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어보기

그들의 일상

마법사의 심부름

마법사의 심부름

 

넓고 넓은 사막

황금빛 모래가 파도치는 곳

 

맑고 맑은 오아시스

별빛이 찬연한 깊은 밤하늘

 

하늘하늘 나풀나풀

무지개를 담은 칠흑의 깃털

 

“그래서 그 깃털은 어디에 쓴다고?”

 

“모르셔도 됩니다.”

 

가늘어진 눈으로 미심쩍게 흘겨보는 에녹의 시선에 피쿠스는 미간을 찡그리고 입술 씰룩이며 대답했다.

 

“스승님의 프라이버시라서요.”

 

피쿠스의 스승이자 궁중 수석마법사 풀크리오 다우리스의 프라이버시라는 핑계에 에녹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표정을 풀었다. 피쿠스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햇빛이 내려쬐는 모래 위에 발을 내딛었다. 조금의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는 무심한 동작이다.

 

“저, 조금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햇빛을 막기 위해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뒤로 돌아보는 세 사람의 모습에 베르첸은 혼자만 지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체력이 좋은 에녹과 몸이 가벼운 라비에라는 이해할 수 있지만, 책상 앞에 앉아서 책과 마법만 파고드는 피쿠스마저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도착해서 쉬죠.”

 

그렇게 말하는 피쿠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동정이 느껴졌다. 베르첸의 고개가 힘없이 끄덕여지고 네 사람은 다시 발을 움직였다. 푹푹 찌는 열기에 한손으로 땀범벅이 된 얼굴을 훔쳐내는 베르첸에게 라비에라가 슬쩍 다가와 생글거렸다.

 

“왜 예배를 빼먹었을까 후회하고 있지?”

 

베르첸은 짓궂은 라비에라의 시선을 회피하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딱히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베르첸은 이른 아침 졸음의 유혹에 넘어가 예배를 빼먹고 공원의 나무그늘에서 몰래 잠이나 자려다가 피쿠스와 충돌, 뒤를 쫓아온 에녹과 라비에라까지 마주치며 거의 끌려온 셈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갑자기 사막을 걷고 있는 베르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듯 라비에라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안 덥습니까?”

 

“더워.”

 

라비에라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대답을 했고, 베르첸은 머쓱하니 앞서가고 있는 피쿠스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라비에라는 작게 키득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피쿠스는 원래 지구력이 좋아. 게다가 저 로브에는 안쪽에 마법이 걸려있어서 체온이 유지되거든.”

 

베르첸은 의혹이 가득한 시선으로 에녹과 라비에라의 로브를 번갈아보았다. 그런 시선에 라비에라는 그저 싱긋- 미소했고 베르첸은 억울하고 분하고 황당함이 뒤섞인 헛웃음을 토했다.

 

“허, 허. 그럼 저만 더운 겁니까?”

 

발끈한 베르첸의 작은 외침에 피쿠스는 한숨을 쉬었으며, 라비에라는 꿈틀거리는 입술을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돌렸고 에녹은 실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자기 포복절도하며 웃는 라비에라의 반응에 베르첸의 표정은 멍하게 바뀌었다.

 

“라비에라하고 내꺼에는 그런 마법 없어, 베르첸. 그녀는 원래 더위에 강한 것뿐이야.”

 

놀림을 당했다는 깨달음에 그렇지 않아도 열이 오른 베르첸의 얼굴이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마냥 벌겋게 달아올랐다. 베르첸의 분노라는 이름의 화산폭발을 피해 라비에라는 잽싸게 그늘을 향해 달려갔다.

 

“가장 뜨거운 사막이라는 별명이 그냥 생긴 건 아닌가 보네. 베르첸이 화도 다 내고~”

 

“더운 건 딱 질색입니다.”

 

베르첸은 그대로 땀에 묻혀 녹아버릴 기세로 축 늘어지며 울퉁불퉁한 나무에 기대어 후드를 뒤로 젖혔다. 후끈한 피부에 서늘한 냉기가 닿으며 한결 시원하게 숨통이 트였다. 에녹은 주저앉은 베르첸의 옆에 서서 물통을 꺼내어 한모금 마시고 땀의 축복을 가득 받은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는 사이 피쿠스와 라비에라는 수풀너머로 보이는 오아시스를 향해 다가갔다. 무더운 사막 속에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차갑게 품어진 오아시스에는 구름하나 없는 하늘이 그대로 투영된다. 발을 디디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미세한 파문 하나 없이 고요하다.

 

“거울이 따로 없는 걸. 여기서 밤까지 기다리면 돼?”

 

“간단하게 준비 좀 하고요.”

 

피쿠스는 왼쪽으로 몸을 틀어 수풀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오아시스 주변을 도는 동안, 겉으로는 태연하게 바위나 나무에 마법 문자를 적으면서 속으로는 에녹 몰래 빠져나오지 못한 스스로에 대해 연민의 한숨덩어리를 키우고 있었다. 피쿠스가 오아시스를 한바퀴 돌아 일행이 있는 곳에 왔을 즈음 해가 저문다.

 

“베르첸씨,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사막 위로 내려앉기 시작하는 노을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베르첸은 고개를 내리며 조금 어리둥절하게 피쿠스를 바라보았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

 

피쿠스의 로브 안자락에서 하프가 나오는 광경에 베르첸의 눈이 커다래졌다. 구불구불한 넝쿨이 우아하게 세공되어있는 하프는 순백의 은빛으로 반짝이며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구조가 단순하며 휴대하기 편한 크기의 하프를 피쿠스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베르첸에게 건네었다.

 

“악기 연주에는 자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해가 지고 나면 한곡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라비에라에게 향하는 피쿠스의 시선, 베르첸의 연주 실력이야 이 나라 백성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으니 수긍할 수 있지만, 라비에라는 뒤이어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에 흠칫했다.

 

“나도 뭐 도울 게, 있는 거야?”

 

“노래라면 제가 부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수컷이 와야 해서 말이죠.”

 

“풉. 큭.”

 

에녹은 입을 막으며 라비에라를 외면했고 베르첸은 농담이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피쿠스와 라비에라를 번갈아보았다. 라비에라는 새침하게 표독스러워진 눈초리로 뒤돌아서 웃고 있는 에녹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격렬하게 알려주지 않으셔도 안다고요. 제가 음치인거!”

 

에녹은 웃음의 여운이 남은 채로 피쿠스를 바라보며 염려스레 말했다.

 

“그랬다가 오던 새도 다시 날아가 버리는 거 아냐?”

 

베르첸과 에녹의 반응에도 피쿠스는 홀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팔짱을 끼고서 살벌하게 에녹을 노려보는 라비에라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라비에라씨의 노래 실력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목소리만 빌리겠다는 겁니다.”

 

원래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담담하게 목소리만 빌리겠다는 피쿠스의 발언에 라비에라는 부글거리는 활화산 같은 눈동자로 얼굴을 들이댔다. 그녀의 뜨거운 열기에 피쿠스는 움찔하며 뒤로 한발짝 물러났다.

 

“오호~ 목소리만~? 어떻게 빌리겠다는 건데?”

 

피쿠스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생각하며 서녘에 걸린 태양을 힐끔거리고는 라비에라에게 목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라비에라는 미심쩍은 눈으로 피쿠스의 손바닥에 있는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목에 걸고만 있으면 됩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걸고만 있으라고?”

 

“예.”

 

라비에라는 목걸이를 집어서 천천히 목에 걸었다. 피쿠스는 그녀가 목걸이를 제대로 착용한 것을 확인하고 해가 지평선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옆에서는 베르첸이 하프의 현을 조율하고 있고 에녹은 느긋하게 앉아서 구경할 준비를 마쳤다.

 

짙푸른 어둠 속에 하나 둘 별빛이 모습을 드러내고 뜨거운 모래는 창백하게 식어간다. 피쿠스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바위며 나무에 새겨진 문자가 빛을 발하고 모래에 남은 열기가 하늘로 증발되며 차갑게 얼어붙는다. 얼음입자가 밤하늘로 피어오르며 반짝인다.

 

“베르첸, 연주 부탁합니다.”

 

“어떤 곡으로 할까요?”

 

“어떤 곡이든, 가능하다면 로맨틱한 걸로...”

 

베르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다정한 멜로디가 서서히 울려 퍼진다. 피쿠스는 라비에라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 검지를 갖다 대며 당부했다.

 

“이제부터 노래가 끝날 때까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라비에라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피쿠스는 손가락을 떼며 짧게 시동어를 걸었다. 목걸이에 박힌 펜던트가 은은하게 빛나고 피쿠스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다들 감탄하고 말았다. 심지어 라비에라는 그녀 자신의 목소리임에도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막아야했다.

 

부드럽고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 달콤하다 못해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라비에라는 미묘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며 양팔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에녹은 팔에 오소소- 팔에 돋아난 소름에 멋쩍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손으로 팔을 문질렀다. 반면에 베르첸은 그야말로 황홀한 표정으로 신들린 마냥 하프를 연주했다.

 

마법사 중에 음치는 드물다했던가? 길고 긴 주문을 박자에 맞춰 고저에 맞춰 영창하기에 음치였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고쳐진다고 하던가? 에녹은 그런 소문인지 사실인지 모호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밤하늘을 향해 목소리를 뽑아내고 있는 피쿠스를 바라보았다.

 

“라비에라, 자네 목소리가 이리 고왔나?”

 

에녹은 멜로디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감탄하며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타인의 기교와 발성을 통해 듣게 된 본인의 목소리에 라비에라는 무어라 말해야할지, 기묘한 기분을 쉽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으음...”

 

무언가 상당히 낯간지럽고 무안한 기분이란, 라비에라는 마치 첫키스라도 당한 숫처녀가 된 것 같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이어지는 하프 연주는 가늘고 빠르게 바뀌었고 그에 맞추어 피쿠스의 노래도 한층 음이 높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밤하늘에 오색찬연한 빛의 장막이 펼쳐지고 커다란 날개의 소리가 들려온다.

 

커다란 새의 기척에 머리를 뒤로 젖혀 올려다보았지만 새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아니,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찬란한 장막이 잘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일렁이는 흔적을 눈으로 쫓으며 피쿠스는 오아시스로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베르첸은 하프 연주가 흐트러지지 않게 주의하며, 에녹과 라비에라는 새가 도망가지 않게 긴장하며 피쿠스의 뒤를 쫓아 오아시스로 향했다. 날개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새의 모습이 확연히 보일 즈음, 탐스런 검은 깃털의 새는 밤하늘을 수놓은 오색빛깔을 그대로 담고서 수면에 내려앉았다.

 

작고 동그란 머리에 고아하게 뻗어서 목뒤로 흘러내리는 머리의 깃과 깊고 어두운 수면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꼬리의 깃털은 여신의 은총이라도 받은 게 아닐까 싶은 매혹을 뿜어낸다. 피쿠스는 목소리를 잔잔하게 바꾸며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가 뺐다. 에녹은 그의 손에 들린 게 잡초인줄 알고 놀랐으나, 다시 살펴보니 귀하디귀한 약초임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삼켰다.

 

쌉쌀하고 향긋한 약초의 향이 바람을 타고 부리에 닿는다. 피쿠스의 노래는 속삭이듯 낮아져있고 하프의 멜로디는 졸리운 고양이마냥 나른하다. 새까만 밤의 거울 위로 잘게 파문이 일고 새는 미끄러지듯이 피쿠스 앞으로 다가온다. 그 즈음 피쿠스는 손짓으로 라비에라를 부르고 그녀에게 약초를 쥐어준다.

 

피쿠스의 노래는 멎었고 하프의 멜로디는 가녀리게 이어진다. 라비에라의 손에 쥐여진 약초를 모두 먹은 새는 다시 밤하늘로 날아올라 저 멀리 사라지고, 빛의 장막이 걷힌 수면 위에는 그 흔적만이 남았다. 피쿠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둥실둥실 떠있는 깃털들을 회수했다.

 

“설마 그 오루스 입니까?"

 

베르첸은 눈을 반짝이며 살랑살랑 날아온 깃털을 잡아 주머니에 담고 있는 피쿠스에게 다가갔다.

 

“네. 그 오루스 맞습니다.”

 

밤의 여신이 아끼는 애조(愛鳥) 오루스. 그 전설의 새였다는 사실에 베르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라비에라는 멍하니 넋을 놨으며 에녹은 짧게 휘파람을 부는 것으로 자신의 감상을 더했다.

 

“그래서 그 깃털의 용도는? 여전히 말 안 할 테지?”

 

피쿠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라비에라의 목에서 목걸이까지 회수한 뒤 곧바로 마법 스크롤 하나를 꺼내어 찢었다. 시야가 어지러워지는가 싶더니 곧 낯익은 대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갑작스런 장소 변화에 휘청이는 몸을 가누며 베르첸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허? 갈 때는 왜 걸어간 겁니까?”

 

“스크롤이 하나 밖에 안 남아서요.”

 

그 대답에는 하나를 더 만들 시간이 촉박했다는 뜻도 담겨있었다. 아마 에녹에게서 도망치느라 시간이 없었을 테다. 피쿠스는 그대로 스승의 침실로 쳐들어가 심부름의 결과를 보고했고, 베르첸은 궁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에 몰래 숙소로 돌아가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덕분에 베르첸은 반나절동안 스승의 잔소리를 들어야했으며, 에녹은 여왕에게 호출을 받고는 새로 임명된 교사와 2주간 근신하며 수업을 받을 것을 명령받았다. 방랑벽이 있는 왕자에는 고문과 같은 명령이었다. 그리고 피쿠스는 깃털의 절반을 숨겨두고서 스승과 흥정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믿거나 말거나~

글 이어보기

짧은 글 모음집:愛

새와 소년

구중궁궐(九重宮闕) 깊고 깊은 황궁의 한곳에는 황제의 보물이 있다.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오로지 황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곳, 유리로 된 천장과 나무와 꽃이 우거진 정원의 한가운데, 황금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새장, 두꺼운 철문 너머로 퍼져 나오는 아름다운 노래, 사람들은 무지개빛 깃털의 아름다운 새일 거라고 말한다.

 

화창한 어느 날, 열 살 남짓 어린 황자는 고운 수가 놓인 비단 공을 가지고 놀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공을 따라 커다란 철문 앞에 멈춘다. 공이 툭- 철문에 부딪치고, 공을 주워 돌아서려는 황자의 귀에 고운 노래 소리가 들린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홀릴 법하다.

 

어린 황자는 눈을 반짝이며 문을 밀었다. 지키는 이 하나 없는 무거운 철문이 어린 황자의 손길에 소리도 없이 열린다. 황자는 슬며시 벌어진 문틈으로 들어가고 그 등 뒤로 조용히 문이 닫히며 흔적을 감춘다. 장인이 만든 듯 섬세한 세공이 아름다운 새장에 새하얀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깃털이 흩날린다.

 

“새?”

 

살포시 내뱉어진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황자, 그 까맣고 순진한 눈동자에 비친 건 햇살 같은 소녀다. 얇고 하얀 옷자락이 나부끼는 가녀린 몸에 포근한 햇살 같은 날개가 달린 소녀, 황자와 눈이 마주치며 노래가 멈춘다. 커다란 새장 안을 빙글빙글 맴돌며 내려선다.

 

황자는 공을 잡은 양손을 새장 속의 소녀에게 뻗는다. 공이 떨어지고, 소녀는 창살 안으로 내밀어진 손을 맞잡는다. 작고 어린 손,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스한 타인의 온기, 소녀는 양손으로 작은 소년의 손을 감싸 쥐며 미소한다. 그리고 다시금 들려오는 노래...

 

* * *

 

20번째 생일을 앞둔 황자는 늦은 밤, 거처를 나와 발소리를 죽이며 걸음을 옮긴다. 달빛 아래 늘어진 그림자를 장막 삼아 가장 은밀한 곳으로, 두꺼운 철문을 지나 그녀가 있는 곳에 들어선다. 가닥가닥 달빛이 새어드는 새장으로 다가가며, 황자는 한껏 기쁨을 담아 그녀를 부른다.

 

“가가(佳歌).”

 

황자의 애정 어린 부름에 가가는 고운 미소와 청아한 목소리로 화답한다. 손을 맞잡고, 다정히 눈을 맞추고, 황자의 손이 부드러이 그녀의 뺨을 매만지며 다짐하고 약속한다.

 

“이곳에서 꺼내줄게. 내 황제가 되는 날, 그 옆자리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자유로이 노래하며 날 수 있게, 꼭 약속하마.”

 

가가의 손을 소중히 잡고 황자는 굳은 약속을 말한다. 그녀는 그 마음이 고마워 달빛이 부끄러울 만큼, 별빛이 무색할 만큼, 곱고 고운 정성을 담아 노래한다. 그와 함께 푸른 하늘 아래를 자유로이 누릴 그날을 꿈꾸며 희망을 담은 노래가 밤하늘에 닿을 마냥 울린다.

 

* * *

 

이른 아침부터 궐 안은 금빛과 붉은 빛의 물결이 일렁인다. 궁의 대전 앞에는 문무백관(文武百官)이 홍색과 청색의 예복을 갖추어 입고 열을 맞추어 서있다. 높은 단상에서는 태사가 양손으로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무릎을 꿇은 황태자의 머리에 씌운다.

 

황제가 된 젊은 청년이 몸을 곧게 세우며 일어서고, 문무백관은 입을 모아 소리를 높인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 만만세, 옥체보존 만수무강 하시옵소서- 한결같은 함성 속에서 황제와 황자의 눈빛이 맞부딪친다. 황자는 태연히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조아린다.

 

늦은 밤, 환하게 불을 밝힌 궁은 향긋한 술 냄새와 흥겨운 음악이 넘실대고 현란한 춤사위가 벌어진다. 술잔이 오가고 기름진 음식이 몇 번이고 채워지며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때에 달빛과 불빛을 받으며 황금빛 거대한 새장이 연회장으로 들어선다. 황제는 술잔을 내려놓고 왼손을 검대에 올리며 일어선다.

 

“자, 보시오! 저게 바로 그 요물이오. 나의 아비를 홀리고 어미를 죽게 만든 그 요물이 바로 저 새란 말이오! 고작 저 새 한 마리 때문에 현명한 황제가 사리분별을 잃고 무능한 황제로 추락한 것이오!”

 

황제는 검을 뽑고 새장으로 다가가고, 대신들은 입을 다문 채 그런 황제와 새장 속의 새를 외면한다. 한때는 영물이라 칭해지며 대를 이어 내려온 보물, 허나 전 황제의 과오(過誤)로 씻을 수 없는 불명예가 되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어미는 죽고 남아있는 새끼마저 죽을 위기이다.

 

가가는 분기탱천하여 다가오는 황제의 모습에 창백한 안색으로 벌벌 떨며 황자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그런 가가의 모습에 황제는 가소로운 웃음을 흘리며 참을 수 없는 노기로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는다.

 

“왜? 누굴 찾는 게냐? 오호라~ 그런 게냐? 고작 새 주제에 감히 누굴 찾는 게냔 말이다!”

 

- 채앵! 차라락.

 

날카로운 금속이 스치고, 새장의 잠금쇠가 풀려 떨어진다. 뒤이어 연회장의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고함과 발소리가 들리고, 곳곳에 멍이 들고 핏물이 앉은 몸으로 황자가 연회장으로 뛰어든다.

 

“멈추십시오. 형님! 크흑.”

 

뒤따라온 병사들이 황자를 붙잡아 무릎을 꿇리고, 가가는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몸을 움츠린다. 황자는 그런 가가의 모습을 한번 바라보고 황제를 올려다보며 간구(干求)한다.

 

“부디 목숨만, 그녀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제발, 목숨만은...”

 

“하! 지금 무어라했느냐? 그녀? 그녀라고?!”

 

황제는 뚜벅, 뚜벅 아우의 앞으로 걸어가 검 끝으로 새장 안을 가리킨다.

 

“네 눈에는 저것이 대체 어찌 보이는 게냐? 너 마저 홀린 게냐?!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저것이냔 말이다!”

 

아우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에서도, 형님을 올려다보는 황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한가닥 흘러내린다. 황자는 고개를 숙여 이마를 땅에 대고 다시 한 번 간절히 청한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폐하.”

 

황제는 그런 아우의 모습을 더없이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다 거칠게 몸을 돌려 새장으로 다가갔다. 이미 잠금쇠가 풀린 새장의 입구를 열어젖히고 가가를 끌어내 내동댕이친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날아 보거라. 그 날개로 어디 한번 날아서 도망가 보아라!”

 

가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황자를 바라본다. 황자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향해 끄덕인다. 가라고, 이곳에서 떠나라고, 저 멀리 안전한 곳으로 훨훨- 날아가라고, 애달픈 미소를 짓는다.

 

- 펄럭. 푸득.

 

가가는 생애 처음으로 새장이 아닌 넓고 넓은 하늘을 향해, 새까만 밤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천천히 조금씩 하늘로 떠오르며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제자리를 맴돈다. 아니, 차마 그를 두고 갈 수가 없어 제자리를 맴돈다.

 

“가! 가거라, 어서!”

 

황자는 목이 터져라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치고, 황제는 병사가 메고 있는 활과 화살을 뺏어 쏘아 올린다. 가가는 매섭게 날아오는 화살에 놀라며 푸득거리다 마지못해 멀리 날개짓을 한다. 멀리- 멀리- 어두운 밤하늘을 크고 아름다운 한 마리의 새가 날아간다.

 

달빛에 반짝이는 눈물을 떨구며, 애달프고 구슬픈 노래를 울리며 그렇게 날아간다.

 

* * *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계절이 바뀌고 강산이 바뀌고, 황자가 별궁에 유폐된 지 50년이 되어가는 해. 고즈넉한 늦가을 밤, 풀벌레 우는 소리를 벗 삼아 마음을 달래는 황자의 귀에 익숙한 노래가 흘러든다. 황자의 눈에 아련함이 떠오르고 입가에 눈물 젖은 미소가 어린다.

 

“가가.”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는 사뿐히 내려와 황자의 품에 안긴다. 어린 소년이, 젊은 청년이, 이제 노년이 된 그는 눈을 감으며 품안의 그녀를 살며시 감싸 안는다. 그의 귓가에 은은한 노래가 스며들고 그 노래는 밤이 새도록 이어지다 아침 동이 틀 때에 멈춘다.

 

이른 아침, 황자를 깨우러 온 시동은 별궁 문턱을 넘자마자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별궁의 입구에, 나지막한 계단에, 노년의 황자가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기둥에 기대어 앉아있어서, 그의 무릎에 생전 처음 보는 크고 아름다운 새가 엎드려있어서, 그 새하얀 깃털에 반사되는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그 광경이 너무도 평온하고 황홀하여 시동은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며 서있었다.

글 이어보기

글에서 책으로 가는 옴니글로의 여정

2017년, 옴니글로의 꿈

 

 

안녕하세요.

 

2017년 정유년 새해가 밝은지 벌써 한 달하고 10여 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작가님과 독자 여러분은 어떤 한 해를 시작하고

어떤 목표를 향해 걸어가고 계시는지 궁금해지네요.

저희 옴니글로는 플랫폼을 이용하는 작가님 그리고 독자의 기대와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으로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새벽 어스름에 새롭게 떠오르는 희망의 해를 보며

2017년에는 옴니글로를 이용하는 분께 많은 편리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 2017년 옴니글로는?

 

 

 

✓ 옴니글로의 꿈

옴니글로의 꿈은 따뜻한 일상을 글로 디자인하고 소박한 생각을 담아,

매거진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옴니글로에서 함께 해주시는 여러 작가님의 멋진 작품

그리고 멋진 글들을 꾸준히 발굴하여 의미 있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옴니글로 쇼핑몰 오픈

매거진 주문 절차가 확! 바뀌었습니다.

기존 ‘폼’ 형식의 주문 결제로 매거진 구매에 많은 불편함을 끼쳤었는데요.

2017년부터 옴니글로만의 스토어를 오픈하여 복잡한 주문 절차를 생략하도록 했습니다.

 

앞으로 옴니글로 스토어에서 문학 매거진 1호, 2호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서를 출간·입고할 예정입니다.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올 한 해 옴니글로 플랫폼은 소통을 위한 기능을 강화할 예정입니다.

좀 더 사용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글 쓰는 이들이 즐거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옴니글로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해 귀를 열고 계속해서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이어보기

온새미로를 향하여

01. 어쩔 수 없는 선택

2634년 4월 25일

답이 없다. 김씨가 약통을 천천히 들어보았다. 달그락, 달그락. 귀를 파먹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손가락으로 약통을 열었다. 조심스레 실눈을 뜨고는 약통을 보자 흰 바닥이 훤히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약통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 탐욕스러운 배를 내밀었다. 얼른 약을 더 달라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약을 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떨어지다니.

김씨가 약을 꺼내고는 주머니를 뒤졌다. 바지에 있는 주머니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이리저리 휘저었다. 생각해보면 무어라도 하나 있지 않을까? 아니 인간적으로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쳐다보았다. 아아. 동전. 빵 한 조각도 살 수 없는 동전이었다. 김씨가 허리를 굽혀가며 동전을 주웠다. 시큰거리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동전을 보았다. 잔뜩 긁힌 동전의 표면으로 김씨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김씨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에 핏줄이 올라오고 동전이 손바닥 안으로 파 묻혔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오빠 무슨 일 있어?”

거실 문턱에서 여동생이 고개를 배꼼 내밀었다. 김씨가 눈이 마주치고는 황급히 주머니에 동전을 집어넣고 고개를 돌렸다. 여동생의 큰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김씨는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아.’

딱 한마디. 더도 말고 이 한 마디였으면 됐다. 하지만 김씨는 그 한마디를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컵에 물을 따르고는 약과 함께 건넸다. 여동생이 물을 받고 입에 머금었다. 알 수 없는 쓴맛에 미간이 좁아졌다. 약을 넣어 물을 삼키고는 싱크대로 가 입을 헹구었다. 김씨가 슬며시 손을 내밀며 입가에 힘을 주었다.

“이제 그만 자자. 너무 늦었다.”

김씨는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의 여동생이 생각만큼 어린애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동생이 김씨의 얼굴을 보았다. 입은 웃고 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붉게 충혈 되고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왔다.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전에 혼이라도 나간 듯이 멍해 보이는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여동생이 천천히 김씨의 손을 붙잡았다. 무어라 얘기를 하려다가도 입을 다물고 침실로 향했다.

김씨가 여동생을 눕히고는 이불을 끌어올렸다. 침대 끝에 앉아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여동생은 금방 잠이 들었다. 어제 밤처럼 잠을 못 자면 동화책이라도 읽어줄까 싶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다. 숨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곤히 자고 있었다. 언뜻 보면 죽은 사람처럼 작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순간 김씨의 간담이 서늘했다. 죽은 사람? 김씨가 얼른 여동생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왼손은 가슴 위에 얹어 놓고 오른손은 인중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숨을 멈추고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후우. 왼손이 살짝 움직이고 오른손을 타고 희미한 숨결이 흘러나왔다.

희미한 달빛이 김씨와 여동생 사이를 헤집고 들어왔다. 어쩌면 달빛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오늘밤 여동생은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원체 집에서 나가지 않는 탓에 원래부터 피부가 하얗기는 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마치 알비노처럼 색을 잃어버린 듯 했다. 여동생이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김씨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이제 남은 가족이라고는 여동생이 전부였다. 부모는 일찍이 노동현장에서 죽었고 이렇다 할 친지도 없었다. 전에 고모였던가. 삼촌이었던가. 누군가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김씨가 철이 들기도 전에 버려졌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다시는 오지 않았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욕을 퍼붓고 저주를 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애초에 세상이 요지경인데 무어를 바랄 수 있겠나? 오히려 이상한 곳에 팔지 않았다는 점이 감사했다.

여동생의 손을 움켜쥐었다. 인형 같이 작은 손, 이 손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다 해왔다. 강도 높은 노동도, 오염 지역으로 가는 일도, 구걸도, 심지어 약탈이나 도둑질도 했었다. 필요하다면 김씨는 더 한 것도 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악착 같이 살아왔지만 그 결과가 이거였다. 약 하나도 제대로 사주지 못하는 오빠라니. 김씨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이 바깥을 품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이 세상을 비춰주나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짙게 깔린 어둠은 달빛을 피해 돌아다니고 있었다. 놈들은 교묘한 녀석들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을 한다면 그 안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멍하니 바라보는 김씨에게 더 이상 답은 없다며 계속 속삭이고 있었다. 김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이렇게 살아가면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게 있는 걸까? 고개를 저었다. 희망은 희망일 뿐이었다. 결코 현실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달빛이 황폐화 된 세상을 비춰졌다.

핵전쟁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예전의 찬란했던 문명들은 방사능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물론 돈 많은 놈들이야 여전히 잘 사는 세상이다. 하지만 김씨와 같은 사람들은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흔히 김씨 같은 부류를 하루살이라고 불렀다. 언제 죽어도,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건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김씨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는다.

방사능은 세상만 황폐화 시킨 것이 아니었다. 물, 식량, 토양 등등 대부분을 오염시켜나갔다. 놈들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환경을 오염시킨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마침내 사람을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두 명의 변화였다.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누군가는 구토를 연달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병들은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고 하나 둘 씩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다. 김씨의 여동생도 마찬가지다. 하얗게 질려버린 피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약 사야 하는데.’

김씨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빵 하나도 사지 못하는데 약이라니. 김씨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사실 약도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여동생이 매일 밤마다 먹는 것은 진통제이다. 단순히 고통만 막아주는 셈이었다. 물론 그마저도 구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먹는다 한들 나아질 수 없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나왔다. 거실 구석에 있는 서랍장을 열고는 그 안으로 손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분명 여기 있을 텐데.’

손가락 끝을 움직이자 딱딱한 상자가 느껴졌다. 김씨가 양손을 집어넣어 서랍 위로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겉에는 먼지가 수북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얼마만일까? 먼지를 털어내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권총 한 자루, 칼집이 있었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도 권총은 빛나고 있었다. 겉에 먼지가 조금 묻어있기는 했으나 별 문제 없어 보였다. 김씨가 권총을 꺼내어 양 손에 쥐었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권총의 뒤편을 잡아당겨 장전을 했다.

철컥.

순간 김씨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권총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눈을 가늠쇠에 맞춰보고 방아쇠에 검지를 올렸다. 김씨가 눈을 감고 상상했다. 이 손가락을 당기며 앞에 있는 사람은 죽겠지. 검지를 천천히 움직였다. 틱하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김씨가 눈을 뜨고 총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칼집을 꺼내 들었다. 군용으로 만들어진 칼은 아직도 날이 죽지 않았다. 시퍼렇게 서 있는 날을 보니 소름이 끼쳤다. 살짝이라도 스치면 피가 나올 것 같았다. 한 손으로 칼을 쥐고는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다행히 그리 무겁지 않고 손에 익었다. 김씨가 허벅지와 뒷허리에 칼집과 총집을 차보고는 거울로 다가갔다. 한 바퀴 크게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그렇다하더라도 총은 티가 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거야? 응? 여동생 생각도 해야지.”

이씨의 말이 맞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김씨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환점이 필요했다. 기다리기만 해서는 끝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김씨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행동과 결과였다.

‘그래. 어쩔 수 없어.’

김씨가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있던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버렸다. 어두운 그림자가 김씨의 얼굴을 타고 올라왔다.

글 이어보기

매하梅夏 매일 그리고 하루

가끔은 노력하지 않을 노력을

늘 새해 첫날이 되면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올해 이루고 싶은 목표 12개를 정했다. 매달 1개의 목표. 

그렇게 그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매달 매주 매일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했다. 그리고 매달 말일에 또 1년의 중간인 7월 초쯤에 그리고 그 해 마지막인 12월에 이 것을 이루었는지 점검을 했다. 

 

일을 하면서 아침에 회사 출근 전 영어학원에 가서 영어공부를 했고, 

퇴근 후엔 포토샵 일러스트 같은 일에 도움이 될만한 강의를 들었다. 

그러고 집에 오면 녹초가 돼버렸다.

 

나는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아 조바심을 냈다. 

늘 불안해 내 몸을 축내가면서 무언가를 배우거나 하고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힘들고 빡빡한 일정을 끝내고 나면 밤에 잠이라도 잘 자야 하는데 

 

'지금 하는 일이 내게 맞는 일일까? 다들 열심히 사는데 나만 너무 나태한 건 아닐까?'

'하루하루가 지쳐. 사실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

'돈도 없고, 집도 없고 그런데 빚은 많고. 내가 원하는 건 없고 원치 않은 건 많아.' 

'누구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소연해봤자 나만 힘들어질 거야.'

'왜 맨날 내 연애와 인간관계는 이런 거지?'

 

"나의 하루가 늘 불안해."  

 

매일 잠들기 전 하는 온갖 생각들 때문에 나는 누운 뒤 한두 시간이 지나서야 만 잠이 들었다. 

잡생각들은 머릿속에서 연결되고 계속 피어올라 머리를 복잡하게 흔들었다.

 

그 때문에 나의 아침은 늘 엉망진창이었다. 여러 알람이 차례대로 울리면 마지막 알람을 끄고는 무거운 머리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깨워 화장실에 갔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면 회사에서는 너무 피곤해 일이 능률이 떨어졌고, 실수 연발이었다. 배우고 있는 것에도 그다지 집중을 하지 못하고 매번 시작만 하고 잘 마무리를 못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또다시 내가 왜 그랬지부터 시작해 회사에서 제대로 처리 못한 바보 같은 일들을 질책했다. 

 

생각 과잉이었다. 

너무 많이 생각했고, 너무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불안감에 너무 많은 것들을 한 번에 시도했다.

 

"그때 그 말을 하지 말걸. 그렇게 행동하지 말걸. 그랬다면 지금 더 좋았을 텐데."라는 식으로 과거를 자책하고 후회했다. 때로는 "난 해도 안될 거야. 그냥 이대로 놔버릴래. 해봤자 뭐가 변하겠어."라는 식으로 미래를 비관했다. 그리곤 그 불안한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배움에 몰입했지만 즐거워서 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남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았다. 

 

나에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이 있어야 했고,노력하지 않을 노력이 필요했다. 

 

괜찮아, 인생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거니까 불안해해도 돼. 
가끔은 쫌 편하게 생각해봐.

 

나한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아, 누구나 그래,라고. 돈걱정 일 걱정 걱정이란 걱정을 모두 다 끌어안고 있어도 해결이 되진 않아,라고. 

 

배우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잠시 쉬기로 했다. 그랬더니 아침이 길어졌고, 잠을 더 많이 잘 수 있었다. 하루가 개운해졌고, 무언가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적어졌다. 그러고 나니 남은 시간에 친구들도 만나고, 책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새롭게 시작하게 된 회사 생활도 좀 더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아팠던 내 몸들이 점차 괜찮아지고 있다. 남은 시간에 운동을 시작했고, 그렇게 새해가 다가왔다. 

 

이번 새해는 그저 너무 많은 계획을 세우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나의 계획 이자면 계획이다. 

 

노력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노력도 때론 필요한 듯하다. 

지나간 일들에 후회 말고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감사하며 지내야지. 

 

글 이어보기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모이다_

새로운 것들로 채우는 삶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좋은 기억보다 아프고 슬펐던 기억들만

오래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

왜 그럴까?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들은 뇌에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딘가에 따로 기록해두지 않으면

사실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사라지기 보다는, 희미해진다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아프고 슬펐던 기억들은 그 순간,

충격적인 일을 맞이하기 때문에 큰 자극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통보로 인해 그 사랑이 끝나는 것 뿐이다.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사람은 이미 마음의 정리를 하면서

상대방을 만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보를 받은 사람은 어안이 벙벙하다.

왜 헤어지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니까 답답할 뿐이다.

아직 내 사랑은 끝나지 않았는데,

왜 상대방은 사랑이 끝난걸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순간적으로 뇌가 마비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별을 하고 한동안은 마음이 너무 아파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잘 못잔다.

SNS에 보면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 생긴 것 같은데,

너무 행복해 보이는데 나는 불행하다.

그래서 슬프고 화나고 아프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과의 이별은 희미해지고

마음도 안정을 찾아 잘 지내고 있다.

친구들은 소개팅을 해주고 얼른 새로운 사랑으로

마음을 치유하라고 등떠민다.

하지만, 아직은 그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내가 행복해질 때쯤,

그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이 꼭 온다.

그럴 때의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완전히 잊어준 것인데,

흔들린다면 아직도 그 사람을 향한

내 마음이 정리가 안 된 걸까?

혼란스러워진다.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일을 왜 생각하게 되는걸까?

이제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닌 걸 알면서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 사람과의 이별이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야 만족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등떠밀리면

후회와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눈물이 있는거겠지.

조금만 더 울고 이제 나쁜 기억들은 저 멀리로 던져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나쁜 기억은 빨리 지워버리는 것이 좋은거니까.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가기에도

우리들의 인생은 너무 아깝다.

그러니 안 좋았던 기억은 빨리 잊어버리고

남은 찌꺼기까지 모아서 쓰레기통으로 날려버리자.

 

다 비우고 나면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고 기억이니까.

글 이어보기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모이다_

새삼스레 감사한 일_

어렸을 때는 집이 포근하고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줄 몰랐었다.

어차피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내 방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내 방이 있고 그곳에서의 나의 사생활이 지켜진다는 것 또한

고마운 줄 모르고 당연하니까 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지난 날들이 문득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집이 있다는 것이, 내 방이 있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집이 없어

길거리를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자신의 방이 없어서 동생들과 혹은 부모님과

원룸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던 당연한 것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꿈의 일이라는 것도 알기 때문에

집이 있다는 것과 나의 공간이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감사하게 생각되었다.

 

사소한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마음도 생겼고,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부모님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니

앞으로 더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생겨난다.

 

밖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