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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1. 저녁식사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마법의 질문

이 세상의 누구와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누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겠습니까?

 

“이게 뭐야?”

 

우편함에서 꺼내온 우편물 사이로 보랏빛 편지봉투가 보여서 그대로 뜯었다. 새하얀 종이에는 엉뚱한 질문만 적혀있었다. 수신인은 분명히 내 이름이 맞는데 우표도 없고, 발신자도 없다.

 

“유치하게 마법의 질문이라니.”

 

피식- 웃으며 그대로 책상에 올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촤아- 내리는 물줄기 아래에서 문득 끝내지 못한 저녁식사가 떠올랐다. 쓴웃음이 나왔다. 샴푸를 짜서 젖은 머리에 비볐다. 뭉실뭉실 거품이 생겨난다. 그에 따라 아직도 씻어내지 못한 미련이 머리를 뒤덮는다.

 

‘그렇게 가버리다니.’

 

서운하고 화도 났다. 그럼에도 보고 싶었다. 생애 단 하나뿐인 친구였기에 평생 옆에 있을 줄 알았다. 그날 그렇게 나가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떠난 것이다. 유학을 핑계로, 멀리 떠난 것이다. 시원한 물줄기를 따라 거품이 씻겨 내려간다.

 

거품에 미련까지 묻어서 씻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그렇게 훌쩍 떠나버린 친구를 잊을 수 있게 말이다. 연락도 받지 않고, 메일에 답장도 하지 않는 그 녀석을 잊을 수 있게, 야속한 그 우정에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말이다.

 

한숨을 내쉬고 샤워를 끝낸 뒤 욕실을 나왔다. 대충 물기를 닦아낸 몸에 수건을 두르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대체 누가 이런 편지를 보내서 날 심란하게 만드는 건가 싶다. 보라색 봉투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발신인은...? 이상하다. 분명 발신인이 비어있고 수신인에 내 이름이 있었는데 바뀌어 있었다.

 

“수신자가 비어있어?”

 

명하니 봉투를 바라보았다. 마치 수신인을 채워 넣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을 돌려 그 마법의 질문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종이에 적혀 있는 그 질문의 첫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세상 누구와도...’

 

한참동안 첫 구절을 바라보다가 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뭐라고 적을까 망설이고 망설이다 한자 한자, 천천히 적어 넣었다. 질문의 아래 빈 여백에, 봉투의 비어있는 수신인에, 또렷하게 적어 넣었다. 더 이상 누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쩌면?’이라는 희망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커튼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방안을 비추고, 잔잔한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보랏빛 봉투에 달빛이 닿는 순간, 허공으로 떠오른 봉투가 열리고 새하얀 종이에 달빛이 반사되었다. 그녀가 적어 넣은 대답이 달빛에 은은하게 반짝이며 드러났다.

 

- 항상 옆에 있을 거라고, 떠나지 않을 거라고,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된 내 가장 소중한 사람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달빛에 녹아내리듯, 스며들며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에 빗방울 튕기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신발 안은 이미 축축하게 습기가 찬 상태였다. 찝찝하고 피곤했다. 얼른 가서 씻고 싶은 생각뿐이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 길 건너에 있는 한 레스토랑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간판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횡단보호를 건넜다. 함께 끝내지 못했던 저녁식사, 이 세상 누구라도 초대할 수 있는 기회, 뒤늦게야 알게 된 너의 마음, 너에게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 쏟아져 내리는 이 비처럼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길을 건넌 내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강서원?”

 

급히 돌아보는 얼굴이 낯익다. 나처럼 놀란 얼굴로 우산을 든 채 네가 서 있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 빗물 고인 차도로 차가 달리는 소리, 이 공간에, 이 길 위에, 너와 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망설이는 너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저녁 먹었어? 괜찮으면 여기서 먹고 가지 않을래?”

 

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말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의 비 덕분인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젖은 우산은 로비의 우산꽂이 꽂고, 점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 같이 비쳐진다.

 

우연일까? 그날과 똑같은 자리다. 어째서인지 넌 똑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막상 마주앉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너도, 나도, 가끔 시선을 돌려 창밖만 응시할 뿐이다. 그저 끝내지 못한 과제를 끝내기 위한 것처럼, 서로 아무런 말없이 식사만 했다.

 

결국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저녁식사가 끝났다.

 

가게를 나와 우산을 펼치고 조용히 돌아서는 넌 그날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다. 난 우산을 펴는 것도 잊은 채 너를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네 등에 대고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가지마.”

 

네 걸음이 멈췄다.

 

“가지마. 서원아.”

 

차가운 빗줄기가 몸을 적셨다. 멈칫거리던 네가 뒤돌아본다.

 

“가지마. 가지마. 서원아.”

 

커다랗게 떠진 네 눈에 비에 젖어 울고 있는 내가 비친다. 네 손에서 떨어진 우산이 빙그르르 돈다. 우산을 놓은 네 손이 나를 잡고 끌어당긴다. 나를 품에 안은 네가 그제야 겨우 꺼낸 한마디.

 

“사랑해.”

 

그리고 내가 꺼낸 한마디.

 

“사랑해.”

 

너에게 안긴 채 맞은 비는 시원하고 포근했다.

 

* * *

 

창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젖은 옷 대신에 커다란 수건을 둘둘 말고 쭈그려 앉아서 네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머그컵에 따뜻한 물이 쪼르륵- 담기고,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엣취-.”

 

어느새 다가온 넌 따뜻한 컵을 건네며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컵을 받으며 슬쩍 흘겨보았다.

 

“못됐어. 연락도 안 받고, 답장도 안하고.”

 

비죽거리며 나온 불평에 넌 옅은 미소로 빤히 시선을 맞춰온다.

 

“계속 친구로 남을 자신이 없었어.”

 

볼이 화끈했다.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네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중얼거렸다.

 

“바보야. 친구 같은 연인도 있잖아.”

 

“그러게.”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수건에 싸여 안긴 너의 품은 여전히 포근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너의 체취는 달콤하게 퍼지는 코코아 향기만큼이나 행복하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함께 하고 싶다.

 

마법의 질문

이 세상의 누구와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누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