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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에게 찾아온 습작들

이야기 63-9

592

 

 

 

싸움보단 말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무의미한 폭력은 그리 좋지 않다. 당연하게도 나는 평화주의자이기에 평화롭게 해결하는 걸 좋아한다. 평화 최고. 혼돈은 멀리하고 평화를 가까이 하는 게 좋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평화고 뭐고 없구나.”

 

쓰러져 있는 레인을 바라보며 단검을 집어 넣었다.

 

“카일 씨...왜 그렇게 강해요? 591에서 592로 넘어갔다고 느닷없이 제가 져있잖아요?”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가 남는 그런 기묘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만, 지금은 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그보다 일기에도 네가 지게 되어있는 거야? 아니면 지금 내가 일기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야?”

 

확신이 서지 않지만...

 

“일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기엔...

 

“지금 일기의 가이드라인을 생각해보면 탈선의 수준이 아니에요. 이미 우주로 날아가서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고요.”

 

과거로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다고 본다.

 

그래도 레인은 원망을 하거나 한숨을 짓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레인의 성격상 오히려 일이 엉망으로 되었을 때 수습하는 걸 더 좋아하는 기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까. 내가 쓴 일기도 엉망진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인가요?

 

“좋은 일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네. 그래도 지금은 내가 결정한 것에 따라가야지. 그보다 아이리스는 다 완치가 되었다면서?”

 

“카렌 씨는요?”

 

카렌? 아...

그렇지. 어째서 카렌은 활동하지 않는 이유라고 하면...사춘기라고 해야 하나? 자립심이 너무 올라갔다고 해야 하나?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선 보이지 않은 게 흠이다. 돌아갈 장소가 또 있다는 건 나쁘지 않지만, 어차피 내 복제품과 비슷하기도 하고,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일단 복수에 대한 건 진심이든 아니든 접어둬. 지금 이렇게 해도 별 다른 이득은 없어.”

 

“이익중심으로 움직이는 건가요?”

 

“아니. 평화중심이지.”

 

내 마음속의 1순위는 언제나 평화다. 그런데 현실은 평화가 왜...

자괴감이 든다.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평화를 위해서라니...

 

“이미 미래는 뒤틀리기 시작했어. 그렇다고 리제로트가 죽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을 때, 오히려 리제로트가 안 죽을 수도 있는데, 내가 있으니까 죽거나 심하면 침을 흘리겠지.”

 

“최소와 최대가 바뀌었지 않았나요?”

 

이 말버릇 레시아에게 전염된 건가. 빨리 고쳐야겠다. 리베리티아 고원의 특유한 바람은 300년이 지나도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이곳은 개발도중 청정구역이라고 지정한 모양이다. 사실 청정구역인지 다른 마법적인 요인으로 손을 대지 못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쾌하게 쓸고 지나가는 바람을 뒤로한 채, 뒤에서 차를 마시고 여유롭게 앉아있는 리제로트에게 돌아갔다.

 

“너는 아까 내가 위험했을 때 도와주지도 않더라?”

 

“해결사가 해야 하는 일을 의뢰인이 꼭 도와주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래도 협조나 도움은 줘야 할 거 아냐. 방금 전에 레인이 던졌던 마법공학 유탄을 다른 시공간으로 날려버리지 않았으면, 이 일대가 지금 다 사라졌을 거라고.”

 

“그렇다고 해도 저는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은 기억도 없고, 애초에 마법사가 아니라 초능력자라서요.”

 

초능력자라고 해도 마나는 가지고 있으면 마법사의 길을 좀 가란 말이다.

 

“뭐 어떻게든 위기는 넘겼으니 상관 없겠지.”

 

리제로트는 차를 놓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평소에는 푸른색의 컬러렌즈로 자신의 초능력을 봉인하지만, 어느 사이에 짙은 보라 빛의 눈으로 돌아와있었다.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는데. 저를 과거로 데려다 주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 보라 빛의 눈은 혹시라도 정신오염이 먹힐 거 같아서?”

 

“칫.”

 

인간성이 어디로 간 거냐 넌...

 

“여전히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가 없으니 기괴하네. 뭐, 그래도 너의 초능력은 강력한 최면술일 뿐이니까. 결국 망각의 샘물을 먹이지 않는 이상, 영구적으로 너의 인형이 안 되는 거잖아? 게다가 나는 이미 인외의 존재로 되어가는 중이라서, 명계에서 퍼 올리는 망각의 샘물이 아닌 이상 잘 듣지도 않을 걸?”

 

한 때, 내가 만약에 신이 된다면. 이 지상을 평화롭게 만든다거나 그런 건 없었고, 그냥 내 마음대로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을 해보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평화롭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어쨌든 슬슬 이곳도 정리할 거니까 어서 돌아가기나 해. 라 캄베리의 영애는 자신의 일정은 내팽개치고 이렇게 농땡이 부려도 되는 거야?”

 

“어차피 오늘 일정은 없는 걸요. 오늘 하루 디즈니에서 나오는 쥐나 보면서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 싶기도 하고요. 거추장스러운 남자 둘이서 이리저리 치고 박고 싸우는 건 제가 보기엔 너무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서 문제네요.”

 

“거기서 선정적이란 단어가 왜 나와?”

 

그렇게 폭력적인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잘도 봐온 주제에.

 

“아이고...삭신이야...이럴 줄 알았으면 잡화점에 있는 물품을 가지고 오는 건데.”

 

“그거 멸망의 지름길이니까 가져오지 말아줄래?”

 

레인의 섬뜩한 소리가 내 귀에 흘러가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서 위험을 경고했다. 안 그래도 마법공학 수류탄을 레인이 직접 던지는 바람에, 지도가 완전히 바뀔 뻔했지만, 지금은 우주 어딘가 터지면서 안전한 처리과정을 거쳤으리라 본다. 생각을 해보면 모든 위험한 것들은 우주 밖으로 내던지는 게 편리하지 않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를 블랙홀에 내던지는 방법도 생각해봐야겠다.

물론 블랙홀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렸지만...

 

“그러면 이제 슬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운명을 바꾼다는 건 모든 걸 바꾼다는 의미야.”

 

나는 주변이 황폐해진 리베리티아 고원으로부터 손을 뻗어 힘을 집중했다.

 

“모든 걸 바꾼다는 건 재창세와 같지. 그걸 원하는 건 레이베리아도 그렇겠지만, 사실상 이 힘은 창조주와 거의 같다고 봐도 괜찮아. 레이베리아는 창조주의 근원 중 일부인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뿐이고,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서 재창세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 거지. 내 모든 힘을 뽑아서 빌려 쓰기 위함이기도 해.”

 

“그러면 당신이 신이 된다면?”

 

“아니. 나는 결국 반신이 한계야. 기껏해야 최대로 할 수 있는 게 엉망인 걸 고치거나, 이 세상에 있는 물품을 보고 이해해야 겨우 제작할 수 있는 정도지. 그 이외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나로 나누는 귀찮은 작업까지 해야 하고.”

 

서서히 자연의 모습 그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리베리티아 고원을 바라보며, 리제로트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런 유용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을 손쉽게 끝낼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그거야 아직 내가 잡화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지. 기본적으로 인간이었다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가 있고, 인간의 이해 범위 밖을 내가 어떻게 다 이해를 하겠어? 그건 신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야.”

 

지금 이렇게 수복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솔직히 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의 길을 어느 정도 걸어봤다면 가능한 마법이다. 이런 광범위한 공간을 모두 되돌리기 위해선 거대한 마나가 필요하긴 해도, 마나만 받쳐준다면 이런 일은 마법사라면 가능하단 소리지.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고는 신의 영역에 발자국을 살짝 가져다 댔는데, 안 보이는 벽에 의해 선만 아주 살짝 밟은 상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만일 내가 신이 되었다면...”

 

이런 바보 같은 일은 그만두고 지루할 만큼 평화를 가지고 사는 건데.

 

“아냐. 아무것도. 그러니까 결국 너의 의뢰를 해결하려면 모든 걸 다 바꿔야 해.”

 

“모든 걸 다 바꾼다면?”

 

“너의 과거로 가야지.”

 

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는데, 그와 상반된 리제로트의 얼굴은 마치 썩은 달걀을 본 눈빛이었다. 아니 썩은 달걀을 봐도 지금 저 표정보단 더 좋겠지.

 

“당신 정말 변태네요.”

 

“변태라니. 내가 곤충도 아니고 탈피하지 않는다고?”

 

“하아...저는 그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닐 텐데요!”

 

헉! 화났어! 무서워!

월터도 주먹을 들었어! 날 때리려고 하다니! 무서워!

 

“그런데? 각본가의 각본을 찢자는 건요?”

 

“아. 그거? 너무 위험해서. 나란 사람은 또 온순하고 평화적이잖아?”

 

“온순과 평화란 단어는 당신에게 절대로 안 어울려요. 그리고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났는데 다른 제안을 할 수 있죠? 그보다 제 과거로 가서 뭘 캐낼 생각이에요?”

 

“과거로 가서 지금의 ‘너’를 지울 거야.”

 

어마어마한 시간차를 뚫고 겨우 “네?”라고 대답한 리제로트의 말. 절망이 담겨있는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지 서서히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어떤 사람에게 “지금 당장 당신을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만들 겁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좋다고 “오! 예!”라고 대답하겠는가?

 

자신의 모든 삶을 부정하겠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월터가 스스로 움직였다.

 

-슈아악!

 

어마어마한 발차기가 내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마법방패<Magic Shield>를 전개해 막아내고 있는 동안, 날카로운 외침이 내 귀를 쑤셨다.

 

“어째서요! 당신은 제 편이 아닌가요!”

 

“당연히 너의 편이지. 너는 운명을 거부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상태가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

 

월터의 거대한 주먹이 마법방패를 뒤흔들었다.

 

“애초에 모든 힘을 포기하라는 루니아 누나의 말도, 지금 모든 걸 버리면 우리가 보호해주겠다는 간접적인 메시지였어. 하지만 너는 거부를 했지. 내가 말했잖아? 너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눈에 띄는 거라고, 결국 레이베리아에게 찍힌 거고 각본에 쓰여진 거야.”

 

그리고...그 각본의 내용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각본이든 내 일기장마저 무시하고 다른 선택지를 골랐어. 그 뜻은 결국 이 시간대는 원래 없는 시간대나 마찬가지야!”

 

월터의 공격이 멈췄다.

크게 동요하고 있는 리제로트는 자신의 존재가 허황된 가짜라는 사실에, 그만 무릎을 꿇고 넋을 놓고야 말았다.

 

“물론. 지금은 내 가설에 불과하지만, 너를 데리고 과거로 돌아가서 진실을 마주한다면, 도대체 어떤 개판이 벌어졌길래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증인이 될 수 있어. 유랑극단이 시간을 숨기고 공간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겨우겨우 해결했다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일기장마저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없거든. 그리고...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나는 슬슬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엘티노스는 자서전인 마냥 일기 같은 걸 잡화점에 남기고 있어도.

나는 단 한번도 내 일기장을 잡화점에 보관하고 있다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남이 보는 게 부끄러워서 내 전용 아공간에만 일기장을 넣고 다닌다고?”

 

그래. 처음부터 레인이 읽은 일기장은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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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계주는 급커브를 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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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냥꾼

다샴

※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샴 

1. 악마들의 총괄 책임자, 악령들의 제왕.

2. 날씨를 주관하는 신의 이름. 질병과 재난을 몰아내었다고 함. 고대에서 숭배받았음.

                                                 

소년은 동전 한 닢으로 강을 건넜고 얕은 냇가에서 제 발로 걸어와 마을에 당도했다. 이른 아침이었다. 빨래하고 물긷던 여자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이 그를 흘끔거렸다. 

 한 사람이 여자들의 틈에서부터 잽싸게 빠져나가 반쯤 허물어가는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작은 여자 하나가 나왔다. 두 손으로는 넓적한 그릇을 받쳐든 채로, 다샴을 향해 조심조심 걸어오고 있었다. 옷가지를 널어 말리던 아낙 하나가 물가에서 빨래하던 여자를 향해 황급히 눈짓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가지고 오던 소녀의 뒷통수를 갈겼다. 여자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빼앗고 소녀를 꾸짖었다. 아낙들은 사뭇 일상적인 광경을 대하듯 모른 척 빨래에만 몰두했다. 다샴 같은 탁발승이 마을에 찾아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생존에 지친 여자들은 그악스러웠고 경계심이 강했다. 낯선 승려에게 보시할 여력이 없었다. 다샴은 직감적으로 다른 마을로 자리를 옮겨야 함을 알았다. 모래 바람 날리는 마을은 다들 비슷비슷했으나 그 안의 양상과 처지는 제각기 달랐다. 긴 걸음을 했건만, 이번에도 수확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다샴은 집 몇 채를 돌며 구걸하다가 종교를 신봉하는 노인 두어 명으로부터 음식 약간을 얻었고 그들이 내어준 헛간에서 잠이 들었다. 헛간은 아낙들이 빨래를 하는 강가 옆에 나 있었다. 

 이리의 울부짖음 같은 핏빛 메아리가 공기를 찢었다. 

 다샴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이질적이고 기묘한 느낌이 신경을 흔들었다. 목덜미까지 소름이 쭉 끼쳤다. 낯선 동시에 익숙한 감각이었다. 짐승이 내는 소리는 분명히 아니었다. 

다샴은 헛간 문을 열려 했지만 빗장은 바깥에서 잠겨져 있어 허사였다. 낯선 소년이 밤을 틈타 도둑질을 할지도 모른다는, 노인들의 까닭 없는 경계심 탓이었다. 졸지에 갇힌 꼴이 된 다샴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오래된 경첩이 내는 비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정적을 매단 달빛 아래 기묘하게 번득이는 남자들의 흰 동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놀라지 말게. 

 

무리의 수장인 듯한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나직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다샴은 내색하지 않고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 물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특정한 대가를 바라고 찾아왔음을, 그리고 그것이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닐 것임을 알았다. 

 수장은 직접적인 대답을 꺼렸다. 따라오게, 라는 한 마디와 함께 다샴을 향해 눈짓했는데, 노인의 주위에 기립한 남자들의 눈과 자세는 일체의 거절을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다샴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고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순수한 의도에서 노인을 따라갔을 것이었다. 다샴은 횃불을 든 남자들의 선두에 선 수장과 자리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불빛이 마을의 끝편,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추었고, 곧이어 바닥에 깔린 참혹한 광경을 비추었다. 돼지와 소, 닭과 같은 갖은 가축들의 시체들이 있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숲 속에는 악령들이 살고 있네. 이 악령들의 왕은 사악한 요정인데, 그는 악령들을 마을에 풀어놓지 않는 대가로 한 달에 한 번씩 산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네. 그게 벌써 삼 년이나 지난 일이로군. 

 

곧이어 남자들이 주둥이 부분을 단단히 묶은 포대를 이끌고 찾아왔다. 체구가 작은 사람이 능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다샴은 답변을 요구하듯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남자들에게 물었다.

 

잘 데리고 왔느냐? 착오는 없었고?

 

예, 어르신. 원하신다면 보여드릴까요?

 

노인은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다. 어린 계집애면 충분해. 지금쯤이면 잠에 곯아떨어졌겠느니....

 

남자들이 포대를 이끌고 숲 가까이로 갔을 때, 소동이 일어났다. 포대 안에 갇힌 제물이 꿈틀거리고, 주위의 것을 발로 마구 차고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고 호소하고 애원하며 한바탕 난동을 피운 것이었다. 남자들이 포대 위를 사정없이 발로 차고 짓밟았다. 여자의 신음 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귓속을 파고들었다. 

 

...꼭 저렇게 해야겠습니까? 제가 숲 속으로 들어가 악령들의 왕과 이야기를 해야겠으니, 무고한 사람은 풀어주시지요. 

 

다샴이 말을 이었다. 

 

어르신께서 굳이 이 밤중에 저를 깨워 이곳으로 함께 온 것은 제게 이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고자 함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어제 이 마을에 와 이곳 분들의 후의를 얻었습니다.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어 드리고자 합니다. 이런 일은 승려가 아닌 다른 누가 하겠습니까?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나 나한테나 안된 일이지만, 오늘의 제물은 꼭 바쳐야 하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네한테 한 번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자네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거야. 오늘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악령을 부리는 그 요정이 진노하고 말게야. 저기 붉은 달이 뜬 게 보이나? 오늘이 바로 그날일세. 자네는 재수 없는 시기에 우리 마을에 온 셈이야. 

 

가축으로 제물을 대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요정은 사람을 선호한다네. 그것도 어린 여자를 좋아하지.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또 우리가 어디 가축을 주어버릴 형편인가. 그게 전부 우리의 소중한 재산일세. 저게 모두 낭비라는 말이야. 

 

다샴의 눈 아래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제가 저 사람 대신 제물로 가지요.

 

난데없는 파격에 노인은 당황했다. 안될 것은 없었지만...

 

난 요정을 쫓아낼 경이나 읊어주기 바랐지 자네한테 그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아. 자네는 나이 어리나 승려이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악령을 쫓는 신통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 할 수 있습니다. 한데 애먼 목숨을 희생시키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 아닙니까? 내일 같은 시각까지 차분히 기다려 보시지요. 제가 그리 하겠습니다. 

 

어르신, 하는 남자의 다급한 외침이 둘 사이의 대화를 끊었다. 

 

붉은 달이 갑작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악령들이 찾아올 시간이 지났어요. 조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제물을 던져넣을까요? 

 

노인은 다샴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짙고 검은 눈은 일체의 빛을 반사하지도, 흡수하지도 않는 것처럼 반들거렸다.

 

무슨 영문에서인지 요정이 마음을 바꿨군. 같은 시간에 이 장소에서 보겠네. 

 

 다샴은 짧게 눈을 붙였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헛간에서 조금 더 나은 곳으로 옮길 것을 권유 받았다. 사람들의 태도와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다샴은 그들에게서 희망과 기대감을 보았고, 번들거리는 욕망 또한 읽었다. 횃불을 든 남자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노인의 눈이 그러했다. 

 그가 지내던 헛간의 아래 틈은 손바닥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너비가 있어서 캄캄한 와중에도 흘러가는 물결의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이 일을 끝낸 빨래터, 다샴이 건너온 냇물은 거대한 강과 이어져 있었다. 다샴은 한가히 앉아 있을 때나 그들을 위해 부적을 쓰고 처방을 한 후에면 그 강을 생각하곤 했다. 

 그는 다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물살이 칼로 자른 듯 깨끗이 끊어졌다. 

 다샴이 노인의 집에서 함께 밥상을 받을 때, 작은 여자 아이는 부엌 안에서 숨어 그를 지켜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다샴이 혼자 남자 소녀는 쭈뼛대며 그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다샴의 옷자락을 잡고 구석으로 이끌었고 그는 순순히 따라왔다. 소녀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간신히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는 들릴락말락했다. 소녀가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자 다샴은 그가 전날 밤의 희생물로 지목되었던 아이였음을 알았다. 

 

스님, 저는 오늘이 두렵고 내일이 두렵습니다. 악몽에 시달리다가 깨어나 현실을 자각하면 안도감이 들어야 마땅할 터인데, 실제를 인지하자마자 꿈 속과는 다른 종류의 또다른 지옥이 밀려옵니다. 꿈에서도 괴롭고 현실에서도 괴롭습니다. 

 

아이는 그 말을 하면서 손을 비틀며 흐느꼈다. 아이의 피부에는 온통 검보라색과 누런색의 멍이 피어 있었다. 

 

제 친척들은 제가 제물로 선별되었을 때도 군말 없이 저를 넘기신 분들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저는 결국 오갈 데 없이 친척에게 몸 하나를 의탁하는 어린 여자아이일 뿐입니다. 그 분들에게 저는 쓸모가 없어요. 저를 팔아버리거나 내쫓으려는 생각밖에 없는 분들입니다. 스님, 기억하시나요? 스님이 오신 날 저는 음식을 들고 스님께 가다가 크게 혼이 났습니다. 스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인심 사나운 이곳 사람들도 후한 대우를 베풀어주실 겁니다. 그때는 제가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스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제가 스님의 사당을 차려 대대로 그 숭고한 넋을 기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다샴은 아이를 축복하고, 그가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빌어주었다. 다샴에게 조개껍질이며 소라기둥을 받은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정신없이 손 안에 쥔 것을 매만지고 들여다보던 아이가 물었다. 

 

저는 언젠가 반드시 바다에 가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떤 연유로 방랑하는 중이 되셨나요?

 

다샴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것은 소망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이었다. 소녀가 말했다.

 

제 어미는 간음하여 그 죄질이 더럽다고 하여 사람들이 쫓아냈습니다. 어미가 통정하여 낳은 아이인 저를, 사람들은 경멸하지요. 이와 같은 사건이 10년 전에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 이곳에 붙어있지만 그때의 사람들은 더욱 무자비해서, 간음한 남자는 추방하고 여자는 죽여 숲 속 깊은 곳에 묻은 후, 그 둘 사이의 갓난아기는 들개가 뜯어먹도록 외진 곳에 버려두었다고 합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노파 한 명이 아기의 이름을 손수 지어 옷 아래에 바느질로 새겼는데 다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기가 살아남았다면 스님과 같은 나이일 테지요. 

 

소녀는 그렇게 말했고,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 부엌으로 달려갔다. 

 밤이 찾아왔다. 달은 전날의 그것처럼 붉었다. 소름을 동반한 이상한 파동이 다샴의 몸 안팤을 뒤흔들었다.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이었다. 

전날과 다름없이 횃불을 들고 선 남자들은 제 발로 걸어오기는 했지만 몸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 않는 그를 두고 걱정했다. 

 

어이.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다샴은 고개를 돌렸다.

 

마셔. 저기 있는 귀신 새끼들 족쳐버려야 될 거 아냐.

 

다샴은 남자가 건넨 병을 들어 마셨다. 걸죽하고 독한 술이었다. 다샴이 쿨럭대자 남자는 병을 치워버리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는데 지독하게 아팠다. 

 

 자. 그만하면 되었네.

 

뒷짐을 진 노인이 고개만 돌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앞에서 까마득하게 솟은 숲은, 그야말로 넓고 깊숙한 미궁이었다. 까만 유리알 같은 노인의 눈이 위로 휘어지며 웃었다.

 

부디 몸 성히 돌아오게. 

 

횃불의 무리가 일렁이는 어둠을 뒤로 한 다샴은 그보다 한층 깊고 습한 어둠 속을 향해 나아갔다. 

 

 울창한 잎이 우거진 저 위쪽은 새카매서 하늘과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자, 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서걱거렸다. 어디선가 밤새가 울었다. 작은 동물이 풀숲을 헤치고 빠르게 사라졌다. 더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자 짐승의 기척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곳은 오롯한 생명이 있되 동적인 생물은 없는, 얼어붙은 시간 같은 공간이었다. 오직 나무와 풀 뿐이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이 멈췄다. 정적이 온 몸을 휘감았다. 몸의 내부와 외부를 뒤흔들던 파동이 더욱 거세어졌고, 미약하게 시작되던 두통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뛰놀았다. 피가 달아오르고, 사그라들고, 달아오르며 올라오다가 중간에서 차게 식으며 목덜미까지 죽 뻗었다. 

 

- 다샴...다샴....

 

유령들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았다.

다샴은 정신을 잃지 않으며 애썼다. 빠져나가려는 것을 최대한 붙잡으며, 악령들의 숲 사이를 한발 한발 걸어나갔다. 그의 목적은 그들이 아니었다. 

 암흑 속에는 작은 사당이 있었다. 숲은 계곡으로 이어진 통로였고, 사당은 계곡이 시작되는 탁 트인 저편을 등지고 자리해 있었다. 

 순수한 정념의 결정체가 다샴의 마음을 부분적으로 잠식했다. 분노, 억울함, 황망함, 슬픔, 혼란스러움. 어떤 감정은 오롯히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악령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의 혼 뿐만 아니라, 짐승들의 그것 또한 많았는데 그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애꿎은 골칫거리를 더 늘린 셈이었다. 다샴은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울었다. 무엇 때문에 우는지는 자신조차 알지 못했지만 지극한 슬픔이 몰려와 그는 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홀려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았다. 최악의 경우, 악령들은 그의 몸을 차지하고 조종해 숲 밖을 나오게 한 다음 사람들을 해치게끔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에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정념만이 공명되었지, 그의 정신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마치 숭배하는 것처럼 사당을 올려다보았다. 요정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사람들을 해치는 악한 요정에게 어떻게 사당이 존재하는 걸까? 나지막한 집은 오랫동안 보수되지 않아 이곳저곳이 부식되어 있었고,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푸른 이끼가 집을 뒤덮었다. 흰 물살이 쏟아져내려 귓청을 적셨다. 붉은 균열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눈이 까마득하게 흐려졌다. 

 그가 깨어난 곳은 모래 바람 부는 사막이었다. 여타의 사람들이라면 즉시 홀리고 말았겠지만, 그 곳은 요정이 만들어낸 환상임이 분명했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붉은 균열이 사막 전체를 번개처럼 내리치며 시선을 혼란케 했다. 다샴은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을 골랐다. 요정은 그에게 최후의 심판을 선고했으며 최종적 전투를 선언했다. 무엇이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검은 회오리 바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몰아쳐왔다. 부르짖고 우짖는 영혼들로 가득했다. 땅으로 꺼지지도,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지도 못한 뭇 짐승과 인간의 영혼들이었다. 비늘이 달린 검은 새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그들을 경계하는 것처럼 울어댔다. 그 세계의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졌다. 

 

 노인은 사내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이동했다. 불타오르는 횃불의 무리는 달과 그 빛을 겨루기라도 하듯 한 자리에서 고요했다. 

 

공간이 깨졌고, 시간이 얼어붙었다. 외계적인 고요함이 함께했다. 거대한 침묵이 그의 미세한 입자를 빨아들였다. 어떤 순간부터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함을 잊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회오리 바람은 잦아들고, 약해졌다. 나비의 날갯짓 만큼이나 미약하게 줄어들었다. 회오리를 이루고 있던 영혼들은 생기 있는 먹잇감을 찾아, 그들을 받아들여줄 그릇을 찾아 거진 빠져나갔다. 

 육체는 구부려진 활이었다.

푸른 이끼로 휩싸인 사당에 절로 균열이 생기더니, 천천히 갈라지다가 맥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집은 흙 부스러기로 돌아갔다.

 숲 바깥의 그들은 붉은 달이 어둠에 먹히고 자취를 감추어버린 과정을 맨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달은 본래의 흰 빛으로 돌아왔다. 경이와 두려움과 경탄에 찬 웅성거림이 일었다. 

 횃불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지만, 숲 속으로 들어간 소년은 나오지 않았다.

 마을에는 더 이상 악령이 출몰하지 않았다. 악령들을 부리는 요정이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숲의 중심부까지 다가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다가 숲을 통해 마을까지 흘러들어온 방랑자와 여행객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숲의 중심부 너머 탁 트인 곳에는 흰 계곡이 있다고, 그리고 그 앞에는 허물어져 쓰러진 작은 사당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어린 탁발승은 정말로 자기 일을 잘 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억을 잊었다. 기억만이 진실이 된다. 그들 가운데에서는 읽고 쓸 줄 아는 자들이 거의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들은 죽고 썩었다. 기록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녀는 열 여섯이 되자 마을을 몰래 빠져나왔다. 숲 속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 사당이 쓰러지고 잎사귀가 우거진 검푸른 곳에는 언젠가 작은 묘석이 세워질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지킬 수 있는 맹세의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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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8

591

 

 

새벽에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자장가를 불렀을 때, 레시아와 시나의 정신이 앞들과 뒷동산으로 출타하는 동안, 운명에 대한 고찰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생명은 태어나서 결국 죽는데. 그걸 자연의 섭리라고 보고 운명이라고 한다. 죽음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네크로멘서들은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 자신은 죽었는데 시체로 되살아나버린 경우에는, 그것 또한 그 시체의 운명인 것일까?

 

결론을 말하자면 운명 또한 무질서한 무언가를 질서 있게 보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따라서 운명이란 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면 운명은 없다. 그저 자신의 미래가 어찌 되는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의뢰는...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저 앞에 당돌하면서도 차분하게 입을 여는 소녀.

리제로트에게 받은 의뢰에 대해 정확한 내용으로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

 

“너를 보자고 한 이유야 의뢰 때문이지.”

 

“그래요? 해결할 수 있나요?”

 

그리고 나는 잠깐 숨을 들이켜서 틈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이 가장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짧은 시간. 그리고 나는 이야기한다.

 

“아니. 해결할 수는 없어. 그 대신...”

 

정확한 내용을 수정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너의 소망을 들어주지. 그거면 되지 않을까?”

 

“뭐라고요?”

 

어처구니 없어서 한숨이 입 밖으로 출타하려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있지만, 한숨을 쉬지 못하도록 빠르게 치고 나갔다.

 

“네가 전에 말한 그 의뢰는 사실상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거든. 그저 이야기 책에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이지 않게 했다고 너는 말하지만, 운명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살아있는 것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건 그렇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모르는 나의 말에 리제로트는 째려보며 대답했다.

 

“다만, 거기서 내가 죽어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것도 맞지?”

 

“당신은 지금 살아있잖아요.”

 

“아냐.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내 존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도 몰라.”

 

“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여태 새벽부터 고찰한 내용을 단 한 문장으로 함축하기로 하자.

 

“그 책에 내 이름이 적히지 않는 이유야, 원래 나는 이 평행차원에 없던 존재이기 때문이야.”

 

는 거짓말이고 사실 그 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잡화점의 대마력이 방어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는데 무슨 소리에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시공간은 본래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지, 하지만 과거에도 각본가의 책에 적혀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면, 어처구니 없게도 내 존재는 이 세상으로부터 본래 없었던 거야. 그거 있잖아. 죽음의 기사 4명 중에 하나가 왠 이상한 차원에 떨어져서 영문도 모르고 악마와 싸우는 그런 이야기. 아마 내가 케이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지.”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고...

 

“그러니까. 난 이 차원의 사람이 아냐.”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그런 소리 하려고 절 이곳에 불러서 소망을 들어준다고 한 거에요?!”

 

“당연하지. 생각을 해보니까 나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잖아?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진 못하지만, 말만 해. 뭐가 어떻게 되었든 소망 하나는 들어줄게. 그리고 나는 원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간다.”

 

그 소망 하나가 분명.

리제로트가 원하는 의뢰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뭐든지요?”

 

“아. 그렇다고 높은 수위의 기묘한 소원은 안 받아줘. 노블이니 뭐니 하는 그런 공간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19세 마크가 없다고?”

 

리제로트가 원하는 소망 하나를 들춰내는 것도 정말 어렵구나. 소녀의 마음이라는 건 이런 건가? 내가 잡화점 멤버의 장난으로 소녀가 되어본 적은 있긴 하지만, 음...지금은 무슨 심상인지 까먹었네.

 

“그럼...”

 

오랜 고민 끝에 말하는 건 아니지만, 리제로트의 입장에선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으리라 생각했다. 거대한 내적갈등에도 입을 연다는 그 자체가 결정했다는 소리니까...

 

“전 죽기 싫어요. 그러니...살려주세요.”

 

과연.

운명에 벗어나고 싶다는 말은 결국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건가.

 

“방법이야 많지. 대신 잃는 것도 많아.”

 

저런 소망을 듣고 절대로 공짜로 해줄 이유는 없다. 그래도 사람 하나가 살아나는 거니까 최대한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잃는 거라면?”

 

“우선 루니아 누나의 말처럼 그 힘을 버려야겠지.”

 

“제 초능력이요?”

 

“아. 물리적으로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단순하게 봉인하는 절차니까. 위급한 상황이나 죽기 직전에만 잠깐 발동하도록 만들 거야. 완전하게 빼앗지는 않아.”

 

선천적으로 발현된 초능력을 마법적으로 봉인한다는 그 자체는 개념이 달라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는 이 힘은 근본적으로 마나를 뛰어넘은 자원이다. 그러니 봉인마법과 이미지만 어떻게 해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째서죠? 힘이 있어야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잠깐 생각을 하고 나는 한숨을 지었다.

 

“애초에 힘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운명을 벗어나는 게 아냐. 오히려 힘이 있든 없든 운명은 존재하지. 아니, 난 딱히 운명론자가 아니니까 종착지라고 표현을 하자. 어쨌든 그 끝에 다다르는 원인 중에 하나는 힘이 없어서도 있지만,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해. 힘이 있든 없든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면, 삼손도 대머리로 죽지 않았을 거야.”

 

“......”

 

“그러니까. 넌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어. 힘이라는 그건 어떤 것도 상징할 수 있지. 라 캄베리의 영애라는 타이틀도 그렇고, 유랑극단의 간부이기도 하고, 너의 초능력은 너무 강력해서 내 정신방어마저도 흔들어버릴 정도야. 게다가 아이리스를 건드려서 레인에게 죽을 위기까지 처했고, 레이베리아의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살려주다가 놓친 이후로, 나와 이렇게 몰래 만나면서 레이베리아에게도 죽을 위기에 놓여졌다. 결국 각본가는 너의 죽음에 대한 각본을 썼을 테고, 너는 그걸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거지. 맞잖아?”

 

“마, 맞아요.”

 

“각본가의 각본은 또 언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너의 각본을 적기 전에 내용을 본 거 같으니까. 지금 미래가 어찌 될지 몰라서 답답할 지경이네.”

 

내가 레이베리아라면 배신자에게 어떤 각본을 써서 비참하게 죽였을까?

나라면 깃털로 간지럼을 태워서 죽였을 거 같은데...

 

“당신. 저질이군요.”

 

“아니. 남의 독백을 읽고 그런 표정을 짓기 전에 사생활침해라는 거 몰라? 나는 뭐 상상의 자유도 없나? 자유도도 없는 GTO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고.”

 

“O가 아니라 A겠죠...아무튼 절 볼 때마다 그런 상상만 했어요? 변태.”

 

“그런 상상만이라니. 이 상상은 지금 처음 하는 거고, 앞으로는 안 할 상상이란 말이야. 그리고 형벌 중에 간지럼은 예로부터 내려온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 중 하나란 말이다. 염소가 네 발을 지속적으로 핥아본 적 없잖아?”

 

“당신도 없잖아요.”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건 여전하군. 아무리 궤변을 늘어뜨려도 그 사이에 포인트만 집어서 공격을 하다니. 어린 나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냉철한 아이였다.

 

“뭐 아무튼. 자세히 어떤 죽음을 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로 끔찍하고 잔인한 결말이 쓰여졌겠지. 아니면 지금 쓰고 있거나, 아니면 슬럼프가 와서 마감이 다가와도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았거나. 그러다가 담당자가 찾아와서 으름장을...아니, 이건 너무 갔구나.”

 

“하아...이런 바보 같은 사람에게 내 미래가 걸렸다니...”

 

“바보 같은 사람이라니 바보에게 실례군.”

 

“바보에게 실례인가요...”

 

지쳤는지 태클도 밍밍하게 들어오는군. 즐거운 잡담은 이 정도로 끝내자. 어쨌든 바보에게 미안한 내 입은 다른 주제를 향해 나아갔다.

 

“어쨌든, 그런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해. 예를 들어 죽는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하지 않는다거나...”

 

“그거 영원히 죽는 거라니까요?”

 

“아니면, 진실을 덧씌우는 거지.”

 

“그런 능력은 당신에게 있어요?”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없는데...

 

“꼭 그럴 필요까지 있나? 말했잖아.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고, 예를 들자면...그래,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거나.”

 

분위기가 일그러졌다.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는 방법을 상상이라도 했겠지만, 레이베리아의 힘이 막강해서 그럴 수는 없었겠지. 애초에 여신 중에서 가장 강력해진 레이베리아의 힘이 깃든 각본을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일 터.

 

“그러니. 각본을 찢고 자유가 되면, 불안정한 운명 속에서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건...불가능해요. 다른 방법은 있나요?”

 

여전히 부정하는 리제로트. 그런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있지. 당연히. 최후를 맞이하는 거야. 여러 방법이 있으니까 잘 생각해봐.”

 

잠깐만?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리제로트는 날 악인 취급하고 있을까? 심각하게 경계를 하는 눈초리를 하면서도, 조심스레 작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이 제안한 것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뭐죠?”

 

“가장 높은 건 당연히...”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각본을 찢고 불태우는 일 밖에 없지.”

 

얼마나 자랑스럽게 말했는지 리제로트의 얼굴에 경악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정도였는데, 리제로트의 동요는 찻잔 하나를 깨먹고서야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거 레이베리아에게 직접 선전포고를 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물론 그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있어.”

 

“뭐죠?”

 

나지막하게 웃은 나는 지금쯤 리제로트의 옆머리로 슬쩍 손을 뻗었다.

 

“다, 당신 바보에요? 무, 무슨 짓을 하려고 점점 가까이 오는 거에요! 설마 소녀의 첫 키스라도 뺏을 작정으로...!

 

-파바박!

 

손에 따끔한 통증이 도사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손등에 박혀있는 샤프심이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꽂혀있는 상황.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어째서 너의 첫 키스를 가져가는 거냐? 지금 당장 살기를 품고 암살하려는 녀석부터 막아야지.

 

“내 한숨이 너의 말 때문에 가출해버렸잖아. 책임져.”

 

“채, 책임을 지라뇨!”

 

“어라? 카일 씨? 오순도순 대화를 하는 거 같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거에요?”

 

“암살하려던 녀석이 태연하게 내가 뭘 하는지부터 묻는 거냐? 그리고, 지금 리제로트를 죽이지는 마라.”

 

내 말에 어깨를 으슥이던 레인은 감정이 알 수 없는 가면으로 들이댔다. 그보다 그 가면은 언제까지 쓸 작정이냐? 지금 덥지도 않나?

 

“리제로트를 죽이지 말라는 그 말은 아직 그녀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인가요?”

 

“이용가치가 아니라 의뢰인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 누구의 의뢰를 받고 정상적으로 해결한 적은 있냐?”

 

“없죠.”

 

“그거 자랑 아니거든?”

 

가늠하기 어려운 녀석들은 꼭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뭐, 한번 잘 막아보세요? 어차피 피도 흘리지 않는 걸로 봐선, 카일 씨도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모양인데 말이죠?”

 

“뭐. 인정은 하지. 그래도...신은 아니잖아?”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은 있어도, 신의 영역에 돌입하는 인간은 없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선 레인과 어쩔 수 없이 한판 벌여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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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이라니!

내가 동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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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7

생리아의 성벽은 망치 소리로 가득했다. 인부들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손에서 손으로 돌을 날랐다. 발레트는 크레누와 함께 성벽 지도를 보며 공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지아니는 인부들과 성벽 틈새를 메꾸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아니의 초록 눈은 여전히 빛났고 삶을 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그는 순간을 받아들였고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해나갔다.
시간은 강물이 흐르듯이 흘렀고 몰타의 공기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새로운 날이 찾아왔고 움츠린 것이 피어났다. 대지는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모든 것은 지나갔고 또 시작되었다. 보키아는 성과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의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시칠리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발티는 갤리선으로 보내져 동생과 해후했다.
잠시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들자 나디아가 성벽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지아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동생을 마중나갔다. 사람들은 나디아를 반기며 하나 둘씩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었고 발레트도 그녀를 발견하고 성벽 지도를 접었다. 모두 둥글게 앉아 나디아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마셨다. 갓 구운 빵과 치즈 한 덩이에 미소는 저절로 번졌고 마음은 풍족해졌다. 발레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내리쬐는 강한 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태양 아래에서 먹는 점심은 너무나 달콤했다.
성벽 위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나디아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목 뒤로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갔다. 나디아는 지중해로 눈길을 돌렸다. 바다는 헤아릴 수 없이 넓었고 갤리선 한 대가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은빛의 바다는 잠자는 아기의 얼굴처럼 평온했다.
발레트와 나디아의 시선이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한곳에서 멈췄다. 두 사람의 눈길은 스케베라스산에 오래 머물렀다. 산은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었고 몰타를 든든히 지켜주고도 있었다. 몰타로 들어오는 배를 환영했고 떠나는 배를 배웅해 주기도 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품었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스케베라스는 몰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하늘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나디아는 집을 나서 좁은 골목을 걷고 걸어 광장에 다다랐다. 성 바울 성당은 빛을 받아 눈부신 색채를 발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서서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그녀의 눈길이 어느 한곳에 멈춰졌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보고 순간 놀란 듯 했지만 곧 미소를 되찾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나디아 앞에 선 남자는 모자를 벗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해를 등진 남자는 어린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나디아는 자신 앞에 나타난 안드레아를 보자 잠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광장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새소리와 분수대에서 흐르는 물 소리만이 그들의 귀에 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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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6

보키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얼굴 표정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릴라당의 방을 둘러보며 몇 마디 말을 했으나 얼핏 스치는 긴장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발레트가 방에 들어서자 보키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릴라당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발레트의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보키아의 눈이 놀란 듯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는 금새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고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보키아경, 누군지 알아 보시겠습니까?"
릴라당이 발티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키아는 비토를 보았으나 비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의 시종, 비토 발티입니다. 이틀 전, 오스만 정찰병과 함께 있다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릴라당이 보키아를 보며 말을 맺었다. 보키아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보키아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번, 비토 발티가 살람 메메드가 아니라고 증언하셨지요. 몰타의 안전이 걸린 중대한 일임에도 경은 첩자를 감싸 수사에 혼란을 주었습니다."
릴라당이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20년 동안 제 밑에 있던 사람을 내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두었기에 또다시 연루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보키아는 안쓰럽다는 듯 발티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키아는 인정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을 포장했지만 그는 철저히 이해득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보키아의 뻔한 답변에 릴라당과 발레트는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발레트는 방을 나갔고 보키아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방에 들어온 발레트를 보자마자 보키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부인!"
보키아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말을 계속 하지 못하고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부인,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릴라당이 정중한 태도로 의자를 권했다. 창백한 얼굴의 보키아 부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베일은 쓰고 있지 않았으나 검은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부인, 부군과 비토 발티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부인께서 알고 계신 전부를요."
발레트가 부인에게 말을 하자 보키아는 온몸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보키아 부인은 발레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개월 전이에요. 평소와 같이 성당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밖으로 나섰지요. 뜰에서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이 새벽에 누군가 싶었는데 남편과 비토였어요."
보키아 부인이 여기까지 말을 하자 보키아는 눈을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네가 살람 메메드라는 것을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첩자임을 증명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절대로 밝혀내지 못 해... 남편의 목소리였어요. 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남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발티는 그 후로 남편의 곁에 있지 않았어요. 집안일도 맡지 않았죠. 헌 옷을 입고 다녔고 남편에게 한 번씩 무언가를 보고했어요. 돈 후안경이 집에 초대되었을 때도 저녁 식사 중 남편에게 따로 보고를 했어요."
"에스파냐의 돈 후안경 말입니까?"
발레트가 물었다.
"네, 남편에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발티에게 무언가를 전해 듣고 다른 방으로 돈 후안경을 데리고 갔어요."
부인의 말이 끝나자 보키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눈밑은 파르르 떨렸고 입술은 어색하게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부인."
발레트는 큰 결심을 한 보키아 부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보키아 부인은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보키아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보키아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보키아 부인은 고개를 돌리더니 릴라당의 방을 나갔다.
"비토 발티를 아끼는 마음에 그의 정체를 묵인하였다는 경의 말은 믿기가 어렵군요."
릴라당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키아의 뒤에 섰다.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돈 후안은 그 계획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카를 5세의 측근이지요."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보키아는 릴라당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우리가 붙잡은 오스만 정찰병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오스만투르크의 병력과 함선 규모를 발티에게 전했다고 하더군요. 돈 후안경이 그 정보를 알고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발티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보키아는 더 이상은 못 듣겠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에스파냐를 비롯한 각국에서는 오스만의 동태를 항시 살피고 있습니다. 경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발티를 이용하여 오스만의 정보를 얻고자 했어요. 그 정보라면 에스파냐로 진출할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발티는 당신의 사익을 위해 이중첩자 노릇을 했던 겁니다."
발레트의 핵심을 찌르는 말에 보키아는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비토 발티가 흐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동생을 눈앞에 두고도 모른척 했었던 감정이 결여된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동생을 살려야 했어요... 동생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었습니다..."
마치 막혀있던 무언가가 뚫린 것처럼 한꺼번에 모든 것이 쏟아졌다.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발티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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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냥꾼

쥐들의 도시

 

또 하나가 죽었다. 죽음은 차례차례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이는 서서히 죽었고, 다른 이는 급히 숨이 넘어갔다. 죽음은 변칙적이어서 그들은 괴로웠다.
 쥐. 쥐 떼가 몰려와 곳곳에 파고들었다. 구석에, 틈바귀에, 저장소에, 우물에. 쥐들은 차츰 대담해져 치즈를 실은 수레나 과일 좌판에도 출몰했다. 사람의 눈에 띄이면서도 태연했다. 쥐들은, 차선책으로 풀어놓은 고양이를 물어죽였다. 새끼들은 쥐에게 몸피에서부터 상대가 되지 못했다. 쥐들은 늘어났고 죽음도 넘쳐났으나 시장은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사병들로 하여금 성문을 삼엄히 감시하도록 지시하고 저택의 문을 꽁꽁 잠근 뒤 엄격히 선별된 소수의 사람들에 한해 접근을 허락했다. 
 저잣거리를 떠돌며 종말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종말론자들은 곧 죽어 연설은 끊어졌지만, 다음 날이면 새로운 미친 자가 나와 같은 내용을 외쳤기에 끝나지 않을 노래 같았다. 시장은 그들마저 죽어 없어질 때까지 영원히 입을 다물겠다는 듯 잠잠했다. 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의 안위 뿐이었다. 
 도시는 고립되었다. 
오랜만에 저택을 찾아온 이는 왕의 특사도 구걸하러 온 거렁뱅이도 아니었다. 그가 걸어가자 덩치 큰 잿빛 쥐들이 꼬리를 흔들며 재빨리 흩어졌다. 가축과 사람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시체들은 파먹힌 과일처럼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는 그대로 걸어가 저택의 문을 두드렸고, 보초병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그는 병사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병사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렸다. 
 시장은 무엇이든지 불신했다. 불신이 그의 큰 자산이었다. 그는 무수한 사람을 배신하고 속여 재산과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타인 또한 믿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믿는 대상은 신이었다. 때문에 그는 갑작스레 등장한 이상한 청년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청년은 그가 본 인간들 중 단언컨대 새로운 유형이었다. 
"뭐야, 어떤 새끼가 저거 들여보냈어?"
시장은 대충 가운만 걸친 채 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그렇게 호통을 쳤는데 정작 쫓겨날 위기에 처한 청년은 여유로운 태도였다. 시장에게는 그 태도마저도 거슬렸다. 
"야, 저거 빨리 안 끌어내고 뭐해? 내 집에 웬 천한 광대 새끼를 들여보내다니 니들 제정신이야?"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시장을 막은 것은 순간적으로 눈앞을 휙, 스쳐간 커튼 같은 검붉은 형상이었다. 시장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유리잔이 손에서 맥없이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숴졌다. 고용인들이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그에게 다가와 고개를 받치고 입가에 액체를 흘러넣었다. 
"그동안 피로와 압박감이 심하셔서..."
한명이 조심스레 그렇게 말했고 시장은 흐려진 눈으로도 투명한 잔 너머에 비친 청년의 형상을 보았다. 언뜻 본 그것은 산불처럼 밝게 타오르며 일렁이는 샛노란 불길이었다. 잔이 입가에서 떨어지자, 청년은 이전과 다름없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시장님께서 보신 것은 헛것이 아닙니다."
검녹색 눈의 청년이 말했다.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붉은 장막을 보셨지요. 그는 쥐들의 제왕입니다. 쥐떼를 몰고 다니며 질병을 퍼뜨리는 악의 징조입니다."
"이런, 씨..."
시장은 이마를 쓸며 난색을 표했다.
"그게 지금 내 집에 들어온거야? 자네도 무슨 대책이 있으니까 날 보겠다고 한거 아냐.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들어줄테니 일단 날 살려주게. 난 여기 시장이야. 자네가 요구하는 건 전부 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저는 애초부터 그럴 목적으로 찾아왔으니까요."
청년은 거무스름한 얼굴을 숙여 그렇게 말하고는, 접견실에 저택의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하였다. 그가 펼친 것은 마법도, 의술도 아니었다. 음악이었다. 
 시장의 태도는 눈에 띄게 바뀌었다. 그는 시장의 권위에 걸맞는 의복을 갖추고는 즉시 성대한 연회를 베풀도록 지시했다. 
"내가 자네를 잘 몰라 실례를 했네. 도시를 질병으로 부터 구완해야 할 의무감과 부담감은 나날이 나를 짓밟고 갉아먹었다네. 그러나 이제 자네가 왔으니 나도 시민들도 한 시름 덜었네. 수많은 목숨이 자네 한 사람에게 달려있으니 모쪼록 최선을 다해주시게."
시장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 사람들이 무안해질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으나 눈으로는 줄곧 청년을 훑어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청년은 시장의 마음을 적잖이 풀어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쥐들을 밖으로 몰아냈으니 그들의 제왕은 힘을 잃고 쥐 떼를 좇아 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겁니다. 시장님의 저택은 당장에는 역병으로부터 무사할 것이나 바깥의 도시는 그렇지 못하지요. 제게 나흘의 기한을 주시면 도시 곳곳에 웅크린 병의 씨앗을 모두 제거하겠습니다."
 시장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청년이 쥐들을 모두 퇴치해주는 대가로 막대한 양의 돈을 요구했을 때도 기분좋게 승낙했다. 
 쥐들의 왕국에 구원자가 납시었다. 골목에서 광장까지, 그가 도시를 누비며 펼친 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기적이었다. 하잘것없는 피리 소리였을 뿐인데, 쥐들은 그 소리에 홀린 듯이 하릴없이 이끌려가다가 강가에 몸을 던졌다고, 그 광경을 목격한 이는 그렇게 말했다. 시민들은 단번에 찾아온 평화에 기뻤고 일견 얼떨떨했다. 그러나 쥐를 퇴치하는 대가로 시장이 그 이방인에게 천 냥이나 되는 금액을 지급하기로 약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시청 앞으로 몰려가 항의했다. 깨끗해진 광장에는 말쑥한 차림새의 시의원들과 시장이 엄숙히 서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소!"
한 남자가 그렇게 고함을 질렀다. 

"전염병 때문에 가축도 식량도 전부 동이 나버렸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판에 시장 당신은 우리의 목숨을 놓고 수상쩍은 떠돌이 외국인 하나에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버렸단 말이오? 우리가 언제까지 더 참아야 합니까?" 
 사람들은 비쩍 꼴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목놓아 시장의 탄핵을 외쳤으나 시장은 이를 타개할 간단한 대책을 세워놓았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쉬운 일을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검은 피부와 외지의 억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떠맡겨진 약속의 짐을 내던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일단 가장 쉬운 대책이 제안되자 그들은 만장일치의 동의를 보였는데 사뭇 오랜만의 일이었다. 시장은 조소 어린 거만한 자세로 청년에게 즉시 떠날 것을 명령했는데 쥐들이 사라진 거리는 깨끗이 닦여 윤기가 흘렀고 건물은 위용이 넘쳤다. 꾀죄죄한 아이들이 쥐처럼 빠르게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수레를 끌던 노인은 바퀴가 죽어 널부러진 돼지의 시체에 걸렸는데도 제자리에서 멈춰선 채 나아가지 않는 수레를 밀고 밀기만 했다. 
"좋은 경험으로 여기도록 해. 이 또한 신이 정하신 운명이니, 다음 번에는 조금 더 똑똑하게 행동하기를 바라겠네. 그 꼬라지로 와서 천 냥을 요구하다니, 그야말로 분수에 맞지 않는 요구 아니던가. 주제 파악을 하도록. 이만."
 시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고 경비병은 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청년은 시장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모습을 드러낸 시장은 커튼을 내려 청년의 시야를 막았다. 마치 배신을 기다려왔다는 듯, 숲의 가장 깊은 구역을 닮은 눈 속에 환한 불빛이 켜졌다. 모멸 당한 청년은 등을 돌리며 모자를 깊숙히 눌러 그 빛을 삼켰다. 도시의 씨는 모조리 말라 버릴 것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 어리고 약하고 무방비한 존재들은 쥐들이 그러했듯 정체불명의 음악에 이끌려 물가로 하나하나 춤추듯이 행진하다가 물 속으로 몸을 던질 것이었다. 
 사람들은 허둥지둥대다가, 전말을 알아차리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하늘을 저주하고, 자신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고, 이제는 사라진 이방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분노는 시장에게 향했다. 갓난아기를 제외한 아이란 아이는 모두 사라졌다. 골목의 거지에서부터 시장의 자식들까지 하룻밤만에 연기처럼 홀연히 증발했다. 시장은 자신도 같은 피해자일 뿐이고 시민들 모두가 이미 동의한 사안이 아니냐며 시민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분노로 눈먼 그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시장은 쥐의 비가 쏟아지는 꿈에 시달렸다. 쥐들이 쉴새없이 떨어져내리며 지붕과 바닥과 기둥에 부딪혔다. 쥐들은 금화를 갉아먹어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건물을 갉아먹고, 치즈와 사과를 갉아먹고, 사람을 갉아먹었다. 열 살 난 아들은 그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아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슬프게 뜬 채 시장을 바라보았다. 쥐들이 들불처럼 번져 아이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단 한번도 의도하지 않았다. 
 -전염병이 저주가 아니었어. 그 놈이 찾아왔던 게 저주였던거야. 쥐들의 출몰은 그 놈의 출현을 위한 전조에 불과했어!
시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창 너머 떠오른 달은 너무도 깨끗하게 보였다. 잿빛이라고는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날의 조용한 도시 속 사람들은 슬픔에 지쳐 미적거렸다. 시장은 이불을 제치고 숨겨왔던 상자를 꺼내 열었다. 칼날은 새것처럼 순정하게 빛났다. 그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죽거나, 청년이 죽거나 , 그 한 가지만 생각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일 없는 계획이었다. 오늘 밤에 끝낼 생각이었다.
 '너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나는 침묵을 원했지만 넌 그보다 더한 것을 빼앗아갔다. 쥐들은 사라졌지만 도시는 생기를 잃었다.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거였어. 네가 인간이든, 요정이든, 오늘 밤에 결판을 내야겠다. 그 이상한 음악으로 날 쥐새끼들처럼 만들어보라구.'
 시장은 청년이 찾아온 날 보았던 붉은 장막 같은 형체를 기억했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청년이 쥐의 왕이니 역병이니 했던 그것을 떠올리자, 무섭기는커녕 기묘한 쾌감을 동반한 저항 욕구가 솟았다. 가까이에 두면서도 결코 소중함을 몰랐던 보석이 휘발해버렸다. 그것이 사라진 이상 그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그 전에는 깨닫지 못했을까? 시장은 칼을 품 속에 감추고 검은 밤 사이를 내달렸다. 아무도 모르는 구멍을 빠져나왔을 때, 때모를 소나기가 내렸고 천둥이 으르렁댔다. 피부를 때리는 빗발의 소음 틈으로 찍찍대는 쥐 소리가 들렸다. 쥐들의 제왕은 창궐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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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5

발레트는 모래색 돌로 차곡차곡 올려진 건물 벽을 손끝으로 만지며 걷고 있었다. 처음 몰타에 발을 내딛던 날이 떠올랐다. 지중해 한가운데 솟은 작은 도시는 로도스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발레트는 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을 벽에 댔다. 차가운 기운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타로 들어왔고 자신도 그들과 같이 스쳐가는 한 사람일 뿐이지만 이 벽은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발레트는 모래색의 돌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뜻밖의 목소리에 시간은 현재로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자 영롱한 초록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디아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본래보다 밝게 보였다. 나디아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로 발레트에게 걸어왔다.
"나디아!"
발레트는 벽에 올렸던 손을 내려 허리춤에 찬 칼을 잡는 시늉을 했다.
"아침 일찍 어딜 가는 거에요?"
"성당에요."
나디아는 눈을 크게 뜨며 발레트를 보았다. 그녀는 발레트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눈으로 묻는 것 같았다.
"나도 성당에 가는 길이에요."
발레트는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손을 내밀어 나디아에게 길을 내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아침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갖고 있었다. 골목은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고 소리는 리듬이 되었다. 리듬에 따라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이따금씩 마추치는 시선은 미소를 불러왔다. 모퉁이를 돌자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은 빛에 의해 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건하고도 평화로웠다. 발레트는 알 수 없는 힘을 느끼며 광장으로 한걸음씩 내딛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아름다웠다.
"아침의 광장은 늘 황홀해요."
나디아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성당으로 향하는 똑같은 길이지만 그녀에게는 매순간이 특별했다. 발레트도 나디아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장 저 편으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숨이 멎을 만큼 경이로웠다. 두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 주위에 감탄하며 성 바울 성당으로 이끌려갔다.


성당 앞에는 며칠 전과 같이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발레트는 마차를 힐끗 보고는 나디아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성당 정문을 열고 들어서자 누군가와 얘기 중이던 피오르 신부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부 옆에는 검은 베일을 머리 위로 올린 여인이 있었다.
"오, 나디아."
피오르 신부는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베일을 쓴 여인은 발레트와 나디아를 보자 얼른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감추더니 신부에게 인사한 후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방금 지나간 여인은 보키아경의 부인이 아닙니까?"
발레트의 물음에 신부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발레트는 빠른 속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만!"
여인의 등 뒤로 발레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일을 쓴 여인은 뒤를 돌아보더니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보키아경에 관해 할 얘기가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보키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여인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발레트도 걸음을 늦췄다. 여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녀는 얼굴을 가렸던 베일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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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7

590

 

 

 

그나마 다행이라면 평생 여장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점. 결국 불행해지는 건 잡화점에 돌아오고 나서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찾아온 나의 거주지라는 것은 또 다른 태클의 시작이었으니까.

 

“주인은 짐의 저주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가? 흐응...짐에 대한 애정이 식었구나.”

 

“남에게 저주를 씌운 것이 어떻게 애정의 표현으로 될 수 있는지 서술해보시죠. 5점을 드릴 테니까.”

 

“1번이니라.”

 

“객관식 아니라고!”

 

애정이 식었네 뭐하네 하는 주제에, 결국 검은 고양이 상태로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레시아. 13대 마왕이고 타락의 마왕이면서, 결과적으로 내 사역마였으나 지금은 결혼을 했으니까 부부관계인데. 솔직히 어떤 부부가 남의 옷에 저주를 퍼붓냐고?

 

아마. 나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레시아의 입장에서는 나는 좋은 마나 창고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좋은 장난감 하나라고 취급하겠지.

 

“그렇군. 주인은 그 옷이 귀엽지 않아서 해주를 한 것이로군.”

 

“아니. 남자가 여장을 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이미 글러먹었다니까요.”

 

“뭐 아서라. 짐이 조만간 더 귀여운 옷으로 주인에게 선물할 테니 말이다.”

 

“아 글쎄! 여장 때문에 벗어 던진 거라니까요!”

 

이렇게 소리를 쳐도 레시아는 레시아 나름대로만 생각을 하는 중이다. 어깨 위에 올라온 하얀 올빼미는...

 

“마스터에게 입혀야 할 옷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여장이 아닙니다.”

 

“그래도 시나 밖에...”

 

“저처럼 하얀 날개를 단 천사복장을 해야 합니다.”

 

“도대체 너희들이 왜 그런 걸로 싸우는 건지 이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태세전환이 우디르를 넘어 드랙스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제발 나를 피곤하게 하지 말아줄래?”

 

잡화점 안에 돌아가도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 그래도 밖에서 골치 썩는 것 보단, 여유를 가지고 조그마한 트러블에 대응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잡화점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몸과 정신의 피로를 달래보려고 했으나, 어린 아이처럼 달라붙는 레시아와 시나에 의해 편하게 쉰다는 단어가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버렸다. 나중에 지구로 모여서 롤링발칸이라도...아니, 너무 갔으니 그만하자.

 

“뭐. 이렇게 하루 종일 붙어있게만 해준다면 여장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인기가 은근히 좋다. 아니, 좋아도 너무 좋다. 어째서 연관되는 사람들마다 주인을 원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저를 원하는 게 아니라 제가 일을 해결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건 사람의 호불호로 갈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와 위치가 어디인지부터 파악해야 하는 일이다. 잡화점의 주인은 기괴하게도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긴 하는데, 잡화점이라면 보통 진귀한 물건이나 대규모의 잡화물품을 의뢰 받는 건 줄 알았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해결사나 잡일을 처리하는 1회용 노동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그 규모가 매우 커서 그래도, 의뢰의 보상이 어째서인지 백장미의 매출을 못 따라가고 있는 아이러니함마저 의구심이 들기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뢰를 하기 위해 나를 지목하는 사람과 몬스터가 많이 있었다.

 

과거에 실베스 씨가 기괴한 청혼을 위해 도와달라는 말부터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할 거니까. 리제로트의 의뢰만 처리하고 돌아가죠.”

 

“그리고 그녀도 잡화점에 들어오는 겁니까? 마스터?”

 

“아니. 리제로트까지 과거로 데려갈 이유는 없지. 그런데, 지금 당장 레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찰서에서 풀려난 모양입니다. 이 세상에는 초능력자에 대해 인식을 하고 있지만, 레인의 경우에는 감춰주고 숨겨주는 자들이 있으니까요.”

 

다른 곳에서 아리엘이 터벅터벅하고 걸어왔다. 조금은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진 키가 크지 않은 상태. 아니...오히려...

 

“왜 키가 작은 거냐?”

 

“무슨 소리에요? 제 키는 원래부터 작았다고요? 아담한 사이즈를 좋아한다는 카일 씨의 성향에 맞춘 건 아니라고요?”

 

“듣기만 해도 오해 수치가 100정도 쌓일만한 발언은 그만둬라. 그리고 미묘하게 츤데레 캐릭터를 따라 하려고 들지도 말고. 너의 캐릭터는 애초에 뭔지 나조차 이해가 안 되니까.”

 

“전에는 마신을 한번 했었죠.”

 

“그런 거 말고!”

 

자주 못 봐서 그런 건지 몰라도, 사람이 성장을 한다면 키가 크고 있다는 걸 느껴야 하는데, 아리엘의 경우에는 키가 작은 건지 아니면 저게 성장한 건지 애매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보다 마왕님. 여신님. 제 자리가 없잖아요!”

 

“그보다 신랑. 내 자리는?”

 

루시피나는 요리하다 말고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내가 교제를 한다고 했을 때 정상적인 취급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늘씬한 미녀. 레드 드래곤의 일족임과 동시에 첫 혼인 대상자다.

 

어른스러운 면이라기보단 다정다감한 누나의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 평상시의 모습이고, 루시피나가 화를 낸다면 그것보다 더 살벌한 상황은 없다. 그나저나 내가 어쩌다가 이런 말이 들어야만 했을까? 아니, 그보다...

 

“모두가 그렇게 몰려오면 제 입장이 어떻겠어요?”

 

“행복하지 않는가?”

 

“행복이기 이전에 힘들다고요!”

 

모든 남자들이 그런걸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미녀나 미소녀들이 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달라붙는 상황이 현실로 찾아온다면, 사실상 좋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소리다. 최소 0.3초 동안 망설여지는 순간이 있는데, 과연 저 사람들이 다 달라붙으면 나는 숨이라도 쉴 수 있는가?

 

생존부터 걱정하는 내 입장에선 행복하기 이전에 살아 돌아갈 수 있느냐가 더 걱정이다.

 

“그래도 짐의 취급을 공기로 하는 것보다 좋지 않는가? 아니면 뭔가? 짐이 귀여운 여자아이가 되어 공기취급으로 되는 걸 원하는 것인가? 역시 주인은 은팔찌를 차야 하는 인물이로다.”

 

“아뇨. 언제 공기취급을 했는데요? 제가 레시아를 공기취급 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마스터. 저희들의 출현이 어째서 잘 일어나지 않는지 설명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희들이 그 기괴한 여장만 시키지 않았더라면, 나의 행적은 잡화점 내부로부터 시작했겠지!”

 

일어날 때 개운하게 일어나면서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평화로운 나날을 기리고 있다만, 요즘 들어 자고 있는데 계속해서 결계가 깨져나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부부인데 뭐가 문제냐고 말하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 초죽음 상태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늘도 눈을 떠보니 여장이 되어있었습니다. 라는 상황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야.”

 

“맞습니다. 마스터.”

 

“아니라고!”

 

하긴 이미 여긴 평범이라는 말이 치고 들어갈 수 없는 건가? 내 인생에 평범이라는 단어와는 더 이상 견우와 직녀마냥 만날 수 없는 건가? 아니, 만날 수는 있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실에 불과하나?

 

혹은 내가 평범에 도달할 수 없다는 진실을 가지고 있거나, 나는 평범할 수 있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말장난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결국 평범이라는 단어와 사이 좋게 지낼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한숨을 접어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주인에게 밀착하려는 자들이 많은가!”

 

“어째서긴요. 레시아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이 건에 대해선 정리가 필요하겠다!”

 

뭔가 또 난장판이 될 징조가 보인다. 안 그래도 리제로트의 의뢰를 빨리 해결하고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레시아가 저러면 의뢰는 과연 언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서 뭐 어쩌시려고요. 1주일마다 달라붙을 수 있는 사람들을 지정할 겁니까?”

 

“아니. 짐이 주인에게 달라붙어 있다면 상관이 없지만, 짐이 주인의 곁에 없을 때는 그 누구도 달라붙지 못하도록 하겠노라!”

 

너무 당당한 나머지 이 고양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못 알아 들을 지경이다.

 

“말도 안 됩니다. 냥캣. 그런 억지를 부리기 전에 냥캣의 인성을 다시 되돌아보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짐은 본래 마왕이니라!”

 

고양이와 올빼미가 또 한바탕 싸우고 있는 동안, 방 안에서 짜증나는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지 않는가! 모처럼 첩이 자고 있는데...어라? 카일이여! 언제 온 것이냐?”

 

성인이라고 보기엔 한참 힘든 외형이지만, 연한 초콜릿 피부를 가진 소녀는 사실상 어마어마한 신급의 카테고리로 들어간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을 무렵.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흔들의자가 더 뒤로 젖혀짐과 동시에 무게가 늘어났으니...

 

“아아.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 하지 않는가? 첩은 언제나 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빛 잠옷이라는 게 그리 귀엽지는 않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내 가슴팍에 파묻었다.

 

“자, 잠깐만! 허무의 공작! 짐이 보는 앞에서 주인에게 뛰어들다니!”

 

“어라? 아까 마왕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왕님께서 붙어계실 때는 그 누구도 상관없다고.”

 

“아직 개정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조만간 세린에게 찾아가 내 개인적인 방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그보다, 잡화점의 규칙에 개정하려는 건 아니겠지?

 

잡화점 규칙에 나에게 달라붙는 규칙을 적는다면 그거야 말로 골치 아픈 건 없지만, 애초에 주인은 나라서 내가 직접 개정하지 않는 이상, 그런 바보 같은 규칙은 늘어나지 않는다.

 

잠깐? 규칙이라?

 

“맞아! 규칙! 규칙을 개정하면 되는 일이었어!”

 

“마스터?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뜬금없는 나의 외침에 시나가 당황한 듯 묻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는 규칙을 바꿀 수 있으니 솔직히 내가 인간이든 아니든, 마지막 항목에서는 ‘어떤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에 인간을 뜻한다. 그러니까 저 어떤 사람이라는 말을 제대로 바꾸기만 하면, 내가 인간을 초월하든 말든, 잡화점의 주인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내가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려고 하길래, 다른 방법이 없는지 생각했는데, 그냥 잡화점의 규칙을 잠깐이나마 바꾸면 되는 거였어.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이 되었네. 이제 리제로트의 의뢰만 어떻게 해결하면 과거로 그냥 돌아가자고. 미래에 더 있는 건 위험하니 말이야.”

 

“그렇군요. 그런데 마스터.”

 

“응?”

 

“마리아와 얼마나 붙을 생각이십니까?”

 

사, 살기!?

 

작은 올빼미에게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이전에!”

 

나는 빠르게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안 그러면 레시아와 작정하고 또 다시 마법을 날릴 테니까.

 

“지금 나가서 할 일이 있어요.”

 

“안 된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랑을 증명해보거라!”

 

“뭘 증명해요!”

 

“그렇다면 사랑의 저주를...”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잖아!”

 

결과적으로 다시 저주받은 여장을 당하기 전에, 모두를 설득하는데 애쓰고 모두가 진정할 때쯤 시간은 흘러 새벽에 이르렀다. 언제나 규칙에 따라 잡화점 운영을 하고 있는 나는, 레시아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리제로트라는 자는 전에 주인을 납치한 자가 아니더냐? 그런데 이번엔 목숨을 구해줬으니 도와달라는 건가?”

 

“뭐. 그런 거라기보단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엘 샤다이를 말하는 건가?”

 

“괜찮아. 문제없어. 라는 대사를 하기 싫으니까 이상한 요소를 가져오지 마시죠.”

 

검은 고양이에서 가지런히 앉아있는 여성으로 변한 레시아. 지금 상태에서 정신방어가 약한 사람이 본다면 죽거나 심한 경우 침을 흘린다고 하는, 변칙적인 패시브를 지니고 있었으나, 잡화점 멤버에는 정신방어능력이 모두 뛰어났으니 발작을 일으킬 일은 없었다.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을 스윽 하고 쓸어 내리며 팔짱을 끼고 있는 마왕. 그러면서도 위압감이나 카리스마는 여김 없이 뿜어져 나왔다. 칠흑의 드레스로 무장된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

 

“그래도 그런 장비는 괜찮은가? 에서 그런 말장난은 괜찮은가?로 변환하면 써먹을 수 있지 않는가?”

 

는데...진지하게 생각한 것이 겨우 그거라는 생각에 내 자신이 화가 났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그런 생각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아뇨. 못써먹어요.”

 

“써먹을 수 있노라!”

 

어디까지 우기는 거냐.

 

“리제로트가 뭔가 꾸미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유랑극단이건 레인에게 암살당하던 둘 중 하나는 못 막을 거 같네요. 잡화점 안이 가장 안전하지만...”

 

“유랑극단의 신분이 있으니 이쪽에서 보호하는 것은 무리로군.”

 

분명 또 “주인은 어린아이가 그렇게도 좋은가!”라고 말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내가 기대한대로 정확한 포인트를 짚어서 레시아가 대답했다.

 

“맞아요. 지금 상황에선 유랑극단과 선전포고를 한 이상. 리제로트를 통해 이곳의 위치가 들킬 수 있어요. 기껏 가짜 좌표를 깔아놔도 포위망이 좁아지는 판국에, 트로이목마처럼 들어오는 날엔 끔찍한 경험을 하겠죠.”

 

“맞다. 그 뼈다귀 샌...”

 

“제발 부탁인데 그 이상 다른 요소를 가져오면 아이언 클로부터 날릴 겁니다. 그러니 그만하시죠.”

 

진지한 이야기에 ‘골’판지 같은 개그가 나오면 진심으로 때릴 테다.

진정한 양성평등주의자는 여자에게도 드롭킥을 선사할 수 있는 신사이지 않는가?

맞을 짓을 하려고 매를 벌면 사랑의 매로 다독거리면 된다. 물론 그 사랑의 매가 아이언 클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마스터.”

 

눈빛보다 더 새하얀 소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시나? 자고 있는 중 아니었어?”

 

“이야기 소리가 들려서 깼습니다.”

 

분명 잠이 많긴 하지만, 새벽에 이야기 소리가 시끄러워서 깨어날 줄은 몰랐다. 언제나 내 몸 속에서 동화를 한 체 휴식을 취하지만, 지금 이렇게 나오는 경우는 전혀 없을 텐데.

 

“흥! 그대로 영원히 자고 있지 그런가? 비둘기.”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 입니다. 냥캣.”

 

“어쨌든간! 지금은 주인과 짐의 사랑의 밀담을 하고 있지 않는가! 방해가 되니 저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자기나 하거라!”

 

“제가 눈을 감는 장소는 언제나 마스터의 품입니다. 이렇게 꼬옥하고 안으면 언제든지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습니다.”

 

정신차려보니 언제부턴가 나에게 안겨서 하품을 하는 시나.

 

“잠깐! 언제부터 나에게 안겨 있는 거야?”

 

“주인!”

 

“아니! 잠깐만! 이상해! 킹 크림존이 있는 거 같아요! 지금 시나가 저에게 안기는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만 남았잖아요!”

 

진노하는 레시아를 진정시키려면 얼마 동안의 노력이 필요할까? 한줄기의 희망은 있는 걸까? 음...이때는...

 

“레시아도 오시던가요...”

 

-꼬옥

 

“비어있는 반은 짐의 자리니 넘보지 말거라.”

 

“냥캣이야 말로 제 영토를 침범하지 마시죠.”

 

이제서야 저 둘을 어느 정도 다루는 요령이 생기는 듯했다.

 

“정해진 운명을 부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자연의 순리대로 맞춰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운명을 부수고 다른 미래를 새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이 자연의 순리대로 맞춰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지요.”

 

레시아와 시나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마왕과 여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갈등되는 고민 속에 천사와 악마가 싸우는 듯한 모습과는 달리, 신비로운 운명론에 대한 무거운 분위기만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주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스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사람의 질문은 하나로 뭉쳐졌다.

 

“모르죠. 저야.”

 

내가 어찌 알겠나?

 

“어쩌다가 운명이 부셔진 것마저 운명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운명이란 건 생각하지도 않아요. 원인과 결과와 나비효과가 겹쳐진 게 운명이라고 해도, 솔직히 그게 운명인지 아닌지는 알게 뭡니까? 막말로 제가 다른 세계에서는 레시아와 대적관계가 되었을 때도 레시아가 지던 이기던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된다. 주인을 이겨서 짐에게 복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대화의 취지는 운명 같은 거 생각하지 말자라는 거고! 어째서 저를 복종시키는 건데요!”

 

딴 이야기로 빠져나가는 게 마왕의 일인가?

 

“그때는 제가 마스터에게 가호를 내리고 있을 테니, 냥캣은 소멸이나 당하시는 게 편할 겁니다.”

 

뭐...다른 세계에서도 레시아와 시나는 싸우는구나.

애초에 존재 할 일이 없는 세계일 터인데...

 

“서로 싸우지 말고 각자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세요.”

 

“주인의 품이 짐의 방이다! 여기서 자겠다!”

“마스터가 계신 곳이 제 휴식처이니 이 상태로 잠을 청하겠습니다.”

 

잡화점을 운영해야 하는데 자장가부터 불러주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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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축구 때문에 일찍 퇴근하고 써내렸다가 지금 올립니다.

꽤 늦었는데...원인은 당연히 일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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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4

발티는 항구 일꾼으로부터 전갈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글을 빠르게 읽은 후 순식간에 종이를 입안으로 넣어 삼켜버렸다. 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뜰을 가로질러 나갔다.
도시에 어둠이 스며들었다. 인적이 없는 컴컴한 길에 허름한 복장의 발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어느 골목에 들어가 막다른 길에 접어들었다. 누군가 그의 등을 건드리자 발티는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돌았다. 몰타인처럼 변복을 한 투르크 정찰병이 입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뜻을 보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오? 연락은 내쪽에서 하기로 했잖소."
발티는 목소리를 낮추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정찰병은 다시 한번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대답했다.
"중요하게 전달할 사항이 있어 만나자고 했소. 급한 일이오."
검은 눈의 남자가 심각하게 말하자 발티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요?"
정찰병은 숨을 밖으로 길게 내보내며 눈을 내리깔았다.
"일이 생기..."
정찰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티의 어깨가 뒤로 젖혀지며 팔이 꺾였다. 발티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며 당황해 했으나 이내 상황이 파악된 듯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발티는 변복을 한 검은 눈의 사내를 쳐다보고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순순히 기사들을 따라 좁은 골목을 걸어갔다.

 

 

릴라당과 발레트는 서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정적을 깨고 로메가스가 들어와 릴라당에게 보고를 했다.
"단장님,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게."
릴라당이 대답하자마자 기사 두 명이 발티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 방으로 들어섰다. 발티는 손이 앞으로 묶인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발레트는 발티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토 발티, 아니 살람 메메드. 넌 몰타 첩자로 체포되었다."
릴라당이 입을 열었다. 발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발레트는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소. 난 현장에서 잡혔소."
발티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대답했다.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을 숨긴 텅 빈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상대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비토 발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군."
발레트는 발티 앞에 섰다. 발티는 발레트를 보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너의 신분을 보키아는 왜 숨겨준 거지?"
발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끝난 것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끝을 알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후련했다. 발티는 자신 앞에 놓여질 것을 이제 당당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발레트는 릴라당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릴라당은 내보내라는 눈짓을 했고 로메가스는 발티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예상대로 발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
릴라당은 의자에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정입니다. 보키아가 연관된 것은 끝까지 말하지 않을 겁니다."
릴라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키아는 발티가 첩자임을 알고서도 감춰 주었고 사욕을 위해 그를 이용했어. 이 일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보키아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가 꼼짝할 수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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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인스턴트 맨

 

 

 

  퇴근 후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차키를 집어드는 것. 군더더기 없는 몸짓과 함께 그대로 자신과 어딘가 묘하게 닮은 차에 올라타 미끄덩, 30분을 달려 그가 도착한 목적지는 편의점이었다. 익숙하다는 듯 레토르트 식품을 넣어둔 곳으로 직행, 몇 개 남지 않은 도시락 중 가장 가성비가 좋은 걸 골라 망설임 없이 계산대로 향했다.

 

 마흔을 목전에 둔 나이지만 아직은 삼십 대, 대기업 근무, 본인 명의 20평형대 아파트 보유, 큰 키, 서글서글한 외모, B** n시리즈의 자차 소유, 호탕한 성격. 다른 사람들 말에는 그냥 웃어넘기거나 혹은 변변치 않은 핑계를 대곤 했으나, 그는 사실 자신이 왜 여태껏 혼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의 직장 동료나 같은 나이의 인간들과는 달리 꽤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감성적이니까, 그러니 감수성이 넘쳐흐르는 나는 따라서 여자들에게도 꽤 괜찮은 대화 파트너가 될 수 있을 텐데. 솔직히 말해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면, 그는 여자를 만난 경험도 제법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일정 수준의 시간에 도달하면 이별이 찾아왔다. 분명히 좋아하는데, 어쩌면 사랑하는 것도 같은데, 꼭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나게 되는 그였다. 도통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연애도 결혼도 너무 큰 과제처럼 느껴졌다.

 

 2025년 6월 어느 날, 그는 TV에서 놀라운 소식 하나를 들었다. 지난 해 체결된 ‘보어링협약 Boring Convention’에 따라 내달부터 사랑이 전면 금지된다는 것. 보어링협약의 정식 명칭은 ‘인류의 편안한 삶을 위한 정서 조절에 관한 협약’이며, 2024년 6월 18일 미국 오리건 주의 Boring이라는 도시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간편하게 보어링협약이라 부른다 했다. 협약에 참여한 168개국 국민들에게 7월 1일부터 내장형 칩이 무상으로 제공되며, 삽입 즉시 효과가 발동될 거란다. 그는 한 국가나 국제사회가 중대 사항에 대해 무언가 결정을 내릴 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지내온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규율과 질서를 군말 없이 잘 지키는 편에 속했고, 그래서 ‘법 없이도 잘 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곤 했다. 그런 그가 이번 보도를 접하고는, 처음으로 큰 혼란을 느꼈다. 사랑이 금지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잘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류를 거부한다는 건 그에게 더더욱 상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도 다음 날 저녁부터 그의 퇴근 시간이 당초보다 1시간가량 늦어지기 시작했다. 거리가 촛불을 든 인파로 넘실댔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집에 들어와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포털사이트에 접속해도 온라인 사이트에는 포스트잇을 붙이는 유저들의 자취가 줄을 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어링협약에 반발하는 것 같았다. 그는 광화문을 지나며 마주친 ‘인간실격’이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인간다움이라는 게 뭘까. 사실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생각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으므로.

 

 7월 1일, 등기로 배달된 내장형 마이크로 칩을 삽입했다. 우리 집 강아지랑 똑같네, 칩을 넣으며 껄껄 웃는 부장님의 옆모습이 왠지 불량식품을 삼킨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는 꽤 설렜다. 언제나 시대는 변한다. 그리고 시대정신을 따르지 못하면 도태된다. 나는 이번에도 도태되지 않을 것이다.

 

 석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가 오가는 길 위에는 NO를 외치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 시위가 언제 끝날까, 길이 너무 막히는데. 내년에 완공된다는 새 도로를 타고 속도를 올리는 상상을 해본다. 기분이 나아진다. 칩을 장착한 뒤 그는 오히려 좋아하는 것이 더 많아졌다. 아마도 몸속에서 좋음의 정서가 과잉 반응하는 걸 예방하는 대신 다양한 대상을 애호할 수 있도록 분배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확실히 사랑이 없는 세계는 더 안락한 듯 보였다. 심장을 뒤틀리게 할 만큼 큰 감정소비가 사라지니, 연인이 되는 일부터 시작해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개별 사건들이 속속 타결되니 생활 자체가 간략해졌다. 인생을 복잡하게 하는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이 걷어지니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건조하면서도 평화로운 시간이 지속되었다. 그는 인스턴트 음식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것이 인류의 건강을 크게 해칠 거라며 호언장담했던 전문가들의 근심 어린 얼굴을 떠올렸다. 어느새 자기 삶의 영역에서 인스턴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높아져있음을 눈치챘지만,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그는 퇴근 후 1시간을 달려 새로운 연인에게 향한다. 이번에는 왠지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다. 이제 “너무 아픈 사랑은 하지 말자”며 연애에 억지로 한계선을 그을 필요도 없다. 아마 곧 자신과 많이 닮은 그녀와 결혼해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매끈한 검정색 자동차가 촛불을 뒤로 하고 도로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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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사냥꾼

Echoes in the box

폐허에는 유령들이 맴돌았다. 무너진 건물의 구석진 방에도 유령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재난으로 갑작스레 벗어난 혼들이었다. 땅으로 푹 꺼지던가, 하늘로 휘발되듯이 날아가버리던가 했어야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었기에 같은 자리를 공허하게 돌았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죽지 못한 말들이었다. 살해당하지 못한 언어들의 망령이었다. 그들이 지껄이는 말은 거대한 원통형의 세계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안에는 푹신푹신하고 꿈틀거리는 붉은 주름들이 가득한 점막이 자리했다. 망령들은 그 위에 떠다니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의식은 죽었지만 언어는 살해당하지 못했다.
세계는 가끔 흔들렸다. 망령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제자리를 맴돌며 같은 말만 뇌까렸다. 그들은 진동 만을 느꼈으나 의식 너머로 그것은 맥없이 흘러갔다. 하늘에는 흰 구멍이 열렸다 닫혔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그 정경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하늘 너머, 세상의 밖까지 흘려갔다. 때로는 선명히 울려퍼지기도 했다. 어떤 망령은 그 이변을 깨닫고 몸부림쳤다. 목소리는 더욱 선명해졌고, 커졌다. 점막이 꿈틀댔다. 유령들의 메아리는 거세졌다.
 그들이 입을 모아 고함치기 전까지, 세상의 주인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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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3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는 바쁜 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성 바울 대성당으로 향했다. 앳된 얼굴의 수사는 앞장서서 긴 복도 끝에 있는 피오르 신부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신부는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들 오시오."
발레트와 로메가스는 예의를 갖추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오르 신부는 앉으라 권하며 발레트와 로메가스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기사단이 무슨 일로 날 찾아왔는지?"
발레트는 피오르 신부의 얼굴을 바로보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몰타의 안전을 위협하는 자가 몰타 내부에 있습니다."
신부는 발레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발레트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자는 사익을 위해서 옳지 않은 일을 묵과하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신부는 발레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단서가 있지 않을까하여 신부님을 찾아 왔습니다. 자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몰타를 위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혹시 이것과 관련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신지요?"
발레트는 조심스레 신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피오르 신부는 만났을 때와 같은 온화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이곳은 주님의 성전입니다. 그런 것과 관련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이것에 관해 알고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신부님!"
발레트는 간곡한 말투로 피오르 신부에게 청했다.
"주님께 고백하는 것이지 내게 하는 것이 아니오. 미안하지만 부탁을 들어줄 수 없소."
피오르 신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발레트는 신부에게서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신부에게 인사를 한 후 뒤를 돌아 나가려했다. 그때 피오르 신부의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은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주신다오."

 


발레트는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밤을 꼬박 새우고 동이 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이 상한 자. 신부가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발레트는 신부의 말을 곱씹었다. 신부는 뒤돌아 나가려는 발레트에게 이 말을 했다. 그의 머리 속에 신부가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신부가 무엇을 알려주려던 것은 아닐까?'
그는 복잡한 생각을 쫓고 싶었다.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발레트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기사단 숙소를 나섰다.
성당 앞에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성당 정문이 열리자 발레트는 반사적으로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피오르 신부가 나타났고 그 뒤로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정문 앞에서 짧은 얘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베일을 쓴 여인은 계단을 내려가 대기하던 마차에 올랐다.
'이른 시간에 성당을 찾은 귀족 여인이라.'
마차는 광장을 돌아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임디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보키아의 성채로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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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2

파도는 끊임없이 해안과 숨바꼭질을 했다. 나디아는 맨발로 파도와 장난을 치며 까르르거렸다. 지아니는 모래 위에 앉아 천진난만한 동생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꿈꾸던 것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지아니에게 하루하루는 기적과 같았다. 지난 5년은 이미 파도에 실려 머나먼 곳으로 떠나갔다. 과거는 그들의 일부분이 되었고 두 사람은 현재에 있었다.
나디아는 밝은 얼굴로 뛰어와 그대로 모래 위에 팔을 뻗고 누웠다. 다른 이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녀의 눈은 세상을 향해 있었고 그녀의 웃음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디아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코로 가득 들어온 상쾌한 공기는 몸 구석구석을 쓸고 내려갔다.
"누워서 하늘을 봐, 오빠!"
나디아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아니는 아이 같은 나디아의 행동에 소리내어 웃다가 동생을 따라 모래 위에 누워 보았다. 파란 하늘에는 다양한 형태의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하늘을 이렇게 오랫동안 보는 것이 얼마만이던가.'
폭신한 구름 위에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아니는 나디아처럼 눈을 감아 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그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팔과 다리는 전보다 강해졌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지아니는 일어나 앞을 항해 달렸다. 그리고 은빛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파도를 넘어 계속 나아갔다. 한참이나 전력을 다해 헤엄치던 그는 편안히 누워 파도에 몸을 맡겼다. 지아니는 지금 이 순간 자유로웠고 삶에 온전히 취해 있었다.

 

 

크레누의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새어 나왔다. 식욕을 돋구는 양고기 냄새는 집안 전체에 풍겼고 로메가스는 탁월한 식성을 자랑하며 음식을 비워내고 있었다. 크레누는 로메가스에게 음식을 더 권했고 발레트는 자신의 고기를 덜어 로메가스의 접시에 놓았다. 무사히 돌아온 발레트와 로메가스, 지아니를 위해 마련된 저녁 식사 자리였다. 나디아의 웃는 얼굴을 보며 크레누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무사히 돌아와주어 고맙소."
크레누는 포도주 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그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자식 같은 네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발레트는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 나디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나디아는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빌구 공사를 잘 마무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생리아도 공사가 시작되었지요?"
크레누는 발레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리아는 빌구보다 더 일찍 끝낼 수 있을거요."
"지아니도 현장에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좀 더 쉬어야 하는건 아닌지."
발레트가 지아니의 건강을 염려하며 말했다. 지아니는 몸이 회복되자 크레누의 일을 돕고 있었다.
"나디아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지아니는 옆에 앉은 나디아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발레트는 나란히 앉은 지아니와 나디아를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짙은 갈색머리와 초록빛의 눈동자, 두 사람은 누가봐도 남매라고 생각할 만큼 닮은 모습이었다. 문득 만남이라는 강력한 연결에 발레트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순간 발레트는 자신이 왜 몰타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스만투르크로부터 기독교를 수호하겠다는 것도, 신께 한 맹세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도, 기사단의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미소, 서로를 향해 짓는 웃음을 위해서였다. 거창한 대의가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몰타에 있는 것이었다. 발레트는 식탁에 둘러 앉은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 함께하는 시간을 진심으로 즐거워했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눈속에 가득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로메가스가 무언가를 말하자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포도주는 향기로웠고 웃음소리는 노래가 되었다.
나디아는 지금 이 순간에 감사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며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나누는 시간. 나디아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함께 하는 시간, 나디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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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6

589

 

 

 

시공간이동을 자유자재로 하는 사람이 나 이외에 하나 더 있긴 했다. 아니, 내 경우에는 원하지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휘말린 거고, 이전에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것은 티아의 도움으로 간 것. 하지만 지금의 켈모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로 찾아온 것이다. 당연히 놀러 온 이유는 아닐 것이고, 지금의 나에게 볼일이 있어서 다가 온 거 같은데...

 

“세상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나와 같은 사람. 그리고 나 같지 않은 사람‘들’”

 

“꼭 거기에 강조할 필요가 있나? 그보다 내가 알고 있는 켈모리아와는 다른 나이인 거 같은데?”

 

켈모리아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강조했다. 그보다 저 모습은 몇 살이지?

 

“숙녀의 나이를 물을 셈이야? 아무리 귀엽다고 한들 여자의 비밀을 쉽게 알려고 해선 안 되지. 안 그래?”

 

도대체 왜 이런 녀석과 그 저주받을 보드게임을 한 거야? 그 전에, 내가 만났던 켈모리아와는 나이가 좀 달라 보인 이유라고 한다면...

 

“확실히 나이는 그쪽이 만난 것보다 더 어리긴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거야말로 자네가 쓸 때 없이 미래에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차원이 합쳐지려는 영향 때문이야.”

 

“그럼 너는 평행세계에서 온 켈모리아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방금 전에 봤던 이비도 평행세계의 이비. 모두 다른 선택지를 하여 이곳까지 온 존재들이야.”

 

다른 선택지?

 

“그럼 너는 평행세계에서 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켈모리아는 화사한 웃음이 태양빛에 반사되었다. 보통 저런 웃음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사심이 가득한 분위기가 켈모리아 몸 주변에서 오러처럼 퍼지고 있으니...

 

“뭐. 그렇지. 내가 있는 세계에서는 카일이란 남자는 없어.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거든.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까 자네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들기 시작하는데, 그게 그 옷의 저주인가? 아니면 자네가 귀여운 건가.”

 

“옷의 저주야. 100% 옷의 저주네. 저주에 오염되기 전에 지금 당장 이 옷에 있는 저주를 풀어주면 맨 정신으로 돌아오겠지. 나도 다른 사람들이 저주로부터 오염되는 걸 피하기 위함인데, 역시 나는 의로운 일에 움직이는 남자야. 그렇지 않아?”

 

남자라는 말을 강조한 이유는 부디 내 성 정체성이 남자라는 것이야 말로, 평행세계에서 온 켈모리아가 제대로 인식해주길 바람이었다. 남자가 여장을 하는데 그 여장이 더 잘 어울려서 여자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는가? 특정 조건이 붙어서 꼭 여장을 해야 메리트가 있다면 모를까...지금 내 모습은 저주받을 백장미의 양산만 가속화하는 경우가 되니.

 

“해주를 한다면 그 마법진 위에 올라와. 릴리스에게는 이미 들어놨으니 자네가 오기 전까지 준비하고 있었거든.”

 

“내가 오기 전까지?”

 

“나는 마법에 있어선 모든 걸 통달한 마법사. 제 2의 엘티노스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그건 네 자칭이잖아.”

 

“그래도 엘티노스 이외에 마법에 대해 모든 걸 꿰뚫은 사람은 나 밖에 없어. 애초에 내 앞에 있는 남자는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일보 직전이고...시공간술사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래도 자네는...아니, 이 이야기는 나중에 미루도록 하지.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시간이 없다고?”

 

“내가 있는 세계의 아리엘은 너무 어리광을 부려서...3시간동안 나를 한번이라도 만나지 못하면, 나를 찾겠다고 카멜롯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대니까.”

 

어리광을 부리는 아리엘이라. 얼마나 심하길래 카멜롯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거지?

 

“그 아이. 그쪽 세계에서는 어때?”

 

“이쪽에는 장래에 어둠이 드리울만한 은근 사디스트 종류로 진화 중이다.”

 

“그런가? 자네도 고생이 많겠군. 뭐 나야 귀여운 아이들이 주변에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지만.”

 

귀여운 아이들이 주변에 있으면 오히려 힘들지 않을까? 마음 고생이 많이 심할 거 같은데. 결국 마법진 안에 들어온 나는 켈모리아의 박수 소리와 함께 모든 옷이 날아가기 시작...

 

“야! 잠깐만! 모든 옷이 싹 다 날아간다는 말은 없었잖아!”

 

모든 옷이 날아가버려서 급하게 한쪽 팔로 가리고, 다른 팔은 거대한 천을 만들어 감쌌다. 이럴 때야말로 편리한 창조에너지라고 말하고 싶으나...아직까지 동요한 마음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네는 여장을 하기 싫어서 해주 한다고 들었다만? 그렇게 강력한 저주가 담긴 옷을 하나하나 해주를 하고 벗는 건 시간낭비라고? 그러니 한꺼번에 태워버려서 날려버리는 게...”

 

“나는 수지침이 없는 줄 아냐!”

 

“수치심이겠지. 그리고 자네의 몸을 관찰해야 할 만한 일이 생겼다네.”

 

“관찰?”

 

어느 사이에 내 등 뒤로 공간이동을 한 켈모리아. 그리고는 이리저리 옮기면서 나를 바라보는데...

 

“환생이야?”

 

“내가 틈만 나면 트럭에 치여서 죽는 줄 알아? 환생하는 대부분이 사고로 죽어서 환생한다고 하지만, 내 경우에는 환생이 아니라 무한 루프에서 다른 선택지를 고른 거야. 그런데 그건 왜?”

 

“증상을 알아야 치료를 할 수 있으니까. 자네가 지닌 신격화는 결국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리니, 그걸 또 조사해 봐달라는 의뢰가 있었다. 비록 이런 허름한 구두점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애석하게도 자네가 인간을 벗어나는 일은...그게 ‘운명’이라고 보면 되겠지.”

 

“운명? 결국 나는 신이 된다는 거야?”

 

“맞아. 잡화점을 떠나야 한다는 소리야. 그래도 걱정은 하지 말도록. 지금 잡화점의 주인은 자네니까.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

 

“정말 희망찬 설교로군.”

 

평행세계에서 잠깐 넘어온 켈모리아는 그나마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내가 카멜롯에 방문했던 켈모리아는 아직까지 충동적으로 해결하려는 어린애 같은 성격 덕분에, 결국 일이 비틀어져서 적대를 하고 말았고, 결국 황혼<Dusk>로 인해 마법의 근본을 날려버렸다.

 

과거를 잠깐 떠올리던 머리를 뿌리치고 이제 내가 궁금해 하는 걸 물어보자.

 

“그런데 그 평행세계의 카일이 없다는 건. 내가 죽었다는 의미야?”

 

자신의 안경을 치켜세운 켈모리아는 눈웃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어느 평행세계를 다 뒤져봤지만...없었어. 아마, 이곳만 유일하게 네가 살아남은 세계겠지.”

 

“이곳이 유일하게 내가 살아남은 세계라...”

 

다른 평행차원의 카일들은 뭘 한 거냐! 가위바위보에서 지기라도 한 건가?

 

“대부분 카일이 아니라 ‘카린’이라는 이름의 여성체들이니까.”

 

“왠지 그거 내가 돌연변이 같잖아. 그 이전에 이곳에서 수많은 남성체 카일이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둬! 잠깐만, 따지고 보면 유일하게 내가 남성체로 현재 진행중인 카일인가? 머리가 느닷없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잖아! 다 너 때문이야!”

 

카일이라는 남자가 없다는 말은 아마 잘못된 사실이고, 다른 평행세계에는 카린이라는 여성체가 많다는 의미겠지. 그게 무슨 시스터즈도 아니고? 레벨 올리는 강화재료로 쓰이는 것도 아니잖아.

 

“그 중에 60%정도는 엘티노스와 결혼에 성공했지.”

 

“듣자 듣자 하니 쇼킹한 사실만 계속 내뱉는데, 그런 암울한 평행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켈모리아는 입을 가려서 웃었다.

요염한 웃음에 느끼는 감정은 짜증이었지만...

 

“아무튼 해주는 끝났고 갈아입을 옷은 다 갈아입은 거 같은데?”

 

“아니.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옷이 자동으로 입혀주는 줄 알아? 네가 여태껏 뒤를 돌아보지 않으니까 내가 옷을 입지 못하는 거 아냐?”

 

“부끄러워?”

 

“시끄러워!”

 

옆에 릴리스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고 있어서 더 거부감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난장판이지? 어쩔 수 없이 옷을 입긴 하지만, 주변에 마법방패<Magic Shield>를 방벽처럼 쌓았다. 언제나 기초에서 응용하는 내 사고방식은 벽을 만들면 편할 텐데, 굳이 저렇게 다중으로 소환해서 쓸 때 없이 낭비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도 투시할 수 있으니까 상관은 없는데?”

 

“제발 너는 고개 좀 돌려!”

 

켈모리아에게 소리치며 빨리빨리 입었다. 릴리스는...뭐. 그래...어차피 갈 때로 간 사이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어차피 사라지라고 해도 환영마법이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녀석이니까.

 

-스윽. 스으윽.

 

“호오~”

 

“너 진짜 엿보는 거면 아이언 클로가 튀어나오는 거니 조심해라.”

 

“자네는 이런 아름다운 미녀에게 폭력을 휘두를 셈인가? 야만적이지 않는가?”

 

“너는 지금 남자의 여린 몸을 탐닉하면서 음흉하게 웃고 있을 거냐? 오히려 네가 죄를 더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괜찮다. 자네는 남자이지 않는가? 여장을 했을 때가 더 부끄러워야 하는 것 아닌가?”

 

남자라고 해서 수치심이 없는 게 아니라고! 부끄러운 거에 뭐가 더 부끄럽고 아니고가 어디 있는가? 한결 같이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다. 머리 맞는 거와 배 맞는 게 어느 쪽이 더 아프냐고 물어보면, 오히려 ‘맞으면 다 아프다.’라는 대답이 정상적으로 나와야지.

 

“조만간 너는 성범죄로 끌려가게 될 거야.”

 

“자네야 말로 조심하는 게 좋지. 자네의 주변에는 어린 아이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건 잡화점 멤버 일부가 멋대로 변신하는 거고! 실제로 내 취향은 어린아이가 아니란 말이다! 은팔찌가 내 손목에 걸리기 전에 너도 잡혀갈 거다!”

 

이른바 “저 사람도 나쁜 사람이에요!”라는 물귀신 작전으로 말이지.

 

“농담은 이쯤 하면 되나.”

 

켈모리아의 한 마디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분위기를 밥상 뒤집듯이 바꿔버리는 켈모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평행세계가 사라지던 말던 나는 상관이 없지만, 모든 평행세계가 사라지고 나면 끝이 날까?”

 

켈모리아의 질문이 날아와 내 머리를 때렸다. 모든 것의 끝이 있다면 또 다시 모든 것의 시작이 있을까? 한 때,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내 의견을 듣고 싶은 거냐?”

 

“물론.”

 

“정답은 나도 모른다야. 내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지금 당장 엘티노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겠고...시나도 어느 순간 자신이 존재하여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니까. 시나에게 물어봐도 잘 모른다고 하겠지.

 

“그렇다면 자네가 알게 될지도 몰라. 창조주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으니, 결국 모든 것이 사라져도 자네가 재창세를 할 테니까. 세상을 창조하면서 시공간의 개념이 생기면, 그에 따른 평행세계는 또 다시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갈 거야.”

 

“모든 세계가 끝장이 난다고 해도 너는 태평하군?”

 

“당연하지. 어차피 이대로 살다 끝날 것이 아닐 텐데.”

 

“마치 내가 이 일을 해결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내가 해결 할 일은 리제로트의 의뢰다.

 

“그 아이가 말했잖아. 자신의 운명을 바꿔달라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까?”

 

정해진 운명을 먼저 알아야 회피를 하던 말던 하지.

 

“왠지 모르게 리제로트의 운명을 알아내려면 심하게 고생해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든다만?”

 

“그래도 의뢰를 받았으니 굴러야 하겠지?”

 

제길.

어째서 나는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걸까?

그냥 태어난 의미가 굴러다니는 돌보다 더 심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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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은 쉬고 싶은데...

일이 바쁘니 또 못 쉬는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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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사람

순서

이어폰을 달고 밤거리를 걸었다. 주황색 가로등을 따라 터벅터벅. 어렴풋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가 뒤죽박죽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러다 지독히 외로워지는 순간이 있다. 세상 속에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찰나의 순간 같지만 어쩌면 그냥 분리된 느낌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때는 과거나 미래, 혹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내 안의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래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의 볼륨을 키우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훌쩍 큰 음악 소리가 조금 놀라게 하고 익숙해지고 어느새 들리지 않는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할까, 그런 고민이 드는 밤이다. 중요한 건 말의 내용보다 순서가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순서라는 건 생각보다 정말 중요한 것이다. 어머니가와 아버지 중 누가 먼저 죽는지, 어머니가 죽고 철이 드는지, 철이 들고 나서 어머니가 죽는지, 이런 사소한 순서의 차이가 누군가의 인생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미인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가난하고 얼굴도 못났다. 그저 ‘그 사람 착하지’ 정도의 얘기 밖에 듣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두 사람은 짧은 연애 후 결혼했다. 도통 어울리지 않는 둘이 어떤 구애의 과정을 거쳐 어떤 사랑을 했고 어떤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네 번째 손가락에 사이즈도 맞지 않는 싸구려 금반지를 밀어 넣은 순간 미래는 불 보듯 뻔 한 것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가장 모르는 게 자신인 것처럼 두 사람의 미래를 가장 모르는 것도 당사자들이었다.

 

건장한 남자애를 둘이나 낳은 후 어머니는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애초에 어머니는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사랑받는 여자로 자란 그녀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부적절한 입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건달과 바람을 피운 어머니는 곧이어 또 다른 사람과 만남을 이었고, 화를 참지 못한 건달의 손에 죽었다. 정말 우연히 재떨이가 두개골의 가장 약하고 위험한 곳에 향했다.

 

두 집안은 그녀의 이기적인 유희를 모른척하기로 했다. 남달리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으로 포장한 건 그냥 자기들이 편하고 싶어서였다. 집안에서 정해준 자리에 어머니를 묻었다. 건장한 청년들이 관짝을 내려놓고 흙을 덮고 빙글빙글 돌면서 발로 밟았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흙을 촘촘하게 다지는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죽은게 그녀인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와 형, 나, 세 남자는 동시에 버림받았다. 빈자리는 컷지만 세 남자는 나름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한 여자의 부재를 메우고 또 다른 삶을 만들어 가야만 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이유는... 귀속에 가득찬 이어폰의 감촉이나 주황색 가로등 불빛, 혹은 발바닥을 짓누르는 아스팔트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고 슬픈 음악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일은 단순히 생각하면 쉽게 답을 내릴 수 있지만 어렵게 생각하면 한두가지 이유로 도저히 풀이할 수 없다.

 

머릿 속에 두 여자가 떠오른다. 하나는 어머니, 하나는 어린 시절의 사진이 없고, 행복한 추억을 더듬기도 어려워하는 사람. 그러니까 평생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제멋대로 죽어버린 여자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애쓰며 견뎌온 여자가 내 안에 동시에 자리 잡았다. 나는 둘 사이의 괴리를 가늠하며 아주 느린 속도로 한걸음씩 걸어간다.

 

가끔 그 사람이 과거의 불행을 잠시 잊고 행복할 때마다 나도 조금씩 숨이 트이는 걸 느낀다. 희한하게도 그만큼 어머니에 대한 불완전한 원망도 사그라든다. 하지만 확실치 않다. 어머니를 용서하고 이해함으로써 그녀와 만날 수 있었던 걸까, 그녀를 만나서 어머니를 받아들이게 된 된 걸까. 어쩌면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동시에 이루어진 것일지도.

 

오랜 시간, 불행한 과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불행하단 생각을 했다. 어쩌면 순서가 바뀐 거 같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평가는 현재가 한다. 지금 행복하면 과거도 만족스럽고 지금 불행하면 아무리 좋았던 과거라도 결국 저주하고 만다. 내 옆의 사람도 과거가 불행했다 단정했지만 지금, 그리고 앞으로 행복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면 아직 이른 결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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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5

588

 

 

 

살벌한 대화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건 언제나 감정에 휘말려서 그르치기 마련. 영혼이 있기에 그런 부작용이 있지만, 감정에 휘말려도 좋은 점은 있긴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빈 껍데기를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발언하는 리제로트. 그릇이 비어있을 때야 말로 무엇이든지 채울 수 있다고는 하지만, 리제로트가 하는 건 그릇을 비워놔도 그 안에 있는 공기조차 비우기 위해 노력하는 바보였다. 그 안에 채워져 있는 공기만큼은 절대로 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영혼이 아닐까?

 

인간의 영혼이 공기 같은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절대로 오해하지는 말자.

 

“뭐. 알겠어요.”

 

눈싸움에서 진 리제로트는 고개를 획 돌리며 월터와 같이 등을 돌렸다.

 

“그래도 의뢰는 의뢰죠? 선금은 얼마로 해드리는 게 좋을까요?”

 

“선금?”

 

“네. 느닷없이 “아. 저는 의뢰 못해요.”라는 바보 같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족쇄를 좀 채워놓을 생각이랍니다.”

 

“선금이라...”

 

솔직히 선금을 받고 일해본 적이 오랜만이라, 지금 이 일에 대뇌는 목숨을 돈으로 환산해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뇌의 경우에는 눈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한쪽 다리를 못 떨게 만들었고, 중뇌의 경우에는 제어하지 못하는 왼쪽 다리가 스스로 떠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아니. 독백의 표현 방법이 왜 이래?

엉망이잖아.

 

“선금으로 얼마를 받을지 모르시나요?”

 

“솔직히 나는 돈 때문에 사건을 해결하는 타입이 아니거든.”

 

“위선자네요.”

 

“위선자고 나발이고 내가 사건에 휘말려서 억지로 해결하는 바람에 돈이고 뭐고 못 버는 경우가 많다는 소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의뢰를 받으면 그에 맞는 의뢰비를 받아야 하지만, 몬스터들은 화폐가 아니라 물물교환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물품들을 나에게 줬다. 이빨부터 뜯는 녀석도 있고, 왠 이상한 돌덩이를 메테오로 날려버리는 녀석들. 실제로 죽을 뻔한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지만, 실제로 기록에 쓰여져 있지 않았던 일중에는 해결해줘서 고맙다며, 영원한 죽음을 선물해주려는 기괴한 녀석도 있었다.

 

“그런 에피소드는 없는데요오?”

 

“그냥 어물쩍하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째서 제 생각을 읽고 없다는 진실까지 말하는 겁니까?”

 

맞다. 그런 적 없다.

어떤 바보 같은 녀석이 은혜를 입은 은인에게 영원한 죽음을 선물로 줄 생각을 할까?

 

“아무튼 빨리 백장미 찍게 이리오세요오.”

 

“뭘 더 찍을 게 있다고!”

 

“삑삑!”

 

......

 

어디선가 익숙한 새소리. 옆을 바라보니 건강한 근육을 자랑하는 웨이터 얼굴에 하얀 뱁새얼굴을 한 생명체를 보고야 말았다.

 

“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삑삑!”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언밸런스한 그 모습. 여기서 알바를 하고 있는 건지 종업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이곳 카페의 주인은 백곰이었나? 아무리 백곰이라도 저런 기괴한 생명체는...

 

“삑삑!”

 

“그만해! 그리고 그 앞치마는 또 뭐냐! 나더러 입으라고? 웃기지마! 네 놈 정상이냐!”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꿈쩍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째서 저런 녀석이 신수라고 할 수 있지?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을 촬영할까요오?”

 

“안 해요!”

 

사람의 눈이 많이 띄는 장소에서 이런 옷을 입고 일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지. 혹은 자살방지를 위해서 “너 자살하기 전에 분홍색 앞치마에 여장을 하고 고양이 귀를 달아서 아르바이트를 뛰어라.”라고 말하면, 그 순간 자살하는 사람은 어이가 없어서 자살을 그만두게 되고, 밝고 활기찬 미래만이 반겨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진짜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 대신 저 위에 있는 말을 꺼내진 말자. 그 사람이 죽기 전에 본인부터 살해당할지도 모르니까.

 

“저는 이 옷의 저주를 빨리 풀어야 하기 때문에, 백장미고 뭐고 찍을 마음도 없어요.”

 

“카일이 많이 아픈가봐요오...”

 

“진짜로 절 환자 취급하지 말아달라니까요?”

 

이 정도면 날 정신병으로 몰고 갈 생각인가?

 

“저는 갈길 갈 겁니다.”

 

기괴한 뱁새 이비를 지나치고 앞으로 나아갈 무렵. 저 멀리서 앉아있는 릴리스가 다가왔다. 결국 환영에 불과하지만 너무 사실적이라 착각을 일으키는 기괴한 환영마법. 강인한 정신방어능력이 아니면 분별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내 정신방어능력은 남들이 다 알아줄 정도로 강력하나 보다.

 

아무래도 이 정신방어능력의 존재의의는 내가 맨정신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함인가?

 

“여전히 떠들썩해서 좋네.”

 

“떠들썩해서 좋은 이유는 없다. 그런데 릴리스 이비가 왜 저기서 알바를 하는 거야? 아리엘은 알고 있어?”

 

“아니. 나도 처음 알았는데. 나중에 아리엘에게 알려줘야겠당~”

 

“당은 또 뭐야?”

 

“포도당~”

 

“하지마!”

 

이 개그 하나로 더운 낮이 영하 10도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팔짱을 끼는 감촉마저 사실인 것 같지만, 결국 환영인 릴리스는 실제로 내 옆에 없는 존재다.

 

“꿈의 미로에서 지켜보니 재미있나?”

 

“재미있지. 정말 재미있어. 꿀잼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쓰이는 걸까나?”

 

제기랄...

빨간 티셔츠만 입는 곰돌이가 사용할 법한 단어는 또 뭐냐? 이곳에 와서 이상한 것들만 배운다니까?

 

“그런데 한가지. 리제로트에게 당한 건 많은데, 의뢰인으로 받아준 자기의 생각을 듣고 싶어. 혹시 또 하나의 컬렉션 추가야? 고독하고 외로운 아이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평생 각인될 황홀한 경험을...”

 

“일단 멈춰. 그리고 입 닫아. 2분간 입 닫고 있으면 내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네가 잡화점으로 찾아왔을 때 아이언 클로를 출격해야 하는지 생각을 좀 해야 되니까. 아니면 지금 당장 꿈의 미로로 찾아가서 난동부릴 테니 각오해둬.”

 

그래도 말은 잘 듣는지 정말 2분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2분이 지났을 때.

 

“이 로리콘!”

 

“정말 죽어볼래!”

 

어째서 나는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걸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던 릴리스에게 화낼 기력도 없다. 결과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친 나는 모든걸 내팽개치고 잡화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나마 돌아갈 장소라는 곳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했지만, 힘들고 지칠 때는 그냥 쉬고 싶은 장소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건 마찬가지겠지.

 

“사람은 영혼이 없는 상태가 순수하다라...”

 

리제로트의 말을 내 입에서 곱씹었다. 영혼이 있기에 타락을 하기도 하고, 신앙으로 깨끗해진다고 하지만, 사실상 성향이 바뀐다는 말을 사용하는 게 더 정확하다.

 

“자기는 그 소녀가 했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거야?”

 

“어느 정도라면 어디까지인지 설명해줄래?”

 

“대략 15%정도?”

 

15%라.

 

대체 얼마나 동의를 해야 15%라는 수치가 나오는 걸까?

 

“사람은 영혼의 유무에 따라 순수함이 달라지는 게 아냐. 순수하다는 기준도 멋대로 만든 거지. 다이아몬드를 가공해서 그 완성품이 순수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고, 원석 그대로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순수하다는 평가도 내릴 수 있어. 영혼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순수함을 따지는 건 넌센스야.”

 

말 같지도 않는 걸 그대로 지워버리고, 릴리스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거리를 맴돌았다. 드디어 도착한 장소는 평범한 구두점. 아니, 300년 뒤의 발전된 세계에 비하면 대략 60년정도 뒤떨어진 건물이었다.

 

“이런 곳에서 누가 사는 거지? 혹시 저 건물도 풍선 달고 날아다니는 거 아냐?”

 

“지금 잡화점은 300년이나 낡았다고, 상대적으로 보면 저 건물이 최신식인데?”

 

릴리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뭐가 기쁜지 먼저 앞서나가는 릴리스를 뒤따라가며, 문 앞까지 도달하자 신사다운 노크를 2번 정도 했다.

 

“그 다음은 눈사람 만들러 갈 거냐고 물어보는 거지?”

 

“그거 리듬에 맞춰서 5번 두드린 다음 하는 거거든?”

 

릴리스는 작년 겨울에 눈사람을 만들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혔나? 아니면 또 다른 기괴한 문화가 오염되어 무의식적으로 입밖에 퍼트리는 상황인가? 릴리스는 옆머리를 귓가 뒤로 쓸어 내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 장소는 이전에 아리엘과 같이 왔던 장소 중 하나야.”

 

“그래?”

 

“이곳에서 Yee.T 보드게임도 했지.”

 

“그건 듣고 싶지 않아.”

 

그 보드게임은 언제부터 이 세계를 침공하기 시작한 걸까? 만약 멋대로 과거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보드게임부터 제거하는 걸 시작으로 타임라인을 정리할 것이다. 과거로 가는 장치를 가진 미치광이가 자신의 흑역사를 제거하는 것처럼.

 

그 뭐냐...슈트는 절대로 초록색으로 하지 말아달라는 그 사람.

 

“그 사람은 마블에서 일하고 있잖아?”

 

“왜 내 독백을 읽고 마블에서 일한다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냐. X교수님이 네 머리 속에 직접 텔레파시라도 걸어온 거냐.”

 

“아무튼 난 녹색 슈트가 싫어서 안 한다고 했어.”

 

“완전히 다른 곳에서 부르고 있잖아!”

 

녹색반지는 고향이 따로 있다고.

울트라 맨처럼 따로 고향이 존재한단 말이다.

 

그보다 벨리알은 잘 살아 있으려나?

 

“악당 생각이나 하는 건 좀 아닌데.”

 

“그래도 울트라 맨 악당 중에서 가장 멋졌다고.”

 

만일 악당이 된다면 차라리 그런 악당이 되어 우주적으로 놀아보고 싶긴 했다만, 나의 또 다른 이면은 그렇게 되면 매우 귀찮아지기에, 그저 안전한 장소에서 가만히 놀고 있는 게 좋겠지. 선악의 개념이 매우 불투명한 이런 순간엔, 내가 좋은 일로 움직여도 남들이 보기엔 악당이 될 수 있다.

 

“잡화점에서 악당 노릇이나 하면 무슨 일부터 할 거야?”

 

반 농담 삼아 릴리스가 물어봤다. 그러나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니 또 다시 반문을 하는 나.

 

“악당 노릇? 그건 왜?”

 

“자기가 악당이 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볼만할 거 같아서.”

 

악당이라고 한들...

 

“난 3류악당이 될 마음은 없다. 그러니까 이제 좀 들어가자고.”

 

노크를 해도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직접 문고리를 붙잡고 들어갔는데, 문이 열리면서 낮임에도 불구하고 빛은 이제서야 그 안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밝아지는 장소.

 

“이번엔 어떤 손님인지 기대되는데? 저주를 잔뜩 가지고 오다니. 마왕이라도 잘못 건들인 건가?”

 

어떤 마왕을 건드려야 여장을 당한 상태로 평생을 사는 저주를 받는 거지?

 

“뭐. 어떤 이야기든 심각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이리로 들어오게.”

 

울려 퍼지는 여성의 목소리.

그보다 이 가게는 구두점 아니었던가?

 

“구두점에서 저주를 풀 수 있다고? 나에게 말을 거는 존재가 누구길래?”

 

“그거야 당연히.”

 

밝은 빛이 계속해서 자리를 채운다.

 

“덤디덤...”

 

“여기서 나올 대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차라리 샌즈에게 해주를 요청하겠다.”

 

“그거 참 ‘골’때리는 해주가 되겠구나.”

 

이 녀석 너무 잘 알잖아.

뭐 하는 녀석이야?

 

“꼭 표정이 내가 뭘 하는 인간인지 궁금해 하는 거로군.”

 

“아닌데.”

 

일단 거짓말이라도 하자.

 

“뭐. 거짓말이라도 부정하고 싶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네.”

 

대체 어떻게 알고 저렇게 말하는 거냐고.

 

“그래도 그 모습으로 나만의 고양이가 되어준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과거 때부터 겪어온 게 많으니까 좀 그렇지?”

 

“좀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이 그렇지. 그보다. 과거에서 이곳까지 날아온 걸 어떻게 안 거지? 릴리스와 아리엘이 한번 찾아와서 그런가?”

 

방안이 비추고 모습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온 정신에는 충격이 돌아 뇌가 정지할 뻔했는데...

 

“오랜만이야. 잡화점의 주인.”

 

“켈모리아...”

 

켈모리아 마그누스.

생각을 해보니 그녀도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었던 최고의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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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냥 일찍 자러 간다고 퇴근했습니다.

앞으로 11시간은 자겠군요.

 

그래도 피곤하다면 이 몸은 답이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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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3-1

아주르... 아주르...
푸른 바다, 쏟아지는 햇빛,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바람, 흩날리는 짙은 머리카락과 너울거리는 치맛자락, 누군가 고개를 돌린다. 얼핏 보이는 옆모습, 초록빛으로 감싸인 눈동자.
안드레아는 눈을 떴다. 동트기 전의 새벽녘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은 이미 도망쳐 버린 후였다. 그는 세수하듯이 얼굴을 쓸고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집 밖으로 나선 그는 항구로 방향을 정했다. 아니, 발걸음이 목적지를 정했는지 모른다. 안드레아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골목을 홀로 걸었다.
거리에 나오자 앞사람의 얼굴이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집집마다 문과 창문이 굳게 걸어 닫혀 있었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드레아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사람들의 말소리. 그는 항구 근처의 주점으로 들어갔다. 주점에는 선원 몇몇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리보다는 그를 반기는 듯 했으나 여기서도 그가 기대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코가 빨간 주인장이 눈빛으로 뭘 원하느냐고 물었다. 럼이라는 짤막한 안드레아의 대답에 빨간코의 주인장은 큼지막한 손으로 잔에 가득히 술을 채웠다. 안드레아는 입에 잔을 갖다 대었다. 빈속에 술을 털어넣자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선원들은 거친 입담을 서로 자랑하고 있었고 주인장은 그들의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얼굴을 찌푸렸다. 속이 쓰라렸지만 남은 술을 비웠다. 그리고 술값을 탁자에 올려두고 주점을 나와버렸다. 항구의 주점도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울면서 하늘을 맴돌았다. 안드레아는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 보았다. 그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 제노바에서도,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바다에서도. 안드레아는 흐릿한 눈으로 해무로 뒤덮인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저편을 보기 위해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전히 해무에 갇힌 바다였다. 해무를 걷어내고 바다를 보고 싶었다. 풍족한 바다를 느끼고 다시 사랑하고 싶었다. 해무를 걷어내야 했다. 깊게 드리워진 해무를 걷어내야 했다.
안드레아의 머리 위에서 소리내어 울던 갈매기 한 마리가 바다 위에 사뿐히 앉았다. 갈매기는 보란 듯이 해무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이어서 다른 갈매기들도 주저 없이 해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좀 전에 마신 럼이 이제야 작용하는 것 같았다. 몸이 따뜻해지면서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해무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발레트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선형으로 생긴 계단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었고 어둠으로 가득했다. 발레트는 숨을 짧게 내뱉으며 걸음을 떼었다. 한 손에 횃불을 들었지만 어둠은 쉽게 길을 내주지 않았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지하 감옥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발레트는 횃불을 들어 철창 안을 비춰 보았다. 컴컴한 굴 속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발레트는 철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검은 눈동자의 사내는 발레트를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순순히 일어났다.
발레트는 릴라당의 방문을 짧게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창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릴라당은 인기척이 나자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발레트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검은 눈동자의 사내를 앞으로 이끌었다. 릴라당은 그를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날 만나고 싶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릴라당은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결심한 듯 대답했다.
"기독교로 개종하겠습니다."
"배교를 하겠다는 건가?"
릴라당은 사내의 의중을 읽기 위해 다시 한번 물었다.
"제 어머니는 그리스인입니다. 저도 반은 기독교도입니다."
"넌 투르크 정찰병이야. 무엇을 보고 널 믿어야 하지? 모국과 종교를 배반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텐데."
발레트가 날카롭게 사내를 몰아세웠다. 남자는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곧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몰타 첩자를 잡는데 협조하겠습니다."
"그건 우리선에서 할 수 있네."
"조금 있으면 본국에서 다른 정찰병을 보낼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자는 더욱 몸을 사릴테고 기사단에게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뿐입니다."
투르크인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를 둔 이 정찰병은 릴라당 앞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발레트는 투르크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한 태도였다.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게."
릴라당은 발레트에게 방에 남으라고 말했다. 사내는 발레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른 기사에게 이끌려 방을 나갔다.
"어떻게 생각하나?"
릴라당이 발레트에게 물었다.
"도망칠 구실로 배교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경계를 늦춰서는 안되네."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만약 투르크인을 통해 발티를 잡는다 하더라도 그가 보키아에 대해 털어놓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내 생각도 같네. 발티는 보키아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을 걸세.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보키아가 발티를 이용해 에스파냐에 환심을 사려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사단이 추측한 정황이었다. 그동안 기사단은 발티를 감시해왔고 그는 투르크 정찰병과 비밀리에 만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보키아는 돈 후안 경을 몰타로 초대하여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려는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하고 있었다. 보키아가 위험을 무릅쓰고 발티의 신원을 숨겨준 것은 아직 이용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보키아가 빠져나갈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보키아는 온갖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자였다. 그보다 더 정보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지도 몰랐다.
'사람들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라면?'
말이 모이는 곳. 그곳은 오래전부터 아주 가까운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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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캔버스에 여백, 2018.

 

 

 

  회화에 있어 여백이란 배경을 그대로 비워둠으로써 캔버스 위 작은 설국雪國을 입맛대로 상상하게 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또는 반대로 여백이 아닌 부분에 시선을 더 오래 두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실은 퇴근길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읽은 이 글 때문에 갑자기 든 생각이면서, 기어이 ‘상상력을 숨겨두고 살 만큼 마음이 메마른 사람은 되기 싫다’는 거창한 핑계를 내세우며 취미 미술반에 등록했다. 하지만 첫 수업이 있던 날, 비장한 표정으로 건물 앞에 다다른 나는 화실 문턱을 넘자마자 그만 머리에 피도 채 마르지 않은 여고생의 마음이 되고 말았다. 12년 만에 처음 잡아본 4B연필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희멀건 손가락과 흰 도화지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나는 이왕 철딱서니 없이 시작한 일, 첫 날엔 공쳐도 괜찮다며 철없는 자기위안에 빠져들기로 결정했다. 능청을 떨며 자분자분 주변을 살피니 화실의 모습이 꼭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제목을 붙이자면 『Hello Strangers』, 91×65.2cm, 캔버스에 유채, 2018. 정도가 어떨까.

 

  한 타임 당 예닐곱 명에 불과한 소규모 클래스였지만, 강사 1명이 2시간 동안 우리 모두의 그림을 꼼꼼히 돌봐주기엔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인이 된 후의 첫 그림에 대한 살뜰한 보살핌을 바랐던 내게 선생님의 깃털처럼 가벼운 눈빛은 그다지 만족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감동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4B연필에 뭐 사연이라도 있어요? 계속 노려보네. 낯설지만, 그보다 더 냉랭한 수업시간의 분위기를 단번에 풀어줄 만큼 다정한 목소리. 나는 그날 화실에서 진이를 처음 만났다.

 

  수업이 끝난 건 오후 4시가 갓 넘어 이른 시각이었지만 목을 축이기엔 커피보다 맥주가 나을 것 같아 근처 호프로 이동했다. 나보다 석 달 먼저 화실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진이는 아버지를 그리는 게 목표라 했다. 가족애가 남다른가보다 싶어 나도 보조를 맞추려 우리 집 식구들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자 그는 술이 들어가서 말이 술술 나오냐며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뺨이 봉숭아처럼 물든 뒤에는 술잔에 술을 따르듯 자기 이야기를 술술 흘렸다.

 

  내가 아주 작았을 때 올려다본 아버지는 그냥 큰 사람이었어. 물론 모든 아버지들이 그런 경향이 있지만 내 아버지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그래보였지. 왜 그런 형용사 있잖아. ‘크다, 넓다, 단단하다’ 같은 말… 왜 사람이 나이 들면 잔뜩 쪼그라들고, 그래서 불쌍해 보이고, 연민을 자극하는 모든 수식어가 덕지덕지 붙어서 꼭 콩떡처럼 된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아직도 아버지는 그냥 대문자야. 저 혼자 우뚝 선 알파벳 대문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

 

  하지만 자기의 주관을 갖고 붓칠을 할 수 있게 된 시기부터는 긴 면이 고작 41센티 정도 되는 화폭 안에도 그를 집어넣을 수 있다고, 심지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꼬마병정만큼 줄여서 그릴 수도 있다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병정만치 자그마하게 아버지를 그리면 그 옆엔 무얼 둘 거냐고 물었더니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단다. 파란 하늘도, 깨끗한 물도, 보기 좋은 꽃도, 건강해 보이는 강아지도, 아내도 아들도 전부 그의 곁엔 놓고 싶지 않다고.

 

  술자리가 마무리되고 밖으로 나와 발을 내딛은 길 위에서 혀도 다리도 꼬여버린 진이는 비탈길을 비틀길이라 우겨대기 시작했다. 물기 가득한 그의 혀에서 툭 튀어나오는 오타誤打가 마치 내 심장 중앙에 콩 콩 점을 찍는 것처럼 느껴져서, 들키지 않으려 쿵 쿵 큰 보폭으로 앞서나갔다. 나는 진이가 좋았지만 당장 그걸 알리고 싶진 않았다. 그가 깨닫는 때가 온다면, 서로가 감춰둔 빈 화폭 위에 점 하나 찍어도 웃어넘길 수 있을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틀비틀 비틀길을 걷던 진이는 딱 한 잔만 더 하자며 나를 불러 세웠다. 오늘만 살 거냐고 묻는 내게 속 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소주잔을 앞에 두고 영 횡설수설하던 그는, 그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크고 단단하기만 한 병정 곁에 꼭 무언가를 내줘야 한다면 하얀 눈밭을 선물해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진짜 눈을 줘야지. 스키장 같은 데서 퍼다가 부어버리는 건 안 돼. 그건 진짜 눈이 아니니까. 가짜 눈엔 붓질도 안 될걸. 내 여백을 그런 식으로 망칠 순 없지.

 

  그리고 그 위엔 옛날의 공기를, 그 공기 안의 기억과 기분과 마음 따위를 떠다니게 할 거라고.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들이라 물감으로 덧칠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라고. 그래서 그걸 그릴 수 있게 될 때까지 비틀길을 넘어 화실에 다닐 거라고, 그는 말했다. 그럼 우리가 언젠가 화실에서 만날 수 없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 날이 너에겐 축일祝日이겠구나. 하얀 눈밭 위엔 네 숨, 엄마 숨, 날숨 그런 걸 올려둘 테니. 그럼 그 날 비로소 가족이 완성될 테니. 진이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연거푸 세 번이나 원 샷으로 소주를 들이켰다. 절대로 아버지를 따뜻하게 그릴 수 없는 사람. 하지만 그의 곁에 둔 여백을 세상 가장 오랫동안 지켜볼 사람. 나는 진이가 그릴 눈밭의 기온이 영하권으로는 내려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흰 여백에 쌓인 진짜 눈이 녹아버리면 다시 흰 물감으로 눈을 퍼와 노병老兵의 여백을 지켜줄 신병新兵의 모습을 상상했다. 짐짓 하품을 하며 빈 잔 위로 흘린 두어 방울의 눈물과 이게 바로 참이슬이라는 농담을 흘리는 진이의 한 마디를, 나는 그냥 흐르도록 두었다.

 

  어떤 남자에게 여백이란 희미해진 과거의 원망들을 캔버스 위에 까무룩 내려놓음으로써 더 이상 이슬에 취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도구로 쓰인다. 그게 아니라면, 실은 그 흰 벌판을 단 한 번도 가까이에서 마주하지 못한 아버지의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등바등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하얀 욕심 같은 것. 그의 여백이 완성되는 날, 나는 이런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여백』, 333×218cm, 캔버스에 수채, 2018.

 

 

 

 

                                                                  작년 겨울, 그림을 그리던 친구를 보며 썼던 <그 남자의 여백>이라는 글에

                                                                                                                조금 살을 붙여 다시 써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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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6

허기가 진 인부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나디아는 한 명 한 명에게 포도주를 따라 주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날이었다. 스케베라스산이 펼쳐진 빌구의 성벽에서 인부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막바지 작업에 열중했고 나디아는 빵과 포도주를 챙겨 왔다. 지중해는 늘 그렇듯이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했고 하늘에는 다양한 모양의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햇빛은 수면을 간지럽혔고 물결은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인부들은 포도주를 들이켰다.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양젖으로 만든 치즈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그들은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함선이다! 성 요한 기사단의 함선이 돌아왔다!"
인부 중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디아는 포도주 따르기를 멈추고 성벽 앞으로 걸어갔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 성 안나호의 붉은 십자가 깃발이 위풍당당하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나디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머리속은 오로지 마르삼세트 항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디아는 포도주 항아리를 내려놓고 성벽 아래로 뛰었다. 해안을 따라 달리며 그녀는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붉은 십자가 깃발은 그녀를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나디아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항구로 들어섰다. 십자가가 새겨진 기사단 망토를 본 순간 나디아는 더 이상 뛸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다리가 세차게 떨렸고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딛을 수 없었다. 마중을 나온 기사단원들과 부둥켜 안으며 기뻐하는 발레트를 보자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나디아는 가슴을 움켜잡고 가까스로 눈물을 삼켰다.
지아니는 천천히 땅을 밟았다. 그토록 꿈꿔온 순간이었는데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로였다. 몰타의 색, 공기, 소리... 그리웠던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지난 5년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그는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발레트, 수고했네.."
"단장님.."
릴라당은 발레트의 등을 두드리며 말을 아꼈다. 주름진 릴라당의 눈가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발레트는 스케베라스산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처음 몰타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이제 몰타는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었다.
"나디아!"
익숙한 그 이름에 발레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아니는 벌써 저만치 앞서 뛰어가고 있었다. 부두가 시작하는 곳에서 나디아는 몰타를 떠났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발레트는 나디아의 얼굴을 보자 세상을 다 담을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뛰었다. 기사단원들은 발레트의 모습을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마르삼세트 항은 만남과 헤어짐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처음의 설레임과 마지막의 서글픔은 항구에 늘 존재했다. 그러나 기다림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고 끝내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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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5

며칠 동안 맹렬히 퍼부은 공격으로 튀니스의 길목인 라골레타 항구의 요새는 무너졌고 에스파냐 동맹군은 육지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승리의 기세는 에스파냐로 기울어졌다. 항구는 이제 에스파냐 동맹군의 함대가 장악하게 되었다. 바르바로사는 질겁하며 튀니스 성벽으로 도망쳐 버렸다. 튀니스는 호수 주변에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녹색의 도시라고도 불렸다. 호수 뒤편에는 길다란 성벽이 펼쳐져 있었다. 에스파냐 동맹군 앞에는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자리에 가만히 앉아 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포격은 멈췄다. 해적의 발길이 끊긴 것으로 보아 라골레타는 에스파냐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엄청난 긴장감을 동반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지상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앞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그것은 또아리를 틀고 혀를 내미는 뱀처럼 그들에게 공격적으로 다가왔다.
'덜컹'
덜그럭거리는 쇳소리에 발레트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물체가 철창 앞에서 조심스레 자물쇠를 열고 있었다. 모두 떨리는 마음으로 의문투성이 침입자의 행동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발레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족쇄 찬 손을 꽉 쥐었다. 검은 실루엣이 몸을 굽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 망토에 달린 모자를 내렸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어서 여기를 나갑시다."
남자는 빠르게 사람들의 족쇄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작은 쇳덩어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발레트는 손을 움켜 쥐었다 다시 폈다.
"자, 어서 나가야 해요."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발레트는 나가려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왜 우리를 풀어주는 거요?"
남자는 망토의 모자를 올려쓰며 말했다.
"나도 당신과 같은 기독교도요."
남자는 배교자였다. 에스파냐 함대가 라골레타를 공격하자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편을 바꾼 것이었다. 바르바로사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노예들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적들은 이미 요새 안으로 숨어 버렸고 배교한 남자는 지하 감옥에 있는 기독교 포로들을 풀어줄 수 있었다. 성벽 밖에는 에스파냐 동맹군이 자리하고 있고 해적들은 성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다면 성 안에는 힘없는 주민들 뿐이었다. 발레트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병기창이 어디에 있소?"
해적을 상대하려면 무기가 필요했다. 포로된 기독교도 숫자가 많으니 무기만 있다면 승산은 있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이쪽이요."
로메가스와 지아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심호흡을 한 후 벽에 붙어 살금살금 걸어갔다. 달빛은 일렬로 뛰어가는 그림자들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성벽 위에 서 있던 해적이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발레트는 손을 들어 뒷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거리 곳곳에 무장한 기독교 노예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둠이 빛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튀니스 성벽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에스파냐 동맹군은 성벽 위에 높이 들린 등불을 보았다.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동맹군은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르바로사는 어젯밤, 튀니스를 버리고 알제로 도망쳤다. 성 안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랍 주민들만 남아 있었다. 어제까지 족쇄 찬 노예 신분이었던 많은 기독교도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에 취해 있었다. 발레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한바퀴 둘러 보았다. 로메가스는 손을 높이 들며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고 지아니는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었다. 발레트는 손을 펼쳐 보았다. 손목에는 족쇄 찬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멀리서 붉은 십자가 망토를 두른 성 요한 기사들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로메가스가 뛰쳐나갔다. 발레트도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군대에 이질이 돌아 알제로 도망친 바르바로사를 끝까지 추격하지 못한 카를 5세는 해적을 피해 도망친 하산을 튀니스의 허수아비 지도자로 복귀시키고 에스파냐 수비대를 남겨 두었다. 그리고 에스파냐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라골레타 항은 고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함선으로 가득 찼다.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북아프리카의 메마른 바람을 맞으며 항구를 거닐었다. 저 멀리 성 요한 기사단의 무장 상선 성 안나호가 보였다. 붉은 십자가 깃발은 바람을 반기며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어이, 이게 누구야? 딴 사람이 되었는걸?"
깨끗해진 턱을 만지며 멋쩍어하는 지아니를 위아래로 훑으며 로메가스가 말했다. 옷을 갖추어 입고 머리와 수염을 자른 지아니는 다른 사람같아 보였다. 발레트는 환하게 웃으며 지아니에게 다가갔다.
"푹 쉬면서 영양을 섭취하면 몸은 원상태로 돌아올 거요."
발레트는 지아니의 건강이 염려되었으나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지아니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로도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마음이 들떠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몰타가 바로 앞이에요."
지아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도 바다로 눈을 돌렸다. 모든 것을 감싸주는 푸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수평선 너머에 몰타가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남았어요. 그전에 우리끼리 회포를 푸는게 어때요?"
로메가스는 발레트와 지아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로메가스의 얼굴을 본 발레트와 지아니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로메가스도 뒤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항구가 떠나갈 정도로 한참을 웃어댔다. 한바탕 웃고 나니 발레트는 아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조금 더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세 사람은 십대 소년들처럼 떠들면서 항구의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에는 해군 복장을 한 남자가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발레트도 그를 지나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아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색으로 새겨진 십자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안드레아는 지중해를 바라보고 서 있는 나디아를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성 안나호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