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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하얀 겨울

 

 

 

하얀 겨울이었다. 갓 태어난 그녀의 눈에는 그것이 눈인지 먼지인지 구분될 필요가 없었다. 온 몸에 치닫는 감각만 상대하기에도 버거웠던, 한 아기의 어떤 날에 대한 이야기다.

 

따뜻한 자궁 안으로부터 차가운 병원 침대로 꺼내졌다가 이윽고 도착한 곳, 아기의 그 세 번째 장소를 사람들은 집이라 불렀다. 초가에 들어서며 아기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이 날의 주인공이어야 함을 느꼈다. 한껏 동그랗게 뜬 눈을 굴리던 그녀는, 그러나 아구구구- 소리와 함께 바닥에 눕혀졌다. 산모가 너무 약해졌어. 어떡하누. 눕혀 눕혀. 뱃속에서 잠영하던 시절처럼 웅웅거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들만 귓가를 맴돌았다. 소리가 잘 들린다는 것과 말을 잘 알아듣는다는 건 다른 일이구나, 그녀는 한참 뒤 이 날을 회상하며 확신했다.

 

산모가 너무 약해졌다고 했지, 그럼 아기는 너무 강했던 걸까. 내 자리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는 그녀는, 방구석 한 편을 지정석으로 썼던 그 날의 행운을 잊을 수 없었다. 잠이 올 만도 했는데 아기는 웬일인지 잠들지 않았다. 어른이 된 그녀는 태어난 지 며칠 만에 경험하기엔 그 운이 너무 빨랐다며 웃었다. 성급한 행운을 거머쥔 아기는 모두에게 잊힌 채로 꼬박 하루 동안 방치되었다. 한참이 지난 뒤 낯선 우는 소리를 알아챈 어떤 어른이 자리를 살펴보았을 때, 아기의 등에는 커다랗게, 화마가 다녀간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아기는 빨간 등을 가진 여자로 자라서 말했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몸에 남아있는 자국처럼 마음에도 혼연히 남아 있다고. 버려졌던 그 몇 시간, 며칠의 기억이 평생을 방랑하게 한다고. 그 날은 집이라는 장소를 자신이 머무를 곳으로 생각하지 못한 채 살게 될 어떤 여자가 처음으로 등을 뉘인 날이었다. 하얀 겨울이었다.

 

 

 

겨울에 태어난 내 어머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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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사막의 나비

사막의 나비

 

태양이 내려쬐는 뜨거운 모래 바다 위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날개를 가진 나비가 팔랑인다.

위로 올라가면 햇살이 뜨겁고 아래로 내려앉기에는 데워진 모래가 뜨겁다.

 

꽃도 없고 가지도 없으며 작은 돌멩이 하나 보이지를 않는다.

쉬어갈 곳을 찾지 못하고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나비는 계속해서 허공을 헤엄친다.

 

수십, 수백, 수천…나비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날개가 남긴 흔적이 이어지며 쌓인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얼마나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한번의 날갯짓이 수만번의 흔적을 남길 때까지 쉼 없이 날아도 멈출 수가 없다.

쉬지 못한 날개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푸른 나비는 비틀거린다.

 

마침내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너덜너덜해진 날개로 식어가는 모래 위에 내려앉았을 때

차가워지는 모래를 따라 나비의 열기도 식어가고 불어오는 바람에 서서히 가라앉는다.

 

사구 속에 가라앉은 나비는 흔적도 보이지 않지만 허공에 새겨진 날개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모래 파도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뒤섞이며 휘몰아치는 푸른 날개의 잔상.

 

작은 나비 한 마리가 허공에 남긴 수천, 수만의 발자국이 모여 거대한 태풍을 이룬다.

마치 수천, 수만의 모래 알갱이가 모여서 사막을 이루듯이…

 

인터넷이라는 사막, 네티즌이라는 나비

 

문명이 발달하고 기술이 발전하며 쌓이고 쌓인 노력이 이루어낸 정보의 바다 인터넷.

하루 또는 1시간 만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정보가 쌓이고 쏟아진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마우스와 키보드를 타고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며 흔적을 남긴다.

공감, 좋아요, 댓글, 하트, 별…무수한 날갯짓을 남기는 수많은 나비 떼.

 

무심코 남긴 작은 흔적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괴로움을 선사하고

무심코 남긴 작은 흔적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감동이 되어 축복한다.

 

무수한 나비가 남기고 간 자리에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린다.

때로는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생명을 죽이기도 하는 나비의 날갯짓.

 

의미 없이 흘린 한마디가 이리저리 휩쓸리며 부풀려지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뼈와 살이 붙어 진실이 되어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무수한 무관심이 쌓이고 덮여 알려져야 하는 것들이 묻히기도 하고

거짓이 진실의 가면을 쓰기도, 진실이 거짓이라는 무덤에 들어가기도 한다.

 

마치 뜨거운 아지랑이처럼 또는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날개의 잔상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신기루가 되어 눈을 어지럽힌다.

 

 

당신은 어떤 나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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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모이다_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로 믿을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당신이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풀라. 

 

당신이 어떤 일에 성공하면 몇 명의 가짜 친구와 몇 명의 진짜 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기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솔직하라. 

 

오늘 당신이 하는 좋은 일이 내일이면 잊혀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을 하라. 

 

가장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가장 작은 생각을 가진 작은 사람들의 총에 쓰러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생각을 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동정을 베풀면서도 강자만을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약자를 위해 싸우라. 

 

당신이 몇 년을 걸려 세운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라. 

 

당신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발견하면 사람들은 질투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행복하라.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인도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 본부 벽에 붙은 시-

 

위에 글을 읽어내려가면서 나는 얼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사용하는지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일단 첫번째에서부터 '음...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라? 말이 돼?' 를 떠올렸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었을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배신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대답은 절대 용서 못한다로 결론이 났으며,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뭐...

나도 어차피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알아서 잘 살아가면 되는것이며....

 

내가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면 어떤 의도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면 되는데 굳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란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 공감이 되는 글귀.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그 기준을 똑바로 세워서 살아간다면 크게 어렵게 살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거나 쉽지 않다는 것이 참...아이러니 할 뿐이다. 

그래도 인생은 한 번뿐인데, 최대한 즐겁게! 행복하게 !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괴롭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으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면 정말 즐거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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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이러니

#31

십 분 동안 생각나는 대로 아무거나 쓰기.

 

몸이 차다. 그래선지 겨울이면 추위를 많이 타고 손발도 남들보다 많이 시려운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맨발이다. 여간해서는 집에서 양말을 신지 않는다. 양말을 신으면 너무 답답하다. 마치 갑옷을 입고 있거나 내 발에 족쇄라도 채워놓은 것 같은 기분 마저 든다. 평소 넥타이 할 일이 있어도 웬만해서는 매지 않는 이유 역시 이와 비슷하다.

 

어렸을 때부터 알레르기 비염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내 고질적인 산만함과 허약한 집중력의 원인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게 사실이지만 여전히 환절기처럼 일교차가 큰 날씨 혹은 추위가 지속되는 겨울이면 비염은 버젓이 다시 고개를 든다. 참으로 집요하다.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게 무척이나 미안해지고 죄를 짓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누구한테 미안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창조주 하나님? 아니면 운 좋게 만물의 영장이 된 인간 밑으로 무수히 얽혀있는 먹이사슬 안의 동물들? 그것도 아니라면 내 곁에 있는 사람들?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미안하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앞으로는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을 참이다. 그런데 무심코 보게 되는 경우라던가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사람은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 법. 그럴 땐 그냥 재밌게 보면 된다. 인생을 걸만한 신념이나 소신 같은 것이 아닌 이상에야 자신이 뱉은 말에 너무 얽매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조금 가볍게 살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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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에게 물드는가

너와 난 파리에서 만날 것이다

  금사빠. 대학 시절부터 내게 따라 붙던 별명이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라는 이 칭호는 밀당에서 비롯되는 스릴 있는 연애를 지향하는 현대 첨단 사회를 살아가기에는 부적절한 스펙이나 다름 없다. 뜨거운 고구마를 무턱대고 입에 가져다 넣는 아이처럼 데이고 데인 것이 어느새 두 줄의 경력. 그리고 이 기록은 지금도 갱신중이다. 그것도 무려 집에서 수 Km를 떨어진 이 곳 파리에서.

 

  "좋은 아침이에요."

 

카운터 앞에 온 내게 엘렌이 말을 걸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엘렌. 커피 한 잔 주세요."

 

따뜻하고 진한 커피 한 잔이 곧 내 앞에 놓인다. 한 모금을 마시며 딱딱한 바케트를 씹어 먹는다. 처음에는 벽돌 같다고 생각했던 이 빵도 이제는 그럭저럭 먹을만 하다.

 

  "내일이면 여기를 떠난다고 그랬죠?"

 

내 맞은 편에 앉으며 엘렌이 말을 건다. 붉은 머리의 그녀는 이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커피 맛도 좋고 시설 자체가 깔끔해서 파리에 가면 꼭 이 곳에서 묵는다는 회사 동기의 추천대로 참 좋은 장소이다. 내가 보기엔 엘렌이라는 사람도 한 몫을 하는 것 같긴 하지만.

 

  "네, 내일이면 공항에 가서 서울로 돌아가게 되네요."

 

어쩐지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열흘 가까이 되는 휴가 내내 이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냈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는 사실에 피식 웃는다. 그렇다, 나는 그 고질병에 또다시 걸리고 말았다.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 것만 몇 번인지.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이성이 아무리 제동을 걸어도 컨트롤하기 어려운 법. 이 곳에 발을 들여 엘렌을 마주했을 때, 커피를 받아 들며 여행 루트에 대해 조언을 받을 때,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원래는 아비뇽으로 가기로 했던 일정을 취소하고 파리에서만 8일을 보내고 있다. 주변 구경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프랑스의 이모저모를 보고 싶어 그동안 아껴둔 월차들을 모아 온 휴가를 침대에서만 보내고 싶진 않았으니까. 다만, 틀에 박힌 여행은 싫어서 국내에서 유명한 곳들만 피해서 구경다니는 중이었다.

 

  "오늘은 또 어떤 특이한 곳을 갈 계획이죠?"

 

또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묻는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돌리며 대답한다.

 

  "어제까지 골목이란 골목은 다 다녀서 오늘은 적당히 쉬려고요."

 

  "그러면..."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과 눈이 마주친다. 또다시 미소.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조금은 덜 이상한(Unstrange) 장소를 가보는 건 어때요?"

 

  "덜 이상한...?"

 

  "어, 그러니까... 그래! 조금은 흔한(Common) 장소요! 영어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요."

 

  "그러니까... 루브르라던가, 에펠 탑 같.."

 

  "그래요, 에펠탑!"

 

갑자기 탁상을 소리나게 내리치며 큰 소리로 말한다. 살짝 놀랐다. 잔에 담긴 커피가 살짝 넘쳤다.

 

  "에펠탑의 야경이 예뻐요! 음, 사실 수도 없이 많이 보긴 했지만 그래도 엄청 예뻐요."

 

pretty beatiful이라는 표현까지 쓰는 걸 보니 에펠탑 야경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가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이야기 한다.

 

  "저기, 그러니까... 저랑 같이 에펠탑에 저녁에 가지 않을래요?"

 

  "어.. 엘렌씨랑 제가요?"

 

  "사실, 오늘 밤에 윈스턴 씨랑 겐지 씨가 에펠탑에 갈 거라던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해서요. 시현 씨는 에펠탑 안 가봤잖아요?"

 

 역시 단 둘이 가자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고질병의 증상 첫 번째가 바로 설레발이다. 젠장.

 

  "뭐... 하루 쯤은 유명 장소를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려면 오늘 저녁에 같이 에펠탑을 가는 거죠? 지금 위층에 올라가서 같이 간다고 이야기하고 올게요."

 

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로 계단을 올라간다. 참 기운 좋은 여자다. 이 게스트 하우스의 곳곳에서 엘렌의 초록빛깔의 기운이 여기저기에 퍼져 나가는 듯하다. 뭐, 저 기운찬 모습이 호감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지만. 나도 오후에 나갈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둬야 할 것 같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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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오는 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12월의 밤은 생각보다 일찍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침의 쌀쌀하던 날씨와는 다르게 적절히 찬 공기가 볼에 닿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긴 했지만. 확실히 야경이 예쁘긴 하다. 서울의 남산에서 보는 야경과 다른 분류의 것이라고나 할까. 뭔가 전원적인 도시 야경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윈스턴은 옆에서 Good, Prefect라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사진기 셔터를 누르고 있다. 사진을 같이 찍자는 말에 사진도 같이 찍고, 서로 서투른 영어로 대화하며 웃고. 생각해보니 이번 휴가 기간 동안 누구랑 같이 거리를 다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사람들과 밥을 매일 같이 먹기는 했지만, 유명지는 가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다. 

 

  "어때요, 나오길 잘했죠?"

 

추운 날씨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엘렌이 내게 묻는다. 답이 정해져있는 질문이지만, 나는 웃으며 그렇다고 한다. 확실히 사진으로만 보던 모습과는 다르다. 웅장하다기 보다는 뭔가 아기자기한 거리의 모습을 보고 미니어처를 갖다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확실히, 좋네요. 이렇게 나오는 것도. 덕분이에요, 엘렌."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또다시 미소. 

 

  '내일이면 여기를 떠난다고 그랬죠?'

 

이 말을 하던 당신의 표정이 어땠는지 생각해본다. 서운해 하는 표정이었나? 그건 아무래도 나의 '설레발' 증상이 아닐까. 8일 동안이나 있던 투숙객이 떠나면 정이 들었으니 아쉬울 수 있는 거 아닌가? 괜히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고질병의 두 번째 증상이 있다면 그것은 '잡 생각이 많다.'라는 것이다. 축구공 마냥 여기저기로 차여 굴러다니다 보니 생긴 일종의 방패라고나 할까.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당신의 눈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지금 이 야경의 노오란 조명들처럼 빛나는 눈. 그래, 나는 내 마음을 말하고 싶다.

 

  "나는요. 엘렌."

 

일단 말을 내 뱉어 버렸다. 아, 이런. 이제 뒷 말을 해야 한다. 세 번째 증상은 '결국 내뱉고 후회한다.'이다. 잠시 고개를 돌린다. 무슨 말을 해야 긍정적인 피드백이 돌아올까. 영어 단어를 머리 속에서 조합해본다.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마주한다.

 

  "나는... 엘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 뭐랄까, 처음 봤을 때부터 싱그러운 빛이 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나도..."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문다. 뭐라고 말할까, 당신은.

 

  "나도, 시현 씨가 좋아요. 하지만... 시현씨는 한국에 돌아갈 거에요. 저는 파리에 남아 있을 거구요. 우리가 있을 곳은, 있어야 할 곳은 서로 달라요, 시현."

 

그래,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을 말할 때 나는 기대를 점점 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기대를 하고 있지 않다고 나를 몰아 세운 것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나 혼자서 하는 망상이었고, 그 망상은 깨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시현이 좋아요. 그건 확실해요. 하지만, 음... 영어 표현이 생각이 안 나네."

 

  "아니에요, 엘렌. 표현하지 않아도 잘 알겠어요. 당신의 마음을."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이 지어진다. 고개를 내렸지만, 그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고마워요. 말해줘서."

 

손에 낀 장갑을 벗고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추운 날씨에도 그 손은 매우 따뜻했다. 12월 29일의 밤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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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파리를 은은하게 수놓던 야경도 잠이 든 새벽의 시간. 조용히 게스트 하우스를 나가려고 하던 나를 누군가가 부른다. 엘렌이다. 

 

  "지금 가는 거에요?"

 

  "엘렌,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요?"

 

  "이거. 주려구요."

 

한 장의 봉투다. 여성스러운 글씨체로 서명이 되어있는 한 장의 편지 봉투. 괜히 머쓱해진 나는, 비행기 타면서 읽어보겠다고, 고맙다고 이야기 하면서 나선다. 사실 좀 후회는 된다. 좀 제대로 인사를 하고 나올걸. 문을 열고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미소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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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전 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기장의 말을 끝으로 안내 방송이 끝이 난다. 코트 안 주머니로 손을 넣는다. 편지 봉투를 아직도 열지 못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이걸 보면 그렇게 소심해 갖고 X- 떼고 다녀라 라고 하겠지. 그래, 편지는 읽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지. 새벽 시간까지 깨어 있으면서 전해준 편지를 읽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차이더라도 확실하게 차여야 뒤탈이 없는 법이다.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연다. 안에서 나온 것은 두 번 접혀 있는 편지지 한 장, 그리고 사진 한 장. 

 

 

윈스턴이 찍었나 보다. 9일 동안의 여행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미소를 지으며 편지지를 펼치려고 하는데, 사진의 뒷면에 쓰여진 글씨가 보인다. 편지지의 글씨체와 같은 것을 보니, 엘렌인가. 불어로 적혀 있었지만, 쉬운 문장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Vous et moi rencontrer de nouveau à Paris

(너와 난 파리에서 만날 것이다.)

 

편지지를 펼치지도 못하고 사진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구름이 바닥부터 차올라 파리의 야경을 덮었다. 비행기는 공항을 지나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난다. 더 먼 곳으로, 파리에서는 너무나도 먼 곳으로. 그래, 더 먼 곳으로. 갈라진 길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간다. 앞으로 앞으로.비행기가 지나가고 있는 길의 뒤 쪽을 바라본다. 당신의 편지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스쳐 지나 나에게 왔다. 8시간. 문득, 지금 당신의 시간이 궁금해진다. 내가 아침일 때 당신은 따뜻한 햇살을 맞고 있을 테고, 내가 점심을 먹을 때쯤이면 당신은 사람들과 에일을 마시면서 너스레를 떨겠지. 

 

그래, 당신과 나는 파리에서 만날 것이다. 당신은 그 전날에도 본 것처럼 한결 같은 미소와 커피 한 잔을 줄 것이고, 나도 그 미소에 같이 웃을 것이다. 이번에는 유명한 곳을 가보자고. 다른 사람들이 가는 그런 곳에 가서 걷고, 먹고, 함께 웃어보자고 할 것이다. 당신은 뭐라고 할까? 어떻게 웃어줄까? 읽으라고 쓴 것은 읽지도 못하고 사진만 쳐다보는 나지만, 분명히 나는 알 수 있다. 너와 나는 파리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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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모이다_

기준이란 뭘까?

나의 운명의 짝을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걸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괜찮아지는 걸까?

도대체, 사랑의 기준이라는 게 뭘까?

 

사회생활에서는 각각의 룰이 존재하기도 하고,

정답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나와 있는데,

도대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나 사랑에 대해서는 명백한 답안지가 왜 없는 걸까?

 

인생을 살아가면 갈수록 어렵고 모르는 것투성이다.

잘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면, 실수는 더 많이 하게 되고,

때때로 의외의 성과를 거둘 때도 있지만 명확한 답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만둘 수도 없는 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현실이지 않을까?

 

말 한마디에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고, 좋지 않았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킬 수도 있다.

 

삶을 살아가기에, 어떤 이들은 인생이 너무 짧다하고,

또 어떤 이들은 너무 길어서 인생이 지루하고 따분하다고도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에서 정답은 없다.

다만,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부분에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건지 말이다.

 

일단, 나는 사실 기준 같은 거 잘 모르겠다.

다만, 막연하게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탕했던 과거의 삶과,

꿈과 목표를 향해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지금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넘어진다 할지라도 다시 일어나 도전하면 된다는 걸.

 

 

인생 살아가는 게 한번뿐인데, 잘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고민이나 걱정을 할 시간에 차라리 좀 더 즐거운 것을 찾아,

나에게 더 큰 선물을 안겨주는 것이,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기준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불평과 불만들이 수두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만 더 생각해보고 주변을 돌아보면,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이 정말 많을 텐데.

정작,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말들은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헐뜯고 비교하는 말들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비교하면서 헐뜯고 있는 당신들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하냐고.

 

당신들이 하는 행동들이, 또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거냐고.

모른다고, 상관없다 하면 물론, 더 이상 할 말은 없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꼭 이 말은 해주고 싶을 것이다.

 

당신 스스로를 더 많이 사랑하고 아끼라고.

쓸데없이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당신 스스로에게 더 많이 집중하라고 말이다.

 

이 세상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누구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법!

 

단지, 세상의 잣대에 따라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기준이 아닐까?

 

그렇다. 애초부터 어떻게 하라는 기준 따위는 없었다.

신은, 우리에게 공평하게도 하루 24시간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그 시간을 얼마나 알차게 사용하는지는 이제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사랑 앞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변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서로가 서로를 미친 듯이 사랑한 다해도 각자 살아왔던 환경이 틀린데

어떻게 서로의 마음이 자신 같을 수 있겠는가?

서로, 노력해보지도 않고, 이해해 보려하지도 않고 상대방에게 맞춰달라고 강요하는 건

부질없는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에도 기준이라는 건 없다.

서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배려하고 양보하면서 맞추어 나가다 보면,

그 사람이 나의 운명의 짝이 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하면서,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보는 게 아니라 조건도 재고 따지게 되면서

사랑을 잃고 아쉬워하면서 눈물로 잊으려 하는 건 아닐까?

그리곤, 곧 또다시 자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을만한 조건을 갖춘 사랑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 기준이란 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자기 자신만의 기준만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 나의 궁금증은 해결이 되었다.

 

쓸데없이 걱정 근심하지 말고, 나의 기준대로 멋지게 살아낼 것이고

운명의 반쪽도 찾아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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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이러니

#26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 안. 내 옆에 한 여자가 앉았다.

 

나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검고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는 자리에 앉아마자 두툼한 가방에서 허연 종이뭉치들을 잔뜩 꺼내더니 이미 밑줄이 여러 번 그어 진 종이 위에 또 다시 밑줄을 그으며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무어라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여자의 인기척이 자꾸 신경쓰였다. 결국 버스를 타기 전 서점에 들려 구입한 책을 읽는 것도 얼마 못 가 그만두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여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간헐적으로 옆을 흘끔거리기까지 했다.

 

보아하니 여자는 아마도 입사 시험을 앞두고 있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입술을 푸르르르 떨며 풀어보기도 하고, 기지개를 펴듯 고개를 뒤로 쭉 젖혀보기도 하고,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좌우로 머리를 절레절레하기도 하며 여자는 자신의 초조함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때였다. 여자가 들고 있던 펜이 바닥에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여자의 손이 전혀 닿지 않는, 내 손도 겨우 닿을만한 곳으로 떼구르르 굴러가 멈췄다.

 

나는 심드렁한 척 허리를 숙여 펜을 주운 뒤 여자에게 그 펜을 건넸다. 그러자 여자는 고맙습니다, 라고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숙여 그 인사에 답을 하고 다시 책을 폈다. 여전히 책읽기에 집중이 되지는 않았다.

 

두 시간 남짓 달린 고속버스가 어느덧 휴게소에 도착했다. 나는 편의점에 들려 생수를 하나 집어들고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서 기다렸다. 그리고, 불현듯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여자의 초조한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음료수라도 하나 사서 여자에게 건넬까, 생각을 하다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서였다. 진정 다른 뜻이 없는 순수한 호의라고 해도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요즘같은 세상엔 더욱 그렇다. 나는 끝내 단념하고서 다시 버스에 올라탔고, 자리에 앉았다.

 

얼마 후 여자가 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의 양 손에는 캔커피가 하나씩 쥐여져있었다.

 

내 옆, 그러니까 자신의 자리에 앉은 여자가 안전벨트를 다시 착용한 후 조금 전까지 들고 있던 커피 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여자는 한 개 구입하는 가격에 하나를 더 주더라는 말과 함께 웃으며 조금 전 펜을 주워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호의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