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어보기

유리병 편지

서른, 책갈피

 

 

 

 

    나의 전공은 철학. 이상하게도 나는 철학을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이라기보다는, 어떤 방법론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일들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는, 그런 방법론. 그래서 철학이 좋았다. 대학생 신분이었던 4년,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던 2년 동안, 내 안에 움츠리고 있던 아집을 없애고 최대한 많은 색깔의 생각들과 표정들, 소리들을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비닐 장막 같았던 편견을 걷어내니 궁금한 것도 많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질문을 늘어놓았다. 친구들은 가끔 날 보고 특이하다거나 웃기다고 말했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이십대 초 ․ 중반, 가장 꽃다웠던 나의 청춘의 시기이다.
 
  원래 나는 국문과를 가려고 했던 여고생이었다. 다섯 살 때 밤새 책을 읽다가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반항기가 다분했던 나는 그 다음 날도 또 책상 밑에 기어들어갔다. 남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에게 어마어마한 짜릿함을 선사해주었으므로, 그 정도 크기의 강압으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책읽기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레 글쓰기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고, 이것저것 끄적이는 습관이 생겼다. 작가가 되고 싶다며 떠들고 다녔고, 대학을 간다면 국문과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도 제법 진지하게 했다. 하지만 대학 지원의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혹시 국문과에 가면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문학에 고정관념이 생기는 건 아닐까. 작품을 더 훌륭하게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고정된 시선을 가진 정답형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사실 ‘문학’을 좋아하면서도 고등학교 ‘문학 과목’에서는 그리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는 이상한 학생이기도 했다. 시와 소설에 정답이 있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는 아이, 그래서 객관식 시험에 꽤나 어려움을 겪는 아이였다. 고 3 말미, 나의 이러한 기질이 훌륭한 국문학도로 성장하기에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결국 철학을 전공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물론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4년 동안 나와 타인을 향해 끝도 없이 질문하고, 수많은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또 반성하면서 좋은 정답보다는 좋은 질문에 천착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므로.
 
  서른이 된 지도 벌써 아홉 달. 사실 요즘 나는 슬프다. 눈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조금씩 건조해지는, 그런 신체적인 변화 때문이 아니다. 해가 갈수록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주 많이 슬프다. 타인의 말에 토를 달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사건이 벌어진 까닭보다는 결과에 나타난 수치들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낀 채로 생존해야 한다. 무미건조하다. 힘이 든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삼십대라는 나이가 주는 중압감이 있다. 주변 눈치가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꼭 내 식대로 살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누군가는 아직도 철이 덜 든 거냐고 나를 비웃겠지만. 그저 그런 어른이 되는 것보다는 비난받으며 철딱서니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소년이 될 거에요?” 늘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질문이다. 독립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 나온 대사이기도 한데, 자기반성을 좋아하는 나는 스스로에게 종종 이 물음을 던진다. 이 말은 내가 과연 이 세상을 철들지 않고 살아가도 되는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고민의 끝에 언제나 따라붙는 나의 대답은, 결국 “YES”다. 가능하면 아주 오래도록 이 질문을,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서른의 한 가운데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는 핑계로 일상 곳곳에 책갈피를 끼워 둔다. 선언하듯 다짐하고, 꿈꾸듯 소망한다. 짧은 질문에 매달린 꿈들이 너무 많아 때론 버겁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내내 청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글 이어보기

마법의 질문

02. 유명세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여기저기 사방으로 허리를 굽히며 꾸벅- 인사를 하고, 매니저 형을 따라 차에 올라타면 몸은 이미 알아서 늘어져버린다.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힘없이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불타오르는 금요일을 외치며 즐거운 얼굴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또래다.

 

“좋겠다.”

 

무심결에 나온 중얼거림에 매니저 형이 쓰게 웃는다. 그래. 나도 안다. 배부른 소리라는 걸. 하지만 진심이다. 원 없이 사랑받고, 원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난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저들이 부럽다. 고개를 돌려 머리를 뒤로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나직한 자동차 소음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렇게나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그렇게나 원하던 일이었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아니. 왜 점점 행복해지지 못할까? 왜 점점 더 힘들고, 점점 더 외롭고, 점점 더 후회가 될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었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행복하지 못 할까?

 

“신후야. 다 왔다.”

 

어깨를 흔드는 기척에 눈을 뜨고 차에서 내렸다. 형은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었다. 가득 찬 쇼핑백 5~6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이서 양손에 나눠들고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열고 들고 온 쇼핑백을 내려놓은 형은 조금 걱정스레 한번 훑어보았다.

 

“뜯을 때 조심하고, 푹 쉬어라.”

 

“네. 형도 조심해서 가요.”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집은 고요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옷을 벗어두고 적당히 따듯한 물에 몸을 담갔다. 피식- 우스웠다. 쇼핑백 안에 든 건 전부 팬레터와 선물인데. 뜯을 때 조심하라는 말을 들어야 하다니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웃음이 난다.

 

“하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고,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사람이란, 인간이란, 누군가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만큼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주 당연한 것임에도 난 날이 갈수록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필시, 저 중에도 선물 아닌 선물이 섞여 있겠지.’

 

악플과 소문과 안티와 스토커에게 시달려야하는, 적어도 내가 바란 건 이런 생활은 아니었다. 난 그저 같이 서고 싶었고, 같이 하고 싶었는데, 왜 나만 남았을까? 넌 어디로 가버리고 나만 남았을까? 내가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너 하나였는데, 넌 왜 내 옆에 없는 걸까?

 

멍하니 욕조에 늘어져 하얀 타일이 가득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 똑. 똑.

 

샤워기에서 하나 둘 물방울이 떨어졌다. 규칙적인 물방울 소리와 옅게 퍼져나가는 동심원, 천장의 새하얀 타일들, 그대로 있다가는 욕조에서 잠들어버릴 것 같았다. 머리를 흔들어 몽롱한 정신을 깨우고 욕실을 나왔다. 대충 물기를 닦고 침실로 가려는 걸음을 멈췄다.

 

- 툭.

 

현관에 놓아둔 쇼핑백 하나가 쓰러졌다. 한숨을 쉬고 걸음을 돌렸다. 쓰러진 쇼핑백을 세우고, 방바닥으로 쏟아진 자잘한 선물상자와 편지봉투를 주워 담았다. 손에 뭉쳐 잡은 봉투 중에 하나가 미끄러져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명한 보라색 봉투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집어 들었다.

 

“뭐야?”

 

발신자는 비어있고, 수신자에는 주소도 없이 내 이름만 적혀있다. 딱 봐도 수상하다. 분명히 또 이상한 혈서나, 욕지거리나, 괴상한 그런 게 들어있겠지. 그런 생각과 달리, 풀칠도 안 된 봉투 안에서 나온 건 새하얀 종이였다.

 

마법의 질문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어떤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행운의 편지도 아니고, 이게 뭐야?”

 

이건 또 무슨 신종 장난인가 싶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약 올리는 건가? 목을 타고 울컥하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은 내 상황에서는 너무나 유치하고 악질적인 장난이었다. 점점 늘어가는 헛소문에, 안티에, 악플에, 있던 팬마저 잃어가고 있는 나한테는 말이다.

 

“유명해지고 싶으냐고?”

 

괜히 그 사람하고 얽히는 게 아니었다. 무반응이 답이라며 입 다무는 게 아니었다.

 

‘이미 늦어버렸지만.’

 

처음으로 터진 스캔들에 그동안 쌓아온 게 이리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허무하게 말이야.’

 

그래서 더 보고 싶다. 다른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날 믿어줄 네가 너무도 보고 싶다.

 

“주소가 없다는 건 직접 갖다 넣은 거겠지?”

 

봉투와 종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펜을 꺼냈다. 내가 적은 답을 보면, 이걸 보낸 사람은 뭐라고 생각할까? 쓴웃음이 나온다. 내가 이걸 왜 적고 있나 싶으면서도, 적어도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싶다. 억울한 헛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선가 내 소식을 듣고 있을 너만은 알아주면 좋겠다.

 

* * *

 

“내려가고 있어요. 이제 1층이에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통화를 종료했다. 문을 나서기 전, 잠깐 걸음을 멈추고 우편함에 봉투를 넣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가져갈 것이다. 어제와 같은 곳, 내 스케줄을 알고 있다면, 어디선가 날 보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반응이 궁금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겠지. 아쉽네.’

 

문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 * *

 

어두운 밤. 건물의 모든 불이 꺼지고, 문이 잠기고, 셔터가 내려갔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푸른 어둠속에 한줄기 보랏빛 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실려 우편함 밖으로 빠져나온 봉투가 열리고, 새하얀 종이가 환하게 빛을 낸다. 질문 아래 적힌 답이 어둠보다 더 진하고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 네. 거짓된 모습이 아닌 진실된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어둠속에서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2016년 6월 26일. 신문과 잡지, 온라인이 온통 하나의 기사로 화제가 되고 있다.

 

<< K양과 S군의 진실 게임 >>

 

어제 오후 S군은 작년 연말부터 계속해서 열애설과 결별설이 오가며 구설수에 오르던 K양과 스캔들에 관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S군은 K양과의 열애설은 근거 없는 소문이며, 서로 사적인 친분도 없는 사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스캔들을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양측 소속사의 제재 아래, 두 당사자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게 된 거라며, S군 자신은 물론이고 K양도 피해자라고 밝혔다. 이에 S군의 입장표명에 소속사는 그런 적이 없다고 입장을 밝힌 반면, K양측의 소속사는 아직 입장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S군은 소속사와의 계약이 만료되는 오늘 이후, 휴식기를 가진 뒤 홀로서기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S군의 진실 고백에 팬들은 차라리 잘됐다고 홀가분하게 벗어나라는 응원이 대다수이며, 안티들의 경우는 이것도 짜고 치는 거 아니냐며 믿지 않는 분위기이다. 소속사와 좋지 않게 끝낸 S군의 향후 행방이 걱정되는 가운데...[하략].

 

* * *

 

그 한번의 인터뷰에서 모든 걸 털어놓고, 다음날 바로 가방을 챙겨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숨 돌릴 틈도 없었던 생활에서 벗어나, 가보고 싶었던 곳,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혼자서 바람처럼, 쿡-. 그래. 유치하지만, 바람처럼 그렇게 떠돌았다. 이국적인 거리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길을 걸었다.

 

일상적인 거리와 일상적인 풍경과 그 속에서 일상적으로 오가는 사람들 속에 섞여, 목적지 없이 돌아다녔다. 가끔은 너와 함께 왔다면, 내 옆에 네가 있다면, 네가 그리워지는 만큼, 더 많은 걸 보고, 더 많은 걸 들었다. 그렇게 1년을 떠돌며, 소문에서, 안티에서, 악플에서 벗어나 5년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공항에 네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 많은 인파속에서 단번에 널 찾을 수 있었다.

 

그대로 달려가 널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네 손이 내 등을 토닥인다. 네가 울먹이며 미소한다.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네가 다시 내게 와주었다. 이제는 절대 놓지 않아. 너와 멀어지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다. 네 옆에서, 네 손을 잡고, 너와 함께 걸으며, 너와 함께 할 테다. 다른 그 누구보다 너만 날 알아주고, 날 믿어주고, 날 바라봐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세상 모두보다 너 하나면 충분하니까.

 

* * *

 

창밖에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창가에서는 네가 건반을 치며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네 눈은 그때처럼 반짝였고, 너의 허밍[humming]은 여전히 간지럽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든 컵을 들고 옆에 앉았다.

 

“어때?”

 

양손으로 머그컵을 받아들며, 생긋- 웃는다.

 

“좋아. 봄날에 내리는 눈송이 같은 느낌?”

 

“그래서. 가사는 떠오르십니까?”

 

“흠...좀 기다려 주시죠?”

 

결국 서로 마주보며 웃고 만다. 내가 만든 멜로디에 네가 가사를 붙이고, 그걸 함께 부르고, 나와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일상. 비록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더 이상 거짓된 내 모습에 시달리지 않고, 우리가 함께한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만으로 나에게는 이미 충분하다.

 

세상 모두가 아닌, 너 하나면 돼.

 

마법의 질문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어떤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글 이어보기

마법의 질문

01. 저녁식사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마법의 질문

이 세상의 누구와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누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겠습니까?

 

“이게 뭐야?”

 

우편함에서 꺼내온 우편물 사이로 보랏빛 편지봉투가 보여서 그대로 뜯었다. 새하얀 종이에는 엉뚱한 질문만 적혀있었다. 수신인은 분명히 내 이름이 맞는데 우표도 없고, 발신자도 없다.

 

“유치하게 마법의 질문이라니.”

 

피식- 웃으며 그대로 책상에 올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촤아- 내리는 물줄기 아래에서 문득 끝내지 못한 저녁식사가 떠올랐다. 쓴웃음이 나왔다. 샴푸를 짜서 젖은 머리에 비볐다. 뭉실뭉실 거품이 생겨난다. 그에 따라 아직도 씻어내지 못한 미련이 머리를 뒤덮는다.

 

‘그렇게 가버리다니.’

 

서운하고 화도 났다. 그럼에도 보고 싶었다. 생애 단 하나뿐인 친구였기에 평생 옆에 있을 줄 알았다. 그날 그렇게 나가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떠난 것이다. 유학을 핑계로, 멀리 떠난 것이다. 시원한 물줄기를 따라 거품이 씻겨 내려간다.

 

거품에 미련까지 묻어서 씻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그렇게 훌쩍 떠나버린 친구를 잊을 수 있게 말이다. 연락도 받지 않고, 메일에 답장도 하지 않는 그 녀석을 잊을 수 있게, 야속한 그 우정에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말이다.

 

한숨을 내쉬고 샤워를 끝낸 뒤 욕실을 나왔다. 대충 물기를 닦아낸 몸에 수건을 두르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대체 누가 이런 편지를 보내서 날 심란하게 만드는 건가 싶다. 보라색 봉투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발신인은...? 이상하다. 분명 발신인이 비어있고 수신인에 내 이름이 있었는데 바뀌어 있었다.

 

“수신자가 비어있어?”

 

명하니 봉투를 바라보았다. 마치 수신인을 채워 넣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을 돌려 그 마법의 질문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종이에 적혀 있는 그 질문의 첫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세상 누구와도...’

 

한참동안 첫 구절을 바라보다가 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뭐라고 적을까 망설이고 망설이다 한자 한자, 천천히 적어 넣었다. 질문의 아래 빈 여백에, 봉투의 비어있는 수신인에, 또렷하게 적어 넣었다. 더 이상 누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쩌면?’이라는 희망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커튼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방안을 비추고, 잔잔한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보랏빛 봉투에 달빛이 닿는 순간, 허공으로 떠오른 봉투가 열리고 새하얀 종이에 달빛이 반사되었다. 그녀가 적어 넣은 대답이 달빛에 은은하게 반짝이며 드러났다.

 

- 항상 옆에 있을 거라고, 떠나지 않을 거라고,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된 내 가장 소중한 사람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달빛에 녹아내리듯, 스며들며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에 빗방울 튕기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신발 안은 이미 축축하게 습기가 찬 상태였다. 찝찝하고 피곤했다. 얼른 가서 씻고 싶은 생각뿐이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 길 건너에 있는 한 레스토랑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간판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횡단보호를 건넜다. 함께 끝내지 못했던 저녁식사, 이 세상 누구라도 초대할 수 있는 기회, 뒤늦게야 알게 된 너의 마음, 너에게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 쏟아져 내리는 이 비처럼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길을 건넌 내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강서원?”

 

급히 돌아보는 얼굴이 낯익다. 나처럼 놀란 얼굴로 우산을 든 채 네가 서 있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 빗물 고인 차도로 차가 달리는 소리, 이 공간에, 이 길 위에, 너와 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망설이는 너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저녁 먹었어? 괜찮으면 여기서 먹고 가지 않을래?”

 

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말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의 비 덕분인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젖은 우산은 로비의 우산꽂이 꽂고, 점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 같이 비쳐진다.

 

우연일까? 그날과 똑같은 자리다. 어째서인지 넌 똑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막상 마주앉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너도, 나도, 가끔 시선을 돌려 창밖만 응시할 뿐이다. 그저 끝내지 못한 과제를 끝내기 위한 것처럼, 서로 아무런 말없이 식사만 했다.

 

결국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저녁식사가 끝났다.

 

가게를 나와 우산을 펼치고 조용히 돌아서는 넌 그날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다. 난 우산을 펴는 것도 잊은 채 너를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네 등에 대고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가지마.”

 

네 걸음이 멈췄다.

 

“가지마. 서원아.”

 

차가운 빗줄기가 몸을 적셨다. 멈칫거리던 네가 뒤돌아본다.

 

“가지마. 가지마. 서원아.”

 

커다랗게 떠진 네 눈에 비에 젖어 울고 있는 내가 비친다. 네 손에서 떨어진 우산이 빙그르르 돈다. 우산을 놓은 네 손이 나를 잡고 끌어당긴다. 나를 품에 안은 네가 그제야 겨우 꺼낸 한마디.

 

“사랑해.”

 

그리고 내가 꺼낸 한마디.

 

“사랑해.”

 

너에게 안긴 채 맞은 비는 시원하고 포근했다.

 

* * *

 

창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젖은 옷 대신에 커다란 수건을 둘둘 말고 쭈그려 앉아서 네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머그컵에 따뜻한 물이 쪼르륵- 담기고,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엣취-.”

 

어느새 다가온 넌 따뜻한 컵을 건네며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컵을 받으며 슬쩍 흘겨보았다.

 

“못됐어. 연락도 안 받고, 답장도 안하고.”

 

비죽거리며 나온 불평에 넌 옅은 미소로 빤히 시선을 맞춰온다.

 

“계속 친구로 남을 자신이 없었어.”

 

볼이 화끈했다.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네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중얼거렸다.

 

“바보야. 친구 같은 연인도 있잖아.”

 

“그러게.”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수건에 싸여 안긴 너의 품은 여전히 포근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너의 체취는 달콤하게 퍼지는 코코아 향기만큼이나 행복하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함께 하고 싶다.

 

마법의 질문

이 세상의 누구와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누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