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어보기

그림자 사냥꾼

The day-그림자 사냥꾼

나는 창문을 열었다. 오래된 문짝은 단단히 굳어버린 것 같아서, 힘을 주어서 밀어야만 간신히 열렸다. 창문은 활짝 열리지 않았다. 끝까지 열었다면 보였을, 바깥 풍경의 반조차도 되지 않는 면적까지만 밀려나갔다. 나는 그 틈 사이로 푸른 눈을 대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아버지가 우리에게 허용한 자유의 크기였다. 그는 우리를 이곳에 가두어놓고 결코 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저택이 줄지어 선 거리, 즉 내 시선의 앞으로 마차가 천천히 지나갔다. 검은 안개 같은 마부와 까마귀 떼로 이루어진 것 같은 형상의 마차를 끄는 말들이었다. 바퀴가 굴러갔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부는 말할 것도 없고 말들조차 고요했다. 
 나는 직감했다. 마부는 아버지의 하인이고, 저 마차 안에는 아버지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서 곧바로 뛰어갔다. 오래된 서재에는 잡동사니를 포함해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각종 무기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나는 붉은 검을 뽑았다. 익숙한 냉기가 손바닥을 휘감았다. 나는 이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자 했던가? 그리고 아버지는 어떠했던가?
 아버지는 누구든 살해할 수 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죽임당할 수는 없다. 그는 악령을 부리는 흑마법사다. 그의 힘에 대적할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가공할 힘으로 아버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전쟁터에서, 거리에서, 지하 감옥에서, 뒷골목에서.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억겁의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죽여왔다. 살인은 그의 일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하기에 그는 자유로이 쏘다닐 수 있다.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침묵의 인간들이자 그가 방치한 가축이다. 그는 우리를 멋대로 엮어 한 공간에 몰아넣고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우리는 그의 핏줄을 공유하고 있지만, 실상 서로조차 믿지 못한다. 우리를 한 데 묶어주는 것이라고는 어둠 속의 촛불처럼 속수무책으로 떨리는 두려움이라는 감정만이 유일하다.
 나는 어머니에게로, 무력한 짐승과도 같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언가를 말한다거나, 함께 의논을 한다거나 같은 구체적인 의도는 없었다. 그저 막막하고 두려운 심정으로 갔을 따름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없이 묵묵히 숙인 자세로 앉아있었다. 동생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동생은 영원한 침묵 속으로, 아버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지 않는 또다른 세상 속에 잠겨버린지 오래였다. 영원 같은 잠이었다. 유리 자국 같은 깊은 정적이 우리 사이에 번져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의 세번째 층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을 등 뒤에 늘어트린 여자가 그 광경을 보고는 날카로운 홍소를 터뜨린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다. 내 눈으로 그녀의 형상을 본다. 
 내게 말을 거는 유일한 존재라고는 그녀 뿐이다. 살아있는 자들은 내게 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죽은 사람들만이 목소리로 행세한다. 심장이뛰는 자들의 귀에는 닿지 않는 무연한 음성이다. 
"내가 말했지? 내가 말했잖아."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는  그 이전부터 아버지의 출현을 예고한 바 있다. 숲 바깥에서도 막강한 포식자의 악취와 기척을 감지하는 사냥개들처럼, 그녀도 생전의 자신을 살해한 자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그들은 죽은 뒤에도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해칠 수 없다. 복수할 수 있는 힘은 그들에게 없다. 피가 흐르는 자들만이 보복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의 핏줄을 이은 내게 달라붙어, 시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든 언어를 속삭이는 자들은 그들이다. 그들은 내 육체가 시작되는 기억의 첫 단락부터 내 주변을 맴돌아왔다.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자는 그녀가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이 사실에 안도하기도, 절망하기도 한다. 
 나는 그녀를 향해 눈길을 돌린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나와 대화할 유일한 상대이니까. 그녀가 깔깔댄다. "내가 말했지? 내가 말했잖아. 그가 올 거라고. 머지않아 너희 모두를 처단하기 위해 찾아올 거라고!" 
나는 아버지는 일시적인 현상 같은 것이라고, 비록 그의 출현이 재앙이기는 해도 우리는 처단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 
 붉은 머리의 기사는 금색 망토를 휘날리며 바람같은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의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전리품들이 일제히 쩔렁, 짤랑대는 갖가지 소리로 이 웃음에 합류한다.
 "나는 그에게 필요가 없어서 죽임당한거야. 전쟁을 이끄는 일국의 공주의 격에 맞지 않는 최후였지. 우리는 그의 힘을 과소평가했어. 사막의 지배자는 늘 신중해야하지. 나는 날아가지도 꺼지지도 못한 채 늘 그의 핏줄 주변을 배회하며 공허한 말을 읆조리는 망령이 되어버렸어. 내가 말했지? 그가 찾아올 것이라고!"
 그들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기로 결정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러나 유령들은 입을 다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살해한 자의 자손에게 들러붙어, 결코 끝나지 않을 자폐적인 어둠의 기억을 선사한다. 동생은 아버지에게서부터도, 희생자들의 처참하고 생생한 언어로부터 차단된 얼음처럼 깨끗한 세상 속에 갇혀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럴 용기도 없었지만 나는 아버지와 맞서 싸워야 했다. 나는 붉은 검을 살펴보았다. 고대로부터 쌓여온 물건들은, 얼핏 보기에는 잡동사니처럼 보였지만 각자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 때 먼지 속에 잠겨 잠들어 있었다. 그들을 깨운 것은 나였다. 붉은 검. 나는 그렇게 이름 붙였다. 막 흘린 피를 단번에 응고해 보석의 광채를 입힌 듯한, 새빨간 검이었다. 그 검은 아마도 용의 꿈을 꾸고 있을 터였다. 루비같은 붉은 보석으로 뒤덮인 깊은 동굴. 그곳이 숨어 있는, 신조차도 그 손가락을 뻗치지 못할 구름의 산. 나는 검을 만지며 검이 보여주는 기억에 귀기울였다. 난생 처음 마주하는 세상을 탐닉했다. 그것을 배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배움일 것이었다. 끝까지 열리지 않는 창문 바깥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광경들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익숙한 이 세계를 떨치고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거품 같은 꿈들이 인도하는 곳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죽여야 했다. 붉은 검의 눈이 나를 향했다가, 이내 지쳤다는 듯 눈을 감았다. 검은 자르고 베고 썰 데에만 숨을 쉰다. 물건은 제가 만들어진 용도에 따라 쓰여질 때만 살아난다. 나는 위아래로 요동치는 뱃속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온 몸의 장기가 가지 말라고, 허튼 짓하지 말고 익숙하고 안락하고 비참한 세계에서 머무르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애원하고 있었다. 나는 검의 날을 만져보았다. 내 살이 종잇조각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이 세상을 깨뜨릴 수만 있다면, 내 공포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피를 몇 번이고 검의 이빨에 가득 적셔지도록 바칠 용의가 있었다. 
 붉은 머리의 기사가 소리 높여 그를 환영하는 웃음 소리가 귓청을 때린다. 그가 돌아오면, 그녀 역시 죽은 목숨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하는 걸까?  그녀의 두 손목과 목이 마법의 족쇄에 걸려 연기처럼 사라지는 모습이 눈 앞에 선연히 그려졌다. 왜 그녀는 그의 출현을 환영하는 걸까? 
  환영이 아니라 애원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일찍이 그의 출현을 몇 번이고 예고해 온 터였다. 
 까마귀의 날개와 같은, 거대하고 검은 그림자가 우리의 침실 위에 드리워진다. 매캐한 향기와 수많은 사체들이 내뿜는 악취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말발굽 소리는 멈췄고, 그의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종소리가 진공을 흔든다. 그는 악령을 부리는 흑마법사로, 그가 억겁의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왔던 까닭은 오직 이것을 위해서였으니, 나의 유일한 임무는 그에게 맞서는 일이다. 
  내 연푸른 눈, 하늘의 빛깔을 본딴 것 같은 그 눈이 바닥을 향해 흐르다가 이내 천장을 따라 급격히 치솟아 올라갔다. 어머니는 어깨를 움츠리고 무력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든다. 붉은 머리의 기사가 붉은 입술을 열어 광적인 웃음을 폭발시킨다. 
  "내가 말했지? 그가 온다고, 그가 찾아온다고!"
 

글 이어보기

여름밤

여름밤 #4

세 시가 되었을 무렵 D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사에게 불려갔다 왔는데도 그녀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건지 겉으로만 그런척 하는건지 Y는 D의 머리속이 궁금했다. D는 어젯밤에 지방에 내려가서 늦게 출근했다고 했는데 말도 안되는 핑계였다. 이사도 그 말을 믿지는 않을 터였다. K차장은 D를 아주 못마땅해했다. D때문에 이사가 자신을 더 못살게 군다고 생각했다. 팀 회의를 할 때면 K차장은 팀원들에게 자신이 이사에게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지 토로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다. 오늘도 야근을 예약해 놓은거나 다름없었다. Y는 애써 마음을 비우려고 했다. 신경쓰지 않고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P에게 짜증내는 K차장의 목소리와 D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보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Y는 자신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빨갛게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J가 Y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물을 봐달라고 메세지를 보냈다. Y는 J의 자리로 갔다. 모니터를 보고 Y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J를 한 번 쳐다봤을 뿐이었다. J는 벤치마킹한 디자인을 섞어 놓고는 어떻냐는 표정으로 Y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J에게 Y는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J는 평소에도 연봉이 높은 포지션에 대해 묻고는 했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적은 듯 보였다.

"팀장님께 보여드려 봐."

Y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J는 디자인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여섯 시가 다 되어가자 L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L은 어김없이 자신의 저녁 약속에 대해 떠들어댔다. 오늘 업무가 끝난 사람들은 자리를 정리하며 퇴근 준비를 했다. Y와 P는 저녁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K차장과 D도 뒤따라 나왔다. 정말이지 눈치마저도 없었다. 네 사람은 시간을 아끼려고 회사 앞에 있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네 사람은 아무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음식이 나오자 모두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했다. Y와 P는 가끔씩 눈을 마주쳤는데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J는 퇴근한 뒤였다. F차장은 다이어트 중으로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 몇 개월이 지나도록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사는 거래처 사람과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인상을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 언제 불똥이 튈 지 몰랐다. D는 작업한 파일을 보내줄 수 있냐고 Y에게 물었다. Y는 용량이 커서 전송이 안된다고 대답했다. D는 다른 사람에게 매번 도움을 얻어 일을 했다. Y도 몇 번 일을 알려주고는 했는데 그 후로 신입인 J보다 더 많이 물어와 일에 집중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D가 남자 직원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누구나 자기만의 생존 방식이 있는 법이었다. 이사는 출근과 퇴근을 모두 늦게 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기 전에는 집에 가지 않았다. 이사의 통화가 끝나자 사무실 안은 조용해졌다. 회사에는 Y의 팀을 비롯해 몇몇 사람만 남아있었다. Y는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Y는 파스가 붙여진 시큰거리는 손목을 내려다보다 휴대폰 배경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붉은색 지붕의 낡은 건물들이 바다를 향해 서 있고 석양에 황금빛으로 물든 모래사장을 Y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지중해는 Y의 오랜 갈망이었다. 어릴적 지중해 연안의 작은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본 후로 그곳은 Y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거리가 펼쳐졌고 그곳을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다. 거머리같은 더위와 코미디 영화에 출연해도 될 우스꽝스러운 회사 사람들과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을 견뎌야만 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17세기 풍의 오래된 집의 테라스에서 지중해를 내려다 보기 위해서였다. 사시사철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 터키 블루색 같은 잔잔한 물결의 지중해,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깨끗한 공기, 눈 인사와 정감어린 미소,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제철 재료로 만든 건강한 음식, 느긋한 아침 시간과 저녁 식사 후 산책. 크게 바라는 것은 없었다. 죽어있는 감각을 깨우고 하루에 한 번 크게 웃고 죄책감없이 게을러지고 싶었다.

 

Y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색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하철 안에는 긴 하루의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있었다. Y의 맞은편에는 얼굴이 붉은 중년 남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앉아 있었고 Y의 옆에는 앳되 보이는 얼굴의 커플이 속닥거리며 킥킥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Y는 출퇴근 시간에 휴대폰을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안그래도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혹사시키고 있는 터에 조그만 기계에 내 시간을 전부 쓰고 싶지는 않았다. Y는 눈을 감았다. 잠시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없는 상태로 있고 싶었다. 지하철은 익숙한 이름의 정거장을 거치고 또 거치고 거쳐 Y의 동네에 Y를 내려놓고 빠르게 사라졌다. Y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다시한번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눅눅한 습기가 Y의 얼굴로 덮쳐왔다. 역 주변 상점 앞에는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가진 듯 보이는 남자 몇몇이 모여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Y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Y가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가 멀뚱히 Y 뒤에 서 있었다. Y는 앞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 빠른 속도로 걸었다. 뒤의 남자가 말을 붙여왔다.

"저기요, 어디가세요?"

Y는 대꾸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역 앞에서 술에 취해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인 것 같았다. 남자는 계속 뒤따라 왔다. 심장이 빨리 뛰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큰 길이 끝나면 집까지 가는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았고 어두웠다. Y는 룸메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룸메이트는 집에 있었다. 룸메이트는 자신이 나갈테니 큰 길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큰 길이 끝나는 지점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Y가 그들에게 가까이 걸어가자 뒤따라 오던 남자는 그제서야 몸을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 갔다. 룸메이트가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Y도 룸메이트에게 뛰어갔다.

"괜찮아? 어디 있어, 그자식!"

"사람들이 있는 거 보고 돌아갔어, 미친놈."

Y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그런 행동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공포감을 주는지 남자들은 모를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힘들게 일하고 집에 오는 길에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Y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바짝 서고 두려움이 엄습했었다.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흥분하며 얘기하자 지나가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Y와 룸메이트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집을 향해 걸었다. 룸메이트는 Y의 가방을 대신 들고 Y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두 사람 앞에 개 두 마리를 데리고 한밤의 산책을 하는 사람이 보였다. 개들은 밖으로 나온 것에 신이 났는지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땅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그러다 Y와 룸메이트를 발견하고는 컹컹대며 짖었다. 두 사람은 순간 소리를 지르며 냅다 집으로 뛰었다. 주인이 목줄을 끌어당기며 개들을 진정시켰다. Y와 룸메이트는 집 앞에서 숨을 고르다 무심코 검은 하늘에 떠있는 달을 올려다 보았다. 달은 건물 꼭대기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듯 했다.

"달 봐봐."

야근으로 밤 늦게 들어오면서 달을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떨구고 지친 몸을 이끌며 똑같은 길을 걸었을 뿐이었다. 달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다. 방금 전 겪었던 불쾌한 기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공기는 여전히 옆에 있었지만 달빛은 그들을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붙잡아 두었다. 여름밤이었다.

“화장실 고쳐놨어."

룸메이트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Y는 룸메이트의 어깨를 툭 치며 피식하고 웃었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목 뒤로 머리카락이 쩍쩍 달라붙었다. 서울은 20일째 열대야가 지속되고 있었다. 오늘도 달빛 아래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 같았다.

글 이어보기

여름밤

여름밤 #3

점심 시간을 한 시간 남겨두고 이사가 출근을 했다. 이사는 사십대 초반의 청순한 외모의 소유자로 나이보다 몇 살은 어려보였다. 그러나 Y는 이사가 의학의 도움을 정기적으로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깨끗한 인상과는 달리 굉장히 지저분한 사람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갑자기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코를 막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사는 Y 뒷자리에 앉았는데 점심을 먹고 들어오면 소화가 되지 않는다며 방귀와 트림을 번갈아 가며 했다. 또 결코 책상을 정리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책상에는 먹다 남은 샌드위치, 일회용 커피컵, 코 푼 휴지가 굴러다녔다. 목소리는 어찌나 큰 지 누구를 부를 때나 업무 지시를 할 때에는 귀가 먹먹하다 못해 아플 정도였다. 일을 마음에 들게 하면 대우해줬고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즉시 눈 밖에 났다. 애연가였고 냄새를 없애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향수를 뿌렸는데 오히려 더 역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사는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마다 항상 L을 데리고 다녔는데 L은 이사의 오른팔로서 아부로 살아남는 종족이었다. L의 아부는 독보적이었는데 이사 앞에서 허리를 펴는 날이 없었다. 이사의 말이라면 모두 맞장구쳤고 자신의 생각은 집에 놔두고 온 듯 했다. L은 소위 월급 도둑이었다. 중요한 업무는 요리조리 피하고 간단한 일만 맡아서 하는데도 어찌나 생색을 내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회사 일은 L이 다 하는 줄로 생각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듣도록 자신이 일을 한다는 티를 팍팍 냈다. 업무가 많아 야근하는 동료들과 달리 L이 근무 시간 이후에 회사에 남아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사를 등에 업은 L에게 F팀장도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L이 회사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일은 이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입발린 말을 할 수 있는지 타고난 재능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덧 시곗바늘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Y와 P 그리고 J는 도시락을 들고 휴게실로 갔다. J는 입사한지 몇 개월 밖에 안된 이십대 후반의 신입 직원이었는데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다. Y는 처음 얼마간은 그의 불평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신입 직원의 고충이라고 이해하며 듣기에는 정도가 지나쳤다. 그의 불평은 점심 시간 내내 지속되었고 Y와 P는 꼼짝 않고 그 불평을 들어야만 했다. 하나 더 참을 수 없는게 있었는데 그것은 J의 입냄새였다. J는 양치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J가 옆에 앉아 얘기할 때면 Y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날도 J의 불평이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포착한 Y가 P에게 먼저 말을 던졌다.

“우리 점심 먹고 마트나 갈까?"

"좋아, 좋아. 내가 봐놓은게 있거든."

P는 신이나서 사고 싶은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먹거리에 관한 정보는 줄줄 꿰고 있었다. P는 어디에서 무엇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지 Y에게 알려주고는 했다. 그 정보는 유용할 때도 있었지만 Y는 P만큼 물건을 많이 사서 쟁여 놓는 경우는 없었기에 이용할 일이 없었다. J는 웬일인지 P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오늘은 J의 불평을 듣지 않고 여유롭게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D대리님 말이에요, 어떻게 된 걸까요?"

J가 못참겠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글쎄, 오후에 출근하겠지."

Y가 짧게 대답했다.

“대표님이 이사님한테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출근할 때 역 근처에서 D대리가 돌아다니는 걸 몇 번 봤대요."

J가 계속 말하자 Y와 P는 동시에 몸을 뒤로 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Y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D는 자리를 한참동안 비울 때가 많았다. 언젠가 어떤 직원이 D가 비상구 계단에 앉아 자고 있는 걸 봤다고도 했었다.

"진짜? 대표님 점심 시간 다 되서 출근하시잖아. 그 시간에 거기서 뭘 하는 거지?"

P가 바나나를 Y와 J에게 주며 말했다. 그녀는 항상 넘치게 먹을 것을 갖고 왔기에 사람들에게 잘 나눠줬다. Y는 바나나 껍질을 벗기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P와 J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Y를 바라보았다. 11시가 넘은 시간에 역 주변을 배회하는 D와 그녀를 목격한 대표님을 상상하니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D에 대해서는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항상 얘깃거리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점심 시간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오후 시간은 고되었다. 눈알은 빠질 듯 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귀의 통증이 며칠간 계속되고 있었다. 어지럼증은 사회 생활을 하며 얻은 단짝 친구였다. 손목이 시큰거렸다. 고질적인 직업병이었다. Y는 서랍에서 파스를 꺼내 손목에 붙이고 모니터에 다시 눈을 고정했다. 이사는 K차장을 불러다 한참이나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Y의 귀가 더욱 욱씬거렸다. K차장은 사십대 초반으로 이사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그는 중간 관리자로서의 업무 조율 역할을 잘 하지 못했고 책임을 지기 싫어했으며 이사 눈치 보기에만 급급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같은 팀인 Y와 P에게 풀었고 Y와 P의 업무량은 갈수록 늘어났다. K차창은 이사에게 잔소리를 듣기 싫어 자주 야근을 강요했다. 그러나 야근을 한다고 해서 이사가 K차장을 좋게 볼 일은 만무했다. K차장은 뭐가 문제인지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 것 같았다.

 

Y는 업무 얘기를 하기 위해 H과장을 찾았다. H과장은 100kg가 넘는 육중한 몸의 소유자였는데 대표와 이사의 눈을 피해 맨 뒤 자신의 자리에서 자주 낮잠을 잤다. 그는 자다가 일어나 당이 떨어진다며 편의점에서 초코 과자들을 잔뜩 사와 순식간에 해치웠고 휴게실에서 몰래 잠을 자기도 했다. 지각을 밥먹듯이 하면서 집에서 회사까지 멀다며 항상 우는 소리를 했고 땀을 비오듯 흘리며 4월에도 덥다고 선풍기를 틀었다. 여름이 돌아오면 헬스장을 다닌다며 입으로만 유난을 떨었고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예전 사진을 보여주며 조만간 근육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Y는 H과장을 불렀다. 그는 낮게 코를 골며 세상 편하게 잘도 잠을 잤다. 정말 혼자보기 아까운 광경이었다. Y가 다시 한번 부르자 H과장은 그때서야 가늘게 눈을 떴다. 그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었다. Y는 반영되어야 할 사항에 대해서 설명했다. H과장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기가 막혔으나 Y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글 이어보기

여름밤

여름밤 #2

Y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커피가 목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이 몇 분이 Y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마에 맺힌 땀이 조금 마르자 Y는 컴퓨터 전원을 켰다. 9시 5분 전이었다. 대표와 이사는 점심 시간이 다 되어서야 출근을 했다. 동료인 P도 오늘은 늦는 모양이었다.

"Y씨, 커피 마실래?"

맞은편 자리의 F팀장이 Y에게 말을 걸었다.

"전 들어오면서 사왔어요."

Y는 커피를 들어보이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F팀장은 절대 자신이 커피를 사오는 법이 없었다. 커피를 사러 가는 사람이 보이면 꼭 카드를 주며 자기 커피도 사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 카드로 다 계산하라는 얄미운 그 말을 마지막에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Y는 몇 번 F팀장의 커피 심부름을 한 후로는 커피를 사서 회사에 들어갔다. F팀장은 삼십대 후반으로 오지랖이 넓었고 자신의 성격이 좋다고 착각하는 부류였다. 그녀는 한 번씩 나서서 농담을 할 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웃어주자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이 꽤 좋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인사도 받지 않을 만큼 감정이 극과 극을 오갔다. 또 자기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입고 와서는 자기 입으로 자기 모습이 웃긴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그러면 팀원들은 팀장님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는 정해진 답을 말했고 F팀장은 눈을 흘기며 좋아했다. Y는 단 한번도 F팀장에게 옷이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F팀장은 Y에게 그 말을 듣고 싶어 Y의 옷차림에 대해 칭찬하고는 했는데 Y는 입가에 미소만 한번 지을 뿐이었다. F팀장이 자신에게 왜 그 말을 하는지 알았지만 Y는 F팀장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Y가 보기에 그 옷은 F팀장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F팀장이 빵을 한가득 사와서 팀원들에게 먹으라며 평소 그녀에게서 볼 수 없었던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팀원들은 감사하다고 말하고 몇 개는 먹고 몇 개는 남겼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F팀장이 남은 빵을 자신의 자리에 가져가더니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둥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 명 밖에 없다는 둥하며 신경질을 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감사하다는 말을 얼마나 해야 F팀장의 마음에 충족되는 걸까하고 Y는 고개를 숙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었다.

F팀장은 결국 나이가 가장 어린 신입 직원에게 카드를 주며 자신의 커피와 신입 직원의 커피를 사오라고 얘기했다. Y는 카드를 받아들고 나가는 신입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동료인 P가 9시를 조금 넘겨서 들어왔다. 그녀는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Y는 P가 지각을 자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아침 시간의 대부분을 썼다. P는 점심에 먹을 음식과 간식을 잔뜩 챙겨 회사에 왔는데 먹을 것을 자신의 옆에 두고 흐뭇해했다. P는 퇴근 후에 회사 근처의 마트에 함께 가자고 Y에게 자주 말했는데 Y는 주말에 장을 봤다고 거절하고는 했다. P는 가방에서 간식거리를 꺼내어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러고는 Y에게 점심 시간에 마트에 가자고 말했다.

 

Y는 파일을 열어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Y의 팀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늘 그렇듯이 기획 단계부터 일정이 꼬이기 시작했다. 기획자는 새로울 것 없는 기획서를 주면서 디자인은 새롭게 하기를 원했다. 마감 시간까지 겨우 맞춰 디자인을 끝내면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며 디자인적 요소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수정할 거리들을 잔뜩 던져 주었다. 기획자는 디자인이 방망이를 몇 번 두드리면 뚝딱하고 나오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Y는 매번 반복되는 상황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이쪽 업계에서는 기획자의 목소리가 더 컸다.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었으나 현실은 매달 돌아오는 월급날 외에는 즐거움을 찾는 것이 힘들었다.

 

F팀장이 D를 찾았다. 옆자리에 앉는 D는 아직도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8년간 사회 생활을 한 Y도 D와 같은 사람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D는 경력이 Y와 비슷했지만 업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용어도 잘 몰랐다. 회의 시간에는 멍하니 있거나 노트에 낙서를 하다가 이사에게 한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간단한 일도 며칠을 붙들고 있었고 그마저도 실수가 많아 수시로 이사에게 불려가 설교를 들었다. F팀장은 D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휴대폰 전원은 당연하게도 꺼져 있었다. D는 이렇게 연락이 안 될 때가 종종 있었다. 오후에 가까스로 연락이 되면 그제서야 회사에 나왔다. 동료들이 전원을 왜 꺼놨냐고 물으면 전화 할 거 아니까 꺼놨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좀처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멍해 보이는 인상 뒤에 어떻게 그와같은 뻔뻔함이 숨겨져 있는지 볼수록 신기했다. F팀장은 한숨을 쉬며 궁시렁거렸다. F팀장은 궁시렁대기 대회가 있다면 1등은 따놓은 당상일 정도로 누가 듣건 말건 자기 기분이 풀릴 때까지 그 사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다. Y는 한 달 정도 F팀장의 뒷담화 대상이 된 적이 있었는데 신입 시절 이후로 회사 생활하며 울어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F팀장의 공격은 Y 다음 타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었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4 - 2

596

 

 

 

잡화점 내부에서는 본래의 모습으로 지낼 수 없으니, 밖으로 나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인생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인데, 어째서인지 밖으로 나가도 나는 ‘카린’이라는 여성체의 모습일 뿐. 결국 한숨을 쉬고 나중에 되돌아갈 방법을 찾기로 생각했다. 대부분 짧은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폭염이지만, 숲에는 긴바지를 입어야 마음이 놓인다.

 

맨살이 드러난 부분에 가시에 찔리거나 독을 지닌 생물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어떤 변수로 작용해 목숨을 빼앗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리베리티아 고원 특유의 바람은 오히려 시원하다 못해 서늘할 정도니, 반팔과 반바지를 입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된다. 최적의 기온으로 맞춰진 이곳이 낙원이긴 하지만...

 

“그 덕에 이곳에 몰려오는 수많은 몬스터들과 인간들의 전쟁터가 되었구나.”

 

덕분에 비릿한 냄새가 떠나지 않는 붉은 빛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리베리티아 고원에서 조금만 더 가면 요정과 엘프들이 사는 숲이 나오지만, 어차피 들어갈 일이 없으니 비명을 들었던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주변에 시체로 황폐해진 곳을 산림욕 하듯이 들어갈 수 없는 이 찝찝한 기분은 뒤로하고, 세린에게 말을 걸어 내가 궁금한 것부터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너도 내 상태정보라던지 그런 걸 수정하거나 멋대로 작성할 수 있어?”

 

“일부는 가능하지만 일부는 불가능하지.”

 

“내 성별은?”

 

“......”

 

아. 침묵을 하시겠다?

 

“당장 돌려내! 이 로리콘아!”

 

“나는 겨우 로리콘이 아냐. 그저 귀여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것뿐이지. 만약 잡화점의 주인이 키도 작고 귀여운 남자애나 여자애였으면, 보살필 맛이 나는데 어째서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우중충하고 따질게 많은 남자였는지.”

 

“어째서인지 평소의 카린보다 키가 좀 더 작더니만!”

 

그나마 여성체로 변했을 때는 160cm 후반대로 갔다면, 이번엔 아예 150cm초반대로 가버렸다. 이래서 내 프로필을 적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어느 정도고 몸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죄다 ‘불명’으로 적거나 ‘변수가 많음’으로 적어야 하잖아!

 

대체 어느 신체검사원이 좋아하겠냐고!

그보다 ‘겨우’라는 말을 사용한 거냐? 지금?

 

“아무래도 은팔찌를 차야 할 녀석은 너로구나.”

 

“글쎄? 잡화점에 팔이 있던가? 집을 감옥에 넣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라고 하시지?”

 

저 얄미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카린의 입지가 더 굳어져서는 안 되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는 시체부터 조사를 해야 되나?”

 

“시체를 뒤적거린다고? 그런 지저분한 일을 그런 귀여운 모습으로 할 거야?”

 

“생존에 있어서 귀엽고 멋지고가 어디 있어? 그냥 추악하게 사는 거지.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게 시체든 쓰레기더미든 모두 뒤적거리며 살고 있는 거잖아. 어차피 모든 생명은 죽지만, 모든 생명은 구차하게도 살아남으려는 강한 생존 의지가 있지. 그거야 말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거야.”

 

거대한 손톱에 깊게 파인듯한 갑옷. 그 안에 들어있는 따듯한 내장들이 텅 비어있었다. 사람이 습격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고, 어처구니 없게도 정말 마왕군에게 쫓겼는지 내 근처만 해도 풀 숲에서 감시하는 듯한 고블린 무리가 감지 되었다.

 

그래도 일단 나를 공격하지 않으니 모른 척.

다만, 마나가 요동치며 주변의 공기를 휘두르고 있을 때. 주변에서 발 소리가 더 들려왔다.

 

“뭐지? 지원군인가?”

 

곧 죽어갈 것 같은 여성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울려오자마자, 주변에 있던 고블린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거기 이쪽으로 빨리 오세요. 그런 곳에 있으면 죽어버릴 테니까.”

 

“아, 알았다. 그런데 너 같은 소녀가 이런 곳에 무슨 일이지?”

 

소녀라는 말에 열이 받쳤지만,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멋대로 화내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럼 당신 같은 기사가 이곳에서 대패한 이유는 뭔가요?”

 

흔적을 쫓다 보면 멋대로 추측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여진 것으로 보였다.

 

“대패한 이유야 13대 마왕 레프리시아가 이끄는 군세 때문이지. 벌써 프리트론까지 함락하고 있어. 미약하게나마 부탁을 하지...”

 

“제가 부탁을 받는다고 해도 손쓸 도리는 없어 보입니다만...”

 

“적어도 프리트론에 있는 귀족들만이라도...”

 

“귀족이 아니라 약자를 지키는 게 기사의 사명 아니던가요? 저는 어차피 기사도 아니고 민간인이니 그 말을 들어줄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만?”

 

-털썩!

 

묵직한 소리가 땅을 울리고 내 시선은 무릎을 꿇은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간절히 외쳤다.

 

“제발! 부탁이다! 약자를 보호해주는 것이 나의 사명이지만, 그 약자를 이끌고 보살피는 것이야 말로 왕과 귀족이 행해야 하는 사명이니까! 그들을 지켜야지만 약자를 이끌고 모두 대피할 수 있다!”

 

대답이 좋았다.

아니, 정말로 이 기사는 자신의 주인만 생각한 줄 알았으나,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남을 챙길 생각을 할 줄이야.

 

“그렇군요. 적어도 당신은 올바른 사람인가 보네요. 그렇다면 그대로 가만히 있으세요.”

 

드디어 공격을 감행하려는 듯한 풀숲의 움직임. 순식간에 뛰어가 기사의 등을 밟고 뾰족한 단검을 든 고블린의 얼굴에 발로 차버렸다. 살살 차면 살아있을 수 있으니, 목뼈가 날아갈 정도로 강하게 차버렸다.

 

물 흐르듯이 허공에 떨어지려는 뼈 단검을 붙잡고, 내 동쪽 방향으로 빠르게 던지자, 풀 숲 한곳에서 찢어지는 짐승의 비명이 울렸다. 한 손에는 검을 만들어 휘두르고, 다른 한 손에는 마나를 모아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면서, 일방적인 학살을 하고야 말았다. 어쩌다 보니 고블린이 더 불쌍해질 정도로 괴멸시켰고, 엉망이 되어버린 숲을 더욱 더 황폐하게 만들어서야, 널려있는 고블린의 시체들은 곱게 죽지 못해 사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기 다친 데는 없어요?”

 

다친 데는 없는지 물어보고 있지만, 그 기사는 뭐에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숨을 쉬는 걸로 봐선 서서 죽었다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으니, 다시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서는데...

 

“호, 혹시 용사입니까?”

 

“아뇨. 잡화점 주인입니다. 그보다 이 나라에 용사가 없어요?”

 

“아, 예. 용사는 여신의 신탁을 받고 축복을 받아야만 가능하니까요. 지금으로부터 500년동안 대마법사 엘티노스 일행 말고는 용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흠. 내가 알던 용사들은 바퀴벌레보다 더 많은 숫자로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직업인 줄 알았는데, 이곳은 비정상적으로 신탁을 받고 축복을 받아야 용사로 취급되는 세계구나.

 

“아니. 너희가 이상한 거잖아. 매번 용사들이 득실거려서 무서울 지경이었다고?”

 

“세린은 조용히 하고 있어.”

 

“네? 무슨 소리를?”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말들을 받아 치느라 머리는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음이 호수처럼 넓은 내가 참아야지.

 

“그러면 마왕은 어디서 볼 수 있죠?”

 

“마, 마왕이라면? 그 13대 타락의 마왕 말입니까?”

 

“네. 맞아요.”

 

그 마왕 아니면 누가 있겠어? 이런 잔혹한 일을 벌이는 건 내가 아는 레시아가 아니라, 어느 이야기에서 나올 법한 잔혹한 마왕 ‘레프리시아’라고 보면 된다. 어찌되었든 나와 마주했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혹은 맨 처음 만나자마자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전투가 벌어질 지도 모른다.

 

“마왕은 직접 대군을 이끌지 않고 마계에 있는 마왕성에 있지만, 마기가 가득해 여신의 축복을 받지 않는 이상 도달할 수 없다고...”

 

“아. 거기에 있구나. 알려줘서 고마워요. 어차피 마계로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뭣?”

 

“잘 들었으면서 못들은 척을 하다니요? 마계로 가는 길은 알고 있다는 소리에요. 다만, 제가 알고 있는 방식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마왕을 막아야 한다는 건 맞죠?”

 

마왕을 막는 게 개구리를 만질 수 있는 용기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라면 싸우지 않고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에서야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결정하는 방법은 통하지 않으니까. 철저한 방해공작을 통해 프리트론 왕국과 반대 방향으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다.

 

“인간계의 반대 방향이라면 마계밖에 없지만, 이렇게라도 유인을 해야 지금 당장이라도 함락되지 않고 더 많은 시민들을 살릴 수 있잖아요?”

 

“하지만...혼자서 그 마계대군을 막을 수는...”

 

“아니. 유인만 하는 거지 누가 군세를 막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군세를 막을만한 위력을 지닌 무언가가 필요했다. 계기라던가 아니면 내가 직접 마왕성을 때려부수거나. 아니면 다른 세계처럼 마왕을 자칭하거나...아니, 이 모습으로 마왕을 자칭하기도 힘들겠구나. 이미지라는 것이 있지.

 

“그러면 저는 출발할 테니 고블린 이빨이라도 가져가세요. 팔면 그래도 저녁에 먹을 음식이 호화롭게 될 테니까요.”

 

고블린 이빨은 잡화점에서 취급한 적이 있었는데, 화살촉으로 만들면 위협적인 물건이 되니까. 잡상인에게 팔면 짭짤하게 벌 수 있다. 그나저나, 돈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주제를 벗어난 독백을 하는 버릇 좀 고쳐야겠다.

 

“그럼 마계로 가는 게이트를 열어줘. 세린.”

 

“마계로 가는 길은 스스로 갈 수 있잖아?”

 

“그럼 본래 성별로 되돌려 주던가!”

 

“그건 싫은데?’

 

대체 세린을 어떻게 아이언 클로를 해야 내가 남자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가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하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걸어가는 동안, 마기가 몸을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몸 안쪽에선 신성력과 마기, 마나를 계속해서 합성하기 때문에, 마기에 대한 침식은...

 

“아니! 게이트를 열어줄 거면 열어주던가!!!”

 

조금 걸어갔는데 마계로 간다는 그 자체가 이상하잖아.

 

“이건 내가 한 게 아니거든? 이것도 네가 가고 싶다는 소망이 이루어낸 기적이야.”

 

“내가? 그런 거야?”

 

“그래. 또 그 마왕을 되찾으려는 거야? 아니면 그 마왕을 죽이러 가는 거야?”

 

그야 뭐. 되찾으러 가는 거긴 한데. 생각을 좀 해보니까 마계에서 난동을 부리고 마왕에게 호감을 얻는 건 바보 같은 일이고, 결국 죽이러 가는 것보단, 어쩌다 보니 싸우러 간다는 표현이 맞다. 이 세계에 있는 레시아가 날 알아본다는 가능성은 0에 수렴하지만, 그래도 0.1정도 가능성이 있다면 괜찮겠지.

 

“뭐가 되었든 회군시키러 가볼...”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살기가 주변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레시아와 잡화점 생활을 하면서, 매우 얕보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레시아의 정보습득 능력은...”

 

“전군. 정지.”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미 최상위권이잖아...”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배치. 거대한 군세에 포위당한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환영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많이 데려오지 않았으면 좋겠...”

 

“타락하라.”

 

마왕 레프리시아의 말 한마디에 내 주변이 모두 빛으로 물들었다. 주인공은 악당들의 대사를 끝까지 기다려주는 경우가 있는데, 어째서 악당들은 말도 듣지 않고 속전속결로 공격하려는 걸까?

 

거대한 폭음도 들리지 않고 그대로 전신에 충격이 몰아쳤다.

 

“아프잖아...”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가 바닥에 기고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탈진감부터 서서히 몸의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다.

 

“흐음? 마왕님? 저 인간 일어났는데요?”

 

“그야 당연하지 않는가? 인간이기엔 매우 변칙적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짐의 마법을 직격으로 맞고도 살아남는 자가 있다니.”

 

“좀...사람이 말을 할 때, 마법을 직격으로 날리지 말던가...”

 

레시아와 시나가 항상 예측이 불가능한 곳에서 마법을 사용하니까, 조금이라도 마법을 사용하는 움직임이 보이면, 그대로 마법방패와 몸 안에 에너지를 둘러서 충격에 대비하는 버릇이 빛을 발휘했다.

 

차이점이라면 지금 건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마법인 거 같은데, 생각보다 10배는 더 아프게 느껴진다. 그래도 살아남은 게 의아한 걸까? 굳어있던 마왕의 고개는 살짝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름이 뭔가 소녀여?”

 

“소녀 아냐...원래는 남자라고...”

 

아무래도 나에 대한 정보는 습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보다 내 이름을 묻는다면 둘 중 하나인데. 하나는 대화를 할 여지가 있거나, 다른 하나는...

 

“짐의 마법을 버틴 자의 이름을 알리고, 최후까지 전해주도록 해주기 위함이니라. 어서 대답하거라.”

 

그래 저거. 꼭 사람 죽이려고 하면 피해자의 이름을 듣더라.

아이고...

 

“내 이름은 카...”

 

“잠깐만. 그 입으로 카일이라는 흉한 이름을 대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내가 카린이라고 대답해야겠냐!”

 

“그렇군. 그대의 이름이 카린인가?”

 

“아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세린의 방해공작으로 나의 진짜 이름을 알리지 못한 체, 카린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당장 저 마왕에게 살해당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고양이 모습이었을 때는 그나마 고분고분 잘 따라줬는데, 각본가가 사라지고 난 세상의 레프리시아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잔인한 마왕임이 틀림 없다.

 

“마왕답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 난 마법 한번으로 뻗어버리지 않아.”

 

아마 두 번 맞으면 뻗어버릴 것 같은데...

어쨌든 설령 패배해도 날 죽이지 못하도록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니까. 얇고 긴 백은의 검을 만들었다. 붉은 달 아래에 휘날리는 검은 그 뒤에 별빛이 따라다니듯 어두운 공간에 잠깐이나마 실선을 번뜩였다.

 

“그대는 용사인가?”

 

처음으로 마왕 레프리시아의 눈빛에는 빛을 띄기 시작했다. 자신의 호적수라도 찾은 모양인지 고양된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봐도...내 대답은 고정되어있었다.

 

“아니. 잡화점 주인인데...저녁에는 잡화점을 열어야 하니까 그냥 돌아갈까?”

 

이토록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대사가 어디 있을까?

...내가 했으니 여기 있겠지.

===========================================================================

요즘은...일이 절 죽이네요.

위험등급이 진돗개 2마리 정도라 글을 제대로 못씁니다.

죄송합니다.

글 이어보기

여름밤

여름밤 #1

Y는 무거운 무엇인가가 자신을 옭아 매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이 찾아왔다. 새벽 3시였다. 일주일 가까이 이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눈이 떠졌고 새벽에도 보이지 않는 적과 사투를 벌였다. 방 안은 갑갑한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휴대폰으로 현재 기온을 확인하니 32도였다. 32도! Y는 지금까지 살면서 새벽 3시에 32도라는 경이적인 숫자를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서울은 매년 여름 기온이 상승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한 낮 기온이 39.6도를 찍었다. 체감온도는 40도를 넘어섰다.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서울의 기온이 40도에 육박할 거라고 말이다. 몇 년 후에는 열대 기후의 나라에 여행 갈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Y는 미친 날씨야라고 혼잣말을 내뱉고는 베개 위에 머리를 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머리카락이 말썽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문어 다리처럼 목을 휘감아 숨이 막히는데 한몫을 했다. Y는 늘 여름에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가을이 되면 후회할 것이 분명하기에 충동을 다스리는 쪽을 택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머리끈으로 고정하고 부엌으로 갔다. 물을 컵에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키자 쩍쩍 갈라진 논밭에 단비가 내리는 것처럼 따끔거렸던 목구멍이 촉촉해졌다. Y는 침대에 다시 누워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밖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득 지금 깨어있는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은 고요하고 말라버린 감수성이 터질만큼 감상에 젖기 좋은 시간이지만 지금은 그저 더위에 지쳐 잠 못 이루는 밤일 뿐이었다. Y는 이쪽 저쪽으로 자세를 바꾸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시금 잠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Y는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간밤의 더위에 몇 번이나 잠을 설쳐서 바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눈을 감은 채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5분만 더 자고 싶었지만 다리를 들었다 내리며 반동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햇살은 창을 통과하기 전이었다. Y는 침구를 정리하고 욕실로 향했다. 룸메이트가 욕실문을 열고 나오며 변기에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고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변비에 시달리고 있는 룸메이트는 1년에 두 번은 연례행사처럼 변기를 막히게 했다. 본인은 화장실 배관이 너무 낡아서라고 주장했지만 Y는 변비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삐져나오는 짜증을 간신히 누르며 저녁까지 해결해 놓으라고 말하고는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화장을 하는 도중에도 코 밑으로 땀이 송송 배었다. 선풍기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지만 더위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집을 나와 바깥 공기를 빨리 마셔야 했다. 그래야 답답함이 조금 해소될 것 같았다.

 

지하철은 그나마 북새통은 아니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노선이 아니어서 출퇴근 전쟁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대신 환승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Y의 옆에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섰다. 남자에게서 마른 걸레에서 나는 쉰내가 풍겼다. Y는 가급적이면 숨을 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Y의 폐활량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얼마 못가서 콧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냄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자리를 옮기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옆과 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Y는 어쩔 수 없이 오래 숨 참고 있기를 몇 번 더 했다. 드디어 환승역에 다다랐고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 Y도 환승 통로를 빠르게 걸었다. 여기서 4 정거장을 더 가야 회사가 있는 역에 도착했다. 다행히 역에서 회사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Y는 회사 옆 건물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샀다. 몇 개월째 매일 아침에 보는 편의점 직원은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Y가 인사를 해도 그녀가 입을 여는 법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계산을 하며 Y가 말했다. 직원은 역시나 묵묵무답이었다. 거리는 햇볕에 녹아내릴 것 같았다. 회사 건물에 들어서니 엘리베이터 앞은 이미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사람들을 싣고 쉴새 없이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했다. 차례를 기다려 Y도 사람들에 섞여 엘리베이터에 탔다. 사람들은 모두 올라가는 숫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4 - 1

595

 

시간은 유연하게 변한다.

따라서 공간도 유연하게 변한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모든 걸 꼬아버렸다.

그런 나에게 어떤 벌이 내려지는 걸까?

-혼자서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는 카일의 생각.

----------------------------------------------------------------------------------

 

나는 모순덩어리다.

그야 말로 내 존재 차체는 이미 모순으로 가득 찼...아니, 이렇게 인트로를 시작하려니까, 내 왼팔에 흑염룡이 살고 있는 거 같잖아. 사실 흑염룡은 없고 월식이라는 검은 뱀은 살고 있긴 한데. 아무튼 현재 모든 시공간에 존재하던 각본가가 사라지고 나서, 나를 죽이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상황이 없어졌으니. 착한 마왕인 레시아나, 친근하게 다가오는 루니아 누나라던가. 아무튼 그냥 다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원래 없는 존재니까. 인간관계부터 원만하지 못한 경우가 되겠지.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자. 세린.”

 

“응? 뭔데?”

 

뒤에서 나를 바라보던 세린은 이전과 다르게 차분히 대답했다. 내가 항상 물어보면 퉁명스럽게 대답하거나, 뭔가 시비가 목에 걸려서 따가웠는데...

 

“어째서 나는 카린의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거냐!!!”

 

날카로운 비명은 여김 없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애초에 남자이며 이름은 카일이다. 설령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니, 아무리 그래도 잡화점 내부에서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네가 규칙을 수정해달라면서.”

 

“그래! 맞아! 이 곳을 운영하는 종족을 늘려달라고 했지! 신이든 뭐든 상관없게 말이야!”

 

“하지만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그러니 너의 본 모습인 남자는 이미 인간을 벗어나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규격으로 남아있던 카린이라는 여성형 인간으로 남아있는 거야.”

 

“도대체 너는 왜 내 말부터 무시하는...머리 쓰다듬지 마!”

 

그리고 이 상황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자. 카린 씨. 오늘은 저를 어떤 신비한 세계로 보내주실 건가요?”

 

“리제로트. 이건 타디스가 아니거든? 메두사 폭포로 던져버리기 전에 이제 좀 나가!”

 

“어머머? 이런 가녀린 소녀를 혼자 버려두겠다는 건가요?”

 

“달라붙지 맛!”

 

찹쌀떡처럼 달라붙으려는 리제로트를 겨우겨우 뿌리치고 잡화점 창문을 바라보았다. 먼 은하수가 펼쳐진 공간은 이 시간대가 밤이란 걸 알려주고 있지만, 미래에서 볼 법한 거대한 빌딩이나, 전등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과거. 아니, 내가 본래 되돌아가야 할 고향과 같은 장소.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정말로 약육강식의 세계네.”

 

파이론은 마왕으로부터 멸망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지금은 누가 마왕인지 모르겠지만 레시아라고 해도 똑바로 잡아줄 사람이 없다면, 제멋대로인 폭군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육포에 대한 집착만 봐도...아니, 이런 걸 육포에 빗대어서 뭐하게?

 

“봐요. 밖은 몬스터들이 불을 키고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먹는 세계라고요. 시체를 처음으로 보는 건 아니지만...”

 

음산한 기운이 리제로트를 감싸듯 들어왔다. 그래도 여기는 그나마 좋은 점이라면, 백장미가 없다. 이거야 말로 이 세상이 좀 좋아지는 이유인가? 세상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환멸을 느낄 때쯤.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잡화점에 손님이 찾아...와야 하는데...

 

“내가 알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도, 손님이 잘 안 온다는 공통점은 어째서일까?”

 

“그거야 내가 막고 있으니까. 이미 이곳은 마왕군의 손아귀에 있잖아. 그런데 인간이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퍼져봐. 어떻게 생각하겠어?”

 

지금 겨우 평화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지만, 약육강식이 살벌한 공간에 잡화점이 나오면, 그 안에서 물품을 구입하기 보단, 약탈과 습격의 빈도가 매우 많이 늘어날 거라 생각한다.

 

“일리가 있네. 그냥 이대로 매출 없이 평생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렇게 빈둥거리면서 오지 않는 손님이나 기다리며, 죄다 사라진 잡화점 멤버들에 대한 그리움도 잊어보자. 아니...잊혀질 리는 없나.

 

“그나저나 아쉽네요. 잡화점 멤버가 있을 당시엔 저와 어울려줄 꽃들이 많았을 텐데.”

 

“널 위해서 잡화점 멤버를 영입한 게 아니거든. 리제로트.”

 

저 사막여우보다 더 괘씸한 생각을 가진 리제로트의 말에 대못을 박았다. 아니, 사막여우는 괘씸하지 않고 귀여운 동물인가? 실제로 여우를 본 기억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심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창문이나 보고 있는 소녀는 이윽고...

 

“밖에 나가고 싶어요.”

 

“안 돼. 밖은 안전하지 않아.”

 

답답함을 못 참고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걸 만류해보려고 해도 이제 4일정도 경과했으니, 탐색과 정보를 모을 시기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내일 나하고 같이 나가자. 너는 월터가 붙어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사실 마법에 대한 지식은 초보잖아? 그러니...”

 

“아니? 마법에 대한 기초는 이미 마스터 했는데요?”

 

뭐?

 

“잠깐? 뭐? 어떻게?”

 

“놀라는 모습이 귀엽네요?”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어떻게 기초를...아! 잡화점은 사라진 게 아니니 엘티노스의 자서전과 서적들이 남아있구나!”

 

엘티노스의 자서전과 서적. 그리고 덤으로 어마어마한 물품들까지. 사실 모든 시공간에 레이베리아를 빠짐없이 가둬버리면서, 엘티노스의 잡화점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모순투성이인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잡화점은 이 시대에 모순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네. 재미있더라고요. 이 시기의 마법은 전성기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했잖아요? 마법공학이 발전하기 이전까지만 해도...그러면 카린 씨도 마법사의 길을 걸으신 거 맞죠?”

 

“카일이라고 불러.”

 

“지금은 카린 씨잖아요? 카.린.씨? 푸훗!”

 

저 앙증맞은 볼을 잡아서 늘려버릴라!

 

“세린. 규칙을 바꾸자고 했을 때 말 좀 들으라고...”

 

한숨을 곱게 포장해 밖으로 내뱉었다. 산지직송으로 가는 한숨은 공기 중에 사라졌고, 새벽 1시가 다 되어갈 무렵. 조용하게 생각하고 싶은 내 입장에선 리제로트가 빨리 잠들길 바라고 있었다.

 

“넌 안 자냐? 키 안 큰다?”

 

“카린과 같이 잔다면 지금쯤 꿈나라에 갔을 텐데요?”

 

“쉿! 그 이름은 거론해선 안 돼. 볼트모트와 같은 거야.”

 

“카린 씨야 말로 말하면 안 되는 이름을 거론했잖아요?”

 

한숨만 쌓였다.

뭐, 밖을 외출하면 본래 남자로 되돌아갈 수 있을 테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려나? 그냥 검은 고양이인 레시아를 쓰다듬으며 새벽을 보내는 게, 하얀 올빼미인 시나를 옆에 두고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제는 기억에서 독처럼 남아 퍼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작별인사도 못 건넸구나.

적어도 몇 마디 나눴으면 좋았을 텐데.

 

천천히 눈을 감고 조용히 정리를 하자. 내일 아침에 밖에 나가면 기다리는 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 그런데 어디서 재료를 사야 하지?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현실적인 생각이 먼저인가?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 것이 맞는 표현인가 보네.”

 

눈을 떴다.

시야는 이미 햇빛이 들쳐진 아침.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했는데 설마 아침이 올 줄은 몰랐다. 정기적으로 명상처럼 빠지는 것도 아니고, 눈을 깜빡 하는 사이에 모든 것이 지나갔다. 아무래도 내 의지를 받들어 지금 이 순간은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기적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그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 볼...”

 

생각해보니 나는 깨어났어도 리제로트는 아직까지 자고 있는 시간대. 멍하니 앉아있기도 뭐해서 아침을 만들러 나아갔다.

 

“그나마 암흑물질이나 형광물질 같은 건 먹지 않으니 다행인가?”

 

그렇다고 해도 루시피나의 요리는 먹고 싶었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나는 건 후회만 남는 일이구나. 어쩔 수 없지.”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겠지?”

 

세린은 가시가 돋친 말을 여김 없이 뿌렸다. 거칠게 마음을 파고드는 말은 나를 더 강인하게 해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약해진다는 말은 맞지만, 너는 꽤 신난 거 같다? 혹시 잡화점 멤버가 없어지고 나서 나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거야?”

 

“아니. 진정한 파트너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지.”

 

“그러니까 왜 이 안에서 내가 여성체를 지니고 있어야 하냐고! 규칙 바꾸는 걸 수락하기만 해도 나는 남자인 모습으로 자유롭게 살았을 거 아니냐!”

 

“사실 카린이었을 때가 보기 더 좋거든. 쓸 때 없이 위화감이 들지도 않고.”

 

“쓸 때 없이 위화감이 드는 이유가 뭔데? 반신이라서?”

 

“카일이라서?”

 

“넌 진짜 타이타닉이 붕괴될 때 구출되지 마라.”

 

아무래도 자신이 나올 타이밍이라던가, 사실 이전에 레인처럼 세린과 같이 붙어 다니는 모습에 질투가 난 것일지도 모르지만...어쨌든 리제로트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침밥은 완성이 되어갔다. 얼마 없는 재료로 토스트와 에그 스크램블이 끝이지만...

 

“세린.”

 

카린과 비슷한 외형을 지닌 세린은 내 옆에서 “왜?”라고 대답을 했다.

 

“너도 먹는 거야.”

 

“난 잡화점의 중추인격일 뿐이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까 먹어. 어차피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주제에...”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내 앞에 앉는 세린. 거울 속의 내 자신을 보는 듯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수려하면서도 차분한 외모와 신비로운 분위기. 날씬한 몸과 고풍스러운 옷의 조화가 주변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토스트에 버터를 발라 한 입에 무는 모습은, 예를 갖춘 귀족의 영애와 같다고나 할까?

 

쉽게 풀어서 말하면 고작 토스트 하나 먹는 주제에 매우 고상하...

 

“아침을 먹는 다면 그런 쓸 때 없는 독백은 그만두고 어서 먹기나 하시지? 고풍스러운 카린 양?”

 

“시끄러워.”

 

결국 고풍스러운 태그까지 붙어가며 아침식사는 이어갔다. 여전히 리제로트는 꿈나라에 빠지고 있는 동안, 잡화점 밖에는 함성소리와 칼부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프리트론 왕국은 파이론을 되찾으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파이론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추격하는 중인지.

 

뭐, 그건 중요하지 않나?

 

“하아암~ 어라? 카린 씨? 밖이 너무 소란스러운데요? 조용히 해달라고 하면 안 되요?”

 

“왜 일어난 거야? 영원히 잤으면 더 좋았을 텐데.”

 

“키스로 깨우시는 거에요?”

 

월터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도대체 왜 죽은 사람이 키스를 하면 깨어난다고 생각하는 거야?”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확인된 치료법이잖아요.”

 

“정말 숲으로 버려버린다.”

 

더 이상 찾지 못하도록 깊게 봉인해버리겠어. 나의 결의가 마음속으로 다져지는 순간 사람의 비명소리가 찢어지듯 들려왔다.

 

“아아아악!”

 

“밖에 무슨 일이 있나요?”

 

“누군가가 몬스터에게 쫓기고 있는 모양이야. 나야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자세한 상황은...”

 

“지금 도와주는 게 도리잖아요!”

 

도리?

 

“그 도리 하나로 모든 걸 망치고 싶다면 네가 직접 나가서 구해보던가? 자세한 상황을 몰라서 멋대로 끼어들다가 죽어버린 녀석도 많이 봤어. 잡화점 멤버들은 정보능력이 좋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 너는 생존에 있어선 아무것도 몰라. 머나먼 미래...아니, 레이베리아가 만들었던 그 공간은 치안과 안전이 확보된 공간이었으니 당연하다고 해도! 아냐...아니지. 심지어 그런 공간마저도 도리 하나로 인생이 망하는데, 그런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이 세상은 지금 살아남기 위해 얼마든지 인간을 버릴 수 있는 시공간이다. 심지어 남의 눈에는 짐승만도 못한다고 한들, 자신의 가족에겐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먹여 살리는 가장으로 보이는 모순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런 혼돈의 세계가 바로 지금 이곳이다.

 

“애초에 너처럼 예쁜 아이를 납치해서 인형으로 만드는 녀석이 도리라는 단어를 꺼내지 마. 내가 생각했을 땐 차라리 저것들이 너보단 더 나아.”

 

리제로트는 고개를 홱 돌리고 분한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그 이후로 잡화점엔 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리제로트도 저지른 죄가 있지만 마음을 고치고 갱생한다고 해서 저지른 업보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나저나.

밖에 상황이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고 정보수집을 해야 하니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삐쳐있으니 대답은 안 할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다녀오도록 하지. 넌 밖으로 나가지 마. 밖은 내 생각보다 더 위험하니까.”

 

그래도 탈출할 수 있으니 세린에게 문을 굳게 닫아놓도록 하자.

===========================================================================

인간관계의 리셋

 

이제 몬헌월드 해야지...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11

594

 

 

 

자신이 존재함에 있어서 꼭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행성에서 자신의 가치와 살아있었다는 발자취를 남기는 걸까? 아니,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가치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존재를 자신만의 각본으로 적어 넣어 최후를 맞이하게 하고, 또 다른 이들의 삶에 개입하여 수정하고 돌려놓는다.

 

“그 각본만 빼면 너는 대체 뭐가 되냐는 거야. 레이베리아.”

 

아무런 말도 없던 여신은 그대로 나를 바라본다. 저 표정에서 무슨 정답을 찾아야 할까? 아니, 꼭 정답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정답을 찾아도 사탕을 준 선생님은 없다.

 

“그렇다면 잡화점의 주인. 너는 지금 무엇이 될 수 있지?”

 

“나는 잡화점의 주인이지.”

 

“아니. 너는 신도 될 수 있지. 하지만 굳이 인간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뭐지?”

 

“그야 내 사고방식은 인간이니까. 틀을 깨부수는 건 새로운 경지에나 올라갈 때의 이야기고, 아무리 생각해도 신이든 여신이든 인간이든 마족이든 모든 생명체에는 딱 한가지 공통점이 있어. 그게 뭔 줄 알아?”

 

그건 레이베리아의 각본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너는 진실을 꿰뚫기 때문에 어떠한 것이든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이 살짝 짧았어. 너는 진실을 꿰뚫어버렸기 때문에 그걸 왜곡할 수 있는 거야. 꿰뚫고 비틀기만 해도 상처는 더 커지고 심해지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너의 각본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고 있어. 당장 자신의 운명이 너의 손에 달렸는데도 말이야.”

 

심지어 레이베리아를 창조한 창조주마저 신경 쓰지 않았다.

 

“너는 스스로 모순된 세계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야.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체 파멸을 위해서 모든 걸 망치고 있는 거라고. 물론 그 원인이 각본에 쓰여지지 않는 나겠지.”

 

어깨를 으슥이며 내 말을 마쳤다. 레이베리아가 진정으로 사용할 줄 아는 힘은 진실을 보고 그걸 바꾸는 것. 하지만 자신을 직접 창조한 창조주에겐 먹히지 않아, 다른 자들을 이용해 봉인하거나 쫓아냈다고 했지만, 내 경우에는 3개의 에너지를 합치기도 전에, 각본에 쓰여지지 않았다.

 

지금 내 생각으로 이 일이 가능했던 이유...

내 생각을 말하기 위해 입은 다시 움직였다.

 

“꽤 그럴 싸한 생각인데. 머나먼 미래를 보고 너에게 대항하기 위해 나를 누군가가 창조해냈어. 그것도 원래 없어야 하는 인물이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수를 만들어내는 그 무언가...세상에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을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추측을 말해보자면.”

 

그리고 모두의 기대 속에서 한 박자 쉬었다.

뜸을 들이며 주변의 반응을 보고 다시 내뱉었다.

 

“아니. 그리 궁금하지 않으면 듣기 싫다고 하지.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내 옆에 있던 리제로트가 치켜 뜬 눈으로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자신을 잊고 레이베리아와 상대를 하기 때문에 지루해진 것은 아닐까?

 

“지금 레이베리아가 저를 이용해서 당신을 죽일 수 있다고 하잖아요! 지금 제가 당장 죽게 생겼는데 이곳까지 와서 그런 바보 같은 헛소리를 한 땀 한 땀 들으라는 건가요?”

 

“내가 말하는 게 뜨개질인 줄 알아? 하긴, 내가 생각한 추측으로는 구멍이 많을 거 같으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았던 게 좋았을 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내 생각으론 너는 각본에 죽을 상이 아냐. 관상이 그리 말해주더라고?”

 

“사람의 얼굴만 보고 어찌 그리 판단해요? 당신 바보에요?”

 

“바보라니! 나처럼 평범한 낙제생이 어디 있다고!”

 

“그게 바보잖아요! 이 바보야!”

 

적을 앞에 두고 만담을 펼치니 기분이 묘하지만...

 

“아무튼, 내 존재의의는 결과적으로 널 막는 거야. 그러기 위해 잡화점의 주인이 된 거고. 원래 이 시간대에 있어야 하는 레이베리아가 없다는 걸 보면, 다른 시간대로 이동해서 진실을 마주하고 있겠구나. 뭐야. 따지고 보면 진실을 마주해도 인정할 수 없어서 이런 바보 같은 일을 만들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대야 말로 레이베리아의 최후인가.

지금 이 공간이야 말로 레이베리아의 묘비가 되는 셈이잖아?

추측이지만.

 

“굉장하네. 모든 것을 이용해서 날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를 했어. 마왕부터 시작해서 드래곤, 검은 달의 여왕, 최강의 여기사 등. 시도 때도 없이 내 주변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제서야 납득이 가기 시작해. 맨 처음에는 그들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아리엘의 경우도 그렇고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날 죽이기 위한 계획이었다.

 

“다만, 예상하지도 못한 방해와 변수 때문에 실패를 한 거지. 그게 어떻게 일어났는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알지 못하는 내 입장에서도 아리송한 일이다. 사실 초창기에 레시아를 잡화점에서 소환할 당시. 나는 세상이 완벽하게 멸망한 줄 알았지만, 이는 과거로부터 내 영향을 받은 레시아가 성장해 마왕이 되었고, 천계와 휴전을 하면서 평화로운 세계를 이어 나아갔다.

 

만일 내가 없었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각본가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군. 아니면...이것도 창조주가 계획한 일인가?”

 

다른 곳에서도 이게 모두 창조주의 계획이라면서, 공룡화석 파묻고 자신을 믿는지 시험하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아니...이건 다른 이야기잖아.

 

결과적으로...

 

“창조주 또한 네가 그럴 거라 생각하고 날 만들어냈는지. 아니면 다른 요인으로 내가 창조된 건지 잘 모르겠네. 가장 확실한 건 내가 살아있는 동안, 너의 방해만 되는 존재란 거지. 게다가 리제로트에게 어떤 각본을 썼는지 몰라도, 이미 그 각본은 유효기간이 지났잖아? 사실 리제로트의 최후를 각본에 쓴다고 한들, 그 내용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해.”

 

“모순은 이미 일어났어. 각본가. 내 존재 자체야 말로 모순이야.”

 

쐐기를 꽂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 내 할말만 무작정 하고 있는데, 어마어마한 분위기가 대기를 짓눌렀다.

 

“웃기지마...웃기지마!”

 

날카로운 비명이 모든 공간을 지배했다.

 

“쇼는 아직이야! 각본은 계속 되어야 한다! 잡화점 주인이 나를 가로막는 방해꾼이라면!”

 

잠깐만? 그 거대한 에너지덩어리는 또 뭐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도 에너지는 존재했다. 창조주마저 쫓아냈던 레이베리아의 힘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항상 강인할까?

 

“모든 걸 걸고 존재자체를 소멸시켜주겠어!”

 

“뭐. 그 정도면 확실하게 위험하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고요! 이 세계 자체를 지워버릴 것만 같잖아요! 왜 그렇게 태연하세요!”

 

확실히 아직까지 인간적인 상식을 지닌 리제로트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다면

 

“그러네. 태연하게 있으면 안 되겠네. 지금 여기서 사라진다면 네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이게 시간대로 가고 있는 게 맞을까?”

 

나로 인해 제대로 이어져야 할 미래가 서서히 끊어지고 붕괴한다면...

 

“레이베리아의 무덤이긴 하지만, 내가 직접 죽인다면 미래는 보존되겠군. 그렇지?”

 

나는 엘티노스에게 받은 붉은 버튼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거대한 빛의 구체가 조금이라도 땅에 닿으면 모든 걸 소멸할 기세로 타올랐으나, 지금은 그 공간만 사라진 체 무산이 되어버렸다.

 

“그럼 이곳의 레이베리아의 힘을 모두 제거하고 살려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뭐라고요?”

“뭣이?”

 

단순한 질문이잖아. 왜 오물을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싸늘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만회를 할까? 애초에 이런 일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이 존재하지 않는 걸까?

 

“왜 그런진 굳이 이유를 묻지 않겠지만, 그런 식으로 날 바라보는 건 그만두지 않을래? 단순한 질문을 이상한 망상력을 사용해서 기묘한 이야기를 써 내리지 말고.”

 

“당신은 정말 변태야...”

 

“뭘 생각했는지 대충 예상은 가지만 난 네가 상상한 그런 사람이 아냐. 이곳에 버리고 가기 전에 눈빛부터 고쳐줘...”

 

사람을 죽일 눈빛이 많지만 정신적으로 참살해버리는 저런 눈빛...

어린애가 얼마나 수라장을 겪었길래 저런 눈빛까지...아니, 나 때문에 수라장을 겪고 있었으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구나.

 

“불안전 변태는 완전 변태든 그런 단어는 곤충에게 맡겨버리고, 레이베리아. 한 가지 협상을 하도록 하지.”

 

“같은 미래가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함인가? 하지만 거절한다.”

 

“글쎄. 아까와도 말했지만 나 자체가 모순이라...그 거절은 거절할게. 아니면 힘으로 막아보던가?”

 

내 말 한마디에 레이베리아는 사라졌다.

그리고.

 

“죽어!”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

딱히 뭐라 설명할 것도 없는 거대한 하얀 구체.

 

“그렇게 질 낮은 에너지 덩어리로 죽으라고 해도 쉽게 죽지도 않아. 히드라!”

 

왼팔에 감겨있던 사슬들이 검은 빛을 띠며 서서히 거대해졌다.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9머리의 괴수. 모든 걸 집어삼키는 자는 세상을 향해 침을 흘린다. 거대한 입이 벌어져 레이베리아가 쏘아 올린 에너지를 먹어 치우고 더 성장했다.

 

“잡화점의 주인...이런 맛없는 걸 먹여놓고 협력을 하라니?”

 

“맛없는 것치곤 너무 상큼하게 먹는데?”

 

농담을 주고 받아도 언제나 흐름을 끊는 건 리제로트의 말 한마디.

 

“장난치지 말고 제발 제대로 싸우실래요!”

 

제대로 싸우면 분량이 안 나오는데...

뭐, 별로 상관 없나?

 

-샤아악!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빛이 내 주변을 버터처럼 잘라냈다. 땅속에 파묻는 것도 모자라, 이 행성의 내핵까지 파묻을 기세로 사라졌고,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용암은 튀어나와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행성의 핏물이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왔으나, 오히려 부동자세로 오른손을 펴 입을 열었다.

 

“황혼!<Dusk>”

 

-파앙!

 

하얀 실선이 레이베리아의 몸을 꿰뚫었으나, 잠깐만의 경직이 있을 뿐 곧이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다시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면역이 된 건가?

 

“제길.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에너지인가.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다르군...”

 

“그럼 못 먹는 거냐?”

 

“아니. 빛으로 이루어진 건 껄끄러울 뿐. 다만 먹기엔 좀 거부감이 있지. 마치 가지 볶음을 처음 먹는 듯한 그런 기분 말이야.”

 

“어째서 예시가 구체적이냐?  그 미묘한 식감에 대해선 나도 동의를 하지만...”

 

세상을 집어삼키는 녀석이 그 세상의 극히 일부인 채소를 껄끄러워 한단 말이야? 날로 갈수록 이 녀석도 편식이 늘어가는구나?

 

“너의 힘은 창조주와 같은 것! 하지만 나는 창조주를 이미 뛰어 넘었다! 그런 나를 막을 수 있는 마법은 존재하지 않아!”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레이베리아의 눈을 당당히 마주하며 나는 입을 연다.

 

“그래? 마법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확실히 인간이 일으키는 기적은 마법이라고 하지. 그렇다면 그 마법은 일으킬 수 있는 위대한 기적 중 하나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너를 나락으로 몰아넣을 위대한 기적을 보여줄게. 히드라! 내뱉어라!”

 

나의 말에 맞춰 지금까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먹어 치운 에너지들을 거대한 검은 광선으로 내뱉었다. 리제로트와 월터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지만, 그래. 이게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기괴한 싸움방식이긴 하지.

 

“네가 황혼<Dusk>마저 먹히지 않으면 이걸 써야지?”

 

본래 창조의 에너지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지만 인간의 틀을 넘어설 수 없는 나에겐, 간편한 옷이나 무기를 만드는 제작마법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틀을 벗어나 우주의 이치를 알고, 모든 걸 통달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은 나야 말로 최악의 신이 되리라 생각한다.

 

“극야!<Polar Night>”

 

모든 것을 다시 어둠으로 바꿨다.

말 그대로 더 이상 빛이 없는 장소.

모든 장소 중에서 가장 고독하고 추운 곳이다.

 

“뭐...뭐야? 이건? 방금 전에 걸어왔던 그 터널인가?”

 

“아니. 여긴 좀 달라. 이곳은 내가 추방하고 싶은 자들을 추방하기 위해 만든 공간. 각본가는 이곳에서 퇴장한다.”

 

리제로트에게 설명하면서 내 손을 슬쩍 보았다. 겉보기엔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일까? 뭐, 그건 둘째치고...

 

“뭐야. 이 공간은? 어째서 또 다른 내가 잠들어 있는 거지? 방금 전에 미래로 갔던 ‘나’마저?”

 

“이번 기적은 월식의 힘을 빌렸어. 솔직히 나 혼자서 이런 바보 같은 공간은 만들지 못하거든. 그리고 솔직히 너만 불러오려고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월식의 힘이 또 다른 차원까지 영향 받은 모양이네.”

 

당황하는 레이베리아와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레이베리아‘들’

 

“네가 가장 미래에서 왔으니까. 너만 깨어있는 거야. 시공간의 규칙을 부수고 돌아다니는 불멸자에겐 가장 잘 어울리는 벌이지.”

 

“흥! 그렇게 따지면 너라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아니, 적어도 리제로트만큼은...”

 

오해할 여지가 있으니 아직까지 질질 붙잡고 있던 레이베리아에게 말했다.

 

“아니. 그건 좀 다르지. 첫째로 나는 모순덩어리에 불과해. 그리고 둘째는 리제로트는 아직 잡화점의 의뢰인이야. 의뢰인이 자신의 결과에 만족하면 의뢰는 끝나지만, 의뢰인으로 남아있을 때까진 잡화점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긴 한다고? 그리고 셋째로...잡화점은 나보다 더 강하거든.”

 

-콰앙!

 

“결국 인간을 벗어났구나. 이래서 골치덩어리는 잡화점의 주인일 자격이 없다니까?”

 

흔히 카린의 모습처럼 코발트 블루의 긴 머리를 한 소녀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잡화점 안에서 나왔다.

 

“그래서 다급하게 잡화점의 규칙을 바꾼 거 아냐. 내가 잡화점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슬슬 가자. 너 때문에 일이 너무 복잡하게 되어버렸어. 신경 쓰지 않고 되돌아가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새침한 눈으로 보다니. 츤데레같잖아.”

 

“네가 츤데레처럼 생겼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무슨 농담이 그러냐...

내가 어딜 봐서 츤데레라고?

 

“자, 잠깐 기다려!”

 

한 때 여신이였던 존재는 내 소매를 붙잡았다. 언제 다가와서 붙잡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을 좀 하면 지금도 무서운 여신이잖아?

 

“이대로 날 두고 갈 생각은 아니겠지? 모든 시공간에 있는 각본가를 없애다니? 지금 이렇게 돌아가면 너의 평상시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맞이하게 된다고!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잡화점 멤버들을 그저 나 하나 때문에 버릴 셈이야?”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거 같으니 말해주지.”

 

리제로트와 월터를 먼저 잡화점에 데려가라고 세린에게 눈치를 추고, 레이베리아의 눈높이를 마주하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네가 조작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야. 그녀들이 날 좋아하도록 만들어서 나는 수많은 죽음을 뛰어넘었지. 모든 것에 대해 모순으로 비틀며 살아갔으니까. 각본은 어디서부터 시작한 건지 몰라도, 어린 레시아가 나를 만났던 것부터. 너의 각본은 오랫동안 진행되었어. 그러니...이제 너의 각본이 없는 진짜 세계를 내 눈으로 볼 예정이야. 그러니 너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쉬도록 해. 그 누구도 너의 잠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아냐...절대 안 돼! 지금의 나라면 몰라도! 유랑극단으로 타락한 나라면 몰라도! 적어도! 한 때 위대한 창조주를 따라 정의감으로 무장한 각본가는 풀어줘! 그러지 않으면 세상은 완전하게 엉망이 될 거라고!”

 

나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붙잡힌 소매를 거칠게 옆으로 털었다. 힘에 끌려가듯 레이베리아의 몸은 휘청거리며 옆으로 돌아갔고 확실한 거절을 위해 짧게 대답했다.

 

“거절하지.”

 

“안 돼! 돌아와! 제발 이 아이만큼은 데려가 달란 말이야!!!”

 

잠들어있는 레이베리아 중. 한 명을 들고 힘겹게 몸을 끌어보지만, 내가 잡화점에 도달해서 문을 닫는 속도가 더 빨랐다. 검은 나무로 칠해져 있는 나무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곧 이어 잡화점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이베리아를 극야<Polar Night>로 내던져버린 이후...

 

“주변에 방이 완전히 다 사라졌네.”

 

이변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

이제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패러독스가 시작 됩...<-파악!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10

593

 

 

 

이 시공간을 의심했던 순간은 언제부터일까? 그건 후손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후손이 어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300년이 지난 이후 나의 자손이 어찌 생겼는지. 그리고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유전적인 경우를 뛰어넘어 300년이 지나도 내가 아는 사람은 대부분 살아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과거로 돌아갔다면, 300년 이전에도 레시아의 행방이나 다른 이들의 흔적을 찾았어야 했지만, ‘일기장’이라는 수식어 하나만으로 이곳의 시공간이 안전하게 지나왔다고 볼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레인이 일기장을 보고 있다는 시점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분명 레인은 일기장에 적혀있는 내용대로 수행할 것이고, 나는 그 내용을 모르고 그 일기장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되는 일. 결과적으로 그 일기장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레인은 리제로트를 죽이는 걸 포기했다.

 

“후손과 내 일기장이라는 타이틀로 이곳에 오랫동안 발을 묶거나, 정해진 미래대로 나조차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 도달할 때까지라...과연, 내 사고방식은 역시 인간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혹은 다시 돌아올 거란 것도.”

 

“그럼. 저란 존재도 가짜인가요?”

 

“아니. 그건 아냐. 이 시공간 자체를 창조하고 생명을 만들었으니까, 가짜는 아니지만 이곳에 날아든 잡화점 멤버를 제외하곤 생사여부는 레이베리아에게 달려있다는 거지. 그걸 따져봤을 때, 레인이 살고 있는 잡화점에 일기장은...단순히 레이베리아의 각본에 불과하다는 소리가 되는 거고, 이 여신은 결국 방구석에서 내가 스스로 자멸할 때까지 볼 생각만 했다는 거야.”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군. 언제까지 자신의 각본에 맞아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걸까?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창조된 시점부턴 이미 가짜는 아닌데, 과거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 너를 증인으로 사용할 수 있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과거로 날아갈 거야.”

 

“좋군요. 과거로 간다니. 제 기억 속에 있는 과거가 맞는지, 아니면 당신의 추측대로 이것이 전부 조작된 것인지 확인해보겠어요.”

 

동의는 얻었다.

그러면...

 

“히드라. 힘을 좀 나눠줘야겠다.”

 

내 왼팔에 잠들어있는 사슬에게 외쳤다.

 

[과거로 가기 위해 나의 힘이 필요하다는 건가?]

 

“별거 아냐. 과거로 가기 위해선 네가 좀 같이 움직여야 하거든.”

 

생각을 해보면 시공간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지만, 어째서인지 내가 스스로 사용하지 못하고, 남에게 꼭 힘을 빌려서 가야 하는 슬픔. 나중에 스스로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봐야겠다.

 

“다양한 시공간과 평행차원에 퍼져있어도 하나인 존재잖아. 월식이란 건 그런 거 아냐?”

 

[그렇군. 종족의 특성을 이용해 이 차원의 과거로 갈 생각인가?]

 

“맞아. 제대로 이해했으면 빨리 진행하자고. 방해꾼이 찾아오면 내일 가야 하니까. 귀찮은 일은 오늘 안에 끝내놓고 잡화점 운영을 해야, 다음날에도 일찍 일어날 수 있어.”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하기엔 좀 무리가 있어도, 마음의 평화라는 건 별도의 문제니까. 사슬이 자기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원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9개의 쇠사슬 끝에는 단검이 허공에 박히기 시작했다. 박혀있는 장소에 마법진이 나타나면 꽤나 멋있는 연출일 것 같지만, 블랙홀처럼 검은 원형의 공간만 나타날 뿐.

 

“자. 과거로 가자. 어찌 되어먹었는지 확인하자고?”

 

자연스럽게 리제로트를 인도하며 발을 앞으로 향했다. 이러니까 이상한 나라로 끌어들이는 토끼처럼 느껴지는데? 아니, 그래도 하트 여왕은 안 나오니까 상관 없나? 어두운 공간은 얼마든지 걸을 수 있고, 우리의 목적지가 나올 때까진 무조건 걸어가야 한다. 뛰어가든 날아가든 상관은 없는데, 언제까지 가야 할지도 모르는 그 길을 뛰고 날다간 쉽게 지쳐버리니까.

 

그리고...

 

“제, 제발...좀 천천히 걸어요...”

 

“월터에게 업어달라고 하던가? 얼마나 체력이 안 좋으면 고작 15분정도 걸었는데 지치는 거야?”

 

“당신은 3보 이상 자동차 몰라요?”

 

“너의 장래가 심히 걱정된다.”

 

세상에 리제로트가 먼저 만담을 열다니. 심리상태를 꿰뚫는 건 아니지만, 나와 있으면서 경계를 하는 모습은 많이 풀어졌다. 물론 월터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면도날처럼 날카롭기 시작했지만...

 

“그런데 이 공간은 뭐죠? 위험하지 않나요?”

 

“당연히 위험하지. 날 놓치고 다른 길로 가면 시공간적으로 미아가 되어버려서, 찾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니까.”

 

“당신은 어떻게 이 길을 잘 알고 있는데요?”

 

“내 왼팔에는 이 공간을 열어준 존재가 있어. 그 존재를 믿고 따라가고 있는 거야.”

 

[그래도 이 몸이 만약 그대를 다른 길에 방황하게 만드는 함정을 팠다면?]

 

[만약 그러면 넌 레시아와 시나에게 맞아 죽는 일 밖에 없어.]

 

대부분 주인공들은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매우 강하거나 강해지는데, 나는 왜 아무리 강해져도 주변에서 보살핌을 받는 걸까? 정형적인 클리셰 중에 여주인공이 맨 처음에 남주인공을 지켜주다가, 남주인공이 각성하고 강해지면서 거의 마지막쯤에는 여주인공을 지켜주지 않는가?

 

근데 나는 아무리 강해져도 아직까지 초반부마냥, 레시아와 시나 이외에도 잡화점 멤버들에게 지켜지고 있다. 맨 초기에는 혼자 구르면 거의 반은 죽어서 왔어도,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오히려 잡화점 멤버들에게 반정도 죽는 일이 더 많다.

 

그 바보 같은 백장미만 아니었어도...

 

“과거로 가서 충격이나 받지 말라고. 처음 보는 과거에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서슴없이 하는 바보 같은 녀석이 아니길 빌어야지.”

 

“과거에 가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뇨?”

 

“너는 그 영화도 안 본 거냐? 자동차 타고 과거로 갔다가 본인이 사라질 뻔했잖아. 다행히 해결책을 찾고 겨우겨우 미래로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그 영화는 마지막에 미래가 바뀌었잖아요?”

 

솔직히 그 영화가 지금 시대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째서 이렇게 잘 아는지 금시초문이다. 본적도 없는 지식이 마음대로 흘러 들어오는 일은 이렇듯 좋은 일은 아니다. 아무튼...

 

“슬슬 다 왔는데.”

 

기나긴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고 처음 본 광경은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진짜냐? 이 상황?”

 

모든 땅이 전부 메말라있었다. 그 누구도 없고 생명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을 무렵. 언제부터 이 일이 계속 진행되어왔을까?

 

“내가 너무 과거로 돌아와서 이 땅이 이렇게 된 건가?”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는 창조가 되었는지, 적합한 환경에 의해 진화를 한 것인지에 대해, 이 세계는 창조와 진화를 반반 섞어버린 닭마냥, 물을 만들고 산소를 만들고, 태양빛에 보호하는 오존층대신 다른 보호막을 씌웠다.

 

“레이베리아는 없나 보네.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망해버린 세상은 이런 거야. 그보다 이곳 시간대가 언제야? 내가 왜 이런 꼬맹이와 같이 어린 왕자를 찍어야 하는데?”

 

“제가 꼬맹이가 아니라 당신이 늙은 거에요. 어린 왕자는 또 뭐에요? 당신이 왕자라고 말할 정도로 젊기라도 해요?”

 

“아직 젊어! 아직 20대밖에 안 됐어!”

 

“거기에 300은 추가로 붙여야 하잖아요!”

 

“300을 왜 붙여! 스파르타냐!”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무렵. 이곳의 현재시간을 알아보기로 했다. 레시아와 시나가 있으면 더 정확한 측정이 가능했겠지만, 지금의 내 능력에도 대략적인 결과값을 찾아낼 수 있으니, 잠깐만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뜨자. 내 시야 위에 13자리 정도 숫자가 나타났다.

 

“내가 아까 있던 곳과 상대적인 숫자를 알려줄래...”

 

내 혼잣말이라도 들었는지 순식간에 줄어드는 숫자. 최종적으로 줄어든 숫자를 보며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5년전의 파이론이라고?”

 

“5년전?”

 

모든 이들이 5년전이 모두 사라졌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데? 뭐, 무슨 일이 있는지 그리 궁금하지 않지만, 확실히 재창세가 되기 전에 모두가 사라졌다.

 

내가 넘어가버린 세계는 결국 5년만에 만들어진 가짜란 소리다. 아니, 가짜 세계는 아니지만, 나를 속이려고 만든 세계니 내 입장에선 가짜.

 

“그래서 이 세계는 왜 다시 만드는 거지? 너의 각본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무조건 다시 부수고 만드는 건가?”

 

허공에다 외치는 듯한 내 소리는 방향을 정확하게 찾아 날아갔다.

 

“레이베리아!”

 

“결국 잡화점의 주인은 이곳까지 찾아온 건가?”

 

“결국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 보니 내가 지금쯤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나 보네?”

 

4쌍의 날개는 대체 뭘 의미하는지 이제 기억이 잊을 정도, 여신이라는 태그가 붙으면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압도하지만, 그건 일반인이나 신앙심이 가득한 사람의 경우다.

 

“모든 건 멸망했어. 이런 미래는 원하지 않았지. 각본에 쓰여지지 않는 멸망의 시. 잡화점의 주인. 그건 모두 당신 때문이야.”

 

“나 때문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경우는 머나먼 미래의 일이니까.”

 

아무리 봐도 295년 이후의 일이잖아.

그렇지 않나?

 

“잡화점의 주인. 아니...카일. 이 각본에는 당신이 기록되어있지 않아.”

 

“그보다 각본에 하나하나 적을 생각부터 하는데?”

 

“우주의 별 하나마저 모두 끝이 존재하지. 그 끝을 막기 위해서라도 모든 이들을 각본에 적을 필요가 있어.”

 

“그렇다고 쳐도, 재창세를 하기 위해 모조리 갈아 없는 건 문제가 있는데? 아니, 애초에 모조리 갈아 없애는 것에 문제 유무는 따지지 않도록 할 게. 하지만, 가짜 일기장을 레인의 잡화점까지 집어넣을 정도로 날 묶어놓을 이유가 뭐야? 너 또한 300년 이후의 미래보다 더 머나먼 미래에서 온 레이베리아잖아.”

 

지금 이 시간대의 각본가가 아닌, 다른 시간대의 각본가.

 

“맞아. 나는 다른 시간대의 각본가. 유랑극단 최후의 단원이자 단장. 다른 미래에도 너 때문에 모든 것이 망해버렸지.”

 

“꼭 내가 살아있으면 모든 게 망해버린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 같은데. 당연하게도 내가 살아있으면 너희들이 손해보고, 너희가 살아있다면 내가 손해를 봐. 하지만, 다른 존재들은 그런 거에 신경이나 쓸까?”

 

“뭐라고?”

 

“불멸자든 필멸자든 언젠가 끝이 있다고 해도, 전부 너의 각본대로 움직여서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얼마나 대단하든 차원에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할 수 없는 일이니까.”

 

격노하는 듯한 레이베리아에 투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지금 죽이면 미래가 바뀌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 같은데...글쎄? 불가능하지 않을까? 넌 나를 각본에 적을 수 없잖아?”

 

“직접적으로 적을 수 없지만, 네가 데리고 온 그 계집을 이용하면 가능하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해보니까 저 레이베리아는 상대적으로 미래에서 왔으니까, 리제로트의 최후에 대한 각본은 이미 적혀있겠지. 그러나 여기서 문제...

 

“각본이 없다면 넌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거지?”

 

그 질문 하나가 모든 공기를 멈추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이곳엔 공기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

오늘은 리벳팅을 했어요.

솔리드 리벳 죽이고 싶어요.

 

어째서 수동으로 쥐어 짜내야 하는 건가요...

내 손목...

글 이어보기

어느 날 나에게 찾아온 습작들

이야기 63-9

592

 

 

 

싸움보단 말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무의미한 폭력은 그리 좋지 않다. 당연하게도 나는 평화주의자이기에 평화롭게 해결하는 걸 좋아한다. 평화 최고. 혼돈은 멀리하고 평화를 가까이 하는 게 좋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평화고 뭐고 없구나.”

 

쓰러져 있는 레인을 바라보며 단검을 집어 넣었다.

 

“카일 씨...왜 그렇게 강해요? 591에서 592로 넘어갔다고 느닷없이 제가 져있잖아요?”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가 남는 그런 기묘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만, 지금은 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그보다 일기에도 네가 지게 되어있는 거야? 아니면 지금 내가 일기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움직이고 있는 거야?”

 

확신이 서지 않지만...

 

“일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기엔...

 

“지금 일기의 가이드라인을 생각해보면 탈선의 수준이 아니에요. 이미 우주로 날아가서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고요.”

 

과거로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다고 본다.

 

그래도 레인은 원망을 하거나 한숨을 짓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내가 이곳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레인의 성격상 오히려 일이 엉망으로 되었을 때 수습하는 걸 더 좋아하는 기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까. 내가 쓴 일기도 엉망진창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인가요?

 

“좋은 일인지 아닌진 잘 모르겠네. 그래도 지금은 내가 결정한 것에 따라가야지. 그보다 아이리스는 다 완치가 되었다면서?”

 

“카렌 씨는요?”

 

카렌? 아...

그렇지. 어째서 카렌은 활동하지 않는 이유라고 하면...사춘기라고 해야 하나? 자립심이 너무 올라갔다고 해야 하나?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선 보이지 않은 게 흠이다. 돌아갈 장소가 또 있다는 건 나쁘지 않지만, 어차피 내 복제품과 비슷하기도 하고,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일단 복수에 대한 건 진심이든 아니든 접어둬. 지금 이렇게 해도 별 다른 이득은 없어.”

 

“이익중심으로 움직이는 건가요?”

 

“아니. 평화중심이지.”

 

내 마음속의 1순위는 언제나 평화다. 그런데 현실은 평화가 왜...

자괴감이 든다.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평화를 위해서라니...

 

“이미 미래는 뒤틀리기 시작했어. 그렇다고 리제로트가 죽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을 때, 오히려 리제로트가 안 죽을 수도 있는데, 내가 있으니까 죽거나 심하면 침을 흘리겠지.”

 

“최소와 최대가 바뀌었지 않았나요?”

 

이 말버릇 레시아에게 전염된 건가. 빨리 고쳐야겠다. 리베리티아 고원의 특유한 바람은 300년이 지나도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이곳은 개발도중 청정구역이라고 지정한 모양이다. 사실 청정구역인지 다른 마법적인 요인으로 손을 대지 못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쾌하게 쓸고 지나가는 바람을 뒤로한 채, 뒤에서 차를 마시고 여유롭게 앉아있는 리제로트에게 돌아갔다.

 

“너는 아까 내가 위험했을 때 도와주지도 않더라?”

 

“해결사가 해야 하는 일을 의뢰인이 꼭 도와주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래도 협조나 도움은 줘야 할 거 아냐. 방금 전에 레인이 던졌던 마법공학 유탄을 다른 시공간으로 날려버리지 않았으면, 이 일대가 지금 다 사라졌을 거라고.”

 

“그렇다고 해도 저는 시공간술사의 길을 걸은 기억도 없고, 애초에 마법사가 아니라 초능력자라서요.”

 

초능력자라고 해도 마나는 가지고 있으면 마법사의 길을 좀 가란 말이다.

 

“뭐 어떻게든 위기는 넘겼으니 상관 없겠지.”

 

리제로트는 차를 놓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평소에는 푸른색의 컬러렌즈로 자신의 초능력을 봉인하지만, 어느 사이에 짙은 보라 빛의 눈으로 돌아와있었다.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는데. 저를 과거로 데려다 주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 보라 빛의 눈은 혹시라도 정신오염이 먹힐 거 같아서?”

 

“칫.”

 

인간성이 어디로 간 거냐 넌...

 

“여전히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가 없으니 기괴하네. 뭐, 그래도 너의 초능력은 강력한 최면술일 뿐이니까. 결국 망각의 샘물을 먹이지 않는 이상, 영구적으로 너의 인형이 안 되는 거잖아? 게다가 나는 이미 인외의 존재로 되어가는 중이라서, 명계에서 퍼 올리는 망각의 샘물이 아닌 이상 잘 듣지도 않을 걸?”

 

한 때, 내가 만약에 신이 된다면. 이 지상을 평화롭게 만든다거나 그런 건 없었고, 그냥 내 마음대로 세상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을 해보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평화롭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어쨌든 슬슬 이곳도 정리할 거니까 어서 돌아가기나 해. 라 캄베리의 영애는 자신의 일정은 내팽개치고 이렇게 농땡이 부려도 되는 거야?”

 

“어차피 오늘 일정은 없는 걸요. 오늘 하루 디즈니에서 나오는 쥐나 보면서 편안한 오후를 보내고 싶기도 하고요. 거추장스러운 남자 둘이서 이리저리 치고 박고 싸우는 건 제가 보기엔 너무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서 문제네요.”

 

“거기서 선정적이란 단어가 왜 나와?”

 

그렇게 폭력적인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잘도 봐온 주제에.

 

“아이고...삭신이야...이럴 줄 알았으면 잡화점에 있는 물품을 가지고 오는 건데.”

 

“그거 멸망의 지름길이니까 가져오지 말아줄래?”

 

레인의 섬뜩한 소리가 내 귀에 흘러가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서 위험을 경고했다. 안 그래도 마법공학 수류탄을 레인이 직접 던지는 바람에, 지도가 완전히 바뀔 뻔했지만, 지금은 우주 어딘가 터지면서 안전한 처리과정을 거쳤으리라 본다. 생각을 해보면 모든 위험한 것들은 우주 밖으로 내던지는 게 편리하지 않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를 블랙홀에 내던지는 방법도 생각해봐야겠다.

물론 블랙홀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렸지만...

 

“그러면 이제 슬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운명을 바꾼다는 건 모든 걸 바꾼다는 의미야.”

 

나는 주변이 황폐해진 리베리티아 고원으로부터 손을 뻗어 힘을 집중했다.

 

“모든 걸 바꾼다는 건 재창세와 같지. 그걸 원하는 건 레이베리아도 그렇겠지만, 사실상 이 힘은 창조주와 거의 같다고 봐도 괜찮아. 레이베리아는 창조주의 근원 중 일부인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뿐이고, 그러니까 나를 이용해서 재창세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 거지. 내 모든 힘을 뽑아서 빌려 쓰기 위함이기도 해.”

 

“그러면 당신이 신이 된다면?”

 

“아니. 나는 결국 반신이 한계야. 기껏해야 최대로 할 수 있는 게 엉망인 걸 고치거나, 이 세상에 있는 물품을 보고 이해해야 겨우 제작할 수 있는 정도지. 그 이외엔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마나로 나누는 귀찮은 작업까지 해야 하고.”

 

서서히 자연의 모습 그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리베리티아 고원을 바라보며, 리제로트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런 유용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을 손쉽게 끝낼 생각을 하지 않는 거죠?”

 

“그거야 아직 내가 잡화점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지. 기본적으로 인간이었다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가 있고, 인간의 이해 범위 밖을 내가 어떻게 다 이해를 하겠어? 그건 신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야.”

 

지금 이렇게 수복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솔직히 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의 길을 어느 정도 걸어봤다면 가능한 마법이다. 이런 광범위한 공간을 모두 되돌리기 위해선 거대한 마나가 필요하긴 해도, 마나만 받쳐준다면 이런 일은 마법사라면 가능하단 소리지.

 

결국 내가 한 일이라고는 신의 영역에 발자국을 살짝 가져다 댔는데, 안 보이는 벽에 의해 선만 아주 살짝 밟은 상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만일 내가 신이 되었다면...”

 

이런 바보 같은 일은 그만두고 지루할 만큼 평화를 가지고 사는 건데.

 

“아냐. 아무것도. 그러니까 결국 너의 의뢰를 해결하려면 모든 걸 다 바꿔야 해.”

 

“모든 걸 다 바꾼다면?”

 

“너의 과거로 가야지.”

 

나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했는데, 그와 상반된 리제로트의 얼굴은 마치 썩은 달걀을 본 눈빛이었다. 아니 썩은 달걀을 봐도 지금 저 표정보단 더 좋겠지.

 

“당신 정말 변태네요.”

 

“변태라니. 내가 곤충도 아니고 탈피하지 않는다고?”

 

“하아...저는 그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닐 텐데요!”

 

헉! 화났어! 무서워!

월터도 주먹을 들었어! 날 때리려고 하다니! 무서워!

 

“그런데? 각본가의 각본을 찢자는 건요?”

 

“아. 그거? 너무 위험해서. 나란 사람은 또 온순하고 평화적이잖아?”

 

“온순과 평화란 단어는 당신에게 절대로 안 어울려요. 그리고 어떻게 하루도 안 지났는데 다른 제안을 할 수 있죠? 그보다 제 과거로 가서 뭘 캐낼 생각이에요?”

 

“과거로 가서 지금의 ‘너’를 지울 거야.”

 

어마어마한 시간차를 뚫고 겨우 “네?”라고 대답한 리제로트의 말. 절망이 담겨있는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지 서서히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어떤 사람에게 “지금 당장 당신을 이 세상에서 없는 존재로 만들 겁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좋다고 “오! 예!”라고 대답하겠는가?

 

자신의 모든 삶을 부정하겠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월터가 스스로 움직였다.

 

-슈아악!

 

어마어마한 발차기가 내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마법방패<Magic Shield>를 전개해 막아내고 있는 동안, 날카로운 외침이 내 귀를 쑤셨다.

 

“어째서요! 당신은 제 편이 아닌가요!”

 

“당연히 너의 편이지. 너는 운명을 거부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상태가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안 들어?”

 

월터의 거대한 주먹이 마법방패를 뒤흔들었다.

 

“애초에 모든 힘을 포기하라는 루니아 누나의 말도, 지금 모든 걸 버리면 우리가 보호해주겠다는 간접적인 메시지였어. 하지만 너는 거부를 했지. 내가 말했잖아? 너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눈에 띄는 거라고, 결국 레이베리아에게 찍힌 거고 각본에 쓰여진 거야.”

 

그리고...그 각본의 내용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각본이든 내 일기장마저 무시하고 다른 선택지를 골랐어. 그 뜻은 결국 이 시간대는 원래 없는 시간대나 마찬가지야!”

 

월터의 공격이 멈췄다.

크게 동요하고 있는 리제로트는 자신의 존재가 허황된 가짜라는 사실에, 그만 무릎을 꿇고 넋을 놓고야 말았다.

 

“물론. 지금은 내 가설에 불과하지만, 너를 데리고 과거로 돌아가서 진실을 마주한다면, 도대체 어떤 개판이 벌어졌길래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증인이 될 수 있어. 유랑극단이 시간을 숨기고 공간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겨우겨우 해결했다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일기장마저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없거든. 그리고...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나는 슬슬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엘티노스는 자서전인 마냥 일기 같은 걸 잡화점에 남기고 있어도.

나는 단 한번도 내 일기장을 잡화점에 보관하고 있다는 소리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남이 보는 게 부끄러워서 내 전용 아공간에만 일기장을 넣고 다닌다고?”

 

그래. 처음부터 레인이 읽은 일기장은 거짓이었다.

=============================================================================================

환상계주는 급커브를 시전하였다!

글 이어보기

그림자 사냥꾼

다샴

※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샴 

1. 악마들의 총괄 책임자, 악령들의 제왕.

2. 날씨를 주관하는 신의 이름. 질병과 재난을 몰아내었다고 함. 고대에서 숭배받았음.

                                                 

소년은 동전 한 닢으로 강을 건넜고 얕은 냇가에서 제 발로 걸어와 마을에 당도했다. 이른 아침이었다. 빨래하고 물긷던 여자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이 그를 흘끔거렸다. 

 한 사람이 여자들의 틈에서부터 잽싸게 빠져나가 반쯤 허물어가는 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작은 여자 하나가 나왔다. 두 손으로는 넓적한 그릇을 받쳐든 채로, 다샴을 향해 조심조심 걸어오고 있었다. 옷가지를 널어 말리던 아낙 하나가 물가에서 빨래하던 여자를 향해 황급히 눈짓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가지고 오던 소녀의 뒷통수를 갈겼다. 여자는 음식이 담긴 그릇을 빼앗고 소녀를 꾸짖었다. 아낙들은 사뭇 일상적인 광경을 대하듯 모른 척 빨래에만 몰두했다. 다샴 같은 탁발승이 마을에 찾아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생존에 지친 여자들은 그악스러웠고 경계심이 강했다. 낯선 승려에게 보시할 여력이 없었다. 다샴은 직감적으로 다른 마을로 자리를 옮겨야 함을 알았다. 모래 바람 날리는 마을은 다들 비슷비슷했으나 그 안의 양상과 처지는 제각기 달랐다. 긴 걸음을 했건만, 이번에도 수확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다샴은 집 몇 채를 돌며 구걸하다가 종교를 신봉하는 노인 두어 명으로부터 음식 약간을 얻었고 그들이 내어준 헛간에서 잠이 들었다. 헛간은 아낙들이 빨래를 하는 강가 옆에 나 있었다. 

 이리의 울부짖음 같은 핏빛 메아리가 공기를 찢었다. 

 다샴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이질적이고 기묘한 느낌이 신경을 흔들었다. 목덜미까지 소름이 쭉 끼쳤다. 낯선 동시에 익숙한 감각이었다. 짐승이 내는 소리는 분명히 아니었다. 

다샴은 헛간 문을 열려 했지만 빗장은 바깥에서 잠겨져 있어 허사였다. 낯선 소년이 밤을 틈타 도둑질을 할지도 모른다는, 노인들의 까닭 없는 경계심 탓이었다. 졸지에 갇힌 꼴이 된 다샴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오래된 경첩이 내는 비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정적을 매단 달빛 아래 기묘하게 번득이는 남자들의 흰 동자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놀라지 말게. 

 

무리의 수장인 듯한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나직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다샴은 내색하지 않고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 물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특정한 대가를 바라고 찾아왔음을, 그리고 그것이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닐 것임을 알았다. 

 수장은 직접적인 대답을 꺼렸다. 따라오게, 라는 한 마디와 함께 다샴을 향해 눈짓했는데, 노인의 주위에 기립한 남자들의 눈과 자세는 일체의 거절을 용납하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다샴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고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순수한 의도에서 노인을 따라갔을 것이었다. 다샴은 횃불을 든 남자들의 선두에 선 수장과 자리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불빛이 마을의 끝편, 숲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추었고, 곧이어 바닥에 깔린 참혹한 광경을 비추었다. 돼지와 소, 닭과 같은 갖은 가축들의 시체들이 있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숲 속에는 악령들이 살고 있네. 이 악령들의 왕은 사악한 요정인데, 그는 악령들을 마을에 풀어놓지 않는 대가로 한 달에 한 번씩 산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네. 그게 벌써 삼 년이나 지난 일이로군. 

 

곧이어 남자들이 주둥이 부분을 단단히 묶은 포대를 이끌고 찾아왔다. 체구가 작은 사람이 능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다샴은 답변을 요구하듯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남자들에게 물었다.

 

잘 데리고 왔느냐? 착오는 없었고?

 

예, 어르신. 원하신다면 보여드릴까요?

 

노인은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없다. 어린 계집애면 충분해. 지금쯤이면 잠에 곯아떨어졌겠느니....

 

남자들이 포대를 이끌고 숲 가까이로 갔을 때, 소동이 일어났다. 포대 안에 갇힌 제물이 꿈틀거리고, 주위의 것을 발로 마구 차고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고 호소하고 애원하며 한바탕 난동을 피운 것이었다. 남자들이 포대 위를 사정없이 발로 차고 짓밟았다. 여자의 신음 소리가 어둠 속을 뚫고 귓속을 파고들었다. 

 

...꼭 저렇게 해야겠습니까? 제가 숲 속으로 들어가 악령들의 왕과 이야기를 해야겠으니, 무고한 사람은 풀어주시지요. 

 

다샴이 말을 이었다. 

 

어르신께서 굳이 이 밤중에 저를 깨워 이곳으로 함께 온 것은 제게 이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고자 함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어제 이 마을에 와 이곳 분들의 후의를 얻었습니다.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어 드리고자 합니다. 이런 일은 승려가 아닌 다른 누가 하겠습니까?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나 나한테나 안된 일이지만, 오늘의 제물은 꼭 바쳐야 하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네한테 한 번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자네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거야. 오늘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악령을 부리는 그 요정이 진노하고 말게야. 저기 붉은 달이 뜬 게 보이나? 오늘이 바로 그날일세. 자네는 재수 없는 시기에 우리 마을에 온 셈이야. 

 

가축으로 제물을 대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요정은 사람을 선호한다네. 그것도 어린 여자를 좋아하지.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또 우리가 어디 가축을 주어버릴 형편인가. 그게 전부 우리의 소중한 재산일세. 저게 모두 낭비라는 말이야. 

 

다샴의 눈 아래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제가 저 사람 대신 제물로 가지요.

 

난데없는 파격에 노인은 당황했다. 안될 것은 없었지만...

 

난 요정을 쫓아낼 경이나 읊어주기 바랐지 자네한테 그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아. 자네는 나이 어리나 승려이고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악령을 쫓는 신통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마음만 먹는다면 그리 할 수 있습니다. 한데 애먼 목숨을 희생시키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 아닙니까? 내일 같은 시각까지 차분히 기다려 보시지요. 제가 그리 하겠습니다. 

 

어르신, 하는 남자의 다급한 외침이 둘 사이의 대화를 끊었다. 

 

붉은 달이 갑작스럽게 사라졌습니다. 악령들이 찾아올 시간이 지났어요. 조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제물을 던져넣을까요? 

 

노인은 다샴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짙고 검은 눈은 일체의 빛을 반사하지도, 흡수하지도 않는 것처럼 반들거렸다.

 

무슨 영문에서인지 요정이 마음을 바꿨군. 같은 시간에 이 장소에서 보겠네. 

 

 다샴은 짧게 눈을 붙였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헛간에서 조금 더 나은 곳으로 옮길 것을 권유 받았다. 사람들의 태도와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다샴은 그들에게서 희망과 기대감을 보았고, 번들거리는 욕망 또한 읽었다. 횃불을 든 남자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노인의 눈이 그러했다. 

 그가 지내던 헛간의 아래 틈은 손바닥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너비가 있어서 캄캄한 와중에도 흘러가는 물결의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이 일을 끝낸 빨래터, 다샴이 건너온 냇물은 거대한 강과 이어져 있었다. 다샴은 한가히 앉아 있을 때나 그들을 위해 부적을 쓰고 처방을 한 후에면 그 강을 생각하곤 했다. 

 그는 다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물살이 칼로 자른 듯 깨끗이 끊어졌다. 

 다샴이 노인의 집에서 함께 밥상을 받을 때, 작은 여자 아이는 부엌 안에서 숨어 그를 지켜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다샴이 혼자 남자 소녀는 쭈뼛대며 그에게 다가왔다. 소녀는 다샴의 옷자락을 잡고 구석으로 이끌었고 그는 순순히 따라왔다. 소녀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간신히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는 들릴락말락했다. 소녀가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자 다샴은 그가 전날 밤의 희생물로 지목되었던 아이였음을 알았다. 

 

스님, 저는 오늘이 두렵고 내일이 두렵습니다. 악몽에 시달리다가 깨어나 현실을 자각하면 안도감이 들어야 마땅할 터인데, 실제를 인지하자마자 꿈 속과는 다른 종류의 또다른 지옥이 밀려옵니다. 꿈에서도 괴롭고 현실에서도 괴롭습니다. 

 

아이는 그 말을 하면서 손을 비틀며 흐느꼈다. 아이의 피부에는 온통 검보라색과 누런색의 멍이 피어 있었다. 

 

제 친척들은 제가 제물로 선별되었을 때도 군말 없이 저를 넘기신 분들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저는 결국 오갈 데 없이 친척에게 몸 하나를 의탁하는 어린 여자아이일 뿐입니다. 그 분들에게 저는 쓸모가 없어요. 저를 팔아버리거나 내쫓으려는 생각밖에 없는 분들입니다. 스님, 기억하시나요? 스님이 오신 날 저는 음식을 들고 스님께 가다가 크게 혼이 났습니다. 스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인심 사나운 이곳 사람들도 후한 대우를 베풀어주실 겁니다. 그때는 제가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스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제가 스님의 사당을 차려 대대로 그 숭고한 넋을 기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다샴은 아이를 축복하고, 그가 바라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빌어주었다. 다샴에게 조개껍질이며 소라기둥을 받은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정신없이 손 안에 쥔 것을 매만지고 들여다보던 아이가 물었다. 

 

저는 언젠가 반드시 바다에 가고 싶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떤 연유로 방랑하는 중이 되셨나요?

 

다샴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것은 소망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이었다. 소녀가 말했다.

 

제 어미는 간음하여 그 죄질이 더럽다고 하여 사람들이 쫓아냈습니다. 어미가 통정하여 낳은 아이인 저를, 사람들은 경멸하지요. 이와 같은 사건이 10년 전에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 이곳에 붙어있지만 그때의 사람들은 더욱 무자비해서, 간음한 남자는 추방하고 여자는 죽여 숲 속 깊은 곳에 묻은 후, 그 둘 사이의 갓난아기는 들개가 뜯어먹도록 외진 곳에 버려두었다고 합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노파 한 명이 아기의 이름을 손수 지어 옷 아래에 바느질로 새겼는데 다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기가 살아남았다면 스님과 같은 나이일 테지요. 

 

소녀는 그렇게 말했고,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 부엌으로 달려갔다. 

 밤이 찾아왔다. 달은 전날의 그것처럼 붉었다. 소름을 동반한 이상한 파동이 다샴의 몸 안팤을 뒤흔들었다. 익숙하고도 낯선 감각이었다. 

전날과 다름없이 횃불을 들고 선 남자들은 제 발로 걸어오기는 했지만 몸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 않는 그를 두고 걱정했다. 

 

어이.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다샴은 고개를 돌렸다.

 

마셔. 저기 있는 귀신 새끼들 족쳐버려야 될 거 아냐.

 

다샴은 남자가 건넨 병을 들어 마셨다. 걸죽하고 독한 술이었다. 다샴이 쿨럭대자 남자는 병을 치워버리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는데 지독하게 아팠다. 

 

 자. 그만하면 되었네.

 

뒷짐을 진 노인이 고개만 돌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앞에서 까마득하게 솟은 숲은, 그야말로 넓고 깊숙한 미궁이었다. 까만 유리알 같은 노인의 눈이 위로 휘어지며 웃었다.

 

부디 몸 성히 돌아오게. 

 

횃불의 무리가 일렁이는 어둠을 뒤로 한 다샴은 그보다 한층 깊고 습한 어둠 속을 향해 나아갔다. 

 

 울창한 잎이 우거진 저 위쪽은 새카매서 하늘과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바람이 불자, 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서걱거렸다. 어디선가 밤새가 울었다. 작은 동물이 풀숲을 헤치고 빠르게 사라졌다. 더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자 짐승의 기척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곳은 오롯한 생명이 있되 동적인 생물은 없는, 얼어붙은 시간 같은 공간이었다. 오직 나무와 풀 뿐이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이 멈췄다. 정적이 온 몸을 휘감았다. 몸의 내부와 외부를 뒤흔들던 파동이 더욱 거세어졌고, 미약하게 시작되던 두통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뛰놀았다. 피가 달아오르고, 사그라들고, 달아오르며 올라오다가 중간에서 차게 식으며 목덜미까지 죽 뻗었다. 

 

- 다샴...다샴....

 

유령들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았다.

다샴은 정신을 잃지 않으며 애썼다. 빠져나가려는 것을 최대한 붙잡으며, 악령들의 숲 사이를 한발 한발 걸어나갔다. 그의 목적은 그들이 아니었다. 

 암흑 속에는 작은 사당이 있었다. 숲은 계곡으로 이어진 통로였고, 사당은 계곡이 시작되는 탁 트인 저편을 등지고 자리해 있었다. 

 순수한 정념의 결정체가 다샴의 마음을 부분적으로 잠식했다. 분노, 억울함, 황망함, 슬픔, 혼란스러움. 어떤 감정은 오롯히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악령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의 혼 뿐만 아니라, 짐승들의 그것 또한 많았는데 그들은 서로를 인지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애꿎은 골칫거리를 더 늘린 셈이었다. 다샴은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울었다. 무엇 때문에 우는지는 자신조차 알지 못했지만 지극한 슬픔이 몰려와 그는 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홀려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았다. 최악의 경우, 악령들은 그의 몸을 차지하고 조종해 숲 밖을 나오게 한 다음 사람들을 해치게끔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에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정념만이 공명되었지, 그의 정신을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마치 숭배하는 것처럼 사당을 올려다보았다. 요정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사람들을 해치는 악한 요정에게 어떻게 사당이 존재하는 걸까? 나지막한 집은 오랫동안 보수되지 않아 이곳저곳이 부식되어 있었고,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푸른 이끼가 집을 뒤덮었다. 흰 물살이 쏟아져내려 귓청을 적셨다. 붉은 균열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눈이 까마득하게 흐려졌다. 

 그가 깨어난 곳은 모래 바람 부는 사막이었다. 여타의 사람들이라면 즉시 홀리고 말았겠지만, 그 곳은 요정이 만들어낸 환상임이 분명했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붉은 균열이 사막 전체를 번개처럼 내리치며 시선을 혼란케 했다. 다샴은 정신을 집중하고 호흡을 골랐다. 요정은 그에게 최후의 심판을 선고했으며 최종적 전투를 선언했다. 무엇이 나올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검은 회오리 바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몰아쳐왔다. 부르짖고 우짖는 영혼들로 가득했다. 땅으로 꺼지지도,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지도 못한 뭇 짐승과 인간의 영혼들이었다. 비늘이 달린 검은 새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그들을 경계하는 것처럼 울어댔다. 그 세계의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졌다. 

 

 노인은 사내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이동했다. 불타오르는 횃불의 무리는 달과 그 빛을 겨루기라도 하듯 한 자리에서 고요했다. 

 

공간이 깨졌고, 시간이 얼어붙었다. 외계적인 고요함이 함께했다. 거대한 침묵이 그의 미세한 입자를 빨아들였다. 어떤 순간부터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함을 잊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회오리 바람은 잦아들고, 약해졌다. 나비의 날갯짓 만큼이나 미약하게 줄어들었다. 회오리를 이루고 있던 영혼들은 생기 있는 먹잇감을 찾아, 그들을 받아들여줄 그릇을 찾아 거진 빠져나갔다. 

 육체는 구부려진 활이었다.

푸른 이끼로 휩싸인 사당에 절로 균열이 생기더니, 천천히 갈라지다가 맥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집은 흙 부스러기로 돌아갔다.

 숲 바깥의 그들은 붉은 달이 어둠에 먹히고 자취를 감추어버린 과정을 맨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구름이 걷히고 달은 본래의 흰 빛으로 돌아왔다. 경이와 두려움과 경탄에 찬 웅성거림이 일었다. 

 횃불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지만, 숲 속으로 들어간 소년은 나오지 않았다.

 마을에는 더 이상 악령이 출몰하지 않았다. 악령들을 부리는 요정이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숲의 중심부까지 다가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다가 숲을 통해 마을까지 흘러들어온 방랑자와 여행객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숲의 중심부 너머 탁 트인 곳에는 흰 계곡이 있다고, 그리고 그 앞에는 허물어져 쓰러진 작은 사당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어린 탁발승은 정말로 자기 일을 잘 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억을 잊었다. 기억만이 진실이 된다. 그들 가운데에서는 읽고 쓸 줄 아는 자들이 거의 없었다. 글을 아는 사람들은 죽고 썩었다. 기록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녀는 열 여섯이 되자 마을을 몰래 빠져나왔다. 숲 속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 사당이 쓰러지고 잎사귀가 우거진 검푸른 곳에는 언젠가 작은 묘석이 세워질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지킬 수 있는 맹세의 최선이었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8

591

 

 

새벽에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자장가를 불렀을 때, 레시아와 시나의 정신이 앞들과 뒷동산으로 출타하는 동안, 운명에 대한 고찰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생명은 태어나서 결국 죽는데. 그걸 자연의 섭리라고 보고 운명이라고 한다. 죽음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네크로멘서들은 운명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 자신은 죽었는데 시체로 되살아나버린 경우에는, 그것 또한 그 시체의 운명인 것일까?

 

결론을 말하자면 운명 또한 무질서한 무언가를 질서 있게 보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따라서 운명이란 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면 운명은 없다. 그저 자신의 미래가 어찌 되는지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의뢰는...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뭐죠?”

 

저 앞에 당돌하면서도 차분하게 입을 여는 소녀.

리제로트에게 받은 의뢰에 대해 정확한 내용으로 수정을 할 필요가 있다.

 

“너를 보자고 한 이유야 의뢰 때문이지.”

 

“그래요? 해결할 수 있나요?”

 

그리고 나는 잠깐 숨을 들이켜서 틈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이 가장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이끌어낼 짧은 시간. 그리고 나는 이야기한다.

 

“아니. 해결할 수는 없어. 그 대신...”

 

정확한 내용을 수정한다는 건 이런 의미다.

 

“너의 소망을 들어주지. 그거면 되지 않을까?”

 

“뭐라고요?”

 

어처구니 없어서 한숨이 입 밖으로 출타하려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있지만, 한숨을 쉬지 못하도록 빠르게 치고 나갔다.

 

“네가 전에 말한 그 의뢰는 사실상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거든. 그저 이야기 책에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이지 않게 했다고 너는 말하지만, 운명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살아있는 것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건 그렇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모르는 나의 말에 리제로트는 째려보며 대답했다.

 

“다만, 거기서 내가 죽어도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것도 맞지?”

 

“당신은 지금 살아있잖아요.”

 

“아냐.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내 존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도 몰라.”

 

“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여태 새벽부터 고찰한 내용을 단 한 문장으로 함축하기로 하자.

 

“그 책에 내 이름이 적히지 않는 이유야, 원래 나는 이 평행차원에 없던 존재이기 때문이야.”

 

는 거짓말이고 사실 그 책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잡화점의 대마력이 방어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이곳에 존재하는데 무슨 소리에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시공간은 본래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지, 하지만 과거에도 각본가의 책에 적혀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면, 어처구니 없게도 내 존재는 이 세상으로부터 본래 없었던 거야. 그거 있잖아. 죽음의 기사 4명 중에 하나가 왠 이상한 차원에 떨어져서 영문도 모르고 악마와 싸우는 그런 이야기. 아마 내가 케이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지.”

 

물론 이것도 거짓말이고...

 

“그러니까. 난 이 차원의 사람이 아냐.”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세요! 그런 소리 하려고 절 이곳에 불러서 소망을 들어준다고 한 거에요?!”

 

“당연하지. 생각을 해보니까 나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잖아?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진 못하지만, 말만 해. 뭐가 어떻게 되었든 소망 하나는 들어줄게. 그리고 나는 원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간다.”

 

그 소망 하나가 분명.

리제로트가 원하는 의뢰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뭐든지요?”

 

“아. 그렇다고 높은 수위의 기묘한 소원은 안 받아줘. 노블이니 뭐니 하는 그런 공간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19세 마크가 없다고?”

 

리제로트가 원하는 소망 하나를 들춰내는 것도 정말 어렵구나. 소녀의 마음이라는 건 이런 건가? 내가 잡화점 멤버의 장난으로 소녀가 되어본 적은 있긴 하지만, 음...지금은 무슨 심상인지 까먹었네.

 

“그럼...”

 

오랜 고민 끝에 말하는 건 아니지만, 리제로트의 입장에선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으리라 생각했다. 거대한 내적갈등에도 입을 연다는 그 자체가 결정했다는 소리니까...

 

“전 죽기 싫어요. 그러니...살려주세요.”

 

과연.

운명에 벗어나고 싶다는 말은 결국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건가.

 

“방법이야 많지. 대신 잃는 것도 많아.”

 

저런 소망을 듣고 절대로 공짜로 해줄 이유는 없다. 그래도 사람 하나가 살아나는 거니까 최대한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잃는 거라면?”

 

“우선 루니아 누나의 말처럼 그 힘을 버려야겠지.”

 

“제 초능력이요?”

 

“아. 물리적으로 하지 않아도 괜찮아. 단순하게 봉인하는 절차니까. 위급한 상황이나 죽기 직전에만 잠깐 발동하도록 만들 거야. 완전하게 빼앗지는 않아.”

 

선천적으로 발현된 초능력을 마법적으로 봉인한다는 그 자체는 개념이 달라서 불가능해 보이지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는 이 힘은 근본적으로 마나를 뛰어넘은 자원이다. 그러니 봉인마법과 이미지만 어떻게 해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째서죠? 힘이 있어야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잠깐 생각을 하고 나는 한숨을 지었다.

 

“애초에 힘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운명을 벗어나는 게 아냐. 오히려 힘이 있든 없든 운명은 존재하지. 아니, 난 딱히 운명론자가 아니니까 종착지라고 표현을 하자. 어쨌든 그 끝에 다다르는 원인 중에 하나는 힘이 없어서도 있지만, 너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해. 힘이 있든 없든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으면, 삼손도 대머리로 죽지 않았을 거야.”

 

“......”

 

“그러니까. 넌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어. 힘이라는 그건 어떤 것도 상징할 수 있지. 라 캄베리의 영애라는 타이틀도 그렇고, 유랑극단의 간부이기도 하고, 너의 초능력은 너무 강력해서 내 정신방어마저도 흔들어버릴 정도야. 게다가 아이리스를 건드려서 레인에게 죽을 위기까지 처했고, 레이베리아의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살려주다가 놓친 이후로, 나와 이렇게 몰래 만나면서 레이베리아에게도 죽을 위기에 놓여졌다. 결국 각본가는 너의 죽음에 대한 각본을 썼을 테고, 너는 그걸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거지. 맞잖아?”

 

“마, 맞아요.”

 

“각본가의 각본은 또 언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너의 각본을 적기 전에 내용을 본 거 같으니까. 지금 미래가 어찌 될지 몰라서 답답할 지경이네.”

 

내가 레이베리아라면 배신자에게 어떤 각본을 써서 비참하게 죽였을까?

나라면 깃털로 간지럼을 태워서 죽였을 거 같은데...

 

“당신. 저질이군요.”

 

“아니. 남의 독백을 읽고 그런 표정을 짓기 전에 사생활침해라는 거 몰라? 나는 뭐 상상의 자유도 없나? 자유도도 없는 GTO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고.”

 

“O가 아니라 A겠죠...아무튼 절 볼 때마다 그런 상상만 했어요? 변태.”

 

“그런 상상만이라니. 이 상상은 지금 처음 하는 거고, 앞으로는 안 할 상상이란 말이야. 그리고 형벌 중에 간지럼은 예로부터 내려온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 중 하나란 말이다. 염소가 네 발을 지속적으로 핥아본 적 없잖아?”

 

“당신도 없잖아요.”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건 여전하군. 아무리 궤변을 늘어뜨려도 그 사이에 포인트만 집어서 공격을 하다니. 어린 나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냉철한 아이였다.

 

“뭐 아무튼. 자세히 어떤 죽음을 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할 정도로 끔찍하고 잔인한 결말이 쓰여졌겠지. 아니면 지금 쓰고 있거나, 아니면 슬럼프가 와서 마감이 다가와도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았거나. 그러다가 담당자가 찾아와서 으름장을...아니, 이건 너무 갔구나.”

 

“하아...이런 바보 같은 사람에게 내 미래가 걸렸다니...”

 

“바보 같은 사람이라니 바보에게 실례군.”

 

“바보에게 실례인가요...”

 

지쳤는지 태클도 밍밍하게 들어오는군. 즐거운 잡담은 이 정도로 끝내자. 어쨌든 바보에게 미안한 내 입은 다른 주제를 향해 나아갔다.

 

“어쨌든, 그런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해. 예를 들어 죽는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하지 않는다거나...”

 

“그거 영원히 죽는 거라니까요?”

 

“아니면, 진실을 덧씌우는 거지.”

 

“그런 능력은 당신에게 있어요?”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없는데...

 

“꼭 그럴 필요까지 있나? 말했잖아. 결말에 도달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고, 예를 들자면...그래,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거나.”

 

분위기가 일그러졌다. 각본가의 각본을 찢는다는 방법을 상상이라도 했겠지만, 레이베리아의 힘이 막강해서 그럴 수는 없었겠지. 애초에 여신 중에서 가장 강력해진 레이베리아의 힘이 깃든 각본을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일 터.

 

“그러니. 각본을 찢고 자유가 되면, 불안정한 운명 속에서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건...불가능해요. 다른 방법은 있나요?”

 

여전히 부정하는 리제로트. 그런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있지. 당연히. 최후를 맞이하는 거야. 여러 방법이 있으니까 잘 생각해봐.”

 

잠깐만?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리제로트는 날 악인 취급하고 있을까? 심각하게 경계를 하는 눈초리를 하면서도, 조심스레 작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신이 제안한 것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뭐죠?”

 

“가장 높은 건 당연히...”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각본을 찢고 불태우는 일 밖에 없지.”

 

얼마나 자랑스럽게 말했는지 리제로트의 얼굴에 경악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정도였는데, 리제로트의 동요는 찻잔 하나를 깨먹고서야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거 레이베리아에게 직접 선전포고를 하는 건가요?”

 

“당연하지. 물론 그 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있어.”

 

“뭐죠?”

 

나지막하게 웃은 나는 지금쯤 리제로트의 옆머리로 슬쩍 손을 뻗었다.

 

“다, 당신 바보에요? 무, 무슨 짓을 하려고 점점 가까이 오는 거에요! 설마 소녀의 첫 키스라도 뺏을 작정으로...!

 

-파바박!

 

손에 따끔한 통증이 도사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손등에 박혀있는 샤프심이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꽂혀있는 상황.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어째서 너의 첫 키스를 가져가는 거냐? 지금 당장 살기를 품고 암살하려는 녀석부터 막아야지.

 

“내 한숨이 너의 말 때문에 가출해버렸잖아. 책임져.”

 

“채, 책임을 지라뇨!”

 

“어라? 카일 씨? 오순도순 대화를 하는 거 같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거에요?”

 

“암살하려던 녀석이 태연하게 내가 뭘 하는지부터 묻는 거냐? 그리고, 지금 리제로트를 죽이지는 마라.”

 

내 말에 어깨를 으슥이던 레인은 감정이 알 수 없는 가면으로 들이댔다. 그보다 그 가면은 언제까지 쓸 작정이냐? 지금 덥지도 않나?

 

“리제로트를 죽이지 말라는 그 말은 아직 그녀가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인가요?”

 

“이용가치가 아니라 의뢰인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 누구의 의뢰를 받고 정상적으로 해결한 적은 있냐?”

 

“없죠.”

 

“그거 자랑 아니거든?”

 

가늠하기 어려운 녀석들은 꼭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뭐, 한번 잘 막아보세요? 어차피 피도 흘리지 않는 걸로 봐선, 카일 씨도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모양인데 말이죠?”

 

“뭐. 인정은 하지. 그래도...신은 아니잖아?”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은 있어도, 신의 영역에 돌입하는 인간은 없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선 레인과 어쩔 수 없이 한판 벌여야 하는 건가?

===========================================================================

동원이라니!

내가 동원이라니!!!!!!!!!!!!!!!!!

글 이어보기

발레타

발레타 3-7

생리아의 성벽은 망치 소리로 가득했다. 인부들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손에서 손으로 돌을 날랐다. 발레트는 크레누와 함께 성벽 지도를 보며 공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지아니는 인부들과 성벽 틈새를 메꾸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아니의 초록 눈은 여전히 빛났고 삶을 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이었다. 그는 순간을 받아들였고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해나갔다.
시간은 강물이 흐르듯이 흘렀고 몰타의 공기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새로운 날이 찾아왔고 움츠린 것이 피어났다. 대지는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모든 것은 지나갔고 또 시작되었다. 보키아는 성과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의 부인은 아들을 데리고 시칠리아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발티는 갤리선으로 보내져 동생과 해후했다.
잠시 땀을 닦으려 고개를 들자 나디아가 성벽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지아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동생을 마중나갔다. 사람들은 나디아를 반기며 하나 둘씩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었고 발레트도 그녀를 발견하고 성벽 지도를 접었다. 모두 둥글게 앉아 나디아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마셨다. 갓 구운 빵과 치즈 한 덩이에 미소는 저절로 번졌고 마음은 풍족해졌다. 발레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내리쬐는 강한 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지만 태양 아래에서 먹는 점심은 너무나 달콤했다.
성벽 위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나디아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목 뒤로 기분 좋은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갔다. 나디아는 지중해로 눈길을 돌렸다. 바다는 헤아릴 수 없이 넓었고 갤리선 한 대가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은빛의 바다는 잠자는 아기의 얼굴처럼 평온했다.
발레트와 나디아의 시선이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한곳에서 멈췄다. 두 사람의 눈길은 스케베라스산에 오래 머물렀다. 산은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었고 몰타를 든든히 지켜주고도 있었다. 몰타로 들어오는 배를 환영했고 떠나는 배를 배웅해 주기도 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품었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스케베라스는 몰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하늘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나디아는 집을 나서 좁은 골목을 걷고 걸어 광장에 다다랐다. 성 바울 성당은 빛을 받아 눈부신 색채를 발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서서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는 그녀의 눈길이 어느 한곳에 멈춰졌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보고 순간 놀란 듯 했지만 곧 미소를 되찾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나디아 앞에 선 남자는 모자를 벗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해를 등진 남자는 어린아이처럼 맑게 웃었다. 나디아는 자신 앞에 나타난 안드레아를 보자 잠시 눈앞이 아득해졌다. 광장에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새소리와 분수대에서 흐르는 물 소리만이 그들의 귀에 들릴 뿐이었다.

글 이어보기

발레타

발레타 3-6

보키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얼굴 표정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릴라당의 방을 둘러보며 몇 마디 말을 했으나 얼핏 스치는 긴장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발레트가 방에 들어서자 보키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릴라당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발레트의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보키아의 눈이 놀란 듯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는 금새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고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보키아경, 누군지 알아 보시겠습니까?"
릴라당이 발티를 가리키며 물었다. 보키아는 비토를 보았으나 비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의 시종, 비토 발티입니다. 이틀 전, 오스만 정찰병과 함께 있다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릴라당이 보키아를 보며 말을 맺었다. 보키아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저의 불찰입니다."
보키아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번, 비토 발티가 살람 메메드가 아니라고 증언하셨지요. 몰타의 안전이 걸린 중대한 일임에도 경은 첩자를 감싸 수사에 혼란을 주었습니다."
릴라당이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20년 동안 제 밑에 있던 사람을 내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두었기에 또다시 연루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보키아는 안쓰럽다는 듯 발티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키아는 인정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며 자신을 포장했지만 그는 철저히 이해득실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보키아의 뻔한 답변에 릴라당과 발레트는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발레트는 방을 나갔고 보키아는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황을 파악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방에 들어온 발레트를 보자마자 보키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부인!"
보키아는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말을 계속 하지 못하고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부인,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릴라당이 정중한 태도로 의자를 권했다. 창백한 얼굴의 보키아 부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베일은 쓰고 있지 않았으나 검은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부인, 부군과 비토 발티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부인께서 알고 계신 전부를요."
발레트가 부인에게 말을 하자 보키아는 온몸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보키아 부인은 발레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개월 전이에요. 평소와 같이 성당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밖으로 나섰지요. 뜰에서 말소리가 들리더군요. 이 새벽에 누군가 싶었는데 남편과 비토였어요."
보키아 부인이 여기까지 말을 하자 보키아는 눈을 감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네가 살람 메메드라는 것을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첩자임을 증명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절대로 밝혀내지 못 해... 남편의 목소리였어요. 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남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발티는 그 후로 남편의 곁에 있지 않았어요. 집안일도 맡지 않았죠. 헌 옷을 입고 다녔고 남편에게 한 번씩 무언가를 보고했어요. 돈 후안경이 집에 초대되었을 때도 저녁 식사 중 남편에게 따로 보고를 했어요."
"에스파냐의 돈 후안경 말입니까?"
발레트가 물었다.
"네, 남편에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발티에게 무언가를 전해 듣고 다른 방으로 돈 후안경을 데리고 갔어요."
부인의 말이 끝나자 보키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눈밑은 파르르 떨렸고 입술은 어색하게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부인."
발레트는 큰 결심을 한 보키아 부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보키아 부인은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보키아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보키아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보키아 부인은 고개를 돌리더니 릴라당의 방을 나갔다.
"비토 발티를 아끼는 마음에 그의 정체를 묵인하였다는 경의 말은 믿기가 어렵군요."
릴라당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키아의 뒤에 섰다.
"에스파냐로 활동 무대를 넓히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돈 후안은 그 계획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카를 5세의 측근이지요."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보키아는 릴라당의 말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우리가 붙잡은 오스만 정찰병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오스만투르크의 병력과 함선 규모를 발티에게 전했다고 하더군요. 돈 후안경이 그 정보를 알고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발티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보키아는 더 이상은 못 듣겠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에스파냐를 비롯한 각국에서는 오스만의 동태를 항시 살피고 있습니다. 경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발티를 이용하여 오스만의 정보를 얻고자 했어요. 그 정보라면 에스파냐로 진출할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발티는 당신의 사익을 위해 이중첩자 노릇을 했던 겁니다."
발레트의 핵심을 찌르는 말에 보키아는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던 비토 발티가 흐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동생을 눈앞에 두고도 모른척 했었던 감정이 결여된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동생을 살려야 했어요... 동생의 목숨만은 살리고 싶었습니다..."
마치 막혀있던 무언가가 뚫린 것처럼 한꺼번에 모든 것이 쏟아졌다.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발티의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글 이어보기

그림자 사냥꾼

쥐들의 도시

 

또 하나가 죽었다. 죽음은 차례차례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이는 서서히 죽었고, 다른 이는 급히 숨이 넘어갔다. 죽음은 변칙적이어서 그들은 괴로웠다.
 쥐. 쥐 떼가 몰려와 곳곳에 파고들었다. 구석에, 틈바귀에, 저장소에, 우물에. 쥐들은 차츰 대담해져 치즈를 실은 수레나 과일 좌판에도 출몰했다. 사람의 눈에 띄이면서도 태연했다. 쥐들은, 차선책으로 풀어놓은 고양이를 물어죽였다. 새끼들은 쥐에게 몸피에서부터 상대가 되지 못했다. 쥐들은 늘어났고 죽음도 넘쳐났으나 시장은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사병들로 하여금 성문을 삼엄히 감시하도록 지시하고 저택의 문을 꽁꽁 잠근 뒤 엄격히 선별된 소수의 사람들에 한해 접근을 허락했다. 
 저잣거리를 떠돌며 종말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종말론자들은 곧 죽어 연설은 끊어졌지만, 다음 날이면 새로운 미친 자가 나와 같은 내용을 외쳤기에 끝나지 않을 노래 같았다. 시장은 그들마저 죽어 없어질 때까지 영원히 입을 다물겠다는 듯 잠잠했다. 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의 안위 뿐이었다. 
 도시는 고립되었다. 
오랜만에 저택을 찾아온 이는 왕의 특사도 구걸하러 온 거렁뱅이도 아니었다. 그가 걸어가자 덩치 큰 잿빛 쥐들이 꼬리를 흔들며 재빨리 흩어졌다. 가축과 사람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시체들은 파먹힌 과일처럼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는 그대로 걸어가 저택의 문을 두드렸고, 보초병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그는 병사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병사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렸다. 
 시장은 무엇이든지 불신했다. 불신이 그의 큰 자산이었다. 그는 무수한 사람을 배신하고 속여 재산과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타인 또한 믿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믿는 대상은 신이었다. 때문에 그는 갑작스레 등장한 이상한 청년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청년은 그가 본 인간들 중 단언컨대 새로운 유형이었다. 
"뭐야, 어떤 새끼가 저거 들여보냈어?"
시장은 대충 가운만 걸친 채 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그렇게 호통을 쳤는데 정작 쫓겨날 위기에 처한 청년은 여유로운 태도였다. 시장에게는 그 태도마저도 거슬렸다. 
"야, 저거 빨리 안 끌어내고 뭐해? 내 집에 웬 천한 광대 새끼를 들여보내다니 니들 제정신이야?"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시장을 막은 것은 순간적으로 눈앞을 휙, 스쳐간 커튼 같은 검붉은 형상이었다. 시장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유리잔이 손에서 맥없이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숴졌다. 고용인들이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그에게 다가와 고개를 받치고 입가에 액체를 흘러넣었다. 
"그동안 피로와 압박감이 심하셔서..."
한명이 조심스레 그렇게 말했고 시장은 흐려진 눈으로도 투명한 잔 너머에 비친 청년의 형상을 보았다. 언뜻 본 그것은 산불처럼 밝게 타오르며 일렁이는 샛노란 불길이었다. 잔이 입가에서 떨어지자, 청년은 이전과 다름없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시장님께서 보신 것은 헛것이 아닙니다."
검녹색 눈의 청년이 말했다.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붉은 장막을 보셨지요. 그는 쥐들의 제왕입니다. 쥐떼를 몰고 다니며 질병을 퍼뜨리는 악의 징조입니다."
"이런, 씨..."
시장은 이마를 쓸며 난색을 표했다.
"그게 지금 내 집에 들어온거야? 자네도 무슨 대책이 있으니까 날 보겠다고 한거 아냐.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들어줄테니 일단 날 살려주게. 난 여기 시장이야. 자네가 요구하는 건 전부 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저는 애초부터 그럴 목적으로 찾아왔으니까요."
청년은 거무스름한 얼굴을 숙여 그렇게 말하고는, 접견실에 저택의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하였다. 그가 펼친 것은 마법도, 의술도 아니었다. 음악이었다. 
 시장의 태도는 눈에 띄게 바뀌었다. 그는 시장의 권위에 걸맞는 의복을 갖추고는 즉시 성대한 연회를 베풀도록 지시했다. 
"내가 자네를 잘 몰라 실례를 했네. 도시를 질병으로 부터 구완해야 할 의무감과 부담감은 나날이 나를 짓밟고 갉아먹었다네. 그러나 이제 자네가 왔으니 나도 시민들도 한 시름 덜었네. 수많은 목숨이 자네 한 사람에게 달려있으니 모쪼록 최선을 다해주시게."
시장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 사람들이 무안해질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으나 눈으로는 줄곧 청년을 훑어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청년은 시장의 마음을 적잖이 풀어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쥐들을 밖으로 몰아냈으니 그들의 제왕은 힘을 잃고 쥐 떼를 좇아 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겁니다. 시장님의 저택은 당장에는 역병으로부터 무사할 것이나 바깥의 도시는 그렇지 못하지요. 제게 나흘의 기한을 주시면 도시 곳곳에 웅크린 병의 씨앗을 모두 제거하겠습니다."
 시장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청년이 쥐들을 모두 퇴치해주는 대가로 막대한 양의 돈을 요구했을 때도 기분좋게 승낙했다. 
 쥐들의 왕국에 구원자가 납시었다. 골목에서 광장까지, 그가 도시를 누비며 펼친 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기적이었다. 하잘것없는 피리 소리였을 뿐인데, 쥐들은 그 소리에 홀린 듯이 하릴없이 이끌려가다가 강가에 몸을 던졌다고, 그 광경을 목격한 이는 그렇게 말했다. 시민들은 단번에 찾아온 평화에 기뻤고 일견 얼떨떨했다. 그러나 쥐를 퇴치하는 대가로 시장이 그 이방인에게 천 냥이나 되는 금액을 지급하기로 약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시청 앞으로 몰려가 항의했다. 깨끗해진 광장에는 말쑥한 차림새의 시의원들과 시장이 엄숙히 서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소!"
한 남자가 그렇게 고함을 질렀다. 

"전염병 때문에 가축도 식량도 전부 동이 나버렸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판에 시장 당신은 우리의 목숨을 놓고 수상쩍은 떠돌이 외국인 하나에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버렸단 말이오? 우리가 언제까지 더 참아야 합니까?" 
 사람들은 비쩍 꼴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목놓아 시장의 탄핵을 외쳤으나 시장은 이를 타개할 간단한 대책을 세워놓았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쉬운 일을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검은 피부와 외지의 억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떠맡겨진 약속의 짐을 내던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일단 가장 쉬운 대책이 제안되자 그들은 만장일치의 동의를 보였는데 사뭇 오랜만의 일이었다. 시장은 조소 어린 거만한 자세로 청년에게 즉시 떠날 것을 명령했는데 쥐들이 사라진 거리는 깨끗이 닦여 윤기가 흘렀고 건물은 위용이 넘쳤다. 꾀죄죄한 아이들이 쥐처럼 빠르게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수레를 끌던 노인은 바퀴가 죽어 널부러진 돼지의 시체에 걸렸는데도 제자리에서 멈춰선 채 나아가지 않는 수레를 밀고 밀기만 했다. 
"좋은 경험으로 여기도록 해. 이 또한 신이 정하신 운명이니, 다음 번에는 조금 더 똑똑하게 행동하기를 바라겠네. 그 꼬라지로 와서 천 냥을 요구하다니, 그야말로 분수에 맞지 않는 요구 아니던가. 주제 파악을 하도록. 이만."
 시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휘휘 내저었고 경비병은 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청년은 시장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모습을 드러낸 시장은 커튼을 내려 청년의 시야를 막았다. 마치 배신을 기다려왔다는 듯, 숲의 가장 깊은 구역을 닮은 눈 속에 환한 불빛이 켜졌다. 모멸 당한 청년은 등을 돌리며 모자를 깊숙히 눌러 그 빛을 삼켰다. 도시의 씨는 모조리 말라 버릴 것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 어리고 약하고 무방비한 존재들은 쥐들이 그러했듯 정체불명의 음악에 이끌려 물가로 하나하나 춤추듯이 행진하다가 물 속으로 몸을 던질 것이었다. 
 사람들은 허둥지둥대다가, 전말을 알아차리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하늘을 저주하고, 자신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고, 이제는 사라진 이방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분노는 시장에게 향했다. 갓난아기를 제외한 아이란 아이는 모두 사라졌다. 골목의 거지에서부터 시장의 자식들까지 하룻밤만에 연기처럼 홀연히 증발했다. 시장은 자신도 같은 피해자일 뿐이고 시민들 모두가 이미 동의한 사안이 아니냐며 시민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분노로 눈먼 그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시장은 쥐의 비가 쏟아지는 꿈에 시달렸다. 쥐들이 쉴새없이 떨어져내리며 지붕과 바닥과 기둥에 부딪혔다. 쥐들은 금화를 갉아먹어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건물을 갉아먹고, 치즈와 사과를 갉아먹고, 사람을 갉아먹었다. 열 살 난 아들은 그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아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슬프게 뜬 채 시장을 바라보았다. 쥐들이 들불처럼 번져 아이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단 한번도 의도하지 않았다. 
 -전염병이 저주가 아니었어. 그 놈이 찾아왔던 게 저주였던거야. 쥐들의 출몰은 그 놈의 출현을 위한 전조에 불과했어!
시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창 너머 떠오른 달은 너무도 깨끗하게 보였다. 잿빛이라고는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날의 조용한 도시 속 사람들은 슬픔에 지쳐 미적거렸다. 시장은 이불을 제치고 숨겨왔던 상자를 꺼내 열었다. 칼날은 새것처럼 순정하게 빛났다. 그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죽거나, 청년이 죽거나 , 그 한 가지만 생각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일 없는 계획이었다. 오늘 밤에 끝낼 생각이었다.
 '너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나는 침묵을 원했지만 넌 그보다 더한 것을 빼앗아갔다. 쥐들은 사라졌지만 도시는 생기를 잃었다.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거였어. 네가 인간이든, 요정이든, 오늘 밤에 결판을 내야겠다. 그 이상한 음악으로 날 쥐새끼들처럼 만들어보라구.'
 시장은 청년이 찾아온 날 보았던 붉은 장막 같은 형체를 기억했다.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청년이 쥐의 왕이니 역병이니 했던 그것을 떠올리자, 무섭기는커녕 기묘한 쾌감을 동반한 저항 욕구가 솟았다. 가까이에 두면서도 결코 소중함을 몰랐던 보석이 휘발해버렸다. 그것이 사라진 이상 그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 그 전에는 깨닫지 못했을까? 시장은 칼을 품 속에 감추고 검은 밤 사이를 내달렸다. 아무도 모르는 구멍을 빠져나왔을 때, 때모를 소나기가 내렸고 천둥이 으르렁댔다. 피부를 때리는 빗발의 소음 틈으로 찍찍대는 쥐 소리가 들렸다. 쥐들의 제왕은 창궐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글 이어보기

발레타

발레타 3-5

발레트는 모래색 돌로 차곡차곡 올려진 건물 벽을 손끝으로 만지며 걷고 있었다. 처음 몰타에 발을 내딛던 날이 떠올랐다. 지중해 한가운데 솟은 작은 도시는 로도스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발레트는 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을 벽에 댔다. 차가운 기운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타로 들어왔고 자신도 그들과 같이 스쳐가는 한 사람일 뿐이지만 이 벽은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발레트는 모래색의 돌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뜻밖의 목소리에 시간은 현재로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자 영롱한 초록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디아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본래보다 밝게 보였다. 나디아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로 발레트에게 걸어왔다.
"나디아!"
발레트는 벽에 올렸던 손을 내려 허리춤에 찬 칼을 잡는 시늉을 했다.
"아침 일찍 어딜 가는 거에요?"
"성당에요."
나디아는 눈을 크게 뜨며 발레트를 보았다. 그녀는 발레트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눈으로 묻는 것 같았다.
"나도 성당에 가는 길이에요."
발레트는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손을 내밀어 나디아에게 길을 내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아침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고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갖고 있었다. 골목은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고 소리는 리듬이 되었다. 리듬에 따라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이따금씩 마추치는 시선은 미소를 불러왔다. 모퉁이를 돌자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은 빛에 의해 제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건하고도 평화로웠다. 발레트는 알 수 없는 힘을 느끼며 광장으로 한걸음씩 내딛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아름다웠다.
"아침의 광장은 늘 황홀해요."
나디아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침, 성당으로 향하는 똑같은 길이지만 그녀에게는 매순간이 특별했다. 발레트도 나디아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장 저 편으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숨이 멎을 만큼 경이로웠다. 두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 주위에 감탄하며 성 바울 성당으로 이끌려갔다.


성당 앞에는 며칠 전과 같이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발레트는 마차를 힐끗 보고는 나디아와 함께 계단을 올랐다. 성당 정문을 열고 들어서자 누군가와 얘기 중이던 피오르 신부가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부 옆에는 검은 베일을 머리 위로 올린 여인이 있었다.
"오, 나디아."
피오르 신부는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베일을 쓴 여인은 발레트와 나디아를 보자 얼른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감추더니 신부에게 인사한 후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방금 지나간 여인은 보키아경의 부인이 아닙니까?"
발레트의 물음에 신부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발레트는 빠른 속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만!"
여인의 등 뒤로 발레트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베일을 쓴 여인은 뒤를 돌아보더니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보키아경에 관해 할 얘기가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보키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여인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뒤따르던 발레트도 걸음을 늦췄다. 여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녀는 얼굴을 가렸던 베일을 올렸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3 - 7

590

 

 

 

그나마 다행이라면 평생 여장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점. 결국 불행해지는 건 잡화점에 돌아오고 나서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찾아온 나의 거주지라는 것은 또 다른 태클의 시작이었으니까.

 

“주인은 짐의 저주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가? 흐응...짐에 대한 애정이 식었구나.”

 

“남에게 저주를 씌운 것이 어떻게 애정의 표현으로 될 수 있는지 서술해보시죠. 5점을 드릴 테니까.”

 

“1번이니라.”

 

“객관식 아니라고!”

 

애정이 식었네 뭐하네 하는 주제에, 결국 검은 고양이 상태로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레시아. 13대 마왕이고 타락의 마왕이면서, 결과적으로 내 사역마였으나 지금은 결혼을 했으니까 부부관계인데. 솔직히 어떤 부부가 남의 옷에 저주를 퍼붓냐고?

 

아마. 나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레시아의 입장에서는 나는 좋은 마나 창고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좋은 장난감 하나라고 취급하겠지.

 

“그렇군. 주인은 그 옷이 귀엽지 않아서 해주를 한 것이로군.”

 

“아니. 남자가 여장을 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이미 글러먹었다니까요.”

 

“뭐 아서라. 짐이 조만간 더 귀여운 옷으로 주인에게 선물할 테니 말이다.”

 

“아 글쎄! 여장 때문에 벗어 던진 거라니까요!”

 

이렇게 소리를 쳐도 레시아는 레시아 나름대로만 생각을 하는 중이다. 어깨 위에 올라온 하얀 올빼미는...

 

“마스터에게 입혀야 할 옷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여장이 아닙니다.”

 

“그래도 시나 밖에...”

 

“저처럼 하얀 날개를 단 천사복장을 해야 합니다.”

 

“도대체 너희들이 왜 그런 걸로 싸우는 건지 이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태세전환이 우디르를 넘어 드랙스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제발 나를 피곤하게 하지 말아줄래?”

 

잡화점 안에 돌아가도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 그래도 밖에서 골치 썩는 것 보단, 여유를 가지고 조그마한 트러블에 대응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잡화점 창가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몸과 정신의 피로를 달래보려고 했으나, 어린 아이처럼 달라붙는 레시아와 시나에 의해 편하게 쉰다는 단어가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버렸다. 나중에 지구로 모여서 롤링발칸이라도...아니, 너무 갔으니 그만하자.

 

“뭐. 이렇게 하루 종일 붙어있게만 해준다면 여장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인기가 은근히 좋다. 아니, 좋아도 너무 좋다. 어째서 연관되는 사람들마다 주인을 원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저를 원하는 게 아니라 제가 일을 해결해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건 사람의 호불호로 갈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와 위치가 어디인지부터 파악해야 하는 일이다. 잡화점의 주인은 기괴하게도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긴 하는데, 잡화점이라면 보통 진귀한 물건이나 대규모의 잡화물품을 의뢰 받는 건 줄 알았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해결사나 잡일을 처리하는 1회용 노동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그 규모가 매우 커서 그래도, 의뢰의 보상이 어째서인지 백장미의 매출을 못 따라가고 있는 아이러니함마저 의구심이 들기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뢰를 하기 위해 나를 지목하는 사람과 몬스터가 많이 있었다.

 

과거에 실베스 씨가 기괴한 청혼을 위해 도와달라는 말부터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제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할 거니까. 리제로트의 의뢰만 처리하고 돌아가죠.”

 

“그리고 그녀도 잡화점에 들어오는 겁니까? 마스터?”

 

“아니. 리제로트까지 과거로 데려갈 이유는 없지. 그런데, 지금 당장 레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찰서에서 풀려난 모양입니다. 이 세상에는 초능력자에 대해 인식을 하고 있지만, 레인의 경우에는 감춰주고 숨겨주는 자들이 있으니까요.”

 

다른 곳에서 아리엘이 터벅터벅하고 걸어왔다. 조금은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진 키가 크지 않은 상태. 아니...오히려...

 

“왜 키가 작은 거냐?”

 

“무슨 소리에요? 제 키는 원래부터 작았다고요? 아담한 사이즈를 좋아한다는 카일 씨의 성향에 맞춘 건 아니라고요?”

 

“듣기만 해도 오해 수치가 100정도 쌓일만한 발언은 그만둬라. 그리고 미묘하게 츤데레 캐릭터를 따라 하려고 들지도 말고. 너의 캐릭터는 애초에 뭔지 나조차 이해가 안 되니까.”

 

“전에는 마신을 한번 했었죠.”

 

“그런 거 말고!”

 

자주 못 봐서 그런 건지 몰라도, 사람이 성장을 한다면 키가 크고 있다는 걸 느껴야 하는데, 아리엘의 경우에는 키가 작은 건지 아니면 저게 성장한 건지 애매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보다 마왕님. 여신님. 제 자리가 없잖아요!”

 

“그보다 신랑. 내 자리는?”

 

루시피나는 요리하다 말고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내가 교제를 한다고 했을 때 정상적인 취급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늘씬한 미녀. 레드 드래곤의 일족임과 동시에 첫 혼인 대상자다.

 

어른스러운 면이라기보단 다정다감한 누나의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것이 평상시의 모습이고, 루시피나가 화를 낸다면 그것보다 더 살벌한 상황은 없다. 그나저나 내가 어쩌다가 이런 말이 들어야만 했을까? 아니, 그보다...

 

“모두가 그렇게 몰려오면 제 입장이 어떻겠어요?”

 

“행복하지 않는가?”

 

“행복이기 이전에 힘들다고요!”

 

모든 남자들이 그런걸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미녀나 미소녀들이 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달라붙는 상황이 현실로 찾아온다면, 사실상 좋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소리다. 최소 0.3초 동안 망설여지는 순간이 있는데, 과연 저 사람들이 다 달라붙으면 나는 숨이라도 쉴 수 있는가?

 

생존부터 걱정하는 내 입장에선 행복하기 이전에 살아 돌아갈 수 있느냐가 더 걱정이다.

 

“그래도 짐의 취급을 공기로 하는 것보다 좋지 않는가? 아니면 뭔가? 짐이 귀여운 여자아이가 되어 공기취급으로 되는 걸 원하는 것인가? 역시 주인은 은팔찌를 차야 하는 인물이로다.”

 

“아뇨. 언제 공기취급을 했는데요? 제가 레시아를 공기취급 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마스터. 저희들의 출현이 어째서 잘 일어나지 않는지 설명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희들이 그 기괴한 여장만 시키지 않았더라면, 나의 행적은 잡화점 내부로부터 시작했겠지!”

 

일어날 때 개운하게 일어나면서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평화로운 나날을 기리고 있다만, 요즘 들어 자고 있는데 계속해서 결계가 깨져나가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부부인데 뭐가 문제냐고 말하지만, 자고 일어났을 때 초죽음 상태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늘도 눈을 떠보니 여장이 되어있었습니다. 라는 상황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야.”

 

“맞습니다. 마스터.”

 

“아니라고!”

 

하긴 이미 여긴 평범이라는 말이 치고 들어갈 수 없는 건가? 내 인생에 평범이라는 단어와는 더 이상 견우와 직녀마냥 만날 수 없는 건가? 아니, 만날 수는 있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실에 불과하나?

 

혹은 내가 평범에 도달할 수 없다는 진실을 가지고 있거나, 나는 평범할 수 있다는 진실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말장난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결국 평범이라는 단어와 사이 좋게 지낼 수 없는 일.

 

어쩔 수 없는 현실에 한숨을 접어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주인에게 밀착하려는 자들이 많은가!”

 

“어째서긴요. 레시아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이 건에 대해선 정리가 필요하겠다!”

 

뭔가 또 난장판이 될 징조가 보인다. 안 그래도 리제로트의 의뢰를 빨리 해결하고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레시아가 저러면 의뢰는 과연 언제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서 뭐 어쩌시려고요. 1주일마다 달라붙을 수 있는 사람들을 지정할 겁니까?”

 

“아니. 짐이 주인에게 달라붙어 있다면 상관이 없지만, 짐이 주인의 곁에 없을 때는 그 누구도 달라붙지 못하도록 하겠노라!”

 

너무 당당한 나머지 이 고양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못 알아 들을 지경이다.

 

“말도 안 됩니다. 냥캣. 그런 억지를 부리기 전에 냥캣의 인성을 다시 되돌아보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짐은 본래 마왕이니라!”

 

고양이와 올빼미가 또 한바탕 싸우고 있는 동안, 방 안에서 짜증나는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지 않는가! 모처럼 첩이 자고 있는데...어라? 카일이여! 언제 온 것이냐?”

 

성인이라고 보기엔 한참 힘든 외형이지만, 연한 초콜릿 피부를 가진 소녀는 사실상 어마어마한 신급의 카테고리로 들어간다. 짙은 흑색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을 무렵.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흔들의자가 더 뒤로 젖혀짐과 동시에 무게가 늘어났으니...

 

“아아.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 하지 않는가? 첩은 언제나 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빛 잠옷이라는 게 그리 귀엽지는 않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내 가슴팍에 파묻었다.

 

“자, 잠깐만! 허무의 공작! 짐이 보는 앞에서 주인에게 뛰어들다니!”

 

“어라? 아까 마왕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왕님께서 붙어계실 때는 그 누구도 상관없다고.”

 

“아직 개정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조만간 세린에게 찾아가 내 개인적인 방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그보다, 잡화점의 규칙에 개정하려는 건 아니겠지?

 

잡화점 규칙에 나에게 달라붙는 규칙을 적는다면 그거야 말로 골치 아픈 건 없지만, 애초에 주인은 나라서 내가 직접 개정하지 않는 이상, 그런 바보 같은 규칙은 늘어나지 않는다.

 

잠깐? 규칙이라?

 

“맞아! 규칙! 규칙을 개정하면 되는 일이었어!”

 

“마스터?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뜬금없는 나의 외침에 시나가 당황한 듯 묻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는 규칙을 바꿀 수 있으니 솔직히 내가 인간이든 아니든, 마지막 항목에서는 ‘어떤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에 인간을 뜻한다. 그러니까 저 어떤 사람이라는 말을 제대로 바꾸기만 하면, 내가 인간을 초월하든 말든, 잡화점의 주인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아니. 다른 사람들이 내가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려고 하길래, 다른 방법이 없는지 생각했는데, 그냥 잡화점의 규칙을 잠깐이나마 바꾸면 되는 거였어.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이 되었네. 이제 리제로트의 의뢰만 어떻게 해결하면 과거로 그냥 돌아가자고. 미래에 더 있는 건 위험하니 말이야.”

 

“그렇군요. 그런데 마스터.”

 

“응?”

 

“마리아와 얼마나 붙을 생각이십니까?”

 

사, 살기!?

 

작은 올빼미에게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이전에!”

 

나는 빠르게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안 그러면 레시아와 작정하고 또 다시 마법을 날릴 테니까.

 

“지금 나가서 할 일이 있어요.”

 

“안 된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랑을 증명해보거라!”

 

“뭘 증명해요!”

 

“그렇다면 사랑의 저주를...”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잖아!”

 

결과적으로 다시 저주받은 여장을 당하기 전에, 모두를 설득하는데 애쓰고 모두가 진정할 때쯤 시간은 흘러 새벽에 이르렀다. 언제나 규칙에 따라 잡화점 운영을 하고 있는 나는, 레시아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리제로트라는 자는 전에 주인을 납치한 자가 아니더냐? 그런데 이번엔 목숨을 구해줬으니 도와달라는 건가?”

 

“뭐. 그런 거라기보단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엘 샤다이를 말하는 건가?”

 

“괜찮아. 문제없어. 라는 대사를 하기 싫으니까 이상한 요소를 가져오지 마시죠.”

 

검은 고양이에서 가지런히 앉아있는 여성으로 변한 레시아. 지금 상태에서 정신방어가 약한 사람이 본다면 죽거나 심한 경우 침을 흘린다고 하는, 변칙적인 패시브를 지니고 있었으나, 잡화점 멤버에는 정신방어능력이 모두 뛰어났으니 발작을 일으킬 일은 없었다.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을 스윽 하고 쓸어 내리며 팔짱을 끼고 있는 마왕. 그러면서도 위압감이나 카리스마는 여김 없이 뿜어져 나왔다. 칠흑의 드레스로 무장된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

 

“그래도 그런 장비는 괜찮은가? 에서 그런 말장난은 괜찮은가?로 변환하면 써먹을 수 있지 않는가?”

 

는데...진지하게 생각한 것이 겨우 그거라는 생각에 내 자신이 화가 났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그런 생각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아뇨. 못써먹어요.”

 

“써먹을 수 있노라!”

 

어디까지 우기는 거냐.

 

“리제로트가 뭔가 꾸미고 있는 건 확실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유랑극단이건 레인에게 암살당하던 둘 중 하나는 못 막을 거 같네요. 잡화점 안이 가장 안전하지만...”

 

“유랑극단의 신분이 있으니 이쪽에서 보호하는 것은 무리로군.”

 

분명 또 “주인은 어린아이가 그렇게도 좋은가!”라고 말할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지만, 내가 기대한대로 정확한 포인트를 짚어서 레시아가 대답했다.

 

“맞아요. 지금 상황에선 유랑극단과 선전포고를 한 이상. 리제로트를 통해 이곳의 위치가 들킬 수 있어요. 기껏 가짜 좌표를 깔아놔도 포위망이 좁아지는 판국에, 트로이목마처럼 들어오는 날엔 끔찍한 경험을 하겠죠.”

 

“맞다. 그 뼈다귀 샌...”

 

“제발 부탁인데 그 이상 다른 요소를 가져오면 아이언 클로부터 날릴 겁니다. 그러니 그만하시죠.”

 

진지한 이야기에 ‘골’판지 같은 개그가 나오면 진심으로 때릴 테다.

진정한 양성평등주의자는 여자에게도 드롭킥을 선사할 수 있는 신사이지 않는가?

맞을 짓을 하려고 매를 벌면 사랑의 매로 다독거리면 된다. 물론 그 사랑의 매가 아이언 클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마스터.”

 

눈빛보다 더 새하얀 소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시나? 자고 있는 중 아니었어?”

 

“이야기 소리가 들려서 깼습니다.”

 

분명 잠이 많긴 하지만, 새벽에 이야기 소리가 시끄러워서 깨어날 줄은 몰랐다. 언제나 내 몸 속에서 동화를 한 체 휴식을 취하지만, 지금 이렇게 나오는 경우는 전혀 없을 텐데.

 

“흥! 그대로 영원히 자고 있지 그런가? 비둘기.”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 입니다. 냥캣.”

 

“어쨌든간! 지금은 주인과 짐의 사랑의 밀담을 하고 있지 않는가! 방해가 되니 저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자기나 하거라!”

 

“제가 눈을 감는 장소는 언제나 마스터의 품입니다. 이렇게 꼬옥하고 안으면 언제든지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습니다.”

 

정신차려보니 언제부턴가 나에게 안겨서 하품을 하는 시나.

 

“잠깐! 언제부터 나에게 안겨 있는 거야?”

 

“주인!”

 

“아니! 잠깐만! 이상해! 킹 크림존이 있는 거 같아요! 지금 시나가 저에게 안기는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만 남았잖아요!”

 

진노하는 레시아를 진정시키려면 얼마 동안의 노력이 필요할까? 한줄기의 희망은 있는 걸까? 음...이때는...

 

“레시아도 오시던가요...”

 

-꼬옥

 

“비어있는 반은 짐의 자리니 넘보지 말거라.”

 

“냥캣이야 말로 제 영토를 침범하지 마시죠.”

 

이제서야 저 둘을 어느 정도 다루는 요령이 생기는 듯했다.

 

“정해진 운명을 부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자연의 순리대로 맞춰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운명을 부수고 다른 미래를 새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이 자연의 순리대로 맞춰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지요.”

 

레시아와 시나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마왕과 여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갈등되는 고민 속에 천사와 악마가 싸우는 듯한 모습과는 달리, 신비로운 운명론에 대한 무거운 분위기만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주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스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사람의 질문은 하나로 뭉쳐졌다.

 

“모르죠. 저야.”

 

내가 어찌 알겠나?

 

“어쩌다가 운명이 부셔진 것마저 운명이라고 한다면 애초에 운명이란 건 생각하지도 않아요. 원인과 결과와 나비효과가 겹쳐진 게 운명이라고 해도, 솔직히 그게 운명인지 아닌지는 알게 뭡니까? 막말로 제가 다른 세계에서는 레시아와 대적관계가 되었을 때도 레시아가 지던 이기던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된다. 주인을 이겨서 짐에게 복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대화의 취지는 운명 같은 거 생각하지 말자라는 거고! 어째서 저를 복종시키는 건데요!”

 

딴 이야기로 빠져나가는 게 마왕의 일인가?

 

“그때는 제가 마스터에게 가호를 내리고 있을 테니, 냥캣은 소멸이나 당하시는 게 편할 겁니다.”

 

뭐...다른 세계에서도 레시아와 시나는 싸우는구나.

애초에 존재 할 일이 없는 세계일 터인데...

 

“서로 싸우지 말고 각자 방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세요.”

 

“주인의 품이 짐의 방이다! 여기서 자겠다!”

“마스터가 계신 곳이 제 휴식처이니 이 상태로 잠을 청하겠습니다.”

 

잡화점을 운영해야 하는데 자장가부터 불러주게 생겼네...

===========================================================================

월요일에 축구 때문에 일찍 퇴근하고 써내렸다가 지금 올립니다.

꽤 늦었는데...원인은 당연히 일 때문에...

글 이어보기

발레타

발레타 3-4

발티는 항구 일꾼으로부터 전갈을 받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글을 빠르게 읽은 후 순식간에 종이를 입안으로 넣어 삼켜버렸다. 그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뜰을 가로질러 나갔다.
도시에 어둠이 스며들었다. 인적이 없는 컴컴한 길에 허름한 복장의 발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어느 골목에 들어가 막다른 길에 접어들었다. 누군가 그의 등을 건드리자 발티는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돌았다. 몰타인처럼 변복을 한 투르크 정찰병이 입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뜻을 보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오? 연락은 내쪽에서 하기로 했잖소."
발티는 목소리를 낮추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정찰병은 다시 한번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대답했다.
"중요하게 전달할 사항이 있어 만나자고 했소. 급한 일이오."
검은 눈의 남자가 심각하게 말하자 발티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요?"
정찰병은 숨을 밖으로 길게 내보내며 눈을 내리깔았다.
"일이 생기..."
정찰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티의 어깨가 뒤로 젖혀지며 팔이 꺾였다. 발티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며 당황해 했으나 이내 상황이 파악된 듯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발티는 변복을 한 검은 눈의 사내를 쳐다보고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순순히 기사들을 따라 좁은 골목을 걸어갔다.

 

 

릴라당과 발레트는 서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정적을 깨고 로메가스가 들어와 릴라당에게 보고를 했다.
"단장님,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게."
릴라당이 대답하자마자 기사 두 명이 발티의 팔을 양쪽에서 잡고 방으로 들어섰다. 발티는 손이 앞으로 묶인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발레트는 발티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토 발티, 아니 살람 메메드. 넌 몰타 첩자로 체포되었다."
릴라당이 입을 열었다. 발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발레트는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소. 난 현장에서 잡혔소."
발티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대답했다.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감정을 숨긴 텅 빈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상대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비토 발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군."
발레트는 발티 앞에 섰다. 발티는 발레트를 보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너의 신분을 보키아는 왜 숨겨준 거지?"
발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끝난 것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끝을 알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후련했다. 발티는 자신 앞에 놓여질 것을 이제 당당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발레트는 릴라당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릴라당은 내보내라는 눈짓을 했고 로메가스는 발티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예상대로 발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
릴라당은 의자에 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정입니다. 보키아가 연관된 것은 끝까지 말하지 않을 겁니다."
릴라당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키아는 발티가 첩자임을 알고서도 감춰 주었고 사욕을 위해 그를 이용했어. 이 일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보키아는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가 꼼짝할 수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글 이어보기

유리병 편지

인스턴트 맨

 

 

 

  퇴근 후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차키를 집어드는 것. 군더더기 없는 몸짓과 함께 그대로 자신과 어딘가 묘하게 닮은 차에 올라타 미끄덩, 30분을 달려 그가 도착한 목적지는 편의점이었다. 익숙하다는 듯 레토르트 식품을 넣어둔 곳으로 직행, 몇 개 남지 않은 도시락 중 가장 가성비가 좋은 걸 골라 망설임 없이 계산대로 향했다.

 

 마흔을 목전에 둔 나이지만 아직은 삼십 대, 대기업 근무, 본인 명의 20평형대 아파트 보유, 큰 키, 서글서글한 외모, B** n시리즈의 자차 소유, 호탕한 성격. 다른 사람들 말에는 그냥 웃어넘기거나 혹은 변변치 않은 핑계를 대곤 했으나, 그는 사실 자신이 왜 여태껏 혼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의 직장 동료나 같은 나이의 인간들과는 달리 꽤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보다 감성적이니까, 그러니 감수성이 넘쳐흐르는 나는 따라서 여자들에게도 꽤 괜찮은 대화 파트너가 될 수 있을 텐데. 솔직히 말해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면, 그는 여자를 만난 경험도 제법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일정 수준의 시간에 도달하면 이별이 찾아왔다. 분명히 좋아하는데, 어쩌면 사랑하는 것도 같은데, 꼭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나게 되는 그였다. 도통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연애도 결혼도 너무 큰 과제처럼 느껴졌다.

 

 2025년 6월 어느 날, 그는 TV에서 놀라운 소식 하나를 들었다. 지난 해 체결된 ‘보어링협약 Boring Convention’에 따라 내달부터 사랑이 전면 금지된다는 것. 보어링협약의 정식 명칭은 ‘인류의 편안한 삶을 위한 정서 조절에 관한 협약’이며, 2024년 6월 18일 미국 오리건 주의 Boring이라는 도시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간편하게 보어링협약이라 부른다 했다. 협약에 참여한 168개국 국민들에게 7월 1일부터 내장형 칩이 무상으로 제공되며, 삽입 즉시 효과가 발동될 거란다. 그는 한 국가나 국제사회가 중대 사항에 대해 무언가 결정을 내릴 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지내온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규율과 질서를 군말 없이 잘 지키는 편에 속했고, 그래서 ‘법 없이도 잘 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곤 했다. 그런 그가 이번 보도를 접하고는, 처음으로 큰 혼란을 느꼈다. 사랑이 금지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잘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류를 거부한다는 건 그에게 더더욱 상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도 다음 날 저녁부터 그의 퇴근 시간이 당초보다 1시간가량 늦어지기 시작했다. 거리가 촛불을 든 인파로 넘실댔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집에 들어와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포털사이트에 접속해도 온라인 사이트에는 포스트잇을 붙이는 유저들의 자취가 줄을 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어링협약에 반발하는 것 같았다. 그는 광화문을 지나며 마주친 ‘인간실격’이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인간다움이라는 게 뭘까. 사실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생각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으므로.

 

 7월 1일, 등기로 배달된 내장형 마이크로 칩을 삽입했다. 우리 집 강아지랑 똑같네, 칩을 넣으며 껄껄 웃는 부장님의 옆모습이 왠지 불량식품을 삼킨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는 꽤 설렜다. 언제나 시대는 변한다. 그리고 시대정신을 따르지 못하면 도태된다. 나는 이번에도 도태되지 않을 것이다.

 

 석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가 오가는 길 위에는 NO를 외치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이 시위가 언제 끝날까, 길이 너무 막히는데. 내년에 완공된다는 새 도로를 타고 속도를 올리는 상상을 해본다. 기분이 나아진다. 칩을 장착한 뒤 그는 오히려 좋아하는 것이 더 많아졌다. 아마도 몸속에서 좋음의 정서가 과잉 반응하는 걸 예방하는 대신 다양한 대상을 애호할 수 있도록 분배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확실히 사랑이 없는 세계는 더 안락한 듯 보였다. 심장을 뒤틀리게 할 만큼 큰 감정소비가 사라지니, 연인이 되는 일부터 시작해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개별 사건들이 속속 타결되니 생활 자체가 간략해졌다. 인생을 복잡하게 하는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이 걷어지니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건조하면서도 평화로운 시간이 지속되었다. 그는 인스턴트 음식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것이 인류의 건강을 크게 해칠 거라며 호언장담했던 전문가들의 근심 어린 얼굴을 떠올렸다. 어느새 자기 삶의 영역에서 인스턴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높아져있음을 눈치챘지만,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그는 퇴근 후 1시간을 달려 새로운 연인에게 향한다. 이번에는 왠지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다. 이제 “너무 아픈 사랑은 하지 말자”며 연애에 억지로 한계선을 그을 필요도 없다. 아마 곧 자신과 많이 닮은 그녀와 결혼해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매끈한 검정색 자동차가 촛불을 뒤로 하고 도로를 달린다.

 

글 이어보기

그림자 사냥꾼

Echoes in the box

폐허에는 유령들이 맴돌았다. 무너진 건물의 구석진 방에도 유령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재난으로 갑작스레 벗어난 혼들이었다. 땅으로 푹 꺼지던가, 하늘로 휘발되듯이 날아가버리던가 했어야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었기에 같은 자리를 공허하게 돌았다.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죽지 못한 말들이었다. 살해당하지 못한 언어들의 망령이었다. 그들이 지껄이는 말은 거대한 원통형의 세계 속에 갇혀 있었다. 그 안에는 푹신푹신하고 꿈틀거리는 붉은 주름들이 가득한 점막이 자리했다. 망령들은 그 위에 떠다니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의식은 죽었지만 언어는 살해당하지 못했다.
세계는 가끔 흔들렸다. 망령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제자리를 맴돌며 같은 말만 뇌까렸다. 그들은 진동 만을 느꼈으나 의식 너머로 그것은 맥없이 흘러갔다. 하늘에는 흰 구멍이 열렸다 닫혔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들은 그 정경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하늘 너머, 세상의 밖까지 흘려갔다. 때로는 선명히 울려퍼지기도 했다. 어떤 망령은 그 이변을 깨닫고 몸부림쳤다. 목소리는 더욱 선명해졌고, 커졌다. 점막이 꿈틀댔다. 유령들의 메아리는 거세졌다.
 그들이 입을 모아 고함치기 전까지, 세상의 주인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