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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망각을 불허합니다

 

 

 

  망각이라는 능력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요즘 종일 찌는 날씨에 눈사람 사진을 보며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여름 만 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지난 겨울엔 너무너무 추워서 빨리 여름이 되어 해변에 놀러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 계절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오면 한파에 몸을 떨며 내가 경험한 폭염을 잊고 빨리 겨울이 끝나기만 바랄 것이다.

 

 오늘 퇴근길에 선릉역 부근을 걷다가 6411 버스를 보았다. 익숙한 번호인데 뭐였지, 하며 지나치려다가 그게 뭔지 불현듯 떠올라 걸음이 느려졌다. 매일 새벽 강남 지역으로 청소일을 하러 다니는 투명인간들이 타는 버스.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한 정치인의 연설에 등장했던 그 버스였다. 우는 사람들 앞에 훤히 웃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며 마지막 국화를 올리고 온지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으면서, 추도식도 영결식도 그렇게 꺼이꺼이 울며 봐놓고서, 다른 일들로 머릿속이 덮여 또 나는 잘 지낸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대단한, 자꾸 무언가를 잊게 하는 능력이 나를 별 탈 없이 잘 살게 해준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두통을 달고 살아도 좋으니 지우지 않고 싶은 일.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가 생전 속했던 정당에 후원금을 내기로 결심했다. 아주아주 적지만, 이번 달부터 다달이 빠져나가면, 출금 문자를 마주하며 그날 본 영정사진과 6411번 버스, 솔베이지의 노래, 그리고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라 형을 좋아했어요"라며, 누군가가 울음을 참으며 읽던 편지가 계속해서 떠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은 후원도 참 이기적으로 하는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파랗지만 시원하지는 않은 하늘을 보며 밭은 숨을 뱉는다. 부디 내 기억을 보조해주길. 기억을, 마음을, 정의를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나 말고도 아주 많이 생겨나 더 나은 세상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