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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4

세 시가 되었을 무렵 D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사에게 불려갔다 왔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건지 겉으로만 그런척 하는건지 Y는 D의 머리속이 궁금했다. D는 어젯밤에 지방에 내려가서 늦게 출근했다고 했는데 말도 안되는 핑계였다. 이사도 그 말을 믿지는 않을 터였다. K차장은 D를 아주 못마땅해했다. D때문에 이사가 자신을 더 못살게 군다고 생각했다. 팀 회의를 할 때면 K차장은 팀원들에게 자신이 이사에게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지 토로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다. 오늘도 야근을 예약해 놓은거나 다름없었다. Y는 애써 마음을 비우려고 했다. 신경쓰지 않고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P에게 짜증내는 K차장의 목소리와 D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보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Y는 자신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빨갛게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J가 Y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물을 봐달라고 메세지를 보냈다. Y는 J의 자리로 갔다. 모니터를 보고 Y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J를 한 번 쳐다봤을 뿐이었다. J는 벤치마킹한 디자인을 섞어 놓고는 어떻냐는 표정으로 Y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J에게 Y는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J는 평소에도 연봉이 높은 포지션에 대해 묻고는 했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적은 듯 보였다.

"팀장님께 보여드려 봐."

Y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J는 디자인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여섯 시가 다 되어가자 L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L은 어김없이 자신의 저녁 약속에 대해 떠들어댔다. 오늘 업무가 끝난 사람들은 자리를 정리하며 퇴근 준비를 했다. Y와 P는 저녁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K차장과 D도 뒤따라 나왔다. 정말이지 눈치마저도 없었다. 네 사람은 시간을 아끼려고 회사 앞에 있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네 사람은 아무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음식이 나오자 모두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했다. Y와 P는 가끔씩 눈을 마주쳤는데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J는 퇴근한 뒤였다. F차장은 다이어트 중으로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 몇 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사는 거래처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인상을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언제 불똥이 튈 지 몰랐다. D는 작업한 파일을 보내줄 수 있냐고 Y에게 물었다. Y는 용량이 커서 전송이 안된다고 대답했다. D는 다른 사람에게 매번 도움을 얻어 일을 했다. Y도 몇 번 일을 알려주고는 했는데 그 후로 신입인 J보다 더 많이 물어와 일에 집중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D가 남자 직원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누구나 자기만의 생존 방식이 있는 법이었다. 이사는 출근과 퇴근을 모두 늦게 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기 전에는 집에 가지 않았다. 이사의 통화가 끝나자 사무실 안은 조용해졌다. 회사에는 Y의 팀을 비롯해 몇몇 사람만 남아있었다. Y는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Y는 파스가 붙여진 시큰거리는 손목을 내려다보다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붉은색 지붕의 낡은 건물들이 바다를 향해 서 있고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든 모래사장을 Y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지중해는 Y의 오랜 갈망이었다. 어릴적 지중해 연안의 작은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본 후로 그곳은 Y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거리가 펼쳐졌고 그곳을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다. 거머리같은 더위와 코미디 영화에 출연해도 될 우스꽝스러운 회사 사람들과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을 견뎌야만 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17세기 풍의 오래된 집의 테라스에서 지중해를 내려다 보기 위해서였다. 사시사철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 터키 블루색 같은 잔잔한 물결의 지중해,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깨끗한 공기, 눈 인사와 정감어린 미소,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제철 재료로 만든 건강한 음식, 느긋한 아침 시간과 저녁 식사 후 산책. 크게 바라는 것은 없었다. 죽어있는 감각을 깨우고 하루에 한 번 크게 웃고 죄책감없이 게을러지고 싶었다.

 

Y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색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하철 안에는 긴 하루의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있었다. Y의 맞은편에는 얼굴이 붉은 중년 남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앉아 있었고 Y의 옆에는 앳되 보이는 얼굴의 커플이 속닥거리며 킥킥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Y는 출퇴근 시간에 휴대폰을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안그래도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혹사시키고 있는 터에 조그만 기계에 내 시간을 전부 쓰고 싶지는 않았다. Y는 눈을 감았다. 잠시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없는 상태로 있고 싶었다. 지하철은 익숙한 이름의 정거장을 거치고 또 거치고 거쳐 Y의 동네에 Y를 내려놓고 빠르게 사라졌다. Y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다시한번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눅눅한 습기가 Y의 얼굴로 덮쳐왔다. 역 주변 상점 앞에는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진 듯 보이는 남자 몇몇이 모여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Y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Y가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멀뚱히 Y 뒤에 서 있었다. Y는 앞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 빠른 속도로 걸었다. 뒤의 남자가 말을 붙여왔다.

"저기요, 어디가세요?"

Y는 대꾸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역 앞에서 술에 취해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인 것 같았다. 남자는 계속 뒤따라 왔다. 심장이 빨리 뛰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큰 길이 끝나면 집까지 가는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았고 어두웠다. Y는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룸메이트는 집에 있었다. 룸메이트는 자신이 나갈테니 큰 길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큰 길이 끝나는 지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Y가 그들에게 가까이 걸어가자 뒤따라 오던 남자는 그제서야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 갔다. 룸메이트가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Y도 룸메이트에게 뛰어갔다.

"괜찮아? 어디 있어, 그자식!"

"사람들이 있는 거 보고 돌아갔어, 미친놈."

Y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런 행동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공포감을 주는지 남자들은 모를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힘들게 일하고 집에 오는 길에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Y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두려움이 엄습했었다.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흥분하며 얘기하자 지나가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Y와 룸메이트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집을 향해 걸었다. 룸메이트는 Y의 가방을 대신 들고 Y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두 사람 앞에 개 두 마리를 데리고 한밤의 산책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개들은 밖으로 나온 것에 신이 났는지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땅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그러다 Y와 룸메이트를 발견하고는 컹컹대며 짖었다. 두 사람은 순간 소리를 지르며 냅다 집으로 뛰었다. 주인이 목줄을 끌어당기며 개들을 진정시켰다. Y와 룸메이트는 집 앞에서 숨을 고르다 무심코 검은 하늘에 떠있는 달을 올려다 보았다. 달은 건물 꼭대기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듯 했다.

"달 봐봐."

야근으로 밤 늦게 들어오면서 달을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지친 몸을 이끌며 똑같은 길을 걸었을 뿐이었다. 달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 겪었던 불쾌한 기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공기는 여전히 옆에 있었지만 달빛은 그들을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었다. 여름밤이었다.

“화장실 고쳐놨어."

룸메이트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Y는 룸메이트의 어깨를 툭 치며 피식하고 웃었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목 뒤로 머리카락이 쩍쩍 달라붙었다. 서울은 20일째 열대야가 지속되고 있었다. 오늘도 달빛 아래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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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3

점심 시간을 한 시간 남겨두고 이사가 출근을 했다. 이사는 사십대 초반의 청순한 외모의 소유자로 나이보다 몇 살은 어려보였다. 그러나 Y는 이사가 의학의 도움을 정기적으로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깨끗한 인상과는 달리 굉장히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갑자기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코를 막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사는 Y 뒷자리에 앉았는데 점심을 먹고 들어오면 소화가 되지 않는다며 방귀와 트림을 번갈아 가며 했다. 또 결코 책상을 정리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책상에는 먹다 남은 샌드위치, 일회용 커피컵, 코 푼 휴지가 굴러다녔다. 목소리는 어찌나 큰 지 누구를 부를 때나 업무 지시를 할 때에는 귀가 먹먹하다 못해 아플 정도였다. 일을 마음에 들게 하면 대우해줬고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즉시 눈 밖에 났다. 애연가였고 냄새를 없애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향수를 뿌렸는데 오히려 더 역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사는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마다 항상 L을 데리고 다녔는데 L은 이사의 오른팔로서 아부로 살아남는 종족이었다. L의 아부는 독보적이었는데 이사 앞에서 허리를 펴는 날이 없었다. 이사의 말이라면 모두 맞장구쳤고 자신의 생각은 집에 놔두고 온 듯 했다. L은 소위 월급 도둑이었다. 중요한 업무는 요리조리 피하고 간단한 일만 맡아서 하는데도 어찌나 생색을 내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회사 일은 L이 다 하는 줄로 생각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듣도록 자신이 일을 한다는 티를 팍팍 냈다. 업무가 많아 야근하는 동료들과 달리 L이 근무 시간 이후에 회사에 남아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사를 등에 업은 L에게 F팀장도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L이 회사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일은 이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입발린 말을 할 수 있는지 타고난 재능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덧 시곗바늘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Y와 P 그리고 J는 도시락을 들고 휴게실로 갔다. J는 입사한지 몇 개월 밖에 안된 이십대 후반의 신입 직원이었는데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다. Y는 처음 얼마간은 그의 불평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신입 직원의 고충이라고 이해하며 듣기에는 정도가 지나쳤다. 그의 불평은 점심 시간 내내 지속되었고 Y와 P는 꼼짝 않고 그 불평을 들어야만 했다. 하나 더 참을 수 없는게 있었는데 그것은 J의 입냄새였다. J는 양치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J가 옆에 앉아 얘기할 때면 Y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날도 J의 불평이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포착한 Y가 P에게 먼저 말을 던졌다.

“우리 점심 먹고 마트나 갈까?"

"좋아, 좋아. 내가 봐놓은게 있거든."

P는 신이나서 사고 싶은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먹거리에 관한 정보는 줄줄 꿰고 있었다. P는 어디에서 무엇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지 Y에게 알려주고는 했다. 그 정보는 유용할 때도 있었지만 Y는 P만큼 물건을 많이 사서 쟁여 놓는 경우는 없었기에 이용할 일이 없었다. J는 웬일인지 P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오늘은 J의 불평을 듣지 않고 여유롭게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D대리님 말이에요, 어떻게 된 걸까요?"

J가 못참겠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글쎄, 오후에 출근하겠지."

Y가 짧게 대답했다.

“대표님이 이사님한테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출근할 때 역 근처에서 D대리가 돌아다니는 걸 몇 번 봤대요."

J가 계속 말하자 Y와 P는 동시에 몸을 뒤로 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Y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D는 자리를 한참동안 비울 때가 많았다. 언젠가 어떤 직원이 D가 비상구 계단에 앉아 자고 있는 걸 봤다고도 했었다.

"진짜? 대표님 점심 시간 다 되서 출근하시잖아. 그 시간에 거기서 뭘 하는 거지?"

P가 바나나를 Y와 J에게 주며 말했다. 그녀는 항상 넘치게 먹을 것을 갖고 왔기에 사람들에게 잘 나눠줬다. Y는 바나나 껍질을 벗기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P와 J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Y를 바라보았다. 11시가 넘은 시간에 역 주변을 배회하는 D와 그녀를 목격한 대표님을 상상하니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D에 대해서는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항상 얘깃거리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점심 시간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오후 시간은 고되었다. 눈알은 빠질 듯 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귀의 통증이 며칠간 계속되고 있었다. 어지럼증은 사회 생활을 하며 얻은 단짝 친구였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고질적인 직업병이었다. Y는 서랍에서 파스를 꺼내 손목에 붙이고 모니터에 다시 눈을 고정했다. 이사는 K차장을 불러다 한참이나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Y의 귀가 더욱 욱씬거렸다. K차장은 사십대 초반으로 이사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그는 중간 관리자로서의 업무 조율 역할을 잘 하지 못했고 책임을 지기 싫어했으며 이사 눈치 보기에만 급급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같은 팀인 Y와 P에게 풀었고 Y와 P의 업무량은 갈수록 늘어났다. K차창은 이사에게 잔소리를 듣기 싫어 자주 야근을 강요했다. 그러나 야근을 한다고 해서 이사가 K차장을 좋게 볼 일은 만무했다. K차장은 뭐가 문제인지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 것 같았다.

 

Y는 업무 얘기를 하기 위해 H과장을 찾았다. H과장은 100kg가 넘는 육중한 몸의 소유자였는데 대표와 이사의 눈을 피해 맨 뒤 자신의 자리에서 자주 낮잠을 잤다. 그는 자다가 일어나 당이 떨어진다며 편의점에서 초코 과자들을 잔뜩 사와 순식간에 해치웠고 휴게실에서 몰래 잠을 자기도 했다. 지각을 밥먹듯이 하면서 집에서 회사까지 멀다며 항상 우는 소리를 했고 땀을 비오듯 흘리며 4월에도 덥다고 선풍기를 틀었다. 여름이 돌아오면 헬스장을 다닌다며 입으로만 유난을 떨었고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예전 사진을 보여주며 조만간 근육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Y는 H과장을 불렀다. 그는 낮게 코를 골며 세상 편하게 잘도 잠을 잤다. 정말 혼자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 Y가 다시 한번 부르자 H과장은 그때서야 가늘게 눈을 떴다. 그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Y는 반영되어야 할 사항에 대해서 설명했다. H과장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기가 막혔으나 Y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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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2

Y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커피가 목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이 몇 분이 Y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마에 맺힌 땀이 조금 마르자 Y는 컴퓨터 전원을 켰다. 9시 5분 전이었다. 대표와 이사는 점심 시간이 다 되어서야 출근을 했다. 동료인 P도 오늘은 늦는 모양이었다.

"Y씨, 커피 마실래?"

맞은편 자리의 F팀장이 Y에게 말을 걸었다.

"전 들어오면서 사왔어요."

Y는 커피를 들어보이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F팀장은 절대 자신이 커피를 사오는 법이 없었다. 커피를 사러 가는 사람이 보이면 꼭 카드를 주며 자기 커피도 사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 카드로 다 계산하라는 얄미운 그 말을 마지막에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Y는 몇 번 F팀장의 커피 심부름을 한 후로는 커피를 사서 회사에 들어갔다. F팀장은 삼십대 후반으로 오지랖이 넓었고 자신의 성격이 좋다고 착각하는 부류였다. 그녀는 한 번씩 나서서 농담을 할 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웃어주자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이 꽤 좋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인사도 받지 않을 만큼 감정이 극과 극을 오갔다. 또 자기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와서는 자기 입으로 자기 모습이 웃긴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그러면 팀원들은 팀장님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는 정해진 답을 말했고 F팀장은 눈을 흘기며 좋아했다. Y는 단 한번도 F팀장에게 옷이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F팀장은 Y에게 그 말을 듣고 싶어 Y의 옷차림에 대해 칭찬하고는 했는데 Y는 입가에 미소만 한번 지을 뿐이었다. F팀장이 자신에게 왜 그 말을 하는지 알았지만 Y는 F팀장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Y가 보기에 그 옷은 F팀장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F팀장이 빵을 한가득 사와서 팀원들에게 먹으라며 평소 그녀에게서 볼 수 없었던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팀원들은 감사하다고 말하고 몇 개는 먹고 몇 개는 남겼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F팀장이 남은 빵을 자신의 자리에 가져가더니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둥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 명 밖에 없다는 둥하며 신경질을 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감사하다는 말을 얼마나 해야 F팀장의 마음에 충족되는 걸까하고 Y는 고개를 숙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었다.

F팀장은 결국 나이가 가장 어린 신입 직원에게 카드를 주며 자신의 커피와 신입 직원의 커피를 사오라고 얘기했다. Y는 카드를 받아들고 나가는 신입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동료인 P가 9시를 조금 넘겨서 들어왔다. 그녀는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Y는 P가 지각을 자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아침 시간의 대부분을 썼다. P는 점심에 먹을 음식과 간식을 잔뜩 챙겨 회사에 왔는데 먹을 것을 자신의 옆에 두고 흐뭇해했다. P는 퇴근 후에 회사 근처의 마트에 함께 가자고 Y에게 자주 말했는데 Y는 주말에 장을 봤다고 거절하고는 했다. P는 가방에서 간식거리를 꺼내어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러고는 Y에게 점심 시간에 마트에 가자고 말했다.

 

Y는 파일을 열어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Y의 팀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늘 그렇듯이 기획 단계부터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기획자는 새로울 것 없는 기획서를 주면서 디자인은 새롭게 하기를 원했다. 마감 시간까지 겨우 맞춰 디자인을 끝내면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며 디자인적 요소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수정할 거리들을 잔뜩 던져 주었다. 기획자는 디자인이 방망이를 몇 번 두드리면 뚝딱하고 나오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Y는 매번 반복되는 상황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이쪽 업계에서는 기획자의 목소리가 더 컸다.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었으나 현실은 매달 돌아오는 월급날 외에는 즐거움을 찾는 것이 힘들었다.

 

F팀장이 D를 찾았다. 옆자리에 앉는 D는 아직도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8년간 사회 생활을 한 Y도 D와 같은 사람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D는 경력이 Y와 비슷했지만 업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용어도 잘 몰랐다. 회의 시간에는 멍하니 있거나 노트에 낙서를 하다가 이사에게 한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간단한 일도 며칠을 붙들고 있었고 그마저도 실수가 많아 수시로 이사에게 불려가 설교를 들었다. F팀장은 D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휴대폰 전원은 당연하게도 꺼져 있었다. D는 이렇게 연락이 안 될 때가 종종 있었다. 오후에 가까스로 연락이 되면 그제서야 회사에 나왔다. 동료들이 전원을 왜 꺼놨냐고 물으면 전화 할 거 아니까 꺼놨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좀처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멍해 보이는 인상 뒤에 어떻게 그와같은 뻔뻔함이 숨겨져 있는지 볼수록 신기했다. F팀장은 한숨을 쉬며 궁시렁거렸다. F팀장은 궁시렁대기 대회가 있다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일 정도로 누가 듣건 말건 자기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 사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다. Y는 한 달 정도 F팀장의 뒷담화 대상이 된 적이 있었는데 신입 시절 이후로 회사 생활하며 울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F팀장의 공격은 Y 다음 타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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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여름밤 #1

Y는 무거운 무엇인가가 자신을 옭아 매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이 찾아왔다. 새벽 3시였다. 일주일 가까이 이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고 새벽에도 보이지 않는 적과 사투를 벌였다. 방 안은 갑갑한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휴대폰으로 현재 기온을 확인하니 32도였다. 32도! Y는 지금까지 살면서 새벽 3시에 32도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서울은 매년 여름 기온이 상승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한 낮 기온이 39.6도를 찍었다. 체감온도는 40도를 넘어섰다.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서울의 기온이 40도에 육박할 거라고 말이다. 몇 년 후에는 열대 기후의 나라에 여행 갈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Y는 미친 날씨야라고 혼잣말을 내뱉고는 베개 위에 머리를 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머리카락이 말썽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문어 다리처럼 목을 휘감아 숨이 막히는데 한몫을 했다. Y는 늘 여름에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가을이 되면 후회할 것이 분명하기에 충동을 다스리는 쪽을 택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머리끈으로 고정하고 부엌으로 갔다. 물을 컵에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키자 쩍쩍 갈라진 논밭에 단비가 내리는 것처럼 따끔거렸던 목구멍이 촉촉해졌다. Y는 침대에 다시 누워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밖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득 지금 깨어있는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은 고요하고 말라버린 감수성이 터질만큼 감상에 젖기 좋은 시간이지만 지금은 그저 더위에 지쳐 잠 못 이루는 밤일 뿐이었다. Y는 이쪽 저쪽으로 자세를 바꾸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시금 잠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Y는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간밤의 더위에 몇 번이나 잠을 설쳐서 바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눈을 감은 채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5분만 더 자고 싶었지만 다리를 들었다 내리며 반동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햇살은 창을 통과하기 전이었다. Y는 침구를 정리하고 욕실로 향했다. 룸메이트가 욕실문을 열고 나오며 변기에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변비에 시달리고 있는 룸메이트는 1년에 두 번은 연례행사처럼 변기를 막히게 했다. 본인은 화장실 배관이 너무 낡아서라고 주장했지만 Y는 변비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삐져나오는 짜증을 간신히 누르며 저녁까지 해결해 놓으라고 말하고는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화장을 하는 도중에도 코 밑으로 땀이 송송 배었다. 선풍기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지만 더위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집을 나와 바깥 공기를 빨리 마셔야 했다. 그래야 답답함이 조금 해소될 것 같았다.

 

지하철은 그나마 북새통은 아니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노선이 아니어서 출퇴근 전쟁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대신 환승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Y의 옆에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섰다. 남자에게서 마른 걸레에서 나는 쉰내가 풍겼다. Y는 가급적이면 숨을 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Y의 폐활량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얼마 못가서 콧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냄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자리를 옮기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옆과 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Y는 어쩔 수 없이 오래 숨 참고 있기를 몇 번 더 했다. 드디어 환승역에 다다랐고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 Y도 환승 통로를 빠르게 걸었다. 여기서 4 정거장을 더 가야 회사가 있는 역에 도착했다. 다행히 역에서 회사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Y는 회사 옆 건물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샀다. 몇 개월째 매일 아침에 보는 편의점 직원은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Y가 인사를 해도 그녀가 입을 여는 법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계산을 하며 Y가 말했다. 직원은 역시나 묵묵무답이었다. 거리는 햇볕에 녹아내릴 것 같았다. 회사 건물에 들어서니 엘리베이터 앞은 이미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사람들을 싣고 쉴새 없이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했다. 차례를 기다려 Y도 사람들에 섞여 엘리베이터에 탔다. 사람들은 모두 올라가는 숫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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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움직이는 것, 멈춰있는 것들

물웅덩이

그날도 나는 심심한 시간을 이겨내고 있었다. 이름 모를 거리 위에서 또 다른 이름 모를 거리로 옮겨가면서 말이다.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그다지 변함이 없어서 내가 같은 지점에 둥둥 떠있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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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보았다. 어제 온 비가 남긴 흔적이었다. 웅덩이 속에 비친 세상에는 내가 보지 못한 얼굴들이 있었다. 이 웅덩이는 내 시선을 사로잡을 만했다. 하늘에선 모든 것이 다 보일 것 같지만, 사실 바닥에 시선을 꽂은 얼굴을 볼 재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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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지만, 어쩐지 뒤통수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썩 기분 좋아지는 표정은 아니었으나 신기함에 발이 묶인 나는 거울 속에서 계속 그 표정들을 주워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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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웅덩이 속 구경에 맛들린 나는 다른 웅덩이를 찾아 둥둥 떠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겨운 살구색 얼굴이 아닌 초록 얼굴들이 비치는 공원 속 웅덩이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자꾸만 보고싶은 한 잎의 얼굴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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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잎은 땅 위에 서 있는 나인 양 주변을 관찰하기 바빴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그와 함께 온 강아지를 하트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눈치없는 새가 앉아 가지가 흔들릴 때면 깜짝 놀라기도 했고. 나처럼 아래만을 보며 살아가는 누군가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신기함보다 더 큰 무언가가 나를 같은 지점에 묶어두었다. 덕분에 햇살에 따라 달라지는 초록빛도 바라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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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즐거운 자리를 떠난 건 그 잎이 웅덩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잎은 웅덩이 속에서 하늘을 보고는 그 처음 보는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처음 보는 아래와 위의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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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나는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잎의 시선을 따라다녔다. 왼쪽을 보면 왼쪽을 보았고, 오른쪽을 보면 오른쪽을 보았다. 그러다 물웅덩이 안에서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나는 생각할 새도 없이 그곳에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후에 나는 꽤 오랫동안 후회했다. 잎을 비추는 거울이 다시 나타날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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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웅덩이를 되찾기 위해 노력할 동안 사람들은 자꾸만 비가 온다고 투덜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오면, 어차피 난 또 그 초록 없는 세상을 떠돌 수밖에 없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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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저려오는 손끝으로 리코더를 움켜쥐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나를 스쳐 지나간 너의 온기가 아직 내 어깨에 남아있어서, 너가 흘리고 간 날숨이 아직 내 귓가에 고여있어서,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든다. 

 

내가 뱉어내는 모든 말마디 속에 너가 존재한다. 내가 팔과 다리를 움직여 만들어내는 모든 행위 속에 너가 살아 숨쉬고, 내리뜨는 눈꺼풀 끝에 너가 찬란하게 자리한다. 뺨을 할퀴고 머리칼을 들추며 지나가는 바람 사이에 너의 붉은 체취가 너울거린다.

 

매 순간 내 간절한 시선과 애닳은 숨결과 숭고한 심장의 메아리가 닿는 곳에 너가 스며있다. 손을 뻗으면 예의 그 신기루처럼 아스라질까 두려워 나는 너에게 닿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응시하며 나는 기꺼이 절망했다. 사라지는 잔향을 좇아 움직이며 나는 너의 짓궂은 입꼬리를 상상하고, 반항적으로 구겨지는 눈꼬리를 그리고, 오늘도 인사를 건네지 못한 나를 저주한다. 

 

자책과 자괴가 만들어낸 어둠을 닮아 그 이면마저 추악한 피조물은 짝사랑의 허무함과 외로움을 근거로 했고, 한번을 돌아봐주지 않는 너에 대한 미약한 원망과 치기를 전제로 했다.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교실로 틀었다.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전신을 살라 먹는 뜨거운 열기를 폐포 가득히 삼키며 나는 고요히 울었다. 

 

교실의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자라난 끈적한 미련과 아쉬움이 나를 붙잡았다. 30도를 웃도는 더위와 시끄러운 말소리 사이에 나만 잠식되어 있다. 차가운 심해 속에, 무거운 침묵 속에, 하얗게 부서지는 창공 속에. 수면 위로 떠오르려 허우적거리고, 말간 공기와 맞닿고 싶어 애써 발버둥치지만 결국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결코 너라는 그물 속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안다. 

 

사물함을 열고 음악책과 리코더를 집어넣었다. 더불어 너의 옷깃을 잡아채고 싶은 욕망을, 눈을 맞추고 싶은 욕심을,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바람을 조용히 밀어 넣는다. 

 

차마 건네지 못하는 인사다, 감히 전할 수 없는 고백이다, 끝내 보여줄 수 없는 마음이다. 

 

서러운 변명들 밖에 나열할 줄 모르는 못난 나는 오늘도 너의 곁을 그냥,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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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끔찔끔 끄쩍끄적

(소설) 구름위의 만찬 5화 (완결)

*

 

서울 여의도 DDM 빌딩 18층, 많은 기자들 앞에 서있는 여자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들고 일어섰다. 그녀는 비행기 내에서는 높은 고도로 인해 미각이 둔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입맛을 돋울 수 있는 향과 맛으로 메뉴들을 구성한 점이 이번 기내식의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 전채 요리로 이탈리안 전통의 맛을 한국식으로 모던하게 재해석한 ‘파르메산 치즈를 곁들인 제동한우 카르파치오’ 등을 즐길 수 있고, ‘청양 고추와 매운 돼지고기 살라미가 들어간 가르가넬리’로 청양고추 특유의 매콤한 맛을 살린 파스타를 맛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메인 요리로는 신선한 채소에 구운 잣과 바질 잎을 올리브 오일에 버무려 만든 페스토 드레싱을 곁들인 ‘농어 필레, 후식으로는 쑥 티라미수로 구성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시빌레 쇤버거는 기내식 개발에 있어 중요한 요소는 손님들의 미각과 시각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이 요리가 지상에서 조리된 후 항공기 기내에서 최소한의 조리 공정만을 거쳐 서비스되는 제한적인 조건에도 훌륭한 품질 유지가 가능한 메뉴라고 말했다. 시빌레 쇤버거는 이 메뉴가 그런 메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시빌레 쇤버거의 말을 듣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낱 인스턴트식품이라고 여겼던 기내식을 자신이 만들게 될지 몰랐다는 듯한 그녀의 얼굴은 씁쓸하면서도 자신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 증조할머니께서 조선시대 마지막 주방 상궁이라고 하시던데 사실입니까?

- 네, 맞습니다. 증조할머니께서 궁중조리인 이셨고 할머니, 어머니께서 대를 이어 음식장사를 하셨습니다.

 

그녀의 입 꼬리가 비릿하게 말아 올라갔다. 자신도 그 피를 이어받은 것 같다며 수상소감을 마무리했다. 수상소감을 말한 후 고대하던 시빌레 쇤버거와 이야기를 하는 시간.

그녀는 시빌레 쇤버거에게 인사를 한 뒤, 입을 뗐다.

 

-왜 기내식을 선택 하신 거예요?

 

정말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시빌레 쇤버거에게 물었다.

그러자 시빌레 쇤버거는 하늘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음식이잖아요, 했다.

 

-아..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준비해둔 질문들을 연이어 물었다.

 

-호텔음식도 하셨잖아요? 호텔음식과 기내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세요?

 

- 호텔음식이 라이브 음악이라면 기내식은 녹음한 음악을 라이브처럼 들려줘야 하는 일이죠. 어쩌면 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 말을 듣고 여자는 마음속 잔잔한 파문이 일며 무언가가 부서짐을 느꼈다. 하늘에서 먹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음식. 그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며칠 뒤 회사에 휴가를 낸 그녀는 여행을 갈 짐을 챙겼다. 커다란 캐리어에 여벌의 옷과 속옷을 넣었다. 세면도구들과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우겨넣곤 뚜껑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여권을 챙긴 여자는 집을 나왔다. 하늘은 어두웠고 무서웠다. 그녀는 공항까지 가는 공항버스를 탔다. 공항버스 안은 여행객들로 화려하고 활기찼다. 들떠있는 공항에선 행복감이 가득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둥둥 떠다녔다. 여자의 입술은 긴장감으로 잔뜩 짓눌리고 뜯겨져 있었다.

 

- 손님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잠시 후 이륙하겠습니다. 좌석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Ladies and gentlemen. We will be taking off shortly. Please make sure that your seat belt securely fastened. Thank you.

 

비행기는 활주로를 달리더니 곧이어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렇게 하찮게 생각했던 첫 하늘 여행길에 올랐다. 지상 위 구름과 파란 하늘이 일직선상으로 펼쳐지자 여자의 눈에선 생동감이 올라왔다. 잔득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자 그녀는 나른함을 느꼈다. 그녀는 도착할 곳의 정보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어디를 둘러볼지, 무엇을 먹을지. 그녀는 사소한 행동들 속에서 여행이 주는 즐거움을 알아갔다. 그녀 옆에는 5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인 듯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아이 때문에 시끄러운 비행이 될 것 같아 여자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있는 그대로를 즐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 고기와 생선 중에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손님?

 

그녀가 여행 정보에 대해 검색을 하는 동안 승무원이 다가와 그녀와 아이엄마에게 차례대로 물었다. 그녀는 고기로 주세요, 했다. 아이엄마는 자신은 생선을 달라고 했고, 아이는 아동식으로 달라고 말했다. 이윽고 기내식이 그녀의 눈앞에 놓여졌다. 처음으로 하늘에서 먹는 기내식에 그녀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여자는 그동안 자신이 기내식을 한낱 인스턴트식품에 비교하며 비하했던 것을 후회했다. 눈앞에 있는 음식은 너무나 훌륭했고, 입안에 넣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로지 하늘 여행길에 오르는 여행자만이 즐길 수 있는 음식, 하늘 위에서만 느끼는 밥상에 그녀는 여행의 설렘이라는 양념이 가득 뿌려진 기내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녀는 자신이 구름위의 만찬을 즐기는 것이 꼭 특별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여자는 여행의 일부인 이 구름위의 만찬을 느긋하게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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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끔찔끔 끄쩍끄적

(소설) 구름위의 만찬 4화

 

4:00 또랑또랑한 알람에 그녀가 눈을 뜬다. 밖은 아직도 새카만 밤이지만 창문을 열고나니 시원한 새벽 공기가 아침을 깨운다. 그녀는 커피포트에 커피를 내렸다. 하루아침의 시작으론 커피만한게 없기 때문이다. 부엌에 있는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었다. 4:15분 개운해 보이는 몸짓으로 화장실로 간 그녀는 4:20분 화장실에서 나와 화장을 시작한다. 화려한 핑크 빛 펄 쉐도우가 그녀의 눈에 안착한다. 체리를 머금은 듯한 빠알간 립스틱이 그녀의 입술위에 칠해진다. 4:50분 집 밖으로 나온 여자는 4:56분 회사에 도착한다. 그녀는 큐빅이 박힌 파란색 머리망을 하고 흰색 모자를 목까지 덮는 위생모를 착용한다. 진공청소기, 먼지제거 테이프를 거쳐 에어 샤워기까지 통과한 후에야 그녀가 담당하는 핫 키친 파트로 들어선다.

 

- 어~ 좋은 아침~

 

허인식이 철재 문을 통과한 그녀에게 인사를 한다. 그녀는 입은 멈춰 있는 채 눈웃음으로 화답하며 네 좋은 아침이에요, 했다. 그러자 허인식이 다가와 그녀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잘 잤어?, 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덕분에요, 했다. 그녀는 하얀 옷은 겹겹이 입은 직원들에게 오늘 만들어야 할 메뉴와 양을 말했다. 그녀는 오늘 메뉴와 양을 확인한 뒤 디시업방으로 향했다. 오슬오슬한 공기 속 하얀 벽 한쪽 구석 모니터에 숫자가 계속해서 바뀐다. 그녀는 모니터를 확인하며 일렬로 서서 손으로 음식을 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해야 되는 양이 많으니까 파이팅해요, 우리.

 

그녀의 입에선 줄지어 서있는 직원들을 향한 응원의 멘트가 나왔다. 차가운 방안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디시업방을 나갔다.

 

-지희년 보다 더해 저년은, 아주 소름이 끼친다니께

-그러게나 말이에요. 지희씨가 회사를 관둔 것도 있지만, 이번에 저 여자가 진급한 건 십중팔구 허인식이랑..

 

그때 다시 문이 열렸고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두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가더니 모니터 옆에 놓여 있던 검정 펜을 집어 들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제가 펜을 두고 가서요, 했다. 기시감이 한기처럼 느껴지는 디시업방 안엔 정적과 눈이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핫 키친과 콜드 키친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메뉴들을 체크한 후, 퇴근 전 올려야할 보고서를 쓰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무실 벽 초록색 게시판에는 온갖 종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녀는 보고서를 쓴 뒤에 게시판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개월 전 회식이후 지희는 회사에 오지 않았다. 차마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겠지, 그래서 회사에 못 왔겠지 생각할 뿐이다. 여자는 조용해진 환경에 기뻐하며 미소 지었다. 보고서를 쓰던 중 무수한 종이들이 들러붙어있던 게시판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그녀는 게시판으로 다가가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종이를 여자는 보이지 않는 입으로 조용하게 읽어 내려갔다.

 

- 퓨전 기내식 메뉴 공모전..

 

종이에는, 이메일을 통해 출품 레시피를 접수 받고 공모된 레시피 중 우수작 10개를 선정해 출품자가 직접 레시피를 조리하는 형식으로 본선을 진행되는 공모전이라고 적혀있었다. 출품된 메뉴는 세계 아름다운 기내식 1위를 차지한 ‘시빌레 쇤버거’ 밀레니엄 루트 호텔 총주방장이 직접 심사를 하며 공모전 1등에게는 부상으로 유럽 왕복 비즈니스 항공권이 제공되고 유러피언 스타 시빌레 쇤버거 셰프와 직접 만나 요리에 대한 그의 비전을 듣는 멘토링 기회도 제공된다고 큼지막하게 써져 있었다.

 

그녀는 이 내용을 두 번 세 번 읽고 또 눈으로 읽었다. 그녀의 눈에는 시빌레 쇤버거라는 셰프와 함께하는 멘토링이란 단어가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죽기가 두려워 살았었다. 바꾸어 생각하면 살고 싶었다. 여자는 잃을게 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소유하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허나 자신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내재되어있던 욕망들이 스믈스믈 벌레처럼 올라왔다. 하루를 살아야하는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이번 기회에 무기력하고 힘들었던 삶, 단하나 놓을 수 없었던 음식이라는 이름을 마주하기로 했다. 여자는 이것이 자신의 손끝으로 자신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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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끔찔끔 끄쩍끄적

(소설) 구름위의 만찬 3화

 

어느새 자리는 무르익고 얼큰하게 취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녀는 곱창과 물김치를 계속해서 먹었다. 이 자리에 곱창의 존재보다 더 작은 존재가 자신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우울과 안도를 반복한다. 중간에 들어온 허인식이 그녀 옆에 앉아 있다는 점만 빼면 나름 나쁘지 않다고 느끼는 그녀다. 허인식은 새빨개진 전형적인 술톤 얼굴빛을 하곤, 멀리 떨어진 지희에게 들릴 정도로 큰소리로 말했다.

 

-지희씨 정말 축하한데 말이야,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그 말에 옆에 앉아있던 남자직원이 아부적 멘트를 날린다. 당연히 위생, 맛 그리고 개발이지요, 했다. 그들은 사실 언제보아도 윗사람을 너무 경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다시 속이 메슥거렸다. 이미 넘어간 곱창들이 꿈틀대는 것 같아 물김치 국물을 마셨다.

 

-그것도 그거지만 메뉴의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단 말이야. 이번에 그, 누구냐 시벌레 버거?

-시빌레 쇤버거.

 

그녀가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이 되었다. 그녀는 그 시선들에 당황해 고개를 푹 숙였다. 여자는 시빌레 쇤버거를 호텔셰프 때부터 좋아했지만 그가 단순노동인 기내식을 만든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녀는 시빌레 쇤버거가 성의 없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내식을 만드는 셰프 중에서 그나마 나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다채로운 색깔로 눈으로 아이들과 아이들의 마음을 가진 어른들을 사로잡는 기내식을 만드는 셰프. 다양한 맛을 추구했던 그녀의 어머니처럼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한 시빌레 쇤버거는 재미와 맛 그리고 상상력과 정성까지 더하는 그런 기내식을 선보였다.

 

허인식이 험험- 헛기침과 함께 그 시선을 자신에게 가져왔다.

 

-그래 시빌레 쇤버거. 웬 패스트푸드 이름 같은 그 요리사가 작품을 만들었단 말이야. 이젠 기내식도 작품이 되는 시대가 왔어. 우리 기내식에도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고. 새우 넣은 뇨케티 파스타 샐러드를 뭐라고 지었더라.

 

허인식은 그녀를 팔로 툭툭 치면서 말해보라고 종용했다. 셰프 이름도 알고 있는데 음식 이름도 알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녀는 설레는 이름에 괜히 아는 척한 것을 후회했다. 그녀는 그녀에게 다시 포커스 된 시선들을 거두며 작게 읊조렸다.

 

-나비의 꿈..

-그래 그거! ‘나비의 꿈’이니 ‘감자 일몰’이니 이름에 스토리를 담아야 잘 팔리는 시대가 온 거라고. 역시 비행기는 못타봤어도 뉴스는 보나봐?

 

그녀 빼고 모두가 웃었다.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녀 밖에 없을 거란 말에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남은 네손가락으로 꽉 쥐었다.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돈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내다 보니, 굳이 여행이라는 걸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멀리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을 왜 돈과 시간을 들여가면서 해야 하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이곳에도 충분히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데 굳이 인스턴트식품 같은 기내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내가 비행기 좀 태워죠? 첫 여행으로 홍콩 보내줘?

 

허인식은 그 말을 하면서 두툼하게 살이 오른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쓸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감쳐물었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눈앞의 곱창이 철판에 눌어붙고 있었다. 그 공간에 있던 곱창 냄새가 그녀의 옷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지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반동에 앉아있던 파란색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지희는 두 손으로 테이블 위를 쾅- 하고 강하게 한번 내리쳤다. 그리곤 허인식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펼쳤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법?

 

지희의 목소리는 술에 의해 많이 꼬여있었지만 분명하게 귓가를 때렸다. 가운데 손가락은 굽혀지지 않은 채였고 그녀를 제외한 모든 이가 당황으로 얼룩져 지희를 말릴 틈이 없었다.

 

-그거 너 같은 새끼랑 홍콩 가는 거잖아.

 

지희는 작은 비웃음에서 큰 폭소로 소리를 변경했다. 허인식은 철판 바닥에 붙어 타버린 곱창보다 더 딱딱해진 굳은 모습으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양껏 마신 소주가 증발해 버린 듯 했다. 술 때문에 원래도 붉었던 허인식의 얼굴이 김칫국물보다 더 달아올라 있었다.

 

-그 돼지 같은 몸으로 홍콩은 무슨, 제주도도 못가 더만.

 

정적이 흐르다가 양옆에 있던 직원들이 서있는 지희를 잡고 말렸다. 곱창은 그새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완전히 검게 그을리고 있었다. 다들 똑같은 인간들이라며 옆에서 말리는 직원들을 밀쳐낸 지희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푸릇푸릇한 초록색 고추를 집어 들었다.

 

-적당히 해. 이것보다 작은 주제에!

 

지희는 그 고추를 된장에 푹 찍더니 우걱우걱 씹었다. 그녀는 지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희 자신이 원해서 허인식과 관계를 가진 게 아니었나? 왜 화를 내는 거지? 그 순간 여자는 울렁이던 속이 잠잠해졌다. 어지러웠던 머리도, 답답했던 명치가 편안해, 했다. 이율배반적인 몸뚱아리였다. 그녀는 단지 시끄럽고 화려해서 지희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자신보다 먼저 진급을 한 게 배알이 꼴렸을지도 모른다. 늘 기내식 자부심으로 가득해 열변을 늘어놓던 허인식이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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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끔찔끔 끄쩍끄적

(소설) 구름위의 만찬 2화

 

구름 위는 지상과는 180도 다르다. 기압이 80%까지 떨어지고, 산소농도가 낮아지니까 음식의 맛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음식 속 수분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재료들을 켜켜이 쌓아둔다. 그녀는 소고기를 마무리하고 최근 인기 메뉴인 포두부 보쌈을 만들기 시작했다. 얇은 포두부를 찜기에 쪄낸다. 증기가 모락모락 한 포두부가 여러 장 겹쳐있고, 보쌈용 야채도 두루마리처럼 돌돌 말려있다. 공기와 닿는 면적을 최대한 줄여서 수분이 증발하지 않도록 한다. 이것 역시 비빔밥과 마찬가지로 기내식 중에 소스를 뿌려 먹는 메뉴다. 그래야 물기가 덜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혼자가 되기 전 할머니와 엄마가 알려주었던 요리들을 기억 속에서 꺼냈다. 어떻게 해야 음식이 맛있어지는지,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것들을 넣어야 음식이 조화로워 지는지를 되뇌었다.

 

자신이 오늘 맡았던 음식들을 다시 한 번 체크한 그녀는 ‘디시업 방’으로 향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수공업으로 음식을 담는 시스템이다. 20여개의 긴 식탁에 7~8명이 서서 손으로 일일이 음식을 담는다. 이코노미 석, 비즈니스 석, 퍼스트클래스 석에 따라 용기가 다 다르고 양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 일은 기계가 할 수 없다. 온몸을 흰옷과 모자로 둘둘 감아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는 새하얀 직원들 사이로 으슬으슬한 찬 기운이 스민다. 벽조차 하얀 그 곳에 붙은 온도계는 ‘16도.’그녀의 작은 한숨에도 입김이 퍼진다. 공간 모서리 기둥에는 작은 모니터가 보인다. 실시간으로 달라지는 예약손님의 숫자가 껌뻑인다. 지희는 그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숫자가 바뀔 때마다 큰소리로 다른 이들에게 알렸다. 그녀는 지희가 말한 숫자를 상기시키며 차갑게 시린 연어를 뚝뚝 잘라 용기에 담았다. 지희는 아직 진급전인데도 마치 이미 이곳을 진두지휘하는 장수처럼 굴었다. 그녀는 훈제된 연어의 비릿한 냄새가 역겨웠지만 연어를 계속해서 담았다. 그녀는 디시업방이 싫으면서도 좋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같은 음식을 담기만 하면 되는 반복적인 일이라 좋았고, 아무런 의미 없이 담기는 사랑 없는 이 음식들이 혐오스러웠다. 그녀는 끝없이 올라가는 모니터 화면의 숫자를 멀리서 바라보며 지금 이 시간이 멈춰버리기를 바랐다. 2시가 되자 교대자들이 들어왔고, 차디찬 연어는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오늘 올꺼죠?

 

뭐? 라는 의미로 그녀는 지희의 화려한 핑크 쉐도우가 덮여진 큰 눈을 쳐다본다. 그녀의 표정 속엔 어딜? 이라는 질문이 들어있다.

 

-오늘 회식이잖아요. 매번 빠지고. 오늘은 꼭 와야 해요. 저 진급도 축하해 줘야죠.

 

5년째 일하고 있는 그녀보다 이제 막 3년차에 접어든 지희가 먼저 진급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억울해하지 않는다. 그저 이 조용하고 잠잠한 하루가 지속되길 바랄 뿐이다. 발버둥 쳐서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할지라도 고작 얼마 안 되는 차이에 더 행복해지지 않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저 주어진 하루 그리고 현실에 안주한다. 누군가를 책임지지도 않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지 않는 혼자의 삶. 미래를 희망과 꿈에 버무리지 않고 지금 이대로를 바꾸지 않는 것을 원한다. 여자는 요리를 사랑했고 요리를 나름 잘했지만 기내식 일을 하게 되면서 자신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노동 속에서 의미 없는 인스턴트식품을 만드는 일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고 원했던 요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게 무의미 하고 욕심일 뿐이라고 되뇌었다. 어차피 가질 수 없는 꿈이라고.

 

누군가는 오해하고, 미워하고, 착각하고, 욕할 수 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평가를 신경 쓸 필욘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필욘 없지만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싫은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도 회식에 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의심할 수도 있다. 그녀가 억울해 한다고, 더 노력한 다른 이를 축하해 줄줄 모른다고 지들 마음대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여자는 5년 동안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회식을 가기로 했다.

 

-진짜죠? 언니 온다고 했어요?

 

그녀는 짙은 쌍꺼풀에 속눈썹까지 붙여진 화려한 지희의 눈을 보며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늘 오후시간엔 집에서 목욕을 하거나 책을 읽던 여자의 오늘 오후는 달랐다. 5년 만에 처음 참석한 회식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말을 붙여준 지희의 진급을 축하하기 위해서 회식에 왔다. 허나 그녀는 그렇다고 해서 지희를 다른 직원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우연히 회사에서 말을 섞게 된 사람이라 생각할 뿐이다. 지희는 누구에게나 활기찼으며 싹싹했고 화려했으며 시끄러웠다. 여자에게 지희는 그저 말이 많은 과하게 엔돌핀을 소비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할머니와 엄마가 죽은 후 시끄러운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대화도 잘하지 않았으며 손님과의 대화도 싫어 대대손손 내려온 가게도 다 처분에 버렸다. 밥알이 익는 소리, 치익치익 무언가를 볶는 소리, 촤악- 튀겨지는 소리 외에 귓가로 들리는 모든 말들을 싫어했다. 그렇게 조용하게 일할 곳을 찾아 들어온 것이 하필 음식을 만든 회사였을 뿐이다. 회식은 회사 근처 곱창 집이었다. 회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이른 시간인 오후 3시. 하지만 이미 그녀가 오기 전 몇몇 회사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와우. 이게 누구야? 여긴 웬일이래?

-오늘 저 축하해준다고 왔어요.

 

정신 사납고 화려한 걸 싫어하는 그녀가 지희를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그녀의 대답을 늘 지희가 대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가장자리에 앉는다. 그리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금 안심한다.

 

선홍색 핏기가 도는 곱창이 앞에 있다. 그 곱창의 모습이 다소 흉물스러우나 다 익고 난 뒤에 입으로 들어오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노릇노릇함과 가득 차있는 곱. 구수하고 부드러운 곱이 알싸한 마늘과 함께 들어오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모든 것들이 한 대 섞인다.

 

-곱창을 기내식으로 먹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그러면 한국 사람만 먹을걸요.

 

그녀를 빼고 모두가 웃는다. 곱창이 익기 전 그로테스크한 모습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다. 첫째는 위생, 둘째가 창의성일 정도로 기내식은 위생이 관건이다. 절대로 곱창 같은 건 기내식이 될 수 없다. 기내식은 조리 직후 바로 배식이 되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기내식은 비행기 출발 4~6시간 전에 조리를 마친다. 따뜻한 음식의 경우 72시간 이내, 차가운 음식의 경우 48시간 이내 소진해야한다. 인스턴트식품 따위가 참 까탈스럽다. 이질적인 모습으로 태어난, 위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는 이 곱창은 절대로 하늘 위로 갈 수 없다. 곱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마치 거울을 바라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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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끔찔끔 끄쩍끄적

(소설) 구름위의 만찬 1화

 

 

투두둑- 빗방울이 어둡고 습한 지하창문을 때리며 굴러간다. 아직 해가 일지 않은 새벽, 그녀는 창문을 두드리는 물방울들 소리에 4:25분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을 뜬다. 불빛이라곤 반쯤 보이는 창문에서만 느낄 수 있는데, 그것마저 캄캄하고 무거운 하늘에 가려 저녁인지 아침인지 분간할 수 없다. 알람이 울릴 때 까지 똬리를 튼 뱀처럼 이불 속에서 밍기적거리다가 이내 알람이 울리자 몸을 일으킨다. 4:27분 아무런 의식이 없어 보이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화장실 불을 팟-하고 킨다. 4:40분 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와 로션을 바른 뒤 어젯밤 떠놓았던 자리끼 한잔을 벌컥벌컥 마신다. 4:45분 옷장 문을 연 여자는 몇 개 없는 옷 중 가장 앞에 있던 검정티셔츠와 검정바지를 집는다. 4:50분 집 밖으로 나온 여자는 4:56분 회사에 도착한다. 같은 시간 같은 행동의 무한반복인 일상. 그녀는 매일 일어나는 시간도 밖으로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도 늘 동일했다. 여자는 돈을 많이 벌기위한 노력도 무언가를 소유하고자하는 욕망도 없었기에 이 숙복적인 삶에 만족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용기가 없어서 그리고 먹기 위해서라는 허망하고 잔인한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녀의 회사는 집에서 오 분 거리였는데, 늘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너무나 편한 차림으로 회사에 갔다. 하지만 회사에 도착하면 그녀는 파란색 머리망을 머리에 쓰고 흰색 모자를 목까지 덮는 위생모를 착용했다. 집에서 입고 나온 검정 옷은 회색 철재 캐비닛에 박아두고 흰 옷, 흰 바지, 흰 장화, 흰 이중위생모로 온몸을 하얗게 하고 블랙홀같이 까맣고 텅 빈 혼몽한 눈만 보이게 복장을 갖췄다. 꼭 아바야에서 눈만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완전히 가린 중동 전통의상 니캅의 화이트 버전을 입은듯했다. 그 후 진공청소기로 그나마 남아있던 욕망덩어리 같은 작은 먼지들을 제거하고, 그래도 떨어지지 않은 건 먼지 제거 테이프로 온몸의 오물질을 없앴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손톱 사이사이를 세척하고 입구를 통과하기 전 강한 바람으로 먼지를 날려주는 에어샤워기를 통과해야 비로소 입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상태처럼 동공이 허공을 향해 있었지만 그 행동들은 몇 년간 반복한 동작인 듯 물 흐르듯 빠르게 진행됐다. 은빛 두꺼운 철문을 통과하면 식전에 먹는 단내 가득한 빵 향이 코를 자극한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향기를 지나 그녀는 자신이 담당하는 한식 핫 키친 파트로 들어선다.

 

- 어, 언니 왔어요?

 

그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지희는 그녀를 알은체하며 잘 보이지 않은 입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응- 이라는 개미목소리 보다 못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늘 그래왔던 일이라는 듯이 지희는 답도 없는 그녀에게 조잘거린다.

 

그녀가 하는 일은 비빔밥, 불고기, 영양쌈밥과 같은 메뉴를 만드는 일이다. 어쩌면 음식을 만드는 일보단 이코노미 석, 비즈니스 석, 퍼스트 클래스 석에 각각 맞는 팩과 그릇에 음식을 담아 기내식 트레이로 옮기는 일을 더 많이 할 때도 있다. 만드는 양은 그때그때 항공기 노선과 스케줄, 탑승인원에 따라 달라진다. 해당 노선에 제공되는 메뉴도 천차만별이라 그 메뉴에 맞춰 재료를 준비하고 조리를 시작한다. 조리실에는 한식과 일식, 중식, 양식 등 기내식 종류별로 해당 유명 셰프가 요리를 한다. 그녀는 셰프들을 도와 간단하고 반복적인 음식들을 만들고 담는다.

 

그녀가 애호박을 한 300개째 썰고 있을 때, 그녀 옆으로 한식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허인식 메인 셰프가 다가왔다. 깡마른 그녀와 대조적인 커다란 곰 같은 덩치에 억지로 입은 흰색 조리복이 힘들게 잠가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위에 손을 올리며 애호박에만 집중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비행기 타봤어?

 

기름지며 조악한 눈빛에 그 말투는 명백히 냉소적이며 적대적인 느낌이었다. 그녀는 작게 아뇨, 했다.

 

-역시. 그쪽은 비행기를 안타봐서 잘 모르겠지만, 비행기를 타면 혀가 달라져. 혀에 돋아있는 작은 돌기 있지? 그걸 미뢰라고 하는데, 이 미뢰는 딱 해수면 1000피트 이내 높이에서 까지 제 기능을 한다고. 그런데 우리가 타는 비행기는 보통 장거리 비행기 고도 3만 5000피트를 날아.

 

허인식은 삼만 오천 피트를 끊어서 강조하면서 한손을 들어 비행기처럼 물결 흉내를 냈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의 손을 눈으로 따라갔다.

 

-그렇게 기압이 떨어진 미뢰는 엉뚱멀뚱해지지. 뭐지? 이게 맛있는 건가? 이렇게.

 

허인식은 혀를 내밀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것은 콜레라 걸린 돼지와 흡사했다.

 

-거기에다가 건냉한 기내석 공기는, 냄새~ 이 달큰한 애호박 향도 못 맡게 할 정도로 코를 마비시켜. 그래서 기내에서 먹는 맥주나 와인도 잘 선택해야 하는 거야. 와인은 과일 맛이 나지 않는 드라이 와인으로 하는 게 좋고. 비행기에서 타닌은 배가되니 더 빨리 취하지. 비행기에서 와인 먹어봤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여전히 손은 애호박을 썰고 있다. 여자의 옆으로 볶은 애호박, 살짝 데친 콩나물, 버섯, 얇게 채 썬 무, 작은 쇠고기가 보인다. 기내식 비빔밥은 보통의 비빔밥과 다르다. 고슬고슬한 밥을 만들 필요도 없고, 나물과 고명을 색과의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할 필요도, 양념해둔 다진 쇠고기를 볶다가 고추장, 설탕, 물을 1:1:1로 넣어 부드럽게 볶아 약고추장을 만들 필요도 없다. 기내에선 짜서 먹는 고추장볶음을 사용하니까. 기내식은 비행기 출발 전에 여기 땅에서 만들어져 냉동상태로 기내로 운반되고 이를 데워서 그저 인스턴트식품처럼 손님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간편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도 기내식이 최고인양 말하는 허인식의 말투에 여자는 속이 쓰라렸다.

 

-아, 맞다. 비행기도 못타봤다고 했지.

 

웃음. 그것은 흡사 자신을 좀 바라봐 달라는 듯 화려한 색으로 자신을 포장한 독버섯 같은 미소였다. 비웃음이 분명함에도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늘 상 있는 일이라는 듯 한 얼굴,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미소도 화남도 비춰지지 않은 무표정에 담았다. 오히려 옆에 있던 지희의 표정이 홧홧하게 달아올라보였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제공된 음식은 간이 조금 짜고 양도 적은 거야.

 

허인식은 그 말을 하면서 여자의 말캉한 가슴을 만지듯이 그녀의 왼쪽 팔을 주물럭거렸다. 그녀는 일순간 표정이 굳어졌지만, 온몸이 감싸져 눈밖에 보이지 않는 흰옷에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진 걸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자신을 만지는 변태적인 행동보다 요리에 ‘요’자도 모르면서 저 자리에 주인 잘 만나 평생 호강을 누리는 옆집 개처럼 앉아있는 허인식이 싫었다. 허인식이 사라지자 그제야 멀리 떨어져 한마디도 안하던 지희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는 거예요. 화를 내요 화를! 아우 재수 없고 변태 같은 놈. 세상에 어느 여자가 저런 남자를 좋아하겠어요. 안 그래요?

 

가증스럽다는 눈으로 그녀는 지희를 본다. 하지만 그 눈빛을 금세 거두곤 그녀는 그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일을 계속했다. 약간의 두통과 메슥거림이 있는 듯 명치를 두어 번 두드리던 여자는 다시 애호박에 집중을 한다. 그녀는 남은 애호박을 다 썰곤 커다란 무쇠 솥에 잘근하게 다져진 소고기를 볶는다. 소고기의 풍미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콧구멍 양쪽으로 기분 좋은 향이 빨려 들어간다.

 

작가say: 사진은 베이글을 먹는 제 셀카입니다ㅋㅋㅋㅋㅋ 나름 베이글녀..(베이글을 먹는 여자의 줄임말..) 

              소설도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늘 읽어주시는 모든분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