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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奇

비밀 일기장

 

비밀 일기장

 

아직 짐정리가 끝나지 않은 그의 서재로 들어선 그녀는 정리하다만 박스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밝게 웃으며 박스 하나를 밀어 책장 옆으로 옮긴 뒤 책을 꺼내 꽂기 시작했다. 그의 정리방법이야 익히 알고 있으니 대신 정리해주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자기가 와서 마저 하겠다고 했지만, 여기만 정리하면 다 끝나니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 정리를 하다가 문득 서재를 두리번거렸다. 곧 도착할 웨딩사진을 어디에 걸까 찾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비어있는 벽들을 보며 어찌 꾸밀지 고민하던 그녀는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반가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 띵동!

 

“아. 왔나보다.”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가던 그녀는 발에 치이는 박스에 잠시 휘청거렸다. 그에 박스가 쓰러지며 안에 들어있던 책들이 쏟아졌지만, 일단은 반가운 택배가 먼저였다. 책이 가득한 박스에 부딪힌 발을 살살 털며, 현관문으로 다가가 택배를 받았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웨딩사진이었다.

 

앨범은 물론 크기별로 액자에 맞춘 사진도 들어있었다. 그녀는 앨범을 잡고 잠시 고민했다. 먼저 한번 볼까? 아니면 그가 오면 같이 볼까? 행복한 얼굴로 망설이던 그녀는 앨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다시 그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의 정리가 다 끝내 놓고 그가 오면 웨딩사진을 걸 생각이었다.

 

아까 쏟아진 책들을 다시 차곡차곡 쌓던 그녀의 눈에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는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한손에 쏙- 잡히는 아담한 크기였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커버는 짙푸른 색의 두꺼운 양장이었다. 그의 집에 자주 놀러가고 서재 구경도 했었지만 이건 처음 보는 책이었다.

 

“최근에 산건가?”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았다. 책이 아니라 앨범이나 노트인 모양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레 그 파란 책을 펼쳤다. 한 장, 두 장, 천천히 넘겨보았지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손때가 묻고 모서리가 매끈한 걸로 봐서는 새로 산 건 아니었다.

 

“잊고 안 쓴 건가?”

 

그녀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손에 든 빈 노트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불쑥 손이 튀어나와 그 파란 노트를 잡아챘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였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놀랬잖아. 왜 이리 일찍 왔어?”

 

그는 아무런 말없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난히 무심한 그 눈빛에 그녀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머뭇거렸다. 그의 입매가 곱게 말려 올라가고 다정한 미소를 그려냈다.

 

“당신 도와주려고 일찍 왔지. 여긴 내가 정리할게. 나가서 쉬어.”

 

그는 파란 노트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서 일으켰다. 그의 행동에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마지못해 거실로 나갔다. 그녀가 거실에서 쉬며 아까 받은 택배 상자를 정리하는 동안, 그는 서재의 문을 닫고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정리를 끝내버렸다.

 

* * *

 

계절이 바뀌고, 그 파란 노트에 대한 기억이 흐려질 무렵. 그녀는 점심을 먹고 청소를 하려고 서재로 들어섰다. 책상을 닦고 책장의 먼지를 터는데 무언가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파란 노트였다, 표지도 두꺼워 쉽게 떨어질 책도 아니고, 허술하게 꽂혀있지도 않았다.

 

“흐음-.”

 

그녀는 묘한 기분에 물끄러미 짙푸른 책을 내려다보았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책을 낚아채던 그의 손과, 낯설 만큼 무심했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책을 집어든 그녀는 의심이 더욱 깊어지는 걸 느꼈다. 책의 표지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이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노트에 왜 자물쇠까지 채워둔 걸까? 새파란 표지를 빤히 노려보던 그녀는 곧 책상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분명 어딘가에 열쇠가 있을 테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있을 테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물쇠까지 채울 이유가 없지 않는가?

 

‘이제 남도 아닌데.’

 

보지 못하게 자물쇠까지 걸어두니 더 수상했다. 왠지 꼭 봐야할 것 같은 의지까지 생겼다. 서재 안의 모든 서랍을 뒤지고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 중 하나만 남았다. 열쇠구멍이 있는 서랍에 바로 옆 칸에서 찾아낸 열쇠를 꽂으려는 찰나 현관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몇 시지?’

 

열쇠를 원래의 위치에 넣고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6시 30분. 걸레를 손에 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재를 나왔다.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퇴근한 그를 반겨주었다.

 

* * *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리고, 곤하게 잠든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천천히 이불을 걷고 방을 나와 서재로 향했다. 까치발로 서재에 들어선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먼저 찾은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열었다.

 

- 찰칵.

 

서랍 안을 더듬는 그녀의 손끝에 작은 금속의 물체가 닿았다. 직감적으로 열쇠라는 걸 느낀 그녀는 곧장 잡아서 꺼냈다. 시리도록 반짝이는 은빛의 작은 열쇠였다. 녹슬고 오래되어 보이는 자물쇠의 짝이 맞을까 싶었다. 그녀는 그 열쇠를 쥐고 그 파란 노트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여기 있다.’

 

작고 오래된 자물쇠에 작고 반짝이는 열쇠를 끼워 살짝 돌렸다.

 

- 달칵.

 

자물쇠가 열렸다. 그녀는 자물쇠와 열쇠를 책장(冊欌) 한쪽에 내려놓고 책을 펼쳤다. 역시 아무것도 없는 백지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그녀는 눈썹을 찌푸렸다. 짜증스레 종이를 넘기던 그녀의 손끝에서 일순 따끔한 통증이 전달되었다.

 

“아야!”

 

종이에 베여 피가 망울지고 있었다. 손끝을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작을 멈추었다. 베이면서 스며든 그녀의 피가 비어있는 백지에 퍼져나갔다. 그녀의 손끝에 망울져있던 피가 종이 위로 한방울 떨어지며 점점 더 붉게 물들였다.

 

“어?”

 

- 살려줘. 살려줘. 여보. 내가 잘못했어. 이젠 안 그럴게. 제발. -

 

- 아냐.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진짜야. 아무것도 못 봤다고. -

 

- 안 돼. 이러지마. 응?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그러니까...아악! -

 

계속해서 이어지는 절규와 비명과 애절한 외침. 노랗게 바래어 얼룩덜룩한 종이 위에 붉은 피는 한없이 퍼져나가며 처참한 광경을 그려냈다.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주체할 수 없는 공포감이 피어올랐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그녀를 붙잡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억울하다고, 위험하다고, 살려달라고, 머릿속에, 귓가에, 눈앞에,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맴돌았다. 겁에 질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등에 누군가가 닿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 안자고 여기서 뭐해?”

 

그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익숙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번쩍 드는 생각에 손에 들린 노트를 바라보았다. 백지였다. 아까의 그 핏자국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 피식.

 

멍한 얼굴로 굳어버린 그녀를 보며 그는 실없는 미소로 파란 노트를 낚아챘다.

 

“하여간, 궁금한 걸 그리 못 참아서, 이거 그냥 빈 노트야.”

 

그는 보란 듯이 노트를 들어 펼치며 파라락- 종이를 넘겼다. 그의 말대로 깨끗하게 비어 있는 백지뿐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모습에 그는 한숨을 쉬며 노트를 그대로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잡으며 달랬다.

 

“우리 자기, 몽유병은 아닐 테고,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악몽? 꿈이라고? 그러기에는 그녀의 손끝에 아리한 통증이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그만 나갑시다. 자야지 내일 또 눈을 뜰 거 아닙니까? 부인.”

 

“으, 응.”

 

그녀는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머뭇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조용히 서재를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기척에, 책상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펼쳐져 있는 그 파란 노트에 붉은 핏자국이 떠올랐다.

 

- 어서와. 기다리고 있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