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2 - 2

575

 

 

 

머나먼 과거.

바다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존재들은 한낱 단세포생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경쟁하여 살아남고 진화하게 되었으니, 먼 훗날 복잡한 기관을 가진 생물이 되어, 각기 다른 환경에서 적응했고, 그 이후로도 멈추지 않는 성장은 지능을 발달시켜 무리를 만들고, 우월한 유전자를 찾아 번식을 하며 경쟁자를 죽이고, 터전을 만들어 후손을 위해 죽어갔다.

 

과연. 이런 말을 들어보니 창조주가 수많은 종족을 뱉어냈다는 말은 믿지 않게 되는군. 사실상 창조설에 대해 믿지는 않지만, 창조주의 존재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매우 높긴 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창조주가 ‘설레여라 얍!’하면서 만든 존재가 아니라, 실험정신으로 투철한 진화설까지 확립한다면, 결국 우리를 탄생시킨 건 창조주가 되는 거다.

 

그러나 창조주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릿광대는 내가 과거에 선생으로 변장했던 모습을 이미 알고 있었고, 레이베리아는 보이드로 모든 것을 지우려고 하고, 설상가상으로 수정구에선 염라대왕이 계속 난동을 부리는 오후였다. 여전히 겨울이라 쌀쌀하지만 한파는 지나가고, 약간 따스해진 햇빛을 만끽하며 흔들의자에 앉아 허브티를 마시고 있을 무렵.

 

생각만큼은 긴박하게 돌아가서 조만간 급정지가 필요하리라 판단했다. 어릿광대가 과거로 시간여행 할 때의 변장한 내 모습을 알고 있다면 둘 중 하나인데.

직접 봤거나.

누가 보여줬거나.

 

저 두 개가 아닌 이상 다른 방법으로 알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어릿광대가 월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엔 시기가 너무 이르고, 나 또한 과거로 갔을 때는 시나로 인해 잠식되어있던 월식은 모조리 제거되었을 시기다.

 

서로 맞지 않는 시간대이니 월식의 종족특성간의 정보공유는 물 건너갔고, 나머지는 기록에 따라 누가 보여준 거 아니면, 어릿광대가 스스로 시간여행을 했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도대체 누가 유랑극단에서 시간여행까지 하는 만행을 저지른단 말인가? 당연히 시간이 정지되어버린 세계에서 공간마저 없애려고 했던 유랑극단이라서 가능하겠다만, 역시나 그거마저 시기가 너무 이르다. 오히려 시간을 조종할 수 없어서 티르를 조종해 호문쿨루스로 난장판을 벌였으니까.

 

그렇다면 시간의 파수꾼을 통해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들도 지능이 있는 생명체인만큼, 무언가 자신과 맞아떨어지는 사상이나 개념이 있으면 친근해지기 마련이다.

 

시간을 지키는 정의의 수호자라고 해서 타락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시간의 파수꾼 중 누군가가 유랑극단과 오래 전부터 협력하고 있다는 말이 될 테고, 시공간에 관련된 정보를 넘겨줬다는 경우를 통해, 날 300년 뒤로 밀어 보내버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홀짝하며 마신 허브티는 배를 편안하게 하고, 머리는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만끽할 무렵. 안리아스의 수정구로부터 연락이 도착했다.

 

[음? 여장한 잡화점의 주인은 어디 있는가?]

 

“왜 그거부터 따지고 드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염라대왕님.”

 

짙은 붉은색 눈 화장이 슬슬 부담스럽지 않게 느껴진다는 건, 그 사람의 개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일까? 치켜 뜨는 모습에는 카리스마가 느껴지지만, 최근에는 매우 귀엽게 느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없다면 본론만 간단히 말하지.]

 

“천계의 동태를 파악하셨나요?”

 

[아니. 여장하고 다시 본인에게 연락하거라.]

 

“그러니까 왜! 내 여장에 집착을 보이냐고요!”

 

평화로운 오후를 즐기던 나의 시절은 단 5분만에 여장이라는 키워드 한방으로 모조리 날아갔다. 명계의 지배자가 살아있는 인간의 여장을 보고 싶어하다니? 이거야 말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몇 초나 지속되었을까?

 

[하...정말 실망이로다. 본인은 지금까지 명계를 지배하면서 남에게 부탁을 해본 경험이 없다. 당연히 부탁을 당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언제나 독보적으로 결정을 해오고 판결했으니 말이다. 그로 말미암아 본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고집만 본다면 레시아보단 위에 속하지만, 루니아 누나보단 아래에 속하기도 하고...

 

“아뇨. 알아도 모른다고 할 거에요.”

 

[칫!]

 

염라대왕이 혀까지 찼다.

대체 백장미의 영향력은 어디까지인가?

 

[본론만 말하도록 하지. 천계는 멸종한지 오래다.]

 

멸종?

 

“잠깐만요. 멸종이라뇨? 발키리와 천사들은요? 모조리 다 어디로 갔어요? 상급신들은? 그 신들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길래 멸종된 거에요?”

 

엘티노스가 있는 이상 멸종은 아닐 터.

 

[말 그대로 멸종이다. 천계에는 더 이상 천사, 발키리, 심판자, 하급신, 상급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소멸해버렸다고 봐야겠지. 애초에 천계로 부름을 받은 이들은 명계로 와서 다시 환생할 수 없으니 말이다. 환생할 수 없는 불멸의 존재들을 소멸시킨 것도 꽤 특이한 경우로다.]

 

불멸의 존재가 소멸해서 멸종을 당했다면, 시간의 파수꾼이 유랑극단과 함께하고 있다는 가설이 점점 힘을 받게 된다. 무시무시한 일이 그대로 내 생각대로 벌어진다면, 그 다음은 잡화점부터 제거하려고 들겠지.

 

그런데 시간의 파수꾼이 왜 나에게 직접 나서지 않고, 몰래 유랑극단과 손잡으며 움직이고 있을까? 그것도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다.

 

“그렇군요. 멸종이라 보기엔 한꺼번에 봉인되어있을 수도 있으니 잘 관찰해주세요. 제가 만일 천계에 갈 수 있었다면, 시간을 돌려서 무슨 일인지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애석하게도 저는 천계로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이 없거든요.”

 

[한낱 인간이 천계에 출입할 자격이 있다는 거야말로 이상한 거다.]

 

“아니, 그건 그렇지만. 예전에는 출입도 가능했었다고요. 300년전에 말이죠.”

 

300년전에는 아우리스 여신이 존재했으니까.

 

[본인은 모르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염라대왕이 말을 늘리며 잠깐 자리를 비켜주는 듯했다. 그리고 10초뒤에 짙은 회색의 로브로 몸을 둘러싼 소피아가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겼다.

 

[아빠! 좋은 오후!]

 

레시아와 비슷한 외형이었지만 조금 더 앳되고 밝게 웃는 미소부터 눈에 띄었다. 레시아와는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미래의 나와는 매우 사이가 좋은 듯한 분위기. 안리아스의 수정구를 준 이후 연락횟수도 늘어났다. 나 또한 좋은 오후라고 답을 했는데, 타이밍 나쁘게 검은 고양이가 내 왼쪽 어깨로 올라왔다.

 

“주인. 아직도 쉬는 건가? 음?”

 

[어라?]

 

검은 고양이와 명계의 뱃사공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시아였다.

 

“주인! 어째서 어린 시절의 짐의 모습이 여기에 있는 건가! 안리아스 수정구는 +9강까지 강화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이상 강화를 해버리면 파괴되거나 변질이 되어버린다!”

 

“아니. 강화기에 넣은 적이 없...”

 

[아빠! 그 도둑고양이는 또 누구야! 지금 당장 사지를 뽑아서...]

 

“도둑고양이가 아니라 이쪽이 레시...”

 

잠깐만? 레시아가 검은 고양이라는 사실을 모르나? 그럼 소피아가 살아가는 동안 레시아가 동물로 변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못 봤다는 소리잖아. 그리고 고양이에게 도둑고양이라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짐은 타락의 마왕 레프리시아다. 과거의 나인지 아니면 우연히 닮은 객체인지에 대해 알릴 것을 명하노라.”

 

[뭐? 레프리시아? 그렇군! 나의 영원한 라이벌의 과거인가!]

 

어쩌다가 모녀관계가 라이벌관계로 진화를 한 걸까?

 

“호오? 라이벌이라? 아쉽게도 지금 그대의 모습을 보아하니, 짐의 라이벌이라고 떠들고 다니기엔 12억하고도 139만광년정도이르다.”

 

[웃기지마! 너의 마수로부터 아빠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고!]

 

부부관계는 어떻게 하면 내가 마수에 빠진 걸로 되어있는 걸까? 마치 내가 반 강제로 레시아에게 끌려간 것처럼 보이잖아?

 

“저기! 잠깐만! 그만들 좀 싸워요!”

 

소란이 더 커져서 레시아와 소피아가 수정구를 박살내기 전에 중재를 시도했다. 적어도 내 말은 잘 따를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결과는 다행히도 레시아와 소피아의 말싸움이 멈추고...

 

-파아앙!

 

레시아의 마법에 휘말려서 잡화점의 창문을 깨고 4M밖으로 더 날아갔다. 뭐가 다행히도 말싸움을 멈춘 건가? 결국 감정조절을 못하고 마법을 날린 건데.

 

“여전히 아파죽겠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상처 속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하얀 올빼미가 날 보자마자 날아와 입을 열었는데.

 

“마스터. 이곳에서 자면 입 돌아갑니다.”

 

“충고는 고마운데...나는 이곳에서 자려고 한 게 아니거든?”

 

다른 차원에선 창세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람파시나. 줄여서 시나라고 부르고 있지만 정찰을 다녀왔는지 아직까지 하얀 올빼미는 내 주변에서 활공하고 있었다.

 

“레시아와 그 후손은 왜 이렇게 살벌한지 아직도 모르겠네.”

 

“후손? 그 냥캣에게 후손이 있다는 겁니까?”

 

“아. 소피아라고 명계에서 뱃사공을 하고 있더라고, 기괴하게도 살아있는 상태에서 명계의 배를 조종하고 있어. 안리아스의 수정구를 주며 자주 연락하라고 하긴 했는데, 오늘 레시아와 마찰이 빚어져서...”

 

“결국 마스터는 마법을 맞고 날아온 전개입니까? 좀 더 참신하게 마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날아오길 바랍니다.”

 

요즘 따라 이 올빼미도 내가 구르는 모습에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좀 더 참신한 아이디어로 구르라고 강요하고 있다니.

 

“그보다 마스터. 왼팔에 있는 건 월식입니까?”

 

왼팔에 감겨있는 검은색의 뱀 조종자.‘히드라’에 시선을 살짝 돌렸다.

 

“지금은 협력하는 사이야. 어릿광대를 찾거나 유랑극단의 본진을 찾으려면 꼭 필요해서.”

 

“그렇군요. 하지만 마스터에게 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히드라를 대신해서 입을 열려고 했다가, 검은 사슬이 멋대로 움직이더니 이윽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웃기지 마라. 멸망한 차원의 여신이여. 오히려 이쪽은 조용히 죽고 싶었건만, 잡화점 주인의 협박과 폭력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니는 것뿐이다.”

 

“협박과 폭력이라니?”

 

폭력이라기엔 히드라가 먼저 공격해서 반격한 것뿐이고, 협박이었다면 협력하는 관계가 아니라, 내가 부려먹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겠지. 이건 좀 억울했다.

 

“나처럼 평화적이고 온순한 사람이 협박과 폭력이란 키워드를 사용하다니? 그런 유언비어를 퍼트리면 안 되지.”

 

“직접 경험한 입장에서...”

 

“맞을래?”

 

히드라는 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왼팔을 감싸며 가만히 있었다.

 

“뭐 어쨌든. 서로 협력을 하면서 살아야 좋은 세상이 되지. 그렇지 않아?”

 

“마스터에게 방금 섬뜩한 무언가가...”

 

“응?”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웃고 있는지 몰라도 시나마저 인정했으니, 평화적이고 온순한 사람으로 증명되었다.

 

“아 맞다! 이게 문제가 아니지! 시나. 한가지 확인할 것이 생겼어요.”

 

“뭡니까? 마스터?”

 

“샤이어의 행방을 좀 알고 싶은데, 염라대왕의 말을 들어보았을 때 천계에 있는 모든 자들이 멸종해버렸다고 하더라고요.”

 

“멸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누군가의 소행으로 인간의 몸 속에 갇혀있는 것뿐이죠.”

 

“인간의 몸 속에 갇혀있다고?”

 

그 많던 개체수가 각기 다른 인간의 몸에 갇혀있다?

이건 또 어떤 난장판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

너무 피곤해요...

살려ㅈ...

글 이어보기

유리병 편지

편지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시지요?

저를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 날이 많아 몸을 웅크리게 되는 날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잠깐 날이 풀린 틈을 타 오랜만에 안부를 전합니다.

 

만남이 중단된 이후로 당신을 마주칠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물론 저에게나 당신에게나, 혹은 그밖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실 거라 생각을 했지만요.

그래도 가만히 그림을 그리는 당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라던가, 당신만의 공간에서 전해지는 좋은 음악들을 들으며 나른한 휴일을 보내는 일이라던가 하는 일상적 기쁨이 사라져서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었어요.

그게 무엇이든, 이유가 정리되거나 종료가 되고 나면 언젠가 그곳에서 당신과 당신의 그림자와 당신이 무심히 틀어주던 음악을 반갑게 만나볼 수 있게 되길 희망하며 지냈습니다.

 

실은 얼마 전 우연히 당신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많은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는 당신에게 차마 다가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그냥 반갑다는 마음만 품고 있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는구나, 이토록 수고로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피로감을 느낄 수 없는 어깨는 여전하구나. 추운 겨울밤에 움츠러들지 않은 누군가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일들로 많이 힘들었던 지난밤과 새벽들에 울다가도, 그런 장면들이 생각나면 또 마음이 따뜻해져서 위로를 받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오래 전 알고 있던 당신은 너무나 순수한 사람이라, 본인의 마음에 떠오르는 순간의 생각들 혹은 감정들이 곧이곧대로 비추어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이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다시 돌아왔을 때 마음이 이상했고 또 눈물도 많이 났습니다.

 

당신을 둘러싼 외부의 환경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고 또 당신의 생활양식에도 큰 변화들이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무언가는 당신 안에 남아있구나. 참 좋다. 참 감사하다. 그런 생각에, 당신에 대한 믿음에, 주변에서 아무리 이를 가는 소리, 쇠가 부딪치는 소리, 벽을 부수는 소리들이 들려도 악물고 버텼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사는 세상에서는 참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또 알지 못했던 종류의 언어들, 이상하리만큼 무서운 생각들도 떠다닙니다. 1년 전에 전 참 나약한 사람이었는데, 걷다가 뛰다가 하다 보니 온 몸에 굳은살이 배겨서, 이제는 정말 강해진 것 같아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이제 꾹 누르듯 마음에 찍어놓은 믿음 절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생긴 것 같습니다.

 

잘 지내고 계시지요?

저를 기억하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글 이어보기

잔상

 

행복은 무엇일까

자기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처럼

은은히 빛나면서도

언제 꺼질지 모르는

그런 불안함일까

 

타인에게 기대는 한편

주변에 좌우되는 

행복이라면

자신을 주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금씩 내려놓고 벗어나는 법

 

살아가며 자라며 

그 방법을 익혀야 한다

본래 아무것도 없이

일차원적 환락과 값싼 입맛에

익숙해지도록 명멸하는 빛들이 있었지

이곳은 정신을 말살시킨다

 

태어나서부터 말살되어 있어

자기가 텅 빈 바보가 된 줄도

모르고 사는 삶을 지속하게끔 한다

원망하지 않는다

하잘것 없는 감정으로 나를 

소모하고 싶지 않기에

 

벗어난 사람들만이 안다

인생은 합리화와 양보의 연속

애초에 그럴 상황을 만들지 않는

편이 더 좋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서로 교차해서는 안된다

섞이고 모일 수는 있지만

삶 하나가 다른 쪽을 침범해서는 

안된다 생은 모두의 것 

누군가 말했지 그러나 누구도

 

남을 온전히 믿어서는 안되고

자기를 맡겨서는 안되는 것을

그들도 알지 않았는가

딱 부러지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호로비츠의 피아노 

별이 하나 둘 울리는 것 같았다

 

두통이 몰려왔고

그런 와중 생업은 이어가야 했지

여자들은 힘겨웠다

하지만 그들의 일이다

땅거미가 지면 

부풀어오른 흰 뺨의 아이들이

 

쏟아져나왔다

슬픈 광경이었다

세포 하나에 집착하는

생명을 완강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극도의 이기심

태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낙엽색 외투와

갈색 머플러가

흩날리는 가지처럼 흐트러졌고

새들은 새들은 솟구쳤다

겨울의 반이 사라져가며 

새 이파리를 기원하면

 

근본 없는 후손들의 

체면 치레가 곳곳에 불붙었다

술도 시간이 흐르면 발효되는데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썩는다

눈빛부터 악취를 풍긴다

목소리에 향기를 품은 나는 

 

가장 어두운 봄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고단한 나날도 하나둘 불이 꺼졌고

한데 엉킨 팔다리도 움직임을 멈췄다

무의미한 연극

암흑 속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2 - 1

574

 

누구 때문에 일이 힘들어지고 있다.

그런 경우는 매번 나온다.

설령 그게 내 탓이라고 한들,

불평만 해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세린을 통해 자신의 몸 상태를 살펴보는 카일의 생각

----------------------------------------------------------------------------------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더라 해도,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이라면 바로 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 기본적으로 지성체라면 나를 우선시해야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패턴을 지니고 있다. 지금 당장 굶어 죽을 거 같은데 남에게 돈을 기부할 마음이 드는가? 당연히 아니리라 생각한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기부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최고의 천사이며, 최고의 얼간이나 다를 바가 없는 일.

 

그러니 나는 천사도, 얼간이도 되기 싫어서 나 하나 살겠다고,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와중에 정기검진을 받아야만 했다. 잡화점에서 신비로운 코발트 블루 빛의 여성은 날카로운 눈으로 매번 나를 쏘아봤다. 연한 갈색의 스웨터에 검은 스커트를 입고, 그 위에 하얀 백의를 걸쳤는데 의사라도 되는 건가?

 

“흐음.”

 

새하얀 검지손가락이 푸른 빛의 옆머리를 살짝 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길래 그리 고민을 해?”

 

“바보 같은 일이 일어났어.”

 

바보 같은 일이라?

매번 나를 질타하는 잡화점의 중추인격인 세린은 이내 한숨 패키지를 풀었다. 아직까지 밖에 있던 싸늘한 한기가 그대로 나오는 듯, 하얀 입김이 퍼져나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정말이지 이곳에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네.”

 

“세린. 너는 중추인격이라서 나갈 수 없잖아.”

 

“아니. 나 말고 너 말이야! 이 멍청아!”

 

그렇다고 욕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성난 얼굴이 내 얼굴 앞까지 들이 밀며 청진기를 이마에 꾸욱하고 눌렀다.

 

“어째서 너는 두개골에 뇌가 들어있으면서 그런 헛소리를 난발할 수 있는 거야? 아니면 뇌 자체가 헛소리 제조기인 거야? 헛소리만 하는 뇌는 필요 없지 않아? 지금 이 기회에 목 위에 있는 모자걸이 먼저 날려보내줘?”

 

“펴, 평소보다 적극적이네. 상냥하게 대해줘?”

 

-파악!

 

“아악! 내 머리! 청진기로 때리는 게 어디 있냐!”

 

덕분에 두개골이 흔들리는 기분을 맛보며 땅에 굴러다녀야만 했다. 여전히 새하얀 공간에서 끔찍한 벌레를 본 듯한 얼굴로 나를 쏘아본 세린.

 

“상냥하게 때렸으니 그리 아프진 않지?”

 

이윽고 살인이 가득한 미소가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저 미소는 정말로 사람을 죽일 법한 미소니 지금부터는 몸을 사려서 명줄을 이어 나아가도록 하자. 여전히 잡화점은 나보다 강해서 섣부르게 덤빌 수가 없으니까.

 

“언제부터야?”

 

내 손이 멋대로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을 강요하고 묻혀있던 내역을 꺼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시공간마법을 보이드에서 사용했을 때부턴가? 물론 그 때는 몸이 죽을 듯이 아팠는데, 나중에 가면 갈수록 편안하고 시공의 눈을 오랫동안 개안했는데도, 부작용이 거의 없더라고. 정말 신기한 일이야? 그렇지 않아?”

 

“그러네. 신기하네!”

 

이번엔 뾰족한 검은색 구두굽이 내 허벅지를 짓눌렀다. 너무 아파. 그만 좀 해줘.

 

“아아악! 그러니까 그만 좀 때려! 가정폭력이야! 가정폭력이라고!”

 

“뭐가 가정폭력이야! 이 멍청이! 결국 인간을 벗어 던지고 네가 창조주가 될 작정이야!”

 

검은 구두가 이리저리 비틀 때마다 허벅지 근육과 내 입은 비명을 질렀다. 혹시라도 건강진단을 받을 때, 여의사가 진찰하러 온 환자를 때리고 구두굽으로 밟은 다음 웃으면서 이리저리 비튼다면 신속히 탈출하길 바란다.

 

“내가 창조주가 되다니? 그저 평온과 평화로운 생활을 바랄 뿐이야.”

 

“말만 평온과 평화지. 직접 하는 꼬락서니는 파괴자와 다를 바가 없잖아!”

 

그래도 나름 노오력하고 있는데...

 

“뭐,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나는 인간인데 취미로 창조주를 하고 있는 거야. ‘눈을 떠보니 나는 창조주가 되어있었고 엄청 강해져 있었다.’라는 멘트까지 집어 넣으면, 인간과 별만 다를 바가...”

 

-파악!

 

아 진짜 또 왜!

 

“정말 바보야? 아니면 멍청한 걸까? 다른 세계의 멘트까지 빌려서 그런 짓을 꼭 하고 싶어? 제발 정상적인 생각을 바라는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실천할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허벅지에...구멍 뚫리겠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고만해라...”

 

“시끄러워. 하와이로 보내버리기 전에.”

 

드디어 허벅지에 꽂혀있는 듯한 구두굽이 뽑히듯 나왔고, 고통에서 해방된 내 허벅지를 무의식적으로 한쪽 손을 이용해 쓰다듬어 고통을 완화했다. 말로 이을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며 구멍이 뚫렸는지 아니지 확인하려던 찰나에 세린은 입을 열었으니.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대로 모든 평행차원이 융합하길 기다리면서 세상이 쪼개지길 기다리는 거야?”

 

“그건 아니지. 세상이 쪼개지기 전에 유랑극단은 해결하고 갈 거야.”

 

“카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본래 시간대로 돌아가는 게 어때? 너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겠지? 이럴수록 부작용은 계속해서 생기고...”

 

“지금 당장 돌아간다면 300년 뒤에는 멸망했다는 결말이 나오잖아? 후세에 살아갈 수 없다면 후손에게...”

 

“너의 후손을 걱정할 때야? 네가 없어도...”

 

“아니. 지금은 내가 이 시간대에 있잖아. 그럼 최선을 다 해야지.”

 

세린은 내가 말을 가로막아도 별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진저리나...정말...”

 

짜증이 났는지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세린. 마지막 그 한마디가 내 심장을 찔러 넣었다. 내 고집하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하기엔 1초도 아까울 지경이지만, 휘둘리는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는 편이 더 좋겠지.

 

그래도.

세린은 내 뜻을 받아주는 모양이다.

 

“주인. 아직도 멀었나? 슬슬 검사가 끝날 시간이니라.”

 

밖에서 기다리라는 내 말을 이미 짓밟아버렸는지,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검은 고양이. 말을 하는 고양이는 이제 내 관점으로 볼 땐 일상이 되었다. 놀랍게도 작은 체구에 비해 따라붙는 명칭이라면 타락의 마왕이라는 칭호가 붙는데. 진명은 레프리시아. 그리고 내가 멋대로 줄인 이름이라면...

 

“레시아. 노크를 하고 들어오라고요. 그 이전에 밖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은 어디로 내팽개치고 문을 열은 거에요?”

 

“그야 당연히 말머리성운에 보내버렸다. 짐에게 있어서 주인의 말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마왕은 언제나 먼 미래를 내다보고 움직여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저번에 노크를 하며 들어오라고 했을 때도 문짝이 부셔져서 노크를 하지 말라고 했노라.”

 

“그건 레시아가 노크를 할 때 힘 조절을 잘못한 거고요!”

 

마왕이라고 한들 남의 허락 없이 문을 마구자비로 열어 주의를 준 적이 있지만, 노크를 할 줄 모르는 마왕이기에 문을 살짝 두드리라는 말만 믿어 날려버린 적이 있다. 물론 날아간 문짝은 내가 맞아서 한동안 부러진 뼈를 붙이느라 고생했었지.

 

“그래서 주인의 몸은 어떠한가?”

 

“뭐. 아직까진 아무런 일도 없네요.”

 

“그나저나 기이하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선 거침없이 진행하던 주인이, 느닷없이 몸 상태를 체크해야 한다고 해서 오후에 있을 일정을 취소할 줄이야. 역시 인간의 수명은 너무 짧은 건가?”

 

“정기적으로 몸을 점검하는 게 뭐가 나빠요? 그리고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니거든요? 21세에요! 21세!”

 

“21세에 300이 더 붙지 않는가?”

 

이놈의 미래를 내가 빨리 떠나야 하나? 그렇게까지 늙지는 않았는데.

 

“레시아도 앞에 300이 더 붙거든요!”

 

“마왕은 마계의 아이돌이기 때문에 나이를 무시한다. 그러므로 300이란 숫자는 주인에게만 허용되노라.”

 

검은 고양이는 자신의 왼쪽 앞발을 핥으며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 월식마저 굴복시켰다는 말은 주인의 에너지가 안정을 되찾았다는 건가? 아님 반대로 주인의 몸을 갉아먹고 있다는 의미인가?”

 

역시 마족이라서 그런가...시간이 지날 때마다 습득하는 지식의 양이 다르다 보니, 말을 얼마 나누지도 않았는데 손쉽게 추측하여 나에게 질문했다.

 

“뭐. 후자 쪽이죠. 지금 저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요.”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 곧 붕괴할 것만 같은 원자핵처럼 말인가?”

 

“왜 비유가 엉뚱한 쪽으로 넘어가는 거에요?”

 

나더러 알파붕괴와 베타붕괴 중에서 하나를 고르란 소리 같잖아. 기괴한 소리를 내뱉는 마왕의 장단을 맞추기 위해 기괴한 소리로 받아 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3개의 기운이 융합되어있는 에너지는 내 몸을 지금도 갉아먹고 있겠지. 예전에 월식에게 잠식되어있을 때는 시나가 어떻게든 해결해줬지만 지금은 누가 이 일을 해결해줄까?

 

없겠지.

서서히 인간에서 벗어나고 있는 나를 우연히 앞에 걸려있던 거울을 통해 바라보았다.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 평범한 나. 언제나 잡화점을 운영해야 하는 사람은 인간이어야만 한다. 그런 규칙이 있으니 내가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봐야겠다.

 

“주인은 잡화점을 그만두면...이제 어디로 갈 생각인가?”

 

내 어깨 위로 올라온 검은 고양이가 말을 걸어왔다. 어쩐지 왼쪽 어깨에 살짝 무겁다고 생각했더니만, 붉은 눈이 나를 직시하며 대답을 바라고 있었고, 가슴속에 또 다시 한숨을 포장해서 입에 내뱉었다. 한숨을 내뱉을 때마다 정신적으로 늙어가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이 머리를 찔렀다.

 

“여행이라도 해야죠. 시공간마법도 배워놨으니 경비는 들지 않아서 좋을 것 같아요.”

 

“그런가? 그럼 짐도 따라가지.”

 

“레시아의 선생을 찾으려고요?”

 

“당연하지 않는가? 과거에 돌아가면 짐의 선생을 찾는 일부터 계속 진행할 것이다.”

 

쓴웃음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만두세요. 찾을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노력하면 안 되죠.”

 

“찾을 수 없다니. 짐은 마왕이니라. 못 이루는 업적 말고는 전부 이뤄본 자이기도 하며, 선생이라면 분명 긴 시간 동안 살아남아 짐을 보기 위해...”

 

이런 바보 같은 숨바꼭질이 어디 있는가?

정작 본인이 찾고 싶어하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멀리 있는 환상을 보려고 하다니.

예전에는 시공간을 지키는 파수꾼들 처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짓말로 숨겨놨지만, 이미 300년의 미래에서 난장판을 부리고 있는 나에게 그 어떠한 견제도 없으니, 슬슬 사실대로 풀어 넣기로 해보자.

 

“레프리시아.”

 

고작 이름 하나 불렀을 뿐인데 검은 고양이가 감전되듯 경직 당했다.

 

“미래에서 과거로 온 나를 곧바로 습격한 일은 기억해?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되어 내가 가위바위보에 대해 알려줬었지.”

 

“주, 주인?”

 

“많이 당황한 것도 이상하지 않겠지. 물론 나도 솔직히 매우 놀랬다고? 울보가 언제부턴가 마왕이 되어 잡화점 멤버가 되어버렸으니까.”

 

처음에 보았을 때는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결국 내가 의도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정말이지 시간여행이라는 타이틀만 들어가면 너무 골치가 아파진다.

 

“그런가...그렇게 되었군.”

 

나지막하게 체념하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바로 들려왔다.

 

“짐이 선생을 찾아서 하려던 목표는 이미 이룬지 오래였구나.”

 

연이어 부드럽게 흐르는 음색이 주변 공기를 감쌌다.

 

“뭐. 어쨌든 이렇게 된 거에요. 레시아. 상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았을 거라 생각해요.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것은...”

 

“짐이 혼란을 가질 것이라 생각하는 주인의 배려겠지. 바보 같은 걱정은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으나...”

 

검은 고양이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 평온함을 간직하고 싶구나. 오랫동안 노력해왔던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어도 결과가 좋으니 다행이니 말이다. 오히려 헛된 환상을 쫓지 않게 만들어준 주인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진실을 알려줘도 선생이라고 부르지 않는구나.

오히려 그 편이 나에겐 더 좋다. 진실을 알아도 평소처럼 행동하고 지낼 수 있는 편이 미래지향적으로 긍정적이니까.

 

“그런데. 주인. 한가지만 물어보도록 하지.”

 

분위기가 뒤집어졌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진지해진 말.

 

“혹시 과거에도 어릿광대를 만난 적이 있는가?”

 

“네? 아뇨. 없는데요?”

 

“일전에 어릿광대를 직접 격멸하기 위해 짐이 움직였던 것 기억하고 있는가?”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잡화점에 찾아온 어릿광대와 레시아가 1:1싸움을 하면서, 그때 마을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조마조마했는데...”

 

잠깐만? 어째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불길함이 저 멀리서 나에게 찾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서슴없이 옥죄어오고 있는 공기 사이로 레시아는 말한다.

 

“그 당시에 그 어릿광대녀석. 주인이 선생이었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노라.”

=============================================================================================

음...설연휴가 3개월정도 짧네요.

더 쉬었으면 좋겠...

글 이어보기

단편선

행복이 시작되었다.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 A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을 길게 늘어뜨리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뚜둑 뚝 뚜둑. 짧게 끊어지는 소리에 쓴 웃음을 짓는다.

전동차가 도착하고 A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시간인데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지하철에 있었다. A는 한발짝 물러서 기다렸다가 전동차에 올라탔다.

A가 손잡이를 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전동차 안에 따뜻함이 흘러나왔다. 손을 꼬옥 잡고 웃고 있는 연인, 아이들과 놀러 가는 가족,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통화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얼굴에서 행복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요새 중국에서 미세 먼지가 몰려온 탓에 며칠째 해를 보지 못했다. 덕분에 주중에 출근할 때면 잿빛 도시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주중과 확연히 달랐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화창한 햇살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둥싱둥실 떠다니는 구름을 보니 그 안에 몸을 맡긴 듯 서서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A가 핸드폰을 꺼내 카카오톡을 열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여전히 숫자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잘 자라는 달콤한 인사가 끝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B의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느긋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침대에서 자고 있을 B가 떠올랐다.

핸드폰 화면이 꺼지면서 A의 얼굴이 비쳤다. 잠시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슬며시 미소를 지은 모습이 전동차 내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해 보였다.

 

역에서 나온 A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날씨가 맑아졌지만, 여전히 겨울이었다. 하아. 숨을 내뱉자 하얀 김이 길게 늘어졌다. 몸을 웅크린 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하얀 핫팩 하나를 꺼내 들었다. 살며시 흔들고 얼굴에 비비자 따스한 온기가 얼굴을 감쌌다.

A가 곧장 길 건너 편의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추위에 뒤뚱뒤뚱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펭귄 같았다. 그렇게 힘겹게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점원이 웃으며 반겨줬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날이 많이 춥죠?”

점원의 인사에 맞춰 A도 고개를 숙였다.

“그러게요. 역시 겨울은 겨울이에요. 날이 맑아서 따뜻해졌나 싶었는데.”

호호 웃는 소리에 A가 점원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티를 버리지 못한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항상 사던 거 선반 뒤쪽에 놔뒀어요.”

“매번 고마워요.”

점원의 손길을 따라 A가 샌드위치가 있는 선반으로 갔다. 다양한 샌드위치가 있지만, 선반 구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스윽 훑어보다 잡히는 두 개의 샌드위치를 꺼냈다. 베이컨 토마토 샌드위치, 야채 샐러드 샌드위치. 두 개 다 B가 좋아하는 샌드위치다.

계산대로 가서 A가 핸드폰을 꺼냈다. 잠금 버튼을 누르자 화면 위로 알림 표시가 나타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빠르게 잠금 해제하고 알림줄을 길게 늘였다. 하지만 그 상태줄에 A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

A가 점원에게 카드를 건넨 후 카카오톡을 열었다. 숫자 1은 놀리듯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얄미운 엉덩이를 A의 눈앞에서 흔들고 있었다. 아직도 자고 있나? 정말 잠이 많은 사람이니까.

“부럽네요.”

“네?”

A가 카드를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점원이 A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샌드위치를 봉투에 담았다.

“매번 샌드위치 사는 거 애인한테 주는 거죠?”

“네. 그건 맞는데……”

“어떻게 알았냐고요?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점원의 말에 A는 지하철에서 봤던 자신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구나.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이는 구나.

봉투를 받은 A는 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나왔다. 한 손에는 봉투를, 나머지 한 손에는 핫팩을 쥐고 B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발걸음은 가벼웠다.

 

띵동.

벨을 누르고 A는 잠시 기다렸다. 예상대로 문 안쪽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뚜루루.

연결음이 이어지더니 B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늘어지는 목소리가 핸드폰을 기어 나와 A를 맞이했다. 뒤이어 하품 소리가 몇 번이나 이어졌다.

“아직까지 자고 있었던 거야?”

“응? 지금 몇 시인데?”

B의 목소리는 여전히 붕 떠 있었다. 비몽사몽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A의 귀를 사로잡았다. A는 살며시 핸드폰을 쥐고 얼굴에 더 가까이 가져갔다.

“이제 열한시 넘었어.”

“벌써 그렇게 됐나? 미안 어제 읽고 싶은 책이 있어서.”

“으이구. 그럴 줄 알았어. 집 앞이니까 문이나 열어줘.”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B가 나왔다. A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B를 쳐다보았다.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입에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B는 서둘러 옷으로 입을 닦았다. 하지만 닦은 침과 다르게 헝클어진 머리는 여전히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밉지 않았다.

“얼른 씻고 와. 샌드위치 사왔으니까.”

“매번 고마워.”

웃으며 B가 A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A가 미소 지었다.

“추울 텐데 어서 들어와. 금방 씻고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봉투를 받은 B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화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A는 그러한 B의 손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조금 더 있어도 좋지 않았을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눈길만 주었다.

화장실을 들어가기 전 B가 그런 A를 보았다. 그리고 A의 앞으로 다가갔다. 말없이 양팔을 벌리자 A가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니까. 알았지?”

B의 품 안에서 A가 눈을 깜빡였다. 이럴 때 보면 B가 다르게 느껴졌다. 매번 아이 같았는데 이럴 때면 선수가 따로 없었다. 손을 뻗어 B의 등 뒤를 감싸며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B의 냄새가 느껴졌다.

 

B가 화장실로 가자 A는 홀로 방안에 남겨졌다. 침대에 앉아 A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요일마다 오는 방이었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책, 책, 책. 언젠가 봤던 티브이 프로그램 제목이 떠올랐다. 정말 책밖에 없는 방이었다.

‘정말 책을 좋아하는구나.’

책이 있는 곳은 책장 만이 아니었다. 이미 책장에는 이중 삼중으로 책을 쌓아 놓았고 그래도 남는 책들은 책상 모서리나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흔한 게임기나 장난 거리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고리타분한 할아버지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게 20대 청춘의 방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A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하지만 그런 B를 A는 좋아했다. 언젠가 B에게서 받은 단편 소설집은 아직도 가방에 넣어서 들고 다닌다.

-너와 부딪친 순간 행복이 시작되었다.

A가 책 겉표지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솔직히 많이 놀랐다. 물론 B가 주는 선물이라고 하길래 당연히 책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제목일 줄은 몰랐다.

B는 취향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철학이나 과학과 같은 어려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탓에 사랑 이야기를 읽는 것을 본 적이 드물었다. 더구나 B는 연애 서설이라면 극도로 싫어했다. 단순 소비라면서 그에 관련된 책은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B가 준 이 책은 여느 연애 소설과는 달랐다. 각각의 사랑이 담긴 이야기들은 가슴 한구석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랑이 담겨있었다. 애절한 사랑 앞에서는 눈물이 나오고, 수줍은 사랑 앞에서는 A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빠져버리고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오죽했으면 하얗던 책 표지는 너덜너덜해져서 테이프로 고정을 했다.

손을 뻗어 책 표지를 만졌다. 손끝으로 B의 손길이 느껴졌다. 분명 B도 이 책을 봤겠지.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B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미안. 오래 기다렸어?”

그때 문이 열리면서 B가 들어왔다. A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 좋은 타이밍이야.”

A가 천천히 책을 펼쳤다. 이미 질릴 정도로 봤지만, 오늘도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사락.

방안에서 책을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두 사람은 조용히 책을 읽었다. 이따금 차를 마시거나 샌드위치를 먹었지만, 대화를 하지 않았다.

A가 책을 읽다 고개를 덜었다. 슬며시 A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순간이 좋다. 이렇게 둘이서 책을 읽을 때면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풀었다. 일상에서 매일 치이고 살았던 탓일까? 편안한 침묵이 A의 몸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돌려 B를 보았다.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책을 읽는지 겉표지에 어려워 보이는 단어가 가득했다. 그저 책을 읽는 모습이건만 보기 좋았다. 만일 B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A가 책을 내려놓고 팔을 길게 쭉 뻗었다. 한 자세로 오래 책을 본 탓에 몸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스트레칭을 하자 입에서 하품이 나왔다.

“지루해?”

책을 읽던 B가 고개를 들었다. A는 천천히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아냐. 책 읽다가 잠시 쉬는 중이야.”

“그래? 그러면 나도 쉬어야겠다.”

B가 책을 내려놓고 A에게 다가왔다. A의 옆에 앉아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이 책 기억해?”

그런 B에게 A가 책을 내밀었다. 책을 보고는 B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당연히 기억하지.”

책을 받은 B가 천천히 책을 넘겼다. 스르륵. 책이 넘어가는 소리가 두 사람의 틈을 채웠다.

“이 책. 난 많이 좋아해. 연애 소설은 별로인데 이 책은 좀 특별하거든.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진다니까. 특히 여기 이 부분에서 눈물도 나왔다니까.”

해맑게 웃는 B를 보자 A가 미소 지었다.

“너와 부딪친 순간 행복이 시작되었다라. 정말 그렇네.”

A가 고개를 내밀어 B와 입을 맞췄다. 입술이 살짝 닿는 거리에서 두 사람의 숨결이 뒤섞였다.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 위의 서로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글 이어보기

토성

 

웅성이는 암흑과

기어가는 모래 바람

증식하는 세포들이

번식을 거듭하며

앙상한 팔을 흔들어댄다

 

하늘의 빗금

어둠이 깔리고 

빛이 변하면 

그들의 시간이

찾아왔다

 

불길한 꿈, 환영받지 못하는 징조

내면으로의 잠식

그들의 정신이 실처럼

한 가닥 한 가닥 풀어헤쳐졌을 무렵

요동치던 소음이 문득, 멈췄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 사막의 끄트머리에서

모래 더미 속 파묻힌 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어

아늑한 감옥이자 동굴

 

맴돌던 나무 지팡이의 머리가

사막의 어느 부분을 가르켰고

별 사이를 헤매던 방랑자는

퍼뜩 깨어나 시선을 들었다

분명한 마을이었다

 

어둠에 사로잡힌 자여

어둠이 되어버린 자여

떨구어내고 고개를 들어라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 사이 빛이 있을 것이니

 

서재 안 가로막힌 책들이 

한 데 모여 피어오르는 

각자의 목소리가 

시선이 목을 옥죄고

귓 속을 가득 메우더라도

 

자신만의 감옥에서 그들은 

스스로가 세운 세상에

파묻혀 몰두했으므로

언뜻 비치는 뜻모를 암호 같은

행성의 의미에 집착하지 않았다

 

별은 괴이한 소음을 내뿜으며

오직 자신의 세계 속 

돌고 돌고 또 돌았다

그의 비호 아래 앙상한 나뭇가지가

팔을 뻗어 윤택해진 대지 위

 

생명이 증식했다

헤매는 의미와 헤아리는 생

헤어나올 수 없는 그들의

정신의 실타래가 

삶의 물레가 돌아갔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1 - 10

573

 

 

 

2마리 토끼를 다 잡는 방법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자도 사냥을 할 때는 전력을 다하는데, 그것은 토끼건 사슴이건 다르지 않게 모든 전력을 다한다. 그런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쳐나가는 토끼를 잡으려면? 아무 생각 없이 돌격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지.

 

지금 잡화점이 2개로 되는 것은 중추인격을 담당하는 세린이 같은 시간선상 2명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 둘이 융합한다는 그 자체밖에 되지 않았다. 잡화점 멤버들이라고 하기엔, 이곳에 카일이라는 존재도 없고, 잡화점 멤버가 300년 뒤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을뿐더러, 루나의 경우에는 과거 시간대에 놓고 왔으니, 300년 후의 루나만 존재한다.

 

그럼 이 시간상에 절대로 2명이 존재할 수 없어야 하는데, 예외적인 그리티스 씨 빼고 또 다른 존재라면, ‘세린’의 존재가 명확하게 부각이 된다. 나는 이 말에 좀 더 중점을 뒀어야 했었는데. 바로 잡화점이 2개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건 기회에요. 모든 차원이 융합되고 지정된 시간에 모든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한꺼번에 이곳에서 투영되는 그 아슬아슬한 시간대에 해치우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안전장치를 위해 시간이 만료되기 전 본래 시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우도 찾아야겠네요.”

 

“수많은 삼천세계의 붕괴라도 일삼는 것인가? 본인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건 확실하게 파괴자의 소행이 아닌가!”

 

당돌하게 말하는 염라대왕. 지금 중간계와 천계, 마계가 난장판이 되었어도 명계만큼은 안전했었다. 하긴, 내가 중간계에서 고생을 한다고 한들, 명계에서 똑같이 겪어야 한다는 그런 말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끌어올려서 내 말을 듣게 한다면 지금 상황도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왜 상황이 점점 반대로 되어가는 걸까?

 

나는 분명 이 세상을 지우려는 유랑극단을 처리하기 위해 온 거지만, 사실상 이곳을 파괴하려는 사람은 내가 되어버렸다. 언제나 사람의 행동에는 의미와 뜻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그건 인생에 살아감에 있어서 후회하지 않겠다는 최면에 불과하다. 나도 결국 레이베리아와 별 다를 게 없는 파괴자일 뿐.

 

깨끗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자.

본래 나는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니까.

 

“당연히 파괴자의 소행이죠. 하지만 제가 파괴자가 되어 모든 것을 무로 만든다고 한들, 레이베리아의 입장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는 상황이라 봅니다. 그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아직까지 레이베리아의 힘은 모든 평행차원을 품을 정도로 강대하지 않다는 거죠.”

 

레이베리아의 목적은 규모가 작으면 작을수록 좋은 계획이다. 만일 우주자체를 뜯어고치겠다면, 티르가 호문쿨루스를 만들 필요도 없이, 모든 생명이 전부 사라지고 또 다른 생명이 그 자리에서 태어날 뿐이나, 지금은 어떻게든 조용히 제거하고 다시 만들기 위해, 보이드로 시공간을 지우고 나처럼 시공간의 개념자체를 다시 새겨 넣어, 직접 조종할 수 있도록 잡혀있다는 것이 내 추측.

 

그 외에도 여럿이 있지만, 전부 다 풀기에는 너무 쓸 때 없는 말뿐이다. 그래도 이 행동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 한가지. 통제에 관련된 문제들이다.

 

“레이베리아는 지금 천계와 마계, 인간계마저 통제하기 위해 세상을 들쑤시고 다니죠. 유랑극단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체를 만들어서, 제가 손을 쓰기 힘들 정도까지 왔어요. 염라대왕님이 저를 지금 당장 명계로 보내서 셀 수 없는 영겁의 시간 동안 형벌을 내리기 전에, 잡화점에 있는 중추인격들이 서로 융합해서 모든 평행차원을 한 점으로 밀집 시킬 겁니다. 그 말이 뭔 줄 아시겠죠?”

 

염라대왕의 눈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내 업보가 그만큼 증가한다는 소리인가? 사실상 여장을 한 상태로 이런 무거운 말을 한다는 자체가 웃긴 상황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소신껏 이야기 했다. 양보를 할 수 없으니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소피아.”

 

“네! 염라대왕님!”

 

어디서든 밝게 웃으며 대답한 소피아는 섬뜩한 대낫을 양손으로 잡고 언제든지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다음에 나올 말은 살상명령이 아닌...

 

“명계로 돌아가 있거라. 나는 친히 잡화점의 주인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어라? 아버지를 명계로 보내서 같이 뱃사공해도 된다면서요!”

 

어째서인지 소피아가 너무 힘차게 공격한다 했더니, 그런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었다는 거냐? 자신의 아버지를 때리는 것도 아니고, 무기로 휘두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만하게 “괜찮아. 아빠가 죽으면 명계에서 같이 지내지 뭐.”라는 생각으로 싸웠으리라 본다.

 

“계획을 바꾼다. 본인도 실로 오랜만에 생각을 바꿀 줄은 몰랐지만, 명계의 위대한 존재가 자신의 세계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나 또한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여자애일 뿐. 지금은 잡화점 주인의 고양이 혀라도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사항임을 인식했다.”

 

세치 혀겠지.

내 주변사람들은 일부러 잘못 말하는 게 취미인가?

 

“300년 전의 존재가 이곳에서 정 나갈 수 없고, 꼭 사건 하나를 해결해야 한다면...좋다! 이 염라대왕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한가지만이라도 알려다오.”

 

계약은 성립인가.

살짝 눈감고 고개를 끄덕이던 염라대왕의 분위기는 차근차근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염라대왕님께서 하실 일이라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엘티노스를 좀 찾아주세요. 이 양반이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해결방안을 제시해주거든요. 애초에 제가 있는 그 자체만으로 보이드는 사라진다고 하지만, 잡화점에 대해서는 엘티노스가 저보다 더 잘 알 테니, 나중에 그 사람에게 잡화점이 2개 이상 같은 시간대에 있을 시, 어떤 난장판이 벌어지는 가에 대해 잘 설명해줄 겁니다. 또 다른 하나는 소피아에게 거짓이 가득한 명령은 내리지 말아주세요.”

 

“그것뿐인가?”

 

상대는 파격적인 제안에 다시 의문을 품었다. 아무래도 소피아에 대한 부탁은 그렇다고 쳐도, 엘티노스는 찾는 건 쉽지 않는 일인데? 어쨌든 나는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고 뭔가 불만이 서려있는 염라대왕의 눈빛의 뜻을 내가 알아차리기엔 무리였다.

 

“그것뿐이에요.”

 

“다시 확인시키지 않아도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군.”

 

이해가 안 되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지?

 

“네가 제안한 일은 실질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것들뿐이군. 본인은 이 상황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역할을 말하는 것일 터.”

 

“우리가 모든 평행차원에 대해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도 못하잖아요? 아마 각기 다른 창조신들이 이 상황이 뭔지 모르고, 많이 당황하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상관 없어요. 그전에 상황을 끝낼 수 있으니까.”

 

“일을 해결하는 것이 엉망진창이로군.”

 

“벌어지는 일이 엉망진창이라서요.”

 

정상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통 없었다.

당연히 지금도 그렇다.

 

예를 들어 살인사건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 정상적인 구도라면 범인이 피해자를 살해하여 시신이 발견되고 수사가 이루어지는 방식이겠지.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일단 시신이 발견 되었는데, 조사를 하던 도중 범인이 나타나 그 시신을 한 번 더 살해하고, 내 눈앞에서 태연하게 가버리는 그런 경우다.

 

이미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 엉망진창인데.

해결하는 방법도 엉망진창이 되는 게 맞다.

 

태연하게 말대꾸를 하는 내가 탐탁지 않은지, 불만이 염라대왕의 얼굴에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을 때였다.

 

“본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알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해결할 수 있었으면 내가 이러고 있지 않았지. 시간은 없고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군가에게 자문을 구하는 편이 더 좋다. 그러니 무리하게 월식을 뱀 조종자 안에 넣어 히드라를 만든 이유도 그것.

 

“그건 염라대왕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이니까요. 오히려 지금은 제가 가장 적합한 사람이에요. 제 왼팔에 감겨있는 월식을 통해, 유랑극단에 있는 어릿광대의 위치를 알아내고 도박을 좀 할 겁니다. 당연히 제가 있는 위치도 어릿광대가 잘 알고 있겠죠. 혹시 월식에 대한 존재는 아시나요?”

 

월식에 대한 존재는 대부분 거의 모른다. 그만큼이나 그들은 다른 세계가 대비하기도 전에 모든 우주를 먹어 치우는 존재. 훗날 그리티스 씨와 월식을 둘이 앉혀놓고 먹기 대회라도 펼친다면, 그거야 말로 대 재앙 중 하나겠지만...이런 생각은 잠깐이나마 접어두자.

 

[염라대왕같이 어린아이가 우리의 존재를 알 리는 없지. 허나 잡화점의 주인. 네가 우리의 존재를 발설해버렸으니 이제서야 위기의식을 느끼긴 했을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머릿속에 울렸다. 그러나, 이제 와서 숨길 것도 없으니 히드라는 더 이상 추궁을 하지 않고 잠잠해졌다. 염라대왕의 외견상 어린아이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히드라는 아마 외견을 보고 말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간단한 설명 중에서 중요한 사실은 빼고, 아직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염라대왕에게 알려줬는데.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모두가 무서워하면, 별것도 아닌 일이라면서 무표정하게 있는 사람이 있지 않는가?

 

그게 염라대왕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군. 아직까지 본인이 모르는 미지의 존재가 있다니. 흥미로운 사실이긴 하나 묻겠노라. 그 월식이란 존재는 너의 명령에 완전복종하고 있는가?”

 

“아뇨. 협력자의 관계니까 완전복종은 아니에요. 이 녀석이 지금 당장 폭주를 해서 저를 먹어 치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시시한 걸 당할 제가 아니긴 하죠.”

 

잔뜩 경계하는 얼굴이 내 시야에 비춰졌다.

 

“너는 실로 무서운 사람이군. 아니, 사람도 아니지 언제부터 사람이 아니게 된 것이냐?”

 

“사람이 맞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또 뭐에요? 사람은 지금까지도 사람이잖아요?”

 

무턱대고 사람이 아닌 취급을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저기 있는 루니아 누나도 사람인데 검술로만 따지면 이미 신을 뛰어넘었는데? 잡화점에서 그나마 정상인 포지션을 맡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러니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맞다.

 

“본인은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힘도 그렇고, 오히려 지금 당장 죽지 않는 것이 신기하군. 무엇이 지금까지 잡화점의 주인을 살게 만드는 건가? 무엇이 지금까지 죽지도 못하고 계속 살아남게 만들어주었느냔 말이다.”

 

지금까지 날 죽지 않게 한 것이 뭐냐고 물어본들 그걸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미 수많은 이상현상을 많이 겪어봤으니,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단 소리를 들어도 별로 감흥이 없고, 왜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느냐고 물어본들 별로 신기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글쎄요. 아직까지 제가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그 바보 같은 백장미 모델만 빼면, 내가 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것쯤은 알겠지만...확실히 따지고 보면 시공의 눈을 개안한지 약 40분이 넘어가도 내 몸에 과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는 점은 이상하다고 봐야겠다.

 

“원래는 몸이 무너져내려야 할 시간대인데 그건 좀 신기하네요. 루니아 누나는 뭐 아는 거라도 없어요?”

 

“글쎄요오? 확실한 것은 카일도 이제 인간을 벗어나려고 한다는 점일까요오?”

 

여전히 느긋하게 말하는 루니아 누나의 말을 듣자 하니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우연히 흘기며 스쳐 지나간 염라대왕의 표정은 서서히 어두워져만 갔다.

===========================================================================

큰집에 다녀오느라 좀 쉬고 글을 썼습니다.

물론 드래곤볼 파이터즈 z가 너무 재밌어서 이 시간에 올리는 건 아니에요.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