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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한, 밤의 기록

남 같지 않은, 사사로운 감정이 얽힌 관계, 친구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이 사람과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지금은 너무 우습다. 그때의 너와 나는 프레임 속에서 참 어색하고 낯간지러웠다. 

 

눈떠보니 어느새 4개월 차가 넘었던 회사 생활. 우리 팀에 신입이 들어왔다. 이력서를 봐도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우리 팀에서 유일한 여자였던 나에게 굳이 차 문까지 닫아줬다. 넌 예의가 몸에 배어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더 꼴사나웠을까. 참 유별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지능 못지않게 각잡힌 생활과 웃음기 없던 너의 표정. 너의 포커페이스로 제나이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1년이 지나도 어색함이 감돌았다. 동료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니었다. 동갑내기였지만 다른 또래 직원들보다 너와 친해지는 시간은 오래 걸렸다. 지금와서 들은 말이지만 그때 넌 이미 우리가 친했다고 생각했단다. 당시, 일할 땐 편했지만 둘이 남겨지면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어색한 빈틈이 싫어 할말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다 단둘이 외근을 가고 식사를 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팀장에 대한 너의 생각을 처음 들었다. 너도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너도 '같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또래 직원들과 우린 거의 매일 술 한잔, 그 이상을 기울이며 닭발, 곱창, 회사를 맛보고 즐기고 뜯었다. 

 

적립식 통장보다 더 빠르게 쌓여가는 스트레스에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 날 너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친구"

일할 땐 우연이라도 손끝이 닿을까봐 거리를 두고 격을 차렸다. 그런 우리가 동료를 끝내고 친구가 되었다. 친구가 되니  동료 때보다 트러블은 더 많았다. 너는 스스럼없이 장난을 참 많이 쳤고 난 참 잘도 속았다. 화가 나 눈물이 나던 날도 있었다. 화해의 악수는 몇 번이나 했던지, 널 몇 번이나 때렸는지 이제 기억도 안 난다. 그만큼 추억이 쌓여갔다. 그때쯤 나는 약간 우리의 관계에 혼동이 왔다. 친구나 되자고 시작한 관계에서 연인으로 질릴 만큼 만나 끝낸 관계가 몇 번 있었다. 그래서 예전엔 서로 다른 염색체 사이에 친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주변에서도 뻔한 멘트가 들렸다. 

"너희 둘이 그냥 사귀어. 언제 사귀니?" 

너와 나는 자연스러운 재치로 흘려넘기고 언제나 친구 관계를 운운했다. 그런데도 너는 매너와 장난이 적당히 양념된  행동으로 날 헷갈리게 했다. 여중, 여고를 나와 쉽게 선을 넘지 않는 나에겐 낯설었다. 여사친도 적지 않게 있는 너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들과 다 함께 가까운 근교로 여행을 떠났다. 아직은 어색한 반말을 편한 척 주고받았다. 새벽녘, 동료들에게 별을 보러 가자고 졸랐다. 달을 보는 걸 좋아하던 너는 별을 보고 오랜만에 천진한 웃음을 보였다. 술기운도 있었는지 넌 잘 하지 않던 말도 했다.

"별 진짜 많다. 별 따줄까?"  

손발이 사라지는 말에 난 귀를 씻어냈다. 돗자리를 아스팔트 바닥에 깔고 추위와 별을 안주로 소주 한 잔씩 기울였다. 소주병 아래에 핸드폰 빛을 조명삼아 불을 밝혔다. 라섹으로 눈부심에 약해진 터라 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너는 손으로 내 눈을 가려주었다. 그러던 와중 동료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평소 아니라고 한 사람도 잘 맞는다면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누가 봐도 우리에게 한 말이었다.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그땐 한번 쯤 이런 친구를 만나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무수한 연상의 사랑에 지친 참이었고, 매섭게 겨울바람이 다가오던 시절이었다. 

 

네가 우연히 던진 말에는 시가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 우리의 화살은 서로를 조금씩 빗나갔다. 그럴수록 난 점점 막역해지는 이 관계가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 날의 만남이 내 과거의 생각을 일깨웠다. 친구나 되자고 서로의 친구들을 소개했다. 사실, 처음의 목적은 나의 모태쏠로 친구 B의 솔로 탈출을 위해서였다. 그 친구가 소개팅은 어색하다며 다 같이 밥이나 먹자고 제안했다. 그 모임이 반복되면서 우린 친해졌고 넌 내 친구 A에게 관심을 가졌다. 나에게도 썸인듯 아닌듯한 친구가 생겼다. 그런데도 너와 친구 A의 관계에 더 신경이 쓰였다. 둘 다 나에게 가장 최측근이었다. 너는 버릇처럼 여자친구가 생기면 너와 연락을 자주 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네가 같은 염색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민을 애초부터 하지 않도록. 그래서 난 둘은 절대 안 된다고, 다 같이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쯤 나의 썸남과 미묘하게 감정이 틀어지고 있었다. 잘 돼 가는 너와 친구 A를 보며 생긴 열등감도 없지 않았다. 이런 대화가 반복되자 너는 나를 푹 찔렀다.

"너 나 좋아했어? 이제 나 좀 풀어줘." 

 

내가 구속했는지 부터 먼저 생각했다. 평소 우린 장난처럼 주인과 강아지와 같은 역할놀이를 했다. 절대 변태적 성향은 아니다. 넌 내 앞에서 포커페이스를 풀고 모든 감정을 다 드러냈다. 스스로 널 비글이라고 칭했다. 우린 갑자기 만나 끌리는 데로 먹고, 보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내 마음대로 굴어도 너는 다 받아줬다. 그러던 와중 그 말을 들으니 사고가 정지했다. '내가 너를 좋아했던가?' 나마져도 나에게 의심이 들었다. 난 내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니 너와 다니는 일에 즐거웠다고 답했다. 사랑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싫은 게 내 마음이야."

 

이어서, "내가 당긴다고 올 것도 아니잖아."고 답했다. 너는 막역한 친구가 될수록 다른 관계로 발전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는 백번 맞는 말만 했다. 그리고, 내 친구 역시 우리의 시간들을 알기에 너와 관계발전에 망설였다. 너와 친구, 사이에 낀 나, 갈등은 깊어졌다. 난 너무 이기적이라 불편한 감정이 싫었다. 너와 내 친구가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기를 빌었다. 결국 너와 내 친구의 이야기는 시작되지 못했다. 

"안된다고 한 건데 내가 괜한 짓 했지. 안 만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너의 모진 말에 난 면목이 없었다. 며칠 동안 연락을 안 하고 있었다. 넌 아무렇지 않게 먼저 다가왔다. 평소처럼. 

 

회사 다닐 때부터 네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믿고 따르던 사수가 건강상의 문제로 그만뒀고 난 혼자 남았다. 사수가 그만두자 무능력한 사람이 팀장이 되었다. 난 팀장의 몫까지 하느라 지쳐갔다. 그럴 때마다 너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었다. 원래는 직무가 달라 외근 때 말고는 도움받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넌 내 일거리를 차곡차곡 정리해주면서 언제나 뒤에 있었다. 늘어가는 나의 투정도 꾸준히 들어주었다. 사회에 나오고 다닌 첫 회사였다. 사회경험이 많던 넌 큰 힘이 되었다. 간과 쓸개를 빼도 회사를 나오면 역적이 되는 세상이다. 그동안의 고생이 무색하게 쫓겨나듯 나온 회사에 후폭풍이 더욱 심했다. 그럴 때마다 넌 내 자존감을 올려줬다. 너의 과거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넌  '네가 최고다, 예쁘다, 넌 어디 가든 잘할 거야'라고 툭툭 던지듯 말했다. 너도 나에게 너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쭙잖은 나의 위로에도 고마워했다. 

"1년 동안 이 회사에서 뭘 했나 싶어도 널 만나서 다행이야. 네가 좋은가 봐 친구로서."

매일 티격태격해도 너의 그 말에 고마웠다. 그래서 너와 친구 A의 일에 더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시 둘이 연락할까 봐 난 아직도 걱정한다. 정말 난 못돼빠졌다. 

 

이젠 정말 편한 사이가 되었다. 너와 같은 소파에 다리를 엉켜 누워도 아무렇지 않다. 주변의 부추김에 혹시라도 너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좋은 친구를 잃기는 싫다. 그래서 더욱 너의 연애가 늦춰졌으면 한다. 못된 심보다. 이 사사로운 감정이 얽힌 복잡한 관계가 가끔은 지친다. 이제는 너를 내 욕심으로부터 놓으려고 이 글을 쓴다. 넌 최근에 이런 말을 했다. 
"평생은 없어. 우리 관계도 평생 가지는 않을 거야. 죽어서라도."

평생이란 단어는 참 무모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금 여유가 생긴 이 시간에 감사하며 살 것이다. 우리가 평생은 아니더라도 좋은 친구로 오래 남고 싶다. 너도나도 언젠가 좋은 사람 만나겠지. 최근 꿈에서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너를 봤고 너는 나에게 그를 소개했다. 내가 버릇처럼 "내가 모르는 사람과 만나"라고 한 말이 이뤄져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이기적이다. 그래도 참 잘 어울렸다.  

 

모든 일에 끙끙대며 안절부절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친오빠는 '미움받을 용기'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책에선 '난 단점 투성이 이야'고 생각한다면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만든 것이라 한다. 나 역시 나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내가 이기적이기에 우정이란 이름으로 너에게 모질게 굴어도 괜찮다고. 어쩌면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이 스쳐 갔거나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관계를 깨기 싫어 나를 속이는 걸지도 모른다. 저 드라마 속 뻔한 남사친, 여사친처럼. 

 

인생이 뻔하지 않아서 '기대, 미래, 예측불허' 와 같은 단어가 생기지 않을까? 지금은 우리의 관계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너의 존재를 소중히 하며 너의 아픔을 더 달래주고 싶다. 내가 위로받은 시간만큼, 내가 가진 미안함만큼 너에게 보답하고 싶다. 아주 명확하면서도 아직 애매모호한 관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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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라는 감정

관계의 종지부

 

 

 

   그건 작별인사 같은게 아니었다. 내가 생각했던 관계에 종지부를 찍겠노라 선언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꽤 아름답지 않은 끝이었다. 내가 그에게서 느꼈던 일말의 동정심도 털어버리겠다는 뜻이었으며,

이제 그가 했던 어떤 달콤한 말도 붙잡고 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되돌아 생각했을 때, 함께했던 순간들이 많아서 털어낼 감정의 잔재들이 수북했다. 조금 더 어린 나였더라면 끝내 찾을 수도 없는 이유를 찾아헤매며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인데,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 순간 처절하게 울지 못했던 것은 당신이 아닌, 그 이전의 누군가들이 만들고 간 상처가 나를 견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상처받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켜켜이 쌓여 견고함을 만들었고, 나는 그래서 당신의 어떠한 말도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두렵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혼자 바라보고 고민해야 할지. 돌아오는 상처를 감내하기 위해 얼마나 더 단단해져야 할지. 사실 나는 견고해지고 싶지 않다. 막 돋아난 새순처럼 푸르르고 연약한 존재이고 싶단 말이다.

 

   나는 그래서 당신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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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라는 감정

낯선남자

 

 

나는 그날 이름 모를 사내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우린 아직 통성명도 하기 전이었으며,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어떻게 생겼는지가 전부였다.

그리고 우습게도 우리는 그날 남들에게 절대 말하지 않을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감정 밑바닥까지 모두 긁어 남김없이 털어놓자 조금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우습네요. 초면에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상대방이 먼저 웃었다.

 

"못할 건 없잖아요?"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나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긴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의 바닥을 탐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둘이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날이 전부였다. 그 날 우리는 둘도 없는 소울메이트가 된 것처럼 서로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고 밑바닥까지 공유했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고 또 다시 만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도. 그 밤이 지나면 서로에 대한건 모두 잊고 다시 또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임을 알았기에. 아무 교집합도 없는 삶 속에서 그 날은 그저 일상의 한 에피소드로 남을 것임을 알았기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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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완벽한 불량품

완벽한 불량품

 

오후 3시쯤 된 하늘에서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오고 있다. 얇은 원피스 자락을 살랑이며 걷는 동생이 빙글 돌아선다. 눈은 살짝 가늘어져 아래로 쳐져있고 입가는 말려 올라가 있다.

 

“오빠는 요즘 안 바빠?”

 

“응. 그렇게 바쁘지는 않아. 너는 공연준비 잘하고 있어?”

 

동생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입술을 더욱 말아 올렸다.

 

“물론이지! 표나오면 제일 좋은 자리로 줄 테니까 기대해.”

 

나무 그늘아래 멈춰 선 동생의 눈이 가늘어지다가 완전히 감겼다. 그리고 다시 반쯤 떠진 눈은 여전히 초승달 모양이다. 다시 몸을 돌려 앞서 걷는 동생의 치맛자락이 나풀거린다. 양손은 등허리 뒤에서 살짝 겹쳐 잡고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는다.

 

“최대한 노력해볼게.”

 

동생의 걸음이 아주 짧게 멈칫하다가 이어졌다. 오늘 집에 가면 동생이 공연할 작품에 대해 이리저리 검색해봐야겠다. 제일 좋은 자리를 준 동생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제대로 된 감상을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동생은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등 뒤의 나를 향해 말했다.

 

“나도 최선을 다할게. 오빠가 느낄 수 있게.”

 

“응.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은 했지만, 가능성이 상당히 희박한 바람이다. 동생의 실력 탓이 아니다. 내가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 그 작품을 알고 있는 이들의 감상평을 미리 봐둘 필요가 있었다.

 

“오빠. 우리 음료수 하나씩 먹자.”

 

동생은 가로수 길 한편에 있는 노점상으로 다가갔다. 주문을 하고, 요금을 내고, 시원한 음료가 담긴 컵을 받아든 우리는 다시 나란히 거닐었다. 넓은 대로 양옆으로 늘어선 Metasequoia 나무의 가지 사이로 햇살이 가닥가닥 나누어진다. 동생의 눈은 여전히 반달모양이었고, 입술은 연신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저녁 즈음, 집으로 돌아온 나는 동생이 공연하는 작품을 검색했다. 관련된 원작에 관한 평도 찾아보고, 캐스팅된 배우들에 관한 정보도 살펴보았다. 거의 3~4시간을 모니터에 집중하며 정보를 모았다. 동생이 나를 위해 노력한 대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 고마움을 이렇게라도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 * *

 

주차를 한 뒤 시동을 끄고 옷매무새를 살폈다. 셔츠는 목까지 단추가 잠겨있고, tailored에 double collar의 외투도 양쪽 허리선에 있는 단추를 채웠다. 조수석에 놓아둔 꽃다발을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 입구에서 표를 확인받고 정해진 좌석에 앉았다. 공연장은 만석이었다. 곧 조명이 꺼지고 무대의 막이 올랐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판으로 재해석, 재구성한 작품이었다. 배우들의 캐스팅에서부터 호평을 받은 작품으로, 동생이 맡은 역은 여주인공 줄리엣이다. 화려한 무도회 장면이 현대판 클럽이 되어 펼쳐지고, 동생은 세련된 줄리엣이 되어 등장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막이 내리고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동생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 것이다. 동생이 데뷔하고 무대에 오른 5년, 그동안 동생이 표를 줄 때마다 꼬박꼬박 챙겨보고, 때로는 나란히 앉아서 함께 보기도 했다.

 

‘전혀 나아지지 않아.’

 

그래도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동생이기에 꽃다발을 챙겨들고 공연장을 나와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동생이 있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동생 외에도 몇몇 배우들이 분장을 지우거나 쉬고 있었다. 그중에 처음 보는 여배우도 한명 있었다. 눈이 마주친 이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오빠. 어서와.”

 

일어나 다가오는 동생에게 꽃다발을 건네었다.

 

“공연 잘 봤어.”

 

그 짧은 대답에도 동생은 이미 눈치 채버렸다. 그녀가 바라고 내가 바란 희박한 가능성이 이번에도 발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동생의 눈이 일자로 가늘어지고,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갔다.

 

“응. 고마워. 나 분장지우고, 옷 갈아입고 나갈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기실 밖으로 나와 근처 벤치에 앉았다. 몇 시간이나 검색하며 준비한 게 다 소용이 없었다. 기대에 부응하지도 못했고, 그걸 숨기지도 못했다. 동생은 짧은 대답으로도 눈치 채버렸기에 내가 ‘느낀’ 게 아닌 찾아서 ‘읽은’ 감상조차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 끼익.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아까 처음 본 여배우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등 뒤로 문을 닫고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온 이다화라고 해요.”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가늘게 휘어져 있었고, 입술은 완만하게 곡선을 그렸다.

 

“나연 선배가 평소에 오빠 분 자랑을 많이 하셔서 궁금했거든요.”

 

그녀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더니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말을 이었다.

 

“대학 교수님이라고, 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으시다면서요?”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건 목적이 뭔지 모르겠다. 올라가 있던 그녀의 입매가 다시 제자리로 내려왔다.

 

“아, 저. 혹시 제가 불편하시거나, 싫으신...”

 

그때 다시 문이 열리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동생이 밖으로 나왔다. 동생은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

 

“아, 네.”

 

그녀는 나와 동생을 번갈아보며 몸을 돌렸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난 벤치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동생도 그녀도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낯선 사람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익숙하지 못합니다. 제 반응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녀의 눈이 더욱 커지고 동생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리고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배우가 그녀를 부르며 손짓했다. 그녀는 나와 동생을 다시 번갈아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대기실로 들어갔다. 고개를 돌려 동생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내린 눈은 반쯤 감겨있고 입술은 일자로 다물려 있었다.

 

“미안해.”

 

“아냐. 오빠 잘못이 아닌 걸.”

 

동생은 고개를 저으며 내 팔을 잡고 어깨를 다독였다. 내 잘못이 아니라지만, 내가 문제인 건 사실이다. 그러니 내 잘못이 맞다. 동생의 잘못도 아까 다화라는 그녀의 잘못도 아니기에 내가 가진 잘못이다.

 

분명 아까 그녀가 나에게 처음 말을 걸며 보여준 표정은 동생이 보여준 ‘웃음’과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웃는 얼굴이라는 걸 알아도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건 목적에 동조하고 공감할 수 없었다. 대화의 목적을 알지 못했기에 그녀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대화라는 건, 특히나 마주보고 하는 사적인 대화는 서로의 표정과 말투, 어감, 어조, 작은 행동과 눈빛을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고, 동조하며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대화는 끊어지기 마련이고, 상대에게 불쾌한 감정을 심어줄 수도 있다.

 

난 그럴 수 없다. 상대방의 말투와 표정에서 기분을 읽어내고, 눈빛에서 감정을 느끼고, 그에 동조하며 공감하는 그 공명을 나는 할 수가 없다. 어린아이조차도 자연스럽게 해내는 그 사소한 것을 나는 할 수가 없다. 타인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하고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상이나 직장에서의 불편함은 없다. 학생들은 주로 과제나 수업내용이 목적이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웃는 얼굴로 넘겨버리면 된다. 적어도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대처가 가능했다. 하지만 아까의 그 상황은 낯설었고, 생소했다. 무언가 함부로 대처하기가 꺼려졌다.

 

동생은 나 때문에 연기를 배웠다. 나에게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고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로인해 언젠가는 내가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동생이 처음 연기를 배우면서 시작된 10년의 시간동안 그 바람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하지만 이제는 포기하는 게 어떨까 싶다.

 

그냥 내가 불량품이라고 인정해버리는 게 차라리 편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