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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8

계단을 내려갈수록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어두컴컴한 그곳은 지옥의 입구 같았다. 먼저 잡힌 사람들은 거의 헐벗은 채로 나무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허벅지 위에는 노가 눕혀져 있었고 그들의 몸은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족쇄를 찬 손과 발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검은 얼굴의 해적이 발레트의 등을 떠밀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앉아."
밑은 온통 오물 투성이었다. 갤리선 노예들은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노를 젓고 먹고 자며 심지어 배설까지 앉은 자리에서 해결했다. 하루에 한 덩이의 빵이 그들이 먹는 음식의 전부였으며 등에 내리꽂는 채찍질은 노예들의 수명을 더욱 단축시켰다. 매일 한 명씩 죽어나갔고 시체는 바다로 던져졌다. 해적은 손에 채찍을 들고 발레트에게 눈을 부라리더니 위로 올라가 버렸다.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 닫혔다. 발레트는 어둠과 함께 남겨졌다.

"출발이다! 노를 잡아!"
갑작스런 큰 소리에 발레트는 놀라 눈을 떴다. 검은 얼굴의 해적이 다리를 벌리고 서서 무언가를 크게 외치고 있었다. 그는 손과 발에 채워진 족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발레트는 현실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노를 잡아요, 어서!"
어렴풋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발레트는 고개를 들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덩치가 산만한 사내의 검은 얼굴이 보였다.
"어서요!"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가 맡아졌고 다급한 소리가 그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발레트는 족쇄를 찬 손을 들어 올려 노를 잡았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노는 위로 올려지더니 아래로 다시 위로, 아래로를 반복했다. 해적은 통로를 걸어다니며 채찍을 휘둘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빨리, 더 빨리!"
발레트는 자신도 모르게 힘껏 노를 쥐었다. 수십 개의 노들이 구령에 맞춰 앞으로 나아갔다. 노를 저으면 저을수록 간밤의 기억이 또렷이 살아났다. 불 타던 마을과 눈을 부릅뜨고 죽은 동료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발레트는 이를 꽉 물고 노를 밀어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남자가 항구의 오래된 주점에 들어섰다. 그는 구석의 빈 자리에 앉아 고개를 살짝 들어 주점 내부를 둘러보았다. 선원들은 술에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잡다한 농담을 하며 실실거리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꼬마 하나가 얼굴을 삐죽 내밀고 안을 들여다 보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탁자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쪽지를 펼쳤다. 짧은 단어를 읽자마자 남자는 모자를 푹 누르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쪽지를 전해 준 꼬마가 주점 앞에서 그를 향해 손짓했다. 꼬마 아이는 미로같은 골목길을 다람쥐처럼 뛰어갔다. 막다른 골목길이 보이자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남자의 눈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아 섰다.
"사데트."
"사데트."
허름한 복장의 비토 발티가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감시가 심해 이렇게 만날 수 밖에 없었소, 이스탄불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오?"
비토는 남자에게 둘둘 말린 종이를 건네며 물었다.
"새로운 함대를 조직하고 있는 중이요."
남자는 모자를 고쳐 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규모는 어느 정도로?"
"70척은 될거요."
"곧 지중해 원정이 시작되겠군. 다음에는 다른 방법으로 만나야 할거요."
발티는 사내의 어깨에 손을 올려 인사를 한 후 곧 사라졌다. 모자를 눌러 쓴 남자도 미로속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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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7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는 깊은 어둠 속, 트리폴리 해안에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들은 빠르면서도 조심스럽게 해안 근처 마을로 들어가 집집마다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지고 잠을 자다 놀란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때를 기다린듯이 해적들은 정신없이 나오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짓밟고 죽였다.
"해적이다! 해적이 나타났다!"
잠결에 들리는 시끄러운 바깥 소리에 발레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칼을 들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병사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고 있었다.
"해적입니다! 급습이에요!"
발레트는 성벽 위로 단숨에 올라갔다. 이미 마을은 불에 타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고 짐승들이 시체 위를 날뛰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 했다. 발레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주저앉아 있었다.
"각자 위치로!"
발레트는 중얼중얼거리는 병사를 일으켜 세웠다. 로메가스가 성벽 위로 뛰어 올라왔다.
"이미 마을은 초토화됐어요! 수비대는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물자 조달이 되지 않아 이미 창고에 화약은 동이 난 터였다. 병사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집결할 여력도 없었다. 연병장에는 수비대장 멘데스가 병사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요새를 사수해야 한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라!"
"화승총이 부족합니다. 대포를 쏠 화약도 없습니다."
지휘관 한 명이 고개를 떨군 채 멘데스에게 보고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한다!"
멘데스는 칼을 뽑아 들며 단상에서 내려갔다. 성벽 위에서는 병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공포스러운 괴성과 함께 요새를 뚫을 듯한 총소리가 들렸다. 총탄은 빗발치듯 성벽에 난사되었다. 수비대는 하나 둘 쓰러졌다.
"방어선이 뚫렸습니다! 누군가 성문을 열어준 듯 합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알 수 없는 함성과 함께 터번을 두른 해적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수비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자들도 있었다.
"항복해라! 목숨은 살려주겠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해적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거만하게 소리쳤다.
"살고 싶으면 항복해라!"
병사들이 부들부들 떨며 하나 둘 칼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버틸 힘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항복! 항복이요!"
멘데스가 칼을 버리고 손을 들었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도 칼을 버렸다.
"누가 책임자냐? 너냐?"
우두머리 해적의 칼끝이 멘데스의 목에 닿았다. 멘데스는 해적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은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으며 칼에 힘을 주었다.
"이슬람교로 개종을 할 건가?"
"그럴 일은 없소."
멘데스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뱉었다. 우두머리 해적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치켜 올라가더니 뒤를 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다른 해적이 배시시 웃으며 멘데스의 무릎을 꿇려 앉혔다. 멘데스의 눈이 질끈 감기는 것과 동시에 해적이 칼을 내리쳤다.
"살아남은 자들은 전부 배에 태워라!"
해적들은 소리를 지르며 기사단의 십자가 망토를 벗겼다. 발레트의 손목에 굵은 밧줄이 동여졌다. 기사단원과 수비대, 마을 주민들은 모두 한데 묶여 해안으로 떠밀려갔다. 마을은 연기로 자욱해 눈을 뜰 수 없었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사람들만 흐릿하게 보였다. 평온했던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이곳은 죽은 자의 땅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발레트의 등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앞만 보고 걸어."
해적은 꼬질꼬질한 얼굴을 들이밀며 비열하게 웃었다. 발레트는 이를 악 물었다. 트리폴리의 기나긴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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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6

피오르 신부는 할 일 없이 성당 안을 이리저리 걷고 있는 안드레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앉았다 일어섰다 안절부절못하며 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언제 제노바로 돌아갈 생각이냐?"
"다음 주엔 가야 해요. 곧 바르셀로나로 이동할 것 같아요."
안드레아는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발을 떼며 대답했다.
"위험한 상황인거야?"
피오르 신부가 걱정이 담긴 말투로 물었다.
"아니에요, 삼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안드레아는 피오르 신부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신부는 이제 자신의 손보다 더 큰 조카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런데 아침 일찍 성당에는 무슨 일이냐? 기도하러 온 건 아닐테고."
안드레아는 대답 대신 멀뚱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넌 곧 떠날 사람이야, 안드레아."
"그렇지만 그녀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안드레아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피오르 신부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신부는 온화한 표정으로 괴로움을 머금은 조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성당 중앙에 빛이 한 줄기 비치더니 가벼운 발소리가 울렸다. 안드레아는 재빨리 몸을 숙였다. 나디아는 제단 앞으로 걸어와 성호를 긋고 초를 켰다.
광장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성당 입구 기둥에 기대어 빛으로 휘감은 임디나를 바라보았다. 정문이 열리고 나디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소매가 넓은 푸른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는 어깨 아래로 길게 굽이쳐 흘렀고 오묘한 초록 눈은 세상을 다 담을 듯 깊었다.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안드레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디아는 고개를 돌렸다. 깔끔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안드레아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같이 걸어도 될까요?"
나디아는 불쑥 자신 앞에 나타나는 안드레아의 행동에 당황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앞섰다.
"매일 기도하러 오는 건가요?"
안드레아는 나디아의 걷는 속도에 걸음을 맞췄다.
"네, 매일마다."
나디아는 시선을 앞에 둔 채 짤막하게 대답했다.
"제 어머니도 그러셨죠."
과거형인 그의 말에 두 사람 가운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몰타는 처음인가요?"
"이번이 두 번째에요. 제노바도 바다를 끼고 있지만 몰타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와는 비교할 수가 없어요. 특히 포도주 맛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안드레아는 나디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디아는 어색함을 느끼고 화제를 돌렸다.
"피오르 신부님과 사이가 좋아 보여요."
"아버지가 엄하신 편인데 삼촌은 늘 제 얘기를 들어줘서 어릴 때부터 많이 따랐어요. 몰타로 가신 후엔 자주 볼 수 없지만.."
"신부님은 정말 너그러운 분이에요. 모두의 친구이기도 하고."
"앞으로 더 자주 몰타에 와야겠어요."
"신부님이 좋아하실 거에요."
나디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따뜻하게 말했다.
"다시 찾았을 때 오늘처럼 당신과 걸을 수 있을까요?"
나디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때야 비로소 안드레아를 보았다. 조금 전의 천진한 표정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안드레아는 나디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디아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거렸다. 광장의 분수대에서는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의 머리 위로 한 쌍의 새가 지저귀며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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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5

릴라당은 시종에게서 서신을 전달받고 빠르게 읽어나갔다. 발신처는 트리폴리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무엇인가를 써 내려갔다. 그런 다음 인장이 봉해진 두 개의 편지를 시종에게 건넸다.
"하나는 에스퍄냐로, 다른 하나는 트리폴리로."
트리폴리의 사정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발레트는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할 테지만 낯선 땅에서 해적을 상대로 요새를 방어하는 것은 필시 외로운 싸움일 것이었다.
릴라당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빌구와 생리아의 요새 보수 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발레트를 트리폴리 요새로 보내자 보키아는 그 일을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다. 보키아는 에스파냐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넘어서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길 바랬다. 릴라당은 비밀히 비토 발티를 감시하게 했으나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기사단 숙소에 잠입했던 투르크인은 갤리선 노잡이로 보내졌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으나 미심쩍은 부분은 남아있었다. 투르크인이 찾으러 온 칼 그리고 새겨진 이름, 살람 메메드.
'살람 메메드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인가?'
썩은 싹을 뿌리 채 뽑지 못한다면 몰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오스만이 훤히 알게 될 것이 뻔했다. 정찰병은 또 보내져 몰타에 숨어들 것이었다.
'말이 모이는 곳이 어딘가?'
동.서양을 오가는 상선의 중간 기착지로서 몰타의 항구는 온갖 소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들의 말은 서로 뒤엉켜 한곳에 모였다가 어딘가로 다시 흩어졌다. 말이 모이는 곳. 모든 정보를 틀어쥐고 있는 사람을 알아내야만 했다.

 


성당을 향해 걸어가던 안드레아는 검은 베일을 쓴 여인과 피오르 삼촌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에게 가까워지자 인기척을 느낀 여인이 신부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듯 여인의 행동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안드레아, 어딜 다녀오는 거냐?"
피오르 신부는 앞으로 걸어나오며 안드레아를 맞았다.
"항구 주변을 산책하고 오는 길이에요."
"아름다운 곳이지?"
피오르 신부는 광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드레아는 대답없이 삼촌과 같은 곳을 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아침 햇살에 비친 임디나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고 평온했다. 마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현실과 상관없이 따로 떨어진 공간 같았다. 모래색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시간의 흐름을 무색하게 했다. 안드레아는 낯설면서도 신비한 임디나의 정취에 빠져들었다. 이곳은 이방인을 붙잡아 두는 어떠한 힘이 있었다.

 

 

안드레아를 지나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오른 여인은 얼굴을 덮고 있던 베일을 걷어 올렸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잠자던 말의 눈이 떠지며 긴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임디나에서 가장 높은 성채의 성문을 지나 뜰에 멈춰섰다. 어린 하인이 문을 열자 검은색 소매자락과 함께 새하얀 손이 보였다.
"보키아 경께서 찾으십니다."
앞에 서 있던 비토가 보키아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보키아 부인은 어린 시녀에게 아들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물어볼 뿐이었다. 그녀는 가브리엘을 방으로 데려오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가브리엘?"
방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리자 베일을 벗고 머리를 다듬고 있던 보키아 부인이 밝은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나요, 부인."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문앞에 보키아가 서 있자 아무 말 없이 다시 거울로 시선을 주었다.
"성당에 다녀오는 길이오?"
보키아는 화장대 앞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신부님을 뵙고 왔어요."
그녀는 다소 차가운 말투로 여전히 보키아를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피오르 신부가 나보다 당신의 얼굴을 자주 보겠군."
보키아는 창 쪽으로 걸어가며 밖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죠?"
더 이상의 말은 듣고 싶지 않은 듯 짜증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며칠 후 에스파냐에서 손님이 오는 건 알고 있겠지.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길 바라오."
보키아는 할 말을 마치자 방을 나가 버렸다. 그녀는 들고 있던 머리빗을 화장대에 내려놓았다. 거울 속에는 생기잃은 표정의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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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4

트리폴리는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암벽 돌출부에 자리하고 있는 해안 도시였다. 에스파냐 수비대와 성 요한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성채는 에스파냐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이곳의 음울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밝고 평온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작고 소박한 자신의 방에서 발레트는 릴라당에게 보내는 서신을 쓰는 중이었다. 짧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로메가스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야?"
"밖에 나와 보셔야 겠어요. 에스퍄냐 병사 한 명이 도망치려다 잡혔어요."
발레트는 쓰기를 멈추고 서둘러 방을 나갔다. 연병장에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병사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고 수비대장 멘데스가 단상 위에서 고함을 치고 있었다.
"군인에게 병영을 무단 이탈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나가서 무엇을 하려고 한거지? 바르바리 해적이라도 되려고 했나?"
멘데스는 숨도 쉬지 않고 병사를 몰아부쳤다.
"아닙니다.. 고.. 고향으로 가려고 했던 것 뿐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요."
병사는 벌벌 떨며 울먹거렸다.
"함께하는 전우들은 보이지 않나? 이들도 고향에 처와 자식을 두고 왔다. 도망치는 것은 조국을 버리는 일이다!"
"살... 살려주십시요.."
병사는 얼굴이 땅에 닿을 때까지 연신 몸을 굽혔다. 탈영하는 병사는 즉각 처분되는 것이 규율이었다. 발레트는 단상으로 올라가 멘데스 옆에 섰다.
"병사들이 많이 지쳐있습니다. 엄중하게 경고하고 매로 다스리는 것이 어떻겠..."
멘데스는 손을 들어 발레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발레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어떤 말도 통할 것 같지 않은 무쇠같은 얼굴이었다.
"저 자는 탈영병이요. 군에서 명령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오. 예외란 없소."
"본국에서 보급품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식량도 부족한 상황에서 타국의 요새를 지키는 것이 쉽겠습니까?
군대의 규율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발레트는 이 버려진 곳에서 병사들이 얼마나 힘들게 버티고 있는지를 알았다.
"에스파냐 수비대의 일이요. 기사단이 참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끌고 가라!"
멘데스는 굳은 표정으로 지시를 내리고는 단상을 내려갔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요.. 자비를!!"
병사는 끌려 나가면서도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연병장에 남아있던 병사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각자 자리로 흩어졌다.
"상황이 갈수록 나빠져 가네요. 이곳은 허울뿐인 요새에요."
로메가스는 멘데스의 차가운 얼굴을 흘깃 쳐다보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에스파냐에게 이곳은 잊혀진 곳이야. 여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없어. 요새를 지어 해적을 막는 시늉만 할 뿐이야."
발레트 자신도 앞으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볼멘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바르바리 해적들이 불시에 요새를 습격할 수도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병사들을 격려하며 함께 요새를 지키는 것 밖에는 없었다. 발레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비가 내리겠군."
두 사람은 탈영병의 절규만 남은 연병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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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3

"안녕하세요, 아저씨!"
망치 소리로 가득한 빌구의 성벽에 나디아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부들은 하던 작업을 중단하고 나디아 주위로 모였다. 그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나디아가 가져온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나디아는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저도 한 잔 주시겠습니까?"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에 나디아는 고개를 들었다. 정오의 강렬한 햇빛에 나디아는 눈을 찡그렸다. 그녀는 이마에 손을 얹고 위를 올려다 보았다.
"안녕하세요?"
활기찬 음성이었다. 해를 등진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네.. 안녕하세요."
나디아는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는 포도주를 잔에 부어 남자에게 건넸다.
"낮은 정말 덥네요."
그는 모자를 벗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남자는 현지인과는 조금 다른 옷차림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좋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풍성한 소매의 겉옷을 입고 있었다.
"기억을 전혀 못하는군요. 어제 우리 만난 적이 있는데.."
남자는 장난기가 배어 있는 얼굴로 나이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제서야 나디아는 어제 아침 성당에서 한 사내와 마주친 것이 생각났다. 남자는 처음 만난 사이에도 스스럼없이 말하는 활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나디아는 화려한 색감의 옷을 입은 젊은 청년이 빌구의 성벽에는 무슨 일로 온 건지 궁금해졌다.
"훌륭한 포도주에요! 직접 만든 건가요?"
"포도 수확기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요. 집집마다 지하에 저장소가 있어요."
남자는 잔을 다 비우고는 기분 좋게 활짝 웃었다. 그는 인상이 밝았고 말투나 행동에서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면이 있었다.
"점심 때 이곳으로 가면 당신을 볼 수 있다고 삼촌이 알려주더군요."
나디아의 의아한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남자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피오르 신부님이 제 삼촌이에요."
나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피오르 신부님께 조카가 있었군요. 그런데 저를 왜..?'
나디아의 물음에 안드레아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디아, 인부들에게 포도주를 더 따라주거라."
나디아의 등 뒤로 크레누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크레누는 나디아와 함께 있는 낯선 이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그런데 누구요?"
"안녕하십니까. 안드레아 보르노라고 합니다.
크레누의 투박한 말투에도 안드레아는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어디서 왔소?"
"제노바에서 왔습니다."
"제노바에서 무슨 일로?
"삼촌을 뵈러 왔습니다.
크레누의 심문하는 듯한 질문에도 안드레아는 불쾌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삼촌을 보러 왔다면서 여기서 뭐하는 거요?"
"몰타의 풍경을 여기서 꼭 봐야한다고 들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주변을 둘러보다 앞의 스케베라스산을 가리켰다.
"여긴 지금 보수 공사 중이요. 함부로 들어올 수 없소."
크레누는 퉁명스럽게 말을 뱉으며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안드레아는 모자를 고쳐 쓰며 크레누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뒤편에 있는 나디아에게도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성벽을 내려갔다.
"아는 사람이냐?"
크레누는 안드레아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않으며 물었다.
"어제 성당에서 잠깐 마주쳤어요. 피오르 신부님의 조카에요."
크레누는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으나 말을 아꼈다. 태양은 바다 위의 작은 섬에 뜨거운 입김을 사정없이 불어 넣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선명하게 푸른 지중해는 여인의 눈동자처럼 깊고 아름다웠다. 나디아는 늘 그렇듯이 경계 너머의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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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2

바르바리 해안의 트리폴리는 북아프리카의 도시 국가로 에스파냐가 바르바리해안에 축조한 요새가 있는 곳 중의 하나였다. 카를 5세가 성 요한 기사단에게 몰타 섬을 양도할 때 트리폴리 요새의 방어를 맡기는 조건을 포함했기에 릴라당은 이곳에 기사들을 상주시켰다. 트리폴리는 시칠리아 섬까지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었음으로 해적을 상대로 이곳을 수비하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바르바리해안은 붉은 수염의 해적, 바르바로사의 근거지로 해적들은 북아프리카와 서지중해를 오고 가는 상선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기독교인들을 사로잡아 노예로 팔았다. 이곳은 상식과 법이 통하지 않는 말그대로 무법천지였다. 남의 것을 약탈하여 한 몫 단단히 챙겨보려는, 금은 보화에 눈이 먼 동지중해인들이 앞다퉈 이곳으로 넘어왔다. 거리에는 기독교 노예를 사고 파는 시장이 열렸고 터번을 높게 두르고 초승달 모양의 칼을 찬 이슬람 해적들이 술에 취해 서로 욕을 하고 싸움을 벌였다. 그들에게 살인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것에 불과했다. 욕망의 바다에서 양심은 이미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서지중해인들에게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어린아이에게 바르바로사의 이름을 들려주면 즉시 울음을 멈췄다. 여인들은 성호를 그으며 십자가 목걸이에 입을 맞췄다. 북아프리카 해적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트리폴리 요새 성벽 위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는 발레트의 머리 위로 바람이 불었다. 그는 미동도 없이 저 멀리 수평선에 눈을 고정시켰다. 발레트가 트리폴리에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성 요한 기사단과 트리폴리에 주둔한 에스파냐 수비대는 이슬람 해적의 급습에 대비해 트리폴리 주변 해안선의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에스퍄냐는 북아프리카의 요새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본국에서 들어오는 물자도 넉넉치 않아 병사들에게 충분히 식량이 공급되지 못했다. 주변은 그들과 다른 언어와 종교를 가진 아랍 주민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요새는 고립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져갔다. 그들은 하루빨리 북아프리카를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프랑스를 떠난 이후로 발레트는 지중해를 누비며 살았다. 지중해는 그의 삶의 중심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바람과 저항할 수 없는 파도는 늘 그를 따라다녔지만 그는 맞서서 싸웠고 굴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고 그것이 옳은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삶은 오히려 그를 중심에서 밀어냈다. 트리폴리는 삶의 변두리같은 곳이었다. 어디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일까? 차가운 공기가 발레트의 몸을 감쌌다. 파도는 쉴 새없이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안개는 유령처럼 스며들어 발레트의 발끝에서부터 점차 올라와 그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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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

임디나는 몰타의 옛 수도로서 언덕 지대에 위치한 중세풍 성채 도시였다. 성벽이 견고하지 못하고 주민들을 다 수용할 공간도 부족해 요새의 기능은 잃었지만 이곳은 몰타의 역사를 대변하는 곳이었다. 도시는 고유의 색을 갖고 있었고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다. 광장의 성 바울 대성당은 로마로 압송되던 바울 사도가 탄 배가 몰타 근처에서 난파를 당해 섬에서 겨울을 보내게 되면서 기독교가 전해진 것을 기념하는 성당으로 임디나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었다.
나디아는 성당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예수의 수난을 그린 벽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목걸이의 십자가 펜던트에 입을 맞춘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디아."
성당의 사제가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디아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성당 정문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평소와 같아요. 매일 아침 성당에 왔다가 아저씨가 일하는 곳으로 점심을 가져가요."
나디아는 밝은 음성으로 대답하며 사제를 향해 웃어보였다. 아침 햇살이 창을 통과해 성당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크레누씨는 안녕하신가요?"
"성벽 공사로 많이 바쁘시지만 잘 지내고 계세요."
"날이 더운데 모두 수고가 많군요."
문앞에 다다르자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췄다.
"자, 그럼 오늘도 평안히."
나디아가 성호를 그은 후 몸을 돌려 문에 손을 갖다 대자 갑자기 안으로 문이 밀리며 한 사내가 나타났다.
"아, 죄송합니다. 아가씨."
사내는 정중하게 사과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두 사람은 스치며 잠시 눈이 마주쳤다.
"안드레아! 여긴 어쩐 일이냐!"
뒤에 있던 사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그제서야 사제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삼촌!!"
두 사람은 반갑게 웃으며 서로를 안았다. 사제는 사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기별도 없이 어떻게 된거야?"
안드레아는 사제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의 주의는 온통 방금 전 스쳤던 여인에게로 가 있었다. 이미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안드레아는 나디아가 걸어간 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제는 대답없는 안드레아 옆에 서서 조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드레아?"
"아... 삼촌..."
안드레아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코를 찡긋거렸다. 사제는 다시 한번 팔을 벌려 안드레아를 힘껏 안았다. 몇 년만에 보는 조카는 이제 제법 청년티가 났다.
"자, 안으로 들어가자. 듣고 싶은 얘기가 많구나."
안드레아는 신부와 같이 성당으로 들어가면서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문이 열리고 그녀의 얼굴과 마주했을 때 그앞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 같았다. 그것은 그가 겪어보지 못한 세계였다. 불과 몇 초였지만 그의 삶에서 그토록 긴 순간은 없었다. 안드레아는 고요한 빛으로 둘러쌓인 성당을 마치 처음 보는 것인 마냥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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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15

"보키아 경이 첩자 사건에 관해 책임을 요청해 왔습니다."
며칠 후 열린 기사단 위원회에서 참모들은 열띤 논쟁을 벌였다. 발레트는 발티의 출신을 밝히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했으나 투르크인이라는 그의 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신분은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단장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무리하게 수사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
위원들은 발레트의 수사 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보고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한 것도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발레트의 방을 침입한 투르크인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가 첩자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몰타 내 첩자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사건의 매듭을 확실히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러나 위원들의 반발은 거셌다.
"첩자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한 기사단의 명예는 실추됩니다. 보키아는 몰타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와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기사단의 존속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위원회의 참모들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빌구와 생리아의 요새 방비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증거도 없이 첩자 문제를 부각시킬 수 없었다.
"단장님,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오스만이 우리쪽의 정보를 손에 넣었으니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또 하루빨리 요새 작업도 끝을 맺어야 합니다."
릴라당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발레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러나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정황만으로는 더 이상 밀어부칠 수 없었다. 릴라당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참모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를 트리폴리로 보낸다."
 

 

발레트는 스케베라스산을 올려다 보았다. 산은 늘 이 자리에서 누군가를 맞이하기도 했고 누군가를 떠나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트리폴리로 가는 갤리선은 이미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혼자 어딜 가시려구요?"
로메가스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뿌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왔다.
"로메가스,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넌 여기 있어야 해."
"있고 말고는 제가 결정합니다."
로메가스는 발레트를 앞질러 걸어갔다. 로메가스가 우기기 시작하면 그 고집은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 에스파냐 출신의 로메가스와는 로도스 섬에서부터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그들은 친형제처럼 서로를 위했고 지중해를 누비며 함께 싸웠다. 발레트는 로메가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앞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때 등 뒤에서 다급히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나디아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레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나디아!"
나디아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녀의 초록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 보였다.
"나디아, 어떻게..."
발레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가능한 한 조용히 트리폴리로 가고자 했기에 빌구의 성벽에도 찾아가지 않았다. 나디아를 보는 순간 마음속에 작은 일렁거림을 느꼈지만 발레트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트리폴리로 가신다고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그녀는 초록 눈을 들어 발레트를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기사단에서..."
"꼭 주고 싶은 게 있었어요."
나디아는 품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오빠가 제게 준 칼이에요. 고조 섬을 나오기 직전에..."
"나디아.."
나디아는 발레트의 손에 작은 칼을 쥐어 주었다.
"이 칼은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 의미가 있어요.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건강히 돌아와요."
나디아는 칼을 쥔 발레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녀의 깊은 초록 눈망울에서 더 이상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발레트는 그녀가 처음 만났을 때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짐때문에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트리폴리로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에서 나와 자신과 마주한 나디아의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트리폴리는 실패의 결과가 아니였다. 그는 주저함없이 다른 문을 열었다. 발레트는 따뜻한 시선으로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다녀올게요, 나디아."
발레트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등을 돌려 걸어갔다. 갤리선의 돛이 힘차게 올려졌고 바람은 조용히 그들을 이끌었다. 발레트는 다시 푸르른 지중해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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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14

정적만이 감도는 이른 아침이었다. 기사단 숙소의 안뜰에 단장인 릴라당을 비롯한 기사단 전원이 모였다. 뜰의 중앙에는 검은 복장의 투르크인이 결박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투르크인은 어젯밤 릴라당이 발레트의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의연해 보였다.
"단장님, 보키아 경이 도착했습니다."
릴라당의 시종이 보키아의 도착을 알리자마자 높은 음의 목소리가 뜰안에 울려 퍼졌다.
"단장님,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보키아는 급히 나오는 길임에도 완벽한 옷차림이었다. 어떠한 틈도 허용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 했다. 발레트는 보키아 뒤에 서 있는 발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결박된 사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결례가 많습니다. 중요한 일이라 부득이 모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젯밤에 제 보좌관 발레트의 방에 저 사내가 침입했습니다."
릴라당은 무릎을 꿇은 사내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몰타인 복장을 하고 있지만 여기 사람이 아닙니다. 투르크인이죠."
투르크인이란 말에 보키아는 그제서야 사내를 쳐다보았다.
"단장님, 그게 아침부터 제가 여기로 와야 할 이유와 상관있습니까?"
"이게 그 이유입니다."
릴라당은 화려하게 세공된 초승달 형의 칼을 보키아에게 보였다.
"저 자는 이것 때문에 여기 있는 겁니다. 우리는 몰타내 오스만 첩자를 쫓고 있던 중 이 칼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첩자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이 안에 있습니다."
"그럼 저 사내가 오스만 첩자라는 말입니까?"
보키아가 결박된 사내를 가리키며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투르크인을 쏘아보았다.
"저 자는 첩자가 내통한 오스만 정찰병입니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군요."
보키아는 릴라당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릴라당과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살람 메메드.. 살람 메메드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살람 메메드가 누굽니까?"
살람 메메드라는 이름이 나오자 발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발레트는 그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이 칼의 주인이 살람 메메드입니다."
릴라당은 칼을 보키아에게 건넸다. 칼날은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날렵해 보였다.
"20년전, 살람 메메드라는 이름의 투르크 소년을 집으로 들이지 않았습니까?
보키아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칼을 들고 있었다.
"손잡이 밑에 새겨진 투르크어.. 살람 메메드... 당신의 시종 비토 발티의 예전 이름."
릴라당의 말이 끝나자 보키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릴라당에게 칼을 도로 건넸다.
"단장님,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군요. 제 시종은 살람 메메드가 아닙니다. 투르크 출신도 아니구요. 비토는 시칠리아에 계신 제 숙부 밑에 있던 사람의 자식입니다. 집안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해 제가 숙부님께 부탁했지요. 이런 일로 저를 부르시다니.."
보키아의 말투는 아주 침착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살람 메메드, 그렇게 뒤에 숨어 있을건가? 저 자를 봐! 할 말이 없나?"
발레트는 발티에게로 걸어가 그의 몸을 돌려 세워 검은 옷의 사내를 바라보게 했다.
"자, 얼굴을 보고 말해봐!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나? 똑똑히 봐!"
발레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말했다. 형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기사단 숙소에 침입한 아우를 비토 발티가 제대로 보기를 원했다. 검은 옷의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비토를 바라보았다. 사내에게서 원망의 눈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듯 입과 눈을 닫았다.
"당신 때문에 저 자는 몰타로 다시 들어왔어. 살람 메메드! 당신을 지키고자. 형으로서 할 말이 아무것도 없나?"
"난 살람 메메드가 아니요."
비토는 발레트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발레트는 발티의 텅 빈 눈동자를 보자 소름이 끼쳤다.
"단장님,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제 사람이 저 자와 내통했다는 겁니까? 첩자라니요? 말도 안되는 얘깁니다! 이렇게 저를 모욕해도 되는 겁니까?"
보키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따지듯이 물었다.
"보키아 경, 우리는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첩자를 추적해 왔습니다. 저 자는 비토 발티의.."
"어디서 나온 정보입니까? 비토의 출신은 제가 증명하지요. 단장님도 이 문제를 확실히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보키아는 등을 돌려 뜰을 가로 질러 나갔다. 발티는 사내 옆에 잠시 걸음을 멈추는 듯 싶더니 이내 보키아의 뒤를 따랐다.
"단장님, 보키아 경이 발티를 보호하려는 듯 보입니다. 혹시 보키아.."
릴라당은 발레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손을 들었다.
"발레트, 확실하지 않는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네.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다 보고한건가? 처음 이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누구지?
"단장님, 정보 제공자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발레트는 나디아가 시종과 정찰병의 얼굴을 본 사람임을 말할 수 없었다. 비토는 동생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냉혈한이었다. 나디아가 목격자인 것을 비토가 알게 된다면 그녀에게 어떤 위협을 가할지 몰랐다. 나디아를 이 일에 끌어들여서는 안되었다.
"모든 경위를 내게 얘기해야 하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어. 시종이 살람 메메드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보키아는 가만있지 않을 걸세.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은 똑같이 돌려주는 사람이야."
발레트는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비토의 동생을 사로잡았을 때만 하더라도 오늘 벌어진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동생을 앞에 두고도 자신을 부인하다니, 지독한 인간이군. 보키아는 왜 발티를 감싸는 거지?'
보키아의 의중을 알 길이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비토의 신원을 밝혀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검은 옷의 사내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로메가스가 그의 등을 툭치며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목숨을 버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기사단 숙소를 나와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보키아는 말 고삐를 풀며 속도를 늦췄다.
"널 믿고 모든 권한을 네게 줬다. 그런 내게 이런 식으로 은혜를 갚나?"
보키아의 싸늘한 눈초리가 비토의 얼굴에 정면으로 꽂혔다. 비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보키아는 말 위에서 발티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릴라당 앞에서 널 변호했지만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발레트는 너의 정체를 증명할 수 없을 거야. 동생의 목숨은 살릴 수 있을 거다."
발티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는 땅에 두 손을 대고 허리를 굽혔다.
"네가 하던 일을 계속해라. 그리고 그들에게서 중요한 것을 받아내."
보키아는 에스파냐의 카를 5세가 성 요한 기사단에게 몰타 영주권을 왜 양도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카를 5세와 쉴레이만의 힘겨루기 상황에서 몰타에 첩자 사건이 대두된다면 에스파냐로 상업 활동을 넓히려는 자신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었다.
'기사단은 오스만으로부터 몰타를 지키기만 하면 되는 거야. 릴라당, 서로의 영역은 침범하지 말자구.'
그는 뒤꿈치로 말의 배를 차며 고삐를 다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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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13

"시종이 투르크 노예 출신인 건 확실한 것 같아요."
로메가스는 기사단 숙소로 돌아와 알아낸 정보를 숨가쁘게 전달했다.
"항구에 있는 주점에서 어떤 주정뱅이한테 들었는데 보키아 집안으로 들어간 후 똑똑한 머리 덕분에 눈에 띄였던 모양이에요."
로메가스는 약간 취기가 오른 얼굴로 시종이 보키아의 신뢰를 얻어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름은? 예전 이름은 알아냈어?"
발레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살롬이라 불렀다는데 성까지는 기억을 못했습니다."
발레트는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지금까지의 상황을 머리 속으로 맞추어 보았다. 이제 시종은 칼에 찔린 사람이 발레트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 칼이 발레트의 수중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누군가 칼을 찾으러 온다면 그것은 시종 스스로 자신이 살람 메메드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반드시 시종은 칼을 찾으려 할 거야. 칼이 중요한 단서라는 걸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테니까."
발레트는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 온다면 그날은 축제로 경비가 느슨해진 오늘 밤이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쩔 생각이세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야지."
발레트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로메가스에게 말했다. 로메가스는 이런 상황에서 그런 여유가 어디서 오는 건지 궁금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달도 잠든 깊은 어둠의 시간, 발레트는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달빛이 열린 창으로 들어와 방에 머물렀고 적막한 밤 공기가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침대 밑에 있는 로메가스는 긴장한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삐걱'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검은 그림자가 방안에 나타났다. 발레트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의 모든 신경은 움직이는 그림자에게 향해 있었다. 상대는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민첩하게 움직였다. 발레트는 꼼짝하지 않고 침대 위에 가만히 있었다. 실수없이 한번에 제압하기 위해선 그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미세한 숨소리가 자신의 위에서 들리는 그 순간, 발레트는 빠르게 몸을 세워 그의 팔을 잡고 무릎을 꿇렸다. 강하게 훈련된 몸이었다. 짓눌려지지 않으려는 힘이 상당했다. 침대 밑에 숨어 있던 로메가스가 나와 굵게 꼬인 줄로 침입자의 상체를 단단하게 묶었다. 로메가스가 복면을 벗기자 매서운 검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누구냐? 누가 시킨거야?"
로메가스가 사내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며 몰아붙였다.
"조용히! 로메가스!"
발레트는 흥분한 로메가스를 뒤로 물러서있게 했다.
"우린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걸로는 부족한가?"
발레트가 상의를 올려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자 로메가스가 있는 힘을 다해 사내의 얼굴을 후려쳤다.
"로메가스! 진정해!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니야."
매서운 눈의 사내 입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잡힌 순간부터 지금까지 사내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도무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 검은 눈동자와 대조되는 하얀 피부.
"눈빛이 닮았군. 보키아의 시종이자 당신의 형, 살람 메메드."
사내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발레트는 알아차렸다.
"칼을 찾기 위해 몰타로 다시 들어오다니.. 혈육이 아니라면 이런 위험을 감수할리가 없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감정이 배제된 싸늘한 말투로 사내는 입을 뗐다.
"어떻게 정확히 이 방에 들어올 수 있었지? 칼에 찔린 기사가 나라는 건 시종만이 알고 있어!"
사내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발레트는 화려하게 세공된 칼을 사내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이 칼이 네것이라면 넌 다시 몰타에 들어올 이유가 없어! 죽을 각오로 이곳에 온 건 칼에 새겨진 이름, 바로 살람 메메드 때문이야."
"살람 메메드라니..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복면의 사내는 반복적으로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그는 초승달 모양의 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살람 메메드는 투르크 노예였어. 이 칼은 헤어지기 전 그가 네게 주었겠지. 넌 이 칼을 형 대신 소중히 여겼을거야. 그게 네가 여길 찾아 온 이유고."
사내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포박된 줄을 끊으려는 듯 상체에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분명 괴로워하고 있었다. 조금 더 압박을 준다면 살람 메메드에 대해 실토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무언가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단장님!"
굳은 표정의 릴라당이 몇몇의 기사들과 문 앞에 서 있었다. 릴라당은 화를 간신히 누른 채로 발레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발레트!"
"단장님, 나중에 말씀 드리.."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그자는 누군가?"
릴라당은 상체가 결박되어 무릎을 꿇고 있는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가리켰다.
"발레트! 두 번 말하지 않겠네. 당장 내방으로 오게!"
발레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 들어온 물고기를 한순간에 놓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내는 틈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이럴 때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은 일을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박된 사내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입술을 굳게 닫고 있었다.

 

"오스만 정찰병이 몰타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추적했으나 놓치고 말았습니다. 몰타인 첩자와 연결고리를 찾던 중 정찰병이 떨어뜨리고 간 칼에서 단서를 발견했고 칼을 찾기 위해 저에게 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발레트는 뒤돌아 앉아 있는 릴라당에게 그간에 일어났었던 일을 설명했다.
"발레트, 이런 중대한 사안을 보고도 없이 독자적으로 진행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릴라당이 여전히 화를 누르며 말했다. 그는 상황 판단을 빠르게 해야 했다. 기사단 숙소에 오스만 정찰병이 침입한 큰 사건이었다. 이것은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었고 그만큼 기사단 내부가 허술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하지만 사안의 특성상 은밀하게 추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전에 밖으로 정보가 새어나간다면 첩자를 잡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발레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확실하지 않은 것을 릴라당에게 보고할 수 없었다. 릴라당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레트 앞으로 다가왔다.
"몰타인 첩자는? 알아냈나?"
"네, 잡힌 정찰병의 형입니다."
발레트는 고개를 들어 흔들림 없는 눈으로 릴라당을 보았다.
"형? 그게 누군가?"
"보키아의 시종 비토 발티입니다."
"확실한가?"
릴라당은 뒤를 돌며 다시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그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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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12

성 바울 축일은 거리마다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교회는 종을 울려 축일을 축하하고 트렘펫과 북소리는 사람들의 흥분을 더욱 고조시켰다. 성 요한 기사단에게도 중요한 날이었다. 기사단장 릴라당의 연설이 광장에서 곧 있을 예정이었고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식량도 준비해야 했다.
발레트는 자신의 방에서 정찰병이 떨어뜨린 초승달 모양의 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연회에서 어린 여자 하인의 행동은 분명히 고의적이었다. 이제 시종은 자신의 정체를 누가 알고 있는지 파악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가 취할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 시종과 정찰병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찰병은 잡지 못했고 시종은 당분간 오스만과 어떠한 접촉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정황은 있지만 물적 증거가 없었다. 오로지 정찰병이 떨어뜨리고 간 이 칼뿐... 초승달 모양의 칼...
칼을 유심히 바라보던 발레트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그는 다시 한번 칼을 눈앞에 대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무늬로 세공된 손잡이 아래 조그맣게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발레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곧장 숙소에서 나와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로 향했다.
주교와 기사단장 릴라당의 연설이 끝나고 광장은 다시 악기 소리로 가득찼다. 나디아는 크레누와 함께 거리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대추를 넣어 만든 몰타 전통 과자를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아이들은 과자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앞다투어 손을 뻗쳤다. 과자를 담은 바구니는 금새 바닥을 보였다. 신이 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가고 광장 저편에서 발레트와 로메가스가 바쁜 걸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발레트는 나디아에게 눈으로 인사하며 크레누 앞에 섰다.
"혹시 주변에 투르크어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투르크어라...
크레누는 흰 수염이 난 아래턱을 슥슥 문지르며 그리스 출신의 인부가 투르크어를 조금 할 줄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은 작은 것 하나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찾아내야 했다.
"오늘 저녁 모임이 있는데 함께 하겠소? 그도 올 거요."
크레누는 발레트가 평상시와 달리 초조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귀찮은 일에는 끼고 싶지 않았지만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말았다.
"물론입니다."
발레트가 환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그는 식사 시간에 맞춰 가겠다고 덧붙이고는 로메가스와 함께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뜨겁던 광장의 열기도 서서히 식어 가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발레트는 크레누가 알려준 그리스계 남자에게 칼에 새겨진 글씨를 보여주었다.
"이 글자를 읽을 수 있겠어요?"
"말은 하지만 읽는 건 조금밖에 못해요."
남자는 확신이 없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눈을 찡그리며 칼을 들여다보았다.
"음.... 보자.... 살...람...메...메...드."
"살람 메메드?"
그리스인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가리키며 다시 한번 소리를 냈다.
"살람 메메드... 투르크인 이름 같은데요?"
발레트는 속으로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살람 메메드.. 그 정찰병의 이름인가? 시종과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리스인은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발레트에게 할 말이 남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렸다.
"저... 이 이름과 같은 투르크인을 알고 있어요. 티노스에서 성벽 공사를 할 때였는데 아래로 추락할 뻔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옆에 있던 소년이 팔을 잡아 주어 목숨을 건졌지요."
그리스인은 그 뒤로 작업장에서 살람 메메드를 마주칠 때 마다 말을 섞기도 했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 투르크 노예는 보이지 않았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의 이름만은 또렷이 기억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남자의 말에 발레트의 머리 속에서 무언가 번뜩 스쳐 지나갔다.
"그 투르크인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십니까?"
그리스인은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며 20년 전을 떠올리려 했다.
"글쎄요. 투르크인들이 몰타로 갔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생김새라던가 어떤 특징이라도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음.... 오래전 일이라 얼굴은 가물가물해요. 키가 컸고 투르크인치고는 피부가 하얀 편이었어요."
남자의 말을 들으며 발레트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시종이 투르크인이라면?'
연결되지 않았던 정찰병과의 고리가 한순간 맞춰지는 것 같았다. 발레트는 로메가스에게 시종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어디 출신인지, 보키아 집안에서 어떻게 일하게 됐는지 시종에 대한 모든 정보가 필요했다. 로메가스는 신이 나서 재빨리 크레누의 집을 나섰다. 발레트에 대한 충성심은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그였다.

 

"뭔가 알아낸 것이 있나요?"
그리스인이 자리를 뜬 후 등뒤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디아는 어느새 발레트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크레누를 비롯한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오늘 있었던 축제 이야기에 모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디아, 이 칼이 결정적인 단서가 될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칼을 맞은 것이 도움이 될..."
발레트는 높아진 목소리로 얘기를 하다 순간 아차하며 말을 끊었다. 그러나 나디아는 며칠 전과는 달리 동요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찰병이 떨어뜨리고 간 칼을 차분한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5년 전, 우리 마을은 해적의 습격을 받았어요... 그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였어요... 어머니는 오빠와 저를 보호하려다 해적의 칼을 맞았고... 오빠는... 오빠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해요... 무조건 앞만 보고 뛰라며 소리치던 모습이 마지막이었어요. 무슨 정신으로 바닷가로 뛰어갔는지 아직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해적들이 들고 있었던 것도 이런 칼이었어요. 이 칼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어떤 위험을 감지했었던 것 같아요."
나디아는 비교적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 놓았다. 그녀의 속눈썹이 물기를 머금은 듯 촉촉해졌다. 나디아는 재빨리 손을 들어 눈가를 훔치고는 양손을 다시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다. 발레트는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강물이 흐르듯이 그렇게 과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디아, 당신은 용기 있는 사람이에요."
발레트의 진심 어린 한마디에 나디아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발레트를 바라보는 그녀의 초록빛 눈망울은 밤하늘처럼 고요했다. 그것은 마치 깊은 바다 속을 유영하는 것과 같은 평온함이었다. 두 사람은 잠잠히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여름밤의 더운 기운과 사뭇 다른 공기가 서로를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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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11

임디나 성은 곧 열릴 연회 준비로 아침부터 분주했다. 성 바울 축일 전날은 보키아 가문에서 연회를 여는 것이 관례였다. 온갖 종류의 싱싱한 식재료가 성안으로 들어와 하인들의 손에 맡겨졌다.
하인들을 감독하던 시종의 얼굴이 일그러진건 항구 일꾼으로부터 전갈을 받은 후였다. 그는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기사단 중 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갖고 있는 정보라고는 기사 한 명이 칼에 찔렸다는 것뿐이었다. 요새 작업이 한창인 이런 때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동안의 행적을 되돌려봐도 기사단이 알아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변 사람들을 떠올려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건지 도무지 종 잡을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으며 초조한 마음으로 뜰에 서 있는 그의 귀에 보키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비토,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겠지? 이번 연회에는 에스파냐에서 중요한 손님이 오시니 준비에 더욱 만전을 기하도록 해. 올해는 기사단도 있으니 음식이 부족하지 않게 신경 쓰고."
말끔히 정리된 보키아의 콧수염 아래로 얇은 입술이 움직였다. 보키아는 발티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하인의 손에 발을 딛고 말에 올라탔다.
"네, 보키아님.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사단이란 말에 불안감에 휩싸였던 시종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기사단 누구에게 탄로가 났는지 알아낼 수 있는 기회는 한번 뿐이었다. 창상을 입었으니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발티의 입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는 이틀 후에 있을 연회에서 기사단 누구에게 정체가 탄로났는지 꼭 알아내야 했다.

 


연회는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넓은 연회장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찼고 유럽과 아시아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요리법의 음식들은 지체 높은 귀족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자란 당도 높은 포도로 만든 포도주은 최상급이었다. 모두 기분에 취했고 오랜만에 열린 연회를 즐겼다.
귀부인들은 소매를 인공적으로 부풀리고 코르셋으로 허리는 가늘게, 스커트는 파딩게일을 넣어 A라인으로 퍼지게 한 로브를 입었다. 한껏 부풀린 블루버즈형의 바지를 입은 보키아는 이리저리 사람들을 오가며 주최자 역할에 여념이 없었다. 기사단 예복을 차려입은 발레트는 릴라당 옆에 서서 한쪽 귀퉁이에서 하인들을 관리하고 있는 시종을 주시하고 있었다.
"릴라당 기사단장님, 이쪽은 돈 후안 경입니다. 서로 인사하시지요."
러프를 빳빳하게 세운 화려한 복장의 돈 후안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성 요한 기사단이 몰타에 당도했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제 몰타의 방어력은 문제가 없겠군요."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에스파냐의 도움이 많이 필요합니다."
릴라당은 꼿꼿한 자세로 돈 후안의 손을 잡았다.
"황제 폐하를 뵈면 꼭 말씀드리지요. 황제께서도 기사단의 노고를 알고 계실겁니다."
돈 후안은 불룩한 자신의 배 앞으로 릴라당의 손을 당기며 말했다.
"오늘은 심각한 얘기는 하지 맙시다. 좋은 날 아닙니까."
보키아가 적당한 때에 말을 자르며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는 릴라당의 꼿꼿한 성품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돈 후안은 카를 5세를 접견할 수 있는 높은 위치의 에스파냐 귀족이었다. 보키아는 이 연회에서 돈 후안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했다.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돈 후안의 웃음을 사고 있을 때 시종이 다가와 보키아의 귀에 입을 대고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했다. 보키아의 얼굴빛이 살짝 흐려지는가 싶더니 나즈막히 알았다고 말하고는 이내 특유의 웃음을 띠며 대화에 다시 참여했다.
발레트는 시종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시종은 보키아의 뒤로 물러서면서 고개를 들어 발레트를 바라보았다. 단 몇 초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상대방의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눈과 눈을 부딪혔다. 시종의 표정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홀은 사람들의 말소리로 뒤덮였고 발레트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발레트는 상체에 묵직한 충격을 받고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어린 여자 하인이 벌떡 일어나 바닥에 쏟아진 음식을 주워 담으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보키아가 소리치자 발레트는 괜찮다고 말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로메가스가 빠르게 그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워 주었다.
"난 괜찮으니 가보도록 해요."
상처 부위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발레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옷매무새를 수습했다. 그리고 릴라당의 옆에 다시 자리를 잡고 시종을 찾기 시작했다. 시종은 연회장 모퉁이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발레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린 하녀와 부딪히는 발레트를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시종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발레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배의 통증은 점점 심해져갔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새어나온 피가 그의 겉옷에 작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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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10

"그렇게 걸어도 정말 괜찮으세요?
동이 틀 무렵, 크레누가 잠에서 깨기 전에 두 사람은 조용히 집을 나섰다.
"괜찮다니까, 조금 쉬면 될거야."
"나디아한테 칼은 왜 안 보여 주셨어요?
로메가스는 곁눈질로 발레트를 슬쩍 보면서 넌지시 물었다.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괴로워하는 나디아의 얼굴이 발레트의 머리 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또... 라고 했어.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 정찰병을 잡지 못했으니 시종과 연결짓는 건 어렵게 됐어요."
로메가스는 발레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며 그를 부축했다.
"당분간은 오스만과 접선하지 못할 거야. 다행인건 우리는 시종의 정체를 알지만 시종은 기사단 중 누구에게 들켰는지 몰라. 시종이 첩자일까? 아니면 중간 하수인일까? 보키아와는 관련이 없는 걸까? 그 증거를 찾아내야 해!"
발레트는 걸음을 멈추고 작은 숨을 내뱉었다. 꿰맨 부위가 걸을 때마다 아파왔다.
"며칠 후에 임디나에서 큰 연회가 있잖아요. 기사단도 초대를 받았어요. 그때가 기회일지 몰라요."
"오늘은 쉬면서 생각을 해보자. 지금은 좀 누워야겠어."
두 사람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사단 숙소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미로같은 임디나의 좁은 골목에 서서히 아침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발레트와 로메가스가 집을 떠난 후 나디아는 가슴에 숨겨둔 작은 칼을 꺼냈다. 그녀의 시간은 고조 섬에서 멈춰있었다. 어머니와 오빠에 대한 죄책감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은 지난 5년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날은 생생하게 다가왔다.
칼에 찔린 발레트를 보았을 때 그녀안에 멈춰있던 시간이 깨어났다. 불타는 고향 마을의 한복판에 나디아는 서 있었다. 죽음은 무시무시한 칼을 휘두르며 그녀에게로 돌진했다. 고막을 찌르는 듯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아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죽음의 그늘에 드리워진 채 남겨진 자의 삶은 빈 껍데기 뿐이었다. 길게 뻗쳐진 손아귀는 그녀의 목을 짓눌렀다. 나디아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옥죄는 형체없는 실체와 마주했다.
나디아는 처음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15살의 어린 소녀가 혼자라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깊고 어두운 곳에서 몸을 웅크린 채 누군가를 기다리며 소녀는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나디아는 소녀에게로 다가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따뜻하게 꼭 안아주었다.
나디아는 오빠가 준 칼에 소중히 입을 맞췄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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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9

거리도 잠든 깊은 밤, 검은 두 실루엣이 동쪽 해안가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디아가 본 게 확실할까요? 배교한 아랍인일 수도 있어요."
발레트의 뒤를 따르며 로메가스는 의심쩍은 어투로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나디아가 봤다는 초승달형의 칼이 마음에 걸려. 배교한 아랍인이 그것도 어부가 그런 칼을 갖고 다닐리가 없잖아."
발레트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던 나디아를 떠올렸다.
"그냥 장식품이 아닐까요?"
"말도 안돼. 귀족도 아니고 바다에서 그물질하는 어부가 장식으로 그런 칼을 찬다고? 보키아 시종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상해. 귀족의 시종과 어부가 뒷골목에서 만날 일이 있을까?"
발레트는 걸음을 멈추고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어부가 정말 오스만 정찰병일까요?"
"아직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정찰병이라면 오늘 밤 항구를 통해서 반드시 몰타를 빠져나갈거야."
두 사람은 스케베라스산 밑의 마르사 해안에 도착하자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바다는 잠잠했고 파도 소리만이 해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발레트는 바위에 등을 대고 모래 위에 앉았다. 한밤의 해안은 적막했고 축축한 공기가 그들의 주변을 둘러쌌다. 발레트는 작은 어떤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 주의를 기울여 어둠 속을 주시했다. 밤의 차가운 기운이 그들의 몸에 스며들 때쯤, 서로의 숨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미세하게 들렸다. 발레트는 바위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검은 물결 사이로 쪽배가 노를 저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한 사내가 비탈길을 내려와 재빠르게 바다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발레트는 곧바로 뛰쳐나가 달리는 사내의 어깨를 잡아챘다. 사내의 몸이 돌려지는 것과 동시에 칼이 휘둘러졌고 발레트는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뒤이어 달려온 로메가스가 손쓸 새도 없이 모든게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내는 이미 바다에 뛰어들어 엄청난 속도로 헤엄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로메가스가 뒤에서 발레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스만 정찰병이 맞았어!"
발레트는 배를 움켜진 채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얼마나 다친 거에요? 어디 좀 봐요."
로메가스는 상처를 보기위해 무릎을 꿇었다. 발레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괜찮아, 깊이 배이진 않았어. 엄청난 속도였어! 훈련받은 군인만이 할 수 있는.. 아주 민첩해. 나디아가 본 게 사실이었어! 로메가스!"
발레트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빠르긴 했지만 어두워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요. 오스만쪽 사람이 확실할까요?"
발레트는 아무 말 없이 사내가 떨어뜨린 초승달 모양의 칼을 로메가스에게 건넸다.
"곧 시종에게 얘기가 들어갈거야."

 

 

탕!탕!탕! 고요한 밤을 방해하는 둔탁한 바깥 소리에 나디아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탕!탕!탕! 거센 소리가 이어지자 나디아는 베게 밑에서 칼을 빼내 옷안에 숨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나디아, 문 좀 열어줘요! 로메가스에요."
다급한 로메가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디아는 급히 문빗장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우선 눕힐 곳이 필요해요."
허리를 반쯤 굽히고 로메가스에게 기대어 있는 발레트를 보자 나디아는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나디아, 어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나디아를 향해 로메가스가 재촉하며 말했다.
"이리로요."
나디아는 1층의 자신의 방으로 앞장서 갔다. 발레트를 침대에 눕인 후 로메가스는 나디아에게 럼과 물, 깨끗한 천을 부탁했다. 상처는 깊진 않았지만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위치였다.
"나디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을 잡아줄래요?"
나디아는 떨리는 손으로 발레트의 발을 붙잡았다. 그녀는 발레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작할게요."
로메가스는 먼저 발레트에게 럼을 마시게 한 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상처 부위에 럼을 부었다.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에요. 조금만 빗겨났어도... 어휴.. "
로메가스는 피가 묻은 손을 닦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마워, 로메가스."
발레트는 몸을 일으켜 피 묻은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일어나시면 안되요."
로메가스는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발레트를 저지하며 말했다.
"크레누씨가 일어나기 전에 여길 나가야 해."
발레트가 힘겹게 겉옷을 걸치려 할 때 문이 열리고 나디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발레트를 다시 침대에 앉힌 후 수프 접시를 내밀었다.
"감자 수프에요, 몸이 따뜻해질 거에요."
나디아는 로메가스에게도 접시를 건넸다.
"고마워요, 나디아. 크레누씨는..."
"아저씨는 잠잘 땐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주무세요."
나디아는 걱정 말라는 듯 수프 그릇에 눈길을 주었다.
"나디아, 정말 고마워요. 기사단 숙소로는 갈 수가 없었어요. 발레트님이 다치신 걸 단장님이 아시는 날엔..."
로메가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봐, 로메가스.. 난 괜찮다니까.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말하지 말라구."
발레트는 얼굴을 찡그린 로메가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디아는 발레트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전한 경솔한 말로 인해 발레트가 다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물밀듯이 차올랐다. 그의 피 묻은 셔츠는 5년 전 지옥같던 순간으로 그녀를 데려다 놓았다. 나디아는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어부가...아니었던 거죠... 내가 한말 때문에 당신이 다쳤어요..."
나디아는 여전히 발레트를 보지 못한 채로 괴로운 듯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나디아,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오히려 당신 덕분에 더 큰일을 막을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거에요. 상처는 신경쓰지 말아요. 조금 긁힌 것 뿐이니까."
발레트는 부드럽게 말하며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로메가스에게도 어서 먹어보라고 권했다.
"난... 난 당신이 다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 때문에 누군가가 또... 나 때문에..."
나디아는 혼란스러운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몸을 떨었고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초조해 보였다.  발레트는 그릇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나 나디아 앞으로 갔다.
"나디아, 날 봐요. 어제로 시간을 다시 돌린다해도 당신이 본 것을 내게 얘기하는게 옳아요. 절대로 당신 때문에 다친게 아니에요. 내가 방심한 거에요. 난 정말 괜찮아요. 이렇게 바로 걸을 수도 있잖아요."
발레트는 따뜻한 눈빛으로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망울은 눈물이 고인 채 떨리고 있었다. 나디아는 발레트의 얼굴을 가까스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트는 연신 괜찮다고 말하며 방안을 이리저리 걸었다. 나디아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피 묻은 셔츠와 초승달 모양의 칼은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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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8

스케베라스산과 마주하는 빌구와 생리아 두 갑은 탁월한 전략적 요충지까지는 아니어도 몰타의 입구를 지키는 요새로서의 장점은 갖춘 곳이었다. 두 갑 사이는 헤엄쳐 건너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로 유사시 부교를 놓아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킬 수 있었고 두 갑의 바다 쪽 끝 지점을 쇠사슬로 봉쇄해 갤리선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도 있었다. 육지로 연결되는 성채와 생리아 서쪽 연안을 잘 방어한다면 오스만 대군도 쉽게 몰타를 공략하지는 못할 터였다.
탕!탕!탕!
빌구는 성채를 방비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땀이 비가 오듯 쏟아지는 한 낮에도 인부들은 돌을 나르느라 분주했다. 발레트는 크레누와 성채 지도를 보며 취약한 부분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카스티야 구역의 성벽이 미흡해 보입니다. 오스만이 허약한 부분을 알아채 포격을 계속 가한다면 성벽이 뚫리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펼쳐진 지도 위의 한 지점을 발레트가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빌구의 성채를 둘러보다 오래된 돌벽 사이로 작은 틈을 발견했다. 손바닥으로 벽을 치자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빌구의 성벽도 임디나 만큼이나 견고하지 못했다. 육지와 연결되는 이 성벽은 더 두껍게 보수되어야 했다.
"알겠소, 인부들을 몇 명 보내리다. 그런데 작업을 진행할 인력이 많이 부족하오. 날씨는 점점 더워지는데 현재 인원으로 기한까지 일을 마무리하는 것은 무리요."
크레누는 지도에 고개를 파묻은 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보고 있는 발레트를 향해 말했다. 두 사람은 며칠 전부터 시작된 보수 공사로 빌구의 성벽 위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발레트는 고개를 들어 크레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상부에 보고할 테니 크레누씨가 필요한 인력을 보충해 주세요."
태양은 그들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내리쬐었고 저 멀리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바람이 성벽 위로 지치지 않고 불어오고 있었다. 발레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더위를 식혀줄 포도주가 간절하게 생각났다.
"나디아, 무슨 일이냐?"
크레누가 성벽을 올라오는 나디아를 반기며 말했다. 나디아는 큰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점심 식사 하셔야죠. 모두 먹을 수 있도록 넉넉히 챙겨 왔어요."
나디아의 깊고 오묘한 초록 눈동자는 햇살을 받아 더욱 반짝거렸다. 어두운 갈색 머리는 풍성하게 물결 쳐 흐르고 살짝 그을린 피부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당찬 면모를 보여주는 듯 했다.
"같이 드시겠어요?"
나디아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발레트에게 말을 건넸다.
"안그래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고마워요, 나디아."
발레트는 부드러운 말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디아는 발레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자, 이쪽으로 와서 점심 먹지."
크레누가 인부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둥글게 앉아 나디아가 가져온 빵과 양젖으로 만든 치즈, 말린 과일, 포도주를 먹고 마셨다. 아침부터 계속된 보수 공사에 인부들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덮여 있었지만 담소를 나누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넘쳤다. 고단한 일상과 달리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여유로웠다.
8년간의 긴 방랑에서 발레트를 이끌었던 것은 신념이었다. 신께 한 맹세, 기사로서의 명예와 대의. 아니 어쩌면 신념이라 생각했지만 로도스 섬 공방전의 패배로 오스만을 향한 복수심이 그를 여기까지 오게 했는지도 몰랐다. 몰타의 성벽 위에서 소박한 점심을 먹으며 발레트는 오랜만에 그를 사로잡고 있는 상념에서 벗어나 현재를 온전히 즐겼다. 누군가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누군가는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로메가스는 인부들 사이에 앉아 그들과 어울리며 포도주를 금새 비웠다.
"몰타의 포도주는 신이 주신 선물이죠."
어느새 다가온 나디아가 포도주를 가득 채운 잔을 건넸다.
"포도주 한 모금에 삶은 더욱 풍요로워져요."
발레트는 잔을 받아 들어 포도주를 들이킨 후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네요. 삶의 풍요로움이라.."
나디아는 손에 턱을 괸 채 두 눈을 깜빡거리며 발레트의 말을 읊조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경계심 가득한 싸늘한 태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수평선 너머 끝없이 펼쳐진 지중해로 가 있었다.
"여기서는 스케베라스산이 한눈에 보여요. 이렇게나 평온한데... 죽음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게 믿겨지나요? 절대로 도망칠 수 없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스케베라스산을 바라보았다. 금빛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스케베라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웅장했다. 인간이 만든 어떤 건축물보다도 장엄했으며 몇천 년 동안 깊고 푸른 지중해와 맞서서 살아간 몰타인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척박한 환경과 잦은 외세의 침략에도 스케베라스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무수한 사람들이 이곳을 짓밟았지만 스케베라스는 변함없이 지중해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발레트는 쓸쓸함이 서려있는 나디아의 말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전 고조 출신이에요. 몰타 위쪽에 있는 작은 섬이죠. 15살에 몰타로 왔어요. 부모, 형제없이 거리를 떠돌던 절 아저씨가 딸같이 보살펴 주셨죠. 정말 좋은 분이에요. 말투는 좀 거칠지만."
여전히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디아는 침묵을 깼다. 발레트는 나디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툭툭 내뱉는 말이 이젠 정감있게 들려요. 인부들을 많이 생각하세요. 자신보다 더. 저기 봐요, 나디아."
한 뼘 떨어진 곳에서 인부들에게 크게 소리치고 있는 크레누를 보며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찰나의 순간 서로의 눈길은 마주쳤고 나디아의 초록 눈동자가 발레트의 눈속으로 들어왔다. 잠시 비췄던 슬픈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디아의 웃는 모습을 보자 발레트는 왠지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다.
"아까 성벽으로 오는 길에 보키아의 시종을 봤어요. 아저씨가 임디나 성채를 보수한 적이 있어서 시종 얼굴을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이 있어요."
나디아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녀의 초록 눈은 심각한 빛을 띄었다.
"이상한 것이요?"
발레트는 갑자기 변한 그녀의 눈빛을 주시하며 물었다.
"네, 그 시종이 어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부가 조금... 그는 몰타인 같지가 않았어요.
이곳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몰타인이 아니에요. 틀림없어요."
나디아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몰타로 이주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럴수도 있겠지만.. 허리춤에 찬 칼을 봤어요.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이곳에서는 쓰지 않는 칼이죠."
"칼을 차고 있었다.. 초승달 모양의.."
발레트는 나디아의 말을 되뇌었다.
"네, 잘못 봤을리가 없어요. 그건 절대 잊을 수 없는 거니까. 어부 옷차림을 한 외지인과 귀족의 시종이 뒷골목에서 만날 일이 있을까요?"
나디아는 발레트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눈을 바로 보았다.
"어부의 얼굴을 보았습니까?"
"옆모습만요. 중간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어요. 지나갈 때 시종과 눈이 마주쳤는데 뭐랄까... 아주 차가웠어요. 그 느낌이란..."
나디아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두 손으로 팔을 감쌌다. 그녀의 표정에서 언뜻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발레트는 나디아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승달 모양의 칼이라면 아랍인이나 투르­­크족이 쓰는 것인데.. 이슬람 노예 출신인가? 그렇다해도 어부가 그런 칼을 차고 있는 건 이상한데..'
"알려줘서 고마워요, 나디아."
"이상한 것이 맞죠?"
나디아는 조심스럽지만 확신에 찬 말투로 물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본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요. 크레누씨에게도."
발레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저도 그정도는 알아요."
나디아는 스케베라스산으로 눈을 돌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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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7

에스파냐의 국왕, 시칠리아의 섭정,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 귀하.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어 이곳 몰타 섬에 당도했습니다. 성 요한 기사단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고 신앙의 적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지중해를 수호하는 것은 폐하께서 누구보다도 그 중요성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기사단이 이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폐하의 깊은 배려심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성 요한 기사단장
필리프 드 라 릴라당

 

릴라당이 서신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기사단 예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발레트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
"섬에 도착한 후로 이곳 지형을 파악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임디나는 방어 성채로 쓰기에는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릴라당은 의자에 등을 붙이며 발레트의 보고를 들을 자세를 취했다.
"우선 성벽이 견고하지 못합니다. 주민들을 다 수용할 공간도 부족합니다. 섬 중앙보다는 동쪽 항구에 요새를 신축하는 것이 적을 방어하기에 유리할 것 같습니다.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세우면 항구 전체를 통제할 수 있으니 오스만이 쉽게 방어선을 뚫을 수 없을 겁니다."
발레트는 며칠 동안 몰타를 둘러보며 생각한 바를 릴라당에게 전했다.
"음.. 일리가 있는 말이군."
릴라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몰타로 들어올 때 보았던 그 돌출된 산이 스케베라스 아닌가? 항구 사이에 있으니 요새를 건축하기에 적절한 위치인 것 같긴 하군. 분명히 오스만은 동쪽 항구를 목표로 할테니까."
"네, 그렇습니다. 섬 전체를 둘러봐도 서쪽 해안은 절벽으로 되어 있어 배를 정박할 수 없고 남쪽은 중심지와 멀어 매복을 당하거나 보급선 문제도 있으니 오스만은 심해항인 마르삼세트를 공략할 겁니다.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세워 항구를 우리가 통제해야 합니다."
발레트는 로도스 공방전을 경험한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 후 8년간을 지중해를 떠돌며 무슬림 적과 싸웠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지만 전투 경험과 지식은 누구보다도 풍부했다. 릴라당은 발레트의 판단을 신뢰했다.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은 잘 알겠네. 그러나 요새를 신축하려면 비용이 적잖이 들걸세. 위원회에서 비용을 문제 삼을 수도 있어. 이대로 가다간 기사단 운영 자금이 바닥을 보일 테니까."
릴라당이 카를 5세에게 서신을 쓴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섬의 영주권을 양도받아 기사단의 존립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운영 자금이 없다면 섬을 지킬 방도가 없었다. 기사단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병력과 무기, 식량같은 물자가 필요했다. 더군다나 요새까지 신축하려면 막대한 공사 비용이 들 터였다.
"기사단 위원회가 곧 열리네. 그 때 요새 신축건을 위원들에게 얘기해 보겠네."
"네, 단장님."

 


기사단 위원회는 며칠 후에 바로 소집되었다. 각 담당별 참모로 이루어진 위원회는 기사단의 모든 운영과 전략을 논의했다.
"요새를 신축하기에는 기사단의 자금이 많이 부족합니다. 새로운 곳에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현재로선 시기 상조인 듯 합니다."
릴라당이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신축하는 의안을 내놓자마자 자금을 맡고 있는 페르디가 반대 입장을 취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요새를 신축하는 것보다 이미 있는 요새의 성벽을 재방비하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 지금은 기사단의 상황이 안정되는 것이 더 우선입니다."
대부분의 위원들이 요새 신축건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유럽 전역의 지부와 교황님께 자금 요청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부금을 모아 달라 청원하면 비용이 어느 정도 마련되지 않겠소?"
릴라당이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말을 꺼냈다.
"기부금을 모은다 한들 신축 공사 비용을 다 충당하지는 못할 겁니다. 게다가 무기와 식량, 병사들의 급여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둘이 아닙니다. 지금은 기사단 내부가 안정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현재 기사단의 상황으로서는 위원들의 말이 옳았다. 릴라당은 기사단 내부와 외부를 모두 아울러야 했다.
"이건 어떻습니까?"
옥신각신하는 위원들의 말을 잠재운 건 전략 담당의 드발롱이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스케베라스산 앞에 두 개의 작은 갑이 있습니다. 두 갑 사이는 헤엄을 쳐서 갈 수 있는 거리지요. 이미 그곳은 성채가 있으니 바다 끝의 요새에 방비를 더 강화하면 될 겁니다. 스케베라스산에 도시와 요새를 신축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 것이고 동쪽 항에 위치해 있으니 요충지로서 괜찮은 차선 아니겠습니까?"
드발롱의 의견에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원들은 동의한다는 듯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마를 짚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릴라당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드발롱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요. 다른 의견이 없다면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소."
릴라당은 미간을 찌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시종에게 발레트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발레트가 릴라당의 방에 도착했을 때 릴라당은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발레트는 좁아진 릴라당의 어깨를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냈다.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릴라당은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거두어 발레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발레트, 자네 의견에 나도 찬성하는 바이나 비용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네. 요새 신축건은 기사단이 안정을 찾은 다음에 진행하는 것이 좋을 듯 싶어. 대신 임디나가 아닌 동쪽 항구의 갑으로 중심지를 옮기기로 결정했네. 곧 그곳의 요새를 재정비 할 걸세."
발레트는 위원회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사단의 안정도 중요하지만 오스만투르크에 맞서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지금은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였다. 발레트는 다시 한번 힘을 주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단장님, 그렇지만 앞으로를 위해서는 스케베라스산에..."
"나도 자네 생각을 존중하지만 상황이 쉽지가 않아. 위원회의 결정을 따라주게."
릴라당은 발레트의 말을 자르며 의자에 앉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단장의 목소리에 발레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릴라당의 방을 나와 곧장 말 등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스케베라스산 앞의 작은 갑으로 빠르게 말을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