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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월향화

월향화

백월이 뜨는 밤 달그림자 속에 피는 꽃

 

샛노란 보름달이 9번을 채우고 10번째는 노인의 백발처럼 새하얀 백월이 뜬다. 새까만 밤하늘에 하얗게 떠오른 달은 월하노인이 밤나들이를 나오는 달이라. 사람들은 문이며 창문이며 새빨간 끈을 늘어뜨리고 좋은 인연을 기원하는 글을 적어 고이 묶어둔다.

 

“좋은 밤이로구나.”

 

밤하늘이 그대로 담긴 커다란 연못가에서 빙그레 미소하며 느긋하게 거닌다. 새하얀 백발을 등 뒤로 가지런히 늘어뜨리고 노인이라기에는 훤칠한 키에 갸웃거리며 시선을 올리면, 뽀얗고 말간 미청년의 얼굴이 보인다. 늙지 않는 선인이라, 노인이라 칭하여도 실제는 백월처럼 아리따운 미청년이다.

 

편안하게 뒷짐을 지고서 못가를 거니는 월하선인에게 붉은 끈을 꼬리마냥 달고서 새하얀 종이매듭이 나풀거리며 날아온다. 하나, 둘, 셋, 넷...어디선가 날아드는 그 모양새가 꼭 자그마한 나비 떼 같다. 빨간 꼬리를 살랑이며 날아오는 종이매듭을 쫓아온 소녀는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월하, 노인?”

 

미풍에 실려 나약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짙은 흑청색 두루마기를 어깨에 걸치고 새까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버린 앳된 소녀, 이제 막 봉오리가 벌어질 듯 여린 꽃과 같은 소녀다. 월하는 난처한 기색으로 손에 종이매듭을 쥐고서 머뭇거린다.

 

“이런, 아무리 궁금하다고 하나, 쫓아오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게냐?”

 

“죄, 죄송하옵니다. 허나...”

 

소녀는 꽃망울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월하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할 말이 남았는지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소녀의 태도에 월하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손에 쥔 종이매듭을 풀었다.

 

새하얀 종이에 정성스레 적혀있는 이름이 소녀가 원하는 인연이리라. 월하의 달빛 눈동자에 미미한 웃음이 번지고, 소녀는 머뭇거리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무거운 바위에 깔린 신음처럼 잇새를 비집고 간신히 나온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었다.

 

“제가, 소녀가 아닙니다.”

 

“네가 원하는 인연이 아니란 말이냐?”

 

월하는 의아하게 갸웃거리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월하의 시선을 피하며 시선을 떨구는 소녀의 표정에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뒤섞여있었다. 소녀는 비에 젖은 어린 문조처럼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소녀의 동생과 이어주십시오. 부탁드리옵니다.”

 

“흠.”

 

어떤 사연일지는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아마도 소녀와 동생과 정인 사이에 마음이 얽힌 것이리라. 그에 소녀가 동생의 행복을 빌며 종이매듭을 만든 걸 테다. 월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서 새하얀 종이와 붉은 끈을 품속에 넣었다. 백월이 비친 수면으로 발을 내딛는 월하에게 소녀는 급히 뛰어와 옷깃을 붙잡았다.

 

“월하님, 대답을 주십시오.”

 

“이만 돌아가거라.”

 

백월이 뜨는 밤이며 월하의 가호를 바라며 붉은 끈과 종이매듭을 준비하지만, 정말로 이루어질 인연이라면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 또한 그렇지 않다 하여도 본디 인연의 결과는 함부로 알려줄 수 없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란 그 생의 인과와도 연관되어있기에 누설할 수 없음이다.

 

“월하님, 부디...”

 

“그만 돌아가라 하지 않느냐!”

 

온화한 목소리의 언성이 슬쩍 높아진다. 소녀는 마지못해 월하의 옷깃을 놓으며 물러났다. 간절한 소녀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월궁으로 돌아온 월하는 서재로 들어가 품속의 종이를 꺼내었다. 다시 확인한 종이에 소녀가 적은 이름은 두 개였다. 월하는 지그시 종이에 적힌 이름을 응시했다.

 

이름의 합, 이름의 조화.

 

새하얀 백발이 잘게 물결치며 월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둘은 인연이 아니다. 소녀가 아무리 원한다고 하나, 맺어져서는 안 되는 인연을 억지로 이을 수는 없다. 단순히 인연이 아닐 뿐이라면 몰라도 서로 상극이라면 후에 뒷일이 좋지 못할 테다. 월하는 문득 소녀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물어볼 것을 그랬군.”

 

서로 마음이 엉기었다면 누군가와는 인연일 테다. 소녀의 동생과 인연이 아니라면 소녀와 인연일 수도 있는 것을, 월하는 아쉬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월하는 종이를 다시 접어 붉은 끈으로 묶고서 화로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잊었다. 소녀도 잊었을 거라고 그리 생각하고서 저만치 잊어버렸다.

 

항아선녀 마냥 노랗고 따스한 보름달이 아홉 번 지나가고 까맣고 투명한 연못에 백월이 떠오른 밤, 월하는 주변을 맴도는 종이매듭을 하나씩 잡아서 펼쳐보고 있었다. 동그랗고 서툰 글자에 아직 풋풋한 마음이 느껴져 은근히 미소하다 숨어있는 시선을 느끼고서 수풀을 향해 돌아보았다.

 

“거기 누군 게냐?!”

 

월하의 매서운 일갈에 머뭇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일전의 소녀였다. 오늘도 짙은 흑청색 두루마기를 걸치고서 소녀는 다시 만난 월하의 앞에 양손을 포개어 쥐고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월하님.”

 

월하는 조용히 소녀를 바라보다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를 일이니, 라는 뒷말을 삼키고서 월하는 다음 종이매듭을 잡아서 풀었다. 소녀는 사뿐히 월하의 뒤를 따르며 살포시 미소했다. 월하는 소녀의 기척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었다. 느릿하게 커다란 연못을 3바퀴 즈음 돌고 나니, 달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밤이 지나가고 달이 저물며, 태양이 떠오르고 아침이 다가오는 시간이다. 월하는 마지못해 뒤돌아서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맑은 얼굴로 고운 선인을 올려다보았다. 옅은 은빛 눈동자와 새까만 눈동자가 서로를 비춘다. 월하는 소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용건이 남았느냐?”

 

“아니옵니다. 그저 보답해드리고 싶사옵니다.”

 

보답이라니, 월하는 실소를 머금었다가 마침 떠오르는 게 있어 대뜸 말했다.

 

“네 이름이 무어냐?”

 

“소녀, 해영이라 하옵니다.”

 

그에 좀 더 말을 붙이려는 월하의 귓가로 장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걷히고 동녘이 밝아오기 전에 급히 월궁으로 돌아온 월하는 소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해영, 해영이라...”

 

월하는 소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미심쩍은 기색으로 연신 갸웃거렸다.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함 속에서 아홉 번의 보름달이 지나고 다시 백월이 찾아왔을 때, 소녀는 미리 연못가 나와 월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하는 마중을 나온 소녀를 흘겨보고는 언제나와 같이 연못가를 거닐며 살랑살랑 날아오는 종이매듭을 잡아서 풀며 시큰둥하니 입을 열었다.

 

“왜 또 나와 있는 게냐?”

 

달빛 아래 피어난 물망초처럼 청초하게 미소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동무라도 해드릴 수 있을까 하여...”

 

“말동무라...가사라도 불러보려무나.”

 

월하의 요구에 소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어울릴만한 가사를 골라내어 잔잔하게 풀어내었다. 시리도록 투명한 작은 샘물에 실비가 내려앉듯, 밝은 가을 하늘에 얇은 구름이 흘러가듯 보드라운 목소리에 월하는 슬그머니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한해, 두해 흘러 소녀의 나이가 스물 셋이 되는 해의 백월이 뜬 밤, 연못가로 내려온 월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월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이내 연못가를 거닐며 종이매듭을 풀었다. 그녀가 불러주는 가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허전했으나, 금방 올 거라고 생각하였다.

 

허나 해가 뜰 무렵이 되어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월하는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서운함에 고개를 내저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원래 이랬어야한다고, 진작 쫓아냈어야하는 거였다고, 차라리 스스로 발길을 끊었으니 잘 되었다며 쓸쓸함을 달래고서 월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아홉 번의 보름달이 지나 백월이 뜬 밤, 월하는 연못가를 거닐며 종이매듭을 풀고 있었다. 밤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이 그림자가 되어 땅에 비치고, 백월이 구름 너머로 다시 얼굴을 내밀었을 때에 월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길게 늘어진 월하의 그림자 속에서 그녀가 미소하고 있었다.

 

“언제 온 것이냐?”

 

그녀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그 속에 숨은 저릿한 감정에 월하의 은빛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렸다. 서로 상극인 인연은 함부로 이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월하는 아니기를 바라며 시선을 돌려 연못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이 비친 연못에는 새하얀 달만이 보일 뿐이다.

 

달그림자가 곧 월하의 그림자이며 선인이기에 연못에는 그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음이 이상하지 않다. 허나 그녀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 월하의 미간이 일그러지고 그녀의 눈은 슬픔을 머금고서 호선(弧線)을 그린다. 월하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저는 괜찮사옵니다.”

 

나직한 그녀의 말에 월하는 지그시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월하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나, 그날 월하가 종이매듭을 던져 넣은 화로는 이미 꺼져있었고, 그 화로를 치우던 항아가 발견하고서 그녀가 바란 인연을 엮어준 것이다.

 

그녀에게 감사를 받아야하는 것도 사과해야 하는 것도 월하가 아닌 항아였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보답을 받은 것은 월하이기에 그는 쓰디쓴 한숨을 삼키고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어져서는 안 되는 인연을 엮은 대가를 그녀가 받은 걸 테다. 그걸 감수하고서 그날 밤 종이매듭을 걸었을 테다.

 

“내 다시 물으마. 네 이름이 무어냐?”

 

미심쩍었던 그녀의 이름, 월하는 이제야 의문을 꺼내놓았다.

 

“하영(河影)이옵니다.”

 

삼켰던 한숨을 내뱉고서 월하는 애처로운 눈길로 하영을 마주보았다.

 

“미안하구나.”

 

인간사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기에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화로가 꺼진 것을 살피지 않은 것, 항아를 말리지 않았던 것에 대한 자책감, 월하의 사과에 그녀의 미소가 더욱 깊어진다.

 

“괜찮사옵니다. 저는, 괜찮사옵니다.”

 

착잡한 미풍이 불어오고 고요한 연못에 점점이 파문이 인다. 어느새 밤하늘을 비추던 백월이 저물고 동녘이 밝아오기 전, 월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리에 한송이 고운 꽃이 봉오리를 오므린다. 청아하고도 애처로운 자태에 새하얀 달빛방울이 떨어진다.

 

꽃이 있는 자리는 매번 다르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꽃이 핀 것을 본 적이 없다. 오직 백월이 뜨는 날 밤, 달그림자 속에서 봉오리를 피우기에 아무도 꽃이 핀 것을 본 적이 없다. 오로지 이 세상에 단 한명, 백월이 뜨는 밤 연못가를 거니는 월하만이 알 뿐이다.

 

새하얀 보름달이 뜨는 밤, 청아하고 맑게 울려 퍼지는 달빛을 머금은 향기를...

 

애달프고도 다정하며 상냥한 월향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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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쓰다

I AM MOANA

 

0. 올해로 스물 하고도 여덟이 되었다. 
곧 서른이 되는 스물여덟의 난, 이제 나를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1. 안타깝게도 자아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십 대 초반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고민했다면, 이십 대 중반의 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는지 를 치열하게 고민했었다. 


그리고 이제 후반이 되었다.


후반전을 시작하며 드는 고민은 좀 나아졌냐고? 


아니. 


여전히 막연하다.

 

“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동시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2. 설 연휴를 보내며 가족과 애니메이션 ‘모아나’를 보았다. 주토피아 이후 노래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지루함이 생겨 피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설에 온 가족이 모여 볼 영화도 없었고 뒤늦게 올라오는 입소문에 끌리기도 했고. 그리고 사실 포스터도 별로였다. 남자 주인공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얼굴과 너무 닮았달까.

 

 

단 하나 끌리는 게 있었다면 배경이 열대지방이라는 점. 춥고 춥고 추운 날씨에 에메랄드 빛 바다는 그래도 매력적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영화를 보았고 지금은 그 영화에 반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자아를 찾고 자신을 찾아갔던 모아나와 함께 나는 이제 나의 자아를 찾아가는 글을 써보려 한다. 그래 내가 모안다고 영화 서평을 써본다.           

 

 

 

3. 본격적인 시작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크게 둘이다. 겨울왕국의 엘사와, 주토피아 주디 홉스에 이어 등장한 또 다른 여주인공 ‘모아나’. 모아나는 엘사와 같이 흰 피부가 아니었지만 주디만큼 쾌활하고 적극적이었고,

 

 

 

주디만큼 경찰이 되겠다는 하나의 확실하고 명확한 꿈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엘사만큼 아파했고 성장했다. 어쨌든 이전에 있지 않던 여주인공이란 이야기. 

 

 

그런 모아나와 우정 라인으로 등장하는 ‘마우이’. 마우이는 반인반신이다. 우리나라에도 위대한 반인반신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반인반신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귀엽고 개념 있는 서브주인공. 

 

 

혹시 몰라 작게

 

그는 우람하고 근육질의 남성이지만 그는 작은 벌레로도 변하고 무시무시한 상어로도, 창공을 나르는 독수리로도 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자기의 모습을 바꾸는 마우이를 보며 예전의 나를 떠올렸다.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 아니고)   

 

4. 『사람들의 기대에 부합한다는 건-』     

 

나는 착하다는 소리를 꽤나 많이 들어왔다. 지금이야 착하다는 게 무엇인지, 어떨 때 착하다고 말하고, 왜 착하다고 하는지를 알지만 고딩까지만 해도 나는 착하다는 말이 인생을 참 잘 살고 있다는 말과 동의로 받아들였다.      
그럼 사람들은 언제 착하다고 할까? 그건 잔인하게 말해 크게 두 가지다. 내가 못하거나 귀찮아서 안 하는 일을 네가 대신할 때거나 내 뜻대로 네가 잘 따라줄 때. 

 

이렇게 두 가지의 상황에서 우린 상대방에게 ‘착하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배배 꼬였냐고 묻겠지만 나는 ‘착하다’는 말에 어마어마하게 데었으니 나름 ‘착함’에 대한 권위가 있다고나 할까. 착하다는 말에 현혹돼 내 의지를 늘 포기해왔고, 착하다는 말에 약해져 지켜야 할 걸 지키지 못했으니 난 이제 착하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말할만하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내게 ‘착하다’고 말했던 사람이 아닌 그저 착한 내가 다 지었어야 했고.      

마우이를 보며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마우이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서 버림받는 사람. 그런 사람을 신이 도와 갈고리를 주었고, 그 갈고리의 힘으로 마우이는 신이 되었다. 자신을 버린 사람들을 위해 섬을 일으키고, 물고기를 잡아주고, 멋진 독수리로 변신해 날아다니는 마우이. 


이 모든 일은 착한 마우이, 착한 신, 사람들에게 맘에 들고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태웠던 
마우이의 두려운 마음이 그 시작이었다.        




신도 두려운 것이 있을까. 
모든 것을 만들고 만든 모든 것을 움직일 힘이 있는 신이 두려운 게 있을까. 난 있다고 본다. 자신이 애써 만든 것이 그 의미와 필요가 없어지는 것. 내가 애써 만들었으나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는 것.  신인 마우이도 그 쓸모없어짐에 두려움을 느꼈을 테다. 애써 만든 사람들의 지지와 기대로 만들어진 나의 모습이 더 이상 쓸모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마우이는 어느 정도의 상실감을 느꼈을까. 그 deep deep 한 상실감을 내가 잘 알기에 난 마우이에 나를 빗대, 화면 속 그를 통하여 나를 다시 바라본다.     

 

 

5. 『처음엔. 언제나 발목을 잡히는 법-』  

 

 

모아나는 평화롭고 안전한 섬의 존재다. 이 섬에서 시간만 지나면 그는 부족을 이끄는 장이 되고, 섬의 가장 위 족장들만의 영역에서 그는 자신만의 돌을 올릴 수 있다. 그런 섬을 놔두고 모아나는 드넓은 바다로 향하고 싶어 한다. 모아나는 결국 몰래 배를 이끌고 파도에 몸을 싣는다.  


   

내가 처음 바다로 향했던 순간이 있다. 휴학을 하고 무언가 세상 속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싶다는 목마름이 있을 때. 부산에 살기에 어느 방향으로 가도 바다를 만날 수 있던 난 바다에 앉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치열하게 고민했다.      


봄에 가도, 여름에 가도, 겨울에 가도 그 모습 그대로인 바다는 내게 위로의 공간이자 내 안으로 침잠할 수 있는 세상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 시간 안에서 나는 첫 도전을 결심했고 가열히 도전했다. 그 당시 했던 것은 홀몸어르신 고독사 캠페인. 타인의 일상 속에서 고독사의 현실과 변화를 위해 당신의 쌀을 모은다는 피켓 하나를 들고 했던 내 첫 도전은 매일매일이 무지하게도 괴로웠다.      


어린 날의 치기인가 혹은 도전의 무게인가. 
지금 내가 하는 것은 변화의 시작일까 혹은 실패의 시작일까.      




내 안에서 답을 찾지 못했던, 내가 직면했던 첫 두려움이 모아나에게도 다가왔다. 모아나가 배를 끌고 처음으로 산호 밖으로 나갔던 순간, 산호 밖의 파도는 더 이상 섬의 영역이 아니었고 그만큼 매서웠다. 그 파도 두 번에 배는 뒤집혔고 부서졌다. 모아나는 바다에 잠겼고 바닥에 있던 산호에 모아나는 발목이 끼고 만다.      

 

 

언제나 첫 도전엔 좌절을 맛보기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이 좌절은 실패라기 보단 확인의 과정이 될 테다. 모아나는 파도란 이름의 현실을 확인하는 거고, 나는 무관심의 이름의 현실을 확인했던 것. 이 처음의 좌절에서 재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우린 끝없이 이 기억에 발목이 잡히고 만다.      



마치 산호에 발목이 끼었던 모아나의 첫 도전처럼 말이다.         




       

6. 『잊지 말아야 한다- 정착하는 섬은 재가 된다.』     




모아나가 바다로 나갈 수 있냐 와는 별개로 세상의 어둠은 섬을 삼켜온다. 맑은 소리가 났던 코코넛은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풍족하던 물고기도 산호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어둠은 눈치채지 못한 동안 바로 내 곁까지 다가왔고 안에서부터 섬은 재로 변해간다.      


우린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정착하는 곳은 속도만 다를 뿐 언제나 그 끝은 재가 된다. 그 어디에도 나를 평생 지켜줄 수 있는 섬은 없고, 끊이지 않는 먹거리와 안락한 잠자리가 계속해서 제공되는 곳도 없다. 이젠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건 내가 늘 갖기 위해 불안해하던 것. 그래 난 늘 평생의 ‘정착’을 꿈꿔왔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계신가요? 네! 맞아요! 그게 바로 저예요! 나는 내 삶을 관통하며 ‘불안정’과 ‘불안함’을 경험했다. 누군가 불안하다는 얘길 할 때면 난 나의 지난 불안했던 감정이 올라왔고, 그 감정에 기초한 언어와 나만이 아는 미세한 떨림이 세어 나왔다. 난 이미 단어의 선을 넘어버린 두 단어를 가지고 있고, 이 단어의 합은 ‘가난’으로 좁혀졌다.      


가난한 자가 가지고 싶은 것은 안정이고 확실함이다. 미래에 대한 안정과 확실함. 그러나 너무 슬프게도 세상에 그런 안정과 확실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걸 알았던 건 평생을 정착하고 싶던 터전이 재가 되어 다 타버리고 나서야, 그제야 알았다.      


“모아나야, 떠나! 바로 지금이야!” 영화를 보며 마음속으로 외친 내 소리. 지금 네가 떠나지 않는다면 결국 너의 섬은 재가 되고야 말 거란다. 떠남은 숙명이야. 언제든 우린 떠나야 해. 너의 짐이 가벼울수록, 난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섬은 더 활기차지고 더 오래 있을 수 있단다.         







 

떠남은 숙명이야. 언제든 우린 떠나야 해.










            

7. 『오픈 유어 아이스』     




영화는 중반을 넘어간다. 모아나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파도를 건널 수 있는 큰 배를 찾았고 우리가 어떤 민족의 후예인지를 깨닫는다. (우리는 배달의 민족) 길을 아는 자만이 향할 수 있는 길. 그 길을 향해 모아나는 돛을 열어 바람을 모은다. 다시 생명을 찾아올 거란 자신의 바람과 함께.   
  

바다를 항해하던 민족. 길을 아는 자만이 향할 수 있는 길. 아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을 향해 모아나는 출발한다. 그리고 이 여정에서 모아나는 마우이를 만났고, 나도 만났다. 모아나와 마우이는 갈고리를 되찾기 위해 괴물들의 섬으로 향하고, 그 섬에서 빛나는 것들을 모으는 소라게를 만난다. 소라게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샤이니” (누난 너무 예뻐어)      

 

나는 빛난다고 말하는 소라게를 보며 내가 느낀 감정은 ‘정말 너는 괴물이구나’. 


도덕책인가 바른생활 책인가 어쨌든 이젠 존재하지 않는 옛 교과과정의 교과서를 보면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고 했다. ‘난 사람’과 ‘된 사람’. 하지만 이것보다 우선돼야 할 전제는 과연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사람인가’ 하는 질문.      


소라게가 왜 괴물이 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다. 단순히 덩치가 크다고 괴물이 되진 않았을 테다. 못생기기도 했지만 잘생긴 괴물도 요즘 많으니 이것도 아닌 셈 치면, 소라게 네가 괴물이 된 건 자신을 찾지 못하고 빛나는 것들로 널 치장하고 거기에 매몰되서야. 아주 단순히 말해 빛나는 것들로 치장할수록 우리의 내면에선 어두운 것이 나오고, 어두운 것으로 날 덮을수록 내면의 가치가 빛나 보이는 법이란 거지.      


난 누구보다도 빛났던 소라게가 괴물의 세계에 있는 걸 보며 어쩌면 우린 모두 한 끗 차이로 괴물과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잃은 채 더 멋진 것, 더 비싼 것, 사람들이 더 우와 아아 하는 것을 모으는 데 우선하면 내가 누군지 아는 사람과 사람들의 기대에서 벗어나 혼자 서려는 두 존재가 ‘네가 그 괴물이구나’ 하면서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돈은 좋지만 괴물보단 난 사람이 되자. 아니 된 사람인데 조금 여유롭게 사는 된 사람이 되자.                  




   

8. 『I am Moana』     




모아나에서 나왔던 노래 중에 어느 노래가 가장 좋았냐 묻는다면, 난 단언컨대 배를 타고 산호섬을 벗어나며 사자후처럼 외쳤던 “I AM MOANA" 이 부분이다. 나는 과연 내가 나라고 세상에 대고 소리칠 수 있을까. "나는 바람꽃이다!"라고 난 노래부를 수 있을까.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간다. 이십 대 후반인 내가 또 한 번의 설을 보내며 가진 질문. 
“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난 이제 어느 정도 나를 찾았다. 내가 싫어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이게 저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다. 영화를 보며 원큐로 위의 두 질문까지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모아나를 보며 나는 뜻밖의 나를 다시 보게 된다. 아니 정확힌 자신이 갈 길을 아는 모아나와 나와 너무나 닮은 마우이를 보며.      


이 글은 마루와 함께 하는 매거진 쓰다의 내 첫 글이다. 첫 글의 맛은 시다. 눈이 저절로 감길 정도로 내게 시큼한 이야기다. ‘신글’ 카테고리의 첫 스타트를 끊으며 신글답게 다음 글로 내 고민을 넘긴다.       








“내가 누군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는 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이게 바로 저예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내가 하고 있는 건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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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같은 인생

'엄마의 빗질과 머리끈' 카네이션:carnation

'엄마가 많이 늙었구나.'

매일같이 얼굴을 보니까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이듦'이었는데, 새삼 엄마의 세월이 빨리도 흘렀구나 느껴졌다.

늦은 밤, 자고 있는 엄마를 보니 눈덩이까지 내려앉은 주름이 그동안의 삶의 무게를 말해주는 것 같아 코끝이 시큰해졌다.

우리 엄마가 젊었고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내가 2학년 때 처음 머리를 스스로 묶었으니까) 엄마는 예쁜 머리끈을 자주 사서 머리를 묶어주셨다. 딸을 사랑하는 엄마의 사랑을 표현의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은 작고 앙증맞은 꼬마가 새겨진 머리끈,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작은 구슬이 달린 끈, 장식은 달려있지 않지만 형광색이 포인트인 긴 끈까지...

너무 세게 묶어서 종종 내 눈이 여우눈처럼 치켜올라가곤 했지만 내 전문 미용 선생님의 손길이 참 좋았더랬다.

예쁘게 묶인 머리를 보고 부러워하던 친구들도 많았다.(아마도 맞벌이 부모님을 둔 까닭에 상황상 단정한 빗질은 어려웠을 거다)

지금은 엄마 손은 다소 투박해졌고 쪼글쪼글하다. 내일은 왠지 엄마한테 내 머리를 부탁하고 싶다. 나는 아직도 어리고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늘 30대다.

모정, 부인의 사랑.

카네이션의 꽃말이다. 우리집 곳곳에는 카네이션이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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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같은 인생

'슬프고 괴로운 사랑의 쓴맛' 아네모네 anemone : 바람꽃

배신, 속절없는 사랑, 기대, 사랑의 쓴맛...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웠어요. 당신을 사랑하기에 저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 비록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아네모네의 꽃말은 슬프고 괴롭다. 부정적인 뉘앙스의 저 말들의 공통점이라면 이뤄지지 않은 사랑, 혹은 이별 뒤 쌉싸름한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 '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의 사랑이야기'는 아네모네를 더욱 사연있는 꽃으로 만들어준다. 

먼 옛날, 키프로스 섬에 살고 있는 키니라스 왕에게는 미르라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딸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던 왕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보다 미르라가 더 아름답다'고 말했고, 이 사실을 안 아프로디테는 미르라가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는 저주를 내리게 된다. 

죄책감과 수치스러움, 절망감으로 가득찬 나날을 보내던 미르라. 그녀의 자초지종을 들은 유모는 아무도 모르게 키니라스 왕과 동침하도록 뒤를 봐준다. 후에 미르라는 아이를 잉태하게 됐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미르라를 죽이려 한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미르라는 신들에게 자신은 죽어도 좋으나 아이만큼은 살려달라고 기도한다.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는 이를 불쌍히 여겨 미르라를 몰약 나무로 만들어 산 목숨도, 죽은 목숨도 아닌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미르라는 요정들의 도움으로 건강한 아이를 출산한다. 이렇게 태어난 아기가 '아도니스'다.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저승의 신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에게 맡겼고,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서 아름다운 청년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사랑하게 된다. 이에 페르세포네에게 아도니스를 빼앗으려 하지만, 페르세포네 역시 만만치 않게 아도니스를 사랑하는 상황. 

과정이야 어쨌든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했다.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에게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나 곁에 두고 싶은 건 신들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매일같이 함께 사냥에 나서기에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로디테는 잠시 아도니스의 곁에서 떨어지게 되는데 하필 그날 아도니스는 멧돼지에게 겁없이 덤벼들다 날카로운 엄니에 찔려 숨을 거둔다. 당시 아도니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멧돼지는 아프로디테의 전 연인인 전쟁의 신 아레스가 변화한 것이었다.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가 흘린 붉은 피 위에 향기로운 신주 '넥타르'를 뿌렸고, 그 자리에서는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아네모네다. 

 

아네모네는 다른 말로 '바람꽃'으로 불린다. 아네모네라는 이름도 그리스어로 바람을 뜻하는 anemos에서 유래됐다.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아도니스처럼 살짝 부는 바람에도 꽃잎이 떨어진다. 비록 꽃이 피어있는 기간은 짧지만, 그럼에도 아네모네는 피어있을 때만큼은 아름답고 또 아름답다. 하늘하늘 벨벳같은 꽃잎의 질감, 보기만해도 취하는 꽃잎의 색감... 한창 아름답게 피어있던 아도니스처럼.

 

*아네모네는 9~10월 가을에 심어져 이듬해 이른 봄에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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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같은 인생

'충분히 예뻐' 러넌큘러스 Ranunculus:개구리눈알

개구리 눈알처럼 꽃 얼굴이 동그랗고 큰 '러넌큘러스'의 꽃말은 '매력', '매혹', 그리고 '비난하다'다.

하늘하늘 거리는 꽃잎이 겹겹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면 황홀하기 그지없다. 꽃말처럼 꽃 자체가 매력적이고 매혹적이다.

희고 은은한 핑크 색상은 웨딩 부케로도 많이 쓰이는, 신부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꽃들 중 하나다. '하노이'라고도 불리며 꽃이 다른 색상보다 크고 풍성한 것이 특징.

또 다른 꽃말 '비난하다'는 의외이지만, 비난하는 사람에게 혹은 미워하는 사람에게 이 꽃을 선물하거나 받음으로써 마음속 앙금이 녹아내릴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최근 5개월 동안 운동에 나태해지고 먹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었는지 5kg이 늘고 말았다. 여자의 평생 숙제가 다이어트라는 말이 있다. 원래도 몸무게에 민감했지만, 불어버린 몸무게를 보고 화가 치밀어올랐다. 1,2kg이면 열심히 운동해서 한 달 안에 돌려놓으면 돼 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뜻밖의 숫자에 허탈함이 더 크게 밀려왔다. 레프트 훅 라이트 훅, 양훅으로 머리통을 강타당한 느낌이었다. 반격을 하고 싶지만, 무기력해졌다. 그리고 그 무기력함은 곧 나 자신을 향한 비난으로 바뀌었다. 

일하기도 싫어졌고, 타인과 말을 섞는 것도 싫어졌다. 평소 좋아하던 쇼핑도 하기 싫었다. 사봤자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일거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남았던 화요일 오후 집에서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야 도착하는 큰 화원에 갔다. 

축축하지만 싱그럽고, 따뜻한 풍경일 것 같지만, 시끄럽고 분주한 꽃 도매점.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매력적인 노란 러넌큘러스와 디디스커스 한단씩을 샀다.

내가 나에게 건네는 화해의 선물이었다. 

'매력적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마음은 버리는 게 어때?' 

왔다 갔다 왕복 두 시간은 너무 긴 시간이었지만, 손질해서 물병에 꽂아놓은 꽃들을 보니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도 풀리고, 움츠러들었던 내 마음이 조금씩 다시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올망졸망 작은 꽃들이 모여 피어있는 디디스커스와 풍성한 얼굴의 러넌큘러스로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알기에 화원으로 무작정 향한 내가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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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奇

비밀의 화원

 

비밀의 화원

 

“저기는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알겠지?”

 

소녀의 말에 소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소녀가 얘기해주지 않아도 소년은 이 저택에서 일하게 된 첫날 시종장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후원에 있는 화원에는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별 다른 반응이 없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콧소리를 냈다.

 

“흐응.”

 

소녀가 들어가지 말라며 엄포를 놓은 후원의 화원은 거대한 돔 형태로 전체가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져 있다. 소녀의 모친인 귀부인이 살아생전 가장 좋아했던 장소로 그녀 자신과 딸 이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장소이다. 심지어 귀부인 자신의 남편이자 소녀의 부친인 백작조차도 말이다.

 

반응이 시원찮은 소년의 모습에 소녀는 입매를 슬며시 말아 올리며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소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소년은 흠칫거리며 눈동자를 굴려 새하얀 조각 인형 같은 옆모습을 흘끗거렸다. 소년의 시선을 느꼈는지 소녀는 시선을 마주하며 간지럽게 속삭였다.

 

“들어가면 엄청 혼내줄 거야.”

 

소년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내용보다 귓가에서 느껴지는 소녀의 숨결과 달콤한 목소리에 당황한 것이다. 놀라서 동그래진 눈 아래로 새빨갛게 물든 소년의 양 볼을 보며 소녀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소녀의 새빨간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위험하리만치 반짝거렸다. 마치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눈빛이었다.

 

늦은 밤. 잠이 깬 소년은 문득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 앉아 간이침대 옆에 높인 주전자를 들어 물을 마시려했으나. 주전자는 텅텅 비어 있었다. 소년은 주전자를 들고 조용히 방을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주전자를 채우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로 나온 소년은 창문으로 쏟아지는 밝은 달빛에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에 둥그렇게 뜬 보름달이 보였다. 정원에는 노란 달빛이 잔디 위로 푸르스름한 그림자를 띠우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소년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내 뭔가 발견한 듯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얇은 잠옷 위에 하늘거리는 가운을 걸친 소녀가 정원에 있었다. 소녀는 소년이 바라보는 정원을 가로질러 후원으로 향했다. 소년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소녀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그러다 소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소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주전자를 바라보며 정신을 차렸다. 소년은 괜히 멋쩍은 듯이 코를 씰룩이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왜 이런 늦은 시간에 후원엘 가는 거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대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소녀의 아침 식사를 챙겨들고 방으로 들어선 소년에게 소녀는 잠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다가왔다. 얇은 잠옷 너머로 비치는 소녀의 뽀얀 속살에 소년은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어제 봤지?”

 

“뭐, 뭘. 말입니까?”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소년의 반응에 소녀는 그저 키득거리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았다. 소년은 잔뜩 긴장한 채 소녀의 앞에 아침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소녀가 식사를 하는 동안 소년은 그 옆에서 바짝 굳은 자세로 그녀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나?’

 

소년의 그런 의문 속에서 소녀의 아침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소녀가 입가를 닦고 일어나는 동안 소년은 빈 접시를 옮겨 담은 뒤 방을 나왔다. 빈 접시를 부엌에 가져다주고 난 뒤에 소년에게 남은 건 오늘 아침 도착한 우편물 분류 및 각종 잡다한 심부름이었다.

 

어린 소년이 할 만한 잡다한 모든 일은 당연히 소년의 몫이라는 듯이 돌아오는 상황에 쉬지도 못하고 오전 내내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잠깐 쉴 틈이 생긴 소년은 본관과 별관 사이의 작은 마당에서 목을 주무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푸른 하늘에 포근해 보이는 새하얀 뭉게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따뜻한 햇살을 머금은 바람은 소년에게 상쾌함을 날라다 주었다. 하늘을 향해 답답함을 내쉬어 날려 보낸 소년은 목과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조금이나마 개운해진 몸으로 다시 제 할 일을 하러 가려던 소년은 문득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온실에 시선이 멈췄다. 그 화원이었다. 시종장도 소녀도 들어가지 말라던 그 화원이었다.

 

‘위험한 거라도 있는 걸까?’

 

위험한 게 있다면 어린 소녀 혼자서 제 맘대로 드나들 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것도 그리 늦은 야밤에 말이다. 그런데 왜 들어가지 말라는 걸까? 뭔가 봐서는 안 되는 거라도 있는 걸까?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투명한 유리의 화원으로 다가갔다.

 

- 끼익.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가지 말라고 해놓고 정작 문을 잠그지 않다니. 소년은 이런 모순이 어디 있나 싶었다. 열린 문 사이로 고개만 들이밀고 두리번거리는 소년의 코에 달콤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짙은 단향에 소년은 주춤거리며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햇살을 가득 머금은 유리 화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꽃이었다. 크고 화려한 꽃, 풍성하고 요염한 꽃, 단아하고 탐스러운 꽃, 작고 앙증맞은 꽃. 꽃. 꽃. 꽃...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온통 꽃뿐이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소년은 경고도 잊은 채 넋을 놓고 천천히 화원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소년의 입에서는 연신 감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꽃에 정신이 팔려버린 소년은 자신의 등 뒤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들어오면 혼내 준다고 했는데.”

 

“아, 아가씨?!”

 

화들짝 놀란 소년이 고개를 돌리니 소녀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앙증맞은 입술로 웃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소녀의 미소에 주눅이 든 소년은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어 펼쳤다. 소녀의 손바닥에는 작은 Fortune Cookie가 놓여있었다.

 

“이거 먹어. 그럼 용서해줄게.”

 

행운의 면죄부라는 생각에 소년은 망설임 없이 소녀의 손에서 쿠키를 낚아채 입안에 집어넣었다. 바삭한 쿠키가 부스러지며 안에 있던 고소한 견과류가 씹혔다. 행운의 쪽지 대신 넣어 만든 건가 보다.

 

- 아작. 아작.

 

소년이 쿠키를 완전히 다 먹은 것을 확인한 소녀는 옆으로 비켜서며 유리 화원의 문을 가리켰다. 마치 그만 나가보라는 듯이 점잖은 태도였다.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원을 나왔다.

 

그날 밤. 소년은 무언가 간지러운 느낌에 잠에서 깼다. 소년은 잠에 취한 멍한 눈으로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내 가슴께 부근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소년은 불안한 눈으로 옷깃을 들춰보았다. 딱히 이상한 건 없었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자꾸 간지러웠다.

 

‘뭐지? 옷 안에 뭐가 들어갔나?’

 

소년은 옷 안에 머리카락이나 먼지라도 들어간 건가 싶어 웃옷을 벗어 털었다. 탈탈탈- 소리가 날만큼 세차게 털어낸 소년은 다시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어느새 간지러움은 사라져있었다. 소년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소년은 눈을 뜨자마자 주전자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목이 너무 말랐던 것이다. 얼마나 갈증이 심했는지 반이 넘게 차 있던 주전자를 쉬지도 않고 텅텅 비워버렸다. 소년은 그제야 좀 갈증이 가셨는지 창문을 열어 방을 환기시키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우편물을 분류하고 전달한 뒤 잡화점과 서점, 식료품점을 들리며 필요한 물건을 주문해두고 돌아오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소년은 빵은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스프를 마셔버리고는 우물로 향했다. 우물에서 막 길어 올린 시원하고 차가운 물을 정신없이 마셔대는 소년의 모습에 다들 걱정스레 수군거렸다.

 

“더위라도 먹은 거 아냐?”

 

“에이. 지금이 한여름도 아니고 화창한 봄에 더위라니.”

 

“저거 괜찮은 거 맞아? 어디 아픈 거 아냐?”

 

최근 며칠 사이 소년은 음식은 거의 먹지 않으면서 틈만 나면 물만 마셔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다들 수군대며 셔츠 앞섶이 다 젖도록 물을 마셔대는 소년을 힐끔거렸다. 이제 막 16살이 된 소년의 아직 앳된 가슴팍에 젖은 셔츠가 달라붙어 어딘가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반백의 시종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다들 뭘 멀뚱거리며 서있어. 어서 제자리로 가.”

 

그 호통에 숨도 안 쉬고 물을 마시던 소년도 축축해진 셔츠 앞섶을 털어내며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나이 지긋한 시종장은 그런 소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몸을 돌려 본관으로 향했다.

 

그날 밤. 소년은 부엌에서 주전자에 물을 채우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그때 그 쿠키를 받아먹었던 그날부터인 게 분명하다고. 내일 소녀에게 꼭 물어봐야겠다고 말이다. 대체 그 쿠키의 정체가 뭐였는지. 그렇게 생각하며 물을 마시던 소년은 주전자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금방 채운 주전자의 물은 소년이 부엌을 나서기도 전에 비어버린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수시로 몰려드는 갈증에 소년은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고 잠도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밤만 되면 명치부근이 가려워져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소년의 피부는 더욱 매끈하고 탱탱해졌고 안색은 더 말갛게 바뀌고 있었다. 마치 물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듯이 말이다. 소년은 비어버린 주전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터덜터덜 걸어서 마당에 있는 우물로 향했다.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어 올린 소년은 두레박 째로 물을 마셨다.

 

소년의 턱과 목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옷 앞섶을 적셨다. 소년은 그것도 모른 채 다시 물을 길어 올리고, 마시고, 다시 두레박을 내리고, 올리고...거의 새벽까지 그렇게 물을 마신 소년은 그제야 겨우 참을 만큼 해소된 갈증에 간신히 잠을 청하러 방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소녀의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 대기하고 있던 소년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아가씨.”

 

“왜?”

 

“그때 저한테 주신 쿠키 말인데요.”

 

“응. 그 쿠키가 왜?”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당당한 모습에 소년은 어쩔까 망설였다. 괜히 소녀를 의심했다가 자칫해서 오해라도 사게 되면 쫓겨나는 걸로는 안 끝날 것 같았다. 소년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뇨. 왜 포춘 쿠키에 쪽지가 없었나 해서요.”

 

소년의 말에 소녀는 진분홍 입술을 말아 올리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쪽지보다 더 좋은 걸 넣어줬잖아.”

 

소녀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식사를 마저 했다. 그런 소녀의 뒤에서 소년은 내심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왜 자꾸 목이 마르고 간지럽냔 말입니다?!’

 

역시 수상했다. 소녀가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데. 대놓고 묻기에는 소년이 훨씬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소년은 일하면서 물을 마시면서 머리를 굴렸다. 대체 그 쿠키 안에 있던 게 무엇이었는지. 어찌해야 이 갈증과 간지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어디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지.

 

‘역시. 그 화원이 수상해. 뭔가 있는 거야.’

 

해가 저물고 집안의 인기척이 잦아들면서 보름달이 밤하늘에 떠올랐다. 소년은 쿠키를 받아먹은 한 달 만에 다시 유리 화원의 문 앞에 멈춰섰다. 혹여나 그날처럼 소녀가 오지 않을까 싶어 근처에 숨어 지켜보았지만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숨어 있던 소년은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 끼익.

 

역시나 잠겨있지 않았다. 소년은 살금살금 걸음을 죽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한밤중인데도 화원 안은 밝았다. 커다란 만월의 빛이 유리를 통해 더욱 환하게 비춰 들어오는 듯했다. 짙게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에 취해버릴 것 같았다. 소년은 머리를 내저으며 주변을 살피면서 화원 깊숙이 들어갔다.

 

노랗게 반짝이는 달빛 아래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달콤한 향은 달빛을 따라 흐르는 듯이 화원 안을 가득 메워 숨을 쉴 때마다 폐를 들락날락거렸다. 결국 향에 취해버린 소년은 홀리기라도 한 듯이 화원의 중앙에 서서 꽃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금실 은실로 자아낸 달빛을 반사시키듯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았다.

 

그런 귀한 꽃들을 감상하던 소년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바로 정면에 있는 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은 꽃잎은 겹겹이 펼쳐져 풍성했고 꽃을 받치고 있는 줄기는 매끈하게 내려와 뽀얀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꽃을 피운 소년은 물빛 곱슬머리에 짙푸른 눈을 한 채 뽀얀 나체를 드러내고 앉아있었다.

 

“이...이게. 무슨...?”

 

소년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경악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사방을 둘러보니 꽃 하나에 소년 하나였다. 하나 같이 앳되고 뽀얀 나체를 드러낸 아름다운 소년들이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을 피운 채 앉아있었다. 그 광경에 불길한 기운이 스쳐지나간 듯 소년의 등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도망쳐야했다.

 

‘나가야 돼. 여기서. 이 저택에서!’

 

뒤돌아선 소년은 한걸음도 떼지 못한 채 주저앉아버렸다. 어느새 온 건지 소녀가 웃으며 서 있었다. 소녀는 주저앉은 채 뒤로 기는 소년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속삭였다.

 

“도망가려고? 여기서 나가면 죽을 텐데?”

 

새하얗게 질린 소년의 뺨으로 소녀의 손이 다가왔다. 소녀는 다정하고 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리며 미소 지었다. 소년의 이성은 일어나라고 도망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으나. 다리가 풀려버려 도무지 일어설 수가 없었다. 소녀는 겁에 질린 연녹색 눈을 들여다보며 소년의 명치부근을 어루만졌다. 소년이 밤마다 가려워했던 부위였다.

 

“어떤 꽃이 필지 궁금하지 않아?”

 

“아. 안. 궁금해요. ㅅ...살려줘요.”

 

소년의 애원에 소녀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프지 않을 거야. 죽지도 않을 거고. 여기서 나와 함께 사는 거야.”

 

소년의 심장부근에서 어깨로 움직이는 소녀의 손을 따라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소년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싱싱하고 푸른 줄기가 소녀의 손을 따라 뻗어 나왔다. 어느새 소년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 뻗은 줄기의 끝에 작게 꽃봉오리가 맺혔다. 소년의 시선이 그 꽃봉오리에서 멈췄다.

 

“아. 어, 어째서? 왜?”

 

“울지 마. 울면 말라버려. 시든단 말이야.”

 

소녀의 마지막 말에 소년의 눈에 공포가 스멀거리며 차올랐다. 말라버리면 시든다. 그럼 정말로 죽을 것이다. 소년은 안간힘을 쓰며 몸 밖으로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소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어린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말했다.

 

“괜찮아. 볕이 좋은 곳에 앉게 해줄게. 물도 꼬박꼬박 줄 거고. 혼자가 아니니까 외롭지도 않을 거야.”

 

소녀의 붉은 눈이 소년의 연녹색 눈을 들여다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희고 가느다란 팔이 다가와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소녀는 슬며시 고개를 올려 소년이 피워낸 꽃을 바라보았다.

 

“역시. 예쁠 줄 알았어.”

 

소녀의 작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자아내고, 소년의 귓가에 맴도는 소녀의 목소리에서 가슴 설레는 희열이 퍼져 나왔다. 소년은 차마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겨우 돌려 꽃을 바라보았다. 방금 피어난 싱그러운 꽃이 소년의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옅은 레몬빛을 띤 연녹색의 동그란 꽃잎이 서로 촘촘하게 겹치며 피어있다. 청초하고 탐스런 꽃은 달을 향해 달콤한 향을 뿜어냈다. 소녀는 더 없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소년을 꼬옥 안은 채 그 꽃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년은 그런 소녀의 품에서 울지도 못한 채 그저 멍한 눈으로 자신이 피워낸 꽃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믿지 못할 현실을 부정하듯이 말이다.

 

화원을 뒤덮은 투명한 유리 너머로 금가루와 같은 달빛이 흘러들어왔다. 따스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달빛은 기묘하고 아름다운 화원을 비추었다. 마치 아무도 보아선 안 될 것을 그 혼자 감상하는 듯이...

 

 

“저기는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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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벚꽃 같은 그대

 

벚꽃 같은 그대

 

땅 위에는 하얀 벚꽃 잎이 깔려있고 머리 위에는 달빛에 새하얗게 빛나는 벚꽃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달빛 아래 벚꽃을 밟으며, 벚꽃을 올려다보며, 사뿐사뿐~ 나풀나풀~ 걷는 여인을 한 사내가 조용히 뒤따른다.

 

바람에 벚꽃 잎이 흩날리고, 바람에 여인의 새까만 머리가 살랑거린다.

흩날리는 꽃잎처럼 춤추듯 걷는 여인을 사내는 아련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따라 걷는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빙글. 사내의 말에 몸을 돌리는 여인의 벚꽃 같은 옷자락이 나풀거린다.

여인의 고운 얼굴은 밤하늘의 달 마냥 환하게 미소 짓는다.

 

“좋아요. 너무나 아름답고...좋아요.”

 

벚꽃이 좋다는 것일까? 그녀를 뒤따르는 사내가 좋다는 것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

벚꽃이 아름답다는 것일까? 그녀를 뒤따르는 사내가 아름답다는 것일까? 이것도 둘 다 일까?

 

그녀의 말에 사내의 단정한 입매가 ‘못 말리겠군요.’라는 듯이 미소 짓는다.

앞서가는 여인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에 사내의 옅은 옷자락이 펄럭 거린다.

 

여인은 바람에 날리며 떨어지는 벚꽃 잎을 향해 손을 뻗어보지만

꽃잎은 매정하게도 여인의 손을 스쳐 떨어져 내린다.

 

그 모습을 보던 사내가 다가와 여인의 양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살며시 감싸 잡는다.

그 위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벚꽃 잎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는다.

 

여인은 기쁜 듯이 손을 포개어 꽃잎을 덮고 잠시 눈을 감더니 곧 입김을 불어 꽃잎을 날려 보낸다.

사내가 살풋- 웃더니 여인에게 묻는다.

 

“소원이라도 비셨습니까?”

 

“네. 꼭 이뤄달라고 빌었어요.”

 

“무엇을 비셨습니까?”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보는 사내를 마주보던 여인이 짓궂게 웃는다.

 

“안 가르쳐 줄래요.”

 

빙글. 여인은 다시 몸을 돌려 저만치 사뿐사뿐 꽃잎 위로 걸어간다.

그런 여인의 뒤를 사내는 조용히 웃으며 다시 따라 걸어간다.

 

* * *

 

가로등 불빛에 붉은 빛을 띠며, 달빛에 창백한 빛을 띠며 벚꽃 잎이 바람에 하늘거리며 흩날린다.

그 벚꽃 길을 새까만 머리를 흩날리며 걸어가는 여자를 남자는 느긋하게 걸으며 따라간다.

 

“예쁘다.”

 

빙글. 몸을 돌리는 여자 주변으로 바람결에 흩날리던 벚꽃 잎이 휘감긴다.

그녀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생긋 웃는다.

 

“그거 알아?”

 

“뭔데?”

 

살짝 미소 지으며 되묻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떨어지는 벚꽃 잎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꽃잎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가 픽- 웃더니 다가와 여자의 양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가만히 감싸 잡는다.

그 손 위로 벚꽃 잎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는다.

 

여자는 조금 놀란 듯 감탄한 듯 멈칫하더니 손을 포개고 잠시 눈을 감는다.

잠시 후 살며시 눈을 뜬 여자는 입김을 불어 벚꽃 잎을 날려 보내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데.”

 

“뭘 빌었는데?”

 

묘한 미소를 짓던 여자는 빙글. 몸을 돌리고 몇 걸음 걸어가더니 가로등 아래에서 멈춰 선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벚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향해 돌아선다.

 

“안 가르쳐죠.”

 

여자의 말에 조금 맥 빠진 듯이 웃던 남자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간다.

남자는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안 가르쳐줘도 괜찮아. 나도 같은 걸 빌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