대가 깔끔하게 3바퀴 돌고 정확하게, 나와 시선이 마주하며 멈춘 뒤에 건방진 목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첫 번째로 호칭을 바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왜냐하면 자기와 나는 운명의 붉은...소방용 도끼로 이루어져있는 걸!”

 

“운명의 소방용 도끼는 뭐냐? 우리의 운명은 화재를 진압하는 거냐?”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태클을 걸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는 어릿광대.

 

“앞으로 3일 뒤에는 공간이 사라질 거 같아. 그걸 전해주러 온 거야. 비록 이곳은 시간이 멈추고 있다고 해도, 억지로 시간을 움직이는 여신님에게는 반갑지 않는 소식이겠지?”

 

 

끔찍한 소식은 늘 예상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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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서 춥네요...

얼어죽을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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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7

486

 

 

 

세계는 멸망해도 나를 여장시키겠다라는 발상은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도, 제발 부탁이니 그 이상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나가 힘을 공급받기 위해 자신의 분신을 수거하려는 듯 어느 사이에 사라진 동안, 검을 들고 루니아 누나와 대치하고 있었다. 보통 검사에게 검을 드는 사람의 의도는 결투라고 생각하지만, 내 경우에는 날개 옷을 찢어서 태워버리겠다는 심산이었으니까.

 

“카일도 참. 그렇게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있지마세요오?”

 

“그 옷을 이 세상에서 분자단위로 만들어야 제 속이 좀 풀어질 것 같습니다만!”

 

저 옷을 이룬 실 하나를 절대로 남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카운터 위에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는 검은 고양이가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했다.

 

“어째서 주인은 그렇게까지 싫어하고 거절하는 것인가? 그냥 한번 입고 나서 벗으면 빨리 해결될 것을? 강아지가 장난감을 물고 있을 때 억지로 뺏으면 더욱 더 놓지 않는 법이니라. 그러니 반대로 생각하거라‘입어도 좋다.’라는 생각. 언제나 관점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남자에게 있어서 여장이 잘 어울리는 것 또한 기적이니라. 어째서 주인은 21세가 되면서도 루니아보다 키가 작고, 수염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피부가 매끈한 건가? 주인도 혹시 여자로 그려놓고 남자로 우겨서 남자가 된 케이스인건가?”

 

“여긴 글밖에 없으니까. 그리 자세하게 설명한다고 한들 우리의 존재에 대한 상상력을 더 불어넣는 것뿐이잖아요.”

 

결국 레시아는 나보고 입으라는 말을 고무줄처럼 늘린 것뿐이다. 여장을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즐거움을 선사해준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 사사로운 것보단 눈 앞에 당장 닥쳐온 위기에 집중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유랑극단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각본가를 찾거나 날아간 시간을 찾아야 하잖아요. 날아가버린 시간을 찾는다는 그 자체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제발 이런 거에 힘을 빼지 말자고요!”

 

나의 짜증이 섞인 외침이 잡화점에 울려 퍼져도, 주변에 있는 검은 나무가 다 흡수해서 들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귀가 꽉 막혀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루니아 누나는 여전히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고, 루시피나는 내 빈틈을 찾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카일이여. 첩이 생각한 바로는 그냥 입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마지막이 될 수 있다면 이 시간을 좀 더 즐겨야 한다.”

 

“마리아가 없는 동안 당한 게 얼만데 뭘 즐겨요! 이렇게 질긴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야! 손님 받아라!

 

이젠 손님을 알리는 종까지 나에게 시비를 거는 건가? 그보다 손님이 아니라 아리엘이잖아.

 

“어머나? 마왕님은 잡화점이 부활하자마자 이곳에서 쭉 쉬고 있는 거에요?”

 

“릴리스. 항상 성안에서만 박혀있는 줄 알았는데, 세상이 이렇게 되니 그대도 다른 몽마처럼 꿈의 미로에 인간이 없어서 직접 나온 것인가?”

 

색욕의 공작이라고 불리는 몽마들의 여왕. 릴리스. 아리엘과 같은 은발이지만, 물기를 머금은 보라 빛 눈동자가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살며시 입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는“아냐. 난 맛없어. 콜레스트롤 수치가 높다고!”라는 말을 자동으로 내뱉을 뻔했지만, 꾹 눌러 삼키고 꿈의 미로에 사람이 없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꿈의 미로는 사람의 의식을 붙잡아놓는 장소. 어처구니 없게도 모든 대륙에서 혼수상태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몽마들이 꿈의 미로로 안내하여, 영원히 정기를 흡수당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과 같다. 당연히 릴리스가 만든 꿈의 미로이기에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보이고 있지만, 천칭들의 모임에서 과장된 이야기이다.

 

최근 릴리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2일이나 3일정도 되면 알아서 풀어주는데, 꿈의 미로에 갇혔던 사람이 다시 자야 한다고 억지로 꿈나라에 가려는 기이한 노력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일을 안 한다는 문제점이 더 크긴 했다.

 

아무튼 꿈의 미로에 사람이 없는 이유라면, 지금은 마왕이 모든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포지션이라서 가둘 필요가 없어졌다고 하는 게 좋겠지.

 

형식상 지배이지만 일시적으로는 인간과 마물이 공존하는 형태다.

 

“제 방에 들어오고 싶다는 인간이 너무 많아서 말이죠. 당분간 이곳으로 몸을 대피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그보다 자기는 잘 있었어?”

 

천연덕스럽게 내 옆에 달라붙으면서 친근하게 대했지만, 찰나의 순간에 살기가 내 등을 찔렀고, 레시아가 못마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주인에게 붙지 말거라!”

 

“저도 반지를 받아서 잡화점의 멤버라고요? 카일을 독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그러기엔 릴리스가 독점하고 있잖아요.”

 

뒤에 있는 아리엘이 말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빅터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내가 아리엘에게 말을 걸자. 아리엘은 나와 시선을 마주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뇨. 빅터를 찾았으니 다행이었는데 300년이 지난 시점이니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시간이 날아가버린 터라 신체나이가 정지된 상태에서 지냈어도, 오히려 300년동안 아무일 없었던 게 더 이상한 거에요. 게다가 빅터는 귀족이 협박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했다고 하고...”

 

“이상한 거 물어봐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어차피 스트레스를 풀 요소는 많으니까요.”

 

아리엘이 과거의 연인을 포기하고 태연하게 있는 것은 자랑스러웠지만, 내심 걱정되는 것은 스트레스를 풀 요소가 많다는 말이었다.“스트레스가 한 가득 쌓였으니 각오해라.”라는 듯한 협박은 곧 현실이 되기 시작했는데.

 

“루니아 언니! 지금이에요!”

 

“와아~!”

 

“이런 망할!”

 

아리엘의 외침으로 순식간에 루시피나와 루니아가 점프를 하기 시작했고, 릴리스가 놔주질 않아 그 상태로 충돌이 일어났다. 번개가 번뜩거리는 시야반전과 사방에서 난잡하게 옷을 잡아당기는 기분. 그게 3분정도 지나면 내 옷이 어느새 바뀌어 있는 놀라운 마법이 아닌 마법을 경험하고 있었다.

 

“제길. 이번엔 날개 옷까지...”

 

“와아~ 선녀가 따로없네요오. 카일. 여기 좀 잠깐 보세요오.”

“신랑! 정말 잘 어울려!”

 

루시피나의 감탄이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심장을 가루로 만들고 있을 때. 루니아 누나는 어디서 꺼내왔는지 사진기를 내 앞에서 들이밀고 있었다. 너무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아래를 보니, 릴리스는 내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쉬는 모습이었다. 과거에서는 릴리스와 레시아가 같이 지냈으니까 사이가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릴리스.”

 

“왜 그래?”

 

“우선 제 허벅지를 만지는 것부터 그만해줄래요? 옷 위에서 만진다고 하지만 형용할 수 없는 수치심이 지금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으니까.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창문에다 내던질 거에요.”

 

요염한 손짓으로 쓰다듬고 있는 내 허벅지를 릴리스의 손부터 멈추게 한 뒤에 질문을 하도록 하자. 그래도 릴리스는 내 말에 순순히 알았다고 하면서 릴리스의 양손이 배쪽으로 가지런히 놓여졌다.

 

“예전에는 레시아와 어떤 관계였어요?”

 

질문이 이런 이유는 레시아에게 릴리스와의 과거를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마왕님이라...순진무구하고 귀여웠지. 지금은 자신을 떠난 선생님에게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겠다면서, 마왕이 된 이후에 선생님을 찾겠다고 했지만, 그 때 당시에는 질서가 바로잡혀있는 마계를 마왕이 다스려야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내가 극구 말린 결과가 이런 거지. 그 사람도 어째서 저 아이를 나에게 떠넘기고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빨리 지나가서 보통사람이라면 알지 못할 정도. 그러고 보니 내가 레시아의 선생님이었다는 말은 루시피나만 알고 있는 사실일 뿐. 레시아의 낚시질 때문에 말해버린 진실이지만, 그 사실을 루시피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지, 꼭꼭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선녀의 날개 옷을 입히니 정말 선녀이지 않는가? 카일이여.”

 

“이 가발은 대체 어디서 났는지가 더 궁금하지만, 자세한 건 안 물어볼게요. 그리고 마리아. 비어있는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사탕을 먹으면 안 되죠?”

 

레몬 맛 사탕인지 밝은 노란빛의 사탕을 입에서 빼고는“첩은 프로니까 괜찮다.”라고 말한 뒤에...

 

“레로레로레로레로...”

 

“그거 하지마!”

 

내 입에서 소리치게 만들었다.

 

아리엘은 루니아에게 도망치고 있는 모습을 보아, 남장을 당하기 싫어서 사방팔방에 뛰어다니고 있었고, 루시피나는 과자를 내 입에 넣어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검은 고양이는 엎드린 체 눈을 감고 있을 뿐.

 

내가 생각하라고 할 때는 엉뚱한 말을 하면서도, 정작 내가 바빠지거나 이런 일에 휘말리면 레시아가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생각해주기도 한다.

 

세상이 망해도 잡화점 안에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릴리스?”

 

“응?”

 

“지금 뭐해요?”

 

당연히 세상이 망해도 잡화점 안에만 있으면 하루에 한번 꼴로 사고가 터져서 문제지.

 

“그야 치마 안에 들어가려고 잠깐 들추고 있었는데?”

 

“거길 왜 들어가요! 두더지도 아니고!”

 

“괜찮아. 잠깐만 들어갔다가 30분 뒤에 나올 거니까.”

 

“제가 안 괜찮으니까 당장 손때요!”

 

그리고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솔직히 용병으로 일했던 것보다 더 힘들다.

 

“그렇군. 그거이니라!”

 

모두가 레시아의 외침에 전부 시간정지라도 당한 듯이, 고개를 돌려 검은 고양이에게 집중되어있었다. 카운터에서 날렵하게 내려온 한 마리의 맹수...처럼 보이는 고양이가,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입은 치마 속으로 들어...

 

“들어가지 마!”

 

“냐아아아아!”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가길래 3초만 더 늦었어도 큰일날 뻔했다. 그 사이에 아이언 클로가 잡아내서 레시아를 허공으로 인도하고 있었고, 방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했길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하다가 외치면서 뛰쳐나오는 톤과 비슷하게 외쳤는지 질문을 해야만 했다.

 

“대체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한 거에요?”

 

“그야 당연히 주인에게 붙어있는 이들보다, 더 가깝고도 친근하게 접촉할 수 있는 명당자리를 찾고 있었노라. 릴리스의 파렴치한 행동이 짐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으며, 짐은 단순한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마왕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의 치마폭에 감싸이며...니야아아아앗!”

 

남자의 치마폭에 감싸면 여자는 좋아하던가?

아니, 고양이는 좋아하던가?

 

“저는 여태까지 레시아가 이 상황에 대해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답을 내놓은 줄 알았더니, 지금 이 사람들 사이에 껴서 뭘 하려고 했던 거에요!”

 

“아프다! 아프다! 주인! 어째서 마법이 봉인 됐는데도 이렇게 아픈 것이냐! 놔라! 노아라!”

 

 

결국 레시아는 아이언 클로로 인해, 내 어깨 위에서 축 늘어진 상태로 가만히 있었지만, 여전히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레시아에게 언제쯤 말해야 할지,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가늠을 하며 기회를 뒤로 미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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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와서 뒤척이다가 아침에자서 늦었어요.

핳핳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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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백일몽(白日夢)

백일몽(白日夢)

 

새파란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 그 위로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간다.

 

“와- 예쁘다.”

 

은으로 가루를 만들어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모래를 밟으며 끈적임 없이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살며시 손을 잡아오는 그, 물빛 눈동자가 반달을 그리며 다정하게 웃는다.

 

“좀 더 가까이 가볼까?”

 

“응!”

 

그와 나란히 손을 잡고 파도가 밀려오는 물가로 다가갔다. 참방- 참방- 발끝을 간질이며 적셔오는 물이 차다. 기분 좋은 감각에 작게 웃으며 살며시 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넣었다.

 

쏴아-

 

그림 같은 풍경과 꿈결 같은 여유로움, 살포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뽀얀 파도와 푸른 바다, 아름다운 모래밭, 따뜻한 햇살, 부드럽게 머리를 어루만져주는 손길이 나른하다.

 

“수박 먹을까?”

 

“수박?”

 

수박이라는 말에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놔두었는지 10걸음 정도 뒤에 커다란 파라솔과 테이블 의자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투명하고 예쁜 그릇에 얼음과 수박화채가 가득하다.

 

“맛있겠다.”

 

어느새 의자에 앉아서 얼음과 수박을 한숟가락 가득 떠 입안에 넣는다. 아삭아삭…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박의 달달한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싱긋- 웃고 있는 그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나온다

 

“냐옹~”

 

“에?”

 

“냐아~~”

 

“뭐?”

 

그의 눈동자가 묘하게 휘어지며 손을 뻗어 내 볼을 톡- 건드린다.

 

축축한 등, 체온으로 뜨뜻해진 마룻바닥 그리고 내려다보는 노란눈동자와 말랑한 솜방망이.

 

“아…꿈이었어?”

 

“냐~앙.”

 

“하아…”

 

늘어지게 한숨을 내뱉고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마당에 내려쬐는 햇살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엄청난 무더위에 고장 난 에어컨을 원망하며 부채를 집었다. 부채바람에 나비가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덥다…더워.”

 

흐물흐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꿈에서 본 파라다이스가 겹쳐진다.

 

끈적임 없이 상쾌한 바닷바람, 뜨겁지 않은 태양, 차가운 파도.

그리고 아름다운 그…막상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차라리 그게 현실이면 좋겠다.”

 

무한한 아쉬움을 달래며 간신히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얼음 한가득, 빨간 수박 알맹이 한가득, 달달한 설탕 조금.

입안에 넣고 아삭아삭 씹으면 시원하고 달다.

 

“그래도 이건 좋네. 흐응~”

 

햇볕이 물러나고 그늘진 마룻바닥에 앉아 해가 저무는 걸 바라보며 수박화채로 더위를 달랬다.

내일이면 수리기사가 와서 에어컨을 고쳐줄 테다. 그러니까 오늘은 수박화채로 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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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6

485

 

 

 

잡화점에 돌아와서 눈 앞에 바로 닥쳐온 사건에 대해 신경을 쓴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가장 큰 오산이라고 보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만 신경을 쓰고 다른 이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뜩이나마 시간이 날아가버려서 멸망한다거나, 마네킹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유랑극단이 보고 싶은 것은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과 결과물이겠지.

 

각본가가 쓰는 예언 중에서는 나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도 빗나가거나, 틀어지는 방향으로 진행이 될 테니까. 아무튼 다시 잡화점으로 돌아오면서 레시아는 늘 그렇듯 마왕의 입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앞발이나 핥으면서 카운터 위에 올라와있고, 마리아와 루시피나는 루니아 누나가 요리하는 것을 전력으로 막고 있었다.

 

서로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이라도 이 사람들은 서로 싸우겠지.

 

“이런 편안한 기분도 오랜만이로다. 300년동안 본래의 마왕생활로 돌아가서, 무시무시한 용사들을 처리했기에 긴장을 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라. 그러니 주인. 오랜만에 쓰다듬어라.”

 

마왕인가?

아니면 고양이인가?

 

가끔 레시아를 보면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시작하는데, 고양이의 모습을 오랫동안 해와서 그런지, 마왕성에서 마족들을 이끄는 그런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보단, 이런 고양이 모습이 더 정감이 가기 시작했다. 오른손이 레시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에도, 고양이의 본성이 남아있는지 자신의 머리를 이리저리 비비면서,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고양이 입의 구조상 웃고 있는 얼굴처럼 양쪽 끝이 올라가있는 구조이지만, 지금은 잠깐의 행복을 느긋하게 즐기는 중이라고 본다.

 

“주인은 여전히 쓰다듬는 것이 능숙하군. 게다가 아리엘과 같이 봉인 되었을 때도 별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니라. 만약에 여자가 또 하나 늘었다면 마왕성 지하감옥에 가둔 다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양이 베기를 사용했노라.”

 

“제가 아리엘에게 수작을 걸기보단, 아리엘이 저에게 수작을 거는데요.”

 

“그래서 문제이니라. 남자인 주제에 여자에게 습격이나 받는다니, 그거야 말로 정말 꼴사나운 모습이 아닌가?”

 

가장 맨 처음에 습격한 건 레시아거든요?

 

“그런데 잡화점 안에는 시간에 관련된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시간에 관련된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과거로 갔을 당시에 잡화점 내부에서 시간이 멈췄었고, 티아만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돌아다녔지만, 잡화점 건물에서 외부와 내부를 중심으로 시간이 따로 흐르는 것이 맞겠지.

 

아직까지 잡화점의 미스터리가 전부 밝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에 대해선 잡화점에게 물어보거나, 엘티노스에게 물어봐야 하지만...천계와 인간계의 통로가 막혀버린 이상, 엘티노스에게 물어본다는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소거되었다.

 

“그나저나 비둘기가 그렇게 걱정되는 것인가?”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입니다.”

 

머리 위에서 하얀 올빼미 하나가 내려오더니, 내 머리 위에 날카로운 발톱으로 착지하면서 말을 꺼냈다.

 

“다음부터 올 때는 내 머리 위에 착지하지 말아줘. 차라리 모자를 쓸 때 착지를 해주던가...”

 

“괜찮습니다. 마스터. 이 정도로 마스터의 모발은 튼튼하니까요.”

 

사무적인 어조로 말한들 지금 탈모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발톱이 균형을 잡기 위해,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 머리를 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시나가 잡화점에 왔다는 소리는 밖에 시간이 멈췄다는 소리인가?

 

“밖에서 우리가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도록 힘써주고 있다는 건 들었어. 여기에 왔다는 것은 지금 모든 시간이 정지했다는 소리지?”

 

머리 위에 있는 하얀 올빼미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 눈동자를 아무리 올려봐도, 마주할 수 없으니까, 시나가 앞쪽으로 구부려서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건 분신입니다. 마스터에게 힘을 공급받기 위해 잠깐 만들어냈지만, 마스터 안에 있는 에너지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이런 분신으로도 받아내기가 힘듭니다. 차라리 본체로 찾아와서 공급을 받는다면 좋겠지만, 다음에는 30체의 분신을 만들어서 공급받으러 오겠습니다.”

 

30체의 하얀 올빼미들이 이곳 저곳에서 날아든다고?

여기는 호그와트 마법 학교가 아냐.

잡화점이지.

 

“시나도 오자마자 하는 소리의 내용이 내 안에 있는 에너지구나.”

 

“하지만 마스터가 담아낸 그 에너지는 제가 방출하는 에너지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확실히 신성력과 마나, 마기를 합쳤으니까. 초창기에 창조주가 지녔던 힘과 같을지도 몰라. 시나는 다른 차원에서 창조주역할을 했으니까, 닮아있다는 것은 무리도 아닐 거야.”

 

내 말을 듣자 시나는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내 손에 쓰다듬어지고 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냥캣. 각본가는 찾으셨는지요?”

 

“아직이다. 의외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중이니라. 주인도 이렇게 잡화점에 도착했으니 슬슬 진행해야겠지.”

 

“다음계획이라뇨?”

 

여전히 내가 모르는 것들을 전부 담고 있는 판도라상자마냥, 레시아는 내 손길에서 벗어나 4발로 일어섰다.

 

“지금부터 유랑극단의 멤버인 맹수 조련사와 어릿광대를 잡을 것이다.”

 

어릿광대와 맹수 조련사를 잡는다니.

죽인다는 것보단 포획에 가까운 뉘앙스였다.

 

“같은 유랑극단의 단원들을 잡아서 고문이라도 하게요?”

 

“그런 포학한 방법으로 그 두 명이 말할 거라면 오히려 짐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살아가면서 가끔씩 봐온 것으로 보아, 그렇게 쉬울 정도로 유랑극단에 대한 정보를 말하는 자들이 아니기에, 미인계를 쓰는 작전으로 해야 할지도 모르지.”

 

그 말에 잠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미인계를 왜 그런 애들에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렇고, 누가 미인계를 사용하는 가에 대해서도 그렇고, 지금 당장 이것에 대해 반론을 하거나 막지 않는다면, 내 오래된 경험으로 예리해진 감각이 매우 위험하다고 알려줬으니까.

 

“미인계를 그 애들에게 왜 써요? 그보다 어떻게 써요?”

 

“그야 어릿광대는 주인을 맹목적으로 같은 부류에 넣으려고 하지 않는가? 맹수 조련사의 경우에는 카린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보아, 손쉽게 배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제가 그들과 마주해봐서 잘 알고 있지만, 우선 어릿광대는 제 안에 있는 월식이 사라져버린 이상, 그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저를 좋아하려고 들지 않아요.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오히려 공격해서 죽이고 힘을 흡수해가려는 포식자처럼 행동하려고 하는 거지, 어릿광대가 절 좋아한다는 의미는 절 죽이겠다는 의미와 같은 거라고요. 게다가 맹수 조련사의 행동은 여성 한정으로 매우 친절하게 대하지만, 친절한 것은 친절한 거고...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맹수들을 오히려 더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걸로 봐선, 쉽게 배신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보다 보통의 전투력으로 그 둘을 잡는다는 그 자체가 무리야.

 

“그러니 우선 시도라도 해야 한다.”

 

“시도는 무슨! 레시아! 그게 무리수라고 하는 거에요?”

 

“무리수? 그건 무슨 물이더냐? 아리수의 친구이냐?”

 

“지금 그런 말장난이 나오냐!”

 

“냐아아아아아! 어째서 아이언 클로는 변함 없이 강한 것이냐!”

 

있는 힘껏 아이언 클로를 하고 나서 오른손에 쥐가 살짝 나는 것 같았지만, 축 늘어져서 카운터에 쓰러져있는 레시아를 바라보며 시나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냥캣의 작전에는 결점이 많아 보입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알아주는 것이 시나라서 다행...

 

“마스터가 착용할 여장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 말이죠.”

 

이라 생각했는데.

 

“너희들은 그냥 날 여장시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 아냐?”

 

“우선 고풍스러운 하늘색 바탕의 하란복장을 계량한 것과 더불어, 주변에는 연분홍 빛의 날개 옷으로...마스터? 아, 아픕니다. 아이언 클로는 그만해주세요. 분신이 아파합니다.”

 

“분신이 아파하던 말던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그런 이상한 여장은 안 할거니까. 그런 기묘한 물건을 만들려고 하지도...”

 

시나를 내 머리 위에서 때어낸 다음, 아이언 클로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훈계하려고 있는 사이에, 시선이 자연스레 주방으로 쏠렸을 무렵. 루니아 누나는 시나가 말한 대로 정확하게, 계량된 하란복장과 더불어 연분홍 빛의 날개 옷이 가지런하게 접혀있었고, 오른쪽 옆머리 일부를 이용해서 땋은 듯한 머리모양에, 뒤에는 연꽃이 활짝 핀듯한 머리핀이 존재했다.

 

이럴 때는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루니아 누나는 음식을 만드는 줄 알았더니, 주방에서 코스튬을 완성한 것일까?

 

내가 말을 잘 하다가 끊어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내 평생에 기억이 남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안 입어요. 집어 넣어요.”

 

“그래도 새로운 백장미 시즌을 맞이해야 하는 걸요오?”

 

“무슨 시즌이에요? 시간이 날아가버려서 세상이 망하게 생겼는데!”

 

무의식적으로 내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화를 내자, 내 왼손에 매달려있던 시나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마스터? 화를 내면서 힘을 주면 제가 더 아픕니다. 아이언 클로는 풀어주시고 이야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전히 사무적으로 이야기하는 터라 아픈지 안 아픈지, 감정은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았지만, 날개를 파드득거리면서 거대하고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두 다리가 허공을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시나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자 축 늘어져있는 레시아 옆에, 날개를 쭉 펴면서 땅에 축 늘어진 하얀 올빼미. 그 틈에 루니아 누나가 나긋나긋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내 손바닥을 보여주며 멈추라고 무의식적으로 행했다.

 

“마왕님의 작전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요오? 카일이 여장을 한다면 어릿광대가 넘어올지도 몰라요오?”

 

“넘어온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어릿광대도 백장미의 구독자이기도 하고...”

 

“그 빌어먹을 놈의 하얀 잡지는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거야!”

 

무심코 거친 말이 산발적으로 튀어나갔다. 그 놈의 백장미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다른 이들도 그렇고, 무심결에 다른 곳을 멸망시키는 곳도 그렇고, 백장미에 연관되어있는 사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여장으로 사람 하나를 꼬시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남자가 애초에 여장하고 미인계를 쓴다는 그 자체부터 아웃.

내 기준으로 하기 싫다는 의미다.

 

“어릿광대는 애초에 성별도 모르는 도플갱어인데, 여장을 해서 미인계를 쓴다고 해서 통할 리가 없죠.”

 

“아니. 반대로 생각해서 도플갱어는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하니, 짐은 이 작전이 제대로 먹힐 것이라 생각하니라...냐아아아아! 그만! 그만하거라! 귀는 언제나 설정이 민감하다고 하지 않았는가아아아!”

 

“시끄러워! 이 바보 같은 고양이야! 설정에서 좀 조정하면서 살던가!”

 

분노에 몸을 맡긴 체 검은 고양이의 귀를 잡아 늘려버린 뒤에, 내 등에서 느껴지는 영문도 모르는 분위기에 뒤를 돌아봤을 때, 루니아 누나가 곱게 접혀진 옷을 들고 있는 상태로, 당장이라도 나에게 입히려는 투기를 보이고 있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러는 걸 보면...

 

정신상태가 아다만티움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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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비정상적인...이 아니라 비범한 잡화점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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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5

484

 

 

 

레시아는 내 무릎 위에서 장대한 계획을 꾸미는 것 같지만, 인간을 통제한다면 언젠가는 각본가가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상대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각본가를 인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까? 그보다 왜 예전보다 더 찰싹 달라붙는 기분이 드는 걸까?

 

“저기. 레시아. 예전에는 이 정도로 달라붙지 않았잖아요.”

 

“주인에게 붙어있으니 꽤나 기분이 좋아서 말이다. 마나의 소용돌이가 쳤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포근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생각한다.”

 

“그건 연인 사이들이 서로 붙어있을 때 느껴지는 감정 아니에요?”

 

“주인과 짐은 부부이니라. 당연히 그 기분은 알지만 이건 좀 차별되는 기분이다. 마왕의 입장으로는 이 단어를 말하는 것이 바보처럼 보일지 몰라도, 구원을 받는다는 느낌이 강할 정도다.”

 

구원이라.

그런 말을 들으니 나와도 거리가 먼듯했다.

정확하게는 구원을 받는 입장보단, 구원을 해주는 입장이 되었으니까.

그런 무거운 생각 때문에 잠깐 머릿속에서 놓으려고 했는데, 끈질기게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 레시아의 팔이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고개도 철저하게 내 상체에 기대고 있으니, 떨어지라는 단어를 고르고 싶지만 은은한 향이 내 입을 봉쇄하듯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응석을 부리고 싶은 건지 아닌지 몰라도, 레시아에게 질문할 것은 또 한가지 있었으니.

 

“저기. 레시아. 얼마나 지났길래 계속해서 붙어있는 거에요? 제가 봤을 때는 상당히 오래된 것 같지만, 루니아 누나를 보았을 때는 전혀 달라진 적이 없어서 놀랬거든요.”

 

“그야. 당연히 그러겠지. 주인이 사라진 뒤로 300년의 시간이 멈춰있었으니까.”

 

뭐? 라고?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지금 제가 잘못들은 건가요? 300년이라뇨? 루니아 누나가 3번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치잖아요? 게다가 300년동안 절 기다려온 거에요?”

 

“맞다. 짐은 주인을 300년동안 쭉 기다려왔노라. 모든 인간들도 그렇고, 주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사회자의 농간에 모조리 당해왔으니까.”

 

그래서 천계에서는 지상으로 내려오지 아니하고, 시나가 이곳에 없어진 이유는 대략적으로 알 것 같았다.

 

“지금 사회자는 어디 있죠?”

 

질문에 레시아의 작은 손이 옷깃을 살짝 붙잡고 대답을 해줬다.

 

“주인이 사라지고 검은 존재를 토벌하기 위해 세피르라는 몽마를 분리시켰을 무렵. 또 다른 남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검은 존재와 융합해버렸고, 검은 존재는 모든 세상을 덮어버린 뒤로 이 세상의 존재들이 아닌, 시간을 먹어 치웠다고 해야겠지. 따라서 지금까지 죽을 사람은 죽지 않고, 신체의 노화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로 이 공간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럼 지금으로부터 1초 뒤에는...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겠네요?”

 

“300년의 시간이 지났으니, 아마 시간을 다시 되찾는다면 탄력을 크게 받아 단숨에 세상이 바뀔 것이니라.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은 0.001초도 지나지 않는 사실이 오히려 무섭긴 하군.”

 

시간이 멈추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시간은 멈춰있다는 소리는 모순처럼 들려왔다.

 

“그래도 뭐...300년동안 짐의 선생이라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인간 때문에 골치 아팠지만, 바람을 피우면 안 되는 걸 알기에 짐은 지금까지 기다려온 것이니라. 주인의 경우에는 짐이 바람을 피우면 아이언 클로가 아니라,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과거의 연을 모조리 끊을 줄 아는 남자이니까.”

 

“그것도 예전에 페어링을 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거에요?”

 

“아니. 페어링을 안 해도 알 정도로 오래 지냈으니 안다. 무엇보다 마왕을 상대로 청혼을 할 인간은 없기도 하고, 주인도 얼떨결에 짐과 같이 혼인을 했지만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받아들여주지 않았는가?”

 

그야.

일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싫은 내색을 할 시간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거절하지 않았던 내가 조금은 자랑스러웠다.

 

우선 잃어버린 시간부터 되찾는 것이 우선인가? 시간을 잃었다는 것은 곧 세계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하니까.

 

“그럼 지금 시나는 어디에 있는 거에요?”

 

“비둘기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곳을 유지시키고 있다. 창조주와 같은 권능을 가졌으니 유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언제 이곳이 무너질지는 모르지.”

 

세상에 혼돈과 광기만 있으면 우리는 즐겁다라는 것이 유랑극단의 신조였었는데, 지금 제대로 난리치고 있으니 이름 값은 하는 모양이지만, 지금 당장 시나를 불러오지 않으면 존재가 소멸할 것만 같은 불안함에 레시아에게 부탁했다.

 

“시나를 불러주세요. 300년동안 이곳을 유지하기만 해도 많이 지쳤을 거에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노라. 오늘 그 비둘기는 주인에게 부족한 힘을 보충하고 간 것 같으니 말이다.”

 

“그걸 어떻게 알...잠깐. 시나가 이곳으로 오면 시간이 멈춘다는 의미에요?”

 

시나가 밖에서 유지를 하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말하고 움직일 리는 없으니, 시간이 정지가 되면 시나가 부족한 힘을 나에게 채워간다는 뜻이 되는 거겠지.

 

“시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멈춘다. 그러니 비둘기가 밖에서 우리를 위해 힘써주는 동안, 각본가를 찾아서 이곳에 시간을 써야 한다는 소리지.”

 

시간을 쓰게 만든다.

각본가가 적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지는 건가?

 

“각본가의 능력은 우주를 뛰어넘는 능력이에요?”

 

“그렇다고 볼 수 있노라. 옛날에는 신이나 마왕이 가장 높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을 가볍게 능가하는 자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노라. 지금도 믿겨지지 않아서 부정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괴롭다.”

 

옛날에 용사는 여신의 부름을 받고 마왕을 타도했다.

하지만 마왕과 여신마저 손을 못쓰는 적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까?

 

그럼 마리아는 어디에 있는 거지?

 

“마리아는 다른 차원에 있다. 주인이 물어볼 것 같아서 미리 이야기를 하지만, 그 허무의 공작은 이미 이 세상을 멸망한 차원이라고 단정짓고 도망쳤지. 사실 주인이 오기 전에 잡화점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른 차원으로 몸을 피하자고 했지만, 짐은 주인이 오기 전까지는 안 가겠다고 버텼다.”

 

“누가 도망갔다는 거에요? 마왕님. 첩이 없는 동안 이상한 말을 지어내주지 마시겠어요?”

 

뒤에 앙칼진 목소리로 레시아에게 따지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짙은 밤하늘처럼 부드러운 눈동자로 내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입 안에 있던 사탕을 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오! 카일이여! 언제 봉인이 깨어난 것이더냐! 첩에게 알려줬다면 다른 차원으로 도피를 하려고 했을 터인데!”

 

“어이! 허무의 공작! 주인을 데리고 도피라니 무슨 소리더냐!”

 

시나가 없으니까 마리아와 말 싸움을 하려고 시도를 하는 레시아를 보며 알아차린 것은, 레시아는 시나가 없어서 많이 외롭나 보다.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과 대등하게 이야기 하거나 말 싸움을 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지. 애꿎은 마리아에게 이상한 누명을 씌워가면서 지루함을 없애려고 했다.

 

여전히 연한 초콜릿피부가 검은 원피스보다 눈에 띄는 마리아에게 입을 열었다.

 

“치마부분에 그렇게 레이스가 잔뜩 달리면 빨래하기 어렵지 않아요?”

 

“첩을 만나자마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거라. 레이스가 한 가득 달리면 귀엽지 않는가? 뒤에 이렇게 붉은 리본이 거대하게 달려있으면,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한 가득 나와서 좋은 것 같노라.”

 

“어린애 같은데요.”

 

“뭣이!”

 

마리아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허리를 살짝 구부리고, 오른손을 자신의 무릎에 지탱하면서 질문했다.

 

“이래도 어른스럽지 않다는 것이더냐?”

 

“거울 안 봐요?”

 

레시아는 “쿠쿠쿡!”하고 고개를 돌리며 웃고 있었고, 마리아는 분한 표정으로 “마왕님!”이라고 호통을 쳤지만, 그것도 잠시...

 

“뭐. 첩이 이 모습으로 있는 이유는 카일이 약간 소녀취향이 있으니 맞춰주는 것뿐이니라.”

 

“그거 위험한 발언이거든요? 그리고 저는 그런 취향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상한 은팔찌를 세트로 착용하고 싶지는 않아요.”

 

“괜찮다. 지금 이 숙주의 나이는 20세가 넘어가니 합법적으로 어른이니라.”

 

그런 발언이 더 무섭다고.

 

“마리아는 뭐하고 있었나요?”

 

마리아는 다시 허리를 펴고 양손을 팔짱을 끼더니,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목소리로 한 마디를 했다.

 

“그야 다른 차원에 있는 존재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었노라.”

 

“다른 존재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그만해요. 그런 거 끌고 오면 무시무시한 일이 더 벌어질 것 같아요.”

 

“그런가? 요그 소토스는 필요하지 않는 거로군?”

 

“불러오지 마!”

 

그걸 불러오면 설령 해결한다고 해도 더 크나큰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창조신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무렵. 우리는 그 빌어먹을 각본가를 찾아내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놔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잡화점이 부활을 함과 동시에 시공간적으로 안전한 은신처가 생겼으니.

 

설령 밖에 있는 시간이 멈출지라도, 잡화점 안에만 있다면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시나는 나중에 잡화점 안에서 부르기로 할 테니, 시간이 멈출 것 같으면 잡화점으로 도망쳐주세요.”

 

“잡화점은 상당히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닌가? 시간이 멈춰도 그 안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무시무시하다. 어쩌면 짐이 못된 마음으로 마왕을 하고 있었다면, 언젠가 잡화점이 두발로 일어서서 한방에 날려버리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레시아는 내 무릎 위에 내려와서 땅을 밟았다. 이제 그나마 움직이는 인간들을 찾아 다녀야 할까? 지금 마왕에게 모든 땅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겠지만, 암묵적으로 인간을 지키고 있었던 레시아와 다른 차원을 계속해서 이동하면서 도움을 요청한 마리아에게, 잡화점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아늑한 안식처가 되겠지.

 

이제 잃어버린 시간을 어떻게 되찾아오는 가에 대해...

 

“그보다 검은 존재는 지금 사회자와 융합이 되어서 시간을 먹어 치웠다면, 사회자가 시간을 퇴장시킨 거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카일이여.”

 

서커스에서는 한번 퇴장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맨 마지막에 한번 얼굴을 비추기 위해 나온다. 하지만 맨 마지막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전부 사라진 뒤에 나타나겠지.

 

이곳에 있는 생명체는 언제쯤 퇴장시킬까?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아직까지 퇴장시킬 마음은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유랑극단은 대체 뭘 증명하고 싶은 걸까요?”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가? 주인. 역시 짐이 없으니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듯 하구나. 좋아. 짐이 주인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도록...”

 

“이상한 소리는 레시아가 하고 있는 거에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렇게까지 사회자는 검은 존재와 융합한 뒤에 시간을 퇴장시켜서 모든 존재를 멈추게 했어요. 물론 시나가 지금 밖에서 버텨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거지만, 그래도 좀 이상하지 않아요? 퇴장을 시킨다면 모든 것을 다 날려버려야 이로울 텐데. 지금은 우리가 이걸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고 싶은 행동이잖아요?”

 

사회자는 희생하면서까지 뭘 보고 싶은 걸까?

각본가는 그런 사회자에게 마지막까지 떠넘겨져서는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머릿속에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체 우리들은 아무 말없이 서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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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프레임은 머리 비우고 하기에 좋죠.

농사를 짓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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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3 프란치스카의 공개일기

돌산 방죽포 해수욕장 [2017.0730.일]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우리 가족은 갓김치가 유명하고 가득한, 또한 오동도 같은 섬들이 같이 모여 있는 돌산에  갔다. 가만히 있어도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날씨가 불 타듯이 더울 때 딱 좋은 것은 바로~~~~ 해수욕이다! 해수욕 전에 우리는 갈치조림으로 유명한 '푸른바다' 식당으로 갔다. 그 식당에서 돌산 관광객이라면 꼭 한 번은 먹어야 할 정도로 유명한 갓김치를 먹었다. 고춧가루 때문에 붉은 초록색이었고, 맛이 시원하다고 하시면서 엄마와 아빠는 쉬는 틈 없이 와구와구 먹었지만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갓김치가 맛이 없어 일단 갈치 조림으로만 배를 빵빵하게 채운 다음 드디어 내가 가고 싶고 고대했던 "방죽포 해수욕장"으로 갔다.

 

내가 엄마와 수영복으로 갈아입을 동안 아빠는 나무그늘 아래 매트를 깔았다. 니모 튜브에 공기를 채우고 준비 운동을 했다. 화장실 다녀온 후에 드디어 바닷물에 풍덩!!! 나는 아빠와 니모 튜브를 열심히 타다가 아빠 때문에 풍덩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고무 보트를 빌려서 타고 바다 수영 한계선까지 가기도 했다. 신나서 더 멀리 멀리 노를 저어 가고 싶었지만 해경 아저씨들이 더 멀리는 못 간다고 막아서 섭섭했다. 돌아올 때는 아빠가 노를 젓다가 힘이 빠져서 수퍼맨인 내가 바다에 다이빙을 해서 보트와 보트에 탄 아빠를 영차 영차 끌고 왔다. 29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초등학교 3학년인 내가 70킬로그램도 넘는 어른이 탄 고무보트를 끌고 수영을 해서 오다니, 내가 생각해도 대단하다! 또한 구명조끼를 입고 수영도 했다. 아빠는 구명조끼가 없어 해수욕장에서 빌려서 같이 수영을 했다. 수영강습에서 배운 자유형과 배영을 하니 내가 정말 돌고래가 된 것 같았다. 수경을 깜빡하고 안 가지고 오는 바람에 눈에 바닷물이 들어와 견딜 수 없어서 눈을 감은 채로 수영을 해야했다. 마지막으로 모래를 깊게 파서 돌과 해초 등을 숨겼다. 방죽포에는 미역처럼 생긴 해초가 너무 많았다. 방죽포 해수욕장 전체가 미역국 같기도 하다고 생각하니 우습다.

 

이번 해수욕을 하니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다 말고 달아난 것 같았다. 역시 여름에는 해수욕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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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아이가 된 그녀

그녀, 모두 잊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뽀글뽀글한 머리에 통통한 몸매를 하고 후줄근한 옷을 입는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글도 배우지 못했다. 평생 고되고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아낄 줄은 알았어도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쓸 줄 몰랐다. 그저 내 얼굴만 보면 끼니 거르지 말고, 물은 멀리하고, 길 건널 때는 좌우 살피기를 일러주기 바빴다. 나 없인 못 산다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나를 잊어버렸다.

여느 때와 같던 점심. 식사를 마친 그녀는 늘 달고 살던 약봉지를 뜯지 못하고 손에 든 채 꾸벅꾸벅 졸았다. 그녀와 함께 있던 이는 많이 졸리면 한숨 자고 일어나라며 그녀를 거실에 바로 눕혔다.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뇌경색. 중환자실에서 세 달 남짓. 가까스로 눈을 떴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주 어릴 적 가난하고, 아픈 기억만 남아 그녀를 괴롭혔다. 눈물 많은 아이가 되었다.

그래도 잊지 않은 것
그녀를 휠체어에 태워 산책을 나선다. 푹 쉬어서 그런지 살도 쏙 빠지고, 얼굴도 하얗게 이뻐졌다. 아이를 다루듯 살며시 손을 잡고, 말을 건네고, 얼굴을 쓰다듬는다. 내가 묻고 잠시 기다렸다 내가 답한다. 그래도 아이가 되어서도 잊지 않은 말, "바람이 차다. 그만 돌아가거라.".

 

할머니, 이제 걱정은 내려 놓고 마음 편히 쉬세요. 끼니 거르지 말고 밥 꼬박꼬박 잘 먹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웃으면서 잘 있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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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4

483

 

 

 

잠깐의 휴식을 취하려고 했는데 루니아 누나는 초인적인 회복능력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나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금이 간 듯한, 혹은 부러진듯한 상체를 낑낑거리며 기어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맞는데, 몸에서 빛이 한번 휘감기 시작하더니 모든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에너지는 몸 속을 부수기도 하면서, 치유하기도 하는 것이 기묘했다. 이 에너지는 대체 뭐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까?‘신 재생 에너지’라고 부르기에는 바보 같고, 딱히 부를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구나. 카일의 몸 속에는 3개가 전부 합쳐진 에너지가 있는거군요오?”

 

“네. 뭐. 그렇죠. 그보다 레시아는 어디 있나요? 그 뭐냐 선생이라고 말하는 사람하고 말이죠. 애초에 루니아 누나를 이곳에 혼자 있는 이유가 뭐에요? 아니, 적어도 용사가 쳐들어온다면 부하라도 같이 넣어주지.”

 

“저에게는 의미가 없으니까요오. 카일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마왕님은 선생이라고 불리는 사람과 같이 동행하고 있는 것 같아요오. 카일이 돌아오기 전까지 견문을 넓히고 오겠다면서 마왕성을 비웠어.”

 

마왕성을 비우면 용사들이 거기에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

 

“어디 여행이라도 갔어요? 마왕이? 오늘 휴일이에요?”

 

“아니. 최근에 내가 용사들을 많이 막잖아요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제가 마왕님 대리역을 맡아버려서 지금까지 무패행진을 하고 있어요오.”

 

그러니까 지금 루니아 누나를 쓰러뜨리면 자연스럽게 마왕을 물리쳤다는 업적이 생기는 건가? 다른 곳의 마왕은 그렇지 않는데, 왜 이곳에 있는 마왕은 항상 자기 일에 관심이 없는 걸까?

 

“그나저나 카일에게 졌으니, 카일이야 말로 마왕을 토벌했다는 보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네요오.”

 

사뿐하게 다가와서 주는 것은 검은색 메달이었는데, 나는 용사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루니아 누나의 손가락부터 밀어서 보상을 거부했다. 찾아온 이유는 언제나 레시아의 얼굴을 보러 온 거니까.

 

“지금 시나는 어디 있는지 알아요? 루나라던가?”

 

“시나는 잘 모르겠고, 루나는 다른 지역에서 공연하고 있을 거에요오.”

 

“오늘 보름달 떠요?”

 

나긋나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자, 그 뒤로 금발이 물결을 치기 시작했다. 보름달이 뜬다는 것은 잡화점을 쉬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아무튼 루니아 누나는 잡화점으로 귀환하세요. 이런 일은 이제 더 이상 안 해도 되잖아요?”

 

“그래도 카일이 검은 메달을 가져가야. 제가 여기서 해방이 된답니다아. 루니아 누나는 어마어마한 저주를 받고 있기에, 이 검은 메달을 회수한다면 해방이 될 수 있어요오.”

 

대체 레시아는 무슨 일을 하길래 얼굴 보기 힘들까?

검은 중갑을 벗어 던지고 그 안에는 릴리 기사단 시절에 입었던 하얀 제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탈피라도 하듯 벗어 던진 중갑이 땅바닥에 처량할 정도로 굴러다니는 동안, 기지개를 피면서 자신의 일이 끝났다는 듯이 행복해 하고 있는 얼굴을 보며, 어마어마한 스타일을 지닌 몸매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내려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다른 질문을 하도록 했다.

 

“루니아 누나. 그 선생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본 기억은 있나요?”

 

“아. 만나봤죠. 확실히 카일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어요.”

 

“비슷해요?”

 

어릿광대라면 분명 내 모습과 똑같이 바꿀 텐데.

 

“비슷하지만 카일과 전혀 다르게 사람이 싹싹하다고 해야 할까아. 응석을 잘 받아준다고 해야 할까아. 아무튼 다정한 사람이었어요오.”

 

다정한 사람이라.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사람이 선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잘 알아야 하지 않나?

 

“저와 거의 반대네요.”

 

“아뇨. 비슷해요. 카일도 다른 사람에게 항상 다정하게 굴잖아요오?”

 

네? 누가 다정하게 굴어요?

그거 누구에요?

 

“다만, 그 사람의 경우에는 태양과 같은 다정함이라면, 카일은 달과 같은 다정함이라고 해야겠지요오. 항상 밝고 응석을 받아주고 다정한 것과는 다르게, 카일은 주변에서 은은하고 고요하게...특히 둘만 있을 때 부드럽게 감싸주는 그런 거요오.”

 

확실히 루니아 누나의 설명을 들어보니...

모르겠다.

 

아무튼 인간성이 밝고 좋은 사람이라는 건 확실한 건가.

 

“루니아 누나. 지금 당장 레시아를 좀 봐야 하는데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어라? 혹시 질투우?”

 

내 마음과 표정을 떠보려는 듯이 치켜 뜨며 말끝을 살짝 올렸다. 질투라고 해야 할까? 우선 질투라고 해두자.

 

“부정은 하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게 있어요. 바보 같은 술자리로 가위바위보를 해서 인간들의 영토를 빼앗아간 것에 대해 할 말이 있으니까요.”

 

“그거 검은 메달을 천칭들의 모임에게 건네주면, 곧바로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지.

용사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지금 당장 만나서 이야기 할 것이 좀 있어요. 각본가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이 레시아라면, 빨리 해결해야 할 것부터 생기거든요.”

 

루니아 누나는 “각본가...”라고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내 앞에 손을 살짝 건넸다.

 

분명 손을 잡으라는 소리일 테니 잡았지만, 내 시야가 한 순간에 허공으로 이동하던 찰나, 온 몸은 부유공간에 떠도는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밑을 보니...

 

“저기. 여긴 어디에요?”

 

“하늘이죠오. 지금 당장 마왕님이 있는 곳으로 갈게요오.”

 

“저기. 루니아 누나.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공중에서 날아올라 어디까지 갈...아아아아악!”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이 생각났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한 명은 나를 보면서 소원을 3번 말하고 있겠지. 나는 그런 사람에게 찾아가서“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아!”라고 외치고 싶었다. 짧은 망상의 끝에는 어마어마한 충격이 그대로 전해질 것 같았지만, 루니아 누나는 속도를 줄이는 것과 동시에 나를 안전하게 안으며 안착했다.

 

“오늘 부로 이 세상의 빛을 영원히 못 볼뻔했어...”

 

땅에 발이 닿자마자 발바닥부터 허벅지까지 차례대로 힘이 방전되기 시작했고, 내 스스로가 땅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조금 행복했다.

 

“주인이 빨리 건강하게 돌아오길. 주인이 빨리 건강하게 돌아오길. 주인이 빨리...어라? 주인?”

 

연보라 빛을 지닌 소녀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체, 너무 놀라서 커져버린 붉은 두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째서 마왕이 별똥별을 보고 3번씩이나 소원을 빌고 있는 걸까?

 

“저기.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어도 이루어지지 않...”

 

“와아! 주인! 소원이 이루어졌노라!”

 

느닷없이 달려와서 안겼다는 것은 생각만큼 로망이 담겨있지 않았다. 레시아의 가냘픈 팔이 목을 제대로 후려치는 바람에 또 다시 이세상과 작별을 할 뻔했지만, 목뼈가 부러지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대체 어떤 남자가 여자가 급하게 껴안는다고 죽거나 다치냐고 물어보는데, 상대는 마왕이라서 힘 조절이 안 되면 충분히 부상을 당하거나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크로스 라인을 제대로 맞아서 헛기침이 나왔지만, 거기에 신경 쓰지 않고 레시아는 자신의 뺨을 사용해서 내 얼굴에 이리저리 비비고 있었다. 분명 인간형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고양이가 다 되어버린 걸까?

 

“주인! 봉인이 풀리자마자 짐을 만나러 온 거구나!”

 

“잡화점이 죽어가길래 그거 좀 살리고 오느라 늦었어요.”

 

“괜찮다. 어차피 짐의 계획대로 루니아에게 검은 메달을 뺏은 거 같아 다행이니라. 어쨌든 아직까지 루니아가 가지고 있다면 어서 검은 메달을 짐에게 양도하거라. 마왕이 시시하게 무너졌다는 소리가 들리면 안 되니까. 아니, 지금은 주인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것인가?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라서 그런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기가 어렵구나. 그러면 수화를 하기로 하지.”

 

그리고 양팔과 양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나는 수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니까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소리 냈다.

 

“수화는 제가 모르니 그만하시고, 지금 그 선생이라는지 뭔지에 대해 어떻게 된 건지 알려주시겠어요?”

 

“응? 선생? 아. 그거 말인가?”

 

주변을 보았을 때 선생이라는 남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지만 레시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여전히 날 안고 있는 상태로 올려다보더니.

 

“선생이라는 이름을 내걸면 주인이 짐을 빨리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인은 의외로 질투심이 강하니까 말이다.”

 

잠깐?

나 월척 된 거야?

레시아의 장난에 걸려버린 건가?

 

“그럼. 인간의 땅을 모조리 점령한 건 어떻게 된 거에요?”

 

“그것도 주인이 짐을 빨리 찾아오게 만들기 위함. 짐은 주인과 오랫동안 페어링이 되어와서 알고 있노라. 평온과 평화를 바라는 주인은 무엇보다도 아무런 일이 없기를 빌며 조용히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이니까. 그 반대의 상황이 되면 거침없이 행동하는 사내가 되지. 그래도 지금은 인간의 땅덩어리들을 되돌려줄 마음이 없노라.”

 

“그건 왜요?”

 

레시아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유랑극단 때문이니라. 주인이 윤허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짐은 정복한 땅을 건네줄 생각은 전혀 없노라. 유랑극단은 지금 주인을 부여잡고 무언가를 할 생각이기에, 지금 당장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주면, 예측하지도 못하는 위험이 있으니까.”

 

나는 잠깐 한숨을 돌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모두가 다 작정하고 선생에 대한 걸 저에게 거짓말 했다는 거에요?”

 

“아니. 그건 아니다. 선생이라고 자칭하고 짐을 찾아오는 이가 있었노라. 그 자는 유랑극단에 있던 각본가라는 녀석 때문에 조종 받고 있었지. 하지만 짐은 기억 속에서 없는 선생의 존재라고 할지라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구별할 수 있노라. 마왕이면서 선생을 따라 배운 것은,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외적인 면이 아니라, 내적인 면이라는 것을...그렇게 생각하면 주인은 선생과 많이 닮았노라. 평화가 깨졌을 때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한 거침없는 행동이...”

 

솔직히 아직까지 어린 마왕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많은 성장을 하는 바람에, 과거에 어렸던 레프리시아와는 전혀 다른 통찰력을 보여줬다. 루니아 누나는 속삭이는 듯한 바람이 새는 목소리로 “누나는 이만 쿨하게 가도록 할게요오! 카일 파이팅!”이라는 말을 남겼다.

 

왜 쿨하게 가는 거야.

이 타이밍에.

 

“그나저나 주인. 몸 안이 좀 이상하다. 보통 마나가 느껴져야 하는데?”

 

“아마. 켈모리아에게 한방 먹이려고 마법을 쓴 부작용일 거에요. 지금 제 몸에는 마나와 신성력, 마기가 한꺼번에 합쳐진 상태로 생성되고, 소비되고 있으니까요.”

 

레시아의 머리가 들썩이면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건 대체 무슨 말인가? 3개의 자원을 합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을 터인데? 그걸 성공했다는 소리인가?”

 

“성공했으니 안 날아갔지만, 봉인 되기 전까지는 제 몸이 날아갈 뻔했죠.”

 

생각대로 잘 되었지만 그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내 몸 하나만으로 받아냈기에, 수명이 단숨에 줄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줄어든 수명을 강제적으로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 봉인을 선택한 거고, 몸이 반동에 다 적응된다면 내 안에 있는 힘을 사용한다 한들, 수명이 느닷없이 2주만 남는 불상사가 나지 않을 거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을 짐의 허락도 없이 하다니! 주인은 여전히 위험한 일만 골라서 하는구나!”

 

호통이 내 귀에 따가울 정도로 날카롭게 들어왔다.

만약 호통이 예리한 칼이었다면, 내 귀는 갈기갈기 찢겨나갔겠지.

 

“그런데 유랑극단을 찾기 위해 모든 인간계의 땅을 점령했다는 거. 계획을 상세하게 들어봐도 될까요?”

 

 

레시아는 웃음이 가득한 미소를 띠며“좋아. 주인의 무릎에 앉아서 이야기 하도록 하지.”라는 뻔뻔한 요구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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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카메라 -잡화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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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3

482

 

 

 

아침이 밝아오면 해가 뜨기 마련이지만,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감았기에 중천에서 놀고 있는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봉인 한번 되었다가 잡화점에서 잠이 들었을 때,‘이것이 과연 꿈인가? 환상인가?’라고 착각하면서 신선한 기분이 들었고, 루시피나는 레시아가 없는 지금이야 말로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언제인지 몰라도 내 옆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다.

 

분명 나는 루시피나를 재우고 1층 바닥에서 잤을 텐데. 어느 사이에 이렇게 되어있는 모습은 그리 놀랄 것도 아니지. 지금은 이것보다 더 놀랄만한 일들이 내 앞에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우선 심신을 안정시키고 루시피나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움직이기로 했다. 아직까지 조용한 잡화점의 내부에서 레시아를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사키엘의 문을 이용해서 그나마 기억에 있던 마왕성으로 직접 갈 예정이다. 본래 용사가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하지만, 내 경우에는 이미 혼인까지 한 사이가 아닌가?

 

어처구니 없게 당했다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갑작스러웠지만, 그래도 지금은 만나러 갈 수 있는 수단이 다양했다.

 

어차피 나는 용사가 아니라 잡화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사람 A라고 봐도 될 정도.

 

보통 평범한 사람 A가 물품을 들고 마왕성까지 찾아가 팔지는 않지만, 그래도 용사가 아니니까 직접적으로 싸우지는 않을 것이리라 믿어야지.

 

그래서 루시피나가 잠든 사이에 마왕성으로 출발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어머나? 카일~! 오랜만!”

 

마왕보다 더 극심한 최종보스가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것을 보며, 사키엘의 문을 다시 닫아 목숨을 보존하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내 멱살을 잡아챈 부드러운 손길이, 어마어마한 힘을 담아 저 멀리 반대쪽 벽으로 집어 던졌다. 내 시야가 잠깐 반전되어있는 사이에, 어마어마한 충격과 고통이 내 온몸을 쓸어 내리고 지나갔다.

 

“아프잖아요!”

 

“미안해. 카일을 오랜만에 보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그만...”

 

반대편에서는 릴리 기사단장 시절과는 정 반대로, 검은 중갑을 입고 밝게 웃은 금발의 여기사. 루니아 누나가 나를 바라보며 반겨줬다. 루니아 누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 남을 벽으로 집어 던지는 습관이 있는 건가? 여자를 울려서는 안 된다는 부모님의 말이 떠올랐지만, 루니아 누나를 울렸다간 다음 생에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어떤 인간이 눈물을 감추기 위해 사람을 집어 던져요!”

 

마왕성에 울려 퍼지는 절규가 담긴 태클이 사방팔방으로 확산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시아라던가 마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특수한 장치라도 되어있는 장소라고 내 경험이 속삭이고 있는 사이에, 루니아 누나는 나에게 검을 던졌다. 그냥 주변에 있는 검 중에 하나를 던진 것 같은데...

 

“잠깐만요? 저는 싸우러 온 게 아니에요.”

 

“하지만 마왕님께서 시켰어요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상대를 하라고요오.”

 

“레시아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요?”

 

모든 직업이 평등하게 루니아 누나와 검을 주고 받으라고? 설마 마법사나 성직자도 검으로 싸워야 하는 거 아냐?

평등할 것이 따로 있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우선 검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발상은 하지 않으시고 계시죠? 그것만 좀 물어보도록 할게요.”

 

“검사에게 있어서 검이란 삶과 같은 법. 검사에 대한 예의라면 말이 아니라 검으로 부딪치면서 알아가는 법이랍니다아? 루나의 만화책에서는 그렇게 적혀있었어요오.”

 

“그건 만화 이야기지 현실이 아니란 말이에요!”

 

얼떨결에 날아온 궤적을 눈으로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막아냈다. 이건 루니아 누나의 개인적인 시험이라고 봐도 좋은 건가? 마법을 다 잃어버린 나에게 남아있는 거라면 일반인보다 약간 더 튼튼하고 빠른 몸밖에 없다.

 

마나로 강화한 몸이 그립기 시작한 것은 3번째 검을 받아냈을 때부터, 팔이 저리기 시작하고 근육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흘려야 하는데, 그 흘리는 타이밍을 잘못 잡는 바람에 팔을 타고 내려와 다리까지 흔들렸다.

 

“얼굴이 자동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아하니 카일이 너무 약해진 거 아닌가요오?”

 

“루니아 누나는 대체 뭘 먹었길래 이렇게 강해요? 나중에 원펀치로 백신맨이라도 쓰러뜨릴 거에요?”

 

루니아 누나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옅게 붉혀진 홍조와 붉은 눈이, 장난은 여기까지라는 걸 알리기 시작했다. 보통 저런 경우에는 지는 순간 목숨은 나발이고 백장미에 찍힐 것 같았기에, 거리를 벌려서 자세를 다시 잡고 싶었다.

 

그럴 틈이라도 줬으면 좋겠는데 주지 않는 것이 문제지.

 

“마법이 없는데 절 상대할 수 있겠어요오? 카일?”

 

“무시하려고 해도 상대할 수 밖에 없잖아요!”

 

봉인에서 풀리고 난 다음 첫 대결이라고 하지만, 루니아 누나는 예전처럼 봐줄 마음은 전혀 없어 보였다. 사자도 토끼를 사냥할 때는 전력을 다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루니아 누나가 전력을 내보이면, 내가 가루가 되는 건 시간문제.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아무리 마나가 없어도 전투를 많이 했으니 몸에 익혀진 프로세서는 사라지지 않았으리라.

 

“저는 처음부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 거 기억하시나요?”

 

“그건 갑자기 왜요오?”

 

루니아 누나는 아무런 자세를 잡지 않고 느긋하게 질문을 되돌렸다.

 

“맨 처음부터 마법에 의지한 삶을 살아온 적이 없단 거에요. 루니아 누나를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지금은 이 검으로만 상대한다는 소리죠.”

 

“당연한 소리를 한 이유라면 혹시 그 소리와 정반대로, 그 안에 있는 마법공학 물품을 준비하는 시간을 벌 속셈은 아니겠지요오?”

 

내 허리춤 뒤로 몰래 움직이는 왼손이 경직되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아는 거지?

독심술이라도 쓰나?

 

“지금의 카일이라면 많이 약해진 상태인 만큼, 잔꾀를 많이 생각했겠지요오? 그래도 누나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랍니다아? 누나는 카일에 대한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오.”

 

“그거...참 무섭네요.”

 

자연에서 떠돌아다니는 야생동물을 멀리서 관찰하는 사람인가? 그래도 지금은 마음을 다 잡고 허리춤 뒤에 있던 물품을 꺼냈다.

 

“그건 뭐에요?”

 

“이거요? 안리아스의 수정구요.”

 

“마법공학 물품은 맞지만, 그건 녹음과 녹화가 되는 수정구잖아요오?”

 

“아니. 싸우기 전에 불편해서 빼려고 한 건데, 루니아 누나가 반정도 맞춰서 당황한 것뿐이에요.”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 필요 없는 물건은 바닥에 가지런히 놓았다. 곧바로 날아드는 참격을 옆으로 굴러서 피하자, 또 다른 연격이 내 눈 앞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시작도 하지 않고 휘두르는 것은 비겁한 것은 아니고, 언제나 적의 공격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발생하는 거니까. 오히려 루니아 누나의 행동은 현실적이고 현명하다고 해야 하나.

 

-카앙!

 

롱소드의 옆면으로 막아내기에는 휘두르는 힘이 너무 무겁다. 불꽃이 튀면서 내 눈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선명했지만, 정신차릴 틈도 없이 내 복부로 날아오는 찌르기를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도록 허리를 뒤로 젖혔다.

 

림보를 할 때는 이것보다 더 낮게 한 경우는 없었는데. 허리에 강한 통증과 살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그나마 살 수 있었던 나는, 발을 박차고 공중에서 뒤로 한 바퀴 돌면서 안착했다.

 

“여전히 몸이 유연하네요오?”

 

“루니아 누나의 공격은 여전히 피하기가 어렵네요.”

 

“그나저나 예전보다 더 빠르게 반응하는 거 같은데, 정말 약해진 거 맞나요오?”

 

“누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강해지고 약해져요? 여태까지 마법을 배우고 이용한 것은 상황을 손쉽게 해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요!”

 

오른손에 들려있는 롱소드를 휘두르지만, 루니아 누나가 발로 차버리는 바람에, 잡고 있던 손목이 날아가지 않으려면 검을 놔야 했다. 발에 차인 검은 높은 마왕성 천장에 박혀버리고, 그 이후로 날아 들은 루니아 누나의 검을 나도 모르게 붙잡아 저지하고 있었다.

 

보통은 잘려나가도 이상하지 않는 괴력.

하지만 붙잡고 있던 손에 하얀 빛이 발현하기 시작하면서, 검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장갑방어구가 되어주었다.

 

“카일? 언제 그 힘을 조절하기 시작한 거에요오?”

 

“위기의 순간에는 멋대로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게 사람이니까요!”

 

운이 좋게도, 위험한 순간에 내 몸 안을 이리저리 다니던 에너지들이, 오른손에 응집되기 시작하면서 기적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악력으로 깨져나간 루니아 누나의 롱소드가 공기 중으로 사방에 흩어지면서 터졌고, 그 빛은 천천히 검의 형태로 모양을 잡기 시작했다.

 

루니아 누나의 느긋한 표정은 사라지고 진지한 얼굴로 마주보며 말을 이어갔다.

 

“설마 2단계를 뛰어넘을 줄은 몰랐는데 카일의 성장은 예측할 수 없네요오. 각본가는 왜 카일에 대해 예측을 할 수 없는 걸까요오?”

 

“그걸 저에게 물어봐도 알 리가 없잖아요. 제가 각본가도 아닌데.”

 

루니아 누나는 자신의 등 뒤에 있던 붉은 색의 대검을 거칠게 뽑았다.

 

“미안하게도 누나는 봐주지 않을 거에요오.”

 

“미안하게도 누나를 봐주지는 않을 거에요.”

 

오른손에 광검을 들고 자리를 피하자마자, 거대한 구덩이가 내 발 밑에서 생성되었다. 어마어마한 흙먼지에 잠깐 몸이 가려지나 싶었더니, 흙먼지를 뚫고 튀어나오는 루니아 누나에게 검을 휘둘렀고, 붉은 대검과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부딪치려고 했을 때.

 

거의 통과하듯이 지나가버린 빛의 검은 루니아 누나의 검은 중갑을 강하게 타격했다. 당연히 나의 경우에는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줄 몰랐기 때문에, 그 상태로 루니아 공격이 직격으로 날아왔다는 의미.

 

서로 한방씩 주고 받았지만, 루니아 누나의 갑옷은 특수처리가 되어있는지 튕겨나간 것에 비해, 나는 옷 안에 있던 비상용 단검이 으스러지면서, 겨우겨우 상체가 두 동강나버리는 위험을 피했다.

 

“카악! 제길!”

 

아픈 건 아픈 거라 충격이 그대로 전해져서 왼쪽 어깨부터 갈비뼈까지 박살이 난듯한 고통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고, 루니아 누나도 입에 피를 흘리면서 당황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카, 카일? 아무리 진지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른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요오!”

 

“아니...검을 통과하고 타격할 줄은 몰랐으니까요...으극!”

 

말하는 것도 몸이 욱신거리기 시작하면서, 말을 아끼는 걸로 마음을 먹었을 무렵. 전투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루니아 누나는 천천히 다가가면서 입을 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카일은 방금 전에 검사의 길에서도 가장 높은 달인의 경지까지 올라갔답니다. 다만, 아직까지 힘을 다루는 것이 미숙한 것 같네요오.”

 

루니아 누나는 대검을 집어넣고 나를 잠깐 흘깃 하고 바라보더니...

 

“게다가 제가 공격받아본 것도 일생에 3번째네요오.”

 

“일생에 3번째라면 루니아 누나는 어디 무패전사라도 되는 건가요?”

 

일생에 3번밖에 맞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런 궁금증이 머리에서 지나갔기에, 본래 물어보려고 했던 레시아의 근황에 대한 질문이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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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대타 후에는 집에 돌아와서

아침 워프레임을 방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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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Think & Write

여수의 사랑 by 한강 (1995)

 

#우울하다: 여수 여행을 다녀왔다. 동네 작은도서관에 아이 책 때문에 들렀다. 신간코너를 아무 생각없이 훑어보다 '여수'라는 글자에 눈이 멈췄다. '한강 소설집?' 한강이라... 맨부커상. 유명한 작가. 책으로 손이 갔다. 한 번 읽어보자. 단편소설 모음집이고 첫 번째 단편소설 제목을 따서 책 전체 제목이 되었다. [여수의 사랑]. 로맨틱하지 않는가? 그런데 내용은 정반대다. 정말 우울하다. 두 번째 이야기 [질주]의 인규.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왜 이렇게 사무치는 한이 많은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가족 때문에 덧씌워진 불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들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고 있다. 한 주인공은 결벽증으로 다른 한 주인공은 표출하지 못하고 속으로 썩어들어가도록 타들어가는 분노. 글 마무리도 우울하다. 이런 나레이터 구조라니! 주인공은 온갖 역경과 도전을 이겨내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lived happily ever after)' 엔딩을 줘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하나같이 막연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다. [어둠의 사육제]는 결국 명환의 자살로 끝난다. 그 자리를 그냥 지나가고 마는 주인공.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헐떨거리는 인간들. 구질구질하다.

 

#되삶, 이것이 진짜 인생: [야간열차]의 영현과 동걸이를 만나고 책을 잠시 덮는다. 이제 한강 작가의 글 스타일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걸까? 그러고보니 우울하다 암울하다 투덜대면서도 한 글이 끝나면 허겁지겁 다음 단편으로 눈길을 옮기는 나를 보며 이 답답하고 불쌍한 인간들이 이끌어가는 삶이 내게 위로를 주나 궁금해한다. 그러고보니 이만큼 현실적인 소설이 없는 것 같다. 모든 소설은 희안하게 일이 해결이 되고 평온한 결말을 맞는다. 그렇게 되어야 나도 마음이 편하다. 내 인생도 그렇게 모든 문제가 속시원히 해결되고 모든 갈등이 풀리며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엔딩이 있을 것 같아서 함께 기분이 좋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않는가? 결코 현실은 이럴 수 없다는 것을. 마음을 놓는 순간 더 높은 파도가 뒤통수를 치고 더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너무나 뿌리가 깊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 대야 할지 모르는 운명에 휩쓸린 인생의 경우 잠깐 안도의 한숨을 쉴 지언정 지난한 인생은 큰 변화가 없다. 이것이 우리의 진짜 인생아닐까? 드라마틱한 엔딩이 내 근심을 잠시 잊어버리게 할 수는 있겠지만 잠시 취해 잊어버릴뿐 없어지지 않는다. 엔딩은 또 다른 고민의 시작이고 우리는 이렇게 되살고 또 되살고 또 되산다. 뚜렷한 해결책도 없이 피로한 현재진행형으로 끝나는 엔딩이 오히려 내 삶에 위로를 준다. 이것이 이 작가의 힘이란 말인가? 그런데 결국 마지막 단편은 읽지 않았다. 그만 우울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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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3 프란치스카의 공개일기

오동도 바닥분수 [2017.0729. 토]

 

가족 휴가때 우리 가족은 오동도에 갔다. 오동도는 여수에 있는 섬 중 하나다. 우리 가족은 처음에 차를 타고 공용 주차장에 차를 새우고 오동도 섬까지 걸어갔다. 섬 까지 가는데 한 15분쯤 걸렸다. 오동도는 동백꽃으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동백꽃에는 슬픈 스토리가 있는데 어부의 아내가 도둑놈들한테서 도망치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어서 한 겨울에 아내의 무덤에서 핀 빨간색 꽃이 바로 동백꽃이라 한다. 오동도에서 나는 배를 안전히 목적지로 데려다 주는 등대를 봤다. 오동도 섬 파도의 소리를 들으니 마음의 상처, 머리의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오동도에서 내가 가장 신났던 곳은 바닥분수이다. 분수 사이로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달리다가 분수샤워도 하고, 분수에서 "태-권-도!"도 했으며, 또한 슬라이딩도 했다. 분수가 하늘만큼 높이 올라가서 내 머리 위로 물이 퍼부을 때 나는 소나기가 와서 불볕더위가 도망치는 느낌 같았다. 그렇지만 문제는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그래서 아빠가 숙소에 다시 가셔서 바닥분수가 끝나는 7시에 맞춰서 옷을 가지고 오셨다.

 

나는 내년 봄에 와서 화려한 동백꽃을 꼭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