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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린의 시/소설/편지/기타

Part 1-10 [특별한 시]- 인연은 [돌고도는 것] 이다

안녕하세요 만다린입니다.

지금 막 밤 12시를 달려가고 있는데요.

혹시 지금 살아있는 사람 있으신가요?

전...아주 생생하게 살아있답니다~^^

 

어쨌든, 오늘도 시를 들고 온 만다린에게 칭찬의 한마디를 하며(자기자신칭찬ㅋㅋㅋㅋ)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이번 편도 조금은(?) 슬프다능...ㅠㅠ)

 

#. 다들 궁금한거나 질문 등은 댓글 다시는 거 알죠?

#. 마리분들 사랑해요~~^^ (독자분들 말이예요) / 독자분들의 호칭입니당

 

 

작가의 말

여러분 사랑하구요 >_<

 

그리고.....

 

안녕히주무세요~(하트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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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같은 시간 속에

나도 포함되어있다는

 

그런 부담 속에

 

열심히 하라고만 하는

들려오는 말소리에

 

그렇게 그렇게

 

오늘 하루도

 

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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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는 저의 담임선생님이셨던

김혜림선생님께 바칩니다. 선생님~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_< ]

 

시간이라는 공간 속에 멈춰 서

 

당신을 바라보다

 

인사를 하다

 

돌아서니

 

어느새

 

나는 다른 곳에 가 서있었다

 

그래, 또다시 만나면 되겠지

 

나는 하늘을 보았다

 

그래,

 

'인연은 만났다 떨어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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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사람은 만나다 떨어지는 인연이다

 

어쩌면 다시 만날수도 있겠지만

 

인생은 한참을 돌고도는 거니까

 

그렇게 돌다보면

 

한번쯤은 다시 만날수도 있을거야

 

그리고 또다시

 

'추억으로 남길 수도 있을거야'

 

 

 

               #_<_ 만다린 : 이거 캘리 해주실분 구합니다>_<  (캘리그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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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서른, 책갈피

 

 

 

 

    나의 전공은 철학. 이상하게도 나는 철학을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이라기보다는, 어떤 방법론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일들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는, 그런 방법론. 그래서 철학이 좋았다. 대학생 신분이었던 4년,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던 2년 동안, 내 안에 움츠리고 있던 아집을 없애고 최대한 많은 색깔의 생각들과 표정들, 소리들을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비닐 장막 같았던 편견을 걷어내니 궁금한 것도 많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질문을 늘어놓았다. 친구들은 가끔 날 보고 특이하다거나 웃기다고 말했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이십대 초 ․ 중반, 가장 꽃다웠던 나의 청춘의 시기이다.
 
  원래 나는 국문과를 가려고 했던 여고생이었다. 다섯 살 때 밤새 책을 읽다가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반항기가 다분했던 나는 그 다음 날도 또 책상 밑에 기어들어갔다. 남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에게 어마어마한 짜릿함을 선사해주었으므로, 그 정도 크기의 강압으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책읽기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레 글쓰기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고, 이것저것 끄적이는 습관이 생겼다. 작가가 되고 싶다며 떠들고 다녔고, 대학을 간다면 국문과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도 제법 진지하게 했다. 하지만 대학 지원의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혹시 국문과에 가면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문학에 고정관념이 생기는 건 아닐까. 작품을 더 훌륭하게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고정된 시선을 가진 정답형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사실 ‘문학’을 좋아하면서도 고등학교 ‘문학 과목’에서는 그리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는 이상한 학생이기도 했다. 시와 소설에 정답이 있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는 아이, 그래서 객관식 시험에 꽤나 어려움을 겪는 아이였다. 고 3 말미, 나의 이러한 기질이 훌륭한 국문학도로 성장하기에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결국 철학을 전공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물론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4년 동안 나와 타인을 향해 끝도 없이 질문하고, 수많은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또 반성하면서 좋은 정답보다는 좋은 질문에 천착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므로.
 
  서른이 된 지도 벌써 아홉 달. 사실 요즘 나는 슬프다. 눈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조금씩 건조해지는, 그런 신체적인 변화 때문이 아니다. 해가 갈수록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주 많이 슬프다. 타인의 말에 토를 달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사건이 벌어진 까닭보다는 결과에 나타난 수치들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낀 채로 생존해야 한다. 무미건조하다. 힘이 든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삼십대라는 나이가 주는 중압감이 있다. 주변 눈치가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꼭 내 식대로 살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누군가는 아직도 철이 덜 든 거냐고 나를 비웃겠지만. 그저 그런 어른이 되는 것보다는 비난받으며 철딱서니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소년이 될 거에요?” 늘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질문이다. 독립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 나온 대사이기도 한데, 자기반성을 좋아하는 나는 스스로에게 종종 이 물음을 던진다. 이 말은 내가 과연 이 세상을 철들지 않고 살아가도 되는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고민의 끝에 언제나 따라붙는 나의 대답은, 결국 “YES”다. 가능하면 아주 오래도록 이 질문을,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서른의 한 가운데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는 핑계로 일상 곳곳에 책갈피를 끼워 둔다. 선언하듯 다짐하고, 꿈꾸듯 소망한다. 짧은 질문에 매달린 꿈들이 너무 많아 때론 버겁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내내 청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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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7. 한날, 한시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07. 한날, 한시

 

가끔씩 위험한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야한 상상이나 잔인한 상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위험한 상상이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 계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없지는 않을 테니, 아마도 내가 자각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걸 테다.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가장 처음은 중학생 때다. 한창 사춘기일 때, 어느 날 문득, 과도를 거꾸로 들고 목을 찌르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죽고 싶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그저 과도로 목을 찌르며 고통을 먼저 느낄까? 아니면 숨이 먼저 끊어질까? 그런 생각에 떠오른 상상이었다.

 

그야 말로 위험한 상상, 높은 힐을 신고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데굴데굴 구른다거나, 쿵쾅거리는 윗집 아이들 때문에 천장이 무너진다거나, 녹색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갑자기 차가 튀어나온다거나, 골목길이나 내리막길에서 트럭이 튀어나온다거나, 등등.

 

또는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면 속이 시원할까? 한창 시끄러운 묻지마 살인의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을까? 소설이나 영화, 만화에나 나오는 원귀가 정말로 있을까? 그런 공포 영화 같은 일을 직접 겪게 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같은 망상에 가까운 상상 말이다.

 

이런 상상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마법의 질문

당신이 어떻게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있나요?

 

그런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뭐라고 해야 하나 싶다. 스스로의 죽음을 예감하는 능력이 있다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있다면, 그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이가 없다 못해 막막하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뭘까? 그 꿍꿍이가 궁금하다.

 

중도 제 머리는 못 깎고, 아무리 용한 점쟁이도 지 죽을 제삿날은 못 맞춘다는 말도 있다. 내가 무슨 예지몽을 꾼 것도 아니고, 어떻게 죽을지 생각이나 바람이 아니라 예감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난 그런 능력도 없고 감이 좋은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질문의 대상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다.

 

죽음, 죽음. 죽음!

 

사고, 질병, 노화, 재해, 살인, 또 뭐가 있지?

 

내가 알고 있는 인상 깊은 죽음 중 하나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마지막이다. 그녀는 구경거리가 되는 치욕을 겪지 않기 위해 독사에게 물려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인 여왕의 명예와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상당히 엽기적인 이야기라서 실화인지 허구인지 모르겠다. 한 여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뺏긴 분노에 연적을 고문에 가까운 방식으로 죽이고, 사랑하는 남자의 시체를 냉동보관하며 요리해먹는다는 내용이다. 차마, 세부적인 내용을 적지는 못하겠다.

 

자살을 택하는 이들은 사는 게 힘들어서, 또는 살아갈 용기가 없어서라고 말한다. 그런 이들에게 사람들은 언제나 비슷한 말을 한다. 죽을 용기로, 죽을힘으로 뭐든지 해보라고, 그럴 용기가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다는 건 죽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걸 테다. 그것도 생각보다 상당히 강한 용기가 말이다.

 

죽음은 두려운 걸까?

 

안락사가 떠오른다. 유기동물의 안락사, 불치병에 사경을 헤매는 이를 위한 안락사(안락사가 합법인 곳이 어디인지 기억이 안 난다.) 반려동물의 안락사. 왜 안락사일까? 죽음이 두려운 거라면, 안락한 죽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뭘까? 결론은 고통이 두려운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두렵고 무서운 죽음보다 더 무섭고 견딜 수 없는,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안락사라면,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닐 것 같다. 어쩌면 두려운 게 아니라 안타까운 게 아닐까? 무섭고 두렵다고 느낄 만큼 안타까운 그런 게 아닐까?

 

안타까운 이유는 뭘까?

 

죽음이 두렵고 무서울 만큼 안타까운 이유는 뭘까? 끝이기 때문이라면, 삶에 미련이 남아서라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그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에 두렵고, 무섭고, 안타까운 걸 테다.

 

그럼, 삶에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의욕도, 없는 사람이라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도 있겠다. 미련 없이, 후회 없이, 신나고 멋지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의욕이 사라진 사람이라면, 죽음은 두렵지 않은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

 

글쎄? 과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한다. 아무리 신나고 멋지게 살아온 사람이라도 조금만 더, 라며 욕심을 낸다면, 죽음이 두렵겠지. 어쩌면, 생의 마지막에 이제 갈 때가 되었다는 어르신들의 말 뒤에도 실은 그 깊고 깊은 곳에 미련이나 후회가 남아 있지 않을까? 오랜 세월로 익힌 초연함 뒤에 두려움이 있지 않을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빌딩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면,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이 절망 끝에 높은 다리 위에서 차디찬 강물을 내려다보는 그 심정에도 뿌리 깊은 후회가 가득하다면, 그래서 두려운 걸지도 모르겠다.

 

“흐음. 쿡-.”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질문을 바꿔볼까?

 

펜을 들어 종이에 대답을 적고, 봉투에 넣었다. 책상 한쪽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어둑해진 거실에는 은은한 램프 하나만 켜둔 채 그가 책을 읽고 있었다. 난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다가가 옆에 앉았다. 그제야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왜 그렇게 웃고 있어? 불길하게...”

 

아마도 내가 또 위험스레 반짝이는 눈빛으로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모양이다.

 

“흐음. 질문이 하나 있는데.”

 

얼굴을 슬슬 들이미니 그가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난 입매를 옆으로 더 찢으며 씨익- 웃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며 양손으로 볼을 잡았다. 그가 입술 새로 윽- 하는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다. 난 쿡- 하고 웃어주었다.

 

“뭐, 뭔데 그래?”

 

“혹시 말이야, 나중에 어떤 죽음을 맞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해본 적 있어?”

 

뜬금없이 무슨 엉뚱발랄한 질문이냐는 괴상한 표정을 짓는다.

 

“응? 있어?”

 

재차 물으니 그제야 눈썹을 묘하게 찌푸리며 시선을 돌려 생각해보는 눈치다.

 

“글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굳이...”

 

슬쩍- 시선을 돌려 내 눈을 내려다본다. 난 궁금증을 가득 담은 눈으로 갸웃거렸다.

 

“굳이?”

 

피식- 하는 미소로 양손을 들어 내 얼굴을 감싸 쥐고 코가 닿을락 말락한 정도로 다가왔다.

 

“나중에 백발 할아버지가 되어서, 쭈그렁 할머니가 된 너랑 손잡고 나란히 한날, 한시에 떠나는 거.”

 

가늘게 휘어진 그의 눈 안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발개진 내 얼굴이 비친다.

 

“그래놓고 먼저 가기 없기다?”

 

조금 뚱한 목소리로 대꾸하니 그가 키득거리며 작게 웃는다. 얄미워서 노려보고 있자니, 더 가까이 다가온다. 바짝, 숨결이 느껴질 만큼, 입술이 닿을 만큼.

 

“먼저 안가. 절대로.”

 

살며시 부드럽게 포개어지고, 달콤하게 스며든다.

 

* * *

 

조용한 방안에 창문 너머로 비춰든 달빛이 가루처럼 흩날리며 넘실거린다. 이윽고 책상 위에 놓인 보랏빛 봉투에 달빛 가루가 닿고, 봉투가 열리며 새하얀 종이가 밖으로 나온다. 부스스 스치는 달빛에 고심 끝에 적은 답변이 빛을 머금으며 옅게 빛을 낸다.

 

- 없습니다. 다만, 아프지 않게, 흉하지 않게, 사랑하는 이와 같이 맞고 싶습니다.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미세하게 반짝이는 달빛에 감싸인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흩날리는 달빛을 따라 사르륵 흩어져 사라졌다.

 

* * *

 

마법의 질문

당신이 어떻게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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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6. 정신과 신체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06. 정신과 신체

 

기분이 엉망이다. 언제는 연상이라서 좋다던 놈이 이제는 연하가 좋단다. 어째 이 날씨에 아이스티가 시키고 싶더라니. 어이없음에 얼굴에 냅다 냉수를 끼얹어주고 나왔다. 그래도 분이 풀리질 않아 추운 줄도 모르고 걸었다. 주변에는 한창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외쳐대며 캐럴이 흘러나온다.

 

“젠장맞을 화이트 크리스마스!”

 

홧김에 중얼거리며 못 들은 척, 못 본 척 스킬을 최상으로 발휘하며 집까지 왔다. 입구의 우편함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가다 걸음을 멈췄다. 웬일로 내 우편함에 우편물 하나가 들어있다. 대부분의 명세서는 문자로 받고, 나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도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편함으로 다가갔다.

 

“누구지?”

 

봉투를 꺼냈다. 고운 보라색 봉투 뒷면에는 발신자 없이 수신자만 적혀있다. 상당히 수상하다. 봉투를 노려보며 고민하고 있는 귓가에 승강기 소리가 들렸다.

 

- 띵! 스륵.

 

문이 열린 승강기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곧바로 올라타서 7층을 눌렀다.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승강기가 움직이고, 몇 초의 시간이 지나 7층에 도착했다. 복도로 내려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며, 신발을 벗음과 동시에 손에 든 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냈다.

 

마법의 질문

당신의 수명이 90세이고, 당신이 30세가 되는 해에 정신이나 신체 중 하나를

향후 60년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건가요?

 

눈살을 찌푸리며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건 또 무슨 유치찬란한 질문일까? 그렇잖아도 나이 먹는 게 서러운 판에 무슨 이딴 장난질이 다 있나.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도 아니고, 홧김에 종이를 구겨서 집어던졌다. 데굴데굴 구른 종이는 서랍장에 부딪치며 멈추었다.

 

“아. 열 받아!”

 

이럴 때는 개운하게 씻고, 푹 자는 게 최고다! 따뜻한 물에 거품 팍팍 내서 노곤하게 씻고 나면, 시원한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낸다. 이 손에 잡히는 차가운 감촉이란!

 

- 딱! 치이익-.

 

“캬아-.”

 

속이 다 시원하다!

 

“너보다 어린 여자 만나서 너도 한번 된통 차여봐라 나쁜 놈아!”

 

한 모금 더 넘기고, 시원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구겨져서 나뒹굴고 있는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눈을 찡그리고 노려보았다. 내 수명이 90세라고 할 때, 30살인 채로 60년을 살 수 있다면, 뭘 택하겠냐고? 대체 어떤 인간이 이딴 게 궁금해서 이런 걸 보낸 걸까 싶다.

 

맥주를 넘기며 종이를 주워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대충 펼친 종이는 구겨진 흔적이 남아서 모양새가 말이 아니었다. 연상이라서 싶다는 소리를 듣고, 며칠만 지나면 앞자리가 바뀌는 나에게, 그러고 보니, 며칠만 지나면 이 질문이 무용지물이 될 상황이다.

 

- 피식.

 

“왜 하필 30이야. 차라리 20살로 돌려주든가.”

 

회춘이라도 해보게 말이다. 풋풋하게 캠퍼스 커플도 해보고, 20대에 미처 못 해본 이런저런 것도 좀 해보게. 왜 하필 계란 한판이라는 30살 인가. 인심 쓰는 김에 좀 더 쓰고 20살로 돌려주지.

 

“쪼잔해.”

 

그래도 선택을 한다면, 당연히 신체다. 이왕 오래 살 거라면, 건장하게 살아야지. 게다가 늙는 게 좋은 여자가 어디 있을까? 주름, 검버섯, 기미. 이런 것에서 탈출하려면 당연히 신체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잖아.”

 

정신과 육체를 비유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또한 나, 개인적으로 신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을 물이라고 할 때, 신체를 그릇이라고 보는 것이다. 90세의 신체에 30살의 정신연령이라면, 그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 90세 할머니가 30살 아가씨처럼 행동하고, 말하면 그건 너무 어색할 것 같다.

 

차라리 30세의 신체에, 아니.

 

“30살의 외형이 유지되면, 정신도 그에 따를 가능성이 크지 않나?”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은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왜 입고 있는 옷에 따라서 행동이나 기분이 달라지기도 하지 않은가. 물론 예외인 사람도 있지만, 그건 드문 경우일 테다. 사람이란, 인간이란 생물은 자신의 지위와 사회적 위치, 지식과 배경 같은 것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생물이니까.

 

“나도 어쩔 수 없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고.”

 

30살의 외모를 지니면 그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90세 할머니 같은 말투를 쓰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흠, 그럼 90세 할머니의 외모로 30살의 정신을 유지한다고 해도, 그 말투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할머니 티가 나게 되는 건가? 슬슬 헷갈리려 한다.

 

“에이-! 그냥 안 늙는 게 좋은 거지. 뭐. 치매 걸릴 일도 없고! 그럼.”

 

책상으로 다가가 어느새 비어버린 맥주 캔을 내려놓고, 펜을 잡았다.

 

* * *

 

어슴푸레한 방안에 미미한 맥주 냄새가 풍기고, 봉투에 넣지도 않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구겨진 종이에 연노란 달빛이 닿았다. 허공으로 띄워진 종이는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지, 소리 없이 쫙쫙- 펴지며 구김이 사라졌다. 홧김에, 술김에 적은 글씨는 미묘하게 삐딱한 모양새를 뽐낸다.

 

- 신체. 늙고 싶지 않아.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투명한 달빛 한줄기가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차가운 달빛 속에서 잘게 부서지며 사라졌다.

 

* * *

 

후회한다. 내가 그때 그 질문에 대답한 걸, 저주하고, 후회하고, 그럼에도 감사한다.

 

“왜 울어?”

 

갑자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에게 걱정스레 묻는 당신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기에, 평생을 함께하자는 당신의 말에 그러겠다고, 그러고 싶다고, 또는 그럴 수 없다고, 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수상한 질문에 대답을 했을까?

차라리 아무런 대답도 하지 말 것을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람은, 인간은, 그에 맞게 나이를 먹으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게 신체이건 정신이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고,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 * *

 

남자는 울적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며칠째 그녀가 연락이 되질 않았다.

 

- 찰칵. 스륵.

 

문을 여는 움직임에 바닥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그가 고개를 내려 보니 작은 편지 봉투하나가 문에 쓸려 있었다. 분홍빛이 도는 옅은 보라색의 봉투였다. 남자는 갸웃거리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봉투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거실의 소파에 대충 가방과 외투를 벗어두고, 털썩- 앉으며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서 나온 건, 고이 접힌 편지지와 누군가의 신분증, 그녀의 신분증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남자는 신분증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새하얀 편지지를 펼쳤다. 동글동글한 그녀의 글씨를 하나하나 읽었다.

 

「사랑하는 당신께.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저 스치는 인연이어도 괜찮다 생각했습니다.

곁에서 바라보며, 스치는 인연이기를 바라면서도,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저 마음에 담아두고, 마음에 품고 그리 지내려했습니다.

욕심내지 않으려 일부러 모르는 척, 태연한 척 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마음을 들킬까봐, 당신에게 짐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내 노력이 소용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당신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고백에 함께하자는 말에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 좀 더 일찍 당신을 만나지 못했을까, 왜 이제야 만났을까, 알 수 없는 원망도 해봤습니다.

 

당신이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도 털어놓기 겁나지만, 그래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다고, 불치병 같은 게 아닙니다. 내 수명이 다한 겁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올해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내 생의 마지막에 당신을 만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사랑 받아서 정말 행복합니다.

당신을 만나 게 해준 나의 운명에 감사합니다.

 

당신과의 행복한 추억에 난 웃으며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울지 말아요.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이 행복하길 바랄게요.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합니다.

 

당신에게 행복한 추억이 되고픈 이가.」

 

남자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 동봉되어 있던 신분증을 집어 들었다. 201?년 출생을 나타내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로부터 정확하게 90년 전, 그녀의 나이가 올해로 90세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다. 장난이길 바랐다.

 

“하, 하?!”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짓는 남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벗어둔 외투를 챙겨 다급히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그녀의 집 앞에서 한참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경비실에 연락해 마스터키로 열고 들어갔다.

 

늦은 밤의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방에 그녀는 고요히 누워 있었다. 마치 잠든 것 같은 그 평안한 모습에 남자는 안도하며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몇 번이나 나직하고 다정하게 불렀다.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서있는 경비가 다가와 말리지 않았다면 언제고 그랬을 것이다.

 

경비의 신고로 그녀의 시신은 한 병원의 영안실로 옮겨졌고, 처음 보는 그녀의 친척이 와서 그녀의 신원을 확인했다. 검시의도 장의사도 그녀의 나이와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며 껄끄러운 심사를 애써 숨기는 눈치였다. 병원에 마련된 간소한 장례식장에서 남자는 한참이나 그녀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 * *

 

해가 바뀌고, 남자는 파란 장미 꽃다발을 손에 들고 그녀가 잠든 곳을 찾았다. 하늘은 푸른 장미만큼이나 아름다웠고, 구름은 안개꽃만큼이나 맑았다. 남자는 그녀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비석 앞에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살랑이는 바람에 장미향이 실려 퍼졌다.

 

남자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행복한 꿈을 꾸는 달빛 같은 미소를 떠올렸다.

 

“다행입니다. 당신이 웃으며 떠날 수 있어서, 마지막에 행복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아직은 슬며시 고이는 눈물까지 어쩔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밝게 웃었다. 그녀가 미안해하지 않게, 맘 아프지 않게, 짐이 아닌 행복한 추억과 사랑이었다는 마음이 전해지게, 그렇게 웃었다.

마법의 질문

당신의 수명이 90세이고, 당신이 30세가 되는 해에 정신이나 신체 중 하나를

향후 60년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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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5. 세레나데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05. 세레나데

 

어둑한 아파트 정문을 지나 우편함에 있는 뭉치를 꺼내어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시간은 12시에 가까워지고, 몸은 피곤하다. 5층에 내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컴컴한 집에 인기척 하나 없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이 고요에 쓴웃음을 지으며 거실 불을 켜고 테이블 위에 우편물들을 툭- 던져두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며 반겨주던 잔소리가 오늘 따라 유난히 그립다. 그땐 잔소리가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막상 듣지 못하게 되니 그 허전함이 채워지질 않는다. 어째서 당신은 내게 잔소리만 가득한 걸까? 난 왜 당신 입에서 그런 잔소리만 나오게 만들었을까? 방으로 들어가며 한숨을 쉬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테이블 앞에 주저앉았다. 무심히 던져둔 우편물을 집어 들어 하나씩 뜯었다. 카드 명세서, 공과금 영수증, 전화요금 명세서, 각종 영수증과 명세서 끝에 보라색 봉투 하나가 남았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확인하고 놀란 것도 잠시, 눈물이 핑 돌았다.

 

발신인 : 이혜령

수신인 : 박정훈

 

이름 두 개를 한참 들여다보다 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냈다.

 

마법의 질문

마지막으로 혼자 노래를 부른 건 언제인가요?

다른 사람에게 불러준 적은요?

 

이건 또 뭘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래?”

 

노래라면 당신이 더 좋아했다.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음정도 박자도 못 맞추는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내 노래 실력을 알기에 가족들 앞에서도 부른 적이 없었다. 혹여나 내가 부른 노래에 당신이 웃기라도 할까봐 창피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내가 딱 한번, 당신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매일같이 듣고 따라하며, 몇 달을 연습하고, 노래방에서 99점을 받은 그날, 당신 집 앞으로 찾아가 목청을 뽑았다. 동네 주민들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구경하며 박수까지 쳐주었다.

 

그날 이후로 당신은 종종 같이 듣자고, 같이 부르자고, 나를 졸랐지만, 난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내가 부르는 것보다 당신이 부르는 걸 보는 게 좋았고, 당신이 부르는 걸 듣는 게 좋았다. 이제야 떠오른다. 잔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노래 소리가 떠오른다. 왜 잊고 있었을까?

 

당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멜로디를, 당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가사를, 노래를 부르던 당신의 미소를, 왜 여태까지 잊고서 당신이 노래가 아닌 잔소리를 하게 만들었을까. 맘이 아프다. 후회스럽다. 한번이라도 같이 불러 볼 걸 그랬다. 이제는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었구나.

 

- 툭, 투둑,

 

종이 위로 투명한 얼룩이 번진다. 얼룩을 손으로 닦아내고 두리번거리며 펜을 찾았다. 그러다 달력에서 눈이 멈췄다. 이달의 마지막 날에 표시된 빨간 동그라미 하나. 당신 생일이다. 당신 없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당신 생일이다. 그날까지 아직 14개의 숫자가 남아 있었다.

 

* * *

 

이른 아침,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우편함에 보라색 봉투를 넣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솜털마냥 둥실둥실 흘러간다. 한껏 숨을 들이쉬고, 시원하게 내쉬었다.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화창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떠나고,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온 상쾌한 바람이 우편함 덮개를 흔들었다. 그 흔들거림에 꽂혀있는 봉투가 빠지며 흘러나온다. 화사한 보라색 봉투가 벌어지고, 밖으로 나온 종이에 이슬을 머금은 이른 아침의 옅은 햇살이 닿아 반짝인다.

 

- 오늘, 당신 생일날.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위해 부를 겁니다.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이른 아침의 서늘한 바람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밝아지는 햇살 속에서 아침 이슬처럼 스며들며 사라졌다.

 

* * *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름다운 향기가 코에 닿는다. 오랜만에 꽃집에 들렀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당신이 좋아하는 꽃을 찾으니, 점원이 곱게 꽃다발을 만들어준다. 그 고운 꽃다발을 받아들고 기분 좋게 가게를 나왔다. 얼마 만에 사본 꽃다발인지 모르겠다. 새삼스레 머쓱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차문을 열어 당신만큼이나 고운 꽃다발을 조수석에 고이 놓고, 운전대를 잡았다. 고속도로를 들어서 가장 마지막 휴게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1시간을 더 달려 당신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곧 퇴직하면 그 돈으로 근처에 이사를 오는 게 좋을 듯싶다.

 

차에서 내려 양손으로 고이 꽃다발을 들고 천천히 걸어 햇볕이 내려쬐는 당신 자리에 도착했다. 당신 이름이 새겨진 묘비(墓碑) 앞에 조심스레 새하얀 데이지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명랑하고 순수한, 당신을 닮은 이 꽃을 참 좋아했다. 화려하지 않아서, 그럼에도 밝아서 좋다고 했다.

 

주변의 잡초를 좀 뽑고, 당신 앞에 주저앉았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며,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의 29년 만인데도 마음이 기억하는 노래는 그날처럼 술술 흘러나온다.

 

그동안 부르지 못한 만큼, 불러주고 싶은 만큼, 원 없이 몇 번이고 불렀다. 하늘을 보며, 구름을 보며, 어느새 사라진 쑥스러움에 당신을 마주보며, 한참이나 불렀다. 부르고 부를수록 가슴이 시원하고, 맘이 편해졌다. 당신이 그리워서, 당신에게 미안해서, 울면 어쩌나 싶었는데 오히려 미소가 그려졌다.

 

이제는 당신이 부르는 걸 들을 수 없다. 당신이 부르는 걸 볼 수 없다.

 

앞으로는 내가 당신에게 불러 줄게.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 즐겨 듣던 노래, 즐겨 부르던 노래, 이제는 내가 불러줄게. 하나씩 하나씩 연습해서 당신이 들을 수 있게 내가 부를게. 음정이 안 맞고 박자가 안 맞아도, 나중에 당신 만나러 가서 구박을 듣더라도, 같이 부르지 못한 만큼 내가 부를게. 못 부르더라도 들어줘.

 

내가 당신을 위해 부르는 노래를, 세레나데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부르다 고개를 돌리니 하늘이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붉어지는 하늘과 금빛으로 변한 구름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노을이라는 게 이토록이나 아름다웠던가 싶다.

 

“노을 참 곱다. 그치? 여보.”

 

소슬소슬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풀잎이 자잘한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여보. 나 거기 가면, 우리 그때는 같이 부릅시다. 열심히 연습해서 갈게.”

 

풀잎에 바람이 스치는 가녀린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마치 당신의 흥얼거림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들으니 정말 당신 목소리 같아서 그리움에 미소가 지어진다. 기다려줘. 여보. 금방 갈게.

 

마법의 질문

마지막으로 혼자 노래를 부른 건 언제인가요?

다른 사람에게 불러준 적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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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4. 완벽한 하루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오전 9시 정각.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또각 또각.

 

정면의 큰 창문을 등진 의자에 앉아서 뒤따라 들어온 비서가 오늘의 스케줄을 알려준다.

 

“오전 10시에 기획팀의 PT, 12시에는 <피아르>의 바이어와 점심약속이 잡혀있습니다. 오후 2시에는 이번에 지을 리조트의 후보지 현장방문이 있습니다. 이건 오늘 아침에 도착한 우편물입니다.”

 

간략하게 일정 보고를 마친 그가 책상 위에 몇몇 우편물을 올려놓았다.

 

“오늘 일정이 상당히 적네요.”

 

“예. 후보지 방문 때문에 다른 일정을 조금 조정했습니다.”

 

난 우편물 뭉치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용히 목례를 하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우편물을 빠르게 훑었다. 일정이 적다고 해서 일이 적은 건 아니기에 우편물에 시간을 많이 할애할 여유는 없다. 대략 4~5개의 우편물을 확인하고 마지막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시원한 보랏빛 봉투에 발신자 없이 수신자만, 내 이름만 적혀있다. 분명 그가 한번 확인을 거쳤을 텐데 왜 이런 수상한 우편물이 섞여있나 싶다. 일단 수신인에 내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봉투를 열었다.

 

마법의 질문

당신에게 ‘완벽한’ 하루란 어떤 날인가요?

 

“완벽한 하루?”

 

뜬금없이 이건 또 뭔가 싶다. 어이없음에 입술 새로 실소가 삐져나온다. 책상 한편의 인터폰으로 손을 내밀다가 멈췄다. ‘완벽한’ 하루, 그 말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때, 그날처럼.’

 

종이의 빈 공간을 바라보며 기억을 되짚었다. 한창 놀고 싶은 소녀시절, 학교와 집에서의 빽빽한 스케줄에 치여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그러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시골에 있는 조부의 목장에 놀려갔을 때였다. 당시 겁이 많은 나는 어렵게 얻은 시간을 목장 울타리를 맴돌며 보내고 있었다.

 

목장에서의 마지막 날, 나에게 한 소년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옅은 갈색의 머리에 짙은 녹색 눈동자의 소년. 소년의 손을 잡고 들판과 숲을 누비며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상쾌하고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날, 소년과 함께 산에서 내려다 본 광경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봐. 노을이 지고 있어. 꼭 불이라도 난 것 같지 않아?”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부모님을 따라 다시 바쁘기만 한 도시로 돌아왔고, 그 이후에 다시 목장에 놀러 갔을 때에는 소년을 만날 수는 없었다. 마치 백일몽과 같은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런 하루를 보내지 못했다. 겁 많은 나를 이끌어줄 소년의 손이 없기에 목장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완벽한, 하루.”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펜을 잡았다.

 

* * *

 

정오. 12시 정각. 바이어와 약속을 위해 그녀는 30분 전에 사무실을 나갔다. 비어있는 사무실 책상 위에는 보라색 봉투가 놓여있다. 따스한 햇살 한줄기가 봉투에 닿고, 새하얀 종이가 밖으로 나왔다. 종이에 적힌 단정한 글씨가 햇살을 머금으며 포근하게 빛난다.

 

- 그때, 그날, 그 소년처럼, 상쾌하고 자유로운 하루.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뽀얀 바람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나른 햇살 속에 사르륵 녹아들며 사라졌다.

 

* * *

 

오후 1시 정각. 바이어와 점심식사를 끝내고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기사가 아닌 비서가 앉아 있다.

 

“마크씨는 어디가고 시온씨가 앉아 있는 거죠?”

 

“갑자기 마크씨 부인의 산통이 시작돼서 병원에 갔습니다.”

 

차가 곧 출발하고, 잠시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대로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오후 2시부터 시작된 후보지 방문은 오후 5시 무렵, 마지막 남은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높은 건물들이 점점 모습을 감추고, 어느새 도로 양옆으로 들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태양은 서쪽 하늘을 향해 기울며 짙게 물들어갔다. 그때 차의 속도가 급격히 줄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

 

“왜 그래요?”

 

앞으로 휘청한 몸을 가누며 그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앉아계십시오.”

 

그는 후방의 비상등을 켜고 밖으로 나갔다. 다행이 한적한 도로라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차가 안다니면 여기서 발이 묶이는 건데.’

 

그는 보닛을 열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 낌새를 보니 아무래도 금방 해결될 것 같지가 않다. 차창을 내리고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푸른빛이 남은 갈대밭에 오렌지 빛이 내려앉았다.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가 보험사의 직원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문을 닫고 차에 기대어 서서 천천히 물들어가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통화가 끝나고, 트렁크에서 안전대 3개를 꺼내서 후방에 내려놓은 그가 난감한 얼굴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1시간정도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평소라면 예민한 반응을 보였을 내가 태평하게 한 말에 그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난 다시 눈을 돌려 들판을 바라보았다. 잠시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그도 트렁크에 걸터앉으며 시선을 돌렸다.

 

오렌지 빛의 태양은 차차 짙어지고, 달아올라, 새빨간 색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드문드문 푸른 갈대밭에 붉은 빛이 한가득 내려앉았다.

 

“꼭 불이라도 난 것 같네요.”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노을에 물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짙은 다갈색 머리에 짙은 녹색 눈동자. 옅게 퍼져있는 그의 미소가 낯익다. 그의 눈동자가 저토록 선명한 에메랄드라는 걸 왜 여태 몰랐을까? 그가 문득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한낮의 열기가 식은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그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민다.

 

“산책이라도 할까요?”

 

그 손을 잡고, 그를 따라 갈대 속으로 들어갔다. 붉게 물결치는 갈대 속을 거닐며, 갈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도로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멈춰서, 푹신 갈대 위에 나란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발갛게 타오르는 하늘에 나도 모르게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불이라도 난 것 같네요.”

 

내 중얼거림에 그가 작게 웃었다. 조용히 앉아 상쾌한 바람과 갈대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가리는 것 없이 넓은 하늘에 마음이 편하다. 마치 이 들판과 하늘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다.

 

그때, 그날, 소년과 나처럼.

 

지금, 이곳, 그와 나처럼.

 

선홍빛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짙은 남청색이 되어, 달이 뜨고 수많은 별이 반짝일 때야 보험사 차량이 도착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차가 있는 도로로 향했다. 아쉽지만, 이제는 언제든 나를 이끌어줄 손이 곁에 있으니까. 또 언젠가, 어디서, 나를 이끄는 손을 잡고 ‘완벽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마법의 질문

당신에게 ‘완벽한’ 하루란 어떤 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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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3. 예행연습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국사 노트를 꺼냈다. 수업시간에는 샤프로 연습장에 필기를 하고, 쉬는 시간에 검정, 빨강, 파랑, 중요도에 따라 볼펜으로 노트에 다시 옮겨서 정리한다. 깨끗하게 정리된 노트와 복습을 겸하게 되는 셈이다.

 

“야. 쉬는 시간에는 좀 쉬어라. 응?”

 

“밀리면 귀찮아. 어차피 너 나중에 또 내 노트 빌려갈 거잖아.”

 

“그건 그렇긴 하다만은, 그래도 쉬는 시간까지 노트를 붙잡고 있냐. 하여간 네 성격도 어지간하다.”

 

중학교 때부터 쭉 같이 봐온 녀석이 새삼스레 타박을 한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손을 놀렸다. 상훈은 한숨을 푹 쉬더니, 내 귀에서 이어폰 한쪽을 빼서 자신의 귀에 꽂았다. 내가 노트를 정리하는 동안 또 만화책이나 볼 요량일 테다. 역시나 책상서랍에서 빠져나온 건 만화책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너하고 다른 건 하나도 비슷한 게 없는데, 어째 노래 취향은 일치한단 말이야.”

 

“맘에 드냐?”

 

상훈은 씩-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그 모습에 피식- 웃어주고는 다시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노트 정리를 끝내고, 대략 3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그 사이 상훈은 손에 들린 만화책은 절반 가까이 넘어가 있었다.

 

“참 빨리도 읽는다. 제대로 읽기는 하냐?”

 

“당연하지.”

 

그때 교실 앞문에서 두리번거리던 남학생이 목을 쭉- 뽑고 말했다.

 

“이반 반장, 부반장 누구야?”

 

그에 난 의아한 얼굴로 손을 들었고, 나희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들었다.

 

“왜? 무슨 일이야?”

 

“너네 담임이 찾는다. 교무실로 오래.”

 

역시나 다음 수업인 지구과학은 자습인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햇살에 보송보송한 피부가 뽀얀 빛을 머금는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노려보며 걸었다. 문득 햇빛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녀만 저리 뽀얗게 빛난단 말인가?

 

‘아니지. 내 눈이 잘못된 거겠지.’

 

시선을 돌리며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참았다. 그래. 그날부터 내 눈에, 내 시력에 이상이 생긴 걸 테다. 그 화사한 꽃비를 맞으며 등교하는 말간 소녀의 모습을 본 그날 말이다. 그 짧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교무실에 도착하자 담임은 기다렸다는 손짓으로 나와 그녀를 부르셨다.

 

“어제 미리 말했지. 혹시 모른다고, 근데 아무래도 나가봐야 할 거 같다. 이거 들고 가서 나눠주고 자습 좀 해라. 반장은 애들 떠들지 않게, 조용히 잘 하고.”

 

“예.”

 

둘이서 나란히 자습지를 가득 안아들고 복도로 나왔다. 수업 시작종이 치는 걸 들으며, 힐끗 그녀의 손에 들린 걸 바라봤다. 제법 무거워 보인다. 반반씩 나눠든 게 실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한테 좀 더 얹을래?”

 

“아냐. 괜찮아.”

 

그녀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교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상한 광경이었다. 반장과 부반장이 나란히 자리를 비운 교실이 조용할 리가 없다. 나와 나희는 자습지를 나눠주기 전에 떠드는 애들부터 잡아야했다. 조용해진 교실 안에서 자습지를 나눠주고, 간간이 소곤거리는 50분의 시간이 지났다.

 

- ♬♪♩♬♩♪~

 

이미 담임이 퇴근한 사실을 알고 있는 애들은 수업 종료종이 치자마자 잽싸게 가방을 싸들고 교실에서 도망쳤다. 난 눈썹을 찌푸리며 몇몇 애들을 쏘아보았다.

 

“너네는 도망가면 안 되지. 주번이잖아.”

 

한명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다른 한명은 입맛을 다시며, 손에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앞에서 키득거리며 가방을 매는 상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난 씩- 웃어주었다.

 

“반장 친구이니 너도 좀 남아라. 난 내일 쓰레기, 먼지 더미 속에서 공부하기는 싫다.”

 

“이 인정머리 없는 놈아!”

 

억울하게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가방을 내려놓는 걸 보면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테다. 그렇게 다 도망친 교실에 주번 2명과 나, 상훈은 청소를 시작했다. 칠판을 닦고, 칠판지우개를 털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바닥을 쓸고, 책걸상 줄을 맞춘다. 마지막으로 창문을 다 잠그고 커튼을 치면 완료다.

 

교실 뒷문, 앞문을 잠그고, 가위바위보에서 진 주번 한명이 열쇠와 일지를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다른 한명은 환호를 지르며 이미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난 상훈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냈다. 신발에 딸려 나온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툭.

 

작은 보라색 편지봉투였다. 주워서 이리저리 살피려니 상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짝 붙는다.

 

“뭐냐? 이거 설마 러브레터냐?”

 

잡아채려고 뻗는 손을 피해 재빨리 교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결국 포기한 상훈은 아쉬움을 맘껏 드러내며 학교를 나서는 내내 툴툴거렸다. 그 툴툴대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집에 도착한 나는 방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편지봉투를 꺼냈다.

 

보라색 봉투에는 내 이름만 적혀있다. 누가 보낸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진짜 러브레터이면 어쩌나 싶기도 하다. 연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게다가 지금 내 맘에는 뽀얀 미소의 그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불안과 걱정에 한참동안 봉투를 노려보며 망설였다. 마침내 봉투를 열어 안에 든 걸 꺼냈다.

 

마법의 질문

전화를 걸기 전에 할 말을 미리 연습하나요? 왜 그런가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러브레터도 아니었고, 걱정할 내용도 아니었다.

 

“뭐지?”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전화를 걸기 전에 미리 연습한 적, 있었다. 그날, 내 눈에 콩깍지가 씌인 날 말이다. 상쾌한 아침 바람에, 투명한 햇살 속에서, 향긋한 꽃비를 맞으며, 맑은 미소를 본 그날. 머릿속에서 맴도는 그 모습에 못 이겨 몇 번이나 망설이고 망설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흘끗거리다 돌아온 집에서,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의자 위에 쭈그려 앉아 폰을 들여다보며 고민했다. 뭐라고 할까? 어떻게 말할까? 혼자 공책에 끄적거려 보기도 하고, 중얼거리다가 결국 번호만 들여다보며 밤을 지새고서야 한숨을 쉬며 손에서 폰을 놓았다.

 

‘왜 그런가? 라니. 당연하잖아.’

 

참으로 뻔뻔한 질문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펜을 집어 들고 종이에 답변을 적고 있었다.

 

* * *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복도도 교실도 조용했다.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실내화를 꺼내서 신었다. 그리고 보라색 편지봉투를 신발장 안에 넣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갖다 넣었으니 직접 가져가겠지. 신발장 문을 닫고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갔다.

 

- 드륵.

 

문을 그대로 열어둔 채 자리에 가방을 올려두고,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그래도 너무 일찍 나왔나.”

 

살짝 하품하는 소년을 지나친 바람은 교실 안을 맴돌다 열려있는 문을 지나서 복도로 나왔다. 미미하게 향긋한 냄새를 품은 바람이 신발장 맨 윗줄의 가운데 칸에 닿았다. 닫혀있던 신발장의 문이 열리고, 보라색 봉투가 바람에 실려 나온다. 봉투 밖으로 나온 종이에는 또박또박 눌러쓴 풋풋한 마음이 적혀있다.

 

- 네. 딱 한번 있습니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너무 두근거려서요.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향긋한 바람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조용한 정적 속에서 보랏빛 봉투는 향기로운 꽃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 * *

 

- ♬♪♩♬♩♪~

 

수업 종료종이 울리고, 담임은 인사는 건너뛰자는 손짓을 하신다.

 

“반장하고 부반장은 어제 나눠준 거 다시 걷어서 교무실로 가져와라.”

 

“예.”

 

담임이 교실을 나가고, 나와 나희는 곧바로 어제 나눠준 자습지를 걷어서 들고 교실을 나섰다. 몇몇 안 가져온 애들도 있는지 어제보다 양이 적었고, 혼자 들어도 충분할 거 같았지만, 그래도 이런 때가 아니면 또 언제 나란히 걸어보겠나 싶어서, 혼자 가겠다는 말을 삼켜버렸다.

 

‘그때 그렇게 열심히 고민해놓고, 그 중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니.’

 

간간이 곁눈질로 흘긋거리며, 괜스레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용감한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말 한마디 제대로 전하지 못한 나라는 한심한 놈에게는 골백번을 되새겨도 부족한 말이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도 한마디도 전하지 못했으니 용감한 것과는 거리가 먼가보다.

 

- 툭. 콰당.

 

“악!”

 

갑작스런 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나희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그래? 괜찮아?”

 

후다닥 다가가서 자습지를 내려놓고 살폈다. 나희는 다급히 치마를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잠깐 딴생각하느라, 발이 꼬였나봐.”

 

나희의 볼이 발갛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웃음을 참으며 일어나, 허리를 살짝 숙이고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봐.”

 

머뭇거리더니 손을 잡고 일어서는 모양새가 심하게 넘어지진 않은 것 같다.

 

“괘, 괜찮아. 것보다 담임 기다리시겠다.”

 

나희는 다시 쭈그려 앉아 흩어진 자습지를 주워 모았다. 난 머쓱한 얼굴로 바닥에 내려놓은 자습지를 다시 안아들었다. 교무실로 가는 동안에도 나희의 볼은 여전히 붉었다. 넘어진 게 어지간히 창피한 눈치다.

 

‘왜 이리 귀엽지.’

 

자습지를 담임 자리에 올려놓고 교실로 돌아오는 내내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아야했다. 그러다 새침하게 노려보는 눈초리에 뜨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만 웃지?”

 

“미, 미안.”

 

샐쭉하니 토라져서 교실로 들어가는 나희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백은 못할망정 웃음 하나 못 참아서 미움을 사다니, 억울하다고 해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 * *

 

두부, 계란, 대파 한단, 무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아 카운터에 올렸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초저녁의 거리에는 곳곳에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슬리퍼를 끌며, 오늘 저녁 메뉴는 된장찌개구나, 짙은 푸른빛의 하늘에 옅은 달이 떠 있고, 몇 걸음 앞에 낯익은 모습이 보인다.

 

‘어라?’

 

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왜 하필 지금일까? 헐렁한 츄리닝 차림에 슬리퍼인 지금이란 말인가? 근데 왜 같은 차림인 나희는 예쁜 걸까? 내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본 나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너도 심부름?”

 

“어, 응. 너도 심부름 가는 거야?”

 

근데 나희가 이 근처에 살았던가? 나희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응. 근데 나 어제 이사 와서, 반장 길 좀 가르쳐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아쉽다. 학교도 아닌데 여전히 반장이다. 마트로 돌아와 나희의 심부름을 도와주고, 계산을 하고, 다시 마트를 나왔다. 가로등 불빛에 은은하게 어두운 길을 걷다가 처음 마주친 길목에서 나희가 걸음을 멈춘다.

 

“고마워.”

 

돌아서는 나희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귀여워서 그랬어.”

 

나희가 멈칫하며 뒤로 돌아본다. 놀라서 동그래진 나희의 눈을 보며, 나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다. 그럼에도 한번 나온 말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네가 귀여워서 그랬다고, 내가 너 좋아한다고.”

 

나희의 얼굴이 가로등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볼이 화끈거리는 느낌에 내 얼굴도 못지않을 것 같다. 나희는 놀라서 커진 눈을 깜빡이며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 역시 이런 타이밍에, 이런 차림에, 이건 아니었나보다. 낭패감에 그냥 돌아서려는데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희가 작게 웃고 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다.

 

예쁘게 홍조가 핀 미소로 내 이름을 부른다.

 

“운아, 고마워. 조심해서 가고, 내일 학교에서 봐.”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나희는 이미 전만치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거 성공인가?’

 

그 수많은 끄적임과 망설임과 고민과 중얼거림에도 하지 못한 말을 이렇게 하게 될 줄이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불시에 한 말에 그렇게 웃어줄 줄이야. 뒤늦게야 실감나는 사실에 집을 향하는 내내, 도착해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침이 오기를 바라며, 학교에 가야한다는 사실이 설레고, 기다려지는 날은 생애 처음이다.

 

마법의 질문

전화를 걸기 전에 할 말을 미리 연습하나요? 왜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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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2. 유명세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여기저기 사방으로 허리를 굽히며 꾸벅- 인사를 하고, 매니저 형을 따라 차에 올라타면 몸은 이미 알아서 늘어져버린다.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힘없이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불타오르는 금요일을 외치며 즐거운 얼굴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또래다.

 

“좋겠다.”

 

무심결에 나온 중얼거림에 매니저 형이 쓰게 웃는다. 그래. 나도 안다. 배부른 소리라는 걸. 하지만 진심이다. 원 없이 사랑받고, 원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난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저들이 부럽다. 고개를 돌려 머리를 뒤로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나직한 자동차 소음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렇게나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그렇게나 원하던 일이었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아니. 왜 점점 행복해지지 못할까? 왜 점점 더 힘들고, 점점 더 외롭고, 점점 더 후회가 될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었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행복하지 못 할까?

 

“신후야. 다 왔다.”

 

어깨를 흔드는 기척에 눈을 뜨고 차에서 내렸다. 형은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었다. 가득 찬 쇼핑백 5~6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이서 양손에 나눠들고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열고 들고 온 쇼핑백을 내려놓은 형은 조금 걱정스레 한번 훑어보았다.

 

“뜯을 때 조심하고, 푹 쉬어라.”

 

“네. 형도 조심해서 가요.”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집은 고요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옷을 벗어두고 적당히 따듯한 물에 몸을 담갔다. 피식- 우스웠다. 쇼핑백 안에 든 건 전부 팬레터와 선물인데. 뜯을 때 조심하라는 말을 들어야 하다니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웃음이 난다.

 

“하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고,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사람이란, 인간이란, 누군가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만큼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주 당연한 것임에도 난 날이 갈수록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필시, 저 중에도 선물 아닌 선물이 섞여 있겠지.’

 

악플과 소문과 안티와 스토커에게 시달려야하는, 적어도 내가 바란 건 이런 생활은 아니었다. 난 그저 같이 서고 싶었고, 같이 하고 싶었는데, 왜 나만 남았을까? 넌 어디로 가버리고 나만 남았을까? 내가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너 하나였는데, 넌 왜 내 옆에 없는 걸까?

 

멍하니 욕조에 늘어져 하얀 타일이 가득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 똑. 똑.

 

샤워기에서 하나 둘 물방울이 떨어졌다. 규칙적인 물방울 소리와 옅게 퍼져나가는 동심원, 천장의 새하얀 타일들, 그대로 있다가는 욕조에서 잠들어버릴 것 같았다. 머리를 흔들어 몽롱한 정신을 깨우고 욕실을 나왔다. 대충 물기를 닦고 침실로 가려는 걸음을 멈췄다.

 

- 툭.

 

현관에 놓아둔 쇼핑백 하나가 쓰러졌다. 한숨을 쉬고 걸음을 돌렸다. 쓰러진 쇼핑백을 세우고, 방바닥으로 쏟아진 자잘한 선물상자와 편지봉투를 주워 담았다. 손에 뭉쳐 잡은 봉투 중에 하나가 미끄러져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명한 보라색 봉투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집어 들었다.

 

“뭐야?”

 

발신자는 비어있고, 수신자에는 주소도 없이 내 이름만 적혀있다. 딱 봐도 수상하다. 분명히 또 이상한 혈서나, 욕지거리나, 괴상한 그런 게 들어있겠지. 그런 생각과 달리, 풀칠도 안 된 봉투 안에서 나온 건 새하얀 종이였다.

 

마법의 질문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어떤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행운의 편지도 아니고, 이게 뭐야?”

 

이건 또 무슨 신종 장난인가 싶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약 올리는 건가? 목을 타고 울컥하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은 내 상황에서는 너무나 유치하고 악질적인 장난이었다. 점점 늘어가는 헛소문에, 안티에, 악플에, 있던 팬마저 잃어가고 있는 나한테는 말이다.

 

“유명해지고 싶으냐고?”

 

괜히 그 사람하고 얽히는 게 아니었다. 무반응이 답이라며 입 다무는 게 아니었다.

 

‘이미 늦어버렸지만.’

 

처음으로 터진 스캔들에 그동안 쌓아온 게 이리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허무하게 말이야.’

 

그래서 더 보고 싶다. 다른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날 믿어줄 네가 너무도 보고 싶다.

 

“주소가 없다는 건 직접 갖다 넣은 거겠지?”

 

봉투와 종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펜을 꺼냈다. 내가 적은 답을 보면, 이걸 보낸 사람은 뭐라고 생각할까? 쓴웃음이 나온다. 내가 이걸 왜 적고 있나 싶으면서도, 적어도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싶다. 억울한 헛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선가 내 소식을 듣고 있을 너만은 알아주면 좋겠다.

 

* * *

 

“내려가고 있어요. 이제 1층이에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통화를 종료했다. 문을 나서기 전, 잠깐 걸음을 멈추고 우편함에 봉투를 넣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가져갈 것이다. 어제와 같은 곳, 내 스케줄을 알고 있다면, 어디선가 날 보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반응이 궁금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겠지. 아쉽네.’

 

문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 * *

 

어두운 밤. 건물의 모든 불이 꺼지고, 문이 잠기고, 셔터가 내려갔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푸른 어둠속에 한줄기 보랏빛 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실려 우편함 밖으로 빠져나온 봉투가 열리고, 새하얀 종이가 환하게 빛을 낸다. 질문 아래 적힌 답이 어둠보다 더 진하고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 네. 거짓된 모습이 아닌 진실된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어둠속에서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2016년 6월 26일. 신문과 잡지, 온라인이 온통 하나의 기사로 화제가 되고 있다.

 

<< K양과 S군의 진실 게임 >>

 

어제 오후 S군은 작년 연말부터 계속해서 열애설과 결별설이 오가며 구설수에 오르던 K양과 스캔들에 관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S군은 K양과의 열애설은 근거 없는 소문이며, 서로 사적인 친분도 없는 사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스캔들을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양측 소속사의 제재 아래, 두 당사자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게 된 거라며, S군 자신은 물론이고 K양도 피해자라고 밝혔다. 이에 S군의 입장표명에 소속사는 그런 적이 없다고 입장을 밝힌 반면, K양측의 소속사는 아직 입장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S군은 소속사와의 계약이 만료되는 오늘 이후, 휴식기를 가진 뒤 홀로서기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S군의 진실 고백에 팬들은 차라리 잘됐다고 홀가분하게 벗어나라는 응원이 대다수이며, 안티들의 경우는 이것도 짜고 치는 거 아니냐며 믿지 않는 분위기이다. 소속사와 좋지 않게 끝낸 S군의 향후 행방이 걱정되는 가운데...[하략].

 

* * *

 

그 한번의 인터뷰에서 모든 걸 털어놓고, 다음날 바로 가방을 챙겨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숨 돌릴 틈도 없었던 생활에서 벗어나, 가보고 싶었던 곳,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혼자서 바람처럼, 쿡-. 그래. 유치하지만, 바람처럼 그렇게 떠돌았다. 이국적인 거리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길을 걸었다.

 

일상적인 거리와 일상적인 풍경과 그 속에서 일상적으로 오가는 사람들 속에 섞여, 목적지 없이 돌아다녔다. 가끔은 너와 함께 왔다면, 내 옆에 네가 있다면, 네가 그리워지는 만큼, 더 많은 걸 보고, 더 많은 걸 들었다. 그렇게 1년을 떠돌며, 소문에서, 안티에서, 악플에서 벗어나 5년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공항에 네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 많은 인파속에서 단번에 널 찾을 수 있었다.

 

그대로 달려가 널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네 손이 내 등을 토닥인다. 네가 울먹이며 미소한다.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네가 다시 내게 와주었다. 이제는 절대 놓지 않아. 너와 멀어지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다. 네 옆에서, 네 손을 잡고, 너와 함께 걸으며, 너와 함께 할 테다. 다른 그 누구보다 너만 날 알아주고, 날 믿어주고, 날 바라봐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세상 모두보다 너 하나면 충분하니까.

 

* * *

 

창밖에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창가에서는 네가 건반을 치며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네 눈은 그때처럼 반짝였고, 너의 허밍[humming]은 여전히 간지럽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든 컵을 들고 옆에 앉았다.

 

“어때?”

 

양손으로 머그컵을 받아들며, 생긋- 웃는다.

 

“좋아. 봄날에 내리는 눈송이 같은 느낌?”

 

“그래서. 가사는 떠오르십니까?”

 

“흠...좀 기다려 주시죠?”

 

결국 서로 마주보며 웃고 만다. 내가 만든 멜로디에 네가 가사를 붙이고, 그걸 함께 부르고, 나와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일상. 비록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더 이상 거짓된 내 모습에 시달리지 않고, 우리가 함께한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만으로 나에게는 이미 충분하다.

 

세상 모두가 아닌, 너 하나면 돼.

 

마법의 질문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어떤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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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1. 저녁식사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마법의 질문

이 세상의 누구와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누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겠습니까?

 

“이게 뭐야?”

 

우편함에서 꺼내온 우편물 사이로 보랏빛 편지봉투가 보여서 그대로 뜯었다. 새하얀 종이에는 엉뚱한 질문만 적혀있었다. 수신인은 분명히 내 이름이 맞는데 우표도 없고, 발신자도 없다.

 

“유치하게 마법의 질문이라니.”

 

피식- 웃으며 그대로 책상에 올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촤아- 내리는 물줄기 아래에서 문득 끝내지 못한 저녁식사가 떠올랐다. 쓴웃음이 나왔다. 샴푸를 짜서 젖은 머리에 비볐다. 뭉실뭉실 거품이 생겨난다. 그에 따라 아직도 씻어내지 못한 미련이 머리를 뒤덮는다.

 

‘그렇게 가버리다니.’

 

서운하고 화도 났다. 그럼에도 보고 싶었다. 생애 단 하나뿐인 친구였기에 평생 옆에 있을 줄 알았다. 그날 그렇게 나가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떠난 것이다. 유학을 핑계로, 멀리 떠난 것이다. 시원한 물줄기를 따라 거품이 씻겨 내려간다.

 

거품에 미련까지 묻어서 씻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그렇게 훌쩍 떠나버린 친구를 잊을 수 있게 말이다. 연락도 받지 않고, 메일에 답장도 하지 않는 그 녀석을 잊을 수 있게, 야속한 그 우정에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말이다.

 

한숨을 내쉬고 샤워를 끝낸 뒤 욕실을 나왔다. 대충 물기를 닦아낸 몸에 수건을 두르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대체 누가 이런 편지를 보내서 날 심란하게 만드는 건가 싶다. 보라색 봉투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발신인은...? 이상하다. 분명 발신인이 비어있고 수신인에 내 이름이 있었는데 바뀌어 있었다.

 

“수신자가 비어있어?”

 

명하니 봉투를 바라보았다. 마치 수신인을 채워 넣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을 돌려 그 마법의 질문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종이에 적혀 있는 그 질문의 첫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세상 누구와도...’

 

한참동안 첫 구절을 바라보다가 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뭐라고 적을까 망설이고 망설이다 한자 한자, 천천히 적어 넣었다. 질문의 아래 빈 여백에, 봉투의 비어있는 수신인에, 또렷하게 적어 넣었다. 더 이상 누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쩌면?’이라는 희망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커튼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방안을 비추고, 잔잔한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보랏빛 봉투에 달빛이 닿는 순간, 허공으로 떠오른 봉투가 열리고 새하얀 종이에 달빛이 반사되었다. 그녀가 적어 넣은 대답이 달빛에 은은하게 반짝이며 드러났다.

 

- 항상 옆에 있을 거라고, 떠나지 않을 거라고,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된 내 가장 소중한 사람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달빛에 녹아내리듯, 스며들며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에 빗방울 튕기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신발 안은 이미 축축하게 습기가 찬 상태였다. 찝찝하고 피곤했다. 얼른 가서 씻고 싶은 생각뿐이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 길 건너에 있는 한 레스토랑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간판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횡단보호를 건넜다. 함께 끝내지 못했던 저녁식사, 이 세상 누구라도 초대할 수 있는 기회, 뒤늦게야 알게 된 너의 마음, 너에게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 쏟아져 내리는 이 비처럼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길을 건넌 내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강서원?”

 

급히 돌아보는 얼굴이 낯익다. 나처럼 놀란 얼굴로 우산을 든 채 네가 서 있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 빗물 고인 차도로 차가 달리는 소리, 이 공간에, 이 길 위에, 너와 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망설이는 너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저녁 먹었어? 괜찮으면 여기서 먹고 가지 않을래?”

 

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말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의 비 덕분인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젖은 우산은 로비의 우산꽂이 꽂고, 점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 같이 비쳐진다.

 

우연일까? 그날과 똑같은 자리다. 어째서인지 넌 똑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막상 마주앉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너도, 나도, 가끔 시선을 돌려 창밖만 응시할 뿐이다. 그저 끝내지 못한 과제를 끝내기 위한 것처럼, 서로 아무런 말없이 식사만 했다.

 

결국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저녁식사가 끝났다.

 

가게를 나와 우산을 펼치고 조용히 돌아서는 넌 그날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다. 난 우산을 펴는 것도 잊은 채 너를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네 등에 대고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가지마.”

 

네 걸음이 멈췄다.

 

“가지마. 서원아.”

 

차가운 빗줄기가 몸을 적셨다. 멈칫거리던 네가 뒤돌아본다.

 

“가지마. 가지마. 서원아.”

 

커다랗게 떠진 네 눈에 비에 젖어 울고 있는 내가 비친다. 네 손에서 떨어진 우산이 빙그르르 돈다. 우산을 놓은 네 손이 나를 잡고 끌어당긴다. 나를 품에 안은 네가 그제야 겨우 꺼낸 한마디.

 

“사랑해.”

 

그리고 내가 꺼낸 한마디.

 

“사랑해.”

 

너에게 안긴 채 맞은 비는 시원하고 포근했다.

 

* * *

 

창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젖은 옷 대신에 커다란 수건을 둘둘 말고 쭈그려 앉아서 네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머그컵에 따뜻한 물이 쪼르륵- 담기고,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엣취-.”

 

어느새 다가온 넌 따뜻한 컵을 건네며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컵을 받으며 슬쩍 흘겨보았다.

 

“못됐어. 연락도 안 받고, 답장도 안하고.”

 

비죽거리며 나온 불평에 넌 옅은 미소로 빤히 시선을 맞춰온다.

 

“계속 친구로 남을 자신이 없었어.”

 

볼이 화끈했다.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네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중얼거렸다.

 

“바보야. 친구 같은 연인도 있잖아.”

 

“그러게.”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수건에 싸여 안긴 너의 품은 여전히 포근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너의 체취는 달콤하게 퍼지는 코코아 향기만큼이나 행복하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함께 하고 싶다.

 

마법의 질문

이 세상의 누구와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누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