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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캔버스에 여백, 2018.

 

 

 

  회화에 있어 여백이란 배경을 그대로 비워둠으로써 캔버스 위 작은 설국雪國을 입맛대로 상상하게 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또는 반대로 여백이 아닌 부분에 시선을 더 오래 두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실은 퇴근길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읽은 이 글 때문에 갑자기 든 생각이면서, 기어이 ‘상상력을 숨겨두고 살 만큼 마음이 메마른 사람은 되기 싫다’는 거창한 핑계를 내세우며 취미 미술반에 등록했다. 하지만 첫 수업이 있던 날, 비장한 표정으로 건물 앞에 다다른 나는 화실 문턱을 넘자마자 그만 머리에 피도 채 마르지 않은 여고생의 마음이 되고 말았다. 12년 만에 처음 잡아본 4B연필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희멀건 손가락과 흰 도화지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나는 이왕 철딱서니 없이 시작한 일, 첫 날엔 공쳐도 괜찮다며 철없는 자기위안에 빠져들기로 결정했다. 능청을 떨며 자분자분 주변을 살피니 화실의 모습이 꼭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제목을 붙이자면 『Hello Strangers』, 91×65.2cm, 캔버스에 유채, 2018. 정도가 어떨까.

 

  한 타임 당 예닐곱 명에 불과한 소규모 클래스였지만, 강사 1명이 2시간 동안 우리 모두의 그림을 꼼꼼히 돌봐주기엔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인이 된 후의 첫 그림에 대한 살뜰한 보살핌을 바랐던 내게 선생님의 깃털처럼 가벼운 눈빛은 그다지 만족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감동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4B연필에 뭐 사연이라도 있어요? 계속 노려보네. 낯설지만, 그보다 더 냉랭한 수업시간의 분위기를 단번에 풀어줄 만큼 다정한 목소리. 나는 그날 화실에서 진이를 처음 만났다.

 

  수업이 끝난 건 오후 4시가 갓 넘어 이른 시각이었지만 목을 축이기엔 커피보다 맥주가 나을 것 같아 근처 호프로 이동했다. 나보다 석 달 먼저 화실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진이는 아버지를 그리는 게 목표라 했다. 가족애가 남다른가보다 싶어 나도 보조를 맞추려 우리 집 식구들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자 그는 술이 들어가서 말이 술술 나오냐며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뺨이 봉숭아처럼 물든 뒤에는 술잔에 술을 따르듯 자기 이야기를 술술 흘렸다.

 

  내가 아주 작았을 때 올려다본 아버지는 그냥 큰 사람이었어. 물론 모든 아버지들이 그런 경향이 있지만 내 아버지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그래보였지. 왜 그런 형용사 있잖아. ‘크다, 넓다, 단단하다’ 같은 말… 왜 사람이 나이 들면 잔뜩 쪼그라들고, 그래서 불쌍해 보이고, 연민을 자극하는 모든 수식어가 덕지덕지 붙어서 꼭 콩떡처럼 된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아직도 아버지는 그냥 대문자야. 저 혼자 우뚝 선 알파벳 대문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

 

  하지만 자기의 주관을 갖고 붓칠을 할 수 있게 된 시기부터는 긴 면이 고작 41센티 정도 되는 화폭 안에도 그를 집어넣을 수 있다고, 심지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꼬마병정만큼 줄여서 그릴 수도 있다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병정만치 자그마하게 아버지를 그리면 그 옆엔 무얼 둘 거냐고 물었더니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단다. 파란 하늘도, 깨끗한 물도, 보기 좋은 꽃도, 건강해 보이는 강아지도, 아내도 아들도 전부 그의 곁엔 놓고 싶지 않다고.

 

  술자리가 마무리되고 밖으로 나와 발을 내딛은 길 위에서 혀도 다리도 꼬여버린 진이는 비탈길을 비틀길이라 우겨대기 시작했다. 물기 가득한 그의 혀에서 툭 튀어나오는 오타誤打가 마치 내 심장 중앙에 콩 콩 점을 찍는 것처럼 느껴져서, 들키지 않으려 쿵 쿵 큰 보폭으로 앞서나갔다. 나는 진이가 좋았지만 당장 그걸 알리고 싶진 않았다. 그가 깨닫는 때가 온다면, 서로가 감춰둔 빈 화폭 위에 점 하나 찍어도 웃어넘길 수 있을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틀비틀 비틀길을 걷던 진이는 딱 한 잔만 더 하자며 나를 불러 세웠다. 오늘만 살 거냐고 묻는 내게 속 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소주잔을 앞에 두고 영 횡설수설하던 그는, 그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크고 단단하기만 한 병정 곁에 꼭 무언가를 내줘야 한다면 하얀 눈밭을 선물해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진짜 눈을 줘야지. 스키장 같은 데서 퍼다가 부어버리는 건 안 돼. 그건 진짜 눈이 아니니까. 가짜 눈엔 붓질도 안 될걸. 내 여백을 그런 식으로 망칠 순 없지.

 

  그리고 그 위엔 옛날의 공기를, 그 공기 안의 기억과 기분과 마음 따위를 떠다니게 할 거라고.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들이라 물감으로 덧칠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라고. 그래서 그걸 그릴 수 있게 될 때까지 비틀길을 넘어 화실에 다닐 거라고, 그는 말했다. 그럼 우리가 언젠가 화실에서 만날 수 없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 날이 너에겐 축일祝日이겠구나. 하얀 눈밭 위엔 네 숨, 엄마 숨, 날숨 그런 걸 올려둘 테니. 그럼 그 날 비로소 가족이 완성될 테니. 진이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연거푸 세 번이나 원 샷으로 소주를 들이켰다. 절대로 아버지를 따뜻하게 그릴 수 없는 사람. 하지만 그의 곁에 둔 여백을 세상 가장 오랫동안 지켜볼 사람. 나는 진이가 그릴 눈밭의 기온이 영하권으로는 내려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흰 여백에 쌓인 진짜 눈이 녹아버리면 다시 흰 물감으로 눈을 퍼와 노병老兵의 여백을 지켜줄 신병新兵의 모습을 상상했다. 짐짓 하품을 하며 빈 잔 위로 흘린 두어 방울의 눈물과 이게 바로 참이슬이라는 농담을 흘리는 진이의 한 마디를, 나는 그냥 흐르도록 두었다.

 

  어떤 남자에게 여백이란 희미해진 과거의 원망들을 캔버스 위에 까무룩 내려놓음으로써 더 이상 이슬에 취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도구로 쓰인다. 그게 아니라면, 실은 그 흰 벌판을 단 한 번도 가까이에서 마주하지 못한 아버지의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등바등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하얀 욕심 같은 것. 그의 여백이 완성되는 날, 나는 이런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여백』, 333×218cm, 캔버스에 수채, 2018.

 

 

 

 

                                                                  작년 겨울, 그림을 그리던 친구를 보며 썼던 <그 남자의 여백>이라는 글에

                                                                                                                조금 살을 붙여 다시 써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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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월향화

월향화

백월이 뜨는 밤 달그림자 속에 피는 꽃

 

샛노란 보름달이 9번을 채우고 10번째는 노인의 백발처럼 새하얀 백월이 뜬다. 새까만 밤하늘에 하얗게 떠오른 달은 월하노인이 밤나들이를 나오는 달이라. 사람들은 문이며 창문이며 새빨간 끈을 늘어뜨리고 좋은 인연을 기원하는 글을 적어 고이 묶어둔다.

 

“좋은 밤이로구나.”

 

밤하늘이 그대로 담긴 커다란 연못가에서 빙그레 미소하며 느긋하게 거닌다. 새하얀 백발을 등 뒤로 가지런히 늘어뜨리고 노인이라기에는 훤칠한 키에 갸웃거리며 시선을 올리면, 뽀얗고 말간 미청년의 얼굴이 보인다. 늙지 않는 선인이라, 노인이라 칭하여도 실제는 백월처럼 아리따운 미청년이다.

 

편안하게 뒷짐을 지고서 못가를 거니는 월하선인에게 붉은 끈을 꼬리마냥 달고서 새하얀 종이매듭이 나풀거리며 날아온다. 하나, 둘, 셋, 넷...어디선가 날아드는 그 모양새가 꼭 자그마한 나비 떼 같다. 빨간 꼬리를 살랑이며 날아오는 종이매듭을 쫓아온 소녀는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월하, 노인?”

 

미풍에 실려 나약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짙은 흑청색 두루마기를 어깨에 걸치고 새까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버린 앳된 소녀, 이제 막 봉오리가 벌어질 듯 여린 꽃과 같은 소녀다. 월하는 난처한 기색으로 손에 종이매듭을 쥐고서 머뭇거린다.

 

“이런, 아무리 궁금하다고 하나, 쫓아오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게냐?”

 

“죄, 죄송하옵니다. 허나...”

 

소녀는 꽃망울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월하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 할 말이 남았는지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소녀의 태도에 월하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손에 쥔 종이매듭을 풀었다.

 

새하얀 종이에 정성스레 적혀있는 이름이 소녀가 원하는 인연이리라. 월하의 달빛 눈동자에 미미한 웃음이 번지고, 소녀는 머뭇거리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무거운 바위에 깔린 신음처럼 잇새를 비집고 간신히 나온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었다.

 

“제가, 소녀가 아닙니다.”

 

“네가 원하는 인연이 아니란 말이냐?”

 

월하는 의아하게 갸웃거리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월하의 시선을 피하며 시선을 떨구는 소녀의 표정에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뒤섞여있었다. 소녀는 비에 젖은 어린 문조처럼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소녀의 동생과 이어주십시오. 부탁드리옵니다.”

 

“흠.”

 

어떤 사연일지는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아마도 소녀와 동생과 정인 사이에 마음이 얽힌 것이리라. 그에 소녀가 동생의 행복을 빌며 종이매듭을 만든 걸 테다. 월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서 새하얀 종이와 붉은 끈을 품속에 넣었다. 백월이 비친 수면으로 발을 내딛는 월하에게 소녀는 급히 뛰어와 옷깃을 붙잡았다.

 

“월하님, 대답을 주십시오.”

 

“이만 돌아가거라.”

 

백월이 뜨는 밤이며 월하의 가호를 바라며 붉은 끈과 종이매듭을 준비하지만, 정말로 이루어질 인연이라면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 또한 그렇지 않다 하여도 본디 인연의 결과는 함부로 알려줄 수 없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란 그 생의 인과와도 연관되어있기에 누설할 수 없음이다.

 

“월하님, 부디...”

 

“그만 돌아가라 하지 않느냐!”

 

온화한 목소리의 언성이 슬쩍 높아진다. 소녀는 마지못해 월하의 옷깃을 놓으며 물러났다. 간절한 소녀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월궁으로 돌아온 월하는 서재로 들어가 품속의 종이를 꺼내었다. 다시 확인한 종이에 소녀가 적은 이름은 두 개였다. 월하는 지그시 종이에 적힌 이름을 응시했다.

 

이름의 합, 이름의 조화.

 

새하얀 백발이 잘게 물결치며 월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둘은 인연이 아니다. 소녀가 아무리 원한다고 하나, 맺어져서는 안 되는 인연을 억지로 이을 수는 없다. 단순히 인연이 아닐 뿐이라면 몰라도 서로 상극이라면 후에 뒷일이 좋지 못할 테다. 월하는 문득 소녀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물어볼 것을 그랬군.”

 

서로 마음이 엉기었다면 누군가와는 인연일 테다. 소녀의 동생과 인연이 아니라면 소녀와 인연일 수도 있는 것을, 월하는 아쉬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월하는 종이를 다시 접어 붉은 끈으로 묶고서 화로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잊었다. 소녀도 잊었을 거라고 그리 생각하고서 저만치 잊어버렸다.

 

항아선녀 마냥 노랗고 따스한 보름달이 아홉 번 지나가고 까맣고 투명한 연못에 백월이 떠오른 밤, 월하는 주변을 맴도는 종이매듭을 하나씩 잡아서 펼쳐보고 있었다. 동그랗고 서툰 글자에 아직 풋풋한 마음이 느껴져 은근히 미소하다 숨어있는 시선을 느끼고서 수풀을 향해 돌아보았다.

 

“거기 누군 게냐?!”

 

월하의 매서운 일갈에 머뭇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일전의 소녀였다. 오늘도 짙은 흑청색 두루마기를 걸치고서 소녀는 다시 만난 월하의 앞에 양손을 포개어 쥐고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월하님.”

 

월하는 조용히 소녀를 바라보다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나에게 고마워할 것 없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를 일이니, 라는 뒷말을 삼키고서 월하는 다음 종이매듭을 잡아서 풀었다. 소녀는 사뿐히 월하의 뒤를 따르며 살포시 미소했다. 월하는 소녀의 기척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었다. 느릿하게 커다란 연못을 3바퀴 즈음 돌고 나니, 달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밤이 지나가고 달이 저물며, 태양이 떠오르고 아침이 다가오는 시간이다. 월하는 마지못해 뒤돌아서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맑은 얼굴로 고운 선인을 올려다보았다. 옅은 은빛 눈동자와 새까만 눈동자가 서로를 비춘다. 월하는 소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용건이 남았느냐?”

 

“아니옵니다. 그저 보답해드리고 싶사옵니다.”

 

보답이라니, 월하는 실소를 머금었다가 마침 떠오르는 게 있어 대뜸 말했다.

 

“네 이름이 무어냐?”

 

“소녀, 해영이라 하옵니다.”

 

그에 좀 더 말을 붙이려는 월하의 귓가로 장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걷히고 동녘이 밝아오기 전에 급히 월궁으로 돌아온 월하는 소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해영, 해영이라...”

 

월하는 소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미심쩍은 기색으로 연신 갸웃거렸다.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함 속에서 아홉 번의 보름달이 지나고 다시 백월이 찾아왔을 때, 소녀는 미리 연못가 나와 월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하는 마중을 나온 소녀를 흘겨보고는 언제나와 같이 연못가를 거닐며 살랑살랑 날아오는 종이매듭을 잡아서 풀며 시큰둥하니 입을 열었다.

 

“왜 또 나와 있는 게냐?”

 

달빛 아래 피어난 물망초처럼 청초하게 미소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동무라도 해드릴 수 있을까 하여...”

 

“말동무라...가사라도 불러보려무나.”

 

월하의 요구에 소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어울릴만한 가사를 골라내어 잔잔하게 풀어내었다. 시리도록 투명한 작은 샘물에 실비가 내려앉듯, 밝은 가을 하늘에 얇은 구름이 흘러가듯 보드라운 목소리에 월하는 슬그머니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한해, 두해 흘러 소녀의 나이가 스물 셋이 되는 해의 백월이 뜬 밤, 연못가로 내려온 월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월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이내 연못가를 거닐며 종이매듭을 풀었다. 그녀가 불러주는 가사를 들을 수 없는 것이 허전했으나, 금방 올 거라고 생각하였다.

 

허나 해가 뜰 무렵이 되어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월하는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서운함에 고개를 내저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원래 이랬어야한다고, 진작 쫓아냈어야하는 거였다고, 차라리 스스로 발길을 끊었으니 잘 되었다며 쓸쓸함을 달래고서 월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아홉 번의 보름달이 지나 백월이 뜬 밤, 월하는 연못가를 거닐며 종이매듭을 풀고 있었다. 밤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이 그림자가 되어 땅에 비치고, 백월이 구름 너머로 다시 얼굴을 내밀었을 때에 월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길게 늘어진 월하의 그림자 속에서 그녀가 미소하고 있었다.

 

“언제 온 것이냐?”

 

그녀는 그저 말없이 웃었다. 그 속에 숨은 저릿한 감정에 월하의 은빛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렸다. 서로 상극인 인연은 함부로 이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월하는 아니기를 바라며 시선을 돌려 연못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이 비친 연못에는 새하얀 달만이 보일 뿐이다.

 

달그림자가 곧 월하의 그림자이며 선인이기에 연못에는 그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음이 이상하지 않다. 허나 그녀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 월하의 미간이 일그러지고 그녀의 눈은 슬픔을 머금고서 호선(弧線)을 그린다. 월하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저는 괜찮사옵니다.”

 

나직한 그녀의 말에 월하는 지그시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월하가 아니다. 그녀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나, 그날 월하가 종이매듭을 던져 넣은 화로는 이미 꺼져있었고, 그 화로를 치우던 항아가 발견하고서 그녀가 바란 인연을 엮어준 것이다.

 

그녀에게 감사를 받아야하는 것도 사과해야 하는 것도 월하가 아닌 항아였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보답을 받은 것은 월하이기에 그는 쓰디쓴 한숨을 삼키고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어져서는 안 되는 인연을 엮은 대가를 그녀가 받은 걸 테다. 그걸 감수하고서 그날 밤 종이매듭을 걸었을 테다.

 

“내 다시 물으마. 네 이름이 무어냐?”

 

미심쩍었던 그녀의 이름, 월하는 이제야 의문을 꺼내놓았다.

 

“하영(河影)이옵니다.”

 

삼켰던 한숨을 내뱉고서 월하는 애처로운 눈길로 하영을 마주보았다.

 

“미안하구나.”

 

인간사에 함부로 관여할 수 없기에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화로가 꺼진 것을 살피지 않은 것, 항아를 말리지 않았던 것에 대한 자책감, 월하의 사과에 그녀의 미소가 더욱 깊어진다.

 

“괜찮사옵니다. 저는, 괜찮사옵니다.”

 

착잡한 미풍이 불어오고 고요한 연못에 점점이 파문이 인다. 어느새 밤하늘을 비추던 백월이 저물고 동녘이 밝아오기 전, 월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리에 한송이 고운 꽃이 봉오리를 오므린다. 청아하고도 애처로운 자태에 새하얀 달빛방울이 떨어진다.

 

꽃이 있는 자리는 매번 다르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꽃이 핀 것을 본 적이 없다. 오직 백월이 뜨는 날 밤, 달그림자 속에서 봉오리를 피우기에 아무도 꽃이 핀 것을 본 적이 없다. 오로지 이 세상에 단 한명, 백월이 뜨는 밤 연못가를 거니는 월하만이 알 뿐이다.

 

새하얀 보름달이 뜨는 밤, 청아하고 맑게 울려 퍼지는 달빛을 머금은 향기를...

 

애달프고도 다정하며 상냥한 월향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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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그 남자의 여백

 

 

 

 

    회화에 있어 여백이란 배경을 그대로 비워둠으로써 캔버스 위 작은 설국雪國을 입맛대로 상상하게 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또 그것은 반대로 여백 아닌 부분에 시선을 더 오래 두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H는 아버지를 그린다고 했다. 아주 작았을 때 올려다본 아버지는 크다, 넓다, 단단하다 따위의 언어 혹은 대문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기의 주관을 갖고 붓칠을 할 수 있게 된 시기부터는 긴 면이 고작 41센티 정도 되는 화폭 안에도 그를 집어넣을 수 있다고, 심지어 꼬마병정만큼 줄여서 그릴 수도 있다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그럼 병정만한 아버지 옆엔 무얼 두냐고 물었더니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단다. 파란 하늘도, 깨끗한 물도, 보기 좋은 꽃도, 건강해 보이는 강아지도, 부인과 아들도 전부 두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에게 꼭 무언가를 내줘야 한다면 하얀 눈밭을 선물해주겠다고도 했다. 형체가 불분명한 과거의 공기 같은 것들을 그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며, 그걸 그릴 수 있게 되는 날 비로소 가족이 완성될 거라고 속삭였다. 아버지를 따뜻하게 표현할 자신이 없다는 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H가 반쯤 들어찬 잔을 내려다보며 흘린 두어 방울의 눈물과 “이게 바로 참이슬”이라는 농담 섞인 한 마디를 스치듯 마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H에게 여백이란 과거의 원망을 종이 위에 내려놓음으로써 더 이상 취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도구로 쓰인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사실 그 허허벌판을 등에 때 한번 목격하지 못한 아버지의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등바등 아버지란 사람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어떤 남자의 욕심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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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즈의 감성에세이

그림책

오랜만에 방문한 서점.

 

서점의 코너 중에서도

 

내 무릎 높이에 딱 맞으며, 아이들의 눈높이에는 딱 맞는 책상 위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이 잔뜩 쌓여져 있는 그림책 코너는 내가 서점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다.

 

 

아이들이 읽는 그림책의 표지는 일반 책들보다 훨씬 더 화려하다.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게 생긴 선녀가 요구르트를 들이키고 있는가 하면,

 

장 자크 상뻬의 그림체가 겹쳐 보이는 100명의 소녀들이 노오란 예쁜 꽃을 다소곳이 든 채

 

표지를 장식하고 있기도 하고,

 

부릉부릉 금방이라도 책에서 튀어나올 듯한 조그만 빨간 자동차가

 

표지와 속지에 이어져 멋지게 장식되어 있기도 하다.

 

 

그림책을 구경하는 이 때만큼은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다.

 

얼마나 멋진 세계일까. 이 책 속의 내용이 그 어린 시절에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을 가져다 줄까. 또한 처음으로 나만의 책을 받는 그 황홀한 기분이란.  

 

먼 훗날 나와 함께 '가족'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될 누군가를 위해 

내가 경험했던, 이 멋진 기억을 선사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때문에 나는 그 언젠가를 상상하며, 서점에 들릴 때마다 그림책을 즐겨 구경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