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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

그저 그런 남자

 그는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남자이다. 그저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게 그 흔한 여자 친구도 없고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집에 계신 그의 어머니와 몇 안 되는 친구들뿐이다. 다니는 곳도 그저 그런 직장과 집, 기껏해야 단골 호프집. 난 언제나 그와 함께해야 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는 나를 통해 세상을 본다. 고로 나도 그가 보는 세상을 본다. 아무것도 왜곡시키지 않고 그저 그가 좀 더 편하게, 세세하게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사실 이런 그의 안경인 나도 그저 그런 안경이다. 굳이 특이점을 꼽자면 그의 코는 낮은 편이어서 내가 콧등을 타고 흐를 때마다 왼손잡이인 그가 왼손으로 나를 고쳐 매 왼쪽 다리의 칠이 좀 벗겨졌다. 이런 모습으로 그와 같이 그저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나는 항상 불만이었다. 


 오늘도 야근에 피곤한 눈을 꿈뻑이며 그는 버스를 탔다. 그가 꾸벅대며 조는 탓에 난 그의 무릎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그것밖에 볼 수 없었다. 역시나 무료한 날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일어섰다. 창밖을 보진 못했지만 안내방송을 들었지 싶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뻗은 손을 걷으려는 찰나. 


 아. 그가 고꾸라졌다. 


 졸다 일어나 몽롱한 정신에 그만 발을 헛디뎠다. 나 또한 콧등에서 미끄러졌다. 나를 고쳐 쓰고 걷는 그의 걸음걸이는 영 정상이 아니다. 그는 절뚝대는 오른쪽 다리를 끌고 택시를 탔다. 다친 것은 안쓰럽지만 하루가 길어진 탓에 나는 내심 신이 났다. 택시 안에서 그는 연신 양쪽 창을 번갈아 보았다.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길인 탓이다. 

 

 곧 응급실로 들어가 접수를 했다. 이름도 쓰고 주소도 쓰고 주민등록번호도 썼다. 5번 침대에 배정받아 간신히 몸을 뉘었다. 병원 천장은 참 하얗다. 불은 참 밝다. 그리고 그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귀여운 여자아이가 보였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두툼한 패딩 점퍼.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붙어 앉아 조잘거리고 있었다. 들리지는 않지만 바삐 움직이는 입술 모양새가 꽤 시끄러웠다. 

 그때 간호사가 와서 뭐라 묻기 시작했다. 그도 대답을 했고 간호사는 이내 다시 건너편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그는 간호사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간호사가 돌아간 모퉁이를 보고 있었다. 

 난 아이가 보고 싶었다. 그 정도 어린아이는 자주 볼 수 있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의 손의 반도 안 되는 손으로 침대 난간을 잡고 꼼작거리는 모습을 또 보고 싶었다. 난 그가 보는 것만 봐야 하는 내 신세가 원망스러웠고, 단 한 번이라도 내 의견을 묻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는 것 같다. 그때 다시 아까 그 간호사가 보였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다 접질린 다리 때문인지 움찔하였고, 간호사가 등을 받쳐주었다. 나는 살짝 밀려 올라갔다. 게다가 살짝 떨리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은 그가 샤워를 하고 몸을 닦고 나와 나를 쓰고 거울을 볼 때이다. 그때 본 그의 얼굴에 지금의 안면근육 움직임을 더해 상상해보자니 상상으로 밖에 접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다 간호사 옆의 의사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난 다시 콧등을 타고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간호사가 뻔지르르하게 생긴 의사와 함께 온 것이다. 키는 그보다 훤칠하고 코도 높은 것 같고, 안경은 쓰지 않았다. 의사를 한번 훑는가 싶더니 이윽고 다시 간호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의사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도 간호사만 보았다.

 한낱 안경인 내가 봐도 그는 간호사의 맘에 들지 못할 것 같다.

간호사도 썩 예쁘장한 얼굴은 아니지만 생글생글 웃는 게 호감 형이다. 그는 그저 그런, 어쩌면 그저 그렇지도 못한 남자이고, 차라리 저 뺀질이 의사 쪽이 더 어울릴 것이다.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린 모양이 꼭 바람둥이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뭐 어떠랴. 의사는 다른 간호사를 불러 뭔가를 지시하더니 생글생글 간호사와 가버렸다. 두 번째로 온 간호사가 그의 다리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다시 천장을 보기 시작했다.

 

 치료를 마친 그는 다시 택시를 타고 집 앞 골목길 입구에서 내렸다. 늘 다니는 길이었다. 2분이면 집에 도착해 늘 보던 어머니를 마주할 것이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가로등 불빛은 노을을 흉내 낸 것만 같았다. 노을이 지고 덮치는 어둠처럼 그의 그림자도 바닥을 드리웠다. 

 

 그는 아마 아까 의사가 수고했다는 의미로 두드린 간호사의 어깻죽지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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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알록달록 색안경

알록달록 색안경

 

우리는 누구나 안경을 끼고 살아간다. 무엇보다 투명하고 맑은 안경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비추다가 어느새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색이 입혀진다. 때로는 자의에 의해서, 때로는 타의에 의해서 조금씩 미세하게 물들어간다.

 

푸르른 녹음을 닮은 자연의 색에서 시리고 차가운 냉기를 품은 청색으로 그러다 뜨겁고 사나운 붉은 빛으로 바뀌기도 하고 탁하고 희미한 무채색이 되기도 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덧입혀진 색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자신일수도 있고 부모님일수도 있으며 친구나 연인, 지인, 스승 또는 우리의 시야를 어지러이 방해하는 다양한 지식과 정보일수도 있다. 너무나 많은 거짓과 진실과 소문이 섞이며 한겹, 두겹, 겹겹이 색을 입히고 마침내는 본연의 순수함을 잃게 된다.

 

그렇게 색이 덧입혀진 안경은 한겹, 두겹, 색이 입혀질 때마다 단단해지고 딱딱해진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 색이 갑옷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장한 채 세상을 비춘다. 그런 안경에 비쳐진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싸늘하고 살벌하고 삭막하기만 할 뿐이다.

 

왜 이런 색이 입혀지는 걸까? 무엇을 감추려고 색을 입히는 걸까? 바람에 날린 먼지에 긁힌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누군가와 부딪쳐 금이 간 자국을 감추려는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기 위해, 혹은 보여주기 위해 색을 입힌 걸까?

 

때로는 스스로를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부모가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쌓여온 색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또 오래 지나서야 희미해지고 흐려지지만 완전히 깨끗해지지는 않는다.

 

닦고 또 닦고 닦아내도 두텁게 씌워진 색은 하얀 손수건만 더럽힐 뿐, 힘을 주어 박박 닦다보면 안경이 부서질까 겁이 나서 조심조심 정성을 다해 겨우 닦아내면, 겨우 그 본연의 투명한 렌즈가 보인다. 하지만 처음과 같지는 않다. 얼룩덜룩 흔적이 남아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 닦아내면 언젠가는 처음의 그 투명하고 맑은 안경이 될 거라고, 그리 다독이며 잠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뭉실뭉실 떠가는 조각구름 사이로 노을이 지는 하늘에 잠시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 발을 멈추었다. 오랜만에 하늘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그리움이 몰려든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 투명하고 맑은 안경이 그립다. 세상만사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푸르고 아름답게 비치던 그 풍경이 그립다. 새파란 하늘과 뭉실뭉실 떠가는 구름과 푸르른 나무와 내 작고 소중한 친구가 그립다. 그 하늘을 기억에 담으며 다시 계단을 오른다.

 

우리는 누구나 안경을 끼고 있다. 그 안경의 색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시리도록 푸른색을, 누군가는 뜨거운 붉은 색을, 누군가는 극과 극의 흑백을...

 

마지막은 희뿌옇게 바래서 먼지가 입혀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