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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캔버스에 여백, 2018.

 

 

 

  회화에 있어 여백이란 배경을 그대로 비워둠으로써 캔버스 위 작은 설국雪國을 입맛대로 상상하게 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또는 반대로 여백이 아닌 부분에 시선을 더 오래 두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실은 퇴근길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읽은 이 글 때문에 갑자기 든 생각이면서, 기어이 ‘상상력을 숨겨두고 살 만큼 마음이 메마른 사람은 되기 싫다’는 거창한 핑계를 내세우며 취미 미술반에 등록했다. 하지만 첫 수업이 있던 날, 비장한 표정으로 건물 앞에 다다른 나는 화실 문턱을 넘자마자 그만 머리에 피도 채 마르지 않은 여고생의 마음이 되고 말았다. 12년 만에 처음 잡아본 4B연필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희멀건 손가락과 흰 도화지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나는 이왕 철딱서니 없이 시작한 일, 첫 날엔 공쳐도 괜찮다며 철없는 자기위안에 빠져들기로 결정했다. 능청을 떨며 자분자분 주변을 살피니 화실의 모습이 꼭 한 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제목을 붙이자면 『Hello Strangers』, 91×65.2cm, 캔버스에 유채, 2018. 정도가 어떨까.

 

  한 타임 당 예닐곱 명에 불과한 소규모 클래스였지만, 강사 1명이 2시간 동안 우리 모두의 그림을 꼼꼼히 돌봐주기엔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인이 된 후의 첫 그림에 대한 살뜰한 보살핌을 바랐던 내게 선생님의 깃털처럼 가벼운 눈빛은 그다지 만족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감동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4B연필에 뭐 사연이라도 있어요? 계속 노려보네. 낯설지만, 그보다 더 냉랭한 수업시간의 분위기를 단번에 풀어줄 만큼 다정한 목소리. 나는 그날 화실에서 진이를 처음 만났다.

 

  수업이 끝난 건 오후 4시가 갓 넘어 이른 시각이었지만 목을 축이기엔 커피보다 맥주가 나을 것 같아 근처 호프로 이동했다. 나보다 석 달 먼저 화실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진이는 아버지를 그리는 게 목표라 했다. 가족애가 남다른가보다 싶어 나도 보조를 맞추려 우리 집 식구들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자 그는 술이 들어가서 말이 술술 나오냐며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뺨이 봉숭아처럼 물든 뒤에는 술잔에 술을 따르듯 자기 이야기를 술술 흘렸다.

 

  내가 아주 작았을 때 올려다본 아버지는 그냥 큰 사람이었어. 물론 모든 아버지들이 그런 경향이 있지만 내 아버지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그래보였지. 왜 그런 형용사 있잖아. ‘크다, 넓다, 단단하다’ 같은 말… 왜 사람이 나이 들면 잔뜩 쪼그라들고, 그래서 불쌍해 보이고, 연민을 자극하는 모든 수식어가 덕지덕지 붙어서 꼭 콩떡처럼 된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아직도 아버지는 그냥 대문자야. 저 혼자 우뚝 선 알파벳 대문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사람.

 

  하지만 자기의 주관을 갖고 붓칠을 할 수 있게 된 시기부터는 긴 면이 고작 41센티 정도 되는 화폭 안에도 그를 집어넣을 수 있다고, 심지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꼬마병정만큼 줄여서 그릴 수도 있다고 말하며 피식 웃었다. 병정만치 자그마하게 아버지를 그리면 그 옆엔 무얼 둘 거냐고 물었더니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단다. 파란 하늘도, 깨끗한 물도, 보기 좋은 꽃도, 건강해 보이는 강아지도, 아내도 아들도 전부 그의 곁엔 놓고 싶지 않다고.

 

  술자리가 마무리되고 밖으로 나와 발을 내딛은 길 위에서 혀도 다리도 꼬여버린 진이는 비탈길을 비틀길이라 우겨대기 시작했다. 물기 가득한 그의 혀에서 툭 튀어나오는 오타誤打가 마치 내 심장 중앙에 콩 콩 점을 찍는 것처럼 느껴져서, 들키지 않으려 쿵 쿵 큰 보폭으로 앞서나갔다. 나는 진이가 좋았지만 당장 그걸 알리고 싶진 않았다. 그가 깨닫는 때가 온다면, 서로가 감춰둔 빈 화폭 위에 점 하나 찍어도 웃어넘길 수 있을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틀비틀 비틀길을 걷던 진이는 딱 한 잔만 더 하자며 나를 불러 세웠다. 오늘만 살 거냐고 묻는 내게 속 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소주잔을 앞에 두고 영 횡설수설하던 그는, 그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크고 단단하기만 한 병정 곁에 꼭 무언가를 내줘야 한다면 하얀 눈밭을 선물해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진짜 눈을 줘야지. 스키장 같은 데서 퍼다가 부어버리는 건 안 돼. 그건 진짜 눈이 아니니까. 가짜 눈엔 붓질도 안 될걸. 내 여백을 그런 식으로 망칠 순 없지.

 

  그리고 그 위엔 옛날의 공기를, 그 공기 안의 기억과 기분과 마음 따위를 떠다니게 할 거라고.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들이라 물감으로 덧칠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라고. 그래서 그걸 그릴 수 있게 될 때까지 비틀길을 넘어 화실에 다닐 거라고, 그는 말했다. 그럼 우리가 언젠가 화실에서 만날 수 없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 날이 너에겐 축일祝日이겠구나. 하얀 눈밭 위엔 네 숨, 엄마 숨, 날숨 그런 걸 올려둘 테니. 그럼 그 날 비로소 가족이 완성될 테니. 진이는 내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연거푸 세 번이나 원 샷으로 소주를 들이켰다. 절대로 아버지를 따뜻하게 그릴 수 없는 사람. 하지만 그의 곁에 둔 여백을 세상 가장 오랫동안 지켜볼 사람. 나는 진이가 그릴 눈밭의 기온이 영하권으로는 내려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흰 여백에 쌓인 진짜 눈이 녹아버리면 다시 흰 물감으로 눈을 퍼와 노병老兵의 여백을 지켜줄 신병新兵의 모습을 상상했다. 짐짓 하품을 하며 빈 잔 위로 흘린 두어 방울의 눈물과 이게 바로 참이슬이라는 농담을 흘리는 진이의 한 마디를, 나는 그냥 흐르도록 두었다.

 

  어떤 남자에게 여백이란 희미해진 과거의 원망들을 캔버스 위에 까무룩 내려놓음으로써 더 이상 이슬에 취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도구로 쓰인다. 그게 아니라면, 실은 그 흰 벌판을 단 한 번도 가까이에서 마주하지 못한 아버지의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등바등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하얀 욕심 같은 것. 그의 여백이 완성되는 날, 나는 이런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여백』, 333×218cm, 캔버스에 수채, 2018.

 

 

 

 

                                                                  작년 겨울, 그림을 그리던 친구를 보며 썼던 <그 남자의 여백>이라는 글에

                                                                                                                조금 살을 붙여 다시 써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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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6

허기가 진 인부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나디아는 한 명 한 명에게 포도주를 따라 주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날이었다. 스케베라스산이 펼쳐진 빌구의 성벽에서 인부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막바지 작업에 열중했고 나디아는 빵과 포도주를 챙겨 왔다. 지중해는 늘 그렇듯이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했고 하늘에는 다양한 모양의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햇빛은 수면을 간지럽혔고 물결은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인부들은 포도주를 들이켰다.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양젖으로 만든 치즈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혔다. 그들은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함선이다! 성 요한 기사단의 함선이 돌아왔다!"
인부 중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디아는 포도주 따르기를 멈추고 성벽 앞으로 걸어갔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 성 안나호의 붉은 십자가 깃발이 위풍당당하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나디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머리속은 오로지 마르삼세트 항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디아는 포도주 항아리를 내려놓고 성벽 아래로 뛰었다. 해안을 따라 달리며 그녀는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붉은 십자가 깃발은 그녀를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나디아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항구로 들어섰다. 십자가가 새겨진 기사단 망토를 본 순간 나디아는 더 이상 뛸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다리가 세차게 떨렸고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딛을 수 없었다. 마중을 나온 기사단원들과 부둥켜 안으며 기뻐하는 발레트를 보자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나디아는 가슴을 움켜잡고 가까스로 눈물을 삼켰다.
지아니는 천천히 땅을 밟았다. 그토록 꿈꿔온 순간이었는데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대로였다. 몰타의 색, 공기, 소리... 그리웠던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지난 5년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그는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발레트, 수고했네.."
"단장님.."
릴라당은 발레트의 등을 두드리며 말을 아꼈다. 주름진 릴라당의 눈가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발레트는 스케베라스산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처음 몰타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이제 몰타는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었다.
"나디아!"
익숙한 그 이름에 발레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아니는 벌써 저만치 앞서 뛰어가고 있었다. 부두가 시작하는 곳에서 나디아는 몰타를 떠났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발레트는 나디아의 얼굴을 보자 세상을 다 담을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뛰었다. 기사단원들은 발레트의 모습을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마르삼세트 항은 만남과 헤어짐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처음의 설레임과 마지막의 서글픔은 항구에 늘 존재했다. 그러나 기다림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고 끝내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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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5

며칠 동안 맹렬히 퍼부은 공격으로 튀니스의 길목인 라골레타 항구의 요새는 무너졌고 에스파냐 동맹군은 육지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승리의 기세는 에스파냐로 기울어졌다. 항구는 이제 에스파냐 동맹군의 함대가 장악하게 되었다. 바르바로사는 질겁하며 튀니스 성벽으로 도망쳐 버렸다. 튀니스는 호수 주변에 우거진 나무들 때문에 녹색의 도시라고도 불렸다. 호수 뒤편에는 길다란 성벽이 펼쳐져 있었다. 에스파냐 동맹군 앞에는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자리에 가만히 앉아 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포격은 멈췄다. 해적의 발길이 끊긴 것으로 보아 라골레타는 에스파냐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엄청난 긴장감을 동반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지상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앞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그것은 또아리를 틀고 혀를 내미는 뱀처럼 그들에게 공격적으로 다가왔다.
'덜컹'
덜그럭거리는 쇳소리에 발레트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물체가 철창 앞에서 조심스레 자물쇠를 열고 있었다. 모두 떨리는 마음으로 의문투성이 침입자의 행동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발레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족쇄 찬 손을 꽉 쥐었다. 검은 실루엣이 몸을 굽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 망토에 달린 모자를 내렸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어서 여기를 나갑시다."
남자는 빠르게 사람들의 족쇄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작은 쇳덩어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발레트는 손을 움켜 쥐었다 다시 폈다.
"자, 어서 나가야 해요."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발레트는 나가려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왜 우리를 풀어주는 거요?"
남자는 망토의 모자를 올려쓰며 말했다.
"나도 당신과 같은 기독교도요."
남자는 배교자였다. 에스파냐 함대가 라골레타를 공격하자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편을 바꾼 것이었다. 바르바로사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노예들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적들은 이미 요새 안으로 숨어 버렸고 배교한 남자는 지하 감옥에 있는 기독교 포로들을 풀어줄 수 있었다. 성벽 밖에는 에스파냐 동맹군이 자리하고 있고 해적들은 성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다면 성 안에는 힘없는 주민들 뿐이었다. 발레트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병기창이 어디에 있소?"
해적을 상대하려면 무기가 필요했다. 포로된 기독교도 숫자가 많으니 무기만 있다면 승산은 있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결심한 듯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이쪽이요."
로메가스와 지아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심호흡을 한 후 벽에 붙어 살금살금 걸어갔다. 달빛은 일렬로 뛰어가는 그림자들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성벽 위에 서 있던 해적이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발레트는 손을 들어 뒷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거리 곳곳에 무장한 기독교 노예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둠이 빛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튀니스 성벽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에스파냐 동맹군은 성벽 위에 높이 들린 등불을 보았다.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동맹군은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르바로사는 어젯밤, 튀니스를 버리고 알제로 도망쳤다. 성 안에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랍 주민들만 남아 있었다. 어제까지 족쇄 찬 노예 신분이었던 많은 기독교도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에 취해 있었다. 발레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한바퀴 둘러 보았다. 로메가스는 손을 높이 들며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고 지아니는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었다. 발레트는 손을 펼쳐 보았다. 손목에는 족쇄 찬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멀리서 붉은 십자가 망토를 두른 성 요한 기사들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로메가스가 뛰쳐나갔다. 발레트도 그 뒤를 따라 달렸다.

 

 

군대에 이질이 돌아 알제로 도망친 바르바로사를 끝까지 추격하지 못한 카를 5세는 해적을 피해 도망친 하산을 튀니스의 허수아비 지도자로 복귀시키고 에스파냐 수비대를 남겨 두었다. 그리고 에스파냐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라골레타 항은 고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함선으로 가득 찼다.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북아프리카의 메마른 바람을 맞으며 항구를 거닐었다. 저 멀리 성 요한 기사단의 무장 상선 성 안나호가 보였다. 붉은 십자가 깃발은 바람을 반기며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어이, 이게 누구야? 딴 사람이 되었는걸?"
깨끗해진 턱을 만지며 멋쩍어하는 지아니를 위아래로 훑으며 로메가스가 말했다. 옷을 갖추어 입고 머리와 수염을 자른 지아니는 다른 사람같아 보였다. 발레트는 환하게 웃으며 지아니에게 다가갔다.
"푹 쉬면서 영양을 섭취하면 몸은 원상태로 돌아올 거요."
발레트는 지아니의 건강이 염려되었으나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지아니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떤 말로도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마음이 들떠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몰타가 바로 앞이에요."
지아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도 바다로 눈을 돌렸다. 모든 것을 감싸주는 푸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수평선 너머에 몰타가 있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남았어요. 그전에 우리끼리 회포를 푸는게 어때요?"
로메가스는 발레트와 지아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로메가스의 얼굴을 본 발레트와 지아니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로메가스도 뒤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항구가 떠나갈 정도로 한참을 웃어댔다. 한바탕 웃고 나니 발레트는 아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조금 더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세 사람은 십대 소년들처럼 떠들면서 항구의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에는 해군 복장을 한 남자가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발레트도 그를 지나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아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색으로 새겨진 십자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안드레아는 지중해를 바라보고 서 있는 나디아를 생각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성 안나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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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4

587

 

 

 

어떤 삶을 살고 있던 나는 과연 정상을 위해 도약하는가? 아니면 절벽에서 추락하는가? 그걸 알아내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걸 꿋꿋하게 보여주겠다고 절벽에서 밀어버린다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기분이 수 십 차례나 맴돌게 된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람을 마주할 때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멋대로 사고하는 바가 있다.

 

그래도 지금은 내 멋대로라도 생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루니아 누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카일~ 아~”

 

“제가 먹을 수 있다니까요.”

 

“소녀는 언니가 받아주는 걸 먹어야 한답니다아!”

 

“남자거든요!”

 

정말로 중요한 듯하면서도 불필요한 포지션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통 4사분면으로 모든 기준을 나누는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사람의 기준은,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이익이 존재하고 무엇보다 합이 잘 맞아서 행복해야 한다. 반대로 가장 중요하지 않고 가장 불필요한 사람이라면, 손해만 있고 같이 있으면 매우 불편한 것. 그것들이 각각 1사분면과 3사분면에 속해있다고 했을 때. 루니아 누나의 경우는 확실하게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받아먹고 있는 케이크가 내 입 안에서 뭉개지는 동안,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빠져나가 여장을 풀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기로 하자.

 

“잡화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이가 좋네요.”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는 비꼬는 말투겠지만, 앞에 루니아 누나와 루비아가 있는 한, 리제로트는 매우 부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홍조를 띠면서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세상 하나 없어져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평행세계 모두가 사라지니까, 지금 내 개인적인 감정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참기로 하자.

 

얼마나 참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래도 지금은 케이크를 받아먹으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고분고분하게 받아먹는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루니아 누나가 주는 케이크를 받아먹지 않으면, 커다란 사건 하나를 더 만드는 셈이 되니까, 얌전히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 사실상 케이크는 좋아하긴 하지만, 수틀리면 또 다른 난장판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얌전하게...

 

“자. 아~ 하세요. 안 하면 또 다시 구속을 하고 질질 끌고 갈 겁니다.”

 

“루비아. 케이크를 준다면 준다는 건 고맙지만, 너도 좀 먹는 게 어때?”

 

“저는 이미 충분히 먹고 있습니다.”

 

아니, 절대로 충분히 먹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시켜놓고 나에게만 다 먹이고 있잖아. 초콜릿 케이크도 한 조각만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접시만 5개가 쌓였다.

 

그리고...

 

“그 공허한 눈으로 먹고 있다고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거든! 너 여태까지 케이크조각 하나도 먹지 않고, 나에게만 퍼 먹이고 있잖아!”

 

“퍼 먹이다라는 표현은 너무 남성적이니, 여성스러운 단어로 떠 먹여준다는 표현으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애초에 말하는 것에 대해 남성적과 여성스러움이 뭐가 중요해!”

 

“그렇게 제가 먹는 모습이 보고 싶다면 차라리 저에게도 떠먹여주시죠?”

 

“접시까지 다 넣어줄 테니 입 벌리고 있...크앗!”

 

살기를 감지한 것일까? 루니아 누나는 포크 뒷부분으로 내 이마를 때렸다. 다만, 내 주관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때렸다는 게 아니라, 강타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겠지. 뇌를 흔드는 충격이 아직까지 머리에서 뛰어 놀고 있는 동안, 매우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리제로트와 다른 손님들.

 

이게 뭐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상황인가?

 

“그래서 리제로트 양은? 우리 카일의 뭐죠오?”

 

“은인이에요. 적어도 제가 레이베리아로부터 살려줬죠. 그 이후에는 뜨거운 밤을 보낸...”

 

“그 어느 누구도 살려준 은인과 뜨거운 밤을 보내지 않아. 알아들어?”

 

“절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

 

“헛소리 말고! 제대로 이야기를 하란 말이야!”

 

소리지르는 것도 목에 한계가 있는데, 조만간 득음을 할 지경이다. 한숨이 기가 막히게 튀어나가는 동안 리제로트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의 친구는 당신의 은인에게 암살하려고 시도하잖아요?”

 

“네가 아이리스를 인형으로 만든 게 시작지점이잖아.”

 

“그때는 너무 귀여워서 그만...”

 

귀여우면 모두 인형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냐? 한숨이 한 가득 나오게 되는 답변을 들었지만, 리제로트는 잡화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인형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불안감도 살짝 맺히기 시작했다. 다만, 그런 일을 하기 전에 리제로트가 오히려 굴복하게 되지 않을까?

 

잡화점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내가 걱정을 따로 안 해도 될 정도라니.

아니지. 내가 걱정을 끼치는 입장이었네.

 

“인형으로 만드는 게 무슨 재미가 있나요오?”

 

“그야 제 말에 복종하잖아요.”

 

잡화점에 돌아가기 전까지 한 번도 말을 섞지 않을 것 같은 루니아 누나가, 리제로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굴러오는 질문을 보기 좋게 받아 친 리제로트의 대답에, “흐응~ 그렇군요오.”라고 입을 열었다.

 

“말에 복종한다는 의미는 잘 알고 있는지요오?”

 

“말에 복종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제 명령에...”

 

“아뇨오. 당신은 타인의 진심을 여태껏 모르고 살아왔다는 말이에요오.”

 

얼어붙기 시작했다.

루니아 누나의 분위기는 항상 극과 극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럴 때마다 항상 무서워 죽겠다. 천진난만하고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바보 같은 일을 벌여도, 루니아 누나의 본 모습을 보통 사람이 견딜 일은 없으니까.

 

리제로트가 쥐고 있던 컵이 살짝 떨기 시작했다.

 

“사람의 진심이 왜 필요한 거죠?”

 

“당신의 그 나락 같은 삶을 벗어나기 위함이죠오.”

 

나락 같은 삶이란 소리에 또 다시 리제로트는 흠칫하고 놀란다. 옆에 있던 월터가 그에 동요했는지, 얼어붙는 살기가 우리 주위를 몰아치기 시작했고, “월터. 가만히 있어.”라며 리제로트의 당돌한 한마디가 분위기를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다.

 

“조만간 싸움이 일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글레이프니르를 꺼낸 루비아 씨가, 다시 상황을 보고 서서히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그보다 그거 주머니에서 꺼내는 거였어?

 

그 밧줄이 그렇게 작은 주머니에 다 들어가던가?

 

“루비에몽이라고 불러주시죠.”

 

“남의 생각을 읽고 거기에 맞게 태클 걸어달라고 자신을 꾸미지 말라고!”

 

저럴 때마다 내 정신이 대나무 헬리콥터를 타고 저 멀리 날아간다. 그러나 내가 루비아와 대화를 주고 받아도, 루니아 누나와 리제로트는 서로 공방전을 하느라 바쁜데, 자세한 이야기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달그락!

 

“웃기지 마세요! 당신이야 말로 저에 대해 뭘 안다는 거에요!”

 

“저는 카일의 누나이기 이전에 기사단장이랍니다아. 많은 사람들을 봐오면서 이끌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지요오. 당신도 근본적으로 착한 아이이긴 하지마안, 우리와 함께 걸어가기 위해선 자신의 능력을 버려야 해요오. 바로 저 뒤에 있는 집사 인형도 같이 말이죠오.”

 

태연하게 자신의 모든 힘을 포기하라는 루니아 누나. 그걸 부정하는 리제로트 사이에는 불길한 기운이 맴돌기만 했다.

 

“다른 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조금 더 조용하게 이야기 해주시길 바랍니다.”

 

일하는 종업원에게 한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

 

“그걸 줄이면 갑분싸가 됩니...”

 

“제발 내 생각 읽고 멋대로 입 열지 말아줄래!”

 

루비아는 내 생각 하나하나 전부 다 읽는 게 가능한 건가? 호문쿨루스의 특수능력이 언제부터 사람의 생각을 읽는 게 되었을까? 티르야 말로 최고의 연금술사다운 제작솜씨다.

 

“이건 티르와 관계 없습니다.”

 

“제발 같은 태클 3번 걸기 전에 자중할 수는 없는 거냐?”

 

“없습니다.”

 

“자중하라고!”

 

속도가 빠른 공방전은 이곳도 마찬가지. 각기 다른 토론대회나 만담대회를 진행하는 와중에도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서 이쯤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게다가 나는 중대한 사명이 있으니, 이런 한가로운 곳에서 케이크나 강제로 받아먹으며 앉아있을 위인이 못 된다. 애초에 여장 당한 상태인데, 그 옷까지 저주받아서 벗지를 못하고 있으니, 지금 당장 저주를 풀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한단 말이지.

 

“저는 슬슬 자리에 일어나도 될까요?”

 

“안돼요오. 카일은 누나와 백장미를 촬영해야 한다고요오.”

 

대체 왜 백장미를 찍자고 하는 거냐.

 

“백장미를 찍기 전에 전 이 옷의 저주부터 풀고 싶다고요. 일단 저주를 풀어야...”

 

“다른 여성의류도 입기 때문이죠오?”

 

“아니라고!”

 

도대체 어떤 남자가 다른 여장을 하기 위해 저주를 푼다는 건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그러니 루니아 누나의 사고방식은 정상범주에서 벗어나있다. 결국 비정상중의 비정상은 루니아 누나인...

 

-파악!

 

“켁!”

 

뭔가가 빠르게 날아와 내 머리를 힘껏 때렸다. 가만히 보니까 별이 5개정도 떠있는 걸 보면, 어디 돌침대가 생각나는데...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는 언제까지나 정상이랍니다아. 오히려 카일이 비정상이 아닐까요오? 자신의 귀여움을 멀리 퍼트릴 생각을 하지 않고, 숨기시려고 하시다니이...혹시! 즐길 사람만 즐기라는 뜻의 배려인가요오?”

 

“호수 같은 배려 좋아하시네! 어떻게 자매끼리 남의 생각을 읽고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것에 능통한 것부터가 비정상이거든요!”

 

애초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비정상이라는 소문이 들리긴 했는데, 루니아 누나 또한 붉은 눈을 가지고 있다. 모두 주변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을 보면, 거기를 멀리하고 집을 가까이 하는 편이 좋다.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천성적으로 착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가까이 해도 좋답니다아~”

 

“내 생각 좀 그만 읽어!!!”

 

본래 독백은 남들에게 읽히라고 하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그전에 리제로트에게 무슨 의도로 그런 말 했는진 잘 모르겠지만, 지금 싸우자는 의도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싸워도 득이 없는 건 저 소녀도 잘 알고 있답니다아. 다만, 저는 카일에 대해 1%라도 위험을 없애기 위해 그리 말한 것이지요오.”

 

나를 생각해서 말했다는 말은 진심이겠지.

이전에 리제로트는 나를 납치했던 전과가 있으니까, 더 이상 나에게 위험이 되지 않도록 인형들을 포기하라는 것. 아마 인형을 만드는 그 자체를 포기하라는 거니까, 자신의 초능력을 포기하라는 셈이 된다.

 

내가 알던 인형사 사브누아는 영혼을 집어넣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리제로트는 인간의 영혼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영혼이 없을 때야 말로 가장 순수해! 그러니 귀여운 아이들을 순수한 채로 남아야 한다고!”

 

영혼이 없는 게 순수해?

그러니까 아무것도 담지 않은 그릇자체가 보기 좋다는 건가?

 

“그건 꽤 기발한 헛소리네.”

 

저 말을 듣자마자 내 입에서 자동반사마냥 튀어나갔다.

 

“영혼이 없는 상태가 가장 순수하다고? 그래서 내 딸을 그렇게 만들었냐!”

 

그저 본능적으로 외친 소리. 다른 시간대일지 몰라도 카렌을 지키지 못했던 무기력한 자신. 그리고 엉망이 된 카렌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분노가 리제로트에게 단번에 몰아쳤다. 오늘의 일을 과거까지 끌고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내 분노에 반응한 마나들이 주변을 요란하게 뒤흔들었다.

 

“넌 정말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의 의뢰를 들어주기 위해 이곳에 있지만, 말 한마디를 듣고 내가 정말 무르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잘못하지 않았다는 듯한 그런 소리를 한번만 더 하면...

 

내 분노를 마주한 리제로트에게 성큼 다가가선 나지막하게.

그리고 최대한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내 모든 걸 걸고 너 하나만큼은 꼭 죽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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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 회사는 쉬는 날이 없을까요?

요즘은 그나마 페이스 조절을 하는 거 같았는데,

일정이 당겨진 거 비해, 다른 업체에서 아직까지 일할 준비가 안 되었다니...

 

조만간 백수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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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4

튀니스는 해안에서 이어지는 내륙 호수 기슭에 위치한 도시였다. 마그레브 끝단에 형성된 이곳은 옛 카르타고 시절부터 북아프리카의 무역 중심지로서 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수많은 민족이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힘을 겨뤘고 무수한 통치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좁은 해협을 따라 반나절이면 몰타에 다다를 정도로 유럽과 가까웠기에 오스만은 바르바로사를 지원해 주었고 바르바로사는 오스만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며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실현해 나갔다. 카를 5세는 북아프리카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트리폴리에 이어 튀니스가 함락되자 그들의 만행을 더 이상 못 본 체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지중해의 패권을 제자리에 돌려놔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튀니스는 철옹성같은 성채였다. 성벽 앞으로는 바다로 이어지는 호수가 있어 해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해적들은 포로로 잡은 노예들을 성벽 지하 깊숙한 감옥에 던져 두었다. 그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을 대하듯 하루에 한 번 철창 문을 열고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가축처럼 노예 시장에 세워 큰 돈을 받고 노예 상인에게 팔아 버렸다. 철창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의 눈은 공포심으로 가득했다. 날마다 꾸는 악몽으로 사람들은 서로에게도 적대감을 품었다.
지하 감옥은 어둡고 축축했으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거나 바닥을 기어가는 벌레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며칠 동안 이곳에서 먹은 거라고는 빵 한 조각이 다였다. 발레트는 다리를 끌어당겨 두 팔로 무릎을 감쌌다. 소름끼치는 차가운 공기가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족쇄를 찬 손과 발은 점점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발레트는 맞은편에 앉은 지아니를 보았다. 지아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초록 눈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 했다. 5년간의 갤리선 생활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지아니의 몸은 젊은 성인 남자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그는 다른 노예들과는 달랐다. 그에게 절망이나 원망의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지아니에게는 어떤 압력에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발레트는 나디아에게도 오빠와 같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쾅! 저 멀리서 어렴풋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트는 벽에 귀를 갖다대었다. 로메가스가 다가오려하자 발레트는 손을 들어 막았다. 소리는 전보다 더 크고 가깝게 들려왔다. 쾅! 발레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로메가스와 지아니도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대포 소리는 분명하고 선명하게 튀니스를 뒤흔들었다.
"함대가 왔어! 에스파냐에서 함대가 왔어. 로메가스!"
발레트는 로메가스에게 소리치며 그를 얼싸안았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눈물을 흘렸고 신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발레트는 지아니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힘껏 서로의 어깨를 잡았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말소리가 감옥 밖으로 빠져나갔다. 발레트는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그들은 성벽 아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족쇄 찬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에스파냐군이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해적들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에스파냐 함선은 항구의 요새에 무차별적으로 포를 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성벽이 뚫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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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3

둥, 둥, 둥!!!
검은 얼굴의 해적은 손을 높이 들어 북을 내리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노를 저어라! 더 힘껏!"
발레트는 이를 악 물고 족쇄 찬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생존 앞에서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다. 앞 사내의 등에 긴 채찍이 내리꽂혔다. 사내의 손에서 노가 떨어지자마자 곧 사정없는 매질이 이어졌다.
"계속 저어요."
지아니가 정면을 응시한 채 표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땀이 비가 오듯 흘러 내렸다. 지하 선실은 덥고 습했다. 발레트는 강렬한 태양이 그리워졌다. 빌구의 성벽 위에서 마셨던 포도주가 간절히 생각났다. 금빛의 스케베라스산과 붉은 바다, 함께 했던 사람들. 다시 한번 그곳에서 몰타의 풍경을 보고 싶었다. 지아니의 말이 옳았다. 버텨야 했다.
발레트는 북소리에 집중했다. 북을 치는 해적의 손이 더욱 빨라졌고 노는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해적들의 엉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레트는 라골레타 항에 가까이 왔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항구는 북아프리카의 관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괴괴한 모습이었다. 트리폴리를 무참히 함락시킨 해적의 잔인함을 피해 아랍 지도자는 이미 도망쳐 버린 후였고 튀니스 주민들은 해적들을 상대로 감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르바리 해적들은 힘쓰지 않고 라골레타 항에 입성했다. 부족 대표들은 해적에게 튀니스 요새를 내어주고 말았다.
갤리선 노예들은 모두 족쇄를 찬 채로 배에서 내렸다. 발레트는 트리폴리에서 사로잡힌 후로 처음 두 발로 땅을 딛고 섰다. 다른 배에서 내린 노예들 사이로 로메가스가 보였다. 로메가스는 걸음을 멈추고 발레트를 쳐다보았다. 발레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오랫동안 걷지 못한 탓에 지아니는 다리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 휘청거리는 그를 발레트가 붙잡자 해적은 둘 사이를 떼어놓으며 지아니의 등을 밀쳤다. 검은 얼굴의 해적은 발레트를 노려보며 허리춤에 찬 칼을 만졌다. 발레트는 족쇄를 끌며 앞으로 걸었다. 이제 마그레브의 튀니스는 해적의 도시가 되었다.

 

 

지중해의 바람이 갑판 위로 몸을 내민 안드레아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떠나갔다.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몰타에서 경험한 짧은 환희 뒤에는 텅 빈 허전함만이 남았다. 눈을 감으면 애처로운 얼굴로 항구를 뛰어다니는 나디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드레아는 마지막 순간을 지울 수 없었다. 성 요한 기사단에 생각이 미치자 그는 숨을 내쉬었다. 트리폴리에서 살아남은 자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요새는 해적이 장악하고 있고 대다수의 주민과 병사는 죽임을 당했다.
'에스파냐에는 다른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갤리선은 바르셀로나를 향하고 있었다. 제노바는 일찍이 상업으로 도시가 형성된 곳이었다.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으나 베네치아와의 세력 다툼에서 패배한 후 밀라노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그렇게 쇠퇴의 길을 걷던 제노바에게 에스파냐의 카를 5세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그는 제노바의 용병 대장 도리아를 해군 총독으로 삼고 제노바의 자립을 도와주었다. 카를 5세는 해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필요했다. 도리아 또한 용병으로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쪽으로 움직이는게 당연했다. 북아프리카에 관심을 두지 않던 카를 5세도 더는 바르바로사의 도를 넘는 행위를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전군을 바르셀로나에 집결시켰다.
안드레아는 도리아가 이끄는 해군 선단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는 금융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다의 삶을 택했다. 돈을 저울질하는 것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피오르 삼촌은 늘 그가 동경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어린 안드레아에게 바다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였다.
안드레아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파도는 저항없이 순순히 길을 내주었고 돛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바람은 지중해의 서쪽으로 배를 실어 보냈다.

 


바르셀로나는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에서 집합한 갤리선과 무장 상선으로 가득차 있었다. 원정에 필요한 수많은 물자를 배에 적재하는 선원들로 항구는 발을 디딜 틈도 없었다. 카를 5세는 튀니스까지 점령한 바르바리 해적으로 인해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튀니스는 시칠리아까지 배로 하루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해적은 제국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그것은 광활한 영토를 거느린 카를 5세의 자존심에 금이 가게 만든 사건이었다. 더구나 바르바로사는 오스만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카를 5세는 이번에야말로 지중해가 기독교도의 것임을 단단히 일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튀니스 원정은 대규모의 함선과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교황은 자금을 내어 선단을 조직하였고 릴라당은 세계 최고의 무장 상선인 성 안나호를 바르셀로나로 보냈다. 도리아가 이끄는 제노바 해군도 바르셀로나 항에 들어섰다.
안드레아는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에스파냐 해군에게 트리폴리에 관한 다른 정보가 들어왔는지 알아보았다. 에스파냐 수비대장 멘데스는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병사들과 성 요한 기사들은 갤리선 노예로 넘겨졌다는 얘기가 들렸다. 사망자 명단에 발레트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보면 포로로 잡혔을 확률이 높았다. 해적의 습격이나 해전으로 포로가 된 기독교도나 이슬람교도는 갤리선 노예로 보내져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해전으로 배가 침몰하면 제일 먼저 목숨을 잃는 건 노예들이었다. 그렇기에 각국의 갤리선에는 노를 저을 노예가 항상 필요했고 노예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안드레아의 눈에 성 요한 기사단의 무장 상선 성 안나호가 들어왔다. 돛대에는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 때 창설된 성 요한 기사단은 귀족의 자제들로 구성된 의료 기사단으로 출발했다. 기사는 청빈, 순결, 순종을 평생토록 맹세했고 기사단에 남은 생을 바쳤다. 안드레아는 트리폴리 요새가 함락되지 않았다면 튀니스 원정에서 발레트를 동맹군으로 만날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성당에서 기도한다는 나디아의 말을 떠올렸다. 우두커니 서 있는 안드레아의 앞뒤로 짐을 맨 선원들의 분주한 발걸음만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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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3

586

 

 

 

만일 조사를 받는 와중에 자신이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장을 했는데 그게 하필 검은 고양이 코스프레였고, 살인미수를 한 인간이 자신의 잘못은 스틱스 강 저 멀리 던져버리며 멀쩡하게 이야기 하고 있고, 하필 건들인 사람이 적과 아군을 둘째치고 거대한 기업의 영애라고 한다면, 지금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양한 사고를 경험했지만 이렇게 다각도로 사람을 미쳐버리게 한 상황이 어디 있을까?

 

더군다나 나는 한마디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 어차피 조사를 받는 건 레인이지 내가 살인을 저지르려고 한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초능력을 이용한 범죄는 일반 경찰이 조사하기엔 무리가 있다. 뜬금없이 샤프심이 총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는 기괴한 현상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 이상, 그 말을 믿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니 이건 무슨 해프닝인가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끝나긴 하겠지만...

 

“저도 피해자라니까요? 세상에 총알처럼 빠른 샤프심으로 죽을 뻔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날아드는 방향을 보아 시민들 사이에서 날아들었다는 건데, 그런 연약하고 힘 없는 시민은 저에게도 적용되는 사항이라고요. 제가 비록 이런 이상한 가면을 써서 믿지 않으시려고 하겠지만, 제 옆에 있는 여자친구도...아니. 코스프레 일 때문에 여장한 친구도 무서운 경험을 했다니까요? 안 그래도 소극적인 사람인데 이 일로 트라우마가 되면 어쩌겠어요?”

 

참으로 당당하게 자기가 저질러놓고 수습하기 위해 말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매우 능숙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보다 여장한 친구라고 떠벌린 순간, 모든 사람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은 가지각색으로 바뀌었다. 뭐, 코스튬 플레이 문화가 있긴 하니까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경향은 상대적으로 적겠지만, 방금 이 녀석 나를 여자로 착각했었지? 조만간 때릴까? 그리고 누가 소극적이야?

 

“당신. 본부에 직접 전화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저 남자를 잡아가는 게 좋을 걸?”

 

서리가 피어 오르듯한 리제로트의 말에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나이가 어려도 카리스마가 타고난다면 자신보다 더 작은 어린 아이에게도 압도당할 수 있다. 하긴, 힘을 가진 자야말로 카리스마가 있기 마련인가?

 

그것도 아닐 텐데...

 

“우선 경찰서까지 가시죠. 그보다...”

 

나를 바라본 경찰은 잠깐 고민하며 경직된 체 서 있었다. 나에게 끊임없는 불안감을 심어주는 행동을 5초동안 하다가, 다시 옆에 있던 리제로트가 입을 열기를...

 

“그 사람은 놔두세요.”

 

여전히 나에게 볼일이 있다는 건가?

 

[레인은 괜찮을까?]

 

릴리스가 경찰관 사이에서 유령처럼 통과한 체 나에게 날아들었다. 다른 이들에게 허상이라고 해도, 그 허상이 내 손을 붙잡을 때는,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따듯했다.

 

[레인이야 알아서 해결하겠죠. 레인도 인맥이 없지 않아 있을 테니까요.]

 

자기가 일을 벌이고 수습하는 걸 밥 먹듯이 하는 녀석이니까. 저런 일에 익숙하다고 한다면...

 

[문제는 저에게 처해진 상황이네요.]

 

리제로트는 살며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더니.

 

“잠깐 같이 차를 마실 시간은 있겠죠? 만약 없다면 그런 모습으로 조사받으러 가셔도 상관 없어요?”

 

천천히 경찰서로 끌려가는 레인을 바라보며 한숨을 마음속으로 포장했다.

 

“좋아. 옷의 저주를 풀어야 하지만, 잠깐의 휴식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런데...”

 

“유랑극단의 간부가 어째서 적의 입장인 자신과 이렇게 해도 되냐고 물어보고 싶은 거죠? 유랑극단은 애석하게도 결단력이 거의 없는 단체거든요. 당장 죽어야 할 적일지라도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일 뿐이에요.”

 

“그런 것도 각본가가 다 쓴 거야?”

 

각본가의 존재는 모든 일을 미리 적어놓고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지만, 레이베리아의 힘이 그렇게까지 전지전능하지 않았나 보다.

 

“아뇨. 이건 각본과는 별로 상관 없어요. 아무리 레이베리아라도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보다 제가 맛있는 찻집은 잘 알고 있으니 따라오시죠.”

 

적어도 옷의 저주라도 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내 여장이 리제로트 입장에선 보기 좋았나 보다. 정상적인 옷을 입고 있었을 때는, 기어가는 지네를 바라보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표정이 많이 나아졌다. 그런데...

 

“꼭 이렇게 걸어가면서 공개처형이라도 해야겠냐?”

 

“괜찮아요. 월터가 저희를 지켜줄 거에요.”

 

“내가 내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줄 알아?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게 싫다는 거야.”

 

“저주가 걸려서 벗지도 못하잖아요? 이렇게 된 이상 당당하게 커밍아웃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여장으로 커밍아웃을 왜 하는데? 여장을 당했는데 그런 비참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아.”

 

“여장을 하던 말던 자신의 신변에 대해 궤변을 늘여놓는 건 잘 하시네요.”

 

“궤변이라니? 나처럼 정론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없다고? 모든 세상사람들이 전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나야.”

 

질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니 이 말싸움은 내가 이긴 거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 이기고 지는 걸 따지는 내 입장을 잠깐 생각하자니, 너무 비참해서 머릿속에 있는 휴지통에 넣고 삭제를 누르기로 하자. 찻집에 따라가는 내내 월터의 팔을 바라보았는데, 샤프심임에도 불구하고 무기보다 더 심한 살상력으로 끌어올린 레인의 공격을 버티고도 아무일 없다는 듯이 잘만 움직였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 이 세상이 잘못 되었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건가요?”

 

“인지는 하지. 어차피 이 시간대에서 내가 사라지기만 하면 되잖아. 나도 본래 장소로 돌아가고 싶어서 미칠 거 같아. 그러나, 해결해야 할 일이 한 두 개가 아니라서 말이지. 추후 미래의 유랑극단에 대한 일도 처리하고 싶으나, 애석하게도 우리끼리 싸우면 모든 곳이 다 멸망해버리니, 어쩔 수 없이 지금 당장이라도 뒤집지는 않는다고.”

 

“뒤집는다면?”

 

“레이베리아와 일기토를 벌일 생각도 하고 있어. 하지만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어.”

 

리제로트와 월터의 걸음이 멈추고 나도 따라서 멈췄다.

 

“왜 나를 구해줬지?”

 

내 한마디에 리제로트는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결정한 듯 입을 열었다.

 

“당신이 죽는 건 각본에 없으니까요. 애초에 각본엔 당신의 이름도 특징도 적히지 않아요.”

 

“내가 적히지 않는다는 건 예전부터 일어난 일이지, 그렇게까지 놀랄 필요는 없어.”

 

정해진 각본이었다면 죽었다는 건가? 아니면 그 각본에 쓰여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구해준 건가? 아니, 날 구한 목적은 따로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각본에 없다는 의미는 정해져 있는 결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증거. 그러니 당신을 한 번 살려주고, 그 은혜로 저에게 정해진 결말을 부셔달라는 의뢰를 하고 싶은 거에요.”

 

[호오? 꼬마가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데?]

 

나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던 릴리스의 감탄사는 내 귀를 때렸다. 유랑극단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의뢰를 했다는 말은, 적과 아군의 구분을 떠나서 일단 같은 배를 탄다는 의미가 되는데, 의뢰인이 배신을 안 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저 어린 표정에는 절박함이 드러나있다.

 

“그래? 내가 널 살려줬으니, 너도 날 살려달라 이런 소리구나.”

 

“멋지게 돌려 말했는데 당신은 낭만이 없군요.”

 

“의뢰를 받는 순간부터 낭만이고 뭐고 없어.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는 의뢰인을 최대한 도와주는 것뿐이야.”

 

그러니 배신을 하면 그 이후엔 어찌될지 모른다는 협박을 미리 깔아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제로트는 흔쾌히 손을 내밀었는데. 악수라는 건 기본적으로 “서로 잘해봅시다.”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작은 손을 붙잡고 살짝 흔들며 의뢰를 받아들인 찰나.

 

[자기? 아무래도 다른 곳에 위험이 생긴 거 같은데?]

 

[위험?]

 

리제로트가 이제 와서 자신을 미끼로 함정을 팔 이유는 없고.

 

[위험이라면? 적습은 아니겠지?]

 

일부러 위험이라는 단어를 쓰는 걸 보면, 명확한 정보를 모르는 모양이다. 유랑극단이 보낸 자객이라고 생각하기엔 의구심이 드는데...

 

“카일~ 어디서 다른 소녀와 놀기 위해 비밀친구 서약을 하고 있는 거죠오?”

 

역시나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는 법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난장판이야!”

 

거대한 검기가 리제로트와 월터를 노리는 게 아니라, 정확히 나를 노리며 뿜어져 나왔다. 공중으로 날아갈 만큼 힘껏 도약을 하자마자 기이한 밧줄이 날아왔는데, 마법방패<Magic Shield>로 내 주변을 감싸며 빠르게 회전시켰다. 밧줄은 빠른 회전에 튕겨나가고 안착한 자리에서 루비아와 루니아 누나를 마주했다.

 

“그보다 명백하게 저를 먼저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요?”

 

“당연히 카일이라면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넘어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하물며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이지 않는가? 특히 나에게...

 

“당신들도 같이 찻집에 가시죠?”

 

리제로트는 나와 마주할 때와는 전혀 다른 호의적인 미소와 함께, 루비아와 루니아 누나에게 권유를 했다. 물론 귀여운 걸 보면 환장하는 루니아 누나라면 받아들이고도 남았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유랑극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섣불리 승낙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귀여운 카일을 데리고 온 거랍니다아. 차는 잡화점 안에서 마셔도 상관 없거든요오.”

 

“그런가요? 그럼 그 잡화점에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상상이상의 전개가 나오고 있어서 나 또한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다. 사실은 흥미진진하다기 보단, 여기서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 더 무서웠지만, 이제 하다못해 집까지 찾아오려고 한다. 지금 유랑극단들이 잡화점을 찾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는데. 이렇게까지 말하는걸 보면 그냥 날로 먹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기다려. 잡화점은 아직까지 유랑극단은 아직까지 적이야. 너를 잡화점에 들어오게 하고 싶은 마음이 1%가량이 있어도 지금은 안돼.”

 

아까까지만 해도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얼굴이 살짝 풀어진 리제로트가 다시 정색을 하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흐음? 어여쁜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꼭 한번 찾아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진정으로 노리는 건 잡화점 멤버들이냐?

리제로트의 눈빛이 살짝 번뜩인 걸로 보아 진짜인 모양이다.

 

“꽃밭에서 놀고 싶은 건 소녀의 마음이라고요?”

 

“내 표정을 읽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네가 말하는 꽃밭의 의미는 아무래도 전혀 다른 의미인 거 같으니까. 안 된다고 해둘게. 실제로 꽃밭에서 꽃들만 있는 줄 알아? 곤충도 있고 지렁이도 있고 그 사이에서 사냥하고 있는 고블린도 있다고.”

 

몬스터들의 숲에 2박 3일로 캠핑을 해봐야 꽃밭도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걸 깨닫겠지. 실제로 네펜데스 돌연변이들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차이점이 있다며 그냥 네펜데스는 가만히 있고, 돌연변이들은 직접 뛰어서 사람을 집어삼킨다.

 

“당신은 아직까지 자신이 어떤 삶을 사는지 잘 모르시나 보네요?”

 

“글쎄? 사람이 많은 것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여장하면서 이상한 잡지 모델이나 하는 삶은 원하지 않거든.”

 

잡화점에서 부정적으로 살아가는 건 없지만, 마냥 긍정적일 수 없는 이유라면, 아직까지 따라다니고 있는 투명한 카메라 같은 것들이, 온 종일 날아다니면서 잡지의 재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리라.

 

물론, 지금 카메라를 든 루니아 누나 또한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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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연재주기가 길어지고 있네요.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 기간이 매우 짧아서, 제가 휴일 없이 야근을 1달에 30일정도를 하고 있거든요.

 

집 오면 새벽 12시부터 2시인데 아침 8시 30분까지 출근이니.

적어도 7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 와중에 글을 쓸 시간보단 제가 설계쪽의 일을 하면서 설계와 관련된 것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네요.

 

역시 직장인의 삶은 힘든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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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2

릴라당은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리폴리 요새의 방어를 맡아달라는 카를 5세의 조건이 처음부터 탐탁치 않았던 그였다. 그곳은 남부 이탈리아 해안 마을을 습격하는 해적들을 견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책이었다. 변변치않은 병력과 지원으로 타국의 요새를 지킨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기사들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마을은 불태워졌고 요새는 해적들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북아프리카 해안은 해적이 군림하는 땅으로 점차 바뀌고 있었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마르삼세트 항구는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오가는 상선들로 늘 분주했다. 이곳은 각국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온갖 소식이 넘쳐났다. 나디아는 거친 바다 사람들 사이를 부단히 뛰어다녔다. 사내들은 젊은 아가씨가 항구를 돌아다니는 것이 이상한지 힐끔힐끔 쳐다봤다. 북아프리카에서 온 상선은 트리폴리에 관해 더 이상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요새를 지키던 대다수가 죽었고 살아있다고 해도 노예로 끌려갔을 것이라는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성벽 공사를 감독하는 기사를 통해서도 다른 소식은 얻지 못했다. 나디아는 발레트와 헤어지던 날을 떠올렸다. 등을 돌려 걸어가던 모습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나디아!"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나디아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말끔한 옷차림의 안드레아가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놀라면서도 반가운 얼굴로 나디아에게 다가왔다. 안드레아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나디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 있어요?"
안드레아는 나디아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나디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한 후 몸을 돌리려 했다. 안드레아는 나디아의 왼쪽 팔을 붙잡았다.
"항구를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해요. 무슨 일이에요, 나디아!"
안드레아는 나디아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그녀는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트리폴리.. 혹시 트리폴리 소식을 알고 있나요? 누가 살았는지.."
나디아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두려워졌다. 발레트가 살아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나디아는 잘 알고 있었다. 안드레아의 어깨 너머로 스케베라스산이 보였다. 언젠가는 진실을 마주할 때가 올 것이었다. 나디아는 몸을 떨었다.
안드레아는 흔들리는 눈빛의 나디아를 보며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말했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방법이 있을 거에요. 누구를 찾는 겁니까?"
"발레트.. 성 요한 기사단의 발레트"
나디아는 토해 내듯 발레트의 이름을 가까스로 말했다. 기사단이라는 나디아의 말에 안드레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힘겨운 얼굴로 간신히 눈물을 참는 나디아를 보며 안드레아는 가슴이 멎는 것 같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나디아에게 말했다.
"나디아, 난 오늘 제노바로 돌아가요. 트리폴리 소식을 알게 되면 꼭 전할게요."
안드레아는 잡고 있던 나디아의 팔을 천천히 놓았다. 나디아는 안드레아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녀의 푸른색 로브는 점점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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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1

나디아는 성벽 위에서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가는 붉은 빛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빌구의 성벽은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고 크레누는 공사 기한을 맞추기 위해 때때로 야간에도 작업을 진행했다. 인부들과 함께 저녁을 먹던 크레누는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는 나디아를 발견했다. 그녀의 가냘픈 몸은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릴 듯 했다. 나디아의 풍성한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은 너울너울 춤을 췄다.
크레누는 아내를 하늘로 먼저 보내고 망연자실해 있던 5년 전을 떠올렸다. 술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길모퉁이에 앉아 울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소녀에게 음식을 사주며 지낼 곳은 있는지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의 고통을 어느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기에 크레누는 나디아를 거리로 돌아가게 할 수 없었다. 크레누는 나디아가 환한 웃음을 되찾길 바랬다.
한쪽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인부 중 한 명이 크레누에게 달려와 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트리폴리 요새가 해적에게 습격을 당했답니다. 지금 항구에선 온통 그 얘기로 난리에요!"
크레누는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디아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크레누의 등뒤에 와 있었다.
"나디아!"
미처 붙잡기도 전에 나디아는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녀는 마르사 해안을 지나 스케베라스산을 올라갔다. 숨이 미칠 듯 찼으나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쳤고 작은 생채기에서 피가 이슬처럼 맺혔다. 나디아는 정신없이 뛰었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내렸다. 떨어진 눈물은 모든 것을 적셨다. 고조 섬,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발레트까지도... 아무리 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다 깊숙한 모래 더미에 파묻혀 버렸다.
나디아는 땅끝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발을 멈췄다. 어둠은 이미 바다를 삼켰고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만이 그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나디아는 목에 걸린 십자가 펜던트를 손에 잡고 무릎을 꿇었다. 바람은 그 여느 때보다 세차게 나디아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디아는 눈을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의 밤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발레트는 잠을 청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어깨는 쇳덩이를 올려놓은 듯 무거웠다. 하루 종일 고되게 노를 저었던 사람들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해적들은 대다수가 육지로 나갔고 노예들을 감시할 몇몇만 남아 있었다. 발레트는 고개를 돌려 수염으로 뒤덮인 남자를 보았다. 사내가 자신의 출신을 밝혔을 때 그와 같은 눈을 어디서 보았는지 발레트는 알 수 있었다.
'나디아...'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이 이름 때문일지도 몰랐다. 몰타를 떠난 이후로 발레트는 나디아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나디아를 만나고 간간이 비쳤던 그녀의 쓸쓸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녀가 웃으면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고 안심이 되었다. 깊은 상처를 털어놓았을 때는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발레트는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대었다. 차갑고 딱딱한 물체가 만져졌다. 나디아가 오빠의 칼을 발레트에게 줄 때 그녀는 이전과 달라 보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해 보였다.
"당신이 어떻게 그 칼을.."
초록 눈의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발레트는 놀라는 사내에게 칼을 건넸다.
"나디아... 당신의 여동생을 알고 있소. 이제 주인을 찾은 거요."
사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칼을 잡았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물끄러미 칼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디아...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사내는 칼에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디아를 지켜달라 부탁하며 주신 칼이었다. 그는 지난 5년간 나디아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디선가 살아 있을거라는 믿음으로 그는 노예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움푹 패인 사내의 얼굴은 뜨거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발레트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사내의 몸을 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내는 감았던 눈을 뜨더니 칼을 내려놓았다. 그는 발레트를 보며 나디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몰타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은 말아요."
사내는 발레트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한번 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어떻게 발레트가 칼을 가지고 있는지도 물었다. 발레트는 그간의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 말없이 듣고 있던 남자는 발레트의 말이 끝나자 칼을 도로 건넸다. 발레트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남자는 나디아와 닮은 초록 눈으로 발레트를 바라보며 그의 팔을 잡았다.
"나디아가 당신에게 준 거요."
발레트는 칼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남자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지아니 레오나디요."
"발레트,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
두 사람은 족쇄 찬 손과 손을 마주 잡았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밤이었다. 벌거벗은 사람들은 몸을 웅크리며 마른 기침을 해댔다. 발레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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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10

제르바 섬은 바르바로사가 북아프리카에서 첫 번째로 자리잡은 곳이었다. 이곳은 야자수로 주변이 둘러싸여 해적들의 은신처로 삼기 적당했다. 발레트는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해적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고 쿵 하는 쇳덩어리 소리가 들렸다. 노는 배안으로 들여졌다. 발레트는 족쇄를 찬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목이 쿡쿡 쑤시고 시큰거렸다.
"하다보면 요령이 생길 거요."
'이 생활도 적응이 된다니 끔찍하군.'
허리는 끊어질 듯 했고 목은 갈증으로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조금 있으면 저녁을 갖다 줄 거요."
옆에 앉은 남자는 발레트의 생각을 읽은 듯 다시 한번 말했다.
"갤리선을 탄지 얼마나 됐소?"
"5년."
남자는 얼굴의 반이 수염으로 덮여 있었고 머리는 마구 자라 생김새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가슴과 등은 상처로 가득해 온전한 살을 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볼품없이 야위어 있었으나 초록빛의 두 눈은 어떤 기운을 뿜어내는 듯 했다. 발레트는 그 눈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며칠간 머무를테니 쉬어 두시오."
발레트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로메가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이 지나면 몇 구의 시체가 바다로 던져질지 모를 일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검은 얼굴의 해적은 웬일인지 아무 말 없이 빵과 물을 주고 올라가 버렸다. 발레트는 숨도 쉬지 않고 물부터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차디찬 감각은 그의 몸속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트리폴리에서 잡힌 사람들이 어디로 간지 아시오?"
발레트는 천천히 빵을 씹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다른 갤리선에 타고 있을 거요, 라골레타로 가기 전에 잠시 들른거니까."
"라골레타? 튀니스로?"
"며칠 후면 튀니스도 트리폴리와 같은 신세가 될 지 모르오."
바르바리 해적들은 오스만으로부터 병력과 화승총을 지원받아 쉽게 북아프리카의 요새를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악랄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바르바로사에게 그 누구도 대항하기는 어려웠다. 튀니스까지 함락된다면 몰타와 남부 지중해가 오스만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발레트는 손을 꽉 움켜 쥐었다. 살아난 세포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족쇄를 끌어 당겼다.
"이럴 때 힘을 비축해 놓아야 해요. 여기서 버티려면.."
남자는 돌덩어리같은 딱딱한 빵을 물에 적셔 입으로 가져갔다.
"버텨서?"
"고향으로 돌아갈 거요. 꼭."
발레트의 질문에 남자는 발레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5년간 갤리선 노예 생활을 한, 덥수룩한 수염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남자의 초록 눈이 한순간 빛나는 것을 발레트는 보았다.
"어디 출신이오?"
"몰타, 고조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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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9

릴라당은 벽난로 옆의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고 타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달 사이에 릴라당의 이마 주름은 더욱 깊게 패였다. 그가 성 요한 기사단장으로 취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쉴레이만은 대군을 이끌고 로도스를 공격했다. 패기 가득한 젊은 술탄은 해외 원정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야 했고 릴라당은 200년간 기독교계의 보루였던 로도스를 지켜내야 했다. 기독교와 이슬람, 두 세력의 힘 겨루기에서 성 요한 기사단은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하는 배와 같았다. 그들은 뜯겨진 나무 조각을 간신히 붙잡고 파도가 이끄는 대로 떠밀려 갔다. 몰타는 그들이 표류끝에 만난 섬이었다. 릴라당은 기사단장이 된 직후부터 기사단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야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릴라당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짧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망토를 두른 기사 한 명이 벽난로 앞으로 걸어왔다.
"어떻게 되었나?"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부하 기사는 릴라당에게 둘둘 말린 종이를 건넸다.
"투르크인은?
"지하에 데려다 놨습니다."
"수고했네."
발티가 얻어낸 정보는 보키아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었다. 에스파냐는 오스만의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보키아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그가 가진 카드를 사용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릴라당은 의자에 다시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무거운 두 눈을 감았다.

 


은촛대 위로 흔들리는 불빛, 온갖 산해진미로 차려진 풍성한 식탁, 붉은 포도주와 호탕한 웃음소리.
보키아 부인은 이 모든 것과 상관이 없는 듯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잘 가꾼 콧수염과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의 보키아는 돈 후안의 끝나지 않는 자기 자랑에도 참을성 있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돈 후안은 마드리드에서 온 중요한 손님이었다. 그는 카를 5세와 대면할 수 있는 지체 높은 귀족이기에 그를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인생에 찾아온 기회를 잡는 것과 같았다. 보키아의 배려 속에 돈 후안은 자신의 모험담을 더 길고 장황하게 얘기하는 만족감을 누렸다.
보키아 부인은 시칠리아의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이 결혼으로 인해 보키아는 남부 이탈리아의 상권을 얻을 수 있었고 이제 에스파냐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싶어했다. 하인이 다가와 보키아의 귀에 무엇인가 속삭이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해를 구했다. 보키아 부인은 그제서야 남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부인, 마그레브에서는..."
돈 후안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허름한 복장의 발티가 보였다. 유럽은 오스만의 다음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의 진짜 속내를 알아내기는 무척 어려웠다. 이스탄불에서 활동하는 유럽 첩자들은 본국으로 많은 정보를 보냈지만 그중에는 거짓 정보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서로 속고 속이는 거짓 정보가 판을 쳤기에 믿을 수 있는 정보를 갖는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보키아는 발티를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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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2

585

 

 

 

세상 사람들 중에는 헛것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은데, 오늘은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내가 되는 날이다. 몽마의 여왕답게 잠을 자고 있지 않아도 환상으로 나타나, 이곳 저곳 대려다 달라고 하고, 실물을 먹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보면 나 혼자 아이스크림 2개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으로 보고 있으리라. 애초에 여장을 한 상태에서 아이스크림 2개를 들었으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아이스크림을 매우 좋아하는 여장이 잘 어울리는 변태라고 보겠지.

 

그래, 아이스크림 2개를 드는 건 별로 타격이 없으니, 제발 여장이라도 풀어줬으면 좋겠으나, 레인이 따라다니기까지 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더 이곳으로 쏠렸다. 옷에 저주가 묻어서 존재감이 더 올라간 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도, 시도 때도 없이 떠들고 있는 레인은 내가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저번에도 진공청소기로 모든걸 다 정리했죠.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시체도 남기지 않고 다 빨아들인다고요?”

 

“그래? 너는 헌터들이 판치는 곳에서 나타나는 게 좋지 않겠냐? 환영극단인지 뭔지 하는 곳에 들어가면 잘 받아줄 거 같은데?”

 

“저는 넨을 사용하지 않는데요?”

 

가끔씩 이런 농담을 주고 받을 때도 이 세계는 여전히 미쳐있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뿐이다. 다른 설정과 배경이 섞여버리는 기괴한 현상. 원인이라고 한다면 나와 레인이 각자 소유하고 있는 잡화점이, 하나의 시공간에 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잡화점의 중추인격인 세린과 자주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잡화점 하나가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뿐이고, 무리해서라도 지금 남아있는 방법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도 유랑극단이 미래를 난장판으로 만드는데, 본래 시간대인 300년전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사실...안전하다고 생각은 한다.

 

어차피 300년 뒤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어도, 지금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미래에는 누군가가 해결해줄 것이라고 판단을 했거나, 아니면 자신이 직접 찾아오면 잡화점이 그때는 3개가 될 테니까, 모든 평행차원과 함께 붕괴될 위험이 있으니, 일부러 찾아오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30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아무런 일 없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한번쯤은 미래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지 않는가? 예를 들어 복권이 있다.

 

물론 내 경우에는 300년 뒤의 1등 당첨금액이 얼마인지 알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미리 알아두기만 한다면 기분 좋지 않을까? 이건 너무 사소한 거 같으니...음...적어도 자신이 미래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스포일러라고는 하나, 자신이 잘 되는 스포일러를 미리 경험한다면 그게 또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고, 미래에 불행해진다고 한다면 그 불행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르지. 어차피 삶이란 것은 불안정한 4차원속에서 선택을 끊임없이 하기 때문에, 다른 평행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곳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삶은 매우 유동적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카일 씨는 그렇게 생각하나요?”

 

“멋대로 남의 독백하는 글귀를 읽고 그럴싸한 질문을 던지지 말아줄래? 나는 어째서 독백을 읽히는 거냐? 아니면 내 타임라인에 독백이 올라와서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는 거냐?”

 

“아뇨. 리트윗이 되고 있는데요?”

 

“결국 공유를 하고 있다는 거잖아? 아니, 생각만 하고 있는데 왜 그런 것들이 실제로 공유가 되는 거야? 직접 문장을 치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말한 기억도 없다.

 

“혹시 태클을 운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의 페널티가 아닐까요?”

 

“페널티 킥으로 죽어볼래?”

 

이쯤 되면 창조신이 대체 무슨 이유로 날 창조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 창조신이 창조한 건 아니지. 나는 하늘에 계신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으니까.

 

...지금은 300년 뒤니까 부모님은 하늘에 계신 게 맞다. 물론 300년 전으로 돌아가면 살아계시겠지만.

 

“카일 씨는 운명론자에요?”

 

“운명은 개척이 가능하다.”

 

“책에 쓰여진 그대로네요?”

 

“그거 내가 일기에 썼던 내용이냐?”

 

기이하게도 내가 필수로 적어 넣어야 할 내용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일기나 자서전 같은 건 자신이 겪어온 과거와 그로 인한 성공과 실패, 자아성찰에 대한 내용들이 기술되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들어서 적는 게 아니고!

 

“가급적이면 나에 대한 스포일러는 자제해줄래? 매번 일기나 그런 걸 채워 넣을 때마다 신경 쓰게 만들잖아?”

 

“어라? 카일 씨. 일기도 쓰세요?”

 

“나는 본래 일기를 쓰는 게 습관이야. 하루가 어떻게 마무리 되는 가를 쓰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괴상한 경험들을 하나하나 기록해서, 최후에는 그 기록에 따라 아이언 클로를 집행해야 하기 때문이지.”

 

“음. 일기를 쓰는 건 좋지만, 목적이 매우 불순하네요.”

 

“불순하다는 건 또 무슨 의미야?”

 

레인은 한숨을 내뱉고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불순하다는 건 딴 속셈이 있어 참되지 못하다라는 뜻이에요.”

 

“어디 사전 검색해서 이야기 하지 말라고, 내가 말한 의도는 그게 아니잖아. 아이언 클로를 날리기 위한 일기장도 필요에 의해 쓸 수 있다고!”

 

모든 것엔 목적이 있지만, 꼭 그에 맞는 목적을 설정하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운동하는 목적은 건강보다는 배가 더 고프면 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 무언가 하는 행위에는 여러 목적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러니 나는 불순하지 않아.

오히려 순수하다고 봐야 한다.

 

내가 마음을 다 잡았을 무렵, 레인은 내 쪽에서 한 발자국 벌어졌다. 고작 한 발자국 멀어진 거 같지만 분위기 상, 마음의 거리는 우주 저 끝까지 나아가고 있겠지. 어쩌면 우주를 넘어 다른 평행차원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지금은 그런 추진력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만...

 

“목적은 사소한 거라도 다 가능해. 예를 들어 네가 개미를 관찰하고 인간의 집단은 개미보다 더 못하다. 라는 일기를 써도 일기의 기능을 제대로 한다고.”

 

“나중에 미래를 예지하는 일기를 쓰시는 건가요?”

 

“그 일기는 파손되면 죽는 거잖아.”

 

미래를 예지하는 일기라...

있으면 그리 쓸모는 없다고 본다.

 

그건 이미 정해진 운명으로 도달하게 만드니까.

 

“정해진 운명이 그리 좋은 건 아니지. 인생은 언제나 순탄하게 가지 않으니까. 미래가 참하면 그게 살맛이 나겠냐?”

 

“그렇군요. 그러면 카일 씨의 일기를 다 태울까요?”

 

“알아서 해라. 태우던지 불쏘시개로 쓰던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태워버리라고 하고 싶은데, 차기 잡화점의 주인이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내가 태우라고 했는데 레인이 거절한다고 해도, 뭐라 말할 이유도 뭐도 안 된다.

 

“자기~ 저 옷 사주면 안 되?”

 

“저 옷을 내가 왜 사줘? 그 전에 너는 환각에서나 튀어나오는 귀신 같은 존재잖아. 아니면 꿈의 미로에서 나와서 직접 현실로 튀어 나오던가?”

 

릴리스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내 말에 반박했다.

 

“아니. 저건 자기가 입을 건데?”

 

“안 입는다고!”

 

지금 여장한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오늘의 신상품이라고 나온 저 옷을 입으라고? 차라리 나더러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따오라고 해라.

 

“저주를 풀러 왔다면 나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이렇게 거절하면 자기는 한 곳만 방황하다가 오늘 하루를 다 날리는 것이 아닐까?”

 

“이 녀석...조만간 잡화점에 찾아오기만 해봐라...”

 

“어머? 그렇게 나를 보고 싶어하는 거야? 기뻐라~”

 

저 표정.

구겨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이언 클로가 현실세계와 꿈의 경계를 부수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뻗었지만 아무런 형체가 없이 허공만 스칠 뿐.

 

“하아.”

 

한숨이 밖으로 나와 하늘로 날아갔다. 누군가는 괴롭힘을 받고 누군가는 괴롭힌다. 이건 무슨 음과 양의 관계와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 세상의 이치는 아주 간단하게 기준이라는 것이 정해진 모양이다.

 

그 기준은 전부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필요한 걸까? 언제나 세상은 중심적...

 

“자기? 그런 독백은 재미가 없어서 뒤로 가기를 누르는 사람이 분명 존재할 텐데?”

 

“시끄러워! 개나 소나 독백을 다 훔쳐보고!”

 

“나는 개나 소는 아닌데? 혹시 그런 게 좋다면 노력은...”

 

“이상한 쪽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이 하도 훔쳐보는 바람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독백은 멋대로 볼 수 있다는 상황이 너무 불공평하다. 당연히 훈련을 한다면 사람의 심리상태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어도, 자세하게 독백을 한다는 자체는 너무하지 않나?

 

“설마 이런 독백 하나하나 읽는 것도 설정이 오염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어차피 이게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는 일이긴 하지만, 시공간에 관련된 것도 복잡해 죽겠는데 평행차원까지 생각하니까 머리가 터지려고 하네.”

 

“그래서 저 옷은?”

 

“안 입어!”

 

틈새시장을 공략하려는 릴리스에게 소리를 친 뒤에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세상이 무너져도 정신상태가 아다만티움보다 더 뛰어난 잡화점 멤버들의 장난은 가위바위보부터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가위바위보를 하면 거의 무조건 이기는 마왕이 있는가 하면, 나타날 때마다 세계가 날아가는 여왕이 있고, 대체 이게 인간인지 괴물인지 모르는 여기사를 필두로, 내가 싫어하는 것만큼은 계속해서 건들이기 시작한다.

 

시나의 경우는 그나마 얌전하기 때문인데 대략 소금이 있다면 시나의 경우에는 물에 약간 희석시킨 정도가 된다.

 

그래도 짠 건 마찬가지...

이후 릴리스와 아리엘, 루비아까지 늘어나면서 24시간 쉴 틈도 없이 날 괴롭히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악마가 오면 질색하면서 도망갈 것이고, 어쩌면 아다만티움이 그들의 정신력과 음흉함에 비하면 나트륨까지 내려갈 수 있으리라.

 

“나트륨은 물에 닿으면 폭발...”

 

“그만 읽어!!!”

 

레인에게도 한차례 소리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어쩌겠어요? 그게 카일 씨의 운명인데?”

 

“내 운명이 남들에게 태클 거는 것이 아니라, 24시간 내내 독백이나 흘리는 괴상한 운명이냐? 차라리 기묘한 운명을 타고나서 파문이라도 사용하는 게 속이 더 편하겠다!”

 

파문의 호흡은 건강에 좋다고도 하니까.

 

“그래도 이렇게 상대함으로써 카일 씨도 심심하지 않잖아요.”

 

“심심하지는 않지. 분노가 치솟고 있으니까.”

 

입고 있는 옷의 저주를 풀기 위한 여행은 그리 순탄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하루를 쓸 때 없는 잡담으로 날리는 중이니까.

 

“어라? 카일 씨.”

 

“또 왜?”

 

“앞을 보세요.”

 

내가 걷고 있는 방향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쪽이 앞이 아닌가? 그러나 더 멀리 바라본 시야에서는 소녀와 키가 큰 남자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받으며 걷고 있었다.

 

여전히 인기가 많구만...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옆에서 레인의 행동을 차마 막지 못하고 눈으로 쫓을 수 밖에 없었는데...레인이 꺼낸 샤프의 끝부분이 정확하게 리제로트를 겨누며 딸칵하고 눌렀다.

 

-피이잉!

 

바람을 가르고 지나가는 샤프심이 총알처럼 빠르게 지나간 것도 무서웠지만, 집사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리제로트를 가리고 양팔로 막아내기까지 했다.

 

“야! 너!”

 

나는 레인에게 따지려고 소리를 쳤지만 금세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숨만 쉬면 사람들이 나에게 시선을 보내는데, 이런 대형사고를 내 근처에서 쳤으니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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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글을 올린 이유는

일이 새벽에 끝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항상 새벽에 끝나ㅇ...[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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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8

계단을 내려갈수록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어두컴컴한 그곳은 지옥의 입구 같았다. 먼저 잡힌 사람들은 거의 헐벗은 채로 나무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허벅지 위에는 노가 눕혀져 있었고 그들의 몸은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족쇄를 찬 손과 발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검은 얼굴의 해적이 발레트의 등을 떠밀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앉아."
밑은 온통 오물 투성이었다. 갤리선 노예들은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노를 젓고 먹고 자며 심지어 배설까지 앉은 자리에서 해결했다. 하루에 한 덩이의 빵이 그들이 먹는 음식의 전부였으며 등에 내리꽂는 채찍질은 노예들의 수명을 더욱 단축시켰다. 매일 한 명씩 죽어나갔고 시체는 바다로 던져졌다. 해적은 손에 채찍을 들고 발레트에게 눈을 부라리더니 위로 올라가 버렸다.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 닫혔다. 발레트는 어둠과 함께 남겨졌다.

"출발이다! 노를 잡아!"
갑작스런 큰 소리에 발레트는 놀라 눈을 떴다. 검은 얼굴의 해적이 다리를 벌리고 서서 무언가를 크게 외치고 있었다. 그는 손과 발에 채워진 족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발레트는 현실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노를 잡아요, 어서!"
어렴풋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발레트는 고개를 들었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덩치가 산만한 사내의 검은 얼굴이 보였다.
"어서요!"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가 맡아졌고 다급한 소리가 그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발레트는 족쇄를 찬 손을 들어 올려 노를 잡았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노는 위로 올려지더니 아래로 다시 위로, 아래로를 반복했다. 해적은 통로를 걸어다니며 채찍을 휘둘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빨리, 더 빨리!"
발레트는 자신도 모르게 힘껏 노를 쥐었다. 수십 개의 노들이 구령에 맞춰 앞으로 나아갔다. 노를 저으면 저을수록 간밤의 기억이 또렷이 살아났다. 불 타던 마을과 눈을 부릅뜨고 죽은 동료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발레트는 이를 꽉 물고 노를 밀어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남자가 항구의 오래된 주점에 들어섰다. 그는 구석의 빈 자리에 앉아 고개를 살짝 들어 주점 내부를 둘러보았다. 선원들은 술에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잡다한 농담을 하며 실실거리고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꼬마 하나가 얼굴을 삐죽 내밀고 안을 들여다 보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탁자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남자는 주변을 살피며 쪽지를 펼쳤다. 짧은 단어를 읽자마자 남자는 모자를 푹 누르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쪽지를 전해 준 꼬마가 주점 앞에서 그를 향해 손짓했다. 꼬마 아이는 미로같은 골목길을 다람쥐처럼 뛰어갔다. 막다른 골목길이 보이자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남자의 눈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아 섰다.
"사데트."
"사데트."
허름한 복장의 비토 발티가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감시가 심해 이렇게 만날 수 밖에 없었소, 이스탄불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오?"
비토는 남자에게 둘둘 말린 종이를 건네며 물었다.
"새로운 함대를 조직하고 있는 중이요."
남자는 모자를 고쳐 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규모는 어느 정도로?"
"70척은 될거요."
"곧 지중해 원정이 시작되겠군. 다음에는 다른 방법으로 만나야 할거요."
발티는 사내의 어깨에 손을 올려 인사를 한 후 곧 사라졌다. 모자를 눌러 쓴 남자도 미로속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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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1

584

 

언제나 사람은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라면 매우 간단하다.

내가 나를 챙겨야 하는데 남을 생각할 시간이 있을까?

언제나 나 자신에 대한 여유를 찾아야, 오지랖 넓게 남을 생각해주는 척을 할 수 있지.

-맹렬한 추격전을 끝마치고 결국 붙잡힌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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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로트 처리 여부는 레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장 우려한 것은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 싫어하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 보통 고위급의 간부나 귀족, 대상인 등.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들을 고용하여 조용하게 처리하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다만, 레인의 경우에는 일반상식을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분명 개인방송국을 열어서 “저! 오늘! 살인합니다!”라고 경찰서 앞에서 신나게 떠벌릴게 분명하니까.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언제나 자극적이지 않으면 만족을 못하는 부류에, 켈모리아 마그누스가 있었고 레인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은 보기 좋게 틀려버렸다. 레인의 성격을 고찰하면 고찰할수록, 이 녀석은 자극적이지 않으면 만족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생 살아가는 동안 자극적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내가 마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태클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

 

레인은 1분 1초라도 지루할 틈이 없다.

 

위험천만한 것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초능력도 레인의 성격과 매우 흡사한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 따라서 지금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가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이른 아침에 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도 눈을 떴는데, 거기에는 백장미를 못 찍게 하는 나에게 반기를 들어버린 루니아 누나를 필두로, 모든 잡화점 멤버가 기습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빠르게 도망쳐 나왔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모든 도로와 모든 건물들을 통해서 달리고, 뛰고, 부수고, 날리고를 반복. 그 일대에 피해는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20분 뒤에 치열하고 처절했던 아침운동은 막을 내렸다. 루비아의 글레이프니르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아무런 힘도 못쓰고 그대로 붙잡혀야만 하는 사기적인 아이템.

 

매번 나를 죽이라는 말을 해도, 되돌아오는 것은 자비가 아닌 비웃음과 더불어 빌어먹게도...

 

“카일 씨는 보면 볼수록 여장이 진화하네요?”

 

“닥쳐.”

 

레인이 내 신경을 긁다 못해 삽으로 파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살인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는 분노를 천천히 조절하면서 제거하고 있는 나의 모습. 마음속에서 심호흡을 1시간 전부터 120번 내쉬고, 한번의 한숨으로 내 입밖에 튀어나왔다.

 

심호흡을 마음속으로 내쉬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현 상황이 더 이상하니까 빨리 여장을 풀기 위해 노력을 하자. 어처구니 없게도 옷 하나하나가 모두 기괴한 저주덩어리들이라, 물품을 이용하여 해주를 하거나 고위 프리스트를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 레인에게 찾아간 이유는 레인의 능력을 이용해서, 저주를 해제하려고 했으나 위험한 건 하나같이 다 들어가있는 잡화점 물품의 특정상, 지금 해주 할 수 있는 물품을 찾으러 떠나고 있다.

 

지금은 천계가 모조리 비어있는 상황에서 대주교를 찾아가던 성녀를 찾아가던 권능을 빌릴 수 없는 상황이다. 물품을 빨리 찾고 이 바보 같은 옷에서 벗어나도록 하자.

 

“그래서 이번엔 검은 고양이인가요?”

 

“닥치라고 했지.”

 

“마왕님과 커플룩이네. 아니, 커플 종족인가?”

 

“분자단위로 해체해버리기 전에 닥쳐.”

 

“닭을 때리라뇨. 카일 씨는 잔인한 사람...아! 아파! 알았어요! 잘못했다니까요!”

 

커플 종족이라는 어감이 굉장히 이상해서, 본래 때리려는 힘보다 1.2배정도 강하게 때렸다. 내가 여장을 함에 따라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황폐화되기는커녕, 잡화점 멤버들은 좋아하고 있고, 히드라는 계속해서 “풋!”하고 짧은 웃음을 스타카토로 연주했다. 조만간 불러내서 중모리장단으로 때려야지.

 

“이걸 도와주면 리제로트를 제거하는 것에 동참하겠다는 소리죠?”

 

“애석하게도 죽이는 게 목적은 아니지, 하지만 내가 죽이라고 하면 죽여도 상관 없어. 대신 멋대로 먼저 죽이지는 마라. 물어볼 건 물어보고 죽일지 살릴지 결정해야 하니까.”

 

“역시 어린애를 좋아해서 그런가?”

 

“은팔찌를 찰만한 발언은 그만둬라. 그리고 나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어린애를 좋아하는 건 너잖아. 이 범죄자야.”

 

“범죄자라뇨. 고성능 싸이코라고 해주세요.”

 

“어째서 너는 그런 대답이 나오는 거냐?”

 

사람들이 자신에게 싸이코라고 하는 경우는 친한 친구들의 대화 중에선 나올 수 있지만, 정상인과 비정상인들의 대화에서 비정상인이 싸이코라고 한다면, 그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당장 피하자.

 

“그런데 리제로트를 끌어 내려면...”

 

“무슨 소리하려는지 알고 있으니 제발 좀 조용히 해.”

 

“정말요?”

 

“아니. 사실 모르는데 짜증나니까 조용히 하라고.”

 

레인은 시큰둥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너무 과민반응을 한 터라 혹시나 마음이 상했을까? 그나마 미안함이라는 감각이 내 이성을 정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 폐가에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카메라들이 사방팔방에 있는 거야.”

 

기존에 찍었던 백장미와는 다르게 생동감을 주기 위함이라고, 내 주변에 카메라처럼 생긴 물체들이 이곳 저곳에 날아다니고 있었다. 뭐, 어디에 묶여서 강제로 촬영을 당하는 것도 나쁜 거지만, 이건 뭐...대놓고 도찰하겠다는 거잖아?

 

“조만간 가지 말아야 할 폐가에 찾아가서 기이한 현상을 카메라에 담는 건가요?”

 

“이 세상에 폐가에 찾아갈 생각을 왜 하는 거야? 애초에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가면 안 되지.”

 

무엇이든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무튼 가장 큰 목적은 유랑극단도 아니고, 리제로트를 찾는 것도 아니고, 옷에 걸려있는 저주를 풀어서 자연스러운 나를 찾기 위함이니, 오늘 하루는 이 일에 집중을 하도록 하자.

 

“카일 씨는 여장을 가장 싫어하네요?”

 

“그야 하기 싫은데 억지로 입히니까 그렇지. 잡화점 멤버는 기본적으로 내 의견은 묵살하고 입히거든. 카메라에 녹화가 되니까 그 이상 말은 하지 않겠지만, 이렇게 보여도 나는 꽤 복잡한 삶을 살고 있다고 봐.”

 

그 어떤 인간도 성별이 바뀌는 경험을 체험하는 건 쉽지 않는 일이지만, 잡화점 안에 있으면 방심하는 순간 바뀌는 터라, 전생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갑갑한 내 상황에 한숨을 내쉬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고정이 되었는데, 제길 한숨을 쉬는 것조차 반응하도록 내 존재감을 높여버렸나?

 

“뜬금없이 말하는 거지만 시선이 너무 많이 쏠리는데요?”

 

“아까와도 말했듯이 이 옷들은 저주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레시아와 시나가 같이 다니지 않는 게 가장 크겠지만, 지금 내 존재는 일이 너무 바빠 죽을듯한 사람도 나를 무시 못하게 되어있어. 이래선 차량을 운전하는 사람들이 사고가 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 일부러 차가 적은 구역을 돌아다니고 있는 건데, 여기도 사람이 너무 밀집된 구역이라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네.”

 

주변에서 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아직까지 내 몸에서 타고 흐르는 싸늘한 소름은 내 생각을 거부하기 마련. 보고도 못 본척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부터, 그냥 대놓고 보면서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까지 가지각색이다. 또 다른 경우라고 한다면...

 

“헤? 고양이 꼬리는 진짜 같구나.”

 

뒤에서 뜬금없이 목소리를 낸 릴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겨울이 지나갔다고 해서 그 추위는 전부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꽃샘추위를 견디기 위한 흰색의 시스루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스커트와 연분홍색의 연분홍 빛이 스며든 세미 자켓을 입고 있었다.

 

“대체 고양이가 뭐길래 계속해서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다는지 그 이유부터 묻고 싶지만, 지금은 매우 바쁘니 그 일에 대해 나중에 말하도록 하지.”

 

사실상 여장을 당하는 와중에도, 릴리스가 “그럼 고양이 귀와 꼬리를 다는 건 어떨까?”라는 말 한마디에 고양이 귀와 꼬리가 최적화된 코디로 바뀌어버렸다. 불 나는 집에 기름을 더 부어버린 릴리스는 옷을 입고 있어도, 감각적인 몸과 다른 이들을 홀려서 녹일 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라면 내 환각에만 보이기 때문.

 

아무리 환각을 이용하더라도 적절하게 쓰면 그거야 말로 좋은 정보원이 될 수 있는데, 지금의 경우에는 릴리스가 길잡이를 해주고 있는 역할이다. 여태까지 나는 목적이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니까, 릴리스에게 책임을 묻고 저주를 풀기 전까지 길잡이를 하라고 했다.

 

“아무튼 지금 거의 다 온 거야?”

 

“아니~ 아직 한~참 남았어.”

 

아직 한참 남았으면 지금 빨리 가야 할 텐데, 매번 미소를 짓고 여유가 있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데이트 했으면 좋겠다~ 이런 봄 날에~”

 

“그거 협박이지?”

 

“글쎄? 나는 협박 같은 거 모르는데?”

 

천진난만하게 나를 보고 있는 릴리스의 말과 의도를 번역하자면, “데이트 해주기 전까지 그 옷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장소를 가르쳐주지 않을 거야.”라고 들리게 되었다. 기이하게도 분명 피해 받은 사람은 나고, 이런 꼴로 만든 공범은 릴리스인데도, 갑과 을의 관계는 릴리스가 더 높았다.

 

“하아...지금은 레인도 동참하고 있으니까 데이트는 나중에...”

 

“응?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해주를 할 수 있는 물품을 파는 곳이 떠오르지가 않네?”

 

“아! 진짜! 알았어! 하면 되잖아!”

 

이 모습을 입고 데이트를 한다고? 나를 죽이다 못해 무덤에서 꺼낸 뒤에, 5개로 분해하고 5대륙에 파묻는 것과 같다. 소리질러서 이곳으로 다시 시선집중이 되었는데, 주변 반응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건가? 자기가 데이트를 해준다니 따라갈 수 밖에 없잖아?”

 

“내가 어쩌다 이런 모습으로 환각과 같이 데이트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환각이라고는 해도, 나와 적절하게 링크가 되어있으니 잘 대해줘야 해?”

 

그리고는 나와 레인의 사이를 뛰어들어 내 팔을 붙잡았다. 그 사람에게만 보이는 환각은 그 감각까지 혼란을 일으키지만, 레인의 경우에는 릴리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접촉자체를 할 수 없으니 아무일 없는 듯이 걸어갔다.

 

“릴리스라는 분은 어디에 있는 거에요?”

 

“지금은 꿈의 미로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겠지.”

 

“몽마들의 여왕이기 때문인가요?”

 

“기이하게도 꿈은 모든 차원과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공간이니까. 꿈에 한정을 짓자면 릴리스가 잡화점에서 최강자에 속해. 레시아도 릴리스가 꿈에서 추방시키면 꿈의 미로로 들어가지 못하거든.”

 

세계를 창조하고 강력한 마왕이 되고 최고의 여기사로 명성을 떨쳐도, 현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공간의 규칙에 대해 얽매이기 마련. 그 시공간의 규칙을 깨고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릴리스야 말로, 어찌 생각을 해보면 최강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존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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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일하기 싫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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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2 - 10

583

 

 

 

사실상 방법이라면 미래에 대한 걸 알아버렸으니 과거로 돌아가서 바꾸는 것이 있다. 그러나, 멋대로 과거를 바꿔서 난장판이 된 이야기가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과거를 바꾸지 않고 미래에서 해결만 하려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런데 내가 미래에 오래 있어도 상황은 악화되고, 무분별하게 과거를 바꾸려고 시도하면 시간의 파수꾼들이 찾아오리라. 시간의 파수꾼 중 유랑극단과 손을 잡은 자가 존재한다면, 과거로 가든 미래에 있든 나에게 불리하다는 것만큼은 별만 다를 바가 없지. 잡화점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멤버들은 하나 같이 침묵을 유지할 뿐이다.

 

분명 내 앞에 있는 멤버들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를 생각하는 거라면 정말 좋겠지만...

 

“그래서 주인. 언제쯤 촬영을 시작할 건가?”

 

난 분명 찍는다는 말도 없었는데 검은 고양이가 판을 깔아놓고 있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하지만 카일? 누나 생각으로는 백장미를 찍는 것도 중요해요오.”

 

파도가 치는듯한 금발의 여성은 레시아의 말에 동조했다.

 

“루니아 누나. 제 말을 다 듣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기왕 이 세상이 언젠가 사라진다면, 어쩔 수 없이 카일의 귀여운 모습을 최대한 많이 남겨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오?”

 

“안 좋아요.”

 

찍히는 당사자가 안 좋아.

 

“그래도 어릿광대가 신이 되었다라아? 결국 미래에 오래 있어봤자 다른 평행차원의 설정들이 이곳까지 섞여 녹아 들고 누군가는 기괴한 설정에 오염된다는 소리군요오?”

 

기괴한 설정에 오염이 되어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4차원을 뛰어넘은 대재앙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 만약 다른 세상의 설정이 오염된다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사각형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나무젓가락과 공하나 올려놓는 듯한 모습으로 오염될지 모른다.

 

심지어 세계관까지 오염된다면 오메가버스인지 스쿨버스인지까지 되어버리면, 그 즉시 총채적 난국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 그리고 몇몇 평행차원은 “우린 멸망했어요.”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이곳을 오염시킨다면, 모든 평행차원 자체가 멸망 당하는 것뿐이다. 그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

 

따라서, 지금 가장 커다란 문제는 수 많은 평행차원 중. 분명 멸망하여 사라진 우주가 존재하리라 예상하고, 그걸 방지하면서도 유랑극단을 부셔야 하지만...

 

생각해보니 미래까지 유랑극단이 있다는 소리는,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유랑극단을 모조리 제거하는데 실패했다는 소리가 된다. 따라서, 미래에서 해결을 보고 과거로 돌아가서 유유자적하게 준비만 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기에, 머릿속은 매우 복잡하고 정리하려고 하니 너무 꼬여버렸다.

어쨌든...

 

지금은 생각하지도 못한 재앙을 통해 우리가 살아갈 길을 알아보도록 하자. 늘 계속 생각해왔던 거지만, 내가 잡화점을 처음 접하기 전부터 300년 뒤에 나는 이런 바보 같은 일을 꾸준하게 진행했다는 증거야말로, 이곳에는 존재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태클을 걸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이 미래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면, 결국 과거의 나는 알지도 못하는 기괴한 지식을 자연스럽게 받아 치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행동하게 되리라.

 

물론 그건 재앙이 아니다.

진짜 재앙은 아까 전에 말했듯이, 설정이나 세계관이 오염되는 경우일 뿐. 어쩌면 레이베리아의 진짜 목표라면, 평행차원이 융합되기 전에 일어나는 혼돈을 막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세계의 설정이 침범한다면, 꿈과 희망이 없는 이야기의 설정도 이곳에 찾아올 수도 있죠. 예를 들어 마법소녀가 사람을 죽이고, 그 사람이 부활해서 “매지컬~”이라는 기묘한 말과 함께 온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거요.”

 

“그럼 저도 매지컬 루니아로 활동할 수 있으니 좋은 거네요오?”

 

“매지컬에 대한 단어가 무조건 좋다는 게 아니잖아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으음. 백장미 찍고 싶다고 했었죠오.”

 

“제멋대로 말하지마! 그런 단어는 단 한마디도 안 했어!”

 

아직까지도 백장미타령을 신나게 하고 있는 루니아 누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리친 것에 대해 뭐라 할 줄 알았더니. “귀여워라아~”라고 말하는 게 더 무서웠으니, 가급적이면 백장미를 찍자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도망가도록 하자.

 

검은 고양이는 내 다리 위에서 앞발을 핥았다.

 

“그렇군. 주인의 말대로 확실히 이 재앙은 성가신 것이니라. 마왕이라는 존재는 분명 대중적인 눈으로 볼 때, 대부분 다 악인이 틀림없노라. 그런 설정이 짐에게 오염되기라도 한다면, 그거야 말로 무시무시한 일이 되어버리니. 지금 당장이라도 과거로 돌아가서 평행차원이 합쳐지는 것을 막는 일 밖에 없다.”

 

“잡화점이 하나의 시공간에 2개가 되지 않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렇다.”

 

매우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이다.

본래 시간대로 되돌아가는 건 오래 전에도 했으니까.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요?”

 

“없다.”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요?”

 

“당연히 본래 시간대로 되돌아가서 ‘그것’을 하려고 할 뿐이다.”

 

“세상에~”

 

그것은 또 뭔데? 광대가 나와서 어린애들을 실종시키는 영화인가?

 

“마왕님도 대담하시군요. 그런 계획이라면 첩은 지금 당장 본래 시간대로 이동시킬 준비를...”

 

연한 초콜릿 피부를 지닌 마리아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체격은 어린애지만 검은 달의 여왕으로서, 저래 보여도 대재앙의 증거이며 새로운 시작의 알림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뭘 생각하는지 몰라도, 슬슬 아이니스에게 받아놨던 육포가 다 떨어졌으니 충전해야 한다.”

 

“결국 육포냐!”

 

나름 진지하게 생각하길래 그래도 레시아만큼은 다르다고 생각을 했더니. 결국 육포가 더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가 있어야 할 시간으로 돌아간다니. 육포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선 다음에 고찰하자.

 

“그래도 지금까지 들어본 바로는 상당히 위험한 상태라는 거죠?”

 

황혼을 담은 듯한 눈빛이 번뜩였다. 1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매력이 베어 나오고 있는 소녀는 은빛의 비단과 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푸른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앉아있는데, 조만간 길거리 싸움터에 나갈 준비라도 하는 걸까?

 

아무튼 나는 아리엘의 질문에 대답하기로 했다.

 

“맞아. 지금 이대로라면 몽마의 설정도 막 바뀌기 시작해서, 네가 한쪽 손에 시퍼런 칼날이 손톱처럼 자라나있는 장갑을 끼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일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양호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일은 어느 시간대를 가든 다 똑같이 일어날 꺼야. 그 증거로 우리는 미래에 오기도 전에 알지도 못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고 농담과 태클에 써먹고 있지. 이건 마치 성경책을 펼치고 반야심경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는 것과 똑같다는 거야.”

 

“예시마저 저희가 원래 몰라야 하는 거잖아요.”

 

허탈한 눈으로 바라보는 아리엘의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러면 나의 순수했던 과거부터 지금까지 평행차원들은 이쪽 차원으로 응집되고 있었다는 모양인데, 지금은 설정이 뒤틀려서 니알라토텝이 되어버린 어릿광대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어릿광대가 뭘 하는지 중요한 이유라도 알 수 있습니까? 마스터?”

 

“그 무지막지한 혼종이 다른 곳에서 난리를 치면 안 되거든...”

 

하얀 올빼미가 내 어깨에 붙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상 갸웃이라기엔 기이하게 꺾여버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다음 내용을 덧붙였다.

 

“시나는 그나마 다른 평행차원에서 넘어온 케이스라서 면역이 되어있는 희망 가득한 캐릭터인가?”

 

“그건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희망이 가득한 캐릭터는 아닙니다. 마스터에게 예쁨과 사랑을 항시 받아야 하는 가련한 캐릭터죠.”

 

“비둘기가 가련하다는 말은...”

 

“올빼미입니다. 냥캣.”

 

“시끄럽다! 내려와라! 싸우자!”

 

또 서로 경쟁심에 불붙기 시작했구나. 사소한 싸움은 좋지 않다만 지금 이런 모습을 보니, 저 둘에게 기이한 세계의 설정이 오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당연히 안도하고 있는 와중에 거대한 마력폭발에 휩쓸렸다고 해서 안 아픈 건 아니다.

 

잠깐 정신을 잃는 동안에도 나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 정신을 잃었는데 생각을 어떻게 해?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살짝 검게 그을린 상태로 기침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결계와 방어를 했는지 멀쩡히 일어서있을 뿐이었다. 물론 최고의 중심부에 맞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모두 나만 바라보면서 멍하니 있을 뿐.

 

“왜요? 또 뭐가 문제에요?”

 

“기괴하군. 평상시의 흐름이라면 주인은 마력폭발에 기절하고, 그 사이에 백장미를 찍을 옷을 입힌다는 정상적인 진행이 되어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의 주인은 쓰러지지 않고 멀쩡하게 서 있지 않는가?”

 

“그게 왜 평상시의 흐름이고 정상적인 진행입니까? 그리고 중복된 말을 사용해서 강조하지 마시죠?”

 

평상시의 흐름은 잡화점에 사건이 들어오면 그걸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거다.

생각을 해보니 잡화점에서 사건을 받고 그걸 해결하는 것 또한 이상한데? 다시 생각을 해보면 잡화점 안에 있는 위험한 물품이 2층과 3층에 있는데, 그걸 지키는 역할이 더 비중이 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기괴한 잡지를 찍기 위해 잡화점의 주인이 된 건 아니란 말이지.

 

“그러면 일단 투표를 하죠.”

 

“투표내용이라면 여기서 백장미를 찍는가? 아니면 본래 시간대로 돌아가서 찍는가에 대한 거죠?”

 

“아니에요. 루비아 씨.”

 

루니아 누나의 여동생인 루비아마저 기괴한 밧줄형태의 무언가를 손에 감싸며 입을 열었다.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의 부정하는 사람의 심정을 잘 모르는 거 같은데?

 

“그렇게 정색을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만, 루비아 상처받았습니다. 에엥. 에엥.”

 

“영혼마저 없는 울음소리라니. 그보다 신사에서 입었던 그 무녀복장 말고 좀 더 편한 옷이 있잖아요?”

 

“이것마저 입지 못하면 저의 캐릭터를 지킬 수 없습니다.”

 

“왜 캐릭터를 지키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개인의 자유니까 제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네요.”

 

“그럼 제 개인의 자유로 지금 백장미 찍을 것을...”

 

“사람의 말을 듣고 멋대로 해석하지 내뱉지 말아주실래요?”

 

잠깐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리제로트를 처리해야 할 건도 있으니. 본래 시간대로 돌아가는 건 잠깐 미루도록 하죠. 그나마 시간이 덜 걸리는 이유라면, 레인의 성격상 자기가 공격할 시간을 멋대로 골라서 통보할 성격이니까요.”

 

아직은 돌아갈 시간은 아니다.

 

“리제로트는 굳이 죽이지 않으시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거 같은데 말이죠?”

 

윈디는 내 옆에서 그리 말했다. 나는 분명 꼭 죽일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결국 레인을 돕는 건 나고, 죽일지 살릴지 결정하는 것에 대해 내 의견을 살짝 얹었을 뿐. 레인이 리제로트를 먼저 발견하여 죽인다면, 그건 어쩔 수 없이 레인의 선택일 뿐이다.

 

“아무리 강대한 적이라도 피를 흘려서 해결하는 방법은 옳지 못하지만, 레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사실상 나도 그 녀석만큼은 막지 못할 거야.”

 

솔직히 말하면 레인을 막기가 싫다.

어차피 레인은 또 다시 자기 멋대로 일을 저지르고 수습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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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내내 일하면 죽어가는 것도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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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7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는 깊은 어둠 속, 트리폴리 해안에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들은 빠르면서도 조심스럽게 해안 근처 마을로 들어가 집집마다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지고 잠을 자다 놀란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때를 기다린듯이 해적들은 정신없이 나오는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짓밟고 죽였다.
"해적이다! 해적이 나타났다!"
잠결에 들리는 시끄러운 바깥 소리에 발레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칼을 들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병사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고 있었다.
"해적입니다! 급습이에요!"
발레트는 성벽 위로 단숨에 올라갔다. 이미 마을은 불에 타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고 짐승들이 시체 위를 날뛰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 했다. 발레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사들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주저앉아 있었다.
"각자 위치로!"
발레트는 중얼중얼거리는 병사를 일으켜 세웠다. 로메가스가 성벽 위로 뛰어 올라왔다.
"이미 마을은 초토화됐어요! 수비대는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물자 조달이 되지 않아 이미 창고에 화약은 동이 난 터였다. 병사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집결할 여력도 없었다. 연병장에는 수비대장 멘데스가 병사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요새를 사수해야 한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라!"
"화승총이 부족합니다. 대포를 쏠 화약도 없습니다."
지휘관 한 명이 고개를 떨군 채 멘데스에게 보고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한다!"
멘데스는 칼을 뽑아 들며 단상에서 내려갔다. 성벽 위에서는 병사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공포스러운 괴성과 함께 요새를 뚫을 듯한 총소리가 들렸다. 총탄은 빗발치듯 성벽에 난사되었다. 수비대는 하나 둘 쓰러졌다.
"방어선이 뚫렸습니다! 누군가 성문을 열어준 듯 합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알 수 없는 함성과 함께 터번을 두른 해적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수비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자들도 있었다.
"항복해라! 목숨은 살려주겠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해적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거만하게 소리쳤다.
"살고 싶으면 항복해라!"
병사들이 부들부들 떨며 하나 둘 칼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버틸 힘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항복! 항복이요!"
멘데스가 칼을 버리고 손을 들었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도 칼을 버렸다.
"누가 책임자냐? 너냐?"
우두머리 해적의 칼끝이 멘데스의 목에 닿았다. 멘데스는 해적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은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으며 칼에 힘을 주었다.
"이슬람교로 개종을 할 건가?"
"그럴 일은 없소."
멘데스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뱉었다. 우두머리 해적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치켜 올라가더니 뒤를 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다른 해적이 배시시 웃으며 멘데스의 무릎을 꿇려 앉혔다. 멘데스의 눈이 질끈 감기는 것과 동시에 해적이 칼을 내리쳤다.
"살아남은 자들은 전부 배에 태워라!"
해적들은 소리를 지르며 기사단의 십자가 망토를 벗겼다. 발레트의 손목에 굵은 밧줄이 동여졌다. 기사단원과 수비대, 마을 주민들은 모두 한데 묶여 해안으로 떠밀려갔다. 마을은 연기로 자욱해 눈을 뜰 수 없었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사람들만 흐릿하게 보였다. 평온했던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이곳은 죽은 자의 땅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발레트의 등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앞만 보고 걸어."
해적은 꼬질꼬질한 얼굴을 들이밀며 비열하게 웃었다. 발레트는 이를 악 물었다. 트리폴리의 기나긴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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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6

피오르 신부는 할 일 없이 성당 안을 이리저리 걷고 있는 안드레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앉았다 일어섰다 안절부절못하며 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언제 제노바로 돌아갈 생각이냐?"
"다음 주엔 가야 해요. 곧 바르셀로나로 이동할 것 같아요."
안드레아는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발을 떼며 대답했다.
"위험한 상황인거야?"
피오르 신부가 걱정이 담긴 말투로 물었다.
"아니에요, 삼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안드레아는 피오르 신부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신부는 이제 자신의 손보다 더 큰 조카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런데 아침 일찍 성당에는 무슨 일이냐? 기도하러 온 건 아닐테고."
안드레아는 대답 대신 멀뚱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넌 곧 떠날 사람이야, 안드레아."
"그렇지만 그녀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안드레아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피오르 신부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신부는 온화한 표정으로 괴로움을 머금은 조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성당 중앙에 빛이 한 줄기 비치더니 가벼운 발소리가 울렸다. 안드레아는 재빨리 몸을 숙였다. 나디아는 제단 앞으로 걸어와 성호를 긋고 초를 켰다.
광장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성당 입구 기둥에 기대어 빛으로 휘감은 임디나를 바라보았다. 정문이 열리고 나디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소매가 넓은 푸른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는 어깨 아래로 길게 굽이쳐 흘렀고 오묘한 초록 눈은 세상을 다 담을 듯 깊었다.
"오늘도 날씨가 좋네요."
안드레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디아는 고개를 돌렸다. 깔끔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안드레아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같이 걸어도 될까요?"
나디아는 불쑥 자신 앞에 나타나는 안드레아의 행동에 당황스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앞섰다.
"매일 기도하러 오는 건가요?"
안드레아는 나디아의 걷는 속도에 걸음을 맞췄다.
"네, 매일마다."
나디아는 시선을 앞에 둔 채 짤막하게 대답했다.
"제 어머니도 그러셨죠."
과거형인 그의 말에 두 사람 가운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몰타는 처음인가요?"
"이번이 두 번째에요. 제노바도 바다를 끼고 있지만 몰타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와는 비교할 수가 없어요. 특히 포도주 맛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안드레아는 나디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디아는 어색함을 느끼고 화제를 돌렸다.
"피오르 신부님과 사이가 좋아 보여요."
"아버지가 엄하신 편인데 삼촌은 늘 제 얘기를 들어줘서 어릴 때부터 많이 따랐어요. 몰타로 가신 후엔 자주 볼 수 없지만.."
"신부님은 정말 너그러운 분이에요. 모두의 친구이기도 하고."
"앞으로 더 자주 몰타에 와야겠어요."
"신부님이 좋아하실 거에요."
나디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따뜻하게 말했다.
"다시 찾았을 때 오늘처럼 당신과 걸을 수 있을까요?"
나디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때야 비로소 안드레아를 보았다. 조금 전의 천진한 표정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안드레아는 나디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디아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거렸다. 광장의 분수대에서는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의 머리 위로 한 쌍의 새가 지저귀며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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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2 - 9

582

 

 

 

보통 사람이 칼에 찔리면 처음에는 고통이 없으나, 이후에는 천천히 고통이 느껴지고 조금만 더 있으면 고통이 커지는데, 이걸 매우 쉽게 말하면 “칼에 찔리면 마이아파.”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지금 내 몸 어딘가에 단검이 박혀있는지 눈으로 쫓고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심장부근에 박혀 빠지지 않는 상태였고, 칼에 찔린 것도 서러워죽겠는데 어릿광대의 조소가 내 귀로 들어와 정신적인 피해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몸에 이변이 생기고 있다는 건 붉은 피가 흘러나와 출혈로 인해 빈혈이 생기기보단, 오히려 아주 조금만 흘렸을 뿐. 안에는 이제 남아있지 않다는 듯이 피는 나오지도 않고, 마치 지점토에 칼을 찌른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지점토가 칼에 찔리면 이런 느낌이 강하겠지.

 

[인간...도대체 어찌 된 것이냐?]

 

사람은 피를 흘린다라는 공식이야 말로 이 세상의 법칙이자 변하면 안 된다. 히드라가 충격을 먹고 나에게 질문을 하는 동안, 주변 바람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윈디가 동요하는 동안 어릿광대의 조소는 멈추지 않았다.

 

“역시나!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렸어! 피가 도중에 나지 않잖아!”

 

“아니. 잠깐만 기다려봐. 아마 지금 토마토소스를 섭취한다면 분명 더 나올 거 같으니까. 지금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토마토 좀 사줄래?”

 

당연히 직접 찔린 당사자 또한 매우 당황해야 정상이지. 게다가 통증도 이제 느껴지지 않았고, 곧바로 죽어야 하는 치명상임에도 불구하고 농담하나 제대로 던질 정도라면, 이제 물리적인 방법으로 내가 죽기엔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단 소리다.

 

나도 모르게 어릿광대가 쑤셔 넣은 단검을 빼냈다. 분명 피가 있었으니 검은 단검에도 보이는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지만, 내 몸을 살펴보니 그 자리에는 피가 흐르다 만 것 이외에 신성력과 마기, 마나가 합쳐져 있는 거대한 에너지가 상처부위를 막고 재빠르게 재생까지 했다.

 

“세상에...”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또 뭐가 되어버린 거지?

 

“이제 인간이 아니네. 완벽하게 인간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존재, 혹은 새로운 신으로 뻗어 나아가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뿌듯해. 너무 뿌듯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니까? 아 맞다. 지금은 가면을 쓰고 있으니 눈물을 흘릴 수가 없지. 그럼 소리라도 내도록 할게! 에엥! 에엥!”

 

단검을 들고 양손으로 하얀 가면을 가리면서 우는 척 하는 게, 어린 아이들의 생일파티보다 더 짜증이 났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는 잡화점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긴 해도, 아직까지 루니아 누나가 잡화점 안에 남아있으니, 나 대신 잡화점의 후계자가 되어도 상관이 없으나, 지금은 실제로 내가 인간의 틀을 완벽하게 벗어났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오히려 이런 상황은 프리스트들이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신성력을 빌려 자신의 몸을 일시적으로 에너지화 시키는 경우도 있으니. 아직까지 나는 잡화점의 주인일 뿐이다.

 

“뭐, 이건 따로 생각하도록 하자. 이렇게 되면 염라대왕이 날 명계로 못 끌고 갈 테니, 내 명줄이 좀 더 늘어났다고 생각만 해보자.”

 

“명줄이 늘어난 게 아니라 특수한 공정을 거치지 않으면 영원하게 살 수 있겠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입장에서는 내 개인적인 견해로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아직까지 할 일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부터라도 긍정적인 면을 좀 보고 살아봐야지.

 

“결국엔 나와 자기는 영원히 싸울 수 있다는 거야. 이렇게 되면 결혼식도 올리고 다른 여자들도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아니.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다른 존재로 돌연변이가 되었다고는 하나, 결과적으로 널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그래서 이제 도망갈 준비를 하는 거냐?”

 

조금씩 거리가 멀어지는 착각을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정말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

 

“그래도 지금은 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왜 의문문을 의문문으로 대답하냐? 쓸 때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지 마.”

 

“그럼 이렇게 180도로 돌려서...”

 

“180도로 고개를 어떻게 돌...으아악! 이 괴물 같은 녀석! 진짜로 돌리지 말고 제대로 갸웃거리기나 해!”

 

“괴물 같은 게 아니라. 따지고 보면 도플갱어도 몬스터에 속하니까 괴물 맞아.”

 

“그런 거 수긍하지 말고! 목뼈 부러지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린다!”

 

아무리 도플갱어라도 목은 180도로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러면 오늘은 여기서 끝내볼까? 다음에 볼 때는 방해자가 없으면 좋겠는...”

 

-콰아앙!

 

어릿광대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폭발 하나. 굉음은 이곳까지 울리고 온 천하를 전율에 떨게 만드는 진동이 사방을 퍼져나갔다. 그 뒤에 아쉬운 듯 짧게 혀를 찬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다음 말을 이었다.

 

“칫! 도망 하나는 잽싸군. 뭐 어쨌든 다음에 만나면 제거하도록 해야지. 설령 다른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한들, 짐 앞에서는 약간 껄끄러운 제거대상일 뿐이니라.”

 

마왕이 외신을 제거할 수 있다는 말에 더욱 더 놀랐다.

 

“마스터. 상처는 없으신지요?”

 

“아아! 짐이 멋지게 주인을 구하며 등장하고 있는데, 새치기를 하다니! 비둘기...”

 

“올빼미입니다.”

 

“어쨌든 당장 주인의 어깨에서 내려오거라!”

 

하얀 올빼미와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검은 고양이야 말로 300년전 당시의 최고의 마왕. 마계 역사상 문화와 사회자체를 뒤바꿔버린 타락의 마왕 레시아와 다른 차원을 창조한 빛의 여신 시나의 말 싸움은 끝날 줄 몰랐다. 옆에서 고양이와 올빼미가 앞발과 날개를 마치 사람의 손처럼 힘겨루기 하고 있는데, 보면 볼수록 가관이었다. 저러다 폭주하면 내 어깨에서 마법이 날아올 건 안 봐도 뻔하니까.

 

그리고 쓸쓸한 희생자가 되겠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제발 내 어깨 위에서 싸우지 마세요. 저를 구하러 왔다는 건 감사하지만, 오히려 암살자는 저와 가까운 레시아나 시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불안에 떨고 있으니 5초 이내로 둘 다 내려가지 않으면 아이언 클로가 출격할 거에요.”

 

내 말을 듣고 얌전하게 내려가는 레시아와 시나. 원하지 않는 스트레스와 피해는 재앙이 되니까 철저하게 관리를 하자. 그나저나...

 

“제가 위험한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에요?”

 

잡화점의 멤버를 알리는 반지가 효력은 있어도 그리 뛰어나진 않을 텐데. 용케 잘 알고 이곳까지 찾아온 걸 보면...

 

“슬슬 백장미를 찍어야 한다고 루니아가 데려오라고 했노라.”

 

“맞습니다. 슬슬 모델활동을 하셔야 합니다. 마스터.”

 

뭐...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투성이지. 이곳까지 와서 단검에 찔리고 혼란에 빠져있는 사이에도, 내가 다쳤는지 다른 존재가 되었는지 신경도 쓰지 않은 체, 그저 저주받을 하얀 잡지를 찍어야 한다고 이곳까지 찾아온 거라니.

 

“안 찍어! 도대체 그 잡지가 뭐길래!”

 

“그 잡지는 예로부터 파이론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끄러워요!”

레시아의 장황한 설명을 다 들어줄 인내심은 없었다. 검은 고양이는 내 다리를 붙잡더니...

 

“짐의 부탁이니라. 찍으러 가도록!”

 

“안 찍는다고요...”

 

이번엔 하얀 올빼미가 비어있던 왼쪽다리를 붙잡더니

 

“마스터. 저의 부탁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아 글쎄! 백장미 안 찍는다고!”

 

지쳐서 소리지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결국 소리지르게 만드는 듀오. 서로 싸울 때는 원수처럼 싸우더니, 지금처럼 서로 협동할 때는 죽이 너무 잘 맞는다. 이러다가 조만간 저 둘이 변신로봇을 불러서 합체를 하더니, 우주에 구멍을 뚫는 드릴로 적들을 분쇄하지 않을까?

 

가끔 이렇게 생각해보면 참으로 쓸 때가 없다.

 

“결국엔 주인은 찍게 되어있다.”

 

“맞습니다.”

 

“그 운명론적인 대답은 또 뭐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에 무언가가 전개될 거 같은 기분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데?”

 

기분 나쁜 일이라고 한다면 억지로 때려서라도 데리고 간다는 선택지가 있지만, 지금 내 상태는 쉽게 제압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이번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천천히 생각해도 답은 그리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 찍지 않는다면 주인이 명계로 떨어지고 우리들은 그대로 본래 시간대에 돌아가서, 명계에서 농락당하고 있는 주인을 열심히 구경하겠노라.”

 

“그건 대체 무슨 벌칙게임이죠?”

 

명계에서 염라대왕에게 심판을 받아야지. 왜 농락을 당해?

신개념 벌칙게임에 나도 놀래고 이걸 읽는 당사자도 놀랬을 거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하늘이 파란색에서 노란색으로 변질될지도 몰라. 그런데...

 

“이번엔 명계에 가서 할 일도 없잖아요? 저번에 천계에 한번 다녀온 걸로 느닷없이 저쪽에서 막무가내로 연락을 끊어버리고...”

 

“그건 전에 주인이 명계에서 백장미를 찍으라고 말한 걸 듣자마자, 수정구의 연락망을 끊어버린 것이 아닌가? 아무리 짐이 주인의 편이라고 한들, 기본적으로 뭐가 잘못이고 뭐가 나쁜 것인지는 알고 있노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여장을 강요하는 상대의 통신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는 게 잘못은 아니거든요!”

 

내가 여장을 한다는 것부터 잘못이 아닐지...

어쨌든 명계에 볼일도 없고, 직접 찾아가서 따질 만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은 내 앞에 있는 저 두 사람을 진정시키고...

 

“주인! 아무리 인간의 틀을 벗어나려고 해도 감정까지 벗어나려는 건가!”

 

“그 백장미가 뭐길래 절 인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겁니까?”

 

가끔가다 생각하는데 그 바보 같은 하얀 잡지는 인생에 무엇일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 나중에 잡화점으로 먼저 돌아가고 이야기 하죠.”

 

“상황이 좋지 않다? 그 어릿광대가 무슨 일이라도 한 것인가?”

 

수그러지는 분위기를 토대로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었다. 유랑극단의 일도 그렇지만 어릿광대가 뜬금없이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다른 신화에서 나와야 하던 니알라토텝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다른 평행세계와 가까워졌다는 의미지만, 그렇게 된다면 어릿광대뿐만이 아니라 우리마저도 다른 설정에 섞여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빨리 이곳에서 탈출을 해야 하는데, 가장 근본적으로 레이베리아 때문에 본래 시간대로 못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다른 계획으로 잡화점 2개에서 하나로 줄이는 방법이 있지만, 애석하게도 잡화점이란 것은 인격이 존재하기에, 솔직히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서 “당신이 살아있으면 크나큰 해가 되니까 죽어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빌어먹게도...

 

“어릿광대가 신으로 각성해버린 이상, 스스로 능력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잘 나타나진 않을 거에요. 그래도 니알라토텝이라는 건 신보단 우주적 존재에 가깝기는 해도,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주의하도록 하는 거죠. 그리고 이 상태로 본래 시간대에 돌아가버린다고 해도, 만약에 평행차원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니.”

 

또 다른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걸 되돌리거나. 모든 걸 바꿔버릴 수 밖에 없어요.”

 

지금 상황이라면 과거를 바꿔서 미래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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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회사일에 치중하니...

글을 쓸 시간이 거의 없네요.

짤리지 않으려면 열심히 해야 하는데.

글 쓸 시간마저 할애하고 있습니다.

 

주말에 좀 쉬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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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5

릴라당은 시종에게서 서신을 전달받고 빠르게 읽어나갔다. 발신처는 트리폴리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무엇인가를 써 내려갔다. 그런 다음 인장이 봉해진 두 개의 편지를 시종에게 건넸다.
"하나는 에스퍄냐로, 다른 하나는 트리폴리로."
트리폴리의 사정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발레트는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할 테지만 낯선 땅에서 해적을 상대로 요새를 방어하는 것은 필시 외로운 싸움일 것이었다.
릴라당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빌구와 생리아의 요새 보수 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발레트를 트리폴리 요새로 보내자 보키아는 그 일을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다. 보키아는 에스파냐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넘어서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길 바랬다. 릴라당은 비밀히 비토 발티를 감시하게 했으나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기사단 숙소에 잠입했던 투르크인은 갤리선 노잡이로 보내졌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으나 미심쩍은 부분은 남아있었다. 투르크인이 찾으러 온 칼 그리고 새겨진 이름, 살람 메메드.
'살람 메메드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인가?'
썩은 싹을 뿌리 채 뽑지 못한다면 몰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오스만이 훤히 알게 될 것이 뻔했다. 정찰병은 또 보내져 몰타에 숨어들 것이었다.
'말이 모이는 곳이 어딘가?'
동.서양을 오가는 상선의 중간 기착지로서 몰타의 항구는 온갖 소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들의 말은 서로 뒤엉켜 한곳에 모였다가 어딘가로 다시 흩어졌다. 말이 모이는 곳. 모든 정보를 틀어쥐고 있는 사람을 알아내야만 했다.

 


성당을 향해 걸어가던 안드레아는 검은 베일을 쓴 여인과 피오르 삼촌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에게 가까워지자 인기척을 느낀 여인이 신부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듯 여인의 행동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안드레아, 어딜 다녀오는 거냐?"
피오르 신부는 앞으로 걸어나오며 안드레아를 맞았다.
"항구 주변을 산책하고 오는 길이에요."
"아름다운 곳이지?"
피오르 신부는 광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드레아는 대답없이 삼촌과 같은 곳을 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아침 햇살에 비친 임디나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고 평온했다. 마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현실과 상관없이 따로 떨어진 공간 같았다. 모래색의 오래된 건축물들은 시간의 흐름을 무색하게 했다. 안드레아는 낯설면서도 신비한 임디나의 정취에 빠져들었다. 이곳은 이방인을 붙잡아 두는 어떠한 힘이 있었다.

 

 

안드레아를 지나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오른 여인은 얼굴을 덮고 있던 베일을 걷어 올렸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잠자던 말의 눈이 떠지며 긴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임디나에서 가장 높은 성채의 성문을 지나 뜰에 멈춰섰다. 어린 하인이 문을 열자 검은색 소매자락과 함께 새하얀 손이 보였다.
"보키아 경께서 찾으십니다."
앞에 서 있던 비토가 보키아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보키아 부인은 어린 시녀에게 아들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물어볼 뿐이었다. 그녀는 가브리엘을 방으로 데려오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가브리엘?"
방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리자 베일을 벗고 머리를 다듬고 있던 보키아 부인이 밝은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나요, 부인."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문앞에 보키아가 서 있자 아무 말 없이 다시 거울로 시선을 주었다.
"성당에 다녀오는 길이오?"
보키아는 화장대 앞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신부님을 뵙고 왔어요."
그녀는 다소 차가운 말투로 여전히 보키아를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피오르 신부가 나보다 당신의 얼굴을 자주 보겠군."
보키아는 창 쪽으로 걸어가며 밖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죠?"
더 이상의 말은 듣고 싶지 않은 듯 짜증섞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며칠 후 에스파냐에서 손님이 오는 건 알고 있겠지.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길 바라오."
보키아는 할 말을 마치자 방을 나가 버렸다. 그녀는 들고 있던 머리빗을 화장대에 내려놓았다. 거울 속에는 생기잃은 표정의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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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2-4

트리폴리는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암벽 돌출부에 자리하고 있는 해안 도시였다. 에스파냐 수비대와 성 요한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성채는 에스파냐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이곳의 음울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밝고 평온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작고 소박한 자신의 방에서 발레트는 릴라당에게 보내는 서신을 쓰는 중이었다. 짧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로메가스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야?"
"밖에 나와 보셔야 겠어요. 에스퍄냐 병사 한 명이 도망치려다 잡혔어요."
발레트는 쓰기를 멈추고 서둘러 방을 나갔다. 연병장에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병사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고 수비대장 멘데스가 단상 위에서 고함을 치고 있었다.
"군인에게 병영을 무단 이탈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나가서 무엇을 하려고 한거지? 바르바리 해적이라도 되려고 했나?"
멘데스는 숨도 쉬지 않고 병사를 몰아부쳤다.
"아닙니다.. 고.. 고향으로 가려고 했던 것 뿐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요."
병사는 벌벌 떨며 울먹거렸다.
"함께하는 전우들은 보이지 않나? 이들도 고향에 처와 자식을 두고 왔다. 도망치는 것은 조국을 버리는 일이다!"
"살... 살려주십시요.."
병사는 얼굴이 땅에 닿을 때까지 연신 몸을 굽혔다. 탈영하는 병사는 즉각 처분되는 것이 규율이었다. 발레트는 단상으로 올라가 멘데스 옆에 섰다.
"병사들이 많이 지쳐있습니다. 엄중하게 경고하고 매로 다스리는 것이 어떻겠..."
멘데스는 손을 들어 발레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발레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어떤 말도 통할 것 같지 않은 무쇠같은 얼굴이었다.
"저 자는 탈영병이요. 군에서 명령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오. 예외란 없소."
"본국에서 보급품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식량도 부족한 상황에서 타국의 요새를 지키는 것이 쉽겠습니까?
군대의 규율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발레트는 이 버려진 곳에서 병사들이 얼마나 힘들게 버티고 있는지를 알았다.
"에스파냐 수비대의 일이요. 기사단이 참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끌고 가라!"
멘데스는 굳은 표정으로 지시를 내리고는 단상을 내려갔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요.. 자비를!!"
병사는 끌려 나가면서도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연병장에 남아있던 병사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각자 자리로 흩어졌다.
"상황이 갈수록 나빠져 가네요. 이곳은 허울뿐인 요새에요."
로메가스는 멘데스의 차가운 얼굴을 흘깃 쳐다보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에스파냐에게 이곳은 잊혀진 곳이야. 여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없어. 요새를 지어 해적을 막는 시늉만 할 뿐이야."
발레트 자신도 앞으로 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볼멘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바르바리 해적들이 불시에 요새를 습격할 수도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병사들을 격려하며 함께 요새를 지키는 것 밖에는 없었다. 발레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비가 내리겠군."
두 사람은 탈영병의 절규만 남은 연병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