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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망각을 불허합니다

 

 

 

  망각이라는 능력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요즘 종일 찌는 날씨에 눈사람 사진을 보며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여름 만 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지난 겨울엔 너무너무 추워서 빨리 여름이 되어 해변에 놀러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 계절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오면 한파에 몸을 떨며 내가 경험한 폭염을 잊고 빨리 겨울이 끝나기만 바랄 것이다.

 

 오늘 퇴근길에 선릉역 부근을 걷다가 6411 버스를 보았다. 익숙한 번호인데 뭐였지, 하며 지나치려다가 그게 뭔지 불현듯 떠올라 걸음이 느려졌다. 매일 새벽 강남 지역으로 청소일을 하러 다니는 투명인간들이 타는 버스.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한 정치인의 연설에 등장했던 그 버스였다. 우는 사람들 앞에 훤히 웃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며 마지막 국화를 올리고 온지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으면서, 추도식도 영결식도 그렇게 꺼이꺼이 울며 봐놓고서, 다른 일들로 머릿속이 덮여 또 나는 잘 지낸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대단한, 자꾸 무언가를 잊게 하는 능력이 나를 별 탈 없이 잘 살게 해준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두통을 달고 살아도 좋으니 지우지 않고 싶은 일.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가 생전 속했던 정당에 후원금을 내기로 결심했다. 아주아주 적지만, 이번 달부터 다달이 빠져나가면, 출금 문자를 마주하며 그날 본 영정사진과 6411번 버스, 솔베이지의 노래, 그리고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라 형을 좋아했어요"라며, 누군가가 울음을 참으며 읽던 편지가 계속해서 떠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은 후원도 참 이기적으로 하는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파랗지만 시원하지는 않은 하늘을 보며 밭은 숨을 뱉는다. 부디 내 기억을 보조해주길. 기억을, 마음을, 정의를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나 말고도 아주 많이 생겨나 더 나은 세상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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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캔버스에 여백, 2018.

 

 

 

  회화에 있어 여백이란 배경을 그대로 비워둠으로써 캔버스 위 작은 설국雪國을 입맛대로 상상하게 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또는 반대로 여백이 아닌 부분에 시선을 더 오래 두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실은 퇴근길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읽은 이 글 때문에 갑자기 든 생각이면서, 기어이 ‘상상력을 숨겨두고 살 만큼 마음이 메마른 사람은 되기 싫다’는 거창한 핑계를 내세우며 취미 미술반에 등록했다. 하지만 첫 수업이 있던 날, 비장한 표정으로 건물 앞에 다다른 나는 화실 문턱을 넘자마자 그만 머리에 피도 채 마르지 않은 여고생의 마음이 되고 말았다. 12년 만에 처음 잡아본 4B연필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희멀건 손가락과 흰 도화지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나는 이왕 철딱서니 없이 시작한 일, 첫 날엔 공쳐도 괜찮다며 철없는 자기위안에 빠져들기로 결정했다. 능청을 떨며 자분자분 주변을 살피니 화실의 모습이 꼭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제목을 붙이자면 『Hello Strangers』, 91×65.2cm, 캔버스에 유채, 2018. 정도가 어떨까.

 

  한 타임 당 예닐곱 명에 불과한 소규모 클래스였지만, 강사 1명이 2시간 동안 우리 모두의 그림을 꼼꼼히 돌봐주기엔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인이 된 후의 첫 그림에 대한 살뜰한 보살핌을 바랐던 내게 선생님의 깃털처럼 가벼운 눈빛은 그다지 만족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감동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4B연필에 뭐 사연이라도 있어요? 계속 노려보네. 낯설지만, 그보다 더 냉랭한 수업시간의 분위기를 단번에 풀어줄 만큼 다정한 목소리. 나는 그날 화실에서 진이를 처음 만났다.

 

  수업이 끝난 건 오후 4시가 갓 넘어 이른 시각이었지만 목을 축이기엔 커피보다 맥주가 나을 것 같아 근처 호프로 이동했다. 나보다 석 달 먼저 화실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진이는 아버지를 그리는 게 목표라 했다. 가족애가 남다른가보다 싶어 나도 보조를 맞추려 우리 집 식구들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자 그는 술이 들어가서 말이 술술 나오냐며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뺨이 봉숭아처럼 물든 뒤에는 술잔에 술을 따르듯 자기 이야기를 술술 흘렸다.

 

  내가 아주 작았을 때 올려다본 아버지는 그냥 큰 사람이었어. 물론 모든 아버지들이 그런 경향이 있지만 내 아버지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그래보였지. 왜 그런 형용사 있잖아. ‘크다, 넓다, 단단하다’ 같은 말… 왜 사람이 나이 들면 잔뜩 쪼그라들고, 그래서 불쌍해 보이고, 연민을 자극하는 모든 수식어가 덕지덕지 붙어서 꼭 콩떡처럼 된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아직도 아버지는 그냥 대문자야. 저 혼자 우뚝 선 알파벳 대문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

 

  하지만 자기의 주관을 갖고 붓칠을 할 수 있게 된 시기부터는 긴 면이 고작 41센티 정도 되는 화폭 안에도 그를 집어넣을 수 있다고, 심지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꼬마병정만큼 줄여서 그릴 수도 있다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병정만치 자그마하게 아버지를 그리면 그 옆엔 무얼 둘 거냐고 물었더니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단다. 파란 하늘도, 깨끗한 물도, 보기 좋은 꽃도, 건강해 보이는 강아지도, 아내도 아들도 전부 그의 곁엔 놓고 싶지 않다고.

 

  술자리가 마무리되고 밖으로 나와 발을 내딛은 길 위에서 혀도 다리도 꼬여버린 진이는 비탈길을 비틀길이라 우겨대기 시작했다. 물기 가득한 그의 혀에서 툭 튀어나오는 오타誤打가 마치 내 심장 중앙에 콩 콩 점을 찍는 것처럼 느껴져서, 들키지 않으려 쿵 쿵 큰 보폭으로 앞서나갔다. 나는 진이가 좋았지만 당장 그걸 알리고 싶진 않았다. 그가 깨닫는 때가 온다면, 서로가 감춰둔 빈 화폭 위에 점 하나 찍어도 웃어넘길 수 있을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틀비틀 비틀길을 걷던 진이는 딱 한 잔만 더 하자며 나를 불러 세웠다. 오늘만 살 거냐고 묻는 내게 속 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소주잔을 앞에 두고 영 횡설수설하던 그는, 그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크고 단단하기만 한 병정 곁에 꼭 무언가를 내줘야 한다면 하얀 눈밭을 선물해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진짜 눈을 줘야지. 스키장 같은 데서 퍼다가 부어버리는 건 안 돼. 그건 진짜 눈이 아니니까. 가짜 눈엔 붓질도 안 될걸. 내 여백을 그런 식으로 망칠 순 없지.

 

  그리고 그 위엔 옛날의 공기를, 그 공기 안의 기억과 기분과 마음 따위를 떠다니게 할 거라고.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들이라 물감으로 덧칠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라고. 그래서 그걸 그릴 수 있게 될 때까지 비틀길을 넘어 화실에 다닐 거라고, 그는 말했다. 그럼 우리가 언젠가 화실에서 만날 수 없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 날이 너에겐 축일祝日이겠구나. 하얀 눈밭 위엔 네 숨, 엄마 숨, 날숨 그런 걸 올려둘 테니. 그럼 그 날 비로소 가족이 완성될 테니. 진이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연거푸 세 번이나 원 샷으로 소주를 들이켰다. 절대로 아버지를 따뜻하게 그릴 수 없는 사람. 하지만 그의 곁에 둔 여백을 세상 가장 오랫동안 지켜볼 사람. 나는 진이가 그릴 눈밭의 기온이 영하권으로는 내려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흰 여백에 쌓인 진짜 눈이 녹아버리면 다시 흰 물감으로 눈을 퍼와 노병老兵의 여백을 지켜줄 신병新兵의 모습을 상상했다. 짐짓 하품을 하며 빈 잔 위로 흘린 두어 방울의 눈물과 이게 바로 참이슬이라는 농담을 흘리는 진이의 한 마디를, 나는 그냥 흐르도록 두었다.

 

  어떤 남자에게 여백이란 희미해진 과거의 원망들을 캔버스 위에 까무룩 내려놓음으로써 더 이상 이슬에 취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도구로 쓰인다. 그게 아니라면, 실은 그 흰 벌판을 단 한 번도 가까이에서 마주하지 못한 아버지의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등바등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하얀 욕심 같은 것. 그의 여백이 완성되는 날, 나는 이런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여백』, 333×218cm, 캔버스에 수채, 2018.

 

 

 

 

                                                                  작년 겨울, 그림을 그리던 친구를 보며 썼던 <그 남자의 여백>이라는 글에

                                                                                                                조금 살을 붙여 다시 써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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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

사랑

“일종의 편린이지, 인생 자체가. 무엇 하나 완성된 게 없이.”

 

2년 만에 만난 그녀는 눈에 띄게 수척해 있었다. 몇 년의 시간이 얼굴에 사정없이 폭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것 같았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언니, 동생으로, 같은 과 동기로서 친하게 지내다가, 대학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서로를 잊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연락이 온 그녀는 퇴근 시간에 맞춰 내가 다니는 회사 앞으로 나오겠다고 했다. 회사를 나서다가, 하마터면 그녀를 못 알아볼 뻔 했다. 수척해진 모습에, 그녀답지 않은 회색 빛 촌스러운 의상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항상 밝고 자신감에 넘치고 아름다워, ‘태양의 여자’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연신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나까지도 불안해졌다. 대체 그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야. 내 인생은 아이러니야.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너도 들으면 웃을 거야.”

 

그녀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맥주 한잔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언니가 이렇게 술을 잘 마셨나. 전화 벨소리가 울리는 데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출판사에 삽화를 그리기로 새로 계약한 사람이 있어서 환영의 의미로 팀 사람들과 조촐하게 회식을 했어. 미대생이라 그런지, 얼굴도 말끔하게 생긴 게 진짜 예쁘장하더라고. 근데 그 꼬마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로르까 시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로르까를 말이야. …아, 잠깐만.”

 

그녀는 계속되는 벨소리에 핸드폰을 집어 들어, 대충 ‘알았어, 신경 쓰지 마’등 무미건조한 말투로 몇 마디를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안, 짜증나는 전화가 계속 오네. 암튼, 아니 글쎄, 그 꼬마가 로르까 시를 읽고 그림 그린 것도 있다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새 다들 집에 갔는지 우리 둘만 남게 됐어. 그래서 술도 취했겠다, ‘로르까풍 회화 작품’을 보여 달라고 했지. 그렇게 그날 그 애네 집에 가서 자게 됐어. 작품이 어땠는지는 기억도 안 나. 근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뭔가 이상한 거야. 한번 와본 곳 같은 거야. 문에 달린 장식이며, 천장 등이며…, 언젠가 본 것 같은. 그래서 꼬마한테 장난스레 물어봤지. 꿈속에서 한번 와본 것 같다고. 그랬더니, 그 애 표정이 약간 이상해지는 거야. 그러더니, ‘저 기억 안 나요?’ 이러는 거 있지. 그제야 그 애를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게 생각이 났어. 웃기지 않냐?”

 

그녀가 말하고 있는 사이에 채워 놓은 맥주잔을 그녀는 다시 단숨에 들이켰다. 별로 웃기진 않았다. 대학 다닐 때도 워낙 인기가 좋았던 그녀는 많은 남자와 교제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교제했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과 잠자리를 했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혐오스러웠고, 아름다운 그녀가 자신의 진가를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일정부분은 통쾌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같이 잤던 남자들 이마에 표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잤던 사람과 안 잤던 사람을 구별하고 그게 몇 번을 잤는지도 알 수 있게끔 하는 거야. 아니다, 차라리 남자들 가슴에 내 이름을 문신해놨으면 좋겠다. 그럼 그 사람의 셔츠 속 가슴을 들여다보며, ‘아, 네가 잃어버린 과거의 나를 아는 구나’하는 거지.”

 

그 순간 내 핸드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손으로 집으며 그녀를 얼핏 보자, 받으면 서운해 할 것 같았다. 나는 벨소리가 안 나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나에게 사랑은 제로 칼로리 콜라와 같은 거야. 강렬한 느낌에 끌려 마시고 또 마시지만, 그건 나에게 절대 아무것도 채워주지 않아. 제로 칼로리인 걸 알고, 그렇기 때문에 마시려고 했던 건데, 나는 그게 기적처럼 날 풍성하게 채워줄 듯 계속 마셔. 그렇게 배는 부르고 점점 목은 따가워지는데, 나는 콜라를 마시기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아. 이 콜라만 마시면 될 것 같았는데. 그런 느낌 이해하겠니? 끊임없이 갈망하는데, 절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말하자면, 제로 칼로리의 비애지, 내 사랑은. 잉여쾌락일 수도 있고, 잉여가치, 잉여환상…….”

 

자기 연민에 가득 찬 그녀의 연애 이야기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시켜놓은 풍성한 안주는 우리 둘 다 별로 손을 대지 않은 관계로 풍성한 그대로였다. 그렇게 속을 채우고 싶다면, 안주라도 먹지.

 

우리가 있는 호프집에선 금방이라도 천장에서 바퀴벌레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날려도 전혀 놀라지 않을 만큼 허름하고 어두운 데다가 습기가 가득 차 있는 불쾌한 환경이었다. 회사 앞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아니, 지구상에 이런 곳이 존재하는 지도 몰랐다. 나는 안주에도, 그렇다고 술에도 손이 안 가고 그나마 물만 괜찮게 여겨, 물만 마셨다. 그녀는 열심히 말하면서도 틈틈이 술을 들이켰다. 그녀 혼자 술잔을 비워댔고, 술을 잘 하진 못하는지 눈에 띄게 취해가고 있었다. 난 그저 그녀의 얘기를 대강 듣고 술잔이 비지 않게끔 채워주면서, 부재중으로 택배기사가 앞집에 대신 맡겨놓았을 카메라를 빨리 찾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생리할 때가 됐는데, 계속 안 하더라고. 임신했구나 하고, 누가 애 아빠일까 생각해봤는데, 딱히 적당한 사람이 없더라고. 그래도 별로 상관없었어. 왠지 내가 무언가 해냈다는 느낌, 내 안이 따뜻하게 가득 채워졌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신성한 느낌마저 들더라고. 그래서 일부러 병원을 가지 않고 한 달을 더 넘기고 또 한 달을 넘기고……, 그렇게 반년을 넘겼어. 병원에 가면 현실을 직시하고 수술을 감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배가 별로 불러오질 않는 거야. 한참을 고민하다가 산부인과를 갔지. …아씨, 이거 진짜 시끄럽게 하네!”

 

그녀는 벨소리 나는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팽개쳤다. 오늘 처음 만났을 때 불안하게 떨리던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술에 취해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병원에서 뭐라는 줄 알아? 내가……, 글쎄, 폐경이라는 거야. 스물아홉 밖에 안 됐는데.”

 

그녀는 애초에 울음을 참을 생각도 없었는지, 그때부터 격렬하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아들, 딸 다 낳고 기른 오십 살 중년부인도 아니고 스물아홉에 무슨 폐경이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담담하게 ‘요즘 뉴스에도 간혹 나오고 하는데, 환경 호르몬 영향 때문, 어쩌고’하는 거야. 약으로 치유가 될 확률이 50%이상인데, 문제는 내가 너무 늦게 왔다는 거야. 잘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약을 먹어보자고 하더라.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칼슘제도 먹자고 하더라고. 혹시 올지 모를 골다공증 때문에. 이게 말이나 되니? 진이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많아서 이렇게 벌을 받은 걸까?”

 

그녀는 마치 상처 받은 들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다소 충격적이고 그녀가 받았을 고통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나,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하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표현대로 정말 벌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에겐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헛것을 가졌던 거지, 나를 갉아먹은. 누군가와 살을 부빈 시간이 많을수록 나는 점점 없어지고, 마침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숨 사이사이 먼지가 되어버린거야.”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저 그녀의 다분히 문학적인 발언에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이제는, 내가, 사라져, 버린 거야.”

 

 

 

아마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얼마간 멍하니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던히 놀랐지만, 나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술값을 계산하고 나왔다. 어떻게 그 곳을 빠져나와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기억나는 건, 다음 날 아침, 전날의 일이 몇 년의 일처럼 낯설게 느껴졌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에게서도 그 후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퇴근 후에 호프집을 다시 찾아보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시간이 1년 정도 흐른 뒤였다. 학교 후배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그녀가 독일로 가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후배는 그 독일인이 호모 같은데다가, 그녀 또한 예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살이 많이 찌고 여러모로 굉장히 상했다고 했다. 대학 때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제야 궁금해졌다. 그때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던 걸까? 그럼, 나는 예전 모습이 남았던 그녀를 본 마지막 증인인 걸까? 대체 나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듣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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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당신의 이름

 

 

 

    할아버지는 학생들의 명찰을 만들 때가 가장 기쁘다고 하셨다. 아직 살이 더 붙을 기미가 보이는 녀석, 내년이면 지금보다 10cm는 자랄 듯한 녀석, 벌써부터 수염이 난다며 연신 턱을 문지르는 녀석 등등…. 헝겊에 자수로 이름을 박음질할 때면 꼭 아이들의 얼굴이 손끝에 새겨지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는 것이었다. 축구를 좋아했던 나는 툭하면 튿어지는 체육복을 들고 '단필사'를 찾는 날이 많았고, 재봉틀 앞에서 땀을 흘리는 할아버지 옆에서 수십 개의 서로 다른 이름들을 보며 그들의 얼굴을 상상했다.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로 들어서며 미싱이 돌아가는 소리도, 할아버지의 사투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보며 그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는 버릇은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여전히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니면 운명인지는 모르겠으나, 명함이나 브로셔를 디자인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나는 꽤나 묘한 즐거움을 가지고 생활해나갔다. 나는 내 일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마저 지니고 있었는데, 명찰이든 명함이든, 어떤 이의 이름을 고이 적어 가장 예쁜 형태로 그에게 다시 되돌려주는 일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학생 때도 갖지 못했던 꿈이라는 걸 서른이 훌쩍 넘은 뒤 품게 된 별종으로 통했다. 그 별종의 꿈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이름을 적어본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할아버지의 기일에 아버지와 함께 다녀온 성묘길에 '단필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단필사'의 '단필'이 한자로는 短筆, 즉 솜씨가 서투르고 보잘것없는 글씨라는 뜻이었다는 것. 나는 아버지에게 할아버지가 얼마나 멋진 기술자였는지, 내가 그분을 얼마나 좋아하고 존경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왜 가게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을 응시하던 아버지는, 아마도 당신께서는 아무리 멋진 필체로 이름을 새긴다 하더라도 고작 1㎠ 안에 그 이름이 가진 크기와 무게를 다 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게 자신의 직업적 한계라 여기셨던 듯하다… 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그 1㎠가 할아버지의 세상이었고, 전부였으니까, 그 손끝에서 피어난 꽃도 맺힌 열매도 그의 모든 것이 담긴 명필名筆이었을 거라고 힘주어 이야기했다. 사람의 이름을 그렇게 많이 쓰고 부르며 기억해내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런지, 그로 인해 할아버지의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웠을지, 어쩌면 소설가나 시인 부럽지 않을 정도로 여행 같은 삶을 살다 가신 게 아니었을까…. 유난히 둥그런 산소 앞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이름을 적어본 사람, 그러니까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 꿈을 꼭 이루고 나면 그의 비석에 내 손으로 이름을 새겨드리겠노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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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hort sentimentally-beautified story of my childhood.

 방청소 하다 발견한 yearbook으로 인한 감상적 미화.

Tbt to 2003 only if I had the ability to time warp. 

This is a short sentimentally-beautified story of my childhood.

Taking a short look at this year book and what is written here made me laugh so much and realize that me and my friends were probably the most innocent and pure creatures in this world as kids. Not knowing a thing about stereotype nor prejudice led to having no concept of discrimination at all. I had the perfect condition of being a minority of that society-Being 1-2 year younger and also shorter than most of my friends, a female, with different race and nationality + unlike now I didn't speak any English by the time I just got there. 

However back by then I was more than welcomed, loved, respected and treated equally, had lots of great opportunities and new challenges. And of course sometimes I was hurt by some people but there were more people who cared about me with love and comforted me with smile. I still remember being hurt by what the conductor had told me at blue lake music camp but what I remember more is the figure of Amy, the counselor of our dorm, looking into my eyes which were almost full of tears and encouraging me with her warm words, beautiful smile, and hug. (I think she was a university student by then so perhaps she was much younger than my current age. But I still suck at cheering someone up.Probably it has something to do with my not-so-sweet personality) 

Now I've grown up to realize that what I had experienced was only some part and not everything of the nation and it is absolutely meaningless to idealize somewhere for that there is no place on earth to be called utopia, but still I'm thinking that this shocking experience of mine has become the significant reason of me always wanting to live outside of korea.Yet, a few experiences living abroad after that were never as easy as before because I've become an evil, also a.k.a grown up.Furthermore I am not praising certain nation but I 100% admit that society I belonged to for a short period was much more mature in understanding and respecting difference as well as accepting other cultures than the society I've been living. Anyway for the chaotic situation in Korea we are facing now I think it's not so bad for everyone to reminisce about our very innocent and pure hearted period-no maturity but also no discrimination. Simple as that. 

 방청소 하다 발견한 yearbook으로 인한 감상적 미화.

돌이켜보면 이시절의 나와 친구들은 다른 여느 어린이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시절을 보내고있지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편견이 뭔지, 고정관념이 뭔지조차 알기전이었고 따라서 차별의 개념이라는것 또한 생기기 전의 나이였다. 나는 그사회의 소수자, 그리고 약자로 분류되기 좋은 조건들을 다 갖추고있었다. 여자, 유색인종, 외국인. 거기에 추가로 영어는 하나도할 줄 몰랐으며 같은 학년의 대부분의 친구들보다 내가 한두살어렸으며 키조차작은편에 속했다는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색의 피부와 눈동자를 지닌 이들은 영어도 못하는 이방인을 환영해주었다. 내가 떠듬떠듬 말할때는 귀기울여서 끝까지 들어주었고, 나의 의사를 존중해주었고, 호기심을 가져주었고, 사랑해주었으며 또 동등하게 대우해주었다. 새로운 도전을 항상 시도할수 있는 기회 또한 많았다. 물론 몇번의 상처는 있었으나 상처를 주는 사람보다 보듬어 주는 사람이 훨신 많았다. 아직도 나는 뮤직캠프에서 지휘자와 퍼스트플릇에게 한방먹고 울먹이던 나에게 눈을 맞추며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안아주던 카운슬러 에이미의 모습을 잊지못한다. (지금은 벌써 다섯살짜리 아들이 있지만 당시 에이미는 대학생이었으므로 지금의 나보다 훨신 어린나이였을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몇살은 더 많을 나이인 지금의 나는 사람을 달래는 방면에는 아직도 매우 서툴다. 물론 이것은 내가 태생부터 무뚝뚝하고 오그라드는것을 혐오하는 성격을 지닌탓도 있다..)

 십년이 넘게 지난 지금 나는 그때 내가 경험했던것이 그나라의 극히 일부일뿐 전부가 아니였음을 알게되었으며, 세상어디에도 유토피아따위는 없기때문에 어딘가를 이상화시키고 그곳만을 바라보는일이 얼마나 촌스럽고 쓸데없는일인가임을 깨닫게 된 씁쓸한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가끔 회상한다. 그나라를 찬양하는것은 절대 아니지만 '다름'에 대한 이해와 존중, 타문화에 대한 수용도가 훨신 높은 사회였던 사실이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던때를. 또한 확신한다. 이시절의 순수함은, 분명 나에게 역마살과 탈조선의 꿈을 심어준 너무나 크리티컬한 원인이었을거라고. 나는 이경험으로 인해 초딩때부터 탈조선을 꿈꾸는 시대를 앞서가는 어린이였다고..(?)+실제로 귀국하기싫다고 울며불며 엄마한테 홈스테이한다고 설쳤던 기억. 그러나 나와 달리 엄마는 그곳에서 이상하게 너무 힘이들었다고했는데, 그러고나서 열심히 올때마다 묵주를 돌리시던 외할머니로부터 우리가 살던집에 남미계의 귀신이 옷장속에 사는것을 목격했다는것을 들은것은 우리가 귀국한 후였다. 우리가 무서워할까봐 이걸 혼자만 보시고 비밀로 하신 할머니가 더 대단하시고 무섭다..뭐 어쨌든 그 후 정작 몇번의 탈조선은 순수함을 잃어버린 후라 그시절과는 많이 달랐다고한다. 가끔은 철도없고 차별도 없던 어린시절을 생각해보는것도 괜찮은 일 같다. 탈조선 헬조선 대신 대한민국 이라는 공식국가명칭만을 사용하게 되는 날들만이 지속되길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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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그 남자의 여백

 

 

 

 

    회화에 있어 여백이란 배경을 그대로 비워둠으로써 캔버스 위 작은 설국雪國을 입맛대로 상상하게 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또 그것은 반대로 여백 아닌 부분에 시선을 더 오래 두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H는 아버지를 그린다고 했다. 아주 작았을 때 올려다본 아버지는 크다, 넓다, 단단하다 따위의 언어 혹은 대문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기의 주관을 갖고 붓칠을 할 수 있게 된 시기부터는 긴 면이 고작 41센티 정도 되는 화폭 안에도 그를 집어넣을 수 있다고, 심지어 꼬마병정만큼 줄여서 그릴 수도 있다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그럼 병정만한 아버지 옆엔 무얼 두냐고 물었더니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단다. 파란 하늘도, 깨끗한 물도, 보기 좋은 꽃도, 건강해 보이는 강아지도, 부인과 아들도 전부 두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에게 꼭 무언가를 내줘야 한다면 하얀 눈밭을 선물해주겠다고도 했다. 형체가 불분명한 과거의 공기 같은 것들을 그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며, 그걸 그릴 수 있게 되는 날 비로소 가족이 완성될 거라고 속삭였다. 아버지를 따뜻하게 표현할 자신이 없다는 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H가 반쯤 들어찬 잔을 내려다보며 흘린 두어 방울의 눈물과 “이게 바로 참이슬”이라는 농담 섞인 한 마디를 스치듯 마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H에게 여백이란 과거의 원망을 종이 위에 내려놓음으로써 더 이상 취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도구로 쓰인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사실 그 허허벌판을 등에 때 한번 목격하지 못한 아버지의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등바등 아버지란 사람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어떤 남자의 욕심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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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움직이는 것, 멈춰있는 것들

애물단지 M-1에 대하여

"충돌 주의! 충돌 주의! M-1*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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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왔구나 또 왔어 우주의 신이 내 소원을 이뤄주겠다고 한다면 난 망설임 없이 M-1의 궤도를 반지름이 엄청나게 큰 원으로 바꿔달라고 말할 것이다 다른 행성들은 가까이 있어도 얌전히 공전하는데 M-1은 때가 되면 내게 미친 듯이 가까워지는 타원형 궤도를 가졌다 멀리 갔다 싶으면 내 옆을 살짝 비켜가고 또 한시름 놓으면 또 찾아오는 식이다 그래서 나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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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언가 와서 나에게 충돌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다 코딱지 1호**라던가 들킬수없성*** 같은 게 막무가내로 달려들어서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그래도 이런 충돌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회복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M-1은 다르다 M-1은 다른 것들에 비해 엄청나게 거대할 뿐만 아니라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서 나에게 다가오는 순간 그야말로 큰일이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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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 얘기를 하면서 벌벌 떨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M-1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M-1을 좋아한다 M-1의 반지름이 말도 안 되게 커져서 내게서 멀어지는 것도 사실 싫다 단지 안정적인 거리를 두고 평화를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M-1이 좋은 이유는 다른 어떤 행성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M-1 안은 그야말로 별천지다 행복했던 순간들이 가득 담겨 있다 달팽이수제비 만들던 것 속상해하는 내 편을 들어주던 것 내가 잠들기 전에 먼저 잠들지 못했던 것 등 잊고 싶지 않은 소중한 기억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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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과의 충돌이 두려운 건 아프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M-1 안에 담겨있는 것들이 영영 사라질까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쌓아온 그 기억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조금 멀더라도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내 맘을 알 리 없는 M-1은 앞으로도 계속 나를 뒤흔들 것임을 안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이 우주의 법칙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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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에 대한 기억이 담긴 행성 공전주기 매우 짧음
**코딱지를 판 것에 대한 최초의 기억을 담은 혜성
***거짓말을 했던 기억이 담긴 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