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어보기

짧은 글 모음집:奇

시궁창 같은 현실, 꿈같은 허상

가파른 오르막길에 자리한 달동네, 그 곳의 가장 꼭대기 계단 옆이 우리 집이었다. 해도 뜨기 전의 이른 새벽이 되면 어머니는 이미 집을 나서고 계신다. 우유배달, 신문배달, 낮에는 식당 설거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신다. 나와 여동생의 학비 그리고 우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악착같이 일을 하셨다.

 

어머니가 어떻게 벌어온 돈인지 알기에 나와 여동생은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성적도 좋았고 학교에서의 평판도 좋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학교를 다닐 수 있을지 항상 불안해야했다. 잊을 만하면 술냄새와 담배에 찌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나서 어머니가 숨겨둔 돈뭉치를 찾아내는 그 인간 때문에…

 

그날은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던 중이었다.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뛰어서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다시 한 번 비명이 들렸다. 급히 뛰어가는 눈앞에 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와 마주쳤다. 그 인간의 눈동자가 심히 떨리고 있었다.

 

손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팔꿈치 아래까지 시뻘건 피가 흥건했다. 그대로 도망치는 그 인간을 쫓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쓰러진 여동생과 어머니, 바닥에 고여 있는 피, 급히 119를 불렀지만 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난 목격자나 피해자가 아닌 용의자가 되었다.

 

내가 아니라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죽인 건 내가 아니라 그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하지만 그 인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잡히지를 않았고, 목격자도 없었다. 게다가 경찰은 사건을 빨리 끝내고 싶은 눈치였다. 끝까지 부인했지만 소용없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외쳐도 소용없었다. 돈 없고 힘없는 게 죄였다.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나날은 희망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잘 뿐이다. 순식간에 타버리고 시커멓게 남은 재처럼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그렇게 숨만 쉬며 살았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하지만, 억울하다. 너무도!

 

“이봐, 편지다.”

 

“편지?”

 

교도관이 내미는 편지를 받아서 뜯었다. 새하얀 편지지에는 <D프로젝트 : 초대장> 이라는 말이 제일 먼저 적혀있었다. 초대장이라니, 잘못 온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적힌 이름은 분명 내 이름이었다. 죄수번호와 이름은 분명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갈 수도 없는 나를 말이다.

 

“대체 D프로젝트가 뭐야?”

 

퉁명스레 중얼거려도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다. 편지지에도 자세한 내용 없이 그저 ‘당신에게 두 번째 인생을 드립니다.’라고만 되어있을 뿐이다. 두 번째 인생,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내 결백을 밝혀서 여기서 나가 새출발을 하게 해주겠다는 건지, 아니면…모르겠다. 다른 건 생각나지 않는다.

 

“두 번째 인생…”

 

가능할까? 그런 게? 나에게도 아직 기회라는 희망이 있는 걸까?

 

초대장에 서명을 하고 편지에 지명되어있는 교도관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불안하고 들뜬 맘으로 기다렸다. 누군가 날 찾아올까,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얼마나 걸릴까, 새출발을 하게 된다면 뭘 할까, 공부를 다시 할 수 있을까, 수십, 수백, 수천, 수만의 생각이 돌풍이 되어 휘몰아친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일…일주일, 열흘, 보름이 지나 한 달이 되었을 즈음. 어쩌면 그저 누군가의 장난이거나 헛된 기대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깊어졌다. 기대와 희망은 불신으로 얼룩져버렸다. 역시 나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새겼다.

 

이미 진작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고약한 장난에 울분이 생기는 걸 보면 그래도 미련이 남았던가 보다. 쓴물이 입 안 가득 퍼지는 기분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사형 집행날짜가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 문득 나를 위해 슬퍼해줄 사람은 없지만, 먼저 떠난 어머니와 여동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눈이 가려진 채 몇 년을 보낸 철창 안에서 나왔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울리는 복도를 지나고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이대로 죽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아득한 정신으로 이제 곧 어머니와 여동생을 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오빠. 오빠-!”

 

어딘가 앙칼진 반가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떴다? 죽지 않은 건가?’

 

눈앞에는 새초롬한 표정의 여동생이 교복을 입고서 팔짱을 끼고 눈을 흘기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더 자면 지각이거든~?”

 

내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덩달아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동생을 빤히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혼자 사용하기에 적당한 크기의 방, 발치에는 깔끔한 옷장과 서랍장에 전신거울이 있고, 여동생이 서있는 뒤로는 책장과 책상, 방문이 보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앉아있는 푹신한 침대!

 

침대의 왼편은 넓은 창문이 있고 옅은 하늘색의 얇은 커튼 너머로 햇살이 눈부시게 비춰든다.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아니면 여기가 천국인 건 아닐까?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고 어머니를 찾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서 부엌을 들여다본 순간 몸이 굳었다. 어머니가 단정한 차림으로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오빠, 왜 그래? 어디 아파?”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여동생의 호들갑에 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뒤돌아보았고, 등 뒤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냐? 무슨 일이야?”

 

“아빠, 오빠가 아까부터 이상해. 꼭 넋 나간 사람 같아.”

 

천천히 고개를 돌린 시야에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 나를 그 지옥으로 떨어뜨린 사람, 나의 아버지.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손에는 아침신문이 들려있고, 안경을 낀 얼굴은 언제나 도박과 술, 담배에 찌든 모습이 아니었다. 너그럽고 온화한, 전혀 다른 분위기라 당혹스러웠다.

 

“괜찮은 거냐?”

 

혀가, 입술이 제대로 움직여주지를 않는다. 겨우 떠올린 대답을 간신히 내뱉었다.

 

“괘, 괜찮아요. 그냥, 그…악몽을 꿨어요.”

 

황급히 계단을 뛰어올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뒤쫓아 온 여동생의 재촉에 얼떨떨한 상태로 씻고 나와서 교복을 입고 가방을 챙겼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여동생과 나란히 집을 나왔다. 작은 마당이 있는 붉은 벽돌 담장의 2층 가정주택, 주변의 집들도 비슷하게 생겼다.

 

“오빠, 늦었어. 뛰어.”

 

“어? 응.”

 

상쾌하다. 보고 싶었던 여동생과 나란히 달리는 아침이 너무도 상쾌하다.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신나게 달리며 웃는 나를 보고 여동생은 다시 한 번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교문이 닫히기 직전,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교실에 들어서자 다들 익숙하게 인사를 건네며 반겨주었다.

 

꿈꿔왔던, 바라고 바래왔던 하루하루를 보내며 생각했다. 이게 나의 인생이라고, 이게 바로 나의 두 번째 인생이라고, 그 이전의 것은 악몽이었다고, 두 번 다시 그런 인생을 살지는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행복하고 즐겁게 열심히 살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 * *

 

투명한 뚜껑이 덮여있는 캡슐의 안에 한 남성이 누워있다. 캡슐 옆에는 작은 모니터와 입력장치가 연결되어 있다. 하얀 가운을 입은 한 여성이 긴장한 티가 팍팍 나는 남성 인턴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캡슐 옆면에 있는 명패는 안에 있는 사람의 신상정보에요. 이 사람은…누명을 쓴 사형수였군요.”

 

여자의 말에 남자의 입모양이 아-하고 작게 움직인다. 그때 삑- 소리가 나며 캡슐과 연결된 모니터가 깜빡거린다. 여자와 남자는 작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까만 화면에 녹색의 글자가 나타났다.

 

[ O.K ]

 

짧지만 확실한 의사전달, 여자가 설명하지 않아도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가상세계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걸 말이다. 하긴,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느니, 바라마지 않던 이상향에서 한번의 인생을 더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다.

 

비록 그 이상향이 허상일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사실을 모른다면 그에게는 진실이 되지 않을까?

글 이어보기

짧은 글 모음집:雜

백일몽(白日夢)

백일몽(白日夢)

 

새파란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 그 위로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간다.

 

“와- 예쁘다.”

 

은으로 가루를 만들어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모래를 밟으며 끈적임 없이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살며시 손을 잡아오는 그, 물빛 눈동자가 반달을 그리며 다정하게 웃는다.

 

“좀 더 가까이 가볼까?”

 

“응!”

 

그와 나란히 손을 잡고 파도가 밀려오는 물가로 다가갔다. 참방- 참방- 발끝을 간질이며 적셔오는 물이 차다. 기분 좋은 감각에 작게 웃으며 살며시 밀려오는 파도에 발을 넣었다.

 

쏴아-

 

그림 같은 풍경과 꿈결 같은 여유로움, 살포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뽀얀 파도와 푸른 바다, 아름다운 모래밭, 따뜻한 햇살, 부드럽게 머리를 어루만져주는 손길이 나른하다.

 

“수박 먹을까?”

 

“수박?”

 

수박이라는 말에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놔두었는지 10걸음 정도 뒤에 커다란 파라솔과 테이블 의자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투명하고 예쁜 그릇에 얼음과 수박화채가 가득하다.

 

“맛있겠다.”

 

어느새 의자에 앉아서 얼음과 수박을 한숟가락 가득 떠 입안에 넣는다. 아삭아삭…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박의 달달한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싱긋- 웃고 있는 그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나온다

 

“냐옹~”

 

“에?”

 

“냐아~~”

 

“뭐?”

 

그의 눈동자가 묘하게 휘어지며 손을 뻗어 내 볼을 톡- 건드린다.

 

축축한 등, 체온으로 뜨뜻해진 마룻바닥 그리고 내려다보는 노란눈동자와 말랑한 솜방망이.

 

“아…꿈이었어?”

 

“냐~앙.”

 

“하아…”

 

늘어지게 한숨을 내뱉고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마당에 내려쬐는 햇살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엄청난 무더위에 고장 난 에어컨을 원망하며 부채를 집었다. 부채바람에 나비가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덥다…더워.”

 

흐물흐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꿈에서 본 파라다이스가 겹쳐진다.

 

끈적임 없이 상쾌한 바닷바람, 뜨겁지 않은 태양, 차가운 파도.

그리고 아름다운 그…막상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차라리 그게 현실이면 좋겠다.”

 

무한한 아쉬움을 달래며 간신히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얼음 한가득, 빨간 수박 알맹이 한가득, 달달한 설탕 조금.

입안에 넣고 아삭아삭 씹으면 시원하고 달다.

 

“그래도 이건 좋네. 흐응~”

 

햇볕이 물러나고 그늘진 마룻바닥에 앉아 해가 저무는 걸 바라보며 수박화채로 더위를 달랬다.

내일이면 수리기사가 와서 에어컨을 고쳐줄 테다. 그러니까 오늘은 수박화채로 참자!

글 이어보기

유리병 편지

메리 고 라운드

 

 

 

 

 

    미영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그녀가 전동 휠체어에 앉아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유영하듯 미끄러져 나아가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찬란한 미소를 사람들은 경이로운 듯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가 내 앞에 멈춰 서니 왠지 모를 우쭐함까지 느껴졌다. 미영은 만나자마자 예뻐졌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제법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듣는 칭찬이 싫지 않아 미소가 절로 나왔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그녀가 잘 안다는 파스타 집으로 향했다. 길 양 옆에 늘어선 나무들이 내뿜는 초록빛이 내 안에 남아 있던 옅은 살얼음마저 녹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이 봄의 첫 날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소박한 식사로 온모밀을 주문했다. 테이블 위 작은 화분에는 흰 소국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딸 아이가 스파게티를 좋아해 이곳에 자주 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늘 해 오던 일상의 의식儀式인 듯 국화 앞에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공기 정화 기능이 있대, 그녀는 한동안 먼지와 매연으로 더럽혀진 콧속을 씻어냈다. 내 친구와 그녀의 딸아이가 마주 보고 앉아 언제까지고 작은 화분 앞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상상을 하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미영이 아이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다. 나는 친구의 딸아이가 꽤 궁금했지만,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그녀의 집을 방문할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미영이 서운해 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밝고 명랑하며 아이 같은 순진함이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지만, 그런 성격 때문에 오랫동안 공들여 이야기해보지 않으면 좀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거듭되는 유산에도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가지려 애썼던 것, 그래서 홀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 병원 저 병원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하고 몸에 좋은 음식들만 먹으며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왔던 것, 하지만 그녀보다 더욱 순진했던 남편은 세 번의 유산이 서른 살 여자에게 준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내의 장애만을 탓하며 밖으로만 돌았다는 것 등등…. 어느 날 이혼녀로 나타난 미영은 그런 것들을 마치 진부하고 오래 된 전설처럼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나마 이혼 전에 아이를 입양하는 데 동의해준 건 정말 다행이라고, 하지만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으니 남편이 좀 더 믿음직한 가장 역할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자기의 오산이었다고, 그녀는 단단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영의 밝음은 아마도 선천적인 생명력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고 오늘은 우리 집에 한 번 가 보자.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어차피 오래도록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나는 그녀를 따라나섰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다양한 크기의 알록달록한 알이었다. 예쁘다, 개미만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미영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그녀는 아이도 못 낳는 병신에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며 폭언을 퍼붓는 시어머니와 그 뒤로 숨어 있던 맥 빠진 남편에게 악착같이 위자료를 받아내 이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 사람, 아마 무지 놀랐을 거야. 

 

  쓸쓸히 웃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도 이 친구가 악을 쓰는 모습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사실 아이 가져보겠답시고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아내를 뒤로 하고 허구한 날 여기저기 팁이나 꽂아주던 사람에게 그 정도밖에 받아내지 못한 것이 억울한 일이었다. 남편과 함께였던 시절에는 아이를 낳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느라 다른 건 거의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의 미영은 아는 사람의 공방에서 알공예를 가르치며 바쁘게 생활해 나간다고 했다. 사회 시간에 부도를 펼쳐 놓고 ㅇ이나 ㅁ 같은 글자마다 샤프로 까만 칠을 하던 내가 선생님에게 걸려 복도에서 벌을 서고 있으면 이내 끌려나오던 어린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넌 왜 걸렸어, 라 물으면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펼치며 자기가 그린 그림을 내게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녀가 선물이라며 크고 둥그런 조명을 건넸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이런 동글동글한 것들이 바퀴가 되어 그녀의 삶을 멈추지 않고 굴러가게 해 준 거구나. 어린 날, 나는 미영이 나중에 커서 유명한 화가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이어보기

Log-Zine

일 합시다

5년차, 햇수로 6년차에 접어들 때 즈음, 내가 다니던 회사는 큰 경심을 했다.

내가 5년간 해오던 사업을 종료하고 지역에 있던 인력들은 모두 본사로 발령을 낸다고 했다.

선택의 기로였다.

지금의 삶을 유지하며 새로운 곳에서 살 것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지금까지 지내오던 곳에서 살 것인가?

누군가에게 직장은 삶의 터전이고, 생존의 수단이고, 육아의 공간이기도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예전에 적었던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그 한 문장이 아니었다면 과연 지금의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이미지, 인생이 달라진다. 그렇기에 선택을 하기 전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

어릴 적, 내 선택은 강요 받았다. 부모님으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주변 환경이 선택을 강요하고, 그 선택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강요 받으며 자라왔다. 성인이 돼서는 다른가? 환경이 변했을 뿐, 환경이 주는 선택의 강요는 동일하다.

 

다만 이번 선택은 달랐다. 주변에서는 내 선택에 대한 강요를 할 수 없었고, 온전히 내 결정으로 모든 것을 선택 해야만 했다. 선택에 대한 대가가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했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만약 내가 서울로 간다면, 지금 받는 연봉에 어느정도 오를 수 있을까? 서울 집 값은 얼마나 할까? 가서 또 적응은 어떻게 해야할까? 이 곳 대전에서 보내던 익숙한 환경이 그립지는 않을까?

 

만약 내가 서울로 가지 않는다면, 지금 받는 연봉만큼 벌 수 있을까? 전세자금대출 받은 금액은 어떻게 상환해야할까?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환경이 과연 나에게 이로운 것일까?

 

수 많은 고민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논의 하지 않았다. 선택은 나의 몫이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몫이기에.

 

고민하던 중, 컴퓨터 한 켠에 적혀있는 메모를 봤다. 연극을 하는 선배가 나에게 해준 한 문장.

"왜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며 하고 싶은건 생각하지 않고, 해야할 것만 생각하는가?"

이 한 문장.

 

복잡하던 머리가 한 순간 명확해졌다. 내가 하고 싶던 광고를, 이제 직접하자. 내가 진짜 원하던 것을 해보자.

 

다음날 나는 서직서를 제출했다.

 

5년이라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보낸 수 많은 역경이 내 경력으로 탄생하는 순간. 제출한 사직서 말미에 2011. 7. 4라는 날짜를 본 순간 마음이 살짝 미어졌지만, 그 소중한 시간이 내 경력으로 힘을 줄 것이란걸 알기에 미련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이제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기로!

 

2011. 7. 4 ~ 2017. 2. 28

수고했어 DoDo, Kim

글 이어보기

글에서 책으로 가는 옴니글로의 여정

2017년, 옴니글로의 꿈

 

 

안녕하세요.

 

2017년 정유년 새해가 밝은지 벌써 한 달하고 10여 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작가님과 독자 여러분은 어떤 한 해를 시작하고

어떤 목표를 향해 걸어가고 계시는지 궁금해지네요.

저희 옴니글로는 플랫폼을 이용하는 작가님 그리고 독자의 기대와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으로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새벽 어스름에 새롭게 떠오르는 희망의 해를 보며

2017년에는 옴니글로를 이용하는 분께 많은 편리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 2017년 옴니글로는?

 

 

 

✓ 옴니글로의 꿈

옴니글로의 꿈은 따뜻한 일상을 글로 디자인하고 소박한 생각을 담아,

매거진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옴니글로에서 함께 해주시는 여러 작가님의 멋진 작품

그리고 멋진 글들을 꾸준히 발굴하여 의미 있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옴니글로 쇼핑몰 오픈

매거진 주문 절차가 확! 바뀌었습니다.

기존 ‘폼’ 형식의 주문 결제로 매거진 구매에 많은 불편함을 끼쳤었는데요.

2017년부터 옴니글로만의 스토어를 오픈하여 복잡한 주문 절차를 생략하도록 했습니다.

 

앞으로 옴니글로 스토어에서 문학 매거진 1호, 2호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서를 출간·입고할 예정입니다.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올 한 해 옴니글로 플랫폼은 소통을 위한 기능을 강화할 예정입니다.

좀 더 사용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글 쓰는 이들이 즐거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옴니글로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좀 더 나은 환경을 위해 귀를 열고 계속해서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이어보기

바닥이라는 감정

모라토리엄 인간

흔들흔들,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나도 흔들린다. 얼마나 흔들렸는지, 모든 것을 그만하고 싶었다. 그만두면 편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졸업도, 젊음도, 시간도 - 생각도 유예시키면 나는 고통에서 벗어날까? 온갖 물음들이 걸음 속에 흩어졌다.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어느 날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있다. 아무 미동도 없는 하늘이 어찌나 무심하게 보이던지. 순간 나와 더불어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았다. 등 뒤에 짊어진 가방이 인생의 무게만큼 무거웠을 때, 나는 그 곳에 못 박힌 채로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와 닮은 단어를 떠올렸다.

 

모라토리엄 인간 -사회적 자아를 확립하고 사회적 책무가 따르는 성인이 되기를 유예하는 사람을 가리킨다-의 의미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다. 잘 벼른 칼날에 베이는 것 같다. 내 미래가 조각나고 부서진다. 꿈꿔왔던 것들은 모두 내 발 아래 있다.

 

부서진 미래를 걸으면서, 나는 울었다. 이런건 내가 생각하던 것들이 아닌데. 어린시절 전부였던 꿈을 밟아가며 나는 어른이 된다. 그리고 아마 나는 영원히 내가 원하던 어른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데, 정체 된 내 삶은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모라토리엄 인간인가.

 

 

 

글 이어보기

유리병 편지

가위 끝

 

 

 

 

    어린 시절, 내 손에 제일 오래 머물렀던 것은 연필도 장난감도 아닌 가위였다. 비록 아버지와 나, 둘 뿐이기는 했지만 한 가족의 식사 준비를 한다는 것은 어린 내가 맞닥뜨린 인생 최초의 난관이었다. 때문에 언제나 바빴던 나에게 어머니의 빈자리 같은 것을 느낄 여유는 별로 없었다. 나의 탄생과 동시에 숨을 거둔 어머니는, 그저 내게 다른 아이들보다 주방에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기회를 준 존재에 불과했다. 생각해보면 슬픈 것은 오히려 그쪽이다. 어머니의 부재가 어린 나에게 그 정도 의미밖에 되지 못했다는 것. 그 나이 대 아이에게 부모의 의미란 어떤 것인지, 나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식사 때가 되면 주방에 들어가 가위를 들어야 했다. 그것은 식전에 행해지는 자연스런 일과였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내가 가위로 인해 특별한 방식으로 자극을 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차츰 내 손이 주방 가위와 익숙해지자, 김치나 고기를 능숙하게 자르는 것 따위에는 금세 싫증이 났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대통령이나 여군은 아니더라도, 여하튼 좀 더 멋진 일을 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 끝에 찾아낸 것이 인형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었다. 여덟 살의 나는, 인형의 금발을 조금씩 잘라내며 훗날 내게 머리를 맡길 사람들의 뒷모습을 상상했다.

 

    몸이 아파 시내 미용실까지 다니는 것이 무리인 할머니들이나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게 된 것은 2년이 지나고 난 뒤부터였다. 맨 처음 아버지는 내가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그 짓 - 아버지는 나의 일을 그렇게 불렀다 - 을 하고 다니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했지만, 동네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내가 '이문동 귀염둥이' 대접을 받자 이내 마음이 풀린 듯 했다.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눈치를 보아 하니 아무래도 아버지의 한의원에 단골손님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내가 대놓고 사람들의 옆구리를 찌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내가 한의사 양반의 늦둥이라는 것을 온 동네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선전 효과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아버지는 열두 살 생일날 내게 미용 가위까지 선물해 주었고, 이내 우리 집 앞마당은 미용실이 되었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아버지와 나를 기술자 모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기술자. 사람들은 한의사인 아버지까지 기술자라 불렀다. 문득 몇 년 전 큰 인기를 끈, 그래서 나 또한 자주 시청했던, 외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메쩬바움 대신 미용 가위를 들게 된 것은, 어쩌면 아버지가 어린이날마다 사다 준 마론인형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무한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현실적인 제약이 뒤따르기 마련이니까. 선물 받은 인형이 분해가 가능한, 그러니까 보들보들한 털로 뒤덮인 곰이나 토끼 따위였다면 나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 "난 아주 어릴 때부터 가위를 가지고 놀았어요." 사회인이 되고 나서 알게 된 언니와 '서로에 대해 몰랐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들은 문장 몇 개로 글을 적어봤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의 가위 양 쪽 끝에는 무엇이 달려 있었을까요. 일이 너무 힘들 때마다 손에 쥔 가위를 보며 종종 그런 생각을 해본다는 언니. 그녀는 물론 지금의 자기 모습도 너무 사랑하지만 가위로 할 수 있었던 다른 일에 대한 가능성을 상상하면 괜시리 기분이 묘해진다고 합니다. 

 

글 이어보기

짧은 글 모음집:雜

17. The Star

17. The Star

 

등교하기 전 이른 아침, 평소라면 불이 꺼진 채 문이 닫혀 있을 카페가 불이 켜져 있었다. 입구에 라는 작은 명패가 달린 이 카페는 평소에 친구들과 심심풀이 삼아 타로 점을 보러오는 곳이다. 최근에는 시험기간이라서 자주 오지 못했는데 이른 아침에 문을 연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들어가 볼까?’

 

그렇지 않아도 시험이 끝나면 와볼까 싶었다. 친구들과 같이 오는 게 아닌 나 혼자서.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데 문이 살짝 열리고 낯선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카페에서 주로 타로 점을 봐주는 언니도 아니었고,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해주는 오빠도 아니었다.

 

“들어올래?”

 

“네? 저요?”

 

얼떨결에 되묻는 나를 보며 그는 싱긋- 웃었다. 귀공자 같은 외모에 그런 살인적인 미소라니, 뺨이 화끈거린다. 이건 반칙이다. 그러면서도 발은 내 대답을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카페로 향한다. 카페 안으로 들어와 그를 따라서 창가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최현, 여기 오너야.”

 

“아, 네. 네?”

 

엉겁결에 대답하다가 깜짝 놀랐다. 이렇게 젊은 미남이 카페 사장이라니, 소문으로만 들었지 보는 건 처음이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자랑이라도 해야겠다. 그는 조용히 미소하며 카드를 골고루 섞었다.

 

* 점을 보기 전 카드를 골고루 섞는 걸 Shuffle이라고 한다.

 

‘언니는 주면서 직접 섞으라고 하던데. 조금 다르네.’

 

사람마다 다르다고는 들었지만, 조금 의외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어서 그는 테이블 위에 카드를 일렬로 쭉- 펼쳐놓고 말했다.

 

“딱 3장만 골라봐.”

 

“음-.”

 

나는 테이블 위에 일렬로 펼쳐져 있는 78장의 카드를 노려보았다. 마치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3장의 카드를 골라서 빈자리로 빼내었다. 그는 아직 뒷장을 보이고 있는 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좌우는 상관없지만, 상하는 신중하게 정해서 뒤집어봐.”

 

가장 왼쪽에 있는 카드를 집어서 아래에서 위로 뒤집었다. 드러난 카드는 [01. 마법사] 정방향이다. 다음은 위에서 아래로, 마지막 카드는 다시 아래에서 위로 뒤집었다. 각각 [17. 별]과 [13. 죽음] 모두 정방향이었다. 마지막에 나온 카드에 시선을 고정하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저 카드가 모두 나쁜 건 아니라고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심 찝찝했다. 해골이 그려진 우중충한 그림이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거 같다. 눈동자를 굴려 힐긋 바라보았다. 순간 시선이 마주치며 그가 걱정 말라는 듯이 웃었다.

 

“하고 싶은 일을 속에 숨겨두고 있구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 알았을까? 부모님에게도 친오빠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속에만 숨겨두고 있었다. 놀란 내 눈을 보며 그는 마법사 카드를 가리켰다.

 

“마법사의 카드는 지식이나 지혜와 관련이 있지만, 속임수를 쓴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때도 나오지. 반면, 지금은 또 다른 의미로 숨겨진, 잠재된 능력을 뜻하기도 해.”

 

“잠재된 능력이요?”

 

그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별이 반짝이고 있는 카드를 짚었다.

 

“네가 희망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

 

곱고 남자다운 손가락이 짚은 카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하고 싶은 일,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성적을 올리는 일이 중요하고 우선이다. 그 이유를 알고 있고 납득하면서도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생각이 들어 답답하다.

 

“겁나니?”

 

그림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얘기했을 때, 부모님이 뭐라고 하실지, 친구들은, 선생님은 뭐라고 하실지, 그리고 나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마법사 카드로 옮겨갔다.

 

“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할까봐 겁먹을 필요는 없어. 넌 이미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니까. 다만, 그 자질이 빛을 발하려면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거야.”

 

그의 말에 울적한 말이 조금 가라앉아 눈을 들어 작게 되물었다.

 

“정말요?”

 

“그럼. 다만...”

 

그는 가장 마지막, 해골이 그려진 카드를 짚었다.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성장하려면 이 고비를 반드시 넘겨야 해.”

 

“어떻게요?”

 

그는 팔을 테이블에 올려서 기대고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상냥한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숨기지 말고 알려야지. 설령 누군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너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걸 보여주며 설득해야 해. 그리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워나가야겠지.”

 

“꼭, 알려야 돼요?”

 

나를 마주한 미소가 한층 더 부드러워지며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받고 배우기 위해서라도 알릴 필요가 있어. 너를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나를 이해하고 도와줄 사람.’

 

카드를 처음부터 찬찬히 훑어보았다. 잿빛 머리의 노련해 보이는 마법사와 크고 아름답게 빛나는 별과 깃발과 방패를 든 해골, 필요한 건 용기와 노력과 배움이다. 가능과 불가능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울렸다. 울림이 사라지고 마음이 상쾌해졌다.

 

‘할 수 있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냐. 얼른 가 봐.”

 

그는 유리창 밖을 눈짓했다. 낯익은 여고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와 달려갔다.

 

“얘들아! 같이 가!”

 

“어? 너 왜 저기서 나와?”

 

“아침부터 커피 마셨어?”

 

난 활짝 웃으며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아니! 앞으로 내 운을 봤어. 그런 의미에서 너희에게 할 말이 있는데.”

 

“뭔데?”

 

씩- 웃으며 내가 꺼낸 말에 등굣길 내내 놀라기도 하고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반응은 금세 이런저런 호기심과 관심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참고할 만한 자료나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과 선생님은 달랐다. 현재 고3, 수능을 앞 둔 수험생이 갑자기 진로를 바꾼 것에 선생님은 크게 걱정하셨다. 심지어 엄마는 화를 내기도 하셨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냐며, 왜 탄탄한 진로를 두고 그런 불확실한 길을 선택하는 거냐고 눈물이 쏙 빠질 만큼 된통 꾸지람도 들었다.

 

그럴 때면 힘이 되어주는 건 친구들이었다. 부모님도 언젠가는 이해하실 거라고, 오히려 그렇게 하고 싶은 꿈이 있다는 게 부럽다는 말도 들었다. 그때마다 용기를 내서 부모님을 설득했고,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다. 내 끈질긴 설득에 먼저 마음을 움직여주신 건 선생님이셨다.

 

“현재 네가 원하는 학과로 안전하게 지망할 수 있는 곳이 어디냐 하면...”

 

선생님은 그렇게 내가 원하는 길을 택할 수 있게 안내를 해주셨고,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걸 눈치 챈 오빠와 아빠가 엄마를 설득해주셨다. 덕분에 마지못해 내 선택을 인정해주셨지만, 시간이 지나서 수능을 끝내고 대학에 들어가 장학금도 받으며 열심인 모습에 엄마도 천천히 나를 인정해주셨다.

 

계절이 바뀌고, 학년이 바뀌고, 대학을 졸업하는 동안 꾸준히 노력한 결과, 20대 중반에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넉넉하지는 않아도 자리를 잡고, 인정도 받으며 소소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그날 아침의 일이 떠오른다.

 

너 자신의 능력이 부족할까봐 겁먹을 필요는 없어.

넌 이미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니까.

다만, 그 자질이 빛을 발하려면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거야.

 

그날 이후 수능이 끝나고 대학교 근처로 이사를 할 때까지, 다시 보지 못했다. 소문은 여전히 무성하게 나 있지만, 어깨를 으쓱거리며 창문 너머로 새벽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신기하지만, 확실하게 사람이었으니까. 언젠가 우연히 다시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새삼 희미하게 떠오르는 얼굴에도 미소만은 뚜렷하다는 느낌에 쿡- 하고 작게 웃었다. 동쪽 하늘에 새빨갛게 떠오르는 태양이 너무도 아름답다. 그 태양을 마주보며 눈이 다 감길 만큼 미소했다.

 

오늘 하루도 시작이다. 반짝이며 빛나는 꿈을 위해 달려갈 하루의 시작이다.

글 이어보기

우리의 삶.

우리의 삶.

‘좋아하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 이 말은 사실일까? 이 말에 대한 사실여부는 단정적으로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것이 헛소리이거나 재능이나 배경으로 성공 한 사람들이 나 같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부질없이 허우적대는 것을 보고 싶어 주절 댄 것으로 들렸다. 그렇지 않다면 잠을 줄이고, 놀 시간을 줄이고, 공부 할 시간까지 줄이면서 나온 이 종이조각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다음에.....’

교실에 들어오자 담임선생님이 주신 종이에 써진 건 글이 훌륭했다는이 묘사가 좋았다는 자잘한 수식을 넣었지만 요약하자면 너는 ‘탈락’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처음 공모전을 보았을 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다. 처음의 실패였지만 시간이 있다고, 소설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그들의 형식적인 말에 나는 정말 아쉽게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게 두 번,세 번이 되자 깨달았다. 그 말들은 값싼 동정이었으며 이미 이룬 자의 여유이면서 비웃음이었다는 것을!

분했다. 그들이 나를 깔보듯이 동정을 하였다는 생각에 분했다. 그렇기에 나는 노력했다. 몇 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하면서.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아무리 손을 움직이고 종이를 버리고 뇌가 쪼그라질 정도로 사용해도 결과는 같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합격자는 있었다.

‘빌어먹을.’

재능은 1%이고 노력은 99%다? 헛소리다. 적어도 나는 자부 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남이 쓰지 않을 때 글을 쓴 나였으니까.그런데 왜!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걸까? 하다못해 고등학생 중에서 한 번 쯤은 금상을 받아야 정상 아닌가? 노력하면 된다고 했는데 왜 나는 이런 거지? 도대체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강시현!”

내 머리 속의 고함과 귀에 울리는 고함소리가 터지자 나는 그제야 나를 부르는 학생이 있음을 눈치챘다.

“어?”

“아까부터 불렀는데 못 들었어? 어디 아프냐?”

평소에 알고 지내는 학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걱정스러운 말에 나는 그 정도로 내 생각에 빠졌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머리를 지긋이 누르며 말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잠깐 딴 생각 좀 해서 그래.”

“그래?”

정말이냐는 듯 묻는 학생의 말에 나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상당히 오지랖 많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

“어. 그런데 무슨 일이냐?”

“아, 맞다. 박혜성선생님이 교무실로 부르래.”

학생A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담임샘이?”

“응. 지금 오라고 했으니까 빨리 가봐.”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 일어서 교무실로 걸어갔다. 교무실로 가면서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우리 담임선생님이자 국어 선생님인 박혜성선생님은 언제나 용건이 있을 때는 아침조회시간 같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가만히 있는 선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 선생님의 모습은 ‘아, 조회하는 김에 강시현....’이 선명하다. 그런 선생님이 나를 먼저 불렀다? 이곳이 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교무실 앞에 도착 한 나는 문을 살짝 두드리고는 문을 열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교무실은 쓰레기가 뒹굴고 땀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는 교실과는 다르게 안이 환해서인지 깨끗한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 바닥은 깨끗했으며 소란스러운 교실과는 다르게 타자를 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매우 조용하면서도 일에 열중하는 선생님들의 모습에 나는 상당한 거북함을 느꼈는데, 그런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한 선생님이 과자를 먹으며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자 피식 웃고는 과자를 먹는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부르셨어요?”

선생님은 과자를 씹던 것을 멈추고는 의자를 돌려 나에게 시선을 맞추곤 말했다. 상당히 귀찮다는 듯 늘어진 목소리였다.

“어, 그래. 내가 널 불렀지?”

나는 난처하게 웃었다.

“천하의 선생님이 먼저 학생을 부르신 게 신기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한 행동을 저한테 물어보신다고 원하는 대답을 얻으실 수는 없을 걸요?”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내가 부르긴 했나 보네.”

나는 그의 말에 무안하여 머리를 긁적였다.

“네.”

“쯧. 커피 준다고 해서 하는 건데 막상 하려고 하니까 귀찮네.”

“예?”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신경이 쓰이는 게 사람심리인데요. 선생님.

“시현. 허상이라고 알지?”

“소설가 허상이요?”

국어선생님인 그가 허상의 의미를 물을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필명이 허상인 소설가를 말했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1학년 때 말했었지? 허상의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예. 아마 그때가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의 의무로 어쩔 수 없이 진로상담을 할 때였죠?”

“그랬지. 참고로 말하자면 네가 너의 담임선생을 2년 동안이나 맡은 것에 대해 지옥으로 생각하고 있다.”

머리까지 쥐어 잡으면서 괴로워하는 선생님의 모습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수염이 여기저기 나 무책임 해 보이는 이 게으른 선생님은 내 진로상담 후에 자잘한 대회나 충고를 해 주신 분이었기에 그의 말은 정당하다 못해서 부족 할 정도였다. 그의 성정을 감안한다면.

‘할 때는 하시는 분이었지.’

그런 선생님이 감사했지만 동시에 선생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는 내 모습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정작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죄송한 것은 죄송한 것이었다.

“그런데 허상은 왜요?”

“허상이 우리 학교에 있거든.”

뇌의 신경이 기차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과학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생님의 말을 받아들이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예? 정말요? 언제부터 있었는데요?”

“작년부터.”

“네?!”

선생님이 나를 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지만 선생님이 이런 걸로 장난을 치실 분이 아니었기에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잠깐만요. 선생님이 어떻게 허상이 누군지 아세요? 공식적으로는 허상이 고등학생인 것 빼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야 내가 그녀를 우리 학교로 데려왔으니 어떻게든 알고 있는 거겠지?”

그 어떻게든 알고 있는지가 도대체 무슨 경로로 알고 있는 지가 궁금한데 말이죠.

“그건 그거고. 읏차.”

-우드득

선생님이 자리에 일어서자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무언가의 소리가 들렸는데, 그소리가 워낙 컸는지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 되었다. 나는 아마도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몇 시간을 그 자세로 계속 있었던 거예요?”

선생님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침조회 끝내고 계속 이 자세 그대로 있었는데.”

“에? 수업은요?”

“자습.”

당신 정말 수능에 희비가 갈리는 고등학생의 선생님이 맞는 겁니까?

“뭐,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쯤하고.”

정말로 선생님이 맞는 지 의심이 드는 발언이라고는 자각 하지 못하시는 건가.

“허상이 너를 보고 싶다니 좀 따라와라.”

“예? 저를요?”

“그래. 기쁜 건 알겠는데 너무 좋아하지는 마.”

선생님은 과자를 챙기고는 자리에 일어섰다.

“왜요?”

“너라면 실망 할게 분명하니까. 어쩌면 혐오 할 지도 모르겠지.”

“제가요?”

의문에 찬 내 말에 선생님은 잠시 나를 보았는데 곧 한숨을 쉬고는 과자봉지를 뜯어내며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그런 선생님의 행동에 의아했지만 일단 따라오라고 말하는 듯 한 선생님의 등에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4층에서 계단을 한 3번 정도 내려가자 선생님은 한 교실에 과자를 먹던 것을 멈추고 교실 문을 열었다. 위치를 생각하니 책상이 부족 할 때 자주 왔던 교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알 리가 없었나.’

같은 반이라면 일말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다른 반이고 거의 이곳에 있었다면 2년 동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뭐 해? 들어가지 않고.”

“아, 네.”

교실에 들어간 나는 먼지투성인 과거와는 다르게 잘 정리 되어있는 그곳에 무언가 열심히 그리는 한 여학생이 시야에 잡혔다. 동시에 머리 속엔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아름답다.’

단순히 귀엽거나 예쁘다가 아닌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알맞았다. 마치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 여자가 허상이다? 솔직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얼굴에 대해 자신감이 없어 인터뷰나 사진을 올리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수지야. 약속의 커피는?”

역시 나는 커피 하나에 팔려 간 것이 맞았나 보다. 커피 하나는 나라는 공식이라니 뭔가 서글프군.

“네. 말씀대로 블랙으로 대령했사옵니다.”

꽤나 장난기가 가득한 여성의 목소리. 나는 그 한 마디에 대충 그녀의 성격을 짐작했다. 커피 하나로 나를 데려 온 것이나 장난기 가득한 얼굴과 목소리를 보아 나랑은 맞지 않을 듯 한 느낌이었다.

“음, 물건은 정확하네. 그럼 나는 이만 갈게. 아! 참고로 성욕은 자제하렴. 시현아.”

“말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합니다.”

내 말에 선생님은 피식 웃으며 교실을 나갔다. 잠깐, 데려다 주기만 하는 것인가? 소개 같은 것도 하지 않고?

‘거참....’

나는 내심 복잡한 심정으로 수진이라고 불린 허상을 보았다.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 명의 팬으로서 물었다.

“소설은 그만 둔 거냐?”

약간은 질책이 담긴 말투였지만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는 지 태연스럽게 받아쳤다.

“응.”

“왜? 슬럼프라도 온 거냐?”

“아니.”

“그럼 왜 미완결로 끝낸 거야?”

허상의 첫 작품이자 미완결로 낸 ‘환상세계’. 무려 19권이나 나온 책이었고 보통 이런 장편은 초반에 비해 뒤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각 권마다 열광의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연재중단의 소식에 많은 부분에서 패닉을 일으켰다.

소식을 늦게 접했지만 나 역시 그 중에 한 명이었다. 어쩌면 그녀에 의해 소설가의 꿈을 한창 꾸던 나였으니 더 큰 충격을 받았을 지도. 그래서였을까? 연재중단 소식을 듣고 난 후의 난 공부에도 글에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소설 하나에 생활에 지장이 있는 이런 내 모습이 우스워 보이겠지만 ‘환상세계’라는 소설은 나에게 있어서 그런 존재였다.

그 소설은 제목에 또는 필명에 맞게 잡히는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느낌이었다. 배경이 보일리가 없지만 절경이 내 눈 앞에 보이고 주인공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내가 전투의 현장에 직접 있는 생동감이 전해졌다. 아니,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곳이 내 망상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 마치 ‘허상’과 같았다.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그런 존재 말이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이것이 진정한 ‘소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 작품이었다. 영화는 다르게 시각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감각을 환상처럼 느끼는 것이 소설이 아닌가. 그렇기에 나는 그 끝을 보고 싶었다. 환상의 끝을! 하지만 결과는 미완결 상태에 작가는 나에게 말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거든. 그게 이유야.”

“그것 뿐?”

“그것 뿐.”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말. 그 재능을 두고 그림을 그린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불같은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찬 물을 끼얹은 듯 냉정해 진 기분이었다.

“내가 네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못 들었나?”

“아니. 들었어.”

나는 그녀를 보았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 지 실실 쪼개고 있는 그녀의 낯짝이 심히 거슬렸다.

“그런데 할 말이 그것 뿐이다? 변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변명이야.”

“도대체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뭐야? 넌 독자가 기뻐하는 걸 보고 싶어하는 소설가 허상 아니야?”

그 재능을 두고서 왜 그림을 그리는 거지?

“그림으로 감동 받은 적이 있어서 그래.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거고.”

“모든 국민을 감동 시킬 게 분명한 소설이라는 재능을 버리고서?”

“응.”

그건 모욕이야. 허상.

“허상. 넌 나 같은 놈을 위해서라도 써야 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나 같은 놈들을 위해서. 그렇지 않다면 너는 우리를 모욕하는 행위야.”

허상은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

“우리는 너 때문에 진정한 소설을 보았으니까. 그래서 소설가라는 꿈을 쫓는 거고. 그런데 그곳에 네가 없다면 우리는 뭐지? 무엇을 위해 우리는 쫓아간 거지?”

“궤변이야. 시현.”

궤변? 어쩌면 맞을 지도 몰랐다. 머리는 냉정했지만 속은 이리저리 얽혀있어서인지 내가 무슨 말을 꺼내는 지도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시현. 거짓을 말하지 말고 네 본심을 말해.”

그녀가 가까워진다. 나를 보고 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건 나인데도 그녀가 다가 올수록 나는 작아지는 듯 한 느낌이었다.

“시현. 너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천재. 동경. 우상. 글을 써야만 하는 사람. 그리고.....

“어쨌든 넌 글을 써야 해. 그 재능이 있다면 그건 사명이야.”

“내 눈을 피하고 말해도 설득력은 없어. 시현아. 히히.”

“......”

나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는 거야?”

“어. 너랑 대화 한 게 실수였어.”

“응. 그럼 나중에 또 와!”

방금 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가볍고 명랑한 소리였다.

“그럴 일 없어.”

“그건 모르는 일이야~”

뭔가 심히 거슬리는 마지막 말이었다.

***

설마라고는 생각했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오는 모습을 보니 또 다시 매수를 당한 듯 했다.

“또 만났네~”

여전히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어제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욱 짜증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어제 일이 있음에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인지, 쓰지 않는 것인지 도통 모를 지경이었다.

선생님은 어제와 같이 괴상한 물체를 받고는 교실을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나 역시 이 교실을 탈출 하고 싶었지만 선생님의 강압아닌 강압에 지속적으로 여기에 나와야 했다.

“하아.”

같이 있기 싫은 사람과 밀폐 된 공간이라니. 최악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녀가 그림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일까나.

그저 가만히 있긴 무안한 나는 빈자리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공모전에 실패하고 처음 쓰는 글이었다.

“글 써?”

이수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그런데 진척이 되지 않는 것 같아?”

“.....”

그녀의 말대로 한 시간 가량 지났음에도 종이에 쓴 건 3줄의 글과 잔해처럼 남겨진 무수히 많은 지우개 자국만이 남아있었다.

“한 번 봐도 될까?”

“보고 있잖아.”

“다른 것도 있을 거 아냐?”

“있기야 한데......”

자신작이라고 할 만 한 것도 아니고 모두 공모전에 떨어졌던 것 뿐이었던지라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작가였던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비평을 받을 기회는 적다는 생각에 가방을 뒤져 이번에 떨어진 작품을 그녀에게 주었다.

작품을 받은 그녀는 곧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작가였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그녀가 읽을 때 까지 나는 어딘가의 면접장을 나와 면접을 보는 초보자 사회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괜찮은데?”

내 소설을 읽고 난 후의 그녀의 한 마디였다.

“구체적으로 어떤데?”

“묘사나 스토리는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은 편이야. 다만 옷에 맞지 않다고 해야하나?”

“결국 나한테 재능이 없다는 소리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멋대로 요약해서 듣지 마. 안 좋은 버릇이야.”

“나한테는 그렇게 들려. 천재씨.”

“더럽게도 꼬여있네.”

“알고 있어.”

나의 담담한 태도에 그녀는 토라진 것처럼 볼을 부풀렸다. 그 짓을 하는 그녀의 정신상태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동시에 그걸 보고 얼굴을 붉히는 내 뇌의 상태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다.

“어쨌든 이건 재능얘기가 아니야. 자신의 색을 찾으라는 이야기야.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오리지널의 글을 말이야.그걸 찾는 과정을 재능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노력이락 생각해.”

“넌 그 과정을 어떻게 했는데?”

“내 마음 가는대로. 자신의 색은 곧 본능이라고 생각해.”

나는 혀를 찼다.

“결국은 재능이라는 소리구만. 쯧.”

“꽈배기 같은 놈일세....”

“알고 있는 사실이야.”

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물었다.

“그러고보니 너 지금 만화가냐?”

“응?”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이었지만 나는 한 순간 내 말에 표정이 굳었던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만화가 말이야.”

“아, 만화? 아직은 아니야. 스토리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림 그리는 실력이 좀.... 헤헤.”

“소설 그만 두고 바로 그림 그렸지?”

“뭐.... 그렇지. 왜?

그럼 한 4~5년은 됐나.

“그런데도 계속 그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자신의 재능에 의심이 들지는 않는 거냐?”

“당연히 들지. 하지만 그래도 하는 거야. 선택을 할 수 없어 자포자기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을 한 거니까. 그래서 하는 거지. 이게 내 적성이랑 맞는 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걸 좋아하는 건 확실히 알고 있잖아?”

그녀는 웃었다. 정말로 행복을 만끽 하고 있는 소녀의 미소였다.

“그 말은 소설은 싫었던 소리야?”

“아니, 말했잖아? 나는 단지 그림에서 더 큰 것을 보았다고.”

“만약.... 만약에 그림 그리는 게 자신과 맞지 않았다고 깨달으면 소설로 다시 돌아 올 거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에다 손가락을 대고 고개를 젖혀 고민을 하 듯 ‘음...’ 소리를 내며 위를 바라보았다.

“설령 깨달아도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 같아. 소설 때와는 다른 느낌을 맛 볼 수 있거든. 그런데 너는 어쩔건데? 듣자하니 소설을 그만 둘 거라는데.”

“선생님이 말했나 봐?”

그녀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반쯤은. 지금 소설을 쓰고는 있지만 그저 휘갈겨 쓴 글이야. 마음잡고 쓰자니 이제는 무엇을 쓰고 싶은 지도 모르겠어.마치 표류 하는 난파선이 된 기분이야.”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나에게 이수진은 새하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환상세계를 이어 써 보는 건 어때?”

“내가?”

그녀는 밤 하늘의 별과 같은 은은한 빛을 눈 안에 반짝이며 대답했다.

“응!”

“네가 싫기는 하지만 소설적 재능은 인정하고 있어. 그런데 그걸 나 따위가 이어쓴다고?”

자신 없는 내 목소리에 용기를 복 돋아 주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내 손을 꽉 붙잡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인정해! 너는 내 작품을 이어 쓸 재능이 있다고!”

확신에 찬 눈빛, 확신에 찬 목소리. 그녀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확신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것 일지 모르겠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그녀가 가지고 있기에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쓸 수 있을 리가 없어.”

그 말을 남기고 나는 교실을 나왔다.

***

다음 날. 그녀는 어제와 같이 ‘환상세계’를 이어서 쓰라고 제안했다. 물론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다음 날. 역시 그녀는 다시 나에게 ‘환상세계’를 쓰라고 다시 권유하였다. 당연히 나는 오히려 그 말은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니냐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그런 단호함과는 다르게 마음은 흔들렸다. 쓰고 싶다는 생각과 명작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 서로가 부딪혔다. 아직은, 명작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며칠 동안 권유와 거절을 반복하는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그녀가 소설을 쓰게 하는 것은 포기하였다.납득은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의 질투도 사라졌다. 아마 그녀의 확신에 찬 모습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에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

선생님에게 이수진이 교실에 나오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종이를 주었다. 종이에는 어느 한 주소가 적혀있었다.

“같은 과니까 너라면 위로가 되겠지.”

선생님은 그 한 마디를 하고는 나에게 등을 돌렸다.

주소를 보고 사람에게 수소문을 하고 찾아온 결과 예상외로 으리으리한 저택이 아닌 평범한 원룸이었다. 아직도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있는 그녀의 책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딩동

초인종을 울려보았지만 인기척이 없는 듯 방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사람이 없나 싶어 걸음을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급한 판단이었는지 방 안에 우당탕 소리가 들리자 생각을 바꾸어야만 했다. 소리가 난 후 잠깐의 침묵. 아마도 누가 왔는지 확인을 하는 것이겠지.

-철컥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고 나보다 작은 이수진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도.

고개를 젖혀서 다시 나를 확인 한 그녀는 바로 나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에 들린 뜯어진 봉투를 보자 저항을 그만두었다.

이수진이나 강시현이나 똑같은 인간이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살아도 실패 앞에서는 흔들리는 인간이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녀는 확신을 한 것이 아닌 단지 압박을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느끼는 불확실성을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라고. 결코 강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약간 긍정적으로 생각 한 ‘여자’일 뿐이었다.

그런 여자에게 나는 과거를 질책했다. 길이 틀렸다고 말했다. 천재라고 질투했다. 아마도 그녀는 흔들렸을 것이었다. 나의 말에 사실은 이건 잘못 된 길이 아닌지 생각하면서. 확실한 성공 길이 있는 그녀에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어 나를 위로했다. 포기하려던 나를, 주저앉으려던 나를, 그녀는 일으켜 세우려 했다.

“미안. 정말로 미안.”

나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손을 얹었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의 울음소리가 진정되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잘 참아 낸 아이에게 상을 주듯 머리카락을 쓰담았다.그러자 그녀는 나를 더 꽉 잡았는데,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자

“보지 마.”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쩔 줄 몰라 얼굴을 붉히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 줘.”

“특별히 그래 줄 게.”

집 안에 들어오자 안겨져 있떤 그녀는 휙 돌아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마치 들고양이와 같아 미소가 지어졌다.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리지 않자 곧 이수진은 컵에다 음료수를 따라다 주었다.

“방 안이 내 집보다 더 엉망인데?”

“탈락봉투가 오면 나보다 더 심할 사람이 건방지네.”

“하긴.”

분명히 탈락 했다는 내용에 지금 앞에 있는 건 장난이라는 수준으로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었지.

“이수진. 넌 왜 그 교실로 부른거야? 과거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건 아닌 거 같은데.”

“그냥 위로 받고 싶어서. 우습게도 사람이란게 비열해서 말이야. 나처럼 길에 막힌 너가 있다는 이야기에 보고 싶더라. 적어도 나 혼자만 그러는 건 아니구나라는 안심이 들면서 말이야.”

그녀는 애써 평소에 보이는 미소를 지었지만 꽤나 씁쓸해 보이는 보였다.

“있지. 너한테 소설을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를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말이기도 했어. 만화를 포기 할 리는 없었지만 괜히 불안하더라. 이 길이 맞는 지 말이야.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네가 글을 포기 하지 말라고 말했지.나한테 만화를 포기 하지 말라는 것처럼.”

“결국은 이게 모두 너의 이기심이었다는 말이야?”

“응. 미안....”

나는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사과 할 일은 아니었다. 사실은 나 역시 천재라고 생각 되는 그녀가 실패라는 문 앞에 좌절한 모습을 보고 안도했으니까.

“어쩌면 이게 우리의 삶이겠지.”

“응?”

“이 길이 맞는지 모르는 불확실성이라는 압박을 어깨에 무겁게 메고 살아가는 거 말이야.”

“그게 살아가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야지. 이 무거운 짐을 받아들여야지. 누가 나에게 이 무거움을 나한테 주었는지 원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인다고?”

“그래.”

과거의 난 원망만을 했다. 누가 나에게 실패라는 절망을 선사 했는지. 누가 나에게 이 길이 맞는 지에 대한 불안함을 떨게 만들었는지. 하지만 그것은 투정이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니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그저 싫다며 거부하고 원망하고 도망치는 건 그만 해야 해. 물론 많은 실패를 겪어야 하겠지. 이미 겪어보기도 했고. 하지만 모두가 그래.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 실패를 겪으면서도 다시 일어서. 두려우면서도 그 길을 계속 걸어가. 왜냐면 모두가 이 두려움을 느끼니까. 적어도 실패하기 위해 우리가 태어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이

“삶이겠지. 우리의 삶이겠지. 무섭고 두렵지만 계속 도전을 해나가는 것이.”

눈을 감는다. 그리고 거기에 나 역시 한 걸음 움직이기 위해 다시 입을 연다.

“수진아. 아직 환상세계를 이어서 쓸 수 있는 권한은 유효하지?”

나는 이 압박감을 받아들이겠다.

글 이어보기

유리병 편지

서른, 책갈피

 

 

 

 

    나의 전공은 철학. 이상하게도 나는 철학을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이라기보다는, 어떤 방법론으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일들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는, 그런 방법론. 그래서 철학이 좋았다. 대학생 신분이었던 4년, 그리고 대학원을 다니던 2년 동안, 내 안에 움츠리고 있던 아집을 없애고 최대한 많은 색깔의 생각들과 표정들, 소리들을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비닐 장막 같았던 편견을 걷어내니 궁금한 것도 많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이상한 질문을 늘어놓았다. 친구들은 가끔 날 보고 특이하다거나 웃기다고 말했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이십대 초 ․ 중반, 가장 꽃다웠던 나의 청춘의 시기이다.
 
  원래 나는 국문과를 가려고 했던 여고생이었다. 다섯 살 때 밤새 책을 읽다가 아버지에게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반항기가 다분했던 나는 그 다음 날도 또 책상 밑에 기어들어갔다. 남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에게 어마어마한 짜릿함을 선사해주었으므로, 그 정도 크기의 강압으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책읽기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레 글쓰기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졌고, 이것저것 끄적이는 습관이 생겼다. 작가가 되고 싶다며 떠들고 다녔고, 대학을 간다면 국문과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도 제법 진지하게 했다. 하지만 대학 지원의 순간 나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혹시 국문과에 가면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문학에 고정관념이 생기는 건 아닐까. 작품을 더 훌륭하게 해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고정된 시선을 가진 정답형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사실 ‘문학’을 좋아하면서도 고등학교 ‘문학 과목’에서는 그리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는 이상한 학생이기도 했다. 시와 소설에 정답이 있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는 아이, 그래서 객관식 시험에 꽤나 어려움을 겪는 아이였다. 고 3 말미, 나의 이러한 기질이 훌륭한 국문학도로 성장하기에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결국 철학을 전공하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물론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4년 동안 나와 타인을 향해 끝도 없이 질문하고, 수많은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또 반성하면서 좋은 정답보다는 좋은 질문에 천착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므로.
 
  서른이 된 지도 벌써 아홉 달. 사실 요즘 나는 슬프다. 눈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조금씩 건조해지는, 그런 신체적인 변화 때문이 아니다. 해가 갈수록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주 많이 슬프다. 타인의 말에 토를 달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사건이 벌어진 까닭보다는 결과에 나타난 수치들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낀 채로 생존해야 한다. 무미건조하다. 힘이 든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삼십대라는 나이가 주는 중압감이 있다. 주변 눈치가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꼭 내 식대로 살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누군가는 아직도 철이 덜 든 거냐고 나를 비웃겠지만. 그저 그런 어른이 되는 것보다는 비난받으며 철딱서니로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훌륭한 소년이 될 거에요?” 늘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질문이다. 독립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 나온 대사이기도 한데, 자기반성을 좋아하는 나는 스스로에게 종종 이 물음을 던진다. 이 말은 내가 과연 이 세상을 철들지 않고 살아가도 되는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고민의 끝에 언제나 따라붙는 나의 대답은, 결국 “YES”다. 가능하면 아주 오래도록 이 질문을,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서른의 한 가운데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는 핑계로 일상 곳곳에 책갈피를 끼워 둔다. 선언하듯 다짐하고, 꿈꾸듯 소망한다. 짧은 질문에 매달린 꿈들이 너무 많아 때론 버겁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내내 청춘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