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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한, 밤의 기록

볼품없는 여름 밤의 끝자락에서

아직, 길지 않은 삶이지만 지금 뒤를 돌아보면 작은 언덕에 올라서 마을이 어느 정도 보일 높이쯤 온듯 하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느낀 감정이 지금은 다르게 느낄 수 있는,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할 수도 있는 나의 이야기를 소개할 예정이다. 에세이지만 가끔은 공상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나갈 것이다. 처음은 남자Y에 관한 이야기다. 

 

am 7:59 

가끔 그런 밤이 있다. 정말 오늘밤은 내게 너무하다는 생각을 주거나, 누구에게는 대낮일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겐 칠흙같은 한 밤 같을 때. 너무한, 밤이라고 느낀 처음 순간에 대해 지금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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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Y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름 이니셜은 아니다. 알파벳 Y처럼 처음부터 나와는 다른 방향을 향해 가진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남자 Y가 이 사람과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남자Y랑 헤어진 순간은 점점 꼬여가던 그 사람의 인생이 이제 잠잠해지려고 한 시기였다. 그 시기를 난 기다리고 있었다. 구렁에 빠졌을 때 나 먼저 빠져나가는 건 사랑하는 이에게 할짓은 아니였다. 하지만, 그때 내가 사실 더 깊은 구렁에 빠지고 있었다. 사랑의 지독한 단면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이 힘든 상황을 겪고 있을 때, 난 자주 만나지 못해도 이해했다. 그 사람에 휴식의 시간을 주기도 했다. 그때 그 남자는 나와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나 역시 그 사람이 너무 좋았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나고 일주일은 그 사람을 생각할 때 마다 두근거림을 느꼈으니깐. 하지만, 그의 힘든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상황을 해결할 시간이 필요했고 난 기다렸고 반복되는 사과와 우리 만남의 지연에 나도 지쳐갔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내가 그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헛것을 보기 시작했다. 놓여있던 전선과 종이 등등이 아주 커다란 벌레로 보여 화들짝 놀란 것이다. 내가 망가지는 순간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 남자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면 '나도 내가 잘됐으면 좋겠어' 하고 본인에 대한 애정이 깊어져 갔다. 그는 나에 대한 미안한 감정도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먼저 떠나가길 바랬었나? 

 

헤어진 날은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그에게 마지막 통화를 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의 첫 마디는 말씀하세요. 였다.  물론 그의 말에는 오해가 있었지만, 내 번호를 아직(?) 지우지는 않았고, 사실 감정은 이미 그는 떠나보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왔다. 그는 업무를 진행하고 있던 중이라 일이 끝나면 통화하기로 하고 집 근처 공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 날처럼 바람이 좋았던 날도 없었다. 울컥거리는 마음이 심장을 뚫고 나오려고 했다. 눈물은 하염없이 흘렀고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더욱 얄밉게 느껴졌다. 

 

운동 후, 그에게 그만하자는 말을 전하자, 그는 좋은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마치 내가 하루종일 쫓아다닌 것처럼. 

 

다시, 우리의 첫 만남이 떠오른다. 아는 이의 소개로 간 자리에 그 사람이 있었다.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별 생각은 없었다. 첫 눈맞춤. 제대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눈동자의 방향이 일치한 순간,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손도 입맞춤도 아닌 눈맞춤이라니. 그 순간을 Y는 불꽃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느낀 불꽃은 여의도 축제의 불꽃이 아닌, 우연히 놀러간 바닷가에서 아무렇지 않게 구매한 폭죽에 예상치 못한 불꽃에 내 마음이 젖은 기분이었다. 

 

이로 시작해서 여태까지 느껴온 연애와는 다른 감정이 정말 진부하고 자칫하면 스토커가 될 수도 있는 짝사랑으로 치부되다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그 밤은 참 볼품없는 여름밤이었다. 

 

그렇다고 짝사랑이 찌질하다는 건 아니다. 나도 꽤 절절한 짝사랑에 후회없이 다 쏟아부은 적이 있다. 그 사랑이 끝날 때 오히려 개운했다. 상대방과 이뤄지지 않았지만, 내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있어 시원했다. 이번 사랑을 시작할 때 역시, 한번도 쌍방간의 사랑에서 다 표현하지 못한 나였기에, 이번 만큼은 다 표현하자고 결심한 사랑이었다. 그렇지만 감정이 이렇게 매몰차다. 

 

어떻게 지내냐, 사랑은 왜 그러냐는 노래를 달고 살고, 그와의 기억을 매일 반복재생했다. 지금은 후련한 이 감정에 절대 객관적일 수 없었다. 그 때 다른 사람이 찾아왔지만 흐르는 공기의 냄새에도 Y의 기억 속 냄새와 목소리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여태까지 상처 주었던 사람의 마음을 공감해 본 시기였다. 아직도 그와 보낸 날들과 밤을 생각하면 아리지만 아깝지 않은 기억이 꽤 많다. 

 

그래도 그가 나에게 바랬던 기대점이 충족되지 못하진 않났을까, 그냥 우리의 방향이 달랐기에, 그가 나에게 혼돈을 주었던 우리의 관계도 사실은 허무하게 끝난 건 아닐까.

 

그래도, 그 사람은 고마운 사람이었다. 변화를 얘기하기 보단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나를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것이 눈에 선하다. 참 내 마음에 스크래치는 가장 크더라도, 아문 흔적도 무늬처럼 보이는 듯 하다. 사랑은 아직도 참 어렵고 알 수가 없다. 

 

다시 생각해보면, Y와 만남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중이었는데,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 탈 때마다 봄바람에 실려오던 냄새에 난 괜스레 눈물이 맺혔다. 그의 사람냄새, 향수냄새를 닮아 있었다. 그 때 이미 이별이 예측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가끔 생각나는 그 밤, 올해의 여름은 볼품없더라도 토닥여 줄 수 있는 밤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