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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개인적인

미식가

 

 억지로 먹은 유동식이 피와 함께 쏟아져 나온다. 내장을 쥐어짜는 복통과 함께 피가 흐른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잔숨을 몰아쉰다. 멀건 침을 바닥에 흥건히 흘린다. 복통은 피를 전부 쏟아내야만 멎는다. 팔목에 꽂힌 굵은 바늘을 타고 핏줄기가 솓구친다. 면역억제제를 갈아야 할 시간이다. 근육이 녹아 얇아진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엉덩이를 타고 흐르는 핏줄기를 닦는다.

 세시간마다 간호사는 억제제를 갈고 피를 뽑고 체온을 잰다. 의사의 회진은 하루 두 번, 오전 10시와 오후 4시다. 소화기내과 병동에 의사는 셋. 간호사는 여덟이다. 병원에서 하루는 약을 맞고 밥을 먹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우리집은 맞벌이를 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와 식탁 위에 있는 돈으로 밥을 먹는다. 짜짱면, 짬뽕, 볶음밥, 잡채밥, 오징어 덮밥, 해산물 덮밥…. 중학생이 되었을 때, 동네에 있는 모든 식당을 알게되었다. 맛있는 집, 맛없는 집. 맛을 구분하고 느끼는 것이 혼자 먹는 밥의 즐거움이었다.

 고등학교에 와서는 급식을 했다. 누군가와 함께 먹는 식사는 외롭지 않았지만 아침, 점심, 저녁. 매일 같이 쪄든 기름에 튀겨내고 조미료로 맛을 낸 음식은 견디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는 커졌다. 선생님과 학생, 공부와 급식만 있는 학교에서 맛과 음식이 있는 세상은 도서관에만 있었다.

 학교에 있는 모든 책을 읽었고 주말에는 인터넷으로 음식을 공부했다. 용돈을 모아 전국 유명음식점을 찾아다녔다. 음식은 무채색 유년에 유일한 빛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식을 만들게 되었다. 수 많은 요리법과 음식이 머리 속에 들어있었지만 내 손은 형편없었다. 손가락을 썰고 손등을 불에 익혔다. 맛을 잘낸다는 것이 유일한 칭찬인 열등생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가진 칼은 잘 벼려진 식도였고 내가 가진 칼은 과일 껍질마저 겨우 벗길 뿐인 뭉뚝한 과도였다. 나는 과도를 꽂아두고 학교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기전 남은 보증금으로 그 동안 가고 싶었던 음식점을 돌아다녔다. 애석하게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목표를 잃은 인생은 방황조차 할 수 없고 죽기엔 용기가 없었다. 대신 천천히 죽기를 기다렸다. 하루 종일 누워있다 잠이오면 자고 잠이 오지 않으면 책을 읽었다. 집에 있는 책을 모두 읽었을 때, 몇 개월만에 스스로 집을 나왔다. 덮수룩한 머리로 서점에 갔다. 서점의 음식코너에는 읽을 책, 살 책이 많았다. 손가락을 파고드는 봉지의 무게만큼 죽기엔 이르다는 마음이 생겼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어야하고 음식을 먹으면 배가 아프다. 병에 익숙해지면서 배가 아픈 것과 고픈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매일 밤, 병원에서 가장 조용한 수술실 2층 복도에서 밤새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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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거닐다

비행기 구름

 

나날이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리의 운송수단은 급격히 바뀌었다.

땅위를 빠르게 달리다가 하늘을 날기 시작했으니까.

 

나라와 나라사이, 도시와 도시 사이 하늘 노선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비행기가 수없이 뜨고 지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지나갈때 비행기 구름이 생기는데 이렇게 인위적으로 생기는 구름이 기후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한 과학자가 있었다. 

 

아무래도 구름이란게 햇빛을 반사시키기 마련인데, 그저 가느다란 줄의 비행기구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수백만 이상이 되면 무언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이론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매일 비행기는 뜨고 졌으며, 비행기 구름이 없는 하늘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온 세계가 경악한, 비극적인 일이 생겼다.

수많은 희생을 치뤄내었던 9.11 테러사건.

 

모든 이들이 경악을 하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은채 당황스러워 할 때

조심스레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테러사건이 일어난 그 순간부터 미국전역의 모든 비행기가 3일동안 멈췄다. 

미국의 영공폐쇄 조치.

정부는 하늘에 떠있던 비행기들을 강제 착륙 시켰다.

 

그렇게 단 3일, 비행기 구름이 없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고,

30년간의 기후 자료와 그 3일간의 기후를 비교 연구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항공사는 비행운의 환경적 영향을 고려한 신형항공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나에게 이 이야기는 소름 돋는 반전의 느낌이었다.

가장 최악의 사건 조차 그 유익이 존재할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의 막연한 앎 이었달까.

 

집으로 가는 길에, 문득 내 머리위로 비행기가 하나 지나갔고

언제적에 들었는지도 모를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최악의 순간들조차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유익이 존재할지 모른다.

아니,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일로 슬픔과 아픔을 알게 되었으며 같은 상황에 있을 다른 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나 하나 버릴 경험은 없으며,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완성 시켜간다.

전체의 그림에선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아름다울것이니..

 

우리의 과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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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한, 밤의 기록

8시의 경계

일을 다니가 보면 회사는 작은 사회, 사회는 회사가 모여 만든 단체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사회 속 나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기 마련이다. 회사에서 꿈을 말하는 것이 정말 부끄럽고 뜬구름 같은 일이 되고 그렇게 치부해버린다. 

 

열정가득 했던 사회초년생의 열정이 금새 타버리면, 넌 요새 젊은애 답지 않아, 라는 소리를 듣기 쉽상이다. 내가 좋다는 일이 안될 일이 되고 두루뭉술 넘어가 버리는 일이 익숙해졌다. 이 상황에서 열정과 자부심 운운하는 일이 나에게 정말 사치가 되버렸다. 

 

이런 일이 가장 크게 와닿은 사건은 작년 쯤, 겨울이 가을에 들락말락하며 숨통을 트기 시작할 때다. 8시를 넘기면 야근수당을 주는 회사다 보니, 8시가 가까워지면 기껏 넘기고 가는 일이 많아진다. 회사에서 사람들이 좋으면 대표가 안좋다는 말이 sns상에서 우스개소리처럼 떠다닌다. 나 역시 좋은 사람들 덕분에 일을 견디고 있었다. 그날도 우정을 끔찍히 여기는 나지만 잠시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른 팀이지만 그들의 일을 돕기 위해 의리로 남게 되었다. 8시의 경계가 겨우 넘어가고 있었다. 밥까지 굶으면서 빠른 업무 진행을 위해 일처리에 여념이 없었다. 8시가 지나자, 미안함을 느낀 동료들이 나를 먼저 보냈다. 

 

그러나, 대표님 입장에선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유일하게 저녁식사를 하지 않았던 나지만, 그에겐 내가 밥을 먹었는지 따위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본인 주머니에 저녁식사비가 나갔으니 남은 이는 모두가 먹었겠거니 생각했을 것이다. 이젠 친구들과 의리를 위해 퇴근 준비를 마치고 인사를 드리니, 먹튀라는 말을 듣는다. 

 

충분한 명분으로 야근한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일일이 보고하는 말에 여전히 탐탁치 않아하는 대표님에게 난 그런 존재라는 각인이 박혔다. A의 업무를 맡고 있다면, 혼자 책임지고 혼자 스스로 관리하며, 쓴소리만 여태껏 듣고 왔지만 난 그런 존재인가 싶었다. 

 

그는 그랬다. 직원 사이 신임은 좋지만 나에게 불꽃이 없다며. 그동안 피운 불들은 누가 장작을 패서 불이라는 존재를 발견하여, 겨우 불씨를 살려낸 이 인류발전과 맞먹는 A일은 대체 누가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 이후로 난 자존감이 없는 사람으로 팀에서 그런 척 한다. 내 업적이 위대하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 타성에 젖었다. 그렇다고 꿈이 없는 것이 아닌 감추고 있다. 하지만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렇게 사는 편이 맘이 편할 수도 있다. 

 

열정은 감춰줘야 이 사회는 그나마 살만 하더라. 큰 파이가 있다면 아주 일부분만 콕 집어 맛봤지만 꽤 쓰다. 쓴맛에 익숙해져야 나중에 달디 달다고 느껴지겠지. 

 

8시의 경계는 수당의 차이보다, 내가 나에게 긋는 선이 되었다. 그 대표와 나의 선은 여기까지. 오히려 어필하지 않는 나에게 가끔 던지는 칭찬의 말은 파리떼와 같다. 귀찮은 것. 

 

이직이 무조건적인 답도 아니기에 오늘도 이러고 산다. 오늘도 파이의 더 큰 부분을 맛보기 위해, 8시의 경계를 어쩔 수 없이 넘어버린 오늘 탄식을 하며, 덜컹이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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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거닐다

너 끌리는 대로

"쌤, 누가 그러길, 대학생이 되면 연애도 많이 해보고 여행도 많이 다녀봐야 된데요. 정말 그래요?"

 

중간고사 준비에 지쳤는지 고3학생이 수업시간에 물어봤다.

보통같았으면 
'응, 그런 경험 좋지. 많이 해봐~'
라고 대답했을 것 같은데, 왠지 그런 말이 안나왔다.

 

 

"
연애도 많이 해본 사람이 연애 해보라고 말하는것 아니겠어? 연애를 많이 안해본 99명은 조용히 있겠지.

 

여행도 많이 다녀본 사람이 여행다녀보라고 말하는 것 아니겠어? 여행을 별로 다녀보지 못한 99명은 조용히 있을거야.

 

무언가를 꼭 해야 하는 건 없어. 
끌리면 하고, 아니면 마는거고. 

 

사람들이 소리 높여서 얘기하는건 
결국엔 자신들이 해본 것, 특별히 그 중에 '자신에게 좋았던 것'을 얘기하게 되거든. 

 

그 행동이 그에게 좋았으니 나에게도 좋으리란 보장은 없어.

 

그러니까 누가 이거해봐라, 저거해봐라 조언을 하고 충고해도 그것에 이끌려갈 필요는 없어.

너 끌리는대로 해도되~

 

그거 안한 조용한 99명이 존재하고, 또 나름의 것을 하면서 잘 살고 있을테니까.

 

그렇지만 무언가에 느낌이 오고, 끌림이 올땐 아무리 99명이 하지 않더라도 기꺼이 그 경험에 뛰어들 수 있으면 좋겠다.
"

 

 

학생에게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 이음. 너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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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hort sentimentally-beautified story of my childhood.

 방청소 하다 발견한 yearbook으로 인한 감상적 미화.

Tbt to 2003 only if I had the ability to time warp. 

This is a short sentimentally-beautified story of my childhood.

Taking a short look at this year book and what is written here made me laugh so much and realize that me and my friends were probably the most innocent and pure creatures in this world as kids. Not knowing a thing about stereotype nor prejudice led to having no concept of discrimination at all. I had the perfect condition of being a minority of that society-Being 1-2 year younger and also shorter than most of my friends, a female, with different race and nationality + unlike now I didn't speak any English by the time I just got there. 

However back by then I was more than welcomed, loved, respected and treated equally, had lots of great opportunities and new challenges. And of course sometimes I was hurt by some people but there were more people who cared about me with love and comforted me with smile. I still remember being hurt by what the conductor had told me at blue lake music camp but what I remember more is the figure of Amy, the counselor of our dorm, looking into my eyes which were almost full of tears and encouraging me with her warm words, beautiful smile, and hug. (I think she was a university student by then so perhaps she was much younger than my current age. But I still suck at cheering someone up.Probably it has something to do with my not-so-sweet personality) 

Now I've grown up to realize that what I had experienced was only some part and not everything of the nation and it is absolutely meaningless to idealize somewhere for that there is no place on earth to be called utopia, but still I'm thinking that this shocking experience of mine has become the significant reason of me always wanting to live outside of korea.Yet, a few experiences living abroad after that were never as easy as before because I've become an evil, also a.k.a grown up.Furthermore I am not praising certain nation but I 100% admit that society I belonged to for a short period was much more mature in understanding and respecting difference as well as accepting other cultures than the society I've been living. Anyway for the chaotic situation in Korea we are facing now I think it's not so bad for everyone to reminisce about our very innocent and pure hearted period-no maturity but also no discrimination. Simple as that. 

 방청소 하다 발견한 yearbook으로 인한 감상적 미화.

돌이켜보면 이시절의 나와 친구들은 다른 여느 어린이들처럼,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시절을 보내고있지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편견이 뭔지, 고정관념이 뭔지조차 알기전이었고 따라서 차별의 개념이라는것 또한 생기기 전의 나이였다. 나는 그사회의 소수자, 그리고 약자로 분류되기 좋은 조건들을 다 갖추고있었다. 여자, 유색인종, 외국인. 거기에 추가로 영어는 하나도할 줄 몰랐으며 같은 학년의 대부분의 친구들보다 내가 한두살어렸으며 키조차작은편에 속했다는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색의 피부와 눈동자를 지닌 이들은 영어도 못하는 이방인을 환영해주었다. 내가 떠듬떠듬 말할때는 귀기울여서 끝까지 들어주었고, 나의 의사를 존중해주었고, 호기심을 가져주었고, 사랑해주었으며 또 동등하게 대우해주었다. 새로운 도전을 항상 시도할수 있는 기회 또한 많았다. 물론 몇번의 상처는 있었으나 상처를 주는 사람보다 보듬어 주는 사람이 훨신 많았다. 아직도 나는 뮤직캠프에서 지휘자와 퍼스트플릇에게 한방먹고 울먹이던 나에게 눈을 맞추며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안아주던 카운슬러 에이미의 모습을 잊지못한다. (지금은 벌써 다섯살짜리 아들이 있지만 당시 에이미는 대학생이었으므로 지금의 나보다 훨신 어린나이였을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몇살은 더 많을 나이인 지금의 나는 사람을 달래는 방면에는 아직도 매우 서툴다. 물론 이것은 내가 태생부터 무뚝뚝하고 오그라드는것을 혐오하는 성격을 지닌탓도 있다..)

 십년이 넘게 지난 지금 나는 그때 내가 경험했던것이 그나라의 극히 일부일뿐 전부가 아니였음을 알게되었으며, 세상어디에도 유토피아따위는 없기때문에 어딘가를 이상화시키고 그곳만을 바라보는일이 얼마나 촌스럽고 쓸데없는일인가임을 깨닫게 된 씁쓸한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가끔 회상한다. 그나라를 찬양하는것은 절대 아니지만 '다름'에 대한 이해와 존중, 타문화에 대한 수용도가 훨신 높은 사회였던 사실이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던때를. 또한 확신한다. 이시절의 순수함은, 분명 나에게 역마살과 탈조선의 꿈을 심어준 너무나 크리티컬한 원인이었을거라고. 나는 이경험으로 인해 초딩때부터 탈조선을 꿈꾸는 시대를 앞서가는 어린이였다고..(?)+실제로 귀국하기싫다고 울며불며 엄마한테 홈스테이한다고 설쳤던 기억. 그러나 나와 달리 엄마는 그곳에서 이상하게 너무 힘이들었다고했는데, 그러고나서 열심히 올때마다 묵주를 돌리시던 외할머니로부터 우리가 살던집에 남미계의 귀신이 옷장속에 사는것을 목격했다는것을 들은것은 우리가 귀국한 후였다. 우리가 무서워할까봐 이걸 혼자만 보시고 비밀로 하신 할머니가 더 대단하시고 무섭다..뭐 어쨌든 그 후 정작 몇번의 탈조선은 순수함을 잃어버린 후라 그시절과는 많이 달랐다고한다. 가끔은 철도없고 차별도 없던 어린시절을 생각해보는것도 괜찮은 일 같다. 탈조선 헬조선 대신 대한민국 이라는 공식국가명칭만을 사용하게 되는 날들만이 지속되길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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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쪽잔디

 

 

 

잡풀이 무성하여 잔디가 바르게 자랄 수 없었던 밭을 밀었다. 그리고 얼마 전, 쪽 잔디를 심었다. 일주일이 지났을까, 잔디 주변으로 아기 풀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

 

 


봄이 왔고 아지랑이 피어나듯 나의 인생에도 무언가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던가, 하고 생각했을 때-  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등짝이 따수웠나 배가 불렀나 나의 마음엔 잡스러운 사치가 몽글몽글 돋아났다. 잘- 쓰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막연히 등단에 욕심이 생겨 과거에 갈겨- 썼던 어설픈 글을 작은 문예지 공모전에 보냈다. 몇 주 뒤, 당선이 되었다고 덜컥- 문자가 왔다. 

'축하'라는 그 두 글자에 설레려던 마음은 금세 제동이 걸렸다. 문득 그 공기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분명 11년 전에도 나는 이런 식으로 등단을 하려고 했었다.

 

-


당시 나는 재수를 실패하여 목표했던 공부를 놓고 쉬운 길로 들어섰었다. 나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장학금을 받아서 돈을 아끼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는 사실 장학금이 아쉬운 모양새로 살지 않았다. 수험생으로 일 년을 더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호기심이요, 혈기가, 동갑내기들보다 몇 곱은 지나치게 왕성했던 나의 스무 살은 발을 동동 굴렀다. 

결국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라는 양심은 나만 간직해야 하는 비밀이 되었고, 그 양심은 공공연히 나를 괴롭혀서, 모른 체 하기 위해 나사를 빼 버렸던 그 날들에도, 몹쓸 양심은 내게 글만큼은 놓지 말라고 나지막이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자주 고개를 들이밀던 양심은 웃고 떠드는 나의 과장된 밝은 얼굴 뒤로 꾸준한 고민을 쏟아냈다. 그랬다, 고민이 없는 것이 고민이라 말하던 열 살의 어린이도,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아 바둥대며 살아가던 스물한 살의 어린 소녀도, 글만큼은 꾸준히 인정받고 싶어 했다. 행여 다른 삶을 살더라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때의 생각으로는, 어딘가에 무작정 나의 글을 보내고 당선이 되는 것으로 시작하면서 말이다. 

학창 시절과 재수 시절 적어놓았던 수 십 편의 시들 중에 몇 편을 공모전에 보냈고, 작은 문예지에 당선이 되었다. 당시 32만 원의 등단 비용이 든다고 하였는데, 등단을 할 것이었다면 제멋대로의 성이 지금의 수십만 배는 되었던 그때, 누가 만류를 하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어 등단을 하고도 남았겠지만, 나는 등단하지 않았다. 나는 큰 판을 밟고 시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는 가까운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나의 냉정한 현실성과 나의 뜨거운 이상이 결합된, 내 고유의 본성적인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스무 살을 갓 넘었던 나는 일품이라는 문예지와 신문사, 출판사들의 벽이 높아 보였다. 어떻게 하면 될까, 분석하기보다 어렵다고 생각해야 자유로울 것 같았고, 편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고민을 할 새도 없이 막 대학생이 된 소녀는 이것도 저것도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고 그것을 다 하고 다니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글이라는 재능에 투자하고 발전시키기보다는- 글로서는 쉬운 것만 당첨? 되거나 얻어내는 식으로, 여기저기에 마구 마구 기부라도 하듯 뿌려대며 자기 위로를 일삼고 다녔다. 바닥까지 경험해보고 싶었던 막무가내의 불꽃 튀는 청춘이었다. 자만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양심 따위에는 관심을 주지 않으려고 잠도 자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그러나 저러나 어찌 저찌 나는 결국 10년 만에 창작의 과정으로 들어섰다. 다시 들어선 것이 아니다. 지난 것에 대한 미련은 애초부터 없었고, 지난 목표와는 전혀 다른 비전을 가지고 들어선 것이다.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하며 살았지만, 자의로 타의로 잃어버린 흔적들과 기억들은 끊임없이- 순서도 없이- 돌아와 여기저기에 붙어버렸다. 두세 개의 기억들은 중첩되어 단계들을 겹쳐 넘겨버린다. 나의 선택에 항상 후회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과거의 것으로 직접 돌아가서 손을 대는 것은 이미 부질없음이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이 '도움'이 되는 것은 엄마가 아이를 키울 때 자신의 어릴 때를 참고하는 것과 같이, 어떤 벤처기업의 사장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과정에서도 실수를 기록하고 복기하여 다시 재기, 성장하는 것과 같이, 내 새끼를 만들기 위한 나의 기술적 성장의 정도가 어느 정도로 돌아왔는가, 어느 정도에서 멈춰있는가를 찾기 위한 척도로는 아주 유용하다. 결국 나의 상태는 과거 어느 시점의 조각이 돌아오는데서 확인할 수 있었다.

 

언어도 한 달을 쓰지 않으면 서서히 잊어버리듯 진화가 중단되어버린 기술은 오히려 퇴보하여 엉망이었고, 과감했던 어린 날의 순수한 패기는 녹이 슬어 비만 오면 쓸데없는 걱정을 하였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힌트를 찾아내지만 그로 인해 내 손가락의 현실을 확인할 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내 손 끝의 수준을 확인할 때면, 왜 이러고 있나, 내가 미쳤구나, 마음이 약해졌다가, 구멍을 찾아 반갑기도 하며, 갈 길이 오지게도 멀구나, 라는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래도 나는 바다로 가는 방향을 찾아가며 노를 저어야만 한다. 다시 지도를 펼쳐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겐 날개 없이 유유히 낭떠러지로 가는 길 밖에는 없으니까 말이다.

 

샛길들이 참 많았다. 그 샛길은 남들이 보기에 비단길이기도 했고, 비교적 쉽게 넘긴 장애물이 남들이 보기엔 노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남들이 보기에 부러운 환경이 되기도 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간에 나는 곧 낭떠러지가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올수록 불안했지만 소리는 나만 들리는 것이어서 나는 귀를 막고 나를 더욱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난 그때 날개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날개 없이 떨어지는 그 순간은 시원하고 자유로웠으나 나는 곧 바위와 거세게 부딪혔다. 몇 번을 다시 일어서 물질을 하던 나는 뚜욱 뚜욱 떨어지는 폭포에서 힘없이 나를 내던졌다. 물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므로- 지나온 걸음들로 배우고 깨달아 내가 어느 시점에서 표류하고 있으매 모든 시간이 복이라고 여긴다. 

허나 분명한건 시간의 루프가 돌아오면 그동안의 힘을 모아 위로 돌파해야 한다. 다행히 겨우 낑낑대며 올라와, 한 계단을 밟고 올라갔었다. 한 발을 겨우 떼고서도 대롱대롱 오래도 매달려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나를 괴롭히던, 빙글빙글 내리막길로 향하는 그 얄미운 우회로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것 같다. 

대롱거리던 남은 한 발을 계단 위로 올리니 몸 어딘가에서 향기로운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진다. 썩은 장미에서 나는 향기는 참 매혹적인가 보다. 후드득후드득, 니들 아직도 내 몸에 남아있었니 싶을 정도로 많이도 떨어진다. 이젠 멀어져 가는 저 우회로를 이 향기로서 회상하는 날이 오겠지.

 

 

-


나는 진정 나에게 주어진 능력을 나 스스로, 내 손으로 잘- 만들어내기 위한- 길고 긴 연습과, 길고 긴 인내와 고통을 꾸준히 감내해 본 적이 없다. 

나를 단지 먹여 살리기 위해, 나의 하루를 운영하기 위해 억지로 참고, 억지로 합리화하며, 활기차게 긍정적인 생각들로 연명하며 열심히 살아본 적은 있다. 그러다 언젠가 자존심이 나의 마음을 긁어놓고, 나의 얼굴을 할퀴어 눈물을 핑 돌게 만들었을 때, 자존감마저 바닥이 나서 내 껍데기마저 찢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막 떠나버린 영혼처럼 구멍이란 구멍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을 때, 껍데기를 멍든 살에 꿰어 버리는 것이 인내요 고통이요 노력이라고 생각했더랬다. 물론 언젠가는 이마저 재해석하는 황혼의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예나 지금이나 나중이나 그 시간을 결코 열정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마음이 신이 남겨두신 기회였다고 본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인내란 알기 때문에 놓지 않는 것이요, 알고도 믿는 것이요, 세상과 교집합 되지 않아 가끔 혼자 광야에 서 있는 기분이 들더라도, 나를 끌어줄 타인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것이요,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감사하는 것이요,

고통은 나의 얼굴을 할퀴는 찢어진 아픔이 아니라, 공허한 기억이 흩어지며 마음이 차는 것이요,

그렇기에 스스로 믿고 모래바람을 마시며 걸어가는 것이 열정이 아닌가 한다.

 


*


잡풀이 무성하여 잔디가 바르게 자랄 수 없었던 밭을 밀었다. 그리고 얼마 전, 쪽 잔디를 심었다. 일주일이 지났을까, 잔디 주변으로 아기 풀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호미로 잔디 주변을 스윽스윽 갈아내어 풀들이 자라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야 잔디가 제대로 자랄 수 있다나. 귀엽게 고개를 내민 아기 잡풀들은 쓰윽 쓰윽 긁어 자라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진정 아름답고 예쁜 것, 편하고 좋은 것은 그렇게 만드는 거란다.

 

나는 한참을 갈다가, 잔디를 꾹꾹 밟아준다. 힘에 부쳐 쪼그려 앉아 쉬었다. 땅을 치고 일어선다. 이제 영양제를 뿌려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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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거닐다

저 선배, 좀 별로야

 

 

"저 선배 좀 별로야. 이중인격적이랄까?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론 무얼 생각하는지 알수가 없어. 조심해"

 

20살, 갓 대학생이 되었던 내게 한 선배의 이 말을 들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난 그 말에 의문을 제기할 틈 없이 믿어버렸고, 한 학기동안 해당 선배를 멀리했다.

우연찮게 같이 프로젝트든 뭐든 할 기회가 많았는데도 난 항상 거리를 두었다.

 

그가 친절하게 웃어도 그 웃음에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했음엔 말할 것도 없다. 

 

한 학기가 끝나는 시점, 해당 선배와 내게 얘기해준 선배가 함께 친하게 웃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난 그것을 그저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었다. 충격적이었다.

 

한 학기 내내 좀 무서워하면서 피해왔는데 정작 말해준 선배는 그 선배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엔 이런말도 하면서, 
"아, 막상 또 보니까 괜찮더라고."
 
사실 해당 선배는 1학년인 나를 귀여워했고, 나와 친해지려고 다가왔던 선배였다. 그러나 언제나 나는 피했고, 돌아가기만 했다. 

 

그 둘의 웃음을 멀리서 멍하니 바라보는 순간 난 소름이 돋았었다.


그저 지나가는 한 말을, 하나의 생각을 순진하게 믿었고 어떤 의심도 제기하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했던 나의 행동거지를 떠올리며 말이다.

 

한 생각을 순진하게 믿음으로 인해, 하나의 정보를 의심없이 받아들임으로 인한 파급력을 이렇듯 온 몸으로 느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검증되지 않은 하나의 정보가, 하나의 생각이 우리가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이 삶을 이끌어 가기도 한다. 


인간관계에도, 일에도, 돈을 버는 것에도, 행복에도, 사랑에도...

 

정말로 건강한 정보를 판별하여 취하는 '분별력'이 절실히 필요하고,
홍수처럼 밀려오는 이 정보의 범람속에 '그것이 진실인지'를 묻는 의심의 용기 역시 매우 필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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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거닐다

"쌤, 수학을 왜 배우는 거에요?"

 

 

"쌤, 수학을 왜 배우는 거에요? 이거 도대체 어디다 써먹게요?"

 

오늘도 여김없이 한 학생이 물어본다. 


사실 그 학생 말이 맞다.
우리가 사칙연산만 알면 되지, 루트를 알고, 지수함수를 알고, 적분을 알 필요가 굳이 있을까.

 

시험을 위해서면 깔끔하게 식을 도출하고 답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긴 하다.

 

그러나 아이들에겐 이렇게 얘기해주곤 한다.

 

"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건, '고민'하는 거거든. 


답을 도출하지 못해도 괜찮아.

이렇게 하면 될까? 저렇게 하면 될까? 이 방식을 써볼까? 끝없이 고민해보는거야.

 

한 문제를 2-3일간 고민해본 적 있어? 

 

식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야. 피타고라스 정의를 증명하는 방법만 해도 100가지가 넘는걸. 어떻게든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거지.

 

앞서 얘기했듯 나중에 사회에서는 로그함수를 어떻게 그리고, 곡선의 넓이를 구하는 것 등등은 전혀 필요가 없어.

 

하지만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해본 그 깊이 만큼은 결국 남게 될거거든. 

 

일주일간 수학 한 문제를 고민해 본적이 있는 학생은 아마 수학이 아닌 다른 문제를 만나게 되더라도 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깊이 사고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거야. 이게 사고력이라고도 하거든.

 

단지 문제를 맞춘다는 생각으로 암기하듯 푸는게 아니라 수학을 통해 이 고민의 힘을 향상시킨다는 생각으로 문제를 만나보면 어떨까?

 

비록 답을 맞추지 못할지라도 그 시간들이 다른 누가 아닌 나 자신에게 참 값질거라 생각해.

 

자, 그럼 17번을 마저 볼까? "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 입구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수학을 통한 사고력을 높이평가하였던게 아닐까.

물론 사람들마다 성향이 다르고 사고력을 높여왔던 방법들 역시 제각각일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학생이라면 배우는 이 수학의 과정들이 좀 더 그 본래의 색을 갖춰 잘 배워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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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거닐다

천직이라는 환상(?)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의 적성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에게는 다른 특별한 재능과 예술가적 소양이 풍부하다고 믿나요?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자신의 능력에 맞는 고상한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면, 매사가 불만일 것입니다. 일을 하더라도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저 건성으로 시간만 때우며 살 것입니다. 

 

그렇게 현재를 살지 못할 것입니다."

 

-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 바이런 케이티, 183p

 

천직을 찾아 헤맸던 것 같다.
나만이 잘할 수 있는일, 모든걸 쏟아부을 정도로 열정적인 일, 미칠것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헤맸달까.

 

대학 고학년이 되었을 때 

이 조급함과 압박감속에 무언가를,

재빨리 꿈이란걸 '설정'해 버렸고 

그것에 맞춰 인생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전공과목, 실습할 곳, 학회 설립, 대학원과정에 일할 곳까지 20년간의 로드맵을 짰었고, 꽤 충실하게 하고자 하는 것들을 해나갔다.

 

그러나 사소한 어떤 한 가지 사건이 나의 발목을 잡았고 큰 좌절속에 졸업하고 돌아와 집안에서 멍하니 세월을 보냈었다.

 

돌아보면 사실 그 좌절이 감사할 정도로 더이상 그때 세웠던 계획에 흥미가 없다.

 

요즘들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천직이란건... 혹시 환상이 아니었을까.

 

각 사람마다 자신만의 재능이 있는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꼭 '직업'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일까.

 

같은 보고서를 하나 작성하더라도,
누군가는 자신의 특이한 경험들을 담아 이야기를 들려주듯 작성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논리적으로 원인과 결과의 요소들을 담아 완벽한 형태의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내용을 구조화 시켜 한장의 도해로 끝내기도 한다.

 

같은 물건을 팔더라도,
누군가는 지인에게 특화되어 영향력을 가지고 팔기도 하고,
누군가는 길거리 낯선 사람에게 공연을 하며 팔기도 하고,
누군가는 영상작업을 하여 불특정 다수에게 팔기도 한다.
각자 자신만의 즐거운 방식으로 팔아간다.

 

그 무엇을 하든 그 안에 세부적인 일의 요소들은 나의 재능에 맞춰 변화를 줄 수 있다. 
그 무엇을 하든 그 일이 나에게 딱 맞으며 즐거워질수도 있다.

 

나는 학생을 가르칠 때, 최대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어 가르치고자 한다.
다른 선생님은 스토리를 들려주며 그 개념들을 이해시킨다. 또 다른 이는 논리적으로 도망갈 곳이 없는 탄탄한 과정을 보여준다.

같은 강사라도 그 스타일은 천차만별이다.


자기만의 재능을 가지고 펼쳐낸다.

 

나는 말이다,
나만의 직업을 찾아내는 것을 멈췄다.
그것이 나에게 더이상 중요해지지 않아졌다.

 

어떠한 흐름이 어떻게 올 지는 모른다.
직업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그 무언가만을 바라보며 현재를 불만족스러워 하는 것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막연한 두려움 속에 나를 더이상 내버려두지 않기로 한다.

 

바이런케이티는 이렇게 묻는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나요?
내일이 아닌, 
10분 후가 아닌
바로 지금 행복할 수 있나요?"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가 아닌,
지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러할 때, 무언가가 완성된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온전함을 보게 될 것이고


바로 지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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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거닐다

오늘 감사했던 것 세가지를 고른다면?

 

"오늘 감사했던 것 3가지를 고른다면 뭘까?"

 

종종 수업시간에 아이에게 묻곤 한다.

 

그럼 아이는 매우 고민고민하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꺼내본다.


특히 '무언가'를 '이뤄낸'기억, 
혹은 '무언가'를 '받게 된'것들을 말이다.

 

'오늘 체육시간에 축구를 했는데 제가 골을 넣었어요.'

 

'엄마가 새 운동화를 사줬어요'

 

그렇게 한 두개를 얘기하곤 도저히 세번째 감사제목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럼 나는 운을 뗀다.

오늘 아침에 잘 일어났어?
네.

평상시와 달랐던 점이 있어?
음.. 오늘은 휴일이어서 늦게 일어났어요.
우와 평상시보다 좀 더 잠을 잘 수 있었구나~

 

그러면 아이는 곧 눈치채곤 이렇게 웃으며 말하곤 한다.
'오늘은 좀 더 늦잠 잘 수 있어서 감사했어요.'

 

 

아침밥은 먹었고?
네. 
맛있었어? 
맛있지는 않았어요.
누가 해주셨어?
엄마가요.
이야, 엄마가 해준 음식으로 아침을 먹었구나.

 

 

그럼 또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비록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지만, 뭐 어쨋튼 엄마가 밥을 차려주신것은 고마운일이네요.'

 

 

침대 이불이 정말 보송보송 해보이는데?
네 푹신해서 좋아요. 하하. 폭신한 이불이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인가요?
그럼~ 

 

 

처음에는 감사제목을 한 두가지 못나눴던 아이도

1년쯤이 지나면 꽤 많은 것들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있는 것들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아이가 일상을 감사함으로 나눌 땐 
참 감동적이다.

 

그래, 그렇게 우린 우리 주위에 있는

일상의 소소함을, 
그것들을 다시 보는 법을 배우는 중이야.

 

또 다시 잊고 정신없이 삶을 살다 이 수업을 통해 나 역시 다시 삶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