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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가위 끝

 

 

 

 

    어린 시절, 내 손에 제일 오래 머물렀던 것은 연필도 장난감도 아닌 가위였다. 비록 아버지와 나, 둘 뿐이기는 했지만 한 가족의 식사 준비를 한다는 것은 어린 내가 맞닥뜨린 인생 최초의 난관이었다. 때문에 언제나 바빴던 나에게 어머니의 빈자리 같은 것을 느낄 여유는 별로 없었다. 나의 탄생과 동시에 숨을 거둔 어머니는, 그저 내게 다른 아이들보다 주방에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기회를 준 존재에 불과했다. 생각해보면 슬픈 것은 오히려 그쪽이다. 어머니의 부재가 어린 나에게 그 정도 의미밖에 되지 못했다는 것. 그 나이 대 아이에게 부모의 의미란 어떤 것인지, 나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식사 때가 되면 주방에 들어가 가위를 들어야 했다. 그것은 식전에 행해지는 자연스런 일과였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내가 가위로 인해 특별한 방식으로 자극을 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차츰 내 손이 주방 가위와 익숙해지자, 김치나 고기를 능숙하게 자르는 것 따위에는 금세 싫증이 났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대통령이나 여군은 아니더라도, 여하튼 좀 더 멋진 일을 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 끝에 찾아낸 것이 인형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었다. 여덟 살의 나는, 인형의 금발을 조금씩 잘라내며 훗날 내게 머리를 맡길 사람들의 뒷모습을 상상했다.

 

    몸이 아파 시내 미용실까지 다니는 것이 무리인 할머니들이나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게 된 것은 2년이 지나고 난 뒤부터였다. 맨 처음 아버지는 내가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그 짓 - 아버지는 나의 일을 그렇게 불렀다 - 을 하고 다니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했지만, 동네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내가 '이문동 귀염둥이' 대접을 받자 이내 마음이 풀린 듯 했다.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눈치를 보아 하니 아무래도 아버지의 한의원에 단골손님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내가 대놓고 사람들의 옆구리를 찌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내가 한의사 양반의 늦둥이라는 것을 온 동네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선전 효과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아버지는 열두 살 생일날 내게 미용 가위까지 선물해 주었고, 이내 우리 집 앞마당은 미용실이 되었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아버지와 나를 기술자 모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기술자. 사람들은 한의사인 아버지까지 기술자라 불렀다. 문득 몇 년 전 큰 인기를 끈, 그래서 나 또한 자주 시청했던, 외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메쩬바움 대신 미용 가위를 들게 된 것은, 어쩌면 아버지가 어린이날마다 사다 준 마론인형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무한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현실적인 제약이 뒤따르기 마련이니까. 선물 받은 인형이 분해가 가능한, 그러니까 보들보들한 털로 뒤덮인 곰이나 토끼 따위였다면 나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 "난 아주 어릴 때부터 가위를 가지고 놀았어요." 사회인이 되고 나서 알게 된 언니와 '서로에 대해 몰랐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들은 문장 몇 개로 글을 적어봤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의 가위 양 쪽 끝에는 무엇이 달려 있었을까요. 일이 너무 힘들 때마다 손에 쥔 가위를 보며 종종 그런 생각을 해본다는 언니. 그녀는 물론 지금의 자기 모습도 너무 사랑하지만 가위로 할 수 있었던 다른 일에 대한 가능성을 상상하면 괜시리 기분이 묘해진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