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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떤 여행

[안녕,어떤여행] D+08 팀 로드리고 in 우유니

 

지난번보다는 나아진 컨디션으로 두 번째 선라이즈 투어를 나선다. 오아시스 여행사 앞에는 한국인들이 바글바글한데, 나는 호다카 앞에서 일본인들 사이에 조용히 서있었다. 오아시스와 달리 호다카는 장화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 보라색 헌트 부츠를 골랐다. 마리노와 아사코가 그나마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었는데, 이 친구들은 상태가 조금 독특(?)했다. 흥이 지나치게 넘친다고 할까, 아무튼 내가 알던 일본인들 특유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달랐다. 그래도 아사코가 영어로 계속 통역을 해줘서 그 그룹에서 무사히 투어를 진행할 수 있었다.

 

스타라이트 동안 몇 장의 그룹 포토를 찍고 일출까지는 각자 시간을 보냈다. 사진을 찍어달란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아 눈치를 보다 몇 장 찍고 너무 추워 차 안에 머물렀다. 그리고 호다카의 가이드(그의 이름도 모른다)는 아예 대놓고 내내 차 안에서 잠을 잤다. 어제 우리에게 항의를 당한(?) 가이드는 그래도 밖에서 서성이며 우리가 해달라는 건 거의 다 해주었는데, 좀 미안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별로 불만이 없는 것 같은 걸 보면, 우리가 너무 유별난 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해가 떠올랐고, 가이드가 나와 드디어 몇 장의 그룹 포토를 찍어주었다. 어제와는 달리, 조금은 외로운 기분이었다. 여행지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곳, 우유니에서 만큼은 예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말이 통해야 합도 잘 맞고 예쁜 사진들과 즐거운 수다들이 오갈 수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선셋 투어는 그냥 오아시스에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가이드보단 팀원이 더 중요한 것 같다. 물론 6명의 일본인 친구들은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어제처럼 즐겁지는 않았다. 그래도 외국인들과 다른 여행사의 투어를 해본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셋 투어를 한 번 더 할 생각이었는데, 결국 오아시스 여행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침 선셋 투어 빈자리가 딱 1개 남아있어, 지나가던 한국인 여자 둘에게 펜 좀 빌려 달라니 뒤따라 오던 남자들에게 있을 거라고 가르쳐줬다. 펜을 빌려 이름을 적으니, 그녀들이 자기들도 그 투어를 한다고 해 오후에 만나자고 하고 헤어졌다. 9시에 찾으러 오라던 세탁물을 조금 일찍 찾으러 갔다. 한참 벨을 눌러도 나오지 않아 결국 2층까지 올라가 재촉해서 세탁물을 받았다. 조금 깨끗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소금물 흔적은 깨끗이 사라졌다.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나오니 아침이 준비되었다고 한다. 숙소의 아침 식사는 꽤 맛있다. 매번 싹싹 비우게 된다. 그러니까 고산병에는 과식이 금물인데...! 그리고 선셋 투어 전까지 뒤죽박죽이 된 잠을 청한다. 오후 1시쯤 일어나 씻고 오아시스 회사에 결제를 하러 갔다. 원래 빈칸에 이름을 적고 바로 결제를 해야 예약이 확정되는데, 아침엔 문을 열지 않아 이름만 적어둔 터였다. 혹시나 그 사이 예약이 취소되진 않았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여행사로 갔더니, 마침 한국인 세 명과 여행사의 남녀 사장, 그리고 가이드로 추정되는 인물이 한창 싸우고 있었다. (이제는 으레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가만히 듣다 보니, 내가 하려는 투어 얘긴 거 같았다. 원래 하기로 되어있던 인원 중 4명이 취소를 해서 우리 팀이 분해되었다고. 그래서 내가 바로 마지막 이름의 주인공이라고 했더니 그럼 두 명의 원래 우리 팀에 한 명의 한국인 여자, 그리고 나까지 해서 최소 2명만 더 구해오면 로드리고가 가이드를 해주느냐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한국인 커플(당시엔 커플임 줄 알았다)이 내게 가이드가 로드리고인 줄 알고 예약했냐고 묻길래, 그건 아니라고 했더니 무조건 로드리고로 알고 했다고 하라고 했다(!) 사실 아침에 펜을 빌려준 남자분들이 로메오라고 했지만, 일단 나도 로드리고로 우기고 본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없는 대화들이 한참 오간 다음, 결론은 왜인지 알 수 없지만 나만 결제하면 원래 이름 적힌 대로 7명이 로드리고 팀으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로드리고는 이 여행사의 투톱으로 꼽히는 가이드인데, 그 자리에 있던 인물이 바로 로드리고였다. 나는 얼른 결제를 하고 예약을 확정했다. 와인과 치즈가 포함되어 다른 팀보다 비싼 1인 140볼. 하지만 가이드 로드리고가 확정이라면 노 프라블럼! 우리 팀에 합류하고 싶어 했던 다른 한 명의 여자분에겐 미안하지만, 어쨌든 아침에 펜을 빌려서라도 이름을 적길 잘했다. 한 번 가이드가 바뀐 적이 있기 때문에 몇 번이나 로드리고에게 "좀 있다 너랑 같이 가는 거 맞지?"라고 확인했다. 커플인 줄 알았던 한국인 남녀, 봉균과 혜인은 그냥 동행 중이었고 키친이 있는 숙소를 찾고 있었다. 내게 숙소가 어디냐고 물었지만, 우리 숙소는 아마 우유니에서 제일 비싼 숙소일 것이어서 얼른 키친이 없다고 했다. 봉균, 혜인과 헤어져 나는 점심을 먹기로 했다. 어제부터 먹고 싶었던 크림 파스타를 먹었다. 맛은, 없었다. 숙소에 들어 리모컨을 챙기고 감기약을 먹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콧물이 멈추질 않는다.

 

시간을 맞춰 오아시스 앞으로 가니 좀 전에 만났던 얼굴들이 다 모여있었다. 앳된 얼굴의 한국인 남자 둘과 아침에 만난 여자 둘, 봉균과 혜인, 그리고 나까지 일곱이다. 한국인 남자 둘은 부산에서 온 스물세 살 애기들이었는데 (사실 누나라기 보단 이모가 맞지 않을까 싶은) 정말로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아침에 내가 펜을 빌릴 수 있도록 도와준 여자들은 자매라고, 언니 선영은 나와 동갑이고 동생 난희는 서른 살. 이렇게 셋만 유일한 삼십대다. 두 사람은 회사를 휴직하고 여행을 왔다고 했다. (좋은 회사들이다! 참, 난희가 다니는 회사는 FNC였다) 우유니 첫째 날을 제외하곤 계속 이렇게 왕언니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귀여운 막내들, 상남과 도훈. (도훈은 카메라가 없고 상남은 휴대폰이 없었다, 사실 상남은 카메라도 잃어버려 여행자로부터 고프로를 하나 샀다) 우리는 유난히 금세 친해져서 첫 시작부터 왠지 느낌이 좋았다.

 

로드리고는 그나마 영어를 할 줄 아는 가이드라서 정말 좋았다! 스물여섯의 이 청년은 대학에서 투어리즘을 전공하고 있어서 데이투어는 할 수 없다고 했다. (뭔가 귀엽다) 우리가 로드리고! 로드리고! 를 외칠 때마다 부끄러워하는 게 얼마나 귀여운지, 누나는 너한테 완전 반했어...♥︎

 

사막에 접어들자 로드리고는 지프 지붕 위에 올라가 보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우리는 좋아서 냉큼 봉균, 혜인, 선영이 먼저 올라갔다. 그런데 한참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로드리고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기, 지금 얘 조는 거 같은데...?"라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속도가 높아졌고 나는 얼른 로드리고를 깨웠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휴, 그런데 왜 화나거나 무섭지 않은지! 그저 신나기만 했다. 나도 지붕 위에 올라가 봤는데, 너무너무 신났다!

 

마른 우유니에서 로드리고는 열정을 다해 동영상을 찍어주었고 우리는 열심히 시키는 대로 했다. 다들 합이 척척 맞아서 엄청 신났다. 중간에 로드리고에게 고맙다고 팁을 모아서 줬다. 물 찬 우유니에서도 로드리고의 열정은 끝이 없어, 결국 우리가 지치고 말았다. 말이 필요 없는, 그저 사진이 모든 걸 말해주는 아름다운 순간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다시 마른 우유니에 멈춰, 별빛 아래서 와인과 치즈를 먹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밤이어도 되는 걸까! 내일 우유니를 떠나는데, 마지막 투어가 이렇게 만족스러워 정말 다행이었다.

 

로드리고가 또 졸지 않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로드리고는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면 호텔이나 투어 에이전시를 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나는 이미 너의 팬이 이렇게 많으니, 너는 뭘 하든 다 잘 될 거라고 말해줬다. 로드리고는 만약에 허니문으로 우유니에 오면 자기가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팀을 만나서 기쁘다고도 했다. 그는 우유니에서 나고 자랐는데, 가족들은 지금 다른 도시에 있고 우유니에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여자 친구는 없냐고 물으니, 너무 바빠서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차가 여자 친구라는 뻔한 멘트를 날려서, 그러지 말라고 말해줬다. 도로도 없고 불빛도 없는 사막에서 어떻게 길을 찾은 지 궁금했는데, 자 멀리 있는 도시의 불빛과 소금 호텔의 불빛을 등대 삼아 운전을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아쉽게도 도착하고 말았다. 우리는 조금 더 돈을 모아 팁을 더 줬다. 10볼이 전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아니, 우리가 느낀 기분에 비하면 모자랄 정도였다. 나는 일을 할 때, 저렇게 열심히 한 적이 있었을까?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일을 하면 주변에서도 분명 그걸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로드리고는 정말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게 절로 느껴져 왠지 자극이 되었다.

 

다시 선라이즈를 가야 한다는 로드리고와 헤어지고 우리끼리 술 한 잔 하기로 했다. 시계탑 근처 식당에 들어가 피자와 맥주를 시키고 상남과 도훈이 소주를 가지고 와, 우유니에서 소맥을 마셨다(!) 나는 먹고 있는 약이 한 보따리라서 술은 조금만 마셨다. 12시가 조금 넘어, 술이 약한 상남과 도훈이 얼른 자리를 떠나 나머지도 헤어졌다. 일정이 맞는다면, 산페드로 드 아타카마에서도 만나자고 했다. 오랜만에 정상적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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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떤 여행

[안녕,어떤여행] D+07 우유니의 아버지?

 

2시간 남짓 자고 일어나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선라이즈 투어를 하러 뛰쳐나갔다. 고산병 증상인지 알 수 없지만 조금만 빨리 걸으면 오른쪽 옆구리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혹시 맹장염 같은 건 아니겠지?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든다. (다행히 고산지대에서 내려오니 괜찮다) 숙소는 컨디션이 매우 좋은데, 다만 투어 회사들이 있는 거리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서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3시를 1분 앞두고 도착해 겨우 지프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는데 아무도 반응이 없다. 시무룩한 채로 눈을 감고 있는다. 중간에 내려서 장화를 갈아 신는데, 그제야 다들 인사를 나눈다. 첫인상과는 달리 모두 좋은 사람들 같았다.

 

다소 무리한 일정임에도 이 투어를 신청한 건 가이드가 우유니의 아버지(?)라는 빅토르라고 해서인데, 나랑 같은 이유로 같이 신청한 정음은 가이드가 완전 1개월 차 비기너로 바뀌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다행히 정음이 우유니에서 벌써 4일이나 머문 터라 우리끼리 별 사진을 찍으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가이드는 딱히 한 게 없었다. 혜원과 서영이 선라이즈는 정말 춥다고 경고를 했었는데, 와! 정말로 추워서 죽을 것 같았다. 예진과 둘이 부둥켜안고 바들바들 떨었다. 팀원 중에 스페인어를 잘하는 친구가 있어서 좋았다. 유난히 언어의 벽을 절감하는 여행이다.

 

정말로 예쁜 우유니의 하늘을 봤고 기분 좋게 돌아오는 길, 재원이 SD카드를 좀 달라고 했다. 알다시피 SD카드란 친구들은 워낙 예민해서 잠시 망설였다. 순간 머리 속에 오류가 스쳐갔는데, 아마도 그게 내 예지력이 발동된 게 아니었을까? 케이스를 벗기고 있는데 "꺼내기 힘들어요?"라고 묻길래 "네, 좀" 하고 완곡한 거절을 했으나 결국 나는 그에게 SD카드를 건넸다. 그는 리더기로 자신의 휴대폰에 연결해보더니 "안 되네" 하고 내게 다시 돌려줬지만, 이미 그 카드는 포맷 오류가 생긴 후였다. 하........ 화내면 안 돼. 나는 여기서 유일한 30대니까. 우유니 사진은 다른 사람들도 찍었고 나는 선셋과 선라이즈를 한 번씩 더 할 생각이라 타격이 덜하지만 라파즈의 이틀 치가 그 안에 있었다. 처마 화는 못 내고 팀원들에게 애써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재원은 몹시 당황하며 미안해했다. (그래, 미안해야 마땅하다) 사진을 빨리 받고 싶었다면 와이파이로 연결해서 휴대폰으로 건네줄 수 있었는데, 하... 숙소에 돌아와 컴퓨터로 시도해도 마찬가지여서 여러 번 시도하면 복구가 더 어려워진다고 해서 고이 케이스에 담아 캐리어 깊숙이에 넣어두었다. 5월 중순까지 그 사진들의 운명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투어가 끝나고 가이드가 바뀐 것을 (또) 항의하러 갔다. 정음이 몹시 화를 냈고 스페인어를 잘하는 형근이 힘을 보탰다. 결국 가이드까지 불러와 삼자대면을 했으나, 나는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답답했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예진에게 살짝 물어보니 가이드와 회사는 되려 큰 소리를 치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정음이 빅토르나 로드리고 같은 가이드를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했더니 우리 가이드(난 이름도 모른다)는 자기가 그들만큼 일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다고 했다. 결국 우리의 항의는 10볼씩 받고 마무리됐고 이틀 연속 '먹고 떨어져'를 경험하고 나니 정말 정이 떨어져 호다카 투어 회사에 가서 6명의 일본인과 투어를 신청했다.

 

일단은 졸려서 낮잠을 잤고 오후에 일어나 런드리를 맡기고 점심을 먹을 겸 밖으로 나갔다. 우유니는 보통 투어를 하기 위해 머무는 마을이라 마을 자체는 별로 볼 게 없다. 그래도 천천히 걸으며 둘러본 마을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맑고 건조한 날씨에 파란 하늘이 있어서 싫어할 수가 없는 마을이긴 했다. 다만, 과장 좀 해서 늑대 같은 길멍멍이들과 흙먼지, 고산 지대라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 것만 빼면.

 

2박 3일 투어에서 첫째 날 일정은 덥다고 반바지를 입기를 권해서 반바지를 하나 사려고 했는데, 겨우 찾은 한 곳에선 정말 촌스러운 스팽글이 달린 반바지가 150볼이나 해서 포기했다. (그리고 첫째 날은 진짜 추웠다) 목이 말라 노점에서 주스를 한 잔 사 먹었다. 다른 사람들은 파르페를 주문했는데 얼마나 예쁘게 만들어 주던지! 내가 단 걸 좋아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 같다. 지나가다 신라면을 파는 식당을 발견해 몸도 안 좋은 터라 보양식(?)으로 신라면을 먹었다. 어지간 해선 한국 음식을 찾지 않는데. 6시 조금 넘어 짧은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우유니에서는 모든 것이 투어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틈이 날 때마다 자 둬야만 한다. 다시 새벽 3시 선라이즈 투어를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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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프런티어정신 그리고 보안

 

   "시선(視線)이 드리운 곳에 실체가 시작된다."

 

    프론티어의 사전적 의미는 변경 지대(개척 시대의 개척지와 미개척지의 경계 지방)로, '지금까지 인간의 발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를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특히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에 사용되면서 개척정신으로 탄생합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불확실한 것을 향한 모험이라 정의하면 될 듯 합니다.

 

    미국의 서부개척상은 음악, 그림, 소설, 영화 등을 통해 프론티어 정신이 무엇인지를, 과장의 우려는 있지만,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이 떠나는 모험은 자신의 미래를 열어간다는 자유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그 탐험과정의 역동, 고난과 위기극복의 드라마는 부럽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이제 도전이라는 단어는 미적 낭만성을 부여받기에 이릅니다. 개척정신의 결과물로 얻게 되는 토지, 금 등의 부는 더 나은 미래를 약조하는 희망의 이정표입니다.

 

    그럼 무엇이 프론티어 정신의 본질일까요? 미지의 것에 끌리는 인간의 호기심? 알지 못한다는 것에서 오는 불안과 염려를 종식시키려하는 인간의 존재적 충동? 또는 도전의 결과물로 주어지는 승자의 전리품? 아니면 무엇을 얻을지 잃을지 모르는 것에서 오는 도박사의 흥분?

모두 맞는 말이지만, 저는 프론티어 정신의 본질을 '창조와 도약'이라 봅니다. 주어진 세계와 일상의 현상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과 의미를 갈구하는 것이 프론티어 정신이라 봅니다. 경계로 나뉘어져 분열되어있는 세계를 뛰어넘으려는 도약의 몸짓이 프론티어 정신이라 봅니다. 그러기 위해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시선’입니다.

 

    '자세히 보기', '다르게 보기' 등등 이 모든 것이 시선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시선이든, 불안과 염려를 없애려 하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시선이든, 최초의 시작은 우리의 일상과 우리를 둘러싼 주변과 세계를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이는 숨은 그림 찾기처럼 숨은 의미 찾기 이고 나아가 그 찾기를 넘어 우리의 삶과 세상을 더욱 풍성하게 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에는 창조의 본질이 들어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던 때에 빛이 있으라 라고 하자. 혼돈과 공허의 우주에 어둠을 몰아내며 최초의 광명이 쏟아집니다. 신의 시선은 혼돈과 공허의 한가운데를 직시하며 부재한 무엇을 탐구합니다. 그리고 그 부재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빛을 선언합니다.

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부재는 부재함으로서 존재를 낳게 됩니다. 관심(볼관觀마음심心)은 그 응시의 힘으로 가려져 있던 세밀하고도 은밀한 존재의 비밀을 드러냅니다. 부재해 있던 곳이라면 응당 의미가 탄생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사물을 볼 때 그것은 의미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시선이 드리운 곳에 실체가 시작됩니다.

 

보안은 이 땅에서 우리 언어로 논의되기 시작한지 사실 얼마 안 된 분야입니다. 아직까지 말 그대로 변경(邊境)이며, 우리의 발이 닿지 않은 미개척지가 많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불확실한 것을 향한 모험입니다. 따라서 그 학문을 연구하거나 보안을 실천하는 모든 이들은 프론티어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 개척정신은 모든 훌륭한 도전이 그렇듯 드라마틱하게 역동적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선진국들은 이미 보안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으며 심도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런 연구와 이론이 단순히 소개되어 지거나, 외국에서 건너온 그것을 온 힘으로 지탱하기 위하여 필요한 이상으로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들의 언어 역사 문화 정치 관습이 모두 다른 환경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속한 우리가 사는 곳에서 우리주변에 펼쳐지는 보안현상들은 우리의 말과 우리의 시선으로 세밀히 탐구되어야 합니다. 우리주변의 일상세계는 우리의 관심으로만 발견되고 창조될 수 있습니다.

 

서구의 토양에서 자라난 security는 우리의 보안인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의 이론의 도입은 그저 참고 되어야 하며,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바로 이 현장에서 우리의 말로 우리의 현실속에서 보안을 창조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프론티어에 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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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세잔의 화실에서 '보안'을 그리다

 

 

 

"과일들이 탁자에서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다."

 

화가 폴 세잔의 정물화는 이상했다. 미술에 전혀 아는 거라곤 1도 없는 나같은 사람에겐 더 그렇다. 내가 본 화가 세잔의 정물화는 원근법의 굴레를 벗어나 다른 시점으로 사물을 표현해서 그렇다나.....같이 그림을 본 친구가 답을 해줬다.

 

세잔은 그가 살았던 시대, 정물그림에 관한 지배적인 태도를 버리고 대상의 본질을 깊이 사유했다고 한다. 당시 주류 미술계의 거센 비난 속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으로, 사물의 변하지 않는 구조와 형상의 본질에 주목해 독자적인 화풍을 열었고 이후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보안을 주제로 하는 글에 왠 화가 세잔이냐고 물을 만하다. 각종 매체들에 넘쳐나는 보안담론의 지루함을 느낄 즈음, 사물 그 자체의 고유함과 진실에 천착한 세잔의 그림세계를 우연히 마주하며, 나는 보안에 관한, 그 근원에 대한 고민이, 보안을 업으로 하는 세계에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범람하는 보안기술도 결국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보안은 근원적으로, 본질적으로 두려움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두려움이라는 속성이 없다면 보안이란 말은 성립할 수 없다. 보안활동은 기술이기 이전에 어떤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우리네 삶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 말이다. 보안이 기업이나 조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직업 세계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무슨 보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든, 인식하는 위협이 다르고 그 표현이 다를 뿐  결국 두려움의 처리방식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물리적 보안이든 기술적 보안이든 관리적 보안이든 염려,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기 위한 장치들일 뿐이다.

 

보안은 추상이고 관념이고, 하나의 태도다. 보안기술은 추상이고 관념인 보안을, 구체화 시키는 도구일 따름이고, '보안한다'는 태도는 보안조직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개개 주체들의 문제다. 도구에 갇히지 말고, 그 본질과 우리의 일상을 주목해 보안의 외연을 넓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물화를 바라보는, 당대의 굳은 시선을 깨고 새로운 '바라보기'를 한 화가 세잔의 화실에서 보안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과 인식의 확장을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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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이제 우리 말로 보안하자

 

영어 시큐리티(security)의 어원은 라틴어 명사로 세쿠리타스(securitas),  형용사로는  '벗어나다' 라는 뜻의 세(se)와 염려 ∙ 불안 ∙ 근심을 뜻하는 쿠라(cura). 세쿠라(secura)라고 한다. 그런데 라틴어는 지금은 학술언어나 종교언어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언어이다. 기원전에  쓰이던 라틴어의 의미가 과연 오늘날과 같은 지키고 보호하는 우리가 말하는 보안과 같은 의미일까. 필자의 유치한 의심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보안이라는 말도 순수한 우리말은 아니다. 시큐리티(security)라는 외국어의 어원은 공부하는데, 보안의 순 우리말은 무엇이고 우리말이 있다면 우리말의 어원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말은 형용표현이 매우 발달한 언어다. 붉그레죽죽하다. 푸르딩딩하다. 누리끼리하다. 이런 표현을 외국어로 정확히 번역하기는 정말 어렵다. 이런 표현을 번역하려면 외국 사람들이 우리의 색감을 직접 ‘경험’한 후 그 느낌으로 외국어로 번역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 시티즌(citizen)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단어는 없다. 우리는 서구사회가 영주와 농노, 기사로 대표되는 중세봉건의 시대에 머물 때 이미 강력한 중앙집권의 발전된 국가체계를 만들었다. 우리에게는 왕의 신하로서 신민 또는 국가의 국민개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는 아래로부터의 혁명, 도시의 인민들이 왕과 귀족들에 대항해 싸워 자유를 쟁취해낸 기억이 있다. 이 투쟁을 이끌었던 도시의 인민을 가리켜 시티즌(citizen)이라 한다. 시티즌은 자신의 주권을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낸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우리는 시티즌을 시민이라 번역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민은 ‘시에 속한 인민=시민’ 일 뿐이다. 우리가 시티즌을 정확히 번역하려면 프랑스 시민혁명의 역사와 그 가치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느낌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는 대체어를 찾아야 한다. 필요하면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그 뜻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언어를 만들었을 때에만 우리는 그 말과, 쓰임을 정확이 이해할 수 있다. 과연 시큐리티(Security)가 우리가 말하는 보안이라고 부르는 의미가 꼭 같을까?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시큐리티와 우리의 ‘보안’은 비슷한 측면이 있을지 몰라도 시티즌과 시민처럼 뉘앙스는 분명 다를 것이다.

 

우리와 서구세계는  가치관, 세계관이 다르며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이 다르며 어떠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대처하는 방식 또한 다르다. 그럼에도  수입한 개념은 별다른 반성적 사고 없이 우리의 삶 속으로 무비판적으로 들어온다. 문학영역에서 번역은 그냥 말하는번역이 아니라 제 2의 창작이라는 말이 있다. 외국문학의 제대로 된 소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창작되어야 한다. 시큐리티의 어원은 라틴어로 무엇이고 하는 건 알면 좋지만 몰라도 되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말로 사고하고 우리의 언어로 개념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기의 언어를 상실한 시대,  말 찾기에서 우리의 보안은 한 단계 성숙해 질 것이다. 영어와 일본어 등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정보의 축적량이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만큼 스스로 생산해 낸 지식이 많다는 소리다. 시큐리티와 보안 역시 우리가 생산해낸 말이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지극히 한국적으로 보안의 개념을 사고해보자.  그래서 우리 문화의 맥락에서 우리의 보안을 생산해 보았으면 한다. 선진국이라는 것은 그 국가 스스로 생산한 지식이 많은 나라를 말한다. 우리 식으로 사고를 하고 지식을 생산할 수 있어야 우리도 선진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지식인이 아니다 그래서 지식인들에게 묻고 싶다. 그리고 요구한다. 진짜 한국적 보안은 무엇인가.   글로벌 보안은 이런 것이니 그걸 배우고 빨리 습득했다고  자랑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서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생산할 보안지식은 무엇인가를 고민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진짜 우리 땅에서 우리  생각으로 보안을 생산해 낼 수 있다.

개념까지도 수입해 쓰면 안 돼지 않는가.   아직까지도 우리는 기술만 난무할 뿐 통찰과 철학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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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직감과 경영

경영의 세계는 엄혹하다. 합리와 비합리의 경계가 모호하다. 잔잔한 바다를 순항하는 듯 보이지만, 바다는 언제나 거친 비바람을 품고 있다. 경영은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예상치 못한 바깥사정으로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교통사고로 죽는 것이 가장 ‘부조리’한 것이라고 했던 카뮈의 말처럼 이유도 모른 채 어느 순간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위험에 빠진 경영은 판단의 시간이 부족하다. 막막하고 아연한 감정이 일렁인다. 경영자에겐 혼돈 속에 명운을 건 결단이 필요할 뿐이다.
 
실패한 경영의 배후에 대해 지식인들은, 폭풍에 맞선 어부들의 사투와 같았을, 위기에 빠진 경영자의 목숨을 건 숨가빴을 시간을 두고 철 지난 조언을 하기도 한다. 경영전문가들의 현명한 조언이 담긴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그러나 때때로 현실에 반영되지 못한 경영서적은 서점과 도서관의 가득 찬 책장 한 켠에서 언제 신간에 밀려 창고로 혹은 폐지로 나갈지 모르는 처지에 놓이곤 한다. 인간은 우매하다. 경영학을 십수 년을 공부하고도 자신이 실제 경영의 세계에 발딛여 놓으면 대부분 물속에 처음 들어간 것처럼 허우적거린다. 실제 경영의 세계는 위험투성이다.
 
경영의 현장에서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생존의 갈림길에서 경영자의 직감은 성패를 좌우한다.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라. 쉴 새 없이 회의를 하고 차가운 이성을 가진 머리로 정확한 판단을 한다고 자부하지만, 의식의 배후엔 직감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경영은 분석과 같은 차가운 이성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가슴이 이끄는 감정의 세계이기도 하다. 과반수가 지배하는 국회가 아닌 이상, 치열한 경영현장에선 경영자의 직감과 통찰이 지배한다. 그 직감의 정확도가 경영의 백미(白眉)다. 경영을 잘하려면 결국 오답을 피해나갈 수 있는 본능적인 직감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의 배양이 필수다. 그러므로 어쨌거나 직감의 정확도를 올려야 한다.

사물이나 현상을 접하였을 때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아니하고 진상을 곧바로 느껴 앎. 또는 그런 감각. '직감'에 관한 국어사전 설명이다. “내 느낌은 이렇다” “내가 보기엔 그 사람의 의도는 이런 것 같아” 또 어떤 사안을 두고, 할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우리들은 ‘감’에 의존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 전문가라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넌 어떻게 생각해”하며 물어보고 결국 전문가의 말대로 판단을 해 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직감이란 감각도 훈련이 필요하다. 왜냐면 오랜 경험의 축적으로 생긴 하나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결정의 망설임 앞에 성공의 가능성이 높은 직감적인 결정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에서 본능적인 슛을 성공시켜 승패를 가른 박지성 선수에게 물어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직감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먼저 내 경험을 검증해야 한다. 동일한 경험은 거의 없다. 사람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다. 지역이라면 기온도 다르고 풍습도 다르다. 사람의 인식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사람의 감각은 자신이 들어야 하고, 봐야 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발달한다. 부지불식 간에 특정 상황의 조건에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갖다 붙인다. 직감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내 경험이 건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확보돼 있는지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카트리나 태풍으로 루이지애나 대홍수라는 파국적 사태를 맞이한 당시 미국 국토안보부 통제국장 메튜 브로데릭의 실수는 정보의 편향된 취사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생각의 패턴이 문제였다.또한 불편하고 거북하지만 올바른 조언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정보의 취사는 이해관계에 얽매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는 정보만을 선택한다는 건 자신에게도 독이 되고 조직에게도 독이 될 수 있다. 반대의견을 수용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그리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되, 의심하고 검증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전문가는 존중해야 한다. 단 그들의 의견에 무조건 순종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의 권위에 주눅들지 말자는 얘기다. 다른 생각이 있으면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의견을 말해야 한다. 그렇다고 전문가를 무시하란 말은 아니다. 조언에 대한 어설픈 배척은 자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다름 아니다. 존중하되 그들의 의견을 그대로 믿어버리지는 말란 말이다. 만약 본인이 전문가라면 자신 스스로 전문가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현상에 대해 지금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오류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자세가 필요하다.경영의 핵은 의사결정이다. 갑자기 닥친 위험 앞에선 즉각적인 직감과 통찰은 대단히 중요하다. 자신의 경험이, 타인의 전문적 조언이 상황에 적절한 것인지 의심하고, 검증하는 습관의 형성이  직감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방편이다. 아울러 경영자만큼이나 위험의 한가운데 서있어야 하는 보안전문가들에게 정확도 높은 직감은 필수적인 소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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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사기꾼의 미끼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 싶은 인정욕구를 가지고 있다. 보란 듯 성공해서 이름을 날리고 싶어 한다. 건전한 인정욕구는 목표를 향한 험난한 도전의 여정에 힘을 보태는 보약이다. 그러나 지나친 인정욕구와 공명심은 경계해야 한다. 그런 심리를 악의적으로 악용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기는 사람의 감정을 흔듦으로서 시작한다. 지나친 인정욕구를 가진 이에겐 ‘존중하는’ 그 자체로 과시욕을 더욱 부추긴다.  때론 자존감을 의도적으로 훼손시킴으로써 스스로 과시욕을 일으키도록 유도한다. 고위 공직자 출신이나, 퇴직한 대기업 고위직 임원들의 심리적 상실감을 파고든다. 사회적 성공을 이룬 이들과 다른, 성공을 향한 꿈을 좆는 사람들에겐  그럴 듯한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접근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높은’ 사람과 만났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흥분된다. 어깨동무하고 사진이라고 한 장 찍으면 소셜미디어에 한껏  자랑하며 올려댄다. 그 ‘높은’ 양반들 덕분에 마치 자신의 인생이 바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들은 표적이 된 대상에게 각종 모임과 만남의 기회를 계획적으로 만들고 때가 되면  달콤한 유혹의 손길을 뻗는다. 꾼들은 '근거없는 권위에 굴복'하는 자존감 약한 사람들에게,' 너의 인생을 바꿔 줄 거짓 희망' 이라는 미끼를 던졌고  나약한 표적은 불행히도 미끼를 물고 만다.

      사기는 사람의  욕망을 이용한다.  사기꾼들은 마치 악마처럼 애써 숨긴 욕망의 문을 두드려  수면위로 불러낸다. 그들은 그저 욕망을 불러냈을 뿐이다. 미끼를 문 건, 욕망을 들킨 이들이다. 악마에게 호출된 나약한 인간의 욕망은 강렬하게 질주한다. 소중한 가정도 친구도 허리케인처럼 날려버린다. 태풍이 멎은 후엔 날아가 버리고 부셔진 것들을 보고 후회하겠지만.....

      요즘 세상엔 나이든 어르신들이 아니라면 소셜미디어 한 두 개를 안 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소셜미디어 속엔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매일 매일 쏟아진다. 그 속엔 살아가는 데 유익한 이야기도 많고 피곤한 일상에 활력을 주는 재미있는 글과 그림도 많다. 그 많은 이야기 속에서 올린 이의 숨긴 속마음이 들릴 때도 심심찮게 있다. 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말하고자 하는 말은 단 한마디다. “나는 인정받고 싶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걸 탓할 마음은 없다. 단지 그 욕망을 ‘누군가’이용할까봐 두렵다. 지나친 인정욕구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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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편견

영화 『내부자』 속의 안상구(이병헌 분)는 깡패다. 대통령 후보와 재벌 회장 그리고 언론이 유착한 비리행위를 도왔던 깡패 안상구는 더 큰 꿈을 욕망하다 결국 버림받고 그들의 비리를 폭로한다. 그러나 정치권력과 재벌과 언론은 그가 깡패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시킨다. 결국 깡패라는 선입견과 편견 덕에 그의 정의로운 고발은 오히려 그를 ‘희대의 사기꾼’으로, ‘파렴치한’으로 깊은 곤경에 빠뜨린다.


메시지가 맞다면 메신저를 공격하라. 만약 메신저가 믿을 만하다면 메시지를 혼탁하게 하라. 정치적인 공방에서 흔히 쓰는 수법이라고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다. 영화 속 장면과 딱 들어 맞는 말이다. 비리의 주인공들은 흠집많은 메신저를 공격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편견’이라는 정서를 잘 활용했고 대중은 진짜 읽어야 할 메시지에 집중하지 않는 대신 ‘안상구는 깡패다’ 라는 사실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사회생활을 겪으며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 자신에게 가지는 타인의 편견으로 불편했던 적이 있으리라. 학력이 이러니, 경력이 이러니, 어느 지역 출신이니, 등등. 사실 편견을 안 가진 사람은 없다.  우리는 크고 작은 편견을 가진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편견은 학습의 산물이다. 지연, 학연, 혈연과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편견은 자연히 학습된다. 어느정도의 편견을 가지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부정적이지 않다면 말이다.

 

편견은 어떤 대상이나 사태에 대해 어느 한편으로 깊게 뿌리박히고 고정된 생각의 경향을 가지는 정서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편견의 형성은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겠다. 가정과 출신지역, 출신학교 등 어떤 형태의 사회에서든 어떤 대상이나 사태에 대한 일정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적 오랫동안 상호교감했거나, 비록 주관적인 감정이더라도, 자기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이 타인이나 타지역, 타집단에 비해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것과 같은 일종의 상대적 박탈감 또는 괴리감에 의해서도  형성될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편견은 특정한 대상이나 사건에 대해서 대단히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일쑤며,  편견의 대상을 재평가할 만한 의미있는 의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자기의 사고의 오류를 수정함에 인색하다.


이 편견이라는 정서는 어떤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동조될 때 위험하다. 즉 특정대상에  대해 가지는 영향력이 큰 집단이나 개인의 의견이  그와 다른 의견과 상충될 경우, 다른 의견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다수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편견은 집단화되며 조직화될 수 있고, 그로인해  불안요인이 조성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편가르기'라고 해야 할까.


조직적이고 집단화된 편견은 위험하다. 어떤 현상에 대해 편견이란 정서가 뿌리박혀 있다면 경영이란 관점에선  사고의 유연성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경영현장에서 조직의 '편견'은 한번쯤은 짚어봐야 할 문제다.

경영은 의사결정의 연속이다. 의사결정을 함에 위험판단은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래서 경영자는 항상 냉정하되 유연한 사고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최고 경영자든 일개 부서의 부서장이든 편견을 가지면 위험을 판단하는데 장애요인이 안게된다. 위험요인을 판단함에 있어 위험하지 않다는 의견에 ‘왜’라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편견은 학습의 산물이다. 편견은 하나의 감정이다.  그렇기에 편견의 극복은 훈련으로 학습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보안경영은 모든 경영행위의 전방에 '안전하고자 하는 인식'을 배치하는 것이다. 보안은 위험관리다.  위험관리는 검증된 것이라도 되새겨 보는 태도가 중요하다. 편견은 되새겨 보는 태도를 방해하는 감정이다. 위험을 다루는 보안인들에게 편견을 의심하는 태도는 두 번 말 할 필요없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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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당신의 감정을 보안하라

행복한 하루되세요!

 

아침 출근 길, 간혹 받는 인사 메시지다. 메시지를 받아보다가 문득 ‘나의 하루’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나의 하루를 곱씹어 생각하면, 직장에서 일 하고, 친구를 만나고 하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는 분노, 경쟁심, 탐욕, 적대감, 기쁨 등등 매 순간 일어나는 숱한 감정에 둘러싸여 있다. 그렇다. 나의 ‘하루’가 좋았는지 안 좋았는지는 하루 동안 가졌던 감정이 결정한다. 결국 행복한 하루 되세요! 라는 말은 좋은 감정을 가진 채 전장 같은 일터에서 따스한 가정으로 웃음 가득 안고 돌아가란 말이다.

 

한 사람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사물을 대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한없는 부정과 절망과 세상에 대한 증오를, 어떤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긍정하고 희망하고 사랑한다. 그 사람이 가진 감정이 곧 그 사람 자체다.

 

몇 년 전 무기거래상과 전·현직 장교들이 벌인 방산업체 비리사건과 같은 일명 군피아 사건, 첨단기술 해외유출 사건, 입찰비리·납품비리·인사 비리 등 각종 비리 사건에는 ‘모래 속에 진주 찾기’가 아니라 ‘모래찾기’만큼이나 쉽게 발견되는 문구가 있다. 바로 금품제공! 향응제공! 인간이 가진 탐욕이라는 본성을 이용하는 데 금품제공, 향응접대만큼 더 좋은 솔루션은 없나 보다. 금품과 향응제공은 오랜 세월을 독자들에게 읽히고도, 지금도 서점에서 팔리는 스테디셀러처럼, 탐욕의 시장에서 시대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팔리는 ‘사람 감정 흔들기’ 분야의 스테디셀러임은 분명하다. 비리의 주인공들은 탐욕이라는 감정을 올바르게 처리하지 못했다.

 

금품과 향응제공에 절대 뒤지지 않는 솔루션이 또 하나 있다. 바로‘미인계’. 스파이 사건에서 미인계를 빼놓고 얘기하면 재미없다.

흔한 얼굴 사진 한 장 구하기 어려워 ‘얼굴없는 사나이’란 수식어가 붙었던 냉전시대 동독 비밀경찰기구 슈타지 대외정보부 HVA의 수장 마르쿠스 볼프 (Markus Johannes Wolf). 그는 1953년부터 1986년까지 그의 30여 년의 재임 기간 동안 서독과 서방세계에 4천여 명의 스파이를 심었고, 동독 스파이 권터 기욤을 서독으로 잠입시켜 시의원 당선은 물론 당시 서독총리 빌리 브란트의 최측근 보좌관까지 오르도록 육성하여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자신의 책상위로 퍼 나르게 했던 탁월한 정보본능을 가진 첩보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미인계, 즉 ‘허니 트랩(honey trap)’은 스파이 세계에서 사용하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삼십육계’에도 미인계가 기록되어 있을만큼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뤄지는 계략이다. 마르쿠스 볼프의 스파이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코 ‘로미오 작전’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접근하는 고전적인 미인계를 역발상한 ‘로미오작전’은 잘생기고 젊고 스펙좋은 남성을 이용하여 아데나워 서독총리의 여비서를 포함 서방세계의 정부기관 여성들에게 접근, 거짓된 사랑을 이용하여 정보를 입수하였다. 한 마디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숙주로 삼은 것이다.

 

여러 비리사건들과 스파이 사건들의 장치로 사용된 금품과 향응제공, 미인계는 결국 사람의 결핍과 같은 감정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 그런 사건들 뿐인가. 사기, 폭력 등등. 사람 사는 세상에 많은 범죄는 한 걸음 더 걸어 들어가면 결국 사람의 감정이 출발지점이다. 사람은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싶어하며,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어 한다. 당연히 그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의 결핍. 그로 인한 공허함이라는 자리가 탐욕이라는 기회를 만날 때 사람은 ‘실수’하게 된다. 많은 부정행위와 범죄는 결국 사람의 감정에 관한 것이다. 감정처리를 잘 못한 가장 안 좋은 결과가 범죄인 게다.

 

범죄의 유혹을 벗어나는 길은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악한 감정의 박멸이 아니라, 일순간 일어나는 감정의 섬세한 자각과 통제의 기술이다. 유혹을 벗어나는 절대적인 답은 없다. 결국 당신의 감정을 '보안'하는 수 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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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보안과 닮은 것들

 

오래 전 한 여름 지리산을 갔을 때다. 그 여행에서 잊지 못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높은 계곡에 살아 움직이듯이 흐르는 물줄기와 늦은 밤 하늘을 촘촘히 채운 별들이다. 너무 평범할 수 있는 풍경들이지만, 여느 때보다 시원했던 계곡의 물줄기와 하늘 가득한 그 별빛은 도시의 일상에서 보던 것들과는 다가오는 의미가 달랐다.

 

몇 해가 지나 보안이라는 분야와 연을 맺고 문득 그 때를 돌이켜보다 '물’과 ‘별’과 ‘보안’은 닮았다' 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생뚱맞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터이지만, 원래 필자가 쓰는 보안단상은 삶의 저변 속에서 보안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그러니 이해하시라. 먼저 물이 보안을 닮았다는 생각의 이유다. 

 

지구표면의 70%를 차지하고, 사람의 몸의 6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물.  물 없이는 일체의 생명은 존재하지 못한다. 물은 일정한 형태가 있다기 보다는 이를 담는 그릇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물이 그렇듯, 보안도 그 대상에 따라 전략전술적 체계가 구체적이고 개별적으로 각각의 조직에 달리 적용해야 한다.  또한 물은 흐르기 때문에 썩지 않듯 보안 역시, 시대의 변화를 추적하고 선도하는 노력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 만물 모든 생명에 물이 필요하듯 우리 사는 삶속 '일상'에 보안이 필요하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일상의 모든 행위 앞에 '안전하고자 하는 인식'를 염두에 두는 것이 보안경영이듯 보안은 물처럼 사회곳곳에 흘러야 한다. 그래서 보안은 물을 닮았다.

 

두번 째 별이 보안을 닮았다고 생각한 이유다.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은 아주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보안 역시 너무 촘촘한 정책을 펼쳐서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해서도 안 되지 않던가.  그래서 별은 보안과 닮았다.

 

그런데 별의 매력은 또 하나 더 있다. 필자 본인만 그럴지도 모르나 . 왠지 별을 바라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별을 보고 있으면 미운 사람도 잠시나마 용서되기도 한다. 별빛 아래에선 용서가 있고 친구사인엔 우정이 있고 연인에겐 사랑이 있다. 어떨 땐 나같은 평범한 사람도 밤하늘의 별 아래에선 시인이 되기도 한다. 별을 바라보면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다.

 

밤하늘의 별을 생각하며 보안교육을 생각해보았다. 현재보다 예전엔, 보안교육은 무엇을 금지하고 통제하고 어떻게 징계하고 하는 내용이 많았다. 사람은 그런 교육으론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충실한 법 집행자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의 죄를 끝까지 추적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장발장의 마음을 움직인 건 미리엘 신부의 사랑과 용서아니었는가?

 

오늘 이밤에도 누군가는 별빛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용서와 우정과 사랑에 관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것이다. 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마음이 열렸을 뿐이다. 미리엘 신부의 관용과 사랑이 장발장의 마음의 문을 열게 했듯이 말이다. 그러니 금지하고 통제하고 징계하는 보안보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와 배려로 감사는 온기있는 보안교육, 보안홍보가 더욱 필요한 것이다.밤하늘의 별빛에 사람들이 스스로 다가가 마음을 열듯 사람들의 감성을 흔들 수 있는 교육과 홍보가 필요하다. 그래서 보안은 별을 닮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글은 물과 닮았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틈만 보이면 샌다. 그러니 너무 새기 전에 이만 줄여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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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보안의지(意志)에 관한 단상(斷想)

 

각종 먹을거리가 즐비한 시장.

뭘 사가면 집에서 맛있게 해 먹을까. 한참을 슬렁이다 순대랑 떡볶이 가게를 보고 지나칠 수 없어 사먹고 말았다. 싸고 맛있게 먹으니 기분도 좋고 속도 든든하다. 분식을 좋아하는 내겐 산해진미를 먹은거나 다를게 없다. 허기진 때, 고기를 먹으면 어떻고 생선을 먹으면 어떤가. 떡볶이, 순대를 먹든 라면을 끓여 먹든 즐겁게 배불리 먹으면 된다. 지갑 사정이 허락한다면 비싼 한우를 한껏 사서 먹으면 더 할 나위 없지만. 어쨋든 힘이 나니 시장구경이 더 흥미롭다.

 

먹는다는 건 생존을 위해 그리고  건강을 위함이 일차적인 이유다. 그 다음 맛있는 걸 골라먹는 건 개개인의 기호에 관한 문제다.  음식재료들은 시장에서 살 수도 있고 여유와 능력이 되면 직접 재배해서 먹을 수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잘 먹는다는 건 결국 든든한 지갑의 능력이 필수조건이다.


음식재료 자체는 사람이 먹는 행위의 목적 그 자체는 아니다. 하루 세끼를 먹어야 사는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먹는다. 뭘 먹든 먹어야 산다. 음식을 먹는 일은 삶의 지속에 관한 문제다. 고기를 먹든 초코파이로 때우든 살기 위해서 일을 하려면 뱃속에 연료를 든든히 채워야 한다.


보안도 그렇다. 보안의 소명은 소중한 자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정보, 인프라 등 자산을 지킨다는 건 내가 밥을 먹고 살게 해주는 일터를 지키는 일이다. 내 지갑의 능력이 좋으면 물리적이든 기술적이든 온갖 최첨단 기술을 사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몸으로 깡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보안은 추상(抽象)이다. 관념이고 철학이다.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삶의 몸부림이다. 흔히 말하는 무엇무엇 '솔루션'이라는 것들은 추상인 보안을 구체화 시키는 도구다. 미나리나 삼겹살이 음식먹는 행위의 근원적 이유가 아니듯 보안솔루션이라는 제품들은 '보안' 그 자체는 아니다. 쓰임새 좋은 비싼 '솔루션'을 사면 좋겠지만. 먼저  내 소중한 자산을 지키려는 강한 '보안의지(意志)'가 먼저다. 아무리 좋은거 먹어도 살겠다는 강한 의지가 없으면 구첩반상도 소용없듯.

 

보안은 쓸모있는 '솔루션'들의 도움으로 구체화되지만, 그 전에 지키고자 하는 강한 '보안의지'가 없다면 다음 날 끼니를 걱정해야만 하는 오늘만 풍성한 만찬으로 끝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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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자기과신은 독(毒)이다

          IMF구제금융 시절, 굴지의 대기업에서  구조조정 업무를 담당하던 선배가 있었다. 조직에서 중요한 업무인 자금 · 회계업무를 오랬동안 다룬 분이다.  선배는 사업을 하던 친구와 선 · 후배들에게 유용한 정보와 노하우를  곧 잘 알려주곤 했고 자신의 지식과 경력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퇴직 후 중견기업의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새로운 회사에 잘 융화되지 못해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사했고, 얼마 후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큰 성공을 기대했던 사업은 오래 지나지 않아 큰 손실을 입고 무너졌다. 선배는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기업 구조조정 전문가라고 하던 그는 자신의 '인생의 구조조정'에는 실패한 것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 동료 중에 수사기관에서 오랜 기간 실무 경험으로, 사기꾼은 '한 눈에 딱 알아본다'는 분이 계셨다. 퇴직 후 그는 지인과 창업을 했다. 일년 후 그는 ‘사기’를 당했다고 하소연했다.  그 이후로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사기성 짙은 사업에 순진하게 참여하셨고, 지금도 복잡한 소송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고 계신다.

 

     군에서 고급장교로 전역하셔서 리더십 분야로는 책 열 권도 쓰신다는 분이 계셨다. 좋은 군 경력에 믿음직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별다른 심사도 없이 큰 규모의 보안 현장에 책임자로 파견됐다.  그러나 현장근무자들의 책임자에 대한 불만으로 잦은 인원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업무의 안정성도 떨어지고, 사용자 측의 불만이 커져 급기야 재계약까지 위태로워졌다. 그 분은 보안근무자와 사용자의 수준 탓으로만 책임을 돌렸다. 직원관리능력 부족과 거래처와 잦은 불화로 결국 그는 얼마 가지 못하고 해고됐다.

   

     친구이야기다. 기계공학 박사에 교수다. 아파트관리사무소와 분쟁이 생겼다고 한다. 명색이 해당분야 박사로서 관리사무소를 찾은 친구는 의기양양하게 강의하듯,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관리사무소 직원들에게 문제점에 관해 설명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는 고백했다.  자신이 틀렸다고.  자신의 설명도 잘 이해하지 못하던 관리사무소 직원이 어떻게 한 눈에 문제를 정확히 짚어냈는가. 하며 놀라워했다.

 

     위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경력과 배움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이다. 아니 정확히 자기 지식의 과신이다. 과신의 결과는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능력의 결여를 초래한다.

 

    수영선수 출신에게 물어보면 같은 물인 것 같아도 수영장마다 같은 물이 없다고 한다. 같은 강에서 똑 같은 지점을 수십 번 건너가도 한번도 같은 물살이 없다고도 한다. 그런데  하물며 수영장에서 바다로 나간다면 어떠하겠는가.

 

    보안현장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경력이 자랑할 만하다 하더라도 그건 몸 담았던 조직환경에서의 경험인 것이다. 보안업무의 패턴은 비슷할 수 있으나 해당 조직의 비즈니스, 조직의 구성, 보호대상의 상이함, 경영자의 철학 등등의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다. 같은 방법을 적용해선 안 된다.

 

    더구나 지나친 우월감으로 자신의 지식 경험을 과신할 때 오히려 그것이 치명적인 취약점이 되어 보안실패를 불러올 수도 있다. 보안전문가는 같은 것도 새로운 시각으로 다르게 보고 다양한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보안전문가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자기과신은 자신을 해치는 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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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떤 여행

[안녕,어떤여행] D+06 드디어 우유니

 

라파즈에서의 마지막 아침, 그 전에는 계속 새벽에 깨서 고민이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오늘도 바쁘게 "푸드득탕탕끙끙" 거리며 터질 것 같은 짐을 싸야 했다. 캐리어를 먼저 밖에 내어놓으려고 문을 여니 (내 방은 리셉션 바로 앞) 아저씨 두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한 분은 내 도시락을 들고. 뭔가 귀여운 상황이라 웃음이 났다. "잠시만요!" 하고 나는 남은 짐은 백팩에 그대로 쓸어담았다. 내가 다시 문을 벌컥 열자 또 똑같이 나를 돌아보는 아저씨들. 아, 귀여워. 정신없이 정들었던 숙소를 떠났다. 드라이버 아저씨는 굉장히 영어를 잘 하시고 알아듣기도 좋은 발음이라 가는 내내 이야기를 나눴다. 인상적이었던 건, 우리가 고산병을 겪는 것처럼 라파즈의 사람들이 산타크루즈 같은 저지대 도시에 가면 비슷한 증상을 겪는다고 한다. (잠수병이라고 하나?) 또 라파즈와 공항이 있는 엘 알토는 완전히 다른 도시고 라파즈는 분지인데 엘 알토는 해발 4,000미터에 평지라고. 실제로 비행기 안에서 보니 김해평야나 나주평야 못지않은 대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아, 이건 실제로 봐야지 신기한데! 사진도 없고. (눈물) 드라이버 아저씨랑은 너무 재밌어서 고프로로 동영상도 찍었다. 첫날 비행기 시간이 바뀌는 바람에 만나지 못해서 아쉬웠다. 체크인을 하고 출국장 카페테리아에서 파파야 주스 한 잔을 시키고 도시락을 열었다. 별 건 없지만, 왜 나 뭉클하지?

 

우유니까지의 비행은 짧았고 비행기는 반쯤 비어있었다. 배기지 클레임 따위는 없는 작은 공항, 그냥 짐을 찾아서 나가면 되는 구조다. 짐을 찾아 택시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혹시 한국 사람이세요?" 하고 낯익은 말소리가 들렸다. 영어도 못하고 스페인어도 못해서 서러웠던 나는 그 목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타운으로 가시죠? 같이 택시 타고 가실래요?" 그렇게 영준 오빠를 만났다. 오랜만에 한국 사람을 만났는데, 게다가 오빠라니! 야호! 숙소에 들렀다가 만나서 같이 투어를 알아보기로 했다. 방이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 짐만 맡기고 나오니 오빠는 데이투어를 양도받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이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어 나랑 같이 선셋 투어를 신청하고 내가 화장실이 급해 일단 주스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오랜만에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니 얼마나 좋던지! 영준 오빠는 체육 선생님인데 한 학기 휴직을 하고 여행 중이라고 했다. 평생에 한 번 최대 일 년 동안 쓸 수 있는데, 한 학기만 쓰는 건 너무 아깝다고 꼭 다 쓰시라고 나는 몇 번이나 말했다. 회사가 날 잘라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사실 조금 길게 무급이라도 좋으니 휴직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기엔 둘 다 배가 고프지 않아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투어를 가기 전에 다시 만나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마침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2박 3일 투어를 신청하려던 레드 플래닛 회사가 보여 바로 예약을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터라 잠이 쏟아져서 잠깐 낮잠을 잤고 투어 하기 전에 오아시스 여행사 앞에서 영준 오빠와 같이 투어를 하게 된 혜원, 서연을 만났다. 넷 다 점심을 먹어야 해서 근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며 미리 친해졌다.

 

외국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서로 싫어하거나 그냥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유니만큼은 예외다. 모두가 인생 샷을 건지기 위해 오는 곳인 만큼 언어도 통하고 취향도 (예를 들자면, 서양인과 우리가 인물 사진을 찍는 방식을 생각해보라) 통하는 한국인들끼리 팀이 되는 게 굉장히 유리하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설렘을 안고 있는 여행자들인 만큼 한 번 말을 트면 대부분 금세 친해지기 마련이다. 다만, 우리 팀엔 싱가폴에서 온 일본인 한 명과 국적은 모르겠지만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서양인 한 명이 함께였다. 그리고 지프에 탈 수 있는 정원은 가이드를 포함해 8명인데, 우리는 투어 인원만 8명이었다. 덕분에 여자 넷은 지프의 비좁은 마지막 칸에 몸을 구겨 넣어야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하얀 우유니 사막을 본 순간! 아, 정말 내가 우유니에 왔구나! 가이드 Hamir는 몇 개의 원근법을 이용한 사진을 찍어주었고 혜원, 서영은 아침에 했던 선라이즈 투어보다 몹시 만족한다며 기뻐했다. 그리고 해가 지고, 우리는 저마다의 선셋과 별 헤는 밤을 즐겼다. 혜원에게 노래를 틀어보라고 했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소리로, 냄새로 각인된 기억이 더 오래가는 법이니까. 혜원의 취향대로(?) 비투비가 부른 나비 무덤 라이브 음원이 흘러나왔다. 아마 언제 어디선가 길을 가다 이 노래를 들으면 우유니의 밤하늘이 생각나겠지?

 

투어가 끝나고 우리는 투어 회사로 쳐들어가 8명이 함께 투어를 하게 된 것을 항의했다. (스페인어를 잘하는 서양인은 자기는 그런 가 못한다고 가버렸다, 그는 조수석에 앉아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자 1인당 10볼씩을 환불해주겠다고 한다. 우리는 15볼 정도를 생각했기 때문에 강하게 거절했고, 그러자 유일한 일본인이었던 Sunny에게만 환불해주고 한국인들에겐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했다. 어이가 없어서, 나참. 다행히 Sunny가 의리가 있는 친구라서 자기만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고 결국 15볼씩 환불받고 5볼은 가이드에게 팁을 줬다. 너무 기분 나쁜 경험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선라이즈 투어를 빅토르가 한다고 해서 미리 신청해둔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몸이 안 좋은 서영과 혜원은 먼저 숙소로 돌아가고 나는 배가 고파 오빠들과 저녁을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웬일로 내가 막내가 되는 기적이!) 선라이즈 투어가 오전 3시에 시작하는 터라 일찍 자야 했는데 주문한 음식이 너무 나오지 않았다. 여긴 음식을 시키면 1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 같다. 컨디션이 좋진 않아서 음식은 허기를 해결할 정도로 간단하게만 먹었다. 긴 하루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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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나날

과거가 되어가는 과정

첫 번째 무더운 여름이 다가오기도 전에 시작되어 세 번째 시린 겨울을 맞이하며 끝나버린 한 편의 사랑이야기가 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시작된 징조들은 행복했던 나날을 사정없이 난도질했고, 준비하지 못했던 반전 없는 결말은 나를 지독한 감기에 걸려 무기력해진 아이처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마음 속 깊이 뿌리 내려버린 방향을 알 수 없는 기대감과 찢겨버린 날들이 뒤엉켜 나를 옭아매고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고통이란 마약에 취해 시간의 흐름조차 무뎌질 즈음, 물속의 시체가 표면 위로 떠오르듯 나는 다시 떠올랐지만 눈을  뜨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떠다녔다.

망망대해 같은 절망 위에서 부표처럼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던 내가 발견한 것은 사랑에 밀려 사라진 '다른 행복'이었다. 특별함은 없지만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던 일상 속의 그 행복은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순간부터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나에게서도 기억 속에서도 점점 밀려나며 잊힌 그 행복이 나에게 다가와 절망 속에서 헤맨 고통스러운 나날을 견뎌낼 수 있는 의지를 만들어주었다. 처음엔 찰나 같던 그 시간은 새싹이 자라듯 자라나면서 '지나간 나날'을 기억 속에서 조금씩 밀어냈고 그 자리를 새로운 시간으로 채워주었다. 나의 의지로 만든 새로운 나날들은 내 존재의 가치를 다시 알게 해주었고 더 나은 나 자신을 만들며 살아가게 해주었다. 해질녘 하늘의 붉은 노을처럼 마음에 퍼지는 허전함과 외로움이 이따금씩 나를 절망 속으로 끌어당겼지만 되찾은 일상과 그 속에서 느끼는 행복은 든든한 뿌리가 되어 삶을 지탱해주었다. 새로운 날들이 계속되며 행복해질수록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했던 '나날'은 그저 또 다른 하나의 ‘지나간 나날’이 됬고 시간이 흘러 나는 그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시간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우리의 곁을 흘러간다. 그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람의 마음에 묻어 있는 감정을 조금씩 씻으며 가는데 그 시간이 흘러내려가서 호수처럼 모이면 기억 속의 '지나간 나날'이 만들어진다.

먼저 온 날들은 뒤에 오는 날들에 밀려 끊임없이 가라앉게 되고, 그 속에 갇혀 있던 감정들도 같이 가라앉게 되어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날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뎌지고 언젠가 그 나날에서 벗어나게 된다. 누구나 살다 보면 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날들이 한번쯤 찾아온다. 어떤 형태로, 얼마나 긴 시간으로 찾아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이 아무리 힘들게 나를 괴롭혀도 시간은 반드시 지나가며 그저 하나의 '지나간 나날'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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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집

<겨울 안부>

 

안녕. 잘 지내니?

이르게 찾아온 겨울의 온도가 마치 재작년의 늦겨울 같아 네 생각이 났어.

그러다 너와 진지한 고민을 쏟아내던 때가 아득하게 느껴지길래 편지지를 꺼냈다.

잘 지내는 거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자꾸만 묻고 싶어.

나는 사랑하던 사람과 마침표를 찍고 겨울을 맞았어. 물론 사랑하고 있었다면 헤어지지 않았을 테니,

사랑하지 않아가던 사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 후로도 잔잔히 일상을 살아가곤 있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때까지 몇 번의 쓸쓸한 연애를 하고 나니,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게 된 것 같아.

 

기억나니? 우리 몇 년 전에 같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웠었잖아. 분명 똑같은 방법을 배웠는데도

너와 내 모습은 퍽 달랐었지. 나는 여기저기에서 더 쉽고 빠르게 하는 방법을 찾아 요령을 피웠지만

너는 거북이처럼 하나하나 느리고 정직하게 해나가더라. 미안하지만 사실 그런 너를 보며 답답하다고 생각했었어.

더 쉬운 방법으로, 더 멋진 결과물을 만든 내가, 너보다 더 세상을 잘 살아가겠구나라고, 감히 잘난체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너는 요즘도 그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더구나. 나는 있지, 그 프로그램을 다루는 법이 생각나지 않아. 요령만 잔뜩 부렸던 손가락이 부끄럽게 자판 위를 헤매고 있어.

 

이젠 너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지?

그래. 어쩌면 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우듯 사랑하는 법을 배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다 꺼내 보여주던 내 모습이 상처였던 그때부터 더 이상은 어설프게 헤메고, 허둥대고 싶지 않아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요령을 피운 거지. 나는 그저 사랑을 잘하고 싶었어. 다가가고 물러설 적당한 거리를 알고 있는, 더 쉽게 사랑하면서도 손해 보지 않고 이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인지 요즘 느릿한 정직함을 가진 네가 많이 생각나.

너라면 사랑도, 아니 사랑은 더욱, 헤매고 부딪히면서 구석까지 꼼꼼히 채워나가고 있을 거라 믿기에.

그런 너를 떠올리며 나도, 마치 처음부터 다시 사랑하는 사람처럼,

성실하게 내 마음에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하는 중이야.

 

그립다. 네가 많이 보고 싶어. 예전 너와 나누었던 고민이 생생히 기억나는 건,

볼에 홍조가 필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했던 그 마음이 여전히 반짝이기 때문이겠지.

모처럼 네게 편지를 쓰는 내 볼도 물들어 있어서, 꼭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써보내는 기분이 든다.

오랜 시간 보지 못했어도, 문득 붉게 생각나 주어서 고맙고,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담아 편지 보낼 수 있는 사람이어 주어서 고맙다.

어디서든 우리는 가까이에 있어. 잘 지내다 어느 겨울날 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