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어보기

만다린의 시/소설/편지/기타

Part 1-11 [시/조각글]- 난, 너의 마음에 닫길 바랬던 거야.

약간의 오타가..ㅜㅜ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복귀하고 바로 씁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난 왜 이러는데

 

생각해봐도

 

알 수 없는건

 

믿음이 깨지는 거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아무도 안 말해주는 건

 

그건 뭘까

 

내 눈치를 보며 점점 도망가는 건 뭘까

 

내가 심한건가?

 

아무리 말해도 답 안해주잖아

 

생각만 해도 끔직한 걸

 

 이게 내 세상이면 좋을텐데...큭

 

잔인..ㄷㄷ 크억...

 

마리분들 사랑합니댜ㅑ >_< (돼지 멱따는 소리: ASMR)

 

 

사랑은 끝내 가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응답했으니까

 

사소한 것이라도 챙겨주는 센스란 것

 

서로 감시하는, 해주는 관계

 

그런게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건가

 

좀 자유로우면 마음에 안 드니까 감시하는 거라고

 

그런게 서로 센스가 있는 건가?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

 

그게 과연 미안한 것일까

 

서로의 배려인가??

 

난 잘 모르는 게 정답인가

 

그게 심하면, 좀 더 심하면 

 

점점 더 심해지면,

 

결국 그것은 집착이 되는 것이다.

 

 

사랑.

 

좋은선택하시길!!

글 이어보기

편하게 쓰는 단편선

기도

기도

 

찬바람이 불어보는 밤.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한다. 집안의 허전함을 느끼며 팔을 휘휘 저어본다. 역시나 손에 걸리는 것이 없다. 고개를 살짝 돌려본다. 나를 제외한 아무도 없었다. 쓴 웃음을 지어본다. 언제는 좁아터진 집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넓은 집인 줄은 몰랐다.

창문을 연다. 뺨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숨을 들이마신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고 몸 안을 맴돌았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하늘에 달이 작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드러내기 수줍은지 구름에 살짝 몸을 가린 채 세상을 어둡게 비췄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했다. 도시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도로 위를 자동차가 다니고 신호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지금쯤이면 도착했을까? 핸드폰을 세게 쥐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내지 말걸 그랬나보다. 하지만 이내 슬며시 고개를 저어본다. 아니. 그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야.

메시지 창을 열고 메시지를 보낸다. 언제나 그랬듯이 손끝으로 느껴지는 화면이 기분 좋았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보내졌다. 화면을 잠그고 핸드폰을 내렸다. 그리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 너가 보고 있는 하늘은 어떨까? 분명 이곳과는 다르리라 생각된다. 시간차가 대략 12시간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그곳의 날씨는 어떨까? 비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처음 도착 했을 때 비부터 내린다면 분명 기운이 빠질 테니까.

참으로 신기했다. 하늘은 하나였다. 지구는 하나였고 그 지구는 무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보고 있는 하늘은, 즉 너가 보고 있는 하늘이라는 얘기다. 그렇지만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까만 밤을 보고 있지만 너는 푸른 하늘을 보고 있을 테니 말이다.

띠리리링.

벨소리가 울리며 핸드폰이 흔들렸다. 얼른 손을 들어 화면을 보았다. 너의 얼굴이 보였다. 너의 사진이 보였고 그 사이로 너의 이름이 보였다. 손가락을 들어 수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천천히 핸드폰을 귀를 향해 옮겼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여보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건넨 첫마디. 사실 묻고 싶은 것은 여러 가지 있었다. 잘 도착했는지, 밥은 먹었는지, 비행기는 불편하지 않았는지, 날씨는 어떤지, 그리고 나는 보고 싶은지......

“응. 나야. 메시지 보내려고 했는데 안자는 것 같아서 전화했어. 혹시 자는데 방해가 된 건 아니지?”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마. 그것보다 잘 도착했어?”

“응. 비행기가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더라. 생각보다 견딜만 했어.”

“그랬어? 다행이네.”

평소와 같은 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나만 그런 걸까? 나만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을 걸까? 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걸까? 괜히 이상한 생각들이 몰려온다. 아아. 이런 거 싫은데 말이지.

검은 생각들이 나에게 달라붙었다. 텅빈 집안 구석구석에서 새어나온 잡념들이 내 다리를 타고 내 몸을 감쌌다. 내 눈을 가리고 점차 짙은 어둠 속으로 나를 끌고 갔다. 생각들이 내 귀를 막으려는 그 순간 핸드폰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있잖아. 고마워.”

“뭐가?”

뜬금없는 감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어가 고맙다는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네 생각이 많이 나더라. 생각해보면 그렇잖아. 내가 멋대로 여기로 온 건 아닐까 싶어서. 장거리 연애가 쉬운 것도 아니고 말이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 순간 몸을 감싸던 검은 생각들이 떨쳐나갔다. 언제 사라졌는지 눈앞이 훤하게 보였다.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맞아. 너무해. 혼자 내버려두고 외국으로 가고 말이야. 게다가 어? 시간차가 열두시간이라고? 솔직히 완전 다른 곳에 있는 거랑 다를 바 없잖아.”

“그, 그렇네...... 미안.”

짖궃게 말하자 너는 아이처럼 작게 말했다. 머뭇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푸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 나를 붙잡던 우울감이 단숨에 날아가버렸다.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잠도 못 이룰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저 편안하다. 편안함이 내 몸을 감쌌다.

“장난이야. 사실 방금 전까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같은 하늘 아래 있는데도 다른 것을 보니까 말이야. 뭐랄까 다른 세상에 가버린 것은 아닐까 싶었어. 뭔가 굉장히 멀어진 것 같은 느낌에 잠도 안 오고 말이야.”

“응.”

“그런데 말이야. 결국 그런 건 아무 상관없는 것 같아. 결국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 냐가 중요한 거 아닐까?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슬며시 가슴을 움켜쥐었다. 살짝 쿵 떨려오는 심장소리에 주먹을 쥐었다. 주먹 안으로 온기가 느껴졌다. 차가운 바람도 온기를 이길 수 없었다. 온기가 내 손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가슴에서 시작된 온기는 온 몸으로 펴져나갔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잘 배우고 와. 어찌됐건 꿈을 위해서 간 거잖아? 나는 나대로 잘 지낼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 열심히 하고 오라고. 그래야 나도 잘 보냈구나하고 생각하지.”

“응.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핸드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이 하늘이 다른 하늘이든 같은 하늘이든 상관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연결되어있다. 서로를 생각하며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 그거면 충분했다. 거리 따위, 시간 따위 내 알바 아니었다. 이렇게 서로를 위하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이제 슬슬 공항에서 나가봐야겠다. 나중에 또 연락할게.”

“응. 그래. 나도 이제 슬슬 자야겠다. 시간도 늦었으니 말이야.”

“그래. 잘자고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버튼을 누르자 전화가 끊겼다. 사랑한다는 목소리가 내 귓가를 맴돌았다. 핸드폰을 내리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달이 구름에서 나와 온 몸을 드러냈다. 하얀 달빛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하늘을 보다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 신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있다고 말하기도 없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은 두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앞으로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타국에서 지내는 삶은 조국과 다를 것이다. 좋은 일도, 안좋은 일도 있을 것이다. 잠깐의 방황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악재에 휘둘리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두 손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길을 잃었을 때 빛으로 비춰주리,

어둠이 눈앞을 가릴 때 길을 밝혀주리,

바람에 흔들릴 때 버텨주길,

절망에 빠져 포기하지 않기를,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슬며시 눈을 뜨고 하늘을 보았다. 환하게 빛나는 달빛에 미소를 지었다.

 

글 이어보기

편하게 쓰는 단편선

랜선 사랑

밤 열한시.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 손으로 마우스를 잡는다. 인터넷 창을 열고 나서 주소에 익숙한 문자들을 입력한다. 평소에 영어 단어 하나 외우기 힘든 나였지만 이럴 때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타자를 입력한다. 엔터키를 누르자 우리들의 방으로 이동한다. 그리고는 마우스로 채팅인원을 눌러본다. 나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기지개를 펴면서 몸을 비틀었다. 띠링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사실 누군이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

그리고 오늘도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그녀를 만난 것은 일 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 펜팔이 하고 싶었던 나는 이리저리 펜팔 친구를 구하고는 했었다. 그때는 로망인가 낭만인가 아무튼 그런 걸 쫓고 있었다. 바보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그게 멋져 보였다. 그렇게 사람을 찾아봤지만 현대 사회는 인터넷 사회였다. 메일 한방에 해외로 소식이 가는 시대에 누가 편지를 쓰려고 할까? 그렇게 포기하려는 때 그녀를 알 게 되었다.

그녀는 늘 이 채팅방을 이용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단 한번도 만난 적은 없었다. 물론 사진으로 얼굴을 본 적도 있었고 음성채팅으로 목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퀴즈를 낸다면 그 누구보다도 높은 점수를 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애들이랑 햄버거 가게에 갔는데 글쎄 사람이 많아서 곤란했다니까.

-하긴 점심 시간대 사람이 많지.

우리의 이야기에 어떤 목적도 없었다. 그저 대화를 위한 대화였다. 어떤 의미로서는 정말 대화다운 대화였다. 대화 그 자체가 목적이었고 서로를 향해 말을 건넸다. 수다스러운 우리는 늘 이렇게 밤을 지새곤 했다.

-그리고 보니 이제 일 년이네.

-뭐가?

-우리가 알게 된 게 벌써 일 년이야!

-그렇네. 벌서 일년이라니 시간 참 빠르네.

웃으면서 타자를 쳤다. 생각해보면 일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남에게 말 못할 고민부터 어린시절 흑역사까지 무어 하나 빼놓지 않고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딱 하나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있잖아. 너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문득 물어보는 질문에 잠시 주저했다. 딱 하나를 빼고 모든 것을 얘기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미친 얘기일수도 있다. 얼굴 한번 마주하지 않고 목소리 조차 모르는 사람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사랑은 물건과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것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생각에 사랑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그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감히 다른 누군가가 모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사랑이라 느낀다면 이 감정은 사랑인 것이다. 비록 그것이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도 말이다.

-있기는 한데. 왜?

-그 내 친구가 좀 특이한 사람을 좋아해서 그게 고민이래.

-특이한 사람? 왜 사차원 같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인터넷 채팅으로 알게 된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서 고민이래.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그렇군. 세상에 별난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나 보다. 게다가 우연하게도 그녀의 친구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후후. 살짝 웃고는 타자를 마저 두드렸다.

-그래? 그게 왜 고민이야?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그게 상대방이 자기를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걱정이래.

-상대방이?

-응. 그렇잖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다니. 그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잖아.

일반적이라. 물론 일반적이지 않다. 보통 사람은 만나서 호감을 느끼고 그런 지속된 만남으로 사랑을 하게 되겠지. 하지만 일반적이라는 건 무엇일까? 언제부터 그런 것이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던 걸까?

-그게 중요한가? 일반적이든지 아니든지 중요한건 그 친구의 마음이지. 중요한건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잖아. 좋아하는 거면 좋아하는 거지. 복잡할 것도 없어. 그냥 좋아하는 거니까.

-그래도 그 상대방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해?

-사랑에 있어서 최선이 뭐라고 생각해?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깜빡이는 말풍선을 보며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글세...... 잘 모르겠어.

-내 생각에는 자신의 마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상대방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 마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대 상대방의 마음을 어찌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 그때는 포기해야겠지. 하지만 그걸 겁내서 아무것도 안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포기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하지 않을까 싶어.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고 그런 마음과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사실 내가 무슨 대단한 철학자나 생각이 깊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길을 지나가다 흔히 볼 수 있는 범인에 불과했고 사랑 앞에서 고민도 하고 상처도 받는 청춘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난 내 마음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이상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마음이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듯이 세상에 이런 사랑도 존재한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하지만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인데?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면 사랑이 무엇이라 생각해?

-뭐랄까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_그러면 그 친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에 있어서 만남은 조건 중 하나일 수도 있지만 필수 조건은 아니야.

-그러면 어떤 게 사랑인데?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 사랑은 조건이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사실 그렇지 않아? 어느새 보면 좋아하게 된 거지.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 만일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사라지면 그 사람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거야? 그건 아니잖아. 좋아하니까 이유가 생기는 거지. 이유가 있어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래. 그렇구나. 듣고 보니 그러네.

-그치? 그런 거야. 세상에 그런 사랑도 있고 저런 사랑도 있는 법이니까.

-그러면 만일 말이야. 이건 정말 만일인데 내가 널 좋아한다면 어떨 것 같아?

순간 타자를 치던 손가락이 굳었다. 무슨 말이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갔다. 방금 전까지 잘난 듯이 떠들던 놈이 사라지고 소심한 겁쟁이가 튀어나왔다. 뭐지? 무슨 의미로 얘기하는 걸가?

-저기 혹시 기분 나빴어?

그녀가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 그 순간 얼른 타자를 쳤다. 잠시 생각한다는 것이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다. 조심스레 타자 위 버튼을 하나하나씩 눌러나갔다.

-아니, 아니. 갑자기 그런 얘기해서 놀랐어.

-왜? 내가 이런 얘기하니까 이상해?

-아니. 그냥 갑작스러워서.

-그래서 넌 어떨 거 같아?

-글쎄다. 솔직하게 말하면 좋겠지. 사실 내가 널 본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응. 이런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넌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야. 내가 널 만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사고방식도 그렇고 꽤나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네.

하긴 생각해보면 이렇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사실 잘난 듯이 지껄였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나 또한 그저 바라볼 뿐 만이다. 사람이 늘 그렇듯이 타인의 일에 대해서는 나서지만 막상 자신의 일에는 소극적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나마 이번에는 선방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얘기했을 것이다. 평소에는 이런 얘기를 죽어도 하지 않았으니까.

깜빡이는 말풍선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너무 오버해서 얘기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버라는 표현은 이상하지 않을까? 적어도 난 내 진심을 얘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그저 장난스럽게 얘기한 것에 너무 진지하게 대답한 것은 아닐까?

한참동안 말풍선은 그저 깜빡이기만 했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이네. 오늘은 뭔가 처음인 일이 가득했다. 사랑에 관해 얘기한 것도 처음이었고 이런 질문을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오늘 또 처음으로 우리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물론 나만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어쩌면 화장실을 간 것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잠깐 자리를 비운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왜 일까? 괜시리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워졌다.

하지만 결코 나서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게 바보 같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내 사랑이었다. 사랑은 강요하는 순간부터 사랑이 아니었다. 그건 집착이었다. 우리의 관계도 그랬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 한들 그것은 유리와 같은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목소리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니 언제든지 단절될 수 있는 사이였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고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오랜 침묵이 끝나자 그녀가 한마디씩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턱을 괴고 그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놓치지 않고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너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아직 이런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거든.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확실하게 좋아해. 하지만 과연 이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난 모르겠어. 이런 경우는 처음이거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야. 인터넷에서 흔한 썰로만 생각했는데 내가 그 당사자가 될 줄이야. 그래서 많이 고민했어. 너에게 솔직하게 말을 할까 말까. 며칠을 고민했는지 몰라. 그런데 오늘 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이 바뀌었어. 그래서 물어보고 싶어. 혹시 괜찮다면, 너도 날 좋아한다면 우리 언제 만나보지 않을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조심스러우면서 부드럽게 따뜻하면서도 확실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랬구나.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타자를 쳤다

-나야 좋지. 이번 주 주말에 만나지 않을래?

글 이어보기

짧은 글 모음집:愛

처음처럼 그때처럼

처음처럼 그때처럼

 

깨끗한 벽지와 바닥, 햇살이 비추어드는 새집.

앞으로 행복한 일만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믿으며 나란히 발을 들여놓는다.

 

비록 작지만 함께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열심히 살자며 서로를 북돋는다.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 정말로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는 나날을 보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서툴고 어설프게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웃을 수 있다.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고, 익숙해지는 만큼 피로가 늘어가지만 견딜 수 있다.

 

설레고 바쁜 봄을 보내고, 축축하고 우울한 여름을 보낸다.

마주보며 웃는 시간이 줄어들고, 피곤함에 대화가 잦아든다.

 

유난히도 비가 쏟아지는 날,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고 귀가한 날.

어둡고 좁은 현관에 서서 초라함을 느꼈다.

 

서로의 일에 쫓겨 아직도 제대로 정리가 끝나지 않은 짐으로 어질러진 집.

신발을 벗어던지며 치미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성난 걸음으로 들어가 창문을 벌컥 열었다.

 

- 쏴아아...

 

장맛비가 거침없이 창가로 빗발친다. 숨을 크게 몰아쉬는 사이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스친다.

 

“이거 설마...?”

 

불긴한 예감에 벽으로 다가가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환하게 밝아진 거실과 방을 돌아다니며 냄새의 원인을 발견한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피곤에 지친 그가 들어선다. 난 일부러 보란 듯이 화난 기척을 내며 남편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내 기대에 부응하듯 옆으로 다가온 남편에게 천장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곰팡이 생겼어!”

 

불쾌함이 가득 담긴 내 목소리에 그는 시선을 돌려 곰팡이를 확인하고서 무덤하게 대꾸했다.

 

“그러네.”

 

“그러네? 그게 다야? 곰팡이 생겼다고. 처음엔 분명 깨끗했잖아.”

 

터지기 직전의 불만을 꾹꾹 누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모든 걸 해결해주기를 바라듯이,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곰팡이가 핀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사하고 제대로 치우지 않은 짐과 확실하게 끝내지 않은 벽의 페인트칠 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칠하다 말아서 생긴 거 아냐? 짐정리도 안했고, 왜 하다가 말았어.”

 

“뭐야? 왜 다 내 잘못인 것처럼 말해? 나 혼자 사는 집이야? 아니잖아! 도와주다 만 게 누군데?!”

 

“그러게 적당히 하자고 했잖아. 그냥 짐만 정리해도 될 걸 뭘 굳이...”

 

“처음엔 너도 맘에 든다며, 좋다고 했잖아. 그러면 끝까지 도와줘야할 거 아냐!”

 

“퇴근하면 피곤하니까 쉬어야지. 그래서 휴가 끝나기 전에 적당히 하자고 했잖아.”

 

“너만 피곤해? 나도 피곤해!”

 

결국 서로 언성을 높이다 대화가 끊어지고 살얼음 같은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깨끗한 벽지를 좀먹으며 천장과 벽으로 퍼져나가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는 장마 내내 이어졌다. 곰팡이처럼 퍼져 나온 불만과 짜증은 그와 나의 감정을 좀먹기 시작했다.

 

서로 신경질을 내고, 냉랭하게 입을 닫아버리고, 본 체 만 체 고개를 돌리며 날짜가 지나갔다. 둘 사이의 감정에 불쾌감이 짙어질수록 회사의 일도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감정의 불쾌감이 쌓여가니 신체의 피로도 가중되는 기분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올랐다.

 

“하-...”

 

계단의 끝, 지하철역 입구에서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와-...”

 

바로 앞에 주차장이 펼쳐진 위로 노을이 지는 하늘이 보였다. 몽실몽실 작은 털뭉치 같은 양떼구름 사이사이로 옅은 금빛이 스며들고, 짙은 노란색과 황금빛 주황색이 어우러진 하늘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장마 끝났구나.’

 

그 순간, 벽과 장 구석을 잠식한 곰팡이가 생각났다. 어느새 집을 잠식한 곰팡이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짐과 마무리되지 않은 페인트 칠, 천천히 하나하나 떠올리는 동안 마음이 가라앉았다. 말갛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여기서 뭐해?”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남편이 의아한 얼굴로 옆에 서있었다.

 

“그냥. 하늘이 너무 예뻐서.”

 

그는 고개를 돌려 더욱 짙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편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다 살며시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우리 오랜만에 같이 맥주 한잔 어때?”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손을 잡고 근처의 아담한 맥주바에 들어갔다. 간단하게 안주를 주문하고 작은 맥주 한병을 들고서 자리에 앉았다. 병을 따서 한모금을 넘겨 목을 매끄럽게 만들고 입을 열었다.

 

“화내고 짜증내서 미안해.”

 

불시에 나온 사과에 남편은 머쓱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도 미안해.”

 

약간의 어색함이 흐르고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 곰팡이. 찾아보니까 쉽게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더라고...”

 

“그래? 어떻게?”

 

이후로는 맥주를 마시고 안주를 집어먹으며 곰팡이를 제거할 방법과 짐정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의논하며 오랜만에 즐겁게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모처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골목을 남편의 팔짱을 끼고서 걸으며 환한 달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와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하늘이 참 예뻤었다.

 

추억에 젖어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햇볕이 쨍쨍한 날씨에 감사하며 창문과 문을 전부 열어두고 곰팡이와 사투를 시작했다. 곰팡이를 제거하는 비법이라며 알아낸 방법을 이용해 열심히 뿌리고, 닦아내고, 말리는 동안 해는 중천을 지나갔다. 해가 저물 즈음에는 곰팡이는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깨끗하네. 좋다.”

 

개운한 미소를 지으며 말끔해진 천장과 벽을 둘러보았다. 이 집에 처음으로 들어섰을 때가 생각났다.

 

“여보.”

 

“응?”

 

상쾌한 오렌지 빛 노을이 천장과 벽을 물들이는 걸 보며 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었다.

 

“고마워.”

 

그는 싱긋- 웃으며 손을 들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포근한 온기에 서로 기대어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속삭였다. 서로를 사랑한 처음처럼, 신뢰와 사랑을 약조한 그때처럼, 잔잔하고 따스하게 두근거리며 설레는 시간 속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진다.

 

- 언제나 당신을 사랑해.

글 이어보기

짧은 글 모음집:愛

나를 잊지 말아요

나를 잊지 말아요.

 

여리게 밝아오는 하늘 아래 새벽 이슬에 젖어 또르르- 한방울 흘러냅니다.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리운 그대를 기다리며...

 

당신은 내게 생애 처음으로 느껴본 설렘이었습니다.

모질고 고된 일상 속에서 처음으로 맛본 달콤함이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대를 향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에 짧은 만남이라도 소중했습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그 시간, 그 순간이 더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습니다.

이별이 멀지 않음을 알면서도 잊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비록 당신이 떠나가더라도, 더 이상 만날 수 없더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나와 함께한 시간과 기억이 그대에게 아픔이 아닌 추억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이제는 곁에 다가갈 수조차 없기에 다시 만날 때에는 먼발치에서 나마 볼 수 있기를...

투명한 이슬을 떨어내는 물빛 꽃송이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바랍니다.

 

그대여 나를 잊지 말아요.

 

우리 함께한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하게 웃어요.

가슴 아픈 상처가 아닌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해줘요.

 

그대여 나를 잊지 말아요.

 

나를 잊지 말아요.

 

글 이어보기

바닥이라는 감정

관계의 종지부

 

 

 

   그건 작별인사 같은게 아니었다. 내가 생각했던 관계에 종지부를 찍겠노라 선언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꽤 아름답지 않은 끝이었다. 내가 그에게서 느꼈던 일말의 동정심도 털어버리겠다는 뜻이었으며,

이제 그가 했던 어떤 달콤한 말도 붙잡고 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되돌아 생각했을 때, 함께했던 순간들이 많아서 털어낼 감정의 잔재들이 수북했다. 조금 더 어린 나였더라면 끝내 찾을 수도 없는 이유를 찾아헤매며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인데,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 순간 처절하게 울지 못했던 것은 당신이 아닌, 그 이전의 누군가들이 만들고 간 상처가 나를 견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상처받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켜켜이 쌓여 견고함을 만들었고, 나는 그래서 당신의 어떠한 말도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두렵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혼자 바라보고 고민해야 할지. 돌아오는 상처를 감내하기 위해 얼마나 더 단단해져야 할지. 사실 나는 견고해지고 싶지 않다. 막 돋아난 새순처럼 푸르르고 연약한 존재이고 싶단 말이다.

 

   나는 그래서 당신을 정리한다.

 

 

 

글 이어보기

편하게 쓰는 단편선

사랑의 인식론

책장에 다가가 책 한권을 꺼내본다. 오래된 책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책의 겉표지를 만져보았다. 거친 표면이 손가락으로 느껴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정말 책이 맞는 걸까? 다시 한번 손으로 책을 쓰다듬어보았다. 그러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거친 표면이 느껴졌다. 그리고 천천히 책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갔다.

인식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책의 제목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게 내가 찾는 책이라고 하는 결정적인 되지 못했다.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지금 내 감각이 오작동을 일으켜 전혀 다른 책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천천히 책 겉표지를 살펴보았다. 구석 진 곳에 새겨진 너의 이름이 보이자 그제야 책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책상으로 다가가 책을 내려놓았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책을 보았다. 인식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책 중 하나였다. 무어라 얘기하는 지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헷갈리고 머리만 아파오는 책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다. 난 그렇게 똑똑한 편도 아니었고 논리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만큼 내게 낯설고 어려운 책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장에서 가장 많이 읽은 책을 고르면 ‘인식론’을 고를 것이다. 딱히 생각하지 않아도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책장 한 구석에 가장 헤진 책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식론’일 것이다.

천천히 책을 펼치자 오랜 기억들이 함께 쏟아졌다. 문득 네가 생각났다. 책의 표지를 만지는 너의 모습이, 이 책을 건네주던 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너가 생각나는데 너는 내 옆에 존재하지 않았다.

인식론. 사실 나는 이렇게 어려운 말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나마 내가 이해하는 것이라고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상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본질이 주는 관념은 알 수 있지만 결코 본질 그 자체에는 도달할 수 없었다.

가령 내 눈앞에 있는 이 책. 책은 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이는 대로 존재하는 걸까? 우선 시각에 대해 의심을 해볼 수 있다. 시각이란 상당히 상대적인 것이다. 내 눈의 상태 혹은 주변의 환경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은 책이 흰색으로 보인다. 물론 완전한 흰색은 아닐 것이다. 오래된 만큼 색이 바란 것도 있지. 하지만 그 점은 논외로 치고 만일 여기서 불을 끈다면 책이 하얗게 보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불을 끈다며 어둠 속에서 보이는 책은 검게 보일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시각을 제외하더라도 우리의 오감은 상당히 상대적인 것이다. 누군가는 민트초코가 맛있다고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치약 맛이 난다면 싫어하기도 한다. 또 뜨거운 탕에 들어갔다 냉탕에 들어가면 아무렇지도 않듯이 같은 현상을 느껴도 그것을 감지하는 사람, 주위 환경 등등에 의해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책을 펼쳐보았다. 그 안에 담겨진 수많은 글씨들이 내 눈을 향해 달려들었다. 눈알을 파고들어서 뇌로 흘러들어왔다. 뇌를 가로질러 너를 부르며 끊임없이 너를 불렀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었다. 그저 무기력하게 너를 떠올릴 뿐이다. 저항도 별다른 의미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도 본질을 알 수 없는데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가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때는 그렇게 믿었다. 원래 무식한 놈이 용감하다고 나 또한 그랬다. 단순히 너를 믿고 보이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한 굳은 믿음은 내게는 신앙과도 같았다. 나의 생각은 나를 사로잡는 족쇄였고 내게 달콤하게 속삭이는 악마의 유혹이었다..

“넌 사랑이 무엇인 것 같아?”

너의 그 질문. 그때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사랑이 무엇이냐? 내가 믿는 것이 곧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어리석은 착각에 불과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관념으로 만들어져 있다. 단순한 관념이 모여서 복합적인 관념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모여서 사람을 이룬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너와의 모든 것이 사랑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면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와 함께 밥을 먹는 순간이, 너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걸 사랑이락 부를 수 있을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전에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아끼고 귀중히 하는 것이 사랑일까? 그것은 아니다. 물건을 굉장히 아낀다면 그 물건을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사람 관계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저렇게 쉽게 정의될 만 한 것이 아니다.

책을 넘기며 너의 흔적들을 찾아보았다. 너가 썼던 글씨, 너가 접어놓았던 페이지, 너의 손길이 남아있는 문구들...... 무엇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찾았다.

그렇다면 사람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내가 임의로 정의하기에 무리가 있는 복잡한 관념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형체도 없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다.

물론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자신은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랑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본질이 주는 관념을 느낄 뿐이다. 그 대상 자체에는 다가갈 수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 자신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고 그것은 사랑이 주는 관념이 있는 것이지 사랑 그 자체가 있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랑은 복잡적인 관념이다. 그것은 내가 너를 봤을 때 심장박동, 너와 함께 있을 때의 설렘과 같은 관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관념들이 나타나 내 ‘지성’이라는 놈이 사랑이라는 복합적인 관념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렇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너와 나 사이에서 만들어진 관념일까? 그것은 맞는 말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생긴 관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너와 나에게 같은 의미라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이러한 관념은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너를 보고 설렌다고, 기쁘다고 너 또한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너도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항상 같은 사랑은 느끼지 않았다.

책 속에 ‘사랑해’라고 적혀있는 그 단어를 살며시 만져보았다. 오래 전에 썼던지라 어느새 글씨가 흐릿해졌다. 손가락으로 그 단어를 몇 번이고 만져보았다. 하지만 종이의 촉감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이상했다. 너와 만날 때 몇 번이고 이 단어를 보았다. 너를 생각하면서 만지면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종이에서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사랑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 어땠을까? 이렇게 혼자 책을 읽고 있지 않았겠지. 내 곁에 너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너도 나도 알다시피 절대적인 것은 어디에도 없다. 너가 내게 알려줬듯이 사랑 또한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 그 본질에 다가갈 수 없음을 이미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너 또한 나를 그리 사랑하는 줄 알았다.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마음만큼 너도 나를 사랑하는지 알았다. 그때는 우리가 ‘하나’라도 되는 줄 알았다. 사랑으로 이어져서 ‘너와 나’가 아닌 ‘우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너와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다. 다른 생물이었고 다른 존재였다. 아무리 사랑으로 이어졌다한들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달랐다. 그러므로 너에게 그런 것을 바라면 안됐었다.

책을 덮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밀려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턱을 괴고 점점 생각 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너는 지금쯤 무어를 하고 있을까? 너도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너는 내 생각 따윈 전혀 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지금 너는 무어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 내 곁에 너가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너는 언제나 현명했으니까. 나와는 달리 생각도 깊고 내가 모르는 걸 많이 알고 있었으니까. ‘인식론’도 그렇다. 너가 내게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저런 것이 존재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영원히 너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입장에서만 생각을 하니까. 내가 봐왔던 너만 기억나고 내가 알던 너만 떠올리니까. 그렇기에 내가 너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내가 너를 이해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내 마음대로 너를 규정하고 너를 욕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너가 지금 이곳에 있다면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을까? 너의 생각을, 너의 마음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너가 내게 말을 해준다 한들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니까. 우리는 이미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이별을 선택했다. 가능성이라는 것을 죽이고 현실을 택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떠올리곤 한다. 이렇게 시간이 남는 날이면 너를 생각한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그저 생각만 하더라도 나는 좋다. 물론 이렇게 생가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너가 내 옆에 오는 거도 아니고 우리의 관계가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떠올릴 뿐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이 개소리에 불과하다. 내가 제대로 무어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또 내가 무언가를 추론할 정도로 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뭐가 맞는지 뭐가 틀린지 내가 알바는 아니었다. 그저 나는 너를 생각하며 멋대로 또 생각을 할 뿐이니까. 책을 들고 일어나 책장으로 다가갔다. 원래 있던 자리에 책을 꽂아놓고는 쳐다보았다. 낡은 책은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방문을 열고 나오려다 책장을 보았다. 또 다시 너가 생각나면 이 책을 보러오겠지. 그리고 방문을 서서히 닫았다.

글 이어보기

편하게 쓰는 단편선

시간을 믿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불빛 하나 없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오직 그곳에는 어둠만이 가득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왜 이럴까? 텅 비어있는 천장 사이로 슬며시 너가 보이기 시작했다. 또 시작인걸까? 흐릿해지는 기억 사이로 점점 기어 나왔다. 안개 속을 헤쳐 나오듯이 점점 그 모습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너의 모습이 또 다시 이렇게 나를 찾아온다.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 모서리를 붙잡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살짝 기울였다. 역시 너무 오래 누워있었나 보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살며시 머리를 움켜쥐고는 일어나 한걸음씩 걸어갔다.

방문을 잡는데 갑자기 손에 힘이 풀렸다. 밥을 먹지 않아서 그런 걸까? 식욕이 없었건만 몸은 아니었나보다. 순간적으로 온 세상이 멀게 느껴졌다. 귓가로 삐이이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든 감각들이 동시에 사라졌다. 한순간이었지만 나는 어둠 속에 갇혔다. 아니 어둠이 아니었다. 또 다시 기억 속으로 들어갔었다. 마치 컴퓨터 전원이 꺼지듯이 내 심장 박동도 한 순간 멈췄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었다.

거실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커다란 냉장고 안에 음식은 없었다. 그저 술과 주스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흔한 계란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술병과 주스를 잡고 문을 닫았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음식보다 술이었다. 각혈을 하고 허기에 굶주려도 차라리 술을 마시는 편이 좋았다. 음식이 내 배를 배부르게 만들어준다면 술은 내 허기진 영혼을 배부르게 만들어주었다. 의사는 더 이상 술을 마실 경우 세상과 안녕을 할 수 있다며 엄중하게 경고를 했었다. 하지만 이 술이 나를 죽이지만 또 나를 살리는 것이 이 술이었다.

술은 보드카였다. 언제부터 이 술을 마셨을까? 한 일년정도 된 것 같았다. 남들은 그런 술 왜 마시냐고 하지만 보드카는 사실 생각보다 좋은 술이었다. 취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고 금세 모든걸 잊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물론 술에 약한 나는 보드카를 그대로 마실 수는 없었다. 주스와 섞어 마셔야 했다. 조금 번거롭기는 했으나 그래도 나는 보드카를 좋아한다.

양주잔을 꺼내와 보드카를 따랐다. 그리고는 그 위에 주스를 마저 따르고 섞었다. 휘휘 젓가락으로 젖고는 싱크대에 젓가락을 던졌다. 팅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잔을 가볍게 한번 들어보았다. 살짝 술 냄새가 올라오는 것이 괜찮아보였다. 술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달콤한 주스 사이로 알코올이 흘러 들엉왔다. 살짝 비린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주스를 조금 더 넣어야했나보다. 하지만 그래도 그냥 마셨다. 어찌됐건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알코올이 들어가는 것. 그 자체가 가장 우선이었다.

술을 홀짝 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에도 어둠은 짙게 내리깔고 있었다. 그 위로 달빛이 살포시 내려앉았지만 방안을 밝혀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불을 켜볼까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차라리 어두운 편이 나았다. 텅빈 집안에 혼자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면 또 다시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양주잔에 술을 다시 따르고 그 위에 주스를 쏟아냈다. 섞어야 했지만 더 이상 내 알바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주스를 부어버리고는 베란다로 향했다.

“결국 달라진 것이 없네.”

일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이 집에 혼자 있게 된 것이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한해가 흘러갔지만 나는 그대로였다. 세상만물이 움직여도 나는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순수했던 것이다.

‘미안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야.’

내 일생 딱 두가지를 믿었다. 회의적인 나도 믿는 게 있었다. 그게 바로 너와 시간이었다. 나에게 달콤하게 속삭이는 너의 말이라면 모든 걸 믿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너의 말도 믿었다. 너가 말한 시간도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거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내 믿음은 배신으로 돌아왓다.

베란다의 창문을 열자 따뜻한 바람이 흘러들어왔다. 어느새 겨울이 가고 봄이 오나보다. 또 다시 계절은 바뀌어가고 있었다. 다시끔 사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너가 말한대로 괜찮아지지 않는 걸까?

난간에 술잔을 올려놓고 턱을 괸다. 창문 밖 도시의 풍경은 검게 칠해져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모습은 유난히 쓸쓸해보였다. 그런 어둠 속에서 다시 너의 모습이 보인다. 지긋이 너를 본다.

너는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기억 속 너는 그대로였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 해맑은 미소, 슬픈 눈동자, 미안하다는 말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적어도 내게 너는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우리가 지내온 시간만큼 시간이 간다면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믿었었다. 하지만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라는 장막 안에는 허무만이 가득하였다.

‘누구나 다 한번씩 겪는 거야. 괜찮아.’

친구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엄밀히 따지면 누구나 다 한번씩 겪는 일이다. 이별이라는 것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게 너와 나의 이야기인줄은 몰랐다. 정말 바보 같고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우리가 한때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너라면 내 곁에 평생 있을 줄 알았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감정의 동물이다. 결국은 감정을 따르는 법이다. 아무리 이성이 앞선다고 주장해도 감정이 이를 무시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성이 매달리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소리쳐도 감정은 내게 다가온다. 매번 다가와 내 귀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떠나버린다.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숨 쉬며 죽지도 않고 나를 흔들어 놓는다.

술을 마신다. 술술. 술은 잘 넘어간다. 모든 것이 이리 쉽게 넘어간다면 어떨까? 이 감정들도 다 집어 삼킬 수 있다면 괜찮아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감정은 기생충이다. 아무리 집어삼켜도 소화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나를 먹이로 삼고 그 몸집을 불려나가겠지. 지난 일년동안 그래왔듯이 내 심장을 갉아 먹고 너에 대한 기억을 자극하고 너를 갈구하겠지.

천천히 난간 위에 올라갔다. 발 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아찔했다. 새까만 어둠이 내게 다가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살짝 들어보았다. 발가락 사이로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시원했다. 이대로 바람에 몸을 맡긴다면 이 답답한 속도 뻥 뚤릴까?

그 순간 술잔이 베란다 안쪽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술잔이 깨져버렸다. 멍하니 고개를 숙여 술잔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끝난다면 어떨까? 내 세계도 술잔처럼 깨진다면 이 고통도 괜찮아질까? 심장이 쿵쾅거렸다. 끝이 난다. 모든 것이 편해진다. 당장이라도 그 끝을 볼 수 있었다. 그저 한걸음 나아가면 되는 일이다.

그 순간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내 세계가 끝난다는 것. 그것은 너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얘기이다. 너의 얼굴도, 너의 목소리도, 너와 함께한 모든 순간들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찌 사람은 이토록 어리석은 존재인걸까? 고작 한걸음이었다. 딱 한걸음이면 편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그 한걸음을 나아가지 못했다.

난간에서 내려와 방으로 들어갔다. 싱크대에는 씻지 않은 젓가락이 뒹굴고 베란다에는 깨진 술잔이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무릎 사이로 얼굴을 포개고 숨을 죽였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간다고 한다. 오늘을 숨 쉬고 내일을 생각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과거의 망령이었다. 죽지 못해 사는 유령이었고 내일을 부정하는 괴물이었다. 나는 명백히 과거를 살아가고 있었다. 어제를 생각하고 그저께를 추억하고 있었다. 내 시간은 갈수록 뒤로 가고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나는 널 생각했다. 너와 처음 만난 날부터 마지막 그 순간까지 우리의 역사를 다시 새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내게 남겨진 것은 없었다. 그저 또 다시 무너질 뿐이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끅끅. 알 수 없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소리는 귓가를 타고 흘러들어가 심장에 못질을 하기 시작한다. 아프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는다. 뜨거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보니 조금씩 의식이 멀어졌다. 또 다시 이렇게 하루가 가는 구나.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눈을 뜨면 내일이 올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 와도 나는 어제를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