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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B

 

 

 

B급 코드가 수면 위로 올라온 지 몇 년이 지났다. 과거 B급은 다소 그늘진 성향을 드러내는 의미로 통용되었지만, 지금은 가벼움과 웃음, 반전이라는 요소가 전면에 드러나 있다. 이는 비주류에 대한 대중 일반의 시각의 변화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도 하나의 취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된 것. 가요계는 물론이거니와 광고계, 영화계 등 문화 산업 전반에, B급 문화는 이미 확산해 있다. 음지에 머물러 있던 마이너 문화가 양지로 끌어내진 것이다. 이제 병맛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너무 진지하고 어두운 현실 속에서 사람들을 웃게 해줄 수 있는 유희의 대상의 위치를 갖는다.

 

재미는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저마다의 피로에 지친 사람들은 더는 문화를 콧대 높은 사람들이 독점하는 예술로서 대하려 하지 않는 듯하다. 남들과의 경쟁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세계에서 번쩍이는 스펙으로 자신을 고급화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불편함을 잔뜩 축적해두고 사는 우리에게, 싼 티를 간판으로 내건 B급 문화는 꽁꽁 감춰두었던 욕망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내숭에 길들여진 양반들이 저잣거리 사당패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자꾸만 곁눈질로 훔쳐보게 되는 것처럼.

 

B급 문화의 가볍고 고급스럽지 못한 모양새 때문에, 그것이 속 빈 강정처럼 아무 내용이 없다고 지레 짐작해서는 안 된다. B라는 알파벳의 어감 때문에, 그것이 A의 하위 혹은 A가 되지 못한 어떤 것처럼 여겨지기 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B급 문화는 형식적인 틀에 갇힌 A가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조명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 그것은 다양한 문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 대중들을 위해 존재해야 할 필수요소이기도 하다. A와 다른 것으로서의 B, 이것이 B급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이다.

 

90년대를 주름잡았던 홍콩 배우 주성치의 영화는 영화관보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훨씬 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보고 싶지만 왠지 나 혼자 봐야 할 것 같았던, B급 문화에 대한 이중모션에서 마이너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단지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남들의 평균에 맞추려 겉으로는 내색하기 힘든 것들을 마이너라는 단어로 묶어야 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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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hort sentimentally-beautified story of my childhood.

 방청소 하다 발견한 yearbook으로 인한 감상적 미화.

Tbt to 2003 only if I had the ability to time warp. 

This is a short sentimentally-beautified story of my childhood.

Taking a short look at this year book and what is written here made me laugh so much and realize that me and my friends were probably the most innocent and pure creatures in this world as kids. Not knowing a thing about stereotype nor prejudice led to having no concept of discrimination at all. I had the perfect condition of being a minority of that society-Being 1-2 year younger and also shorter than most of my friends, a female, with different race and nationality + unlike now I didn't speak any English by the time I just got there. 

However back by then I was more than welcomed, loved, respected and treated equally, had lots of great opportunities and new challenges. And of course sometimes I was hurt by some people but there were more people who cared about me with love and comforted me with smile. I still remember being hurt by what the conductor had told me at blue lake music camp but what I remember more is the figure of Amy, the counselor of our dorm, looking into my eyes which were almost full of tears and encouraging me with her warm words, beautiful smile, and hug. (I think she was a university student by then so perhaps she was much younger than my current age. But I still suck at cheering someone up.Probably it has something to do with my not-so-sweet personality) 

Now I've grown up to realize that what I had experienced was only some part and not everything of the nation and it is absolutely meaningless to idealize somewhere for that there is no place on earth to be called utopia, but still I'm thinking that this shocking experience of mine has become the significant reason of me always wanting to live outside of korea.Yet, a few experiences living abroad after that were never as easy as before because I've become an evil, also a.k.a grown up.Furthermore I am not praising certain nation but I 100% admit that society I belonged to for a short period was much more mature in understanding and respecting difference as well as accepting other cultures than the society I've been living. Anyway for the chaotic situation in Korea we are facing now I think it's not so bad for everyone to reminisce about our very innocent and pure hearted period-no maturity but also no discrimination. Simple as that. 

 방청소 하다 발견한 yearbook으로 인한 감상적 미화.

돌이켜보면 이시절의 나와 친구들은 다른 여느 어린이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시절을 보내고있지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편견이 뭔지, 고정관념이 뭔지조차 알기전이었고 따라서 차별의 개념이라는것 또한 생기기 전의 나이였다. 나는 그사회의 소수자, 그리고 약자로 분류되기 좋은 조건들을 다 갖추고있었다. 여자, 유색인종, 외국인. 거기에 추가로 영어는 하나도할 줄 몰랐으며 같은 학년의 대부분의 친구들보다 내가 한두살어렸으며 키조차작은편에 속했다는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색의 피부와 눈동자를 지닌 이들은 영어도 못하는 이방인을 환영해주었다. 내가 떠듬떠듬 말할때는 귀기울여서 끝까지 들어주었고, 나의 의사를 존중해주었고, 호기심을 가져주었고, 사랑해주었으며 또 동등하게 대우해주었다. 새로운 도전을 항상 시도할수 있는 기회 또한 많았다. 물론 몇번의 상처는 있었으나 상처를 주는 사람보다 보듬어 주는 사람이 훨신 많았다. 아직도 나는 뮤직캠프에서 지휘자와 퍼스트플릇에게 한방먹고 울먹이던 나에게 눈을 맞추며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안아주던 카운슬러 에이미의 모습을 잊지못한다. (지금은 벌써 다섯살짜리 아들이 있지만 당시 에이미는 대학생이었으므로 지금의 나보다 훨신 어린나이였을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몇살은 더 많을 나이인 지금의 나는 사람을 달래는 방면에는 아직도 매우 서툴다. 물론 이것은 내가 태생부터 무뚝뚝하고 오그라드는것을 혐오하는 성격을 지닌탓도 있다..)

 십년이 넘게 지난 지금 나는 그때 내가 경험했던것이 그나라의 극히 일부일뿐 전부가 아니였음을 알게되었으며, 세상어디에도 유토피아따위는 없기때문에 어딘가를 이상화시키고 그곳만을 바라보는일이 얼마나 촌스럽고 쓸데없는일인가임을 깨닫게 된 씁쓸한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가끔 회상한다. 그나라를 찬양하는것은 절대 아니지만 '다름'에 대한 이해와 존중, 타문화에 대한 수용도가 훨신 높은 사회였던 사실이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던때를. 또한 확신한다. 이시절의 순수함은, 분명 나에게 역마살과 탈조선의 꿈을 심어준 너무나 크리티컬한 원인이었을거라고. 나는 이경험으로 인해 초딩때부터 탈조선을 꿈꾸는 시대를 앞서가는 어린이였다고..(?)+실제로 귀국하기싫다고 울며불며 엄마한테 홈스테이한다고 설쳤던 기억. 그러나 나와 달리 엄마는 그곳에서 이상하게 너무 힘이들었다고했는데, 그러고나서 열심히 올때마다 묵주를 돌리시던 외할머니로부터 우리가 살던집에 남미계의 귀신이 옷장속에 사는것을 목격했다는것을 들은것은 우리가 귀국한 후였다. 우리가 무서워할까봐 이걸 혼자만 보시고 비밀로 하신 할머니가 더 대단하시고 무섭다..뭐 어쨌든 그 후 정작 몇번의 탈조선은 순수함을 잃어버린 후라 그시절과는 많이 달랐다고한다. 가끔은 철도없고 차별도 없던 어린시절을 생각해보는것도 괜찮은 일 같다. 탈조선 헬조선 대신 대한민국 이라는 공식국가명칭만을 사용하게 되는 날들만이 지속되길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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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BREAK TIME

 

 

 

 

    철부지 시절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에게 절교 선언을 해본 적은 있지만 다 큰 뒤 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D는 말했다. 사랑이야 피고 지는 계절이 있으나 특별한 이유 없이 우정이 식을 리가 없지 않겠냐고, 혹시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거냐고 그녀가 물었을 때, 그런 거 없다고 웃으며 고개를 젓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돌아서며 내가 본 D의 마지막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꼭 SNS 안에서 마주하는 낯선 그녀의 셀카처럼.

 

  누군가에게 참담함이라는 감정을 안겨줘야 한다는 사실은 더없이 미안했지만, 나도 친구와 헤어진다는 게 익숙지는 않아서 애인과 헤어질 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망설이며 흘려보내야 했기에 고통스러웠다. 이 고통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건 D 아니면 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추억의 일부를 잘라냈다.

 

  D와 내가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언제였을까. 고개를 들면 아무리 먼 곳을 바라보아도 그저 칠판뿐이었던, 누가 누구와 사귀는 것이 좋을까 라든가 급식을 전교에서 가장 먼저 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든가 어떻게 하면 야자시간에 들키지 않고 G의 작품집을 돌려볼 수 있는가에 대해 몰두하던 시절, 우리는 분명 행복했다. 화장실을 갈 때도 미용실에 앞머리를 자르러 갈 때도 함께였고, 수업시간 껌을 씹다 들켜 교무실로 불려간 나를 문 밖에서 기다려준 것도 그녀였다. 약속을 한 건 아니었지만 D가 나에게 뭔가를 해주면 나도 D에게 뭔가를 해줬다. 호의好意를 선의善意로 갚아나가며, 우리의 우정은 계절과 분기를 뛰어넘었다. 아마도 함부로 애틋하게, 영원永遠을 확신했던 것 같다. 그 마음은 밀가루를 흠뻑 뒤집어쓰며 바보같이 웃던 졸업식에서 가장 반짝였고, 만나는 횟수가 줄어든 만큼 통화하는 시간이 늘어난 대학 시절에도 유지되었다. 비록 환경은 조금 달라졌지만 숨을 쉬고 내뱉는 하늘은 같다고 생각했으므로.

 

  하지만 어느 해 D가 휴학을 하고 세계 일주를 하는 동안 내가 빵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졸업논문을 쓰는 시기가 찾아오면서 연락이 가로막힌 우리는 서로를 향한 그리움으로 근근이 관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거두어질 마음이라 여겼고, 장거리 우정은 애틋함을 먹고 자라 더욱 각별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오판이었고 자만이었음을 시인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귀국 후 다시 대학생이 되었고, 나는 진로에 대한 길고 긴 방황의 터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때때로 우리는 만나서 파스타를 먹고 커피를 마셨지만, 언제나 시차적응이 되지 않은 사람들처럼 졸린 눈을 하고 있었다. D가 조별과제 핑계로 약속을 파하면 서운함보다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내가 몸살 때문에 다음에 보자고 전화를 걸었을 때, 시끌벅적한 술자리에서 조금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녀가 졸업 후 공시생 생활에 뛰어들고, 내가 어리숙한 사회 초년생이 되어 서툰 비즈니스 영어로 메일을 쓰는 동안, 어느새 우리는 함께 있을 때보다 멀리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의 생일에도 기프티콘으로 축하인사를 대신하는, 그런 사이.

 

  여전히 우리는 동창들 사이에서 베스트 프렌드로 회자되고 있겠지만, 나는 이 허울 좋은 올가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관계에 대한 의무감과 우정에의 환상은, 사실은 먼지 몇 톨도 안 되는 것이면서도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으니까. 의무적인 만남과 주기적인 연락은 마치 내 감정이 때가 되면 전송되는 자동이체 공과금 같았으니까.

 

  버거워진 관계까지 짊어져야 어른이라는 결론을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이 들 때 제동 걸 줄 아는 용기를 두고 아이 같다 평가하는 세상이라면, 나는 이번 생에는 기꺼이 어른에서 다시 아이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