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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라는 감정

관계의 종지부

 

 

 

   그건 작별인사 같은게 아니었다. 내가 생각했던 관계에 종지부를 찍겠노라 선언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꽤 아름답지 않은 끝이었다. 내가 그에게서 느꼈던 일말의 동정심도 털어버리겠다는 뜻이었으며,

이제 그가 했던 어떤 달콤한 말도 붙잡고 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되돌아 생각했을 때, 함께했던 순간들이 많아서 털어낼 감정의 잔재들이 수북했다. 조금 더 어린 나였더라면 끝내 찾을 수도 없는 이유를 찾아헤매며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인데,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 순간 처절하게 울지 못했던 것은 당신이 아닌, 그 이전의 누군가들이 만들고 간 상처가 나를 견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상처받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켜켜이 쌓여 견고함을 만들었고, 나는 그래서 당신의 어떠한 말도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두렵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혼자 바라보고 고민해야 할지. 돌아오는 상처를 감내하기 위해 얼마나 더 단단해져야 할지. 사실 나는 견고해지고 싶지 않다. 막 돋아난 새순처럼 푸르르고 연약한 존재이고 싶단 말이다.

 

   나는 그래서 당신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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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라는 감정

낯선남자

 

 

나는 그날 이름 모를 사내에게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우린 아직 통성명도 하기 전이었으며,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어떻게 생겼는지가 전부였다.

그리고 우습게도 우리는 그날 남들에게 절대 말하지 않을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감정 밑바닥까지 모두 긁어 남김없이 털어놓자 조금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우습네요. 초면에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상대방이 먼저 웃었다.

 

"못할 건 없잖아요?"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나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긴했지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의 바닥을 탐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둘이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날이 전부였다. 그 날 우리는 둘도 없는 소울메이트가 된 것처럼 서로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고 밑바닥까지 공유했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고 또 다시 만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도. 그 밤이 지나면 서로에 대한건 모두 잊고 다시 또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갈 것임을 알았기에. 아무 교집합도 없는 삶 속에서 그 날은 그저 일상의 한 에피소드로 남을 것임을 알았기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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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완벽한 불량품

완벽한 불량품

 

오후 3시쯤 된 하늘에서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오고 있다. 얇은 원피스 자락을 살랑이며 걷는 동생이 빙글 돌아선다. 눈은 살짝 가늘어져 아래로 쳐져있고 입가는 말려 올라가 있다.

 

“오빠는 요즘 안 바빠?”

 

“응. 그렇게 바쁘지는 않아. 너는 공연준비 잘하고 있어?”

 

동생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입술을 더욱 말아 올렸다.

 

“물론이지! 표나오면 제일 좋은 자리로 줄 테니까 기대해.”

 

나무 그늘아래 멈춰 선 동생의 눈이 가늘어지다가 완전히 감겼다. 그리고 다시 반쯤 떠진 눈은 여전히 초승달 모양이다. 다시 몸을 돌려 앞서 걷는 동생의 치맛자락이 나풀거린다. 양손은 등허리 뒤에서 살짝 겹쳐 잡고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는다.

 

“최대한 노력해볼게.”

 

동생의 걸음이 아주 짧게 멈칫하다가 이어졌다. 오늘 집에 가면 동생이 공연할 작품에 대해 이리저리 검색해봐야겠다. 제일 좋은 자리를 준 동생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제대로 된 감상을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동생은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등 뒤의 나를 향해 말했다.

 

“나도 최선을 다할게. 오빠가 느낄 수 있게.”

 

“응.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은 했지만, 가능성이 상당히 희박한 바람이다. 동생의 실력 탓이 아니다. 내가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 그 작품을 알고 있는 이들의 감상평을 미리 봐둘 필요가 있었다.

 

“오빠. 우리 음료수 하나씩 먹자.”

 

동생은 가로수 길 한편에 있는 노점상으로 다가갔다. 주문을 하고, 요금을 내고, 시원한 음료가 담긴 컵을 받아든 우리는 다시 나란히 거닐었다. 넓은 대로 양옆으로 늘어선 Metasequoia 나무의 가지 사이로 햇살이 가닥가닥 나누어진다. 동생의 눈은 여전히 반달모양이었고, 입술은 연신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저녁 즈음, 집으로 돌아온 나는 동생이 공연하는 작품을 검색했다. 관련된 원작에 관한 평도 찾아보고, 캐스팅된 배우들에 관한 정보도 살펴보았다. 거의 3~4시간을 모니터에 집중하며 정보를 모았다. 동생이 나를 위해 노력한 대가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 고마움을 이렇게라도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 * *

 

주차를 한 뒤 시동을 끄고 옷매무새를 살폈다. 셔츠는 목까지 단추가 잠겨있고, tailored에 double collar의 외투도 양쪽 허리선에 있는 단추를 채웠다. 조수석에 놓아둔 꽃다발을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 입구에서 표를 확인받고 정해진 좌석에 앉았다. 공연장은 만석이었다. 곧 조명이 꺼지고 무대의 막이 올랐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판으로 재해석, 재구성한 작품이었다. 배우들의 캐스팅에서부터 호평을 받은 작품으로, 동생이 맡은 역은 여주인공 줄리엣이다. 화려한 무도회 장면이 현대판 클럽이 되어 펼쳐지고, 동생은 세련된 줄리엣이 되어 등장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막이 내리고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동생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 것이다. 동생이 데뷔하고 무대에 오른 5년, 그동안 동생이 표를 줄 때마다 꼬박꼬박 챙겨보고, 때로는 나란히 앉아서 함께 보기도 했다.

 

‘전혀 나아지지 않아.’

 

그래도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동생이기에 꽃다발을 챙겨들고 공연장을 나와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동생이 있는 대기실로 들어갔다. 동생 외에도 몇몇 배우들이 분장을 지우거나 쉬고 있었다. 그중에 처음 보는 여배우도 한명 있었다. 눈이 마주친 이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오빠. 어서와.”

 

일어나 다가오는 동생에게 꽃다발을 건네었다.

 

“공연 잘 봤어.”

 

그 짧은 대답에도 동생은 이미 눈치 채버렸다. 그녀가 바라고 내가 바란 희박한 가능성이 이번에도 발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동생의 눈이 일자로 가늘어지고,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갔다.

 

“응. 고마워. 나 분장지우고, 옷 갈아입고 나갈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기실 밖으로 나와 근처 벤치에 앉았다. 몇 시간이나 검색하며 준비한 게 다 소용이 없었다. 기대에 부응하지도 못했고, 그걸 숨기지도 못했다. 동생은 짧은 대답으로도 눈치 채버렸기에 내가 ‘느낀’ 게 아닌 찾아서 ‘읽은’ 감상조차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 끼익.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아까 처음 본 여배우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등 뒤로 문을 닫고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새로 온 이다화라고 해요.”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가늘게 휘어져 있었고, 입술은 완만하게 곡선을 그렸다.

 

“나연 선배가 평소에 오빠 분 자랑을 많이 하셔서 궁금했거든요.”

 

그녀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더니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말을 이었다.

 

“대학 교수님이라고, 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으시다면서요?”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건 목적이 뭔지 모르겠다. 올라가 있던 그녀의 입매가 다시 제자리로 내려왔다.

 

“아, 저. 혹시 제가 불편하시거나, 싫으신...”

 

그때 다시 문이 열리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동생이 밖으로 나왔다. 동생은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

 

“아, 네.”

 

그녀는 나와 동생을 번갈아보며 몸을 돌렸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난 벤치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동생도 그녀도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낯선 사람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익숙하지 못합니다. 제 반응이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녀의 눈이 더욱 커지고 동생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리고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배우가 그녀를 부르며 손짓했다. 그녀는 나와 동생을 다시 번갈아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대기실로 들어갔다. 고개를 돌려 동생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내린 눈은 반쯤 감겨있고 입술은 일자로 다물려 있었다.

 

“미안해.”

 

“아냐. 오빠 잘못이 아닌 걸.”

 

동생은 고개를 저으며 내 팔을 잡고 어깨를 다독였다. 내 잘못이 아니라지만, 내가 문제인 건 사실이다. 그러니 내 잘못이 맞다. 동생의 잘못도 아까 다화라는 그녀의 잘못도 아니기에 내가 가진 잘못이다.

 

분명 아까 그녀가 나에게 처음 말을 걸며 보여준 표정은 동생이 보여준 ‘웃음’과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웃는 얼굴이라는 걸 알아도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건 목적에 동조하고 공감할 수 없었다. 대화의 목적을 알지 못했기에 그녀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대화라는 건, 특히나 마주보고 하는 사적인 대화는 서로의 표정과 말투, 어감, 어조, 작은 행동과 눈빛을 통해 상대방의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고, 동조하며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대화는 끊어지기 마련이고, 상대에게 불쾌한 감정을 심어줄 수도 있다.

 

난 그럴 수 없다. 상대방의 말투와 표정에서 기분을 읽어내고, 눈빛에서 감정을 느끼고, 그에 동조하며 공감하는 그 공명을 나는 할 수가 없다. 어린아이조차도 자연스럽게 해내는 그 사소한 것을 나는 할 수가 없다. 타인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하고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상이나 직장에서의 불편함은 없다. 학생들은 주로 과제나 수업내용이 목적이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웃는 얼굴로 넘겨버리면 된다. 적어도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대처가 가능했다. 하지만 아까의 그 상황은 낯설었고, 생소했다. 무언가 함부로 대처하기가 꺼려졌다.

 

동생은 나 때문에 연기를 배웠다. 나에게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고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로인해 언젠가는 내가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동생이 처음 연기를 배우면서 시작된 10년의 시간동안 그 바람은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하지만 이제는 포기하는 게 어떨까 싶다.

 

그냥 내가 불량품이라고 인정해버리는 게 차라리 편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