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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쓰는 단편선

강아지 길들이기

아아 춥다. 등골 사이로 오싹한 냉기가 흘렀다. 몸을 일으켜 세우자 허리가 욱신거렸다. 가볍게 몸을 움직여보았다. 허리와 골반으로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역시 삼일은 무리였나?”

멍하니 소파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당신이 누워있던 소파. 벌써 3일째 이곳에서 잠들었다. 소파에서 일어나자 거짓말처럼 놈이 내게 달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했는데 소파에서 내려오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으르르르릉. 왈!왈!

골든 리트리버는 온순하다고 들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빨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사냥개 같았다.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놈은 경계를 푸는 일이 없었다. 하다 못해 볼일을 보는 와중에도 내게 이빨을 들어냈다. 같이 지낸 게 3일이나 됐는데 아직도 놈은 나를 처음 보는 것처럼 대했다.

“야. 이제는 나랑 살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그럴 거냐?”

하지만 마냥 놈을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놈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진으로는 많이 봤다. 시도 때도 없이 당신이 보내는 사진들에는 항상 놈이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놈의 사진을 보았다. 놈이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의 사진이다. 사진 속 놈은 작은 강아지였다. 눈도 못 뜨고 젖병을 빠는 모습이 가엽게만 보였다. 문득 그때 당신이 내게 해줬던 얘기가 떠오른다.

“이번에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했거든. 시간되면 와서 봐라. 어찌나 놈이 귀여운지.”

“죄송해요. 제가 요즘 바빠서요.”

그때 여기와 놈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놈은 지금쯤 나를 맞이해줬을까? 내 곁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을까? 아니 적어도 이빨을 내밀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알 수 없다. 그때 나는 이곳에 없었으니까.

핸드폰을 내려놓고 놈을 쳐다보았다. 더 이상은 작은 강아지가 아니었다. 어느새 이렇게 커졌는지 강아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자 놈이 나를 따라오며 짖어댔다.

“야야, 조용히 좀 해라.”

부엌에 가서 봉투 하나를 집었다. 살짝 접혀 있는 집게를 풀고는 그릇에 놈의 밥을 부었다. 그리고는 그 옆에 우유를 붓고는 놈을 보았다. 놈은 여전히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저럴까? 알 수 없었다. 놈이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어쩌면 놈은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당신 곁에 없었던 나를, 언제나 떨어져 있던 나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에휴. 밥이나 먹어라. 너도 그래야 살지.”

밥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자 놈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는지 게걸스럽게 먹었다. 우유를 입에 묻히고는 정신 없이 먹으면서도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를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빵이다. 각종 빵이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부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뿐이었다. 이미 수 차례 보았지만 여전히 낯선 모습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당신은 빵을 먹지 않았다. 입에 빵을 달고 사는 나와는 다르게 밥을 좋아했었다. 천천히 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빵들은 하나 같이 내가 좋아하는 것들뿐이었다.

냉장고를 닫고 냄비 하나를 집었다. 제대로 된 반찬이 없었기에 라면 하나를 집었다. 다행히도 찬장에는 라면이 한 가득 있었다.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를 켜보았다. 딸깍 거리는 소리와 함께 불이 살살 올라왔다. 라면 봉지를 찢고 라면을 반으로 부셨다. 뽀각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보니 당신이 해준 라면을 먹는 것이 언제였더라? 예전에는 곧장 같이 먹곤 했다. 물을 받고 라면을 끓이는 뒷모습을 보면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당신과 함께 라면 한끼 하지 못하게 된 것이.

라면을 끓이고 냄비를 소파 앞의 책상에 놔두었다. 젓가락을 하나 챙기고 자리에 앉는 순간 ‘띠링’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켜보았다. 각종 전화와 문자 때문에 핸드폰이 폭발할 것 같았다. 그 중에 당신에게 온 것은 없었다.

알림을 무시하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눌러 전화했다. 뚜르르. 신호음은 가나 반응은 없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신호음에 집중했다. 혹시나 당신이 받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기다린다면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럼 그렇지. 고개를 젓고는 다 불은 라면을 먹었다.

라면을 먹고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짐도 정리해야 했고 직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좀처럼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마음조차 없었다. 언제나 당신이 누워있던 소파에 몸을 맡겼다.

소파에 누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신은 언제나 이 소파 위에 누워있었다. 집으로 찾아올 때면 소파에서 잠든 채 나를 맞이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작은 소파는 누워있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것이 덕분에 허리랑 골반에 통증만 느껴졌다. 이곳에서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왈!왈!

밥을 다 먹는 놈이 현관 앞쪽에서 짖어댔다. 자연스레 눈길이 그쪽으로 갔다. 그제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창문 밖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관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지나가는 자동차가 보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머릿속에 선명하게 당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를 기다리는 그 모습이, 그리고 잠이 드는 그 모습이 떠올랐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날 밤. 늦은 새벽에 눈이 떴다. 차가운 냉기도, 허리의 통증 때문도 아니었다. 놈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끼잉, 끼잉.’거리며 짖고 있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놈이 당신이 자던 침대에 있었다. 코에는 웬 양말에 박고는 신음소리를 계속 내고 있었다.

놈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보았다. 슬며시 안아주며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놈이 조용해졌다. 놈이 코를 박던 양말을 보았다. 당신이 신던 양말이었다.

조심스레 양말을 들어보았다. 지독한 냄새가 났다. 흔히들 말하는 발꼬랑내가 진동했다. 순식간에 미간 사이가 좁혀지고 혀를 내둘렀다. 당신은 여전했던 모양이다. 어려서부터 당신의 냄새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매번 지독해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끼잉, 끼잉……”

놈이 다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양말을 놈의 코로 가져갔다. 그러자 놈이 조용해지면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래. 너도 냄새가 지독하다고 생각하지? 나도 그래.”

눈가가 뜨거워졌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움에 놈을 끌어안았다.

“아버지 보고 싶어요……”

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단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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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17. The Star

17. The Star

 

등교하기 전 이른 아침, 평소라면 불이 꺼진 채 문이 닫혀 있을 카페가 불이 켜져 있었다. 입구에 라는 작은 명패가 달린 이 카페는 평소에 친구들과 심심풀이 삼아 타로 점을 보러오는 곳이다. 최근에는 시험기간이라서 자주 오지 못했는데 이른 아침에 문을 연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들어가 볼까?’

 

그렇지 않아도 시험이 끝나면 와볼까 싶었다. 친구들과 같이 오는 게 아닌 나 혼자서.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데 문이 살짝 열리고 낯선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카페에서 주로 타로 점을 봐주는 언니도 아니었고,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해주는 오빠도 아니었다.

 

“들어올래?”

 

“네? 저요?”

 

얼떨결에 되묻는 나를 보며 그는 싱긋- 웃었다. 귀공자 같은 외모에 그런 살인적인 미소라니, 뺨이 화끈거린다. 이건 반칙이다. 그러면서도 발은 내 대답을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카페로 향한다. 카페 안으로 들어와 그를 따라서 창가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최현, 여기 오너야.”

 

“아, 네. 네?”

 

엉겁결에 대답하다가 깜짝 놀랐다. 이렇게 젊은 미남이 카페 사장이라니, 소문으로만 들었지 보는 건 처음이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자랑이라도 해야겠다. 그는 조용히 미소하며 카드를 골고루 섞었다.

 

* 점을 보기 전 카드를 골고루 섞는 걸 Shuffle이라고 한다.

 

‘언니는 주면서 직접 섞으라고 하던데. 조금 다르네.’

 

사람마다 다르다고는 들었지만, 조금 의외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는 테이블 위에 카드를 일렬로 쭉- 펼쳐놓고 말했다.

 

“딱 3장만 골라봐.”

 

“음-.”

 

나는 테이블 위에 일렬로 펼쳐져 있는 78장의 카드를 노려보았다. 마치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3장의 카드를 골라서 빈자리로 빼내었다. 그는 아직 뒷장을 보이고 있는 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좌우는 상관없지만, 상하는 신중하게 정해서 뒤집어봐.”

 

가장 왼쪽에 있는 카드를 집어서 아래에서 위로 뒤집었다. 드러난 카드는 [01. 마법사] 정방향이다. 다음은 위에서 아래로, 마지막 카드는 다시 아래에서 위로 뒤집었다. 각각 [17. 별]과 [13. 죽음] 모두 정방향이었다. 마지막에 나온 카드에 시선을 고정하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저 카드가 모두 나쁜 건 아니라고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심 찝찝했다. 해골이 그려진 우중충한 그림이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거 같다. 눈동자를 굴려 힐긋 바라보았다. 순간 시선이 마주치며 그가 걱정 말라는 듯이 웃었다.

 

“하고 싶은 일을 속에 숨겨두고 있구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 알았을까? 부모님에게도 친오빠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속에만 숨겨두고 있었다. 놀란 내 눈을 보며 그는 마법사 카드를 가리켰다.

 

“마법사의 카드는 지식이나 지혜와 관련이 있지만, 속임수를 쓴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때도 나오지. 반면, 지금은 또 다른 의미로 숨겨진, 잠재된 능력을 뜻하기도 해.”

 

“잠재된 능력이요?”

 

그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별이 반짝이고 있는 카드를 짚었다.

 

“네가 희망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

 

곱고 남자다운 손가락이 짚은 카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고 싶은 일,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성적을 올리는 일이 중요하고 우선이다. 그 이유를 알고 있고 납득하면서도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생각이 들어 답답하다.

 

“겁나니?”

 

그림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얘기했을 때, 부모님이 뭐라고 하실지, 친구들은, 선생님은 뭐라고 하실지, 그리고 나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마법사 카드로 옮겨갔다.

 

“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할까봐 겁먹을 필요는 없어. 넌 이미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니까. 다만, 그 자질이 빛을 발하려면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거야.”

 

그의 말에 울적한 말이 조금 가라앉아 눈을 들어 작게 되물었다.

 

“정말요?”

 

“그럼. 다만...”

 

그는 가장 마지막,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짚었다.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성장하려면 이 고비를 반드시 넘겨야 해.”

 

“어떻게요?”

 

그는 팔을 테이블에 올려서 기대고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상냥한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숨기지 말고 알려야지. 설령 누군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너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걸 보여주며 설득해야 해. 그리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워나가야겠지.”

 

“꼭, 알려야 돼요?”

 

나를 마주한 미소가 한층 더 부드러워지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받고 배우기 위해서라도 알릴 필요가 있어. 너를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나를 이해하고 도와줄 사람.’

 

카드를 처음부터 찬찬히 훑어보았다. 잿빛 머리의 노련해 보이는 마법사와 크고 아름답게 빛나는 별과 깃발과 방패를 든 해골, 필요한 건 용기와 노력과 배움이다. 가능과 불가능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울렸다. 울림이 사라지고 마음이 상쾌해졌다.

 

‘할 수 있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냐. 얼른 가 봐.”

 

그는 유리창 밖을 눈짓했다. 낯익은 여고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와 달려갔다.

 

“얘들아! 같이 가!”

 

“어? 너 왜 저기서 나와?”

 

“아침부터 커피 마셨어?”

 

난 활짝 웃으며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아니! 앞으로 내 운을 봤어. 그런 의미에서 너희에게 할 말이 있는데.”

 

“뭔데?”

 

씩- 웃으며 내가 꺼낸 말에 등굣길 내내 놀라기도 하고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반응은 금세 이런저런 호기심과 관심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참고할 만한 자료나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과 선생님은 달랐다. 현재 고3, 수능을 앞 둔 수험생이 갑자기 진로를 바꾼 것에 선생님은 크게 걱정하셨다. 심지어 엄마는 화를 내기도 하셨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냐며, 왜 탄탄한 진로를 두고 그런 불확실한 길을 선택하는 거냐고 눈물이 쏙 빠질 만큼 된통 꾸지람도 들었다.

 

그럴 때면 힘이 되어주는 건 친구들이었다. 부모님도 언젠가는 이해하실 거라고, 오히려 그렇게 하고 싶은 꿈이 있다는 게 부럽다는 말도 들었다. 그때마다 용기를 내서 부모님을 설득했고,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다. 내 끈질긴 설득에 먼저 마음을 움직여주신 건 선생님이셨다.

 

“현재 네가 원하는 학과로 안전하게 지망할 수 있는 곳이 어디냐 하면...”

 

선생님은 그렇게 내가 원하는 길을 택할 수 있게 안내를 해주셨고,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걸 눈치 챈 오빠와 아빠가 엄마를 설득해주셨다. 덕분에 마지못해 내 선택을 인정해주셨지만, 시간이 지나서 수능을 끝내고 대학에 들어가 장학금도 받으며 열심인 모습에 엄마도 천천히 나를 인정해주셨다.

 

계절이 바뀌고, 학년이 바뀌고, 대학을 졸업하는 동안 꾸준히 노력한 결과, 20대 중반에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넉넉하지는 않아도 자리를 잡고, 인정도 받으며 소소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그날 아침의 일이 떠오른다.

 

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할까봐 겁먹을 필요는 없어.

넌 이미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니까.

다만, 그 자질이 빛을 발하려면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거야.

 

그날 이후 수능이 끝나고 대학교 근처로 이사를 할 때까지, 다시 보지 못했다. 소문은 여전히 무성하게 나 있지만, 어깨를 으쓱거리며 창문 너머로 새벽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신기하지만, 확실하게 사람이었으니까. 언젠가 우연히 다시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새삼 희미하게 떠오르는 얼굴에도 미소만은 뚜렷하다는 느낌에 쿡- 하고 작게 웃었다. 동쪽 하늘에 새빨갛게 떠오르는 태양이 너무도 아름답다. 그 태양을 마주보며 눈이 다 감길 만큼 미소했다.

 

오늘 하루도 시작이다. 반짝이며 빛나는 꿈을 위해 달려갈 하루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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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7. 한날, 한시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07. 한날, 한시

 

가끔씩 위험한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야한 상상이나 잔인한 상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위험한 상상이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 계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없지는 않을 테니, 아마도 내가 자각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걸 테다.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가장 처음은 중학생 때다. 한창 사춘기일 때, 어느 날 문득, 과도를 거꾸로 들고 목을 찌르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죽고 싶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그저 과도로 목을 찌르며 고통을 먼저 느낄까? 아니면 숨이 먼저 끊어질까? 그런 생각에 떠오른 상상이었다.

 

그야 말로 위험한 상상, 높은 힐을 신고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데굴데굴 구른다거나, 쿵쾅거리는 윗집 아이들 때문에 천장이 무너진다거나, 녹색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갑자기 차가 튀어나온다거나, 골목길이나 내리막길에서 트럭이 튀어나온다거나, 등등.

 

또는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면 속이 시원할까? 한창 시끄러운 묻지마 살인의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을까? 소설이나 영화, 만화에나 나오는 원귀가 정말로 있을까? 그런 공포 영화 같은 일을 직접 겪게 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같은 망상에 가까운 상상 말이다.

 

이런 상상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마법의 질문

당신이 어떻게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있나요?

 

그런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뭐라고 해야 하나 싶다. 스스로의 죽음을 예감하는 능력이 있다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있다면, 그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이가 없다 못해 막막하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뭘까? 그 꿍꿍이가 궁금하다.

 

중도 제 머리는 못 깎고, 아무리 용한 점쟁이도 지 죽을 제삿날은 못 맞춘다는 말도 있다. 내가 무슨 예지몽을 꾼 것도 아니고, 어떻게 죽을지 생각이나 바람이 아니라 예감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난 그런 능력도 없고 감이 좋은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질문의 대상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다.

 

죽음, 죽음. 죽음!

 

사고, 질병, 노화, 재해, 살인, 또 뭐가 있지?

 

내가 알고 있는 인상 깊은 죽음 중 하나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마지막이다. 그녀는 구경거리가 되는 치욕을 겪지 않기 위해 독사에게 물려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인 여왕의 명예와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상당히 엽기적인 이야기라서 실화인지 허구인지 모르겠다. 한 여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뺏긴 분노에 연적을 고문에 가까운 방식으로 죽이고, 사랑하는 남자의 시체를 냉동보관하며 요리해먹는다는 내용이다. 차마, 세부적인 내용을 적지는 못하겠다.

 

자살을 택하는 이들은 사는 게 힘들어서, 또는 살아갈 용기가 없어서라고 말한다. 그런 이들에게 사람들은 언제나 비슷한 말을 한다. 죽을 용기로, 죽을힘으로 뭐든지 해보라고, 그럴 용기가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다는 건 죽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걸 테다. 그것도 생각보다 상당히 강한 용기가 말이다.

 

죽음은 두려운 걸까?

 

안락사가 떠오른다. 유기동물의 안락사, 불치병에 사경을 헤매는 이를 위한 안락사(안락사가 합법인 곳이 어디인지 기억이 안 난다.) 반려동물의 안락사. 왜 안락사일까? 죽음이 두려운 거라면, 안락한 죽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뭘까? 결론은 고통이 두려운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두렵고 무서운 죽음보다 더 무섭고 견딜 수 없는,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안락사라면,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닐 것 같다. 어쩌면 두려운 게 아니라 안타까운 게 아닐까? 무섭고 두렵다고 느낄 만큼 안타까운 그런 게 아닐까?

 

안타까운 이유는 뭘까?

 

죽음이 두렵고 무서울 만큼 안타까운 이유는 뭘까? 끝이기 때문이라면, 삶에 미련이 남아서라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그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에 두렵고, 무섭고, 안타까운 걸 테다.

 

그럼, 삶에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의욕도, 없는 사람이라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도 있겠다. 미련 없이, 후회 없이, 신나고 멋지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의욕이 사라진 사람이라면, 죽음은 두렵지 않은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

 

글쎄? 과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한다. 아무리 신나고 멋지게 살아온 사람이라도 조금만 더, 라며 욕심을 낸다면, 죽음이 두렵겠지. 어쩌면, 생의 마지막에 이제 갈 때가 되었다는 어르신들의 말 뒤에도 실은 그 깊고 깊은 곳에 미련이나 후회가 남아 있지 않을까? 오랜 세월로 익힌 초연함 뒤에 두려움이 있지 않을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빌딩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면,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이 절망 끝에 높은 다리 위에서 차디찬 강물을 내려다보는 그 심정에도 뿌리 깊은 후회가 가득하다면, 그래서 두려운 걸지도 모르겠다.

 

“흐음. 쿡-.”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질문을 바꿔볼까?

 

펜을 들어 종이에 대답을 적고, 봉투에 넣었다. 책상 한쪽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어둑해진 거실에는 은은한 램프 하나만 켜둔 채 그가 책을 읽고 있었다. 난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다가가 옆에 앉았다. 그제야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왜 그렇게 웃고 있어? 불길하게...”

 

아마도 내가 또 위험스레 반짝이는 눈빛으로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모양이다.

 

“흐음. 질문이 하나 있는데.”

 

얼굴을 슬슬 들이미니 그가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난 입매를 옆으로 더 찢으며 씨익- 웃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며 양손으로 볼을 잡았다. 그가 입술 새로 윽- 하는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다. 난 쿡- 하고 웃어주었다.

 

“뭐, 뭔데 그래?”

 

“혹시 말이야, 나중에 어떤 죽음을 맞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해본 적 있어?”

 

뜬금없이 무슨 엉뚱발랄한 질문이냐는 괴상한 표정을 짓는다.

 

“응? 있어?”

 

재차 물으니 그제야 눈썹을 묘하게 찌푸리며 시선을 돌려 생각해보는 눈치다.

 

“글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굳이...”

 

슬쩍- 시선을 돌려 내 눈을 내려다본다. 난 궁금증을 가득 담은 눈으로 갸웃거렸다.

 

“굳이?”

 

피식- 하는 미소로 양손을 들어 내 얼굴을 감싸 쥐고 코가 닿을락 말락한 정도로 다가왔다.

 

“나중에 백발 할아버지가 되어서, 쭈그렁 할머니가 된 너랑 손잡고 나란히 한날, 한시에 떠나는 거.”

 

가늘게 휘어진 그의 눈 안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발개진 내 얼굴이 비친다.

 

“그래놓고 먼저 가기 없기다?”

 

조금 뚱한 목소리로 대꾸하니 그가 키득거리며 작게 웃는다. 얄미워서 노려보고 있자니, 더 가까이 다가온다. 바짝, 숨결이 느껴질 만큼, 입술이 닿을 만큼.

 

“먼저 안가. 절대로.”

 

살며시 부드럽게 포개어지고, 달콤하게 스며든다.

 

* * *

 

조용한 방안에 창문 너머로 비춰든 달빛이 가루처럼 흩날리며 넘실거린다. 이윽고 책상 위에 놓인 보랏빛 봉투에 달빛 가루가 닿고, 봉투가 열리며 새하얀 종이가 밖으로 나온다. 부스스 스치는 달빛에 고심 끝에 적은 답변이 빛을 머금으며 옅게 빛을 낸다.

 

- 없습니다. 다만, 아프지 않게, 흉하지 않게, 사랑하는 이와 같이 맞고 싶습니다.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미세하게 반짝이는 달빛에 감싸인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흩날리는 달빛을 따라 사르륵 흩어져 사라졌다.

 

* * *

 

마법의 질문

당신이 어떻게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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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奇

새하얀 꿈

 

새하얀 꿈

 

17살 어느 날.

 

“계세요~?”

 

방안에 있던 난 내 방문을 열고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서부터 환하게 비춰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셨다.

 

그 빛 속에서 현관에 서있는 사람이 흰 저고리에 흰 바지를 입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환하게 비춰드는 빛에 얼굴만은 보이지 않았다.

.

.

.

잠에서 깨고 꿈을 꾼 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그날이 17살 겨울방학 때였고, 1월 중순이었다는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것도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꿈만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날 오후 난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장에 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신을 염하기 전에 할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영안실로 들어가셨다.

빈 장례식장에 홀로 앉아 있던 난 아침에 내가 꾼 꿈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새하얗고 눈부시던 빛과 하얀 한복을 위아래로 입고 있던 아저씨.

 

영안실에서 나온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편하게 쉬신 것 같다며 웃고 계셨다고 했다.

 

향을 피우고 상복을 입고 곧 도착 할 다른 형제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에게 난 아침에 꾼 꿈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꿈같은 걸 믿지 않는 아버지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나도 그저 그런 꿈이었나 보다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3일 내내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맡았던 짙은 향내 때문일까?

출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결국 심하게 탈이 낙 말았다.

그런 내 엄지손가락을 아버지가 바늘로 따주시고 나서야 탈이 난 것을 모두 내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나 지난 뒤 나는 어머니에게 그 날 내가 꾼 꿈을 말했다.

다 듣고 난 어머니께서 하신 말에 난 그 꿈이 할아버지를 마중 나온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휴. 가시는 길에 큰손녀 어루만지고 가셨나 보네. 그래서 네가 탈이 났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