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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6. 정신과 신체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06. 정신과 신체

 

기분이 엉망이다. 언제는 연상이라서 좋다던 놈이 이제는 연하가 좋단다. 어째 이 날씨에 아이스티가 시키고 싶더라니. 어이없음에 얼굴에 냅다 냉수를 끼얹어주고 나왔다. 그래도 분이 풀리질 않아 추운 줄도 모르고 걸었다. 주변에는 한창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외쳐대며 캐럴이 흘러나온다.

 

“젠장맞을 화이트 크리스마스!”

 

홧김에 중얼거리며 못 들은 척, 못 본 척 스킬을 최상으로 발휘하며 집까지 왔다. 입구의 우편함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가다 걸음을 멈췄다. 웬일로 내 우편함에 우편물 하나가 들어있다. 대부분의 명세서는 문자로 받고, 나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도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우편함으로 다가갔다.

 

“누구지?”

 

봉투를 꺼냈다. 고운 보라색 봉투 뒷면에는 발신자 없이 수신자만 적혀있다. 상당히 수상하다. 봉투를 노려보며 고민하고 있는 귓가에 승강기 소리가 들렸다.

 

- 띵! 스륵.

 

문이 열린 승강기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곧바로 올라타서 7층을 눌렀다.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승강기가 움직이고, 몇 초의 시간이 지나 7층에 도착했다. 복도로 내려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며, 신발을 벗음과 동시에 손에 든 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냈다.

 

마법의 질문

당신의 수명이 90세이고, 당신이 30세가 되는 해에 정신이나 신체 중 하나를

향후 60년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건가요?

 

눈살을 찌푸리며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건 또 무슨 유치찬란한 질문일까? 그렇잖아도 나이 먹는 게 서러운 판에 무슨 이딴 장난질이 다 있나.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도 아니고, 홧김에 종이를 구겨서 집어던졌다. 데굴데굴 구른 종이는 서랍장에 부딪치며 멈추었다.

 

“아. 열 받아!”

 

이럴 때는 개운하게 씻고, 푹 자는 게 최고다! 따뜻한 물에 거품 팍팍 내서 노곤하게 씻고 나면, 시원한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낸다. 이 손에 잡히는 차가운 감촉이란!

 

- 딱! 치이익-.

 

“캬아-.”

 

속이 다 시원하다!

 

“너보다 어린 여자 만나서 너도 한번 된통 차여봐라 나쁜 놈아!”

 

한 모금 더 넘기고, 시원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구겨져서 나뒹굴고 있는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눈을 찡그리고 노려보았다. 내 수명이 90세라고 할 때, 30살인 채로 60년을 살 수 있다면, 뭘 택하겠냐고? 대체 어떤 인간이 이딴 게 궁금해서 이런 걸 보낸 걸까 싶다.

 

맥주를 넘기며 종이를 주워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대충 펼친 종이는 구겨진 흔적이 남아서 모양새가 말이 아니었다. 연상이라서 싶다는 소리를 듣고, 며칠만 지나면 앞자리가 바뀌는 나에게, 그러고 보니, 며칠만 지나면 이 질문이 무용지물이 될 상황이다.

 

- 피식.

 

“왜 하필 30이야. 차라리 20살로 돌려주든가.”

 

회춘이라도 해보게 말이다. 풋풋하게 캠퍼스 커플도 해보고, 20대에 미처 못 해본 이런저런 것도 좀 해보게. 왜 하필 계란 한판이라는 30살 인가. 인심 쓰는 김에 좀 더 쓰고 20살로 돌려주지.

 

“쪼잔해.”

 

그래도 선택을 한다면, 당연히 신체다. 이왕 오래 살 거라면, 건장하게 살아야지. 게다가 늙는 게 좋은 여자가 어디 있을까? 주름, 검버섯, 기미. 이런 것에서 탈출하려면 당연히 신체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하잖아.”

 

정신과 육체를 비유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또한 나, 개인적으로 신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을 물이라고 할 때, 신체를 그릇이라고 보는 것이다. 90세의 신체에 30살의 정신연령이라면, 그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 90세 할머니가 30살 아가씨처럼 행동하고, 말하면 그건 너무 어색할 것 같다.

 

차라리 30세의 신체에, 아니.

 

“30살의 외형이 유지되면, 정신도 그에 따를 가능성이 크지 않나?”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은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왜 입고 있는 옷에 따라서 행동이나 기분이 달라지기도 하지 않은가. 물론 예외인 사람도 있지만, 그건 드문 경우일 테다. 사람이란, 인간이란 생물은 자신의 지위와 사회적 위치, 지식과 배경 같은 것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생물이니까.

 

“나도 어쩔 수 없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고.”

 

30살의 외모를 지니면 그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90세 할머니 같은 말투를 쓰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흠, 그럼 90세 할머니의 외모로 30살의 정신을 유지한다고 해도, 그 말투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할머니 티가 나게 되는 건가? 슬슬 헷갈리려 한다.

 

“에이-! 그냥 안 늙는 게 좋은 거지. 뭐. 치매 걸릴 일도 없고! 그럼.”

 

책상으로 다가가 어느새 비어버린 맥주 캔을 내려놓고, 펜을 잡았다.

 

* * *

 

어슴푸레한 방안에 미미한 맥주 냄새가 풍기고, 봉투에 넣지도 않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구겨진 종이에 연노란 달빛이 닿았다. 허공으로 띄워진 종이는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지, 소리 없이 쫙쫙- 펴지며 구김이 사라졌다. 홧김에, 술김에 적은 글씨는 미묘하게 삐딱한 모양새를 뽐낸다.

 

- 신체. 늙고 싶지 않아.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투명한 달빛 한줄기가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차가운 달빛 속에서 잘게 부서지며 사라졌다.

 

* * *

 

후회한다. 내가 그때 그 질문에 대답한 걸, 저주하고, 후회하고, 그럼에도 감사한다.

 

“왜 울어?”

 

갑자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에게 걱정스레 묻는 당신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기에, 평생을 함께하자는 당신의 말에 그러겠다고, 그러고 싶다고, 또는 그럴 수 없다고, 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수상한 질문에 대답을 했을까?

차라리 아무런 대답도 하지 말 것을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람은, 인간은, 그에 맞게 나이를 먹으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게 신체이건 정신이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고,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 * *

 

남자는 울적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며칠째 그녀가 연락이 되질 않았다.

 

- 찰칵. 스륵.

 

문을 여는 움직임에 바닥에서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그가 고개를 내려 보니 작은 편지 봉투하나가 문에 쓸려 있었다. 분홍빛이 도는 옅은 보라색의 봉투였다. 남자는 갸웃거리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봉투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거실의 소파에 대충 가방과 외투를 벗어두고, 털썩- 앉으며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서 나온 건, 고이 접힌 편지지와 누군가의 신분증, 그녀의 신분증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남자는 신분증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새하얀 편지지를 펼쳤다. 동글동글한 그녀의 글씨를 하나하나 읽었다.

 

「사랑하는 당신께.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저 스치는 인연이어도 괜찮다 생각했습니다.

곁에서 바라보며, 스치는 인연이기를 바라면서도,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저 마음에 담아두고, 마음에 품고 그리 지내려했습니다.

욕심내지 않으려 일부러 모르는 척, 태연한 척 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마음을 들킬까봐, 당신에게 짐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내 노력이 소용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당신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고백에 함께하자는 말에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왜 좀 더 일찍 당신을 만나지 못했을까, 왜 이제야 만났을까, 알 수 없는 원망도 해봤습니다.

 

당신이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도 털어놓기 겁나지만, 그래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다고, 불치병 같은 게 아닙니다. 내 수명이 다한 겁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겁니다.

올해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내 생의 마지막에 당신을 만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사랑 받아서 정말 행복합니다.

당신을 만나 게 해준 나의 운명에 감사합니다.

 

당신과의 행복한 추억에 난 웃으며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울지 말아요.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이 행복하길 바랄게요.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합니다.

 

당신에게 행복한 추억이 되고픈 이가.」

 

남자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 동봉되어 있던 신분증을 집어 들었다. 201?년 출생을 나타내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로부터 정확하게 90년 전, 그녀의 나이가 올해로 90세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다. 장난이길 바랐다.

 

“하, 하?!”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짓는 남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벗어둔 외투를 챙겨 다급히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그녀의 집 앞에서 한참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경비실에 연락해 마스터키로 열고 들어갔다.

 

늦은 밤의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방에 그녀는 고요히 누워 있었다. 마치 잠든 것 같은 그 평안한 모습에 남자는 안도하며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몇 번이나 나직하고 다정하게 불렀다.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서있는 경비가 다가와 말리지 않았다면 언제고 그랬을 것이다.

 

경비의 신고로 그녀의 시신은 한 병원의 영안실로 옮겨졌고, 처음 보는 그녀의 친척이 와서 그녀의 신원을 확인했다. 검시의도 장의사도 그녀의 나이와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며 껄끄러운 심사를 애써 숨기는 눈치였다. 병원에 마련된 간소한 장례식장에서 남자는 한참이나 그녀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 * *

 

해가 바뀌고, 남자는 파란 장미 꽃다발을 손에 들고 그녀가 잠든 곳을 찾았다. 하늘은 푸른 장미만큼이나 아름다웠고, 구름은 안개꽃만큼이나 맑았다. 남자는 그녀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비석 앞에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살랑이는 바람에 장미향이 실려 퍼졌다.

 

남자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행복한 꿈을 꾸는 달빛 같은 미소를 떠올렸다.

 

“다행입니다. 당신이 웃으며 떠날 수 있어서, 마지막에 행복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아직은 슬며시 고이는 눈물까지 어쩔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밝게 웃었다. 그녀가 미안해하지 않게, 맘 아프지 않게, 짐이 아닌 행복한 추억과 사랑이었다는 마음이 전해지게, 그렇게 웃었다.

마법의 질문

당신의 수명이 90세이고, 당신이 30세가 되는 해에 정신이나 신체 중 하나를

향후 60년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