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7 - 2

522

 

 

 

눈을 뜨기 싫었다.

자고 일어나면 사람의 몸은 언제나 피로의 한계치가 오기 마련일까? 몸이 무거워서 고개도 들기 싫고 그냥 이대로 자고 싶은 기분만 들었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한 평생을 잠으로 잘 수는 없는 법. 잠을 무한적으로 자는 날이 있다면, 그 날이 스틱스 강을 넘어가는 풍경을 보게 되겠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 아무도 없었고, 잡화점 안에는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천천히 일어나서 이불을 접으려고 했지만, 오늘따라 커다란 이불 때문에 힘이 좀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기묘하네 분명 카운터의 높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레시아. 시나.”

 

평소에 부르는 목소리가 아닌 어린애가 부르는 듯 음이 높다. 설마 진짜로 날 여자애로 만든 거냐? 하나의 인생에 이상한 체험은 다 해보네. 조만간 외계인으로 변해서 ‘제 7원소’를 부르지 않을까? 참드람 벤드람하면서 말이야.

 

내가 부르는 목소리에 어디선가 덜그럭하는 목소리가 났다. 고개는 소리를 잡고 빠르게 감지했는데, 허리를 넘기지 못한 머리카락이라 해도, 고개를 따라 흔들리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 그전에 이번 머리색상도 코발트 블루냐...

 

“뭐, 뭔가? 주, 주인.”

 

검은 고양이로 변한 타락의 마왕. 레시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로 내 말에 대답했다.

 

“왜 거기에 숨어서 바라보고 있어요?”

 

“그거야 주인의 아이언 클로가 무서우니 그러지 않는가? 따, 딱히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아니다.”

 

아이언 클로는 핑계고 지금 내 모습 때문에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소리로군. 사람의 감정은 좀 기묘한 것이 있는데, 너무 귀여운 고양이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나서 애교를 부린다면, 그 사람은 도덕적인 관점으로 형성된 초자아의 강력한 중재를 당함으로써, 어쩔 줄 몰라 하는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나도 가끔 길가에 어린 고양이가 버려지면서, 주워가야 하는가? 하지만 내가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오랜 시간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가지는 선택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않는가?

 

내 경우에서 그녀들의 입장은 어마어마한 내적 갈등이 피어 오르고 있겠지.

 

“마스터는 많이 당황한 모습이 아니군요. 오히려 침착하다는 말이 더...”

 

하얀 올빼미로 변한 빛의 여신 람파시나는 용기를 내며 내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당당하게 나아가려는 올빼미를 보며, 검은 고양이가 “비, 비둘기! 그 앞은 위험하다!”라고 말했고, 시나는 “올빼미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5M앞까지 왔다.

 

“성별이 전환된 것은 이제 어쩔 수 없이 익숙해져서 그래. 다만, 아직까지 어려진 것에 대해는 이질감이 생기긴 하네. 시나와 레시아가 어린 모습으로 있으려는 이유가 어쩌면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있으면, 최약체인 상황에서도 강력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연습을 할 수 있는데, 나중에 성장하면 할수록 노련해지기 마련이다. 에너지를 관리하는 입장에 있어서 회전을 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거리가 짧아지기 때문에, 신체를 강화하는 마법이나 특정 마법의 시전속도는 향상이 된다.

 

“어째서 가까이 더 안 오는 거야?”

 

쭈뼛쭈뼛하며 서있는 올빼미가 움찔거리면서 내 말에 반응했다. 내가 자연스럽게 결계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내가 한발자국 전진하자, 올빼미는 자연스럽게 뒤로 한발자국 후퇴한다. 저 멀리 있던 레시아마저 후퇴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전신 거울로 보는 내 모습에는, ‘카린이 만일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이라는 타이틀에 나올 정도로 닮았지만, 신비롭고 단아한 모습보다는 귀엽고 총명한 모습이 더 어울렸다. 긴 생머리와 곱고 깨끗한 이마까지 비춰졌고, 옷은 은은한 옥색의 하프넥 니트, 소매의 경우에는 내 손을 감추고 나팔꽃마냥 넓었다. 거기에 맞추려는 듯이 무릎을 넘어가는 옥색 치마까지 입히고, 짙은 녹색으로 겉 부분을 마무리했다. 누가 이런 옷으로 입혔는지 몰라서, 내 눈이 자연스럽게 거울을 노려보듯이 보자 쨍그랑!하고 깨졌다.

 

“거, 거울이 깨져버렸다! 역시 거울에도 심장이 있는 것인가!”

 

거울에 심장 없어요.

 

“마리아와 루니아 누나는요?”

 

앳되고 맑은 목소리가 퍼지자 카운터 위에 있던 유리컵이 깨져버렸다.

 

“세린. 유리 좀 그만 깨뜨려.”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이번엔 샹들리에가 떨어지면서, 나는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아서 고치겠지...어쨌든, 제 질문에 대답을 해야죠?”

 

“저, 저는 천계에 볼일이 좀 있어서...”

“짐은 마왕성에 일을 해야 하니...”

 

“지금 현 상황은 300년 뒤에 천계와 마계가 전쟁하고 있잖아요. 전 마왕이면서 왜 일을 해야 하고, 천계에 추방당할 것 같은 시나는 왜 자리를 벗어나려고 해요?”

 

내가 말하고도 기억력에 아무 이상이 없는걸 보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내가 걸어오면서 2M정도 남아있을 무렵. 레시아와 시나는 구석에 몰려서 벌벌 떨고 있었다.

 

“아이언 클로는 하지 않을 테니 그만 떨어요.”

 

“아니. 지금은 아이언 클로보다 짐의 심장을 지키는 것이 먼저이니라.”

 

바보 같은 말에 한숨을 내쉬게 되는 경우도 있구나. 쪼그려 앉아서 반 강제로 검은 고양이를 들자. “냐아앗! 냣!”하며 어마어마한 반항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달라붙으면 좋아하는 레시아가 이 정도라니.

 

이리저리 휘젓고 있는 발톱에 상관하지 않고, 진정하라는 듯이 품에 꼭 안아주었다. 안아주면서도 레시아가 “주인! 이러지 말거라! 안 돼에에!”라고 소리쳤지만, 그것도 시간이 약간 지나니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 마스터! 냥캣이!”

 

“응? 어라?”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혼절했는지 혀를 내밀고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레시아? 레시아!”

 

마왕이 어린애가 안아줬다고 해서 기절할 줄은 몰랐는데.

이런 모습으로는 외출도 제대로 못하리라 본다.

 

잠깐 의식을 잃은 레시아를 다른 곳에 놓고, 시나는 내 어깨 위에 올라와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나마 시나의 경우에는 제대로 적응을 했는지 입을 열었다.

 

“마리아와 루니아는 방금 전에 마스터의 모습을 보고, 과호흡에 빠지기 직전에 가까스로 외출하러 나갔습니다. 옷을 사러 간다고 했는데 외출한지 13분째 됩니다.”

 

“또 여러 가지 옷을 입히겠구나. 하아.”

 

이제 조건만 되면 자연스럽게 한숨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시스템 가동. 한숨, 출동준비 완료.”

 

“넌 사이클론이 아냐!”

 

이제 한숨을 쉴 때마다 태클을 걸어야 하는 걸까?

 

“마리아의 계획으로는 SNS에 영상을 퍼트리면서, 사람들의 자의식을 심어주는 최면마법까지 집어넣는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꼭 내가 변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마리아 본인이 찍어도 상관없고, 레시아와 시나가 변한모습으로 찍어도 될 텐데.”

 

“하지만 거울을 보면 마스터가 가장 으뜸입니다.”

 

나에게 있어선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상처가 되는 말이야. 상처라기보단 원래 없어야 했던 말이었지. 주기적으로 오고 가는 성별의 정체성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라면, 원래 나는 남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빨리 이 모습에서 돌아올 생각만 하면 된다.

 

그렇게 희망을 가지면 언젠가는 되돌아오겠지...

 

“그런데 지금 내 신장이 얼마나 되는 거야? 평소와 너무 달라서 상자라도 있어야겠는데?”

 

“대략적으로 139.9cm입니다.”

 

140이면 140으로 해줄 것이지, 0.1cm가 모자란 경우는 뭐야?

 

“한숨밖에 안 나오는 신체라. 죽기살기로 뛰어도 루니아 누나가 쉽게 따라잡을만한 신체능력이네.”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든 하얀 올빼미는 계속해서, 내 어깨 위에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스터에게는 보호자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합니까?”

 

“내가 어린애로 변했다고 해서, 어른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거든? 내 상태는 마리아와 비슷하게 보면 될 거야. 몸은 소녀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건장한 21세 청년이라는 거지. 하아...코난도 어려지기만 했지 성별은 바뀌지 않는 게 부러울 따름이야.”

 

그래도 정신상태의 경우에는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다. 신체나이가 어려졌다고 해서 정신연령까지 어려지면, 그거야 말로 큰일나는 상황이니까. 예를 들어서 천계와 마계가 전쟁 일어난 급박한 상황에서, 느닷없이 솜사탕 먹고 싶다는 말을 하게 되면, 그거야 말로 이불 속에서 우주 끝까지 걷어찰만한 상황이 된다.

 

흑역사를 신체나이가 낮아진 상태에서 만들고 싶지 않기에, 슬슬 레시아를 깨우기로 했는데 땅에 쓰러진 검은 고양이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20세 중반의 여성이 앞치마를 두른 상태로 서 있었다.

 

“......”

“......”

 

뼈 아픈 침묵과 갑작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사고. 소리를 질러야 할까? 핀잔을 줘야 할까? 내적 갈등이 심화되어 심화문제로 나오기 전에, 레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뭐냐. 주인과 같이 놀기 위해선 이런 복장을 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루니아 누나에게 들었어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레시아.

앞에 있는 여성의 연보라 빛의 파도가 살랑거림과 동시에, 공기라도 가를듯한 칼답으로 대답했다.

 

“아니니까. 평상시의 복장으로 돌아오기나 하세요.”

 

“짐이 이유식을 만들어주도록 하지.”

 

“요즘 이유식은 10대 초반도 먹어요? 암흑물질밖에 못 만들면서 억지로 요리하려고 하지 마시죠.”

 

“오늘따라 주인의 태클이 아프구나.”

 

잠깐이나마 한숨을 쉬며 나는 말했다.

 

“그러면 레시아가 남자의 모습으로 바꾸시던 가요.”

 

“알았다.”

 

“못하실 줄 알았어요. 애초에 레시아는 어릴 때부터 여성체로 살...잠깐? 뭐라고요?”

 

느닷없이 검은 마기가 레시아의 몸을 감싸기 시작한 이후로, 짧은 연보라 빛의 올백머리, 날카로운 눈매와 그 안에는 홍옥처럼 번뜩이는 눈동자. 턱선과 콧날이 날카롭고 검은 후드티와 검은 청바지를 입은 상태로 내 앞에 나타났다. 당연히 앞치마는 왜 안 바꾸는지 입고 있었지만...

 

“어떤가? 짐도 잘 어울리는가?”

 

남자로 변해서 목소리까지 듣기 좋고 깔끔한 중저음으로 바뀌어버렸다.

 

“레시아? 안 불편해요?”

 

“마족에는 애초에 성별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한 것. 게다가 짐은 마왕이다. 때로는 특정 마족을 만나기 위해선 남자로 변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주인의 이상형에 맞춰서 여성체로 오래 존재했노라. 의외로 지금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니 신선하고 좋구나.”

 

평상시의 레시아와는 다르게, 성별 하나가 바뀌었다고 권위적으로 들리는 건 처음이다.

지금은 말 그대로 마왕.

정말 마왕이다.

 

손을 흔들자 그 끝에 마기가 서두르며 따라오기 시작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냈는데 하마터면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그대로 내 체감시간마저 정지할 뻔했다.

 

“생각을 해보면, 주인이 지금 어린 소녀로 변해있으니, 짐이 임시적으로 이 모습을 해야겠군. 짐이 곁에서 항상 지켜보면서 위험할 때는 구출해야 하니 말이다.”

 

섣부르게 안 된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라면, 집안에 남자는 한 명씩 필요하기 때문. 여자만 있는 장소는 그리 안전한 구역이 아니다. 지금은 레시아가 임시적으로 남자로 변하면서 잡화점의 전체 분위기를 흩트리지 않기에, 알아서 하라는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런 모습으로 느닷없이 안기면 당하는 입장에서 너무 놀라지 않는가? 심장이 부셔지는 줄 알았노라.”

 

“그건 평상시에 단련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 아니고요?”

 

“짐은 강력한 마왕이니라. 주인의 생각으로는 ‘전’마왕이지만, 단련을 하지 않아도 강해지는 것이 마왕이며, 단련을 하게 된다면 100배씩 전투력이 증가하여, 슈퍼 마왕 갓 블루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1년도 걸리지 않지.”

 

“그 이상한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 수련을 하는 모습부터 보여주라고요...”

 

남자로 변한 레시아는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보기 시작해서, 고양이 특유의 공격자세인 줄 알고 잠깐 경계했다.

 

“지금 뭘 빤히 보는 거에요!”

 

내 목소리가 날카롭게 잡화점을 가로지르니,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는 레시아는 솔직하게 모든 걸 다 말했다.

 

“아니. 순간 주인의 모습을 보아하니, 기이한 감각이 눈을 뜨려고 했노라. 마치 단 둘이서만 Yee.T 보드게임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라고 해야겠군.”

 

“그런 기이한 감각에 멋대로 눈뜨지 마세요. 단 둘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오해한다고요.”

 

레시아의 경우에는 남자로 변한적은 있어도, 오랫동안 살아본 경험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방금 전에 나를 보며 강력한 소유욕을 느낀 것 같은데,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그대로 은팔찌와 전자발찌가 세트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은 다음 레시아의 말에 묻혀버리고 말았으니.

 

“짐과 주인은 지금도 부부니까. 단 둘이 있어도 괜찮지 않는가?”

 

“설령 제가 괜찮을지 몰라도, 세간의 눈이라는 것이 있으니 자중하고 절제해줬으면 좋겠어요.”

 

 

세간의 눈이라기보단, 내 옆에서 어마어마한 열기로 바라보고 있는 올빼미 하나 때문에, 레시아와 싸우지 않기 위한 중재의 말을 계속 변호하고 있는 나였다.

=============================================================================================

애석하게도 람파시나는 여신이란 타이틀이 붙었기에...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7 - 1

521

 

자신이 머물고 있는 보금자리는 안전한가?

동물들은 자손을 남기기 위해 보금자리를 공들여 짓지만,

맹수는 그것을 알고 오히려 이용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묻는데, 지금 머물고 있는 보금자리는 안전할까?

-겨우 도망쳐 나온 카일의 생각.

----------------------------------------------------------------------------------

 

300년 뒤의 세계는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정글이 많다. 파이론에서도 가장 높다는 건물에 올라가서 밑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사람들은 개미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말하는 소리는 전혀 귓가에 도달하지 못했다. 높이에 따라 바람은 매섭게 부딪치고, 새들은 그 위에서도 자유롭게 날아간다. 좋겠다. 저 새들은 적어도...

 

내가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를 겪지 않아서!

 

잡화점에서 도망치듯 뛰쳐나가 숨어있는지 1시간이 경과하면서, 그나마 내 본래의 모습을 손거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크나큰 인기를 얻기 위해, 멀쩡한 사람을 여자애로 바꿔버린다는 건, 지금 생각해봐도 터무니 없는 소리니까. 당연히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기 위해, 레시아나 시나, 루니아 누나 3명이서 영상을 찍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멀쩡하다 못해 매력적인 존재들을 놔두고, 내 성별을 바꾸고 어린애로 만든다는 그 시점부터,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지금은 생각하고 있지만, 언젠가 떠오를 기발한 해결방법을 위해. 꾸준히 머리를 돌리고 과부화시키고 냉각하는 것을 반복하며, 뇌 신경을 전부 태워버리더라도 노력해야 한다.

 

“잠깐만? 뇌 신경을 전부 태우면 생각은커녕 죽잖아?”

 

뜬금없이 혼잣말로 내 생각에 태클을 걸어 중지가 되었다. 고뇌의 늪에서 나와 현실을 자각하고, 시선은 다시 정면을 향해 바라봤다. 잡화점에서는 내가 그녀들의 남편이지만, 그녀들은 나를 남편이라 생각하지 않고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관계는 수정해야 할 방안일까? 그렇다고 국이 짜다고 해서 밥상을 엎을 수가 없다. 애매하게 못하면 그런 일을 할 생각만 가지고 있지만, 루시피나의 요리는 흠잡을 때가 없을 정도로 매우 잘하며, 3명은 독극물을 창조하는 것에 도가 터버렸다.

 

요리를 하라고 했더니 암흑물질과 형광물질, 그 사이에는 무지개가 놓여져 있으니까.

아무튼 당분간 갈 곳도 없는 이곳에서 멍하니 앉아, 이미지를 띄우고 체내에 있는 에너지를 회전시키자, 내 몸에 알맞은 회색 빛의 코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근에 알았던 거지만 명계에서 레시아와 닮은 뱃사공에게 다녀온 이후로, 엉망진창이었던 힘이 안정이 되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서, 시나와 레시아처럼 물질을 창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마나로 이루어진 형상은 불안정하고 공급이 끊어지면 바로 사라지는 것과는 다르게, 내가 창조하는 것은 생성과정에서 한번이면 충분했다. 제거하는 것도 내가 하면 되는 것일 테니, 다음에는 골드를 좀 복사해서 가지고 다니면 어떨까?

 

“이런 힘이 있다고 해서, 전혀 기쁘지 않은 것은 왜 일까?”

 

분명, 어릴 적에 나는 신기한 힘이 눈을 뜬다면, 그에 맞춰서 다양한 일을 해보고, 생활이 편해질 것이라는 걸 생각했지만, 그 신기한 힘은 그에 걸 맞는 부작용도 존재하는 것을 모르던 순진무구한 시절이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처한 위기는 신기한 힘과는 아무 상관 없지만...

 

뒤쪽에서 옥상의 문이 열렸다. 잡화점 문과는 다르게, 나무가 아닌 합금으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 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 문에 있는 마법진과 결계를 뚫고 올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후우...이거 혼났네.”

 

발목까지 오는 검은 코트를 입고 온 레인은, 흠집이 이리저리 생긴 가면을 쓴 상태로 나에게 다가왔다.

 

“아. 카일 씨. 여기 있었군요.”

 

“그 가면은?”

 

“카일 씨가 있는 잡화점에 놀러 갔는데, 느닷없이 공격이 들어와서...하마터면 인생에 단 한번밖에 없을 줄 알았던, 성전환 패턴을 그대로 당할 뻔했어요. 지금쯤 이 삼각자가 없었다면, 모든 마법을 직격으로 맞고 끌려갔겠죠.”

 

레인이 들고 있는 플라스틱 재질의 거대한 삼각자. 어처구니 없게도 그 삼각자의 절반이 사라진 체 옥상 바닥에 버려졌다.

 

“제 삼각자가 부셔질 정도로 퍼붓는데, 평소에도 카일 씨는 이렇게 맞고 다니나요? 가정폭력 아닙니까?”

 

“넌 그게 가정폭력의 수준으로 보이냐? 마법 맞고 눈떠보니 잡화점으로부터 1km정도 날아간 게?”

 

가정폭력을 뛰어넘는 애정행각이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내 근처로 다가가서 내가 보고 있는 경치를 따라보고 있었다.

 

“카일 씨는 그래도 좋겠네요. 찾아줄 사람이 있잖아요?”

 

“그래. 그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다만,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장난감으로 삼으려는 사람들만 뺀다면...”

 

레인은 내 말에 생각났는지 질문하기 시작했다.

 

“카일 씨. 아까 그 이상한 꼬마에게 들은 말로는, SNL에 내보낼 귀여운 영상을 찾는다고 했는데, 어쩌다가 그런 이야기로 변한 거에요?”

 

마리아에게 들은 건가? 이상한 꼬마라고 말하는 거 보면, 이질적인 감각을 정면에서 맞이했겠지만, 그건 둘째치고...

 

“넌 토요일 밤에 라이브로 어딜 보낼 생각이냐? SNS겠지.”

 

“이야. 300년 전에 사람이 SNS에 대해서 알다니, 장족의 발전이 아니라 급성장이라고 봐야겠어요.”

 

“그렇게 볼 생각하지마. 이 정신이 출타한 녀석아.”

 

그런데 레인이 이곳에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그저 우연히 겹쳤던 것뿐일까? 어느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가서 현실이 되는 순간.

 

어마어마한 불꽃이 튀어 오르고 청명한 강철의 충돌이 옥상 위에서 울려 퍼졌다. 내 고막이 찌르는 듯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레인의 손에 들린 것은 트라이앵글이었는데,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소리가, 사방으로 뛰쳐나오며 내가 있는 위치를 간접적으로 알리게 되어버렸으니...

 

“너. 누구의 사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야.”

 

“제가 잡화점에서 어마어마한 폭격을 맞고도 살아왔을 거라 생각해요? 당연히 거래를 함으로써 절 풀어준 거죠.”

 

“날 데리고 오라는 말을 들은 거냐?”

 

“그건 아니고, 시간만 벌어달라고 했거든요. 제가 카일 씨를 어떻게 이깁니까?”

 

뻔뻔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손에는 벌써 사브르를 들고 있었다.

 

“너는 왜 잡화점 1호점에 찾아와서 일을 더 크게 만드는 거냐고...”

 

“심심하면 놀러 가는 게 1호점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날 놔주면 필요 없는 희생은 줄일 수 있을 거야.”

 

“카일 씨. 하늘을 보세요. 저 사조성이 보일 겁니다.”

 

지금은 대낮이라 사조성은커녕 별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늘에 조그마한 점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하면서, 어마어마한 속도로 나에게 날아드는 것만큼은 확인했다. 검은 흑발을 날리며 고속으로 내려오는 소녀.

 

“사조성이 아니라 죽음의 별이잖아 그냥!”

 

마리아를 보자마자 어쩔 수 없이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고, 곧 이어 거대한 폭음과 함께, 건물 옥상에 있는 콘크리트의 파편과 흙먼지들이 사방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레인은 과연 살아있을지 의문이지만, 뒤를 돌아보며 붕괴위기의 건물은, 시간이 역행하듯 천천히 돌아오면서 낙하하던 잔해까지 모두 원상복구가 되었고,

 

갈고리 사슬 하나를 아까 뛰어내린 옥상에 던진 후에, 겨우겨우 매달리면서 옥상으로 다시 올라갔다.

 

“여전히 반응이 빨라서 잡기 힘들군. 그만 포기하고 이곳에 와야 하지 않는가? 그러면 본래 30개를 녹화해야 하는 영상을 3개로 줄여주겠노라.”

 

“밝은 미소로 폭력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으니, 이번 계획은 무산으로 만들어 주시죠?”

 

말 그대로 밝은 미소로 작은 손에 검은 성배를 들고 있는 마리아는, 잔을 살짝 기울자마자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기이한 검은 촉수 같은 것을 피했다.

 

검은 성배에서 안에는 문어도 살고 있는 건가?

 

“애석하게도 카일이여. 첩에게는 그리 시간이 많지 않다. 장비를 겨우겨우 빌렸는데 빨리 찍어야 한다고?”

 

“그건 나랑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잖아요. 멀쩡한 사람의 성별과 나이를 변화시켜버린다는데, 그걸 어떤 인간이 허락해요?”

 

“첩이 허락한다.”

 

“하지마! 그냥!”

 

마리아의 경우에는 거리를 유지하는 마법사형이니, 내가 먼저 근접해서 공격을 해도 상관이 없지만, 그걸 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레인이 근처에서 근접공격을 막아주고, 마리아가 원거리에서 결정타를 먹이는 것이, 가장 유효한 타격방법이라고 한다면 꽤 힘들겠지만, 다행히도 이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리아의 경우에는 내가 도망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지.

 

이 세계가 멸망해도 끝까지 따라올 것 같아서 더 무섭다.

 

“생각을 해보면 카일과 첩은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지 않는가? 애석하게도 그건 당연한 일인데, 첩이 진심으로 힘을 끌어올리는 것은 그 세계가 멸망할 때일 뿐이니까.”

 

“멸망 당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내본 적은 없나 보군요? 저번에도 그 소녀의 모습에서 성인으로 변했을 때는 진심으로 힘을 끌어올린 게 아니에요?”

 

“그야 당연하지 않는가? 첩이 휘두르는 힘은 극미량에 불과하다. 그 극미량의 힘으로 땅이 갈라지고 산이 쪼개지는 것뿐이지. 아주 미세하게 힘 조절을 하지 못해서, 이 건물도 옥상부터 주저앉아 무너질뻔하지 않았는가?”

 

살아생전에 저런 무식한 먼치킨은 처음 봤네.

 

마리아가 지니고 있는 힘이 거대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따르는 자들은 세계가 멸망할 때 찾아와서, 안전한 땅으로 인도해주는 역할이니까. 그래도 급을 따지자면 신에 위치할 수준은 되겠지.

 

신비롭고 경이로운 정신기생체이지만...

 

“아무튼 시간을 더욱 더 지체할 수 없으니, 첩이 살짝 힘을 끌어올릴 테니까. 죽지 말거라.”

 

성배에 담긴 검은 물이 나에게 쏜살같이 튀어나오자마자,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검은 물에 닿은 콘크리트가 서서히 기이한 형태로 뒤집어지기 시작하면서, 기괴한 생명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니. 저건...

 

“슬라임이 검은 물에서 튀어나오다니...그 물은 얼마나 많은 생물이 들어가있는 거에요?”

 

“잘만 들여다보면 카일도 이 안에 있을지도 모르지.”

 

그 검은 물 안에서 내가 수영이라도 하고 있다면 끔찍했겠지만, 그 슬라임이 점점 인간의 형상을 지니기 시작하더니, 나와 쏙 빼 닮은 형체의 남자 3명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아...이런.”

 

순식간에 벌어진 공격에 반응은 하려고 했지만,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은 이후, 내가 다시 눈을 뜨니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첩의 말에 반항하지 않고 순순하게 따라왔으면 좋지 않았는가? 카일도 슬슬 말을 듣지 않고 튀어나가려니 잡기가 힘들구나.”

 

“그나저나, 카일 씨는 감이 예리하네요. 조금이라도 더 은밀하게 다가가지 않았으면, 트라이앵글을 못 울렸을 거에요.”

 

 

재기불능이 되어버린 내 두 다리를 각각 한 명씩 잡고 끌고 가고 있을 무렵. 태클은 걸고 싶어도 머지않아 어마어마한 피로가 다시 내 눈꺼풀의 무게를 증가시키고 있었다.

 

뭐에 맞았는지 몰라도 3명의 분신의 손 앞에 마나가 모이는 걸로 보아, 검을 들어서 근접전을 하겠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원거리에서 포격을 한 모양이로군.

 

이대로 끌려가면 안 되는데...

=============================================================================================

마리아는 카일의 분신 3개를 소환했다.

카일의 분신1 마나 캐논!

카일의 분신2 마나 캐논!

카일의 분신3 마나 캐논!

 

카일은 쓰러졌다.

 

대략 이렇게 전투가 흘렀다고 보면 됩니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6 - 10

520

 

 

 

소녀...아니,  소녀처럼 어리게 보이는 여성은 차분하게 걸어와, 우리와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검은 달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그녀는 세상의 멸망을 알리기 위해. 혹은 자신이 마음에 드는 세상으로 인도하기 위해 일하고 있는 안내자. 그녀의 눈에 들어오면 영혼은 보존되어 영원히 그녀의 곁을 맴도는 행성이 된다고 한다. 아직까지 나는 죽어본 적은 없지만, 나에게 새긴 검은 달의 문양이야 말로, 나중에 죽을 경우 전생을 하여 총애를 받긴 할 거 같지만, 잡설은 치우고 마리아가 입을 열며 사탕을 지휘봉처럼 허공에 찔렀다.

 

“정신계열은 이 우주에서 첩만큼이나 도달한 자가 없노라. 그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는데. 카일이여. 혹시 그 초능력자의 몸에 쉽게 침입할 수 있는 만큼, 엘티노스가 다른 수작을 부려놓지 않았는가?”

 

말한 적도 없는데 마리아의 추측은 끊임없이 뻗어 나아갔다.

 

“초능력자의 육체가 죽으면, 들어온 천족의 혼까지 소멸한다고 들었어요. 인간의 수를 줄이는 것도 있지만, 천족이 그 안에서 죽으면 천계에 있는 개체수가 줄어들겠죠.”

 

마리아의 작은 고개는 상황을 인지하듯 끄덕였다.

 

“그러면 1차적인 봉인은 있지만, 2차적인 봉인은 없다는 소리이지 않는가? 2차적인 봉인은 아까 첩이 말했던 것처럼, 초능력자의 자의식을 강화하거나, 초능력자 자체를 봉인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마리아. 그 계획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오.”

 

루니아 누나는 느긋한 목소리로 마리아의 생각을 붙잡고 늘어졌다. 마리아가 고개를 돌려 루니아를 바라보는 동안 이야기 하기를...

 

“지금 이곳에 있는 초능력자들이 누군지도 모를뿐더러, 실제로 얼마나 있는지 알지도 못하잖아요오? 게다가 초능력자는 일반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간의 몸에 들어가기 쉬운 거지, 적합성이 높으면 일반인에게도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리가 되요오.”

 

그 말에도 일리가 있듯이, 나는 비록 초능력자가 아니지만, 마나와 친화력이 높고 레시아나 시나가 내 몸에 동화할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당연히 내 체질이 특이한 것도 있지만,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특이체질이 분명 존재하니까.

 

“그렇군. 루니아의 말도 일리가 있노라. 그러면 모든 이들의 자의식을 강화해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자의식이 강해지면 대담해져서 사고나 그런 것이 일어나지 않나요?”

 

내가 질문을 하자 루니아 누나와는 다르게,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건성으로 답하는 마리아.

...그런데, 내가 물어볼 때는 처음부터 한숨을 내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시당하는 기분이니까.

 

“그건 쓸 때 없는 자존심이 높아지는 거지, 자의식이 강해진다는 소리가 아니니라. 자의식이 강해진다는 소리는 ‘나’를 알아가는 것이니라. 남과 타협하지 않는 진정한 자신을 알게 해주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란 말이다.”

 

“그럼 마리아가 들어가 있는 여성은 자의식이 약한 거에요?”

 

“아니. 그거와는 전혀 다른 거다. 흔히 줄임말로 ‘케바케’라 하지.”

 

케바케?

그런 줄임말은 어디서 줍고 이곳에 뱉는 걸까?

 

“케바케에?”

 

루니아 누나도 모르니 고개가 갸웃하면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의 줄임말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첩의 경우에는 하나의 산 제물을 받아들인다는 개념이지. 숙주가 되는 여성의 영혼은 첩에게 거둬지면서, 다음 생을 살아가는 것을 뜻하며, 현재 이 몸은 첩의 것이 되는 거지. 딴 소리를 너무 많이 했구나. 어쨌든, 2차 봉인을 하는 것이라면, 모든 인간들이 아직까지 무역을 하고 돌아다니는 지금이야 말로, 곧장 실행에 옮겨야 하는 계획이 있다.”

 

벌써 계획까지 준비한 마리아에게 모두 집중을 하고 있는데.

 

“카일이여. 그대의 도움이 꼭 필요한데 괜찮은가? 이 일이 잘 진행되려면 카일 밖에 도움을 부탁할 사람이 없노라.”

 

“그거야, 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하겠죠.”

 

“괜찮다. 오히려 카일이야 말로 300.999%의 능력을 끌어 올릴만한 일이니 말이다.”

 

300까지는 괜찮은데 0.999는 무슨 수치야?

차라리 반올림을 해서 301%라고 해주지.

 

“그나저나, 마리아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저에게 최적화가 되어있는 일이에요?”

 

“그렇다. 카일이 아니면 이 일을 할 수가 없노라.”

 

“설마 백장미 팬들을 싸인하라거나 그러면 안 되는데요?”

 

“300년 뒤에는 카일이라는 존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이지 않는가? 애당초 백장미와 관련된 일이 아니니 안심하거라.”

 

백장미에 관련이 없이 나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일이라니?

그거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사람은 항상 가치를 측정하며 살아가고, 자신에게 잘 맞는 가치에 대해 한 없이 높게 평가하지만,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는 일은 가치가 심해로 곤두박질 치기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중에.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기에, 마음 속에서는 자기 멋대로 기대하기 시작했다.

 

“마왕님. 혹시 ‘그거’ 연구 다 되지 않았습니까?”

 

“마리아. ‘그걸’ 꺼내자는 것인가? 아직 임상실험은 하지도 않았노라.”

 

무슨 약물이야?

임상실험을 하지도 않았다는 말이 걸리잖아.

 

“헤에? ‘그거’를 꺼내다니요오? 마리아.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여기서 하자는 건가요오?”

 

대체 ‘그게’ 뭐길래?

 

“제가 판단하기에는 아직까지 위험하다고 봅니다만, 저희들이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시나마저 위험하다고 생각할 만큼 무시무시한 약물인가보다. 루니아 누나의 요리와 레시아의 요리, 시나의 요리가 섞인 것보다 더 위험한 약물이 있을까? 설마 흔히 말하는 창조주마저 죽어버리는 최악의 독액이라던가?

 

300.999%라고 하더니, 오히려 부담만 가잖아? 상대를 너무 치켜세우고 어려운 일을 부려먹으려는 속셈일까? 나보다 더 뛰어난 존재들이 살아갈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었다. 우선 무슨 일인지 듣기나 해보자.

 

그래야 분위기만으로 질소포장중인 ‘그것’에 대해 알 수 있겠지.

 

“카일이여. 6단계 분리이론이라는 말 알고 있는가?”

 

“그건 또 뭐에요? 먹을 걸 6단계로 분리한 다음 나눠서 먹는다는 이야기인가요?”

 

3식이 6식으로 바뀌어서 매번 반찬을 육식으로 해결하는 육식주의자가 되는 거야.

 

“쓸모 없어서 분리수거도 안 되는 개그를 독백으로 하지 말거라.”

 

“마리아야 말로 남의 생각을 읽으려고 하지 마시죠.”

 

이번 개그는 재활용은커녕 분리수거도 힘들다니. 그 전에 6단계 분리이론이 뭐인지 모르는 나와 잡화점 멤버들은 마리아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6단계 분리이론이라는 것은 6명만 거치면 모두 간접적으로 어이 진다는 말이다. 애석하게도 이 이론을 알고 있는 유능한 첩은, 아쉽게도 300년전에는 통신수단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시절이니 사용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마법공학의 개발로 인해, 일반인도 특정 기계만 있으면 멀리 있는 사람과 통화할 수 있다고 하더군.”

 

그리고 마리아는 주머니 속에서 “짜잔!”이라는 외침과 함께, 기묘한 물건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이것이야 말로 그 연락수단 중 하나로, 안에는 제법 복잡한 마법공학과 수식이 이곳 저곳에 붙어있노라. 하급마나석만으로 사용할 수 있게 계량한 이것은, 초기에는 통화만 가능했다고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다양한 유희거리를 이곳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이 화면에 들어와있는 아이콘을 누르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지.”

 

그걸 본 레시아는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봤고, 시나는 내 옷자락을 붙잡으면서 “마스터. 저거 하나 사주세요.”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루니아 누나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는데, 이미 소지하고 있는 걸로 예상하고 있을 때였다.

 

“최근에는 휴대기기가 발달한 것은 잘 알고 있어요오. 저도 이곳에 도착하면서 쭉 둘러보는데, 그걸로 먼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Yee.T 보드게임이나,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면서요오?”

 

실로 경이로운 물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저 조그마한 물건 하나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해내다니. 하지만, Yee.T 보드게임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다. 그것 빼고는 300년 이후에 신세계라는 말이 나올 정도.

 

“우리는 그럼 너무 구식처럼 저런 물건 하나 이용하지 않았다는 거네요.”

 

“그런 뜻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상을 숨기기 위해선 이걸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지. 조금이라도 개인정보가 누설되면 곧바로 뒤집혀지지 않는가?”

 

그 기묘하고 똑똑한 물건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았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서 그걸 어떻게 이용할지 물어보도록 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걸 이용할 거라 생각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이용하실 건가요?”

 

마리아는 씨익하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첩이 말하지 않았는가? 6단계 분리이론을 여기서 실천할 것이다. 이 기계 안에 있는 어플리케이션 중에는, ‘얼굴 책’이라던가 ‘지저귐’등. 모든 이들이 하나로 묶여있듯이 거대한 체계가 존재하는데, 그 안에서 어마어마한 관심을 이끌면, 모든 사람들이 그걸 보고 배포하면서 퍼지게 되어있노라. 그 영상 안에 자의식을 강화하는 최면마법을 심어놓으면 끝이지.”

 

“영상이라. 안리아스 수정구로 녹화나, 풍경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이, 이제 모든 이들에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더 놀랍네요.”

 

“첩은 다른 세계에서 경험한 결과, 어마어마하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낸 결과물로 승부를 본다. 거기에 첩의 계정도 살짝 참여하는 것뿐이지.”

 

300년 후의 세계에서 그 문명의 문물을 사용하자는 이야기가 내 귀에 들어오니, 내가 300.999%으로 발휘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일에 대해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잠깐의 침묵을 기회로 먼저 치고 올라오기로 하자.

 

“백장미를 그 안에서 촬영할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거에요.”

 

“아이잉~ 왜요오~! 카일의 귀여움을 알릴 수 있는 순간이라고요오~!”

 

루니아 누나가 내 팔을 붙잡고 흔들면서 앙탈을 부렸지만, 이미 나는 굳건하게 버티면서 “안 돼요. 돌아가요.”라고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마리아의 작은 손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하기를...

 

“걱정 말거라! 카일을 여장시키면서까지 고생시킬 필요는 없으니까. 오히려 백장미를 찍을 생각은 없다.”

 

“잠깐만요오. 마리아. 이야기가 틀리잖아요오.”

 

기어 다니는 루니아 누나의 목소리를 보아, 맨 처음에 계획했던 건 백장미였는데, 마리아의 변덕인지, 나를 방심시키기 위함인지, 계획을 급하게 수정하는 모습이다. 둘이서 소근거리는 것이 무슨 내용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내가 앞으로 나서서 들으려고 했으나, 레시아와 시나가 나를 막고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여성들의 비밀공유를 남자가 멋대로 듣는 것이 아니니라. 주인.”

“마스터. 조금만 기다려주시지요.”

 

잠깐의 시간 동안 방해를 받았을 무렵. 루니아 누나와 마리아의 간격이 벌어지고 어마어마한 웃음이 루니아 누나의 얼굴에 달라붙은 모양인지, 쉽사리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가끔 저런 웃음은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데...

 

“마왕님. 잠깐만 귀를...”

 

“무엇인가?”

 

이번에야 말로 듣겠다는 심정으로 가까이 가려고 했으나, 루니아 누나와 시나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뭐해요? 데자뷰 놀이에요?”

 

“카일은 여자들의 비밀대화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답니다아~”

 

레시아가 귓속말을 다 들었는지 진지한 목소리로, “오늘 어떻게 되도 모른다. 감당은 할 수 있는가?”라고 조용히 말을 하자. 마리아는 “모든 책임은 제가 질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내가 백장미를 찍지 않는 건 확정이 난 모양인데.

책임을 진다는 말은 또 무슨 소리인지 마음에 걸린다.

 

시나의 경우에는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지, 더 이상의 비밀대화를 진행하지 않고, 잡화점 멤버가 점점 가까이 오기 시작했는데. 그 어떤 사람이 봐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집단 행동이라 볼 것이다.

 

“자, 잠깐만요? 왜 그래요?”

 

사방으로 나를 포위한 잡화점 멤버들. 가만히 서 있는 모습만 봐도 무서운데, 따듯하게 웃고 있는 레시아의 미소를 보며 더욱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주인. 마리아가 우리에게 권유한 것으로는 여자아이로 변하면 어떻겠냐는 소리가 들리는데?”

 

“어. 그건 레시아와 시나가 하는 거에요? 나이야 역행하실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건 맞다고 하지만, 그런 모습으로 제 손목에 은팔찌라도 차게 된다면...”

 

“아니. 짐와 비둘기가...”

 

“올빼미입니다.”

 

시나는 꾸준히 태클을 걸고 있지만, 레시아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벌렸다.

 

“어쨌든 우리 둘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루니아 누나가 하는 거에요?”

 

“그것도 아니다.”

 

그럼 대체 누가 하는데? 아리엘을 스타로 만들 생각인가?

 

“누가 하는지 잘 모르겠...”

 

“마스터가 하시는 겁니다.”

 

지금 말을 내가 잘못들은 건가? 그래 맞아. 내 귀가 잘못 된 것이 분명해.

 

“누가 해야 할지 참 의문이네...”

 

“주인이 하는 것이다.”

 

“저기. 생물학적으로 봐도 어마어마하게 불가능하다는 생각만이...”

 

여태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지, 성별이 또 바뀐다고? 게다가 이번엔 나이까지 어려져서? 그냥 날 구워삶지 못해 안달이 난 거 같은데?

 

“마법이면 가능하다. 짐은 운이 좋게도 강력한 마왕이니 말이다.”

 

“아니. 그건 운이 나쁜 것일뿐더러 ‘전’마왕이잖아요. 지금은 마왕이 아니지...그 전에 저처럼 남자답게 생긴 사람에게 성별을 바꾸고 나이까지 어려지라고요? 외형 변형 아이템이라도 사셨어요?”

 

도망갈 준비를 슬그머니 했지만, 내 어깨를 꾹 누르며 웃고 있는 루니아 누나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오. 잔뜩 예뻐해 줄게요오.”

 

“루니아 누나. 눈이 무서워요. 눈에 생기가 없잖아요!”

 

마지막으로 마리아가 천천히 밖으로 나가면서...

 

“그럼. 마왕님. 잘 부탁 드립니다. 저는 잠깐 계정을 만들고 녹화 준비를 위해 장비를 조달하도록 하죠.”

 

“마리아! 어디가! 지금 장비를 왜 조달하는 거야! 잠깐! 레시아! 그 손에 마법진 치워요! 아아아아아아악!”

 

개인적으로 나는 공포가 극한까지 달하게 되면 비명을 지른다.

예를 들어, 가장 현실적으로는 살인자에게 죽기 직전이거나.

 

가장 비현실적으로는 성별이 강제로 바뀌기 전이라거나...

=============================================================================================

300년 후의 세계는 현대와 거의 같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촬영이나 녹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발달한 곳에서,

카일이 구르는 것은 필연적인 요소겠죠.

꿈에서 멱살잡고 흔들 것 같지만 괜찮아요.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사는 일

⠀일기장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사는 일.' 이라고 적었다. 마침표는 무거운 척하기 위해 애써 찍어둔 것으로, 나의 투정과 연희를 생각하는 마음과 기필코 그녀를 잊고 말겠다는. 갈대처럼 가벼운 다짐이 한데 섞인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문장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엔 진짜로 마침표가 찍히는 문제였다. 나는 꽤 진지한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 사랑이라는 글자를 보고 있으면 문득, 사랑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안녕하세요. 김연희에요. 연희동에 살아요."

⠀연희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늘 그렇게 인사를 한다고 했다.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리곤, "열여덟쯤 연희동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꼭 그곳에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어요. 정확히 십오 년 만에 얻은 집이네요"라고 덧붙였다.

⠀한 달. 그녀를 추억하는 한 달 동안 어쩌면 처음 인사를 나누던 순간부터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던가. 따위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분명 좋은 곳도 많이 다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는데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안녕하세요. 김연희에요. 연희동에 살아요." 하는 목소리였다. 대책 없이 연희를 생각하다 보면 두, 세 시간은 우습게 흘러버렸다. 마지막 데이트까지 한 번 곱씹고 나서야 '아, 또 걔를 생각하고 있었네.' 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사는 일.' 아래에 밑줄을 긋고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사는 일에 대해 생각하려다가, 연희에 대한 생각만 잔뜩 한 것에 대한 자책이었다. 이번엔 동그라미로 글자들을 가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니까.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사는 일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글자들이 다른 생각과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 가둔 것인지, 그것만 생각하기 위해 가둔 것인지에 관해서라는 말이다. 어쩌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사는 일에 관해 생각하는 일을 바라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나는 이미 펜으로 동그라미를 검게 칠하고 있었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6 - 9

519

 

 

 

엘티노스의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멍한 머리를 수습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엘티노스가 “야.”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30년뒤에나 충격을 수습하고 움직였겠지. 30년을 3분으로 단축시켜준 엘티노스에게 궁금증이 생겨서 입을 열었다.

 

“그런 큰 그림을 어떻게 그리고 앉아있는 거에요?”

 

라며 아직까지 감탄보다는 허탈한 목소리가 섞여 나오자.

 

“상황을 보고 언제든지 변하는 것이 변수고 해결법이잖아. 잡화점에서 2시간동안 스탠바이하고 있을 때. 생각해낸 변수 중에 하나가 걸려든 것뿐이야.”

 

“역시 천계에 있는 사람들이 신성력이 부족한 이 땅에서 본래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 초능력자의 몸으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거군요?”

 

“아니. 신 노릇도 재미가 없으면 다 때려 치고, 적당한 녀석 몸 안에 들어가서 여자나 꼬시려고 했지.”

 

겨우 그 이유 때문에 지금 이런 결과를 만든 거냐!

 

“얼마나 여자를 밝혀야 그쪽이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까요?”

 

“너는 여자가 항상 꾸준할 거라고 생각해? 여자는 변화무쌍의 달인이야. 절세미녀가 나타나도 다음세대에 또 다른 절세미녀가 나타나지. 경국지색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그런 미녀가 말이야.”

 

유일하게 여자 이야기를 할 때는 엘티노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래 험악하게 생긴 40대 중년 아저씨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고. 마치 강아지가 뼈다귀보고 좋아 죽으려고 하는 그 얼굴 말이야.

 

한숨이 나타나려다 다시 꾹 참고, 또 다시 한숨이 뒤늦게 나가려는 걸 막고 있을 무렵. 엘티노스는 거침없는 자신감으로 입을 열었다.

 

“너 나랑 사업 안 할래?”

 

“제가 신하고 같이 사업해서 무슨 손해를 보겠습니까?”

 

“하긴, 넌 과거로 돌아가야 할 몸이지. 그냥 여기서 계속 산다고 했다면, 같이 사업이나 좀 하려고 했을 텐데.”

 

무슨 사업인지 예상이 가는 바람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못해요. 안 해요. 혼자 하세요. 아니면 샤이어 데리고 하세요.”

 

“샤이어는 람파시나 여신의 부하잖아. 그것도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는 추종자. 그 올빼미가 내 눈에 섬광을 24시간동안 뿜어대는 바람에 힘들었다고. 넌 사역마 관리도 제대로 안 하냐?”

 

무슨 짓을 해야 시나가 천계까지 쫓아와서, 엘티노스의 눈을 실명시키려고 하는지부터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사역마가 아니에요. 페어링이 다 끊어져서 그 관계를 억지로라도 유지하기 위해, 반지로 결속하고 있는 거라고요.”

 

“밴쥐?”

 

“반지!”

 

“밴~쥐!”

 

양산형 간달프에게 맞아 죽어라 그냥...

 

“그 반지들은 잡화점 멤버의 표식이기보단, 전부 반려자라는 뜻으로 가진 거 맞지?”

 

“그건 왜요?”

 

뜬금없이 물어보는 이유에 대해 역으로 질문을 했더니, 엘티노스는 조용한 혼잣말로 “많이도 고생하겠네.”라는 말만 남겼다. 이미 고생하고 있는데 엘티노스만 볼 수 있는 고생길이 더 있는 건가? 새로운 고생길은 사양하고 싶다.

 

“방금 전의 혼잣말은 또 뭡니까?”

 

“아무것도 아냐. 말하면 너에겐 미래를 알려주는 일이니까. 신경 쓰지마.”

 

엘티노스는 마지막 말을 뒤로하고 느닷없이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그보다 레인이라고 했던가? 잡화점의 후배가?”

 

“잡화점을 로켓으로 만들어서 날아다니는 애가 있긴 하죠. 그런데 레인이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엘티노스는 가만히 생각을 좀 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녀석에게도 가봐야겠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잡화점 안에 있는 사키엘의 문이 서로 공명하면 될 거라 생각하지만, 로켓으로 날려버릴 만큼 내부구조도 많이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키엘의 문은 자신이 한번 가본 장소를 기억해야 사용할 수 있지만, 나도 레인의 잡화점은 둘러본 기억이 없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리스 뿐일지도...

 

“어차피 잡화점이 2개라면 여기 말고 다른 한곳의 좌표를 찾아가면 되는 것뿐이지. 찾는 건 그리 어려운 건 아니지만, 다른 잡화점에 있는 세린이 협조할지는 잘 모르겠다.”

 

엘티노스의 말에 대꾸를 하기 위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는, 말 그대로 감쪽같이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깜빡 하면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현상은, 마음속 어딘가에 불안하고 공허하게 만들지만, 그것도 잠깐 일시적일 뿐.

 

“간다면 간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지.”

 

홀로 남겨진 의자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냐아앗!”

“아...”

“어라아?”

 

느닷없이 레시아는 바닥으로 넘어졌고, 시나는 짧은 탄성을 냈으며, 루니아 누나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방문을 열고 나온 것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셋이서 뭐하고 있어요?”

 

“그야 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위해 말하려고 했지마안, 안에서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해서요오. 엘, 엘라스티인?”

 

“그건 머리카락이 좋아지는 거에요. “

 

사람이름과 상품이름을 혼동하지 말아줬으면...

아니 상급신이니 사람은 아닌가?

 

혼동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다.

어차피 신의 이름은 알아서 외워지거나 알아서 지워지기 마련이니까.

 

“전쟁을 해결하는 방법이 뭔데요?”

 

궁금하지 않지만 루니아 누나가 말하니 들어보기라도 하자.

 

“백장미를 부흥시켜서 모든 세계를 이어주면...”

 

“거기까지. 그거 100%확률로 실패하니까 그렇게 알아두세요.”

 

5초전에 나를 때리고 싶었다.

내가 왜 이걸 듣는다고 했지?

 

백장미가 부흥한 이유라면 우연이 너무 겹쳐서 잘 되었지만, 지금은 백장미의 ‘ㅂ’자도 보이지 않으니, 루니아 누나의 말을 딱 잘라서 거절했다. 사실 더 불안한 게 있다면, 진짜 부흥해서 일이 틀어지는 날에는, 300년 뒤에도 내 후손은 백장미로 나를 감상하는 멸망의 시대가 오겠지.

 

진짜로 세계가 다 멸망하는 건 신경도 안 쓸 테니 백장미만 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게다가 이번 천계와 마계의 전쟁은 유희 같은 거에요. 실질적으로 인간세력을 줄이기 위한 계획일 뿐이고, 지금도 다른 초능력자 몸에는 천족이 들어갈지도 모르죠. 마족의 경우에는 위험하면 도망갈 수 있는 책략은 벌어두고 있지만, 사실 가장 우세한 세력은 천족이네요.”

 

인간들 몸에 들어가서 가상의 게임마냥 즐기려고 했지만, 엘티노스는 그것을 함정으로 이용해서, 그 인간의 몸이 죽으면 영혼도 같이 소멸하게 되어버린다고 한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지금도 아우리스 여신을 본 적이 없다는 건가?

 

“아우리스 여신은 대체 뭐하고 있을까요?”

 

“주인은 왜 그런 맹꽁이 같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는가?”

 

“제가 천계에 올라왔을 때는 레이베리아 이외엔, 그 어떤 여신도 본 기억이 없어서 그래요. 비니스 여신도 그렇고 지금의 성녀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엘티노스 잡화점이 2개라는 사실이 지금쯤, 천계와 더불어 명계에도 소문이 다 퍼졌겠죠. 하지만, 아우리스 여신이 오지 않은 것은 수상하네요.”

 

레시아는 여전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라고 짜증나는 얼굴로 내 눈만 응시했다. 내가 아우리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야 말로, 또 다른 하나의 가설을 형성하는 과정일 뿐.

 

“즉, 다시 말해서. 지금 레시아가 나타났다면 가장 빠르게 견제하러 와야 하는, 아우리스 여신의 행방이 보이지 않다고 봐야 한다고요.”

 

“음? 생각해보면 주인의 말도 일리가 있긴 하구나. 짐을 항상 숙적으로 여겨왔던 것은 아우리스니까. 하지만, 300년이 지난 이후에 없어도 별 이상한 것은 없지. 다른 대륙으로 갔을 수 있지 않는가? 전담하는 대륙이 다르니 볼 수 없다라는 것은...”

 

“그러면 지금은 신성 아우리온이 아니게 되죠. 그보다, 아우리스를 대신할 여신이 천계에서 보이지도 않아요.”

 

아주 잠깐이라서 못 봤다고 생각했으니, 시나의 작은 고개가 살짝 들썩이자, 백은의 실들이 파도처럼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샤이어에게 확인해본 결과 마스터의 말대로 레이베리아를 제외한 모든 여신이, 천계에서 실종된 상황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시나의 말을 확증으로, 300년간 천계에 많은 이변이 생긴 모양이다.

 

“확실한 거라면 마족이 그나마 우리에겐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는 좋은 정보와 함께, 나쁜 정보라면 지금 레이베리아를 막을 여신이 천계에 남아있지는 않는단 소리네요.”

 

엘티노스는 분명 다른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확실한 견제도 하지 못하고, 숨어서 지낼 것이 뻔했다. 아리엘과 루시피나, 릴리스가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의견이 오고 가고 있는 와중에도.

 

“그러면 카일은 어떻게 해결하실 건가요오? 대안이 없다면 ‘무한 백장미계획’이 가장 좋다고 보는데요오?”

 

무한 백장미는 무슨 계획인데?

환술이냐?

나무가 아깝지도 않아?

루니아 누나의 뜬금없는 사형선고를 피하기 위해, 생각을 쥐어짜내서라도 아무 말이나 뱉도록 하자.

 

“그럼 초능력자들의 몸에 들어간 녀석들을 봉인시키는 건 어때요?”

 

“어떻게 봉인을 해요오?”

 

“그 해답은 지금 멀쩡히 남의 몸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마리아가 가장 잘 알 거 같은데요.”

 

햇빛에 비춰진 연한 갈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는 소녀가, 놀란 듯이 돌아보며 “첩을 부른 것인가?”라고 입을 열었다. 마리아가 놀란 이유는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들어와서, 조용히 창가에 앉아 사탕을 뜯었을 정도로 의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잡화점의 문 여는 소리는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제대로 들리는 것이 정상적이다.

 

“몸 안에 본래 자아를 밀어내고 사용하지 않을 테니 말이죠. 게다가 그 몸이 죽으면 마리아는 또 다시 자신의 육체를 찾아 떠돌아다니잖아요?”

 

“당연히 그렇지만, 정신기생체라고 해서 마구자비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 몸 안에 들어가려면 상당히 많은 것을 고려하고 들어가는 거지. 아까 듣자 하니, 천계에 있는 자들이 초능력자의 몸으로 들어간다고 하지만, 그 초능력자의 의지가 강하면 역으로 봉인을 당하거나, 공생을 하게 되는 처지에 놓여지는 것은 다반사다.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면 상관 없지만, 그 몸이 봉인 장소가 된다면 천족들의 자아를 억누르는 봉인을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몸에 들어가서 권능을 휘두른다는 자체가 무산된다.

봉인 방법만 알면 되는데...

 

“봉인을 하는 방법 또 있다. 하나는 인간의 자의식이 선천적으로 천족보다 더 뛰어나도록 관리를 해주거나, 다른 경우에는 그 초능력자를 봉인시키면 그만이니라. 그런데 그게 왜 중요한 것인가? 어차피 엘티노스가 다 해결할 거라는 생각은 한 해본 것인가?”

 

“우리가 봉인 방법을 들은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서일 뿐. 엘티노스가 얼마나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니, 미리 줄여나가는 것도 생각해야죠.”

 

“그나저나 마족도 인간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그렇긴 하겠죠.”

 

마리아는 딸기 맛 사탕으로 자신의 작은 입을 톡톡 건들이기 시작했다. 딸기사탕보다 더 진한 붉은 입술이 움직일 때. 모두가 귀를 세우고 마리아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꽤 재미있게 흘러가는 구나. 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계통으로 장난을 하다니. 아무래도 저들이 운이 없는 이유라면, 300년 뒤에도 첩이 있을 거란 것을 계산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여유롭게 웃고 있는 마리아의 속을 알 수 없으나, 좋은 방법이 떠올라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

피곤한 인생...언제쯤 끝날지...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6 - 8

518

 

 

 

레시아가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독극물은 루니아 누나의 비전까지 합쳐져서, ‘죽음의 근원’이라고 칭했다. 그 바보 같은 것이 혀끝에 닿자마자 스틱스 강의 뱃사공이 눈 앞에 들어왔다.

 

“어서 와. 저승길은 처음이지?”

 

나태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소리쳤다.

 

“뭐가 처음이에요! 자주 왔었는데!”

 

“그런가? 나는 네가 누구인지 기억에 없는데? 카론 선배가 말한 대로 명단에 없으면서 자주 이곳에 나타나는 인간이란 사실밖에...”

 

“제대로 기억하고 있네요. 어차피 뱃사공에게 그 사람의 이름은 별 볼일 없잖아요.”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람은 수많은 영혼을 배에 태우니까. 다른 이들의 이름을 기억할 리가 없다.

 

“카일. 아무리 나라도 기억하는 이름은 몇 가지가 존재해.”

 

검은 후드를 푹 내려쓴 사공에게선 슬퍼하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쓸 때 없는 소리를 한 나에게 스스로 책망했다.

그런데 내 이름을 왜 알고 있는 거야? 불안하게...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닌데도 말이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매번 영혼을 인도하는 뱃사공의 감정은 얼마나 지나면 마모가 되는 걸까. 그건 둘째치고 이번에도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데?

 

“그런데 왜 너는 이곳에 자주 들락날락하는 거야? 게다가 300년이나 지나서 이곳에 오다니 별일이네? 카론 선배도 잡화점 주인은 매번 비정상적으로 오기 때문에, 오래 살아도 놀랍지 않을 거라 했지만, 인간의 평균수명으로 따지자면 60세도 넘기기 힘들다고?”

 

“저도 이곳에 들락날락할 줄은 몰랐지만, 제 잡화점 멤버 중에는 훌륭한 독극물 제조사들이 존재하거든요. 무지개 빛의 음식을 먹으면 말 그대로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거고, 암흑물질과 발광하는 물질도 존재해요. 그 중에 2가지를 섞어서 먹으면, 오게 되는 겁니다.”

 

“그런 거 먹고 원래 죽지 않는 게 더 신기하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300년이 지나도 살아있어서 정말 놀랐어. 하지만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을 보아, 과거에서 미래로 건너뛴 모양이네?”

 

통찰력의 극을 보여주는 뱃사공의 말을 듣고, 머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이 한가지...

 

“천계와 명계는 따로 독립적인 구간이죠?”

 

“맞아. 명계에서 죽은 사람의 혼을 천계로 올려주기도 하고, 다른 생물로 환생하게 만들기도 하고, 마족들이 가져가서 자신의 힘을 증폭시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 당연히 그 영혼마다 백업은 남아있으니까, 환생이 가능하되 그때는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이 아닌, 동물이나 식물로 환생을 시켜. 그런데 그건 왜?”

 

“저는 독립적인 구간이냐고 물어봤는데, 왜 영혼의 쓰임새에 대해서 알려주는 겁니까?”

 

동문서답에도 극을 보여주는 건가?

 

“독립적인 구간은 맞지만, 이쪽이 제대로 일하지 않는다면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야.”

 

“그걸 왜 알려주는 건데요?”

 

“내 후배로 들어오라고.”

 

“싫어!”

 

그거 완전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잖아. 농담은 그만두고 나는 다시 입을 열어, 분위기도 전환할 겸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생명의 순환과 관련이 있을 테니까요. 그럼 마족은 필멸이라 그렇다고 쳐도, 천계에 있는 천족은 불멸의 존재 아니에요?”

 

“그건 아니야. 이 세상에 불멸이라는 존재는 없어. 끝이 항상 정해져 있는 걸?”

 

뱃사공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신빙성이 매우 높은 말로 들린다. 모든 것이 움직인다면 그 끝은 반드시 있는 법인가?

 

“완벽한 생물은 없다는 소리네요.”

 

“그렇지. 설령 창조주라고 할지라도 완벽한 생물은 없어. 만일 완벽한 생물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종말을 할지라도 그 생물은 살아가면서 이렇게 생각할 거야. ‘이 세상엔 완벽한 것이 없다고.’라고...”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는 차분하고 또렷했다. 여전히 미풍의 바람도 불지 않는 이 장소에서 저승과 이승을 가로지르는 강물은, 석산이 개화하며 천천히 지나가고 있을 때, 머리에서는 번개처럼 치는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같은데. 그거 뭐에요?”

 

“나도 어릴 때 들은 거거든. 그래서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아. 명계는 모든 시간이 하나로 뭉쳐진 곳이기도 하니까.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별 상관 없거든. 매번 뱃사공이 바뀌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하도록. 알았지?”

 

“그러면 그 이야기는 적어도 과거에 들은 이야기란 소리네요?”

 

“맞아. 그것도 내가 지상에 있을 때 들었던 소리지.”

 

지상에서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뱃사공은 한 때, 살아서 무엇을 했다는 것일까?

 

“지상에 살아있을 당시의 이야기도 해줄 수 있어요?”

 

“그건 불가능해. 금기거든.”

 

딱 잘라 선을 그어버린 뱃사공의 말로 흥미로운 것이 사라지자, 멋대로 추측하는 머리가 풀가동하고 있었으니...

 

“혹시 억울하게 죽어서 뱃사공을 하고 있다거나?”

 

“말해줄 수 없다니까?”

 

“아니면 카론 씨의 딸이라던가?”

 

“카론 선배와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걸?”

 

역시 어려운 수수께끼. 멋대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추측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내 입에선 한숨이 나왔고, 포기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뱃사공은 후드 안에서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슬슬 지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저기. 그걸로 때리면 아프다고요. 좀 정상적인 방법으로 되돌려주시죠?”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이런 건 자주 하지 않는 일이지만, 옛날에 부탁을 받았으니 이렇게 해볼까?”

 

옛날에 부탁을 받아?

 

“누구에게 부탁을 받아요?”

 

“비밀이야. 어쩌면 곧 알게 될지도 모르겠지?”

 

서서히 다가오는 후드에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내 목을 감싼 그 순간,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그윽한 향을 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자애로는 붉은 눈동자가 어느 정도 거리를 좁혀지던 그 순간.

 

-쪽!

 

내 이마에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만 남은 뒤로, 주변을 둘러보자 레시아와 시나가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잡화점으로 돌아왔는지 주변에 나무재질의 검은 바닥이 반겨주고 있을 무렵.

 

“어라? 일어...냐아아아아아앗!!”

 

우선 레시아에게 징벌의 아이언 클로부터 사용하고, 잠깐 동안 멍한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앉아서 양손으로 내 머리를 붙잡기 시작했다. 방금 그 얼굴은 어릴 적의 레시아와 판박이라고 말할 정도로 똑같았는데, 지상에 살았다고 말하는 걸로 보아...

 

“열은커녕 하나부터 정상적으로 지내는 후손은 없나 보네...”

 

“무슨 말인가? 주인?”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시아의 꿈 중 하나는 이루어진 듯 하네요.”

 

“명계에서 짐의 선생을 보았는가?”

 

레시아가 흥미로운지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고, “그것보다 더 우선시 되야 하는 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레시아는 천천히 내 눈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그런가...짐과 주인은 의외로 열정적이었나 보다. 후손이라고 해서 이곳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찾기 어려운 이유가 있었노라. 명절날에는 올라와서 같이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만, 애석하게도 짐과 주인은 300년 후의 사람이 아니니, 알고 있기만 해도 꽤 도움이 많이 되리라 본다.”

 

미소가 자동으로 그려지고 있는 레시아의 얼굴은,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단 명계에 있던 그 뱃사공의 얼굴과 겹쳐져서, 나도 따라 미소를 남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크흠! 마스터. 엘티노스가 왔습니다만, 들여보내야 할까요?”

 

좋은 분위기를 한 순간에 묵사발 내는 시나의 헛기침 뒤에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엘티노스 씨가 나를 찾아왔으니 이것은 분명 진실을 알아가거나, 또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나는 백은의 소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런데 잡화점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자동으로 열어주지 않아요?”

 

“이상하게도 제가 열어주려고 할 때는 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세린이 또 무슨 짓을 한 건가?

 

“세린! 그만 문 열어!”

 

내가 잡화점을 향해 소리를 치자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엘티노스는 “여전히 말은 더러울 정도로 듣지 않네.”라고 화를 씩씩내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대체 뭘 했길래 2시간동안 뻗어버린 거야? 세린이 네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절대 열어줄 수 없다고 하던데?”

 

“잠깐 명계에 다녀올 일이 생겨서요...”

 

“그거 죽은 사람만 가는 곳이잖아? 변명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아니, 진짜인데 어쩌란 거야.

 

“지금까지 주인은 후손을...읍!”

 

“그 이상 말하는 건 넌센스라고요.”

 

레시아가 명계에 다녀온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것에 대해 알려줄 생각이었지만 내가 어설픈 부분에서 입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엘티노스는 나를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밤낮이 없네. 사람이 2시간동안 기다리게 한 원인이...원래 청렴하고 순진했던 너는 어디로 간 거냐? 나는 적어도 손님이 오기 15분 전에는 뒷정리를 다 한다고.”

 

“뭘 상상하든 자유지만 적어도 댁이 상상한 그건 아니에요.”

 

“아무튼 Yee.T 보드게임을 많이 하면 몸에 해로우니 적당이 해라.”

 

Yee.T 보드게임은 한 적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데. 그나저나 후손에 관련된 게 Yee.T 보드게임에도 붙어있던가?

 

보드게임이 300년 뒤에도 살고 있는 게 더 신기한데? 그보다 후손은 또 뭐야? 그 게임 안에 있는 건가?

 

“그 보드게임에는 Yee.T의 후손이라는 좋은 효과를 지닌 카드가 있지. 그 카드를 집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주사위를 던져서 숫자를 확인했을 때. 자신의 점수로 가져올 수 있는 카드야.”

 

상세한 설명은 뒤에 있던 루시피나가 해줬다. 그리고는 “루시피나는 쿨하게 장을 보러 가도록 하지.”라며 아리엘과 같이 잡화점 밖으로 나갔는데...그런 기묘한 캐릭터를 따라 하는 이유는 뭘까?

 

“어쨌든 나머지는 다 나가있어. 카일과 내가 따로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까.”

 

나와 엘티노스는 모의전투실 안에 단 둘이 들어가서, 능숙하게 조정하고 있는 엘티노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 사이에 가상으로 이루어진 방 안에는, 의자와 책상이 나타나게 되고, 한숨부터 내쉬는 엘티노스를 시작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우선 앉고 이야기를 좀 하자.”

 

“그러죠.”

 

자리에 앉고선 양손으로 깍지를 쥐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엘티노스.

 

“초능력자들을 왜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겠지?”

 

“초능력자들은 정신력이 강하니까, 그 안에 천족과 마족이 들어가기 쉽다는 거잖아요?”

 

“당연히 그렇지. 하지만, 내 계획은 인간들만의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함이야. 천계와 마계가 서로 공존하는 것도 좋지만, 언젠가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움직일 위험세력이지. 애초에 네 경우에는 특이한 애들이 많이 모여서, 잘 공존하고 있지만 레이베리아와 실베스의 움직임으로 보아, 인간의 힘을 줄이고 지배하거나 멸종을 시킬 것 같으니까. 초능력자들을 만들어낸 거야.”

 

“그러면 오히려 손쉽게 지배당하지 않을까요? 강한 능력을 지녔을 뿐더러, 그 안에 천족과 마족의 힘이나 권능까지 모두 사용할 수 있다면...”

 

엘티노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우려한 것에 대해 동의한다.

 

“맞아. 너무 강해서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엘티노스의 눈에서는 빛이 튀는 것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게 함정이라는 거야. 초능력자는 살아 숨쉬고 돌아다닐 수 있는 봉인이라는 것. 초능력자의 몸 안으로 들어간 천족과 마족은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 인간이 죽으면 안에 들어가있는 모든 것들도 죽음을 당하는 거야. 100%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들어갔지만, 오히려 신격화를 제거하고 상대적으로 죽기 더 쉬운 몸으로 봉인시키는 거지.”

 

천계에 있는 존재는 불멸의 존재이지만, 초능력자의 몸 안으로 집어넣음으로써 필멸의 존재로 바꿔버린다. 마계에 있는 생물은 필멸의 존재라서 상관은 없지만, 마기가 없는 인간계에서는 마나를 마기로 변환하는 마법이 있다.

 

“마나를 마기로 변환하는 마법이 있잖아요? 마족은 별로 초능력자의 몸에 빙의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 같은...설마? 실베스 씨가 마왕으로 된 이유는 엘티노스 씨 때문이에요?”

 

애초에 천계에 있는 특정 세력을 끌어내기 위해 실베스 씨와 짜고 치는 작전이라면, 게다가 그걸 미리 알아차린 레시아가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받아가면서 후퇴하고, 긍지 높은 실베스 씨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억지로 전쟁하는 것이야 말로...

 

 

모두 엘티노스가 의도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다.

=============================================================================================

이제 아버지께 받은 홍삼을 흡수할 수 있겠군요.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중독

⠀요즘에는 종종 중독에 관해 생각해요. 아마도 담배 때문이겠죠. 윤은 손바닥에 올려놓은 사탕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바닐라 향이 나는 동그란 사탕은 유난히 짧은 윤의 생명선이 꼭 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손금을 따라 이리저리 흘렀다. 윤은 담배를 끊은 대신 임시방편으로 사탕을 먹고 있다고 했다. 중독이 또 다른 중독을 낳은 셈이었지만, 구태여 문제를 삼지는 않았다. 사실 그녀가 술과 담배, 커피 중에 하나라도 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했다. 윤에게 건네받은 사탕을 입안에 넣고 커피와 함께 조금씩 녹이면서, 내가 가지고 있을 중독들에 대해 생각했다. 중독이라.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테이블을 작게 두드리고 있는 윤의 손이었다. 그녀의 손이 나의 볼을 감싸 안거나, 사랑한다고 말할 때 등의 살갗을 어루만지는 것이 좋다. 처음 그녀의 손이 나의 볼을 감싸 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손바닥의 온기라든가, 손가락의 모든 작은 곡선과, 향수 냄새와, 꼭 나의 전부가 될 것 같았던 그녀의 짧은 생명선과, 벅찰 만큼 빛나던 눈빛. 오랜 옛날 처음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였을 때만큼이나 심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그것은 중독이었다. 중독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어떤 신호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나의 세상이 뒤집어졌는지도 모를 일이고.

⠀나중에 사탕을 끊는다고 담배를 다시 피우면 어떻게 해요? 윤이 웃으며 물었다. 중독이 또 다른 중독을. 나는 그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면서 그동안 나를 물들였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하필이면 카페에서는 하림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따위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고, 나는 어금니로 사탕을 깨문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6 - 7

517

 

 

 

늦은 아침에 눈을 떠보니 루시피나는 어딜 갔는지 안보이고, 엘티노스의 기척마저 사라진 뒤였다. 아직 물어볼 것이 남아있어서 아랑과 이야기를 하고, 거침없이 나를 깨우면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잠자는 인간은 그냥 놔두나 보다.

 

아님, 나를 피하기 위한 묘책일수도 있지.

 

엘티노스가 초능력자를 만들기 시작한 날은 언제인지 몰라도, 300년전에 마신이 강림한다는 정보를 받고 골치 아프게 뛰어다니던 시절에도, 초능력자는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카멜롯의 역사학원장이 마나 없이 보석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사이코메트리를 사용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예전부터 은밀하게 진행된 계획이라고 추측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배에서는 배고프다고 소리를 질렀고, 루시피나를 찾아 여우신사에 나가서 잡화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루시피나가 문을 열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신랑! 큰일이야!”

 

잠자고 일어난 사람에게 다짜고짜 큰일이라고 외친다고 한들, 커다란 반응을 해주기가 너무 애매했다. 뇌세포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서, “하...또 무슨 일이길래 아침부터 이 난리야.”라고 짜증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으니까.

 

“무슨 일이에요? 거대한 일이 걸어 다니기라도 해요? 그거 완전 넘버 원이네요.”

 

“그런 썰렁한 개그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 큰일이야!”

 

이곳까지 뛰어왔는지 숨을 고르고 있는 루시피나에게 20초의 시간을 주자, 안정적인 호흡으로 돌아온 루시피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천마전쟁이 인간계에서 터지려고 하고 있다고!”

 

“뭐라고요?”

 

이번엔 전쟁이냐? 그것도 천마전쟁이면 자기들끼리 싸울 것이지, 이제 인간까지 끌어드리는 건가? 이럴 때만큼은 잘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듣고 싶지 않는 정보 때문에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마티는 미래에 가서 자식들 때문에 고생을 하더니, 왜 나는 300년 뒤에 가서 전쟁 때문에 골치가 썩는 걸까...”

 

천계와 마계가 인간계에 내려와서 싸운다는 것은, 단순히 천족과 마족의 전쟁에 휘말린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부분 천족을 믿는 인간들과, 마족의 힘을 받은 인간끼리 싸우는 건데, 결국 그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애들은 소모적인 피해는 입지 않으니, 겉으로는 천마전쟁이고, 실제로는 인형으로 전쟁놀이나 하는 거다.

 

과거 선조들이 카멜롯에서 득도를 해서 천족과 마족을 쓸어버렸을 때는, 그만한 반전세력이 천계와 마계에 튀어나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번엔 아예 작정을 하고 전쟁을 한다면...

 

“저기? 신랑? 어떻게 천계와 마계가 인간들만 조종해서 전쟁하려는 걸로 되는 거야?”

 

“그야 당연히...인간계에서 제대로 힘을 낼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잖아요. 그런 인간을 회유해서 자신의 아군으로 만든다. 그런 거죠. 아주 먼 과거에 인간들에게 모조리 썰려나간 천족과 마족들을 보며 고안해낸 것이 이거라고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한 거에요. 이곳은 아랑의 결계로 숨겨져서 찾아올 수도 없는 안전한 장소지만...잡화점으로 먼저 돌아가는 게 좋겠네요.”

 

루시피나로 인해 끊어진 독백을 다시 이어보자면, 이들은 인간을 멸종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이 맞다. 신인류가 벌이던 짓과 비슷한 수준으로, 인간의 힘을 최소한으로 줄인 뒤에 멸망을 시킨다는 것이 맞는 해석이겠지.

 

해결법이라고 한다면 말이야 엄청 간단한데...

인간을 규합하고, 천계와 마계를 상대로 싸우면 된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말만 쉬운 거지. 현실적으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을 보이고 있다.

 

가기만 하면 사건, 사고에 전쟁만 터지는 이 인생이라니...

아직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여럿이 있는데, 모든 사건을 뒤로한 체 과거로 돌아가야만 할까? 잡화점에 돌아온 내 인상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그걸 아는지 검은 고양이로 변한 레시아는 나에게 뛰어들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갈 방법은 아직 못 찾았노라. 어쩌면 이곳에서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괜찮아요. 태풍이야 잘 지나가겠죠. 그보다 지금 천족과 마족은 어디에 있는 거죠?”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각자 인간의 몸에 들러붙었을지도 모르지. 초능력자들은 일반인보다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들이라면 쉽게 몸을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티노스가 초능력자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갈 생각이라도 했을까? 상급신의 인생을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인간계로 와서 여자를 꼬시는? 아니, 그럴 생각으로 했다면 그 이전에 벌써 하고도 남을 사람이겠지.

 

“마스터. 전쟁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까?”

 

“있기야 하겠지.”

 

하얀 올빼미는 내 앞에서 기대심이 가득 내뿜고 있을 때,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을 이야기 해줬다.

 

“인간이 모두 사라지면 될 거야.”

 

극단적인 해결방법을 내가 말해주니, 시나는 올빼미 인형이 되면서 아무런 소리나, 행동도 할 수 없었는지 멍하니 있을 뿐... 당연히 그건 최악의 수이기도 하고, 절대 하면 안 되는 방법이니, 이걸 실현할 가능성은 개구리가 느닷없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보다 확률이 낮다.

 

“하긴, 매개체가 사라지면 힘이 빠지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다시 인간을 창조할 수 있고, 인간과 비슷한 것도 창조할 수 있다.”

 

“레시아. 정확하게는 창조주가 하는 일이지, 천계나 마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거에요. 실베스 씨는 결국 전쟁을 시작해버렸고, 레이베리아는 뭘 숨기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주인은 개입할 것인가?”

 

“애석하게도 니드호그를 발견하는 바람에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카렌도 찾아야 하고...”

 

그러자 레시아와 시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니드호그?”라는 말을 내뱉었다. 순간 내가 뱉은 말에 등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면서, 실수라는 것을 자각하기도 전에 루시피나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신랑과 저의 후손이에요! 정확히는 둘이서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나~? 에헤헷!”

 

오늘따라 유난히 기뻐하고 있는 루시피나가 도화선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오호라. 주인은 후손을 위해서 아무런 관계도 없을 미래의 전쟁을 막겠다는 거로군?”

 

“마스터...”

 

“아니. 전쟁을 막아야 하는 목적은 니드호그도 있긴 하지만, 지금은 후손이 살아나갈 땅을 깨끗이 닦아주는 것도 선조가 해야 할 일...”

 

***

 

말도 모두 끝내지 못하고 잠깐의 폭발음을 뒤로 의식이 끊어져버려서 죄송할 따름이지만, 레시아는 앞발을 핥으면서 내 배 위에 앉아있었다. 검은 고양이가 붉은 눈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기분은 어떠할까? 솔직히 내가 살아가는 동안 봐온 고양이 종 중에서, 붉은 눈을 한 고양이는 없으니 오히려 기묘할 뿐이다.

 

“길을 닦는 것은 길라잡이가 해야 할 일 아니던가? 바보 같은 변명으로 짐 앞에 어중이 떠중이처럼 이야기 하지 말지어다. 그런데 어쩌다가 루시피나와 주인의 후손을 발견했는가?”

 

“드래곤은 오래 사는데 아직도 루시피나의 아버지가 드래곤을 이끌고 있더라고요. 세월이 지나면서 돈이 필요했는지 회사를 차렸지만...”

 

“그렇군. 좋겠구나. 루시피나는...과거에 주인과 이어졌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레시아도 제 부부에요. 괜찮을 거에요.”

 

내가 안심하라고 입을 말하고 있지만, 질린다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검은 고양이는, 순식간에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멱살을 붙잡기 시작했다.

 

“주인이! 짐을 제대로 상대만 했어도! 축구 할 수 있을 정도로 수 많은 후손이 태어났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레시아가 흔들고 있는데, 내 머리는 매번 천장에 부딪쳤고, 의식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 레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풀어줬다.

 

“설마...루시피나와 주인이 외박했을 때. 이어진 것은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주인이 품고 있는 씨앗을 잘라야...”

 

“어째서 제가 아이를 품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겁니까?”

 

“주인은 신부이니까.”

 

“그 소리를 제가 앞으로 얼마나 들어야, 신랑과 신부의 개념이 올바르게 잡히실 건가요?”

 

꾸준히 신랑과 신부의 차이점을 헷갈려 하고 있는 모습이니 태클을 걸 수 밖에 없었다.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신랑이라는 입지를 굳히고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귀찮은 일이니까.

 

“그러면 어제는 루시피나와 주인 사이에, 킹 크림존이 오지 않았다는 그런 이야기군?”

 

“뭘 기대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다시 일어나서...

어라?

 

“레시아?”

 

“왜 그런가? 주인.”

 

“비켜요.”

 

“싫다.”

 

왠지 모르게 나만 어색해진 침묵의 시간을 보내게 되고, 불길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돌고 있을 때. 레시아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쨌든 지금은 천족과 마족이 전쟁을 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주인의 말대로 인간을 이용해서 싸우는 것은, 전쟁이라기 보단 모의전투 같은 같은 느낌이로군.”

 

“하지만 실베스 씨라면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인. 애석하게도 마왕의 자리를 올라서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많다. 짐도 서로 공존하는 길을 찾는가 하면, 머릿속에 마구니가 가득한 자들은, 인간계를 지배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울 생각을 하고 있노라.”

 

선과 악은 언제나 공존한다. 하지만 선과 악은 임시로 지어낸 개념일 뿐. 다양한 관점으로 보면 다 맞고 다 틀리다. 다양한 모순이 결합되어있는 이 세상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면...

 

“이 일을 해결하려면 3파전을 만들 수 밖에 없겠네요. 인간을 효과적으로 통합해야 하고, 양측 세력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니까요.”

 

“그래? 그러면 주인이 그 일을 할 것인가?”

 

“레인에게 말해보고 못하겠다고 말하면 제가 해야죠. 하지만 엘티노스에게 궁금한 것을 풀기 전까지는 보류로 하고 있을게요.”

 

엘티노스는 이 초능력자들을 어째서 만들었는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의 괴랄한 인성과는 반비례로 인간을 위해 살아간 그는, 티르처럼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는 강인함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인간을 모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간이 늦더라도 엘티노스가 방법을 찾아내거나, 이미 알고 있다면 그의 계획을 먼저 따라줘야 하니까요.”

 

엘티노스가 천족과 마족의 도움이 되라고 초능력자를 만들지는 않았을 터. 그러니 나는...

 

“레시아. 어째서 제 몸에 감각이 없는지 이제 설명하시죠!”

 

당장 내 눈앞에 닥쳐온 시련을 해결해야 한다.

 

“그야 루시피나와 외박을 하지 않았는가? 짐이 그 사실에 가만히 눈감아 줄거라 생각하는가?”

 

그리고 내 옆에서 뭔가가 담긴 그릇을 가져오기 시작했는데, 싸늘하게 웃으면서 조용히 웃고 있는 레시아의 미소는, 매력적이라는 말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보다 심보가 너무 쪼잔해!

 

“그, 그 안에 든 내용물 뭐에요?”

 

“짐이 루시피나와 밖에서 으쌰으쌰를 한 줄 알고, 피곤하고 지칠 것 같기에 장인의 정신으로 손수 만든 스테미나 영양 암흑물질이다. 루시피나도 요리를 도와줘서 무지개 소스를 같이 받아왔지.”

 

날 죽일 생각인가?

진심으로?

여기서 삶이 마감되는 거야?

 

“자. 주인. 끈적하고 뜨거운 것을 입에 담아낼 준비가 됐을까? 크흐흐흣!”

 

“일부러 음흉하게 말하지마! 그 전에 스푼이 녹는 건 음식이 아니라고요...하아...”

 

 

비참하게 녹아가는 은수저가 미래의 내 혀와 장기가 되기 전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서서히 가까워지는 죽음 앞에서, 어차피 죽나 안 죽나 저걸 먹어야 한다는 체념 때문에 한숨만 나왔다.

=============================================================================================

위스키를 철근같이 씹어먹고 글을 올립니다.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태는 틈이 있는 곳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 그러니까 장롱과 천장 사이에 있을 어떤 틈이나, 침대와 바닥 사이의 틈, 살짝 열려있는 창문의 틈, 차의 아래쪽 보이지 않는 틈 같은 것들까지 말이다. 그 강박은 틈이 작고 은밀할수록 더해서 태의 집에는 온통 틀어막힌 틈과 그 위로 단단히 붙어있는 박스테이프로 어지러웠다. 처음 그의 집에 갔을 때 나는 온 방 안에 부적이라도 붙여놓은 줄 알았다. 그 노란색 테이프가 꼼꼼히 둘러진 모습이라니.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부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틈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니, 그의 말을 빌리자면 틈 사이로 노려보는 눈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덕지덕지 발라진 노란색 박스테이프는 그 눈으로부터 태를 보호하는 일종의 부적인 셈이다. 언젠가 그와 술을 마시면서 그토록 틈을 경계하는 이유를 물었다. 벽과 테이블이 딱 달라붙어 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술집에서였다. 틈에는 늘 나를 노려보는 눈이 있어. 태가 말했다. 꼬부라지는 말투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분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분노와 두려움, 그것은 상반된 어떤 감정들이 섞여 나오는 색이었다. 평소 그의 강박에 가까운 행동과 그때의 태도를 미루어 보았을 때 도저히 장난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떤 눈? 내가 물었다. 태는 술을 한 잔 마시고는 재빨리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술잔을 내려놓을 때 생기는 술잔과 테이블 사이에 틈을 경계해서 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그는 숟가락이나 포크도 쓰지 않았다. 오로지 젓가락으로만 모든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물론 틈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 시골에 갔다가 우물을 들여다본 적이 있어. 태는 아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습관처럼 왼쪽 볼을 지긋이 누르면서였다. 까마득하게 깊은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전혀 속이 보이질 않는 거야. 태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린다. 나는 그것이 떨고 있는 어깨 때문인지, 흔들리는 눈동자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태의 꽉 다문 어금니 부근에서 아아아,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그 작은 소음을 통해 태가 기억 속에 남아있는 트라우마와 마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레박, 두레박을 내렸어. 물소리를 듣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안에 있던 ‘것’이 내게 그렇게 하라고 시켰는지도 몰라. 태는 반쯤 울고 있었다. 물 소리라기보다는 질퍽한 진흙에 두레박이 닿는 소리가 들렸어. ‘철퍽’하고 말이야.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두레박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봤지. 그런데.. 태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니 숨까지 멈추고 있었다. 그때의 그는 꼭 죽은 사람처럼 허리를 빳빳하게 펴고서 빈 눈동자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심장조차 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줄을 잡고 기어오르고 있었어. 태는 분명한 발음으로 ‘누군가 줄을 잡고 기어오르고 있었어.’라고 두 번 더 말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눈이 마주쳐버린 모양이다. 태는 바로 기절했고, 운이 좋았던 건지 쓰러지면서 두레박을 걸어두었던 나무를 부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였어. 그 눈이 나를 따라다닌 게. 분명히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그 눈... 그 커다랗고 빨간.. 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여전히 왼쪽 볼을 누르면서였다. 그곳은 아마도 방금 전에 비명을 지르던 어금니가 놓여있을 자리.라는 생각에 꺼림칙한 기분에 빠진다.

⠀치과에 다녀온 날 태는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어금니가 부서져 작은 틈이 생겼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유를 알지 못했겠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말을 할 때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던 찢어진 빨간 눈은 결코 나의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언니

언니 오늘은 모르는 남자랑 커피를 마셨어요. 아, 그러니까 커피를 마시기 전까지는 모르는 남자였지만 지금은 아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은 밥 한 끼 먹은 게 전부라서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뜬금없지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언니, 사람을 안다는 건 어떤 걸까요? 이런 소리를 하면 언니는 또 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저 ‘안다는 건 그냥 단순히 알고 지낸다는 건데, 네가 너무 단어에 집착하는 건지도 몰라. 다영아.’ 하시겠죠? 하지만 언니 저는 알고 싶은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아요. 사실은 사람들도 나를 몰랐으면 좋겠어. 그렇게 그렇게 조용히 살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어요. 아무도 모르게 살다가, 다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는 거에요. 어때요? 꽤 괜찮죠?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요. 나도 언니도 서로를 잘 몰랐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왜냐하면 나는 마카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언니는 집 앞에서 파는 마카롱을 종종 사다 줬잖아요. 나는 그런 언니를 좋아했으니까. 맛있게 먹는 척했거든요. 사실 내가 좋아한 건 마카롱이 아니라 언니였어요. 언니도 분명 그런 것들이 있었겠죠? 내게 맞춰주고 싶어서 말하지 않은 것들이요. 그런 것들이, 그러니까 서로에게 서로를 숨기는 것들이 서로를 알고 지내는 일에 도움이 된다니 우스운 일이에요. 그렇죠? 그러니까 우린 ‘서로에 대해 알지는 못했지만 알고 지내는 사이’였을까요? 어쩌면 ‘계속 알아가고 싶은 사이’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아니라면 ‘계속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이’일지도 모르고. 왜 그런 것들 있잖아요. 잘 지내는지,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간밤에 악몽을 꾸지는 않았는지. 하는 것들이요. 아, 가끔 언니가 보고 싶은 날에는 그 가게에 가요. 맞아요. 마카롱을 파는 그 가게요. 참 이상해요. 나는 마카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걸 먹으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사람을 떠올린다는 게요. 사실은 오늘도 언니가 보고 싶어서 그 가게에 가고 있었어요. 문 앞에 서서 들어갈까 말까 하고 고민하다가, 그 남자를 마주친 거에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남자가 언젠가 제 앞에 서있었어요. 제가 꽤 오래 우왕좌왕하고 있었거든요. 평소라면 그냥 무시했을 텐데, 제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어요. 그냥 그 남자가 마카롱 좋아하냐고 묻는 말에 “네”하고 대답해버린 거에요. 사실은 그 집에 들어갈 핑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언니. 나는 언니가 초록색 마카롱을 제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언제나 두 개씩 사서 하나씩 나눠 먹는 건 초록색 마카롱뿐이었으니까요. 그냥 막연히 ‘아, 언니는 초록색 마카롱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왠지 자꾸만 목이 막혔어요. 언니가 좋아하던 건데, 언니는 이제 먹을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요. 혹시 이것도 제 착각일까요? 사실 언니는 마카롱 같은 거 좋아하지 않는데, 저 혼자 착각한 걸까요? 차라리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좋아하는 걸 못 먹는 건 너무 슬프잖아요. 언니. 언니가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저의 죄책감이 조금 덜 할까요? 언니의 장례식이 있던 날. 저는 거의 죽은 듯이 자고 있었어요. 삼 일 내내요. 크리스마스니 연말이니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거 알잖아요. 그리고는 한 달이 지나서야 어머님께 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날은 어머님을 붙잡고 거의 하루 종일 울었어요. 사실은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펑펑 울었어요. 언니, 나는 왜 진작 언니한테 연락하지 않은 걸까요? 그때 부재중 전화를 보고 바로 전화를 걸었더라면, 언니가 나를 만나러 왔더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요. 언니, 오늘은 초록색 마카롱을 샀어요. 좋아하지 않더라도 평소처럼 웃으면서 먹어줬으면 좋겠어요. 아, 벌써 겨울이에요. 언니가 좋아하는 겨울이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온몸에 기운이 없는 게 자꾸만 축축 쳐져요. 그럴 때면 한 쪽 눈을 감고 “이렇게 하면 내 반쪽은 자고 있는 거야.” 하던 언니가 생각나요. 나도 따라 한 쪽 눈을 감는데, 그럴수록 언니는 자꾸만 뚜렷해져요. 꿈을 꾸는 걸까요?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6 - 6

516

 

 

 

새벽이란 시간대는 어느 무엇보다 중요한 시간인데, 새벽에 얼마나 더 깨어있는지의 차이로 수많은 것이 바뀐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며, 경건한 마음으로 깨끗한 옷을 입으며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아랑의 작은 어깨를 잡으며, 한 때 창조주가 사용했다던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을 때였다. 일부 무녀는 수면을 거부하고 중요한 의식을 보조하고 있을 무렵. 목걸이에는 어마어마한 빛이 일어나며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포탈이네요? 이제 저 앞에 가면 디아블로가 기다리고 있나요?”

 

“디아블로를 퇴치할 생각이었다면 이 몸은 네팔렘이나 둠가이를 불렀겠지. 지금은 엘티노스가 오래 봉인 되었으니 카일이 직접 찾아가서 깨우고 와야 한다.”

 

“시간은요?”

 

“아마 2시간정도?”

 

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매한 대답을 들으니 한숨밖에 쉴 것이 없었다. 안에 들어가서 찾지 못하고 2시간이 지나기 전에 뛰쳐나와야 하는 걸 보면, 차라리 람보라도 불러서 저 안에 기관총세례를 퍼붓는 게 더 빠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 천천히 차원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루시피나는 레인과 같이 밖에서 지켜주세요.”

 

“알았어. 신랑. 만일 문이 닫히려고 한다면 강제로라도 이곳으로 불러올게!”

 

용족혼인의 문장으로 날 강제귀환 시킬 수 있는 마법은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고, 만약에 문제가 터져도 여유롭게 빠져나올 수 있는 수단까지 있어야, 다른 변수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끝날 수 있지만, 내 앞에 벌어진 변수가 상상을 뛰어넘어버렸다.

 

“여긴 대체 어디야?”

 

봉인이라는 것은 대상을 제압할 힘이 마땅히 없거나, 제거하기에는 무리가 있기에 조치하는 행위다. 하지만 봉인을 경험해본 나로는, 무지하게 긴 시간을 그냥 잠자고 나왔다고 해야 하지만, 엘티노스에겐 자신의 삶을 영원히 돌아보는 장소였다. 멍하니 수정구 앞에 앉아서 자신이 벌여온 일을 끊임없이 보고 있었고, 이곳에 온 나의 존재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퀭한 눈으로 굳어있을 뿐.

 

“엘티노스 씨?”

 

[최근에 내가 보았을 때는 직접 영향을 주는 천계의 영향이 너무 커.]

[언제나 인간의 편에서 좋은 일을 하다간, 천계와 마계가 전부 붕괴될 거야?]

[그래도 인간계의 주인은 인간이 되어야 해. 언제까지 창조주 앞에서 인형처럼 움직이게 만들 수는 없지.]

[창조주도 너의 계획을 알고 있어?]

 

사납게 울려오는 목소리는 페어리들의 여왕. 티아와 일전에 이야기 했던 것처럼 들렸다. 지금 내 앞에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시야를 꽉 채우는 엘티노스의 기억을 빠짐없이 보고 있었지만, 육두문자나 화를 내야 했던 엘티노스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엘티노스 씨. 거기서 뭐 하는 거에요? 그보다 이 기억들은 또 뭔데요! 좀 일어나서 말대꾸라도 하라고요!”

 

지금 당장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르는데, 태평하게 앉아서 멍하니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는 엘티노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실이 끊어져버린 인형처럼 흔들리고 있던 엘티노스는 이중, 삼중으로 봉인을 당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소리치면서 정신차리길 빌고 있었다.

 

[그래서 창조주에게 권한을 조금 이어받아 몇몇 인간들의 유전자를 살짝 변형시키고 있어.]

[하지만 발전의 끝에는 언제나 멸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 강해지면 주목을 받아버리니까.]

[괜찮아. 현재진행형이니까. 조금씩이나마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능력을 사용하는 이른바 ‘초능력자’들이 늘어나고 있어.]

 

초능력자?

엘티노스가 초능력자를 만들기 위해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시켰다고?

이게 좋은 의도인지 나쁜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엘티노스를 깨우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뭘 해야 엘티노스가 일어날까?

 

“어! 저기 여자다!”

 

나의 허무한 외침이 공허 속으로 들어가 공허충 귓가로 빠질 때, 허무함만 마음에 가득 차버린 나머지 허탈한 웃음 하나 남기고,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초자아가 “왜! 그런 쓸 때 없는 짓을 했니!”라고 어마어마하게 질타하고 있을 무렵. 엘티노스가 단숨에 일어날 듯한 말을 골라야 했다.

 

“저기! 발키리가 바니 걸 복장하고 있다!”

 

“어디! 어디야! 아...뭐야? 여긴 어디야?”

 

“댁은 진짜 상급신 맞아요?”

 

“당연하지. 하아암~”

 

입을 쩍 벌리면서 커다란 하품을 너무 늘어지게 하는 나머지, 시공간마저 늘어나는 줄 알았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하품이 끝나고, 꿈뻑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벌써 2년이 지났나? 너 언제 왔냐?”

 

“댁이 봉인 당해서 찾아왔거든요? 아쟁총각의 제7원소 같은 인간아?”

 

“나는 그 노래를 불러주기 위해 이곳에서 잔 게 아냐. 그보다 이 수정은...그렇군...”

 

“그 수정이 뭔데요?”

 

엘티노스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하기를...

 

“이 수정은 천계의 도공이 만든 12변체도 중에 하나지.”

 

“당신 미쳤어요? 다른 글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그리고 이거 칼 아니에요. 수정구라고요. 봉인 당하더니 뇌세포까지 봉인 당했어요?”

 

이상한 인형이나 권총을 칼로 분류하는 것만큼 특이한 설정도 없었다고. 하긴 아무것도 모르고 맨 처음에 보면 다 그렇게 생각하려나?

...아닌 거 같은데?

 

“저 수정구는 상대의 정신을 가두는 용도로 쓰여. 하지만 레이베리아에게 봉인 당했을 때는 분명...아! 맞아! 그 망할 년이! 감히 날 봉인해! 야! 얼마나 지났어!”

 

“제가 이 시간대로 불시착했을 때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흐른...”

 

“얼마냐고!”

 

“300년 뒤요.”

 

내 앞에 있는 것이 화산인 줄 알았다. 어마어마하게 붉어진 얼굴로 화를 내는데, 나중에 입에서 용암과 화산재가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다행이 상급신이고 오랜 세월을 지켜봐 온 인간의 수호자로서, 절제를...

 

“이 망할 것을 어떻게 해야 하지? 꼬챙이를 들고 가서 죽을 때까지 찔러야 할까? 아니면 평생 타고 다닐 것으로 만들어버려? 이런 빌어먹을! 하필 그 중요한 시점에서 어떻게 알고 봉인을 시킨 거야!”

 

할 줄 모르며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뱉고 있는 엘티노스의 이미지가 더 나빠지기 전에, 좀 전에 비췄던 기억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시켜서 초능력자를 만든 거요?”

 

“......”

 

불같이 화를 냈던 인간이 내 말에 고요한 호수처럼 숨도 쉬지 않는지, 불편한 침묵이 이곳 저곳을 찌르기 시작했다.

 

“뭐야? 알고 있었냐?”

 

“엘티노스의 정신을 가두기만 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나중에 이야기를 좀 들어야 하겠지만, 초능력자는 엘티노스가 직접 저지른 일이라면서요?”

 

“저지른 일이 아냐. 그건 내 의지였어. 언제까지 인간이 신과 악마에게 고개를 숙이며 살아야 하겠냐? 그보다 아직 그 목걸이 안이라면, 지금 당장 나가야지. 하지만 이상하네? 내가 봉인 당한 목걸이는 이 차원의 신 이상의 계급이 열어 줄 수 있지만, 내 예상으로는 레이베리아가 너를 천계에 추방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엘티노스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물어봤다. 당연히 엘티노스의 시선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지만, 살이 파고들 것만 같은 눈빛.

사실대로 말한다는 선택지만 존재하니 어쩔 수 없나.

 

“아랑이 문을 열고 있어요. 빨리 나가죠.”

 

“야. 너 혼자 나가. 자존심이 허락 못해.”

 

“이럴 때만큼은 애처럼 행동하지 말라고요...”

 

자존심을 때려죽여서라도 좀 나오던가?

결국 약 30분동안 말싸움을 한 끝에 차원문에서 나온, 나와 엘티노스는 아랑의 웃음소리를 한 가득 듣...

 

“봉인에서 나왔나? 그보다 엘티노스에게는 긴 할말이 있으니 먼저 쉬고 있거라.”

 

지는 못했고 오히려 이 날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엘티노스를 말로 붙잡기 시작하면서 나머지는 전부 내쫓기 시작했다. 아직 엘티노스에게 물어볼 것이 남아있지만, 봉인은 풀렸고 얼마 있지 않아 나를 만나러 올 것 같으니, 아랑의 말을 순순히 듣기로 했고 오늘은 내가 잡화점을 운영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하고 있으니 여우신사에서 자기로 하자.

 

다른 무녀들에게 인도를 받아 도달한 곳이라면...

 

“그럼 두분 오붓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바닥에 베개 2개와 이불 하나만 있는 기괴한 현상을 목격하고야 말았지만...

 

“그 뭐냐. 루시피나?”

 

“왜 그래? 신랑?”

 

활짝 웃으면서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루시피나였지만, 밝은 앞모습과 달리 뒤에 피어 오르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검은색 오러가 무서웠다. 그보다 음침해.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밤은 따로 자고 싶을 정도야.

 

-팡팡!

 

언제 루시피나가 이불 속에 들어갔는지, 비어있는 옆자리의 푹신푹신한 베개를 시원하게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신랑! 컴 온!”

 

“뭐가 컴 온이에요.”

 

“괜찮아! 손만 잡고 잘게!”

 

“이미 우리 둘이 부부인 시점에서 손만 잡고 자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이런 말을 하자.

 

“그, 그럼 니드호그를 여기서 만들까?”

 

“뭘 만들어! 색종이로 접어서 만들기 전에 얌전히 자기나 하시죠!”

 

이미 상상의 나래로 빠진 루시피나는 자신의 볼을 모두 감싸면서 “꺄아~”라고 소리지르고, 어마어마한 소리가 울려서 자고 있는 이들을 깨우기 전에 문을 닫았다. 우선 나도 자러 가야겠으나 주변에 있는 무녀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 루시피나를 먼저 재우고 내가 자야 순서가 옳다.

 

“아아, 빨리 과거로 돌아갔으면 좋겠네요.”

 

“왜?”

 

“그야...잠깐만! 언제 위로 올라온 거야!”

 

루시피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심장이 멎을 뻔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녀의 연애판타지가 아니라, 진심으로 호러인 줄 알았으니까. 분명 조금까지만 해도 옆에 있었는데, 느닷없이 내 몸 위쪽에서 말이 흘러나온다고 생각하면, 그게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어디가 낭만적이야?

 

드래곤도 죽어서 유령이 될 수 있냐고 나중에 물어보자.

지금은 아니지만...

 

“나의 최고시속으로는 태양부터 이곳까지 8분 20초가량 걸린다고?”

 

“루시피나는 광속으로 질주하는 건가요?”

 

“헤헤헷!”

 

그나마 약한 태클을 받고 해맑게 웃으면서 행복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수많은 일이 있지만 그나마 진정이 되고 있을 때였다.

 

“이렇게 있으니까 편안하다. 그렇지?”

 

“아래에 눌리고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을 좀 해주면 좋지 않을까요?”

 

“내가 그렇게나 무거워?”

 

“아뇨. 오히려 가볍기는 한데...”

 

무섭잖아.

주온을 찍는 줄 알았다고.

 

하지만 루시피나는 보안이 바사삭하고 부셔지는 나의 독백을 읽었는지 아닌지, 갸웃거리기만 하다가 더 강하게 끌어안아 입을 열었다.

 

“신랑! 사랑해!”

 

“그런 말은 좀 자중해줘요.”

 

“부끄러워?”

 

“아뇨. 이걸 읽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불을 켜고 죽창을 만드는 소리가 들리니까요.”

 

솔직히 닭살이 돋아서 시공의 폭풍으로 사라질 것 같았다.

당연히 죽창 만드는 소리가 환청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나는 신랑이 이렇게나 좋은 걸?”

 

“장르를 억지로 바꿀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 자기나 하시죠?”

 

 

그나마 루시피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내가 주온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다고 생각을 하니 그나마, 안심하면서 잘 수 있는 새벽은 이어지고 있었다.

=============================================================================================

기술 배우고 집에 와서 바로 글쓰니 피곤하네요.

물론 도중에 아버지와 족발하고 소주를 마셨답니다.

...네. 족발도 마셨어요.(?)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영은 어떤 사람이에요?” 준이 물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숨을 골랐다. 혹시나 나의 모자란 어휘로 인해 영이 갖는 무수히 많은 매력이나, 그녀와 나 사이에 흐르던 어떤 감정 같은 것들이 변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은..” 나는 간신히 그녀의 이름만 흘리고 다시 말을 멈춰야만 했다. 이번에는 숨을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시에 거의 목구멍까지 차오른 뜨거운 것을 삼키기 위해서였다. 아,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키다니. 그나마 아까부터 쏟아지는 비가 목젖 어림에 머무는 열기를 식혀주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머릿속으로 영에 대해 정리하는 동안 준은 말없이 다이어리를 적었다. 검은색 펜과 빨간색 펜이 번갈아 가면서 중요한 일정을 체크한다. 그는 기다림의 미학을 아는 사람이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번도 소리 내어 불지 않고, 적당한 온도가 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타입의. 아, 영은 저런 신중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늘 무언가에 질려가는 중이거나, 이미 질렸거나, 혹은 질리기 직전의 상태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질리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라고는 ‘무언가에 질리는 자세’였으니, 영의 곁에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늘 살얼음판 위에 있는 기분으로 걸었다. “영은 변덕이 심한 사람이에요.” 결국 나는 그녀를 설명하는 일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얘기를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준을 설득시킬 자신이 내겐 없었다. 그녀는 그런, 설명하기 힘든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뜯어놓고 보면 사랑할 구석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데, 모두가 사랑하는 그런 매력. 나는 요즘에도 종종 불안정하게 떨리던 그녀의 눈동자를 생각한다. 아무리 세게 끌어안아도 멈추지 않던 눈동자의 떨림은 온몸의 살갗이 닿아있을 때에도 그녀의 실체를 온전히 느낄 수 없게끔 만들었다. 어리석은 나는 그럴수록 더 세게, 세게 그녀를 끌어안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새벽

⠀"요즘들어 새벽에 깨어있는 일이 잦아요." 윤은 가슴팍에 안긴 채로 잠꼬대처럼 말했다. 아니 어쩌면 잠꼬대였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꿈을 꿨어요." 말 끝에 한숨이 그림자처럼 붙었다. 그 한숨은 나로 하여금 그녀가 꿨다던 꿈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게 했다. 조금씩 잠이 깨면서 딱 그만큼의 서늘함이 살갗에 달라붙는다. "누구한테 쫓기고 있었어요. 달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데,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거에요." 쫓기는 꿈이라. 악몽에도 역사가 있다면, 아마도 가장 오래된 페이지에 적혀있을 내용의 꿈이었다. 누가 말했던가, 심플 이스 베스트라고. 적어도 악몽에 있어서는 심플한 것이 가장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 증거로 윤은 다시 잠들지 못하고 끝내 나를 깨우고 만 것이다. "우리집 문을 두드리지 그랬어요." 농담처럼 말했다. 윤은 대답 대신 팔을 깨물고 몸을 일으켰다. 떨어지는 이불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할 수만 있다면, 그래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그녀가 꿀 모든 악몽을 대신 꾸고 싶다고 생각했다. 달빛을 받아서 하얗게 빛나는 윤의 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린다. 그녀의 살갗에서 나의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달빛은 손의 모양에 따라 온도도 없이 길어졌다 줄어들었다 한다. "간지러워요." 일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날개뼈에 입을 맞춘다.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뾰족한 날개뼈와 마른 어깨에서는 꼭 베이비파우더를 바른 것 같은 냄새가 난다. 코를 그녀의 살갗에 깊숙이 대고 숨을 들이마신다. "좋은 향기가 나." 내가 말했다. 윤은 손을 뻗어 가만히 나의 머리칼을 만지다가, 뺨을 어루만지다가 한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 있는 시간, 소란한 것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는 시간, 살갗과 살갗이 마주 닿은 시간, 서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순간들. 나는 윤과 함께 하는 새벽을 그렇게 부른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6 - 5

515

 

 

 

과거의 기억이 오랜만에 들쑤시듯 아프기 시작하지만, 지금은 이대로 멈추거나 뒤로 퇴보하지는 않는다. 잡화점의 주인이 된지 1년이 되고 더 넘었을 무렵에, 사람은 한눈에 달라질 정도로 성장을 하게 되니까. 하지만, 매번 성장을 해도 시련은 있으니...

 

“이거 먹어봐 신랑!”

 

“어째서 루시피나까지 여우무녀로 폴리모프를...”

 

드래곤이면서 머리 위에 여우귀가 있는 수인으로 폴리모프 했으니, 한숨이 자동적으로 생산되고 있는데, 5초당 한번씩 땅이 꺼질듯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환영술사가 기초적으로 사용하는 일루전과 지금 루시피나가 사용한 폴리모프는 다른데, 일루전은 그저 눈을 속이기 위한 것뿐이고, 폴리모프는 몸이 변형하는 것이 기초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루시피나는 왜 이곳에서 여우무녀로?”

 

“그야. 신랑을 노리고 있는 여우들이 많은 걸. 게다가 여우신사는 여우무녀들이 신랑에게 봉사를 할 권한이 있다고 해. 아랑의 손님으로 이곳에 머물고 있으니까. 그 과정에서 이상한 도둑고양이에게 빼앗기면 어떻게 해?”

 

그거 레시아가 들으라고 한 소리인가?

게다가 여우는 고양이과가 아니라 개과인데...

 

“제 잡화점은 누가 지키고 있어요?”

 

“아리엘이 하겠다고 했어.”

 

오늘 저녁은 유부를 넣은 우동인가. 그 외에는 유부 안에 밥을 넣었다거나, 유부 케이크라던가, 물고기를 유부 속에 넣는 요리, 유부가 들어간 육회, 유부 전골, 유부...

 

“유부가 너무 많아! 물컵에 안에 들어있는 것도 유부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유부가 들어가서 무시무시했으나, 다른 여우무녀들은 잘 먹기만 했고 내 앞에 있던 루비아도 싫은 기색 없이 입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이 기름진 것을 다 먹고 죽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인데, 내가 아랑에게 따지기도 전에 작은 몸짓으로 찾아온 아랑은 입을 열었다.

 

“그런가? 유부가 너무 많으면 내가 직접 덜어가겠다!”

 

“제가 말한 뜻은 양이 너무 많아서 다 못 먹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어째서 식단이 유부밖에 없는지 그 이유부터 설명하라고요! 애초에 여우는 유부만 먹는 이상한 동물이 아니란 말이에요!”

 

여우는 포식자다.

사냥을 해서 먹는 것이 기초라고 한다면, 유부 말고 다른 종류의 음식이 있지 않을까?

그보다 누가 생크림 케이크 위에 유부를 올려놓은 거야?

 

“루시피나는 잘도 먹네요. 여우수인으로 바뀌어서 그런 건가요?”

 

“그래도 유부는 맛있어. 적어도 루니아 언니의 무지개 음식을 먹는 것보단 좋지 않을까?”

 

극단적인 상황을 비추어봤을 때, 루니아 누나의 요리를 먹는 것보단 좋지만, 모든 식단에 유부의 비율이 80%가 넘어가는 이곳도 어떻게 보면 지옥이 아닐까?

 

“그보다 유부도 분명 기름으로 튀긴 거니까 살이 찔 것 같은데, 모두다 말라 보이네요?”

 

“그거야 축복을 받기 때문이지! 이 몸의 축복을 받는다면 카일에게도 여우정령과 함께 살아가면서, 수많은 유부요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노라!”

 

“조만간 여우신령이 아니라, 유부신령으로 바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린아이에게 들러붙었더니 정신마저 어린아이가 되었나?

 

“가을이라고 해도 밤은 역시 쌀쌀하니까, 목걸이에 있는 봉인을 빨리 풀어줬으면 좋겠는데요?”

 

“좀 기다리거라.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선 적절한 시기가 있노라. 그건 그렇고 이 몸을 가둔 엘티노스를 직접 풀어주게 되다니 꿈에도 몰랐다.”

 

여전히 어린아이라서 성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을 무렵. 아랑은 루시피나의 무릎 위에 거침없이 앉고, 작은 손으로 내 귀를 잡아 당겨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그보다 어째서 루비아와 사이가 좋지 않는가? 아까 전에도 잠깐이나마 카일의 인상이 좋지 않았는데, 루비아의 성격이 원래 무뚝뚝하지만, 카일을 대할 때는 더 차갑게만 느껴진다.”

 

“그야. 신인류 때. 마주했던 적이었으니까요. 게다가 다른 루비아 씨는 이미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죽었을 때를 기억하는 건 한 사람뿐이에요.”

 

“그런가? 흐음.”

 

그러고는 루시피나의 몸에 등을 기대며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는 아랑. 루시피나는 붙임성이 좋게 아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고 있을 때. 저 구석에서 혼자 유부시리즈를 먹고 있었던 루비아는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은 다 끝난 일인데, 내가 민감하게 반응을 해서 멋대로 상처를 준 건가? 하지만 과거의 상처를 쑤시는 얼굴을 보니 본의 아니게 예민해졌다. 지금은 300년이 더 지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말끔하게 다 잊고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람의 기억은 매개체가 아주 사소하더라도 쉽게 떠올리곤 한다.

 

속이 불편한 가운데에서도 바람을 쐬러 나갔을 때, 저 멀리서 말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번에는 달까지 가려고 세린에게 좌표를 물어봤지만, 사키엘의 문이 통하지 않더라고, 결국 그 좌표까지 날아가기 위해 잡화점을 로켓으로 쏘아 올려버렸지.”

 

산이라서 짙은 어둠이 깔렸지만, 말소리만으로 레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저 앞에는 루비아가 무표정으로 레인의 말을 경청하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가만히 앉아있는 여성은 멍하니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어도, 어떻게든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기 위해 다양한 화제로 이야기하며 노력하는 레인의 처량한 모습이, 어느 사이에 달빛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인이 루비아에게 관심이 있다기보단, 레인의 머리 속에는 뭔가 흥을 주체할 수 없어, 매우 긍정적이라서 언젠가 루비아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 하나보다. 나쁘게 말하면 파리처럼 귀찮게 구는 존재라고 폄하할 수도 있는데, 내가 보기엔 긍정적인 사고방식에 흥을 주체할 수 없어 폭주한 것으로 생각해야지.

 

“카일 씨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냐. 의외로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고? 물론 언제나 신중하게 나아가라고 설교하는 게 좀 짜증나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사람이 얼마나 불안정하게 살았길래 이 성격이 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어?”

 

레인에게 충고는 다 쓸모 없던 걸로 봐야겠군.

루비아는 내 이름이 레인으로부터 발설하자마자 몸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 이름이 바퀴벌레보다 더 싫은 기분이겠지. 한숨을 내쉰 레인의 가면은 이윽고 나를 바라보았다.

 

“여자를 꼬시려면 싫어하는 주제를 내세우면 안 되지.”

 

“이게 다 아저씨 때문에 망한 거잖아요.”

 

내가 말하긴 뭐하지만 연애에 대해 기초적인 정보를 알려줬을 무렵. 레인은 한숨을 내쉬며 나 때문에 망했다고 대답하고 걸어왔다. 레인의 생각이 무엇인지 읽을 수는 없지만, 이 녀석은 나와 루비아의 관계를 그나마 해소시켜주려고 노력했으나.

 

잘 안된 모양이다.

 

“아저씨라니. 지금 내 나이는 너와 별로 차이 안나. 동갑일지도 모르고.”

 

“300년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서로 적이 된 거에요?”

 

“신인류라는 조직이 세상을 깽판으로 몰아가고 있을 때, 티르의 연금술로 태어난 호문쿨루스야. 다만, 티르는 달 토끼의 관리자였던 루나 알파와 같이 손을 잡고, 달의 기술력을 지원받았으니 그때 당시에 탄생할 수 있었던 호문쿨루스 중 최상위였겠지.”

 

“호문쿨루스라고요? 인간과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요?”

 

달의 기술력과 티르의 천재적인 연금술은 죽여야지만, 호문쿨루스와 인간을 구분했을 정도로 매우 똑같았다.

 

“루나 알파도 자신의 체세포로 복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성격이나 개성을 부여할 수 있도록 티르에게 지원받았으니, 서로 이득이 될만한 부분은 있었을 거야. 뭐, 그건 둘째치고 지금은 또 다른 루비아 씨가 살아있다는 전제하에, 이 세상에는 호문쿨루스로 이루어진 루비아가 2명.”

 

“2명씩이나 있어요? 그거 정말 신기하네요.”

 

“루니아 누나가 만일 죽은 줄만 알았던 루비아를 만나게 되면...”

 

“하긴...진짜 루비아 씨는...”

 

말을 하다가 끊어버린 이유라면 이 녀석은 내 자서전을 읽었으니, 이브센티아에서 루비아 씨를 내 손으로 직접 죽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죄송해요.”

 

“아냐. 네가 잘못한 게 아니니까 괜찮아.”

 

분명, 그녀 또한 죽어가는 순간에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었지.

과거에 있었던 따듯한 온기가 한 순간에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밤공기는 역시 매우 쌀쌀하네. 이곳에 가만히 있으니 따듯한 바람이 분다고 착각까지 할 줄은.”

 

“저처럼 두껍게 입지 않으면 춥다고요?”

 

내가 일어나는 동안에도 자신의 옷을 자랑하고 있던 레인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너처럼 옷을 입으면 낮에 쓰러져.”

 

“달 토끼들이 많이 건강한 거라고요! 그래도 오빠라고 부르면서 나에게 응석부릴 때는 정말 귀여웠는데!”

 

나를 따라 여우신사로 되돌아가고 있는 레인은 수다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시끄럽다고 생각은 해도, 내가 입을 닫으라고 해서 닫을 녀석은 아니니 방치를 해두자.

 

“신랑! 어서 와!”

 

“씻으러 가나 보네요. 그런데 왜 제 옷까지 챙겨놓고 있는 거에요?”

 

“이곳은 혼욕이 가능하다고 하거든!”

 

“아하! 그렇...잠깐만? 뭐요?”

 

원래 남탕과 여탕이 따로 있는 거 아니었어?

 

“이곳에는 여우무녀들밖에 없으니까, 따로 남탕이나 여탕의 개념이 없어. 그러니 신랑과 같이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지.”

 

오늘따라 루시피나의 웃는 얼굴이 매우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서웠다.

같이 따라가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늘 저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아악!”

 

“아랑도 신랑의 몸을 청결하게 해야 의식이 잘 된다고 했단 말이야! 빨리! 목욕탕으로! 등은 내가 밀어줄 테니까!”

 

“끌고 가지 마요! 무엇보다 팔을 꺾으면서 가지마! 이렇게 가니까 체포를 당한 기분이잖아요!”

 

“부부인데 언제까지 부끄러워할 거야! 빨리 가자!”

 

목욕탕이라고 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대중목욕탕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온도계로 보이는 기계들이 붉은 불빛으로 40도를 표시하고 있는 곳에, 레인은 편하게 앉아서 떠들고 있었고, 여우무녀들은 커다란 수건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면서 레인의 수다를 듣고 있었으니. 여기가 목욕탕인지 스탠드 업 코미디를 하러 온 장소인지 분간이 안 갈정도로, 물 위에 있는 거품마냥 분위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번에는 내가 어린애를 지키기 위해서, 그 어린애가 들고 있던 요술봉을 휘둘러서 괴한으로부터 지켰거든, 그 괴한은 마법중년이 되어서 내가 건 마법을 풀기 위해, 지금도 날 찾고 있다고 해. 마초맨이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나를 찾고 있는 건 좀 끔찍하지만, 내 능력은 다양할 정도로 많지.”

 

“한 사람의 인생을 획기적으로 망쳐버리는구나. 너는.”

 

“어라? 샤이<Shy>보이? 여기까진 무슨 일이에요?”

 

“닥쳐!”

 

입으로 레인에게 치명타를 맞기 전에 소리쳤지만, 레인이 내가 몸에 담고 있는 39도 탕에 들어오자마자, 여우무녀들이 모두 이동하려는 듯 어마어마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네가 이곳으로 오면 저분들이 전부 내 쪽으로 오잖아?”

 

“괜찮아요. 혼욕이라고 해서 부끄러워하면 그게 더 실례라고요.”

 

“너는 남자인데 수치가 없는 거냐. 아니면 무성애자인 거냐?”

 

레인이 고민할 무렵 주위에서는 여우무녀들이 근처에 모두 도착을 했는지, 일시적으로 수위가 높아지면서 대량의 물이 밖으로 넘쳐흘러 바닥을 세차게 때렸다.

 

“음?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어차피 친해지고 웃고 들뜨게 되면 그게 혼욕이든 누드던 무슨 상관이겠어요? 서로 친구로 보는 시각일 뿐인데? 게다가 남녀 평등하게 커다란 수건으로 옷을 입은 듯이 가렸으니, 별 문제는 없을 거 같아요.”

 

“문제는 많아! 남녀관계에 영원한 친구가 있을까 보냐!”

 

“그래도 여긴 혼욕탕이니 상관 없어요.”

 

“상관 많아!”

 

조만간 경찰이 레인을 잡아가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걱정할 입장은 아닌가?

=============================================================================================

일어나자마자 글 쓰는 것은 공복도 잊게 만드네요.

글쓰기 다이어트라던가 그런것도 생기지 않을까요?

[물론 저는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지만...]

글 이어보기

시간을 되돌려, 그에게로

#2. 시간을 되돌려, 그에게로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고있자니 감성에 젖었나보다.  
'생각하면 뭐해...'
추석연휴라 주위는 시끌벅적하지만 비오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앉아있자니 너무 청승맞은것같기도하다.

"언니!! 안어울리게 똥폼잡지말고 와서 저녁먹어! 어휴. 비오는데 뭔 청승이야~"

내 친동생 은혜.  여자얘가 엄청 괄괄하다.

"간다..간다고."

동생은 밥을 먹으면서도 내게 잔소리이다.

"나 이번 주말에 친구들이랑 남이섬 간다!
언니도 집안에만 있지말고 밖에 좀 돌아다녀~  운동도 배우고."

어휴. 뭔 애늙은이도 아니고 뭔 잔소리가 부모님 보다 더해.
그 말에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있다보니 벌써 
자야 될 시간.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니 또 다시 그 사람 생각이 난다.  

"나도 미쳤지... 왜 자꾸 생각이 나냐고.
그래도말이야. 그 때 까페에서 그 친구놈한테 화를 냈어야했는데.  왜 아무말도 못했지...
아니 그리고 그자식은 친구놈이 내 욕을 하는데 왜 가만히 있어!!  이놈이나 저놈이나... 남자놈들이란."

'우르릉 쾅'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문 닫고 잠이나 자자.  그래도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남자를 처음 만난 날로 되돌아가고싶어.  그럴리는 없겠지만."

'우르릉 쾅쾅!!  멍! 으르르~멍멍!'

다시 천둥이 치고 동네 개들은 뭐때문인지 미친듯이 짖어댄다.  닫쳤던 창문은 아무도 없는데 혼자 열리고 율이 옆으로 그림자가 비친다.  검은 고양이였다.

'사람의 인생엔 기회가 세번 주어진다.  돌아간다면 이번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그에게 사랑을 가르쳐주렴.  그리고 이번엔 꼭 행복하길...'

그녀의 방이 하얗게 물들고 간 자리에 그녀는 없었다.
고양이는 그녀가 잠들어 있었던 자리를 한참동안 애절하게 쳐다보더니 다시 창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날은 벌써 맑게 개인 후였다.

"...유..ㄹ..야..ㅇ.."

'이게 뭔소리지..?'

포근하다.  포근한 무언가에 둘러쌓인 느낌.  그리고 이 멍한 느낌은 뭐지?

"은율 양!!"

으앗!  깜짝이야!  누구야?  이른 아침부터.

"네...네?"

깜짝놀라 일어나보니 대학 강의실.
2년 전 잘난척만 해대면서 나만 괴롭히는 문화콘텐츠과목의 교수님이 날 노려보며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다.

"지금 뭐하는 건가요? 율 양은 내 수업이 침흘리며 담요까지 덮어서 잘 만큼 쓸데없다고 생각하나요?  아~ 예습을 철저히 해서 다 아는부분인가보군요! 좋아요.  그럼 율 양이 한번 발표해보세요.  우리나라 문화콘텐츠를 산업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말입니다. 그리고 무슨 콘텐츠로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할 방안도 발표해보세요.  다 아는 부분이니 쉽게 설명할 수 있겠죠?"

이게..이게 뭔 상황이지?  내가 왜 여기있는거야!!

학생들은 나를  바라보며 안쓰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난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이 시간이 백 년같이 느껴졌다.

"뭐하는거죠?  빨리 나와 발표하세요!!"

저 악독한 여자같으니. 뭐 저리 독하게 사나. 
저러니 아직 애인이 없지.

답을 생각하며 교수님 욕을 속으로 실컷 할 때 엘리제를 위하여의 곡이 나오며 수업이 끝났다.  

교수님은 얼굴이 벌게지더니 무척 억울해하셨다.

"다음시간까지 답 생각해서 발표하세요!!"

하지만 교수님은  매우 끈질기셨고 난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않았다.

"언니... 어떡해. 분명 그냥 넘어가진 않을거야.  꼬투리잡아서 다시 발표하라고 그럴걸? 그러게 왜 잠들어서... 언니,  엄청 곤하게 자더라.  내가 도와줄까?"

얄미운 후배는 입에서 나온 말과 달리 눈빛은 
 꼬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은 한 쪽이 살짝 올라갔다.

`제대로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착한 척은.`

후배의 도움을 거절하고 스쿨버스를 타러 가는 길.  밖은 눈과 비가 엄청 내리고 바람까지 거세게 불었다.

"우산이 있어도 소용 없겠는데...?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왜이리 날씨가 안좋아?"

"야옹~"

그 때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온 몸이 비에 젖은 채 내 앞에 나타났다.  몹시 애절한 눈빛을 하면서.

"냐~앙"

고양이는 오들오들 떨면서 내 다리에 젖은 얼굴을 비벼댔고 내 바지는 젖어버렸다.

"어휴.  너 때문에 내 바지 다 젖었잖아. 못 보던 고양이인데.  넌 어디서 왔니?"

가방에 있던 담요로 고양이를 감싸주며 스쿨버스를 향해 뛰는 동안 고양이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고양이는 내 품을 파고들며 고롱고롱 잠이들었고 난 비를 쫄닥맞은 채 버스에 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그 남자 처음 만났을 때에도 이렇게 비가 내렸고,  그 살모사교수님이 무척 나에게 화를 내던게  기억나네.
그럼 회귀한건가. 나,..?
그런데 그 땐 고양이는 없었는데...?`

난 자리에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쫄딱 젖은 채로 버스에 타는 학생들을 구경했다.

그 때 두 남학생이 수다를 떨며 나를 향해 벌어왔다.  그와 그의 친구였다.
이번엔 안그럴줄 알았지만 내 눈에는 그의 주위로 후광이 비치는 느낌이 들었다.

`미쳤어...또 이러네. 어떡하지.  날 향해 말을 걸텐데.  저번처럼 맥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예상대로 그는 내 앞에 앉아 나를 불렀고 다짜고짜 핸드폰을 달라고했다.
저번과 달리 난 핸드폰을 순순히 주었고,  그는 자신의 번호를 내 핸드폰에 적더니 전화를 걸은 후 나에게 다시 폰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에 아무 말이 없었다.
매우 당황스러웠다.

`나한테 관심이 있는건가..그러니까 내 번호를 가져가는거겠지..?  근데 이번에도 아무 말을 하질않네...어떡하지.  말을 걸고싶은데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냐앙~?"

그 때 내 무릎 위에 있던 고양이가 갑자기 뛰어올라 그의 옆자리로 안착하더니 그 얘의 다리에 몸을 부비었다.

"고양아!  거기서 그러면 안돼!"

난 당황하여 그의  옆자리로 가 고양이를 데려올려그랬으나 그는 고양이를 끌어안은 채로 날 애절하게 쳐다보았다.
물론 내 느낌 상 그렇게 느낀걸 수도 있지만...

"저기.  제 고양이 돌려주시겠어요?"

그는 나와 고양이를 번갈아보더니 나에게 고양이를 돌려주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고는 또 말이 없이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려댔다.

"고마워요.  근데 저 이름이...?"

긴장한 게 내 목소리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평소와는 다른 얌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내숭을 떨었다.
그는 또 말이 없더니 낮은 목소리로 조용하게.

"...김민혁"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아까보다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신기했다.  나에게 이렇게 순수한 사람이 관심을 가지다니.
그의 목소리가 내 귀로 바람처럼 들어와 웅장하게 연주했다. 마치 이 공간에 그와 나.  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밖은 천둥이 치고 하늘이 무너져버릴 것 같은 날씨였지만 버스 안에서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마치 봄날의 벚꽃잎과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회귀한 후의 나의 행동을 축하해주는 기분이었다. 온 공간이 꽃바다로 보였다. 
아마도 난 죽는순간까지 여기서 있었던 일을 절대 잊지못하리라.

"전 조민율이라고해요. 93년생이구요.  한국어문학과. 민혁씨는요?"

꿈을 꾸는 것 마냥 몽롱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순간이 꿈처럼 느껴졌기때문이다.
전혀 현실로 와닿지않았다.

"...어...95년생이요.  미디어창작과입니다."

그는 긴장했는지 뻣뻣한 자세로 대답는데 그 모습이 곰돌이 푸마냥 귀여워서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난 그의 행동이 마냥 신기하고 좋은 나머지 장난기가 발동했다.
눈웃음을 치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거 알아요?  민혁 씨 눈동자가 엄청 예쁜거. 
이렇게 순수하고 맑은 눈은 처음봐요."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벌게지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당황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난 박장대소를 하고싶었지만 겨우 참아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입매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 때 내가 내릴 장소에 버스가 도착했고 난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도 이 곳에서 내린다는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후 그는 친구들과 함께 돌아갔다.  그는 친구들과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왜인지 또 멍해졌다.  

`야옹~.냐앙~`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고양이가 추위때문에 잠에서 깼는지 내 가슴을  발톱으로 긁으며 울어댔다.

"춥지..?  나도 춥다. 빨리 집에 가자."

"냐아~"

"고양아,  그 남자는 왜 내 번호를 가져갔을까?"

고양이는 내 물음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담요 안에서 담요를 박박 긁었다. 잘 준비를 하려나보다.

"아 맞아.  넌 왜 그 남자한테 뛰어올랐니?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고양이는 순간 멈칫거리는가싶더니 편히 누운 채 눈을 감았다.

"너 내 말 알아들었지?  방금 멈칫거린거 뭐야?"

고양인 자는 척을 하는건지 진짜 자는건지 갸르릉거렸다.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의 잔소리가 걱정이었다.  분명 키우지 말라고 할텐데...

세상 걱정없이 자는 고양이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후...만약 내가 혼난다면 그건 너 때문이야."

뭔가 고양이의 입매 한 쪽이 비스듬하게 올라간 것 같지만 착각이겠지.
문을 열고 당차게 들어갔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부모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키워도 된다 말씀하셨다.
동생은 지금 이 때 쯤이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을 때라 그 얘의 허락은 안받아도 된다.

그날 밤,  고양이는 내 침대에서 같이 잘 수 있었다. 

"고양아, 다음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때처럼?  오늘 언제 만나자고 얘기를 못했어..."

"냐앙~"

마치 고양이가 내 물음에 대답해주는 것 같았지만 내 말을 알아들을리가 없지.

그와의 만남을 생각하며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데 핸드폰에서 카톡소리가 났다.

친하게 지내자는 그의 카톡이었다.

"고양아, 그에게 연락이 왔어!  김민혁 말이야.
뭐라고 답해야 될까?"

고양인 자신의 잠을 깨운 게 못마땅했는지 토라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고양이를 안고 다시 누워 친하게 지내자고 답장을 한 뒤 잠이 들었다.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글 이어보기

시간을 되돌려, 그에게로

#1. 특이한 남자. 그와의 만남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왠지 대학 때의 그가 생각난다.  만약 이 순간 내게 시간을 돌릴 능력이 있다면 그를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가고싶다.
시간을 되돌려 그를 다시 만난다면 그 땐 그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를 처음 만난 건 2년 전 비가 쏟아지는 겨울.  대학 스쿨버스 안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였는데 하늘은 매우 껌껌했고, 비는 앞이 안보일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당시, 난 의자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이어폰에서 나오는 발라드 노래를 들으며 차가 출발하길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친구와 함께 수다를 떨며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난 아무생각 없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마치 그의 뒤에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내 앞자리에 앉아 날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너무 맑고 강렬하여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채로 이 공간 속에  그와 나 둘만 있는듯한 기분이었다.   한눈에 반한다는 것이 이런것일까..? 설렌다는게 이런 것일까..?

난 그동안 사랑을 몰랐고 한눈에 반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내 감정이 한눈어 반해 설레는 감정이라면 난 이 전의 나에게 한눈에 반한다는건 매우 아름다운것이며 절대 어리석은게 아니라고 말해주고싶다.

아무튼, 언제 깨질지 모르던 그 시간이 깨진건 그의 목소리를 들은 직후였다.

"저...핸드폰 좀..."

그는 매우 작은 목소리로 다짜고짜 핸드폰을 달라고 말했다.  난 쉽게 번호를 주고싶지않아 싫다고 말했지만 그는 마음대로 내 핸드폰을 가져가 자신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나에게 호감이 있어 저러는건가 싶어 그가 하는 행동을 모른척했다.
하지만 그 다음 그의 이상한 행동들로 인해 나의 그 아름다웠던 환상이 와장창 깨지고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그는 한동안 날 엄청 애절하게 쳐다보더니 허둥지둥하며 자신의 친구 눈치를 보며 말하길...

"이렇게 하는게 맞아?"

그의 이상행동에 대해 심히 충격을 먹었고 난 의심이 들어 그의 번호를 삭제해버렸다. 자존심이 매우 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그에게  연락이 왔다.  절대 자신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며 단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행동이 맘에 안들었지만 그의 순수하고 맑은 눈망울이 떠올라 친하게 지내자고 말해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는 연락이 없었다.  난 처음엔 신경도 안썼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고 분노가 치올랐다.  그를 만나면 왜 그랬는지 나를 가지고 논 것인지 따져물어야겠디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 그와  세번을 마주쳤지만 그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학교도서관건물1층에서 그와 그의 친구가  앉아있는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그 순간 내가 왜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그를 놓지면 안될 것 같았고 그를 보는 순간 다시 차가웠던 심장이  뜨거워지며 불안해졌던것 같다.
그도 나를 알아봤는지 저 얘 아니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첫번째로 그의 맑은 눈에 사로잡혀 다시 멍해졌고.
두번째로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으며

마지막으로 그의 친구가  하는 말에 충격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는 나를 알아보기 전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통 여자들은 번호를 달라고 그러면 다 순순히 준다고. 
그리고 단지 친하게 지내자는 것 뿐인데 왜그런대?"

기가 막혔다.
  `저런 쓰레기같은 친구자식이 뭐라는거야?`

여자를 쉽게보는 친구놈에게도 화가났고 그것을 그냥 듣고만 있는 그 아이한테도 화가났으며  저런 놈을 생각했다는 나 자신에게 화가 제일 났다.  

`그러니까 저 자식은  친구 말 때문에 나한테 접근한건가?...대체 왜..?
그럼 친하게 지내자는 것도 친구가 시켜서 한 말인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화를 낼 수 없었다.
뭐라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심장을 칼로 후벼파는 것 같은 아픔에 서글퍼졌기 때문이다.
머리가 다른의미로 멍해지고 눈 앞이 하얘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저 수업에 늦은것만 생각하고 싶었고 그들과 말을 섞고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아무말도 못하고 난 그를 지나쳐갔다.

그와 다시 만난 건 4학년 겨울방학이 되기 하루 전,  인문학관 건물 앞에서였다.  그는 전의 그 친구들과 수업을 들으러가는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있었고 난 모든 수업이 끝나 홀가분하게 나오는 길이었다.
그와 난 눈이 마주쳤고 둘 다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나 쳐다봤을까...?  문득 그의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생각났다.  그리고 그 때 왜 아무말도 안했고 도서관 건물에서 친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부르려했다.
하지만 그 순간 과에서 친한 선배가 나를 불렀고, 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그를 다시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분명 알아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날 모른척했다.
왜 그랬을까...?  내심 내가 먼저 그를 알아봐주길 바랬던 걸까?
난 그날 밤 내가 한 행동을 많이 후회했다.  이렇게 계속 후회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를 정말.  정말 다시 만난다면 꼭 아는 체하고 말리라!!
하는 생각과 함께 잠들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건 졸업 후 2년이 지난 오후 어느 까페 안이었다.  난 그 날 친구들과 까페를 어디로 갈까 얘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고 그 까페를 지나갈 때 한 친구가 "저기로 가자!" 하며 우리를 이끌었다.  그 때 이상하게 옆통수가 따가워 돌아보는 순간 창문으로 날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 그와 그의 친구가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있었다.  순간 망설여졌다.  아는척을해야할지 그냥 지나쳐야할지.

 

`물론 전에 아는 체를 하자고 다짐했었지만...`

 

하지만 난 그 까페에 들어갔고 그들은 계속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아는 척은 하자싶어 제일 가까이 있는 그의 친구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근데 친구는...?"

 

솔직히 내가 왜 저런 말을 했나싶다.  친구는이라니 
다행히도 그는 손가락으로 내 번호를 가져갔던 그를 가리켰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시 멍해졌다. 
 진짜 왜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멍함은 내 친구들이 날 부를 때 깨졌다.

 

"율아, 주문안해?"

 

"어...?어.  해야지."

 

난 다시 그를 지나쳐 주문을 한 뒤 그를 다시 모른척했다.

아...왜그랬을까...
하지만 그도 나에게 아무말이 없었고, 모른척한건 그도.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런저런 고민을하며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는데 뒤에서 그의 친구가 나에대해 말하는것이 들렸다.

 

"야!포기해포기해."

 

뭘했다고 포기를 한다는건지.  내가 그 친구놈한테 관심있는것도 아닌데 왜 자기가 더 난리인건지.  그놈은 또 왜 가만히 있는건지.
 당췌 알 수가 없다.
그는 또 그렇게 나를 떠나갔다.  


그 후로 반년이 지났다.  난 지금도 그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만약 내게 시간을 돌릴 능력이 있다면 그를 처음 만났던 때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싶다.
나도 너와 마음이 같다고...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형광등

영의 방에는 스위치를 켜면 두, 세 번 정도 깜빡거리다가 불이 켜지는 형광등이 달려 있었다. 양쪽 끝이 꺼멓게 달아있는 그런. 덕분에 집에 들어갈 때마다 스위치를 누르고 그 자리에 오초에서 십초 정도, 불이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멍하니 서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참을 수 없이 부담스러웠다. 깜빡하고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는 방을 그녀와 문턱에 서서 멍하니 보는 것. 꼼짝 않고 내 손을 잡고 서서 방이 밝아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영.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 오히려 지나치게 실감이 나는 반지하의 나날들. 형광등을 갈아야겠다는 말에 영은 그저 응. 다음에, 했다. 이러다가 언젠가 내가 없는 날 형광등이 나간다면 영은 문턱에 서서 십분이고 이십분이고 멍하니 서 있게 될까. 아니면 더듬이며 나아가 침대에 누워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다시는 눈을 뜨지 않게 될까. 영은 무기력한 사람이었다. 제 속에 필라멘트를 까맣게 태워 하루하루를 겨우 밝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종종 그녀의 손가락 끝을 만지면서 형광등처럼 꺼멓게 달아있는 부분이 없는지를 살폈다. 그럴 때면 영은 꼭 스위치를 켰을 때처럼 껌뻑, 껌뻑하고 그 큰 눈을 두, 세 번 감았다, 뜨곤 하는 것이다.

 

불이 나갔어요. 영이 플랑을 포크로 자르면서 말했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불’이 깜빡이던 형광등을 뜻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그만큼 영의 말투는 담담하고 갑작스러웠다. 꼭 ‘플랑이 부드러워요.’라고 말하는 것 같이 자연스럽게, 그녀는 방의 불이 나갔음을 내게 말하고 있었다. 언제요? 내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영의 집에 간 것이 일주일 전이었으니, 어쩌면 그날을 마지막으로 불을 켜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삼 일 전에요. 영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삼 일.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시간이었다.

 

형광등을 사가지고 집에 가는 동안에도 영은 포장해온 원두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끝이 반질반질해진다. 영은 생 원두에서 나는 비린내를 아무렇지 않게 맡았다. 그녀를 만나면서 가장 놀란 것 중에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고민 없이 생 원두를 씹어 먹는 버릇을 꼽을 것이다. 오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반질거리는 손가락을 입술에 물고 있는 영을 본다.

 

집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일주일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일주일 전에 빼놓았던 거실 의자나, 열려있는 찬장, 내가 해 놓고 간 설거지 같은 것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뜻이다. 영은 거실 불도 켜지 않은 채로 들어가 찬장에 원두를 정리했다. 그녀가 원두를 정리하는 동안 나는 형광등을 간다. 끝이 달아버린 형광등에서 어쩐지 원두 탄내 비슷한 것이 난다. 착각이겠지. 굳이 코를 갖다 대고서 냄새를 맡는 짓은 하지 않았다. 스위치를 켠다. 형광등을 갈았음에도 두, 세 번 깜빡이다가 불이 켜지는 오랜 버릇은 고쳐지지 않는다. 문턱에 서서 오드득 소리를 내고 있는 영을 본다. 어쩌면 그녀의 손끝이 반질반질하거나, 늘 꺼질 듯이 무기력한 것에 별다른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가라앉음에 무거운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드득. 문턱으로 걸어오는 영의 왼손이 꼭 무언가를 쥔 것처럼 오므려져 있다. 아마도 원두가 들어있을 것이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6 - 4

514

 

 

 

콘크리트가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창궐하기 시작하니, 숲보다 더 복잡한 경로 때문에 레인을 찾기가 어려울지 몰라도, 루시피나가 비행마법<Fly>을 사용하며 목적지까지 대려다 줄 수 있지만, 아직까지 달 기지에서 들려오는 무전은 없었다. 주변에 있는 건물들을 둘러보면, 자세히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다른 건물들이 들어와있는 복합구조였지만, 지금은 이 복합구조에 뭐가 있는지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어쩔 수 없나.”

 

엘티노스 잡화점의 주인들은 특수한 기류나 그런 거라도 없는 걸까? 그것만 찾을 수 있으면 가장 쉽게 찾아낼 수 있을 텐데. 레인도 세린에 의해 선택을 받았다면, 나보다 세린과 가장 친하게 지낸다고 했을 때.

 

“마법사 출신인 나와는 다르게 신체 강화에만 사용하고 있겠지. 그래도 힘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 흔적만 따라가면 어느 정도까지 추적할 수 있다.

 

“수고를 너무 많이 들게 하고 있잖아. 적어도 무슨 흔적이라도 남겨놔야...”

 

흔적?

 

“신랑? 왜 그래?”

 

옆에서 같이 손을 잡고 날고 있던 루시피나의 목소리가 내 머리를 깨우기 시작했다. 걱정스레 보는 눈을 하고 있지만, 내가 목소리에 반응을 하니 그나마 안심이 되는지, 평소의 얼굴과는 약간 비슷했다.

 

“달 토끼들의 노래는 콘서트 장에도 몇 번 와봤죠?”

 

“맞아. 정말 좋은 노래였지.”

 

그때 회상을 한 것일까? 감미로운 과거의 음색을 기억했는지 웃음을 띠며 말하는 루시피나의 증언을 빌려서 가설을 세웠다.

 

“레인이나 세린이 달 토끼의 습성을 잘 안다면, 노래를 먼저 부르고 갔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납치라는 것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입을 막지 않을까?”

 

당연히 납치의 정석이라면 대상을 무력화하고,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편이 대다수다. 그래도 레인이라면 그 틈을 뚫고 흔적을 남기기 위해 무언가 조치를 취했겠지.

 

“지금 근처에서 노래가 들린다면 그쪽으로 가주세요.”

 

“알았어!”

 

거침없이 빌딩 사이의 강풍을 가로지르며 주위를 날고 있지만, 10분째 비행을 하고 있을 무렵.

 

“찾았어! 이쪽이야!”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돌면서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번화가와는 다른 한적한 시골농가로...

 

“잠깐? 루시피나! 속도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콰지직이라는 소리가 내 머리에 나지 않길 빌며, 어지러움을 무릅쓰고 물속인지 늪지대인지 분간이 안가는 곳에서 일어났다.

 

“신랑! 미안해! 오랜만에 신랑과 같이 날아서 그런지 긴장했거든...”

 

볼을 붉히면서 양쪽 검지 손가락을 빙글 빙글 돌려 부끄러워하고 있지만, 그 동작을 사용할 때는 고백이나 다른

 

“다음부터는 착지를 할 수 있을 만한 속도로 줄여달라고요. 그런데 여기는 농가 아니에요?”

 

300년이 지나도 이런 장소가 있구나. 그보다...

어이 카일. 독백을 모두 끝내고 따지라고...

 

“어라? 카일 씨? 왜 이곳에 있나요?”

 

나를 주위에서 맞이한 것은 한눈에 날 알아본 달 토끼. 그리고 그 주변엔 수 많은 달 토끼와 사람들이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러자 가운데에 있던 달 토끼가 입을 열기를...

 

“아무래도 이 사람들은 하늘에서 사람 떨어지는 게 신기한 모양이네요?”

 

라고 거침없이 손을 내밀었다.

 

“레인.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그야 당연히 농가에 있는 사람들과 놀아주고 있었죠. 그나저나 남자가 여자로 변하니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네요.”

 

“찾을 거면 그냥 찾아도 되지 않아?”

 

“뭐, 그래도 신기한 경험을 하니 괜찮지 않을까요?”

 

달 토끼의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소리에 대해 확실한 진위를 말하자면, 이곳에 있는 모든 달 토끼들은 농가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고, 이 지역이 이상하게도 다른 곳과는 수신이 닿지 않아 감쪽같이 없어진 것처럼 된 것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연약한 달 토끼들은 지상에 내려와서 면역력이 약해죽는 것이 맞지만, 농가에 있던 사람들이 달 토끼들을 도와주는 덕에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말에 따라...

 

“오늘도 개고생을 한 건가.”

 

한숨을 내쉬면서 바닥에 앉아버렸다. 아직까지 진흙이 이곳 저곳에 묻어있어도, 이 상태로 적들의 아지트를 부수러 가는 것보단, 덜 꼴사나운 결말일지도 모르지. 해독약을 삼킨 레인은 본 모습으로 돌아왔고, 언제나 기괴한 검은 코트를 펄럭이면서 달 토끼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어린아이에겐 인기가 맞더군. 그나저나 자네는?”

 

“엘티노스 잡화점의 주인이에요. 저 녀석과 비슷한 직책이죠.”

 

“그런가? 이상하군. 잡화점이 2개라고는 듣지 못했는데? 그러면 이곳에 신령님이신 아랑님을 아시는 건가?”

 

아랑이 아직도 살아있어?

하긴, 신령이니 아직도 살아있는 게 당연하겠지만, 아랑을 따르는 신도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랑은 아직도 존재하던가요?”

 

확실하게 물으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유무를 말해야겠지. 마을에 살고 있는 듯한 아저씨는 “그럼. 이곳을 보호해주고 있단다.”라고 입을 열었다. 아랑이 펼치는 결계가 우연히 이곳을 가리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달 기지에 있는 연락망과는 닿을 수 없었던 건가?

 

하나 둘씩 퍼즐을 풀을 때마다 내 걱정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노력. 그나마 이게 가장 좋은 흐름이라고 해야 하나?

 

“오빠! 오빠! 같이 놀자!”

“좋아! 그럼 저 앞까지 경주다!”

 

어린애와 같이 잘 놀고 있는 레인을 보며, 아랑을 만나기 위해 루시피나의 마법을 빌렸다. 청결해진 몸과 옷으로 신사에 하나씩 하나씩 올라가고 있을 무렵. 그 앞에서 큰 빗자루로 낙엽과 모래를 쓸고 있는 한 여성을 만났다.

 

“아직까지 살아있었나.”

 

저절로 눈이 일그러지게 만드는 존재.

검은 머리를 한 루비아는 내 안에서 가짜의 존재일 뿐.

정확하게 내 앞에 있는 루비아는 신인류를 꿈꿨던 티르의 기술로 만들어진 호문쿨루스.

과거의 적이었던 망령.

 

“당신은...”

 

호문쿨루스는 조정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변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나를 알아본 듯이 입을 열었던 루비아의 말을 틀어 막았던 것은...

 

“어! 카일이지 않는가! 어서 오거라! 여우신사에!”

 

밝은 목소리로 나에게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는 어린아이였다.

 

아랑은 왜 저런 어린아이에게 몸을 빌리고 있는 걸까. 백색의 여우 귀와 뒤에 9개의 꼬리는 확실한 아랑을 뜻했다. 그 주변에도 10명정도의 여성이 여우에게 빙의가 되어있었다.

 

“아랑?”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300년 만인가? 잡화점의 주인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정말인가 보구나!”

 

“완전히 여우신령님이 되셨네요.”

 

“그런데 이곳까지 온 이유라도 있는가?”

 

아랑도 신령이니까 상급신과 동급이니까.

 

“이 목걸이 안에 있는 자를 풀어줬으면 좋겠어요.”

 

“목걸이? 그 목걸이는 신을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품이지 않는가?”

 

한눈에 알아보는 신통함에 마음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어른스럽기 때문에 동요하지 않고 신중하게 아랑의 작은 손바닥 위로 올려놓았다.

 

“음. 이건 누구의 짓인가?”

 

“아마. 레이베리아의 소행이겠죠. 무슨 일인지 몰라도 엘티노스 씨는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그 안에 봉인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해요.”

 

“레이베리아라...그 여신이 일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과한 처사로구나. 오늘밤에 봉인을 해제할 테니, 잡화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그건 왜죠?”

 

가능하다면 가능한 거겠지만, 이곳에 남아야 하는 이유를 질문하기도 전에, 이미 수 차례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그대는 유일하게 인간이면서 창조주의 힘을 품은 자이니까. 그 안에 있는 에너지는 마나가 아니라, 본래 3개의 에너지를 모두 합친 힘이기에, 카일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지?”

 

날카롭게 서있는 여우 눈동자 안에는, 내가 이곳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내가 꼭 필요한 이유라도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우선 그 제안에 승낙을 하고 루시피나에게는 텔레파시로 알려주도록 해야지.

 

“애석하게도 나에게 남아있는 신앙심을 사용하기 싫거니와, 조금이라도 아껴야 부자가 된다는 말을 들었노라.”

 

결국 자기 힘을 쓰기 싫어서 내 힘을 빌리겠다는 소리잖아!

 

“신령이면서 너무 쪼잔한 거 아니에요?”

 

“나의 신앙심은 이곳의 결계를 펼침으로써, 다른 이들의 안정을 도모하고 있는 목적이니라, 그 덕에 이들은 풍족한 도시 생활과는 달리, 이런 소박한 곳에서도 즐기고 살아갈 수 있지. 그러니 신앙심은 꼭 중요한 곳에만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아랑은 작은 몸으로 쏜살같이 달려가서 루비아의 손을 잡고 내 앞으로 끌고 왔다.

 

“이 처자를 보아라! 150년전에 발견한 처자인데 이상하게도 나이를 먹지 않는구나, 따라서 그대에게 양도를 할까 하는데? 어떠한가?”

 

“그건 받아들일 수 없네요.”

 

150년전에 발견했다고 하나, 저 모습을 보아 300년의 시간이 흘렀겠지. 메인터넌스를 한다면 신제품처럼 활발하게 움직일 수도 있지만, 그때 트리니티가 또 다른 간섭을 해서 수상한 짓이라도 벌이다간...

 

“안심하거라. 안에 있는 불순물들은 모두 지웠다. 모두 나의 힘 때문이지!”

 

“신앙심은 중요한 곳에만 사용한다면서요?”

 

“귀엽고 예쁜 처자를 위해 쓰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

 

이 여우신령은 귀엽고 예쁘면 다 좋아하니 어쩔 수 없나? 하지만...내가 이브센티아를 멸망지경까지 만들어놨을 때의 루비아 씨와 너무 똑같잖아. 루니아 누나가 이걸 보면 무슨 말을 할지 가늠이 잡히지 않는다.

 

“어떤가? 루비아도 잡화점의 주인이 마음에 드는가?”

 

내 앞에 있는 루비아는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아랑에게 말했다.

 

“이 남자는...저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제가 따라가도 폐를 끼치는 일만 될 겁니다.”

 

“어라? 카일과 무슨 일이 있었던가? 루비아! 거기 멈추거라!”

 

300년전의 일을 기억하는 거라면 그 가짜가 맞다.

 

내가 루비아를 부정했던 일이라면, 지금 2명의 루비아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전제로 달 기지의 기술로 부활한 루비아와 티르의 연금술로 부활한 루비아가 존재한다. 그러기에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내 입장에서는, 티르의 연금술로 부활한 검은머리의 루비아를 가짜라 칭했지만, 사실 진짜 루비아 씨는 죽고 없으니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달 기지에서 호문쿨루스로 부활한 루비아 씨뿐이었다.

 

“하아...”

 

막막함이 한숨을 일으키는 동안 루시피나는 주변에 있는 무녀들을 보며 대화를 하러 갔고, 레인이 뒤에서 달 토끼들과 같이 뛰어오고 있었다.

 

“허억...! 헉! 정말 어린애들은...크헉! 지치지도 않네!”

“이야! 달리기 1등이다!”

 

 

어린 루나가 깡총깡총 뛰면서 좋아하는 동안, 여우신사의 어마어마한 계단을 전부 밟고 뛰어온 레인은 나사라도 풀렸는지 바닥에 쓰러지며 숨을 골랐다. 그보다 더워 보이는 복장을 한 상태로 이곳에 뛰어올라갔으니 당연히 쓰러지지.

=============================================================================================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의외로 재미있어서 늦었어요.

핳.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씻으면서 생각났어'라고 적으려다가 '씻으며너 생각났어'라고 적고 말았다. 윤은 '참 설레는 오타네' 했고, 나는 그냥 웃었다. 내가 떠올린 것은 샤워기가 쏟아내는 물이 가지는 결에 대해서였다. 윤은 수염에도 결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었다. 오른쪽으로 만지면 부드러운 수염이, 왼쪽으로 만지면 까끌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사방에 있는 결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녀의 와인색 머리칼이 가진 결이나 살갗의 결, 테이블이 가진 결과 말과 말 사이에 존재하는 틈 같은 결들. 어떤 결에는 세월의 흐름 같은 것이 낀다. 때 같은 것이 끼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 같은 것이 낀다. 눈 감고 윤의 지문을 만진다. 30년의 시간 동안 겪어왔을 것들이 지문 사이사이에 있다. 그것은 내가 감히 짐작하기도 힘들 만큼 단단하게 침전해 있었다. 열 개의 손가락은 열 개의 결을 가진다. 누군가를 오래 가리켰을 검지와, 종종 올라갔을 중지와 립밤을 바르던 약지. 누군가를 오래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했을 소지는 각자 겪어온 시간을 역사처럼 새겼다. 내가 적은 지문도 마찬가지였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때 같은 것도, 시간 같은 것도, 그리움이나 사랑, 미련, 삶 같은 것들도 잔뜩 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