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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사랑한다는 헛소리

 

 

 

 

  사랑해

 

  그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하던 행동을 모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사물에 대한 명칭을 알아가는 아이도, 마음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가는 소년·소녀도, 군데군데 미세먼지보다 더 강력한 잡음이 끼어든 인생을 어떻게든 사랑해보려는 청년도, 안녕하세요? 보다 건강하시죠? 라는 인사가 더 익숙해진, 지긋한 나이의 어른들도 모두 좋아하는 말. 그렇지만 손만 뻗으면 닿아 까먹을 수 있는 귤처럼 여기고 싶지는 않은 그 말.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그래서 나는 그가 왜 뜬금없이 그런 말을 갑자기 해버린 건지 궁금했고, 그 이유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다 그만 그 사람을 내 인생에서 스쳐지나가는 이로 만들어버렸다. 사랑의 말에 이유를 묻는 순간, 진심은 헛소리가 되었다.

 

 

  사랑해

 

  얼마 뒤, 나는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그 말과 또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조우했다. 작년부터 엄마는 간헐적으로 헛소리를 내뱉었다. 처음 그녀의 그런 모습을 알아챈 건 다름 아닌 나였는데, 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한 두 번의 이상 반응인 걸로 넘겨버렸다. 그러나 그 헛소리는 조금씩 느슨하게 엄마라는 존재 안에서 영역을 넓혔고, 시간이 지나며 그녀를 원래의 엄마 반, 낯선 엄마 반이 함께 공존하는 다면적 인간으로 만들었다. 엄마는 예전에 자신이 재미도 보람도 없는 삶을 산 것 같다면 자주 자책했는데, 그래서 나는 그녀가 피안彼岸을 끌어들여 인생에 즐거움의 빛을 드리운 게 아닐까 종종 생각하기도 했다. 여하튼 갑작스런 그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건 엄마의 입을 통해서였다. 저 말을 한 건 낮의 엄마일까 아니면 밤의 엄마일까, 내가 서서 고민하는 중에 그녀는 내 눈을 곧이 바라보며 아무런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내가 해야 하는 건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더 이상 아득해지기 전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웃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사랑한다는 말을 머리맡에 두고 떠나보내지 않는 일, 스쳐지나가지 않도록 잡아두는 일, 그녀에게 나는 기적을 행할 수 없지만 나에게 그녀는, 엄마라는 사람은 여전히 기적이라는 사실을 저버리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은 낮의 엄마가 보내는 진심의 신호든 밤의 엄마가 토해낸 헛소리든, 나는 전혀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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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The Color of Love

 

 

 

 

“이렇게 계속 공연을 하고 연말도 같이 보내고. 연말에 같이 보내면 연초도 같이 보내니까, 그렇게 지내면서 같이 살길 바라는...”

 

늦은 밤,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왕십리 극장을 찾은 멤버 J가 꺼낸 말이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같이 지내고. 그렇게 같이 살고.

 

요즘 그 사람들이 내 일상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던 참이었다. 우리가 만나는 그 몇 시간, 때로는 몇 분, 몇 초가 될 수도 있는 그 짧은 순간에만 반짝 생각나는 게 아니라,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나의 어떤 시공간 안에서도 드문드문, 이 사람들이 내 삶에 큰 힘을 주고 있구나 싶을 때가 많다. J의 말처럼 함께 지내고 있다는 기분, 같이 산다는 느낌을 나는 이미 만끽하고 있는 듯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재작년, 이별 후 16년 만에 돌아와 2018년, 18년 만에 정규 앨범을 발매한 그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었다.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마지막 프로젝트. 지난 1월 특별시사회에서 멤버들은 20주년이 참 금방 지나간 것 같다고 말했다.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동시에 다섯 명의 눈빛에는 우리가 참 많은 것들을 함께 해나갔다는 자부심도 서려 있었다. 그리고 21주년을 맞이한 새해 역시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서로에 대한 믿음도 느낄 수 있었다.

 

실 관람은 벌써 8번째. 참 신기한 게, 영화를 볼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장면도 다르고 느끼는 감정도 미묘하게 다르다. 오늘은 정해진 상영 기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걸 체감해서인지, 그래서 혹시 이제 이 사랑스런 영화를 못 보게 되면 어떡하나 싶어서 그랬는지, 여하튼 이상하게 눈물이 많이 났다. 스킵하거나 쉬어가는 트랙이 하나도 없을 만큼 훌륭한 정규앨범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한 편의 서사로 담아낸 20주년 콘서트를 커다란 무대에서 치를 수 있었던 것도 다 너희 덕분이라며, 매 순간의 공을 우리에게 토스하는 그들이 참 고마웠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볼 때면 한없이 순수한 눈빛이 되는 그들과 나의 모습이 좋았다. 우리의 이야기가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도 자랑스러웠다. 진심으로, 내가 그들의 팬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고 또 행복했다.

 

점심시간과 그 외 여유시간을 몽땅 빼내 영화를 보고 곧바로 회사로 뛰어 들어가는 길. 내 눈은 쉴 새 없이 상영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머리는 내가 예매할 수 있는 회차가 얼마나 남아있나 계산하기에 바빴다.

 

팬의 하루는 누구보다 빠르고 치열하게 돌아간다. 해야 할 일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넘치기 때문이다. 나름 떳떳한 팬이 되고 싶다는 욕심에, 현업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꽤나 애를 쓰다 보니 더더욱 정신이 없다. 시간을 쪼개고 관심을 쪼개며 할 일을 조금씩 처리해나가다 보면 벌써 밤이고 새벽이다.

 

덕질을 다시 시작하고 난 뒤 몸과 마음에 피로가 이끼처럼 덕지덕지 끼어있는 게 사실이지만, 누적된 수고로움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나는 지난 1년 간 그 이유가 뭘까 골몰했다. 그리고 결국 찾아낸 답은 이거다. 어릴 때 가장 한스러웠던 건, 내게는 뭔가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속한 시스템 안에서 무언가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걸 느끼면서도 방 안에서 혼자 씩씩대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잠들 수밖에 없는 어린애였고, 심지어 그들의 마지막 무대를 지켜보면서도 엉엉 우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꼬꼬마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내가 집중하고 노력을 기울이면 조금이나마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들이 허다하다. 작게는 어떤 분야의 순위, 조금 더 크게는 수상여부나 상의 명칭이 바뀐다. 불합리한 일들에는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 가수 혹은 내가 속한 팬덤에 따라붙는 수식어도 변한다. 요즘의 덕질은 가수와 팬이 함께 어떤 연작(聯作)을 만들어가는 작품활동 같다. 그만큼 팬이 할 수 있는 것, 바꿀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래서 더더욱 책임감이 생긴다. 내가 팬이기 때문에.

 

사무실에 돌아와 회의를 하고 업무에 집중하다 문득 시계를 보니 4시 15분, 나는 극장에 전화를 걸어 영화의 종영일이 결정되어 있는지, 영화 편성은 어떤 기준에 따르는지에 대해 문의했다. 약간의 어필과 부탁도 실어 보냈다. 하루라도 더 이 영화가 극장에 걸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며.

 

우리는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가게 될까. 미래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지만, 아마 어려운 일이 생겨도 다시 또 손잡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전보다 덜 화려할 수도 있고, 더 험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곁에 있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앞에 있는 상대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본다면, 우린 우리만의 색으로 또 다른 계절을 그리며 함께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당신들의 걸음이 빠르든 느리든, 보폭을 맞춰 걷는 것이 내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같이 울 준비가 되어 있고 함께 웃을 마음이 갖추어져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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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한, 밤의 기록

남 같지 않은, 사사로운 감정이 얽힌 관계, 친구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이 사람과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지금은 너무 우습다. 그때의 너와 나는 프레임 속에서 참 어색하고 낯간지러웠다. 

 

눈떠보니 어느새 4개월 차가 넘었던 회사 생활. 우리 팀에 신입이 들어왔다. 이력서를 봐도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우리 팀에서 유일한 여자였던 나에게 굳이 차 문까지 닫아줬다. 넌 예의가 몸에 배어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더 꼴사나웠을까. 참 유별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지능 못지않게 각잡힌 생활과 웃음기 없던 너의 표정. 너의 포커페이스로 제나이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1년이 지나도 어색함이 감돌았다. 동료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니었다. 동갑내기였지만 다른 또래 직원들보다 너와 친해지는 시간은 오래 걸렸다. 지금와서 들은 말이지만 그때 넌 이미 우리가 친했다고 생각했단다. 당시, 일할 땐 편했지만 둘이 남겨지면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어색한 빈틈이 싫어 할말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다 단둘이 외근을 가고 식사를 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팀장에 대한 너의 생각을 처음 들었다. 너도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너도 '같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또래 직원들과 우린 거의 매일 술 한잔, 그 이상을 기울이며 닭발, 곱창, 회사를 맛보고 즐기고 뜯었다. 

 

적립식 통장보다 더 빠르게 쌓여가는 스트레스에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 날 너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친구"

일할 땐 우연이라도 손끝이 닿을까봐 거리를 두고 격을 차렸다. 그런 우리가 동료를 끝내고 친구가 되었다. 친구가 되니  동료 때보다 트러블은 더 많았다. 너는 스스럼없이 장난을 참 많이 쳤고 난 참 잘도 속았다. 화가 나 눈물이 나던 날도 있었다. 화해의 악수는 몇 번이나 했던지, 널 몇 번이나 때렸는지 이제 기억도 안 난다. 그만큼 추억이 쌓여갔다. 그때쯤 나는 약간 우리의 관계에 혼동이 왔다. 친구나 되자고 시작한 관계에서 연인으로 질릴 만큼 만나 끝낸 관계가 몇 번 있었다. 그래서 예전엔 서로 다른 염색체 사이에 친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주변에서도 뻔한 멘트가 들렸다. 

"너희 둘이 그냥 사귀어. 언제 사귀니?" 

너와 나는 자연스러운 재치로 흘려넘기고 언제나 친구 관계를 운운했다. 그런데도 너는 매너와 장난이 적당히 양념된  행동으로 날 헷갈리게 했다. 여중, 여고를 나와 쉽게 선을 넘지 않는 나에겐 낯설었다. 여사친도 적지 않게 있는 너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들과 다 함께 가까운 근교로 여행을 떠났다. 아직은 어색한 반말을 편한 척 주고받았다. 새벽녘, 동료들에게 별을 보러 가자고 졸랐다. 달을 보는 걸 좋아하던 너는 별을 보고 오랜만에 천진한 웃음을 보였다. 술기운도 있었는지 넌 잘 하지 않던 말도 했다.

"별 진짜 많다. 별 따줄까?"  

손발이 사라지는 말에 난 귀를 씻어냈다. 돗자리를 아스팔트 바닥에 깔고 추위와 별을 안주로 소주 한 잔씩 기울였다. 소주병 아래에 핸드폰 빛을 조명삼아 불을 밝혔다. 라섹으로 눈부심에 약해진 터라 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너는 손으로 내 눈을 가려주었다. 그러던 와중 동료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평소 아니라고 한 사람도 잘 맞는다면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누가 봐도 우리에게 한 말이었다.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그땐 한번 쯤 이런 친구를 만나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무수한 연상의 사랑에 지친 참이었고, 매섭게 겨울바람이 다가오던 시절이었다. 

 

네가 우연히 던진 말에는 시가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 우리의 화살은 서로를 조금씩 빗나갔다. 그럴수록 난 점점 막역해지는 이 관계가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 날의 만남이 내 과거의 생각을 일깨웠다. 친구나 되자고 서로의 친구들을 소개했다. 사실, 처음의 목적은 나의 모태쏠로 친구 B의 솔로 탈출을 위해서였다. 그 친구가 소개팅은 어색하다며 다 같이 밥이나 먹자고 제안했다. 그 모임이 반복되면서 우린 친해졌고 넌 내 친구 A에게 관심을 가졌다. 나에게도 썸인듯 아닌듯한 친구가 생겼다. 그런데도 너와 친구 A의 관계에 더 신경이 쓰였다. 둘 다 나에게 가장 최측근이었다. 너는 버릇처럼 여자친구가 생기면 너와 연락을 자주 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네가 같은 염색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민을 애초부터 하지 않도록. 그래서 난 둘은 절대 안 된다고, 다 같이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쯤 나의 썸남과 미묘하게 감정이 틀어지고 있었다. 잘 돼 가는 너와 친구 A를 보며 생긴 열등감도 없지 않았다. 이런 대화가 반복되자 너는 나를 푹 찔렀다.

"너 나 좋아했어? 이제 나 좀 풀어줘." 

 

내가 구속했는지 부터 먼저 생각했다. 평소 우린 장난처럼 주인과 강아지와 같은 역할놀이를 했다. 절대 변태적 성향은 아니다. 넌 내 앞에서 포커페이스를 풀고 모든 감정을 다 드러냈다. 스스로 널 비글이라고 칭했다. 우린 갑자기 만나 끌리는 데로 먹고, 보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내 마음대로 굴어도 너는 다 받아줬다. 그러던 와중 그 말을 들으니 사고가 정지했다. '내가 너를 좋아했던가?' 나마져도 나에게 의심이 들었다. 난 내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니 너와 다니는 일에 즐거웠다고 답했다. 사랑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싫은 게 내 마음이야."

 

이어서, "내가 당긴다고 올 것도 아니잖아."고 답했다. 너는 막역한 친구가 될수록 다른 관계로 발전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는 백번 맞는 말만 했다. 그리고, 내 친구 역시 우리의 시간들을 알기에 너와 관계발전에 망설였다. 너와 친구, 사이에 낀 나, 갈등은 깊어졌다. 난 너무 이기적이라 불편한 감정이 싫었다. 너와 내 친구가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기를 빌었다. 결국 너와 내 친구의 이야기는 시작되지 못했다. 

"안된다고 한 건데 내가 괜한 짓 했지. 안 만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너의 모진 말에 난 면목이 없었다. 며칠 동안 연락을 안 하고 있었다. 넌 아무렇지 않게 먼저 다가왔다. 평소처럼. 

 

회사 다닐 때부터 네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믿고 따르던 사수가 건강상의 문제로 그만뒀고 난 혼자 남았다. 사수가 그만두자 무능력한 사람이 팀장이 되었다. 난 팀장의 몫까지 하느라 지쳐갔다. 그럴 때마다 너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었다. 원래는 직무가 달라 외근 때 말고는 도움받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넌 내 일거리를 차곡차곡 정리해주면서 언제나 뒤에 있었다. 늘어가는 나의 투정도 꾸준히 들어주었다. 사회에 나오고 다닌 첫 회사였다. 사회경험이 많던 넌 큰 힘이 되었다. 간과 쓸개를 빼도 회사를 나오면 역적이 되는 세상이다. 그동안의 고생이 무색하게 쫓겨나듯 나온 회사에 후폭풍이 더욱 심했다. 그럴 때마다 넌 내 자존감을 올려줬다. 너의 과거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넌  '네가 최고다, 예쁘다, 넌 어디 가든 잘할 거야'라고 툭툭 던지듯 말했다. 너도 나에게 너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쭙잖은 나의 위로에도 고마워했다. 

"1년 동안 이 회사에서 뭘 했나 싶어도 널 만나서 다행이야. 네가 좋은가 봐 친구로서."

매일 티격태격해도 너의 그 말에 고마웠다. 그래서 너와 친구 A의 일에 더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시 둘이 연락할까 봐 난 아직도 걱정한다. 정말 난 못돼빠졌다. 

 

이젠 정말 편한 사이가 되었다. 너와 같은 소파에 다리를 엉켜 누워도 아무렇지 않다. 주변의 부추김에 혹시라도 너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좋은 친구를 잃기는 싫다. 그래서 더욱 너의 연애가 늦춰졌으면 한다. 못된 심보다. 이 사사로운 감정이 얽힌 복잡한 관계가 가끔은 지친다. 이제는 너를 내 욕심으로부터 놓으려고 이 글을 쓴다. 넌 최근에 이런 말을 했다. 
"평생은 없어. 우리 관계도 평생 가지는 않을 거야. 죽어서라도."

평생이란 단어는 참 무모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금 여유가 생긴 이 시간에 감사하며 살 것이다. 우리가 평생은 아니더라도 좋은 친구로 오래 남고 싶다. 너도나도 언젠가 좋은 사람 만나겠지. 최근 꿈에서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너를 봤고 너는 나에게 그를 소개했다. 내가 버릇처럼 "내가 모르는 사람과 만나"라고 한 말이 이뤄져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이기적이다. 그래도 참 잘 어울렸다.  

 

모든 일에 끙끙대며 안절부절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친오빠는 '미움받을 용기'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책에선 '난 단점 투성이 이야'고 생각한다면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만든 것이라 한다. 나 역시 나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내가 이기적이기에 우정이란 이름으로 너에게 모질게 굴어도 괜찮다고. 어쩌면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이 스쳐 갔거나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관계를 깨기 싫어 나를 속이는 걸지도 모른다. 저 드라마 속 뻔한 남사친, 여사친처럼. 

 

인생이 뻔하지 않아서 '기대, 미래, 예측불허' 와 같은 단어가 생기지 않을까? 지금은 우리의 관계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너의 존재를 소중히 하며 너의 아픔을 더 달래주고 싶다. 내가 위로받은 시간만큼, 내가 가진 미안함만큼 너에게 보답하고 싶다. 아주 명확하면서도 아직 애매모호한 관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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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집

<겨울 안부>

 

안녕. 잘 지내니?

이르게 찾아온 겨울의 온도가 마치 재작년의 늦겨울 같아 네 생각이 났어.

그러다 너와 진지한 고민을 쏟아내던 때가 아득하게 느껴지길래 편지지를 꺼냈다.

잘 지내는 거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자꾸만 묻고 싶어.

나는 사랑하던 사람과 마침표를 찍고 겨울을 맞았어. 물론 사랑하고 있었다면 헤어지지 않았을 테니,

사랑하지 않아가던 사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 후로도 잔잔히 일상을 살아가곤 있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때까지 몇 번의 쓸쓸한 연애를 하고 나니,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된 것 같아.

 

기억나니? 우리 몇 년 전에 같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웠었잖아. 분명 똑같은 방법을 배웠는데도

너와 내 모습은 퍽 달랐었지. 나는 여기저기에서 더 쉽고 빠르게 하는 방법을 찾아 요령을 피웠지만

너는 거북이처럼 하나하나 느리고 정직하게 해나가더라. 미안하지만 사실 그런 너를 보며 답답하다고 생각했었어.

더 쉬운 방법으로, 더 멋진 결과물을 만든 내가, 너보다 더 세상을 잘 살아가겠구나라고, 감히 잘난체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너는 요즘도 그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더구나. 나는 있지, 그 프로그램을 다루는 법이 생각나지 않아. 요령만 잔뜩 부렸던 손가락이 부끄럽게 자판 위를 헤매고 있어.

 

이젠 너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지?

그래. 어쩌면 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우듯 사랑하는 법을 배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다 꺼내 보여주던 내 모습이 상처였던 그때부터 더 이상은 어설프게 헤메고, 허둥대고 싶지 않아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요령을 피운 거지. 나는 그저 사랑을 잘하고 싶었어. 다가가고 물러설 적당한 거리를 알고 있는, 더 쉽게 사랑하면서도 손해 보지 않고 이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인지 요즘 느릿한 정직함을 가진 네가 많이 생각나.

너라면 사랑도, 아니 사랑은 더욱, 헤매고 부딪히면서 구석까지 꼼꼼히 채워나가고 있을 거라 믿기에.

그런 너를 떠올리며 나도, 마치 처음부터 다시 사랑하는 사람처럼,

성실하게 내 마음에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는 중이야.

 

그립다. 네가 많이 보고 싶어. 예전 너와 나누었던 고민이 생생히 기억나는 건,

볼에 홍조가 필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 마음이 여전히 반짝이기 때문이겠지.

모처럼 네게 편지를 쓰는 내 볼도 물들어 있어서, 꼭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써보내는 기분이 든다.

오랜 시간 보지 못했어도, 문득 붉게 생각나 주어서 고맙고,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담아 편지 보낼 수 있는 사람이어 주어서 고맙다.

어디서든 우리는 가까이에 있어. 잘 지내다 어느 겨울날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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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제 1장 -01. 만남-

악마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제 1장 -01. 만남-

 

 

댕댕댕

 

 

축복을 울리는 종소리.

 

 

“ 기집애! 돈 많은 남편감 잡아서 좋겠다! ”

 

 

“ 워후! 아리따운 색시 얻어서 기분 좋겠네요, 이사님! ”

 

 

사람들의 환호와 따뜻한 미소 속에

나와 그이의 결혼식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 순간을 매번 기다려왔어.

 

아.. 이 얼마나 벅찬 행복감인가..

 

드디어 내가 그이 것이 되고 그이가 내 것이 되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린 드디어 공식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인정받는 ‘부부’가 된 거야..!

 

 

행복해질게요.

 

꼭..

 

 

하지만..

 

 

“ 여보.. 오늘 혜림이 유치원 재롱잔치 날이에요.. 오실 수 있어요? ”

 

“ 회사일이 바쁜 건 너도 잘 알잖아. ”

 

 

결혼식 때 행복해 질 거란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 혜림이가 당신을 많이 보고 싶어 해요. 자기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많이 궁금해 하고요. ”

 

 

“ 내 얼굴이 궁금하다면 사진이라도 보여주던지. 어쨌든 오늘도 많이 바빠. 며칠 뒤엔 출장도 잡혀있으니 혜림인 네가 알아서 잘 달래줘. ”

 

 

“ 출장 다녀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출장이에요? 요즘 너무 일만 하는 거 아니에요? ”

 

 

“ 회사가 바쁘게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어. 다녀올게. ”

 

 

“ ... ”

 

 

 

쿵. 하고 굳게 닫힌 문.

터벅터벅하고 망설임조차 없는 걸음으로 앞만 보고 걸어가는 나의 남편.

 

이런 남편을 볼 때마다 남편과 나의 사이에 크고 굵은 벽 하나가 있는 기분이다.

보지도 만지지도 부수지도 못하는 큰 벽이..

 

 

‘ 내 얼굴이 궁금하다면 사진이라도 보여주던지. ’

 

 

 

“ ..당신 사진이 있어야 보여주던 말 던 할 거 아니에요.. ”

 

 

 

연애할 당시에도 나와 사진 한 장 찍은 적 없으면서 무슨 사진을 보여주라는 거예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고 틈만 나면 출장이고

회사가 아무리 바쁘다 해도 당신 딸에게 얼굴 한 번 비출 시간도 없는 거 에요?

 

애초에.. 당신 딸이라고 생각하긴 하나요..?

 

태어난 지 6년인 우리 딸 생일잔치에도 얼굴 한 번 비춘 적 없는 당신.

이럴 때 마다 헷갈리고 후회 돼요.

 

 

..왜 당신과 결혼 했는지.

 

 

나는 다시 열리지도 않을 문을 보여 두 손을 꼭 쥐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와 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생길 만큼 손을 꼭 쥐었다.

 

 

이 손을 풀면 참고 있는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거 같아..

 

 

 

“ 엄마... ”

 

 

 

양 손이 부들부들 거릴 정도로 쥐고 있었는데 무너질 번한 나의 마음을 다시 잡아주는 작고 여린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살며시 뒤를 돌아보면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이 귀여운 나의 딸이 서있다.

 

 

 

“ 혜림아? 왜 벌써 일어났어. 아직 유치원 가려면 2시간이나 남았는데. ”

 

 

“ 혜림이.. 아빠 보고 시퍼서 일찍 일어나써. 근데 아빠 어디써? 아빠 가써? ”

 

 

 

그래서 어젯밤에 일찍 자겠다고 들어간 거였구나..

 

 

 

“ 아빤 오늘도 많이 바쁘셔서 일찍 나갔어. 우리 혜림이.. 아빠보고 싶었구나? ”

 

 

“ 웅.. 어제 선생님이 엄마 아빠 얼굴 그림 그리는 거 내일 할 거 라구 했능데.. 아빠 얼굴 못 그려. 아빠 얼굴 몰라서.. 그래서 오늘 보려구 했능데.. ”

 

“ 혜림아.. ”

 

 

 

가여운 나의 딸..

 

 

 

“ ..엄마가 아빠 얼굴 꼭 보여줄게. 오늘 꼭.. ”

 

 

“ 정말? 정말루? 이제 혜림이 아빠 볼 수 있능 거야? ”

 

 

“ 그럼! 아빠 보면 무슨 말 하고 싶어? ”

 

 

“ 우움.. 이번에는 같이 놀러가자고 말하고 시퍼! ”

 

 

“ 그래? 어디로? ”

 

 

“ 어디든 조아! 혜림이 아빠 보면 꼭 놀러가자고 하꺼야! 도시락두 싸고 놀러가자고 꼭 하꺼야! ”

 

 

 

슬픔으로 가득 차있던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저 미소.

나는 손을 들어 혜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그래. 꼭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렴. 유치원 갈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준비하자. ”

 

 

“ 웅! ”

 

 

 

혜림이는 유치원에서 스스로 씻는 법을 배웠다며 화장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어쩜 저렇게 순수하고 착할까

 

저런 순수한 마음에 흠집이 나는 것이 싫어 난 오늘은 반드시 그이의 얼굴을 혜림이 에게 보여주고 말 것이라고 다짐했다.

 

..당신이 혜림이를 만나러 가지 않는 다면..

제가 직접 당신을 찾아가겠어요.

 

 

 

 

.

.

.

.

 

 

 

 

“ 혜림이 오늘 재롱 잔치 오후에 시작이니까 엄마가 시간 맞춰서 갈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있어. ”

 

 

“ 웅! 엄마 꼭 와! ”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오전 8시.

순수한 나의 천사가 유치원 버스에 올라탔다.

 

비가와 혹시나 버스가 가다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아이들의 안전벨트를 꼼꼼히 체크해주시는 선생님 덕분에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다.

 

 

 

“ 저 그러면 좀 이따 뵐게요. 선생님. ”

 

 

“ 네, 어머님! 이따 봬요. ”

 

 

 

나는 선생님과 짧은 인사를 끝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실과 방을 청소하고 옷을 챙겨 입고 차를 마시며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시간이 11시쯤 되자 집 앞으로 택시를 하나 불렀다.

 

어떻게든.. 10분 만이라도 아니, 5분 만이라도 그이가 혜림이 유치원에 잠깐이라도 다녀간다면.. 혜림이에게 얼굴을 보여준다면..

 

그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낼 일은 없겠지.

 

 

 

“ M회사로 가주세요. ”

 

 

“ 어이구, 그런 대기업 회사를.. 거기서 일 하슈? ”

 

 

“ 아.. 하하 잠깐 다녀올 일이 생겨서요. ”

 

 

 

명색의 대기업의 대표이사가 남편인 만큼 그이와 나의 관계를 아무에게나 설명하는 건 위험하다.

사실 집 앞으로 택시를 부르는 것도 안 될 일이라 그이가 어디 나갈 일이 있다면 경호원과 기사를 불러줄 테니 전화를 하라고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곳이 아닌 그이의 회사에 그이를 만나러 가는 거니까..

분명 전화를 하면 오지 말라고 하겠지.

 

 

 

“ ..아, 기사님 저 여기서 내려주시면 돼요. ”

 

 

“ 아이구.. 지나칠 뻔 했구만.. ”

 

 

“ 여기요. 잔돈은 됐어요. ”

 

 

 

한 시라도 빨리 그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택시에서 급하게 내렸다.

 

오랜만이야.. M회사.

회사에서 날 알아봐주고 문을 열어줄까..?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내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기분이다.

 

왜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비가 내리는 지..

 

조금 불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을 가지고 천천히 한발 한발 경호원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 똑똑똑

 

 

 

“ 무슨 일이시죠? ”

 

 

“ 이사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

 

 

“ 지금은 아무도 안 만나겠습니다. 할 말이 있다면 비서를 통해 전해주길 바란다고 해주시죠. ”

 

 

“ 그게.. 이사님의 아내 분이라고.. ”

 

 

 

서류를 넘기던 그의 손이 멈칫 한다.

 

 

 

“ 어떻게 할까요? ”

 

 

 

잠시 손가락으로 머릴 지그시 누르던 그는 입을 열었다.

 

 

 

“ ..들여보내주시죠. ”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두 눈이 마주친다.

딱딱하게 굳어 둘 사이 어느 쪽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 ..들어와. ”

 

 

 

그 목소리에 이끌리듯 천천히 그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

마치 마리오네트 같은 모습이다.

 

 

 

“ 거기 앉아. ”

 

 

 

손님용 소파위에 마주보고 앉은 나와 그이에게서 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있을 때 흐르는 설렘이란 것도 아니고

아직 만나선 안 될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흐르는 불길한 기류.

 

불길한 분위기에 불안함이 마음을 옥죄이는 듯해 숨이 조금 씩 막혔다.

저 입에서 내가 듣기 싫은 말이 나올 거라는 거쯤은 이미 각오하고 왔는데

막상 마주치니까 두렵다. 그 말을 듣기가

 

혜림이를 못 만난다는 그 말을 듣기가.

 

 

 

“ ... ”

 

 

“ ... ”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지금

무성하게 내리는 빗소리만이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온다.

 

저 빗소리마저 없었더라면 이곳은 얼마나 조용하고 무거울까..

가만히 앉아 차도 내오지 않은 테이블만 바라보는데 그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

 

 

 

꽤나 덤덤한 말투로 말하는 그.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 천천히 말했다.

 

 

 

“ ..한 번만 만나 주세요. ”

 

 

“ ... ”

 

 

“ 혜림이를.. ”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 미안하지만 아직은 만나기엔 내가 너무 바빠. 그 아이를 볼 시간도 없어. 그 아이를 볼 시간에 서류 하나는 더 처리할 수 있으니까. ”

 

 

“ .... ”

 

 

 

그게.. 이유인가요?

 

아빠라는 사람이

자기 딸을 5년이나 만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그거 인가요?

 

당신은 정말..

 

 

‘부모’ 맞나요?

 

 

 

“ ..보통 부모는 그런 말 안 해요. ”

 

 

 

당신이란 사람은..

 

 

 

“ 혜림이를 정말 딸이라고 생각하나요? ”

 

 

 

당신은..

당신이란 사람은..

 

당신이란 아빠는..!

 

 

 

“ 정말 혜림이를 딸이라고 생각 하는 거 맞냐고요!! ”

 

 

“ 김혜영. ”

 

 

“ 보통은.. 보통 아빠는..! 서류 하나 더 처리할 시간에 아이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한다고요! ”

 

 

“ ... ”

 

 

“ 당신은! 그깟 일이 혜림이보다 더 중요해요?! 단 10분도 5분도 그 아이를 볼 시간이 없나요?! 아니면 보기 싫은 건가요? 당신의 자식인데! 당신의 핏줄인데! ”

 

 

“ 진정해, 김혜영. ”

 

 

 

잔뜩 흥분한 채 벌떡 일어나며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는 눈썹만 살짝 꿈틀거릴 뿐 표정과 몸짓 그리고 말투조차도 전혀 미동이 없다.

 

난 화내고 있는데

오히려 날 진정시키려는 그의 목소리가 원치 않게 너무 달콤하게 들린다.

 

이 사랑이 뭐라고..

사랑이란 감정이 뭐라고..

 

그에게 제대로 화도 못 내게 하는 지.

그 목소리가 내 귀에 울리는 것만으로도 내 모든 감정을 다 녹여버리는 지.

 

어쩜 이렇게 잔인한지..

 

나는 눈에 가득 맺히는 눈물에 자리에 앉으면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화내도.. 화내려고 해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모든 감정이 눌러져버려서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흥분을 해도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쁜 감정들이 사그리 녹아내려버려서

 

 

 

“ 이리와, 김혜영. ”

 

 

 

저 목소리에 내 몸이 먼저 반응해버려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 버리게 돼..

그동안 참았던 설움을 토해내기도 전에 다 녹아사라지게 돼..

 

 

내 손을 치우게 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내 눈가에 흘린 눈물을 닦아주는 그.

그는 나를 살포시 안아주며 말했다.

 

 

 

“ 미안해. 바빠. 하지만 이번에 여유가 나면 꼭 혜림이를 보러 가겠다고 약속하지. ”

 

 

“ ..그게 언젠데요? ”

 

 

 

조금씩 나에게로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귓가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난 내 입술과 또 한 번 내 모든 것을 그에게 전부 줘버렸다.

 

 

‘ 출장이 끝나면.. ’

 

 

추적추적 내리는 오전 하늘의 빗소리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닿은 후론 더 이상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그이와 짧은 사랑을 나누고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자,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 한 분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말을 걸어왔다.

 

 

 

“ 아니에요. 어디 가야할 곳이 있어서요. ”

 

 

“ 어디 말씀이십니까? 그곳까지 모시겠습니다. ”

 

 

 

보통은 한번 거절하면 실례 일까봐 두 번 다시 권유를 안 하는 편인데 아마 그이가 경호 실장에게 명령을 내렸나보다.

하지만 지금 갈 곳은 집이 아닌 혜림이의 유치원.

경호원까지 동반한 채로 유치원에 가면 애가 당황하겠지..

 

어디 놀러가고 싶어도 경호원들이 무서워서 가자고 말도 못 꺼내는 애니까.

 

 

 

“ 괜찮아요. 그이에겐 제가 잘 말해드릴게요. ”

 

 

“ 그렇다면 경호원을 붙여 드릴 테니... ”

 

 

“ 아닙니다. 오늘은 혼자 가고 싶어요. 걱정 마세요. 그럼... ”

 

 

 

끝까지 붙잡는 경호원을 떼어두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내리고 있는 비.

 

그이와 있을 때 까지만 해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계속 내리고 있었구나..

 

우산을 펼치고 도로 쪽으로 걸어갔다.

콜택시를 부르려 하다가 아무래도 이 건물 앞으로 택시를 부르는 것 또한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 도로를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택시 하나를 잡아탔다.

 

 

 

“ 별님유치원으로 가주세요. ”

 

 

 

택시가 출발하고 점점 멀어져가는 건물을 사이드 미러로 보다가 눈을 돌렸다.

 

하아..

혜림이에게 오늘 아빠 얼굴 꼭 보여주기로 약속했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 출장이 끝나면.. ’

 

 

 

“ ... ”

 

 

 

여보..

 

출장이 끝나면.. 그러면 드디어 혜림이를 만나 주시는 거죠?

그럼 이제 혜림이도 당당하게 아빠 얼굴을 그릴 수 있는 거죠?

 

당신이 아빠인데.. 이런 부탁을 하는 거 자체가 우습지만

제발 약속 지켜줘요.

 

혜림이 앞에서 딱 한 번만 내가 아빠라고 말해줘요.

 

그 아이의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게..

 

그동안 제가 잘 달랠게요.

이번엔 반드시 아빠 만날 수 있다고 제가 잘 달랠게요.

그러니 제발 약속만 지켜줘요.

 

 

 

“ 하아.. ”

 

 

 

하지만 왜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하고 불편할까.

 

그래도 오늘 얘기는 잘 풀린 편인데

난 지금 뭐가 이렇게 초조한 걸까.

 

혹시 난 지금 조바심을 내고 있는 건가?

그이와 약속도 했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지금 당장 그이를 혜림이에게 데려가고 싶어서?

그이가 약속을 깰까봐 두려워서?

 

아니야.

그러면 오히려 내가 약속을 깨버린 게 돼.

 

그이를 믿고 기다리자.. 기다리자.. 기다리자.. 김혜영.

믿고 기다리는 건 예전부터 잘 했었잖아.

 

그이가 집에 안 들어오는 날도

새벽에 귀가하는 날도

 

그이가 날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나에게 오지도 않았지만

언젠가 돌아봐줄 거라고 믿고 기다렸잖아..

 

조바심 내지 말자.

김혜영.

 

 

 

“ 저기.. 아까부터 핸드폰 울리고 있는 데요? ”

 

 

“ 아, 네. ”

 

 

 

이런.. 깊은 생각에 잠겨 핸드폰이 울리고 있는 지도 몰랐다.

나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1).

 

누구지?

 

핸드폰 잠금 화면을 켜고 나에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를 확인 하려 했다.

번호를 확인하려던 찰나

 

 

 

“ 어.. 어.. 어..! 뭐여! 뭐여! ”

 

 

“ ..어! 어! 꺄아아아아아악! ”

 

 

 

갑자기 빗속을 달리던 택시에서 큰 소리가 났고

그 덕분에 택시가 빗길에 미끄러졌다.

 

아무리 핸들을 잡고 돌려고 도저히 중심을 잡지 못하는 택시.

 

마지막으로 무언가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 후 온 세상이 새카맣게 물들여졌다.

 

 

 

 

.

.

.

 

 

 

 

 

뭐지..

여긴 어디지..

 

몸도 움직여지지 않아..

 

설마..

 

죽.. 은건가..

 

죽어..?

 

내가?

 

내가 죽었다고?

 

아, 안 돼..

 

난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이대론 죽을 수 없어!

 

난 살아야 돼!

 

살아야만 해!

 

난..!

 

난!

 

반드시 살아야 해!

 

 

“ 호오.. ”

 

 

뭐, 뭐야..

사람 목소리..?

 

 

“ 살려고 하는 의지가 강하네. 젊은 나이에 죽는 게 억울해서 그런가? ”

 

 

뭐야.. 누구야..

누가 말하고 있는 거야?

어떤 남자가 말하고 있는 거 같은데..

 

앞이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여..

 

 

“ 당연히 어둡지. 여긴 저쪽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니까. ”

 

 

다른 세상?

잠깐, 내가 방금 입 밖으로 말했나?

내 생각이 들리는 건가?

 

 

“ 어, 들려. ”

 

 

뭐..?

 

뭐야..

 

무서워..

 

도대체

당신은 누구..

 

 

“ 누군지 말해도 넌 몰라. 그나저나 왜 그렇게 살려고 하는 거야? 차라리 죽으면 편하잖아. 모든 짐을 내려놓는 거니까. ”

 

 

모든 짐을 내려놓는 거라고?

 

 

“ 응. 모든 짐을 내려놓는 거잖아. 힘든 일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 따윈 이제 안 겪어도 되잖아? ”

 

 

그건...

 

그래..

 

 

“ 그치? 차라리 죽는 게 편해. 뭐 하러 발버둥 치면서 살려고 그래. 어차피 살아봤자 계속 힘들고 고통스럽고 슬픈 일들만 반복 될 텐데. 이왕 이렇게 죽어버린 거 그냥 포기해. 괜히 더 살려고 하지 말고. ”

 

 

그래.. 이왕 죽은 거

다 포기.. 하자.

 

그이를 기다려도 나에게 오지 않아..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이는 날 돌아보지 않아..

 

더 이상

 

아프기 싫어..

 

 

“ 응. 포기하고 여기서 평화롭게 살아. 이제 아프지 않아도 돼. 슬픈 일, 힘든 일, 고통스러운 일 다 겪지 않아도 돼. ”

 

 

좋아..

 

포기하면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돼..

 

포기하자..

 

 

“ 그래. 모든 걸 다 잊어. 지금부터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직 너만 생각해. ”

 

 

나.. 만..

 

 

“ 내가 도와주지. 네가 아프지 않고 이곳에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게. 모든 걸 다 잊어. ”

 

 

모든 걸 다 잊어..

 

 

“ 그래.. 다 잊어. ”

 

 

다.. 잊어..

 

 

“ 잘하고 있어.. 좋아.. 그대로 다 잊고 여기서 평화롭게 지내자. ”

 

 

다 잊고 여기서 평화롭게 지내자..

 

고통스러운 일 따위 겪지 말고 여기서.. 평화롭게 살자..

 

계속 이렇게 살아봤자 행복한 건 없어.

계속 믿고 기다려도 그이는 혜림이를..

 

..혜림이?

 

 

“ ... ”

 

 

혜림이..

 

그래.

 

혜림이.

 

혜림이가 있어.

나에겐 혜림이가 있어.

 

아무리 힘들고 세상사는 게지치고 슬퍼도 나에겐 혜림이가 있어.

그 아이가 있다고.

 

살아야 돼..

난 살아야 돼!

 

혜림이를 혼자 두고 갈 순 없어!

 

 

“ ..네가 살려고 하는 의지가 바로 ‘그거’구나? 그게 뭔데? ”

 

 

딸.. 내 딸이야.

 

‘그거’가 아니야!

물건이 아니야!

 

사랑스러운 내 딸이야!

 

 

“ 딸? ..아 그렇군. 그래도 ‘그거’가 있다고 해도 넌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이미 넌 죽은 목숨이니까. ”

 

 

이미 죽은 목숨..

 

 

“ 그래. 어차피 살고 싶어도 넌 더 이상 살 수 없어. 이미 죽었으니까 다 포기하라니까? 포기하고 여기서 평화롭게 지내라니까? ”

 

 

날..

 

살려줘!

 

 

“ 뭐? ”

 

 

살려줘!

네가 지금 나랑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걸 봐도 넌 평범한 사람이 아니지?

 

제발 부탁이야.

날 살려줘.

 

난 절대 그 아이를 두고 갈 수는 없어!

 

 

“ 지금 네가 얼마나 무모한 부탁을 하고 있는 지는 아냐? 내 대답을 먼저 듣는 다면 안 돼야. 널 살릴 순 없어. ”

 

 

제발..

제발..

제발 부탁이야.

제발.. 날 살려줘..

 

내 ‘모든 걸’ 줄 테니까 제발..

 

 

“ 모든 거? ”

 

 

그래.

모든 거.

 

내 모든 걸 다 너에게 줄 테니..

제발.. 날 살려줘..

 

난 그 아이를 만나야 한단 말이야..

 

 

“ 흐음... ”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 ..그래. 좋아. ”

 

 

..정말?

정말이야?

정말 날 살려줄 거야?

 

 

“ 그래. 살려줄게. 하지만 딱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 ”

 

 

뭔데?

 

 

“ 네가 ‘그거’ 때문에 살려고 하는 건 알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삶을 사려면 힘듦, 슬픔, 고통, 분노를 갖고 살아야 하잖아? 그렇다면 차라리 ‘그거’를 죽이고 같이 이 세상에서 지내면 되는데 왜 굳이 저 짐들을 안고 다시 살려고 하는 거야? ”

 

 

그건...

 

 

“ 그건? ”

 

 

그건..

 

그 짐들 속에서도

그 괴로운 삶 속에서도

 

아무리 삶이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하나의 꽃이 있어

 

 

“ ... ”

 

 

나에게 꽃은 우리 혜림이야.

 

혜림이가 점점 성장하는 것과

웃는 거, 먹는 거, 말 하는 거..

 

삶 속에서 그 행복을 놓칠 순 없어.

 

나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도

내 자식만을 바라보며 힘을 냈어.

 

내 자식을 포기할 수 없어.

 

그 아이가 웃는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면

그간 힘들었던 일들이 모두 다 녹듯이 사라져

 

그래서..

 

 

“ 미안. 난 이해 못 하겠다. 하지만 일단 약속은 했으니까 살려줄게. 대신 약속대로 난 너의 모든 걸 갖으러 가겠어. ”

 

 

아...

응..

 

고마워..

 

 

“ 글쎄.. 과연 그 ‘고마워’라는 말이 나중 가서 진심이 될 수 있을까? 일단은 보내줄게. 다시 한 번 삶을 살아봐. 그리고.. ”

 

 

그리고..?

 

 

“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도 나에게도 알려줘 봐. ”

 

 

 

.

.

.

.

.

 

 

 

“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 ... ”

 

 

“ 저기..? 사모님? ”

 

 

“ 아.. 아, 네? ”

 

 

“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 ..아 ”

 

 

뭐지?

아까 그 상황들은?

 

꿈인가?

아니,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해.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리저리 눈을 굴려 봐도 여긴 그이의 회사.

 

그리고 난 계단 위에 뚝 하고 서있다.

 

마치 그 꿈을 꾸기 전 상황처럼..

 

 

“ ..사모님? ”

 

 

“ 네? ..아, 네. 그럼 제 딸의 유치원까지 부탁합니다. ”

 

 

“ 네. 따님의 유치원 이름은 뭐죠? ”

 

 

“ 별님유치원입니다. 잘 부탁할게요. ”

 

 

“ 차는 바로 앞에 대기시켜놨습니다. 타시지요. ”

 

 

나는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바로 앞에 준비되어있는 벤에 올라탔다.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는 비..

경호원이 기사님에게 별님유치원을 얘기했고 기사님이 네비게이션을 찍는 중이라 택시를 탔을 때와 다르게 약간 늦게 출발했다.

 

 

“ ... ”

 

 

방금 전 꿈같던 그 상황들..

..설마 내가 지금 정말 목숨을 한 번 더 받은 건가?

 

정말로?

 

그렇다면..

 

나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손에 꼭 쥐었다.

그러자 잠시 후

 

 

-♪♬♪.

 

 

“ ... ”

 

 

정말로 전화가 왔다.

아까 겪었던 상황과 똑같이..

 

나는 핸드폰을 들어 누가 전화를 건건지 확인했다.

 

 

-(남편.)

 

 

“ ..아 ”

 

 

그럼 아까도 그이가 나에게 전화를 건건가?

 

나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나야. 경호 실장에게 집까지 바래다주라고 명령했어. 경호원 한 명이 갔을 텐데.. 만났나?]

 

 

“ 아, 안 그래도 지금 가고 있어요. 이렇게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

 

 

[뭘.. 어쨌든 출장은 오늘 오후에 가서 대충 2달쯤 걸릴 거야. 출장에서 돌아오면 너와 했던 약속대로 혜림이를 만나러가지. 오늘 혜림이 재롱잔치인데 못 가서 미안해. 그 아이한테도 미안하다고 전해줘.]

 

 

“ 알겠어요. 신경 쓰지 마요. 제가 잘 달랠 테니까.. ”

 

 

[고마워. 그럼 출장 다녀와서 보자고. 중간 중간 전화도 할 테니까.]

 

 

“ 네. 잘 다녀와요. 여보.. ”

 

 

-뚝.

 

 

“ ... ”

 

 

그래.. 아까 전화 했던 건 그이였어..

통화내용은 지금과 크게 다를 게 없었겠지..

 

그리고 내가 전화를 못 받고 그냥 끊겼을 때, 이제 곧..

 

 

-펑!

 

 

“ 뭐, 뭐야! ”

 

 

“ 사모님! 다친 곳은 없습니까?! ”

 

 

“ ..네. 괜찮아요. ”

 

 

“ 뭐죠?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기사님! ”

 

 

“ 바.. 바로 앞에 달리고 있던 택시가 폭발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차량에 부딪친 거 같습니다! ”

 

 

“ 제가 내려가서 확인하고 신고 할 테니 기사님은 사모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사모님. 위험 할 수 있으니 내리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

 

 

“ ..네. ”

 

 

그래..

맞아..

이제 알겠어..

그건 꿈이 아니야. 현실이야.

 

그리고 난 지금.. 다시 한 번의 목숨을 받은 거야..

 

 

‘ 약속대로 난 너의 모든 걸 갖으러 가겠어. ’

 

 

“ ... ”

 

 

이 말도 사실이겠지..

 

 

그렇다면 이제 내 모든 걸 가지러

 

곧...

 

 

 

 

 

-본 글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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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한, 밤의 기록

가을, 햇살이 울던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이렇게 전해드리게 되어 죄송한 마음입니다.'

며칠 전, 시집 한 권과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원고지 모양의 편지지에 자필로 눌러쓴 시인의 편지였다. 지난가을 초입에 독립출판을 주제로 한 프리마켓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시인이 파는 엽서 몇 장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엽서에 문제가 있어 다시 보내준다고 했다. 재인쇄 후 연락한다길래 잊어버린 채 몇 주를 기다렸다. 엽서가 결국 제대로 인쇄되지 못해 편지와 함께 시집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저 문장을 보자 마음 속 덮어두었던 감정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들과 청평으로 여행을 갔다. 전날 밤, 별이 빽빽이 박힌 하늘을 봤다. 그렇게 많은 별은 오랜만이었다. 또 우연히 혼자서만 두 번의 별똥별을 봤다.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 시각이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말에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는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오빠랑 차를 몰고 천천히 내려갔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우린 말이 없었다. 

자지 않으려고 했지만, 차에서 깊은 잠이 들었다. 심해 속으로 몸이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꿈도 없는 맑은 잠을 잤다.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 댁에 들렸다. 할머니 댁은 꽤 분주했다. 살아생전 할머니를 도우셨던 요양사분이 집을 정리하고 계셨고, 할머니 친구분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고모는 내려오고 있냐, 너희는 어디서 왔냐, 집은 어떻게 정리할 거냐 등 참 사소하고 평소 오지랖이라고 느꼈던 질문에 정신없이 대답했다. 그 와중에 창가에 햇빛을 보면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인형이 눈에 띈다. "너거 할머니 저거 참 좋아했는데. 매일 춤을 추댄다고."

할머니는 저 친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멀리 있어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하다는 자식들의 뻔한 레퍼토리가 머리 속에서 웅웅 맴돈다. 우리도 그랬구나. 

 

장례식장 입구 모니터엔 할머니 이름과 함께 나를 포함한 가족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상복을 갈아입고, 손님을 받으며 점점 실감했다. 3일의 장례는 정신없이 진행되었다. 장례 동안 여러 번의 충격이 여진처럼 밀려왔지만 흔들리지 않고 꽤  잘 버텼다. 손님들은 올 때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유에 대해 수백 번을 물었고 아버지는 수백 번을 답했다. 손님맞이를 하다 이튿날, 입관식이 있었다. 몇달 만에 마주하는 할머니였다. 평소 같은 얼굴에 깊은 잠을 주무시듯 미동이 없었다. 할머니의 품에 노잣돈을 넣고 식어버린 다리를 꾹꾹 주물렀다. 고모는 할머니 생신상에 미역국 몇 번 올리지 못했다고 오열했다. 울음 섞인 장송곡이 장례식장에 메아리처럼 울린다. 고모의 울음을 이어받아 다음 입관식에서 옆집 가족의 울음이 메들리처럼 이어진다. 

 

장례의 중반쯤, 큰어머니는 그러셨다. 앞으로 울 날이 더 많다고 계속해서 죽상으로 있는 건 아니라고. 사촌 언니는 지난 추석 때 할머니와의 통화를 잊지 못했다. 반갑게 통화 후 끊으면서 할머니는 '한 달 후에 보자'는 말을 남겼다. 거짓말처럼 한 달 후 모두가 모였다. 몇 년을 보지 못했던 친인척을 다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지막으로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남은 할머니를 마주하며 보내드렸다. 화장터 옆 칸에는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다. 화구로 들어가는 관을 붙잡고 붙잡는다. 화장 후 제를 지내며 3일 동안 우리를 도운 병원 측 장의사는 한마디로 장례의 끝을 알렸다. "저희 OO병원 장례식장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이 다음에도 저희 병원을 찾아달라는 뜻으로 들리는 건 뭘까. 노래방에서 1시간이 끝나고 조심히 돌아가라는 멘트가 생각난다. 장의사의 마음이 이해도 되고 3일간의 식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말라가는 눈물 자국 위에 웃음이 피식 났다. 

 

장례를 마치고, 할머니 사진과 유골함을 들고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3일 전 집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왔음에도 매캐한 냄새가 집안을 채웠다. 허전한 빈 침대, 말라버린 고추, 가지, 호박들, 주인없는 마당에 나른한 잠을 자는 길고양이들. 사진을 들고 마당 한 바퀴를 죽 돌았다. 집을 나오는데 담벼락에 개나리를 발견했다. 새롭게 싹이 나는 것도 있었고, 활짝 핀 뒤 지고 있는 꽃도 있었다.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아 코끝이 시큰한 계절이었다. 

 

할머니는 잠자리에서 조용히 떠나셨다. 할머니는 가난한 가정에서 부모 곁을 떠나 어릴 적부터 대감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자라왔다. 그 집에서 몸이 조금 불편한 둘째 아들과 결혼하여 남매를 낳았다. 새벽같이 밥을 하고 집안을 돌보되 본인의 위치는 숨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과한 행복감을 표현하셨다. 힘들게 자란 만큼 우리에게도 그런 점을 요구했다. 윗사람 혹은 남자 어른에겐 '네'만 하고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 남자가 위다. 어릴 땐 그런 말들과 요구가 참 싫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의 그러한 삶이 가엽다. 그만큼 효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이 많이 허하다. 첫 월급으로 사드린 신발도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시는지. 더 드리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할머니의 눈가엔 항상 눈물이 말라 있었다. 할머니의 시선 끝에 머문 먼 산을 보며 고향을 떠올리는 걸까. 어린 시절을 그리는 걸까. 거친 손바닥을 한 번이라도 더 쓸어볼걸, 할머니가 가자는 곳 한 번 더 갈걸. 할머니의 모습이 잔상이 되어 맴돈다. 

 

지금 내 마음이, 시인이 보낸 편지의 첫 문장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이렇게 마음을 표현하여 참 죄송할 따름이다. 장례가 다 끝나고 서울에 올라와서 쉬는데, 아이폰에서 옛날 사진이 떴다. 아이폰은 '몇 년 전' 사진들을 가끔 보여주곤 한다. 거기에서 할머니와 생신 때마다 가던 여행 사진이 보였다. 가을 억새와 함께 가족은 환하게 웃고 있다. 

 

할머니는 잔치국수를 참 잘 말아주셨다. 라면보다 간단히 만드셨다. 어릴 적 할머니 손에서 컸다. 자고 일어났는데 엄마가 없어 펑펑 울었다. 할머니는 달래주면서 얼른 잔치 국수를 말아주셨다. 참 편하고 맛있게 먹던 그 음식은 손이 많이 간다. 채소를 하나씩 다듬어서 일일이 볶고 육수도 따로 내야 하고, 면도 따로 삶아야 한다. 그만큼 정성을 필요로 한다. 매일 할머니의 마음과 손길을 먹고 살았다. 지금 그 잔치국수가 어느 때보다 너무 그립다.

볕 좋은 날에 떠난 할머니가 그곳에선 매일 잔치 같은 나날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