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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개와 늑대의 시간...해커

<필자의 보안단상(斷想)은 말 그대로 보안에 관한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입니다. 보안에 관해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작업입니다> 

 

'해질 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이때는 선도 악도 모두 붉을 뿐이다.’

 

2007년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개와 늑대의 시간」 마지막회에서 주인공 이수현(이준기 분)의 마지막 나래이션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낮도 밤도 아닌, 경계가 모호한 시간을 뜻한다. 해질 녘과 해뜰 녘 빛이 사라지는 황혼의 시간과 다시 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박명(薄明)의 시간대를 말한다. 프랑스 남부 지역 양치기들이 해질 녘, 멀리 보이는 것이 기르는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하기 힘든 어둑어둑한 시간을 이르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친구인지 ,적인지, 진실인지, 위선인지 구별하기 힘든, 모호한 순간이라는 의미로 표현되기도 한다.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려 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어려운 모호함은 우리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선거철이면 정치인들이 남발하는 표심잡기용 공약에서 지역발전, 국가발전이라는 의미심장한 비전의 선포, 그 이면엔 오로지 당선만을 기대하는, 자기자신의 영달을 위한 욕망이 더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그들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경계가 모호한 개와 늑대의 시간과 닮았다. 공감은 사람과 사람 사이, 행복을 잇는 디딤돌 같은 말이지만, 거짓 공감으로 사람을 유인해 속이고 갈취하는 사기꾼들의 접근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어스름이 완전히 걷혀야 기르던 개인지 늑대인지 드러나듯, 사기꾼들도 그 실체가 드러나야 모호함이 비로소 걷힌다. 걷힌 모호함 뒤엔 기르던 개는 처참히 죽어 있고, 늑대가 있을 뿐이겠지만

 

이론과 분석은 사후적 판단이고 두려움 속에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아닌 하나의 지점에 정지된 영역이다. 살아 숨쉬는 긴장감 넘치는 현실에선 매 순간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모호함의 연속이다. 특히, 수많은 거래와 투자결정을 해야 하는 사업가는 한 순간의 결정으로 회사와 개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 사업가들은 수없이 맞닥뜨리는 ‘모호함들’을 극복하며 나아간다.

 

해커…일반인들에겐 아직도 그리 밝게 다가오는 단어는 아니다. IT의 어두운 이면에서 개인이나 기업, 더 나아가 국가기관을 침투, 비밀을 유출하고 악의적으로 이익을 좇는 이미지로 일반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배경엔 사이버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해커라는 이름이 언론에 많이 노출된 탓도 있을 것이다.

 

사실 해커는 정보보호 분야의 전방위에 필요한 핵심 자원이다.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은 사이버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해커를 양성하고 고도의 해킹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해커는 범죄의 유혹을 따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사회안전을 보호하는 수호자의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렇게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진 해커가 세상을 안전하게 지키는 빛을 선택하게 하는 제도도 있다. 바로 ‘버그바운티(Bug bounty)’같은.

 

버그바운티는 내부 보안 전문가가 아닌 외부에서 소프트웨어나 서비스에 대한 취약점을 찾아낸 사람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기업들은 버그바운티를 통해 자사 제품과 서비스의 취약성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보안위협에 대응한 능력 향상을 꾀하고, 보안 취약점을 개선하여 더 안전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아 이익창출의 기회로 삼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버그바운티가 아직 사회 전반으로 확산돼 있지 않다. 공기관과 일부 보안기업 그리고 대기업에서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대다수 기업은 버그바운티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소프트웨어의 역설계 문제, 약관위반 문제 그리고 지나친 경쟁으로 불법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걱정으로 기업들이 내는 반대 목소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버그바운티를 통해 보안취약점 개선과 품질향상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순기능도 고려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누구나 자신의 재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해커들이 자유롭게 능력을 펼치고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지 못한다면, 자기가 설 무대를 잃은 그들은 방패가 아닌 창을 선택할 지도 모른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새벽녘과 해질녘의 시간이다. 태양을 기꺼이 맞이하는 새벽녘을 택할 것인지 어둠을 기다리는 황혼을 선택할 것인지는 기업과 정부의 몫이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시간, 나에게 다가오는 저 그림자가 나의 행복과 우리사회의 안전을 지켜 줄 충직한 파수견으로 다가올 것인지, 안녕과 질서를 해할 늑대로 다가올 것인지는 그 시간을 맞이 할 우리의 준비가 얼마나 성숙되어 있는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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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직감(直感)과 보안경영

<필자의 보안단상(斷想)은 말 그대로 보안에 관한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입니다. 보안에 관해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 보려는 작업입니다.

 

경영의 세계는 엄혹하다. 합리와 비합리의 경계가 모호하다. 잔잔한 바다를 가르는 배는 '순항'을 희망하지만, 바다는 언제나 거친 비바람을 품고 있다. 경영의 바다도 그렇다. 경영은 혼자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예상치 못한 바깥 사정으로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교통사고로 죽는 것이 가장 ‘부조리’한 것이라고 했던 카뮈의 말처럼 이유도 모른 채 어느 순간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위험에 빠진 경영은 판단의 시간이 부족하다. 막막하고 아연한 감정이 일렁인다. 경영자에겐 혼돈 속에 명운을 건 결단이 필요할 뿐이다.
 
실패한 경영의 배후에 관해 지식인들은, 폭풍에 맞선 어부들의 사투와 같았을, 위기에 빠진 경영자의 목숨을 건 숨가빴을 시간을 두고 철 지난 조언을 하기도 한다. 경영전문가들의 현명한 조언이 담긴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그러나 때때로 현실에 반영되지 못한 경영서적은 서점과 도서관의 가득 찬 책장 한 켠에서 언제 신간에 밀려 창고로 혹은 폐지로 나갈지 모르는 처지에 놓이곤 한다. 인간은 우매하다. 경영학을 십수 년을 공부하고도 자신이 실제 경영의 세계에 발딛여 놓으면 대부분 물속에 처음 들어간 것처럼 허우적거린다. 실제 경영의 세계는 위험투성이다.
 
경영의 현장에서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생존의 갈림길에서 경영자의 직감은 성패를 좌우한다.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라. 쉴 새 없이 회의를 하고 차가운 이성을 가진 머리로 정확한 판단을 한다고 자부하지만, 의식의 배후엔 직감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눈치 채지 못한다.
 
경영은 분석과 같은 차가운 이성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가슴이 이끄는 감정의 세계이기도 하다. 과반수가 지배하는 국회가 아닌 이상, 치열한 경영현장에선 경영자의 직감과 통찰이 지배한다. 그 직감의 정확도가 경영의 백미(白眉)다. 경영을 잘하려면 결국 오답을 피해나갈 수 있는 본능적인 직감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의 배양이 필수다. 그러므로 어쨌거나 직감의 정확도를 올려야 한다.

 직관은 '사물이나 현상을 접하였을 때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아니하고 진상을 곧바로 느껴 앎. 또는 그런 감각' 이다. '내 느낌은 이렇다', '내가 보기엔 그 사람의 의도는 이런 것 같아'  또 해야 할 일을 앞두고, 할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우리들은 ‘감’에 의존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조언한대로 판단을 해 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직감이란  곧 '감각'이다. 좋은 감각은 타고 난다. 결정의 망설임 앞에 성공의 가능성이 높은 직감적인 결정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에서 '직감적인 슛'을 성공시켜 승패를 가른 박지성 선수에게 물어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타고난 직감능력이 없다면 훈련하는 수밖에 없다. 훈련도 하나의 경험이고  오랜 경험은 습관이 된다. 그럼 어떤 훈련으로 좋은 직감을 가질 수 있을까. 탁월한 직감은 선입견이나 섣부른 예단이 아니다.좋은 직감을 가지려면 지금하는 자기 직감이 선입견이 아닌지 의심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같은 강이라도, 언제나 똑같은 물살을 가진 강물이 없듯이, 언제 어디서나 같은 결과를 내는 동일한 경험은 거의 없다. 사람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다. 지역이라면 기온도 다르고 풍습도 다르다.  사람이 가진 인식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특정 상황의 조건에 자기가 가진 경험과 지식을 갖다 붙인다. 이런 마음이 일어난다면, 지금 일어난 '직감'을 잠시 멈추고 자기 경험이 상황에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확보돼 있는지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생각과 반대인 의견을 배척하기 보다 수용하고 공부해야 한다. 자기 생각이 선입견이 아닌지 또는 경험을 과신하는 건 아닌지 살피고 다른 이가 가진 이견을 되짚어 보는 노력이 정확도 높은 탁월한 직감으로 이끄는 방편이다. '바다는 언제나 거친 비바람을 품고 있다.'  지금은 순항이지만, 언제 올 지 모를는 거친 비바람을 예비하며 엄혹한 경영 현장의 한 가운데 있어야 하는 보안전문가들에게 순도 높은 '직감'은 필수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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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자기과신은 독(毒)이다

          IMF구제금융 시절, 굴지의 대기업에서  구조조정 업무를 담당하던 선배가 있었다. 조직에서 중요한 업무인 자금 · 회계업무를 오랬동안 다룬 분이다.  선배는 사업을 하던 친구와 선 · 후배들에게 유용한 정보와 노하우를  곧 잘 알려주곤 했고 자신의 지식과 경력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퇴직 후 중견기업의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새로운 회사에 잘 융화되지 못해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사했고, 얼마 후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큰 성공을 기대했던 사업은 오래 지나지 않아 큰 손실을 입고 무너졌다. 선배는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기업 구조조정 전문가라고 하던 그는 자신의 '인생의 구조조정'에는 실패한 것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 동료 중에 수사기관에서 오랜 기간 실무 경험으로, 사기꾼은 '한 눈에 딱 알아본다'는 분이 계셨다. 퇴직 후 그는 지인과 창업을 했다. 일년 후 그는 ‘사기’를 당했다고 하소연했다.  그 이후로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사기성 짙은 사업에 순진하게 참여하셨고, 지금도 복잡한 소송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고 계신다.

 

     군에서 고급장교로 전역하셔서 리더십 분야로는 책 열 권도 쓰신다는 분이 계셨다. 좋은 군 경력에 믿음직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별다른 심사도 없이 큰 규모의 보안 현장에 책임자로 파견됐다.  그러나 현장근무자들의 책임자에 대한 불만으로 잦은 인원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업무의 안정성도 떨어지고, 사용자 측의 불만이 커져 급기야 재계약까지 위태로워졌다. 그 분은 보안근무자와 사용자의 수준 탓으로만 책임을 돌렸다. 직원관리능력 부족과 거래처와 잦은 불화로 결국 그는 얼마 가지 못하고 해고됐다.

   

     친구이야기다. 기계공학 박사에 교수다. 아파트관리사무소와 분쟁이 생겼다고 한다. 명색이 해당분야 박사로서 관리사무소를 찾은 친구는 의기양양하게 강의하듯,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관리사무소 직원들에게 문제점에 관해 설명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는 고백했다.  자신이 틀렸다고.  자신의 설명도 잘 이해하지 못하던 관리사무소 직원이 어떻게 한 눈에 문제를 정확히 짚어냈는가. 하며 놀라워했다.

 

     위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경력과 배움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이다. 아니 정확히 자기 지식의 과신이다. 과신의 결과는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능력의 결여를 초래한다.

 

    수영선수 출신에게 물어보면 같은 물인 것 같아도 수영장마다 같은 물이 없다고 한다. 같은 강에서 똑 같은 지점을 수십 번 건너가도 한번도 같은 물살이 없다고도 한다. 그런데  하물며 수영장에서 바다로 나간다면 어떠하겠는가.

 

    보안현장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경력이 자랑할 만하다 하더라도 그건 몸 담았던 조직환경에서의 경험인 것이다. 보안업무의 패턴은 비슷할 수 있으나 해당 조직의 비즈니스, 조직의 구성, 보호대상의 상이함, 경영자의 철학 등등의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다. 같은 방법을 적용해선 안 된다.

 

    더구나 지나친 우월감으로 자신의 지식 경험을 과신할 때 오히려 그것이 치명적인 취약점이 되어 보안실패를 불러올 수도 있다. 보안전문가는 같은 것도 새로운 시각으로 다르게 보고 다양한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보안전문가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자기과신은 자신을 해치는 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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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

그저 그런 남자

 그는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남자이다. 그저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게 그 흔한 여자 친구도 없고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집에 계신 그의 어머니와 몇 안 되는 친구들뿐이다. 다니는 곳도 그저 그런 직장과 집, 기껏해야 단골 호프집. 난 언제나 그와 함께해야 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는 나를 통해 세상을 본다. 고로 나도 그가 보는 세상을 본다. 아무것도 왜곡시키지 않고 그저 그가 좀 더 편하게, 세세하게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사실 이런 그의 안경인 나도 그저 그런 안경이다. 굳이 특이점을 꼽자면 그의 코는 낮은 편이어서 내가 콧등을 타고 흐를 때마다 왼손잡이인 그가 왼손으로 나를 고쳐 매 왼쪽 다리의 칠이 좀 벗겨졌다. 이런 모습으로 그와 같이 그저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나는 항상 불만이었다. 


 오늘도 야근에 피곤한 눈을 꿈뻑이며 그는 버스를 탔다. 그가 꾸벅대며 조는 탓에 난 그의 무릎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그것밖에 볼 수 없었다. 역시나 무료한 날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일어섰다. 창밖을 보진 못했지만 안내방송을 들었지 싶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뻗은 손을 걷으려는 찰나. 


 아. 그가 고꾸라졌다. 


 졸다 일어나 몽롱한 정신에 그만 발을 헛디뎠다. 나 또한 콧등에서 미끄러졌다. 나를 고쳐 쓰고 걷는 그의 걸음걸이는 영 정상이 아니다. 그는 절뚝대는 오른쪽 다리를 끌고 택시를 탔다. 다친 것은 안쓰럽지만 하루가 길어진 탓에 나는 내심 신이 났다. 택시 안에서 그는 연신 양쪽 창을 번갈아 보았다.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길인 탓이다. 

 

 곧 응급실로 들어가 접수를 했다. 이름도 쓰고 주소도 쓰고 주민등록번호도 썼다. 5번 침대에 배정받아 간신히 몸을 뉘었다. 병원 천장은 참 하얗다. 불은 참 밝다. 그리고 그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귀여운 여자아이가 보였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두툼한 패딩 점퍼.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붙어 앉아 조잘거리고 있었다. 들리지는 않지만 바삐 움직이는 입술 모양새가 꽤 시끄러웠다. 

 그때 간호사가 와서 뭐라 묻기 시작했다. 그도 대답을 했고 간호사는 이내 다시 건너편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그는 간호사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간호사가 돌아간 모퉁이를 보고 있었다. 

 난 아이가 보고 싶었다. 그 정도 어린아이는 자주 볼 수 있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의 손의 반도 안 되는 손으로 침대 난간을 잡고 꼼작거리는 모습을 또 보고 싶었다. 난 그가 보는 것만 봐야 하는 내 신세가 원망스러웠고, 단 한 번이라도 내 의견을 묻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는 것 같다. 그때 다시 아까 그 간호사가 보였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다 접질린 다리 때문인지 움찔하였고, 간호사가 등을 받쳐주었다. 나는 살짝 밀려 올라갔다. 게다가 살짝 떨리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은 그가 샤워를 하고 몸을 닦고 나와 나를 쓰고 거울을 볼 때이다. 그때 본 그의 얼굴에 지금의 안면근육 움직임을 더해 상상해보자니 상상으로 밖에 접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다 간호사 옆의 의사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난 다시 콧등을 타고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간호사가 뻔지르르하게 생긴 의사와 함께 온 것이다. 키는 그보다 훤칠하고 코도 높은 것 같고, 안경은 쓰지 않았다. 의사를 한번 훑는가 싶더니 이윽고 다시 간호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의사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도 간호사만 보았다.

 한낱 안경인 내가 봐도 그는 간호사의 맘에 들지 못할 것 같다.

간호사도 썩 예쁘장한 얼굴은 아니지만 생글생글 웃는 게 호감 형이다. 그는 그저 그런, 어쩌면 그저 그렇지도 못한 남자이고, 차라리 저 뺀질이 의사 쪽이 더 어울릴 것이다.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린 모양이 꼭 바람둥이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뭐 어떠랴. 의사는 다른 간호사를 불러 뭔가를 지시하더니 생글생글 간호사와 가버렸다. 두 번째로 온 간호사가 그의 다리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다시 천장을 보기 시작했다.

 

 치료를 마친 그는 다시 택시를 타고 집 앞 골목길 입구에서 내렸다. 늘 다니는 길이었다. 2분이면 집에 도착해 늘 보던 어머니를 마주할 것이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가로등 불빛은 노을을 흉내 낸 것만 같았다. 노을이 지고 덮치는 어둠처럼 그의 그림자도 바닥을 드리웠다. 

 

 그는 아마 아까 의사가 수고했다는 의미로 두드린 간호사의 어깻죽지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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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알록달록 색안경

알록달록 색안경

 

우리는 누구나 안경을 끼고 살아간다. 무엇보다 투명하고 맑은 안경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비추다가 어느새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색이 입혀진다. 때로는 자의에 의해서, 때로는 타의에 의해서 조금씩 미세하게 물들어간다.

 

푸르른 녹음을 닮은 자연의 색에서 시리고 차가운 냉기를 품은 청색으로 그러다 뜨겁고 사나운 붉은 빛으로 바뀌기도 하고 탁하고 희미한 무채색이 되기도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덧입혀진 색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자신일수도 있고 부모님일수도 있으며 친구나 연인, 지인, 스승 또는 우리의 시야를 어지러이 방해하는 다양한 지식과 정보일수도 있다. 너무나 많은 거짓과 진실과 소문이 섞이며 한겹, 두겹, 겹겹이 색을 입히고 마침내는 본연의 순수함을 잃게 된다.

 

그렇게 색이 덧입혀진 안경은 한겹, 두겹, 색이 입혀질 때마다 단단해지고 딱딱해진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 색이 갑옷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장한 채 세상을 비춘다. 그런 안경에 비쳐진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싸늘하고 살벌하고 삭막하기만 할 뿐이다.

 

왜 이런 색이 입혀지는 걸까? 무엇을 감추려고 색을 입히는 걸까? 바람에 날린 먼지에 긁힌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누군가와 부딪쳐 금이 간 자국을 감추려는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기 위해, 혹은 보여주기 위해 색을 입힌 걸까?

 

때로는 스스로를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부모가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쌓여온 색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또 오래 지나서야 희미해지고 흐려지지만 완전히 깨끗해지지는 않는다.

 

닦고 또 닦고 닦아내도 두텁게 씌워진 색은 하얀 손수건만 더럽힐 뿐, 힘을 주어 박박 닦다보면 안경이 부서질까 겁이 나서 조심조심 정성을 다해 겨우 닦아내면, 겨우 그 본연의 투명한 렌즈가 보인다. 하지만 처음과 같지는 않다. 얼룩덜룩 흔적이 남아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 닦아내면 언젠가는 처음의 그 투명하고 맑은 안경이 될 거라고, 그리 다독이며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뭉실뭉실 떠가는 조각구름 사이로 노을이 지는 하늘에 잠시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 발을 멈추었다. 오랜만에 하늘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그리움이 몰려든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 투명하고 맑은 안경이 그립다. 세상만사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푸르고 아름답게 비치던 그 풍경이 그립다. 새파란 하늘과 뭉실뭉실 떠가는 구름과 푸르른 나무와 내 작고 소중한 친구가 그립다. 그 하늘을 기억에 담으며 다시 계단을 오른다.

 

우리는 누구나 안경을 끼고 있다. 그 안경의 색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시리도록 푸른색을, 누군가는 뜨거운 붉은 색을, 누군가는 극과 극의 흑백을...

 

마지막은 희뿌옇게 바래서 먼지가 입혀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