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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정의

정의 JUSTICE

: 올바르고 공정한 도리

 

 

선은 악마저도 포용하고 받아 안는 것이지요. 허나 정의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오로지 악을 방벌함으로써 정의롭습니다.

                                                                                      -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中 이방원의 말

 

 

 

 

  인간이 선한가 악한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합의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가져야 하는 것은 아마도 ‘답’이 아니라 ‘입장’일 것이다. 모든 생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가지를 뻗어나가기 때문에, 스스로가 선한지 악한지를 가늠해보는 일, 그리하여 결국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종은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의견을 가지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만약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선과 악의 두 가지 선택지 중 자연스레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다면, 다른 답안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다른 답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인물을 접한 적이 있다. 3년 전 드라마 안에서 만난 그는, 다름 아닌 이방원이다.

 

 2015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제목 그대로 육룡(六龍)에 관한 이야기다다. 육룡이라는 단어는 세종(조선의 4대 임금)이 가사를 지은 <용비어천가>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는데, ‘해동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본디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 이자춘(환조)을 의미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성계와 이방원, 그리고 삼봉 정도전이이라는 실제 인물들과 함께 이방지, 무휼, 분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섞어 역사와 판타지를 함께 버무려 놓았다.

 

 그 중 이방원은 선과 악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거머쥔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통해 선과 악 그 어떤 쪽에도 답이 없음을 깨닫고 결국 자신만의 신념을 따른다.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과 생각을 믿고 따르는 일을 곧 ‘정의’라고 여기며 살아가게 된다.

 

 이방원의 첫 좌절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아버지 이성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올곧은 사람이라 믿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정치를 위해 한 발 물러서며 악(극중 이인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적인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어린 방원은 상처를 받고 실망한다. 이에 아버지와 함께 함주로 돌아가는 대신 개경에 남아 성균관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꿈 많은 방원이 성균관 안에서 바라본 세상은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었다. 세상에는 어그러진 일들이 너무도 많이 존재했고,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은 벌을 받지 않았다. 대신 선한 자들이 수치를 겪어야 했고, 그 수치스러움을 참지 못해 죽음에 몰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단발성의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거의 생활처럼 여겨지는 것 같았다. 어린 방원은 블랙홀처럼 크나큰 혼돈 속에 빨려 들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존경했던 스승(극중 홍인방)마저도 변절하고 말았다. 권력자(극중 길태미)와 사돈을 맺으며 그 또한 권력자로 올라선 것인데, 방원은 그런 스승의 모습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감과 분노, 그리고 환멸을 느꼈다. 비뚤어진 일은 곧 방원에게도 찾아오고야 만다. 몇몇 힘 있는 유생들(극중 길태미의 아들 길유 外)이 명나라에서 <맹자>를 금지했다는 까닭으로 <맹자>를 공부하는 유생들을 심하게 괴롭히고 있었고, 그 괴롭힘의 손길이 자연스레 방원에게까지 뻗어온 것이다. 이방원 역시 다른 유생들처럼 수치를 경험합니다. 그는 사내가 부끄러움을 껴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내 다른 동료 유생들처럼 수치를 경험했다 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은 제대로 된 길이 아니라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품고 삶을 연명한다는 것 역시 괴롭기 짝이 없는 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 또한 간파하고 있었다.

 

 결국 이방원이 택한 것은, 자신에게 수치를 떠안긴 일당들을 제 손으로 처단하는 일이었다. 그 처단은 가장 극단적인 벌, 죽음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악은 절대로 가기 싫은 길. 선은 악 앞에서도 그저 그 모든 것들을 품어내고 감내하는 길. 이 두 가지 갈래는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올바른 해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정의’를 택한다. 정의는 악을 용납하지 않으며 무조건 참아내지도 않는다. 대신 악을 방벌한다. 쉽게 말해 악을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이방원은 권력 앞에 갈대처럼 흔들리고 마는 인간에게는 선이 최선의 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악을 떳떳하게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신념과 정의라고, 그는 믿었다. 누군가의 악은 품어준다 하여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직 처절하게 심판받을 때 비로소 종적을 감추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신념에 기초한 정의관은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과 판단력이 곧은 방향으로 서지 않으면 자칫 위험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의 생각을 믿고 결심을 행동으로 치환할 수 있는 강단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요즘 우리 세대를 일컬어 ‘결정 장애 세대’라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가질 시간도 없이, 그저 쏟아져 내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생각, 목소리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 폭력과 광기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인물들이 언젠가부터 다양한 각도로 해석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현 시대에 없는 정의와 스스로에게 부족한 결단력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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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I

: 남이 아닌 자기 자신

 

 

나는 나의 편견을 아끼는 사람, 그 편견을 얻기까지 달려갔다 다치고 온 길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 김애란, <영원한 화자> 中

 

 

 

 

"나는 요즘 나를 공부하는 중이야."

 

자매처럼 지내는 언니가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나는 언니의 그 말이 새삼 반가웠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궁금해 하는 시간이 일상의 4할 정도는 차지하는 사람, 그게 나니까. 꼭 동지가 생긴 기분이었다.

 

아무리 수많은 관심사가 내 마음 언저리를 빙빙 돌며 구미를 당긴다 해도, 결국 내가 가장 오래도록 놓지 않고 줄을 당기며 살 최애는 바로 나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별별 복잡한 일들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도, 내가 내놓는 문장은 "그래서 나는 ~라고 생각해"로 끝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동료들과 함께 이태원으로 다녀온 워크샵에서 애니어그램이라는 걸 한 적이 있다. 제법 진지하게, 우리는 전문가를 초빙해 테스트를 하고, 시간을 들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성향을 분석했다. 그런 걸로 사람을 규정짓는 건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날 들은 것 중 크게 공감이 가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내용이 있다. 내 마음이 건강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감정이 각각 어떤 식으로 조합되어 수면 위로 드러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자아가 강하고 스스로를 너무 좋아하는 탓에 늘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의 '특별함'에 대해 떠올리며 사는 내가, 한없이 건강할 땐 모든 존재가 다 특별하다며 전 우주적 박애주의자로 거듭나지만, 심신이 어두울 땐 그 특별함의 스포트라이트를 오로지 나에게만 한정시키고 빛 바깥에 둔 타인을 한심하게 바라보기도 한다는 사실. 그걸 들키고 나서 한참 뺨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이내, 비밀이 새어나가고 나니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좁은 마음이 될 때마다 '내가 지금 건강하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면, 그런 감정에 휩싸인 나를 혐오하지 않고도 그 시기를 잘 흘려보낼 수 있으니까. 나의 그늘을 도려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으니까.

 

하여, 나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있으니까.

 

며칠 전 김애란 단편 <영원한 화자>를 읽었다.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나는 그 글이, 꼭 나 같아서 속으로 웃었다. 오늘도 주어에 밑줄을 긋는 나에게 명하노니, 부디 건강하자. 전부 사랑해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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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구두 Shoes

: 주로 가죽을 재료로 해 만든 서양식 신

 

 

구두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깃들어 있다. 밑창 아래에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저며들어 있고, 이 구두 안에는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대지의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 불가능한 대지의 거부가 떨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을 확보하기 위한 불평 없는 근심,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 세상에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한 조바심, 그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 느끼는 전율이다.

                                                                                                          - 하이데거, <예술작품의 근원> 中

 

 

 

 

작년 이맘때 쯤, 인터넷에서 한 남자의 구두가 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재인 대통령의 구두. 색이 제법 바래 있기도 하고 군데군데 접힌 부분도 있는지라 '참 열심히 신었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안쪽에 언뜻 보인 로고가 청각장애인들이 만든 수제화 브랜드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에 한바탕 파도가 다녀갔다.

 

그 남자의 구두를 보며 사람들이 열광한 까닭은 그것을 그저 단순히 가죽과 끈, 밑창으로 구성된 '신을 것'으로만 보아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그 남자의 흔적을 되짚어가며 이 사람이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의 구두를 통해 우리는 그가 삶 곳곳에 남긴 흔적들을 확인한다. 구두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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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사진 Photo

: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것

 

 

제주 여기저기를 다니며 그것을 사진으로 담아보려고 노력해보다가 지금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내 카메라가 고가가 아니기도 했지만 아무리 좋은 카메라를 가져도 절경을 사진 속으로 제대로 옮겨오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제주도에 내려와서 금방 깨달았다.

                                                                                              - 요조, <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 中

 

 

 

 

여행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다만 하루하루, 갈 수 있는 곳에 가서 그 안에 있는 작고 평범한 것들을 지켜보는 걸 좋아한다. 때때로 사진을 찍는다. 풍경을 앞에 두고는 인증샷보다 풀, 꽃, 흙, 물 그대로를 담는다. 그렇게 찍힌 사진 속에 내 얼굴은 없지만, 기록 장치에 저장되기 전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가장 먼저 사진을 확인한 게 나니까. 그 정도로 충분하다. 잘 찍힌 사진을 확인하며 그 때 그 순간, 그 장소, 그 대상에 대한 나의 애정을 확인하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전부를 옮겨올 수는 없지만, 사람에게 사진은 기억을 소환하는 가장 좋은 매개체가 되어주기에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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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평화 Peace

: 갈등 없이 평온하고 화목함

 

 

평화는 눈이 내리는 걸 지켜보는 거야. 평화는 누군가를 아프게 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평화는 네 자신의 모습 그대로인 거야.

                                                                                              - 토드 파, <평화 책(The Peace Book)> 中

 

 

 

 

포털 사이트에 평화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최상단에 연관검색어로 대한민국 대통령과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름이 함께 묶여 뜬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두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던 금단의 선. 그 모호하면서도 진하디 진한 선을 손잡고 넘나든 남과 북 두 정상의 몇 걸음이 평화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했나 보다.

 

사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것은 유일한 개인으로서 내 정체성을 확고히 해주는, 매우 유의미한 행위다. 내가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나누며 산다. 언제든 선을 그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

 

하지만 선을 긋는다는 것은 그 선 너머에 존재하는 누군가에 대해 알아가기를 멈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선을 거두는 순간 관심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시의時宜를 잃은 관념이 생긴다. 현재와 미래가 포함되지 않은 관념은 딱딱하게 굳어져 곧 편견이 된다. 무관심의 밭에서 자의적 기준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라난 편견은 이미 그어놓은 선 위로 더 진하고 더 강력한 선을 덧그린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선은 지우기가 힘들어진다. 선 위에서 경쟁과 갈등을 즐기지만, 반복되는 전쟁은 때때로 나를 지치게 한다.

 

평화는 바로 그 균열에서 싹을 틔운다. 하루하루 일어나는 싸움은 견딜 수 있지만, 삶 전체가 온통 갈등으로 범벅이 된다고 상상하면 두렵고, 외롭고, 암담해진다. 선을 긋고 나에 대해 골몰함으로써 내가 특별하다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인지했다면, 선을 지워도 그 사실은 변함없다는 것 역시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에게 애정과 확신을 가진 사람은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나 아닌 타인을 적으로 삼는 일 따위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리고 사실, 세상에 완벽하게 갈라져 있는 건 없다. 바다가 끝나는 곳을 땅이라 부르고, 땅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바다가 펼쳐진다. 평화의 실마리는 생각보다 원초적인 것에서 발견되곤 한다. 확실하고 단단한 내 바운더리를 벗어나 그동안 시선이 닿지 않았던 곳을 내다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떠도는 소문이 아닌, 나 자신을 믿고 미지의 것을 경험해보려는 용기.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땅 위에서 별다른 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언가 다른 게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력. 마지막으로 미지의 것을 마침내 발견했을 때, 눈에 비치는 그 대상을 다른 판단이 끼어들 새도 없이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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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하다

 

부정하다 否定--

: 어떤 것을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거나 옳지 않다고 반대하다

 

 

생은 자기완성을 위하여 자기부정을 하는 것이다.

                                                                                       - 함석헌, <함석헌 전집 2 : 인간혁명의 철학> 中

 

 

 

 

엄마의 건강에 빨간 불이 켜진 뒤부터 우리는 교환일기를 쓰고 있다. 중학생 때 친구와, 대학생 때 남자친구와 함께 써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도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어렵다. 과거 그들과의 일기가 긍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요즘 우리의 노트에는 반쯤 그늘이 져 있다. 우울감에 물든 엄마는 펜 끝에 대롱대롱 검은 잉크와 더 검은 생각을 매달고 지낸다. 과거에 대한 회한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만든다. 어제의 어둠은 오늘을 뛰어넘어 며칠, 몇 달, 몇 년까지 자기영역을 확대한다.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딸의 애정 어린 희망은 거센 자기 부정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엄마의 담장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의 끝에서 희망은 담장 너머를 엿본다. 검은 잉크는 언젠가 다 쓰기 마련이고, 그걸 다 쓰고 나면 새 것으로 갈아 끼울 수 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푸른 바다를 닮았거나 소나무 냄새가 나는 잉크를 넣어버릴 생각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긍정도 부정만큼이나 힘이 강하다는, 설익은 믿음 하나로 견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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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지금 Now

: 말하는 바로 이때

 

 

마치 내 안으로 여행이라도 떠난 듯이, 내 마음속 아득한 곳에 있는, 내가 지금 느끼는 단조로움과는 매우 다른, 오래된 시골집의 단조로움을 기억한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는지 아니었는지 말해야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서 살았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였다. 그 삶과 지금의 삶은 비교 불가능한 다른 삶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中

 

 

 

 

오래된 친구와 만날 때면 늘 듣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가 좋았어”라는 말.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연신 잔을 채우고 이리저리 신나게 부딪쳐도, 어쩐지 그 말은 뼛조각처럼 마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나를 찌른다. 왜 우리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그때’를 ‘좋았다’고 말하며 그리워하는 걸까. 영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그 말이 단순히 과거에 대한 자기긍정이 아니라 지금의 자기 자신을 반대편에 올려놓고 둘을 저울질하다 결국 지나간 시간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버리는 이상한 계산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5년 전, 1년 전, 그리고 오늘의 ‘그때’가 가리키는 시점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겹쳐지면서도 분리되어 있다. 어찌됐든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도 얼마 후면 ‘좋았던 그때’가 된다는 것이다. 이미 손에 쥐고 있어 언제나 가벼운 것처럼 여겨지는 지금을, 비교도 경쟁도 없이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