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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4

세 시가 되었을 무렵 D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사에게 불려갔다 왔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건지 겉으로만 그런척 하는건지 Y는 D의 머리속이 궁금했다. D는 어젯밤에 지방에 내려가서 늦게 출근했다고 했는데 말도 안되는 핑계였다. 이사도 그 말을 믿지는 않을 터였다. K차장은 D를 아주 못마땅해했다. D때문에 이사가 자신을 더 못살게 군다고 생각했다. 팀 회의를 할 때면 K차장은 팀원들에게 자신이 이사에게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지 토로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다. 오늘도 야근을 예약해 놓은거나 다름없었다. Y는 애써 마음을 비우려고 했다. 신경쓰지 않고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P에게 짜증내는 K차장의 목소리와 D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보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Y는 자신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빨갛게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J가 Y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물을 봐달라고 메세지를 보냈다. Y는 J의 자리로 갔다. 모니터를 보고 Y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J를 한 번 쳐다봤을 뿐이었다. J는 벤치마킹한 디자인을 섞어 놓고는 어떻냐는 표정으로 Y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J에게 Y는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J는 평소에도 연봉이 높은 포지션에 대해 묻고는 했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적은 듯 보였다.

"팀장님께 보여드려 봐."

Y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J는 디자인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여섯 시가 다 되어가자 L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L은 어김없이 자신의 저녁 약속에 대해 떠들어댔다. 오늘 업무가 끝난 사람들은 자리를 정리하며 퇴근 준비를 했다. Y와 P는 저녁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K차장과 D도 뒤따라 나왔다. 정말이지 눈치마저도 없었다. 네 사람은 시간을 아끼려고 회사 앞에 있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네 사람은 아무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음식이 나오자 모두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했다. Y와 P는 가끔씩 눈을 마주쳤는데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J는 퇴근한 뒤였다. F차장은 다이어트 중으로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 몇 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사는 거래처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인상을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언제 불똥이 튈 지 몰랐다. D는 작업한 파일을 보내줄 수 있냐고 Y에게 물었다. Y는 용량이 커서 전송이 안된다고 대답했다. D는 다른 사람에게 매번 도움을 얻어 일을 했다. Y도 몇 번 일을 알려주고는 했는데 그 후로 신입인 J보다 더 많이 물어와 일에 집중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D가 남자 직원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누구나 자기만의 생존 방식이 있는 법이었다. 이사는 출근과 퇴근을 모두 늦게 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기 전에는 집에 가지 않았다. 이사의 통화가 끝나자 사무실 안은 조용해졌다. 회사에는 Y의 팀을 비롯해 몇몇 사람만 남아있었다. Y는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Y는 파스가 붙여진 시큰거리는 손목을 내려다보다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붉은색 지붕의 낡은 건물들이 바다를 향해 서 있고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든 모래사장을 Y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지중해는 Y의 오랜 갈망이었다. 어릴적 지중해 연안의 작은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본 후로 그곳은 Y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거리가 펼쳐졌고 그곳을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다. 거머리같은 더위와 코미디 영화에 출연해도 될 우스꽝스러운 회사 사람들과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을 견뎌야만 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17세기 풍의 오래된 집의 테라스에서 지중해를 내려다 보기 위해서였다. 사시사철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 터키 블루색 같은 잔잔한 물결의 지중해,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깨끗한 공기, 눈 인사와 정감어린 미소,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제철 재료로 만든 건강한 음식, 느긋한 아침 시간과 저녁 식사 후 산책. 크게 바라는 것은 없었다. 죽어있는 감각을 깨우고 하루에 한 번 크게 웃고 죄책감없이 게을러지고 싶었다.

 

Y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색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하철 안에는 긴 하루의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있었다. Y의 맞은편에는 얼굴이 붉은 중년 남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앉아 있었고 Y의 옆에는 앳되 보이는 얼굴의 커플이 속닥거리며 킥킥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Y는 출퇴근 시간에 휴대폰을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안그래도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혹사시키고 있는 터에 조그만 기계에 내 시간을 전부 쓰고 싶지는 않았다. Y는 눈을 감았다. 잠시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없는 상태로 있고 싶었다. 지하철은 익숙한 이름의 정거장을 거치고 또 거치고 거쳐 Y의 동네에 Y를 내려놓고 빠르게 사라졌다. Y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다시한번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눅눅한 습기가 Y의 얼굴로 덮쳐왔다. 역 주변 상점 앞에는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진 듯 보이는 남자 몇몇이 모여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Y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Y가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멀뚱히 Y 뒤에 서 있었다. Y는 앞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 빠른 속도로 걸었다. 뒤의 남자가 말을 붙여왔다.

"저기요, 어디가세요?"

Y는 대꾸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역 앞에서 술에 취해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인 것 같았다. 남자는 계속 뒤따라 왔다. 심장이 빨리 뛰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큰 길이 끝나면 집까지 가는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았고 어두웠다. Y는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룸메이트는 집에 있었다. 룸메이트는 자신이 나갈테니 큰 길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큰 길이 끝나는 지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Y가 그들에게 가까이 걸어가자 뒤따라 오던 남자는 그제서야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 갔다. 룸메이트가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Y도 룸메이트에게 뛰어갔다.

"괜찮아? 어디 있어, 그자식!"

"사람들이 있는 거 보고 돌아갔어, 미친놈."

Y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런 행동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공포감을 주는지 남자들은 모를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힘들게 일하고 집에 오는 길에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Y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두려움이 엄습했었다.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흥분하며 얘기하자 지나가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Y와 룸메이트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집을 향해 걸었다. 룸메이트는 Y의 가방을 대신 들고 Y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두 사람 앞에 개 두 마리를 데리고 한밤의 산책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개들은 밖으로 나온 것에 신이 났는지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땅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그러다 Y와 룸메이트를 발견하고는 컹컹대며 짖었다. 두 사람은 순간 소리를 지르며 냅다 집으로 뛰었다. 주인이 목줄을 끌어당기며 개들을 진정시켰다. Y와 룸메이트는 집 앞에서 숨을 고르다 무심코 검은 하늘에 떠있는 달을 올려다 보았다. 달은 건물 꼭대기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듯 했다.

"달 봐봐."

야근으로 밤 늦게 들어오면서 달을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지친 몸을 이끌며 똑같은 길을 걸었을 뿐이었다. 달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 겪었던 불쾌한 기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공기는 여전히 옆에 있었지만 달빛은 그들을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었다. 여름밤이었다.

“화장실 고쳐놨어."

룸메이트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Y는 룸메이트의 어깨를 툭 치며 피식하고 웃었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목 뒤로 머리카락이 쩍쩍 달라붙었다. 서울은 20일째 열대야가 지속되고 있었다. 오늘도 달빛 아래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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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3

점심 시간을 한 시간 남겨두고 이사가 출근을 했다. 이사는 사십대 초반의 청순한 외모의 소유자로 나이보다 몇 살은 어려보였다. 그러나 Y는 이사가 의학의 도움을 정기적으로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깨끗한 인상과는 달리 굉장히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갑자기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코를 막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사는 Y 뒷자리에 앉았는데 점심을 먹고 들어오면 소화가 되지 않는다며 방귀와 트림을 번갈아 가며 했다. 또 결코 책상을 정리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책상에는 먹다 남은 샌드위치, 일회용 커피컵, 코 푼 휴지가 굴러다녔다. 목소리는 어찌나 큰 지 누구를 부를 때나 업무 지시를 할 때에는 귀가 먹먹하다 못해 아플 정도였다. 일을 마음에 들게 하면 대우해줬고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즉시 눈 밖에 났다. 애연가였고 냄새를 없애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향수를 뿌렸는데 오히려 더 역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사는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마다 항상 L을 데리고 다녔는데 L은 이사의 오른팔로서 아부로 살아남는 종족이었다. L의 아부는 독보적이었는데 이사 앞에서 허리를 펴는 날이 없었다. 이사의 말이라면 모두 맞장구쳤고 자신의 생각은 집에 놔두고 온 듯 했다. L은 소위 월급 도둑이었다. 중요한 업무는 요리조리 피하고 간단한 일만 맡아서 하는데도 어찌나 생색을 내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회사 일은 L이 다 하는 줄로 생각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듣도록 자신이 일을 한다는 티를 팍팍 냈다. 업무가 많아 야근하는 동료들과 달리 L이 근무 시간 이후에 회사에 남아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사를 등에 업은 L에게 F팀장도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L이 회사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일은 이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입발린 말을 할 수 있는지 타고난 재능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덧 시곗바늘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Y와 P 그리고 J는 도시락을 들고 휴게실로 갔다. J는 입사한지 몇 개월 밖에 안된 이십대 후반의 신입 직원이었는데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다. Y는 처음 얼마간은 그의 불평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신입 직원의 고충이라고 이해하며 듣기에는 정도가 지나쳤다. 그의 불평은 점심 시간 내내 지속되었고 Y와 P는 꼼짝 않고 그 불평을 들어야만 했다. 하나 더 참을 수 없는게 있었는데 그것은 J의 입냄새였다. J는 양치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J가 옆에 앉아 얘기할 때면 Y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날도 J의 불평이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포착한 Y가 P에게 먼저 말을 던졌다.

“우리 점심 먹고 마트나 갈까?"

"좋아, 좋아. 내가 봐놓은게 있거든."

P는 신이나서 사고 싶은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먹거리에 관한 정보는 줄줄 꿰고 있었다. P는 어디에서 무엇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지 Y에게 알려주고는 했다. 그 정보는 유용할 때도 있었지만 Y는 P만큼 물건을 많이 사서 쟁여 놓는 경우는 없었기에 이용할 일이 없었다. J는 웬일인지 P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오늘은 J의 불평을 듣지 않고 여유롭게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D대리님 말이에요, 어떻게 된 걸까요?"

J가 못참겠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글쎄, 오후에 출근하겠지."

Y가 짧게 대답했다.

“대표님이 이사님한테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출근할 때 역 근처에서 D대리가 돌아다니는 걸 몇 번 봤대요."

J가 계속 말하자 Y와 P는 동시에 몸을 뒤로 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Y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D는 자리를 한참동안 비울 때가 많았다. 언젠가 어떤 직원이 D가 비상구 계단에 앉아 자고 있는 걸 봤다고도 했었다.

"진짜? 대표님 점심 시간 다 되서 출근하시잖아. 그 시간에 거기서 뭘 하는 거지?"

P가 바나나를 Y와 J에게 주며 말했다. 그녀는 항상 넘치게 먹을 것을 갖고 왔기에 사람들에게 잘 나눠줬다. Y는 바나나 껍질을 벗기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P와 J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Y를 바라보았다. 11시가 넘은 시간에 역 주변을 배회하는 D와 그녀를 목격한 대표님을 상상하니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D에 대해서는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항상 얘깃거리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점심 시간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오후 시간은 고되었다. 눈알은 빠질 듯 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귀의 통증이 며칠간 계속되고 있었다. 어지럼증은 사회 생활을 하며 얻은 단짝 친구였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고질적인 직업병이었다. Y는 서랍에서 파스를 꺼내 손목에 붙이고 모니터에 다시 눈을 고정했다. 이사는 K차장을 불러다 한참이나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Y의 귀가 더욱 욱씬거렸다. K차장은 사십대 초반으로 이사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그는 중간 관리자로서의 업무 조율 역할을 잘 하지 못했고 책임을 지기 싫어했으며 이사 눈치 보기에만 급급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같은 팀인 Y와 P에게 풀었고 Y와 P의 업무량은 갈수록 늘어났다. K차창은 이사에게 잔소리를 듣기 싫어 자주 야근을 강요했다. 그러나 야근을 한다고 해서 이사가 K차장을 좋게 볼 일은 만무했다. K차장은 뭐가 문제인지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 것 같았다.

 

Y는 업무 얘기를 하기 위해 H과장을 찾았다. H과장은 100kg가 넘는 육중한 몸의 소유자였는데 대표와 이사의 눈을 피해 맨 뒤 자신의 자리에서 자주 낮잠을 잤다. 그는 자다가 일어나 당이 떨어진다며 편의점에서 초코 과자들을 잔뜩 사와 순식간에 해치웠고 휴게실에서 몰래 잠을 자기도 했다. 지각을 밥먹듯이 하면서 집에서 회사까지 멀다며 항상 우는 소리를 했고 땀을 비오듯 흘리며 4월에도 덥다고 선풍기를 틀었다. 여름이 돌아오면 헬스장을 다닌다며 입으로만 유난을 떨었고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예전 사진을 보여주며 조만간 근육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Y는 H과장을 불렀다. 그는 낮게 코를 골며 세상 편하게 잘도 잠을 잤다. 정말 혼자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 Y가 다시 한번 부르자 H과장은 그때서야 가늘게 눈을 떴다. 그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Y는 반영되어야 할 사항에 대해서 설명했다. H과장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기가 막혔으나 Y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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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2

Y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커피가 목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이 몇 분이 Y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마에 맺힌 땀이 조금 마르자 Y는 컴퓨터 전원을 켰다. 9시 5분 전이었다. 대표와 이사는 점심 시간이 다 되어서야 출근을 했다. 동료인 P도 오늘은 늦는 모양이었다.

"Y씨, 커피 마실래?"

맞은편 자리의 F팀장이 Y에게 말을 걸었다.

"전 들어오면서 사왔어요."

Y는 커피를 들어보이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F팀장은 절대 자신이 커피를 사오는 법이 없었다. 커피를 사러 가는 사람이 보이면 꼭 카드를 주며 자기 커피도 사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 카드로 다 계산하라는 얄미운 그 말을 마지막에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Y는 몇 번 F팀장의 커피 심부름을 한 후로는 커피를 사서 회사에 들어갔다. F팀장은 삼십대 후반으로 오지랖이 넓었고 자신의 성격이 좋다고 착각하는 부류였다. 그녀는 한 번씩 나서서 농담을 할 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웃어주자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이 꽤 좋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인사도 받지 않을 만큼 감정이 극과 극을 오갔다. 또 자기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와서는 자기 입으로 자기 모습이 웃긴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그러면 팀원들은 팀장님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는 정해진 답을 말했고 F팀장은 눈을 흘기며 좋아했다. Y는 단 한번도 F팀장에게 옷이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F팀장은 Y에게 그 말을 듣고 싶어 Y의 옷차림에 대해 칭찬하고는 했는데 Y는 입가에 미소만 한번 지을 뿐이었다. F팀장이 자신에게 왜 그 말을 하는지 알았지만 Y는 F팀장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Y가 보기에 그 옷은 F팀장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F팀장이 빵을 한가득 사와서 팀원들에게 먹으라며 평소 그녀에게서 볼 수 없었던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팀원들은 감사하다고 말하고 몇 개는 먹고 몇 개는 남겼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F팀장이 남은 빵을 자신의 자리에 가져가더니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둥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 명 밖에 없다는 둥하며 신경질을 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감사하다는 말을 얼마나 해야 F팀장의 마음에 충족되는 걸까하고 Y는 고개를 숙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었다.

F팀장은 결국 나이가 가장 어린 신입 직원에게 카드를 주며 자신의 커피와 신입 직원의 커피를 사오라고 얘기했다. Y는 카드를 받아들고 나가는 신입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동료인 P가 9시를 조금 넘겨서 들어왔다. 그녀는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Y는 P가 지각을 자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아침 시간의 대부분을 썼다. P는 점심에 먹을 음식과 간식을 잔뜩 챙겨 회사에 왔는데 먹을 것을 자신의 옆에 두고 흐뭇해했다. P는 퇴근 후에 회사 근처의 마트에 함께 가자고 Y에게 자주 말했는데 Y는 주말에 장을 봤다고 거절하고는 했다. P는 가방에서 간식거리를 꺼내어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러고는 Y에게 점심 시간에 마트에 가자고 말했다.

 

Y는 파일을 열어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Y의 팀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늘 그렇듯이 기획 단계부터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기획자는 새로울 것 없는 기획서를 주면서 디자인은 새롭게 하기를 원했다. 마감 시간까지 겨우 맞춰 디자인을 끝내면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며 디자인적 요소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수정할 거리들을 잔뜩 던져 주었다. 기획자는 디자인이 방망이를 몇 번 두드리면 뚝딱하고 나오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Y는 매번 반복되는 상황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이쪽 업계에서는 기획자의 목소리가 더 컸다.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었으나 현실은 매달 돌아오는 월급날 외에는 즐거움을 찾는 것이 힘들었다.

 

F팀장이 D를 찾았다. 옆자리에 앉는 D는 아직도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8년간 사회 생활을 한 Y도 D와 같은 사람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D는 경력이 Y와 비슷했지만 업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용어도 잘 몰랐다. 회의 시간에는 멍하니 있거나 노트에 낙서를 하다가 이사에게 한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간단한 일도 며칠을 붙들고 있었고 그마저도 실수가 많아 수시로 이사에게 불려가 설교를 들었다. F팀장은 D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휴대폰 전원은 당연하게도 꺼져 있었다. D는 이렇게 연락이 안 될 때가 종종 있었다. 오후에 가까스로 연락이 되면 그제서야 회사에 나왔다. 동료들이 전원을 왜 꺼놨냐고 물으면 전화 할 거 아니까 꺼놨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좀처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멍해 보이는 인상 뒤에 어떻게 그와같은 뻔뻔함이 숨겨져 있는지 볼수록 신기했다. F팀장은 한숨을 쉬며 궁시렁거렸다. F팀장은 궁시렁대기 대회가 있다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일 정도로 누가 듣건 말건 자기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 사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다. Y는 한 달 정도 F팀장의 뒷담화 대상이 된 적이 있었는데 신입 시절 이후로 회사 생활하며 울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F팀장의 공격은 Y 다음 타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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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1

Y는 무거운 무엇인가가 자신을 옭아 매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이 찾아왔다. 새벽 3시였다. 일주일 가까이 이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고 새벽에도 보이지 않는 적과 사투를 벌였다. 방 안은 갑갑한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휴대폰으로 현재 기온을 확인하니 32도였다. 32도! Y는 지금까지 살면서 새벽 3시에 32도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서울은 매년 여름 기온이 상승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한 낮 기온이 39.6도를 찍었다. 체감온도는 40도를 넘어섰다.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서울의 기온이 40도에 육박할 거라고 말이다. 몇 년 후에는 열대 기후의 나라에 여행 갈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Y는 미친 날씨야라고 혼잣말을 내뱉고는 베개 위에 머리를 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머리카락이 말썽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문어 다리처럼 목을 휘감아 숨이 막히는데 한몫을 했다. Y는 늘 여름에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가을이 되면 후회할 것이 분명하기에 충동을 다스리는 쪽을 택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머리끈으로 고정하고 부엌으로 갔다. 물을 컵에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키자 쩍쩍 갈라진 논밭에 단비가 내리는 것처럼 따끔거렸던 목구멍이 촉촉해졌다. Y는 침대에 다시 누워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밖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득 지금 깨어있는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은 고요하고 말라버린 감수성이 터질만큼 감상에 젖기 좋은 시간이지만 지금은 그저 더위에 지쳐 잠 못 이루는 밤일 뿐이었다. Y는 이쪽 저쪽으로 자세를 바꾸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시금 잠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Y는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간밤의 더위에 몇 번이나 잠을 설쳐서 바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눈을 감은 채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5분만 더 자고 싶었지만 다리를 들었다 내리며 반동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햇살은 창을 통과하기 전이었다. Y는 침구를 정리하고 욕실로 향했다. 룸메이트가 욕실문을 열고 나오며 변기에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변비에 시달리고 있는 룸메이트는 1년에 두 번은 연례행사처럼 변기를 막히게 했다. 본인은 화장실 배관이 너무 낡아서라고 주장했지만 Y는 변비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삐져나오는 짜증을 간신히 누르며 저녁까지 해결해 놓으라고 말하고는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화장을 하는 도중에도 코 밑으로 땀이 송송 배었다. 선풍기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지만 더위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집을 나와 바깥 공기를 빨리 마셔야 했다. 그래야 답답함이 조금 해소될 것 같았다.

 

지하철은 그나마 북새통은 아니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노선이 아니어서 출퇴근 전쟁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대신 환승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Y의 옆에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섰다. 남자에게서 마른 걸레에서 나는 쉰내가 풍겼다. Y는 가급적이면 숨을 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Y의 폐활량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얼마 못가서 콧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냄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자리를 옮기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옆과 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Y는 어쩔 수 없이 오래 숨 참고 있기를 몇 번 더 했다. 드디어 환승역에 다다랐고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 Y도 환승 통로를 빠르게 걸었다. 여기서 4 정거장을 더 가야 회사가 있는 역에 도착했다. 다행히 역에서 회사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Y는 회사 옆 건물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샀다. 몇 개월째 매일 아침에 보는 편의점 직원은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Y가 인사를 해도 그녀가 입을 여는 법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계산을 하며 Y가 말했다. 직원은 역시나 묵묵무답이었다. 거리는 햇볕에 녹아내릴 것 같았다. 회사 건물에 들어서니 엘리베이터 앞은 이미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사람들을 싣고 쉴새 없이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했다. 차례를 기다려 Y도 사람들에 섞여 엘리베이터에 탔다. 사람들은 모두 올라가는 숫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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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7

생리아의 성벽은 망치 소리로 가득했다. 인부들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손에서 손으로 돌을 날랐다. 발레트는 크레누와 함께 성벽 지도를 보며 공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지아니는 인부들과 성벽 틈새를 메꾸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아니의 초록 눈은 여전히 빛났고 삶을 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그는 순간을 받아들였고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해나갔다.
시간은 강물이 흐르듯이 흘렀고 몰타의 공기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새로운 날이 찾아왔고 움츠린 것이 피어났다. 대지는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모든 것은 지나갔고 또 시작되었다. 보키아는 성과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의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시칠리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발티는 갤리선으로 보내져 동생과 해후했다.
잠시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들자 나디아가 성벽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지아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동생을 마중나갔다. 사람들은 나디아를 반기며 하나 둘씩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었고 발레트도 그녀를 발견하고 성벽 지도를 접었다. 모두 둥글게 앉아 나디아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마셨다. 갓 구운 빵과 치즈 한 덩이에 미소는 저절로 번졌고 마음은 풍족해졌다. 발레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내리쬐는 강한 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태양 아래에서 먹는 점심은 너무나 달콤했다.
성벽 위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나디아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목 뒤로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갔다. 나디아는 지중해로 눈길을 돌렸다. 바다는 헤아릴 수 없이 넓었고 갤리선 한 대가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은빛의 바다는 잠자는 아기의 얼굴처럼 평온했다.
발레트와 나디아의 시선이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한곳에서 멈췄다. 두 사람의 눈길은 스케베라스산에 오래 머물렀다. 산은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었고 몰타를 든든히 지켜주고도 있었다. 몰타로 들어오는 배를 환영했고 떠나는 배를 배웅해 주기도 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품었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스케베라스는 몰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하늘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나디아는 집을 나서 좁은 골목을 걷고 걸어 광장에 다다랐다. 성 바울 성당은 빛을 받아 눈부신 색채를 발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서서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그녀의 눈길이 어느 한곳에 멈춰졌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보고 순간 놀란 듯 했지만 곧 미소를 되찾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나디아 앞에 선 남자는 모자를 벗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해를 등진 남자는 어린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나디아는 자신 앞에 나타난 안드레아를 보자 잠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광장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새소리와 분수대에서 흐르는 물 소리만이 그들의 귀에 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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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6

보키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얼굴 표정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릴라당의 방을 둘러보며 몇 마디 말을 했으나 얼핏 스치는 긴장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발레트가 방에 들어서자 보키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릴라당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발레트의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보키아의 눈이 놀란 듯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는 금새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고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보키아경, 누군지 알아 보시겠습니까?"
릴라당이 발티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키아는 비토를 보았으나 비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의 시종, 비토 발티입니다. 이틀 전, 오스만 정찰병과 함께 있다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릴라당이 보키아를 보며 말을 맺었다. 보키아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보키아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번, 비토 발티가 살람 메메드가 아니라고 증언하셨지요. 몰타의 안전이 걸린 중대한 일임에도 경은 첩자를 감싸 수사에 혼란을 주었습니다."
릴라당이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20년 동안 제 밑에 있던 사람을 내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두었기에 또다시 연루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보키아는 안쓰럽다는 듯 발티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키아는 인정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을 포장했지만 그는 철저히 이해득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보키아의 뻔한 답변에 릴라당과 발레트는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발레트는 방을 나갔고 보키아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방에 들어온 발레트를 보자마자 보키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부인!"
보키아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말을 계속 하지 못하고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부인,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릴라당이 정중한 태도로 의자를 권했다. 창백한 얼굴의 보키아 부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베일은 쓰고 있지 않았으나 검은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부인, 부군과 비토 발티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부인께서 알고 계신 전부를요."
발레트가 부인에게 말을 하자 보키아는 온몸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보키아 부인은 발레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개월 전이에요. 평소와 같이 성당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밖으로 나섰지요. 뜰에서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이 새벽에 누군가 싶었는데 남편과 비토였어요."
보키아 부인이 여기까지 말을 하자 보키아는 눈을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네가 살람 메메드라는 것을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첩자임을 증명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절대로 밝혀내지 못 해... 남편의 목소리였어요. 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남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발티는 그 후로 남편의 곁에 있지 않았어요. 집안일도 맡지 않았죠. 헌 옷을 입고 다녔고 남편에게 한 번씩 무언가를 보고했어요. 돈 후안경이 집에 초대되었을 때도 저녁 식사 중 남편에게 따로 보고를 했어요."
"에스파냐의 돈 후안경 말입니까?"
발레트가 물었다.
"네, 남편에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발티에게 무언가를 전해 듣고 다른 방으로 돈 후안경을 데리고 갔어요."
부인의 말이 끝나자 보키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눈밑은 파르르 떨렸고 입술은 어색하게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부인."
발레트는 큰 결심을 한 보키아 부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보키아 부인은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보키아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보키아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보키아 부인은 고개를 돌리더니 릴라당의 방을 나갔다.
"비토 발티를 아끼는 마음에 그의 정체를 묵인하였다는 경의 말은 믿기가 어렵군요."
릴라당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키아의 뒤에 섰다.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돈 후안은 그 계획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카를 5세의 측근이지요."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보키아는 릴라당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우리가 붙잡은 오스만 정찰병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오스만투르크의 병력과 함선 규모를 발티에게 전했다고 하더군요. 돈 후안경이 그 정보를 알고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발티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보키아는 더 이상은 못 듣겠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에스파냐를 비롯한 각국에서는 오스만의 동태를 항시 살피고 있습니다. 경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발티를 이용하여 오스만의 정보를 얻고자 했어요. 그 정보라면 에스파냐로 진출할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발티는 당신의 사익을 위해 이중첩자 노릇을 했던 겁니다."
발레트의 핵심을 찌르는 말에 보키아는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비토 발티가 흐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동생을 눈앞에 두고도 모른척 했었던 감정이 결여된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동생을 살려야 했어요... 동생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었습니다..."
마치 막혀있던 무언가가 뚫린 것처럼 한꺼번에 모든 것이 쏟아졌다.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발티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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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5

발레트는 모래색 돌로 차곡차곡 올려진 건물 벽을 손끝으로 만지며 걷고 있었다. 처음 몰타에 발을 내딛던 날이 떠올랐다. 지중해 한가운데 솟은 작은 도시는 로도스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발레트는 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을 벽에 댔다. 차가운 기운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타로 들어왔고 자신도 그들과 같이 스쳐가는 한 사람일 뿐이지만 이 벽은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발레트는 모래색의 돌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뜻밖의 목소리에 시간은 현재로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자 영롱한 초록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디아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본래보다 밝게 보였다. 나디아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로 발레트에게 걸어왔다.
"나디아!"
발레트는 벽에 올렸던 손을 내려 허리춤에 찬 칼을 잡는 시늉을 했다.
"아침 일찍 어딜 가는 거에요?"
"성당에요."
나디아는 눈을 크게 뜨며 발레트를 보았다. 그녀는 발레트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눈으로 묻는 것 같았다.
"나도 성당에 가는 길이에요."
발레트는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손을 내밀어 나디아에게 길을 내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아침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갖고 있었다. 골목은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고 소리는 리듬이 되었다. 리듬에 따라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이따금씩 마추치는 시선은 미소를 불러왔다. 모퉁이를 돌자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은 빛에 의해 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건하고도 평화로웠다. 발레트는 알 수 없는 힘을 느끼며 광장으로 한걸음씩 내딛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아름다웠다.
"아침의 광장은 늘 황홀해요."
나디아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성당으로 향하는 똑같은 길이지만 그녀에게는 매순간이 특별했다. 발레트도 나디아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장 저 편으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숨이 멎을 만큼 경이로웠다. 두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 주위에 감탄하며 성 바울 성당으로 이끌려갔다.


성당 앞에는 며칠 전과 같이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발레트는 마차를 힐끗 보고는 나디아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성당 정문을 열고 들어서자 누군가와 얘기 중이던 피오르 신부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부 옆에는 검은 베일을 머리 위로 올린 여인이 있었다.
"오, 나디아."
피오르 신부는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베일을 쓴 여인은 발레트와 나디아를 보자 얼른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감추더니 신부에게 인사한 후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방금 지나간 여인은 보키아경의 부인이 아닙니까?"
발레트의 물음에 신부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발레트는 빠른 속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만!"
여인의 등 뒤로 발레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일을 쓴 여인은 뒤를 돌아보더니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보키아경에 관해 할 얘기가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보키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여인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발레트도 걸음을 늦췄다. 여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녀는 얼굴을 가렸던 베일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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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4

발티는 항구 일꾼으로부터 전갈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글을 빠르게 읽은 후 순식간에 종이를 입안으로 넣어 삼켜버렸다. 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뜰을 가로질러 나갔다.
도시에 어둠이 스며들었다. 인적이 없는 컴컴한 길에 허름한 복장의 발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어느 골목에 들어가 막다른 길에 접어들었다. 누군가 그의 등을 건드리자 발티는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돌았다. 몰타인처럼 변복을 한 투르크 정찰병이 입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뜻을 보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오? 연락은 내쪽에서 하기로 했잖소."
발티는 목소리를 낮추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정찰병은 다시 한번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대답했다.
"중요하게 전달할 사항이 있어 만나자고 했소. 급한 일이오."
검은 눈의 남자가 심각하게 말하자 발티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요?"
정찰병은 숨을 밖으로 길게 내보내며 눈을 내리깔았다.
"일이 생기..."
정찰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티의 어깨가 뒤로 젖혀지며 팔이 꺾였다. 발티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며 당황해 했으나 이내 상황이 파악된 듯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발티는 변복을 한 검은 눈의 사내를 쳐다보고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순순히 기사들을 따라 좁은 골목을 걸어갔다.

 

 

릴라당과 발레트는 서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정적을 깨고 로메가스가 들어와 릴라당에게 보고를 했다.
"단장님,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게."
릴라당이 대답하자마자 기사 두 명이 발티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 방으로 들어섰다. 발티는 손이 앞으로 묶인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발레트는 발티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토 발티, 아니 살람 메메드. 넌 몰타 첩자로 체포되었다."
릴라당이 입을 열었다. 발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발레트는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소. 난 현장에서 잡혔소."
발티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대답했다.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을 숨긴 텅 빈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상대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비토 발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군."
발레트는 발티 앞에 섰다. 발티는 발레트를 보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너의 신분을 보키아는 왜 숨겨준 거지?"
발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끝난 것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끝을 알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후련했다. 발티는 자신 앞에 놓여질 것을 이제 당당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발레트는 릴라당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릴라당은 내보내라는 눈짓을 했고 로메가스는 발티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예상대로 발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
릴라당은 의자에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정입니다. 보키아가 연관된 것은 끝까지 말하지 않을 겁니다."
릴라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키아는 발티가 첩자임을 알고서도 감춰 주었고 사욕을 위해 그를 이용했어. 이 일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보키아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가 꼼짝할 수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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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3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는 바쁜 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성 바울 대성당으로 향했다. 앳된 얼굴의 수사는 앞장서서 긴 복도 끝에 있는 피오르 신부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신부는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들 오시오."
발레트와 로메가스는 예의를 갖추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오르 신부는 앉으라 권하며 발레트와 로메가스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기사단이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지?"
발레트는 피오르 신부의 얼굴을 바로보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몰타의 안전을 위협하는 자가 몰타 내부에 있습니다."
신부는 발레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발레트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자는 사익을 위해서 옳지 않은 일을 묵과하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신부는 발레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가 있지 않을까하여 신부님을 찾아 왔습니다. 자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몰타를 위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혹시 이것과 관련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신지요?"
발레트는 조심스레 신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피오르 신부는 만났을 때와 같은 온화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이곳은 주님의 성전입니다. 그런 것과 관련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이것에 관해 알고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신부님!"
발레트는 간곡한 말투로 피오르 신부에게 청했다.
"주님께 고백하는 것이지 내게 하는 것이 아니오. 미안하지만 부탁을 들어줄 수 없소."
피오르 신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발레트는 신부에게서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신부에게 인사를 한 후 뒤를 돌아 나가려했다. 그때 피오르 신부의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은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주신다오."

 


발레트는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밤을 꼬박 새우고 동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이 상한 자. 신부가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발레트는 신부의 말을 곱씹었다. 신부는 뒤돌아 나가려는 발레트에게 이 말을 했다. 그의 머리 속에 신부가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신부가 무엇을 알려주려던 것은 아닐까?'
그는 복잡한 생각을 쫓고 싶었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발레트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기사단 숙소를 나섰다.
성당 앞에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성당 정문이 열리자 발레트는 반사적으로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피오르 신부가 나타났고 그 뒤로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정문 앞에서 짧은 얘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베일을 쓴 여인은 계단을 내려가 대기하던 마차에 올랐다.
'이른 시간에 성당을 찾은 귀족 여인이라.'
마차는 광장을 돌아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임디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보키아의 성채로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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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2

파도는 끊임없이 해안과 숨바꼭질을 했다. 나디아는 맨발로 파도와 장난을 치며 까르르거렸다. 지아니는 모래 위에 앉아 천진난만한 동생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꿈꾸던 것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지아니에게 하루하루는 기적과 같았다. 지난 5년은 이미 파도에 실려 머나먼 곳으로 떠나갔다. 과거는 그들의 일부분이 되었고 두 사람은 현재에 있었다.
나디아는 밝은 얼굴로 뛰어와 그대로 모래 위에 팔을 뻗고 누웠다. 다른 이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녀의 눈은 세상을 향해 있었고 그녀의 웃음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디아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코로 가득 들어온 상쾌한 공기는 몸 구석구석을 쓸고 내려갔다.
"누워서 하늘을 봐, 오빠!"
나디아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아니는 아이 같은 나디아의 행동에 소리내어 웃다가 동생을 따라 모래 위에 누워 보았다. 파란 하늘에는 다양한 형태의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하늘을 이렇게 오랫동안 보는 것이 얼마만이던가.'
폭신한 구름 위에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아니는 나디아처럼 눈을 감아 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팔과 다리는 전보다 강해졌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지아니는 일어나 앞을 항해 달렸다. 그리고 은빛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파도를 넘어 계속 나아갔다. 한참이나 전력을 다해 헤엄치던 그는 편안히 누워 파도에 몸을 맡겼다. 지아니는 지금 이 순간 자유로웠고 삶에 온전히 취해 있었다.

 

 

크레누의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새어 나왔다. 식욕을 돋구는 양고기 냄새는 집안 전체에 풍겼고 로메가스는 탁월한 식성을 자랑하며 음식을 비워내고 있었다. 크레누는 로메가스에게 음식을 더 권했고 발레트는 자신의 고기를 덜어 로메가스의 접시에 놓았다. 무사히 돌아온 발레트와 로메가스, 지아니를 위해 마련된 저녁 식사 자리였다. 나디아의 웃는 얼굴을 보며 크레누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무사히 돌아와주어 고맙소."
크레누는 포도주 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자식 같은 네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발레트는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 나디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나디아는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빌구 공사를 잘 마무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생리아도 공사가 시작되었지요?"
크레누는 발레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리아는 빌구보다 더 일찍 끝낼 수 있을거요."
"지아니도 현장에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좀 더 쉬어야 하는건 아닌지."
발레트가 지아니의 건강을 염려하며 말했다. 지아니는 몸이 회복되자 크레누의 일을 돕고 있었다.
"나디아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지아니는 옆에 앉은 나디아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발레트는 나란히 앉은 지아니와 나디아를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짙은 갈색머리와 초록빛의 눈동자, 두 사람은 누가봐도 남매라고 생각할 만큼 닮은 모습이었다. 문득 만남이라는 강력한 연결에 발레트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순간 발레트는 자신이 왜 몰타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스만투르크로부터 기독교를 수호하겠다는 것도, 신께 한 맹세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도, 기사단의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미소, 서로를 향해 짓는 웃음을 위해서였다. 거창한 대의가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몰타에 있는 것이었다. 발레트는 식탁에 둘러 앉은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 함께하는 시간을 진심으로 즐거워했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눈속에 가득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로메가스가 무언가를 말하자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포도주는 향기로웠고 웃음소리는 노래가 되었다.
나디아는 지금 이 순간에 감사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며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나누는 시간. 나디아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함께 하는 시간, 나디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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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1

아주르... 아주르...
푸른 바다, 쏟아지는 햇빛,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바람, 흩날리는 짙은 머리카락과 너울거리는 치맛자락, 누군가 고개를 돌린다. 얼핏 보이는 옆모습, 초록빛으로 감싸인 눈동자.
안드레아는 눈을 떴다. 동트기 전의 새벽녘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은 이미 도망쳐 버린 후였다. 그는 세수하듯이 얼굴을 쓸고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집 밖으로 나선 그는 항구로 방향을 정했다. 아니, 발걸음이 목적지를 정했는지 모른다. 안드레아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골목을 홀로 걸었다.
거리에 나오자 앞사람의 얼굴이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집집마다 문과 창문이 굳게 걸어 닫혀 있었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드레아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사람들의 말소리. 그는 항구 근처의 주점으로 들어갔다. 주점에는 선원 몇몇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리보다는 그를 반기는 듯 했으나 여기서도 그가 기대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코가 빨간 주인장이 눈빛으로 뭘 원하느냐고 물었다. 럼이라는 짤막한 안드레아의 대답에 빨간코의 주인장은 큼지막한 손으로 잔에 가득히 술을 채웠다. 안드레아는 입에 잔을 갖다 대었다. 빈속에 술을 털어넣자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선원들은 거친 입담을 서로 자랑하고 있었고 주인장은 그들의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속이 쓰라렸지만 남은 술을 비웠다. 그리고 술값을 탁자에 올려두고 주점을 나와버렸다. 항구의 주점도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울면서 하늘을 맴돌았다. 안드레아는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 보았다. 그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 제노바에서도,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바다에서도. 안드레아는 흐릿한 눈으로 해무로 뒤덮인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저편을 보기 위해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전히 해무에 갇힌 바다였다. 해무를 걷어내고 바다를 보고 싶었다. 풍족한 바다를 느끼고 다시 사랑하고 싶었다. 해무를 걷어내야 했다. 깊게 드리워진 해무를 걷어내야 했다.
안드레아의 머리 위에서 소리내어 울던 갈매기 한 마리가 바다 위에 사뿐히 앉았다. 갈매기는 보란 듯이 해무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이어서 다른 갈매기들도 주저 없이 해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좀 전에 마신 럼이 이제야 작용하는 것 같았다. 몸이 따뜻해지면서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해무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발레트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선형으로 생긴 계단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었고 어둠으로 가득했다. 발레트는 숨을 짧게 내뱉으며 걸음을 떼었다. 한 손에 횃불을 들었지만 어둠은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지하 감옥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발레트는 횃불을 들어 철창 안을 비춰 보았다. 컴컴한 굴 속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발레트는 철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검은 눈동자의 사내는 발레트를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순순히 일어났다.
발레트는 릴라당의 방문을 짧게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창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릴라당은 인기척이 나자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발레트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검은 눈동자의 사내를 앞으로 이끌었다. 릴라당은 그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날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릴라당은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결심한 듯 대답했다.
"기독교로 개종하겠습니다."
"배교를 하겠다는 건가?"
릴라당은 사내의 의중을 읽기 위해 다시 한번 물었다.
"제 어머니는 그리스인입니다. 저도 반은 기독교도입니다."
"넌 투르크 정찰병이야. 무엇을 보고 널 믿어야 하지? 모국과 종교를 배반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텐데."
발레트가 날카롭게 사내를 몰아세웠다. 남자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곧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몰타 첩자를 잡는데 협조하겠습니다."
"그건 우리선에서 할 수 있네."
"조금 있으면 본국에서 다른 정찰병을 보낼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자는 더욱 몸을 사릴테고 기사단에게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뿐입니다."
투르크인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를 둔 이 정찰병은 릴라당 앞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발레트는 투르크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한 태도였다.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게."
릴라당은 발레트에게 방에 남으라고 말했다. 사내는 발레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른 기사에게 이끌려 방을 나갔다.
"어떻게 생각하나?"
릴라당이 발레트에게 물었다.
"도망칠 구실로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경계를 늦춰서는 안되네."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만약 투르크인을 통해 발티를 잡는다 하더라도 그가 보키아에 대해 털어놓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같네. 발티는 보키아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을 걸세.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보키아가 발티를 이용해 에스파냐에 환심을 사려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사단이 추측한 정황이었다. 그동안 기사단은 발티를 감시해왔고 그는 투르크 정찰병과 비밀리에 만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보키아는 돈 후안 경을 몰타로 초대하여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려는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하고 있었다. 보키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발티의 신원을 숨겨준 것은 아직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보키아가 빠져나갈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보키아는 온갖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자였다. 그보다 더 정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지도 몰랐다.
'사람들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라면?'
말이 모이는 곳. 그곳은 오래전부터 아주 가까운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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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6

허기가 진 인부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나디아는 한 명 한 명에게 포도주를 따라 주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날이었다. 스케베라스산이 펼쳐진 빌구의 성벽에서 인부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막바지 작업에 열중했고 나디아는 빵과 포도주를 챙겨 왔다. 지중해는 늘 그렇듯이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했고 하늘에는 다양한 모양의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햇빛은 수면을 간지럽혔고 물결은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인부들은 포도주를 들이켰다.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양젖으로 만든 치즈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그들은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함선이다! 성 요한 기사단의 함선이 돌아왔다!"
인부 중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디아는 포도주 따르기를 멈추고 성벽 앞으로 걸어갔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 성 안나호의 붉은 십자가 깃발이 위풍당당하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나디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머리속은 오로지 마르삼세트 항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디아는 포도주 항아리를 내려놓고 성벽 아래로 뛰었다. 해안을 따라 달리며 그녀는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붉은 십자가 깃발은 그녀를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나디아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항구로 들어섰다. 십자가가 새겨진 기사단 망토를 본 순간 나디아는 더 이상 뛸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다리가 세차게 떨렸고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딛을 수 없었다. 마중을 나온 기사단원들과 부둥켜 안으며 기뻐하는 발레트를 보자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나디아는 가슴을 움켜잡고 가까스로 눈물을 삼켰다.
지아니는 천천히 땅을 밟았다. 그토록 꿈꿔온 순간이었는데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로였다. 몰타의 색, 공기, 소리... 그리웠던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지난 5년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그는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발레트, 수고했네.."
"단장님.."
릴라당은 발레트의 등을 두드리며 말을 아꼈다. 주름진 릴라당의 눈가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발레트는 스케베라스산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처음 몰타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이제 몰타는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었다.
"나디아!"
익숙한 그 이름에 발레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아니는 벌써 저만치 앞서 뛰어가고 있었다. 부두가 시작하는 곳에서 나디아는 몰타를 떠났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발레트는 나디아의 얼굴을 보자 세상을 다 담을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뛰었다. 기사단원들은 발레트의 모습을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마르삼세트 항은 만남과 헤어짐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처음의 설레임과 마지막의 서글픔은 항구에 늘 존재했다. 그러나 기다림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고 끝내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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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5

며칠 동안 맹렬히 퍼부은 공격으로 튀니스의 길목인 라골레타 항구의 요새는 무너졌고 에스파냐 동맹군은 육지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승리의 기세는 에스파냐로 기울어졌다. 항구는 이제 에스파냐 동맹군의 함대가 장악하게 되었다. 바르바로사는 질겁하며 튀니스 성벽으로 도망쳐 버렸다. 튀니스는 호수 주변에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녹색의 도시라고도 불렸다. 호수 뒤편에는 길다란 성벽이 펼쳐져 있었다. 에스파냐 동맹군 앞에는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자리에 가만히 앉아 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포격은 멈췄다. 해적의 발길이 끊긴 것으로 보아 라골레타는 에스파냐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엄청난 긴장감을 동반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지상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앞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그것은 또아리를 틀고 혀를 내미는 뱀처럼 그들에게 공격적으로 다가왔다.
'덜컹'
덜그럭거리는 쇳소리에 발레트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물체가 철창 앞에서 조심스레 자물쇠를 열고 있었다. 모두 떨리는 마음으로 의문투성이 침입자의 행동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발레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족쇄 찬 손을 꽉 쥐었다. 검은 실루엣이 몸을 굽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 망토에 달린 모자를 내렸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어서 여기를 나갑시다."
남자는 빠르게 사람들의 족쇄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작은 쇳덩어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발레트는 손을 움켜 쥐었다 다시 폈다.
"자, 어서 나가야 해요."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발레트는 나가려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왜 우리를 풀어주는 거요?"
남자는 망토의 모자를 올려쓰며 말했다.
"나도 당신과 같은 기독교도요."
남자는 배교자였다. 에스파냐 함대가 라골레타를 공격하자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편을 바꾼 것이었다. 바르바로사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노예들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적들은 이미 요새 안으로 숨어 버렸고 배교한 남자는 지하 감옥에 있는 기독교 포로들을 풀어줄 수 있었다. 성벽 밖에는 에스파냐 동맹군이 자리하고 있고 해적들은 성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다면 성 안에는 힘없는 주민들 뿐이었다. 발레트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병기창이 어디에 있소?"
해적을 상대하려면 무기가 필요했다. 포로된 기독교도 숫자가 많으니 무기만 있다면 승산은 있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이쪽이요."
로메가스와 지아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심호흡을 한 후 벽에 붙어 살금살금 걸어갔다. 달빛은 일렬로 뛰어가는 그림자들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성벽 위에 서 있던 해적이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발레트는 손을 들어 뒷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거리 곳곳에 무장한 기독교 노예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둠이 빛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튀니스 성벽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에스파냐 동맹군은 성벽 위에 높이 들린 등불을 보았다.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동맹군은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르바로사는 어젯밤, 튀니스를 버리고 알제로 도망쳤다. 성 안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랍 주민들만 남아 있었다. 어제까지 족쇄 찬 노예 신분이었던 많은 기독교도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에 취해 있었다. 발레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한바퀴 둘러 보았다. 로메가스는 손을 높이 들며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고 지아니는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었다. 발레트는 손을 펼쳐 보았다. 손목에는 족쇄 찬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멀리서 붉은 십자가 망토를 두른 성 요한 기사들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로메가스가 뛰쳐나갔다. 발레트도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군대에 이질이 돌아 알제로 도망친 바르바로사를 끝까지 추격하지 못한 카를 5세는 해적을 피해 도망친 하산을 튀니스의 허수아비 지도자로 복귀시키고 에스파냐 수비대를 남겨 두었다. 그리고 에스파냐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라골레타 항은 고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함선으로 가득 찼다.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북아프리카의 메마른 바람을 맞으며 항구를 거닐었다. 저 멀리 성 요한 기사단의 무장 상선 성 안나호가 보였다. 붉은 십자가 깃발은 바람을 반기며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어이, 이게 누구야? 딴 사람이 되었는걸?"
깨끗해진 턱을 만지며 멋쩍어하는 지아니를 위아래로 훑으며 로메가스가 말했다. 옷을 갖추어 입고 머리와 수염을 자른 지아니는 다른 사람같아 보였다. 발레트는 환하게 웃으며 지아니에게 다가갔다.
"푹 쉬면서 영양을 섭취하면 몸은 원상태로 돌아올 거요."
발레트는 지아니의 건강이 염려되었으나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지아니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로도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마음이 들떠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몰타가 바로 앞이에요."
지아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도 바다로 눈을 돌렸다. 모든 것을 감싸주는 푸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수평선 너머에 몰타가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남았어요. 그전에 우리끼리 회포를 푸는게 어때요?"
로메가스는 발레트와 지아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로메가스의 얼굴을 본 발레트와 지아니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로메가스도 뒤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항구가 떠나갈 정도로 한참을 웃어댔다. 한바탕 웃고 나니 발레트는 아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조금 더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세 사람은 십대 소년들처럼 떠들면서 항구의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에는 해군 복장을 한 남자가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발레트도 그를 지나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아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색으로 새겨진 십자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안드레아는 지중해를 바라보고 서 있는 나디아를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성 안나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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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4

튀니스는 해안에서 이어지는 내륙 호수 기슭에 위치한 도시였다. 마그레브 끝단에 형성된 이곳은 옛 카르타고 시절부터 북아프리카의 무역 중심지로서 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수많은 민족이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힘을 겨뤘고 무수한 통치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좁은 해협을 따라 반나절이면 몰타에 다다를 정도로 유럽과 가까웠기에 오스만은 바르바로사를 지원해 주었고 바르바로사는 오스만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며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실현해 나갔다. 카를 5세는 북아프리카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트리폴리에 이어 튀니스가 함락되자 그들의 만행을 더 이상 못 본 체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지중해의 패권을 제자리에 돌려놔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튀니스는 철옹성같은 성채였다. 성벽 앞으로는 바다로 이어지는 호수가 있어 해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해적들은 포로로 잡은 노예들을 성벽 지하 깊숙한 감옥에 던져 두었다. 그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을 대하듯 하루에 한 번 철창 문을 열고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가축처럼 노예 시장에 세워 큰 돈을 받고 노예 상인에게 팔아 버렸다. 철창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의 눈은 공포심으로 가득했다. 날마다 꾸는 악몽으로 사람들은 서로에게도 적대감을 품었다.
지하 감옥은 어둡고 축축했으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거나 바닥을 기어가는 벌레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며칠 동안 이곳에서 먹은 거라고는 빵 한 조각이 다였다. 발레트는 다리를 끌어당겨 두 팔로 무릎을 감쌌다. 소름끼치는 차가운 공기가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족쇄를 찬 손과 발은 점점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발레트는 맞은편에 앉은 지아니를 보았다. 지아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초록 눈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 했다. 5년간의 갤리선 생활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지아니의 몸은 젊은 성인 남자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그는 다른 노예들과는 달랐다. 그에게 절망이나 원망의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지아니에게는 어떤 압력에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발레트는 나디아에게도 오빠와 같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쾅! 저 멀리서 어렴풋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트는 벽에 귀를 갖다대었다. 로메가스가 다가오려하자 발레트는 손을 들어 막았다. 소리는 전보다 더 크고 가깝게 들려왔다. 쾅! 발레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로메가스와 지아니도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대포 소리는 분명하고 선명하게 튀니스를 뒤흔들었다.
"함대가 왔어! 에스파냐에서 함대가 왔어. 로메가스!"
발레트는 로메가스에게 소리치며 그를 얼싸안았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눈물을 흘렸고 신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발레트는 지아니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힘껏 서로의 어깨를 잡았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말소리가 감옥 밖으로 빠져나갔다. 발레트는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그들은 성벽 아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족쇄 찬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에스파냐군이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해적들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에스파냐 함선은 항구의 요새에 무차별적으로 포를 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성벽이 뚫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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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3

둥, 둥, 둥!!!
검은 얼굴의 해적은 손을 높이 들어 북을 내리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노를 저어라! 더 힘껏!"
발레트는 이를 악 물고 족쇄 찬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생존 앞에서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앞 사내의 등에 긴 채찍이 내리꽂혔다. 사내의 손에서 노가 떨어지자마자 곧 사정없는 매질이 이어졌다.
"계속 저어요."
지아니가 정면을 응시한 채 표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땀이 비가 오듯 흘러 내렸다. 지하 선실은 덥고 습했다. 발레트는 강렬한 태양이 그리워졌다. 빌구의 성벽 위에서 마셨던 포도주가 간절히 생각났다. 금빛의 스케베라스산과 붉은 바다, 함께 했던 사람들. 다시 한번 그곳에서 몰타의 풍경을 보고 싶었다. 지아니의 말이 옳았다. 버텨야 했다.
발레트는 북소리에 집중했다. 북을 치는 해적의 손이 더욱 빨라졌고 노는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해적들의 엉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레트는 라골레타 항에 가까이 왔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항구는 북아프리카의 관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괴괴한 모습이었다. 트리폴리를 무참히 함락시킨 해적의 잔인함을 피해 아랍 지도자는 이미 도망쳐 버린 후였고 튀니스 주민들은 해적들을 상대로 감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힘쓰지 않고 라골레타 항에 입성했다. 부족 대표들은 해적에게 튀니스 요새를 내어주고 말았다.
갤리선 노예들은 모두 족쇄를 찬 채로 배에서 내렸다. 발레트는 트리폴리에서 사로잡힌 후로 처음 두 발로 땅을 딛고 섰다. 다른 배에서 내린 노예들 사이로 로메가스가 보였다. 로메가스는 걸음을 멈추고 발레트를 쳐다보았다. 발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오랫동안 걷지 못한 탓에 지아니는 다리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 휘청거리는 그를 발레트가 붙잡자 해적은 둘 사이를 떼어놓으며 지아니의 등을 밀쳤다. 검은 얼굴의 해적은 발레트를 노려보며 허리춤에 찬 칼을 만졌다. 발레트는 족쇄를 끌며 앞으로 걸었다. 이제 마그레브의 튀니스는 해적의 도시가 되었다.

 

 

지중해의 바람이 갑판 위로 몸을 내민 안드레아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갔다.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몰타에서 경험한 짧은 환희 뒤에는 텅 빈 허전함만이 남았다. 눈을 감으면 애처로운 얼굴로 항구를 뛰어다니는 나디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드레아는 마지막 순간을 지울 수 없었다. 성 요한 기사단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숨을 내쉬었다. 트리폴리에서 살아남은 자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요새는 해적이 장악하고 있고 대다수의 주민과 병사는 죽임을 당했다.
'에스파냐에는 다른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갤리선은 바르셀로나를 향하고 있었다. 제노바는 일찍이 상업으로 도시가 형성된 곳이었다.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으나 베네치아와의 세력 다툼에서 패배한 후 밀라노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게 쇠퇴의 길을 걷던 제노바에게 에스파냐의 카를 5세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그는 제노바의 용병 대장 도리아를 해군 총독으로 삼고 제노바의 자립을 도와주었다. 카를 5세는 해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필요했다. 도리아 또한 용병으로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쪽으로 움직이는게 당연했다. 북아프리카에 관심을 두지 않던 카를 5세도 더는 바르바로사의 도를 넘는 행위를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전군을 바르셀로나에 집결시켰다.
안드레아는 도리아가 이끄는 해군 선단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는 금융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다의 삶을 택했다. 돈을 저울질하는 것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피오르 삼촌은 늘 그가 동경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어린 안드레아에게 바다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였다.
안드레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파도는 저항없이 순순히 길을 내주었고 돛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바람은 지중해의 서쪽으로 배를 실어 보냈다.

 


바르셀로나는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 집합한 갤리선과 무장 상선으로 가득차 있었다. 원정에 필요한 수많은 물자를 배에 적재하는 선원들로 항구는 발을 디딜 틈도 없었다. 카를 5세는 튀니스까지 점령한 바르바리 해적으로 인해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튀니스는 시칠리아까지 배로 하루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해적은 제국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그것은 광활한 영토를 거느린 카를 5세의 자존심에 금이 가게 만든 사건이었다. 더구나 바르바로사는 오스만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카를 5세는 이번에야말로 지중해가 기독교도의 것임을 단단히 일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튀니스 원정은 대규모의 함선과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교황은 자금을 내어 선단을 조직하였고 릴라당은 세계 최고의 무장 상선인 성 안나호를 바르셀로나로 보냈다. 도리아가 이끄는 제노바 해군도 바르셀로나 항에 들어섰다.
안드레아는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에스파냐 해군에게 트리폴리에 관한 다른 정보가 들어왔는지 알아보았다. 에스파냐 수비대장 멘데스는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병사들과 성 요한 기사들은 갤리선 노예로 넘겨졌다는 얘기가 들렸다. 사망자 명단에 발레트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보면 포로로 잡혔을 확률이 높았다. 해적의 습격이나 해전으로 포로가 된 기독교도나 이슬람교도는 갤리선 노예로 보내져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해전으로 배가 침몰하면 제일 먼저 목숨을 잃는 건 노예들이었다. 그렇기에 각국의 갤리선에는 노를 저을 노예가 항상 필요했고 노예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안드레아의 눈에 성 요한 기사단의 무장 상선 성 안나호가 들어왔다. 돛대에는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 때 창설된 성 요한 기사단은 귀족의 자제들로 구성된 의료 기사단으로 출발했다. 기사는 청빈, 순결, 순종을 평생토록 맹세했고 기사단에 남은 생을 바쳤다. 안드레아는 트리폴리 요새가 함락되지 않았다면 튀니스 원정에서 발레트를 동맹군으로 만날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성당에서 기도한다는 나디아의 말을 떠올렸다. 우두커니 서 있는 안드레아의 앞뒤로 짐을 맨 선원들의 분주한 발걸음만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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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2

릴라당은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리폴리 요새의 방어를 맡아달라는 카를 5세의 조건이 처음부터 탐탁치 않았던 그였다. 그곳은 남부 이탈리아 해안 마을을 습격하는 해적들을 견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책이었다. 변변치않은 병력과 지원으로 타국의 요새를 지킨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기사들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마을은 불태워졌고 요새는 해적들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북아프리카 해안은 해적이 군림하는 땅으로 점차 바뀌고 있었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마르삼세트 항구는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오가는 상선들로 늘 분주했다. 이곳은 각국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온갖 소식이 넘쳐났다. 나디아는 거친 바다 사람들 사이를 부단히 뛰어다녔다. 사내들은 젊은 아가씨가 항구를 돌아다니는 것이 이상한지 힐끔힐끔 쳐다봤다. 북아프리카에서 온 상선은 트리폴리에 관해 더 이상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요새를 지키던 대다수가 죽었고 살아있다고 해도 노예로 끌려갔을 것이라는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성벽 공사를 감독하는 기사를 통해서도 다른 소식은 얻지 못했다. 나디아는 발레트와 헤어지던 날을 떠올렸다. 등을 돌려 걸어가던 모습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나디아!"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나디아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말끔한 옷차림의 안드레아가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놀라면서도 반가운 얼굴로 나디아에게 다가왔다. 안드레아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나디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 있어요?"
안드레아는 나디아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나디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한 후 몸을 돌리려 했다. 안드레아는 나디아의 왼쪽 팔을 붙잡았다.
"항구를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해요. 무슨 일이에요, 나디아!"
안드레아는 나디아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그녀는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트리폴리.. 혹시 트리폴리 소식을 알고 있나요? 누가 살았는지.."
나디아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두려워졌다. 발레트가 살아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나디아는 잘 알고 있었다. 안드레아의 어깨 너머로 스케베라스산이 보였다. 언젠가는 진실을 마주할 때가 올 것이었다. 나디아는 몸을 떨었다.
안드레아는 흔들리는 눈빛의 나디아를 보며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말했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방법이 있을 거에요. 누구를 찾는 겁니까?"
"발레트.. 성 요한 기사단의 발레트"
나디아는 토해 내듯 발레트의 이름을 가까스로 말했다. 기사단이라는 나디아의 말에 안드레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힘겨운 얼굴로 간신히 눈물을 참는 나디아를 보며 안드레아는 가슴이 멎는 것 같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나디아에게 말했다.
"나디아, 난 오늘 제노바로 돌아가요. 트리폴리 소식을 알게 되면 꼭 전할게요."
안드레아는 잡고 있던 나디아의 팔을 천천히 놓았다. 나디아는 안드레아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녀의 푸른색 로브는 점점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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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1

나디아는 성벽 위에서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가는 붉은 빛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빌구의 성벽은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고 크레누는 공사 기한을 맞추기 위해 때때로 야간에도 작업을 진행했다. 인부들과 함께 저녁을 먹던 크레누는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는 나디아를 발견했다. 그녀의 가냘픈 몸은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릴 듯 했다. 나디아의 풍성한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은 너울너울 춤을 췄다.
크레누는 아내를 하늘로 먼저 보내고 망연자실해 있던 5년 전을 떠올렸다. 술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길모퉁이에 앉아 울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소녀에게 음식을 사주며 지낼 곳은 있는지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고통을 어느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기에 크레누는 나디아를 거리로 돌아가게 할 수 없었다. 크레누는 나디아가 환한 웃음을 되찾길 바랬다.
한쪽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인부 중 한 명이 크레누에게 달려와 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트리폴리 요새가 해적에게 습격을 당했답니다. 지금 항구에선 온통 그 얘기로 난리에요!"
크레누는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디아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크레누의 등뒤에 와 있었다.
"나디아!"
미처 붙잡기도 전에 나디아는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녀는 마르사 해안을 지나 스케베라스산을 올라갔다. 숨이 미칠 듯 찼으나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쳤고 작은 생채기에서 피가 이슬처럼 맺혔다. 나디아는 정신없이 뛰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내렸다. 떨어진 눈물은 모든 것을 적셨다. 고조 섬,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발레트까지도... 아무리 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다 깊숙한 모래 더미에 파묻혀 버렸다.
나디아는 땅끝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발을 멈췄다. 어둠은 이미 바다를 삼켰고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만이 그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나디아는 목에 걸린 십자가 펜던트를 손에 잡고 무릎을 꿇었다. 바람은 그 여느 때보다 세차게 나디아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디아는 눈을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의 밤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발레트는 잠을 청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어깨는 쇳덩이를 올려놓은 듯 무거웠다. 하루 종일 고되게 노를 저었던 사람들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해적들은 대다수가 육지로 나갔고 노예들을 감시할 몇몇만 남아 있었다. 발레트는 고개를 돌려 수염으로 뒤덮인 남자를 보았다. 사내가 자신의 출신을 밝혔을 때 그와 같은 눈을 어디서 보았는지 발레트는 알 수 있었다.
'나디아...'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이 이름 때문일지도 몰랐다. 몰타를 떠난 이후로 발레트는 나디아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나디아를 만나고 간간이 비쳤던 그녀의 쓸쓸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녀가 웃으면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고 안심이 되었다. 깊은 상처를 털어놓았을 때는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발레트는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었다. 차갑고 딱딱한 물체가 만져졌다. 나디아가 오빠의 칼을 발레트에게 줄 때 그녀는 이전과 달라 보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해 보였다.
"당신이 어떻게 그 칼을.."
초록 눈의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발레트는 놀라는 사내에게 칼을 건넸다.
"나디아... 당신의 여동생을 알고 있소. 이제 주인을 찾은 거요."
사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칼을 잡았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칼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디아...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사내는 칼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디아를 지켜달라 부탁하며 주신 칼이었다. 그는 지난 5년간 나디아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디선가 살아 있을거라는 믿음으로 그는 노예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움푹 패인 사내의 얼굴은 뜨거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발레트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사내의 몸을 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내는 감았던 눈을 뜨더니 칼을 내려놓았다. 그는 발레트를 보며 나디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몰타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은 말아요."
사내는 발레트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한번 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어떻게 발레트가 칼을 가지고 있는지도 물었다. 발레트는 그간의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말없이 듣고 있던 남자는 발레트의 말이 끝나자 칼을 도로 건넸다. 발레트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남자는 나디아와 닮은 초록 눈으로 발레트를 바라보며 그의 팔을 잡았다.
"나디아가 당신에게 준 거요."
발레트는 칼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남자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지아니 레오나디요."
"발레트,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
두 사람은 족쇄 찬 손과 손을 마주 잡았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밤이었다. 벌거벗은 사람들은 몸을 웅크리며 마른 기침을 해댔다. 발레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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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0

제르바 섬은 바르바로사가 북아프리카에서 첫 번째로 자리잡은 곳이었다. 이곳은 야자수로 주변이 둘러싸여 해적들의 은신처로 삼기 적당했다. 발레트는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해적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고 쿵 하는 쇳덩어리 소리가 들렸다. 노는 배안으로 들여졌다. 발레트는 족쇄를 찬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이 쿡쿡 쑤시고 시큰거렸다.
"하다보면 요령이 생길 거요."
'이 생활도 적응이 된다니 끔찍하군.'
허리는 끊어질 듯 했고 목은 갈증으로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조금 있으면 저녁을 갖다 줄 거요."
옆에 앉은 남자는 발레트의 생각을 읽은 듯 다시 한번 말했다.
"갤리선을 탄지 얼마나 됐소?"
"5년."
남자는 얼굴의 반이 수염으로 덮여 있었고 머리는 마구 자라 생김새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가슴과 등은 상처로 가득해 온전한 살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볼품없이 야위어 있었으나 초록빛의 두 눈은 어떤 기운을 뿜어내는 듯 했다. 발레트는 그 눈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며칠간 머무를테니 쉬어 두시오."
발레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로메가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이 지나면 몇 구의 시체가 바다로 던져질지 모를 일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검은 얼굴의 해적은 웬일인지 아무 말 없이 빵과 물을 주고 올라가 버렸다. 발레트는 숨도 쉬지 않고 물부터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차디찬 감각은 그의 몸속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트리폴리에서 잡힌 사람들이 어디로 간지 아시오?"
발레트는 천천히 빵을 씹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다른 갤리선에 타고 있을 거요, 라골레타로 가기 전에 잠시 들른거니까."
"라골레타? 튀니스로?"
"며칠 후면 튀니스도 트리폴리와 같은 신세가 될 지 모르오."
바르바리 해적들은 오스만으로부터 병력과 화승총을 지원받아 쉽게 북아프리카의 요새를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악랄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바르바로사에게 그 누구도 대항하기는 어려웠다. 튀니스까지 함락된다면 몰타와 남부 지중해가 오스만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발레트는 손을 꽉 움켜 쥐었다. 살아난 세포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족쇄를 끌어 당겼다.
"이럴 때 힘을 비축해 놓아야 해요. 여기서 버티려면.."
남자는 돌덩어리같은 딱딱한 빵을 물에 적셔 입으로 가져갔다.
"버텨서?"
"고향으로 돌아갈 거요. 꼭."
발레트의 질문에 남자는 발레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5년간 갤리선 노예 생활을 한, 덥수룩한 수염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남자의 초록 눈이 한순간 빛나는 것을 발레트는 보았다.
"어디 출신이오?"
"몰타, 고조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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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9

릴라당은 벽난로 옆의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고 타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달 사이에 릴라당의 이마 주름은 더욱 깊게 패였다. 그가 성 요한 기사단장으로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쉴레이만은 대군을 이끌고 로도스를 공격했다. 패기 가득한 젊은 술탄은 해외 원정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야 했고 릴라당은 200년간 기독교계의 보루였던 로도스를 지켜내야 했다. 기독교와 이슬람, 두 세력의 힘 겨루기에서 성 요한 기사단은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하는 배와 같았다. 그들은 뜯겨진 나무 조각을 간신히 붙잡고 파도가 이끄는 대로 떠밀려 갔다. 몰타는 그들이 표류끝에 만난 섬이었다. 릴라당은 기사단장이 된 직후부터 기사단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릴라당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짧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망토를 두른 기사 한 명이 벽난로 앞으로 걸어왔다.
"어떻게 되었나?"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부하 기사는 릴라당에게 둘둘 말린 종이를 건넸다.
"투르크인은?
"지하에 데려다 놨습니다."
"수고했네."
발티가 얻어낸 정보는 보키아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었다. 에스파냐는 오스만의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보키아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그가 가진 카드를 사용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릴라당은 의자에 다시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무거운 두 눈을 감았다.

 


은촛대 위로 흔들리는 불빛, 온갖 산해진미로 차려진 풍성한 식탁, 붉은 포도주와 호탕한 웃음소리.
보키아 부인은 이 모든 것과 상관이 없는 듯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잘 가꾼 콧수염과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의 보키아는 돈 후안의 끝나지 않는 자기 자랑에도 참을성 있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돈 후안은 마드리드에서 온 중요한 손님이었다. 그는 카를 5세와 대면할 수 있는 지체 높은 귀족이기에 그를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인생에 찾아온 기회를 잡는 것과 같았다. 보키아의 배려 속에 돈 후안은 자신의 모험담을 더 길고 장황하게 얘기하는 만족감을 누렸다.
보키아 부인은 시칠리아의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이 결혼으로 인해 보키아는 남부 이탈리아의 상권을 얻을 수 있었고 이제 에스파냐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싶어했다. 하인이 다가와 보키아의 귀에 무엇인가 속삭이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해를 구했다. 보키아 부인은 그제서야 남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부인, 마그레브에서는..."
돈 후안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허름한 복장의 발티가 보였다. 유럽은 오스만의 다음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의 진짜 속내를 알아내기는 무척 어려웠다. 이스탄불에서 활동하는 유럽 첩자들은 본국으로 많은 정보를 보냈지만 그중에는 거짓 정보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서로 속고 속이는 거짓 정보가 판을 쳤기에 믿을 수 있는 정보를 갖는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보키아는 발티를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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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8

계단을 내려갈수록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어두컴컴한 그곳은 지옥의 입구 같았다. 먼저 잡힌 사람들은 거의 헐벗은 채로 나무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허벅지 위에는 노가 눕혀져 있었고 그들의 몸은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족쇄를 찬 손과 발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검은 얼굴의 해적이 발레트의 등을 떠밀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앉아."
밑은 온통 오물 투성이었다. 갤리선 노예들은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노를 젓고 먹고 자며 심지어 배설까지 앉은 자리에서 해결했다. 하루에 한 덩이의 빵이 그들이 먹는 음식의 전부였으며 등에 내리꽂는 채찍질은 노예들의 수명을 더욱 단축시켰다. 매일 한 명씩 죽어나갔고 시체는 바다로 던져졌다. 해적은 손에 채찍을 들고 발레트에게 눈을 부라리더니 위로 올라가 버렸다.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 닫혔다. 발레트는 어둠과 함께 남겨졌다.

"출발이다! 노를 잡아!"
갑작스런 큰 소리에 발레트는 놀라 눈을 떴다. 검은 얼굴의 해적이 다리를 벌리고 서서 무언가를 크게 외치고 있었다. 그는 손과 발에 채워진 족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발레트는 현실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노를 잡아요, 어서!"
어렴풋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발레트는 고개를 들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덩치가 산만한 사내의 검은 얼굴이 보였다.
"어서요!"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가 맡아졌고 다급한 소리가 그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발레트는 족쇄를 찬 손을 들어 올려 노를 잡았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노는 위로 올려지더니 아래로 다시 위로, 아래로를 반복했다. 해적은 통로를 걸어다니며 채찍을 휘둘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빨리, 더 빨리!"
발레트는 자신도 모르게 힘껏 노를 쥐었다. 수십 개의 노들이 구령에 맞춰 앞으로 나아갔다. 노를 저으면 저을수록 간밤의 기억이 또렷이 살아났다. 불 타던 마을과 눈을 부릅뜨고 죽은 동료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발레트는 이를 꽉 물고 노를 밀어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남자가 항구의 오래된 주점에 들어섰다. 그는 구석의 빈 자리에 앉아 고개를 살짝 들어 주점 내부를 둘러보았다. 선원들은 술에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잡다한 농담을 하며 실실거리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꼬마 하나가 얼굴을 삐죽 내밀고 안을 들여다 보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탁자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쪽지를 펼쳤다. 짧은 단어를 읽자마자 남자는 모자를 푹 누르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쪽지를 전해 준 꼬마가 주점 앞에서 그를 향해 손짓했다. 꼬마 아이는 미로같은 골목길을 다람쥐처럼 뛰어갔다. 막다른 골목길이 보이자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남자의 눈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아 섰다.
"사데트."
"사데트."
허름한 복장의 비토 발티가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감시가 심해 이렇게 만날 수 밖에 없었소, 이스탄불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오?"
비토는 남자에게 둘둘 말린 종이를 건네며 물었다.
"새로운 함대를 조직하고 있는 중이요."
남자는 모자를 고쳐 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규모는 어느 정도로?"
"70척은 될거요."
"곧 지중해 원정이 시작되겠군. 다음에는 다른 방법으로 만나야 할거요."
발티는 사내의 어깨에 손을 올려 인사를 한 후 곧 사라졌다. 모자를 눌러 쓴 남자도 미로속으로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