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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2월 14일

2월 14일

 

인터넷에서는 초콜릿 만드는 법, 초콜릿 파는 장소, 초콜릿 예쁘게 포장하는 법, 연인에게 인기 있는 선물 리스트 또는 받고 싶은 선물 리스트가 물결치며 떠다니고, 지하철 편의점 가판대는 물론 걸에서 꽃다발을 들고 오가는 이들이 종종 눈에 보이기도 한다.

 

2월 14일, 대체 누가 만든 걸까? 아니. 그 유래에 대한 속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굳이 고백의 날이 되어버린 이유가 무얼까? 누가 2월 14일을 연인의 날, 고백의 날, 초콜릿의 대환장 파티로 만들어버린 걸까? 괜스레 심통이 난다.

 

세상에 나만 빼고 전부 커플인 것 같은 이 기분을 어찌할까 싶은 생각으로 속으로 투덜거렸다. 나도 초콜릿 좋아하는데, 나도 고백 받는 거 좋아하는데, 나도 사랑받고 싶은데, 결국 마지막에 달아서 나오는 건 한숨이다. 하하호호 웃으며 지나가는 이들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집에나 가야지.’

 

그런 생각에 저만치 보이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사람하고 부딪쳤다.

 

- 퍽. 와르르르...

 

바구니에 담겨있던 초콜릿이 그대로 쏟아지는 광경에 난 눈을 크게 뜨고 놀라서 굳어버렸다. 금박지에 싸인 작고 동그란 초콜릿이 데굴데굴 구르며 길바닥을 굴렀고,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은 무심결에 밟았다가 깜짝 놀라더니 황급히 도망간다. 상대방은 허탈한 얼굴로 멍하니 초콜릿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하아...”

 

힘없이 한숨을 내쉬는 그 모습에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땅에 떨어진 초콜릿으로 손을 뻗었다.

 

“죄송합니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내 잘못이려니 하는 맘에 짧게 사과하고 초콜릿을 줍기 시작했다. 나와 부딪친 그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허리를 숙이고 초콜릿을 주워 바구니에 담았다.

 

“아닙니다. 제가 급하게 나오느라 부딪친 거니까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하는 모습과 달리 목소리는 맥이 빠져서 기운이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에 선물할 초콜릿이었던 모양이다. 괜히 더 불편해진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사람들 발에 밟힌 몇개를 빼고 거의 대부분의 초콜릿이 바구니에 담겼다. 간혹 지나가다가 주워주시는 분도 계셨다.

 

‘생각보다 많이 안 상했네.’

 

“그럼 전 이만.”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어색하게 인사하고 재빨리 버스정류장으로 뛰었다. 그런 내 등 뒤로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며 빈자리를 찾아 앉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괜히 나 때문에 차이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급하게 나오다가 부딪친 만큼, 약속시간에 늦어서 차인다거나, 운 나쁘게도 성하지 못한 초콜릿이 눈에 띠어 차인다거나, 설마 그런 일이야 있을까? 라며 머리를 흔들어 털어내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눈을 감았다. 내릴 곳이 종점이기에 맘 편히 눈을 붙였다.

 

* * *

 

그녀는 아주 곤란하다는 눈으로 바구니와 나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떼었다.

 

“혁아, 나...”

 

“알아. 나도 아는데, 그냥 말이라도 하고 싶었어. 이기적이라고 나쁜 놈이라고 해도 돼. 그냥, 그냥. 말도 못하고 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서 그런 거니까. 그대로 잊어버려도 돼. 단지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아주 잠깐만이라도 내가 누나를 사랑했다는 것만, 그것만이라도 말하고 싶었어.”

 

착잡하게 가라앉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면서 힘겹게 웃으며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나 누나를 사랑해. 그래서 행복하기를 바랄 거야. 그러니까 행복하게 살아줘.”

 

팔짱을 낀 채 시선을 내리는 그녀의 발 앞에 달콤한 초콜릿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입술을 꾹 깨물고 현관을 나와 대문을 지나 길을 걸었다. 몇 년을 앓아온 짝사랑을 고백도 하지 못하고 끝낼 수 없어서였다. 가로등이 켜진 길을 걸으며 후련한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눈물을 참으며 내리막길을 내려와 편의점 앞을 지날 때였다. 터덜터덜 걷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습...어? 아까...”

 

편한 츄리닝 차림에 패딩 점퍼를 입은 그녀는 초콜릿을 사서 나오다가 부딪친 그 사람이었다. 나만큼이나 놀란 얼굴로 뻘쭘하게 굳어버린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그러다 그녀의 손에 들린 비닐봉투에 비친 맥주 캔에 시선이 닿았다. 살금살금 다가오듯 그녀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저, 혹시...차였어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서 시선을 올려 눈치를 살피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맥주 혼자 마실 거예요?”

 

“네?”

 

“같이 마실 사람 없으면 나하고 같이 마셔줄래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그녀를 마주보며 씩- 웃고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맥주 2캔을 사서 나왔다. 그리고는 멀뚱멀뚱 서있는 그녀에게 눈짓하며 익숙하게 앞장섰다.

 

“저쪽 놀이터에서 마시면 되겠네요.”

 

“네, 뭐...”

 

텅 비어있는 놀이터에는 가로등만 환하게 빛나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덩그러니 매달려있는 그네를 한자리씩 차지하고서 나란히 앉아 각자 맥주 캔을 땄다.

 

- 딱! 치익.

 

맥주를 한모금 쭉- 들이키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둥그런 보름달이 떠있다.

 

“잊어버려요.”

 

불시에 툭- 튀어나온 그녀의 말에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서는 멋쩍은 투로 말을 이었다.

 

“아니, 뭐. 초콜릿이 조금 엉망일 수도 있는 거고, 어쩌다보면 조금 늦을 수도 있는 거고...그...”

 

말을 끊고서 슬며시 내 눈치를 살핀다.

 

“별거 아닌 걸로 차인 거면 그냥 잊어버리라고요. 더 좋은 사람 만날 수도 있잖아요?”

 

멍하니 듣다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설마, 그쪽하고 부딪친 것 때문일까 봐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 뭐.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맘에 걸려서...”

 

눈을 돌려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면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런 내 반응에 그녀의 볼이 발갛게 변하더니 연거푸 맥주를 들이마신다.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투덜거림에도 한참을 웃고 나서야 맥주로 목을 축였다. 착잡한 심정도 물러갈 만큼 말끔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네. 맞아요. 늦어도 한참 늦어서, 더 늦기 전에 청산했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지나고 맥주가 줄어드는 만큼 대화는 늘어갔다. 달이 중천에 다다르고 4개의 캔이 깔끔하게 비워졌을 때, 그녀의 집 앞에서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14일, 내 손에는 또 다시 초콜릿이 가득한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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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애증남녀

 

 

 

    앞자리 남녀가 싸우고 있다.
 
  거리나 카페, 도서관, 서점, 건물 로비에서 싸우는 커플을 발견하는 일이란 매우 쉽다. 대부분 비슷한 표정과 포즈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곧바로 알아챌 수 있다. 여자는 굳은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남자를 노려보고, 남자는 시선을 딴 데로 돌린 채 애꿎은 땅을 발로 찬다.
 
  대개 공격의 시작은 여자친구 쪽인데, 남자는 한참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 할 말이 없는 건지, 이 싸움이 싫은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자 쪽의 훈계가 10분 가량 계속되면, 남자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지 입술을 움찔거린다. 딴 곳을 쳐다보던 남자친구가 한 번 입을 열면 여자는 벙찐 표정이 된다.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여자가 이 싸움을 통해 표현하거나 이해받고 싶은 논지를 벗어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싸움 중에 있을 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극대화된다.
 
  내 앞에서 싸우고 있는 커플 역시 비슷한 양상이다. 지금은 남자의 목소리가 더 자주 들린다. 여자친구는 처음과는 목소리 톤 자체가 달라져 있다. 남자의 말에 쉼표가 붙는 틈새마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지금 잘잘못을 따지자고 하는 게 아니야. 싸우고 싶다는 것도 아니야. 서운하다는 걸 알아달라는 말이야." 여자는 대부분 자신이 서운했던 세부적인 상황들을 기억하고 있고,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그걸 기억해내곤 지금의 다툼이 발생된 또 다른 이유와 그 예전의 기억을 연결짓는다. "너 그 때도 그랬잖아. 근데 또 그러잖아. 내가 그 날 얼마나 다리가 아팠는데, 그런데도 그 날 나는 아무 잔소리 안하고 집에 갔단 말이야. 근데 어떻게 또 그래?"

  꼭 옛날에 연애하며 내가 했던 말들이 다른 사람 입에서 재생되고 있는 것 같아 웃음이 새어나온다.
 
  싸움을 자주 하다 보면 지금 당장은 화가 나고 서운해 한껏 감정적인 사람이 되다가도, 몇 초 뒤에는 '아, 내가 또 그러고 있네' 라는 생각이 들어 불안감도 함께 따른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곧바로 밝히지 못하고 대화는 자꾸 엇나간다. 그래서 싸움이 점점 이상한 쪽으로 치닫나보다.
 
  그러다 꼭 이상한 타이밍에 진심을 고백하게 되고, 울고, 한숨쉬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럼 그도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사실 화가 나서 맘에 없는 말 한 거였다고, 니 마음 이해한다고, 하지만 너도 내 마음 이해해 달라고 토로한다. 30분간 지속되었던 불편하고 불쾌한 다툼은 1분만에 정리된다. 그래서인지 싸우고 나면 늘 머쓱하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느낌. 1분만에 정리되고, 울고 나면 곧바로 웃게 되어서 그런가보다.
 
  엇,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내 앞의 커플도 지금 함께 웃으며 휴대폰으로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있다. 이럴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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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연작

 

 

 

 

    아버지는 본인이 보내지 못한 편지가 있는데, 그것은 연작聯作이라 말했다. 그러니 그걸 받게 되면 정성을 다해 간직해줘야 한다고도 덧붙였는데, 어머니는 그가 말하는 연작이 하나의 편지를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맡아 쓴 것인지, 아니면 혼자서 매일 밤 종이를 펼쳐 문장 하나씩을 적어 백 개의 속삭임을 만들어낸 것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댔다.

 

  편지는 어디에 있냐고 스물아홉의 그녀가 물었을 때, 글쎄 품 어딘가에 넣어두었는데 그 품이 어느 품인지를 모르겠다고 서른하나의 그는 말했다. 술에 취해 돌아온 날이면 베갯속을 뒤적거리며 “편지가 있지 편지가…” 웅얼거리던 아버지 때문에 계절마다 옷장을 뒤집고 엎어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는 쓰지도 않은 걸 썼다고 한 게 아니냐며, 종종 그가 잠든 틈을 타 정수리를 톡 손으로 때렸다고 했다.

 

  결국 편지는 어느 블랙홀 같은 품에 빨려 들어가 일흔 여덟의 그녀가 숨을 거둘 때까지 손바닥 위로 전달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마지막 날까지 나보다 먼저 간 그 사람이 쥐고 간 편지를 참 읽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희미한 목소리가 어디까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마음에서 다 빠져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 그 편지 앞까지 갈 수 있다면 꼭 그리 되길 바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저히 편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는, 어쩌면 아버지가 편지지 위에 투박한 글씨로 어머니의 이름을 따 연작涓作이라 적어놓았던 건 아닐까, 그에게 연이라는 글자가 너무 벅차서 차마 그 다음 글자를 적지 못하고 마음에 줄줄 매달아놓고 살았던 게 아닐까, 이따금 상상하며 그들을 추억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친구가 두 분을 추억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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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안녕 서재

 

 

 

    그에게선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내 이름은 서재, 하고 웃으며 말했을 때 나는 지독한 하품이 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날의 실례는 결코 네가 지겨워서가 아니었다는 건 사흘 뒤에 고백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페이지마다 끼어든 먼지가 시간을 알알이 싣고 콧 속으로 날아들기 때문에 난 졸음이 오는 오래된 책이 좋고, 그런 책들이 쌓인 서재를 좋아한다고도 말했다. 서재의 뺨이 찬찬히 물드는 것이 보였다.

 

어떤 책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낯선 동네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시모키타자와, 받침이 하나도 없는 이름을 외우지 못해 한참을 갸웃하는 나를 보며 서재는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폭신한 계란말이를 만드는 할아버지의 분홍 간판 가게가 있다고 했고, 털실로 훌훌 마음을 엮는 이츠키의 핸드메이드 스웨터를 사주겠다고도 했다. 궁둥이에 큰 점이 박힌 고양이가 담벼락을 넘는 광경도, 양말을 농부처럼 올려 신고 돌아다니는 괴짜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모두 네가 좋아할 거라고. 서재의 모든 유혹은 어설펐지만 아름다워서, 나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여행을 가자는 건지, 같이 살자는 건지도 알지도 못한 채.

 

 

 

 

   ※ <안녕 시모키타자와>라는 책 한 권으로 프로포즈를 주고받은 연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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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06. The Lovers

 

06. The Lovers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

 

지금 내 앞에서 생글거리는 얼굴로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하는 여자는 이 타로 카페 의 점원이다. 가끔 재미 삼아 여자친구와 몇 번 들린 적이 있는 카페인데. 최근 연애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 나에게 점괘는 알려주지 않고 갑자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구속’ 또는 ‘속박’ 이라고 하죠. 붙잡고 싶고 붙잡히고 싶은 그런 인간의 마음이 표현된 단어죠.”

 

“그야 사랑하면 함께 있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예. 맞아요.”

 

내 대답에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여자를 향해 난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사랑이 무엇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지금 내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심정이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사랑하기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 그럼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그야...”

 

당연한 게 아니냐는 말을 하려던 난 말을 흐리며 새삼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여자는 조금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을 자연스레 풀어놓았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다툴 이유도 헤어질 이유도 없겠죠.”

 

“예. 그렇죠.”

 

여자의 말에 난 마지못해 조금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말 그대로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다툴 일도, 질투할 일도, 불안해할 일도 없으니 헤어질 이유도 없을 거라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사랑하기에 함께 하고 싶고 같이 하고 싶고 나만 봐주었으면 싶은. 그런 마음이 상대를 구속하게 되고 속박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그건 당연한 거잖습니까.”

 

“예. 당연한 거예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여자의 태도에 난 대체 내가 왜 이런 말장난을 하고 있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점괘가 어찌 나왔든 그냥 나갈까 싶은 생각으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여자는 마치 아직 다 끝난 게 아니라는 듯이 가늘게 뜬 눈으로 웃으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당연하기에 당연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죠.”

 

“그건 또 무슨 궤변입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변화하게 되죠. 어느 한쪽만의 변화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상당히 역동적인 변화죠. 흔히 ‘서로 닮아간다.’라고 하지만. 글쎄요. 정말 닮아가는 걸까요?”

 

‘구속’과 ‘속박’을 말하더니 이제는 ‘변화’라고 하는 여자의 말에 난 도대체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내 시선에 여자는 크고 동그란 눈이 반달이 될 정도로 생긋- 웃더니 말했다.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속박’을 하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거죠.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 나만을 사랑해주는 사람으로 만드는 거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변화된 모습’ 속에 나에게 익숙한 모습을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서로 닮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넘기며 여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게 뭐가 잘못된 거냐는 듯이 맞받아쳤다.

 

“그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 그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심지어 짝사랑도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게 짝사랑입니다. 설마 그저 바라만 보는 그런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겠죠?”

 

내 말에 여자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는 이내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 중 ‘06. The Lovers - 연인’ 카드를 검지로 짚으며 말했다.

 

“사랑과 연인의 뜻하는 이 카드는 그저 단순한 사랑이 아닌 ‘조화’와 ‘화합’을 나타내기도 해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서로 조화를 이루고 화합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하죠.”

 

여자의 손끝에 놓인 ‘06. The Lovers - 연인’ 카드를 바라보며 나는 그 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기다리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연인들은 크고 작은 다툼으로 서로의 다른 점을 파악하고 그걸 고쳐나가는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게 되죠. 마지 두 개의 서로 다른 돌멩이가 서로 부딪히며 둥글게 깎여 나가듯이 말이에요.”

 

“하지만 서로 다투지 않는 연인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런 경우는 대화를 나누고 서로 고칠 점을 찾는 상당히 평화적인 방법으로 조화를 만들어가는 경우죠. 하지만 그 결과는 다르지 않죠.”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결과 말입니까?”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내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난 다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변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까? 변하지 않으면 조화를 이룰 수가 없잖습니까.”

 

“서로가 변하지 않은 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 그건 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천생연분이겠죠. 마치 처음부터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톱니바퀴 같은 그런 인연이니까요.”

 

“그런 천생연분은 평생 못 찾을 가능성이 더 높죠.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은근히 불평 섞인 내말에 여자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런 여자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난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때로는 변화하지 않는 경우도 있죠. 변하지도 않고 변화를 요구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하려던 나는 이내 말문이 막혔다. 바로 그런 사람이 지금의 내 연인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무언가 변화할 것을 요구한 적이 없으며 나로 인해 변화하지도 않은 그런 사람이었다. 결국 난 테이블 위에 펼쳐진 내 점괘를 외면하며 불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서 헤어지라는 겁니까? 변화하지 않으니 조화를 이룰 수 없고 인연이 아니라는 말이군요.”

 

“사랑하지 않으세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는 여자의 말에 난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 이러고 앉아서 지금 설교 아닌 설교를 듣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냔 말이다.

 

“사랑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만 봐주었으면 좋겠고,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날 사랑해주었으면 싶고, 분명 옆에 있는데도 언제든지 떠나버릴 것 같은 모습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날 사랑하는지 궁금합니다.”

 

내 옆에서 날 보며 웃다가도 가끔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런 내 귓가에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구속’이라고 했죠. ‘연인’ 카드의 역방향의 의미는 잘못된 관계, 지나친 애정, 혹은 뒤틀린 애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 말에 난 눈을 떠 테이블 위에 놓인 ‘연인’카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정방향’이었다. 안도하는 심정이 담긴 내 시선에 여자는 살풋- 웃었고 그 기척에 난 조금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간절하게 원하기에 변질되기도 쉬운 마음이 바로 ‘사랑’인거죠. 사랑하기에 ‘구속’하고 ‘집착’하고 ‘변화’를 바라게 되는 거죠.”

 

“그 말은 다른 것들보다 사랑이 먼저라는 말입니까?”

 

내 말에 여자는 그렇다는 듯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난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내 반응에도 여자는 전혀 지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기분 나쁘지도 않은 듯이 상냥한 미소로 말했다.

 

“맞아요. ‘구속’하고 싶은 마음도 ‘변화’를 요구하게 되는 마음도 ‘사랑’이라는 마음에 뒤따라오죠. 사랑하지 않는다면 ‘구속’하지도 않을 테고 ‘변화’를 요구하지도 않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이죠.”

 

“대부분의?”

 

무언가 조금 묘한 어감에 난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여자의 말을 되뇌듯이 중얼거렸고 여자는 이제 거의 끝나간다는 듯이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아주 당당히 ‘구속’과 ‘변화’를 요구하죠. 나를 사랑한다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듯이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그저 ‘사랑’만을 하는 사람이라는 겁니까? 바로 ‘그녀’처럼?”

 

뭔가 알 것 같다는 듯이 되묻는 내 모습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구속’도 ‘변화’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싫었다면 진즉에 날 떠났을 것이다. 싫어하는 것을 감추지 못할 만큼 솔직한 성격이라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그녀는 적어도 날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여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두 번째로 내게 묻는 여자의 질문에 난 그제야 속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날 사랑한다면 말이죠.”

 

내 대답에 여자도 나와 똑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내 곁에 있어준 그녀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면 나 또한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 마음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그런 확신에 상쾌한 기분으로 카페를 나온 나는 전화를 걸었다. 어쩐지 그녀가 가끔씩 그런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뚜~~~ 달칵.

 

> 응.

 

“우리 여행갈까? 재작년 휴가 때 다녀오고 못 간 거 같은데.”

 

“정말? 그래도 돼?”

 

내 말에 그녀는 정말 반가운 기색으로 되물었다. 전화기 너머의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이 갈 정도로 좋아하는 목소리에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내내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한 건 생각도 못하고 엉뚱한 생각만 했으니 말이다. 덕분에 새삼 그녀가 나에게 어떤 사랑을 주었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응. 아직 일주일 정도 남았으니까.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있어?”

 

내 말에 전화기 너머에서 들뜬 목소리로 고민하듯이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그 소녀 같은 목소리에 난 마냥 웃으며 사무실까지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카페에서 사무실까지 걷는 내내 마치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통화를 하며 올려다본 하늘은 내 마음 마냥 눈부시도록 새파란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