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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일상

저주와 축복

저주와 축복

 

저주란 무엇일까? 타인의 불행을 바라고 기원하는 행위가 저주이다. 그 반대의 의미로 축복이라는 말이 있다. 타인의 행복을 바라고 기원하는 행위로 대부분 더 할 나위 없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헌데, 저주가 축복이 되고 축복이 저주가 된다면 어떨까?

 

붉은 빛이 도는 체리목의 동그란 티테이블 위에 다이아목걸이 하나가 놓여있다. 이름 없는 장인이 혼신의 힘을 다 바쳐 만든 목걸이는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게 빛나며 눈을 홀렸다. 마치 자신을 소유해달라는 듯이, 갖고 싶지 않냐는 듯이,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빛난다.

 

소유자에게 무한한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는 목걸이, 그럼에도 황금의 신과 승리의 여신이 내린 저주라 불리운다. 이 목걸이를 최초로 소유한 자는 작은 영지의 영주였다. 가뭄으로 가난에 처한 영지의 영주에게 목걸이가 어찌하여 흘러들어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목걸이가 영주의 손에 쥐어진 순간부터 재산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영주는 불어난 재산으로 굶주린 영주민을 구제했으며 그로 인해 영주의 명성이 올라간 것은 당연할 테다. 다만, 몇 달 후에 일어난 전염병에 그의 부인이 심히 고통스레 숨을 거두었으며 마을 영주민 중에는 사망자가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우연이라 생각했다. 부인의 체력이 허약해서라 그리 여겼다. 이후로도 영주의 재산은 점점 불어났고 넉넉한 자금에 영주는 세금을 낮추는 등 선정을 펼쳤다. 그러나 부인의 사망 이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혼례를 치르기 위해 영지를 떠난 그녀의 딸이 봉변을 당한다.

 

꽃다운 17살의 아가씨를 모신 일행이 산속에서 도적 떼를 만난 것이다. 하인들과 기사들이 사력을 다했으나 수적으로 지나치게 불리한 상황, 결국 모두가 죽고 하녀들과 영주의 딸은 도적 떼에 유린당한 뒤 자결하고 만다. 이 또한 불행한 사고라 여기며 지나갔으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듬해 가을 영주의 장남이 주변 몬스터 토벌을 갔다가 사망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막내아들마저 다음해 반란을 진압하다 목숨을 거둔다. 영주의 재산과 명예는 부인과 자식들의 목숨을 먹고 자라는 마냥 그득그득 살이 찌워지고 마침내 후작에 봉해진지 얼마 안가 반역의 누명을 쓰고 참수 당한다.

 

이후 목걸이는 떠돌고 떠돌며 몇몇 귀족가에 흘러갔다, 상인의 손에 넘어갔다, 용병대를 지나 기사단장의 손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진다. 기사단장이 목걸이의 저주를 알아채고 강물에 던져버렸다는 말도 있고 바다에 던졌다는 말도 있다. 그런 목걸이가 200년이 지나 다시 나타난 것이다.

 

사슬로 꽁꽁 감겨서 묶인 나무상자가 수도 바로 옆의 강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연찮게도 그걸 발견한 사람이 에녹과 라비에라였다. 에녹은 본능적인 호기심에 수도의 마법사 길드에 가져가길 바랐고, 라비에라는 본능적인 불길함에 수도의 가엘라 대신전으로 갈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결국 에녹 왕자의 개인 응접실에서 궁중 차석마법사인 피쿠스와 가엘라 대신전의 고위사제인 베르첸이 조심스레 사슬을 끊어냈고, 나무상자의 뚜껑이 열리며 안에 들어있는 물품을 확인하자마 라비에라가 직접 수도에서 첫손에 꼽히는 보석감정가를 데려왔다.

 

6개의 주보석인 블랙 다이아와 정확하게 66개의 화이트 다이아가 수놓은 듯이 세공되어있었다. 목걸이의 특징과 생김새를 되새기던 보석감정가는 안색이 변하며 이것이 저주받은 목걸이라 고개를 조아리고 목걸이의 내력을 신중하게 읊어냈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내용이다.

 

“부와 명예를 얻는 대신 희생인가?”

 

“그보다 어째서 그런 저주가 목걸이에 걸린 걸까요?”

 

라비에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목걸이를 흘겨보았다. 그에 보석감정가도 그것만은 알지 못한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목걸이를 살피고 있던 피쿠스와 베르첸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무언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보였다.

 

“단순히 저주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모호합니다. 대체로 저주라 함은 흑마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목걸이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교묘하게 섞여있다고 해야 할 듯합니다.”

 

“황금의 신과 승리의 여신의 저주라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축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주의 근원은 알 수 없으나 황금의 디에론과 승리의 아토리아는 아니라 사료됩니다.”

 

“그렇담 저주와 축복이 함께 있다는 소리인가?”

 

“예. 에녹 저하.”

 

피쿠스와 베르첸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황금의 신 디에론, 승리의 여신 아토리아의 축복,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저주가 목걸이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주와 축복의 공존이라니 실로 희귀한 일이라 할 수 있을 테다. 그에 잠시 고심하던 보석감정가가 입을 열었다.

 

“외람되오나 에녹 저하, 만약을 대비해 신전에 맡기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소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저하.”

 

기회를 노렸다는 듯이 라비에라가 한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신전에 보내버리기에는 아직 에녹의 성미가 차지 않았다. 전혀 호기심 충족이 되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목걸이에 걸린 저주가 무엇인지는 확인해 봐야하지 않겠나?”

 

에녹의 의견에 본디 호기심이 많은 마법사인 피쿠스와 사제임에도 마법사 못지않게 호기심이 많은 베르첸은 고개를 끄덕였으며 - 심지어 베르첸은 싱긋 웃기까지 했다. - 라비에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석감정가가 물러가고 피쿠스와 베르첸은 모종의 준비를 위해 나무상자를 챙겨서 자리를 떴다.

 

이틀 후, 피쿠스와 베르첸으로부터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에녹은 즉시 라비에라를 대동하고 궁을 나섰다. 시각은 푸른 하늘에 붉은 금빛이 번져나갈 즈음, 에녹과 라비에라가 도착한 곳은 성 바깥의 산속에 자리한 등대였다.

 

울창한 숲속에 세워진 새하얀 등대는 일찍이 산길을 다니는 이들을 위한 것으로 새것처럼 보이는 겉과 달리 그 역사는 몇백년이 훌쩍 넘는다. 에녹과 라비에라는 등대 바깥에 말을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서 벽을 따라 둘러진 계단을 통해 가장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딱 맞춰서 오셨네요.”

 

반갑게 맞이하는 베르첸의 양손에는 어울리지도 않게 사람의 두개골이 들려있었다.

 

“소혼술이라도 하려는 건가?”

 

“비슷합니다. 적어도 목걸이에 걸린 저주나 축복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하니까요.”

 

피쿠스가 두개골의 입안으로 무언가를 집어넣으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목걸이를 만든 장인의 혼을 불러들일 생각인 모양이다. 그런 낌새에 라비에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목걸이와 두개골을 번갈아보았다.

 

“죽은 이의 혼을 함부로 불러도 돼? 특히나 베르첸, 당신은 사제잖아.”

 

“그러니 들키면 안 되겠죠.”

 

싱글거리며 능청스레 대꾸하는 베르첸의 낯짝에 라비에라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에녹은 나직하게 키득거리며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과 곳곳에 피워둔 향초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마음만은 누구보다 신실한 사제님이지. 그보다 향초의 향이 다 다른 것 같은데?”

 

“예. 각기 저승으로 향하는 9개의 강줄기를 상징하는 향입니다.”

 

고통의 강 크루치아, 절망의 강 데스페로, 분노의 강 레게톤, 슬픔의 강 아케론, 탄식의 강 코키투스, 후회의 강 라카톤, 미련의 강 스투포르, 체념의 강 시그나티오, 망각의 강 레테, 9개의 강을 말하는 것이다. 두개골을 목걸이 위에 내려두고, 피쿠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죽은지 오래된 혼이라 성공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뒤로 물러나 계세요.”

 

에녹과 라비에라는 벽에 바짝 붙어서 흥미로운 눈으로 입을 다물었다. 9개의 향초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9가지 색으로 허공을 맴돈다. 신기하게도 연기도 향도 서로 섞이지 않는다. 피쿠스와 베르첸은 두개골과 목걸이를 중앙에 두고 마주서서 눈을 감았다.

 

가슴 앞에 양손을 모아 세우고 온화하게 기도문을 읊는 베르첸, 똑바로 서서 눈을 감고 나직하게 주문을 영창하는 피쿠스, 지금 이순간 사제와 마법사의, 신력과 마력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진귀한 광경이 또 있을까? 아마 모든 역사서를 이 잡듯이 뒤져도 3번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베르첸의 신력은 허공을, 피쿠스의 마력은 바닥을, 기도문과 영창이 묘한 리듬감을 만들어내며 움직인다. 어느새 새까만 하늘에 달빛이 뿌려지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소리가 멎었다. 고요함 속에서 9개의 향과 9색의 연기에 둘러싸여, 달칵- 두개골의 턱뼈가 움직인다.

 

성공한 것인가?

 

4쌍의 눈동자가 두개골을 빤히 노려보는 중에 허공의 모든 연기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향초는 꺼지고 두개골의 눈구멍은 칠흑보다 어두워진다. 심상치 않게 싸한 기운에 누구 하나 겁먹을 법도 하건만, 두개골을 향한 눈동자에는 호기심만 가득하다.

 

“그대가 이 목걸이를 만들었나?”

 

에녹이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무형의 시선이 에녹을 향해 움직였다.

 

- 그렇소이다. 내가 이 목걸이를 만든 장인이오.

 

매캐한 목소리가 달그락거리며 흘러나오고, 피쿠스가 단도직입적으로 목적을 밝혔다.

 

“그 목걸이에 걸린 축복과 저주는 누가 한 것입니까?”

 

- 축복은 신관이, 저주는 내가 한 것이오.

 

“그대가 직접 저주를 걸었다는 말인가?”

 

- 그렇소.

 

망령은 은근히 비웃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게 뭐 어떠냐는 느낌이다. 그가 건 저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알고서 그러기를 바란 것 같다. 에녹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저주한 거지?”

 

- 왜냐고? 억울하니까. 분하고 억울하니까.

 

굳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망령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기세로 오랜 시간을 품어온 울분을 토해냈다. 그의 이름은 판토스, 100년 전에 멸망한 토르티아 왕국의 보석세공사였다. 슬하에 아들딸을 하나씩 두었으며 부인과 함께 평범하고도 행복한 가정을 이룬 가장이었다.

 

어느 날 그가 사는 도시의 디에론 신전에서 신께 공양할 물건을 제작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6개의 새까만 다이아가 재료로 주어줬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에 아무런 의심 없이 수락한 것은 당연하다. 헌데 며칠 후에 아토리아 신전에서 같은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주어진 것은 커다란 다이아 원석.

 

무언가 이상했다. 판토스가 디에론 신전의 의뢰를 받았다는 소식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도시 전역으로 퍼졌다. 그런데 아토리아 신전에서 같은 기한을 제시하고 같은 의뢰를 한 것이다. 의뢰주가 신전이 아니었다면 문제 될 것은 없었을 테다. 하지만 신전이기에 문제였다.

 

서로 다른 신에게 바칠 물건을 동시에 진행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의식과 의례의 문제이다. 하나의 신전에서 두 명의 신을 모시지 않듯이, 한곳에서 서로 다른 신의 공양물을 제작할 수 없는 것이다. 난감했다. 하나는 거절해야한다. 판토스는 아토리아의 신전으로 찾아갔다.

 

- 죄송하오나 디에론 신전의 의뢰를 수행하는 중이라 맡을 수 없나이다.

 

- 지금 디에론 신전의 의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오?

 

- 그런 뜻이 아니오라...

 

아토리아의 신관은 거절을 있을 수 없다면 무조건 만들어내라 성화를 부리며 그를 내쫓았다. 디에론 신전에 찾아갔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제야 판토스는 두 신전의 기싸움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디 하나의 도시에는 하나의 신전이 자리하는 것이 오래된 관습이었다. 헌데 하나의 도시에 2개의 신전이 자리하고 있으니, 알게 모르게 신경전이 오가던 것이 드러난 것이다.

 

판토스는 자신의 처지에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그렇게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세공에만 매달린 그의 몰골은 이미 산사람이라 할 수가 없었다.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맘에 부인과 자식들의 속은 가뭄에 메마른 논바닥처럼 바짝 타들어갔다.

 

또 다시 보름이 지나고 마침내 한 달이 되는 날, 판토스가 내어놓은 결과물의 양측의 신전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6개의 블랙 다이아를 66개의 화이트 다이아가 감싸 안은 세공, 이미 사제의 축복이 깃들어버린 보석으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판토스와 그의 가족들은 불경죄로 끌려갔다.

 

- 네 죄를 네가 알렸다!

 

- 억울합니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애초에 신전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 이런 오만방자한 인간을 보았나! 신들을 모독한 죄, 저자와 그 가족을 모두 화형에 처하라!

 

화형을 위한 나뭇단이 쌓아올려지고 굵은 기둥이 세워졌다. 판토스는 물론 그의 아내와 아들딸까지 기둥에 묶여 기름을 뒤집어썼다. 이윽고 집행관이 횃불을 가져와 불을 붙이고, 판토스는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신관과 사제를 향해 고래고래 악을 썼다.

 

- 당신들이 그러고도 신을 모시는 자들인가! 고작 그대들의 기세 싸움에 오랜 예법을 무시하고 그 죄를 나에게 덮어씌우는가! 그대들이 그러고도 신을 모시는 자들이냔 말이다!

 

악에 받친 그의 목소리에 신관과 사제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광경에 판토스는 고통도 잊고서 불길보다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의 몸을 집어삼키는 불보다 더 붉은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

 

- 그 어떠한 불에도 녹지 않는 황금의 신과 시간의 흐름에도 퇴색되지 않는 승리의 여신이여, 저 목걸이를 소유한 자 부와 명예를 얻으나 소중한 것을 잃을지니, 부디 신들의 축복 속에 억울함 섞인 바람하나 끼워주소서! 가장 아름다운 남신 디에론과 가장 용감한 여신 아토리아에게 저의 영혼을 바치나이다. 부디 이자의 바람을 들어주소서 - !!!

 

화형이 끝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그 일과 관련된 신관과 사제들이 차례로 의문사를 당했다. 덜컥 겁을 먹은 신전에서는 합동 기도회를 올리며 목걸이를 다시 녹이려했으나 목걸이는 녹지도 부서지지도 않았다. 신들은 판토스의 바람을 들어준 것이다. 그의 억울함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결국 두 신전은 각자 다른 도시로 이전했으며, 목걸이는 잠시 암시장을 떠돌다 어느 영주의 손에 들어간다. 여기까지 들은 네 사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신관과 사제가 벌인 일도 어이가 없으나 대체 어쩌다 한 도시 안에 두 개의 신전을 허락했단 말인가.

 

“말세는 말세였나 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신전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묻어서 덮어버렸으리라, 그래서 일전의 보석감정가는 알지 못한 것일 테다.

 

“당신의 저주 때문에 희생된 다른 이들은 무슨 죄죠?”

 

라비에라는 안타까움에 눈가가 젖어들었다. 판토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서 대답했다.

 

- 흥, 그들도 축복에 저주가 더해졌다는 사실은 눈치 챘을 것이오. 그럼에도 목걸이를 버리지 않았지. 오히려 그렇게 얻은 부와 명예를 유용하게 쓰더군. 그 쓰임새가 옳든 그르든 말이오.

 

울컥한 라비에라가 입을 열기 전에 피쿠스가 선수를 쳤다.

 

“복수는 이미 진작 끝났겠다, 그럼 이제 저주를 풀 방법을 알려주시죠.”

 

- 난 디에론님과 아토리아님께 영혼을 바쳤소. 내 영혼이 하늘지옥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저주는 풀리지 않을 것이오.

 

피쿠스와 에녹이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베르첸이 해답을 풀어냈다.

 

“황금의 신과 승리의 여신, 디에론과 아토리아의 아버지 신인 태양의 신이나 어머니인 대지의 신에게 공양하면 되겠군요.”

 

모두의 감탄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베르첸은 상큼하게 미소했다. 물론 그 감탄은 해답에 대한 것이 아니라 베르첸 그가 바로 대지의 여신 가엘라의 고위사제이기 때문이리라. 문제 옆에 해답이 있다고, 바로 눈앞에 해답이 있었던 셈이다.

 

“모쪼록 스승님께는 제가 잘 전해드리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베르첸은 목걸이가 담긴 상자를 대지의 여신 가엘라 대신전으로 가져갔다. 그날 오후 전체 예배에서 6개의 블랙 다이아와 66개의 화이트 다이아로 이루어진 목걸이는 여신의 조각상이 모셔진 제단에 굳게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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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일상

마법사의 심부름

마법사의 심부름

 

넓고 넓은 사막

황금빛 모래가 파도치는 곳

 

맑고 맑은 오아시스

별빛이 찬연한 깊은 밤하늘

 

하늘하늘 나풀나풀

무지개를 담은 칠흑의 깃털

 

“그래서 그 깃털은 어디에 쓴다고?”

 

“모르셔도 됩니다.”

 

가늘어진 눈으로 미심쩍게 흘겨보는 에녹의 시선에 피쿠스는 미간을 찡그리고 입술 씰룩이며 대답했다.

 

“스승님의 프라이버시라서요.”

 

피쿠스의 스승이자 궁중 수석마법사 풀크리오 다우리스의 프라이버시라는 핑계에 에녹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표정을 풀었다. 피쿠스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햇빛이 내려쬐는 모래 위에 발을 내딛었다. 조금의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는 무심한 동작이다.

 

“저, 조금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햇빛을 막기 위해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뒤로 돌아보는 세 사람의 모습에 베르첸은 혼자만 지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체력이 좋은 에녹과 몸이 가벼운 라비에라는 이해할 수 있지만, 책상 앞에 앉아서 책과 마법만 파고드는 피쿠스마저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도착해서 쉬죠.”

 

그렇게 말하는 피쿠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동정이 느껴졌다. 베르첸의 고개가 힘없이 끄덕여지고 네 사람은 다시 발을 움직였다. 푹푹 찌는 열기에 한손으로 땀범벅이 된 얼굴을 훔쳐내는 베르첸에게 라비에라가 슬쩍 다가와 생글거렸다.

 

“왜 예배를 빼먹었을까 후회하고 있지?”

 

베르첸은 짓궂은 라비에라의 시선을 회피하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딱히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베르첸은 이른 아침 졸음의 유혹에 넘어가 예배를 빼먹고 공원의 나무그늘에서 몰래 잠이나 자려다가 피쿠스와 충돌, 뒤를 쫓아온 에녹과 라비에라까지 마주치며 거의 끌려온 셈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갑자기 사막을 걷고 있는 베르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듯 라비에라를 바라보았다.

 

“그보다 안 덥습니까?”

 

“더워.”

 

라비에라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대답을 했고, 베르첸은 머쓱하니 앞서가고 있는 피쿠스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라비에라는 작게 키득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피쿠스는 원래 지구력이 좋아. 게다가 저 로브에는 안쪽에 마법이 걸려있어서 체온이 유지되거든.”

 

베르첸은 의혹이 가득한 시선으로 에녹과 라비에라의 로브를 번갈아보았다. 그런 시선에 라비에라는 그저 싱긋- 미소했고 베르첸은 억울하고 분하고 황당함이 뒤섞인 헛웃음을 토했다.

 

“허, 허. 그럼 저만 더운 겁니까?”

 

발끈한 베르첸의 작은 외침에 피쿠스는 한숨을 쉬었으며, 라비에라는 꿈틀거리는 입술을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돌렸고 에녹은 실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갑자기 포복절도하며 웃는 라비에라의 반응에 베르첸의 표정은 멍하게 바뀌었다.

 

“라비에라하고 내꺼에는 그런 마법 없어, 베르첸. 그녀는 원래 더위에 강한 것뿐이야.”

 

놀림을 당했다는 깨달음에 그렇지 않아도 열이 오른 베르첸의 얼굴이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마냥 벌겋게 달아올랐다. 베르첸의 분노라는 이름의 화산폭발을 피해 라비에라는 잽싸게 그늘을 향해 달려갔다.

 

“가장 뜨거운 사막이라는 별명이 그냥 생긴 건 아닌가 보네. 베르첸이 화도 다 내고~”

 

“더운 건 딱 질색입니다.”

 

베르첸은 그대로 땀에 묻혀 녹아버릴 기세로 축 늘어지며 울퉁불퉁한 나무에 기대어 후드를 뒤로 젖혔다. 후끈한 피부에 서늘한 냉기가 닿으며 한결 시원하게 숨통이 트였다. 에녹은 주저앉은 베르첸의 옆에 서서 물통을 꺼내어 한모금 마시고 땀의 축복을 가득 받은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는 사이 피쿠스와 라비에라는 수풀너머로 보이는 오아시스를 향해 다가갔다. 무더운 사막 속에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차갑게 품어진 오아시스에는 구름하나 없는 하늘이 그대로 투영된다. 발을 디디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미세한 파문 하나 없이 고요하다.

 

“거울이 따로 없는 걸. 여기서 밤까지 기다리면 돼?”

 

“간단하게 준비 좀 하고요.”

 

피쿠스는 왼쪽으로 몸을 틀어 수풀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오아시스 주변을 도는 동안, 겉으로는 태연하게 바위나 나무에 마법 문자를 적으면서 속으로는 에녹 몰래 빠져나오지 못한 스스로에 대해 연민의 한숨덩어리를 키우고 있었다. 피쿠스가 오아시스를 한바퀴 돌아 일행이 있는 곳에 왔을 즈음 해가 저문다.

 

“베르첸씨,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사막 위로 내려앉기 시작하는 노을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베르첸은 고개를 내리며 조금 어리둥절하게 피쿠스를 바라보았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

 

피쿠스의 로브 안자락에서 하프가 나오는 광경에 베르첸의 눈이 커다래졌다. 구불구불한 넝쿨이 우아하게 세공되어있는 하프는 순백의 은빛으로 반짝이며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구조가 단순하며 휴대하기 편한 크기의 하프를 피쿠스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베르첸에게 건네었다.

 

“악기 연주에는 자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해가 지고 나면 한곡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라비에라에게 향하는 피쿠스의 시선, 베르첸의 연주 실력이야 이 나라 백성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으니 수긍할 수 있지만, 라비에라는 뒤이어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에 흠칫했다.

 

“나도 뭐 도울 게, 있는 거야?”

 

“노래라면 제가 부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수컷이 와야 해서 말이죠.”

 

“풉. 큭.”

 

에녹은 입을 막으며 라비에라를 외면했고 베르첸은 농담이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피쿠스와 라비에라를 번갈아보았다. 라비에라는 새침하게 표독스러워진 눈초리로 뒤돌아서 웃고 있는 에녹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격렬하게 알려주지 않으셔도 안다고요. 제가 음치인거!”

 

에녹은 웃음의 여운이 남은 채로 피쿠스를 바라보며 염려스레 말했다.

 

“그랬다가 오던 새도 다시 날아가 버리는 거 아냐?”

 

베르첸과 에녹의 반응에도 피쿠스는 홀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팔짱을 끼고서 살벌하게 에녹을 노려보는 라비에라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라비에라씨의 노래 실력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목소리만 빌리겠다는 겁니다.”

 

원래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담담하게 목소리만 빌리겠다는 피쿠스의 발언에 라비에라는 부글거리는 활화산 같은 눈동자로 얼굴을 들이댔다. 그녀의 뜨거운 열기에 피쿠스는 움찔하며 뒤로 한발짝 물러났다.

 

“오호~ 목소리만~? 어떻게 빌리겠다는 건데?”

 

피쿠스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생각하며 서녘에 걸린 태양을 힐끔거리고는 라비에라에게 목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라비에라는 미심쩍은 눈으로 피쿠스의 손바닥에 있는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목에 걸고만 있으면 됩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걸고만 있으라고?”

 

“예.”

 

라비에라는 목걸이를 집어서 천천히 목에 걸었다. 피쿠스는 그녀가 목걸이를 제대로 착용한 것을 확인하고 해가 지평선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옆에서는 베르첸이 하프의 현을 조율하고 있고 에녹은 느긋하게 앉아서 구경할 준비를 마쳤다.

 

짙푸른 어둠 속에 하나 둘 별빛이 모습을 드러내고 뜨거운 모래는 창백하게 식어간다. 피쿠스의 나직한 중얼거림에 바위며 나무에 새겨진 문자가 빛을 발하고 모래에 남은 열기가 하늘로 증발되며 차갑게 얼어붙는다. 얼음입자가 밤하늘로 피어오르며 반짝인다.

 

“베르첸, 연주 부탁합니다.”

 

“어떤 곡으로 할까요?”

 

“어떤 곡이든, 가능하다면 로맨틱한 걸로...”

 

베르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이고 다정한 멜로디가 서서히 울려 퍼진다. 피쿠스는 라비에라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 검지를 갖다 대며 당부했다.

 

“이제부터 노래가 끝날 때까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라비에라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피쿠스는 손가락을 떼며 짧게 시동어를 걸었다. 목걸이에 박힌 펜던트가 은은하게 빛나고 피쿠스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다들 감탄하고 말았다. 심지어 라비에라는 그녀 자신의 목소리임에도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막아야했다.

 

부드럽고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 달콤하다 못해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라비에라는 미묘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며 양팔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에녹은 팔에 오소소- 팔에 돋아난 소름에 멋쩍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손으로 팔을 문질렀다. 반면에 베르첸은 그야말로 황홀한 표정으로 신들린 마냥 하프를 연주했다.

 

마법사 중에 음치는 드물다했던가? 길고 긴 주문을 박자에 맞춰 고저에 맞춰 영창하기에 음치였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 고쳐진다고 하던가? 에녹은 그런 소문인지 사실인지 모호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밤하늘을 향해 목소리를 뽑아내고 있는 피쿠스를 바라보았다.

 

“라비에라, 자네 목소리가 이리 고왔나?”

 

에녹은 멜로디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감탄하며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타인의 기교와 발성을 통해 듣게 된 본인의 목소리에 라비에라는 무어라 말해야할지, 기묘한 기분을 쉽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으음...”

 

무언가 상당히 낯간지럽고 무안한 기분이란, 라비에라는 마치 첫키스라도 당한 숫처녀가 된 것 같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이어지는 하프 연주는 가늘고 빠르게 바뀌었고 그에 맞추어 피쿠스의 노래도 한층 음이 높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밤하늘에 오색찬연한 빛의 장막이 펼쳐지고 커다란 날개의 소리가 들려온다.

 

커다란 새의 기척에 머리를 뒤로 젖혀 올려다보았지만 새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아니,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찬란한 장막이 잘게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일렁이는 흔적을 눈으로 쫓으며 피쿠스는 오아시스로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베르첸은 하프 연주가 흐트러지지 않게 주의하며, 에녹과 라비에라는 새가 도망가지 않게 긴장하며 피쿠스의 뒤를 쫓아 오아시스로 향했다. 날개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새의 모습이 확연히 보일 즈음, 탐스런 검은 깃털의 새는 밤하늘을 수놓은 오색빛깔을 그대로 담고서 수면에 내려앉았다.

 

작고 동그란 머리에 고아하게 뻗어서 목뒤로 흘러내리는 머리의 깃과 깊고 어두운 수면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꼬리의 깃털은 여신의 은총이라도 받은 게 아닐까 싶은 매혹을 뿜어낸다. 피쿠스는 목소리를 잔잔하게 바꾸며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가 뺐다. 에녹은 그의 손에 들린 게 잡초인줄 알고 놀랐으나, 다시 살펴보니 귀하디귀한 약초임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삼켰다.

 

쌉쌀하고 향긋한 약초의 향이 바람을 타고 부리에 닿는다. 피쿠스의 노래는 속삭이듯 낮아져있고 하프의 멜로디는 졸리운 고양이마냥 나른하다. 새까만 밤의 거울 위로 잘게 파문이 일고 새는 미끄러지듯이 피쿠스 앞으로 다가온다. 그 즈음 피쿠스는 손짓으로 라비에라를 부르고 그녀에게 약초를 쥐어준다.

 

피쿠스의 노래는 멎었고 하프의 멜로디는 가녀리게 이어진다. 라비에라의 손에 쥐여진 약초를 모두 먹은 새는 다시 밤하늘로 날아올라 저 멀리 사라지고, 빛의 장막이 걷힌 수면 위에는 그 흔적만이 남았다. 피쿠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둥실둥실 떠있는 깃털들을 회수했다.

 

“설마 그 오루스 입니까?"

 

베르첸은 눈을 반짝이며 살랑살랑 날아온 깃털을 잡아 주머니에 담고 있는 피쿠스에게 다가갔다.

 

“네. 그 오루스 맞습니다.”

 

밤의 여신이 아끼는 애조(愛鳥) 오루스. 그 전설의 새였다는 사실에 베르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라비에라는 멍하니 넋을 놨으며 에녹은 짧게 휘파람을 부는 것으로 자신의 감상을 더했다.

 

“그래서 그 깃털의 용도는? 여전히 말 안 할 테지?”

 

피쿠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라비에라의 목에서 목걸이까지 회수한 뒤 곧바로 마법 스크롤 하나를 꺼내어 찢었다. 시야가 어지러워지는가 싶더니 곧 낯익은 대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갑작스런 장소 변화에 휘청이는 몸을 가누며 베르첸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허? 갈 때는 왜 걸어간 겁니까?”

 

“스크롤이 하나 밖에 안 남아서요.”

 

그 대답에는 하나를 더 만들 시간이 촉박했다는 뜻도 담겨있었다. 아마 에녹에게서 도망치느라 시간이 없었을 테다. 피쿠스는 그대로 스승의 침실로 쳐들어가 심부름의 결과를 보고했고, 베르첸은 궁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에 몰래 숙소로 돌아가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덕분에 베르첸은 반나절동안 스승의 잔소리를 들어야했으며, 에녹은 여왕에게 호출을 받고는 새로 임명된 교사와 2주간 근신하며 수업을 받을 것을 명령받았다. 방랑벽이 있는 왕자에는 고문과 같은 명령이었다. 그리고 피쿠스는 깃털의 절반을 숨겨두고서 스승과 흥정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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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일상

이슬과 서리의 거울

한방울 두방울 새벽이슬을 모은 맑은 은쟁반

동그란 은빛 테두리 안에 방울방울 구르는 이슬방울

데구르르 구르는 이슬 사이로 슬금슬금 스며드는 싸늘한 서리 바람

 

천일동안 천개의 이슬과 천번의 서리로 만든 거울 속에 맑고 투명하게 비치는 하늘과 구름, 투박하고 거친 손이 조심스레 거울의 표면을 쓸어 만진다. 눈가에 주름이 생기며 접히고 입매가 슬며시 말려 올라간다. 중년의 사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운 비단으로 거울을 감싸서 나무 상자에 넣었다.

 

“어둠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기를...”

 

부정한 것을 물리고 칠흑 속에서도 밝게 빛나기를 바라며 사내는 양손을 모아 기원했다. 다음날 거울을 전달받은 신전의 신관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신전의 중앙에 있는 홀로 들어섰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신전의 홀에는 넓은 분수가 있고 그 중앙에 아름다운 여신상이 서있다.

 

“천번의 새벽을 머금은 이슬과 가장 투명한 바람을 담은 거울을 바치옵니다.”

 

신관은 여신상의 앞으로 내밀어진 왼팔과 왼손에 맞추어 거울을 올려놓았다. 이로써 새로이 생긴 신전의 마지막 부분까지 완성된 것이다. 이어서 하나 둘 마을 주민들이 모이고 신전의 모든 사제가 모인 가운데 여신의 축복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회가 열렸다.

 

젊은 사람, 늙은 사람, 남자, 여자, 아이...마을의 주민 대부분이 홀을 메우고 앳된 수련사들의 찬송가가 분수대 물줄기 소리를 덮으며 울려 퍼진다. 여신을 찬양하는 화음이 절정에 치달았을 때에 한가닥 불길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조화로움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찰나를 지난다.

 

- 챙그랑!

 

여신상의 손에 들려있는 거울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투명한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와 두려움이 번져나가고, 산산이 흩어진 거울 조각을 따라 매서운 서리바람이 휘몰아친다. 세차게 뿜어져 나온 서리는 신전의 담장을 넘어 마을 전체를 얼려버렸다.

 

두터운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차가운 눈발이 쏟아지며 얼어버린 풍경위로 내려앉는다. 시리고 삭막하게 바뀌어버린 마을을 내려다보며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멀어진다. 너무나 통쾌하다는 듯이 멀어지는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남은 건 꽁꽁 얼어붙은 생명들뿐이다.

 

* * *

 

청명한 가을하늘과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들판 위로 짙은 남색 로브를 입은 사제와 어두운 색의 여행복을 입은 사내, 날렵한 차림의 여성과 잿빛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길을 걷고 있다. 여행복에 검을 찬 사내는 뒤따라오는 사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봐, 베르첸. 그 저주받은 마을이 확실하게 이쪽이 맞는 거야?”

 

베르첸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만치 먹구름이 보이죠?”

 

베르첸의 말에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마법사는 한손을 들어 이마에 걸치고서 눈을 가늘게 내려떴다.

 

“예. 확실히 시커먼 구름이 보이는군요. 헌데 어쩌다 그런 일이 생긴 거라고 했었죠? 에녹.”

 

마법사의 질문에 앞서가는 남자는 여전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기도회 도중 여신에게 바쳐진 거울이 훼손되었다고, 전언은 그러했다.”

 

에녹의 간략한 대답에 그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걷는 여자가 갸웃거렸다. 그 동작에 여자의 붉은 단발머리가 발랄하게 찰랑거린다.

 

“생존자가 있었나 보네요?”

 

에녹은 픽-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익명의 전언이었어. 라비에라.”

 

“어머나, 그럼 범인이 보낸 전언인가?”

 

가볍게 농담처럼 나온 라비에라의 반문에 사제인 베르첸은 신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머, 정말인가보네? 어떻게 생각해? 피쿠스.”

 

피쿠스라 불린 마법사는 로브를 좀 더 쫙 여미며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찬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서늘해진 바람에 다른 일행들도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글쎄요. 단순히 거울이 깨진 것만으로 저주가 내렸다면, 그걸 깨뜨린 범인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군요. 거울이 깨졌다는 것만으로 저주를 내릴 만큼 비정한 여신은 아니니까요.”

 

“하긴. 그것도 그러네.”

 

단순히 범인의 영향인지, 아니면 그 거울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는지, 각자의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는 사이, 사르륵 밟히던 눈길을 지나 발목까지 삼켜지는 눈밭에 도착했다. 사람이 다닌 흔적도 보이지 않을 만큼, 들짐승이 지나다닌 낌새도 보이지 않는 곳, 새하얀 폐허가 눈앞에 드러났다.

 

“오싹 하군요.”

 

무심한 피쿠스의 중얼거림에 베르첸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유일한 홍일점인 라비에라가 감탄이 섞인 휘파람을 불며 경쾌하게 가장 먼저 마을로 들어섰다. 에녹과 피쿠스는 유심히 주변을 살피며, 베르첸은 로브 자락을 여미어 움켜쥐며 마을로 들어섰다.

 

“이거, 어디가 길인지를 모르겠네. 베르첸, 신전이 어느 쪽이야?”

 

“여기서 대로를 따라 쭉...마을 중앙입니다.”

 

대로라는 말에 모두의 눈총을 느낀 베르첸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말을 끝맺었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마을에서 길이라고는 그저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 이라고 정의해야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로고 골목이고 구분이 가지 않는 상태, 에녹은 정면으로 몸을 돌리며 움직였다.

 

“결론은 마을 중앙이군.”

 

마을 중앙에 영주의 저택이 아닌 신전이 있다는 건, 아마도 신도들이 모여 꾸린 마을이라 그런 걸 테다. 당당하게 마을의 중앙을 향해 나아가는 에녹을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쿠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언이 익명이었던 만큼 이 마을 자체가 함정일지도 모른다.

 

“괜히 왔나...”

 

“예?”

 

“아닙니다. 어서 가죠.”

 

피쿠스는 자신의 혼잣말에 어리둥절해하는 베르첸의 팔을 붙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신전을 향해 다가가며 피해야할 장애물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얼음 조각상, 정교한 그것은 도망치던 그때 모습 그대로 얼어버린 마을 주민들이었다. 약간의 충격만 받아도 깨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이거야 원, 겁나서 함부로 다니지도 못하겠네.”

 

이리저리 얼어붙은 사람들을 피해 앞으로 걸어가는 라비에라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 피쿠스와 베르첸은 로브자락이라도 걸릴까 조심조심 걷느라 온몸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신전에 가까워질수록 그런 상황은 더 심해졌다. 에녹은 신전의 정문 앞에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담을 넘는 게 더 좋을 것 같군.”

 

네 사람은 그나마 빈틈이 보이는 신전의 담장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에녹과 라비에라는 차갑고 미끄러운 담장을 탄력적인 도약으로 수월하게 넘었고, 피쿠스와 베르첸은 먼저 넘어간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신전의 마당에 안착했다. 천천히 신전의 본관으로 다가가는 이들의 입에서 뽀얀 입김이 흘러나온다.

 

“하아. 입구로는 못 들어가겠는데요.”

 

베르첸의 당혹스러운 반응에 에녹과 라비에라는 고개를 들어 신전의 위를 바라보았다. 라비에라는 허리춤의 밧줄을 풀어내며 턱끝으로 2층의 창문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로 들어가죠. 제가 먼저 올라갈게요.”

 

“조심해.”

 

라비에라는 자신의 허리에 밧줄을 묶었고, 에녹은 반대편에 갈고리를 달아서 2층 창문 근처의 난간으로 집어던졌다. 갈고리가 난간에 걸리고, 줄을 잡아당겨 제대로 고정된 걸 확인한 후, 라비에라는 활에 화살을 먹이고 창문을 조준한 에녹을 바라보았다.

 

- 쌔액, 챙!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두껍게 얼어붙은 창문을 관통했고, 곧장 밧줄을 타고 위로 올라간 라비에라는 단검의 자루로 유리창을 부수어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라비에라가 늘어뜨린 밧줄을 타고 피쿠스와 베르첸이 차례대로 올라간 후 에녹이 제일 마지막에 2층 창문으로 들어갔다.

 

“자, 이제 거울을 찾으러 가자고요.”

 

신전까지 무사히 들어온 것에 약간 안심한 것인지, 아니면 긴장감을 풀기위한 것인지, 라비에라는 허리를 실룩이며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실내인데도 바깥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기온에 꽁꽁 얼어버린 대리석바닥은 조금만 방심하면 훌륭한 미끄럼틀이 될 것 같다.

 

“으흠. 발 디딜 틈도 없는데요?”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멈춰선 라비에라는 뒤를 돌아 에녹을 바라보았다. 여신상과 분수대가 있는 1층의 중앙 홀은 그 당시 기도회에 참석한 주민들과 사제들로 인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을 정도였다. 영문도 모르고서 얼어버린 사람들, 공포와 두려움이 뒤섞여 몸을 비트는 사람들.

 

“난감하군요.”

 

현재 처한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드러낸 피쿠스의 한마디에 다들 동의하며 머리를 굴렸다. 거울을 회수해서 원상복구하고 여신상의 팔에 다시 올려놓는 것, 그게 이들에게 주어진 1차적 임무이다. 그 과정에서 원인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마을의 저주를 푸는 것이 최종임무다.

 

“그러고 보니, 어째 여태까지 코빼기도 안보이네요.”

 

이 마을이 함정이라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텐데, 그런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질 않았다. 에녹은 눈을 가늘게 감으며 홀의 중앙에 있는 여신상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게 덫이라면 과연 무엇을 위한 덫일까? 누가 어떠한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거울을 빼낼 방법이 없을까?”

 

“없지는 않습니다만.”

 

에녹의 질문에 피쿠스가 대답하며 품속에서 새까만 밧줄을 꺼냈다. 그는 계단 난간에 바짝 붙어서 거울을 찾기 위해 기웃거렸다. 옆에서 덩달아 목을 쭉 빼고서 홀을 내려다보던 베르첸이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어둠속에서 푸르스름하고 미약한 광택이 보였다.

 

“저거 같습니다.”

 

피쿠스는 베르첸이 가리킨 쪽을 향해 밧줄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Rope Trick. (로프 트릭)"

 

가늘고 기다란 밧줄이 뱀처럼 뻗어나가 거울을 휘감았다. 뻗어나간 밧줄이 회수되며 피쿠스의 손에 거울이 잡히는 순간, 날카롭고 미세한 마찰음이 들렸다.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알리는 감각에 소리의 근원을 찾는 시야로 새파랗게 얼어붙은 사람들이 천천히 목을 비트는 광경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도망가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슬그머니 뒷걸음치는 라비에라의 의견에 동조하며,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려 계단을 뛰어올랐다. 파삭파삭 거리며 쫓아오는 발소리를 뒤로 하고 아까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베르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돌려 문이 열려있는 다른 방으로 뛰어들었다.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 밧줄을 타고서 올라온 이들을 봤기 때문이다.

 

“밧줄을 치웠어야 했는데.”

 

마지막으로 에녹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서 잠갔다. 라비에라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으며, 신전을 향해 다가오는 기괴한 모습의 사람들을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녹은 방안의 가구를 움직여 문을 막으려했지만 너무 얼어있어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 쾅. 쾅. 쾅.

 

달갑지 않은 요란한 노크에 라비에라와 에녹은 문을 마주보며 나란히 섰고, 그 뒤에서는 베르첸과 피쿠스가 거울을 이리저리 살피며 속사포마냥 의견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밖에서 두드려대는 소리에 문이 부서지는 건 시간문제일 듯싶었다.

 

“이 거울은 천번의 이슬과 서리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이른 새벽의 이슬과 밤의 서리 바람으로 만들었다고, 물론 그게 실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이슬을 얼린다고 해서 거울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아마도 비유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언가 이슬과 서리에 비유한 걸 테죠. 다만 이 거울에 어떤 힘이 있었기에 이런 저주를 내릴 수 있었냐는 걸 알아야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군요.”

 

- 쾅. 쾅. 콰직-!

 

피쿠스와 베르첸의 대화가 잠시 중단되고, 에녹은 5개의 화살을 먹인 활을 들어 문을 겨냥했다.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해. 막아 볼 테니까.”

 

“이왕이면 죽기 전에 끝내주면 좋고, 아직 처녀귀신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에녹의 화살이 날아가 붉은 파장을 흩뿌렸다.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다가오는 기세에 라비에라는 맘을 굳혔다. 옆에서 피를 흘리며 부서지는데도 반응이 없다는 건 의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얼어서인지 움직임이 둔하다는 것.

 

라비에르의 표창이 날아가고, 차가운 핏방울이 떨어져 얼어버린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각각의 장검과 단검이 물 흐르듯이 춤을 춘다. 피쿠스는 얼음송장 무리의 후방을 향해 6발의 불화살을 날렸다. 그 옆에서 베르첸은 거울의 뒷면과 앞면에 있는 고대의 문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이른 아침의 해가 뜨기 전 붉은 여명을 머금은 이슬, 가장 순수한 생기를 담은 천개의 이슬을 바치나니...라고 적혀있습니다. 왼쪽에 창문이요!”

 

은색 틀의 앞면에 적힌 문구를 읽으며 고개를 든 베르첸이 창문을 가리켰다.

 

- 채앵.

 

“키에엑.”

 

표창과 화살을 동시에 맞은 얼음송장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피쿠스는 창문이 있는 쪽으로 손을 뻗어 주문을 영창했고, 그에 따라 철벽같은 얼음벽이 솟아올라 창문을 가려버렸다.

 

“붉은 여명에 가장 순수한 생기라면 인신공양(人身供養)아닙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 같군. 그래서 더 적혀있나?”

 

검등으로 어깨부터 허리까지 내려쳐 깨뜨리는 에녹의 동작에 사람모양의 얼음이 둘로 쪼개어지며 무너진다. 베르첸은 불속성 마법을 마구 퍼부어대는 피쿠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낙담하듯 한숨을 쉬었다.

 

“뒷면에 적힌 건 제가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아닙니다. 피쿠스.”

 

피쿠스는 입술을 깨물며 나직하게 신음을 내고서 베르첸에게서 은색 쟁반을 건네받았다. 앞면에 적힌 것은 이 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모국어이지만, 뒷면에 적힌 것은 마법사나 고고학자나 알법한 룬문자였다. 여신에게 바친 물건에 신전의 신성문자가 아닌 룬문자가 적혀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신공양에 마법진이라니, 대체 어떤 여신인 겁니까?”

 

어이없음을 드러내는 피쿠스의 반응에 베르첸은 에녹을 보조하며 대답했다.

 

“어린아이와 연인의 애정을 축복하는 여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신공양을 했다고? 게다가 마법진?”

 

날렵한 고양이처럼 얼음송장 사이를 누비고 다니던 라비에라는 헛웃음을 뱉었다.

 

“으음. 이 마법진 대로라면 이들은 단순히 얼어버린 게 아니군요. 생기를 모두 뺏긴 거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그럼 맘 놓고 부숴도 되겠네.”

 

혹여나 살릴 방법이 남아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편치못한 심정이었던 라비에라는 차라리 개운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피쿠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절제된 동작으로 거리낌 없이 얼음송장을 깨부수고 있는 에녹을 보며 묵직한 한숨을 삼켰다. 반면 베르첸은 암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설마 멈출 때까지 계속 부숴야하는 겁니까?”

 

“마을 주민이 모두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무식하고도 확실한 방법이죠. 다만 그때까지 저희가 버틸 수 있다는 가정을 하고 말입니다.”

 

에녹은 횡으로 검을 휘둘러 두 개의 얼음송장을 단번에 쪼개어버리고 피쿠스를 향해 명령했다.

 

“피쿠스, 해제해.”

 

단호한 명령에 피쿠스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수많은 말을 울컥거리며 입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 피쿠스의 안색을 눈치 챈 베르첸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힐끔거렸다.

 

“간단해보이지는 않던데, 괜찮겠습니까?”

 

피쿠스는 에녹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서 양손으로 거울 틀을 쥐고 눈으로 훑으며 마법진을 분석했다.

 

“하라니 해야죠. 누구 명령인데요. 탈진해서 죽으나, 얼어 죽으나, 맞아죽으나, 죽기는 싫으니까요.”

 

삐딱한 피쿠스의 태도에 그럼에도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모습에 라비에라는 신나게 두 개의 단검을 휘두르며 키득거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그녀와 긴장감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다른 두 사람의 분위기에 베르첸은 웃어야할지 화를 내야할지 비명을 질러야할지, 난감했다.

 

발밑에는 빙판길 부럽지 않게 조각조각 부수어진 얼음이 가득 쌓이고, 창문을 막아둔 얼음벽에 가닥가닥 금이 갈 즈음, 피쿠스는 거울의 틀을 바닥에 세우고서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 몇 시죠?”

 

“몰라.”

 

“모르겠는데.”

 

“어, 글쎄요...”

 

피쿠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거울의 세워둔 바닥에 새하얀 목탄으로 그림인지 문자인지 모호한 것을 적으며 베르첸을 향해 요청했다.

 

“이왕이면 시간이 맞으면 좋겠지만, 안되면 할 수 없죠. 베르첸, 저 얼음벽이 깨지면 먹구름을 치워주겠습니까? 가능하다면 말끔하게, 최대한 햇빛이 다 비쳐지게 부탁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두 분도 제가 신호를 보내면 저보다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알았어.”

 

“그러지.”

 

피쿠스는 손을 털고 꼿꼿하게 정면을 보고 섰다. 그리고 시작된 영창에 맞추어 바닥에 그려둔 기이한 문자들이 희미하게 빛을 뿜어낸다. 발밑에서 미미하게 깔리는 온기를 따라 피쿠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리며 퍼지고 그 옆에서는 베르첸이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며 창문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 파직, 콰지직, 콰직-!

 

얼음벽이 와르르 무너지고 이미 깨져버린 창문으로 벽을 타고 올라온 얼음송장 한무리가 들어온다. 그 뒤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베르첸은 힘주어 외쳤다.

 

“Control weather, Sunny. (기상변화마법, 화창하게)”

 

마을의 상공을 뒤덮고서 꾸물거리던 먹구름에 굵직한 파문이 생기며 일렁거린다. 겹겹이 두터운 먹구름에 틈이 생기고 갈라지며 따스한 햇살이 비집고 흘러나온다. 제대로 발동된 것을 확인한 베르첸은 다시 에녹과 라비에라를 엄호했고, 주문을 영창하는 피쿠스의 목소리는 울렁이며 고저가 심해졌다.

 

중앙의 유리가 없는 거울에 햇살이 맺히며 모이고 뒷면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의 배열이 변한다. 그 기세에 뭔가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얼음송장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다. 영창을 끝낸 피쿠스는 흘끔거리며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세 사람에게 뒤로 물러나란 손짓을 했다.

 

라비에라, 에녹, 베르첸은 각자 최대한 빠른 몸놀림으로 피쿠스의 뒤편으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피쿠스는 투명한 가루가 가득 든 유리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고 얼음송장들을 향해 아낌없이 뿌리며 마지막 단어를 외쳤다. 견디기 힘든 빛이 사방으로 흐르고 네 사람은 실명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깨어지는 소리, 부수어지는 소리, 기괴한 비명 소리, 먹먹할 정도의 요란스러운 소리가 잠잠해지고, 에녹이 가장 먼저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부서진 창문을 스며든 붉은 노을빛에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물이 찰박거린다. 본래는 사람이었을 이들의 시체조차 얼음과 함께 녹아버렸는지 보이질 않는다.

 

“흐아.”

 

긴장감이 풀려 숨을 뱉으며 주저앉은 베르첸의 곁에서 피쿠스도 양손으로 목을 감싸며 호흡을 골랐다.

 

“정말, 정말이지. 저는 용병이 아니라, 궁중 차석 마법사란 말입니다. 에녹 저하도 용병이 아니시고! 이런 일은 전문적인 용병에게 맡기시란 말입니다!”

 

“엄살은...”

 

“엄살이라니요! 저하!”

 

“이런 일로 투덜거리기에는 피쿠스, 당신의 체면이 있지 않아? 궁중 차석 마법사 나으리.”

 

라비에라는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이 재미나는지, 생글거리며 한마디 보태었다. 톡- 까놓고 말해 특급 정도의 용병이 아니라면 단 네 명이서 이런 곳에 올 엄두는 내지도 않을 테다. 그나마 검술이라면 타국까지 통틀어 한손에 꼽히는 에녹과 그런 에녹의 그림자나 마찬가지인 라비에라, 그리고 역대 최연소 탑메이지 칭호를 받은 피쿠스이기에 겁도 없이 쳐들어온 셈이다. 그리고...

 

“그나저나 우리 대신관의 수제자께서는 많이 놀랐나보네. 다리가 풀리셨나?”

 

“아, 하하. 제가 간이 콩알만 해서요.”

 

에녹은 아무런 말없이 방을 나가 1층의 홀로 향했고, 라비에라는 잘게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피쿠스는 한숨을 푹푹 내뱉으며 거울을 챙겼고, 베르첸은 덜덜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무릎을 짚으며 겨우 일어서서 걸음을 옮겼다. 텅텅 비어버린 홀에 도착한 에녹은 인상을 마구 구겼다.

 

여신상이 완전히 박살이 나있었다. 낭패감과 아쉬움이 담긴 분을 삭이며 신전을 나오니 먹구름이 물러간 하늘은 청명한 가을빛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신전도 건물도 서늘한 물기를 방울방울 떨어내고, 인기척 하나 없는 마을은 원래부터 비어있는 게 아니었을까 싶은 정도이다.

 

결국 건진 거라고는 유리가 깨어진 수상한 거울뿐이고,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으며 범인은 꼬리도 잡지 못한, 아니 보지 못했다. 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허탈하고 맥 빠지는 기분을 달래며 마을을 빠져나와 하룻밤을 쉬고, 수도로 돌아가야 했다.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베르첸은 스승인 대신관에게 불려갔고, 피쿠스 역시 스승이자 상사인 궁중 수석 마법사에게 호출 당했으며, 에녹은 그의 모친이 여왕의 서재로 불려가 혼쭐이 나야했다. 그나마 라비에라가 혼나지 않은 것은 에녹이 가는 곳에 그녀가 가야하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일 테다.

 

어쨌거나 한차례 꾸지람의 시간이 지나가고, 여신의 저주를 받은 얼음 마을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었으며, 피쿠스는 스승이 내어주는 업무와 과제에 파묻혀 연구실 깊숙이 넣어둔 거울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에녹과 라비에라는 또 어딜 나가볼까 궁리하며 거울의 존재를 잊었다.

 

그렇게 여러모로 잊혀진 거울은 후에 아주 몇 년이 지나서 피쿠스가 연구실 대청소를 할 때 발견되지만, 시커멓게 변색된 상태에 알아보지 못한 그는 거울을 다른 쓰레기들과 같이 내다버리고 만다. 쓰레기를 치우던 하인이 뭔가 돈이 될까 싶어서 골동품상에 넘기고...이후 그 거울이 어찌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니, 저주도 마법도 잃고 평범한 골동품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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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휴가가 필요해

 

 

 

 

  “전화 끊지 않을게요.”

 

  S는 살면서 남자의 목소리가 그렇게 달콤하게 들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5분여동안의 통화를 마친 그녀는 ‘그래도 삶이 좋은 것’이라는, 꼭 <탈무드>에나 나올 법한 문구가 떠올랐다고 한다.

 

  콜 수를 채우지 못해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지장은 없지만 그 수치들이 쌓이고 또 쌓여 H의 성적표를 만들어준다는 것, 사실 인사고과라던가 그런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나 남들 다 하는 걸 넌 왜 못하냐는 말을 들은 이후로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는 것. 그녀의 일상이 즐거움보다 괴로움의 단어로 더 묵직해지게 되었음은 이런 것들만으로도 이해하기 충분했다.

 

  어쩌다 친구들을 만나면 “한강 물은 따뜻할까”라는, 요즘 유행이랍시고 번지는 이상한 말을 장난이랍시고 던지던 그녀가 다시 밝아진 건 어떤 남자의 전화 한 통을 받고 나서였다. 아이템 환불을 원한다, 캐릭터를 잘못 구해했는데 다른 것과 교환이 되냐, 어떤 유저가 나에게 결혼하자는 쪽지를 계속 보내는데 여기에 신고해도 되냐 등등의 말들은 처음엔 꽤나 흥미로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화기 너머로 쌓여가는 것들은 사람의 말소리라기보다는 짐승의 포효 비슷한 무엇, 혹은 검은 우물을 연상케 하는 한숨이라 어느새 S는 중국집에 전화를 거는 것조차 꺼리는 통화 기피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여느 때처럼 헤드셋을 끼고 인입된 콜을 받았을 때 상대는 중년의 남성이었고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이가 아이템을 잘못 눌러 결제되었는데 환불이 되는지’에 대해 물었다. S는 매뉴얼에 있는 대로 처리를 한 뒤 다른 사람들의 ‘이만 끊자’와 같은 의미로 통용되는 “더 불편하신 사항은 없으신가요?”라는 인사말을 건넸는데, 상대에게 돌아온 대답은 “잠깐만요”였다. 조금 당황했으나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목소리를 다시 한 번 가다듬는 그녀에게 남자는 말했다.

 

  “잠깐만요. 아가씨가 많이 지쳐 있는 것 같아서요. 제가 통화종료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다른 전화는 안 들어오는 거죠? 5분 정도라도 쉬세요, 전화 끊지 않을게요.”

 

  S는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여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갑작스레 얻은 휴식이 휴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딱 5분 동안, 수화기 너머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나비가 날아오르고 개나리가 피고 모락모락 밥 짓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잊었던 뭔가가 떠오르고 그립고 하염없이 눈물이 나올 뻔 했지만 그저 희미하게 웃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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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17. The Star

17. The Star

 

등교하기 전 이른 아침, 평소라면 불이 꺼진 채 문이 닫혀 있을 카페가 불이 켜져 있었다. 입구에 라는 작은 명패가 달린 이 카페는 평소에 친구들과 심심풀이 삼아 타로 점을 보러오는 곳이다. 최근에는 시험기간이라서 자주 오지 못했는데 이른 아침에 문을 연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들어가 볼까?’

 

그렇지 않아도 시험이 끝나면 와볼까 싶었다. 친구들과 같이 오는 게 아닌 나 혼자서.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데 문이 살짝 열리고 낯선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카페에서 주로 타로 점을 봐주는 언니도 아니었고,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해주는 오빠도 아니었다.

 

“들어올래?”

 

“네? 저요?”

 

얼떨결에 되묻는 나를 보며 그는 싱긋- 웃었다. 귀공자 같은 외모에 그런 살인적인 미소라니, 뺨이 화끈거린다. 이건 반칙이다. 그러면서도 발은 내 대답을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카페로 향한다. 카페 안으로 들어와 그를 따라서 창가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최현, 여기 오너야.”

 

“아, 네. 네?”

 

엉겁결에 대답하다가 깜짝 놀랐다. 이렇게 젊은 미남이 카페 사장이라니, 소문으로만 들었지 보는 건 처음이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자랑이라도 해야겠다. 그는 조용히 미소하며 카드를 골고루 섞었다.

 

* 점을 보기 전 카드를 골고루 섞는 걸 Shuffle이라고 한다.

 

‘언니는 주면서 직접 섞으라고 하던데. 조금 다르네.’

 

사람마다 다르다고는 들었지만, 조금 의외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는 테이블 위에 카드를 일렬로 쭉- 펼쳐놓고 말했다.

 

“딱 3장만 골라봐.”

 

“음-.”

 

나는 테이블 위에 일렬로 펼쳐져 있는 78장의 카드를 노려보았다. 마치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3장의 카드를 골라서 빈자리로 빼내었다. 그는 아직 뒷장을 보이고 있는 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좌우는 상관없지만, 상하는 신중하게 정해서 뒤집어봐.”

 

가장 왼쪽에 있는 카드를 집어서 아래에서 위로 뒤집었다. 드러난 카드는 [01. 마법사] 정방향이다. 다음은 위에서 아래로, 마지막 카드는 다시 아래에서 위로 뒤집었다. 각각 [17. 별]과 [13. 죽음] 모두 정방향이었다. 마지막에 나온 카드에 시선을 고정하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저 카드가 모두 나쁜 건 아니라고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심 찝찝했다. 해골이 그려진 우중충한 그림이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거 같다. 눈동자를 굴려 힐긋 바라보았다. 순간 시선이 마주치며 그가 걱정 말라는 듯이 웃었다.

 

“하고 싶은 일을 속에 숨겨두고 있구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 알았을까? 부모님에게도 친오빠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속에만 숨겨두고 있었다. 놀란 내 눈을 보며 그는 마법사 카드를 가리켰다.

 

“마법사의 카드는 지식이나 지혜와 관련이 있지만, 속임수를 쓴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때도 나오지. 반면, 지금은 또 다른 의미로 숨겨진, 잠재된 능력을 뜻하기도 해.”

 

“잠재된 능력이요?”

 

그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별이 반짝이고 있는 카드를 짚었다.

 

“네가 희망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

 

곱고 남자다운 손가락이 짚은 카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고 싶은 일,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성적을 올리는 일이 중요하고 우선이다. 그 이유를 알고 있고 납득하면서도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생각이 들어 답답하다.

 

“겁나니?”

 

그림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얘기했을 때, 부모님이 뭐라고 하실지, 친구들은, 선생님은 뭐라고 하실지, 그리고 나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마법사 카드로 옮겨갔다.

 

“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할까봐 겁먹을 필요는 없어. 넌 이미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니까. 다만, 그 자질이 빛을 발하려면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거야.”

 

그의 말에 울적한 말이 조금 가라앉아 눈을 들어 작게 되물었다.

 

“정말요?”

 

“그럼. 다만...”

 

그는 가장 마지막,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짚었다.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성장하려면 이 고비를 반드시 넘겨야 해.”

 

“어떻게요?”

 

그는 팔을 테이블에 올려서 기대고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상냥한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숨기지 말고 알려야지. 설령 누군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너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걸 보여주며 설득해야 해. 그리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워나가야겠지.”

 

“꼭, 알려야 돼요?”

 

나를 마주한 미소가 한층 더 부드러워지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받고 배우기 위해서라도 알릴 필요가 있어. 너를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나를 이해하고 도와줄 사람.’

 

카드를 처음부터 찬찬히 훑어보았다. 잿빛 머리의 노련해 보이는 마법사와 크고 아름답게 빛나는 별과 깃발과 방패를 든 해골, 필요한 건 용기와 노력과 배움이다. 가능과 불가능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울렸다. 울림이 사라지고 마음이 상쾌해졌다.

 

‘할 수 있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냐. 얼른 가 봐.”

 

그는 유리창 밖을 눈짓했다. 낯익은 여고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와 달려갔다.

 

“얘들아! 같이 가!”

 

“어? 너 왜 저기서 나와?”

 

“아침부터 커피 마셨어?”

 

난 활짝 웃으며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아니! 앞으로 내 운을 봤어. 그런 의미에서 너희에게 할 말이 있는데.”

 

“뭔데?”

 

씩- 웃으며 내가 꺼낸 말에 등굣길 내내 놀라기도 하고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반응은 금세 이런저런 호기심과 관심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참고할 만한 자료나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과 선생님은 달랐다. 현재 고3, 수능을 앞 둔 수험생이 갑자기 진로를 바꾼 것에 선생님은 크게 걱정하셨다. 심지어 엄마는 화를 내기도 하셨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냐며, 왜 탄탄한 진로를 두고 그런 불확실한 길을 선택하는 거냐고 눈물이 쏙 빠질 만큼 된통 꾸지람도 들었다.

 

그럴 때면 힘이 되어주는 건 친구들이었다. 부모님도 언젠가는 이해하실 거라고, 오히려 그렇게 하고 싶은 꿈이 있다는 게 부럽다는 말도 들었다. 그때마다 용기를 내서 부모님을 설득했고,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다. 내 끈질긴 설득에 먼저 마음을 움직여주신 건 선생님이셨다.

 

“현재 네가 원하는 학과로 안전하게 지망할 수 있는 곳이 어디냐 하면...”

 

선생님은 그렇게 내가 원하는 길을 택할 수 있게 안내를 해주셨고,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걸 눈치 챈 오빠와 아빠가 엄마를 설득해주셨다. 덕분에 마지못해 내 선택을 인정해주셨지만, 시간이 지나서 수능을 끝내고 대학에 들어가 장학금도 받으며 열심인 모습에 엄마도 천천히 나를 인정해주셨다.

 

계절이 바뀌고, 학년이 바뀌고, 대학을 졸업하는 동안 꾸준히 노력한 결과, 20대 중반에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넉넉하지는 않아도 자리를 잡고, 인정도 받으며 소소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그날 아침의 일이 떠오른다.

 

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할까봐 겁먹을 필요는 없어.

넌 이미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니까.

다만, 그 자질이 빛을 발하려면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거야.

 

그날 이후 수능이 끝나고 대학교 근처로 이사를 할 때까지, 다시 보지 못했다. 소문은 여전히 무성하게 나 있지만, 어깨를 으쓱거리며 창문 너머로 새벽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신기하지만, 확실하게 사람이었으니까. 언젠가 우연히 다시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새삼 희미하게 떠오르는 얼굴에도 미소만은 뚜렷하다는 느낌에 쿡- 하고 작게 웃었다. 동쪽 하늘에 새빨갛게 떠오르는 태양이 너무도 아름답다. 그 태양을 마주보며 눈이 다 감길 만큼 미소했다.

 

오늘 하루도 시작이다. 반짝이며 빛나는 꿈을 위해 달려갈 하루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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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7. 한날, 한시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07. 한날, 한시

 

가끔씩 위험한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야한 상상이나 잔인한 상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위험한 상상이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 계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없지는 않을 테니, 아마도 내가 자각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걸 테다.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가장 처음은 중학생 때다. 한창 사춘기일 때, 어느 날 문득, 과도를 거꾸로 들고 목을 찌르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죽고 싶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그저 과도로 목을 찌르며 고통을 먼저 느낄까? 아니면 숨이 먼저 끊어질까? 그런 생각에 떠오른 상상이었다.

 

그야 말로 위험한 상상, 높은 힐을 신고 계단을 내려가다 발을 헛디뎌 데굴데굴 구른다거나, 쿵쾅거리는 윗집 아이들 때문에 천장이 무너진다거나, 녹색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갑자기 차가 튀어나온다거나, 골목길이나 내리막길에서 트럭이 튀어나온다거나, 등등.

 

또는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면 속이 시원할까? 한창 시끄러운 묻지마 살인의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을까? 소설이나 영화, 만화에나 나오는 원귀가 정말로 있을까? 그런 공포 영화 같은 일을 직접 겪게 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같은 망상에 가까운 상상 말이다.

 

이런 상상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마법의 질문

당신이 어떻게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있나요?

 

그런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뭐라고 해야 하나 싶다. 스스로의 죽음을 예감하는 능력이 있다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있다면, 그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이가 없다 못해 막막하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뭘까? 그 꿍꿍이가 궁금하다.

 

중도 제 머리는 못 깎고, 아무리 용한 점쟁이도 지 죽을 제삿날은 못 맞춘다는 말도 있다. 내가 무슨 예지몽을 꾼 것도 아니고, 어떻게 죽을지 생각이나 바람이 아니라 예감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난 그런 능력도 없고 감이 좋은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질문의 대상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다.

 

죽음, 죽음. 죽음!

 

사고, 질병, 노화, 재해, 살인, 또 뭐가 있지?

 

내가 알고 있는 인상 깊은 죽음 중 하나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마지막이다. 그녀는 구경거리가 되는 치욕을 겪지 않기 위해 독사에게 물려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인 여왕의 명예와 품위를 지키기 위해 그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상당히 엽기적인 이야기라서 실화인지 허구인지 모르겠다. 한 여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뺏긴 분노에 연적을 고문에 가까운 방식으로 죽이고, 사랑하는 남자의 시체를 냉동보관하며 요리해먹는다는 내용이다. 차마, 세부적인 내용을 적지는 못하겠다.

 

자살을 택하는 이들은 사는 게 힘들어서, 또는 살아갈 용기가 없어서라고 말한다. 그런 이들에게 사람들은 언제나 비슷한 말을 한다. 죽을 용기로, 죽을힘으로 뭐든지 해보라고, 그럴 용기가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다는 건 죽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걸 테다. 그것도 생각보다 상당히 강한 용기가 말이다.

 

죽음은 두려운 걸까?

 

안락사가 떠오른다. 유기동물의 안락사, 불치병에 사경을 헤매는 이를 위한 안락사(안락사가 합법인 곳이 어디인지 기억이 안 난다.) 반려동물의 안락사. 왜 안락사일까? 죽음이 두려운 거라면, 안락한 죽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뭘까? 결론은 고통이 두려운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두렵고 무서운 죽음보다 더 무섭고 견딜 수 없는,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안락사라면,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닐 것 같다. 어쩌면 두려운 게 아니라 안타까운 게 아닐까? 무섭고 두렵다고 느낄 만큼 안타까운 그런 게 아닐까?

 

안타까운 이유는 뭘까?

 

죽음이 두렵고 무서울 만큼 안타까운 이유는 뭘까? 끝이기 때문이라면, 삶에 미련이 남아서라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그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에 두렵고, 무섭고, 안타까운 걸 테다.

 

그럼, 삶에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의욕도, 없는 사람이라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도 있겠다. 미련 없이, 후회 없이, 신나고 멋지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의욕이 사라진 사람이라면, 죽음은 두렵지 않은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

 

글쎄? 과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한다. 아무리 신나고 멋지게 살아온 사람이라도 조금만 더, 라며 욕심을 낸다면, 죽음이 두렵겠지. 어쩌면, 생의 마지막에 이제 갈 때가 되었다는 어르신들의 말 뒤에도 실은 그 깊고 깊은 곳에 미련이나 후회가 남아 있지 않을까? 오랜 세월로 익힌 초연함 뒤에 두려움이 있지 않을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빌딩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면,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이 절망 끝에 높은 다리 위에서 차디찬 강물을 내려다보는 그 심정에도 뿌리 깊은 후회가 가득하다면, 그래서 두려운 걸지도 모르겠다.

 

“흐음. 쿡-.”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질문을 바꿔볼까?

 

펜을 들어 종이에 대답을 적고, 봉투에 넣었다. 책상 한쪽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어둑해진 거실에는 은은한 램프 하나만 켜둔 채 그가 책을 읽고 있었다. 난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다가가 옆에 앉았다. 그제야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왜 그렇게 웃고 있어? 불길하게...”

 

아마도 내가 또 위험스레 반짝이는 눈빛으로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모양이다.

 

“흐음. 질문이 하나 있는데.”

 

얼굴을 슬슬 들이미니 그가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난 입매를 옆으로 더 찢으며 씨익- 웃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며 양손으로 볼을 잡았다. 그가 입술 새로 윽- 하는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다. 난 쿡- 하고 웃어주었다.

 

“뭐, 뭔데 그래?”

 

“혹시 말이야, 나중에 어떤 죽음을 맞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해본 적 있어?”

 

뜬금없이 무슨 엉뚱발랄한 질문이냐는 괴상한 표정을 짓는다.

 

“응? 있어?”

 

재차 물으니 그제야 눈썹을 묘하게 찌푸리며 시선을 돌려 생각해보는 눈치다.

 

“글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굳이...”

 

슬쩍- 시선을 돌려 내 눈을 내려다본다. 난 궁금증을 가득 담은 눈으로 갸웃거렸다.

 

“굳이?”

 

피식- 하는 미소로 양손을 들어 내 얼굴을 감싸 쥐고 코가 닿을락 말락한 정도로 다가왔다.

 

“나중에 백발 할아버지가 되어서, 쭈그렁 할머니가 된 너랑 손잡고 나란히 한날, 한시에 떠나는 거.”

 

가늘게 휘어진 그의 눈 안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발개진 내 얼굴이 비친다.

 

“그래놓고 먼저 가기 없기다?”

 

조금 뚱한 목소리로 대꾸하니 그가 키득거리며 작게 웃는다. 얄미워서 노려보고 있자니, 더 가까이 다가온다. 바짝, 숨결이 느껴질 만큼, 입술이 닿을 만큼.

 

“먼저 안가. 절대로.”

 

살며시 부드럽게 포개어지고, 달콤하게 스며든다.

 

* * *

 

조용한 방안에 창문 너머로 비춰든 달빛이 가루처럼 흩날리며 넘실거린다. 이윽고 책상 위에 놓인 보랏빛 봉투에 달빛 가루가 닿고, 봉투가 열리며 새하얀 종이가 밖으로 나온다. 부스스 스치는 달빛에 고심 끝에 적은 답변이 빛을 머금으며 옅게 빛을 낸다.

 

- 없습니다. 다만, 아프지 않게, 흉하지 않게, 사랑하는 이와 같이 맞고 싶습니다.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미세하게 반짝이는 달빛에 감싸인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흩날리는 달빛을 따라 사르륵 흩어져 사라졌다.

 

* * *

 

마법의 질문

당신이 어떻게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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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6. 정신과 신체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06. 정신과 신체

 

기분이 엉망이다. 언제는 연상이라서 좋다던 놈이 이제는 연하가 좋단다. 어째 이 날씨에 아이스티가 시키고 싶더라니. 어이없음에 얼굴에 냅다 냉수를 끼얹어주고 나왔다. 그래도 분이 풀리질 않아 추운 줄도 모르고 걸었다. 주변에는 한창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외쳐대며 캐럴이 흘러나온다.

 

“젠장맞을 화이트 크리스마스!”

 

홧김에 중얼거리며 못 들은 척, 못 본 척 스킬을 최상으로 발휘하며 집까지 왔다. 입구의 우편함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가다 걸음을 멈췄다. 웬일로 내 우편함에 우편물 하나가 들어있다. 대부분의 명세서는 문자로 받고, 나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도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편함으로 다가갔다.

 

“누구지?”

 

봉투를 꺼냈다. 고운 보라색 봉투 뒷면에는 발신자 없이 수신자만 적혀있다. 상당히 수상하다. 봉투를 노려보며 고민하고 있는 귓가에 승강기 소리가 들렸다.

 

- 띵! 스륵.

 

문이 열린 승강기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곧바로 올라타서 7층을 눌렀다.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승강기가 움직이고, 몇 초의 시간이 지나 7층에 도착했다. 복도로 내려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며, 신발을 벗음과 동시에 손에 든 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냈다.

 

마법의 질문

당신의 수명이 90세이고, 당신이 30세가 되는 해에 정신이나 신체 중 하나를

향후 60년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건가요?

 

눈살을 찌푸리며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건 또 무슨 유치찬란한 질문일까? 그렇잖아도 나이 먹는 게 서러운 판에 무슨 이딴 장난질이 다 있나.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도 아니고, 홧김에 종이를 구겨서 집어던졌다. 데굴데굴 구른 종이는 서랍장에 부딪치며 멈추었다.

 

“아. 열 받아!”

 

이럴 때는 개운하게 씻고, 푹 자는 게 최고다! 따뜻한 물에 거품 팍팍 내서 노곤하게 씻고 나면, 시원한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낸다. 이 손에 잡히는 차가운 감촉이란!

 

- 딱! 치이익-.

 

“캬아-.”

 

속이 다 시원하다!

 

“너보다 어린 여자 만나서 너도 한번 된통 차여봐라 나쁜 놈아!”

 

한 모금 더 넘기고, 시원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구겨져서 나뒹굴고 있는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눈을 찡그리고 노려보았다. 내 수명이 90세라고 할 때, 30살인 채로 60년을 살 수 있다면, 뭘 택하겠냐고? 대체 어떤 인간이 이딴 게 궁금해서 이런 걸 보낸 걸까 싶다.

 

맥주를 넘기며 종이를 주워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대충 펼친 종이는 구겨진 흔적이 남아서 모양새가 말이 아니었다. 연상이라서 싶다는 소리를 듣고, 며칠만 지나면 앞자리가 바뀌는 나에게, 그러고 보니, 며칠만 지나면 이 질문이 무용지물이 될 상황이다.

 

- 피식.

 

“왜 하필 30이야. 차라리 20살로 돌려주든가.”

 

회춘이라도 해보게 말이다. 풋풋하게 캠퍼스 커플도 해보고, 20대에 미처 못 해본 이런저런 것도 좀 해보게. 왜 하필 계란 한판이라는 30살 인가. 인심 쓰는 김에 좀 더 쓰고 20살로 돌려주지.

 

“쪼잔해.”

 

그래도 선택을 한다면, 당연히 신체다. 이왕 오래 살 거라면, 건장하게 살아야지. 게다가 늙는 게 좋은 여자가 어디 있을까? 주름, 검버섯, 기미. 이런 것에서 탈출하려면 당연히 신체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잖아.”

 

정신과 육체를 비유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또한 나, 개인적으로 신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을 물이라고 할 때, 신체를 그릇이라고 보는 것이다. 90세의 신체에 30살의 정신연령이라면, 그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 90세 할머니가 30살 아가씨처럼 행동하고, 말하면 그건 너무 어색할 것 같다.

 

차라리 30세의 신체에, 아니.

 

“30살의 외형이 유지되면, 정신도 그에 따를 가능성이 크지 않나?”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은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왜 입고 있는 옷에 따라서 행동이나 기분이 달라지기도 하지 않은가. 물론 예외인 사람도 있지만, 그건 드문 경우일 테다. 사람이란, 인간이란 생물은 자신의 지위와 사회적 위치, 지식과 배경 같은 것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생물이니까.

 

“나도 어쩔 수 없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고.”

 

30살의 외모를 지니면 그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90세 할머니 같은 말투를 쓰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흠, 그럼 90세 할머니의 외모로 30살의 정신을 유지한다고 해도, 그 말투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할머니 티가 나게 되는 건가? 슬슬 헷갈리려 한다.

 

“에이-! 그냥 안 늙는 게 좋은 거지. 뭐. 치매 걸릴 일도 없고! 그럼.”

 

책상으로 다가가 어느새 비어버린 맥주 캔을 내려놓고, 펜을 잡았다.

 

* * *

 

어슴푸레한 방안에 미미한 맥주 냄새가 풍기고, 봉투에 넣지도 않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구겨진 종이에 연노란 달빛이 닿았다. 허공으로 띄워진 종이는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지, 소리 없이 쫙쫙- 펴지며 구김이 사라졌다. 홧김에, 술김에 적은 글씨는 미묘하게 삐딱한 모양새를 뽐낸다.

 

- 신체. 늙고 싶지 않아.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투명한 달빛 한줄기가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차가운 달빛 속에서 잘게 부서지며 사라졌다.

 

* * *

 

후회한다. 내가 그때 그 질문에 대답한 걸, 저주하고, 후회하고, 그럼에도 감사한다.

 

“왜 울어?”

 

갑자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에게 걱정스레 묻는 당신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기에, 평생을 함께하자는 당신의 말에 그러겠다고, 그러고 싶다고, 또는 그럴 수 없다고, 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수상한 질문에 대답을 했을까?

차라리 아무런 대답도 하지 말 것을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람은, 인간은, 그에 맞게 나이를 먹으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게 신체이건 정신이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고,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 * *

 

남자는 울적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며칠째 그녀가 연락이 되질 않았다.

 

- 찰칵. 스륵.

 

문을 여는 움직임에 바닥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그가 고개를 내려 보니 작은 편지 봉투하나가 문에 쓸려 있었다. 분홍빛이 도는 옅은 보라색의 봉투였다. 남자는 갸웃거리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봉투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거실의 소파에 대충 가방과 외투를 벗어두고, 털썩- 앉으며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서 나온 건, 고이 접힌 편지지와 누군가의 신분증, 그녀의 신분증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남자는 신분증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새하얀 편지지를 펼쳤다. 동글동글한 그녀의 글씨를 하나하나 읽었다.

 

「사랑하는 당신께.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저 스치는 인연이어도 괜찮다 생각했습니다.

곁에서 바라보며, 스치는 인연이기를 바라면서도,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저 마음에 담아두고, 마음에 품고 그리 지내려했습니다.

욕심내지 않으려 일부러 모르는 척, 태연한 척 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마음을 들킬까봐, 당신에게 짐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내 노력이 소용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당신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고백에 함께하자는 말에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 좀 더 일찍 당신을 만나지 못했을까, 왜 이제야 만났을까, 알 수 없는 원망도 해봤습니다.

 

당신이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도 털어놓기 겁나지만, 그래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다고, 불치병 같은 게 아닙니다. 내 수명이 다한 겁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올해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내 생의 마지막에 당신을 만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사랑 받아서 정말 행복합니다.

당신을 만나 게 해준 나의 운명에 감사합니다.

 

당신과의 행복한 추억에 난 웃으며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울지 말아요.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이 행복하길 바랄게요.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합니다.

 

당신에게 행복한 추억이 되고픈 이가.」

 

남자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 동봉되어 있던 신분증을 집어 들었다. 201?년 출생을 나타내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로부터 정확하게 90년 전, 그녀의 나이가 올해로 90세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다. 장난이길 바랐다.

 

“하, 하?!”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짓는 남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벗어둔 외투를 챙겨 다급히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그녀의 집 앞에서 한참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경비실에 연락해 마스터키로 열고 들어갔다.

 

늦은 밤의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방에 그녀는 고요히 누워 있었다. 마치 잠든 것 같은 그 평안한 모습에 남자는 안도하며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몇 번이나 나직하고 다정하게 불렀다.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서있는 경비가 다가와 말리지 않았다면 언제고 그랬을 것이다.

 

경비의 신고로 그녀의 시신은 한 병원의 영안실로 옮겨졌고, 처음 보는 그녀의 친척이 와서 그녀의 신원을 확인했다. 검시의도 장의사도 그녀의 나이와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며 껄끄러운 심사를 애써 숨기는 눈치였다. 병원에 마련된 간소한 장례식장에서 남자는 한참이나 그녀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 * *

 

해가 바뀌고, 남자는 파란 장미 꽃다발을 손에 들고 그녀가 잠든 곳을 찾았다. 하늘은 푸른 장미만큼이나 아름다웠고, 구름은 안개꽃만큼이나 맑았다. 남자는 그녀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비석 앞에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살랑이는 바람에 장미향이 실려 퍼졌다.

 

남자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행복한 꿈을 꾸는 달빛 같은 미소를 떠올렸다.

 

“다행입니다. 당신이 웃으며 떠날 수 있어서, 마지막에 행복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아직은 슬며시 고이는 눈물까지 어쩔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밝게 웃었다. 그녀가 미안해하지 않게, 맘 아프지 않게, 짐이 아닌 행복한 추억과 사랑이었다는 마음이 전해지게, 그렇게 웃었다.

마법의 질문

당신의 수명이 90세이고, 당신이 30세가 되는 해에 정신이나 신체 중 하나를

향후 60년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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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5. 세레나데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05. 세레나데

 

어둑한 아파트 정문을 지나 우편함에 있는 뭉치를 꺼내어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시간은 12시에 가까워지고, 몸은 피곤하다. 5층에 내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컴컴한 집에 인기척 하나 없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이 고요에 쓴웃음을 지으며 거실 불을 켜고 테이블 위에 우편물들을 툭- 던져두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며 반겨주던 잔소리가 오늘 따라 유난히 그립다. 그땐 잔소리가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막상 듣지 못하게 되니 그 허전함이 채워지질 않는다. 어째서 당신은 내게 잔소리만 가득한 걸까? 난 왜 당신 입에서 그런 잔소리만 나오게 만들었을까? 방으로 들어가며 한숨을 쉬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테이블 앞에 주저앉았다. 무심히 던져둔 우편물을 집어 들어 하나씩 뜯었다. 카드 명세서, 공과금 영수증, 전화요금 명세서, 각종 영수증과 명세서 끝에 보라색 봉투 하나가 남았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확인하고 놀란 것도 잠시, 눈물이 핑 돌았다.

 

발신인 : 이혜령

수신인 : 박정훈

 

이름 두 개를 한참 들여다보다 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냈다.

 

마법의 질문

마지막으로 혼자 노래를 부른 건 언제인가요?

다른 사람에게 불러준 적은요?

 

이건 또 뭘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래?”

 

노래라면 당신이 더 좋아했다.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음정도 박자도 못 맞추는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내 노래 실력을 알기에 가족들 앞에서도 부른 적이 없었다. 혹여나 내가 부른 노래에 당신이 웃기라도 할까봐 창피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내가 딱 한번, 당신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매일같이 듣고 따라하며, 몇 달을 연습하고, 노래방에서 99점을 받은 그날, 당신 집 앞으로 찾아가 목청을 뽑았다. 동네 주민들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구경하며 박수까지 쳐주었다.

 

그날 이후로 당신은 종종 같이 듣자고, 같이 부르자고, 나를 졸랐지만, 난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내가 부르는 것보다 당신이 부르는 걸 보는 게 좋았고, 당신이 부르는 걸 듣는 게 좋았다. 이제야 떠오른다. 잔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노래 소리가 떠오른다. 왜 잊고 있었을까?

 

당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멜로디를, 당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가사를, 노래를 부르던 당신의 미소를, 왜 여태까지 잊고서 당신이 노래가 아닌 잔소리를 하게 만들었을까. 맘이 아프다. 후회스럽다. 한번이라도 같이 불러 볼 걸 그랬다. 이제는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었구나.

 

- 툭, 투둑,

 

종이 위로 투명한 얼룩이 번진다. 얼룩을 손으로 닦아내고 두리번거리며 펜을 찾았다. 그러다 달력에서 눈이 멈췄다. 이달의 마지막 날에 표시된 빨간 동그라미 하나. 당신 생일이다. 당신 없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당신 생일이다. 그날까지 아직 14개의 숫자가 남아 있었다.

 

* * *

 

이른 아침,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우편함에 보라색 봉투를 넣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솜털마냥 둥실둥실 흘러간다. 한껏 숨을 들이쉬고, 시원하게 내쉬었다.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화창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떠나고,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온 상쾌한 바람이 우편함 덮개를 흔들었다. 그 흔들거림에 꽂혀있는 봉투가 빠지며 흘러나온다. 화사한 보라색 봉투가 벌어지고, 밖으로 나온 종이에 이슬을 머금은 이른 아침의 옅은 햇살이 닿아 반짝인다.

 

- 오늘, 당신 생일날.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위해 부를 겁니다.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이른 아침의 서늘한 바람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밝아지는 햇살 속에서 아침 이슬처럼 스며들며 사라졌다.

 

* * *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름다운 향기가 코에 닿는다. 오랜만에 꽃집에 들렀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당신이 좋아하는 꽃을 찾으니, 점원이 곱게 꽃다발을 만들어준다. 그 고운 꽃다발을 받아들고 기분 좋게 가게를 나왔다. 얼마 만에 사본 꽃다발인지 모르겠다. 새삼스레 머쓱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차문을 열어 당신만큼이나 고운 꽃다발을 조수석에 고이 놓고, 운전대를 잡았다. 고속도로를 들어서 가장 마지막 휴게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1시간을 더 달려 당신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곧 퇴직하면 그 돈으로 근처에 이사를 오는 게 좋을 듯싶다.

 

차에서 내려 양손으로 고이 꽃다발을 들고 천천히 걸어 햇볕이 내려쬐는 당신 자리에 도착했다. 당신 이름이 새겨진 묘비(墓碑) 앞에 조심스레 새하얀 데이지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명랑하고 순수한, 당신을 닮은 이 꽃을 참 좋아했다. 화려하지 않아서, 그럼에도 밝아서 좋다고 했다.

 

주변의 잡초를 좀 뽑고, 당신 앞에 주저앉았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며,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의 29년 만인데도 마음이 기억하는 노래는 그날처럼 술술 흘러나온다.

 

그동안 부르지 못한 만큼, 불러주고 싶은 만큼, 원 없이 몇 번이고 불렀다. 하늘을 보며, 구름을 보며, 어느새 사라진 쑥스러움에 당신을 마주보며, 한참이나 불렀다. 부르고 부를수록 가슴이 시원하고, 맘이 편해졌다. 당신이 그리워서, 당신에게 미안해서, 울면 어쩌나 싶었는데 오히려 미소가 그려졌다.

 

이제는 당신이 부르는 걸 들을 수 없다. 당신이 부르는 걸 볼 수 없다.

 

앞으로는 내가 당신에게 불러 줄게.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 즐겨 듣던 노래, 즐겨 부르던 노래, 이제는 내가 불러줄게. 하나씩 하나씩 연습해서 당신이 들을 수 있게 내가 부를게. 음정이 안 맞고 박자가 안 맞아도, 나중에 당신 만나러 가서 구박을 듣더라도, 같이 부르지 못한 만큼 내가 부를게. 못 부르더라도 들어줘.

 

내가 당신을 위해 부르는 노래를, 세레나데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부르다 고개를 돌리니 하늘이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붉어지는 하늘과 금빛으로 변한 구름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노을이라는 게 이토록이나 아름다웠던가 싶다.

 

“노을 참 곱다. 그치? 여보.”

 

소슬소슬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풀잎이 자잘한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여보. 나 거기 가면, 우리 그때는 같이 부릅시다. 열심히 연습해서 갈게.”

 

풀잎에 바람이 스치는 가녀린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마치 당신의 흥얼거림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들으니 정말 당신 목소리 같아서 그리움에 미소가 지어진다. 기다려줘. 여보. 금방 갈게.

 

마법의 질문

마지막으로 혼자 노래를 부른 건 언제인가요?

다른 사람에게 불러준 적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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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4. 완벽한 하루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오전 9시 정각.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 또각 또각.

 

정면의 큰 창문을 등진 의자에 앉아서 뒤따라 들어온 비서가 오늘의 스케줄을 알려준다.

 

“오전 10시에 기획팀의 PT, 12시에는 <피아르>의 바이어와 점심약속이 잡혀있습니다. 오후 2시에는 이번에 지을 리조트의 후보지 현장방문이 있습니다. 이건 오늘 아침에 도착한 우편물입니다.”

 

간략하게 일정 보고를 마친 그가 책상 위에 몇몇 우편물을 올려놓았다.

 

“오늘 일정이 상당히 적네요.”

 

“예. 후보지 방문 때문에 다른 일정을 조금 조정했습니다.”

 

난 우편물 뭉치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용히 목례를 하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우편물을 빠르게 훑었다. 일정이 적다고 해서 일이 적은 건 아니기에 우편물에 시간을 많이 할애할 여유는 없다. 대략 4~5개의 우편물을 확인하고 마지막 하나를 집어 들었다.

 

시원한 보랏빛 봉투에 발신자 없이 수신자만, 내 이름만 적혀있다. 분명 그가 한번 확인을 거쳤을 텐데 왜 이런 수상한 우편물이 섞여있나 싶다. 일단 수신인에 내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봉투를 열었다.

 

마법의 질문

당신에게 ‘완벽한’ 하루란 어떤 날인가요?

 

“완벽한 하루?”

 

뜬금없이 이건 또 뭔가 싶다. 어이없음에 입술 새로 실소가 삐져나온다. 책상 한편의 인터폰으로 손을 내밀다가 멈췄다. ‘완벽한’ 하루, 그 말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때, 그날처럼.’

 

종이의 빈 공간을 바라보며 기억을 되짚었다. 한창 놀고 싶은 소녀시절, 학교와 집에서의 빽빽한 스케줄에 치여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그러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시골에 있는 조부의 목장에 놀려갔을 때였다. 당시 겁이 많은 나는 어렵게 얻은 시간을 목장 울타리를 맴돌며 보내고 있었다.

 

목장에서의 마지막 날, 나에게 한 소년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옅은 갈색의 머리에 짙은 녹색 눈동자의 소년. 소년의 손을 잡고 들판과 숲을 누비며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상쾌하고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날, 소년과 함께 산에서 내려다 본 광경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봐. 노을이 지고 있어. 꼭 불이라도 난 것 같지 않아?”

 

다음날 아침 일찍, 나는 부모님을 따라 다시 바쁘기만 한 도시로 돌아왔고, 그 이후에 다시 목장에 놀러 갔을 때에는 소년을 만날 수는 없었다. 마치 백일몽과 같은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런 하루를 보내지 못했다. 겁 많은 나를 이끌어줄 소년의 손이 없기에 목장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완벽한, 하루.”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펜을 잡았다.

 

* * *

 

정오. 12시 정각. 바이어와 약속을 위해 그녀는 30분 전에 사무실을 나갔다. 비어있는 사무실 책상 위에는 보라색 봉투가 놓여있다. 따스한 햇살 한줄기가 봉투에 닿고, 새하얀 종이가 밖으로 나왔다. 종이에 적힌 단정한 글씨가 햇살을 머금으며 포근하게 빛난다.

 

- 그때, 그날, 그 소년처럼, 상쾌하고 자유로운 하루.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뽀얀 바람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나른 햇살 속에 사르륵 녹아들며 사라졌다.

 

* * *

 

오후 1시 정각. 바이어와 점심식사를 끝내고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기사가 아닌 비서가 앉아 있다.

 

“마크씨는 어디가고 시온씨가 앉아 있는 거죠?”

 

“갑자기 마크씨 부인의 산통이 시작돼서 병원에 갔습니다.”

 

차가 곧 출발하고, 잠시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대로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오후 2시부터 시작된 후보지 방문은 오후 5시 무렵, 마지막 남은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높은 건물들이 점점 모습을 감추고, 어느새 도로 양옆으로 들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태양은 서쪽 하늘을 향해 기울며 짙게 물들어갔다. 그때 차의 속도가 급격히 줄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

 

“왜 그래요?”

 

앞으로 휘청한 몸을 가누며 그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앉아계십시오.”

 

그는 후방의 비상등을 켜고 밖으로 나갔다. 다행이 한적한 도로라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니지. 차가 안다니면 여기서 발이 묶이는 건데.’

 

그는 보닛을 열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 낌새를 보니 아무래도 금방 해결될 것 같지가 않다. 차창을 내리고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푸른빛이 남은 갈대밭에 오렌지 빛이 내려앉았다.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가 보험사의 직원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문을 닫고 차에 기대어 서서 천천히 물들어가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통화가 끝나고, 트렁크에서 안전대 3개를 꺼내서 후방에 내려놓은 그가 난감한 얼굴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1시간정도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평소라면 예민한 반응을 보였을 내가 태평하게 한 말에 그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난 다시 눈을 돌려 들판을 바라보았다. 잠시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그도 트렁크에 걸터앉으며 시선을 돌렸다.

 

오렌지 빛의 태양은 차차 짙어지고, 달아올라, 새빨간 색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드문드문 푸른 갈대밭에 붉은 빛이 한가득 내려앉았다.

 

“꼭 불이라도 난 것 같네요.”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노을에 물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짙은 다갈색 머리에 짙은 녹색 눈동자. 옅게 퍼져있는 그의 미소가 낯익다. 그의 눈동자가 저토록 선명한 에메랄드라는 걸 왜 여태 몰랐을까? 그가 문득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한낮의 열기가 식은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그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민다.

 

“산책이라도 할까요?”

 

그 손을 잡고, 그를 따라 갈대 속으로 들어갔다. 붉게 물결치는 갈대 속을 거닐며, 갈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도로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멈춰서, 푹신 갈대 위에 나란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발갛게 타오르는 하늘에 나도 모르게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불이라도 난 것 같네요.”

 

내 중얼거림에 그가 작게 웃었다. 조용히 앉아 상쾌한 바람과 갈대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가리는 것 없이 넓은 하늘에 마음이 편하다. 마치 이 들판과 하늘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다.

 

그때, 그날, 소년과 나처럼.

 

지금, 이곳, 그와 나처럼.

 

선홍빛 하늘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짙은 남청색이 되어, 달이 뜨고 수많은 별이 반짝일 때야 보험사 차량이 도착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차가 있는 도로로 향했다. 아쉽지만, 이제는 언제든 나를 이끌어줄 손이 곁에 있으니까. 또 언젠가, 어디서, 나를 이끄는 손을 잡고 ‘완벽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마법의 질문

당신에게 ‘완벽한’ 하루란 어떤 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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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3. 예행연습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국사 노트를 꺼냈다. 수업시간에는 샤프로 연습장에 필기를 하고, 쉬는 시간에 검정, 빨강, 파랑, 중요도에 따라 볼펜으로 노트에 다시 옮겨서 정리한다. 깨끗하게 정리된 노트와 복습을 겸하게 되는 셈이다.

 

“야. 쉬는 시간에는 좀 쉬어라. 응?”

 

“밀리면 귀찮아. 어차피 너 나중에 또 내 노트 빌려갈 거잖아.”

 

“그건 그렇긴 하다만은, 그래도 쉬는 시간까지 노트를 붙잡고 있냐. 하여간 네 성격도 어지간하다.”

 

중학교 때부터 쭉 같이 봐온 녀석이 새삼스레 타박을 한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손을 놀렸다. 상훈은 한숨을 푹 쉬더니, 내 귀에서 이어폰 한쪽을 빼서 자신의 귀에 꽂았다. 내가 노트를 정리하는 동안 또 만화책이나 볼 요량일 테다. 역시나 책상서랍에서 빠져나온 건 만화책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너하고 다른 건 하나도 비슷한 게 없는데, 어째 노래 취향은 일치한단 말이야.”

 

“맘에 드냐?”

 

상훈은 씩-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그 모습에 피식- 웃어주고는 다시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노트 정리를 끝내고, 대략 3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그 사이 상훈은 손에 들린 만화책은 절반 가까이 넘어가 있었다.

 

“참 빨리도 읽는다. 제대로 읽기는 하냐?”

 

“당연하지.”

 

그때 교실 앞문에서 두리번거리던 남학생이 목을 쭉- 뽑고 말했다.

 

“이반 반장, 부반장 누구야?”

 

그에 난 의아한 얼굴로 손을 들었고, 나희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들었다.

 

“왜? 무슨 일이야?”

 

“너네 담임이 찾는다. 교무실로 오래.”

 

역시나 다음 수업인 지구과학은 자습인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햇살에 보송보송한 피부가 뽀얀 빛을 머금는다. 고개를 돌려 창문을 노려보며 걸었다. 문득 햇빛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녀만 저리 뽀얗게 빛난단 말인가?

 

‘아니지. 내 눈이 잘못된 거겠지.’

 

시선을 돌리며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참았다. 그래. 그날부터 내 눈에, 내 시력에 이상이 생긴 걸 테다. 그 화사한 꽃비를 맞으며 등교하는 말간 소녀의 모습을 본 그날 말이다. 그 짧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교무실에 도착하자 담임은 기다렸다는 손짓으로 나와 그녀를 부르셨다.

 

“어제 미리 말했지. 혹시 모른다고, 근데 아무래도 나가봐야 할 거 같다. 이거 들고 가서 나눠주고 자습 좀 해라. 반장은 애들 떠들지 않게, 조용히 잘 하고.”

 

“예.”

 

둘이서 나란히 자습지를 가득 안아들고 복도로 나왔다. 수업 시작종이 치는 걸 들으며, 힐끗 그녀의 손에 들린 걸 바라봤다. 제법 무거워 보인다. 반반씩 나눠든 게 실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한테 좀 더 얹을래?”

 

“아냐. 괜찮아.”

 

그녀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교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상한 광경이었다. 반장과 부반장이 나란히 자리를 비운 교실이 조용할 리가 없다. 나와 나희는 자습지를 나눠주기 전에 떠드는 애들부터 잡아야했다. 조용해진 교실 안에서 자습지를 나눠주고, 간간이 소곤거리는 50분의 시간이 지났다.

 

- ♬♪♩♬♩♪~

 

이미 담임이 퇴근한 사실을 알고 있는 애들은 수업 종료종이 치자마자 잽싸게 가방을 싸들고 교실에서 도망쳤다. 난 눈썹을 찌푸리며 몇몇 애들을 쏘아보았다.

 

“너네는 도망가면 안 되지. 주번이잖아.”

 

한명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다른 한명은 입맛을 다시며, 손에서 가방을 내려놓았다. 앞에서 키득거리며 가방을 매는 상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난 씩- 웃어주었다.

 

“반장 친구이니 너도 좀 남아라. 난 내일 쓰레기, 먼지 더미 속에서 공부하기는 싫다.”

 

“이 인정머리 없는 놈아!”

 

억울하게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가방을 내려놓는 걸 보면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테다. 그렇게 다 도망친 교실에 주번 2명과 나, 상훈은 청소를 시작했다. 칠판을 닦고, 칠판지우개를 털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바닥을 쓸고, 책걸상 줄을 맞춘다. 마지막으로 창문을 다 잠그고 커튼을 치면 완료다.

 

교실 뒷문, 앞문을 잠그고, 가위바위보에서 진 주번 한명이 열쇠와 일지를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다른 한명은 환호를 지르며 이미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난 상훈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냈다. 신발에 딸려 나온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툭.

 

작은 보라색 편지봉투였다. 주워서 이리저리 살피려니 상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짝 붙는다.

 

“뭐냐? 이거 설마 러브레터냐?”

 

잡아채려고 뻗는 손을 피해 재빨리 교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결국 포기한 상훈은 아쉬움을 맘껏 드러내며 학교를 나서는 내내 툴툴거렸다. 그 툴툴대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집에 도착한 나는 방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편지봉투를 꺼냈다.

 

보라색 봉투에는 내 이름만 적혀있다. 누가 보낸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진짜 러브레터이면 어쩌나 싶기도 하다. 연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게다가 지금 내 맘에는 뽀얀 미소의 그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불안과 걱정에 한참동안 봉투를 노려보며 망설였다. 마침내 봉투를 열어 안에 든 걸 꺼냈다.

 

마법의 질문

전화를 걸기 전에 할 말을 미리 연습하나요? 왜 그런가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러브레터도 아니었고, 걱정할 내용도 아니었다.

 

“뭐지?”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전화를 걸기 전에 미리 연습한 적, 있었다. 그날, 내 눈에 콩깍지가 씌인 날 말이다. 상쾌한 아침 바람에, 투명한 햇살 속에서, 향긋한 꽃비를 맞으며, 맑은 미소를 본 그날. 머릿속에서 맴도는 그 모습에 못 이겨 몇 번이나 망설이고 망설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흘끗거리다 돌아온 집에서,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의자 위에 쭈그려 앉아 폰을 들여다보며 고민했다. 뭐라고 할까? 어떻게 말할까? 혼자 공책에 끄적거려 보기도 하고, 중얼거리다가 결국 번호만 들여다보며 밤을 지새고서야 한숨을 쉬며 손에서 폰을 놓았다.

 

‘왜 그런가? 라니. 당연하잖아.’

 

참으로 뻔뻔한 질문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펜을 집어 들고 종이에 답변을 적고 있었다.

 

* * *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복도도 교실도 조용했다.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실내화를 꺼내서 신었다. 그리고 보라색 편지봉투를 신발장 안에 넣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갖다 넣었으니 직접 가져가겠지. 신발장 문을 닫고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갔다.

 

- 드륵.

 

문을 그대로 열어둔 채 자리에 가방을 올려두고,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그래도 너무 일찍 나왔나.”

 

살짝 하품하는 소년을 지나친 바람은 교실 안을 맴돌다 열려있는 문을 지나서 복도로 나왔다. 미미하게 향긋한 냄새를 품은 바람이 신발장 맨 윗줄의 가운데 칸에 닿았다. 닫혀있던 신발장의 문이 열리고, 보라색 봉투가 바람에 실려 나온다. 봉투 밖으로 나온 종이에는 또박또박 눌러쓴 풋풋한 마음이 적혀있다.

 

- 네. 딱 한번 있습니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너무 두근거려서요.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향긋한 바람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조용한 정적 속에서 보랏빛 봉투는 향기로운 꽃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 * *

 

- ♬♪♩♬♩♪~

 

수업 종료종이 울리고, 담임은 인사는 건너뛰자는 손짓을 하신다.

 

“반장하고 부반장은 어제 나눠준 거 다시 걷어서 교무실로 가져와라.”

 

“예.”

 

담임이 교실을 나가고, 나와 나희는 곧바로 어제 나눠준 자습지를 걷어서 들고 교실을 나섰다. 몇몇 안 가져온 애들도 있는지 어제보다 양이 적었고, 혼자 들어도 충분할 거 같았지만, 그래도 이런 때가 아니면 또 언제 나란히 걸어보겠나 싶어서, 혼자 가겠다는 말을 삼켜버렸다.

 

‘그때 그렇게 열심히 고민해놓고, 그 중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니.’

 

간간이 곁눈질로 흘긋거리며, 괜스레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용감한 자가 미인을 차지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말 한마디 제대로 전하지 못한 나라는 한심한 놈에게는 골백번을 되새겨도 부족한 말이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도 한마디도 전하지 못했으니 용감한 것과는 거리가 먼가보다.

 

- 툭. 콰당.

 

“악!”

 

갑작스런 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나희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그래? 괜찮아?”

 

후다닥 다가가서 자습지를 내려놓고 살폈다. 나희는 다급히 치마를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잠깐 딴생각하느라, 발이 꼬였나봐.”

 

나희의 볼이 발갛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웃음을 참으며 일어나, 허리를 살짝 숙이고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봐.”

 

머뭇거리더니 손을 잡고 일어서는 모양새가 심하게 넘어지진 않은 것 같다.

 

“괘, 괜찮아. 것보다 담임 기다리시겠다.”

 

나희는 다시 쭈그려 앉아 흩어진 자습지를 주워 모았다. 난 머쓱한 얼굴로 바닥에 내려놓은 자습지를 다시 안아들었다. 교무실로 가는 동안에도 나희의 볼은 여전히 붉었다. 넘어진 게 어지간히 창피한 눈치다.

 

‘왜 이리 귀엽지.’

 

자습지를 담임 자리에 올려놓고 교실로 돌아오는 내내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아야했다. 그러다 새침하게 노려보는 눈초리에 뜨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만 웃지?”

 

“미, 미안.”

 

샐쭉하니 토라져서 교실로 들어가는 나희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백은 못할망정 웃음 하나 못 참아서 미움을 사다니, 억울하다고 해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 * *

 

두부, 계란, 대파 한단, 무 하나를 장바구니에 담아 카운터에 올렸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초저녁의 거리에는 곳곳에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슬리퍼를 끌며, 오늘 저녁 메뉴는 된장찌개구나, 짙은 푸른빛의 하늘에 옅은 달이 떠 있고, 몇 걸음 앞에 낯익은 모습이 보인다.

 

‘어라?’

 

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얼굴로 멈춰 섰다. 왜 하필 지금일까? 헐렁한 츄리닝 차림에 슬리퍼인 지금이란 말인가? 근데 왜 같은 차림인 나희는 예쁜 걸까? 내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본 나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너도 심부름?”

 

“어, 응. 너도 심부름 가는 거야?”

 

근데 나희가 이 근처에 살았던가? 나희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응. 근데 나 어제 이사 와서, 반장 길 좀 가르쳐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아쉽다. 학교도 아닌데 여전히 반장이다. 마트로 돌아와 나희의 심부름을 도와주고, 계산을 하고, 다시 마트를 나왔다. 가로등 불빛에 은은하게 어두운 길을 걷다가 처음 마주친 길목에서 나희가 걸음을 멈춘다.

 

“고마워.”

 

돌아서는 나희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귀여워서 그랬어.”

 

나희가 멈칫하며 뒤로 돌아본다. 놀라서 동그래진 나희의 눈을 보며, 나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다. 그럼에도 한번 나온 말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

 

“네가 귀여워서 그랬다고, 내가 너 좋아한다고.”

 

나희의 얼굴이 가로등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볼이 화끈거리는 느낌에 내 얼굴도 못지않을 것 같다. 나희는 놀라서 커진 눈을 깜빡이며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 역시 이런 타이밍에, 이런 차림에, 이건 아니었나보다. 낭패감에 그냥 돌아서려는데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희가 작게 웃고 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다.

 

예쁘게 홍조가 핀 미소로 내 이름을 부른다.

 

“운아, 고마워. 조심해서 가고, 내일 학교에서 봐.”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나희는 이미 전만치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거 성공인가?’

 

그 수많은 끄적임과 망설임과 고민과 중얼거림에도 하지 못한 말을 이렇게 하게 될 줄이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불시에 한 말에 그렇게 웃어줄 줄이야. 뒤늦게야 실감나는 사실에 집을 향하는 내내, 도착해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침이 오기를 바라며, 학교에 가야한다는 사실이 설레고, 기다려지는 날은 생애 처음이다.

 

마법의 질문

전화를 걸기 전에 할 말을 미리 연습하나요? 왜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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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2. 유명세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여기저기 사방으로 허리를 굽히며 꾸벅- 인사를 하고, 매니저 형을 따라 차에 올라타면 몸은 이미 알아서 늘어져버린다.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힘없이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불타오르는 금요일을 외치며 즐거운 얼굴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또래다.

 

“좋겠다.”

 

무심결에 나온 중얼거림에 매니저 형이 쓰게 웃는다. 그래. 나도 안다. 배부른 소리라는 걸. 하지만 진심이다. 원 없이 사랑받고, 원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난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저들이 부럽다. 고개를 돌려 머리를 뒤로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나직한 자동차 소음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렇게나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그렇게나 원하던 일이었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아니. 왜 점점 행복해지지 못할까? 왜 점점 더 힘들고, 점점 더 외롭고, 점점 더 후회가 될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었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행복하지 못 할까?

 

“신후야. 다 왔다.”

 

어깨를 흔드는 기척에 눈을 뜨고 차에서 내렸다. 형은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었다. 가득 찬 쇼핑백 5~6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이서 양손에 나눠들고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열고 들고 온 쇼핑백을 내려놓은 형은 조금 걱정스레 한번 훑어보았다.

 

“뜯을 때 조심하고, 푹 쉬어라.”

 

“네. 형도 조심해서 가요.”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집은 고요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옷을 벗어두고 적당히 따듯한 물에 몸을 담갔다. 피식- 우스웠다. 쇼핑백 안에 든 건 전부 팬레터와 선물인데. 뜯을 때 조심하라는 말을 들어야 하다니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웃음이 난다.

 

“하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고,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사람이란, 인간이란, 누군가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만큼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주 당연한 것임에도 난 날이 갈수록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필시, 저 중에도 선물 아닌 선물이 섞여 있겠지.’

 

악플과 소문과 안티와 스토커에게 시달려야하는, 적어도 내가 바란 건 이런 생활은 아니었다. 난 그저 같이 서고 싶었고, 같이 하고 싶었는데, 왜 나만 남았을까? 넌 어디로 가버리고 나만 남았을까? 내가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너 하나였는데, 넌 왜 내 옆에 없는 걸까?

 

멍하니 욕조에 늘어져 하얀 타일이 가득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 똑. 똑.

 

샤워기에서 하나 둘 물방울이 떨어졌다. 규칙적인 물방울 소리와 옅게 퍼져나가는 동심원, 천장의 새하얀 타일들, 그대로 있다가는 욕조에서 잠들어버릴 것 같았다. 머리를 흔들어 몽롱한 정신을 깨우고 욕실을 나왔다. 대충 물기를 닦고 침실로 가려는 걸음을 멈췄다.

 

- 툭.

 

현관에 놓아둔 쇼핑백 하나가 쓰러졌다. 한숨을 쉬고 걸음을 돌렸다. 쓰러진 쇼핑백을 세우고, 방바닥으로 쏟아진 자잘한 선물상자와 편지봉투를 주워 담았다. 손에 뭉쳐 잡은 봉투 중에 하나가 미끄러져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명한 보라색 봉투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집어 들었다.

 

“뭐야?”

 

발신자는 비어있고, 수신자에는 주소도 없이 내 이름만 적혀있다. 딱 봐도 수상하다. 분명히 또 이상한 혈서나, 욕지거리나, 괴상한 그런 게 들어있겠지. 그런 생각과 달리, 풀칠도 안 된 봉투 안에서 나온 건 새하얀 종이였다.

 

마법의 질문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어떤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행운의 편지도 아니고, 이게 뭐야?”

 

이건 또 무슨 신종 장난인가 싶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약 올리는 건가? 목을 타고 울컥하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은 내 상황에서는 너무나 유치하고 악질적인 장난이었다. 점점 늘어가는 헛소문에, 안티에, 악플에, 있던 팬마저 잃어가고 있는 나한테는 말이다.

 

“유명해지고 싶으냐고?”

 

괜히 그 사람하고 얽히는 게 아니었다. 무반응이 답이라며 입 다무는 게 아니었다.

 

‘이미 늦어버렸지만.’

 

처음으로 터진 스캔들에 그동안 쌓아온 게 이리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허무하게 말이야.’

 

그래서 더 보고 싶다. 다른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날 믿어줄 네가 너무도 보고 싶다.

 

“주소가 없다는 건 직접 갖다 넣은 거겠지?”

 

봉투와 종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펜을 꺼냈다. 내가 적은 답을 보면, 이걸 보낸 사람은 뭐라고 생각할까? 쓴웃음이 나온다. 내가 이걸 왜 적고 있나 싶으면서도, 적어도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싶다. 억울한 헛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선가 내 소식을 듣고 있을 너만은 알아주면 좋겠다.

 

* * *

 

“내려가고 있어요. 이제 1층이에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통화를 종료했다. 문을 나서기 전, 잠깐 걸음을 멈추고 우편함에 봉투를 넣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가져갈 것이다. 어제와 같은 곳, 내 스케줄을 알고 있다면, 어디선가 날 보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반응이 궁금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겠지. 아쉽네.’

 

문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 * *

 

어두운 밤. 건물의 모든 불이 꺼지고, 문이 잠기고, 셔터가 내려갔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푸른 어둠속에 한줄기 보랏빛 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실려 우편함 밖으로 빠져나온 봉투가 열리고, 새하얀 종이가 환하게 빛을 낸다. 질문 아래 적힌 답이 어둠보다 더 진하고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 네. 거짓된 모습이 아닌 진실된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어둠속에서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2016년 6월 26일. 신문과 잡지, 온라인이 온통 하나의 기사로 화제가 되고 있다.

 

<< K양과 S군의 진실 게임 >>

 

어제 오후 S군은 작년 연말부터 계속해서 열애설과 결별설이 오가며 구설수에 오르던 K양과 스캔들에 관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S군은 K양과의 열애설은 근거 없는 소문이며, 서로 사적인 친분도 없는 사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스캔들을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양측 소속사의 제재 아래, 두 당사자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게 된 거라며, S군 자신은 물론이고 K양도 피해자라고 밝혔다. 이에 S군의 입장표명에 소속사는 그런 적이 없다고 입장을 밝힌 반면, K양측의 소속사는 아직 입장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S군은 소속사와의 계약이 만료되는 오늘 이후, 휴식기를 가진 뒤 홀로서기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S군의 진실 고백에 팬들은 차라리 잘됐다고 홀가분하게 벗어나라는 응원이 대다수이며, 안티들의 경우는 이것도 짜고 치는 거 아니냐며 믿지 않는 분위기이다. 소속사와 좋지 않게 끝낸 S군의 향후 행방이 걱정되는 가운데...[하략].

 

* * *

 

그 한번의 인터뷰에서 모든 걸 털어놓고, 다음날 바로 가방을 챙겨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숨 돌릴 틈도 없었던 생활에서 벗어나, 가보고 싶었던 곳,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혼자서 바람처럼, 쿡-. 그래. 유치하지만, 바람처럼 그렇게 떠돌았다. 이국적인 거리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길을 걸었다.

 

일상적인 거리와 일상적인 풍경과 그 속에서 일상적으로 오가는 사람들 속에 섞여, 목적지 없이 돌아다녔다. 가끔은 너와 함께 왔다면, 내 옆에 네가 있다면, 네가 그리워지는 만큼, 더 많은 걸 보고, 더 많은 걸 들었다. 그렇게 1년을 떠돌며, 소문에서, 안티에서, 악플에서 벗어나 5년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공항에 네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 많은 인파속에서 단번에 널 찾을 수 있었다.

 

그대로 달려가 널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네 손이 내 등을 토닥인다. 네가 울먹이며 미소한다.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네가 다시 내게 와주었다. 이제는 절대 놓지 않아. 너와 멀어지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다. 네 옆에서, 네 손을 잡고, 너와 함께 걸으며, 너와 함께 할 테다. 다른 그 누구보다 너만 날 알아주고, 날 믿어주고, 날 바라봐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세상 모두보다 너 하나면 충분하니까.

 

* * *

 

창밖에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창가에서는 네가 건반을 치며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네 눈은 그때처럼 반짝였고, 너의 허밍[humming]은 여전히 간지럽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든 컵을 들고 옆에 앉았다.

 

“어때?”

 

양손으로 머그컵을 받아들며, 생긋- 웃는다.

 

“좋아. 봄날에 내리는 눈송이 같은 느낌?”

 

“그래서. 가사는 떠오르십니까?”

 

“흠...좀 기다려 주시죠?”

 

결국 서로 마주보며 웃고 만다. 내가 만든 멜로디에 네가 가사를 붙이고, 그걸 함께 부르고, 나와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일상. 비록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더 이상 거짓된 내 모습에 시달리지 않고, 우리가 함께한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만으로 나에게는 이미 충분하다.

 

세상 모두가 아닌, 너 하나면 돼.

 

마법의 질문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어떤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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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1. 저녁식사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마법의 질문

이 세상의 누구와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누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겠습니까?

 

“이게 뭐야?”

 

우편함에서 꺼내온 우편물 사이로 보랏빛 편지봉투가 보여서 그대로 뜯었다. 새하얀 종이에는 엉뚱한 질문만 적혀있었다. 수신인은 분명히 내 이름이 맞는데 우표도 없고, 발신자도 없다.

 

“유치하게 마법의 질문이라니.”

 

피식- 웃으며 그대로 책상에 올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촤아- 내리는 물줄기 아래에서 문득 끝내지 못한 저녁식사가 떠올랐다. 쓴웃음이 나왔다. 샴푸를 짜서 젖은 머리에 비볐다. 뭉실뭉실 거품이 생겨난다. 그에 따라 아직도 씻어내지 못한 미련이 머리를 뒤덮는다.

 

‘그렇게 가버리다니.’

 

서운하고 화도 났다. 그럼에도 보고 싶었다. 생애 단 하나뿐인 친구였기에 평생 옆에 있을 줄 알았다. 그날 그렇게 나가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떠난 것이다. 유학을 핑계로, 멀리 떠난 것이다. 시원한 물줄기를 따라 거품이 씻겨 내려간다.

 

거품에 미련까지 묻어서 씻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그렇게 훌쩍 떠나버린 친구를 잊을 수 있게 말이다. 연락도 받지 않고, 메일에 답장도 하지 않는 그 녀석을 잊을 수 있게, 야속한 그 우정에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말이다.

 

한숨을 내쉬고 샤워를 끝낸 뒤 욕실을 나왔다. 대충 물기를 닦아낸 몸에 수건을 두르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대체 누가 이런 편지를 보내서 날 심란하게 만드는 건가 싶다. 보라색 봉투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발신인은...? 이상하다. 분명 발신인이 비어있고 수신인에 내 이름이 있었는데 바뀌어 있었다.

 

“수신자가 비어있어?”

 

명하니 봉투를 바라보았다. 마치 수신인을 채워 넣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을 돌려 그 마법의 질문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종이에 적혀 있는 그 질문의 첫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세상 누구와도...’

 

한참동안 첫 구절을 바라보다가 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뭐라고 적을까 망설이고 망설이다 한자 한자, 천천히 적어 넣었다. 질문의 아래 빈 여백에, 봉투의 비어있는 수신인에, 또렷하게 적어 넣었다. 더 이상 누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쩌면?’이라는 희망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커튼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방안을 비추고, 잔잔한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보랏빛 봉투에 달빛이 닿는 순간, 허공으로 떠오른 봉투가 열리고 새하얀 종이에 달빛이 반사되었다. 그녀가 적어 넣은 대답이 달빛에 은은하게 반짝이며 드러났다.

 

- 항상 옆에 있을 거라고, 떠나지 않을 거라고,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된 내 가장 소중한 사람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달빛에 녹아내리듯, 스며들며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에 빗방울 튕기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신발 안은 이미 축축하게 습기가 찬 상태였다. 찝찝하고 피곤했다. 얼른 가서 씻고 싶은 생각뿐이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 길 건너에 있는 한 레스토랑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간판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횡단보호를 건넜다. 함께 끝내지 못했던 저녁식사, 이 세상 누구라도 초대할 수 있는 기회, 뒤늦게야 알게 된 너의 마음, 너에게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 쏟아져 내리는 이 비처럼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길을 건넌 내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강서원?”

 

급히 돌아보는 얼굴이 낯익다. 나처럼 놀란 얼굴로 우산을 든 채 네가 서 있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 빗물 고인 차도로 차가 달리는 소리, 이 공간에, 이 길 위에, 너와 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망설이는 너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저녁 먹었어? 괜찮으면 여기서 먹고 가지 않을래?”

 

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말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의 비 덕분인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젖은 우산은 로비의 우산꽂이 꽂고, 점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 같이 비쳐진다.

 

우연일까? 그날과 똑같은 자리다. 어째서인지 넌 똑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막상 마주앉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너도, 나도, 가끔 시선을 돌려 창밖만 응시할 뿐이다. 그저 끝내지 못한 과제를 끝내기 위한 것처럼, 서로 아무런 말없이 식사만 했다.

 

결국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저녁식사가 끝났다.

 

가게를 나와 우산을 펼치고 조용히 돌아서는 넌 그날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다. 난 우산을 펴는 것도 잊은 채 너를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네 등에 대고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가지마.”

 

네 걸음이 멈췄다.

 

“가지마. 서원아.”

 

차가운 빗줄기가 몸을 적셨다. 멈칫거리던 네가 뒤돌아본다.

 

“가지마. 가지마. 서원아.”

 

커다랗게 떠진 네 눈에 비에 젖어 울고 있는 내가 비친다. 네 손에서 떨어진 우산이 빙그르르 돈다. 우산을 놓은 네 손이 나를 잡고 끌어당긴다. 나를 품에 안은 네가 그제야 겨우 꺼낸 한마디.

 

“사랑해.”

 

그리고 내가 꺼낸 한마디.

 

“사랑해.”

 

너에게 안긴 채 맞은 비는 시원하고 포근했다.

 

* * *

 

창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젖은 옷 대신에 커다란 수건을 둘둘 말고 쭈그려 앉아서 네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머그컵에 따뜻한 물이 쪼르륵- 담기고,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엣취-.”

 

어느새 다가온 넌 따뜻한 컵을 건네며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컵을 받으며 슬쩍 흘겨보았다.

 

“못됐어. 연락도 안 받고, 답장도 안하고.”

 

비죽거리며 나온 불평에 넌 옅은 미소로 빤히 시선을 맞춰온다.

 

“계속 친구로 남을 자신이 없었어.”

 

볼이 화끈했다.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네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중얼거렸다.

 

“바보야. 친구 같은 연인도 있잖아.”

 

“그러게.”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수건에 싸여 안긴 너의 품은 여전히 포근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너의 체취는 달콤하게 퍼지는 코코아 향기만큼이나 행복하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함께 하고 싶다.

 

마법의 질문

이 세상의 누구와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누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