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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3 프란치스카의 공개일기

예은이 (2017.10.10화)

 

오늘은 엄마가 서울대학교에서 영어책 쓰는 회의를 하는 날이다. 그런데 3~4 간 걸리는 회의에 같이 장남감이나 동영상 같은걸 갔고 오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회의를 하면 내가 지겹다. 같이 회의하는 선생님 중에 예은이라는 딸이 있는 분이 계셔서 그 집에서 놀기로 했다. 예은이는 나랑 나이가 같은데 전혀 모르는 사이다. 그렇지만 한번 가봤다. 예은이를 처음 봤을 때 좀 어색했는데 좀 있다 보니까 금새 친해졌다. 거기선 우리 둘 밖게 없어서 마음대로 놀아도 됐다.

 

예은이는 서울대에 있는 가족기숙사에서 산다. 그런데 너무 깊숙히 있어서 찾기가 힘들었다. 예은이 집은 우리 엄마가 서울대에 입학했을 때 살았던 기숙사랑 좀 가까웠다. 처음에 예은이 집 구경을 했다. 그 다음 기숙사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놀고,  TV랑 아이패드를 봤다. 그 다음에 인형을 갖고 노래 대회를 만들었다. 나는 그때 예은이가 나랑 성격이 비슷하다는걸 알았다.

 

내가 예은이 집에서 했던것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거는 인형놀이다. 왜냐하면 그때 진짜 친구가 된것 같았기 때문이다.서로 즐겁게 웃으면서 리듬을 맞춰 사이좋게 나눠서 놀아서 그때 진정한 친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예은이랑 성격도 비슷해서 지금까지 친구들이랑 논 경험 중에서 예은이랑 논게 제일 재미있었다. 앞으로 자주 놀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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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3 프란치스카의 공개일기

[여의도 불꽃축제 2017.0930.토]

우리 가족은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서울의 자랑거리 "2017 여의도 불꽃축제"를 즐겼다. 여의도 불꽃 축제가 시작하기 전 우리 가족은 깐부치킨에서 맜있는 후라이드 치킨을 먹었다. 저녁 7시에 맞춰서 불꽃축제를 보러 갔다. 나는 불꽃축제가 있는 곳 으로 갈 때 수많은 사람들과 마켓을 봤다. 불꽃축제를 보러온 사람들이 많아서 가는 길이 빽빽했다. 또 경찰도 봤다. 경찰은 사람들이 불꽃축제를 보러 가기 편리하게 도로에 차가 다니는 걸 막아놨다. 현장에 도착 했을때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텐트 펴 놓은 사람들, 돗자리 펴 놓은 사람들, 이불 펴 높은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아무 것도 안챙겨 왔다. 그래서 2천원 주고 무릎담요를 사서 깔고 앉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시작을 안했다. 한숨만 내쉬며 불꽃축제가 시작하길 기다려야 했다.

 

와!  불꽃 축제가 시작됐다! 저 높은 하늘 위에서 아름답고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 하지만 불꽃이 아예 안보이게 카메라를 번쩍 든 매너없는 사람들 때문에 처음 부분은 방해가 됐다. 그것 때문에 좀 짜증이 났지만 너무 신이 나서 아랑곳 하지 않고 사진과 동영상을 열심히 찍었다. 미국, 이탈리아, 한국 세 개의 나라에서 불꽃을 준비했다. 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불꽃은 당연히 우리나라 작품이었다. 하늘 높이 솟아올라서 팡~ 하고 터진 후에 샤워처럼 비오듯이 내려오는 은색 불꽃이었다. 너무 예뻐서 "불꽃축제"라는 제목으로 시도 적었다. 내 시를 보고 엄마, 아빠가 너무 기뻐했다. 

 

이번 여의도 불꽃 축제는 환상적이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모이고 시야를 가려서 짜증이 나긴 했지만 깜깜한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을 보니 '불꽃은 가까이에서 제대로 봐야 정말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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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아이가 된 그녀

그녀, 모두 잊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뽀글뽀글한 머리에 통통한 몸매를 하고 후줄근한 옷을 입는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글도 배우지 못했다. 평생 고되고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아낄 줄은 알았어도 자신을 위해서는 조금도 쓸 줄 몰랐다. 그저 내 얼굴만 보면 끼니 거르지 말고, 물은 멀리하고, 길 건널 때는 좌우 살피기를 일러주기 바빴다. 나 없인 못 산다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나를 잊어버렸다.

여느 때와 같던 점심. 식사를 마친 그녀는 늘 달고 살던 약봉지를 뜯지 못하고 손에 든 채 꾸벅꾸벅 졸았다. 그녀와 함께 있던 이는 많이 졸리면 한숨 자고 일어나라며 그녀를 거실에 바로 눕혔다.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뇌경색. 중환자실에서 세 달 남짓. 가까스로 눈을 떴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주 어릴 적 가난하고, 아픈 기억만 남아 그녀를 괴롭혔다. 눈물 많은 아이가 되었다.

그래도 잊지 않은 것
그녀를 휠체어에 태워 산책을 나선다. 푹 쉬어서 그런지 살도 쏙 빠지고, 얼굴도 하얗게 이뻐졌다. 아이를 다루듯 살며시 손을 잡고, 말을 건네고, 얼굴을 쓰다듬는다. 내가 묻고 잠시 기다렸다 내가 답한다. 그래도 아이가 되어서도 잊지 않은 말, "바람이 차다. 그만 돌아가거라.".

 

할머니, 이제 걱정은 내려 놓고 마음 편히 쉬세요. 끼니 거르지 말고 밥 꼬박꼬박 잘 먹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웃으면서 잘 있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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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6. 눈길이 수그러들기까지

 

스페인에서는 어딜 가나 성당이 눈에 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더라도 어느 수염 희끗한 수도사가 문을 열고 맞이해줄 것만 같은 예배당이 적어도 하나쯤은 있다. 잠시 잊고 있던 신의 존재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그런 곳 말이다. 어쩌면 지난 이들의 기도가 곳곳에 켜켜이 쌓여 그 고요의 깊이를 더하는지도 모른다. 특히나 이른 아침에 홀로 우두커니 서서 성상과 성화, 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마주할 때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대도시의 큰 성당은 좀처럼 마음이 가지 않는다. 가령 세비야 대성당 같은 곳이 그렇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줄을 길게 늘어서서 한시도 쉼 없이 들어오고 빠지는 인파에 한 번 휩쓸리고 나면 피로도 금세 쌓일뿐더러 성당도 마음 편히 둘러보기가 어렵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 명성에 못 이겨 그다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는 식이다. 누구나 보고 간다고들 하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관광객이 붐비는 성당 근처에는 항상 적선을 구하는 이가 있다.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모른 체 하는데, 불편한 감정은 여간 피하기 어려운 게 아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투명한 눈길이 내 뒷덜미를 따라 어깨와 등, 그림자에까지 미끄러진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그 시선을 외면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예수님이라면 그 10유로 내외의 입장료를 서슴없이 그들에게 건넸을 거란 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당에서 그 수입으로 이웃을 섬기는 여러 사회활동을 하고 있을게다. 그럼에도 값나가는 재화로 둘러싸인 성당 그 바로 바깥에 헐벗고 굶주린 이가 있는 현장은 어딘가 께름칙하다. 사실 우리 일상에서도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알고 보면 이건 좀 이상하다 싶은, 그럼에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존재하는 것들 말이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 따라 저 멀리서 풍경의 구도만을 보거나 차라리 눈을 잠시 돌리고 싶을 때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수사는 누더기 옷에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며 제 발로 가난을 택했다. 소유에 대한 진정한 복음의 정신은 무엇인가에 하는 치열한 고민을 삶으로 풀어내려 한 것이다. 아마 가난한 이웃과 함께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한 물음과도 멀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교황 요한 22세는 교황청의 사치와 부패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프란치스코회를 이단으로 몰았다. 어쩌면 프란치스코 수사의 청빈을 질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신앙을 죄여오는 그 불편함에 몇날며칠 잠도 잘 못 이뤘을지도.

 

언제부턴가 세상을 바라본다는 표현보다는 나만의 성을 쌓는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을 따라 자재를 골라내고 다듬으며 한층 한층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있는 거다. 아마 진짜 세상을 만나 그 전체를 조망할 일은 없을 거다. 볼 수 있다 해도 애써 올린 성을 허물 일도 말이다.

 

다만 가끔 성 균형이 애초에 살짝 맞지 않았음을 기억해낼 때가 있다. 작으면 작을수록 외려 더욱 눈에 도드라져 보일 때 말이다. 그럴 땐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성을 완전히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새로 지어보거나, 흔들림을 애써 무시하며 그 기울어진 대로 계속 쌓아 올라가거나. 어쩌면 이도저도 못하고 미완성인 채로 남겨져 시간이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려야 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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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은 언제나 우리를 반긴다

아름답지만 빈 도시. 파주 출판 단지

  사실, 파주를 찾아 간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내가 건축학도니까. 계획 건축 도시라는 파주 출판 단지를 한 번쯤 가보면 좋겠다 싶어서 시작한 여행이었다. 물론 아예 가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적에 동생과 함께 작은 외삼촌의 차를 타고 갔던 기억이 있다. 그 때의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 예쁜 동네라고 나는 생각했다.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그 곳은 어떻게 변했을지 떠올리며 여행을 계획했다.

 

낯선 곳은 언제나 우리를 반긴다.
<아름답지만 빈 도시, 파주 출판 단지>

 

 

    파주 출판 단지를 가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인 4월 25일이었다. 다른 학교 학생들에 비해 중간고사가 매우 빨리 끝나다 보니 딱히 할 일이 없던 터였다. 국내로 짧게 나들이나 갔다와 볼까 하던 중에 파주 출판 단지가 떠올랐다. 설계 수업 교수님이 수업을 하다 언급을 하시기도 했고, 사진 찍는 것을 원체 좋아하다 보니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기도 했다. 즉흥적으로 다음날인 26일에 파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경로를 검색해보니, 수원에 있는 학교에서 파주까지 이동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왔다. 간략하게 정리를 하자면

 

1. 성균관대역에서 버스를 타 사당역으로 이동

2. 사당역에서 버스를 환승하여 영등포 시장 쪽으로 이동

3. 영등포 시장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 번 더 지하철 환승

4. 파주 금릉역에 도착하면 역에서 마을 버스를 타고 파주 출판 단지로 이동

 

환승이 도착하는 즉시 이루어진다고 전제하더라도 3시간 반을 넘는 이동 시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단하다 싶지만, 당시에는 대학생이라면 이정도 이동 시간은 문제 없다 생각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책 한권을 가방에 넣고 가는 가벼운 여정인지라 출발할 때의 마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파주의 금릉역에서 내린 뒤에 찍은 사진(출발한지 3시간 20분 경과)>

 

  결과적으로 총 이동시간이 약 4시간이 걸렸다. 11시 50분에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고 바로 출발을 한 것이니 도착한 시각이 4시 즈음이다. 하지만 피곤하다는 생각보다는 6시 반 즈음이 되면 해가 지기 시작할 것이니 이곳을 두시간 이내로 빨리 돌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든 분위기는 '적막함'이었다. 한적하다기 보다는 무언가 공허함이 느껴지는 곳. 

 

 

 

무언가 예쁜 건물들도 많고, 길도 잘 가꾸어져 있었는데, 정작 이 장소를 채울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뭔가 유령도시 같았다고 하면 될 것 같았다. 사진을 한 3시간 정도를 찍으며 돌아다녔는데, 내가 가장 많이 본 것은 사람이 없이 비어있는 건물과 그 건물을 매매한다는 광고지들이었다. 예쁘지만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 진열대에서만 진열될 뿐 사람들이 집어가지 않는 구두와 같다 생각되었다.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모여서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세 가지 정도를 나는 생각했다. 첫 째, 대규모 프로젝트로 만든 '마을'이지만 교통이 불편하다. 파주 출판단지를 지나는 버스가 그리 많지 않았고, 지하철 역도 거리가 꽤 있는 편이라 자가용이 아니면 접근이 어렵다.(당장 나만 하더라도 가는데 4시간이 걸리지 않았는가) 둘 째로 경제적 발전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이 곳은 정말로 출판사들 건물로 가득찬 곳이다 보니 출판 관련된 사람들만 드나드는 것처럼 보였다. 나처럼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오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대규모 건축 도시를 만들어 놓고 막상 관광객을 유치할 방법을 구상해 놓지 않은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주택가나 상권과도 거리가 상당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놀러오기 부담스러운 거리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정부적 차원의 지원이 제한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자료를 찾아보면서  알아낸 사실이지만, 막상 정부에서 출판업자들을 서울에서 파주로 보내놓고서는 후속적인 조치를 따로 취하지 않았다.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작가와 회사만 있다가 되는 것이 아니다. 종이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디자인업자, 인쇄업자, 광고업자 모두가 협력을 해야 한다. 이미 그런 시스템을 서울에 두고 파주에 출판사만 옮겨놓다 보니 비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실제로 내가 가보았을 때, 건물을 매매한다고 되어있던 출판사 건물들이 많았다.

 

건물만큼은 정말 예뻤다. 사진도 많이 건졌고, 내부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외부 장식이나 건물 마감 처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던 장소였다. 하지만, 집은 결국 사람이 살아야 하는 곳이고,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집만 있어서는 안 된다. 예쁘지만 실속 없는 프로젝트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깨달으며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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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 저는 사실 군대에 있습니다. 올 3월에 공군으로 입대했거든요. 어느정도 글을 쓸 여유가 있다고 생각되어 예전에 쓰려고 했던 글을 올렸습니다. 반 년 정도 글 구상을 안 하다 보니 또 어려운 느낌이 있네요. 원래는 현재 분량보다 두 배정도 더 길게 올릴 것이었는데, 시간 여유상 이정도만 쓰게 되었네요. 부대에서 쓰는 거다 보니 원래 기획했던 것에 비해 사진도 몇 장 못 올렸습니다. 정말 예쁜 사진들 많았는데 말이죠. 휴가 때 파주 출판 단지 사진들을 추가해서 수정해 올리도록 할게요. 부족한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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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5. 파도의 리듬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일상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마치 어느 작은 극장에 홀로 어둠 속에 앉아 내 이야기가 은막에 비추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흑백 무성영화로 말이다. 얼마 전, 해안가를 따라 자전거 산책을 나섰다. 주변 풍경을 이리저리 훑어보다 천사가 보였다. 그는 어느 높고 하얀 벽 위에 서서 땅을 굽어보고 있었다.

 

입구에는 두 개의 여인 석상이 자리했다. 그 표정만 보고도 맞게 찾아왔음을 알았다. 바로 공동묘지였다. 그저 궁금해서 들르는 게 실례가 아닐까 싶어 조심히 걸음을 옮기며 들어섰다. 그곳에는 묘지기 아저씨가 가지를 치며 홀로 한낮의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벽 하나를 넘어섰을 뿐인데, 시간이 묘비를 따라 지면에 차분히 가라앉은 느낌이다. 햇살 따스한 봄날, 주택가 바로 옆 공원에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잠들었다.

 

누구나 이렇게 죽고 잊힌다는 걸 새삼 떠올렸다. 등 뒤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던 불안이 잠시 자취를 감춘다. 항상 따라붙어 다녀, 그것이 불안이었다는 것마저 가끔 잊곤 하는, 사소하면서도 사소하지 않은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결국 언젠가는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결말로 나를 떠나거나 내가 떠나보낼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마치 저 멀리서 다가오는 파도가 해변에 다다르면 푸른 거품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라스팔마스로 온 지 어언 한 달이 지났다. 아침에 커피를 마신다.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을 다녀온다. 장을 봐온다. 가끔 미겔과 외식을 한다. 해변 산보도 종종 나선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일상이 도시의 풍경으로 자리잡아간다. 말과 행동, 주변 길과 사물이 낯섦을 잃어간다.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 속내를 잘 모르지만, 삶이 다시 낯설어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미겔에게 잠시 섬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스페인 남부도시와 리스본, 포르토를 둘러보겠다며. 섬이 그리울 거라고 덧붙였다. 세비야로 떠나는 점심, 미겔이 라자냐륾 만들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빵을 하나 싸줬다. 세비야에 도착하면 늦은 밤이라 먹을거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단다. 비행기에서든 세비야 숙소에서든 챙겨 먹으란다.

 

익숙한 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삶이 멀어지면서 가까워진다. 익숙해진 불안을 다시금 낯설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에 미겔은 나를 서퍼(Surfer)라고 불렀다. 인생을 서퍼처럼 산다고, 흐름에 몸을 내맡기며 사는 것 같다고 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가 싶었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모래사장에 떠밀릴 때까지는 끝없이 일렁일 게다.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는, 그러면서 또 새로운 불안을 찾아가는 그 리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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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팔년생 추억팔이

달팽이

이슬비가 내린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한다. "달팽이 잡으러 가자." 준비물은 종이컵과 뚜껑 역할을 할 구멍 뚫린 랩이다. 집을 나서자 비 냄새가 난다. 물비린내 혹은 달팽이 냄새라고도 불렀다. 달팽이 출몰 지역은 아파트 화단, 놀이터, 단지 내 외진 숲 정도이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나뭇잎 주위를 살펴본다. 달팽이들이 눈에 띈다. 달팽이 집이 큰 녀석, 작은 녀석 다양하다. 무늬 또한 가지각색이다. 챙겨 온 종이컵에 달팽이를 담는다. 이슬을 머금은 나뭇잎도 몇 장 넣어준다.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나뭇잎에 구멍이 뚫려있다. 똥을 싼다. 녹색 똥이다. 나뭇잎을 먹었으니 초록색인가 보다. 신기하다. 용기 내어 달팽이 더듬이도 건드려 본다. 왼쪽, 오른쪽. 건드리는 동시에 줄어든다. 

 

여기저기 달팽이 잡으러 온 친구들을 마주친다. 서로의 종이컵을 들여다본다. "와 엄청 많네?", "네 건 왜 이렇게 크냐?" 종이컵이 아닌 유리컵이나 대접을 들고 온 녀석들도 보인다. 서로의 달팽이를 꺼내본다. 나뭇잎에 올려놓고 누가 빨리 가나 지켜본다. 달팽이들은 몰랐겠지만 일종의 레이스이다. 느릿느릿 나뭇잎을 먹으며 움직인다. "내 거랑 바꿀래?" 달팽이를 교환하기도 한다. 

 

달팽이 채집을 마친 후 집에 온다. 조심스럽게 종이컵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조금 더 큰 공간으로 옮겨줘야겠다. 대접에다 옮겨 놓는다. 분무기로 열심히 수분 보충을 해준다. 며칠이 지나니 덩그러니 달팽이 집만 보인다. 죽은 것이다. 

 

그 이후로 달팽이를 잡지 않는다. 아니 잡긴 잡는다. 집으로 모셔 오지 않는다. 잡고 다시 자연에 놓아준다. 우리 때문에 고통받았을 달팽이들에게 미안하다. 

 

그 시절엔 길가에 죽어있는 달팽이들 흔적이 많았다. 달팽이를 밟지 않기 위해 땅만 보고 다니기도 했다. 지금은 죽어있는 달팽이를 보기 힘들다.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달팽이 자체를 보기 힘들다. 시대만 변한 줄 알았는데 생태계도 변했나 보다. 

 

비 오는 날 옛날에 살던 동네에 가면 다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아이들한테는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달팽이가 변했는지 내가 변했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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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4. 포장을 풀며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다. 어딘가 꾸깃꾸깃 뭉쳐 있던 기억들이 천천히 일어선다. 여행이라는 핑계로 잠시 가려놓은 이야기다.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줄거리일까. 어디서부터 놓쳤을까. 나는 이 이야기 어디쯤 있는 걸까. 그 다음은 어디로 이어질까. 아무튼 눅진한 곰팡이가 소복히 피었을 것만 같은, 우리 사회 저 어둔 장막에도 이제 볕이 서서히 가닿기 시작했다. 3월, 드디어 봄이 왔다고들 한다.

 

라스 팔마스에는 카사 데 콜론(Casa de Colon)이 있다. 콜럼버스 박물관이다. 라스 팔마스와 콜럼버스의 첫 만남은 1492년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는 1차 항해에서 여기 라스 팔마스에 머물렀다. 연이은 원정에서도 카나리아 제도는 배를 정비하고 물자를 공급하는 기착지로서 활용됐다고 한다. 박물관 1층에는 콜럼버스가 탄 배의 모형과 선실 내부, 항해물품 등을 전시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까지의 항로와 그 배경 및 일정을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다.

 

예상은 했었지만, 박물관은 카나리아 제도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지하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유물을 모아 놨고, 2층에서는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몇몇 그림과 카나리아 제도의 지도 및 모형 등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박물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쩌면 정반대로 콜럼버스의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인디언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자기들의 왕국과 땅, 자유, 목숨, 아내 그리고 집을 유린당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스페인 사람들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로 죽어가고, 말발굽에 뭉개지고, 칼로 동강나고, 개에게 먹혀 찢기고, 산 채로 묻혀 죽고, 온갖 고문으로 고통 받는 가운데… ‘생존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서 굶어죽었다.” 콜럼버스의 두 번째 항해에 동참한 스페인의 역사가 라스 카사스의 증언이다. 그러나 카사 데 콜론에서 이는 사실관계를 논하기에 앞서 그 누구도 묻지 않고 그 누구도 답하지 않는 ‘없는 이야기’다.

 

여기 카나리아 제도의 원주민, 관체족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겪을 고난을 한 발 앞서 겪었다. 총칼을 앞세운 학살, 전염병 창궐, 강제 노동, 자원 착취, 종교와 법률과 언어의 강요 등 ‘콜럼버스의 교환’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말이다. 이제 이 섬에서 그들 존재의 흔적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누군가에게 불편한 기억도 함께 말이다.

 

사실은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실수는 없었다고, 실패도 잘못도 없었다며 애써 눈감아보려는 그런 시도 말이다. 그것이 죄책감이라면 아마 더욱 간절해질 것이다. 맥락이 다를 순 있지만 언제부턴가 지나간 모든 순간이 의미 있다거나 필요했다는 등의 긍정 어린 말이 거북해졌다. 뭐랄까, 애써 포장한다는 느낌일까. ‘그것들’을 작은 상자에 고스란히 담아 마트료시카처럼 더욱 큰 상자에 수차례 옮겨 담고 각종 리본 장식과 포장지로 꽁꽁 싸맨다. 누가 보더라도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말이다. 심지어 포장한 사람도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로.

아주 가끔 마음을 톡 하고 놓아본다. 허송세월도 많이 했고, 무의미한 순간도 있었고, 없었으면 좋을 뻔한 이야기도 있었다고 말이다. 맞아, 그땐 내가 잘못했지라며. 그러면 억지로 쥐어짜낸 의미나 변명이 이내 고개를 숙이며 후드득 떨어진다. 그렇게 드러난 그 앙상하고 볼품없는 생의 무늬가 차라리 한결 편해 보일 때다.

 

카사 데 콜론에서 돌아오는 길, 포장을 싸기보다는 풀어가는 데 익숙해지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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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팔년생 추억팔이

딱지치기

"딱지도 파냐?" 아버지가 딱지 치던 시절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문지로 접으면 될 것을." 나도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한다. "이건 그런 딱지가 아니라니까." 진짜 그런 딱지가 아니다. 유행하는 만화의 장면들과 캐릭터들로 도배된 딱지다. 두께도 흐물거리지 않고 종이 재질도 딱지 치기에 알맞다. 이런 번쩍번쩍한 딱지를 신문지 딱지와 비교하니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번쩍번쩍한 자태는 오래가지 못한다. 빈티지로 탈바꿈할 단계가 남아있다. 고이 접은 딱지를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 친다. 그리고 밟는다. 꾹꾹 밟는다. 비빈다. 살짝 찢어도 보고, 공기도 불어 본다. 번쩍번쩍하였던 모습은 점점 거칠어진다. 빈티지 작업이 끝난 후엔 아버지 시절 신문지 딱지보다 더 오래된 딱지로 변해있다. 

 

딱지 좀 쳐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 빈티지 작업의 이유를. 그렇다. 너덜너덜하고 납작해진 딱지는 잘 넘어가지 않는다. 이 녀석들은 딱지치기 대결에 있어 '수비용' 딱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 '공격용' 딱지엔 테이프를 감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전쟁 나가기 전 전사들처럼 딱지들은 고된 훈련과 무장을 하는 것이다. 

 

딱지치기는 전투다. 딱지는 자존심이다. 봉지에 딱지를 가득 담고 동네를 활보하며 딱지를 따러 다닌다. 잘 만들어진 '수비용' 딱지 하나 내려놓으면, 딱지 한 봉지 쓸어 가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 믿었던 딱지가 넘어가는 순간 그동안 쓸어 담았던 딱지를 다시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진다. 열심히 키워놨던 딱지가 적이 되어 버티고 있다. "그동안 딴 거 다 줄 테니 그 딱지만 다시 돌려주면 안 돼?" 때론 비굴해지기도 한다. 잘 키운 딱지 하나 열 딱지 부럽지 않은 격이다. 이렇게 수 없이 내려치다 보니, 어깨 운동이 저절로 되던 시절이었다. 

 

지금만큼은 아닐지라도 컴퓨터 게임과 다양한 장난감이 즐비했었다. 그런데 딱지치기라니.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던 때였다. 유행은 돌고 돈다. 아버지 시절 신문지 딱지가 만화 딱지로 변해서 돌아왔듯, 만화 딱지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 앞에 나타나게 될지 기대된다. 

 

문득, 어딘가 창고에 틀어박혀 숨 쉬고 있을 딱지 전사들이 떠오른다. 시멘트 바닥에 신명 나게 밟히고 패대기 쳐진 대가가 고작 이거라고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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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3. 어중간해진다는 건

 

눈길 돌리는 곳마다 풍경이 아롱아롱 흐리다. 미겔은 이를 깔리마(Kalima)라고 불렀다. 언제부터일진 알 수 없지만, 사하라 사막이 제 몸을 동남풍에 조금씩 벗겨가며 섬을 감싸 왔다. 란사로테 섬에 내리면서, 카나리아 제도가 유럽보다 아프리카에 가깝다는 걸 실감했다. 스페인 내륙으로부터는 약 1,000km이지만 모로코로부터는 불과 100km 남짓이라는 걸 말이다.

 

우리가 숙소로 머문 곳은 티아구아다.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작은 시골 마을이다. 가옥은 대부분 1층이며 어디나 하얀 외벽에 초록색 대문을 달았다. 허허벌판 사막에 구멍이 숭숭 뚫린 화산암이 흔하다. 18, 19세기에 화산폭발로 섬의 상당 지형이 바뀌었다는데 지금도 활화산이다. 그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이 섬으로 몰려들고 있지만, 아마 이 마을은 연중 어느 때라도 외지인이 한 자리 수에 그칠 것만 같은 그런 조용한 동네다.

 

숙소 주인장 카를로스 아저씨는 필요한 게 있으면 대문에서 “카를로스, 카를로스”라고 부르기만 하란다. 주변에는 산책로와 농업 박물관이 있다며 꼭 한 번 찾아가보라고 일러줬다. 다음날, 동네 한 바퀴 돌 겸 자연스레 농업 박물관을 찾아갔다. 1840년부터 지금까지 쓰이는 실제 농가라고 한다. 집안 곳곳에 닭과 병아리가 돌아다니고 외양간에는 낙타와 염소가 여물을 먹는다. 그 옛날 농가의 살림살이와 건물 내외부 구조와 환경 등을 그대로 뒀다. 곳곳에 걸린 액자에는 마을의 지난 역사가 흑백으로 담겼는데 오래 머물진 않았다. 지금의 바깥 풍경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농가 한편에는 와인 양조장이 자리했다. 주변 포도밭에서 직접 수확하여 만든 와인이다. 바람이 강하고 비가 잘 내리지 않아 농사짓기가 쉽지 않은 섬이다. 포도 재배 방법이 다른 곳과 사뭇 다른 이유다. 여기서는 포도나무를 비옥한 화산재 토양에 묻고 그 주변에 돌담을 쌓는다. 이 돌담을 소코(Zoco)라고 하는데, 바람이 습기를 거둬가는 것을 막는다. 와인 시음을 권하기에 화이트 와인을 부탁했다. 술을 잘 알지 못함에도 텁텁한 기운 하나 없는 깔끔한 뒷맛이 한동안 기억에 남았다.

 

사실 술보다도 곁들여 나온 다과에 더 눈길이 갔다. 모호(Mojo)라는 카나리아 제도 특유의 소스와 함께 크래커에 치즈를 얹었다. 치즈도 여기서 직접 기르는 염소로부터 나왔다. 모호(Mojo)는 크게 붉은색을 띄는 모호 로호(Mojo Rojo)와 초록색을 띄는 모호 베르데(Mojo Verde)로 나뉜다. 모호 로호에는 파프리카 가루, 토마토, 홍고추 등이 들어가는 반면, 모호 베르데는 아보카도, 고수, 청고추 등 푸른색 채소와 허브로 만들어진다. 여기서는 보통 감자를 소금물에 껍질째 삶아서 모호에 찍어 먹는데, 파파스 아루가다스(Papas Arrugadas)라고 카나리아 제도의 전통 음식이란다.

 

미겔은 자신이 꿈꾸던 휴일이란다. 몇 찾아오지 않는 조용한 농가, 햇살 따듯한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며 한낮을 보내는 것 말이다. 아마 마을 분들은 박물관이 아니라 누구네 농가로 부를 것만 같다. 우리도 관광객이 아니라 옆동네에서 이따금 마실 오는 이웃으로 생각할지도.

 

한낮의 열기가 수그러들 쯤, 박물관을 나서 다시 동네산보를 이어갔다. 한 두 개의 언덕을 빼고는 나무도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 펼쳐졌다. 고개만 돌리면 해안에 자리한 이웃 마을도 눈에 훤히 들어왔다.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서 굽이치는지도 말이다. 사실 길을 벗어나도 별다른 장애물이 없어 어디로 걸으나 마찬가지였다. 그간 여러 사람이 다녀서 땅이 조금 더 탄탄할 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미겔이 문득 자신이 점점 아웃사이더가 되어간다고 말했다. 히피가 되겠다고 선언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마드리드의 다른 친구들은 그럴 듯한 가정을 꾸리고 번듯한 직장을 다닌단다. 그에 비해 자신은 마흔이 넘도록 부동산, 잡지, 자전거, 관광홍보 등 이리저리 일을 옮겨가다가 출퇴근 개념을 상실한 프리랜서로 굳어지고 있단다. 이어서 그는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아마 이런저런 여러 분야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을 거라고 뒤이었다. 취미라고 하기에도 뭐하고 직업으로 삼기에도 애매한 지점에 말이다.

 

그럼에도 미겔은 다시 돌아가도 똑같을 거라고 말한다. 그때그때마다 괜찮은 선택을 했다며. 알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럴 수 있다고. 가만 보면 어중간한 경계에 놓여 있는 이들은 나름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그럴듯한 시기에 그럴듯한 배경으로 졸업과 취직, 결혼을 이어가며 사회에 자리 붙여가는 사람들의 비슷비슷한 굴곡보다는 그 다채로운 빛깔이 좀 더 넓게 퍼져 있을 것만 같다.

 

 

어느덧 하얀 달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며 깔리마가 붉게 물들었다. 한낮이나 한밤보다는 이런 시간이 더 아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낮이 밤이 서로에게 고이 스며들어가는 시간에,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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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1. 사전에 사과를

 

‘그란 카나리아로 이사했다. 남는 방이 하나 있다. 온다면 환영이다.’

 

“한국사람이구나?”

“아니, 스페인 사람.”

“오, 스페인 사람은 또 어떻게 만났대?”

 

글쎄, 복숭아랄까. 자세한 날짜나 장소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복숭아만큼은 확실하다. 5년 전, 여름방학을 틈타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그 어딘가다. 작은 개울 하나가 흘렀고, 미겔은 씻고 있던 복숭아 하나를 내게 건넸다. 별 말 없이 열흘 가량을 동행하고는 그는 회사로, 나는 학교로 복귀했다. 그 후로는 아주 이따금씩 이메일로 서로의 근황을 짤막하게 나눴다. 회사를 이직했다거나, 만나는 사람이 있다거나, 나라 경제가 망해가고 있다거나 등등.

 

3개월을 답했다. 무비자 체류 기한을 넘길 수는 없으니까. 다만, 왜 떠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그냥' 혹은 '답답해서'다. 또 다른 월급살이를 하루빨리 찾아 연명해야 하는 일시적 백수에게는 아마 사치에 가까울 것이다.  게다가 휴양지라니... 

​사실 어떻게든 그럴듯한 추임새를 넣어보려 했는데, 허사였다. 목적이라는 게 애초에 만들어진다기 보다는 나타나는 쪽에 더욱 가까운 건지도. 아무튼 주변에서는 부럽다고만 하는데, 속내는 썩 그렇지 않다. 솔직해질수록 여행은 힐링보다는 도피나 망각을 닮아갔고 결국엔 ‘하아, 모르겠다’로 끝마쳤다.

 

제1식: 케이준 치킨을 곁들은 감자샐러드, 데친 야채와 밥을 곁들인 삼계찜, 라임향 리코타치즈 무스케이크, 버터, 소프트 롤빵.

제2식: 훈제 치킨 슬라이스를 곁들인 샐러드, 굴소스를 곁들인 에그누들과 생강소스 곁들인 볶은 닭고기, 오예스 초코렛 파이, 버터, 호밀롤빵.

 

하릴없이 기내식 리플렛을 읽다가 괜한 문구에 눈길이 머문다. ‘메뉴에서 뭔가 부족하면 우리는 사전에 사과드립니다.’ 재료가 부족해지기 전에 미리 사과를 드린다는 이야기인가 싶어 몇 번을 재차 읽었다. 맞다. 수면부족이 틀림없다. 기압차에 따른 두뇌활동 둔화인지도.

 

왼편에는 지젝을 연상케 하는 외모의 러시아 아저씨가 이륙할 때부터 잠에 시달렸다. 심지어 포크를 쥔 채 식사를 하다가도 꾸벅꾸벅 졸았다. 앞좌석에 닿을 것만 같은 아저씨 뱃살을 옆눈으로 흘끔 훔쳐보다 생각도 않던 화장실이 간절해졌다. 서울에서 모스크바, 모스크바에서 마드리드, 마드리드에서 그란 카나리아. 거진 하루에 가까운 이동 시간 동안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여행을 떠나기 3일 전 타로를 펼쳤다. 딱히 기대할 바도 없지만, 궁금한 건 궁금하니까. 흐름을 살펴보니, 바보카드가 눈에 띈다. 구름 하나 없는 화창한 날씨, 어느 젊은이가 절벽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는다. 소풍일까. 표정도 해맑고 몸짓도 가볍다. 아마 나는 곧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문을 열어젖힐 것이다. 신선한 만큼 무모한, 또는 무모한 만큼 신선한 문을.

 

대학교 때 어느 교수님은 자신이 겪은 혹은 지켜본 짤막한 일화를 거의 매수업마다 들려주셨는데,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인생은 어떤 거창한 게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 뒤바뀐다고.

다행히 마드리드행 비행기에서는 옆자리가 비어 있는 창가 쪽에 앉았다. 이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가 금세 점점이 박힌 무수한 불빛으로 넘실거렸다. 도시 하나 하나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주황색 열대어처럼 그란 카나리아를 향해 헤엄친다. 어찌 될지 모르지만, 아니, 모르기 때문에 일단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랄까. 나뿐만 아니라, 미겔을 비롯하여 이 떠남에 연루된 모든 이들에게도.

    

​하늘에는 별자리를 그려볼 만큼 무수한 별들이 오래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