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어보기

짧은 글 모음집:愛

사랑불신

 

사랑불신

 

“그 여자는 오빠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그런 허상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했어. 그저 오빠한테 잡힌 약점만 찾아내면 떠날 거라고. 그러니까 나더러 그때까지만 기다리라고 했단 말이야. 왜 내말을 안 믿는데?!”

 

태훈은 라희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하연이 여태까지 자신의 앞에서 웃고 울고 조곤 거리던 모습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말이니까. 비록 서로가 서로에게 저당 잡힌 약점 때문에 곁에 있게 된 거였지만 그 지난 1년이 모두 거짓이라는 말은 전혀 실감할 수 없는 것이다.

 

“오빠. 떠날 사람이야. 그 여자는 떠날 사람이라고. 옆에 남을 사람은 나란 말이야.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쭉 오빠 옆에 있을 사람은 나라고.”

 

진절머리 나도록 간절하게 애원하는 라희를 뿌리치고 태훈은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 펜트하우스에 도착한 그는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하연을 찾는 그의 시야에 거실 한쪽에 열려있는 문이 보였다. 태훈의 서재 문이었다. 태훈은 조용히 신발을 벗고 제발 아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열린 문을 향해 다가갔다.

 

- 파라락~ 사락사락...

 

문가에 선 태훈의 눈에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빼내어 빠르게 책장을 넘기고 있는 하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읽을 책을 고르는 모습보다는 책 사이에 끼여 있을 무언가를 찾는 모습이었다. 하연이 간간이 자신의 서재에서 책을 읽던 게 사실은 그 책 사이에 숨겨져 있을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태훈을 알고 싶지 않았다.

 

“없어.”

 

하연이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놀란 토끼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하연을 향해 태훈은 한 발짝 다가가며 말했다.

 

“이미 예전에 없애버렸어.”

 

잠시 태훈을 바라보던 하연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태훈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제자리에 꽂고 자신을 지나쳐 서재를 나가려는 하연을 붙잡아 끌어안았다. 품안에서 사락거리는 새까만 머리는 언제나처럼 향긋한 샴푸 냄새를 풍겼다.

 

“가지마.”

 

“다 들었잖아.”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하연의 목소리에 태훈은 가슴이 죄어 왔다. 정말 그 1년이라는 시간이 하연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버릴 수 있는 것인지. 그 모든 게 거짓이었는지.

 

“단 한순간도 진심이었던 적 없었어? 정말. 단 한순간도?”

 

태훈의 애타는 속삭임에 하연은 조용히 돌아섰다. 뒤로 돌아 태훈을 올려다보는 하연은 예쁘게 웃고 있었다. 하연은 작고 가녀린 손으로 태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단 한순간도 거짓이었던 적 없었어.”

 

하연의 대답에 태훈의 눈에는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 안도감이 태훈의 입가에 미소를 지어내기 전에 하연은 산산조각 내버렸다.

 

“단지 잊혀질 테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잊을 수 있을 거야.”

 

“왜? 어째서? 진심이었다며. 그런데 왜?”

 

태훈은 도무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듯이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태훈을 눈을 보며 하연은 여전히 환하게 어딘지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즐겁고 행복했어. 또 이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래서 잊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하연의 모습에서 미련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즐겁고 행복했다면서 떠나겠다 말하는 하연을 태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태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하연이 조용히 속삭였다.

 

“나에게 사랑은 허상이니까. 환상처럼 존재하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아무렇지 않게 잊을 수 있는.”

 

하연의 그 말에 태훈은 차마 자신의 감정을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믿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떻게 하면 믿겠어? 어떻게 하면 날 믿을 수 있겠어?”

 

여전히 놓아주지 않는 태훈을 하연은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았다. 하연이 태훈을 떠나려는 이유는 단 한가지뿐이었다. 기간에 상관없이 그 감정의 정도에 상관없이 언제나 항상 결국은 아무렇지 않게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으며 언제 그렇게 사랑했냐는 듯이 잊혀지는 거라면 믿을 수 없다고 말이다.

 

“글쎄. 당신이 날 잊지 못하면, 내가 당신을 잊을 수 없으면?”

 

갸웃거리며 대답하는 하연을 놓아주며 태훈은 약속 하나를 받아낼 수 있었다.

 

* * *

 

서재에 앉아 한 블로그를 구경하던 태훈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훈이 그대로 켜둔 채 나간 모니터에는 어디서 찍은 건지. 소박하고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하연이 밝게 웃고 있었다. 하연과 태훈이 헤어지고 3년. 그동안 하연은 가지 못했던 곳, 가고 싶었던 곳, 보지 못했던 것들과 보고 싶었던 것들을 맘껏 구경하러 다녔고 태훈은 그녀의 블로그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보며 하연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딱 3년이 되는 오늘이 태훈이 하연에게 받아낸 약속이었다.

 

- 내가 널 잊지 않는다면, 네가 날 잊지 못했다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글 이어보기

짧은 글 모음집:愛

너라는 이름의 중독

 

너라는 이름의 중독

 

봄이 오고 가로수에 벚꽃이 피면 네가 생각난다.

매해 봄마다 벚꽃 보러가자며 노래를 불렀던 네가.

그때마다 다음에 가자며 미루고 미루었던 내가.

 

여름이 오고 햇볕이 좋은 날에는 네가 생각난다.

매해 여름 이번 휴가는 계곡으로 가자고 하던 네가.

그때마다 바다가 더 좋다며 바다로 갔던 내가.

 

가을이 오고 하얀 갈대꽃이 피면 네가 생각난다.

매해 가을마다 갈대 보러 가자고 하던 네가.

그때마다 피곤하다며 PC방으로 갔던 내가.

 

겨울이 오고 새하얀 첫눈이 내리면 네가 생각난다.

매해 겨울 새하얀 설경을 보러 가자고 하던 네가.

그때마다 춥다며 가기 싫다고 했던 내가.

 

왜 그랬을까?

벚꽃을 보러 가자던 네 말은 사람 북적대는 벚꽃 축제를 보러가자는 게 아니라

조용한 밤 벚꽃이 가득 핀 거리를 그저 나와 함께 걷고 싶었던 것뿐이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계곡으로 가자던 네 말은 푸른 잎이 우거진 숲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그저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싶었던 것뿐이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갈대꽃을 보러 가자던 네 말은 새하얀 갈대밭 사이를 내 손을 잡고

그저 나와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뿐이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눈을 보러 가자던 네 말은 어디선가 열리는 눈 축제를 보러가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주머니에 네 손을 넣고 소복이 내리는 첫눈을 나와 함께 맞이하고 싶었던 것뿐이었을 텐데.

 

그 몇 년의 시간 동안 나는 왜 항상 미루기만 했을까?

왜 아쉬움을 숨기며 웃는 네 미소에 그대로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네가 옆에 없는 지금에서야 너에게 중독된 나를 느끼며

그저 아무런 말없이 웃어주던 너의 미소에 행복해 하던 나를 떠올려 본다.

 

내가 행복했던 만큼 너도 행복했을까? 아니면 나 혼자 느꼈던 행복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