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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일상

마법사의 심부름

마법사의 심부름

 

넓고 넓은 사막

황금빛 모래가 파도치는 곳

 

맑고 맑은 오아시스

별빛이 찬연한 깊은 밤하늘

 

하늘하늘 나풀나풀

무지개를 담은 칠흑의 깃털

 

“그래서 그 깃털은 어디에 쓴다고?”

 

“모르셔도 됩니다.”

 

가늘어진 눈으로 미심쩍게 흘겨보는 에녹의 시선에 피쿠스는 미간을 찡그리고 입술 씰룩이며 대답했다.

 

“스승님의 프라이버시라서요.”

 

피쿠스의 스승이자 궁중 수석마법사 풀크리오 다우리스의 프라이버시라는 핑계에 에녹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표정을 풀었다. 피쿠스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햇빛이 내려쬐는 모래 위에 발을 내딛었다. 조금의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는 무심한 동작이다.

 

“저, 조금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햇빛을 막기 위해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뒤로 돌아보는 세 사람의 모습에 베르첸은 혼자만 지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체력이 좋은 에녹과 몸이 가벼운 라비에라는 이해할 수 있지만, 책상 앞에 앉아서 책과 마법만 파고드는 피쿠스마저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도착해서 쉬죠.”

 

그렇게 말하는 피쿠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동정이 느껴졌다. 베르첸의 고개가 힘없이 끄덕여지고 네 사람은 다시 발을 움직였다. 푹푹 찌는 열기에 한손으로 땀범벅이 된 얼굴을 훔쳐내는 베르첸에게 라비에라가 슬쩍 다가와 생글거렸다.

 

“왜 예배를 빼먹었을까 후회하고 있지?”

 

베르첸은 짓궂은 라비에라의 시선을 회피하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딱히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베르첸은 이른 아침 졸음의 유혹에 넘어가 예배를 빼먹고 공원의 나무그늘에서 몰래 잠이나 자려다가 피쿠스와 충돌, 뒤를 쫓아온 에녹과 라비에라까지 마주치며 거의 끌려온 셈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갑자기 사막을 걷고 있는 베르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듯 라비에라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안 덥습니까?”

 

“더워.”

 

라비에라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대답을 했고, 베르첸은 머쓱하니 앞서가고 있는 피쿠스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라비에라는 작게 키득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피쿠스는 원래 지구력이 좋아. 게다가 저 로브에는 안쪽에 마법이 걸려있어서 체온이 유지되거든.”

 

베르첸은 의혹이 가득한 시선으로 에녹과 라비에라의 로브를 번갈아보았다. 그런 시선에 라비에라는 그저 싱긋- 미소했고 베르첸은 억울하고 분하고 황당함이 뒤섞인 헛웃음을 토했다.

 

“허, 허. 그럼 저만 더운 겁니까?”

 

발끈한 베르첸의 작은 외침에 피쿠스는 한숨을 쉬었으며, 라비에라는 꿈틀거리는 입술을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돌렸고 에녹은 실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자기 포복절도하며 웃는 라비에라의 반응에 베르첸의 표정은 멍하게 바뀌었다.

 

“라비에라하고 내꺼에는 그런 마법 없어, 베르첸. 그녀는 원래 더위에 강한 것뿐이야.”

 

놀림을 당했다는 깨달음에 그렇지 않아도 열이 오른 베르첸의 얼굴이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마냥 벌겋게 달아올랐다. 베르첸의 분노라는 이름의 화산폭발을 피해 라비에라는 잽싸게 그늘을 향해 달려갔다.

 

“가장 뜨거운 사막이라는 별명이 그냥 생긴 건 아닌가 보네. 베르첸이 화도 다 내고~”

 

“더운 건 딱 질색입니다.”

 

베르첸은 그대로 땀에 묻혀 녹아버릴 기세로 축 늘어지며 울퉁불퉁한 나무에 기대어 후드를 뒤로 젖혔다. 후끈한 피부에 서늘한 냉기가 닿으며 한결 시원하게 숨통이 트였다. 에녹은 주저앉은 베르첸의 옆에 서서 물통을 꺼내어 한모금 마시고 땀의 축복을 가득 받은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는 사이 피쿠스와 라비에라는 수풀너머로 보이는 오아시스를 향해 다가갔다. 무더운 사막 속에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차갑게 품어진 오아시스에는 구름하나 없는 하늘이 그대로 투영된다. 발을 디디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미세한 파문 하나 없이 고요하다.

 

“거울이 따로 없는 걸. 여기서 밤까지 기다리면 돼?”

 

“간단하게 준비 좀 하고요.”

 

피쿠스는 왼쪽으로 몸을 틀어 수풀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오아시스 주변을 도는 동안, 겉으로는 태연하게 바위나 나무에 마법 문자를 적으면서 속으로는 에녹 몰래 빠져나오지 못한 스스로에 대해 연민의 한숨덩어리를 키우고 있었다. 피쿠스가 오아시스를 한바퀴 돌아 일행이 있는 곳에 왔을 즈음 해가 저문다.

 

“베르첸씨,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사막 위로 내려앉기 시작하는 노을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베르첸은 고개를 내리며 조금 어리둥절하게 피쿠스를 바라보았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

 

피쿠스의 로브 안자락에서 하프가 나오는 광경에 베르첸의 눈이 커다래졌다. 구불구불한 넝쿨이 우아하게 세공되어있는 하프는 순백의 은빛으로 반짝이며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구조가 단순하며 휴대하기 편한 크기의 하프를 피쿠스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베르첸에게 건네었다.

 

“악기 연주에는 자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해가 지고 나면 한곡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라비에라에게 향하는 피쿠스의 시선, 베르첸의 연주 실력이야 이 나라 백성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으니 수긍할 수 있지만, 라비에라는 뒤이어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에 흠칫했다.

 

“나도 뭐 도울 게, 있는 거야?”

 

“노래라면 제가 부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수컷이 와야 해서 말이죠.”

 

“풉. 큭.”

 

에녹은 입을 막으며 라비에라를 외면했고 베르첸은 농담이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피쿠스와 라비에라를 번갈아보았다. 라비에라는 새침하게 표독스러워진 눈초리로 뒤돌아서 웃고 있는 에녹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격렬하게 알려주지 않으셔도 안다고요. 제가 음치인거!”

 

에녹은 웃음의 여운이 남은 채로 피쿠스를 바라보며 염려스레 말했다.

 

“그랬다가 오던 새도 다시 날아가 버리는 거 아냐?”

 

베르첸과 에녹의 반응에도 피쿠스는 홀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팔짱을 끼고서 살벌하게 에녹을 노려보는 라비에라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라비에라씨의 노래 실력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목소리만 빌리겠다는 겁니다.”

 

원래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담담하게 목소리만 빌리겠다는 피쿠스의 발언에 라비에라는 부글거리는 활화산 같은 눈동자로 얼굴을 들이댔다. 그녀의 뜨거운 열기에 피쿠스는 움찔하며 뒤로 한발짝 물러났다.

 

“오호~ 목소리만~? 어떻게 빌리겠다는 건데?”

 

피쿠스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생각하며 서녘에 걸린 태양을 힐끔거리고는 라비에라에게 목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라비에라는 미심쩍은 눈으로 피쿠스의 손바닥에 있는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목에 걸고만 있으면 됩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걸고만 있으라고?”

 

“예.”

 

라비에라는 목걸이를 집어서 천천히 목에 걸었다. 피쿠스는 그녀가 목걸이를 제대로 착용한 것을 확인하고 해가 지평선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옆에서는 베르첸이 하프의 현을 조율하고 있고 에녹은 느긋하게 앉아서 구경할 준비를 마쳤다.

 

짙푸른 어둠 속에 하나 둘 별빛이 모습을 드러내고 뜨거운 모래는 창백하게 식어간다. 피쿠스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바위며 나무에 새겨진 문자가 빛을 발하고 모래에 남은 열기가 하늘로 증발되며 차갑게 얼어붙는다. 얼음입자가 밤하늘로 피어오르며 반짝인다.

 

“베르첸, 연주 부탁합니다.”

 

“어떤 곡으로 할까요?”

 

“어떤 곡이든, 가능하다면 로맨틱한 걸로...”

 

베르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다정한 멜로디가 서서히 울려 퍼진다. 피쿠스는 라비에라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 검지를 갖다 대며 당부했다.

 

“이제부터 노래가 끝날 때까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라비에라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피쿠스는 손가락을 떼며 짧게 시동어를 걸었다. 목걸이에 박힌 펜던트가 은은하게 빛나고 피쿠스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다들 감탄하고 말았다. 심지어 라비에라는 그녀 자신의 목소리임에도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막아야했다.

 

부드럽고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 달콤하다 못해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라비에라는 미묘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며 양팔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에녹은 팔에 오소소- 팔에 돋아난 소름에 멋쩍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손으로 팔을 문질렀다. 반면에 베르첸은 그야말로 황홀한 표정으로 신들린 마냥 하프를 연주했다.

 

마법사 중에 음치는 드물다했던가? 길고 긴 주문을 박자에 맞춰 고저에 맞춰 영창하기에 음치였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고쳐진다고 하던가? 에녹은 그런 소문인지 사실인지 모호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밤하늘을 향해 목소리를 뽑아내고 있는 피쿠스를 바라보았다.

 

“라비에라, 자네 목소리가 이리 고왔나?”

 

에녹은 멜로디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감탄하며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타인의 기교와 발성을 통해 듣게 된 본인의 목소리에 라비에라는 무어라 말해야할지, 기묘한 기분을 쉽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으음...”

 

무언가 상당히 낯간지럽고 무안한 기분이란, 라비에라는 마치 첫키스라도 당한 숫처녀가 된 것 같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이어지는 하프 연주는 가늘고 빠르게 바뀌었고 그에 맞추어 피쿠스의 노래도 한층 음이 높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밤하늘에 오색찬연한 빛의 장막이 펼쳐지고 커다란 날개의 소리가 들려온다.

 

커다란 새의 기척에 머리를 뒤로 젖혀 올려다보았지만 새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아니,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찬란한 장막이 잘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일렁이는 흔적을 눈으로 쫓으며 피쿠스는 오아시스로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베르첸은 하프 연주가 흐트러지지 않게 주의하며, 에녹과 라비에라는 새가 도망가지 않게 긴장하며 피쿠스의 뒤를 쫓아 오아시스로 향했다. 날개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새의 모습이 확연히 보일 즈음, 탐스런 검은 깃털의 새는 밤하늘을 수놓은 오색빛깔을 그대로 담고서 수면에 내려앉았다.

 

작고 동그란 머리에 고아하게 뻗어서 목뒤로 흘러내리는 머리의 깃과 깊고 어두운 수면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꼬리의 깃털은 여신의 은총이라도 받은 게 아닐까 싶은 매혹을 뿜어낸다. 피쿠스는 목소리를 잔잔하게 바꾸며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가 뺐다. 에녹은 그의 손에 들린 게 잡초인줄 알고 놀랐으나, 다시 살펴보니 귀하디귀한 약초임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삼켰다.

 

쌉쌀하고 향긋한 약초의 향이 바람을 타고 부리에 닿는다. 피쿠스의 노래는 속삭이듯 낮아져있고 하프의 멜로디는 졸리운 고양이마냥 나른하다. 새까만 밤의 거울 위로 잘게 파문이 일고 새는 미끄러지듯이 피쿠스 앞으로 다가온다. 그 즈음 피쿠스는 손짓으로 라비에라를 부르고 그녀에게 약초를 쥐어준다.

 

피쿠스의 노래는 멎었고 하프의 멜로디는 가녀리게 이어진다. 라비에라의 손에 쥐여진 약초를 모두 먹은 새는 다시 밤하늘로 날아올라 저 멀리 사라지고, 빛의 장막이 걷힌 수면 위에는 그 흔적만이 남았다. 피쿠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둥실둥실 떠있는 깃털들을 회수했다.

 

“설마 그 오루스 입니까?"

 

베르첸은 눈을 반짝이며 살랑살랑 날아온 깃털을 잡아 주머니에 담고 있는 피쿠스에게 다가갔다.

 

“네. 그 오루스 맞습니다.”

 

밤의 여신이 아끼는 애조(愛鳥) 오루스. 그 전설의 새였다는 사실에 베르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라비에라는 멍하니 넋을 놨으며 에녹은 짧게 휘파람을 부는 것으로 자신의 감상을 더했다.

 

“그래서 그 깃털의 용도는? 여전히 말 안 할 테지?”

 

피쿠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라비에라의 목에서 목걸이까지 회수한 뒤 곧바로 마법 스크롤 하나를 꺼내어 찢었다. 시야가 어지러워지는가 싶더니 곧 낯익은 대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갑작스런 장소 변화에 휘청이는 몸을 가누며 베르첸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허? 갈 때는 왜 걸어간 겁니까?”

 

“스크롤이 하나 밖에 안 남아서요.”

 

그 대답에는 하나를 더 만들 시간이 촉박했다는 뜻도 담겨있었다. 아마 에녹에게서 도망치느라 시간이 없었을 테다. 피쿠스는 그대로 스승의 침실로 쳐들어가 심부름의 결과를 보고했고, 베르첸은 궁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에 몰래 숙소로 돌아가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덕분에 베르첸은 반나절동안 스승의 잔소리를 들어야했으며, 에녹은 여왕에게 호출을 받고는 새로 임명된 교사와 2주간 근신하며 수업을 받을 것을 명령받았다. 방랑벽이 있는 왕자에는 고문과 같은 명령이었다. 그리고 피쿠스는 깃털의 절반을 숨겨두고서 스승과 흥정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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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커튼이 걷힌 뒤에

커튼이 걷힌 뒤에...

 

공연이 끝나고 우렁찬 박수소리가 넓은 홀을 메우며 높게 울려 퍼진다. 손에 손을 잡고 줄지어선 배우들은 밝게 미소하며 인사하고, 금빛 술장식이 달린 붉은 버튼이 촤르륵- 내려온다. 커튼 뒤로 배우들이 물러가고 관객들마저 떠난 조용한 공연장, 어디선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붉은 커튼 뒤, 적막이 내려앉은 무대 위에서 한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직 파릇하고 수줍은 소녀의 미성은 실바람에 몸을 맡긴 꽃잎처럼 청초하다. 부끄러운 듯 발그레한 볼에 살며시 말려 올라간 입꼬리는 순수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설레임 가득한 손짓으로 눈짓으로 몰입한 소녀의 모습.

 

무대 한켠에서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묵직하게 침체된다. 조금씩 힘이 들어간 손은 주먹을 쥐며 바르르- 떨린다. 소녀의 감정이, 목소리가, 멜로디가 고조될수록 그 연기를 감상하는 눈빛은 더욱 무거워진다. 마침내 소녀의 독무대가 끝나고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그 작고 여린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은 그녀의 여운의 쫓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한달, 두달, 석달, 넉달. 커튼이 내려오면 항상 소녀가 무대에 오른다.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때로는 한쌍, 때로는 두쌍, 온 마음을 쏟아 노래하고 열정적으로 연기하는 소녀와 지켜보는 시선은 한줌의 소통도 없이 몇년의 세월을 거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의 인사와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붉은 커튼이 무대 위로 드리워진다. 그리고 조용해진 무대 위로 올라온 소녀는 언제나처럼 커튼의 뒤에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 그녀에게 가장 아름다운 노래의 멜로디를 풀어낸다.

 

수줍음을 담아 잔잔하게 시작한 멜로디는 투명한 연못 위에 가느다란 실비가 사뿐사뿐 춤을 추듯이 고조되며 스며든다. 소녀의 얼굴에는 장밋빛 홍조가 피어나고 눈망울은 꿈을 꾸며 젖어든다. 손끝 하나하나 멜로디를 따라 취한 소녀는 무대 위의 커튼이 올라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바람을 타고 가벼이 날아올라 구름에 닿는 감각, 이 세상의 것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하고 향기로우며 녹아내릴 듯이 부드러운 속삭임, 공연장을 떠나지 않았던 관객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천여 명의 관객에 공연장에는 소녀의 노래만이 울린다.

 

소녀의 노래가 끝나고 그녀가 무대를 내려가려는 순간 하나의 박수소리가 터졌다. 소녀가 놀라서 걸음을 멈춘 순간 두 번째 박수가 시작되고, 곧 쏟아지는 박수소리에 공연장의 천장이 뚫어질 것 같다. 소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한명의 중년 사내와 부인이 다가온다.

 

“놀랄 것 없단다. 우리 딸.”

 

“다나, 이건 널 위한 박수란다.”

 

부인은 놀란 다나를 품에 안고 다독였으며, 이 극단의 단장이자 최고의 배우인 사내는 관객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박수와 환호가 잦아들고 사내는 벅찬 감정을 차분히 자제하며 입을 열었다.

 

“많이 놀라셨음에도 끝까지 들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아낌없이 보여주신 환호에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 앞에 이렇게 소개할 수 있어서 더없는 영광입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여기 저의 소중한 딸, 다나 브라이트입니다.”

 

부인은 품안의 딸을 부착하며 함께 무대 앞으로 나왔다. 아름다운 백금발이 무대 조명 아래 반짝이고, 짙은 벽안은 초점이 맞지 않는다. 피부는 여기저기 얽어서 거뭇거뭇하며, 움츠린 어깨 너머로 굽어있는 등에 양 다리는 길이가 맞지 않아 걸음이 비뚤하다.

 

오, 맙소사. 저 아이가 진정 저 두 사람의 딸이라니, 한탄과 한숨이 간간이 새어나온다. 소녀의 양 옆으로 서있는 그녀의 부모는 누가보아도 그림 같은 선남선녀다. 헌데 그런 두 사람의 딸이 곰보에 곱추이며 장님인 것이다. 다나의 고개가 아래로 쳐지고 눈시울이 붉어질 때에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말 아름다운 노래였습니다. 다나 브라이트양, 내 생애 그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는 들은 적이 없을 만큼 가히 천사의 노래였습니다.”

 

노년의 신사는 온화한 미소와 진심어린 감동을 전하며 박수를 쳤다. 그에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동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잔득 겁에 질린 소녀를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게 일어난 파도가 번져나가듯 어느새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름답습니다. 다나양.” “최고였소!” “정말 좋은 노래였어요.”

 

수많은 찬사가 소녀를 향해 다가간다. 소녀는 꿈만 같았다. 누군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아름답다는 말도 처음 들어보았다. 스스로의 모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예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노래도 멜로디도, 어머니의 것을 듣고 따라 부른 것이었기에 소녀에게 지금의 상황은 정말 꿈만 같았다.

 

“다나, 이리오렴. 같이 인사드리자구나.”

 

소녀는 주춤거리며 조심스레 부모의 손을 잡고 나란히 섰다. 소녀의 모친은 관객석을 향해 환하게 미소하며 말했다.

 

“다나, 웃으렴, 환하게. 넌 충분히 아름답단다.”

 

이른 아침 가장 먼저 맺힌 이슬처럼,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물방울로 채운 것 같은 벽안이 미소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청중을 향해 마음을 전한다. 노래가 아닌 인사로써...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쁨에 떨려나오는 목소리에 박수와 환호는 공연장을 가득 메우며 맴돌고 세 사람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 그에 답한다. 커튼이 걷히고 한 소녀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메아리가 되어 세상에 울려 퍼진 날이었다.

 

세상은 그녀의 멜로디에 감동하고 환호했다. 소녀는 아낌없는 찬사 속에서도 언제나 과거를 잊지 않았다. 곰보에 곱추인 모습 때문에 항상 커튼 뒤에서 남몰래 연습한 날들을 그리고 처음으로 박수와 환호를 받은 날을 평생간직하며 언제나 푸르른 벽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며 노래했다.

 

티 없이 순수한 벽안에 비친 세상처럼, 티 없이 맑은 멜로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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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5. 세레나데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05. 세레나데

 

어둑한 아파트 정문을 지나 우편함에 있는 뭉치를 꺼내어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시간은 12시에 가까워지고, 몸은 피곤하다. 5층에 내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컴컴한 집에 인기척 하나 없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이 고요에 쓴웃음을 지으며 거실 불을 켜고 테이블 위에 우편물들을 툭- 던져두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며 반겨주던 잔소리가 오늘 따라 유난히 그립다. 그땐 잔소리가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막상 듣지 못하게 되니 그 허전함이 채워지질 않는다. 어째서 당신은 내게 잔소리만 가득한 걸까? 난 왜 당신 입에서 그런 잔소리만 나오게 만들었을까? 방으로 들어가며 한숨을 쉬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테이블 앞에 주저앉았다. 무심히 던져둔 우편물을 집어 들어 하나씩 뜯었다. 카드 명세서, 공과금 영수증, 전화요금 명세서, 각종 영수증과 명세서 끝에 보라색 봉투 하나가 남았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확인하고 놀란 것도 잠시, 눈물이 핑 돌았다.

 

발신인 : 이혜령

수신인 : 박정훈

 

이름 두 개를 한참 들여다보다 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냈다.

 

마법의 질문

마지막으로 혼자 노래를 부른 건 언제인가요?

다른 사람에게 불러준 적은요?

 

이건 또 뭘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래?”

 

노래라면 당신이 더 좋아했다.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음정도 박자도 못 맞추는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내 노래 실력을 알기에 가족들 앞에서도 부른 적이 없었다. 혹여나 내가 부른 노래에 당신이 웃기라도 할까봐 창피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내가 딱 한번, 당신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매일같이 듣고 따라하며, 몇 달을 연습하고, 노래방에서 99점을 받은 그날, 당신 집 앞으로 찾아가 목청을 뽑았다. 동네 주민들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구경하며 박수까지 쳐주었다.

 

그날 이후로 당신은 종종 같이 듣자고, 같이 부르자고, 나를 졸랐지만, 난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내가 부르는 것보다 당신이 부르는 걸 보는 게 좋았고, 당신이 부르는 걸 듣는 게 좋았다. 이제야 떠오른다. 잔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노래 소리가 떠오른다. 왜 잊고 있었을까?

 

당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멜로디를, 당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가사를, 노래를 부르던 당신의 미소를, 왜 여태까지 잊고서 당신이 노래가 아닌 잔소리를 하게 만들었을까. 맘이 아프다. 후회스럽다. 한번이라도 같이 불러 볼 걸 그랬다. 이제는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었구나.

 

- 툭, 투둑,

 

종이 위로 투명한 얼룩이 번진다. 얼룩을 손으로 닦아내고 두리번거리며 펜을 찾았다. 그러다 달력에서 눈이 멈췄다. 이달의 마지막 날에 표시된 빨간 동그라미 하나. 당신 생일이다. 당신 없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당신 생일이다. 그날까지 아직 14개의 숫자가 남아 있었다.

 

* * *

 

이른 아침,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우편함에 보라색 봉투를 넣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솜털마냥 둥실둥실 흘러간다. 한껏 숨을 들이쉬고, 시원하게 내쉬었다.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화창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떠나고,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온 상쾌한 바람이 우편함 덮개를 흔들었다. 그 흔들거림에 꽂혀있는 봉투가 빠지며 흘러나온다. 화사한 보라색 봉투가 벌어지고, 밖으로 나온 종이에 이슬을 머금은 이른 아침의 옅은 햇살이 닿아 반짝인다.

 

- 오늘, 당신 생일날.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위해 부를 겁니다.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이른 아침의 서늘한 바람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밝아지는 햇살 속에서 아침 이슬처럼 스며들며 사라졌다.

 

* * *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름다운 향기가 코에 닿는다. 오랜만에 꽃집에 들렀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당신이 좋아하는 꽃을 찾으니, 점원이 곱게 꽃다발을 만들어준다. 그 고운 꽃다발을 받아들고 기분 좋게 가게를 나왔다. 얼마 만에 사본 꽃다발인지 모르겠다. 새삼스레 머쓱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차문을 열어 당신만큼이나 고운 꽃다발을 조수석에 고이 놓고, 운전대를 잡았다. 고속도로를 들어서 가장 마지막 휴게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1시간을 더 달려 당신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곧 퇴직하면 그 돈으로 근처에 이사를 오는 게 좋을 듯싶다.

 

차에서 내려 양손으로 고이 꽃다발을 들고 천천히 걸어 햇볕이 내려쬐는 당신 자리에 도착했다. 당신 이름이 새겨진 묘비(墓碑) 앞에 조심스레 새하얀 데이지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명랑하고 순수한, 당신을 닮은 이 꽃을 참 좋아했다. 화려하지 않아서, 그럼에도 밝아서 좋다고 했다.

 

주변의 잡초를 좀 뽑고, 당신 앞에 주저앉았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며,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의 29년 만인데도 마음이 기억하는 노래는 그날처럼 술술 흘러나온다.

 

그동안 부르지 못한 만큼, 불러주고 싶은 만큼, 원 없이 몇 번이고 불렀다. 하늘을 보며, 구름을 보며, 어느새 사라진 쑥스러움에 당신을 마주보며, 한참이나 불렀다. 부르고 부를수록 가슴이 시원하고, 맘이 편해졌다. 당신이 그리워서, 당신에게 미안해서, 울면 어쩌나 싶었는데 오히려 미소가 그려졌다.

 

이제는 당신이 부르는 걸 들을 수 없다. 당신이 부르는 걸 볼 수 없다.

 

앞으로는 내가 당신에게 불러 줄게.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 즐겨 듣던 노래, 즐겨 부르던 노래, 이제는 내가 불러줄게. 하나씩 하나씩 연습해서 당신이 들을 수 있게 내가 부를게. 음정이 안 맞고 박자가 안 맞아도, 나중에 당신 만나러 가서 구박을 듣더라도, 같이 부르지 못한 만큼 내가 부를게. 못 부르더라도 들어줘.

 

내가 당신을 위해 부르는 노래를, 세레나데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부르다 고개를 돌리니 하늘이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붉어지는 하늘과 금빛으로 변한 구름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노을이라는 게 이토록이나 아름다웠던가 싶다.

 

“노을 참 곱다. 그치? 여보.”

 

소슬소슬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풀잎이 자잘한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여보. 나 거기 가면, 우리 그때는 같이 부릅시다. 열심히 연습해서 갈게.”

 

풀잎에 바람이 스치는 가녀린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마치 당신의 흥얼거림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들으니 정말 당신 목소리 같아서 그리움에 미소가 지어진다. 기다려줘. 여보. 금방 갈게.

 

마법의 질문

마지막으로 혼자 노래를 부른 건 언제인가요?

다른 사람에게 불러준 적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