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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정의

정의 JUSTICE

: 올바르고 공정한 도리

 

 

선은 악마저도 포용하고 받아 안는 것이지요. 허나 정의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오로지 악을 방벌함으로써 정의롭습니다.

                                                                                      -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中 이방원의 말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합의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가져야 하는 것은 아마도 ‘답’이 아니라 ‘입장’일 것이다. 모든 생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가지를 뻗어나가기 때문에, 스스로가 선한지 악한지를 가늠해보는 일, 그리하여 결국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은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의견을 가지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만약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선과 악의 두 가지 선택지 중 자연스레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다면, 다른 답안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다른 답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을 접한 적이 있다. 3년 전 드라마 안에서 만난 그는, 다름 아닌 이방원이다.

 

 2015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제목 그대로 육룡(六龍)에 관한 이야기다다. 육룡이라는 단어는 세종(조선의 4대 임금)이 가사를 지은 <용비어천가>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는데, ‘해동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본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을 의미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성계와 이방원, 그리고 삼봉 정도전이이라는 실제 인물들과 함께 이방지, 무휼, 분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섞어 역사와 판타지를 함께 버무려 놓았다.

 

 그 중 이방원은 선과 악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거머쥔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통해 선과 악 그 어떤 쪽에도 답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 자신만의 신념을 따른다.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과 생각을 믿고 따르는 일을 곧 ‘정의’라고 여기며 살아가게 된다.

 

 이방원의 첫 좌절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아버지 이성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올곧은 사람이라 믿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정치를 위해 한 발 물러서며 악(극중 이인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적인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어린 방원은 상처를 받고 실망한다. 이에 아버지와 함께 함주로 돌아가는 대신 개경에 남아 성균관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꿈 많은 방원이 성균관 안에서 바라본 세상은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에는 어그러진 일들이 너무도 많이 존재했고,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은 벌을 받지 않았다. 대신 선한 자들이 수치를 겪어야 했고, 그 수치스러움을 참지 못해 죽음에 몰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단발성의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거의 생활처럼 여겨지는 것 같았다. 어린 방원은 블랙홀처럼 크나큰 혼돈 속에 빨려 들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존경했던 스승(극중 홍인방)마저도 변절하고 말았다. 권력자(극중 길태미)와 사돈을 맺으며 그 또한 권력자로 올라선 것인데, 방원은 그런 스승의 모습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감과 분노, 그리고 환멸을 느꼈다. 비뚤어진 일은 곧 방원에게도 찾아오고야 만다. 몇몇 힘 있는 유생들(극중 길태미의 아들 길유 外)이 명나라에서 <맹자>를 금지했다는 까닭으로 <맹자>를 공부하는 유생들을 심하게 괴롭히고 있었고, 그 괴롭힘의 손길이 자연스레 방원에게까지 뻗어온 것이다. 이방원 역시 다른 유생들처럼 수치를 경험합니다. 그는 사내가 부끄러움을 껴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내 다른 동료 유생들처럼 수치를 경험했다 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길이 아니라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품고 삶을 연명한다는 것 역시 괴롭기 짝이 없는 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 또한 간파하고 있었다.

 

 결국 이방원이 택한 것은, 자신에게 수치를 떠안긴 일당들을 제 손으로 처단하는 일이었다. 그 처단은 가장 극단적인 벌, 죽음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악은 절대로 가기 싫은 길. 선은 악 앞에서도 그저 그 모든 것들을 품어내고 감내하는 길. 이 두 가지 갈래는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올바른 해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정의’를 택한다. 정의는 악을 용납하지 않으며 무조건 참아내지도 않는다. 대신 악을 방벌한다. 쉽게 말해 악을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이방원은 권력 앞에 갈대처럼 흔들리고 마는 인간에게는 선이 최선의 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악을 떳떳하게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신념과 정의라고, 그는 믿었다. 누군가의 악은 품어준다 하여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직 처절하게 심판받을 때 비로소 종적을 감추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신념에 기초한 정의관은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과 판단력이 곧은 방향으로 서지 않으면 자칫 위험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을 믿고 결심을 행동으로 치환할 수 있는 강단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요즘 우리 세대를 일컬어 ‘결정 장애 세대’라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가질 시간도 없이, 그저 쏟아져 내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생각, 목소리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 폭력과 광기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인물들이 언젠가부터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현 시대에 없는 정의와 스스로에게 부족한 결단력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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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나 I

: 남이 아닌 자기 자신

 

 

나는 나의 편견을 아끼는 사람, 그 편견을 얻기까지 달려갔다 다치고 온 길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 김애란, <영원한 화자> 中

 

 

 

 

"나는 요즘 나를 공부하는 중이야."

 

자매처럼 지내는 언니가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나는 언니의 그 말이 새삼 반가웠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궁금해 하는 시간이 일상의 4할 정도는 차지하는 사람, 그게 나니까. 꼭 동지가 생긴 기분이었다.

 

아무리 수많은 관심사가 내 마음 언저리를 빙빙 돌며 구미를 당긴다 해도, 결국 내가 가장 오래도록 놓지 않고 줄을 당기며 살 최애는 바로 나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별별 복잡한 일들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도, 내가 내놓는 문장은 "그래서 나는 ~라고 생각해"로 끝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동료들과 함께 이태원으로 다녀온 워크샵에서 애니어그램이라는 걸 한 적이 있다. 제법 진지하게, 우리는 전문가를 초빙해 테스트를 하고, 시간을 들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성향을 분석했다. 그런 걸로 사람을 규정짓는 건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날 들은 것 중 크게 공감이 가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내용이 있다. 내 마음이 건강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감정이 각각 어떤 식으로 조합되어 수면 위로 드러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자아가 강하고 스스로를 너무 좋아하는 탓에 늘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의 '특별함'에 대해 떠올리며 사는 내가, 한없이 건강할 땐 모든 존재가 다 특별하다며 전 우주적 박애주의자로 거듭나지만, 심신이 어두울 땐 그 특별함의 스포트라이트를 오로지 나에게만 한정시키고 빛 바깥에 둔 타인을 한심하게 바라보기도 한다는 사실. 그걸 들키고 나서 한참 뺨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이내, 비밀이 새어나가고 나니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좁은 마음이 될 때마다 '내가 지금 건강하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면, 그런 감정에 휩싸인 나를 혐오하지 않고도 그 시기를 잘 흘려보낼 수 있으니까. 나의 그늘을 도려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으니까.

 

하여, 나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있으니까.

 

며칠 전 김애란 단편 <영원한 화자>를 읽었다.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나는 그 글이, 꼭 나 같아서 속으로 웃었다. 오늘도 주어에 밑줄을 긋는 나에게 명하노니, 부디 건강하자. 전부 사랑해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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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10. 운명의 수레바퀴

10. 운명의 수레바퀴

 

타로 카드에서 10이라는 숫자와 함께 표기되는 카드

운명의 수레바퀴. 운명, destiny!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말에 매혹되면서도 경계하고 희망하며 원망한다.

왜일까? 운명이라서? 피할 수 없어서?

 

숫자 10은 완성된 숫자, 가득 채워진 숫자라고도 한다.

즉 하나의 단계, 하나의 주기가 끝났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타로에서 이 10번째 카드가 바로 <운명의 수레바퀴>이다.

 

하나가 끝난 것, 가득 채워진 것

그래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뜻한다.

준비되어있기에 진화하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기회가 주어져도 제대로 잡지를 못한다.

설사 잡았다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회는 준비되어 있는 자

잡은 기회를 제대로 쓸 줄 아는 자에게 주어진다.

 

무슨 뜻이냐고?

 

생각지도 못하게 복권에 당첨된 이가 있다.

복권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당첨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복권 당첨자가 술과 도박

유흥으로 그 많은 당첨금을 탕진하는 것이다.

평생을 놀고먹어도 될 만큼의 당첨금을 말이다.

 

그렇기에 운명의 수레바퀴는 양면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기회가 행운이 될지 불행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굴러갈지는

결국 그 주인에게 달린 것이다.

 

즉, 나 자신에게 달렸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과가 어떻든지 타인의 잘못으로 떠넘기지 마라.

그 결과를 이끌어낸 것은 바로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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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fix you

 

 

 

 

    우리는 어제의 날씨에 대해 이야기했다. 평범한 소나기가 내렸다고 하기엔 빛에 비친 빗방울이 너무 환했다. 내가 지내는 이 곳에서는 여우가 호랑이에게 시집 가는 날 구름이 흘리는 눈물이었고, 너는 그것을 마녀가 버터를 만들 때 내리는 마법이라 했다. 나는 왜 버터에 요술 같은 빗물이 필요한지에 대해 물었고 너는 구름이 남의 결실에 왜 재를 뿌리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 좀 더 심플한 형식은 어떨까, 쨍한 하늘에 잠깐 내리다 그치는 비라고. 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낭만을 더하면 어때, 예를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 우연히 비친 찰나의 설움처럼. 너는 시인은 되기 싫다고 했다.

 

  치아도 시력도 교정이 되는데 왜 우리의 언어는 하나로 겹쳐지지 않을까.

 

  여우비 내리는 날 숲에 간 소년과 여우볕 드는 날 호숫가로 향한 소녀는 나무 뒤로 지나가는 행렬을 슬며시 굽어보았고 집으로 돌아와 일기를 적었다. 행렬의 일행들의 손에 들린 것이 술통인지 호롱불인지, 시집을 가는 것이 사람인지 여우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볕과 빗방울이 만나 맺은 일곱 빛깔 열매도 알아챌 수 없었으니, 그들이 본 것은 반쪽 아니 반의 반쪽짜리 진실이었을 것이다.

 

  사실은 교정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동일선상에 놓인 숫자를 근거로, 너와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같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나는 ‘왜 우리가 맞지 않을까’에 대한 바보 같은 생각을 그만 멈추기로 했다. 멀리 버터를 만드는 네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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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BREAK TIME

 

 

 

 

    철부지 시절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에게 절교 선언을 해본 적은 있지만 다 큰 뒤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D는 말했다. 사랑이야 피고 지는 계절이 있으나 특별한 이유 없이 우정이 식을 리가 없지 않겠냐고, 혹시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거냐고 그녀가 물었을 때, 그런 거 없다고 웃으며 고개를 젓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돌아서며 내가 본 D의 마지막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꼭 SNS 안에서 마주하는 낯선 그녀의 셀카처럼.

 

  누군가에게 참담함이라는 감정을 안겨줘야 한다는 사실은 더없이 미안했지만, 나도 친구와 헤어진다는 게 익숙지는 않아서 애인과 헤어질 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망설이며 흘려보내야 했기에 고통스러웠다. 이 고통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건 D 아니면 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추억의 일부를 잘라냈다.

 

  D와 내가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언제였을까. 고개를 들면 아무리 먼 곳을 바라보아도 그저 칠판뿐이었던, 누가 누구와 사귀는 것이 좋을까 라든가 급식을 전교에서 가장 먼저 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든가 어떻게 하면 야자시간에 들키지 않고 G의 작품집을 돌려볼 수 있는가에 대해 몰두하던 시절, 우리는 분명 행복했다. 화장실을 갈 때도 미용실에 앞머리를 자르러 갈 때도 함께였고, 수업시간 껌을 씹다 들켜 교무실로 불려간 나를 문 밖에서 기다려준 것도 그녀였다. 약속을 한 건 아니었지만 D가 나에게 뭔가를 해주면 나도 D에게 뭔가를 해줬다. 호의好意를 선의善意로 갚아나가며, 우리의 우정은 계절과 분기를 뛰어넘었다. 아마도 함부로 애틋하게, 영원永遠을 확신했던 것 같다. 그 마음은 밀가루를 흠뻑 뒤집어쓰며 바보같이 웃던 졸업식에서 가장 반짝였고, 만나는 횟수가 줄어든 만큼 통화하는 시간이 늘어난 대학 시절에도 유지되었다. 비록 환경은 조금 달라졌지만 숨을 쉬고 내뱉는 하늘은 같다고 생각했으므로.

 

  하지만 어느 해 D가 휴학을 하고 세계 일주를 하는 동안 내가 빵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졸업논문을 쓰는 시기가 찾아오면서 연락이 가로막힌 우리는 서로를 향한 그리움으로 근근이 관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거두어질 마음이라 여겼고, 장거리 우정은 애틋함을 먹고 자라 더욱 각별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오판이었고 자만이었음을 시인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귀국 후 다시 대학생이 되었고, 나는 진로에 대한 길고 긴 방황의 터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때때로 우리는 만나서 파스타를 먹고 커피를 마셨지만, 언제나 시차적응이 되지 않은 사람들처럼 졸린 눈을 하고 있었다. D가 조별과제 핑계로 약속을 파하면 서운함보다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내가 몸살 때문에 다음에 보자고 전화를 걸었을 때, 시끌벅적한 술자리에서 조금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녀가 졸업 후 공시생 생활에 뛰어들고, 내가 어리숙한 사회 초년생이 되어 서툰 비즈니스 영어로 메일을 쓰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함께 있을 때보다 멀리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생일에도 기프티콘으로 축하인사를 대신하는, 그런 사이.

 

  여전히 우리는 동창들 사이에서 베스트 프렌드로 회자되고 있겠지만, 나는 이 허울 좋은 올가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관계에 대한 의무감과 우정에의 환상은, 사실은 먼지 몇 톨도 안 되는 것이면서도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으니까. 의무적인 만남과 주기적인 연락은 마치 내 감정이 때가 되면 전송되는 자동이체 공과금 같았으니까.

 

  버거워진 관계까지 짊어져야 어른이라는 결론을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이 들 때 제동 걸 줄 아는 용기를 두고 아이 같다 평가하는 세상이라면, 나는 이번 생에는 기꺼이 어른에서 다시 아이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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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잡기

#0 씀.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매서운 추위에 입고있던 외투를 다시한번 여미게 만드는 날씨다. 다사다난했던 올해도 그 끝이 보인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다사다난했고, 어떤 부분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다사다난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아무튼 필자 개인적으로는 힘든 한해였다.

 

부산과 창원에서 줄곧 생활해온 촌놈이 서울에서 직장을 구해, 본의아닌 상경을 하게되었으며, 보통사람들처럼 매일 아침 출근길에 사람들이 빼곡한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향했다. 어쩌다보니 남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그나마 일하기 편해 보이는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으나, 필자도 어림없는 보통사람이었으니 남들만큼의 스트레스를 받는 채로 일하고 있었다.

 

운좋게 연말에 고향으로 내려와 카페에 앉아 한가로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있노라면, 회사에서의 갑갑했던 기억이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지금도 그런 묘한 기분에 휩쌓인채로 글을 쓰고 있다. 물론, 02로 시작하는 서울 전화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면, 여느 보통사람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걱정이 앞서는 직장인이다.

 

글을 쓴다라는 행위는 과연 어떤 행위 일까. 어떤 이에게는 아주 가치가 크고 숭고한 작업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이에게는 시간낭비에 불과한 작업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떠한 가치로 사람들에게 느껴지던지 모든 것들은 오롯이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가 받아야 할 평가일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에 드는 생각은 글쓰기라는 행위는 그리 거창한 것도,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만 허용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보통사람인 필자가 글을 몇글자 끼적거리고 있는 것 자체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야말로 누구나 글을 쓰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다. 언제부터,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했을까?

 

사실 글쓰기는 과거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제한된 특권이었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계층,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사람들은 생업을 하느라 글을 따로 배우고 익힐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서방에서는 라틴어가, 동방에서는 한자가 지배계층의 특권을 공고히 하는데에 이용되었다. 그러다보니 글쓰기의 행위는 이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전세계적으로 문맹률은 낮아졌으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우리나라만 봐도 글못쓰는 사람의 비중이 과거와 비교해봤을 때, 극단적으로 낮아졌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행위는 무언가 보통사람이 하기엔 거리가 먼 것으로만 느껴졌다. 그래서 소위 문학을 한다던가 작가라고 하면 '저 사람은 특별하다'라는 선입견에 휩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이 서서히 깨져만 가고 있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수상자가 밥 딜런과 같이 문학을 향유하는 계층이 넓어졌다. 물론, 여기에 대해선 의견이 다른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향유층이 넓어지는 것을 나쁘게만 보진 않는다.

 

사실 문학이라는 것의 출발은 춤과 음악, 노랫말이 어우러진 원시종합예술행위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분화가 되기도 하고 어우러지기도 하며, 작금의 소설, 극 등의 장르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과거에는 단순히 보는 문학이 아닌 듣는 문학의 비중이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듣는 문학의 경우에는 휘발성이 높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구전되는 이야기에서 변형되는 부분이 많았을 것이고, 사라져버린 이야기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보는 문학이 대두되었을 것이다. 책이라는 매체가 등장하면서 구비되는 이야기들이 기록되어지고, 고착화되었을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작성하는데에 오래 걸리고, 집중해야 하는 보는 문학을 향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보는 문학은 미디어의 한계로 인해 일방향적 성격을 나타낼 수 밖에 없다. 작가가 독자에게 책을 통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열린 결말이라던가 독자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면서 보완했다고는 하나 쌍방향적 소통이라기엔 부족했다.

 

이후에 발명된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의 대중매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방향적인 미디어로 우리는 글을 읽어왔던 것이다. 보통사람은 글을 수용하는 독자, 소수의 사람들은 글을 쓰는 작가로 고정된 업을 수행해 온 것이다.

 

이제는 다르다. IT기술의 발전은 볼 수 있는 매체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불과 몇년 사이에 디스플레이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필자가 군 복무중일 때만 하더라도 스마트폰이라는 개념이 막 생겼던 시기였다. 그런데 군복무를 마쳤을 때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기기를 목적성에 맞추어 여러개를 구비하는 이용자들이 늘어나면서 그야말로 N스크린 시대가 도래했다.

 

비단 IT기술은 하드웨어만이 발전하지 않았다. 각종 소셜미디어 서비스들이 오픈하면서 보다 쉽게 자신의 글을 남들과 공유하고 상호교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소셜미디어 역시 하나의 글쓰기 플랫폼이라 필자는 바라본다. 각 플랫폼마다의 특성이 있고, 이 특성에 맞는 글들이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다. 이 또한 하나의 장르 분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과거에 비해 독립출판의 기회도 많아졌고, 보통사람이 글을 쓰는데에 투입해야 할 비용은 급격하게 감소했다. 이 얼마나 글쓰기 좋은 시대인가. 그야말로 글쓰기의 시대다.

 

옴니글로같은 글쓰기 플랫폼 서비스들이 지속적으로 생겨나고, 보다 많은 보통사람들이 글쓰기를 즐기다보면, 언젠가는 마치 원시시대에 부족 사람들과 희노애락을 나누었던 글쓰기가 가능해 지지 않을까 필자는 생각해본다.

 

추운 겨울 날, 보통 사람이 휴가를 맞아 고향에 내려와 쓴 최초의 잡기이다. 아무래도 보통사람이다보니 아는 것도 부족하고 글도 매끄럽게 쓰질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틈나는 대로 잡다한 것을 글로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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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flower

초록+싱싱

 

초록이,싱싱이라 부르는 식물들을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함께 한지도 7개월째이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말이 꼭 그들을 위해 누군가가 흘린것 같다.

소리없이 아름다운 존재의 힘으로 시들어져가려는 한 생명체의 불꽃을 되살리기도 한다.

그들이 머금고 있는 초록의 생생한 생명에너지를 보노라면,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무엇또한 꿈틀 반응한다.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다.저절로 미소지어진다.자신을 부지런하게 만든다.

때론 오랜만에 본 벗처럼 활짝 반기고 관심을 가지다가도,때론 오래된 부부처럼 당연시 여기며 바라보지

않을때도 있음을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한다. 변덕스러운 마음의 발동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들의 생김새를 보고 있으면,그 어떤 뛰어난 재단사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예술적인 컷과 디자인에 감탄밖에 할 것이 없다. 그들과 함께하는 흙이 풍기는 냄새는 또 어떻단 말인가. 각 종 매연과 인공적인 향수로 인해 찌들어져가는 코의 감각에  신선한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것만 같다. 물을 주면 더 짙어지는 흙의 냄새를  1g이라도 더 마시기 위해 코를 바짝 갖다대며 킁킁거리기도 한다. 

 

그들이 보내는 신호로,현재 자신이 머무는 공간의 공기,온도,습도 등 상태의 적절함을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이 싱싱하면 그 공간이 쾌적하다는 신호이다.

그들이 시들하면 그 공간이 불쾌적하다는 신호이다.

공간의 신선도 및 자신의 성실도 체크기가 따로 없다.

 

지난 주말,그들의 친구,가족,친지들쯤 되는 이들이 모여있는 화훼시장을 방문했다.

발을 딛는 순간,엄청난 싱그러운 기운이 온 몸을 감싼다.큰 축복의 세례를 받은 이의 기분이 이러할까?

이파리들은 마치 참기름이나 바른듯 윤기가 흐르다 못해 넘쳐보였다.

자신의 공간에 있는 초록이와 같은 종의 초록이의 넘치는 때깔에 혹해 발이 멈춘다.

 

"여기 무슨 기름바르신거예요?"

"물 뿌려서 그래요"

"아.....(똑같이 물을 주는데,때깔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뭐지?)"

.....

"이파리 끝이 변하는 건 왜 그런가요?"

"물을 안주거나,햇빛이 부족하면 그럴수 있죠"

"음,물도 주고 햇빛도 보게끔 했는데..."

"그건 본인 생각이고,식물들 입장에선 충분하지 않을수 있죠"

"아......(!!!)"

.....

조금 사이즈가 있는 초록이가 눈에 들어온다.

우뚝한 나무기둥에 달려있는 새초롬한 초록 이파리들이 참 사랑스럽다.

이름하여 행복한 나무라고 한다.오호~

근데 삐쭉하고 홀로 키가 조금 큰 이파리를 가리키며

"이거 어때 보여요?"

"예뻐요"

"근데 우리는 이런걸 잘라줘요"

"오잉~왜요?"

"혼자만 이렇게 자란것보다 다른것들과 함께 자라라고,그게 더 이쁘거든요"

"아......(!!!)"

 

그렇게 초록이들을 통한 성찰과 깨달음의 시간들을 보내고

유혹적인 때깔을 지닌 초록이와,행복한 나무를 부둥켜 안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머무는 공간으로 모셔왔다.더 울창하고 근사해진 302호이다.

덕분에 팔에 근육이 생긴듯 하다.여러이유로 자신을 건강하게 해주는 초록이 싱싱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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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flower

II

 

11

새는 떠나도 숲은 그곳에

그대가 떠나도 사랑은 여전히

머물고 떠남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원한 사랑


어느 이의 말처럼

내가 그대를

그대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냐

그대와 나를 통해 사랑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야


그대 안의 충만한 사랑이

내 안의 충만한 사랑이

서로 만나 합쳐져 더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것이야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버려두어야 해

잡아두거나 조정하려 든다면 그 빛은 서서히 꺼져버릴지 몰라

집착의 먹구름이 나타나면 사랑의 태양은 자취를 감출지 몰라

 

 

12

나와 같은 그대의 영혼에게 고하 노니

그대의 영혼 깊이 흐르는 맑은 순수의 강에

지치고 고된 얼룩진 시름의 흔적을 씻는다

 

그대가 하는 모든 말은 시고

그대는 언제나 시를 읊조리고

그대가 하는 모든 몸짓은 춤이고

그대는 사랑이다


그대의 눈을 통해 그대의 영혼은 말한다

이 두근거림이 커피의 카페인 때문인가

취할 것 같은 그대의 눈빛 때문인가

 

 

13

사랑엔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없다

비가 내리고 그치는 것처럼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바람이 불다 멈추는 것처럼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물결이 일렁이다 잠잠해지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여러 형태들이 모습을 바꿔가며 드러날 뿐이다


떠들썩한 소리 중심에 침묵이 거하는 것처럼

회색잿빛 먹구름 중심에 밝은 태양이 빛나는 것처럼

깊은 중심의 사랑은 떠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