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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평화

 

평화 Peace

: 갈등 없이 평온하고 화목함

 

 

평화는 눈이 내리는 걸 지켜보는 거야. 평화는 누군가를 아프게 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평화는 네 자신의 모습 그대로인 거야.

                                                                                              - 토드 파, <평화 책(The Peace Book)> 中

 

 

 

 

포털 사이트에 평화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최상단에 연관검색어로 대한민국 대통령과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름이 함께 묶여 뜬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두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던 금단의 선. 그 모호하면서도 진하디 진한 선을 손잡고 넘나든 남과 북 두 정상의 몇 걸음이 평화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했나 보다.

 

사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것은 유일한 개인으로서 내 정체성을 확고히 해주는, 매우 유의미한 행위다. 내가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나누며 산다. 언제든 선을 그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나 자신이니까.

 

하지만 선을 긋는다는 것은 그 선 너머에 존재하는 누군가에 대해 알아가기를 멈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선을 거두는 순간 관심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시의時宜를 잃은 관념이 생긴다. 현재와 미래가 포함되지 않은 관념은 딱딱하게 굳어져 곧 편견이 된다. 무관심의 밭에서 자의적 기준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라난 편견은 이미 그어놓은 선 위로 더 진하고 더 강력한 선을 덧그린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선은 지우기가 힘들어진다. 선 위에서 경쟁과 갈등을 즐기지만, 반복되는 전쟁은 때때로 나를 지치게 한다.

 

평화는 바로 그 균열에서 싹을 틔운다. 하루하루 일어나는 싸움은 견딜 수 있지만, 삶 전체가 온통 갈등으로 범벅이 된다고 상상하면 두렵고, 외롭고, 암담해진다. 선을 긋고 나에 대해 골몰함으로써 내가 특별하다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인지했다면, 선을 지워도 그 사실은 변함없다는 것 역시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에게 애정과 확신을 가진 사람은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나 아닌 타인을 적으로 삼는 일 따위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리고 사실, 세상에 완벽하게 갈라져 있는 건 없다. 바다가 끝나는 곳을 땅이라 부르고, 땅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바다가 펼쳐진다. 평화의 실마리는 생각보다 원초적인 것에서 발견되곤 한다. 확실하고 단단한 내 바운더리를 벗어나 그동안 시선이 닿지 않았던 곳을 내다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떠도는 소문이 아닌, 나 자신을 믿고 미지의 것을 경험해보려는 용기.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땅 위에서 별다른 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언가 다른 게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력. 마지막으로 미지의 것을 마침내 발견했을 때, 눈에 비치는 그 대상을 다른 판단이 끼어들 새도 없이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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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사전

부정하다

 

부정하다 否定--

: 어떤 것을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거나 옳지 않다고 반대하다

 

 

생은 자기완성을 위하여 자기부정을 하는 것이다.

                                                                                       - 함석헌, <함석헌 전집 2 : 인간혁명의 철학> 中

 

 

 

 

엄마의 건강에 빨간 불이 켜진 뒤부터 우리는 교환일기를 쓰고 있다. 중학생 때 친구와, 대학생 때 남자친구와 함께 써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도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어렵다. 과거 그들과의 일기가 긍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요즘 우리의 노트에는 반쯤 그늘이 져 있다. 우울감에 물든 엄마는 펜 끝에 대롱대롱 검은 잉크와 더 검은 생각을 매달고 지낸다. 과거에 대한 회한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만든다. 어제의 어둠은 오늘을 뛰어넘어 며칠, 몇 달, 몇 년까지 자기영역을 확대한다.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딸의 애정 어린 희망은 거센 자기 부정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엄마의 담장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담장 너머를 엿본다. 검은 잉크는 언젠가 다 쓰기 마련이고, 그걸 다 쓰고 나면 새 것으로 갈아 끼울 수 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푸른 바다를 닮았거나 소나무 냄새가 나는 잉크를 넣어버릴 생각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긍정도 부정만큼이나 힘이 강하다는, 설익은 믿음 하나로 견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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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지금 Now

: 말하는 바로 이때

 

 

마치 내 안으로 여행이라도 떠난 듯이, 내 마음속 아득한 곳에 있는, 내가 지금 느끼는 단조로움과는 매우 다른, 오래된 시골집의 단조로움을 기억한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는지 아니었는지 말해야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기서 살았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였다. 그 삶과 지금의 삶은 비교 불가능한 다른 삶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中

 

 

 

 

오래된 친구와 만날 때면 늘 듣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가 좋았어”라는 말.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연신 잔을 채우고 이리저리 신나게 부딪쳐도, 어쩐지 그 말은 뼛조각처럼 마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나를 찌른다. 왜 우리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그때’를 ‘좋았다’고 말하며 그리워하는 걸까. 영 마음이 불편한 까닭은, 그 말이 단순히 과거에 대한 자기긍정이 아니라 지금의 자기 자신을 반대편에 올려놓고 둘을 저울질하다 결국 지나간 시간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버리는 이상한 계산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5년 전, 1년 전, 그리고 오늘의 ‘그때’가 가리키는 시점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겹쳐지면서도 분리되어 있다. 어찌됐든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도 얼마 후면 ‘좋았던 그때’가 된다는 것이다. 이미 손에 쥐고 있어 언제나 가벼운 것처럼 여겨지는 지금을, 비교도 경쟁도 없이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