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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봄이라기에는 덥고 여름이라기에는 모호한 날씨다. 오랜만에 같이 저녁이나 먹자는 메시지에 태연스레 답장을 보내고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가던 걸음을 시외버스 터미널로 바꾸는 맘이 설렌다. 그저 잠깐 보는 건데도 이리 기다려진다. 당신은 알까? 이런 내 마음을,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그리 북적이지도 한산하지도 않은 터미널에 도착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대략 10분 정도, 시원한 음료수라도 사려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건강을 챙기는 당신에게 커피보다는 차가 좋을 테다. 똑같은 시원한 음료 두 개를 사서 대합실 의자에 앉았다.

 

‘아직도 꽤 남았네.’

 

꽤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지만 당신을 기다리는 나에게는 참기 힘들 만큼 긴 시간이다. 순간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연락하면서, 막상 약속을 잡고 기다리는 시간은 왜 이리도 초조한지 모르겠다. 시계를 보다가 목을 쭉- 빼고 들어오는 버스 확인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어. 왔다!”

 

나도 모르게 반갑게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출구로 나오는 당신을 발견하고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내가 건네는 음료수를 받으며 씩- 웃는 당신이 너무도 좋다. 그 시원한 미소에 반했는데 매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서 있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참 무심하게도 말한다.

 

“뭘 그리 빤히 봐? 그렇게 보고 싶었어?”

 

“어. 무진장 보고 싶었어.”

 

당신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장난스레 웃는다. 내 말이 진심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짜식!”

 

“아. 머리 헝클어져!”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며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들킬까, 불편해 할까, 내 마음을 숨겼다. 당신은 그저 픽- 웃고는 내가 준 음료수를 따서 한모금 넘긴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

 

걸음을 떼며 문득 새로 생긴 식당이 떠올랐다. 얼마 전 친구와 갔을 때 잔잔한 분위기에 맛도 제법 괜찮았었다. 그 녀석은 여친하고 올 거라며 자랑을 했지만, 난 당신하고 가보고 싶다.

 

“시내에 새로 생긴 식당이 있는데...”

 

내 말에 당신은 미안한 눈치로 말을 꺼낸다.

 

“근처에서 먹자. 나 금방 다시 가야돼서, 미안하다.”

 

“아냐. 할 수 없지 뭐.”

 

정말 잠깐 들린 모양이다. 한창 바쁜 시기라고 하더니 괜히 내가 피곤하게 하는 게 아닌가 신경이 쓰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터미널을 나와 근처에 자주 가던 식당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면서 중요한 건 메뉴가 아니라고, 같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며 되뇌었다.

 

“많이 바쁜가봐?”

 

“응. 월말이기도 하고, 곧 여름이니까. 넌, 하고 있는 일은 괜찮고?”

 

“뭐. 나야 항상 괜찮지.”

 

서로의 일상에서 있었던 평범한 대화가 오고 간다. 하지만 그 평범한 대화가 나에게는 한동안의 버팀목이 될 것이다. 당신이 없는 일상에서 당신이 보내는 일상을 상상하며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진통제 말이다.

 

 

* * *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나고 다시 터미널이다. 표를 끊고 편의점에서 산 캔 커피를 손에 하나씩 들고 나란히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1시간 전에는 버스가 오기를 그렇게 기다렸는데 지금은 버스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버스가 오면 당신은 떠날 테니 말이다.

 

“밥 잘 챙겨먹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내가 애도 아니고, 별 걱정을 다해.”

 

투덜거리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내 어깨를 당겨 안으며 또 머리를 흩뜨린다. 그때 버스가 들어오고 당신은 내 어깨를 두어번 다독이더니 버스로 걸어간다. 난 그 등에 대고 애써 담담하게 말한다.

 

“조심해서 가.”

 

슬쩍 돌아보며 웃는 그 얼굴을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싶다. 승객을 태운 버스의 문이 닫히고 창가에 앉아 있는 당신을 한 번 더 바라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고 당신은 또 씩- 웃는다. 마주 웃고 있지만 가슴 한구석은 짠하다. 버스가 떠나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하아.”

 

참 허전하다. 내일이 되면 또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갈 걸 알면서도, 이 한순간의 허전함은 정말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니. 2년 전 당신이 이직(移職)하고 한동안 그리움과 외로움에 허덕이다, 일상 속에 희석된 허전함이, 당신이 왔다가는 그 순간 다시 떠오르는 걸 테다.

 

희끄무레하게 어두운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뗐다. 한 손을 들어 괜히 머리를 매만진다. 이제 애도 아닌데 난 당신에게는 언제나 그저 이웃집 동생일 뿐이겠지. 괜히 서글프다. 어쩌다 말도 못할 사람한테 반해서 이러는 걸까? 멋대로 반해버린 내 자신이 밉다.

 

* * *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다가 문득 네가 한 대답이 떠오른다.

 

- 어. 무진장 보고 싶었어. -

 

보고 싶으면 놀러오면 될 텐데 왜 한 번도 오지 않을까 싶다. 설마 내가 곤란할 까봐 그러나 싶다가도 내가 곤란할 이유가 있나 싶은 의문이 든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다. 겉보기와 달리 넌 참 여리고 예민했다. 그걸 처음 알게 된 게 3년 전이다.

 

무더운 한여름,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신문을 가지러 현관문을 열었다가 코를 찌르는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이웃집 문 앞에 아침마다 배달되는 우유가 쌓여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휴가라도 간 건가 싶었다. 신문만 집어서 얼른 문을 닫으려는데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조심스레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안에서 낑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나 고양이가 내는 소리였다. 설마 집안에 반려 동물을 방치하고 며칠이나 집을 비운건가 싶었다. 참으로 무심한 인간이라고 속으로 혀를 차며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문 앞으로 다가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역시 사람은 없는 건가?’

 

망설이다 무심결에 돌린 문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순간 멈칫하다가 문틈으로 빠져나온 작은 주둥이에 한숨을 쉬었다. 그대로 쭈그려 앉은 내 시야에 방안에 쓰러져 있는 남학생이 보였다. 사람이 없는 게 아니었다. 작은 강아지는 내 옷소매를 있는 힘껏 물고 잡아당겼다.

 

방안에 들어가서 살핀 너의 상태는 심한 탈진이었다. 응급실에서 정신을 차린 넌 실연이라고 말했다. 몇 년이나 짝사랑한 사람에게 실연당했다고 말이다. 그래서 몇날 며칠을 정신없이 울었다고 말이다. 그러는 네 모습이 참 가엽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직 어리구나 싶기도 했다.

 

- 쿡.

 

‘네가 안 오면 내가 보러 오면 되니까.’

 

어두운 차창에 가느다란 빗줄기가 스쳤다. 네가 이미 집에 도착했기를, 비를 맞고 있지 않기를 바라며 잠시 눈을 붙였다. 가녀린 빗소리가 부드럽게 귓가를 맴돈다. 그에 아직도 어리고 여린 네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