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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

기름막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내 존재의 의미가 그의 감상에 대한 리액션을 위한 것인 듯 대하곤 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풍부한 표현력과 넓은 배경지식을 가졌었고 그것들을 늘어놓으며 나를 가르치길 좋아했다.

'세상에 너 같은 감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어쩜 그런 방식으로 관찰하는 창의적인 생각을...!'

 이런 반응 몇 가지면 몇 시간이라도 떠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도 내가 감탄할 때마다 그가 더 흥이 올라 얘기하는 모양이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대화의 흐름은 나에게 공허함만 가져다 주었다. 킬링타임용 영화를 보아도, 맛있는 케이크를 먹어도, 뜬금없이 귀여운 모양의 구름을 보아도 나의 생각, 나의 기분, 나의 상태는 없었다. 오직 그의 생각, 그의 기분, 그의 상태만 입혀져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우리'는 없고 그의 껍데기를 덮어쓴 나만 있었다. 기름막으로 둘러싸인 물방울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막의 빈틈으로 수분이 새어나가 쭈글쭈글한 기름막만 남게 되어 불쾌함이 되었다.

 누군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다. 나는 빠르게 적응했고 아무렇지 않았다. 늘 있는 불행에 슬퍼하는 것은 나를 파먹는 짓이라고 어리석은 합리화를 반복하며 나를 곪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영화를 보고 나와 영화가 어땠는지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특히 신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항상 기회를 뺏겼던 첫 감상을 드러낼 수 있었기에 그에 충실하게, 하지만 적당히 절제된 내용으로 답했다. (그의 감상이 나와 같다면 그가 말할 내용을 남겨두려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던 그가 불쑥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당신 얘기만 해요?"

 

기분이 크게 나쁘진 않았다. 불쾌함의 역치가 한껏 높아져 있었기에 별다른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생각이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이런 대화를 해선 안된다.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그를 그만 보는 것.

이 간단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너무 많이 돌아온 느낌이었다. 돌고 돌다 너덜해진 감정은 슬퍼할 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