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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

사랑

“일종의 편린이지, 인생 자체가. 무엇 하나 완성된 게 없이.”

 

2년 만에 만난 그녀는 눈에 띄게 수척해 있었다. 몇 년의 시간이 얼굴에 사정없이 폭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것 같았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언니, 동생으로, 같은 과 동기로서 친하게 지내다가, 대학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서로를 잊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연락이 온 그녀는 퇴근 시간에 맞춰 내가 다니는 회사 앞으로 나오겠다고 했다. 회사를 나서다가, 하마터면 그녀를 못 알아볼 뻔 했다. 수척해진 모습에, 그녀답지 않은 회색 빛 촌스러운 의상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항상 밝고 자신감에 넘치고 아름다워, ‘태양의 여자’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연신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나까지도 불안해졌다. 대체 그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야. 내 인생은 아이러니야.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너도 들으면 웃을 거야.”

 

그녀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맥주 한잔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언니가 이렇게 술을 잘 마셨나. 전화 벨소리가 울리는 데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출판사에 삽화를 그리기로 새로 계약한 사람이 있어서 환영의 의미로 팀 사람들과 조촐하게 회식을 했어. 미대생이라 그런지, 얼굴도 말끔하게 생긴 게 진짜 예쁘장하더라고. 근데 그 꼬마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로르까 시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로르까를 말이야. …아, 잠깐만.”

 

그녀는 계속되는 벨소리에 핸드폰을 집어 들어, 대충 ‘알았어, 신경 쓰지 마’등 무미건조한 말투로 몇 마디를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안, 짜증나는 전화가 계속 오네. 암튼, 아니 글쎄, 그 꼬마가 로르까 시를 읽고 그림 그린 것도 있다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새 다들 집에 갔는지 우리 둘만 남게 됐어. 그래서 술도 취했겠다, ‘로르까풍 회화 작품’을 보여 달라고 했지. 그렇게 그날 그 애네 집에 가서 자게 됐어. 작품이 어땠는지는 기억도 안 나. 근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뭔가 이상한 거야. 한번 와본 곳 같은 거야. 문에 달린 장식이며, 천장 등이며…, 언젠가 본 것 같은. 그래서 꼬마한테 장난스레 물어봤지. 꿈속에서 한번 와본 것 같다고. 그랬더니, 그 애 표정이 약간 이상해지는 거야. 그러더니, ‘저 기억 안 나요?’ 이러는 거 있지. 그제야 그 애를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게 생각이 났어. 웃기지 않냐?”

 

그녀가 말하고 있는 사이에 채워 놓은 맥주잔을 그녀는 다시 단숨에 들이켰다. 별로 웃기진 않았다. 대학 다닐 때도 워낙 인기가 좋았던 그녀는 많은 남자와 교제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교제했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과 잠자리를 했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혐오스러웠고, 아름다운 그녀가 자신의 진가를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일정부분은 통쾌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같이 잤던 남자들 이마에 표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잤던 사람과 안 잤던 사람을 구별하고 그게 몇 번을 잤는지도 알 수 있게끔 하는 거야. 아니다, 차라리 남자들 가슴에 내 이름을 문신해놨으면 좋겠다. 그럼 그 사람의 셔츠 속 가슴을 들여다보며, ‘아, 네가 잃어버린 과거의 나를 아는 구나’하는 거지.”

 

그 순간 내 핸드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손으로 집으며 그녀를 얼핏 보자, 받으면 서운해 할 것 같았다. 나는 벨소리가 안 나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나에게 사랑은 제로 칼로리 콜라와 같은 거야. 강렬한 느낌에 끌려 마시고 또 마시지만, 그건 나에게 절대 아무것도 채워주지 않아. 제로 칼로리인 걸 알고, 그렇기 때문에 마시려고 했던 건데, 나는 그게 기적처럼 날 풍성하게 채워줄 듯 계속 마셔. 그렇게 배는 부르고 점점 목은 따가워지는데, 나는 콜라를 마시기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아. 이 콜라만 마시면 될 것 같았는데. 그런 느낌 이해하겠니? 끊임없이 갈망하는데, 절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말하자면, 제로 칼로리의 비애지, 내 사랑은. 잉여쾌락일 수도 있고, 잉여가치, 잉여환상…….”

 

자기 연민에 가득 찬 그녀의 연애 이야기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시켜놓은 풍성한 안주는 우리 둘 다 별로 손을 대지 않은 관계로 풍성한 그대로였다. 그렇게 속을 채우고 싶다면, 안주라도 먹지.

 

우리가 있는 호프집에선 금방이라도 천장에서 바퀴벌레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날려도 전혀 놀라지 않을 만큼 허름하고 어두운 데다가 습기가 가득 차 있는 불쾌한 환경이었다. 회사 앞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아니, 지구상에 이런 곳이 존재하는 지도 몰랐다. 나는 안주에도, 그렇다고 술에도 손이 안 가고 그나마 물만 괜찮게 여겨, 물만 마셨다. 그녀는 열심히 말하면서도 틈틈이 술을 들이켰다. 그녀 혼자 술잔을 비워댔고, 술을 잘 하진 못하는지 눈에 띄게 취해가고 있었다. 난 그저 그녀의 얘기를 대강 듣고 술잔이 비지 않게끔 채워주면서, 부재중으로 택배기사가 앞집에 대신 맡겨놓았을 카메라를 빨리 찾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생리할 때가 됐는데, 계속 안 하더라고. 임신했구나 하고, 누가 애 아빠일까 생각해봤는데, 딱히 적당한 사람이 없더라고. 그래도 별로 상관없었어. 왠지 내가 무언가 해냈다는 느낌, 내 안이 따뜻하게 가득 채워졌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신성한 느낌마저 들더라고. 그래서 일부러 병원을 가지 않고 한 달을 더 넘기고 또 한 달을 넘기고……, 그렇게 반년을 넘겼어. 병원에 가면 현실을 직시하고 수술을 감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배가 별로 불러오질 않는 거야. 한참을 고민하다가 산부인과를 갔지. …아씨, 이거 진짜 시끄럽게 하네!”

 

그녀는 벨소리 나는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팽개쳤다. 오늘 처음 만났을 때 불안하게 떨리던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술에 취해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병원에서 뭐라는 줄 알아? 내가……, 글쎄, 폐경이라는 거야. 스물아홉 밖에 안 됐는데.”

 

그녀는 애초에 울음을 참을 생각도 없었는지, 그때부터 격렬하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아들, 딸 다 낳고 기른 오십 살 중년부인도 아니고 스물아홉에 무슨 폐경이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담담하게 ‘요즘 뉴스에도 간혹 나오고 하는데, 환경 호르몬 영향 때문, 어쩌고’하는 거야. 약으로 치유가 될 확률이 50%이상인데, 문제는 내가 너무 늦게 왔다는 거야. 잘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약을 먹어보자고 하더라.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칼슘제도 먹자고 하더라고. 혹시 올지 모를 골다공증 때문에. 이게 말이나 되니? 진이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많아서 이렇게 벌을 받은 걸까?”

 

그녀는 마치 상처 받은 들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다소 충격적이고 그녀가 받았을 고통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나,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하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표현대로 정말 벌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에겐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헛것을 가졌던 거지, 나를 갉아먹은. 누군가와 살을 부빈 시간이 많을수록 나는 점점 없어지고, 마침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숨 사이사이 먼지가 되어버린거야.”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저 그녀의 다분히 문학적인 발언에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이제는, 내가, 사라져, 버린 거야.”

 

 

 

아마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얼마간 멍하니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던히 놀랐지만, 나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술값을 계산하고 나왔다. 어떻게 그 곳을 빠져나와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기억나는 건, 다음 날 아침, 전날의 일이 몇 년의 일처럼 낯설게 느껴졌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에게서도 그 후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퇴근 후에 호프집을 다시 찾아보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시간이 1년 정도 흐른 뒤였다. 학교 후배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그녀가 독일로 가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후배는 그 독일인이 호모 같은데다가, 그녀 또한 예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살이 많이 찌고 여러모로 굉장히 상했다고 했다. 대학 때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제야 궁금해졌다. 그때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던 걸까? 그럼, 나는 예전 모습이 남았던 그녀를 본 마지막 증인인 걸까? 대체 나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듣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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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별일 아닌 이야기

3년 후 만남

 항상 편지의 첫 시작은 안녕 자기였다. 

 

 3년, 사람에게 데인 후 딱히 누구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시간들 그렇게 3년 이란 시간을 홀로 보낸 후 

그 사람을 만났다. 지금은 과거가 된 이야기지만... 

난 그사람 아니 그녀를 만났다. 외로움에, 서로의 공통점에 이끌려 누가 먼저 사귀자는 말도 없이 우린 그렇게 만났다. 

강한 여자이지만 상처많고 외로움이 컸던, 혼자서 모든 것을 이겨내려 하지만 눈물이 많고 옆에 누가 있기를 바란 듯 하던 그녀를 만났다. 

 

 우린 그렇게 사랑했고 난 이 사람에게 내 모든 것을 전해주고 사랑해 주었다. 그렇게 우린 서로 맞춰갔다. 난 언제나 그녀가 우선이였고, 그녀가 내 중심이였다. 아픔이 많은 사람이란걸 알기에 그래서 더욱 그녀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본다면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헤어졌으니 말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아직 해결되지 않았던 군대문제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훈련소를 들어가기 한달 전, 난 오로지 그녀만을 보며 생활했다. 언제나 같이 있었고 언제나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게 부담이였을까? 훈련소를 다녀온 한달, 그 한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마음이 변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함께 있던 시간들 속에서, 그녀가 웃으며 말하던 순간들 속에서 진지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나에게 자기의 마음을 말했다. 하지만 바보 같았던 난 그저 흘러들었을 뿐 그 말들이 지쳐간다는 표현이였음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내가 없던 한달, 그녀의 마음은 변하였다. 당연히 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가 했던 말을 이해한다 말했지만, 난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점점 그녀가 날 멀리하는 기분만 들었다.

 

 그렇게, 그렇게... 또 한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난 스스로의 답답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 내 서운함 때문에 했던 스스로의 잘못을 사과 했다. 그렇게 사과를 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난 변하지 않았다 라는 대답이였다. 그리고 더이상은 너무 지친다는 말이였다. 난 내가 바뀌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 물었다. 그녀는 보인다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뀌진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헤어짐을 말한 날, 그녀는 내가 바뀔꺼라 생각도 하지않는다 말했다. 하지만 왜일까? 아직 그녀의 모바일 프로필, 배경사진 그리고 SNS의 사진들은 한장도 지워지지 않았다. 차분히 정리해 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그 곳에는 나와 함께 했던 순간, 내 눈에 비췄던 그녀, 그리고 내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난 스스로가 바뀌길 바랬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변화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아직 그대로인채 우리의 관계만 바뀌었다. 

 

 편지의 첫 시작은 언제나 안녕 자기였다. 

이젠 그 안녕이 인사가 아닌 헤어짐을 뜻한 말 같다.  난 바뀌고 싶었다. 그녀를 위해서 함께 맞춰가고 싶었다. 지금도 그녀가 나에게 돌아온다면... 이라고 생각한다. 둘이 함께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건 내 이기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난, 헤어짐을 받아들이고 그녀를 응원한다. 꿈이있는 사람, 스스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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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접속

 

 

 

 

She said :

 

    그가 작업실에서 집어든 건 가장 먼지가 쌓인, 다시 말하자면 내 손 때가 가장 덜 묻은 그림이었다. 나는 왜 라고 묻는 대신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는 내 얼굴을 보고서도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린 채 문을 나섰다. 사실은 뒤꽁무니를 쫓아가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손에 들린 붓을 놓으면 또 맥을 짚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 지 몰라 그만두었다.

 

  그가 뜬금없이 내 손을 잡은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이번에는 왜 라고 물어야 했는데 애꿎은 눈썹만 또 삐죽거렸다. 바보 같아, 나는 스스로에 대해 반성하다가 그의 떨리는 손을 보고 곧 생각의 스위치를 껐다. OFF.

 

 

 

He said :

 

    내가 그녀의 작업실에서 집어든 건 아무리 봐도 가장 오래된 듯한, 어쩌면 그녀의 기억 속에 먼지 한 톨만큼의 인상만을 남겨놓았을 지도 모를 그림이었다. 그녀는 내게 뭔가를 묻고 싶어하는 듯 했지만 나는 재빨리 돌아섰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내내 들여다본 액자 안에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그 군중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심한 붓터치는 겨우내 입고 다닌 나의 파란 니트를 정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너의 손 끝에서 다시 태어난 작은 난쟁이. 액자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억만 겹으로 이루어진 페스츄리 빵처럼 길고 긴 시간이 흐르고, 나는 화실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네가 가장 덜 아끼는 작품이지만, 오직 하나뿐인 파란 난쟁이. 네가 만든 내 세계에 너를 초대해. 그녀는 습관처럼 눈가를 찌푸렸고, 나는 슬쩍 왼쪽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는 마리오네트가 된 걸까, 마음에게 조종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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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쓰는 편지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길가에는 소복소복, 온통 눈 쌓여가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방황하던 내 발걸음은 누군가의 발자취를 좇으며 어딘가로 향했다.

 

익숙한 등굣길에서 그 어느 날처럼, 그 어느 때처럼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함께 서 있는 나를 만났다. 뭐가 그리도 좋았던지 우리는 그저 웃고, 떠들고, 웃고 또 웃었다.

 

언제나 그렇듯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온 세상의 눈을 녹여버릴 듯 따듯하다. 마치 방황하는 나를 어루만져주고 쓰다듬어주듯이 아늑하기만 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돌이켜 봤다.

 

우리는 언제나 학교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언제나 밤늦게까지 학교에 머물러야 했지만 그녀는 내게 그 모든 것의 이유가 되어주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푹푹 찌는 여름에도 칼바람이 불어치는 겨울에도 틈만 나면 광장에서 서로를 기다렸다.

 

아니, 대부분 내가 그녀를 기다렸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었으니까. 기다림은 남자에게 있어서 특권과도 같은 것이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 이유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내게 물어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에게 서로의 존재는 당연했기에.

 

아직도 기억이 나는 어느 날이 있다. 지독하게도 추운 겨울이었다. 10대의 마지막 관문을 무사히 넘긴 선배들이 사라진 학교에서 텅 비어버린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우리들의 발버둥이 한창이던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더 두꺼운 마스크에 새하얀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목소리도, 행동도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은 했지만 별 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평소보다 더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평소와 다르던 그녀는 결국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가던 중에 갑자기 쓰러져버렸고, 뒤늦게 그 장면을 목격한 나는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그녀를 품에 안고 양호실로 달렸다. 유난히 넓었던 학교에서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달리고 또 달렸다.

 

언제고 그녀가 알아주기를 바랐었지만,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나는 한 번도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친구들 사이에서 지나가는 이야기나 소문으로 들었을 거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감싸주고 싶었다. 항상 변함없는 따스함으로 나를 감싸주는 그녀처럼 나도, 모두에게 아픈 아이라는 낙인이 찍힌 그녀를 감싸주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별 문제없이 여느 날처럼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행복의 끝은 정해져 있고 기쁨의 시간은 찰나의 순간처럼 짧게만 느껴진다.

 

우리를 질투한 시간은 곧 다가올 졸업이라는 끝맺음을 핑계로 우리를 갈라놓기 위해 끊임없이 예고장을 보내왔다.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는 변함없었고, 서로와 각자를 믿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배웠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는 예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그 거친 파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을. 그 모든 일들이 지나가는 동안 그저 가만히 그 순간을 방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코끝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기운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머리와 어깨 위로 소복하게 쌓이는 눈들 사이에서 혼자만 코끝을 스치는 눈꽃이 꼭 소리 없이 찾아왔다가 흔적도 없이 떠난 그녀 같았다. 어느새 운동장 한 가운데로 들어선 나의 귓가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다시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인다.

 

그녀의 웃는 얼굴.

 

그녀의 눈매, 그녀의 눈썹, 그녀의 입가, 표정, 목소리, 습관, 말투까지.

그녀는 언제나 그대로다.

 

길지 않은 삶이지만, 수없이 반복되는 계절을 보내면서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만남이든 이별이든 그것 또한 언제고 반복될 거라는 것이다. 우리가 만났던 것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기필코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라 믿는다.

 

어느새 자라고 자라버렸지만 여전히 방황하는 내 발걸음을 이끄는 건 언제나 단 한 사람뿐이다.

 

모든 것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기만 하다. 기분 좋은 질투를 하던 매점 아줌마도, 그녀가 좋아하던 따듯했던 율무차도, 학교 전체를 시끌벅적하게 울리는 아이들의 말소리도, 그 사이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녀까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그녀는 기억할까? 그녀도 나처럼 아직도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초연하게 이별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마지막까지 스스로 정했던 아름다웠던 한 소녀는 저 바다 어딘가에 뿌려졌고, 지금도 바람을 타고 세상 어딘가를 끊임없이 돌아다닐 것이다. 똑 부러지던 꿈처럼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보고 느끼고 있을 거라 믿는다.

 

터져 나오는 슬픔을 인내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울어대던 그 날의 내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꼭 오늘처럼 퉁퉁 부어버린 눈을 하고서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던 10대의 끝자락의 나와 어느새 20대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나는 이렇게 또 다시 만났다.

 

그 날도 눈이 내렸었다. 하지만 그 날도 무심코 떨어진 눈꽃이 코끝을 스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스쳤겠지. 10년 뒤의 나는 오늘 내 코끝을 스쳤던 눈꽃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꼭 오늘처럼.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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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그와 그녀

 

그와 그녀

 

입술부터 시작해 천천히 입안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키스.

그 나른하고도 부드러운 감촉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가늘게 뜬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와 달리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차분하고 날렵한 눈에는 담담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 그녀 역시 보란 듯이 태연한 눈으로 맞받아쳤다.

 

‘결국 떠나지도 못하면서 바보 같아.’

 

그는 그저 그녀의 직장 상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함께 가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차갑고도 달콤한 키스의 끝에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고 그녀는 시선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내일 아침 새로 오는 담당에게 인수인계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같이 가줘서 고마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건네는 고맙다는 말에 그녀는 순간 울컥하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혹여나 그런 표정을 들킬까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리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 찰칵.

 

“바래다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문을 닫으며 거절하고 돌아서는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한 심정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안도와 아쉬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끼며 엘리베이터를 탄 그녀는 한쪽 벽에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다 힘없이 웃었다.

 

- 피식.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정문을 나서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가로등 불빛만이 비칠 뿐 달도 별도 구름 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무심결에 내뱉은 얕은 한숨은 뽀얀 입김이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