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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커튼이 걷힌 뒤에

커튼이 걷힌 뒤에...

 

공연이 끝나고 우렁찬 박수소리가 넓은 홀을 메우며 높게 울려 퍼진다. 손에 손을 잡고 줄지어선 배우들은 밝게 미소하며 인사하고, 금빛 술장식이 달린 붉은 버튼이 촤르륵- 내려온다. 커튼 뒤로 배우들이 물러가고 관객들마저 떠난 조용한 공연장, 어디선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붉은 커튼 뒤, 적막이 내려앉은 무대 위에서 한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직 파릇하고 수줍은 소녀의 미성은 실바람에 몸을 맡긴 꽃잎처럼 청초하다. 부끄러운 듯 발그레한 볼에 살며시 말려 올라간 입꼬리는 순수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설레임 가득한 손짓으로 눈짓으로 몰입한 소녀의 모습.

 

무대 한켠에서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묵직하게 침체된다. 조금씩 힘이 들어간 손은 주먹을 쥐며 바르르- 떨린다. 소녀의 감정이, 목소리가, 멜로디가 고조될수록 그 연기를 감상하는 눈빛은 더욱 무거워진다. 마침내 소녀의 독무대가 끝나고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그 작고 여린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은 그녀의 여운의 쫓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한달, 두달, 석달, 넉달. 커튼이 내려오면 항상 소녀가 무대에 오른다.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때로는 한쌍, 때로는 두쌍, 온 마음을 쏟아 노래하고 열정적으로 연기하는 소녀와 지켜보는 시선은 한줌의 소통도 없이 몇년의 세월을 거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의 인사와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붉은 커튼이 무대 위로 드리워진다. 그리고 조용해진 무대 위로 올라온 소녀는 언제나처럼 커튼의 뒤에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 그녀에게 가장 아름다운 노래의 멜로디를 풀어낸다.

 

수줍음을 담아 잔잔하게 시작한 멜로디는 투명한 연못 위에 가느다란 실비가 사뿐사뿐 춤을 추듯이 고조되며 스며든다. 소녀의 얼굴에는 장밋빛 홍조가 피어나고 눈망울은 꿈을 꾸며 젖어든다. 손끝 하나하나 멜로디를 따라 취한 소녀는 무대 위의 커튼이 올라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바람을 타고 가벼이 날아올라 구름에 닿는 감각, 이 세상의 것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하고 향기로우며 녹아내릴 듯이 부드러운 속삭임, 공연장을 떠나지 않았던 관객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천여 명의 관객에 공연장에는 소녀의 노래만이 울린다.

 

소녀의 노래가 끝나고 그녀가 무대를 내려가려는 순간 하나의 박수소리가 터졌다. 소녀가 놀라서 걸음을 멈춘 순간 두 번째 박수가 시작되고, 곧 쏟아지는 박수소리에 공연장의 천장이 뚫어질 것 같다. 소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한명의 중년 사내와 부인이 다가온다.

 

“놀랄 것 없단다. 우리 딸.”

 

“다나, 이건 널 위한 박수란다.”

 

부인은 놀란 다나를 품에 안고 다독였으며, 이 극단의 단장이자 최고의 배우인 사내는 관객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박수와 환호가 잦아들고 사내는 벅찬 감정을 차분히 자제하며 입을 열었다.

 

“많이 놀라셨음에도 끝까지 들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아낌없이 보여주신 환호에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 앞에 이렇게 소개할 수 있어서 더없는 영광입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여기 저의 소중한 딸, 다나 브라이트입니다.”

 

부인은 품안의 딸을 부착하며 함께 무대 앞으로 나왔다. 아름다운 백금발이 무대 조명 아래 반짝이고, 짙은 벽안은 초점이 맞지 않는다. 피부는 여기저기 얽어서 거뭇거뭇하며, 움츠린 어깨 너머로 굽어있는 등에 양 다리는 길이가 맞지 않아 걸음이 비뚤하다.

 

오, 맙소사. 저 아이가 진정 저 두 사람의 딸이라니, 한탄과 한숨이 간간이 새어나온다. 소녀의 양 옆으로 서있는 그녀의 부모는 누가보아도 그림 같은 선남선녀다. 헌데 그런 두 사람의 딸이 곰보에 곱추이며 장님인 것이다. 다나의 고개가 아래로 쳐지고 눈시울이 붉어질 때에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말 아름다운 노래였습니다. 다나 브라이트양, 내 생애 그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는 들은 적이 없을 만큼 가히 천사의 노래였습니다.”

 

노년의 신사는 온화한 미소와 진심어린 감동을 전하며 박수를 쳤다. 그에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동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잔득 겁에 질린 소녀를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게 일어난 파도가 번져나가듯 어느새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름답습니다. 다나양.” “최고였소!” “정말 좋은 노래였어요.”

 

수많은 찬사가 소녀를 향해 다가간다. 소녀는 꿈만 같았다. 누군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아름답다는 말도 처음 들어보았다. 스스로의 모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예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노래도 멜로디도, 어머니의 것을 듣고 따라 부른 것이었기에 소녀에게 지금의 상황은 정말 꿈만 같았다.

 

“다나, 이리오렴. 같이 인사드리자구나.”

 

소녀는 주춤거리며 조심스레 부모의 손을 잡고 나란히 섰다. 소녀의 모친은 관객석을 향해 환하게 미소하며 말했다.

 

“다나, 웃으렴, 환하게. 넌 충분히 아름답단다.”

 

이른 아침 가장 먼저 맺힌 이슬처럼,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물방울로 채운 것 같은 벽안이 미소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청중을 향해 마음을 전한다. 노래가 아닌 인사로써...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쁨에 떨려나오는 목소리에 박수와 환호는 공연장을 가득 메우며 맴돌고 세 사람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 그에 답한다. 커튼이 걷히고 한 소녀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메아리가 되어 세상에 울려 퍼진 날이었다.

 

세상은 그녀의 멜로디에 감동하고 환호했다. 소녀는 아낌없는 찬사 속에서도 언제나 과거를 잊지 않았다. 곰보에 곱추인 모습 때문에 항상 커튼 뒤에서 남몰래 연습한 날들을 그리고 처음으로 박수와 환호를 받은 날을 평생간직하며 언제나 푸르른 벽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며 노래했다.

 

티 없이 순수한 벽안에 비친 세상처럼, 티 없이 맑은 멜로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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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새와 소년

구중궁궐(九重宮闕) 깊고 깊은 황궁의 한곳에는 황제의 보물이 있다.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오로지 황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곳, 유리로 된 천장과 나무와 꽃이 우거진 정원의 한가운데, 황금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새장, 두꺼운 철문 너머로 퍼져 나오는 아름다운 노래, 사람들은 무지개빛 깃털의 아름다운 새일 거라고 말한다.

 

화창한 어느 날, 열 살 남짓 어린 황자는 고운 수가 놓인 비단 공을 가지고 놀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공을 따라 커다란 철문 앞에 멈춘다. 공이 툭- 철문에 부딪치고, 공을 주워 돌아서려는 황자의 귀에 고운 노래 소리가 들린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홀릴 법하다.

 

어린 황자는 눈을 반짝이며 문을 밀었다. 지키는 이 하나 없는 무거운 철문이 어린 황자의 손길에 소리도 없이 열린다. 황자는 슬며시 벌어진 문틈으로 들어가고 그 등 뒤로 조용히 문이 닫히며 흔적을 감춘다. 장인이 만든 듯 섬세한 세공이 아름다운 새장에 새하얀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깃털이 흩날린다.

 

“새?”

 

살포시 내뱉어진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황자, 그 까맣고 순진한 눈동자에 비친 건 햇살 같은 소녀다. 얇고 하얀 옷자락이 나부끼는 가녀린 몸에 포근한 햇살 같은 날개가 달린 소녀, 황자와 눈이 마주치며 노래가 멈춘다. 커다란 새장 안을 빙글빙글 맴돌며 내려선다.

 

황자는 공을 잡은 양손을 새장 속의 소녀에게 뻗는다. 공이 떨어지고, 소녀는 창살 안으로 내밀어진 손을 맞잡는다. 작고 어린 손,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스한 타인의 온기, 소녀는 양손으로 작은 소년의 손을 감싸 쥐며 미소한다. 그리고 다시금 들려오는 노래...

 

* * *

 

20번째 생일을 앞둔 황자는 늦은 밤, 거처를 나와 발소리를 죽이며 걸음을 옮긴다. 달빛 아래 늘어진 그림자를 장막 삼아 가장 은밀한 곳으로, 두꺼운 철문을 지나 그녀가 있는 곳에 들어선다. 가닥가닥 달빛이 새어드는 새장으로 다가가며, 황자는 한껏 기쁨을 담아 그녀를 부른다.

 

“가가(佳歌).”

 

황자의 애정 어린 부름에 가가는 고운 미소와 청아한 목소리로 화답한다. 손을 맞잡고, 다정히 눈을 맞추고, 황자의 손이 부드러이 그녀의 뺨을 매만지며 다짐하고 약속한다.

 

“이곳에서 꺼내줄게. 내 황제가 되는 날, 그 옆자리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자유로이 노래하며 날 수 있게, 꼭 약속하마.”

 

가가의 손을 소중히 잡고 황자는 굳은 약속을 말한다. 그녀는 그 마음이 고마워 달빛이 부끄러울 만큼, 별빛이 무색할 만큼, 곱고 고운 정성을 담아 노래한다. 그와 함께 푸른 하늘 아래를 자유로이 누릴 그날을 꿈꾸며 희망을 담은 노래가 밤하늘에 닿을 마냥 울린다.

 

* * *

 

이른 아침부터 궐 안은 금빛과 붉은 빛의 물결이 일렁인다. 궁의 대전 앞에는 문무백관(文武百官)이 홍색과 청색의 예복을 갖추어 입고 열을 맞추어 서있다. 높은 단상에서는 태사가 양손으로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무릎을 꿇은 황태자의 머리에 씌운다.

 

황제가 된 젊은 청년이 몸을 곧게 세우며 일어서고, 문무백관은 입을 모아 소리를 높인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 만만세, 옥체보존 만수무강 하시옵소서- 한결같은 함성 속에서 황제와 황자의 눈빛이 맞부딪친다. 황자는 태연히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조아린다.

 

늦은 밤, 환하게 불을 밝힌 궁은 향긋한 술 냄새와 흥겨운 음악이 넘실대고 현란한 춤사위가 벌어진다. 술잔이 오가고 기름진 음식이 몇 번이고 채워지며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때에 달빛과 불빛을 받으며 황금빛 거대한 새장이 연회장으로 들어선다. 황제는 술잔을 내려놓고 왼손을 검대에 올리며 일어선다.

 

“자, 보시오! 저게 바로 그 요물이오. 나의 아비를 홀리고 어미를 죽게 만든 그 요물이 바로 저 새란 말이오! 고작 저 새 한 마리 때문에 현명한 황제가 사리분별을 잃고 무능한 황제로 추락한 것이오!”

 

황제는 검을 뽑고 새장으로 다가가고, 대신들은 입을 다문 채 그런 황제와 새장 속의 새를 외면한다. 한때는 영물이라 칭해지며 대를 이어 내려온 보물, 허나 전 황제의 과오(過誤)로 씻을 수 없는 불명예가 되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어미는 죽고 남아있는 새끼마저 죽을 위기이다.

 

가가는 분기탱천하여 다가오는 황제의 모습에 창백한 안색으로 벌벌 떨며 황자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그런 가가의 모습에 황제는 가소로운 웃음을 흘리며 참을 수 없는 노기로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는다.

 

“왜? 누굴 찾는 게냐? 오호라~ 그런 게냐? 고작 새 주제에 감히 누굴 찾는 게냔 말이다!”

 

- 채앵! 차라락.

 

날카로운 금속이 스치고, 새장의 잠금쇠가 풀려 떨어진다. 뒤이어 연회장의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고함과 발소리가 들리고, 곳곳에 멍이 들고 핏물이 앉은 몸으로 황자가 연회장으로 뛰어든다.

 

“멈추십시오. 형님! 크흑.”

 

뒤따라온 병사들이 황자를 붙잡아 무릎을 꿇리고, 가가는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몸을 움츠린다. 황자는 그런 가가의 모습을 한번 바라보고 황제를 올려다보며 간구(干求)한다.

 

“부디 목숨만, 그녀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제발, 목숨만은...”

 

“하! 지금 무어라했느냐? 그녀? 그녀라고?!”

 

황제는 뚜벅, 뚜벅 아우의 앞으로 걸어가 검 끝으로 새장 안을 가리킨다.

 

“네 눈에는 저것이 대체 어찌 보이는 게냐? 너 마저 홀린 게냐?!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저것이냔 말이다!”

 

아우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에서도, 형님을 올려다보는 황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한가닥 흘러내린다. 황자는 고개를 숙여 이마를 땅에 대고 다시 한 번 간절히 청한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폐하.”

 

황제는 그런 아우의 모습을 더없이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다 거칠게 몸을 돌려 새장으로 다가갔다. 이미 잠금쇠가 풀린 새장의 입구를 열어젖히고 가가를 끌어내 내동댕이친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날아 보거라. 그 날개로 어디 한번 날아서 도망가 보아라!”

 

가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황자를 바라본다. 황자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향해 끄덕인다. 가라고, 이곳에서 떠나라고, 저 멀리 안전한 곳으로 훨훨- 날아가라고, 애달픈 미소를 짓는다.

 

- 펄럭. 푸득.

 

가가는 생애 처음으로 새장이 아닌 넓고 넓은 하늘을 향해, 새까만 밤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천천히 조금씩 하늘로 떠오르며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제자리를 맴돈다. 아니, 차마 그를 두고 갈 수가 없어 제자리를 맴돈다.

 

“가! 가거라, 어서!”

 

황자는 목이 터져라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치고, 황제는 병사가 메고 있는 활과 화살을 뺏어 쏘아 올린다. 가가는 매섭게 날아오는 화살에 놀라며 푸득거리다 마지못해 멀리 날개짓을 한다. 멀리- 멀리- 어두운 밤하늘을 크고 아름다운 한 마리의 새가 날아간다.

 

달빛에 반짝이는 눈물을 떨구며, 애달프고 구슬픈 노래를 울리며 그렇게 날아간다.

 

* * *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계절이 바뀌고 강산이 바뀌고, 황자가 별궁에 유폐된 지 50년이 되어가는 해. 고즈넉한 늦가을 밤, 풀벌레 우는 소리를 벗 삼아 마음을 달래는 황자의 귀에 익숙한 노래가 흘러든다. 황자의 눈에 아련함이 떠오르고 입가에 눈물 젖은 미소가 어린다.

 

“가가.”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는 사뿐히 내려와 황자의 품에 안긴다. 어린 소년이, 젊은 청년이, 이제 노년이 된 그는 눈을 감으며 품안의 그녀를 살며시 감싸 안는다. 그의 귓가에 은은한 노래가 스며들고 그 노래는 밤이 새도록 이어지다 아침 동이 틀 때에 멈춘다.

 

이른 아침, 황자를 깨우러 온 시동은 별궁 문턱을 넘자마자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별궁의 입구에, 나지막한 계단에, 노년의 황자가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고 기둥에 기대어 앉아있어서, 그의 무릎에 생전 처음 보는 크고 아름다운 새가 엎드려있어서, 그 새하얀 깃털에 반사되는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그 광경이 너무도 평온하고 황홀하여 시동은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며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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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5. 세레나데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05. 세레나데

 

어둑한 아파트 정문을 지나 우편함에 있는 뭉치를 꺼내어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시간은 12시에 가까워지고, 몸은 피곤하다. 5층에 내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컴컴한 집에 인기척 하나 없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이 고요에 쓴웃음을 지으며 거실 불을 켜고 테이블 위에 우편물들을 툭- 던져두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며 반겨주던 잔소리가 오늘 따라 유난히 그립다. 그땐 잔소리가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막상 듣지 못하게 되니 그 허전함이 채워지질 않는다. 어째서 당신은 내게 잔소리만 가득한 걸까? 난 왜 당신 입에서 그런 잔소리만 나오게 만들었을까? 방으로 들어가며 한숨을 쉬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테이블 앞에 주저앉았다. 무심히 던져둔 우편물을 집어 들어 하나씩 뜯었다. 카드 명세서, 공과금 영수증, 전화요금 명세서, 각종 영수증과 명세서 끝에 보라색 봉투 하나가 남았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확인하고 놀란 것도 잠시, 눈물이 핑 돌았다.

 

발신인 : 이혜령

수신인 : 박정훈

 

이름 두 개를 한참 들여다보다 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냈다.

 

마법의 질문

마지막으로 혼자 노래를 부른 건 언제인가요?

다른 사람에게 불러준 적은요?

 

이건 또 뭘까?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래?”

 

노래라면 당신이 더 좋아했다.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음정도 박자도 못 맞추는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내 노래 실력을 알기에 가족들 앞에서도 부른 적이 없었다. 혹여나 내가 부른 노래에 당신이 웃기라도 할까봐 창피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내가 딱 한번, 당신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매일같이 듣고 따라하며, 몇 달을 연습하고, 노래방에서 99점을 받은 그날, 당신 집 앞으로 찾아가 목청을 뽑았다. 동네 주민들은 창문을 열어젖히고 구경하며 박수까지 쳐주었다.

 

그날 이후로 당신은 종종 같이 듣자고, 같이 부르자고, 나를 졸랐지만, 난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내가 부르는 것보다 당신이 부르는 걸 보는 게 좋았고, 당신이 부르는 걸 듣는 게 좋았다. 이제야 떠오른다. 잔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노래 소리가 떠오른다. 왜 잊고 있었을까?

 

당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멜로디를, 당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의 가사를, 노래를 부르던 당신의 미소를, 왜 여태까지 잊고서 당신이 노래가 아닌 잔소리를 하게 만들었을까. 맘이 아프다. 후회스럽다. 한번이라도 같이 불러 볼 걸 그랬다. 이제는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었구나.

 

- 툭, 투둑,

 

종이 위로 투명한 얼룩이 번진다. 얼룩을 손으로 닦아내고 두리번거리며 펜을 찾았다. 그러다 달력에서 눈이 멈췄다. 이달의 마지막 날에 표시된 빨간 동그라미 하나. 당신 생일이다. 당신 없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당신 생일이다. 그날까지 아직 14개의 숫자가 남아 있었다.

 

* * *

 

이른 아침,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우편함에 보라색 봉투를 넣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솜털마냥 둥실둥실 흘러간다. 한껏 숨을 들이쉬고, 시원하게 내쉬었다.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화창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떠나고,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온 상쾌한 바람이 우편함 덮개를 흔들었다. 그 흔들거림에 꽂혀있는 봉투가 빠지며 흘러나온다. 화사한 보라색 봉투가 벌어지고, 밖으로 나온 종이에 이슬을 머금은 이른 아침의 옅은 햇살이 닿아 반짝인다.

 

- 오늘, 당신 생일날.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위해 부를 겁니다.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이른 아침의 서늘한 바람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밝아지는 햇살 속에서 아침 이슬처럼 스며들며 사라졌다.

 

* * *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름다운 향기가 코에 닿는다. 오랜만에 꽃집에 들렀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당신이 좋아하는 꽃을 찾으니, 점원이 곱게 꽃다발을 만들어준다. 그 고운 꽃다발을 받아들고 기분 좋게 가게를 나왔다. 얼마 만에 사본 꽃다발인지 모르겠다. 새삼스레 머쓱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차문을 열어 당신만큼이나 고운 꽃다발을 조수석에 고이 놓고, 운전대를 잡았다. 고속도로를 들어서 가장 마지막 휴게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1시간을 더 달려 당신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곧 퇴직하면 그 돈으로 근처에 이사를 오는 게 좋을 듯싶다.

 

차에서 내려 양손으로 고이 꽃다발을 들고 천천히 걸어 햇볕이 내려쬐는 당신 자리에 도착했다. 당신 이름이 새겨진 묘비(墓碑) 앞에 조심스레 새하얀 데이지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명랑하고 순수한, 당신을 닮은 이 꽃을 참 좋아했다. 화려하지 않아서, 그럼에도 밝아서 좋다고 했다.

 

주변의 잡초를 좀 뽑고, 당신 앞에 주저앉았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며, 쑥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의 29년 만인데도 마음이 기억하는 노래는 그날처럼 술술 흘러나온다.

 

그동안 부르지 못한 만큼, 불러주고 싶은 만큼, 원 없이 몇 번이고 불렀다. 하늘을 보며, 구름을 보며, 어느새 사라진 쑥스러움에 당신을 마주보며, 한참이나 불렀다. 부르고 부를수록 가슴이 시원하고, 맘이 편해졌다. 당신이 그리워서, 당신에게 미안해서, 울면 어쩌나 싶었는데 오히려 미소가 그려졌다.

 

이제는 당신이 부르는 걸 들을 수 없다. 당신이 부르는 걸 볼 수 없다.

 

앞으로는 내가 당신에게 불러 줄게.

 

당신이 좋아하는 노래, 즐겨 듣던 노래, 즐겨 부르던 노래, 이제는 내가 불러줄게. 하나씩 하나씩 연습해서 당신이 들을 수 있게 내가 부를게. 음정이 안 맞고 박자가 안 맞아도, 나중에 당신 만나러 가서 구박을 듣더라도, 같이 부르지 못한 만큼 내가 부를게. 못 부르더라도 들어줘.

 

내가 당신을 위해 부르는 노래를, 세레나데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부르다 고개를 돌리니 하늘이 발갛게 물들고 있었다. 붉어지는 하늘과 금빛으로 변한 구름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노을이라는 게 이토록이나 아름다웠던가 싶다.

 

“노을 참 곱다. 그치? 여보.”

 

소슬소슬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풀잎이 자잘한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여보. 나 거기 가면, 우리 그때는 같이 부릅시다. 열심히 연습해서 갈게.”

 

풀잎에 바람이 스치는 가녀린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마치 당신의 흥얼거림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들으니 정말 당신 목소리 같아서 그리움에 미소가 지어진다. 기다려줘. 여보. 금방 갈게.

 

마법의 질문

마지막으로 혼자 노래를 부른 건 언제인가요?

다른 사람에게 불러준 적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