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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3

437

 

 

 

어처구니 없게도 티아가 나를 과거로 내던져버리면서 막상 알아서 돌아오라고 연락을 받은 지 1주일이 지났을 무렵. 꾸준하게 신체를 과거로 돌려보내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과거 시간대에 있는 티아에게 따지면서 현재로 가는 방법이 있었지만, 지금 당장 내가 돌아가기에는 어린 레프리시아가 눈에 밟혔다. 혼자서 살아갈 힘을 넘어서 마왕의 길에 오르도록 하는 것이 이번에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음. 역시나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혼잣말을 늘어뜨리면서 초목이 모두 파괴되고 그을린 자국만 남은 장소를 바라보며, ‘내가 진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 멧돼지를 사냥하고 있는 게 맞는가?’라고 의문이 3번씩이나 반복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레프리시아와 함께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마기가 희미해져서 곧 사라진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나 때문에 몸 안에 누적되어있는 마기가 레프리시아를 성장시킨 것.

 

게다가….

 

“선생님! 멧돼지를 잡아왔어요!”

 

“멧돼지에게 무슨 마법을 날리면 그게 암흑물질로 되는 거냐.”

 

미다스의 사촌이라도 되는 마냥, 사냥을 하면 전부 암흑물질이 되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만약 주기적으로 내 신체를 과거로 보내지 않았다면, 영양실조로 금방 시들어서 죽어버리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고 있겠지. 게다가 마계공작이 있는 인간마을에 보호자나 레프리시아를 가르칠 다른 선생님을 구할 이유는 없고, 레시아가 어느 정도 성장을 했을 경우 다른 마을에서 찾아주는 것이 좋다.

 

덤으로 그 마을에는 윤회의 조각을 얻을 수 있는 정보나, 아니면 과거에 있는 티아에게 찾아가서 현재로 돌려달라고 하면 좋은 계획이라고 볼 수 있지.

 

“그 멧돼지도 나중엔 네가 다 먹어라. 인간이 먹기에는 이미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니다.”

 

“선생님은 배 안고픈 거에요?”

 

“아사직전의 거지가 저걸 본다면 식욕이 사라져서 굶어 죽을 걸?”

 

암흑물질의 일부를 뜯어먹고도 아무렇지도 않는 레프리시아를 보면서 다시 생각을 했는데, 루니아 누나의 요리는 저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는 소리지? 예전에 레시아가 루니아 누나의 요리를 먹고 기절했었으니까.

 

“선생님?”

 

앞에 있는 레프리시아의 붉은 눈망울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면서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내리면서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나를 걱정하려고 하다니. 1억하고도 2천만년 더 걸리는 짓을...너는 지금 어떻게 혼자서 살아갈지 궁리를 잘 해둬야 해.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니까. 물론 네가 스스로 일어나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는 나나, 아니면 다른 보호자들이 알아서 돌봐줄 거라고 생각해.”

 

“선생님이 계속 곁에 있어주면 안 돼요?”

 

레프리시아의 작은 손은 여전히 바지자락을 잡고 불쌍하게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늘 말해왔듯이 나는 미래에서 건너왔어. 내가 미래로 가게 된다면 계속 같이 있어주지는 못해. 내가 나의 시간대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너를 보살펴주긴 할 거야.”

 

이렇게 말해주면서도 계속 같이 있어 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시아에게 제안을 했다.

 

“그럼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정하자.”

 

“가위바위보?”

 

아직 어린 시절이라서 가위바위보를 모르는 건가? 어쩔 수 없이 상세하게 나는 주먹을 쥐면서 가위바위보에 대한 규칙을 설명했다. 3가지 형태에 따라 물고 물리는 간단한 경쟁은 어린 레프리시아가 이해하는데 5초의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가위바위보야 말로 약자나 강자를 나누지 않고, 손만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한 투쟁이라는 거야. 지금의 나와 레프리시아의 전력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마법으로 대련을 한다면 십중팔구로 지게 되겠지만. 이런 가위바위보를 통해서 간단한 손 모양으로 날 이길 수 있다는 거지.”

 

“해볼게요. 그런데 뭘 정하는 거에요?”

 

레프리시아의 질문에 예약된 단어들을 입으로 내뱉었다.

 

“가위바위보에서 네가 이기면 너의 소원대로 어디에 가지 않고 계속 곁에 있을 거야. 다만, 내가 이긴다면 너는 빠른 시간 안으로 강해져서 날 뛰어 넘어야 해. 그렇든 그렇지 않든 나는 돌아갈 기회가 된다면 곧바로 사라질 거야.”

 

그렇게 가위바위보를 시작했고 작은 손이 가위를 냈을 때 나는 주먹을 내서 이겼다.

잠깐? 이겼어? 드디어 레시아에게 1승을 가져갔다고?

승률이 그나마 0%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올랐다니!

비록 어린 시절의 레시아지만 그래도 이긴 게 어디야!

 

“크크큭! 크하하하핫!”

 

기쁨에 통제되지 않는 나는 광소를 온 세상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사실 시작부터 약속을 지키지 않을 생각으로 멋대로 이야기 한 거지만, 졌을 때는 뭔가 수많은 대비책을 생각해야 했는데, 이겼으니까 그런 까다로운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상황을 봐서 내가 돌아가도 별 탈이 없을 정도로 레프리시아가 성장을 하면 그때 돌아간다.

 

“우으...”

 

“자. 레프리시아. 벌칙이야.”

 

“벌칙?”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그 사람은 벌칙을 받게 되어있지. 아까 내가 제안한 거하고는 별개의 내용이니까. 이건 꼭 참고하도록 해.”

 

나는 레프리시아의 볼을 꼬집으면서 살짝 늘렸다. 말랑말랑한 볼이 늘어나기 시작함에 따라 레프리시아의 목소리와 비명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아파! 아파요! 선생님! 아프다니까요!”

 

“매번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이렇게 당할 것이다! 어떠냐! 가위바위보에 무서움이!”

 

벌칙이 끝나자 빨개진 두 볼을 어루만지며 달래고 있는 레프리시아의 모습을 뒤로 하고, 슬슬 마을로 내려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마을로 내려가는 이유는 레프리시아에게 세상을 구경시켜준다는 목적보단, 지금 당장 돈을 구할 곳이 없어서 벌어들일 수단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한들 대체 뭘 하면서 돈을 벌지?”

 

“원래 산에서 허름한 집으로 거처를 삼은 이유는 자급자족을 하기 위함이 아닌가요? 선생님이라면 분명 욕심도 없고 수수하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애석하게도 인간은 욕구와 욕망에 이끌려 사는 동물이란다.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한 경우가 많지.”

 

레프리시아와 손을 잡고 마을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마법이야기라면 마법이야기,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세상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내가 일부러 피하고 있는 이야기라면 나에 관련된 모든 것. 마을에 있는 시장에는 정말 마계공작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부한 먹거리나 옷들이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를 섬기는 사람들은 보물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았는데, 마계공작의 영토라서 그 영향이 일반사람들에게도 끼치는 모양이다. 그걸로 사치를 하게 되고 유흥에 써버린다면 이 마을의 순환구조는 대략적으로 파악완료.

 

“이곳은 돈을 벌어먹고 살기에는 좀 힘든 구조였군. 정말 네 말대로 그냥 산에 올라가서 자급자족하고 사는 게 더 좋겠다.”

 

어쩔 수 없이 한 바퀴만 돌고 해산하려고 했을 때.

 

“혹시 여행자이신가요? 최근에 이상한 사람이 출몰한다고 들었는데?”

 

내 앞에는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주변에 있는 마을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으로 보아 나는 조용히 말했다.

 

“색욕의 공작인 아스모데우스로군.”

 

무의식적으로 레프리시아의 강하게 붙잡고 직시하게 시작했다. 하늘 빛의 눈동자와 짙은 푸른 색의 머리는 가르마를 한쪽으로 내고 앞머리를 빗어 올려서 고정이라도 시켰는지 광택이 나기 시작했다.

 

“설마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만으로도 눈치채시다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통 머리부터 조아리며 살려달라고 비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오해를 사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혹시나 딸 아이 앞이라고 허세를 부린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허세를 부리는 건 내 앞에 있는 상대의 빈틈을 만들기 위해서지.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보다, 이 아이를 노리고 온 거라면 이곳이 사라져도 좋다는 생각을 좀 해둬야 할 거야? 너희들 마왕군은 어차피 오합지졸이니까.”

 

마왕군을 거론하자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은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희 마왕군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혹시라도 물어보는데 마족은 아니신 것 같고...?”

 

“인간은 맞아.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애는 마족이 맞지.”

 

“그런데도 인간이 마족을 기르시다니 꽤나 무섭겠네요. 마족은 언제 어디서든 지식이 쌓이기 시작하는 생물. 인간에 대한 추잡함이나 불결함에 대해 알게 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먹어 치우려고 할 것 같은데요? 마족의 힘의 원천은 남을 희생시키는 것이니까요.”

 

잔인하게 웃고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시선은 나에게서 레프리시아에게 옮겨졌다.

 

“어린 아가씨? 이런 인간 밑에 길들여지면 훌륭한 마족이 될 수 없단다.”

 

미묘하게 빛나고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눈과 마주한 레프리시아는 급하게 내 다리 뒤에 숨었다.

 

“어라?”

 

“미안하게도 너의 매료를 뿌리치고 나에게 숨은 걸로 보아, 나에게 길들여져도 훌륭한 마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승리의 미소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승리는 이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보면 되겠지.

 

“설마 이런 시시한 말싸움으로 나에게 말을 걸은 거라면 무척이나 실망할 것 같은데. 아스모데우스. 나를 멈춰 세운 이유라도 있지 않던가?”

 

“멈춰 세운 이유는 언제까지나 장래가 유망한 그 어린 소녀를 제 밑으로 위함일 뿐.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제 매료에도 걸리지 않을 만큼 성장한 아이라면 더욱 더 탐이 나긴 하군요.”

 

탐이 난다는 것은 레프리시아가 나중에 마왕이 될 그릇이란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는 건가? 확실히 지금 20대 중반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성이지만, 얼마나 살아왔는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오래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쪽은 이 아이의 잠재능력을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나 봐?”

 

“당연하죠. 제 매료를 피해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상급마족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라면 오히려 저의 반려가 되어, 저의 야망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죠.”

 

“반려? 난 그 결혼 반대인데?”

 

귀걸이에 있던 티르빙을 빼낸 뒤에 사브르로 변형시키고 아스모데우스에게 겨누며 말했다.

 

“시아버지에게 잘못 보이면 큰일난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나? 애초에 너 같은 녀석에게 이 아이를 맡길 바에, 서벌캣에게 던져서 새로운 프렌즈를 만들어주는 게 좋겠어.”

 

마계공작에게 이런 식으로 막 나가는 사람은 없겠지만...그래, 있다면 나 하나 뿐이겠지만,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레프리시아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싸울 준비를 하려고 하고 있었다. 상대도 나도 전력차이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섣부르게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 아스모데우스가 현명하다면 지금은 순순히 물러날 것이다.

 

굳게 다짐한 내 눈을 마주하며 한숨을 내쉰 아스모데우스 옆에,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서 나를 더 기겁하게 만들었다.

 

“아스모데우스 님. 슬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아. 릴리스 미안해. 친절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

 

 

달빛보다 요염한 기다란 은발, 남자가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보라 빛의 눈동자. 그런 릴리스가 내 앞에서 적대하며 아스모데우스에게 곁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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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식스 시즈하다 늦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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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2

436

 

 

 

인간계로 왔다는 증거로는 마나들이 나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 마나와 친화력이 뛰어난 몸이 내 주변으로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하면서, 돌아가는 방법도 듣지 못하고 과거에 온지 대략 1시간정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과거로 간다는 것은 의외로 위화감이 송곳처럼 온 몸을 찌르기 시작하는데, 그건 내가 과거를 섣불리 건드려서 미래를 바꾸면 안 되기 때문인데, 마티가 과거에서 얼마나 많이 고생을 했는지 나도 이제 슬슬 공감하고 있었다.

 

“마계에서 대체 얼마나 못 먹었길래, 빈 그릇이 천장을 받칠 새로운 기둥이 되어버린 거냐?”

 

성장기라고는 하지만 저 어린애의 뱃속에 다 들어갔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대략 50인분을 혼자서 처리하는 모습에 그나마 비상금으로 들고 온 20골드가 전부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어차피 나도 시공간술사라서 레시아 몰래 만든 아공간이 존재하긴 하는데, 거기에는 비상금과 루니아 누나의 폭주에 대비해서 갈아입을 남성용 옷이 있었다.

 

시공간술사는 3개의 시간대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으니, 현재 있던 재화를 과거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좋았다.

 

“배부르냐?”

 

“맛있어. 따듯해. 흐윽…!”

 

너무 맛있어서 우는 거냐. 이 나이에 있던 레프리시아는 얼마나 감수성이 풍부한 거야? 게다가 마나로 눈을 강화해서 상대의 마기를 체크해봐도 터무니 없이 작은 마기였다. 확실히 마계에서 나를 습격할 때도 마법이 아니라 몸을 던져서 습격을 해왔으니까. 마땅한 선생이 없다는 소리가 되겠군.

 

“내 생각으로는 네가 살아가는 것 중에 2가지 방법이 있어.”

 

“2가지?”

 

똘망똘망하게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을 가신 소녀에게 방향성을 제시했다.

 

“하나는 네가 제대로 살 수 있을 때까지 너를 가르칠 스승을 찾는 것. 지금 마계에는 네가 살기에는 너무 잔혹한 세상이야. 그 바보 같은 약육강식에서 어이없이 생명이 사라지는 꼴은 듣기만 해도 끔찍하니까. 두 번째는 너를 보호해줄 사람을 찾는 거야. 보호해줄 사람을 찾는다면 어떻게든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하고, 죽고 죽이는 삶에서 아주 살짝 떨어져서 지낼 수 있어. 어느 하나의 조건이라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꽤나 힘든 일이 되겠지.”

 

“오빠는 못하는 거에요?”

 

“그럼 당연...잠깐? 너 뭐라고?”

 

“오빠는 내 스승이나 보호자가 될 수 없냐고 물었는데...”

 

잠깐이나마 거대한 한숨 패키지가 내 머릿속으로 찾아와서 받아야 했다. 내가 실로 걱정하는 건 지금 레시아가 너무 순진하게 굴고 있다는 점에서, 이걸 바꿔야 할지 말아야 할지 꽤나 큰 고민이었다.

 

“내가 여기에 장기체류라도 가능했으면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나는 언제 어디서든 미래로 갈 수 있는 시간여행자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마족보다 더 잔인한 것은 인간이야. 인간 중에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덜 나쁜 사람하고 또 다른 하나는 무지막지하게 나쁜 사람이지.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은 없어. 좋은 사람이라고 보이는 것은 그만한 메리트가 있기 때문에 본성을 숨기는 거야. 그 좋은 사람도 다른 타인이 봤을 때는 언제든지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단다.”

 

“그럼 오빠는 저에게 무슨 메리트가 있어서 좋게 보이는 거에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말 하나 안지는 건 여전하군.

 

“그렇네. 우선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줄 수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마계가 변해서 인간과 기술협력을 한다거나, 천계에 갑자기 쳐들어가서 휴전을 맺을 수만 있다면, 인간과 마계가 서로 싸우는 일을 멈추고, 마계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겠지. 만약 네가 마왕이 되어서 마계를 바꾸겠다고 할 수도 있잖아? 지금 마계는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어린 레프리시아는 작은 손에 들린 포크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설마 내가 마왕이 되라고 부추긴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만...

 

“지금 마계에 가장 큰 문제점은 마왕이라는 직책이 세습되는 구조라는 거지. 마왕은 인간계에 피해를 주고 용사와 여신이 그 마왕을 죽인다. 그러면 그 마왕의 후손은 인간에 대한 증오를 품고 마왕이 되어 다시 인간계에 피해를 준다.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는 원한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인간이 마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거나. 지금 있는 마왕을 탄핵하고 다른 마왕으로 바꾸거나. 그것뿐이네. 의외로 새로운 사람이 일을 더 잘하거든.”

 

무지한 지도자를 내몰아내고 새로운 지도자가 제대로 이끌어가는 세상에는 미래가 있는 법. 여전히 내 쪽으로 쏟아질 듯한 그릇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어. 카일? 들려?]

 

티아의 텔레파시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시공간술사만 가능한 텔레파시인데. 제대로 작동하려나?]

 

[들리긴 해. 그래서 나는 언제 미래로 갈 수 있는 거야?]

 

[아. 그게 좀 문제가 생겼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에 설마 미래가 바뀌고 있다거나, 모순이 생겨서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건가?

 

[너무 급하게 과거로 보내버리는 바람에,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방법은 카일이 알아서 찾아야 할 것 같아.]

 

티아에게 들은 통보로는 내가 미아가 되어버렸다는 소리였다.

 

[아니. 네가 이쪽으로 와서 현재로 픽업한다는 경우도 있잖아?]

 

[부탁해!]

 

오늘따라 머리가 아파지려고 하는데 기분 탓은 아니겠지? 티아가 나를 이곳에 남겨놓은 이유가 있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는 법. 그렇게 되면 내가 어린 레프리시아를 잠깐이나마 돌봐주면서 현재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보호자나 너의 스승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이제서야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찾았거든.”

 

“이유?”

 

내가 있는 시간대에는 없지만 과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윤회의 조각을 찾아야 한다. 윤회의 조각은 뒤틀린 시간을 원상복구 시켜주는 물품. 혹은 자신에게 찾아온 시공간적 재앙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준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간 축을 원래대로 되돌려주는 물품이니까.

 

“윤회의 조각을 찾기 전까지는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 주기마다 내 신체를 과거로 백업해서 계속 이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 이곳에서 1분 1초라도 늙어서는 안 되니까.

 

“그러면 이제 슬슬 움직이자. 계속 앉아 있다가는 소가 되니까.”

 

“저는 소가 안 되는데요. 오빠.”

 

“그리고 그 오빠소리 하지마. 선생이라고 불러. 안 그래도 세간의 눈이 좋지 않는데 너라도 좀 협력해라.”

 

“알았어요. 선생님...”

 

그럼 이제 누구에게 윤회의 조각을 받아올 수 있을까? 시간의 여신에게 “어. 저 여기 잘못 왔는데 제발 좀 돌려보내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아 그러니? 돈 내놔.”라고 들을 것 같아서 가기가 싫다. 시간은 금이라는 소리가 있지만 그럴 바에는 30초안에 세계가 멸망하는 곳으로 떠나갔으면...

 

어쨌든 잠깐 임시거처로 쓸만한 집이라고 한다면, 인간과 마계 사이에 있는 색욕의 공작의 영지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과거에는 대체 누가 색욕의 공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시무시할 만큼의 마성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가 들었다. 한 번이라도 만나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걸을 정도. 생각을 해보면 이때 용사들도 너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 마을은 격전지가 될 거라 생각했다.

 

아까 어린 레프리시아에게 밥을 먹였던 이 마을이...

 

“그럼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임시 거처라도 만들어야겠군. 현재 색욕의 공작은 아스모데우스인가?”

 

소녀는 여전히 내 바지자락을 붙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해서 나는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산으로 올라가자니 야생동물과 마물들이 들끓고 있어서 그 위치로 잡았는데, 이건 레시아의 훈련을 도와주는 것도 있고 다른 이들이 쉽게 접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내가 보이는 시야에서 활동하는 게 좋을 거다. 인간 마을 하나를 붙잡고 있는 색욕의 공작이 있는 곳은, 의외로 짐승 같은 사람들이 천지에 널려있으니까. 표식을 지닌 마계공작들이 그 성향과 동화하도록 주변을 자연스럽게 물들이는 것.”

 

생각을 해보니 내가 지금 이 모습으로 돌아다닌다면 기록에 너무 자세히 남겠구나.

 

여장은 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남자로 보일 만큼 중성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커다란 붉은 색상의 로브와 머리길이가 어깨까지 오는 블론드 색상의 가발을 착용했다. 변장을 하기 위해 일부는 숨겨놨는데, 확실히 챙겨오는 걸 잘 한 것 같다.

 

“멀리서 볼 때는 꽤나 헷갈리겠지?”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요? 선생님?”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지. 이런 모습이야 말로 상대방을 방심시키기 위함이야.”

 

본심은 과거의 내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있는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업은 시작되었으니까. 지금 당장 이 허름한 집부터 수리하도록 하자.”

 

마침 누군가가 쓰다 버린 듯한 집이 보여서, 조금만 보수를 하고 마법으로 결계를 펼친다면, 생활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레프리시아의 마법 향상을 위해 마법으로 나무를 자르라고 하고, 근력향상을 위해서 직접 도끼로 잘라보라고 시키려고 했지만, 지금은 너무 무리가 있어서 내 옆에 보조역할로 수행하는 것으로 눈감아줬다.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밤에는 레프리시아에게 마법을 알려주는 걸로 하고...외벽을 세웠다면 내부청소를 해야 하지만, 여태까지 잡화점을 청소해오면서 달인의 경지까지 올라가버린 나에겐, 지금 쌓여있는 고물덩어리나 쓰레기 더미는 좌표마법으로 옮기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말하는데, 너 혼자 있을 때는 아스모데우스 앞에서는 절대로 서면 안 된다.”

 

“그건 왜요?”

 

“당연한 걸 내 입에서 나오게 하지 마라. 매료를 당하니까 그렇지! 아직까지는 네 스스로가 자의적으로 풀 수 있는 정신력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해. 수상한 사람이 나쁜지 착한지를 떠나서 이상한 집으로 나도 모르게 따라 들어간다는 거야. 애초에 어린 아이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도 최악이지만...”

 

정신방어가 제대로 되지 않은 레프리시아인 것 같아서 노파심에 말을 해줬다.

 

“조심할게요. 선생님.”

 

또박또박 말을 잘 하는 레프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다만, 계속해서 느끼는 위화감이라고 전해진다면, 현재의 레시아와 여기 과거에 있는 레프리시아의 압도적인 전력차이는 어떻게 된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지금 시간적인 모순을 낳는 결과가 되지 않을지.

 

“제발 내가 돌아갔을 때는 왠 괴물 하나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시간적인 모순이라면 티아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서 해결하도록 하자. 티아도 시공간술사이니까 그 시간대에서도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잠깐 집도 지어서 피곤한 터라 낡은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데, 내 옆에 버젓이 누워서 올려다 보고 있었다. 레프리시아에게 “왜?”라고 물어보자.

 

“아뇨. 왠지 근처에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것도 있고 친숙한 기분이 들어서요.”

 

“마나의 축복을 받은 체질은 그 사람 주변에서 마나가 소용돌이치고 있지. 게다가 나는 마기와 신성력도 담을 수 있는 몸이니까. 마기마저 휘몰아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이곳은 인간계와 마계의 경계선이니까.”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상 부모도 없고 지탱할 사람도 없는 레프리시아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나라서, 지금 이렇게만 옆에 붙어있어도 심리적으로 많은 안정이 되고 있는 거다. 그 결과로는 누워서 2분정도 대화를 이어 나아가려고 했는데 편안하게 자고 있는 레프리시아의 얼굴. 어린 아이가 마계에서 풀이나 먹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하는 모습은 종족을 불문하고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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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1

435

 

뜬금 없지만 옛날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빗살무늬토기는 기원전부터 나타났다고 전해지는데.

그릇 표면에 빗살같이 길게 이어진 무늬가 보여져서 빗살무늬토기라고 한다.

만약 그 빗살무늬토기를 발견하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사역마에게 무기로...!

-월요일이 좋다며 노래 부르고 있던 검은 고양이를 본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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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넷째 주 곧 있으면 파이론 근처에 열려있는 용사들의 연회가 마무리되고, 신성제국인 아우리온 국경 안에 있는 도시 ‘시나론’으로 인구 대이동을 할 준비를 마치고 있을 때. 잡화점에서는 규칙을 깨고 오늘 하루는 오전부터 열어야 했다. 새벽에 깜빡하고 잠이 들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지금 용사들이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많은 물품을 사들이기 시작했으니,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는 지금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자의 비약인 엘릭서부터 끓인 물에 그나마 향을 더해주는 허브까지 팔려나가는 것. 꽉 채워진 잡화점의 제고를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 내 목적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어째서 잡화점을 열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알아냈다. 생각을 해보니 아침에 잡화점 근처로 오는 사람이 전혀 없었으니까.

 

“주인. 그냥 문을 닫는 것이 어떠한가? 파리들만 들어오기 시작한다.”

 

“엘티노스가 낮에만 작동하는 대결계로 만들어놨나?”

 

“그보다 비니스 여신이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충돌시킨다는 물증을 잡아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아닌가?”

 

“일단 벌어먹고 살아야죠.”

 

검은 고양이가 빗살무늬토기에 머리가 끼어있는 상태로 앞발을 핥기 위해 들어올렸다가, 천천히 내리고는 나에게 기우뚱한 모습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보다 저 빗살무늬토기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물어본들, 그냥 잡화점 물품에 있어서 이렇게라도 써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마음에...

 

“그런 하찮은 독백이나 할 시간이 있으면, 이거나 벗겨주고 말하거라. 짐이 월요일이 좋다는 노래를 부르자마자 슬램덩크로 짐의 머리에 이상한 거나 꽂아 넣다니?”

 

“빗살무늬토기는 이상한 게 아닙니다. 냥캣. 그건 기원전에서 사람들이 살아온 문화에 관련된...”

 

“시끄럽다! 비둘기!”

 

“올빼미입니다.”

 

하얀 올빼미가 날아오면서 검은 고양이에게 태클을 걸어왔다. 사소한 것만으로도 물과 기름처럼 싸우는 이 앙숙관계도 어느 정도 완화된 것이 이거라니. 어쨌든 지금은 비니스 여신과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떤 범죄자라도 “네. 제가 그랬습니다. 잡아가주세요.”라고 실토하지 않는다.

 

최소한 빠져나갈 구멍 하나라도 만들어서 도망치는 것이 모든 생물의 심리.

 

“그런 틈을 남기지 않고 잡는 것이 중요하지만, 상대는 여신에다가 검은 높새바람이라는 단체가 있다. 잘못하면 모든 이들에게 적이 될 수 있는 이 섬세한 문제는 일이 결국 모두 터져야 움직일지. 초기에 무리를 하더라도 진압을 해야 할지.”

 

“어떻게든 인류의 적이 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섣부르게 여신을 시해하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요. 게다가 그 마신이 하는 말에는 뭔가 꺼림칙한 것이 걸려있으니까요.”

 

뒤에서는 작은 요정날개로 이리저리 활공하고 있는 요정들의 여왕인 티아 메르세데스의 말을 듣고, 차분하게 대답을 하고 있는 나는 단 한가지 의문...잠깐만? 왜 여기 있지?

 

“티아? 언제 온 거야?”

 

“그러니까 짐이 말하지 않았는가. 파리가 들어오니까 문 좀 닫으라고.”

 

검은 고양이는 여전히 머리 위에 있는 빗살무늬토기를 때어내지 못하고 있는 체 투정을 부리고 있을 무렵. 티아가 빗살무늬토기를 쓰고 있는 레시아의 머리를 이리저리 돌면서 환호하고 있었다.

 

“와아! 카일 드디어 시공간마법에 대해 이해력이 높아졌구나! 빗살무늬토기하고 마왕님의 머리를 공간으로 접착시킬 줄이야. 이래서는 물리적으로는 절대로 때어낼 수 없고, 마법적인 면에서는 공간마법만으로는 부족하지. 왜냐하면 공간마법으로 억지로 때어내도 그 시간으로 다시 돌려보내기 때문이니까.”

 

“요정전쟁<Fairy War>에서는 이기고 왔나 보네. 그나저나 너무 오래 걸린 거 아냐?”

 

“곰돌이 인형을 잔뜩 얻고 백장미까지 얻었거든.”

 

그래 테디 베어로 시작된 페어리 워에 전리품으로 백장미라는 기묘한 잡지까지 얻었다고? 요즘 백장미가 너무 많이 퍼지고 있는 것 같은데? 뭐 그 바보 같은 잡지는 내가 거론하는 일은 없으니까 다른 이야기로 하도록 하자.

 

“그래도 카일은 비니스 여신에 대해 너무 매정한 거 아냐? 비니스 여신은 카일을 한번 살려준 여신이라고? 아니면 카일은 남의 말만 듣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슬슬 카일도 성장을 많이 했는데, 한 번쯤은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른 관점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 말만 쉬운 거지. 아이디어가 없으면 그거 나름대로 골치가 아픈 건데. 그러니까 지금 잡화점 아공간에서 노래연습하고 있는 엘티노스나, 느닷없이 내 꿈에서 기타를 내려찍는 마신 아르트리옴의 주장을 모두 뒤로 날려버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생각이란 건가?

 

“그냥 쉬고 싶은데.”

 

“...카일?”

 

아니 솔직히 이런 일은 정말 용사들이나 영웅들이 해야지. 잡화점에서 그냥 물품을 팔아야 하는 상인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냐는 그런 지극히 정상적인 관점으로 말했는데. 티아가 엄청나게 경멸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손바닥만한 작은 체구에서 어마어마하게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나는 잠깐 움츠리기 시작했고, 티아는 목소리를 높여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만들어줬다.

 

“과거로 간다는 생각은 해본 거야?”

 

“과거를 돌아가려면 드로리안이 필요하지 않나? 괜히 과거로 가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말이지?”

 

“괜찮아. 어차피 조금만 보고 오는 건데. 시험 삼아 과거로 한번 다녀와볼래?”

 

나보다 더 뛰어난 시공간술사인 티아가 이렇게 말한다면 시도할 가치는 있다. 과거로 가서 방관자 놀이나 하면 되는 일이니까. 생각을 길게 잡을 필요 없이 비니스가 어떤 일을 했는가에 대해서만 알아내면 된다.

 

“좋아. 우선 예행연습을 할 겸 시험 삼아 과거로 갈게. 그래서 얼마나 걸려? 티아?”

 

“지금.”

 

지금?

 

***

 

과거로 간다는 건 나 혼자뿐이라는 말을 왜 하지 않은 걸까? 게다가 장소도 마기가 한 가득 모여있는 마계라서 마기를 마나로 정제하려고 했는데, 지금쯤이면 레시아와 시나의 페어링이 전부 일시적인 차단 되었으니까. 정제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독자적인 마법으로만 살아야 하는 건가? 페어링은 끊어져도 체질이 바뀌는 경우는 없으니 마기를 다행히 담을 수 있구나.”

 

과거 마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주변을 둘러봐도 갈라진 대지와 생명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허허벌판에 태양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검은 구름들. 이런 곳에서는 약자들이 먹히고 강자들만 살아남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곳에서 살아남는 자체가 강자니까.

 

“인, 인간!”

 

아무리 과거라고 해도 레시아가 집권하는 마계가 아니니까.

 

“그 피와 살을 나에게 받쳐라!”

 

아마 이게 당연하겠지. 날아오고 있는 작은 생명체라고 해도 마족은 마족이니 적당히 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마기로 이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없으니까. 그냥 평소에 마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써볼까?

 

“방패.”

 

-파아앙!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지만 검은 방패에 막혀버리는 바람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정지된 체 어마어마한 고통을 감내하려는 듯 천천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마기로 응용하는 마법에도 기본적으로는 방패나 화살은 사용할 수 있다는 실험을 성공했지만, 천천히 흐느끼기 시작하던 습격자는 이내 어마어마한 울음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먹이가 날 때렸어!”

 

마계에서는 인간=먹이감이라는 공식이 있지만, 공식은 늘 깨지라고 있는 법이지. 어린 소녀의 목소리로 울고 있었으니 어른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그리 좋지 않았다. 물론 지금 저 아이가 나보다 더 오래 살았을 지도 모르겠으나, 겉모습으로는 얼마든지 어른처럼 보여야 하는 법.

 

“자. 날 건들인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해주지.”

 

어른답게 어린 아이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하는데...

잠깐? 이 소녀 낯이 좀 익다?

 

“엄마! 아빠! 살려주세요! 못된 인간이 저를 먹으려고 해요!”

 

“인간은 마족을 먹지 않아! 어째서 식인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인간에게 엉망진창으로...!”

 

“거기까지 해! 그보다 이름이 뭐지?”

 

마족중에서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한 사람은 딱 한 명밖에 모르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걸어보니 대답은...

 

“레, 레프리시아. 인데요?”

 

얼마나 과거로 날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다행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60년 내외로 이동한 것과, 아직 마계가 통합되기 전이니까 마계공작들이나 마왕이 모두 사나울 시기였다. 덤으로 인간계로 침입하는 마족들은 너무 제각각 놀고 있으니까. 천계에서 파견 나온 발키리와 심판자. 그리고 갯지렁이 수보다 더 많은 용사들에게 토벌 당하고 있는 시기인가.

 

“그렇군. 레프리시아라. 이제 최후를 맞이할 준비는 됐겠지?”

 

“히끅! 사...살려주세...”

 

평상시에 레시아에게 하도 당하고 살아서 그런가. 본심이 아닌 말이 튀어나왔지만 평상시의 내 분위기로 인해 잔뜩 겁먹고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아하니, 빠른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농담이야. 그보다 여기는 마계 맞지?”

 

“그런데요? 누, 누구시죠?”

 

“나는 미래에서 온 T-800이라고 한다. 아니, 그냥 존 스미스라고 하는 게 더 좋은가? 뭐 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확실할 정도로 알 필요는 없어. 그냥 나는 아주 잠깐 이곳에 놀러 온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너에게는 우선 기억소거부터 시작하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보고 있지만, 기억소거 마법은 내가 사용할 수 없으니 물리적으로 뇌에 충격을 가한다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아픈 건 싫어요!”

 

작은 몸으로도 최소한의 저항을 하고 있는 레프리시아에게 죽지 않고 단기기억을 만들 정도의 힘 조절을 할 수 있을 지가 더 문제인데. 게다가 어린애가 기본적으로 하지 말라고 부탁을 하면 들어주는 것이 인간적인 모습이다.

 

“대신 나와 만난 것은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그러면 나는 다른 곳에 가볼 테니까. 너는 알아서 잘 살도록 해.”

 

그런데 나는 언제 현재로 다시 되돌아가지?

이 허허벌판을 그냥 돌아다니면 위험한 일인데.

 

“이런 우울한 곳에서 살 수 있다는 자체가 기묘하네. 옆에는 그 흔하다는 슬라임마저 살기 힘들다니.”

 

“슬라임은 없고 마족들은 많은데.”

 

“넌 대체 뭘 먹고 사는 거냐?”

 

“가끔 자라난 풀이라던가...마기를 흡수하고 사는데...”

 

정상적인 요리는 먹지 못하고 사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마계에서는 요리를 할만한 곳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인간계로 나아가야 할 것 같은데.

 

“이 근방에 인간계로 갈 수 있는 장소가 어디 있지? 그 나이에 자라난 풀이나 먹고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우선 제대로 된 먹거리라도 먹여야겠네.”

 

“하지만, 마족은 지금 인간의 최대의 적인데...”

 

“그런 인간에게 꼭 붙어있는 이유는 뭔데?”

 

어린 레프리시아는 내 바지자락을 붙잡고 가만히 입을 열지 않았다. 나도 지금 마족에게 있어선 최대의 적인 인간이니까. 하지만 레프리시아는 나에게 되묻기 시작했다.

 

“그럼 어째서 저에게 음식을 먹여주려고 하는 거죠?”

 

“어리잖아.”

 

“이상한 인간...”

 

아마 지금 시간대라면 데모르테가 자신의 남편을 죽이고 여신으로 올라갔을 무렵이니. 레프리시아 홀로 마계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시간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혀 이야기 해주지 않았는데...

 

설마 내가 개입되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내 본명은 이야기 하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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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48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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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쓰는 단편선

사랑 쓰레기통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다. 끝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것에 한계가 존재한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눈앞의 A를 보았다. 무어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목에 핏대까지 세웠다.

“아니 그래서 말이야. 그 부장 놈이.”

오늘도 같은 하루의 연속이다. 어김없이 만나봐야 불평이나 듣는 처지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턱을 괴고 A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한 시간? 두 시간? 얼마나 또 들어야 하는 걸까? 아니 그전에 내가 이런 얘기를 왜 들어야 하는 걸까?

“내 말 듣고 있어?”

A가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다. 물론 듣고 있다. 하지만 좀처럼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A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일방통행인 대화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대화라는 것은 본래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이지 않나? 아니 적어도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건 대화라고 볼 수 없다. 그저 지껄이는 말에 불과하다. A가 내뱉는 말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가시가 박히듯이 내 몸을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점점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A가 말하면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이건 대화가 아니었다. 대화라기보다 파블로프의 개 같은 거다. 그래. 개 같은 경우다.

“정말 회사 다니는 것도 그렇고 힘들어 죽겠다니까. 매일 부장 놈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난리지. 선배 놈은 뭐든 안하고 넘기려고만 하지.”

A는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그 이후에 나올 얘기는 안 봐도 뻔했다. 동기 놈들은 아부나 하고 힘든 일은 자기한테 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내기를 해도 좋다. 아니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질 것이다.

“그리고 동기 놈들은 맨날 아부만 한다니까? 짜증나 죽겠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다를 바 없었다. 언제나 같은 불평이었다.

“그러면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때? 그렇게까지 힘들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A의 미간이 좁아졌다. 목에 핏줄을 내세우며 이를 갈았다. 잡아먹을 듯이 내게 다가왔다.

“장난해? 요즘 세상에 취직하기 얼마나 힘든데. 알잖아? 지금 이 회사 들어오려고 하는데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미안.”

고개를 숙였다. 뭐가 미안한지 왜 고개를 숙이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숙였다. 이제는 습관처럼 고개가 내려갔다. 내가 무어를 잘 못했고 무어가 문제인지는 상관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인과관계와는 상관없이 나의 고개를 저절로 내려가야 했다. A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오늘도 자동으로 내려갔다.

힘든 것은 이해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사회생활이라는 게 쉬운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그 속에 있는 사람 관계란 늘 힘든 법이다. 때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일을 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개자식들과 함께 살아가야하는 법이다. 이해되었다. 충분히 힘들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 건 아니다.

“아아. 짜증나 죽겠네.”

A가 또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또 불만 사항들을 얘기하려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어째서 그걸 나에게 푸는 건가? 그 점에 관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나에게 말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아무리 이 자리에서 들어준다 한들 해결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 악화만 될 것이다. 원래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썩어가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가장 좋은 해결법은 문제가 되는 사람과 얘기를 해보던가 아니면 스스로 나서서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애초에 A는 내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고민을 털어놓는 것도 충고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화풀이 대상이 필요할 뿐이다. 자신의 감정을 뱉을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아니. 그리고 오늘 또 무슨 일이 있었냐면.”

A에게는 문제 해결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불만만 가득할 뿐이다. 이렇게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비록 오늘 기분이 좋아진다 고해도 내일 또 다시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그리고 난 또 그 이야기를 듣고 있겠지.

A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무슨 얘기를 하는 지 뻔했다. 의자에 기대어 A를 보았다. 무어를 저리 열심히 얘기하는지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선배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

“그게 다 내 잘못이라는 거 있지? 참 어이가 없어서. 일은 지가 벌려놓고 책임은 나보고 지라는 거야 뭐야?”

“응.”

어렸을 때 우리 집에 고장 난 라디오가 있었다. 테이프를 넣으면 맨날 같은 구간만 반복되는 바보 같은 라디오였다. 그 라디오 이런 기분이었을까? 바보 같다.

“너무하네.”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하네. 어쩌면 지금 내가 A에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A는 그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목청을 키웠다.

“그치?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그 사람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렇게 오늘도 A의 투덜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만나지도 않았는데 기운이 쏙 빠졌다. 어찌된 게 만나기 전보다 더 피곤했다. 그런 나와 달리 A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이 신경에 거슬렸다.

“아~ 그래도 말하고 나니까 속 시원하네.”

해맑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A를 쳐다보았다. 그렇구나. 너는 상쾌하구나. 나는 최악인데.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이런 생활을 반복하는 걸까? 처음에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연인의 힘든 점을 들어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있잖아. 넌 내 생활은 궁금하지 않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라?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세 시간이었다. 무려 세 시간을 얘기하고 나왔다. 그 시간 동안 질리도록 떠들면서 나에 과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의 하루가 어땠는지, 힘든 것은 어땠는지 단 한마디도! 오직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A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째서 모르는 걸까? 하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하도 힘드신 양반이니 그럴 만도 하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감도 잡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힘들고 인생 사는 게 힘들어서 나 따윈 신경 쓰지 못하니까.

“내가 직장에서 어땠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그런 거 궁금하지 않아?”

“뭐야? 갑자기 왜 그래?”

A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띵하고 머리가 울렸다. 뒷골이 당겨오면서 온 몸의 피가 머리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넌 말이야. 항상 너 힘든 것만 말하잖아. 그걸 듣는 내가 어떨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쩌면 한계가 온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언제까지 이런 것이 지속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터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나도 몰랐다.

“오늘따라 왜 그래?”

A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게 나에게 온갖 불평불만을 하면서도 내 얘기는 듣고 싶지 않구나. 정작 나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구나. 웃음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입에서 후후하고 웃음소리가 계속 새어나왔다. 바보 같다. 이런 사람을 연인이라고 사귀고 있었다니…….

“오늘따라? 그렇구나. 너에게는 오늘따라 그렇겠지. 그런데 생각해봐. 언제 한번이라도 나한테 힘든 일 있냐고 물어본 적 있어? 늘 그랬어. 넌 항상 너 힘든 것만 말해왔지 내게 관심 따윈 없었어.”

한번 터진 말들은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점점 목청이 올라갔다. 이를 악물고 A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참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듣고 A가 발끈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내게 다가왔다. 얼굴을 들이밀고 다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연인사이면 그 정도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면 뭐 그런 거 얘기했다고 기분 나쁘다는 거야?”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모르고 있구나. 아니 알려고 하지 않구나. 사실 마음 한구석으로 알아차려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A에게 나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A의 투정을 듣는 나날이 그저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 힘든 일이 있으면 애기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런 걸로 화를 내고 그래? 오히려 연인이면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발악을 하는 A를 보자 정이 뚝 떨어져 나갔다. A에게 나는 무엇인걸까? 사랑하는 연인? 감정을 버리는 쓰레기통?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 그렇구나. 당연한 거구나.”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앞으로의 미래. 지금보다도 힘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회사에 입사하고 난 뒤 고통 따윈 앞으로의 일에 비하면 작은 티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내 모습이 보였다. 한숨을 내쉬며 A의 이야기를 듣는 내 모습. 어쩔 수 없이 맞장구나 치는 내 모습. 정작 나 힘든 건 하나도 말 못하는 내 모습. 그런 바보 같은 모습만 눈앞에 그려졌다.

“우리 헤어지자.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

눈을 뜨고 A를 밀어냈다. 가로등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지겨웠다. 씨익거리는 숨소리도 모든 것이 지겹다.

발걸음을 옮겼다. A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다. 더 이상 A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자, 잠깐. 헤어지자니? 너무한 거 아니야? 겨우 불평 좀 했다고 이러는 거야? 나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A가 내 앞으로 달려왔다. 양 손을 크게 펼치고는 내 앞길을 막았다. 그런 A를 지나가려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A가 나를 놔주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A의 어깨를 붙잡았다.

“겨우 불평? 넌 정말 너 밖에 모르는구나.”

A를 밀어냈다. 아까와는 다르게 세게 밀었다. 덕분에 A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랑? 넌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니? 지난 몇 개월 동안 단 한번이라도 달랐던 적이 있니? 전화를 해도, 만나서 얘기를 해도 힘들다는 말만 하고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잖아. 매일 사람 기운이나 빼놓고. 게다가 무슨 얘기만 하면 뭘 아냐고 소리치고. 너는 양심도 없니?”

A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난 네 감정을 담는 쓰레기통이 아니야. 그럴 거면 집에 가서 인형이랑 얘기해.”

발걸음을 옮기자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너무했나한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먼 미래, 한숨을 내쉬는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A의 곁을 지나갔다. 길을 걸어갈수록 A의 울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리고 어느 샌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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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

기름막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내 존재의 의미가 그의 감상에 대한 리액션을 위한 것인 듯 대하곤 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풍부한 표현력과 넓은 배경지식을 가졌었고 그것들을 늘어놓으며 나를 가르치길 좋아했다.

'세상에 너 같은 감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어쩜 그런 방식으로 관찰하는 창의적인 생각을...!'

 이런 반응 몇 가지면 몇 시간이라도 떠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도 내가 감탄할 때마다 그가 더 흥이 올라 얘기하는 모양이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대화의 흐름은 나에게 공허함만 가져다 주었다. 킬링타임용 영화를 보아도, 맛있는 케이크를 먹어도, 뜬금없이 귀여운 모양의 구름을 보아도 나의 생각, 나의 기분, 나의 상태는 없었다. 오직 그의 생각, 그의 기분, 그의 상태만 입혀져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우리'는 없고 그의 껍데기를 덮어쓴 나만 있었다. 기름막으로 둘러싸인 물방울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막의 빈틈으로 수분이 새어나가 쭈글쭈글한 기름막만 남게 되어 불쾌함이 되었다.

 누군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다. 나는 빠르게 적응했고 아무렇지 않았다. 늘 있는 불행에 슬퍼하는 것은 나를 파먹는 짓이라고 어리석은 합리화를 반복하며 나를 곪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영화를 보고 나와 영화가 어땠는지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특히 신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항상 기회를 뺏겼던 첫 감상을 드러낼 수 있었기에 그에 충실하게, 하지만 적당히 절제된 내용으로 답했다. (그의 감상이 나와 같다면 그가 말할 내용을 남겨두려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던 그가 불쑥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당신 얘기만 해요?"

 

기분이 크게 나쁘진 않았다. 불쾌함의 역치가 한껏 높아져 있었기에 별다른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생각이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이런 대화를 해선 안된다.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그를 그만 보는 것.

이 간단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너무 많이 돌아온 느낌이었다. 돌고 돌다 너덜해진 감정은 슬퍼할 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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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7 - 9

434

 

 

 

느긋하게 자고 있을 상황이 아니지만 춘곤증이 몰려와서 쓰러진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 점심을 먹었으니 식곤증이라고 해야 할까? 아까 전에 아이니스에게 태클을 거는 바람에 체력이 소모가 되어서 그런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보금자리는 결국 의자에 앉아서 자는 걸로 해결해야 했다. 우선 4시간이나 5시간만자고 일어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니, 낮잠을 1시간이나 2시간정도 자고 일어나면 그나마 피로가 풀린다. 책상 위에서 베니를 베개로 삼아 자고 있을 때.

 

“Beep! Beep! 난 양이얌!”

 

6번째양이 내 앞에서 리듬을 타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생각을 좀 해보니 이 꿈은 분명 내가 꾸는 꿈이 아닐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양이 노래나 부르는 꿈을 꾸겠나?

 

“어이 6번째양. 너는 대체 왜 나타나는 거야?

 

“메에~”

 

“아까 잘만 말했잖아! 여기서 이상하게 돌려 말하지 말라고!”

 

다시 동물의 울음소리로 돌아가버린 6번째 양에게 소리를 쳐도, 돌아오는 것은 다시 푸른 초원에서 맞이하는 허무함. 여전히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는 양 때를 보면서 나는 다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레시아는 어째서 나를 늑대라고 표현을 한 것인가?

 

“내가 늑대였다면 이곳에 있는 양이 전부 도망갔겠지. 양치기를 잘못 말하는 거 아냐?”

 

“양치기라. 그래도 카일 군에게는 그게 잘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지.”

 

하긴 내가 잡화점을 운영하는 사람인데.

 

“근데 누구세요?”

 

회색 후드티를 입고 있는 남성이 느닷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거만하게 주머니 속으로 양손을 집어넣어 내려다보고 있더니, 느닷없이 기타를 들어올리면서 나에게 외쳤다.

 

“모두 준비 됐습니까!”

 

-콰지직!

 

내 얼굴에 급속도로 내려가는 기타를 피해 옆으로 구르면서, 처참하게 부셔진 기타 조각들을 보고 조금만 늦게 피했다면, 내 머리마저 산산조각 나서 같이 터져나갔으리라. 한번에 인간에서 시체로 변할 뻔한 나는 정체도 모르는 남자에게 소리질렀다.

 

“대체 무슨 짓이에요!”

 

“내 귀여운 여동생인 아리엘을 너 같은 녀석에게 넘겨줄 수 없다!”

 

“아리엘이 거기서 왜 나와! 그만하라고! 기타는 이미 내구도가 0이란 말이에요!”

 

이것은 분명 내 꿈이 아니라 누군가로 인해 이곳으로 끌려온 것뿐이라고 생각하자니, 지금 당장이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티르빙을 무기로 변환시켰다. 내 앞에 있는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렇군. 설마 설마 했는데 말이야.”라고 중얼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정말 하늘이 무심하기도 하지? 어째서 네가 무기를 뽑을 수 있을까?”

 

“그야 살기 위해서 무기를 뽑은 게 맞잖아요? 꿈속에서도 죽임을 당할 바에 차라리 죽이고 상쾌하게 깨어나는 것이.”

 

“아니. 그게 아니라. 어째서 너는 꿈속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냐는 거야.”

 

꿈속에서 마법을 왜 사용할 수 있냐고? 그야 당연히 꿈속에서 마법을 사용하겠다고 간절히 소원을 빌면 우주에서 마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나?

 

“아리엘은 몽마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체내에서 마나를 직접 생성해서 사용할 수 있는 특이체질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런 아리엘도 꿈속에서는 정기를 사용해서 공상을 구현하고 있단 말이야? 그리고 너는 유독 이 장소로 출현을 자주하는데 이곳이 정확하게 뭐 하는 곳인지 알기나 하고 오는 거야?”

 

6번째 양의 서커스를 보러 오는 공간이 아닌 건가?

 

“그보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아리엘에 대해 어떻게 아느냐는 건데요? 설마 당신이 마신 아르트리옴이에요?”

 

“그래. 내가 바로 아리엘의 오라버니인 아르트리옴이야. 그러니 나는 너에게 내 여동생은 줄 수 없는데?”

 

“여동생이라니? 아리엘이 그 소리 할 때마다 걷어차려고 하지 않아요?”

 

“본 적 있는 거야?”

 

자칭 오라버니라는 녀석인가?

그 애도 무시무시하네. 마신을 자신의 포로로 둘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무튼 이 공간은 대체 어떤 공간이길래 저기 있는 기타 파괴자가 나에게 화를 내는 걸까.

 

“이곳은 보통 인간이 올 수 없는 공간이야. 릴리스와 함께 이곳을 내가 만들었으니까. 차기에 신에게 부름을 받는 아이들이 이곳에 찾아와서 맹약을 나누는 공간이지. 저기 있는 6번째 양은 대체 왜 있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저기 있는 6번째 양은 그냥 있다는 걸로...

 

“그럼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맹약을?”

 

“응~ 아니야~”

 

마신 아르트리옴은 느긋하게 내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아 그럼 왜 내가 여기에 계속 왔었냐고! 저기 있는 6번째 양이 날 꼬드긴 것도 아니잖아!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아르트리옴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대체 그 많은 여자들을 다 거느리고도 뭐가 부족해서 맹약까지 받으려고 하냐? 사기캐릭터가 될 거냐? 이 녀석이 평상시에 엘티노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더니 언제나 비어있고 공허한 척을 하네. 너만 힘의 균형이 필요 없어?”

 

“아니. 힘의 균형이 필요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상상하는 것이 무궁무진하잖아요? 이해를 좀 해줘야 하지 않아요?”

 

아르트리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뭐 됐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라고 한 뒤에, 본론으로 넘어가려는 건지 헛기침을 하고는 나에게 말했다.

 

“한가지 확실하게 해둘까? 지금 엘티노스는 너와 같이 있는 거지? 지금 잡화점에 있는 아공간에서 말이야.”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이면 너에게 엘티노스의 봉인을 빨리 풀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싶군. 천계 쪽에 상황이 좀 급격하게 변하면서 아슬아슬할 것 같거든.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천계에 있는 어릿광대가 들킬 것 같아. 지금 비니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서 말이지.”

 

“비니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요?”

 

그리고 내 귀에 천천히 속삭이는 아르트리옴.

그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아무래도 비니스가 천계의 1인자가 된 것 같다. 비공식적이긴 하지.”

 

비니스가 천계의 1인자가 된 소식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었지만, 어째서 비공식적이라는 말이 나타났는지 의문일 뿐. 머릿속에서 질문할 것이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우리스 여신이 무슨 수로 비니스 여신에게 1인자를?”

 

“그거야 당연히 신도들의 인지도지.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아우리스 교가 대부분이라고 하지만 그건 공식적인 지표일 뿐이고. 실제로는 검은 높새바람이 공작을 한 것이 좀 많은지 대부분은 비니스를 믿고 있거든. 엘티노스가 창설한 검은 산들바람도 비니스 여신의 명령으로 창설한 거였는데, 필요가 없어진 것을 알고 해체시켰잖아?”

 

“그건 들었는데. 그게 왜?”

 

“이런? 평상시에는 머리가 잘 돌아가더니 지금은 뉴런이 다 끊어졌나? 왜 이렇게 이해를 못하지? 어쨌든 엘티노스가 검은 산들바람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비니스의 입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엘티노스가 빠른 시일 내로 해체한 것뿐이야. 지상의 인간들이 비니스를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비니스가 꾸미려는 짓을 알아차렸으니까.”

 

“역시 비니스가 악신인 거죠?”

 

“아니. 비니스는 ‘전’악신이지. 지금은 악신을 부르려고 하는 것뿐.”

 

여전히 모르겠다.

 

“애초에 마신과 악신은 서로 부부라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건 인간들이 멋대로 지어낸 이야기지만, 사실 연인에 가까울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나갔어. 다만, 비니스가 용사를 보고 “내 취향이야! 악신은 이제 그만둬야지!”라고 바람을 피기 전까진 말이지. 그 이후로 악신의 자리는 지금까지 공석.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것이 딱 한가지 있어.”

 

항상 생각을 하는 거지만, 신과 여신의 뇌 구조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고 싶다. 용사가 자신의 취향이라고 악신을 그만두고 생명의 여신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소리잖아. 물론 인간계에서 몰래 내려와서 사람들 사이에 질병을 치료해주는 등. 여러 가지 좋은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데 악신은 지금도 안 나오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아리엘이 소환된 것일 수도 있어. 맹약에 따라 마신의 피를 이어받아서 아리엘은 여신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거든. 그 와중에 켈모리아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마족으로 변해서 그 기간이 연장한 것뿐이지. 악신의 자리는 아리엘이 예약한 사실은 변함이 없어. 사실상 몬스터가 배회하는 숲에서 고블린들에게 무참히 난도질을 당해 죽을 운명이었는데. 이상하게 꼬이더라고?”

 

아르트리옴의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라는 성취감보다는 분노가 머릿속에 가득했다.

 

“애가 죽지 않았는데 뭐가 그렇게 아쉬워!”

 

“그렇게 화내지마. 아리엘이 내 아내로 올 수 있는 시기가 연장이 되어서 슬퍼하는 이유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니까. 아리엘은 다른 세계에서 제물로 받쳐지는 운명이란 건 알고 있지? 영겁의 노래를 조사했으면 알 수 있으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설마?”

 

영겁의 노래가 다른 세계로 날아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영겁의 노래와 계약을 맺은 아리엘이 이곳으로 왔으니까. 조만간 세계가 겹치는 재앙이 펼쳐진다는 소리인가?

 

“너는 다른 세계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아? 적대적일까? 우호적일까? 애초에 아리엘이 넘어온 것도. 영겁의 노래가 넘어간 것도. 비니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실험 같은 거야. 이 세계는 균형이 일정해서 평화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로 평화롭기 때문에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쳐지고 있어.”

 

아르트리옴은 자신의 오른손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면서 한탄해 하듯 계속 말을 이어나갈 때. 푸른 초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나를 조용히 지나갔다.

 

“게다가 마왕이 하필 그 모양이어서 투쟁의 시기는 없어지고, 강력한 적의 세력을 만들자는 비니스의 계략은 너희들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지. 보통은 아무것도 몰랐다가 사건이 터진 뒤에 뒤늦게 움직여서 겨우겨우 회복을 하는 것이 히어로의 일이지만, 너희들의 경우에는 초기 조치가 너무 확실하게 잘 해서 그런지. 악당이 비밀병기의 설계도를 만들기도 전에 해치워버린 기분이야. 당연하게도 너희들을 제대로 조율하고 있던 엘티노스가 일을 잘한 경우도 있지.”

 

어째서 비니스는 투쟁을 바라는 걸까?

그 답은 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평화가 계속 유지되면 신들의 존재가 잊혀지기 때문이겠네요?”

 

“정답.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힘들 때만 의지할 곳을 찾지. 그 대상은 작은 동물부터 위대한 창조신까지 모두. 천계에서 신과 여신이 인간에게 그렇게 눈독을 들이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용사에게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때마다 강해지는 특성은 신들에게 전수받은 능력이기 때문이야. 비록 나는 마신이라서 음험한 오컬트 무리들이나, 시체협회라는 네크로멘서들의 협회에게 힘을 받는 터라 약한 편이지만. 생명의 여신과 최초의 여신은 인기가 높거든.”

 

결국 비니스는 더 많은 힘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세계를 이곳으로 전이시킬 생각인가보다.

 

“그럼 전이에 대해 혼란이 생길 경우. 용의자들은 누가 되는 거죠?”

 

“당연히 너와 켈모리아가 되겠지. 시공간능력을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은 너희 둘밖에 없으니까. 여신들이 너희 두 명을 지목하면 광신도들이 좋다고 뛰어올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이 필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까지 올 수 있으니까. 힘내라고?”

 

 

아르트리옴의 말을 끝까지 들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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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은 하고 싶고...

써주지는 않고...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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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

그저 그런 남자

 그는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남자이다. 그저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게 그 흔한 여자 친구도 없고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집에 계신 그의 어머니와 몇 안 되는 친구들뿐이다. 다니는 곳도 그저 그런 직장과 집, 기껏해야 단골 호프집. 난 언제나 그와 함께해야 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는 나를 통해 세상을 본다. 고로 나도 그가 보는 세상을 본다. 아무것도 왜곡시키지 않고 그저 그가 좀 더 편하게, 세세하게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사실 이런 그의 안경인 나도 그저 그런 안경이다. 굳이 특이점을 꼽자면 그의 코는 낮은 편이어서 내가 콧등을 타고 흐를 때마다 왼손잡이인 그가 왼손으로 나를 고쳐 매 왼쪽 다리의 칠이 좀 벗겨졌다. 이런 모습으로 그와 같이 그저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나는 항상 불만이었다. 


 오늘도 야근에 피곤한 눈을 꿈뻑이며 그는 버스를 탔다. 그가 꾸벅대며 조는 탓에 난 그의 무릎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그것밖에 볼 수 없었다. 역시나 무료한 날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일어섰다. 창밖을 보진 못했지만 안내방송을 들었지 싶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뻗은 손을 걷으려는 찰나. 


 아. 그가 고꾸라졌다. 


 졸다 일어나 몽롱한 정신에 그만 발을 헛디뎠다. 나 또한 콧등에서 미끄러졌다. 나를 고쳐 쓰고 걷는 그의 걸음걸이는 영 정상이 아니다. 그는 절뚝대는 오른쪽 다리를 끌고 택시를 탔다. 다친 것은 안쓰럽지만 하루가 길어진 탓에 나는 내심 신이 났다. 택시 안에서 그는 연신 양쪽 창을 번갈아 보았다.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길인 탓이다. 

 

 곧 응급실로 들어가 접수를 했다. 이름도 쓰고 주소도 쓰고 주민등록번호도 썼다. 5번 침대에 배정받아 간신히 몸을 뉘었다. 병원 천장은 참 하얗다. 불은 참 밝다. 그리고 그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귀여운 여자아이가 보였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두툼한 패딩 점퍼.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붙어 앉아 조잘거리고 있었다. 들리지는 않지만 바삐 움직이는 입술 모양새가 꽤 시끄러웠다. 

 그때 간호사가 와서 뭐라 묻기 시작했다. 그도 대답을 했고 간호사는 이내 다시 건너편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그는 간호사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간호사가 돌아간 모퉁이를 보고 있었다. 

 난 아이가 보고 싶었다. 그 정도 어린아이는 자주 볼 수 있는 친구가 아니었다. 그의 손의 반도 안 되는 손으로 침대 난간을 잡고 꼼작거리는 모습을 또 보고 싶었다. 난 그가 보는 것만 봐야 하는 내 신세가 원망스러웠고, 단 한 번이라도 내 의견을 묻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는 것 같다. 그때 다시 아까 그 간호사가 보였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다 접질린 다리 때문인지 움찔하였고, 간호사가 등을 받쳐주었다. 나는 살짝 밀려 올라갔다. 게다가 살짝 떨리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은 그가 샤워를 하고 몸을 닦고 나와 나를 쓰고 거울을 볼 때이다. 그때 본 그의 얼굴에 지금의 안면근육 움직임을 더해 상상해보자니 상상으로 밖에 접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다 간호사 옆의 의사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난 다시 콧등을 타고 미끄러졌다. 이번에는 간호사가 뻔지르르하게 생긴 의사와 함께 온 것이다. 키는 그보다 훤칠하고 코도 높은 것 같고, 안경은 쓰지 않았다. 의사를 한번 훑는가 싶더니 이윽고 다시 간호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의사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도 간호사만 보았다.

 한낱 안경인 내가 봐도 그는 간호사의 맘에 들지 못할 것 같다.

간호사도 썩 예쁘장한 얼굴은 아니지만 생글생글 웃는 게 호감 형이다. 그는 그저 그런, 어쩌면 그저 그렇지도 못한 남자이고, 차라리 저 뺀질이 의사 쪽이 더 어울릴 것이다.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린 모양이 꼭 바람둥이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뭐 어떠랴. 의사는 다른 간호사를 불러 뭔가를 지시하더니 생글생글 간호사와 가버렸다. 두 번째로 온 간호사가 그의 다리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다시 천장을 보기 시작했다.

 

 치료를 마친 그는 다시 택시를 타고 집 앞 골목길 입구에서 내렸다. 늘 다니는 길이었다. 2분이면 집에 도착해 늘 보던 어머니를 마주할 것이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다. 가로등 불빛은 노을을 흉내 낸 것만 같았다. 노을이 지고 덮치는 어둠처럼 그의 그림자도 바닥을 드리웠다. 

 

 그는 아마 아까 의사가 수고했다는 의미로 두드린 간호사의 어깻죽지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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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7 - 8

433

 

 

 

순진하기에 남성공포증이 쉽게 걸렸다면, 순진하기에 남성공포증이 쉽게 치료가 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성은 너무 순진한 탓에 그 동안 쌓여있던 남성공포증이 치료된 모습이었다. 몽골리안 웜이 대체 뭐라고 한 사람의 트라우마를 단숨에 날려버렸는지 모르겠지만, 학원제가 끝나고 5월이 중반을 거의 다 지나갈 무렵. 한 가지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저기. 이제 슬슬 검은 높새바람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아?”

 

“네? 전 여기가 더 좋은데요?”

 

다음과 같은 상황에 대체 뭐라고 타일러줘야 할지 모르겠다. 이젠 그냥 마나를 차단하는 팔찌까지 해제하고 돌아다니게 했는데, 저 신입에게는 검은 높새바람이 추가적으로 교육을 시키지 않았는지. 저번에는 내가 자는 동안 나를 암살하기 위해서 다가왔나 싶었어도, 다른 사람을 껴안고 안자면 잘 수 없다며 느닷없이 낮잠을 방해하거나, ‘식칼을 들고 찾아와서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나?’라고 생각을 했더니, 뜬금없이 닭을 어떻게 해체하냐고 나에게 물어봤다.

 

그 외에도 분명 여러가지 상황에서도 나를 암살할 기회는 충분히 많았는데, 암살은커녕 여기서 살기 위해 집안일을 배운다고 나서고 있었다.

 

아마 이유는 끔찍한 스프를 두 번 다시 먹지 않기 위함이겠지. 페트리는 앞머리가 길어서 눈이 살짝 가려진 상태에서도, 제대로 정면을 보고 걸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뛰어난 공간지각능력을 가지고 있...

 

-콰당!

 

“끼야아아앗!”

 

지는 않았고, 그냥 독백을 이리저리 해볼까 하다가 하나만 잘 안 맞은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도록 하자.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고 있는데 아래에 있는 문지방에 새끼발가락을 부딪칠 줄이야. 어마어마한 비명소리로 인해 책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귀에 들어와서 소리치는 기분이었다.

 

“괜찮은 거야?”

 

“아파요...슬퍼요...호 해주세요...”

 

대체 그 민간요법을 왜 아직까지 고수하는지 모르겠군.

 

“시나. 가서 치료 좀 해줘요.”

 

“알겠습니다. 마스터.”

 

내 어깨 위에 있는 하얀 올빼미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간 뒤에 빛을 내뿜으며 치료를 해줬...

 

“호~”

 

“그거 말고! 치료를 하라고!”

 

을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어쩌다가 보니, 내 독백이 또 어긋나서 혼란을 빚게 만든 점은 정말로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은 시나에게 민간요법을 받고 있는 페트리에 대한 처분이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지면서, 내 배 위에 있던 검은 고양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트라우마를 고치기 위해서 주인이 다정하게 대한 것을 통해, 정보를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었으니 짐은 어느 정도 수확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주인이 너무 다정하게 대한 탓에 지금 저기 있는 여성이 검은 높새바람은 때려 치고 이곳에 남아있겠다고 하지 않는가? 이 이상 늘어나면 곤란하다는 것은 분명 주인일 터인데?”

 

오늘은 묘하게 레시아의 눈초리가 따갑다. 검은 고양이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조만간 잠을 잘 때 결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서...그런데 페트리에게 뚫려버리는 결계라면 레시아에게 소용이 없는 거 아닐까? 조만간 내가 자야 할 곳은 따로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

 

“돌려보내려고 해도 돌아가지 않는 걸 어떻게 해요. 게다가 생각을 해보면 지금 검은 높새바람으로 돌아가면 배신자로 처형당하거나, 역으로 이곳의 정보가 들통날 수도 있으니 일단...”

 

“전에 루시피나와 이야기를 했을 때는 제거해야 한다는 말은 주인이 했노라. 게다가 이쪽의 정보는 이미 알만큼 다 알아서 별 소용이 없을 터이니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지금 막상 구해주니 반려동물처럼 잘 따르는 모습에 키우고 싶어진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주인은 그건가? 키워준 답례로 몸을 바치라는 그런 매니악한 요구를 하는 그런 인간인가?”

 

‘레시아의 발언이 페트리에게 들리지 않을까?’하는 조마조마한 마음과 나에 대한 인간성을 나락으로 내려버리는 이상한 말을 들은 머리가, 내 얼굴표정을 당혹이라는 이름으로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저를 대체 뭐로 보는 거에요!”

 

“주인은 항상 생각해왔듯이 자신이 늑대라는 자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언제나 양속에서 살아왔으니 자신이 양이라고 생각을 하겠지. 때때로는 짐보다 가장 잔혹하고 본능을 잘 따르는 사람이야 말로 짐의 주인으로 걸 맞는 자다. 하지만 그것도 그럴 것이 벌써부터 다른 여자를 잡화점에 끌어 들이다니. 이 정도면 능력이로군? 그 바보 같은 몽골리안 웜이나 들먹여가면서 속이니 기분이 좋은가?”

 

점점 가까워지는 원망이 담긴 고양이 눈을 피하기 위해 레시아의 얼굴과 내 얼굴 사이를 책으로 가렸다. 조금이라도 더 마주본다면 원한으로 정말 내가 죽어버릴 것 같아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가렸는데...

 

“고양이 어퍼컷!”

 

눈에 별이 잠깐 번뜩이더니 천장에 부딪쳐서 그 상대로 땅바닥에 내리 꽂혔다. 비명은 지르지 못했고 땅에 추락한 뒤에서야 고통을 인내하는 신음만 흘러나올 뿐. 레시아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내 위에서 비아냥 거리며 앞발을 핥기 시작했다.

 

“이런. 어떤 고양이가 주인에게 어퍼를 휘둘렀나 보다. 정말 신기한 일이지 않는가?”

 

“알았어요! 저녁에 손님 없을 때 귀 청소를 해드리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를 풀어요!”

 

“좋군. 협상은 완료했으니 마음씨 따듯한 짐은 다른 곳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외출을 하겠다.”

 

마왕 주제에 뭐가 마음씨가 따듯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때까지 괴롭히고 있었으면서. 어이가 탈주해서 안드로메다로 가고 있는 소리를 하고 있네. 지금쯤이면 말머리 성운을 넘어서 가고 있을 거다.

 

“괜찮으신가요? 어디서 커다란 소리가 났는데?”

 

여김 없이 짙은 보라 빛의 앞머리로 자신의 눈을 살짝 가린 페트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살펴보고 있었다. 괜찮으냐고 물어보면 턱을 강하게 맞아서 지금 당장이라도 빠질 것 같고, 천장에 머리를 부딪쳐서 뇌진탕의 여부가 어떠한지 안부를 물어야 하는데, 무엇보다 낙법도 없이 떨어지는 바람에 전신타박상이 의심된다고 자세하게 설명하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뭐라고 생각할까?

 

결국 나는 쓴 웃음을 띠며 “괜찮아. 늘 있는 일이야.”라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닌 게...가위바위보에서 지면 이런 식으로 날아가는 것이 대부분이니까.

 

“페트리는 돌아갈 곳이 없는 거야?”

 

왠지 모르게 돌아갈 곳이 없어서 이런 곳에 있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페트리의 경우에는 정반대로 돌아갈 곳이 많긴 했다.

 

“저는 공간술사니까 돌아갈 장소는 많아요. 고향에 있는 고아원이나. 저를 마법사로 만들어준 스승님의 집이라던가. 따듯하게 저를 맞이해주는 부모님이 있는 집도 있지만, 지금은 이 곳에서 지내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카일 씨는 저의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그 잔혹한 몽골리안 웜으로부터 저를 살려준 은인!”

 

만약 정말로 과거에 돌아갈 수 있으면 내가 잡화점을 얻게 되는 최악의 날보다는, 가장 최근으로 돌아가서 페트리에 대한 처분을 좀 더 엄격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법수사관에게 신고를 먼저 해서 넘기는 것이지.

 

모든 일이 생기면 가까운 경비대에게 신고하란 이유가 이거일지도 몰라.

 

정말 어린 애도 다 거짓말이라고 간파할 만큼 어설프게 지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걸 간단하게 속아넘어가서 이곳에 일하고 있는 페트리도 대단하다 본다.

 

“카일의 하렘구성원이 또 늘어남. 수라장이 더 심할 것이라 예상됨.”

 

“시끄러워! 팔랑크스!”

 

거대한 기계인형인 팔랑크스는 중압감 넘치는 목소리로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주변에 있는 책상을 집고 힘겹게 일어난 나는 지금 당장 잠자리를 모색하기 위해 잡화점 밖을 잠깐 나갔다. 지금쯤이라면 리베리티아 고원에서 잠들어도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저번에 거기서 낮잠을 자다가 걸리기도 하고, 검은 높새바람이 공중요새로 이곳 저곳에 돌아다닐 수 있다면, 운이 나쁠 경우 나를 픽업해버리는 상황까지 올 수 있으니까. 야외에서 자는 것은 안 된다면 다른 곳을 빌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저기? 카일 씨?”

 

잡화점 문이 열리고 페트리가 고개를 살짝 내밀면서 나를 불렀다.

 

“저 낮잠을 자고 싶은데요?”

 

“베니를 껴안고 자.”

 

“베니는 그래도 차가워서 따듯하게 안고 잘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럼 시나에게 부탁을 해.”

 

루시피나와 마리아는 이미 외출해서 없고, 카렌과 루나는 달에 있으니 부재중이니까.

 

“시나 님은 “저는 마스터에게만 유효한 베개입니다. 다른 베개를 사용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차갑게 거절한단 말이에요!”

 

따듯하게 안고 잘 수 있을 만한 게 필요하다면...

 

“저 2층에 이프리트에게 부탁하던가? 저 위에 있는 잠만보...아니. 잠꾸러기라면 분명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윈디 씨가 자꾸 제 앞머리를 자르려고 한단 말이에요...”

 

왜 앞머리를 자르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 “오오! 앞머리를 넘기니 미녀가 탄생했다!”라는 사소한 클리셰를 따라가기 위해 이상한 노오오오오력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이프리트 주변에는 대부분 윈디가 있는 모양이고.

 

“아저씨! 저 여자는 또 누구에요! 저 말고 또 누구와 바람 핀 거에요!”

 

“어째서 너와 내가 불륜대상이라는 이상한 설정을 창조하냐? 너는 빨리 네 남친에게 돌아가라고. 그리고 아저씨 아니라고 했지!

 

살쾡이처럼 날카로운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내 귀를 찢기 시작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은발의 소녀 아이니스가 잔뜩 화가 난 푸른 눈으로 나에게 소리치더니, 무시무시한 바위들이 하늘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정의나 수두룩하게 맞으세요!”

 

“시작하자마자 궁극기는 쓰지 말라고!”

 

하지만 그 수많은 바위들 앞에 수많은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바위가 그 마법진을 통과하려고 하자 사라지고 없었다. 페트리는 한 손으로 그 많은 바위들을 다른 공간으로 날려보냈는데. 지금쯤이면 저 멀리 슈팅스타를 외치며 우주로 나아가고 있을 거다.

 

나도 모르게 개안한 시공의 눈을 닫고 당황하고 있는 아이니스를 바라보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인사해. 페트리라고 부르는 공간술사야. 이쪽은 염동술사인 아이니스라고 하고.”

 

페트리가 먼저 인사를 하면서 다시 잡화점 문 뒤로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반가워...”

“안녕하...잠깐! 방금 그거 어떻게 된 거에요! 공간술사가 아저씨 집에 왜 있어요? 설마 무슨 이상한 말로 꼬드겨서 정신차리고 보니 노예계약이 되어있는 해프닝 아니에요?”

 

“살다 살다 처음 듣는 말이로군. 그리고 아저씨 아니라고 했지! 너 아스타로트는 어디에 있어! 대체 이 녀석은 자기 애인 내버려두고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아이니스의 일상패턴은 일단 심심하면 나에게 찾아와서 바위를 떨어뜨리고, 그 뒤에 대화를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주변에 있는 사람이 왠지 검은 높새바람보다 위험하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왜 나를 찾아온 거냐? 네가 찾아올 이유는 대부분 육포를 팔기 위함이나, 나를 놀리기 위해서 그런 거 아냐?”

 

“당연히 그것도 있는데. 오늘은 제가 너무 한가해서 놀아주시죠?”

 

“페트리가 상대해줘. 나는 어린애와 놀기 싫다.”

 

내가 아이니스를 어린애 취급을 하자.

아이니스는 나를 바라보며 소리를 다음과 같이 질렀다.

 

“이 추남!”

 

“이 쬐끄만 녀석이!”

 

 

어디 가족들에서는 아들의 목을 조르는 아버지가 있다면, 여기에는 아이니스에게 아이언 클로를 하고 있는 나를 볼 수 있겠지. 페트리는 아이언 클로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아이니스를 보며, 나를 화나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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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7 - 7

432

 

 

 

포로를 잡아들인다는 것은 생각 외로 가장 골치 아픈 일중 하나다. 첫 번째로는 이곳은 지하감옥이 아니라 잡화점이라는 점과 두 번째는 그 포로의 정신상태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곳은 절대적으로 포로를 장기적으로 묶어놓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 유지비는 누가 줄 꺼야? 유지비는? 최대한 신속하게 정보를 뺄 것만 빼고, 기억 소거를 시키든 이중 스파이를 만들던 해야 하는데.

 

“와아...”

 

지금 2시간째 그 빌어먹을 잡지를 보고 있었다. 정작 여장이 너무 잘 된 나머지 보고 있는 사람이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집중해서 볼 정도인가? 인정하기는 싫지만 루니아 누나의 옷 선택과 연출능력은 그래도 아주 조금 어느 정도만 티끌만하게 인정해야 했다. 정말 인정하기 싫은데 본인이 없을 때 이만큼이라도 인정해줘야지. 조용히 감탄하면서 읽고 있는 포로는 여전히 짙은 머리카락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쓸어 넘기며 보고 있었다.

 

아. 의자에 구속하는 것은 어찌 되었냐고 물어본다면, 방금 전까지 백장미를 조용하게 읽고 있다가 베니가 슬슬 다른 곳으로 가는 바람에, 2층에서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고 루시피나가 올라가서 얌전하게 백장미를 보는 조건으로 의자에서 풀어줬다고 했다. 이 잡지가 한 사람에게 이렇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이걸 지금 이 대륙을 넘어서 천계에서도 관람하고 있다는 거지?

 

망하지 않은 게 신기하군.

 

“재미있냐?”

 

“아, 에? 꺄아아악!”

 

남성공포증은 여전하구나. 시큰둥한 나의 한마디는 포로가 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백장미라는 저주받아야 할 잡지 때문이었다. 대부분 저 백장미에 들어있는 것은 내가 여장한 사진들이니까.

 

“오지 마세요! 저는 맛 없어요! 먹으면 당뇨에 걸려요!”

 

백장미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나와 거리를 조금씩 벌리고 있는 포로에게 슬슬 이름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카일이야. 이곳 엘티노스 잡화점의 주인이고. 너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페트리’. 저는 페트리에요. 그러니까 제발 잡아먹지 마세요!”

 

“네가 생각하는 남자들은 전부 식인종이라 생각하는 거냐. 뭘 잡아먹어서 당뇨에 걸려? 네 구성성분이 설탕 99.5%냐? 이 대륙에서는 식인이 금기라는 걸 모르는 게 아니겠지?”

 

나머지 0.5%는 잘 모르겠네. 뭐로 이루어졌는지.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남자는 언젠가 늑대로 변하니까. 잡아 먹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단다!”라고 말씀해주셨단 말이에요! 그러니 제발 먹지 마세요! 저는 맛이 없어요! 아까 전에 먹은 그 끔찍한 스프맛이 날 거에요!”

 

페트리의 부모님이 얼마나 겁을 줬는지 모르겠지만, 성격이나 사고패턴으로 잠깐 보면 매우 순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루나는 순진한 것이 아니라 아이돌이라서 가능한 순진한 연기라면, 페트리는 거의 천연수준으로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 조금만 거짓말을 해도 구별하지 못하고 진짜로 믿는 그런 수준이었다.

 

“내가 무시무시한 비밀을 알려주지.”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보통 분위기가 반전이 되는 것을 감지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말하고 있는 사람에게 집중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실험을 시작하는 말은...

 

“몽골리안 웜의 필살기는 사실 몽골리안 춉이야.”

 

“그런! 무시무시한 일이!”

 

확정이로군. 너무 순진해.

 

“모, 몽골리안 웜의 필살기가 몽골리안 춉이라니! 그런데 몽골리안 웜은 뭔가요?”

 

“그건 남성공포증에 걸려있는 여자들에게 붙어사는 벌레지. 사냥감을 발견하면 우선 그 여성이 눈치채지 못하게 어디선가 붙어있다가, 남성에 대한 공포심을 흡수하며 점점 커져. 그리고 자신의 성장이 끝나면 그때부터 자신이 점을 찍었던 여성을 사냥하는 무시무시한 벌레야. 사냥감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필살! 몽골리안 춉!”을 사용해서 기절 시킨 뒤에 포식을 하지. 그로 인해 수많은 여성들이 행방불명이 된 거고. 사실상 나는 너의 몽골리안 웜을 퇴치하기 위해 접촉한 것도 있어.”

 

이정도 거짓말을 했다면 솔직히 어느 누구나 다 알아야 했다. 참고로 이건 내가 5살짜리 어린 아이에게 말을 했는데 전혀 믿지 않고, 쓸 때 없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며 돌멩이를 던지더니 내 이마 직격을 마고 난 뒤에, 지금까지 암묵적으로 봉인을 해놓은 이야기였다.

 

“정말 이 세상은 무시무시해요! 어떻게 해야 남성공포증을 고치는 거죠!”

 

다만, 페트리는 순진한 푸른 눈망울을 반짝이며 하늘에 녹을 것 같은 눈부심으로 날 바라봤다. 정말 내가 아까 한 이야기를 전부다 믿은 거야? 어린 아이가 메테오를 날렸다고 해도 믿을 사람이잖아?

 

“그거야 남성공포증을 고치면 되잖아. 말은 간단하지만 고치기는 어렵다고 소문나있는 공포증을 무슨 수로 고쳐야 할지는 개인에게 달렸어. 나는 이만...”

 

-덥썩!

 

내 검은 바지자락을 붙잡고 넘어진 페트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예정된 밀고 당기는 클리셰를 원하지 않았는데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만만한 곳이 아닌가 보다.

 

“안 돼요! 그러면 제가 몽골리안 웜에게 잡아 먹힌단 말이에요!”

 

그런데 남성공포증이면 남자 근처에도 가기 싫어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 아마 나를 무의식적으로 붙잡은 이유라면 백장미를 보고 나서, 나에 대한 공포심은 많이 줄어들었다는 소리가 되겠지? 쓸 때 없는 곳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잡지가 할 일은 다 하는 군.

 

“그러면 네가 들어간 검은 높새바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줘. 그러면 몽골리안 웜에게 잡혀 먹히지 않게 치료를 해주도록 하지.”

 

“저, 저에게 배신을 하란 소리에요?”

 

내적으로 갈등하고 있는 페트리의 얼굴은 굳어지는 것과 동시에, 눈에서는 살기가 띄기 시작했지만 애석하게도 마나를 차단하는 팔찌 때문에,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처지를 깨닫고 곧 이어 절망에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너에게 간단히 ‘말하며 죽던가.’, ‘말하지 않고 죽던가.’에 대한 선택지를 주려는 것뿐이야. 어차피 내가 죽이지 않아도 몽골리안 웜이 알아서 너를 포식하는 비극적인 마무리가 되겠지.”

 

이쯤 되면 제발 거짓말이라고 알아차려라!

거짓말을 하는 입장에서 웃음을 참느라 너무 힘드니까!

 

“조, 좋아요. 말하도록 하죠. 대신 몽골리안 웜을 처단해주셔야 해요! 이건 약속이에요!”

 

“그래. 먼저 물어볼 것은 근거지부터인가?”

 

***

 

검은 높새바람은 신입교육을 어떻게 시키는지 자신의 간부 이름도 죄다 모르고, 자신이 돌아가야 하는 장소의 좌표를 몰라서 그쪽으로 공간이동 또한 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공간이동 좌표 값이 매번 바뀌는 걸로 보아, 하늘에 떠있는 섬이라고 하기에는 공중정원이나, 아니면 공중에 날아다니는 거대한 비행선에서 생활하는 걸로 추측하고 있는데, 막상 이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봉사단체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과의 적대세력은 확실하게 적대하는 성향인데, 지금 검은 높새바람과 적대하는 세력은 이 대륙에서 단 둘. 그것은 바로 카멜롯과 내가 속해있는 엘티노스 잡화점이었다.

 

“난 너희들이 악신을 찾아서 난장판을 부릴 것이라는 취지 때문에, 지금 이렇게 고군분투하면서 싸우는 거야.”

 

“하지만 제가 듣기로는 당신이야 말로 악신을 찾아서 모든 이들을 멸할 준비를 한다고 했어요!”

 

어디서부터가 어긋난 건지 모르겠지만 매듭은 한번 더 꼬였다. 우리가 저들을 나쁘게 말하는 동안, 저들은 우리를 나쁘게 말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 악신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그 자체가 놀라웠으니까.

 

말만 들어보면 나와 검은 높새바람은 서로 싸울 이유가 모순 되어버렸다는 소리.

 

“그래서 크로우라는 녀석이 나더러 이끌어달라는 거였나? 결국 이념은 같으니 누가 통제권을 잡아도 소용없다는 그 소리였군. 다만, 카멜롯에 있는 아리엘이란 소녀는 어째서 납치하려는 건지 이해가 안 가는데?”

 

“그 소녀가 악신을 봉인할 수 있는 유일한 소녀니까요. 판도라의 빈상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이상, 그 소녀가 가진 특수한 힘으로 판도라의 빈상자를 소환해서 악신을 가두고, 이 세계의 질서를 다시 쓰는 것이야 말로 검은 높새바람의 존재의의에요.”

 

판도라의 빈상자는 내가 잘 알고 있는 인형사가, 자신의 연인의 혼을 담아놓은 자동인형과 잘 살기 위해 빌려준 것뿐이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확실히 뭐든지 담을 수 있는 판도라의 빈상자라면 신조차 담아서 봉인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은 믿기가 너무 어려웠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니까. 저에게 붙은 몽골리안 웜을 퇴치하기 위해 도움을 주세요.”

 

저렇게 순진한 사람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아리엘에게 특수한 힘은 무엇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아무튼 내가 저질러놓은 거짓말을 내가 책임져야 할 때인가?

 

그렇다고 “모든 건 몰래 카메라였습니다!”라고 외치면서 화기애애하게 끝날 가능성이 없었다. 결국 가져온 것은 귀이개들과 마사지용 크림. 이걸로 대충 “몽골리안 웜이 퇴치되었다! 제 1부 끝!”처럼 대략 끝내기로 하자.

 

“그러면 내 무릎 위에 눕기나 해.”

 

“네?”

 

“‘네?’가 아니잖아. 내 무릎 위에 머리를 눕혀야 귀를 청소할 수 있으니까.”

 

“어, 어째서 느닷없이 제 귀를 청소해주는 겁니까! 설마 저의 작은 귓구멍에 저런 쇳덩어리를 넣어서 비좁은 곳을 엉망진창으로 들쑤시는...”

 

???

표현 방법이 좀 이상하다?

누가 페트리에게 저런 지식을 넣어준 거야?

 

“야. 잠깐만 기다려봐. 너 대체 귀 청소를 뭐라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닌 건가요?”

 

“내 의도는 네가 지금 남자와도 접촉할 수 없으니까, 억지로라도 접촉을 시킨 다음 긴장을 풀게 해서 네가 생각하는 남자들이 전부 늑대처럼 먹이를 노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인식을 바꿔주려는 거야. 나처럼 평온과 평화를 사랑하는 양과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비록 내 평온과 평화 두 개의 단어는 이상한 사건과 사고로 저 멀리 떠나갔지만, 첫 번째 소원이든 세 번째 소원이든 언제나 평온과 평화를 외칠 것이다.

 

“그래도 남자와 같이 있다는 그 자체가 불편하다고요! 무섭다고요! 어째서 다른 여자애들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면서 웃고 다닐 수 있는 거죠!”

 

“너만 못하는 거야. 잔말 말고 눕기나 해.”

 

내 무릎 위에 누워있는 페트리의 머리가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보면 잔뜩 긴장한 상태라고 볼 수 있는데, 마사지용 크림으로 내 손에 발라서 예쁜 모양으로 붙어있는 귀를 마사지 하기 시작했다.

 

“웃. 으으. 흣...”

 

저건 아마 남성공포증과 싸우고 있는 내면의 갈등이 입밖으로 나온 소리겠지.

 

“지금 이걸 이기지 못하면 몽골리안 웜은 평생 네 몸에 따라붙으면서 성장을 하게 될 거야. 그러니 이걸 받아드리면서 천천히 긴장을 풀도록 해.”

 

“아! 넵! 흐우우...”

 

손이 정말 많이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10분 정도 마사지를 한 결과, 숨소리가 차분해지기 시작했고 눈빛이 몽롱해지면서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

 

“카일 씨는 의외로 능숙하네요. 자주해주고 있나 봐요?”

 

“그야. 내 주변에 있는 멤버들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늘 수 밖에 없어.”

 

긴장은 풀은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인데 본래 남성공포증에 걸린 여자는, 남자를 믿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던가? 내 말에 순순히 따라오는 이유가 비록 거짓말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사람의 말은 절대적을 믿어야 한다. 혹은 믿지 말아야 한다. 의 기준점이 애매모호했다. 고찰은 잠깐 집어넣고 나는 귀이개를 들면서 바깥에 있는 부분부터 긁어내기 시작했다.

 

“아프면 꼭 알려줘야 한다. 힘 조절이 필요한 부분이니까.”

 

“네에.”

 

 

그래도 나에 대해 경계를 허물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깐만? 이러다간 페트리가 길들여지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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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보면 천연캐릭터가 이제 나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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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7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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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를 고문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으뜸인 방법이 무엇일까? 루나가 그린 어느 얇은 책마냥 쾌락을 줘서 고문하는 방법도 있기는 한데...그 방법은 우주 저 멀리 날려놓고 시작을 하자면, 고통을 주거나 협박을 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잡혀온 사람이 여성이라서 때리면은 이미지가 좋지 않아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레시아와 시나에게 중대한 발표를 하기로 했다.

 

“레시아. 시나. 잘 들어보세요. 제가 아침에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의미를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셨는데, 우선 저 포로에게 시식해보라고 하고 각종 반응을 얻어오세요. 만약 저 포로가 맛있다고 한마디라도 한다면 제가 먹도록 하죠.”

 

인간형의 돌아가있는 레시아와 시나는 전부 앞치마를 두른 상태로 나에게 투지가 담긴 눈을 띄고 있었다. 둘 다 포니테일에 위쪽에는 거대한 리본으로 묶고 있는 상태였고, 레시아가 하얀색 리본, 시나가 검은색 리본이니, 서로 눈에 띄는 리본의 색상을 고른 것 같았다.

 

“좋다! 비둘기! 이제 요리 승부다! 누가 주인에게 걸 맞는 애처인지 승부다!”

“저는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입니다. 냥캣.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제가 되겠지요.”

 

그 뒤로는 백은의 여신과 타락의 마왕이 주방으로 입성하자마자, 어마어마한 소음과 함께 전쟁이라도 난 듯 소리를 지르는 두 사람이 저 안에 있었다. 팔랑크스는 거대한 몸으로 나에게 다가오더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음에 불안감을 느낀 듯 말을 걸어왔다.

 

“마왕과 여신. 천마대전을 펼치고 있음. 음식으로 무기를 만듦.”

 

“걱정하지마. 우리가 먹을 건 아냐. 잡아온 포로는?”

 

“아직까지 수면상태에 있음. 마나를 차단해서 회복력이 느림. 하지만 뛰어난 공간술사라 풀어주기에는 골치가 아픔.”

 

다른 공간을 통해 단숨에 사라지는 것이 공간술사의 일이니까.

 

“성격과 취향의 정보. 그 여성은 자신보다 외형적으로 낮은 남자 아이에게는 공포감이 없지만, 카일 정도의 외형이라면 남성공포증이 제대로 발휘할 것임을 알림.”

 

나와 마주 할 때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동요를 하고 있던 이유가, 신입이라서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닌 단순한 남성공포증 때문인가? 그러면 내 사진과 프로필이 적혀있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에 집어 던져서 자세히 몰랐던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나의 존재 자체가 고문이잖아?”

 

나 존재를 공포로 몰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까? 하지만 원래는 고문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친해져서 정보를 캐내는 방법이야 말로 이상적이지만, 레시아와 시나에게 일깨워주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잔인한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온화한 방법으로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레시아와 시나가 자신들이 직접 포로를 관리하겠다고 말을 했고, 나는 거기서 요리를 해서 가져다 주라는 부탁만 한 것뿐.

 

그래. 나는 나쁘지 않아.

왜냐하면 나는 나쁘지 않기 때문이야.

 

“따라서 카일이 여장하고 상대해야 함. 그러면 귀중한 정보와 더불어 추종자를 새로 만들 수 있음.”

 

“여장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마!”

 

자동인형마저 여장을 하라는 이 잔혹한 세상에서, 레시아와 시나가 들어간 주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괴한 일이 끝났을 때. 알게 모르게 압도적인 불안감이 가시화가 되어 주방의 문틈으로 뚫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 방문이 열렸을 때는 마치 지옥의 문이라도 나오는 줄 알았는데, 곱게 담겨있는 접시 위에서 퍼져 나오는 불길한 기운이 불안감의 정체였던가?

 

“이번 요리는 짐의 혼신을 다해 만들었다. 이번 건 주인이 직접 먹었으면 좋겠지만, 포로를 대접해달라고 하니 주인은 무슨 생각인가? 다른 추리소설처럼 음식을 먹인다고 해서 그 여자는 우리에게 정보를 알려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자신의 요리가 정상적으로 먹힐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건가...?

 

“마스터. 저도 혼신을 다해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이건 걸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독극물에 걸작이 있다면 어떻게 생겨먹은 작품일까? 1초 안으로 생명의 빛을 잃게 만드는 시나의 걸작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죽으면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포로가 묶여있는 2층으로 올려 보냈다.

 

“아무튼 두 사람 다 억지로 먹이려고는 하지 마세요.”

 

비장한 모습으로 자신이 준비한 요리를 들고 올라가는 레시아와 시나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면서, 노란 빛의 슬라임인 베니는 내 발 밑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연한 초콜릿 피부를 가진 소녀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 왼쪽으로 걸어왔다.

 

“이거 대단한 볼거리로군. 카일이여. 정말 저 위에 잡아온 처자를 죽일 생각인가?”

 

“안 죽길 빌어야죠. 간절히 기도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면서요?”

 

“하지만 첩의 생각으로는 우주는 그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리아와 대화를 잠깐 나누는 사이에 내 귀를 찢을 듯한 여성의 날카로운 비명이 1층으로 뛰어 내려왔다. 나는 2층으로 다급하게 뛰어올라가면서 포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을 하려고 했을 때. 입에 하얀색과 검은색의 액체가 뚝뚝 떨어지면서 그나마 숨이 붙어있는 듯했고, 레시아와 시나는 잠깐 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음. 그렇군 짐의 요리가 이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었기에 기절한 것이다.”

“아닙니다. 저의 요리가 극상의 요리이기 때문에 황홀함에 못 이겨 기절한 것입니다.”

 

지금 저 사람의 눈이 완전히 X자로 표시된 거 안보이나? 무엇보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엘릭서까지 먹여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할 정도면, 뭘 요리로 만들어야 이 지경까지 가는 것일까?

 

“모두 1층에서 엘릭서 가져와요! 빨리!”

 

응급조치로 엘릭서를 가져와서 먹인 것은 정답이었지만, 심각한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차라리 죽여줘...이런 건 싫어...”라고 중얼거리면서 울고 있었다. 짙은 보라색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남성공포증에 걸리면 무슨 센서라도 장착되는 것일까? 고개를 마구 흔들어서 쉽사리 대지 못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검은 높새바람의 일원이라서 친근하게 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 둘에게 요리를 시킨 것이 잘못이지. 이렇게 되니까 좀 미안해지잖아.”

 

마음속에 일어난 죄를 덜어내듯 혼잣말로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레시아와 시나의 요리를 먹은 이후에 응급조치라도 한다면, 사람은 우선 살아남을 수 있다는 놀라운 연구결과를 얻어낸 뒤에, 1층으로 천천히 내려오면서 레시아와 시나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레시아. 시나.”

 

“뭔가? 주인?”

“네. 마스터.”

 

기대하듯이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와 백은의 눈동자가 1쌍식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의 음식이 더 맛있는지 판결이라도 해주려고 내려온 것은 아닌데 말이지.

 

“대체 뭘 만들었길래 사람이 죽을 뻔한 음식이 나와요?”

 

“그야. 짐은 오서독스하게 스프를 만들었다.”

 

“정식 명칭은요?”

 

“‘마왕의 특별한 스프’라고 명명하지.”

 

마왕의 특별한 독극물이 아니라?

레시아는 결국 다크메터를 녹여서 스프처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시나도 스프?”

 

시선을 돌려서 시나에게 물어보자 시나가 고개를 작게 흔들면서 자부심이 넘치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네. 저는 정확한 재료를 사용해서 제대로 된 스프를 만들었습니다.”

 

“그 재료가 뭔데?”

 

“수은 입니다.”

 

“그걸 왜 넣어! 이 멍청아!!!”

 

어째 불길하게 반짝이는 액체가 존재한다고 했더니 그거 시나가 만든 거였나? 조만간 바게트 빵에 알루미늄을 녹여서 부어버리는 참사도 일어날 것 같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시나는 나의 호통에 울먹이기 시작했고, “소리쳐서 미안해. 그래도 그건 아냐.”라고 제대로 타이르면서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으로는...

 

“두 사람은 그냥 요리하지 마세요. 루시피나나 제가 하는 요리를 먹는 게 더 편할 것 같네요.”

 

“그런! 하지만 짐은 주인의 영양밸런스를 생각해서 요리를 만든 것이다!”

 

“암흑물질에 영양밸런스가 존재할까 보냐! 두 사람은 혼돈계가 되어버린 주방이나 청소해요! 당장!”

 

투덜투덜하면서 주방으로 가는 레시아와 아까 내가 화를 내서 훌쩍이며 주방으로 가는 시나의 뒤를 바라보고는 그간 풀지 않았던 한숨 마스터 패키지를 사용해야 했다. 위에서는 레시아와 시나의 요리를 먹은 후유증으로 과도한 우울증과 권태기에 시달리는 것 같아서 마리아가 대신 올라가 상태를 보기로 했고, 이프리트와 윈디는 레시아와 시나의 요리를 보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프리트. 저거 먹으면 우리 정령계로 강제소환 될 것 같지 않아?”

“윈디. 그렇다고 몰래 먹으려고 하지마.”

 

포로에게 정말 심한 짓을 해서 미안하지만, 아직 이름도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입을 더 굳게 담을 것 같아서 또 하나의 걱정거리고 남아 있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 그나마 잡아올 수 있는 사람을 잡아왔는데.

 

“요리가 이걸 망쳐놓네.”

 

의자에 앉아서 아파오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런데 신랑. 지금은 마법학원의 학원제가 진행되고 있는 거 아냐? 안 가도 괜찮겠어?”

 

“괜찮을 거에요. 마법 기동반에 있는 카를로스라는 녀석이 의외로 머리가 잘 돌아가기도 하고, 켈모리아가 대결계에 있는 단점을 제거한다면, 굳이 갈 필요는 없겠죠.”

 

단아하고 온화한 분위기의 루시피나가 내 위에서 내려다 보았다. 그러고는 루시피나의 손이 내 머리를 이리저리 만지면서 다시 이야기를 했는데.

 

“저 위에 있는 포로를 차라리 우리 편으로 만들어서 첩자처럼 심어놓으면 어때?”

 

“이중 스파이를 만들자는 거에요?”

 

루시피나의 붉은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나를 간지럽히고 있을 때, 마주친 붉은 눈에서는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저 아이는 검은 높새바람의 신입이니까. 지금쯤이면 생존자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까?”

 

“검은 높새바람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마저 불안전한 요소가 있으면 완벽하게 제거하려는 녀석일 거에요. 그런 철두철미한 녀석들이 지금 저 신입이 살아서 귀환을 한다고 해도, 죽여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결국 버림받은 건 똑같을 것이고, 상대에는 오라클이 확실히 존재하니까. 지금은 정보만 빼내고 이곳에 있던 기억을 소거하는 편이...”

 

“그러기엔 너무 불쌍한 걸?”

 

루시피나가 무슨 이유로 저 포로의 신변을 지켜주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마리아가 2층에서 내려오며 커다란 한숨을 내쉰 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뭔가 잘못 되었을 때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좌우로 흔드는데.

 

“완전 큰일이로군. 트라우마가 너무 심하게 걸려서 앞으로 마주하는 스프들은 전부 싫어하게 될 거다.”

 

이제 스프를 먹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건가.

 

“그 사람의 기억을 침투할 수 없었나요?”

 

“마왕님과 여신님의 스프가 그녀의 몸과 마음을 심각할 정도로 피폐하게 만들었으니까. 강제로 들어갈 수는 있지만 부작용으로 진짜 죽어버릴지도 모르기에, 첩은 신속하게 포로의 정신을 정상으로 되돌릴 것을 명하노라.”

 

남성공포증이 있는 사람과 내가 대면해봤자 좋을 것은 없을 터.

 

“그렇다고 한들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요?”

 

“그럴 줄 알고 저 여자에게 백장미 1호부터 17호까지 주고 왔노라. 의자에 묶여있으니까 베니가 대신 종이를 넘겨주는 역할로 대처하면 될 것이다.”

 

 

결국 그 놈의 백장미를 또 쓰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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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공포증도 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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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쓰는 단편선

혼자하는 사랑

“나 여자 친구 생겼어.”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 예측하지 못한 순간이 온다. 예를 들면 이렇게 학교가 끝난 후 늦은 점심을 먹을 때처럼 말이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A를 보았다. 설마 밥 먹다 이런 얘기가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전에 A가 이런 얘기를 할 줄은 몰랐다.

땡그랑. 손에서 흘러내린 수저가 테이블 위에서 시끄럽게 울었다. A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뭐라고?”

“여자 친구 생겼다니까.”

“여자 친구? 아니 그러니까 여자 친구 말이야?”

“응. 얼마 전에 생겼거든. 그래서 너한테 얘기해주는 거야.”

멍하니 A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으로 보는 얼굴이었다. 오년이라는 세월을 알고 지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저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여자 친구 같은 거 관심 없다면서!”

순간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러자 조용한 가게 안에서 내 목소리가 울러 펴졌다. 때 아닌 소란에 점원이 우리를 힐긋 쳐다보았다. 점원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왜 그래? 깜짝 놀랐잖아.”

A가 조용히 내게 말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A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전에 여자 친구 같은 거 관심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사귄다고 하니까 놀라서 그랬지.”

천연덕스럽게 얘기하고 물을 마셨다. 들끓는 속을 진정시키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컵에 물을 따르고 다시 마셨다. 그리고 다시 따르고 또 마셨다.

“그래서 누구랑 사귀는 건데?”

“알바 같이 하는 여자애랑. 우리랑 동갑이야.”

“아 그래? 같이 알바 하는 친구구나.”

알바라…….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같이 알바 하는 아이? 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알바 한 것이 아직 두 달도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난 오년이나 알고 지냈다. 두 달은 오년에 비하면 발톱의 때 같은 시간이다. 그런데 어째서?

“근데 왜 갑자기 사귀기로 한 거야? 이런 얘기한 적 한 번도 없었잖아.”

“그냥. 뭐 일하다보니 서로 좋아하게 된 거지. 그래서 사귀기로 했어.”

무심히 말하는 너의 모습이 눈에 박혔다. 유리 조각처럼 내 눈알을 파고들었다. 어쩌면 지금쯤 피눈물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아. 그렇구나. 어쩌다 사귀게 되는 구나. 그냥 그렇게 된 거구나. 하하. 웃음이 나왔다. 가슴 한구석이 미치도록 시리면서도 웃음이 계속 새어나왔다.

“그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야?”

“저번에 친구 얘기가 나와서 너 얘기하다가 생각해보니까 말 안한 것 같아서.”

친구. 그 얘기를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덜커덩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몸을 돌리고 가게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A가 뒤에서 무어라 얘기했다.

고개를 돌려 A를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그 얼굴. 지겹다. 지겨워. 어째서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이토록 티가 나도록 행동해도 모르는 걸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가게를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 모든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지나가는 사람들, 뜨거운 날씨, 시끄러운 소리까지 무어 하나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개중에 가장 거슬리는 것은 웃음소리였다.

왜 일까? 오늘따라 연인들이 눈에 밟혔다. 눈앞에 많은 연인들이 있었다. 아주 작정을 하고 모인 듯싶었다. 연인들은 모두 손을 붙잡고 걷고 있었다. 무어가 그리 신나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A가 떠올랐다.

A도 분명 저렇게 다니겠지? 그 여자랑 손을 붙잡고 다니는 모습에 미간이 좁아졌다. 생각해보면 난 A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오년 이라는 세월을 알고 좋아한 나조차도 잡지 못한 손을 왜 그 여자가 잡는 걸까? 몰려오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달. 고작 두 달도 안 되는 시간이다. 그 사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바라고 해도 겨우 서빙이다. 서빙 하는 것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두 달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만드는 마법 같은 알바는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 여자는 너에 대해 무어를 안다고 사귀는 걸까?

눈을 뜨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가게 구석으로 들어가 소주병을 보았다. 다양한 소주병이 즐비하고 있었다. 과일 소주, 순한 소주, 그 중에서 가장 도수가 높은 소주를 골랐다. 양손으로 세병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점원이 나를 슬며시 쳐다보았다. 그에 맞춰 나도 점원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점원이 아무 말 없이 계산을 했다. 카드를 내밀자 소주병을 봉투에 담았다. 점원이 주는 봉투를 건네받자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을 나오자 또 다시 연인들이 보였다. 이를 악물고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컵을 가져와 식탁에 앉았다. 소주병 뚜껑을 따고 병에 부딪히자 팅하고 소리가 울렸다. 콸콸. 소주가 병을 타고 흘러 내려 컵을 채웠다. 채우다 못해 넘쳐 흘러나왔다.

“아. 망할.”

컵을 들어보았다. 식탁 위로 소주가 뚝뚝 떨어졌다. 머리를 긁적이고 휴지를 가져왔다. 대충 식탁 위를 닦고는 휴지를 집어던졌다.

소주를 마셨다. 찰랑거리던 소주가 입술에 닿자마자 술 냄새가 코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컵을 기울어 소주를 입으로 집어넣었다. 꿀꺽.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뜨거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잔 다 마실 때까지 컵을 입에서 떼지 않았다.

쿵. 컵을 내려놓자 소리가 울렸다. 다시 한 번 컵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그러자 쿵 하는 소리가 또 들렸다.

“나왔어.”

다시 술을 따르려고 하던 때 B가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아직 네시도 되지 않았다. 오늘 휴강이라 집에 빨리 온다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하긴 그런 건 상관없다.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없다.

“뭐해?”

B가 거실로 와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말없이 소주병을 들었다. 그러자 한숨을 내쉬며 내게 다가왔다.

“A 때문이야?”

B가 식탁에 앉아 나를 보았다. 소주병을 들더니 내 컵에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술이 가득 찰 때 즈음에 조용히 한마디 건넸다.

“여자 친구 생겼다고 하더라.”

그 순간 B의 손이 멈췄다. 소주병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무어를 하나 봤더니 B도 컵을 가져와 식탁에 앉았다. 뒤이어 자신의 컵에도 술을 따랐다.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낮부터 대학생 둘이서 소주를 까고 있다니. 참으로 어이없었다. B와 함께 살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오늘 따라 어이없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건데?”

B가 술을 마셨다. 나는 눈알을 굴리다 B를 쳐다보았다.

“뭐가?”

“여자 친구 생겼다면서 그러면 이제 포기하는 거야?”

포기……. 그 말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입을 다물고 B를 쳐다보았다. 불쌍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다시 눈알을 굴렸다. 그러자 B가 말을 이어갔다.

“이제 지치지 않니?”

“......”

“오년이야. 오년. 벌써 오년이나 됐어.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게 있니? 그 동안 친구 이상으로 된 적이 있어? 아니 그전에 걔는 널 친구 이상으로 생각한 적은 있어?”

말이란 참 잔인한 것이다. 한마디 한마디 말이 가시가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염통처럼 내 가슴을 꿰뚫었다. 나도 알고 있다. B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하지만

“나도 알아. 아는데 어떻게 하라고? 아는데 포기가 안 된다고.”

두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점점 몸이 뜨거워졌다. 눈가가 시리고 목소리가 떨렸다. 조금씩 앞이 흐려졌다. 볼 위로 물방울이 타고 흘러내려갔다.

“알면 이쯤에서 그만둬. 더 해봐야 상처 받는 건 너야.”

“그만둬?”

“그래. 여태까지 했으면 너도 용케 잘 해온 거야. 이쯤에서 너도 딴 사람 찾아봐.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어디 세상 남자가 걔 혼자니? 그것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A가 아닌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떠올렸다. 역겨웠다.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웃는 내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그런 건 내가 아니었다. 내 모습이 아니었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구토가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러면 내 마음은 어떻게 되는데? 뭐가 되는데?”

“마음?”

B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내 마음. 그렇게 A를 떠나보내면 내 마음은 뭐가 되는 걸까? 이토록 애끓는 마음은 대체 무어가 되는 걸까? 바람처럼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무덤 마냥 내 마음 속 깊숙이 남아있는 걸까?

“마음도 마음이지만. 결국 사랑이란 건 사람이랑 하는 거야. 너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고. 사람간의 관계란 말이야. 너가 아무리 좋아한들 걔가 널 좋아하지 않으면 고통만 받을 거라고.”

“나도 알아. 나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안다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알고 있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B가 하는 말은 모두 맞았다. 무어 하나 틀린 것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A를 떠올렸다. A 때문에 이렇게 힘들면서도 또 다시 A를 떠올렸다.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사랑이란 이토록 괴로운 것일까? 적어도 다른 사람은 안 그런 것 같다. 아까 봤던 연인들은 모두가 행복해보였다. 미소가 끊이지 않고 얼굴에 행복이라고 써 놓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걸까?

B는 더 이상 내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우리 둘은 술을 마셨다. 잔에 술이 떨어지면 다시 따랐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입을 향해 소주를 부었다.

한참을 그렇게 술을 마시다보니 허벅지가 흔들렸다. 웅웅. 진동 소리에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핸드폰을 켜자 사진이 보였다. A가 보낸 사진이었다. 여자 친구와 환하게 웃는 사진이었다.

“우웁.”

순간 구토가 올라왔다.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잡고 토해냈다. 술을 토해내고 아까 먹은 점심을 토해냈다. 그런데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토하면 토할수록 더 복잡해졌다. 뿐만 아니라 머릿속도 뒤엉켜갔다.

“바보 같기는.”

B가 그런 내게 와 등을 두드렸다. 커흑. 이상한 소리를 나왔다. 입으로 침이 줄줄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화장실의 커다란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이 보였다. 비참하게 변기나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바보 같았다.

“그러게. 완전 바보 같네.”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양 볼에 뜨거운 것이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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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7 - 5

430

 

 

 

결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거기에 구멍만 내서 침입하는 방법이 존재하는 이유라면, 마법은 항상 응용을 하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엘티노스의 말을 생각하고, 레시아에게 텔레파시가 아닌 입을 열어서 이야기 했다. 어차피 카를로스라고 불리는 학생은 레시아와 시나가 보통의 사역마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으니 숨길 이유도 없겠지.

 

“저번에도 제 수면결계에 구멍을 내고 몰래 침입한 적이 있죠?”

 

“그야 주인이 계속 짐을 상대하지 않으니 장난치려고 하다가 어쩌다 보니. 그래서 지금은 이 결계를 뚫어보라고 하는 것인가?”

 

“뚫으라는 것이 아니라 찾아달라는 거에요. 상습적으로 많이 했으니 어디에 흔적이 남아있는지 알 거 아니에요.”

 

검은 고양이는 꼬리를 살랑거리기 시작하다가 “이쪽은 아니로군.”이라고 말하며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얀 올빼미는 우리 주변을 날아다니면서 경계를 하고 있었고, 레시아는 학원에 뒤편까지 걸어간 뒤에 멈췄으니.

 

“이곳이다.”

 

아무런 흠집도 없이 잘 가동되고 있을 것 같은 결계를 레시아가 작은 앞발로 주변을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다른 곳은 작동이 잘 되듯이 유리를 때리는 딱딱한 소리가 났지만, 일부분에는 레시아의 팔이 그냥 통과하듯 들어가기 시작했다.

 

“공간마법이다. 결계에 작은 구멍을 내고 공간마법으로 그 결계가 다시 수복하지 못하도록 상처를 내고 있는 역할이로군. 이런 규모의 대결계는 거대한 충격이나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되어있다면, 작은 흠집이나 구멍은 알아서 수복하기 때문에 경보를 울리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공간마법으로 이렇게 수복을 막고 있으면서도 이 곳을 통해 들어간다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좌표마법까지 설계가 되어있노라.”

 

“확실히 냥캣의 말대로 저 공간 건너편에는 생명이 감지됩니다. 그건 그렇고 저번에 마스터의 수면결계를 뚫고 들어온 해프닝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죠?”

 

하얀 올빼미에서 나올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분노로 레시아가 잠깐 움찔하는 사이에,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서 말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의뢰만 생각하고 따질 것은 나중에 하도록 해.”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 공간을 닫아버리는 것.

저 곳이 우리를 가두려는 함정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 때문에, 사실 들어가는 행동은 삼가 해야 하지만, 이곳이 뚫렸다는 소리야 말로 검은 높새바람에게 위험이 노출되고 있다는 소리다.

 

“혹시 나만 그런 거에요? 저기로 들어가면 우서가 우리를 반겨주는 상상을 하는 거?”

 

“주인은 이런 중요한 순간에 무슨 쓸 때 없는 생각을 하는 것인가? 게다가 주인은 시공간술사의 길 중급자니까 설령 이곳이 닫혀도 탈출할 수 있노라. 아니면 짐의 아공간을 이용해서 다시 잡화점으로 되돌아가는 방법도 있으니 어서 들어가기나 하거라.”

 

“마스터. 설령 시공의 폭풍으로 들어가도 최근에 들어간 고급시계의 요원이 반갑게 반길지도 모릅니다. 스킨으로는 여장한 마스터가 나올 테니 시장가치가...”

 

“무슨 시장가치야. 조용히 해.”

 

마리아 때문에 이세계의 문화를 알고 있는 내 자신이 오늘 따라 증오스럽다.

 

“주인의 고유능력은 돌격형과 마법형이...”

 

“그만 하라고!”

 

한번 크게 소리친 이후에 진정된 마음으로 공간 속에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보자.

 

“어서 오게나! 자네는 시공의 폭풍의 선택을 받...”

 

-Take 2

 

한번 크게 소리친 이후에 진정된 마음으로 공간 속에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보자. 주변에는 다른 공간으로 향하는 구멍들이 이곳 저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명이 감지 되었다는 시나의 말이라면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도 연결 되어있는 공간 때문이겠지.

 

“상황이 좀 안 좋네. 마치 거미줄마냥 이곳 저곳에 집을 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여러 공간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면 치고 빠지기가 용이하고, 주요인물들을 납치하기에도 상당히 편리했다. 나를 납치했을 때는 미리 설치된 공간이동 마법진으로 데려갔다고 한다면, 이곳에서는 마나를 추적할 수 있기 때문에 단번에 들키지만, 이곳은 이미 여러 곳의 차원관문을 세워놓고 유지만 하면 상관없기 때문에, 마나를 추적해도 어느 지점에서 끊기고 혼란을 줄 수 있다.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워. 지금 당장 팔랑크스에게 이 정보를 보내서, 우리 대결계도 어디 뚫려있는지 확인 좀 해줘.”

 

시나를 바라보며 내가 부탁을 하자. 하얀 올빼미는 “알겠습니다.”라고 시원시원하게 말하며 한 번의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너는 이곳에서 빨리 나간 다음 근처에 선생님이나 켈모리아 학원장에게 알리도록 해. 나는 이 바보 같은 거미줄들을 다 제거하고 가야 하니까.”

 

카를로스는 심각성을 단번에 이해했는지 굳은 결의가 깃든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 우리가 들어왔던 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침투를 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는 관문들을 다 지우려고 했을 때.

 

“함부로 지우면 안 돼에에!”

 

검은 로브와 은색의 바람을 형상화한 문양. 이 공간을 만들어 낸듯한 사람이 나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 소리뿐만이 아니라 내 몸이 위험을 감지하고 옆으로 다급하게 피했을 때. 내가 서 있던 공간이 폭발하기도 했으니까.

 

“당신은 누구야? 어째서 내가 만든 공간에 있을 수 있지?”

 

“너는 나에 대해서 모르나 보네. 그건 정말 다행이야.”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걸 본 이상, 동료의 계획이 틀어지지 않게 죽어줘야겠어!”

 

성질이 너무 급한 나머지 내 주변에 있는 공간을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시공의 눈을 개안해서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시간을 이용해, 폭발 범위에서 빠져 나오고 난 뒤에 티르빙을 꺼내 타도로 변형시켰다.

 

커다랗게 휘두르는 궤적을 우습다는 듯이 공간을 접어서 저 뒤에 서 있는 마법사.

 

“그 넓은 폭발반경을 무슨 수로 피한 거지? 너도 공간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거야?”

 

얼굴을 직접 안 봐도 알 정도로 목소리부터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상당히 경계를 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봤으니 허세도 부려볼 겸 대답을 해볼까.

 

“당연히 알지. 그거 필수 마법요소 아냐?”

 

“어디 합성이라도 할 것인가? 왜 필수가 붙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1년 전까지만 해도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

 

“꼭 거기서 초를 쳐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허세를 부려보고 싶어도 레시아 때문에 모두 무산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고, 상대는 공간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내 말만 믿고 소리쳤다.

 

“내가 최고의 공간마법사가 되어야 해! 그래야 버림받지 않을 수 있어! 어쩔 수 없지만 죽어줘야겠어!”

 

서서히 퍼져나가는 불길한 기분이 온 몸을 강타하기 전에, 시나가 빛을 강하게 내뿜자마자 모든 공간이 빛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마법학원 뒤쪽 공터에서 기절해버린 마법사를 확인했다.

 

“상대가 정말 무모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마스터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면, 검은 냥캣과 우아한 올빼미가 근처에 있을 때는 늘 조심했겠지요.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아직까지 저 사람은 검은 높새바람에 들어 간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

 

얼마 안된 신입이라면 그런 사고를 저지를 수도 있지만, 사방으로 침투할 수 있는 관문을 만들어 줬는데 그게 신입의 실력인가? 게다가 공간폭발을 사용할 수 있으면 이미 상급자 이상인 것 같은데?

 

그래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레시아와 시나는 저 사람을 데리고 가서 캐낼 수 있는 정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주세요. 저는 윈디를 찾아서 아리엘이 제대로 시찰을 끝내고 켈모리아의 곁으로 돌아갔는지 확인해봐야 하니까.”

 

“그러면 두근거리는 심문의 시간이로군. 주인은 결국 이 여성에게 귀축 플레이를 하면서 주인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모든 정보를 얻어낸 다음, 쓰레기 같이 버리는 그런 잔혹한 모습으로...”

 

“뭐가 귀축 플레이야! 그런 짓 안 해요!”

 

레시아에게 소리를 친 뒤에도 입 안에 있는 독을 제거하라는 말과 루니아 누나에게 마나를 차단하는 팔찌를 빌리라는 소리까지 한 뒤에, 시나에게는 공간이동을 사용해서 도망칠 것 같으니 잔인하지만, 예전에 초량이 빛 공포증에 걸렸던 것처럼 한동안 햇빛만 봐도 겁을 먹도록 지시했다.

 

두 사역마가 포로를 잡아서 잡화점에 귀환하는 모습을 본 뒤에, 윈디에게 텔레파시를 걸어 현재 위치를 알려달라고 보냈는데.

 

[카일 씨! 빨리요! 여기 와서 도와주세요! 지금 제 힘으로는 버티기가 힘들어요!]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 때문에 나 또한 자동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바람의 정령왕이라고 부르는 윈디가 저렇게 나를 부른다면 분명 심상치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온갖 불길한 생각이 사방팔방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벌써 다른 녀석이 윈디와 아리엘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학원 전체에 무슨 일이 퍼지기 시작했을지도 모르지.

 

온 몸에 있는 마나를 한 가득 회전시켜서 강화를 한 뒤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가서 2층 높이에 윈디가 있는 장소로 추정되는 창문까지 깨뜨리면서 요란하게 침입했다. 내 시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람장벽으로 아리엘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 윈디와, 그 앞에서 검은 로브를 쓴 여러 사람이 불길한 마법으로 주변을 오염시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직까지 타도로 변해있는 티르빙을 거칠게 뽑아 몸 안에 동화하고 있는 이프리트에게 말했다.

 

“이프리트여! 나의 검이 되어라!”

 

[나 이프리트는 계약자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

 

거대한 불길이 내 검에서 만개하듯이 피어 올랐고, 주변에 있는 탁한 기운들을 몰아내며 남김없이 정화하기 시작했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검은 높새바람의 단원 중 한 명이 나를 보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장벽을 세운 뒤, 다급하게 자신의 뒤쪽에 있는 단원들에게 소리치는 모습이었다.

 

“제길! 잡화점의 주인이 벌써 오다니! 내가 희생할 테니까! 모두 신입이 만들어 놓은 공간 속으로 도망쳐!”

 

“안 됩니다! 부장님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제가 희생하겠습니다!”

 

일부는 뜨거운 동료애를 보이면서 자신이 서로 희생하겠다고 나섰고, 그 외에는 전부 거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손을 집어넣으려고 했지만, 이미 연결이 끊어진 관문으로 인해 길이 막혀서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며 아직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녀석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전에 무슨 상황인지 알려줬다.

 

“미안하지만 그 신입은 우리가 구속하고 있다고 전해줘. 아니, 여기서 전부 다 죽을 테니 전하지는 못하겠구나.”

 

나의 검이 흐르는 궤적에 따라 거대한 불길이 1초 뒤에 땅바닥에서 피어 오르는 순간, 꽃이 지듯이 내 앞에 있는 생명이 모두 형태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바닥에 붙어 있는 작은 불씨는 발로 밟아서 급하게 끈 뒤에, 티르빙을 다시 귀걸이로 변형시켰다.

 

“거울까지 매개를 삼을 정도면 어마어마한 공간술사네. 조기에 진압했다고는 말 할 수는 없지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제압해서 정말 다행이야.”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리엘과 언제 위급했냐는 듯이 밝게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는 윈디에게...

 

“아아! 정말 멋져요! 카일 씨! 저를 구해준 답례로 뜨거운 키스를...으갸아아아악!”

 

 

아이언 클로를 집행하면서 이번 소동은 대략적으로 해결했다고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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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주변애들이 더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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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7 - 4

429

 

 

 

다음날 학원제부터 여전히 회색이 곱게 물들어진 코트와 모자를 쓰고, 켈모리아의 부탁대로 윈디의 바람장막을 이용해서 모습을 감추고, 몸이 잘 감춰졌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몰래 솜사탕을 훔쳐서 입안에 넣고 있었다.

 

정말 확인하기 위해서지 절대로 솜사탕이 맛있어 보인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니까.

 

“그런데 마왕님과 여신님께서 또 요리하셨다면서요?”

 

윈디의 질문으로 머릿속에 잠깐 봉인해놓은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독극물을 먹으라는 레시아와 시나가 눈 앞에 보여서, 초인적인 반사신경이 각성해 밥도 안 먹고 뛰쳐나와서 배가 좀 고팠다. 솜사탕이라도 먹어서 당분을 채우지 않는다면, 어느덧 뱃가죽이 말라붙어버릴지도 모르니 입 안에 녹아 들고 있는 구름 같은 솜사탕을 차근차근 음미할 무렵.

 

“카일. 오늘 걸신들렸어?”

 

솜사탕이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슈크림 빵이 내 손에 들려있었다. 이프리트의 말이 너무 늦었는지 이미 한입 베어먹은 상태였고, 어처구니 없는 나의 나쁜 손은 용병처음 들어갔을 때 소매치기를 배웠던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프리트가 밖으로 나와서 나에게 말을 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가?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어머나. 카일 씨에게 크림이 하얀 크림이 이렇게. 제가 깨끗하게 핥아드릴게요.”

 

“뭘 핥는다는 거야. 핥으려고 하지마.”

 

핥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입가에 있는 슈크림을 핥기 위해 점프를 한 윈디의 머리에 아이언 클로가 날아가면서 저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림에 대해 무슨 집착이 이리 심한지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 손을 밀어내면서 반짝이는 눈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크흐흐. 단념하세요? 그간 아이언 클로를 많이 맞아와서 이 정도의 고통은 저에게 쾌락으로 작용한답니다?”

 

“대체 네가 왜 정령왕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런 녀석이 바람의 정령왕이라...

이 세상은 뭔가 잘못 되었어.

 

그래도 이런 이유 하나 때문에 의뢰를 대충할 이유는 없으니, 서둘러서 크림을 닦아내고 학원제가 잘 되고 있는지 시찰하고 있는 아리엘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대부분의 경우 켈모리아의 옆에서 붙어 다닌다고 들어서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켈모리아가 하기 싫은 일은 대부분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일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아리엘의 고운 이마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저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놀랍네요. 엘리트들만 모여있는 카멜롯이라서 그런가? 보통 아이들이라면 체력이 받쳐주지도 않을 일들을 수행하고 있잖아요. 게다가 3발자국만 걸어가도 선물이나 사귀어 달라고 달라붙는 사람들까지 뿌리치니까. 아리엘이 받을 스트레스는 이만 저만이 아니죠.”

 

윈디는 아이언 클로를 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말을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는지.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고 윈디가 말 한대로 아리엘을 알아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서 접촉을 하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쓰고 있었다. 나는 윈디에게 아리엘에 대해 지켜보라고 한 뒤 바람장막에서 빠져 나와 이프리트하고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한 눈에 보이는 장소에서 아리엘을 노리는 검은 높새바람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프리트도 슬슬 동화해주세요.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수색을 시작할 거니까요.”

 

이프리트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몸 속으로 증발하듯이 사라지고 있는 사이에, 레시아와 시나를 내 앞에 불러내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내 앞에 2개가 그려지기 시작하면서 각자 검은 고양이와 하얀 올빼미가...

 

“크흐흐! 오늘이야 말로 주인에게 짐의 정성이 가득한 다크메터를 먹이겠노라.”

“오늘은 마스터에게 빛의 육포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대체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독극물은 다른 곳에다 버리고 왔으면 좋겠다.

 

“여전히 아침에 들이댔던 독극물을 나에게 줄 심산인가요? 다른 곳에서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서 처리하라고 말했잖아요.”

 

“하지만, 이걸 처리하기 전에 핵분열로 하면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노라. 따라서 이걸 먹으면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니까. 이걸 주인이 먹으면 오늘 하루를 힘차고 건강하게 보낼만한 에너지가...”

 

“내가 어디 발전소인줄 알아요? 그걸 먹고 핵분열 시키게? 게다가 그게 핵분열 할 때 쓰는 재료로 쓰일 정도면 이미 먹을 것이 아니잖아요.”

 

레시아는 작은 앞발을 핥으면서도 “그런가?”라고 물었다. 이 세상에서 아직까지 나오지 말아야 할 물질을 레시아가 창조하고 있었다니. 이름만 암흑물질이지 완전히 우라늄아냐? 그걸 사람 입에다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는 건가?

 

“빛의 육포는 고대에 빛이 탄생했을 무렵 먹을 것이 없었던 여신이 먼저 창안해낸 것으로...”

 

“시나가 다른 곳에서는 창세의 여신이라는 건 알겠지만, 그때 당시에는 육포라는 개념조차 없었잖아. 그 이상한 광선검처럼 생긴 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차라리 제다이에게 줘서 무기로 사용하라고 해.”

 

하얀 올빼미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꺾어서 갸웃거리고 있었다. 우라늄이든 광선검이든 우선 먹을 수 있는 물건들은 아니니까. 잡담은 이 정도로 했으니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검은 높새바람 소속의 스파이든 뭐든 찾아야 하지만, 너무 많은 인파로 하나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레시아와 시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것이지만...

 

“다크메터를...”

“빛의 육포...”

 

그 2개의 물건들은 아직까지 내가 집중을 해야 할 정도로 트집을 잡아야 할 요소들인가? 루니아 누나의 음식과 맞먹는 수준의 독극물을 먹고 이 세상을 떠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라서 최대한 사양해야겠지.

 

“모두 그만하고 제발 저 좀 도와달라니까요?”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 높새바람은 아직도 없노라. 어제와 똑같은 상황인데 뭐가 불만인가?”

 

“그러니까 제가 레시아와 시나를 부른 거죠. 어제와 똑같이 습격하지도 않고 그저 평범하게 보내는 일상처럼 있는 것이 말이에요. 내부 상황은 이제 확실하게 알아냈으니까 이제 외부 상황을 둘러봐야죠.”

 

“외부 상황이라면 학원 밖을 말하는 겁니까?”

 

시나는 나에게 질문을 했다.

 

“안에서 학원제가 안전하게 진행되는 동안 외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해야지. 사실상 크로우가 학원의 대결계 내부로 들어오지 않는 이유가 다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검은 높새바람의 입장으로 보고 그걸 역추적을 하자는 소리야.”

 

이런 견고한 대결계를 무슨 수로 침투할 수 있을까? 촉매제가 있다면 내부에서 부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밖에는 풍기위원들이나 마법 기동반이라고 불리는 켈모리아의 사설 병단에서 전부 감지하고 제거하기 때문에 별 다른 일은 없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어이 무식하게 수상한 녀석.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무식함을 뽐내면서 수상하게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기분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양아치 같은 어조는 기억에 있었다. 마법 무투제에서 한번쯤 만난 적이 있는 카를로스라는 학생. 아리엘과 같은 검은 망토를 두르는 걸로 보아 마법 기동반 소속으로 변한 듯 했다.

 

“나는 무식하지도 않고 수상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데? 애초에 켈모리아 학원장의 부탁을 받고 이곳에 온 거니까. 그보다 여전히 상의는 일부만 노출하면서 다니는 건가? 여자들에게 좋은 어필이라고 생각하긴 한데. 역으로 신고 당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네.”

 

“이상한 고양이나 올빼미와 같이 다니는 댁보다는 자연스럽거든?”

 

“고양이와 올빼미가 뭐가 나쁘다고 그래? 그리고 이상하지 않아. 상당히 귀엽다고? 너도 고양이가 따라다니면서 애교부리면 마지못해 받아줄 녀석이.”

 

다만, 이런 호전적인 녀석이 마법 기동반에 있다면 실력은 진짜란 소리일까?

 

“소개가 늦었네. 나는 엘티노스 잡화점의 주인을 맡고 있는 카일이라고 한다. 너는 분명 아리엘의 친구인 카를로스라고 했었지?”

 

날카로운 눈이 커지고 당황한 표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머리에 식은 땀이 찔끔 나오는 걸로 보면 분위기로는 내가 압도하고 있는 상황. 엘티노스 잡화점의 주인이라는 것보단 아리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비중이 더 크겠지.

 

“정말로 잡화점의 주인이란 소리야?”

 

“그럼. 애초에 네가 흉을 본 고양이와 올빼미는 내 사역마야. 사과하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겠지만 다음에는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나에게 있어선 중요한 사람들이거든 결혼까지 했고.”

 

“그 사역마들은 그럼 본 모습은 따로 있다는 거네. 게다가 오히려 그 사역마들의 힘이 댁보다는 더 강해. 그런데도 어떻게 저런 사역마들을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거야?”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군.

아무래도 나를 무식하게 수상하다고 말한 것은 실질적으로 레시아와 시나를 감지한 카를로스가 나밖에 없으니 하는 소리였나 보다.

 

[주인. 이 아이는 이상하게도 발록과 유사한 피를 가지고 있다. 외견은 인간이지만 어째서인지 내부가 기묘하게 뒤틀린 것처럼 보인다.]

 

아리엘의 경우에도 외견은 인간과 다를 것이 없지만 마신의 피가 흐르고 결국 몽마로 각성했는데. 마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호문쿨루스와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호문쿨루스라는 것은 올바르지 않지. 선천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실험으로 인해 내부가 바뀌어버린 실험체라고 말해야 정확한 것을...

 

“너 할 일은 없는 거냐?”

 

머리를 완전히 갈대처럼 올라가 있는 카를로스는 잠깐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내가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러면 너는 지금부터 나를 호위하도록 해라. 어차피 그 모습으로 이곳에 온 손님들을 호위하거나 대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양아치 같은 모습은 개성이 넘쳐서 좋지만, 그게 먹히는 것도 최소 1년밖에 안 될 거야. 그러니 머리라던가 분위기를 온화하게 만든다면 좋겠지.”

 

“댁도 아리엘 같은 말을 하고 있네. 스타일이나 분위기라던가 그건 내가 알아서 결정할 일인데 말이야.”

 

머리를 긁으면서 나와 거리를 살짝 좁힌 카를로스는 나를 따라서 대결계 외부를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레시아와 시나는 내 양쪽 어깨를 모두 자리잡은 상태였고, 카를로스는 나에게 관심은 없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는 분위기가 어색한지 침묵을 깨고 질문을 했다.

 

“당신은 약하지?”

 

“뭐. 솔직히 너와 붙어서 제대로 이길 자신도 없다.”

 

나는 순순히 대답을 하면서 카를로스의 기라도 살려주기 위해 최대한 내 자존심을 깎아서 이야기를 했고, 카를로스는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경계를 했다.

 

“거짓말을 얼굴표정 하나 안 바뀌고 말하는 건 처음 봤어. 당신 의외로 무시무시하구만? 게다가 필요하다면 체면을 깎아서라도 이득을 취한다는 그 정신이야 말로 무시무시해.”

 

“생긴 거치곤 정말 머리가 활발하게 잘 돌아가는 군. 적들이 너의 모습을 보고 겉으로만 판단하고 있을 때. 너는 적의 심리까지 읽는다는 소리인가. 확실히 카멜롯에 있는 애들이 왜 엘리트라고 하는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

 

“그런데 왜 대결계 주변을 서성이는 거야?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사실 아리엘을 몰래 호위해달라는 켈모리아의 부탁을 받았지만, 지금은 윈디에게 맡기고 오는 길이거든. 그런데 말이야, 너는 만약 검은 높새바람이라면 이런 대결계를 뚫고 오고 싶으냐?”

 

카를로스는 자동으로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다.

아무리 자신이 잘 숨을 수 있다고 해도, 혹은 결계에 대해 잘 안다고 해도, 상대는 과거에 엘티노스가 한 것처럼 모든 마법을 전부 정복한 괴물이다. 절대로 정면으로 치고 오는 일은 불가능한 일. 나는 옆에 있는 카를로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카를로스. 너 특기가 뭐야?”

 

“특기? 싸움은 제대로 하는데?”

 

“다행이네. 몸이나 풀어둬. 이것만 확인하면 곧바로 싸우러 가야 하니까.”

 

 

정면에서 뚫고 올 수 없는 결계를 상대하는 방법이라면, 내가 알기로는 공중이나 땅바닥에서 뚫고 오는 방법이 있지만, 조용히 한 곳에 구멍을 뚫어서 그 틈을 몰래 메우는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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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쓰는 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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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7 - 3

428

 

 

 

1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그 이상한 여장에서 다시 처음에 입던 옷으로 돌아와 켈모리아에게 사진을 주고 상담을 하려고 했다. 그 이전에 내 여장모습을 보고 폭주했던 아리엘은 내가 무심결에 사용한 아이언 클로로 인해 기절해버렸고, 비어있는 쇼파에서 사역마로 추정되는 소년에게 간병을 받고 있었다. 그나저나 알 수 없는 알코올 향이 켈모리아에게 날려왔지만, 겉보기에는 아직까지는 멀쩡해 보였으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켈모리아의 정신이 멀쩡한 것은 아니었으니...

 

“빛보다 빠른 아이언 클로는 언제나 위협적이네. 카일의 필살기는 그걸로 할 생각이야? 포인트와 특성은 얼마나 찍을 건데?”

 

“제 필살기가 아이언 클로라니? 제가 어디 프로레슬러라도 되는 줄 알아요? 그보다 포인트와 특성은 또 뭔데요?”

 

“예를 들어서 전기특성을 활성화 한다면, 아이언 클로를 하면서 전기 고문까지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필살기가 되기도 하고, 빛으로 특성을 활성화 하면 아이언 클로가 샤이닝 핑거로...”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시죠.”

 

하멀 씨가 준 사진을 건네주면서 켈모리아의 대답을 듣기 위해 조용히 있자, 켈모리아가 나에게 답해준 것은 검은 높새바람에 ‘크로우’라는 남자라는 말이었다.

 

“크로우가 이곳에 찾아와서 난동을 부린지는 좀 되었지만, 레이나 씨의 남편이 염사를 해서 카일에게 몰래 가져다 준 것으로 보면, 위험인물이 이곳에 찾아올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해. 크로우는 나에게도 개인적인 원한이 있지만, 최근에는 검은 높새바람이 아리엘에게 집착을 하기 시작했거든. 오늘은 내가 어떻게든 지킬 수 있으니 상관은 없지만, 내일은 카일이 아리엘을 보호해주길 바랄게. 그렇다고 내 귀여운 비서를 뺏어가지마?”

 

“뺏어간 적 없어요. 아리엘에게 백장미만 보여주지 않았어도 애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아리엘의 순간적인 맹습은 초기에 레시아의 습격과 비슷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리엘의 경우에는 뿌리치고 나올 수 있다는 것이고, 딱히 여장을 하지 않으면 이상한 스위치가 켜지듯 아리엘이 폭주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할까?

 

백장미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지금, 언젠가는 백장미든 뭐든 다 불질러서 없애는 것이야 말로, 내가 살아가면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적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좋으니까. 나는 크로우에 대해 물어봤다.

 

“크로우라는 남자가 왜 위험한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음. 한마디로 말하면 사기캐릭터라고 할까? 그거 있잖아. ‘아군으로 되기 전까지는 이 녀석이 최종보스다.’라는 느낌.”

 

“자세하게 말해야 대처하죠...”

 

알코올이 켈모리아의 뇌를 직접 흔들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너무 성의가 없었다.

 

“크로우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모방자’<imitator>라고 불려질 정도로, 모든 사람들의 기술을 따라 할 수 있어. 사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크로우도 강해지는 귀찮은 녀석이지. 애초에 타인의 검술만 빼앗을 줄 알았더니, 어떻게 각성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생물의 특성이나 마법마저도 모조리 모방해버리고 있어. 이렇게 된다면 카일의 유일한 필살기인 아이언 클로마저 모방하고 말겠지.”

 

“아이언 클로를 대체 왜 모방하는데요.”

 

설명만 들어보면 은근히 까다로운 적이다. 덤으로 마법까지 모방한다고 하면 나의 시공간마법마저 모방할 수 있을까? 모방에 대한 조건을 알아야 하는데...그건 나중에 따로 알아서 생각을 하도록 할까?

 

“켈모리아는 상대해본 적이 있나 보죠?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복수를 위해서 습격을 감행했을 것 같은데요?”

 

“아. 그랬지. 하지만 자신의 기술에 자기가 당하는 바보는 이세상에 없거든. 만약 크로우에게 마법으로 당했다면 엄청난 비웃음거리로 변했을 거야. 그래도 나는 모든 마법을 유일하게 지배한 제 2의 엘티노스라고 불리는 천재. 켈모리아 마그누스라고?”

 

“제 2의 엘티노스는 아직까지 쓰는 거에요? 그거 그냥 자칭이잖아요?”

 

“그래도 마법을 지배한 건 맞잖아?”

 

켈모리아의 왼손에는 작은 잔이 있었는데, 오른손을 보았을 때는 녹색의 병에 들어있는 투명한 액체를 따르고 있었다.

 

“그게 뭐에요?”

 

“이거? 어른들만의 이슬이라고 해야 할까?”

 

대체 그게 왜 여기 있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심호흡으로 어떻게든 마음속을 진정시킨 뒤에 천천히 물어보았다.

 

“술을 많이 좋아하시네요. 켈모리아.”

 

“귀여운 것도 많이 좋아한다고? 다만, 카일에게 손을 댄다면 무시무시한 참사가 한 가득 일어날 것 같아서 무서워. 아리엘은 뭣 때문인지 몰라도 나보다 카일을 더 좋아하고 있고 말이야.”

 

“댁이 백장미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올바르고 씩씩하게 성장할 아이였어요. 다만...”

 

내가 말의 흐름을 잠깐 길게 늘여놓은 이유라고 한다면, 아까 아리엘에게 붙잡혔을 당시의 위화감이 손목에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항하는 힘을 순식간에 앗아가는 정체불명의 능력. 마법 무투제에서 대면한 아리엘하고 상당히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의 아리엘은 정확한 정체가 뭐죠?”

 

“몽마야. 마신의 피가 각성하기도 했고, 릴리스의 힘을 대부분 흡수하기도 했고, 아주 정확하게 뭐라고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리엘 나름대로의 선택이었지. 방금 전에 카일이 저항하지 못하고 아리엘의 힘에 짓눌린 것은, 아리엘의 힘이 강한 것이 아니라 릴리스의 힘이 카일에게 일시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든 거고, 그 힘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해. 그 덕분에 나는 카일과 아리엘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기도 하고.”

 

조그마한 잔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캬하!”라고 탄성을 내뱉는 켈모리아에게 말했다.

 

“켈모리아의 성격이라면 분명 ‘특수하고 귀여운 비서를 얻고 싶어!’라고 생각해서 멋대로 릴리스에게 보낸 거 아니에요?”

 

“어라? 카일에게 독심술이 있던가?”

 

찍었는데 맞았군.

 

“독심술이 아니라 켈모리아의 성격을 추측하면 알 수 있죠. 쾌락주의자가 하는 일은 대부분 즉흥적이니까요. 하지만 아리엘은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인 거에요?”

 

“응. 잘 적응하고 있어. 제대로 된 비서를 두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이유도 아리엘이 잘 적응해주기 때문이지. 그런데 그건 왜?”

 

“그럼 아직까지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았다는 소리가 되겠네요. 그러니 옆에서 제대로 지켜봐야 할 거에요. 마음속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고찰을 계속해서 하고 있을 거니까.”

 

고운 회색모자를 눌러쓰면서 켈모리아 앞에서 일어났을 때는 아직까지 늦은 오후를 알리는 태양이 반짝이고 있을 때였다. 카멜롯 마법학원 밖을 나가고 있을 때. 옆에서는 나를 부르는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형씨. 잡화점의 주인 맞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눈을 흘리기 전에 날아오는 참격을 티르빙으로 변환한 단검으로 막아내고 거리를 떨어뜨리자. 사진 속의 남성과 얼굴이 매우 똑같았다.

 

“이야. 이곳에 오면 잡화점의 주인과 만나서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정말 오라클의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받는단 말이지?”

 

“크로우라고 하던가? 다른 이명으로는 모방자라고도 하고?”

 

“그 학원장에게 나에 대해 들어서 잘 알고 있잖아? 그런데 마왕과 여신으로 추정되는 동물들이 안 보이는데?”

 

탐욕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지만 레시아와 시나는 지금 내가 돌아간다는 텔레파시를 보내서 잡화점으로 귀환한지 오래였다.

 

“무슨 용건인지 몰라도 내 사역마에게는 다가갈 수 없을 거야.”

 

“하하. 진정해 형씨. 오늘은 싸우려고 온 게 아냐.”

 

‘오늘은’이라는 말에 내 눈 무의식적으로 움찔거렸다. 오늘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고 하면, 내일은 성대하게 부수기라도 한다는 소리인가? 여전히 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남자를 보며 손에 있는 무기를 사브르로 늘려서 길이를 늘렸다.

 

“그런데 말이야. 당신은 너무 약하지 않나?”

 

“약하다고 해서 봐준다는 말은 안 하겠지?”

 

내가 적의를 드러내자마자 거대한 강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안에 있는 윈디가 나의 감정에 반응을 해서 적을 찢어놓을 준비를 하자, 크로우라고 불리는 남성은 유효사거리 밖에 나가는 듯이 뒤로 천천히 이동하며 잘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하. 말로 합시다 말로. 그쪽의 강점은 애초에 주변에 있는 사람이 강하다는 것뿐이잖아? 지금도 몸 안에 불길한 걸 품고 나에게 덤비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쪽의 노림수는 이미 다 간파한 상태라고?”

 

의외로 짜증나게 도발을 하면서 실실거리고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계속 검을 든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상대의 살기에 반응해서 움직이려는 몸을 간신히 제어하면서 나는 크로우에게 입을 열었다.

 

“나를 만난 목적부터 이야기 해주실까?”

 

“그야 당연히 동료로 섭외하려고 온 것뿐이야. 이렇게 몰래 만나는 짓을 잘 하지는 않지만, 검은 산들바람의 창시자인 엘티노스의 정식 후계자로, 우리 높새바람에 들어와서 리더로 이끌어달라는 거지. 형씨가 강한 이유도 카리스마가 아니겠어? 기묘하게 여자가 홀리는 것은 덤으로 따라오던가?”

 

“너는 협상하는 것에 있어서 최악을 달리는 수준이군. 그냥 노골적으로 내 제안을 거절하라는 말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뿐이야. 애초에 높새바람에는 지도자가 따로 있을 텐데?”

 

“고위 간부들은 여성분들이기도 하고, 백장미를 애독하는 사람들이거든. 댁만 온다면 나는 그 옆에서 콩고물이라도 얹어먹듯 이익만 취하면 돼.”

 

완전히 야생동물이 따로 없었다.

죽은 시체나 주어먹는 까마귀나 다를 바가 없군.

나는 눈을 감으면서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티르빙을 본래 귀걸이 모양으로 변형시켰다.

 

“어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검으로 치고 나간다면, 곧바로 반격을 해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 천천히 검을 거두고 쿨하게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억지로 도발하지마. 적어도 네 독단으로 날 죽이지 못하는 건 알고 있으니까.”

 

“어라? 들켰네? 크큭.”

 

크로우 또한 검을 집어 넣고는 사진을 펼쳤다.

저 사진은...

 

“그런데 어떻게 성전환마법을 이용하면 이런 사람이 나오는 걸까? 내가 너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여자 쪽이지만. 그러고 보니 여자일 때의 유전자는 엘티노스와 거의 동일하다면서?”

 

무시무시한 정보력이다.

스카우트가 있다면 정보수치가 10만을 넘어가서 터졌을 거야.

 

우리는 검은 높새바람에게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저쪽은 나에 대한 것이 구멍 난 독에 물이 흐르듯 계속해서 세어나가고 있었으니. 이대로 간다면 아무것도 못하고 철저하게 당하는 것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크로우를 잡을 상황도 아니었다.

모방자의 눈 앞에서 힘을 함부로 드러내면, 역으로 당할 수 있는 건 내가 될 테니까.

어디까지 모방을 할 수 있는지 그 기준점과 특징을 찾기 전까지는...

 

“내일은 기대가 돼. 무슨 일이 터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니까.”

 

“내일을 기대하지 마라. 무슨 일이 터져도 생각해도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내일을 기대하는 크로우와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나의 대면은 그 뒤로 종료했다.

검은 깃털만 날린 체 순식간에 사라진 남자의 형체는 찾아볼 수 없었고, 나는 오른손을 화가 쌓인 가슴에 대면서 천천히 말했다.

 

“잘 참았어요. 이프리트. 윈디.”

 

 

두 정령왕의 분노를 다루지 못했다면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지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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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시공을 하다 좀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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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쓰는 단편선

좋아한다고 말해

늦은 봄 끝자락. A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도착할 때가 됐는데…… 그러자 그곳에 B가 있었다. B가 A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 손을 흔들며 웃는 모습에 가슴이 떨렸다. A가 그 모습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이번에 꼭 말하는 거야.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할 말이 뭐야?”

B가 어느새 A의 앞에 도착했다. 가로등 불빛 탓일까? A의 눈에 평소보다 그녀가 밝게 보였다. A가 자신의 옷자락 끝을 부여잡았다.

“아니, 그, 하고 싶은 말이 말이야……”

사실 여기서부터는 간단히 일이었다. 장황하게 말할 것도 없었고 무언가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저 한마디면 됐다. 좋아해. 이 한 단어를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A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A는 오늘은 분명 말하자고 다짐했다. 집을 나올 때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고 수 없이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도 언제나처럼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응? 할 말 있어서 부른 거 아니야?”

“아니. 그게 맞기는 한데.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건 맞는데……”

A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입술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통증에 눈을 찡그렸다. 아아. 이번에도 안 되는 모양이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벌써 몇 번이나 고백하려고 했으나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성공이라는 말을 하는 것조차 민망하다. 왜냐면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A가 우물쭈물 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B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무어가 그리 신나는지 A를 향해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슬며시 A에게 다가왔다.

“할 말 산책이나 할래? 여기 산책로 예쁘던데.”

“산책로?”

“응. 여기 산책로 벚꽃이 피어서 예쁘거든. 지금쯤이면 벚꽃이 떨어졌나? 혹시 올해 벚꽃 구경 갔었어? 난 올해 못 갔는데.”

A가 고개를 저었다. A도 올해 벚꽃 구경을 가지 않았다. 애초에 갈 이유가 없었다. A로서 벚꽃에 어떤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A가 보고 싶었던 것은 벚꽃을 구경하는 B의 모습이었다. 그런 B가 없으니 당연히 A도 벚꽃을 보러 가지 않았다.

“그래? 그럼 지금이라도 가보자. 혹시 운이 좋다면 벚꽃이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B가 A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앞장섰다. A가 B에게 끌려가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이런 B의 모습에 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A 자신과는 다른 당돌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A가 천천히 B의 뒤를 따라 산책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뜨거운 햇살이 넘치던 낮과는 달리 밤은 고요하고 시원했다. 살짝 추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A도 B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은 강물 소리를 들으며 걸어갔다. 주로 B가 앞장서서 가면 A가 그 뒤를 따라 갔다. 이따금씩 찬바람이 불어오기도 했지만 A는 그마저도 좋게 느껴졌다.

“난 말이야. 이 시간에 산책하는 걸 좋아해. 뭐랄까 침착하게 된다고 할까? 아니면 생각이 깊어진다고 할까? 아무튼 밤에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야.”

B가 깡충깡충 걸어가며 얘기했다. 무어가 그리 기쁜지 뛰어 가는 모습이 마치 토끼 같았다. A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후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는 어때? 너도 밤에 산책하는 거 좋아해?”

“나? 글쎄…… 잘 모르겠다.”

A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B와 다르게 A는 그다지 밖에 돌아다니는 편은 아니었다. 집 밖보다는 집 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굳이 나갈 일이 있다면야 나가는 편이었고 그마저도 한 번에 모든 일을 해결하는 편이었다. A에게 있어서 바깥은 귀찮음의 연속이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한다면.

A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두운 밤, 산책로에 사람이 얼마 없었다. 원래라면 A 또한 그랬을 것이다. 이 시간에 밖에 있다는 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A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대 자주 집을 나오곤 했다. 그건 B가 있기 때문이었다.

A가 유일하게 스스로 집을 나가는 경우는 모두 B와 관련된 것이었다. B가 난데없이 술을 마시자고 하며 흔쾌히 나가고, 늦은 밤 연락이 와도 불평하나 놓지 않았다. 처음에 A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매번 반복되면서 이제는 당연하게 되었다.

“왜? 산책하면 기분 좋지 않아? 한번 맡아봐. 이 상쾌한 밤공기를.”

B가 쓰읍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개구쟁이처럼 숨을 들이 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A가 빵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이랬다. B와 함께라면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B를 좋아했다.

‘역시 좋아하는 구나.’

새삼스럽게 A가 느꼈다. 단순한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외모 때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B에 대해 생각을 하고, B와 한순간이라도 더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지나가며 예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B에게는 외모보다 근본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능력이었다. 주위 사람들을 재미있고 기쁘게 하며 끌어당기는 매력이야 말로 B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B가 불쑥 A에게 다가와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A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쿵쿵거리며 날뛰는 심장 탓에 숨이 흐려졌다. A가 B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에서도 B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고백을 해서 잘 안되면 다시는 이렇게 만날 수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A의 가슴의 통증이 느껴졌다.

A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만일 고백을 했다가 잘 안되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어쩌다 운이 좋아 없는 일로 한다하더라도 예전과는 다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더 최악이 될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A가 씁쓸하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 어쩌면 여기서 고백을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냥 언제나 그렇듯이 넘기면 오늘과 같은 관계는 유지될 것이다. 비록 얻는 것이 없다고 한들 잃는 것도 없다. A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역시……

그 순간 B가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A의 손을 잡았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온기에 A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눈앞에 B가 보였다. 귀 끝이 살짝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난 말이야. 아까도 얘기했지만 산책하는 걸 좋아해. 근데 그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어. 그게 뭔지 알아?”

드물게 B가 작게 물었다. 수줍은 아이 마냥 몸을 꼬는 모습에 A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을 간질이는 감가에 헛기침이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깊고 맑은 눈동자를 통해 서로의 모습이 보였다. A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

B가 싱긋 웃었다. B가 고개를 슬며시 내밀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가 되고 나서야 B는 멈췄다. B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A의 양 볼을 손으로 감싸고 A를 바라보았다. A가 숨을 들이마시자 B의 숨결이 스며 들어왔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산책하는 거.”

B가 재빠르게 고개를 뺐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짓궂게 웃었다. A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잘 못 들었나? 그런 A를 향해 B가 다시 한 번 다가왔다.

“그러니까 너무 고민하지 말고 얼른 말해.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가버린다.”

A가 피식 웃으며 B에게 다가갔다. 그런가? 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 하긴 기다려주는 것도 한계가 있겠지. 이렇게 보니 자신만 바보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한 마음으로 B에게 다가갔다.

“좋아해! 나랑 사귀어 줄래?”

“싫다면?”

“뭐?”

A가 놀라서 소리쳤다. 어두운 밤길 A의 목소리가 널리 퍼졌다. B가 그 소리를 듣고 깔깔 거리며 웃었다. 뒤 이어 혀를 내밀었다.

“고백하는데 오래 걸렸으니 대답도 오래 걸릴 거야.”

“하, 하지만 그래도 대답은 해줘야지.”

“장난이야. 장난. 너무 긴장한 거 같아서 긴장 풀어주려고 했던 거야.”

B가 싱긋 웃었다. 지금까지 B의 미소는 수없이 봐왔다. 하지만 그 어떤 미소도 지금 이 순간보다 빛나지 않았다.

B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A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다시 잡은 손은 온기가 가득하였다. 두 사람은 산책로를 걸어갔다. 두 손을 꼬옥 붙잡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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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쓰는 단편선

닿을 수 있다면

숨을 크게 쉬어본다. 양쪽 폐로 차가운 공기가 차오른다. 쓰라린 바람에 몸을 웅크렸다. 조용히 난간 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틈 사이로 차가운 강물이 보였다.
난간에 손을 가져갔다. 예상대로 차가웠다. 너무 차가워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래도 난간을 꼬옥 붙잡았다. 김형이 떠올랐다. 김형은 여기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김형이 어떤 생각으로 이곳에 온 걸까? 머릿속으로 김형을 떠올렸다.
퇴근 후 김형은 분명 혼자 이 다리 위로 왔을 것이다.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형은 맨 정신으로 이곳에 왔다는 얘기다. 맨 정신으로 다리 위에 올라와 난간을 넘어 저 강물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를 것이다. 강물로 사라지는 김형의 모습…… 김형이 떠난 뒤 매일 같이 김형 생각을 했다. 그렇게 결국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고개를 숙이자 강물이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물로 추정되는 것이 보였다. 늦은 밤이라 다리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출렁거리는 것이 마치 이리로 오라는 듯 손짓 하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을 기울이게 되었다. 점점 강물로 빨려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섬뜩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한 직감이었다. 논리적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뼈저리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떨어지면 죽는다.
이곳에서 강물을 보며 김형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난간에 몸을 기대어 다시 김형을 떠올렸다. 김형이 생전 이런 얘기를 했다.
“너 혹시 그 강다리에 있는 난간에 대해 아냐?”
“난간? 아. 그 자살하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거?”
“그래. 그거 말이야.”
“근데 그게 왜?”
“이상하지 않냐? 사람이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지 않고 죽기 힘든 세상을 만드니까 말이야.”
어쩌면 그날 했던 얘기는 먼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었을까? 고개를 젓고 난간을 잡았다. 그리고 그 위로 발을 올려보았다. 허리 위를 넘어가는 난간에 발을 올리려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덩이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 번 난간에 발을 올리려다 그만 또 넘어지고 말았다.
쓰라린 엉덩이를 붙잡으며 다시 일어나 난간을 붙잡았다. 이렇게 올라가기도 힘든데 김형이 무슨 재주로 이 난간을 넘어간 것일까? 이것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이곳에 오면 무어라도 알게 될 것 같았는데…… 김형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김형이 자살을 하기 전날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말이야.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한다는 말은 위선에 불과하지. 내가 느끼는 고통에 대해서 그 누구도 알 수 없어. 단지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이해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 뿐이야.”
“그럼 형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얘기야?”
“그래. 그렇기에 사람은 고독한 존재인거야. 또 그렇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고. 만일 정말로 이해하고 그 사람을 위했다면 그 사람이 죽게 내버려두며 안 되지.”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죽는 걸 막을 방법이 없다는 얘기야?”
“몰라.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다만 있다 해도 난 그 방법을 모르겠어.”
김형 또한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했다. 그 누구도 김형의 슬픔을 몰랐다. 심지어 나조차도 몰랐다. 몇 년을 일하고 친하게 지내던 나 또한 김형이 어째서 자살을 했는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다리에서 김형이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다리 밑으로 보이는 강물은 죽음이었다. 죽음 그 자체였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이었고 그것은 영원한 끝을 의미했다. 강물이 내게 언제든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분명 김형도 그랬을 것이다. 그 형 또한 나만큼 겁쟁이니 말이다. 그래도 김형은 나와 다르게 멈추지 않았다. 두려웠을 수도 있고 망설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김형은 몸을 던졌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 자리에 온다면 김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김형이 있던 자리에 서서 김형이 봤던 것을 바라보면 김형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이렇게 보면 결국 김형의 말은 다 맞았다.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슬픔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다. 타인이 감히 나의 슬픔을 측정할 수 없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가 느끼는 슬픔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그렇다면 김형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었던 걸까? 만일 그때 내가 김형의 곁에 있었더라도 김형은 죽음을 택했을까?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까? 그저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걸까?
그 순간 저 멀리 다리 끝 쪽에서 한 여자가 보였다. 어두운 밤이라 아무도 없을 터인데 한 여자가 흐느적거리며 걸어왔다. 처음에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귀신을 보는 것 같았고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가 난간을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난간에 올라갔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 보다 여자의 모습에서 김형이 보였다. 김형 또한 저렇게 난간을 올라갔을 것이다. 천천히 다리를 올리고 여자가 주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힘을 주어 난간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곧장 여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까 찧은 엉덩이가 쑤셔왔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계속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날 나는 김형을 막을 수 없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이 여자도 막을 수 없는 걸까? 딱히 좋은 방법이 생각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발을 움직였다. 너무 늦기 전에 재빠르게 뛰어갔다.
“저기요.”
마침내 난간에 도착하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헉 거리며 숨을 내뱉었다. 힘겹게 말을 했지만 여자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두 다리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난간을 잡은 손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가벼웠다.
“왜요? 나를 막을 생각인가요?”
여자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저 어두운 강물보다 시커멓고 무거웠다. 무거운 여자의 목소리가 내 귀를 짓눌렀다. 나는 여자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입을 떼려는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김형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람은 말이야.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그렇다. 나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 모르고 또 왜 목숨을 버리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느낀 절망과 슬픔은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슬픔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눈앞에서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만일 이곳에서 그녀가 죽는 다면 그것은 김형의 죽음과 같을 것이다.
“전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요. 당신이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자살을 하려는 지도 모르죠. 당신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당신의 슬픔은 오로지 당신의 것이니까요.”
여자가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주일 전. 이 다리에서 한 사람이 죽었어요. 그 사람은 저와 친한 사람이었죠. 전 아직도 생각해요. 어째서 그 사람이 자살을 한 것일까? 그래서 이 다리로 온 거에요. 그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요. 하지만 결국 알게 된 것은 없어요. 어째서 자살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 얘기를 왜 저에게 하는 거죠?”
“그때 그 사람을 막을 수 없었을까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을까요? 그 사람은 정녕 죽고 싶었던 걸까요? 사실은 누군가 자신을 말려주기를 원하지 않았을 까요?”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난간을 잡고 있는 손도 떨렸다. 그 순간 가슴 한구석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김형도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겠구나.
나는 손을 내밀었다. 여자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어갔다.
“봐요. 저기 강물. 저 강물에 빠지면 정말로 끝이에요. 모든 게 끝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끝내고 싶은 건가요? 그래요. 나는 몰라요. 당신이 누구인지도 어떤 아픔이 있는 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말리고 싶어요. 그렇게 사라지기에는 당신이라는 존재가 너무 아까워요. 그러니 이리로 와요.”
여자가 내 손을 붙잡았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얼른 여자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고 난간을 넘을 수 있게 온 몸으로 여자를 지탱해주었다. 여자가 다시 난간을 넘어왔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소름 끼치던 담담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자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 품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자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녀와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 번 김형을 떠올렸다. 김형의 말은 옳았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날, 김형도 그랬을 것이다. 김형도 죽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고 살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잠깐의 잘못된 판단으로 김형은 이곳에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곁에 있었다면 김형 정신을 차렸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행동의 무서움을 깨닫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더 빨리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때로는 이런 작은 손길이, 따스한 말 몇 마디가 사람의 목숨을 구해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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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7 - 2

427

 

 

 

팬케이크로 늦은 아침에 공복을 채우는 것은 정말 좋았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프리트는 다시 연인처럼 내 옆에 달라붙어서 오른쪽에 발을 맞춰 걷고 있었고, 윈디는 왠지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내 왼쪽에서 달라붙고 발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윈디의 이프리트의 외모 때문에 나는 순식간에 눈에 띄어버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 바보 같은 백장미를 들먹여가면서 쫓아오지 않는다면 다행이라고 본다.

 

“카일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이런 미인들을 옆에 끼고 돌아다니다니!”

 

“자화자찬을 그런 식으로 돌려서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교실 내부를 돌아다니며 윈디의 말에 태클을 가볍게 걸고 넘어지면서 나아가던 그때. 뜬금 없이 날아온 황금빛의 마탄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멀 씨? 누구 뒤에서 총을 겨누는 건 그만하시죠?”

 

카멜롯의 마법학원에서는 분명 하멀 씨의 아내인 레이나 씨가 있는 곳이니. 오늘 하루는 쉬고 이곳에 온 것일까? 아니면 하멀 씨도 나처럼 이곳에 검은 높새바람의 꿍꿍이를 파헤쳐달라거나.

 

“아니. 여자 둘을 끼고 행복하게 돌아다니는 평민이 아니꼬워서 나도 모르게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발포를 했지 뭐야. 대나무 창이라도 있었으면 너에게 찔렀을 거라고 생각해.”

 

“황금빛 죽도로 때리기 전에 조용히 하세요.”

 

하멀 씨는 사신이 생각나는 마법 수사관의 검은 제복을 입고 오지 않고, 오늘은 검은빛의 정장을 입었기에 평상시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사자의 갈기처럼 퍼진 금빛의 머리카락이 태양에 반사하는 동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금색의 눈동자는 살짝 날카롭게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여전히 30대라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의 20대 후반 정도의 외모를 자랑하는 하멀 씨는 마법공학으로 이루어진 권총을 집어넣고, 그 대신 담뱃갑을 꺼내 메론맛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근데 사소한 트집이지만...하멀 씨는 사탕을 꺼낼 때 “흡연은 우리 몸을 망가뜨립니다.”라는 문구가 신경 쓰이지 않을까?

 

“하멀 씨는 레이나 씨를 만나러 찾아온 거죠?”

 

“그런 거지. 내 마누라는 상당히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 혼자 쓸쓸해지면 죽어버린다는 말도 할 정도로 말이야.”

 

레이나 씨가 무슨 토끼도 아니고.

 

“너는 마왕님과 여신님은 어디에 두고 다른 여자들과 노닥거리고 있는 거냐. 특히 한 명은 그 악명 높은 정보상인 윈디 메르아잖아.”

 

“악명이 높다니! 저는 언제나 진실된 정보를 위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북에도 살짝 나타나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다 알아주는 정보상인이라고요?”

 

하멀 씨는 거대한 한숨을 노골적으로 내쉬면서 윈디를 쏘아보고 입을 열었다.

 

“정보상인이라면 정보를 조작하는 게 아냐. 그리고 너의 정보는 대부분이 노골적으로 카일과 카린의 테마로 집중 되어있잖아. 저번에는 카린의 모습을 한 평민이 갈아입는 장면을 사진에 찍어서 뿌려버리던데.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초상권침해라고 생각하거든?”

 

하멀 씨의 말을 흘려 듣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말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는 즉시 윈디에게 아이언 클로를 사용하면서 천천히 묻기로 했다.

 

“어이. 윈디.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크으읏! 어, 어째서 저 마법 수사관이 그 일을 다 아는...끼아아아앗!”

 

“사진을 찍어서 뿌려버리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그래도 더 유명해지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요!”

 

남의 사진을 찍어서 유명해진다고 한들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뿌려버리다니? 이게 개그가 주된 것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 사진으로 협박을 받아서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이상한 사람까지 추가될 뻔했다.

 

“아무튼 이 사진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전에 내 수사에나 협력하시지.”

 

이상한 사람 추가요.

 

“하멀 씨는 인성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겁니까?”

 

내가 힘껏 경멸한 눈으로 쳐다보자 하멀 씨는 무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농담이야. 아무튼 이런 사진인데 거의 다 갈아입고 스타킹을 잡아 올리는 사진이니 그리 걱정하지는 말라는 거야. 속옷이라던가 그런 건 찍힌 것이 없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안심하라는 거지.”

 

윈디에게 걸어 넣은 아이언 클로가 해제되고, 다른 손으로 문제의 사진을 보면서 그다지 이상한 것 없이, 하멀 씨의 말대로 평범한 수준의 갈아입는 사진이었다.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난 뒤에 하멀 씨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검은 높새바람은 어디까지?”

 

“여전히 정보가 부족하지만, 여러 강대한 귀족이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게 더 골치 아파. 게다가 그 녀석들이 악신을 찾아서 이리저리 뛰어다닐 줄 알았지만, 의외로 조용하게 노출되지 않고 점점 세력을 퍼트리기 시작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들과 관련이 되어버린 네가 불쌍할 정도야.”

 

“하멀 씨는 아니라고 생각하나 봐요?”

 

“그야 당연하지. 나는 마법 수사관이라고? 비록 이제는 내가 평민보다 약할지 몰라도 나를 잘못 건들이면 일이 꼬여버리는 지는 그들의 몫이니까. 일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선 수백만 가지의 방법을 전부 다 알고 있어.”

 

“누가 하멀 씨를 적으로 만들겠나요...그런데 한가지 물어도 될까요?”

 

하멀 씨는 사탕을 문체로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이곳에 검은 높새바람이 숨어들어올 가능성을 제시하고 켈모리아가 저에게 부탁한 건데. 지금 마법학원 안에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되요?”

 

“1%겠지. 너도 켈모리아에게 이런 팔찌를 받았을 거 아냐?”

 

하멀 씨는 오른손으로 녹색의 팔찌를 보여줬고, 나 또한 오른손을 들어 보여줬다. 만일 검은 높새바람이라고 추정되는 사람이 있다면, 마나를 팔찌에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폐쇄된 결계를 만들어내는 포획용 마도구.

 

“하지만 1%라면 오늘 하루는 정찰만하고 2일째부터 본격적인 시간이겠네요?”

 

“그게 기본이니까. 다만, 너도 느껴지지 않아? 그 녀석들은 카멜롯보다 더 심한 괴물들이 모여있는 단체야. 그런데 정찰을 한다고 해서 이곳에 숨어들어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아니겠죠. 레시아와 시나에 의해 발견될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그럼 그 녀석들은 대체 어디서 보고 있는 걸까?”

 

수수깨끼 같은 하멀 씨의 말에 섣불리 대답을 할 수 없었지만, 후보라면 딱 한가지 존재하기 마련.

 

“공중이겠네요.”

 

“하늘에서는 확실히 우리 모두 지켜볼 수 있지. 게다가 투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도 다 보고 있을 테고 말이야.”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적을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추측상 마법학원의 결계 밖에서 보고 있는지 하멀 씨는 머나먼 푸른 하늘을 창문을 통해 바라보기만 했다.

 

“검은 높새바람은 서서히 강하게 불어오기 시작할 거야. 그 강한 바람에 맞서서 우리가 이겨낼지. 아니면 무참히 쓰러질지는 우리에게만 달린 것이 아냐. 그들에게 지원을 받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검은 높새바람을 쓰러뜨리는 우리가 적이 되기 마련이지. 검은 높새바람이 무슨 연유로 악신을 소환해서 이곳을 다 날려버리려고 하는지 아직까지는 모르겠지만, 저번처럼 월식에게 잠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좋아. 너마저 적이 되어버리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지거든.”

 

“어릿광대는 어떻게 월식을 이겨낸 거에요?”

 

“그건 나도 모르겠다. 어릿광대 자체가 월식인지, 아니면 다른 수단을 사용해서 자신의 힘으로 만들었는지.”

 

이미 그들은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단정짓는 하멀 씨의 말처럼 신뢰가 가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쯤 학원제에서 소동을 일으키냐는 것인데. 하멀 씨는 가벼운 인사만 남기고 나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을 무렵. 이프리트는 나의 볼을 검지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카일. 카일.”

 

“왜, 왜 그래요? 이프리트? 아픈 건 아니지만 이게 뭐 하는 건지 알 수 없는데.”

 

“주머니 속에 있는 사진 점점 열이 올라가고 있거든?”

 

무의식적으로 사진을 집으면서도 “에이. 무슨 사진이 온도가 올라간다고?”라고 말하며 꺼냈을 때는 이상한 불에 타고 있는 사진을 보며 기겁했다.

 

“하멀 씨가 무슨 암살하러 온 것도 아니고! 어째서 사진에 불이 붙은 건데?”

 

만약 이프리트가 나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내 손은 벌써 화상을 입고, 옷 또한 모조리 불에 탔을 거라 생각했던 그때, 이프리트가 왼팔을 살짝 휘두르자 사진에 불은 꺼지기 시작하고, 이상한 남자가 사진에 비춰지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확실히 본 기억이 없는데. 까마귀 깃털이 한 가득한 옷이라...분명 하멀 씨는 뭔가 메시지를 주고 싶어하는 걸지도 몰라요. 이 사람을 조심하라던가. 아니면 이 사람을 제발 처치해달라던가. 이건 켈모리아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겠네요.”

 

윈디와 이프리트는 내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내 양손을 각자 붙잡고 나아갔다.

 

“그럼 학원장님께 가볼까요!”

“학원장에게 가자.”

 

윈디는 대체 뭐가 신났는지 모르겠고 이프리트는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는 멍한 눈으로 힘차게 나아갔다. 저 둘 때문에 나도 자연스럽게 끌려가는 구도로 되어버린 체. 켈모리아가 자주 있다는 도서관으로 발 걸음을 옮겼다.

 

***

 

마법학원의 도서관은 주로 켈모리아가 자주 있으니 그곳이 학원장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항상 이곳 도서관 매우 깊숙한 곳에서는 켈모리아 학원장을 도와주는 비서 아리엘이 있는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일 처리를 하는 걸 보아,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라고 볼 수 있다. 장래가 기대되는 외모와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미스 카멜롯에 뽑히기도 했는데.

 

“싫어! 제발! 그만 찍어!”

 

“무슨 소리야? 아리엘. 나에게 험한 말을 한 벌은 받아야지.”

 

남자 집사 복을 입은 상태로 어중간한 남장을 하고 있는 아리엘의 두 눈에서 눈물방울이 흐르기 시작하고 있을 때. 도서관에 눈치 없이 들어온 나를 저주하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켈모리아와 살려달라는 눈으로 구원요청을 하고 있는 아리엘을 번갈아 본 나는...

 

“실례했습니다.”

 

“구해줘야지! 어딜 가는 거에요! 카일 씨!”

 

“그러게. 남자가 어린 소녀를 버리고 가면 안 돼.”

 

나는 인사를 하고 가려고 했었지만 두 사람은 날 놔줄 생각이 없었나 보다. 그보다 아리엘이 구해달라고 할 정도면 얼마나 심하게 혹사하고 있는 건지.

 

“진전이 없나 보네? 이런 곳으로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켈모리아는 상기된 볼을 감추려는 듯 양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가리면서, 아까와는 전혀 다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분명 저거 차이나 드레스라고 마리아가 말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붉은 색이 바탕으로 되어있고 금색의 용이 그려져 있었다.

 

“하멀 씨가 준 사진에 이상한 남자가 찍혀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뭐하세요?”

 

도서관에 오기 전에 이프리트와 윈디는 동화상태라서 내 몸 속에 있으니, 서슴없이 나에게 다가와서는 어깨와 팔, 배, 허리 등. 여러 곳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음. 대략 잘 알았어.”

 

-따악!

 

“뭘 잘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손가락은 왜 튕기시는...”

 

하지만 나의 질문을 잘라버리고 켈모리아가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너의 복장은 메이드 복이다!”

 

“멋대로 내 옷을 바꾸지 마! 가발도 씌우지 마!”

 

우연히 봐버린 거울에는 새하얀 메이드 복장을 하고 금색의 긴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켈모리아에게 트집을 잡고 있는 나의 모습이 처량하게만 보였다. 그렇군 내 몸을 만지작거린 이유가 수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였나? 그래서 그런지 옷은 잘 맞았다.

 

“자. 아리엘. 이제 흑장미에 나갈 포즈를 찍을 거니까. 카일을 쇼파 위에서 덮쳐 누르도록 해.”

 

“그런 무리한 주문을 아리엘이 할 리가 없...”

 

내 뒤쪽에서 음산한 기운을 감지하는 바람에 고개가 자동으로 천천히 아리엘 쪽을 향해 돌려지기 시작했다. 이미 도약준비를 끝마쳤는지 자세를 낮추고 있는 아리엘을 보며, 맹수를 달래듯 양팔을 좌우로 펼치면서 몸을 낮추고 있었다.

 

“카일 씨. 너무 반칙적으로 귀엽잖아요!”

 

“잠깐 뛰어들지마! 으아아악!”

 

분명 내가 했던 포즈는 육식공룡조차 막은 전설의 포즈였는데. 아리엘은 느닷없이 뛰어들어 내 손목을 낚아채더니 억누르기 시작했다.

 

“역시 카일이 와야 아리엘이 적극적으로 변하네. 평소에 내가 읽도록 노출시킨 백장미 때문일까?”

 

“원인은 백장미냐! 아리엘! 제발 정신 좀 차려! 귀에 바람 불지 말고! 핥지도 말고!”

 

 

백장미라는 잡지 하나가 어디까지 사람을 타락에 물드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아리엘의 경우만 봐도 절대로 사람이 봐선 안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등급으로 따지자면 케테르 등급의 물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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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미의 효력은 매우 뛰어났다.

[아리엘은 따로 쓰고 있는 글의 주인공이에요.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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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47 - 1

426

 

카멜롯 마법학원은 체육대회 이후에 다음날 학원제로 이루어진다.

바쁜 일정으로 이루어지는 신성한 축제 속에서,

검은 높새바람은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바람을 가지고 오는데.

지금 나는 축제에 참여한 관객 1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

-모자를 눌러쓰고 조용히 돌아다니고 있는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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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녀본 적이 있다면 어릴 때 교육을 받았을 때뿐이었다. 그 때는 왕국 측에서 무료로 어린아이들에게 글과 상식을 알려주는 시기였기 때문에, 나 또한 부모님이 시켜서 학교에 나와서 공부를 하고, 그 안에서 베가프와 마일론을 만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제대로 된 학교나 학원에 다닌 적은 없고, 전설의 용병인 은빛 송곳니에 동경하게 되면서 용병으로 뛰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마법학원의 주체로 벌어지고 있는 체육대회와 학원제를 보며, 무척이나 감회가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즐기기만 하면 좋겠지만 이 많은 군중 속에서 검은 높새바람이 숨어있다면, 말 그대로 백사장 모래 속에 있는 바늘을 찾으라는 소리잖아?”

 

마법학원의 학원장인 켈모리아 마그누스에게 직접 날아온 의뢰에는, 이곳에서 검은 높새바람 단원이 숨어들어서 공작이나 테러를 펼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붙잡은 다음에 정보를 알아낸다는 단순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대체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덤으로 미스 카멜롯으로 뽑힌 아리엘을 보겠다는 사람들이 수천은 더 될 거라고 생각하면.

 

“그렇다고 이 모든 사람들을 전부 잡아서 떠볼 수도 없고 말이지.”

 

혼잣말만 계속 이리저리 중얼거리며 다른 곳으로 걸어가면서 머릿속에서는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카일이 더 의심스러워.]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돌아다니는 모습이요? 그래도 이게 가장 눈에 안 띄는 모습이라고 전 생각하는데요?]

 

[생각은 자유. 현실은 잔혹.]

 

생각을 해보면 풍기위원완장을 착용한 학생들이 나를 가장 껄끄럽게 보고 있는데, 차라리 수상한 사람이라 오해하고 다가와서 말이라도 했다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서 모두 사이 좋게 헤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겠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계속해서 받는 사람의 입장은 매우 안 좋아지는 것이 당연했다.

 

체육대회임에도 불구하고 마법학원이라서 그런지, 꼭 마법을 사용하는 운동방법에서는 허공에 표적이 나타나서 마탄으로 맞추는 사격대회라던가, 피구공에 불이 붙어서 정말 통키를 보는 듯한 살인 피구를 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마법진을 누가 먼저 빨리 그려서 그랑ㅈ...아니 저게 왜 나와!

 

“체육대회라고 하기에는 그냥 마법경연대회라고 부르는 게 더 확실한 것 같은데?”

 

“카일. 오늘도 혼잣말이 심해.”

 

오렌지 빛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나에게 찰싹 달라붙은 소녀는, 내 상체를 감싸 안으며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같이 보고 있었다. 이프티트가 동화하지 않고 직접 나와서 말을 걸은 이유라면...

 

“이프리트. 혹시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걸 완화시켜주려고 나온...”

 

이프리트는 앞으로 더 나와야 할 나의 단어들을 검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막아 세우기 시작했다. 몸은 즉각적으로 이프리트의 수신호에 멈춰버리고 조용히 속삭여오는 이프리트의 느긋하면서도 가냘픈 목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눈치 빠른 건 싫어.”

 

결국 도움이 되기 위해서 연인행세를 하게 된 이프리트의 노력이 있었는지, 그 풍기위원완장을 든 학원생은 더 이상 나를 경계하지 않고 다른 곳을 향해 보기 시작했다. 이프리트의 온기가 코트를 뚫고 내 몸에 오고 있었으나, 평상시처럼 어마어마한 평정심을 끌어 모아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인내를 하고 마음을 갈고 닦으면 정신과 몸이 평화롭다는 구절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저기?”

 

카멜롯 마법학원의 복장 중에서 여학생의 경우에는 어째서 치마의 길이가 짧은지 모르겠다. 모든 아이들의 교복의 핏이 제대로 잘 맞춰져서 처음 본 사람의 스타일까지 자연스럽게 측정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켈모리아의 의도라고 생각하는데. 어쨌거나 최근 아이들의 성장이 너무 좋다는 생각만 하도록 하자.

 

“그림이 좋은 커플이시네요! 2층에서 찻집도 운영하고 있으니 지금 찾아오셨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찾으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당장 찾아오라는 말을 듣고 나중에 알아서 가겠다고 말하기 전에...

 

“갈게.”

 

이프리트가 한 발 더 앞서서 질러버렸다.

 

“그러면 두분! 안내해드릴게요!”

 

체육대회 이후에 학원제를 할 줄 알았는데, 미리미리 찻집이나 음식점을 운영하는 곳이 있었구나. 아니나다를까 학원 건물 내부에는 소규모 음식점에서 볼 수 있는 군것질 거리들과 사방에서 풍겨오는 다양한 차의 향기가 복도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프리트는 차를 마시고 싶은 거에요?”

 

이프리트는 나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멍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카일과 노닥거리고 싶어.”

 

결론이 그거냐.

나의 이성에서는 “의뢰를 제대로 완수 해야지!”라는 경향이 너무 강해서, 찻집에서 5분만 있다가 나올 생각이었는데, 이프리트는 이곳에서 30분동안 있을 모양인지 여전히 팔짱을 낀 상태로 내 팔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따라온 곳에서는 정말 텅 비어있다시피 사람들이 없어서, 누가 보면 우리가 첫 손님이라고 생각하겠...

 

“축하드립니다! 정령들이 함께하는 찻집의 첫 번째 고객이시네요!”

 

생각이 아니라 첫손님 맞네.

바보 같은 생각은 안 하기로 마음을 먹어도 습관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무섭다.

 

“다른 곳은 사람이 많아 보이는데 왜 이곳에 내가 첫 번째 손님인 거야?”

 

다른 여학생에게 고개를 돌려서 물어봤는데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학생이 내 말에 대답을 했다.

 

“이곳은 정령사들을 겨냥한 카페라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정령들과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거든요. 게다가 옆에 있는 그 여성분은 정령 맞죠? 딱 봐도 불의 정령 같은데? 벌써부터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상급정령인가 보네요?”

 

정령왕이라는 말은 할 수도 없고 그저 웃어 보이면서 넘어가기로 했다.

 

“상급정령부터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경우도 특수한 경우인데, 너는 정령에 대한 이해도가 높네.”

 

이프리트는 그 여학생을 보면서 칭찬을 한 것인지 아직까지 공부가 부족하다고 비꼰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정작 이프리트의 말을 받아들이는 여학생 입장에서는 칭찬으로 알아듣고 고맙다며 화답을 했다.

 

창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마주보는...

 

“이프리트? 저는 독백에서 분명 마주본다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제 바로 옆에 앉은 거에요? 저 위에 있는 독백이 쓸모 없어졌잖아요?”

 

“원래 카일이 하는 독백은 전부 쓸모가 없었어.”

 

“저의 존재 자체라고 봐도 무방한 독백들을 모두 쓸모 없다고 하지는 말아주실래요?”

 

매뉴판을 보며 어마어마하게 비싼 금액을 바라봐도, 최근에는 잡화점의 수입이 아니라 부수적인 수입이 많이 들어왔기에 거침없이 주문을 할 수 있었다. 허브티와 팬케이크가 20실버일 줄은 몰랐는데.

 

“빚을 지었나. 뭐가 이리 비싼 거야?”

 

혼잣말을 하면서 절약을 하자는 나의 마음을 달래고 있을 무렵.

 

“카일. 아~”

 

보통 이 장면에 대해서는 여자가 팬케이크를 자르고 남자에게 먹여주는 장면이라면, 나의 경우에는 이프리트가 팬케이크를 기다리기도 귀찮았는지, 아직 주문만 했는데 벌써부터 먹여달라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프리트. 아직 나오지도 않았어요.”

 

“......그럼 에피타이저를 받아가지 뭐.”

 

“에피타이저? 그건 없...으웁!”

 

그런 의미였냐!!!

길게 느껴지는 입맞춤은 불과 3분만에 끝났다. 이프리트가 만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여운에 잠기고 있을 때. 나의 뇌는 “장비를 정지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10초동안 멍하니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 여학생들의 환호와 귀여운 비명으로 부러움을 사고 있었고, 이프리트는 나의 입술을 한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요염하게 바라봤다.

 

“부족했어?”

 

“부족하고 나발이고 지금 뭐 하는 거에요! 제발 때와 장소를 가려달라고요!”

 

이프리트의 돌발 행동으로 나는 속삭이듯 소리쳤다. 하지만 이프리트는 나의 말을 듣고 대체 어떻게 해석을 했는지 다음과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때와 장소가 맞으면 해도 된다는 소리네?”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프리트는 의외로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는 정령왕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프리트 특유의 페이스에 말려버렸단 소리인가.

 

“정말 알콩달콩한 모습이 보기 좋네요. 사진 찍어도 되요?”

 

“윈디. 너는 근데 학원복장을 입고 뭐하고 있는 거야?”

 

밝은 회색의 포니테일을 하고 있는 윈디는 마법학원의 학원복을 입고 사진기를 앞으로 들이밀며 항상 기분 좋게 기어오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야 당연히 이프리트의 적극적인 모습을 찍기 위해 찾아왔죠! 제 친구가 어느덧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서 평생을 같이 하기로 했는데. 이런 경사스러운 일을 하나하나 찍어서 추억으로 돌아보는...끄으으읏!”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으려는 윈디의 노력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래. 비명은 지르면 안 돼. 이곳은 조용한 찻집이니까.”

 

-꾸우우우욱!

 

“크우웁! 비, 비명을 지르지 말라니. 이런 상황에서 저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데 비명을 지르지 못하다니...이거 나름대로 기분이 좋은데요♥”

 

오히려 이건 역효과인가.

 

“당하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가슴속에 담아놔야 하는데, 점점 고통과 쾌락이 커져나가서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못 지르는 갈등이라니...! 카일 씨는 정말 매니악해! 아으으읏♥”

 

“하트를 써서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마. 그건 느낌표나 마침표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잖아.”

 

나는 아이언 클로를 풀어주고 윈디에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바람의 정령들의 말로는 뭐라고 하든? 검은 높새바람에서 숨어 들은 사람은 아직 없다고 해?”

 

“그거라면 제대로 확인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아직까지는 검은 높새바람에서 보내온 사람도 없고, 다른 곳에서 마법학원을 견제하거나 방해하려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레시아와 시나는 각자 다른 곳에서 감시를 해줄 테니 나중에 텔레파시를 보내도록 하고.

 

“허브차와 팬케이크 나왔습니다.”

 

“고마워.”

 

웃으면서 가져다 주는 여학생에게 짧은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나서, 팬케이크 위에 시럽을 뿌리기 위해 손을 가지고 갔는데.

 

-찰싹!

 

이프리트가 나를 오렌지 빛의 눈동자로 멍하니 바라보면서 내 손등을 때린 것이었다.

 

“아프잖아요! 대체 왜요?”

 

“카일은 부먹파야?”

 

“팬케이크에 부먹과 찍먹이 있을까 보냐!”

 

예로부터 부어서 먹는 사람과 찍어서 먹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독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뿐. 상호간에 옳고 그름은 없다.

 

“이프리트는 시럽을 담은 병에다가 어떻게 팬케이크를 잘라서 어떻게 찍어먹으려고요? 이건 부어서 팬케이크를 촉촉하고 달콤하게 만드는 거란 말이에요.”

 

“안 돼. 카일이 당뇨병에 걸려.”

 

“걸릴까 보냐!”

 

아직까지 나는 당뇨병에 걸릴만한 무식한 식단은 하지 않았단 말이야!

 

“내 건강을 생각하기 전에 이프리트가 즐길 거리를 좀 생각하라고요.”

 

달콤한 메이플 시럽이 팬케이크 위에서 내려올 때마다 그윽한 향이 주변에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따듯하게 데워놔서 그런지 하얀 김이 하늘로 승천하면서, 시럽은 팬케이크를 코팅하듯이 반짝이며 하얀 그릇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 중에 일부를 잘라서 이프리트에게 말했다.

 

“아~ 하세요.”

 

이프리트는 나의 말에 처음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순종적으로 입을 벌리기 시작했고, 팬케이크 조각을 꽂아 넣은 포크를 덥석 물기 시작했다.

 

“맛있어요?”

 

“응. 최고야.”

 

 

이프리트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행복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잠시 곧바로 윈디가 “저도 주세요! 저도 카일 씨가 직접 뜨겁고도 끈적한 시럽을 뿌린 걸로요.”라는 말을 했고, 윈디의 쓸 때 없는 입을 막기 위해 아이언 클로를 출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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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한편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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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6 - 8

425

 

 

 

아우리스가 잡화점을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찾아온 지 1주일이 되었을 무렵. 그간 많은 일이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예상했지만, 오히려 180도 다르게 평소와는 다를 것이 없는 일상을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평소와는 다를 것이 없는 일상이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으로 뭐가 있냐면...

 

“주인! 짐의 음식을 먹어보거라!”

“마스터. 저의 음식을 드시면 됩니다.”

 

늘 내 목숨은 사소한 이유로 나락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다른 점이 있다면 데모르테는 자신이 쫓기고 있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여유롭게 루시피나가 따라주는 차를 마시면서 오후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었다. 양 옆에서 소녀들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것부터 먹어달라는 상황은 그 음식의 상태가 먹고 죽지 않는 전제 하에 낭만적이겠지.

 

지금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으니까 문제다.

 

“이래서는 카일이 정말 곤란하겠네.”

 

“데모르테는 대체 레시아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이 모양이 된 거에요.”

 

자신의 딸과 결혼한 사위가 장모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면 무슨 기분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데모르테의 경우에는 매우 유연하게 받아 친다는 선택지를 골랐나 보다.

 

“그때 당시 레시아는 아주 어렸으니까.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칠 수 밖에 없거든. 마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인 만큼, 어린 마족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힘든 시기였어. 게다가 레시아는 워낙 어여쁘니까 다른 흑심을 품고 다가오는 마족도 많았지.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사자새끼가 벼랑 끝으로 내몰아서 던져버리듯이 혹독하게 가르쳤단다. 그래서 상당히 강해진데다가 마왕까지 되는 기적을 지금에서야 확인했지만, 강해지는 것에는 역시 대가가 있듯이 가여운 레시아는 요리를 전혀 할 수 없는 몸이...흐읍!”

 

마지막은 울먹거리면서 눈물을 훔치고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는 데모르테를 보며, 나는 전혀 다른 이유로 말을 잊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는데. 그 이유는 황당했기 때문이다. 어느 만화에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다 잃은 대신 주먹 한방에 대부분 적을 몰살할 정도로 강해졌다는데.

 

확실히 지식의 괴물이라고 불리는 마족이 요리를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애초에 요리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좋은 말이라 본다.

 

레시아도 처음 사역마로 소환한 당시에 요리가 취미라고 했으니까.

 

레시아에 대한 고찰은 이 정도로 하고 시나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자면, 음식에 수은이라도 부었는지 너무 눈부시게 빛났다.

 

“시나. 그거 대체 뭐야?”

 

“육포입니다.”

 

“육포가 뭐 그리 빛이 나냐! 횃불로 써도 상관 없겠다!”

 

빛이 난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가 많이 존재한다는 소리이고, 그 에너지는 빛과 열, 그리고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소리에너지로 변환하는 무지막지한 상태가 있는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육포가 엄청난 빛을 내보이면서 ‘웅웅!’하는 진동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분명 저건 집기만 해도 내가 타 들어가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그 이전에 시나의 음식은 입에 넣고 사경을 헤맸다면, 지금의 시나가 나에게 주려고 하는 음식은 잡기만 해도 내가 살아있을지 의문이다.

 

“나중에 루시피나에게 제대로 요리를 배우세요.”

 

“안 먹겠다는 것인가!”

“마스터. 실망입니다.”

 

아니 그럼 그거 먹고 죽으라고?

 

“만화책에서 나오는 남자주인공은 아무리 여자주인공이 음식을 못 만들어도 먹어준다! 주인은 어째서 그런 상냥함이 없는 건가! 여자의 자존심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생각인가!”

 

“그건 먹고 죽지 않으니까 가능한 일이잖아요. 그리고 언제나 현실을 만화처럼 생각하면 안 되죠. 레시아는 루니아 누나의 요리를 담담하게 먹고 살아남을 수 있어요?”

 

“음. 그건 아니다.”

 

“레시아의 요리가 지금의 루니아 누나가 한 요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요. 시나의 요리도 마찬가지고.”

 

“우우...”

 

시나까지 한꺼번에 그룹으로 지정해서 요리에 관해 한 소리를 했다. 시나는 곧 울먹이는 표정으로 바뀌면서 분한 감정을 볼을 부풀려서 표현했고, 나는 한숨을 길고 가느다랗게 쉬면서 다른 걸 생각하도록 하자.

 

“마리아에게 아르트리옴에 관한 정보를 모아달라고 해야겠네요.”

 

나는 분위기도 바꿀 겸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키엘과 접촉할 수 없다면 마신에게 직접 들을 수밖에 없다. 목표는 크게 잡고 노는 것은 크게 노는 것이 좋으니까.

 

“마신에게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은 규율에 어긋나지는 않으니 말이지. 하지만 최근에는 마신이 어디에 있는지 행방불명이라는 소리도 있고, 아직 동면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는 소리도 있으니까. 아르트리옴을 찾는 것은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해. 찾는다고 해도 정확하게 인지 할 수 있을까?”

 

찾기 힘들다면 찾기 힘든 거지만, 어째서 ‘인지’를 할 수 없다는 거지?

나는 데모르테에게 들은 말을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마신을 보려면 특수한 의식이라도 해야 하나요? 신생아를 제물로 받치는 그런 거?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말이죠?”

 

“그건 애초에 어디에서 나오는 끔찍한 방법이야?”

 

데모르테는 찻잔을 놓고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평균적인 마신의 이미지라면 분명 엄청 사악하거나, 세상을 부수거나 멸망밖에 모를 줄 알았는데.

 

“마신을 인지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원할 때, 그리고 원하는 상황에만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기묘한 능력 때문이야. 그건 단일이 될 수도 있고 전체가 될 수도 있지만, 그 능력이 껄끄러운 이유 중 하나가, 상급신 중에 일부만 아르트리옴을 찾아낼 수 있거든. 어떻게든 찾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상당한 희생을 해야 해.”

 

희생?

 

“희생이라면 어떤 희생이죠?”

 

데모르테는 나를 천천히 바라보고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르트리옴은 여자를 좋아하니까.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야겠지?”

 

“아. 그냥 사키엘을 빼내보죠. 그게 더 편할 것 같은데.”

 

이상한 흐름으로 가기 전에 서둘러서 차단했다. 마신이면서 여자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데모르테가 애초에 나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했다는 그 자체가 무시무시한 계획을 숨기고 있다는 소리니까.

 

“그보다 어떤 사람이 아르트리옴을 감지할 수 있는 건데요?”

 

“우선 천계의 1인자인 아우리스는 기본이고 생명의 여신인 비니스. 최근에는 의식과 무의식을 다스리고 있는 엘티노스가 있네. 어처구니 없게도 마신 아르트리옴을 위한 종교가 없으니 인간 중에서 아르트리옴을 탐지할만한 사람이 없어.”

 

마신에게 흥미를 보이고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확실히 지금은 별 다른 방법이 없네요. 그보다 데모르테? 여장은 안 할거니까 음흉한 눈으로 보면 안 돼요?”

 

데모르테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하얀 찻잔을 다시 들어서 입을 적시기 시작했다. 천천히 맞이하는 따듯한 햇빛은 봄이 이곳을 장악하고 있다는 기분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줬지만, 외출준비를 위해 회색이 잘 퍼져있는 코트를 오른손으로 집었다.

 

“레시아. 시나. 따라와야죠. 켈모리아가 보낸 의뢰를 할 시간이니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것인가?”

“지금은 오전 11시이니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라 예상합니다만.”

 

“레시아와 시나는 동물상태로 변해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편할 거에요. 저는 이프리트와 윈디를 동화시켜서 켈모리아를 만나러 갈 테니, 검은 높새바람이 나타났다 싶으면 먼저 서로 알려주는 걸로.”

 

회색모자까지 쓰면서 내가 입을 열자. 레시아와 시나는 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남자 옷은 안 어울린다.”

“남자 옷이 안 어울립니다.”

 

“어째서!!!”

 

남자에게 남자 옷이 안 어울린다는 평가를 들을 줄은 몰랐다. 이게 전부 저주받아 마땅할 백장미 때문이야.

 

“봐요. 오늘은 셜록홈즈 패션으로 입었다고요.”

 

“짐은 그렇게 키가 작은 홈즈는 본적이 없노라.”

 

“실물로 봤어! 봤냐고요! 제 키가 작은 걸 어쩌라고!”

 

“최근 마리아가 가져다 준 드라마에서 셜록 역할을 맡은 배우의 키가 매우 컸습니다.”

 

제길. 키 큰 것들은 다 죽어야 해.

마리아는 내가 부재중일 때만 오는 건가? 나중에 잡화점 멤버들에 대한 행동을 제대로 조사해보자.

 

“레시아와 시나는 먼저 가 있어요. 저는 이프리트 좀 깨워야 하니까.”

 

검은 고양이와 하얀 올빼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3층으로 올라가서 사키엘의 문 뒤쪽에 이불을 돌돌 말아서 자고 있는 이프리트였다.

 

“이프리트. 이제 슬슬 일어나요. 가만히 놔두니까 2주를 그냥 내리자고 있잖아요.”

 

이프리트는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면서 내 목을 감싸 안았다. 잠을 깨기 위해서는 이렇게 끌어 안아야 한다고 하지만, 정령왕이 인간의 모습으로 유희를 보낼 때는 겉모습으로는 정말이지 인간과 너무 똑같다.

 

“2주만이야.”

 

“윈디는 어디 있어요?”

 

“실피드는 카일이 부르면 언제든지 나타날 거야. 오늘은 내 힘이 필요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을이 생각나는 주홍빛의 머리카락이 내 볼을 간질거리고 있을 때. 이프리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무리하는 건 용서하지 않아. 다급할 때는 항상 날 부르도록 해.”

 

“그때는 부르고 싶어도 적이 준비를 많이 했더군요. 그래서 맨 처음부터 도움을 요청하려고 왔으니까. 동화해주세요.”

 

이프리트는 내 몸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기 시작했고, 안에는 따듯한 온기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정령을 몸에 담으면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프리트의 경우에는 여름에는 더위를 느끼지 못하게 하고, 겨울에는 한기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적응능력이 기본이라고 한다.

 

엘티노스가 적은 자서전에는 그렇게 적혀있었으니 그대로 말한 것뿐.

 

“그럼 슬슬 출발해야지.”

 

다시 사키엘의 문 앞으로 다가가서 문고리를 잡고 비틀자.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마법학원에서 날아온 폭죽이 그대로 나와 부딪쳤다.

 

-팡! 파파팡!

 

불로 이루어진 보호막이 폭죽의 열기를 흡수하고 서서히 사라지면서, 마음속으로 이프리트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수많은 인파는 각자 개인이나 단체의 목적을 위해서, 체육대회와 학원제를 관람하기 위해 온 것인데.

 

마법학원에 체육대회라고 해도 80%는 전부 마법에 관련된 종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서 와. 오늘은 마왕과 여신이 아니라 정령왕을 품고 왔나 보네?”

 

검은 드레스를 입고 가슴에는 거대한 꽃이 피어난 듯이 장식이 되어있는 세련된 모습이었다.

 

근데 그건 체육대회에서 꼭 입어야 할까?

나를 천천히 훑어 보면서 바라보는 녹안의 여성은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안 어울려.”

 

“신경 끄시죠.”

 

나는 켈모리아가 보낸 쪽지를 던져주면서 신경 끄라고 이야기 했다. 켈모리아는 수리검처럼 빠르게 날아가는 쪽지를 손가락 2개로 낚아채면서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내리더니, 은근히 나에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조만간 못 나와서 내 의뢰도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를 많이 좋아하나 봐?”

 

“그 동안 잡화점 멤버에게 반 강제적으로 갇혀 살았던 것뿐이에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검은 높새바람이 이곳에 숨어있는 것은 확실하죠?”

 

 

켈모리아는 확신에 가득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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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하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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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6 - 7

424

 

 

 

느닷없이 잡화점에 찾아온 사람은 많고 많았다.

“나와 같이 수사의 길에 뛰어들지 않을래?”라고 말하며 황금빛 마탄이나 사방에 뿌리는 하멀 씨라던가. 대체 뭘 보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쇼콜라 뿅뿅할 시간’에 대해 깊이 고뇌하는 스트레스를 잡화점 문을 발로 차서 풀고 있는 쇼콜라 씨라던가. 아침신문과 육포를 들고 와서 정작 나에게 던지는 건 바위덩어리뿐인 아이니스라던가. 그 외에도 각자 다른 방법으로 등장하고 있었지만, 지금 아우리스 여신 같은 경우에는 데모르테를 찾기 위해 이곳에 협력을 요청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비록 문은 날아가서 수복하고 있는 중이지만.

어쨌든 어깨 안마를 받고 개운하다는 듯이 일어난 아우리스 여신은 내 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으니. 그 내용을 요약하면 “데모르테를 발견한 즉시 나에게 보고하도록!”이라는 말을......

 

“천계의 법률을 어기고 사키엘과 내통을 한 데모르테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모든 이들의 힘이 필요하니, 이곳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최초의 여신인 나의 말을 듣거라.”

 

“짐은 마왕이다. 너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노라.”

 

레시아는 확실하게 부정하면서 훼방을 놓기 시작했고, 아우리스는 “어차피! 마왕의 힘 따위는 기대하지 않거든!”이라고 유치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싸울지는 모르겠지만 하얀 사제복을 입고 있는 베가프는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는 그래도 예전과 다른 게 없네?”

 

“지금 이게 최적의 환경이니까. 무리하면서까지 위치를 바꾸기는 싫어. 게다가 잡화점에 오는 물품이 의외로 다양해서 위험한 것은 나와 가까운 곳에 위치시키는 것이 가장 적절하거든.”

 

예를 들어 뒤에 있는 붉은 색의 개구리가 동면한 유리병이라던가. 무시무시한 독성을 지닌 약품들은 다른 이들이 만지기에는 어려운 장소에 놓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사고에서 예방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보통 인간관계에서는 남이 나에 대한 근황을 물었을 때 대답을 했다면, 나 또한 남의 근황을 묻는 것이 대화에 기본이다.

 

“너는 요즘 어때? 저번에 이상한 일에 휘말린 이후에 창세의 집회였던가? 그게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네가 보낸 카렌이 도와줘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어. 네가 붙잡혀서 어디로 납치 당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꽤나 걱정했어. 나도 찾아가려고 했지만 아랑이 지금은 다른 이에게 맡기라고 해서 움직이지 못했지. 그 이후 창세의 집회는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져버렸고, 크리자리드 추기경도 나중에는 자결한 상태로 발견 되었다고 했고. 사실상 그 사람은 추기경도 아니라면서?”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아우리스 여신과 베가프가 이곳에 있는 이상, 비니스 여신에 대해 무언가 말을 꺼내고 싶어도 섣부르게 꺼내지 못하고, 어째서 사키엘과 말을 한 것만으로도 천계에 있어선 크나큰 범죄가 되는지 물어보았다.

 

“사키엘은 제가 알기로는 머나먼 옛날에 존재했던 유일한 천계의 대장장이잖아? 그런데 갇혀있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천계의 법률에 크게 영향이 미치는 거 같네?”

 

그렇게 베가프에게 떠보듯이 이야기를 하고 나의 눈은 아우리스 여신을 곁눈질을 잠깐 하며 미끼를 물도록 유도했다. 보통 민감한 이야기 같은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경계를 받지만, 다른 이를 통해 돌려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는 그 경계가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아우리스 여신의 성격이라면 분명 고지식하고 자존심 높은 성격으로 인해, 베가프 대신 대답을 해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카일.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키엘은 천재적인 대장장이인 것은 확실하나, 그는 다른 신들보다 더 지휘를 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기이한 장신구를 만들었지. 그걸 아르트리옴이 발견하고 미연에 방지함으로 지금의 천계가 존재하고 있는 거야. 탐욕으로 인해 물들어 타락한 사키엘과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전염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와 내통을 하는 존재들을 전부 천계의 유일한 감옥 ‘천상의 탑’에 가두는 거지. 인간은 인간의 문제가 있듯이 천계에도 위태로운 일이 많이 있어.”

 

사키엘이 무슨 세균맨도 아니고...

 

“그러면 데모르테를 쫓고 있는 이유도 타락에 전염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겠네요?”

 

“여신들은 모두 중요한 직책이 있는데 그게 타락하게 되어 기능을 못하게 되면, 크나큰 피해가 생기기 마련이야. 데모르테 같은 경우에는 운명을 관장하는 여신이기 때문에 그녀가 타락을 하면, 비틀어진 예언으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은 천계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기에, 지금은 그녀를 잡아서 봉인을 해야만 해.”

 

“그럼 그 빈 공석은 어떻게?”

 

데모르테가 봉인조치를 받으면 그 공석은 다른 신으로 대처하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한 시스템이니까.

 

“그야...”

 

나를 빤히 보는 것으로 보아 뭔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구나.

 

“전 안 돼요.”

 

“칫.”

 

이 여신이 정말...

 

“카일도 좋은 여신이 될 수 있다고?”

 

“남자거든요?”

 

“여장을 하면 아무도 못 알아볼 거야.”

 

“데모르테를 추방하는 원인이 사키엘과 이야기를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냥 저를 여장을 시키려고 하는 이유도 있죠?”

 

사테라 씨의 몸을 빌린 아우리스 여신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6장의 날개를 활짝 피기 시작하더니 권위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일은 나의 말을 듣고 여장을 하거라!”

 

“싫다니까요!”

 

“이상하다. 대부분의 인간은 모두 내 말에 복종을 하는데?”

 

곤란하다는 표정과 혼란스럽다는 분위기가 이리저리 섞여버린 아우리스의 언동에, 내 옆에 있던 레시아는 “크크큭!”하고 웃어 보이며 아우리스를 질타하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여신이여. 모든지 권위와 권능으로만 조종할 수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는가? 애석하게도 주인의 정신방어는 너무나도 견고해서 수많은 유혹을 전부 뿌리치는 바람에, 짐과 비둘기가...”

 

“올빼미 입니다.”

 

시나는 여전히 그 부분에 태클을 거는구나.

 

“아무튼 잡화점 멤버가 물리적으로 습격을 해야지만 정복할 수 있는 남자이니라!”

 

그거 전혀 대단하지 않게 들리는데...

 

“어째서 인간이 여신의 권위와 권능을 부정할 수 있다는 거지?”

 

아우리스 여신의 눈에서는 놀라움이나 경악보다는 공포나 두려움이 돋보였다. 아무래도 모든 인간들은 천계의 존재가 권위와 권능을 일으키면, 그것을 부정하지 아니하고 기적으로 받아들이게 설계라도 되어있는 건가?

 

“저는 예전에 월식에게 침식을 당한 적이 있으니, 그 영향으로 뭔가 관점이나 가치관이 바뀐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그런 식으로 입을 열었을 때. 아우리스 여신은 “그, 그런가. 한 때 월식이란 존재는 확실히 거북할 정도로 짜증난 녀석이었지.”라고 중얼거리며 넘어갔다. 질문하는 것 하나 이렇게 긴장되고 박진감이 넘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아우리스 여신은 잡화점 문 쪽으로 나아가면서 베가프는 그 뒤를 따라 나아갔다.

 

“그럼 나는 가도록 하지. 그리고 마왕. 언제까지 카일을 타락으로 물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마!”

 

“아니. 타락에 물들지도 않는 주인을 어떻게 짐이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고는 겨우 수복이 완료된 문을 다시 날려버리고 나간 아우리스 여신과 베가프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왠지 눈물을 흘리면서 문을 다시 수복하고 있는 듯한 잡화점의 모습을 10분간 더 지켜본 후에, 데모르테는 2층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와 한숨을 내쉬고 말하기를...

 

“정말 너무하네. 사키엘은 타락에 물들지도 않았는데, 마치 전염병에 걸린 보균자취급을 하다니.”

 

“이상하네요.”

 

“그렇지. 이상하지? 아우리스는 항상 이런다니까?”

 

아니. 내가 이상하다는 것은 지금 아우리스의 성격과 태도가 모순 되었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따로 말할 내용이 아니기도 하고,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기로 해야겠으나, 아우리스 여신과 접촉을 하면서 이와 같은 위화감이 생기면 그때 멤버들에게 상의하도록 해보자.

 

“아우리스 여신은 고정관념이 강한 편인가 봐요? 천계의 규율을 저지르면 무조건 타락에 빠진다거나 그런 거 말이에요.”

 

“아우리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창조신을 잘 따르니까. 하지만, 규율을 저지른다고 해서 무조건 타락에 빠진다는 것은 아냐. 그건 아우리스도 잘 알 텐데 말이지. 어쩌다가 저렇게 꽉 막혀버린 성격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어.”

 

나는 잠깐 생각의 늪에 빠지기 시작할 무렵. 루시피나는 잠깐 나를 끌어당겨서 주방으로 끌고 갔다. 레시아와 시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한 표정으로 날 보면서도 따라가지 않는 것은 루시피나를 어느 정도 존중하고 있는 모양이다.

 

“신랑. 이상해. 뭔가가 잘못 되었어.”

 

“뭐가요? 요리가 이상해요?”

 

“아니! 레시피는 완벽하고 요리가 이상하다는 소리가 아냐. 아우리스 여신이 왜 이곳에 내려왔냐는 거야.”

 

“그야 베가프가 끌고 왔으니까요.”

 

루시피나는 홍옥의 눈빛으로 나의 눈과 가까이 마주하며 속삭였다.

 

“그럼 아우리스 여신은 어째서 데모르테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 의심을 한 건데?”

 

“아마 천계에 있는 엘티노스 때문이겠죠. 저번에 데모르테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이곳으로 온 적이 있잖아요. 게다가 이곳은 엘티노스를 제외하고는 다른 여신이 함부로 볼 수 없는 대결계가 작동하고 있으니까. 이곳에 뭘 숨겨놨다고 해도 작동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루시피나는 나의 추측을 듣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아우리스는 처음부터 이곳에 데모르테가 있다고 확신한 거야. 게다가 데모르테를 붙잡기 위해서는 상급여신의 힘이 필요하니까. 아우리스가 직접 붙잡으러 이곳에 온 거라고? 다른 곳은 전혀 찾지 않고 이곳에만 찾아와서 조사를 한 가능성이 있어.”

 

루시피나는 확신이 가득 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고 그녀의 말에 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렇게 듣고 보니까 처음부터 아우리스는 잡화점으로 찾아가기 위해 베가프까지 끌고 다니면서 이곳으로 도착했으니까.

 

“처음부터 노렸다고 한다면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공범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의외로 조심스럽게 생활하라고 데모르테에게 일러둬야겠어요.”

 

나는 루시피나의 붉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대신에 빈틈을 짚어줘서 고마워요. 루시피나.”

 

“별거 아닌걸. 에헤헷!”

 

수줍게 기뻐하고 있는 루시피나의 모습을 보며 나도 살짝 웃었다.

 

“마스터. 둘이서 무슨 밀약을 했길래 그리 즐거워 보이십니까?”

 

“루시피나. 새치기는 하지 말지어다.”

 

역시 빈틈을 보이면 찌르고 들어오는 질투의 업화가 나를 소름 돋게 만들었을 때. 데모르테도 그 사이에 껴서 “그냥 사이 좋게 4명이서 노닥거리면 되잖아?”라고 말을 했다.

 

4명이서 뭘 노닥거려.

이제 물품 정리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전에 데모르테는 한동안 숨어 살아야겠어요. 아우리스는 이곳에 계속 들어와서 확인할 것 같거든요. 아니면 따로 도망갈 곳이라도 생각해두셔야 다음 추격에서 피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데모르테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가리키며 왼손은 자신의 가슴 위에 살짝 얹고 입을 열었다.

 

“때가 되면 다 그리 할 거야. 운명의 여신은 이미 모든 걸 보고 있다고?”

 

 

그 당당한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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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우리스 교에 대해서 좋은 말씀을 전하러 왔[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