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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완벽

오른 편에서 그녀가 글을 쓰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지겹게도 나를 괴롭히는 마른기침 때문이었다.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책꽂이가 놓여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파란 커버의 책 한 권이 눈에 꽂혔다. ‘완벽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랑.’ 나는 책을 읽지도 않고서 완벽하지 않은 것들과 그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해 제멋대로 생각했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 여덟 글자가 빼곡하게 채워진 느낌이 꽤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나는 완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잘나지 않은 외모, 크지 않은 키는 물론이거니와. 글을 써도 결코 공책의 귀퉁이까지 채우는 법이 없고, 글은 몇 번의 퇴고를 거치고 나서야 공개할만한 것이 됐다. 한참을 글을 쓰던 그녀는 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검지 끝으로 본인의 호흡을 따라가면서 작게 읽는 버릇은 그녀와 내가 가진 거의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연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모습이 우스워요. 본인이 쓴 글을 세 번을 연달아 읽은 그녀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과하게 힘이 들어간 모습은 늘 우습고, 힘이 들어갔다는 말과 완벽하다는 말은 같지 않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아마도, 글에 그런 내용이 있다거나 혹은 글을 쓰는 동안에 연필을 쥔 손을 보고 떠올린 생각이겠거니 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꽉 끼는 구두와 목 끝까지 잠근 와이셔츠, 스프레이로 고정시켜 놓은 머리칼이 그녀의 연필 앞에서 초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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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5 - 5

505

 

 

 

레인은 자기가 차고 있는 목걸이를 내 손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놓고는, 내가 마시고 있었던 허브티를 자기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아직 다 마시지도 못했는데 그 뜨거운걸 거침없이 들이키다가, 어마어마한 기세로 내뿜으며 “얼굴이 뚫리는 줄 알았네.”라고 물어보는 행동에 한숨만 나왔지만, 목걸이를 보면서 한가지 느낀 거라면 이 안에 누군가가 잠들어 있다는 것.

 

“예전에는 비니스 여신이 잠들어있었는데, 이 안에 누가 잠들어있는 거지?”

 

이번엔 제발 이상한 여신이 튀어나와서 날 괴롭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나에게 넘겼다.

 

“오라버니?”

 

“시나.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내 형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기분이야. 그냥 원래대로 부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나저나 이 목걸이는?”

 

“네가 봉인을 풀 수 있다면 풀어보라는 거야. 예전에 비니스의 목걸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의 여신 비니스가 봉인 되었는데, 지금은 누가 봉인 되었든 비니스의 목걸이가 아니란 소리지.”

 

정확한 명칭을 알고 싶었지만 내 감정마법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신들을 봉인하는 도구니까, 어마어마하게 좋은 등급을 지닌 물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안에는 복잡한 수식들과 장치로 설계되어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곳의 창조주가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들을 가두기 위한 것입니다. 가끔가다 강력한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검을 겨누면, 그 안에서 가둬 반성을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저도 하나 가지고 있기에 알 수 있습니다.”

 

시나는 자신의 목걸이를 보여주며 다른 형태이지만, 한 가운데에 박혀있는 보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백금으로 이루어진 목줄과 밑으로 내려가면서, 커다란 자물쇠처럼 생긴 팔각모양 한 가운데에 보석이 박혀있었고, 시나가 들고 있던 것은 양 옆에 날개라도 달린듯한 장식물이었다.

 

뭐라 설명하긴 힘들지만, 황금 딱정벌레 한 가운데에 보석이라도 박혀있는 기분이다. 이게 미이라를 만들 때 쓰는 곤충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시나는 나에게 다시 주면서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저는 이 차원의 창조주가 아니기에, 지금 이 안에 있는 신을 풀어주기엔 힘듭니다. 이곳에 관여를 하려면 절차가 따라야 하지만, 절차를 따르게 되면 저는 다른 차원 건너온 신비롭고 귀여운 창조신이 아닌, 길에 걸어 다니는 일반 여신이 되기 때문이죠.”

 

“...네 입으로 신비롭고 귀여운이라는 수식어가...”

 

“오라버니?”

 

“알았어! 태클 안 걸게! 그러니 호칭으로 날 부르지마!”

 

칼 같이 들어오는 시나의 말에 베일뻔하면서도, 아이리스의 표정을 살펴보니 날 이 세상 쓰레기로 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정말 변태네요.”

 

“웃기지마. 그리고 나는 21세라고! 아저씨라 부르지마!”

 

“앞에 3이 빠졌잖아요!”

 

“이 꼬마가 진짜! 레인! 이 꼬마 관리 안 할래!”

 

“꼬마라뇨! 저는 어엿한 숙녀...”

 

“시끄러! 이 꼬마가!”

 

“뭐라고요? 이 아저씨가!”

 

“아저씨 아니라고 했지!”

 

아리엘과 편안하게 대화하고 있던 레인을 부르면서까지, 내 앞에 있는 꼬마를 치워주길 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살짝 보다가 “사이가 좋으시네요.”라고 웃은 뒤에 루시피나가 가져온 쿠키를 집어먹고 있는 모습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만...

 

“제길...저런 꼬마를 상대할 때마다 고혈압으로 죽을 것 같아.”

 

흔들의자에 앉아서 화를 다스리기 위해 명상을 좀 하려고 했지만, 루시피나가 쿠키를 가지고 오면서 달콤한 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 신랑. 아~”

 

다른 사람들의 눈이 레이저로 변한 순간에도, 루시피나는 본래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주변 분위기 변화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쿠키를 먹여주려고 했다.

 

“루시피나. 제 손으로 집어 머...읍!”

 

뭔가 입 속으로 거칠게 들어갔다 싶었더니 쿠키였다. 쿠키가 안에서 부드럽게 으깨지는 걸 보면 기묘할 수는 있어도 맛있으니 상관없다. 촉촉하게 으깨지는 쿠키라...

 

“그보다 아저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꼬시고 다니는 거에요? 무릎 위에 앉아있는 소녀는 또 누구고요?”

 

“소녀라니. 짐은 한때 마왕이었노라. 13대 마왕이며 타락의 표식을 지닌 절대적인 군주...”

 

“아이 깜짝이야! 이게 뭐야!”

 

“냐아앗!”

 

언제 올라온 거야! 사람 놀라게!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레시아를 다른 의자에 앉혔다. 어떻게 생각하면 임시조치라고 하지만 15세로 시간을 거꾸로 먹은 레시아가 항의하기 시작했다.

 

“주인! 무슨 짓이냐! 기껏 좋은 분위기로 같이 붙어있었는데!”

 

“뭐가 좋은 분위기야! 너무 자연스러워서 암살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고요!”

 

이러니 내가 이곳에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지.

 

“저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데 13대 마왕이에요?”

 

“그렇다. 짐이 13대 마왕 레프리시아이니라. 겉모습에는 속지 말고 똑바로 봤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대는 아이니스처럼 마나를 잘 다루지 못하나 보다.”

 

“제 조상님에 대해 알고 계세요? 저의 조상님은 어떤 분이죠? 정말 자서전에 나와있는 업적을 다 이루신분인가요?”

 

자서전? 업적?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아이리스가 나에게 책을 건네며

 

“자. 보세요.”

 

이상한 그림일기 같은 책을 나에게 건넸지만, 300년 지난 것 치고는 관리상태가 꽤 좋았다. 감정마법으로 주변을 훑어본 결과, 300년이 지난 물품은 맞지만 제목부터 이미 내용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을 전하는 소녀 아이니스의 일대기?”

 

이 녀석은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부수러 오는 사신과 같은 존재인데. 이건 각색을 넘어서 창조하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이 안에서 내가 어떻게 나오는데?”

 

“변태로요.”

 

“돌아가면 그 빌어먹을 은발을 다 쥐어 뜯어버려야지.

 

너무 빠른 페이스로 대화가 오고 가니 한 박자 쉬기로 하자. 레인은 루니아 누나에게 백장미를 받고 돌아갈 생각인지 잡화점 밖을 나가려고 하고 있을 무렵. 아이리스도 레인을 따라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래서 주인이 왜 소녀가 취향인지 알아야겠다.”

 

“무슨 헛소리를 당차게 하는 거에요. 그런 말을 하면 루시피나까지 폴리모프로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변하잖아요.”

 

마나를 집중하던 루시피나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법을 취소한 듯이, 응집된 마나를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상한 헛소리를 해서 팔찌를 채울 생각하지 말고, 이 안에 있던 봉인이나 풀어야 하는 방법을 생각해야죠. 아니면 잡화점 어딘가에 집어넣었을 때 풀릴지도 모르겠군요. 당분간 3층에서 보관하고 자료조사를 합시다.”

 

어찌 생각하면 레인에게 자서전을 읽고 힌트나 달라고 하면 괜찮겠지만, 그러면 내 인생이 한 방향으로 고정되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하기로 하자.

 

“주인. 궁금한 것이 있다.”

 

“뭔데요?”

 

“지금까지 일의 진행을 보아 우리들에게 들려온 소문이 없지 않는가?”

 

“당연히 저희는 300년 뒤로 날아가버린 여행자니까요. 아니면 미아라고 하는 게 맞나?”

 

레시아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좋은 향이 가까이 나기 시작하면서, 내 귀에 이상현상을 체크했다.

 

-할짝!

 

“우앗! 놀랬잖아요! 뭐하고 있는 거에요!”

 

불의의 습격이라는 것은 언제나 온몸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야 당연히 주인이 짐의 말을 듣지 않으니 귀를 핥은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을 부를 때 귀를 핥지 않잖아요. 그리고 저는 제대로 대꾸했고요.”

 

“아니. 주인의 생각이 뇌로 가기 전에 척추반사로 말이 튀어나왔노라. 짐이 의도한대로 나와야 할 대답은 그게 아니니, 답이 정해져 있기에 주인이 제대로 짐을 상대하기 전까지는 귀를 계속 핥는 형벌을 내리노라. 하암...”

 

“핥지마!”

 

레시아의 빨간 혀가 내 귓속까지 들어가기 전에 어깨를 밀어서 거리를 벌렸다. 레시아가 말한 의도라면 분명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힘을 쓰고 있으니, 엘티노스의 봉인을 풀어주려고 천계에 가다가 레이베리아에게 쫓겨나고, 마계는 이미 인간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는 그냥 우리대로 알아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이 목걸이에 담겨있는 기이한 존재의 봉인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음...레시아가 원하는 답은 그냥 세상을 다 쪼개버리자는 건가요?”

 

“짐의 말을 듣기나 하는 것인가!”

 

어린 소녀가 소리치는 거라도 마왕이라서 그런지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에 대해 소문이 들려오지 않으니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려주려는 의도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주인이 행한 일은 비밀리의 자서전에만 담겨있을 뿐이지만, 주인의 후손들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제 후손이요? 음...그거 참 이상하네요.”

 

“어째서 그리 무관심한 태도인가? 주인과 짐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이 얼마나 강인한지 보고 싶지 않는 것인가? 영웅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마계에서 군단장을 할지도 모른다. 혹은 짐의 성품을 이어받아 마계를 탈환하려고 하겠지.”

 

“그렇긴 하겠네요. 나중에 레인에게 물어보세요. 후손들이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혹은 후레쉬맨이 되어서 돌아올지도 모르겠네요.”

 

생각을 해보니 내 후손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카렌은 무슨 일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혹시 레인이라는 자도 주인의 후손이 아닌 것인가?”

 

“그건 아닐 거에요. 레인은 아마 고아출신에 개조수술을 받은 듯한 그런 이미지니까요. 전 적어도 300년전에는 부모님이 다 살아계셨어요.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후손들은 대부분 ‘하프’라는 말이 수식어로 붙어서 다니겠죠.”

 

잡화점 멤버들만 따지자면 정상적인 후손은 태어나지 않고, 특별한 후손들이 이리저리 솟아날 테니까. 진짜로 후손을 찾는 여행을 한다면, 천계와 마계도 다 들려야 하고, 드라고니스까지 찾아가서 난동을 부려야 한다.

 

몽마의 특질을 이어받은 후손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뭐 사실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아서 후손을 찾는 것은 나중에 시간이 남았을 때나 하려던 것인데, 애석하게도 정말 우주멀리 사라져서 나중에 후레쉬맨으로 되어 돌아오는 게 아닐지 더 걱정스럽다.

 

루니아 누나의 경우에는...

무지개 푸드라던가 약에 저항이 없는 후손이 나타나겠지.

 

“주인? 그러니 후손을 이곳에서 만들고 미래지향적인 자산을 만드는 것이 좋지 않는가?”

 

“냥캣에게만 허용할 수 없습니다. 마스터 저에게도...”

 

“기다려! 잠깐만! 둘 다 진정하세요!”

 

나는 어디 공룡테마파크에서 나올법한 자세로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레시아와 시나를 다른 곳에 앉혀놓고는 양팔을 벌리면서 두 눈을 마주보며 진압하고 있는 사이에, 지금쯤 은팔찌를 얼마나 차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내고 있을 때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에요.”

 

“하지만 사랑에는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은팔찌라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짐이 더 위험하다.”

 

“그러니 마스터는 안전합니다.”

 

“뭐가 안전해! 제 3자가 보면 위험하다니까!”

 

 

후손은 궁금하지만 레시아와 시나의 현재모습은 상당히 위험하니까, 오늘도 전력을 다해 저 두 명과 말씨름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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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아크 하다가 늦었어요.

이제서야 루테란 에피소드는 다 끝났고 해적때려잡으러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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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경계

경계.
윤은 가지고 온 셔츠를 완전히 입지도, 벗지도 않은 상태로 어깨 위에 걸쳐놓았다. 그 모습이 꼭 가을 같아서 괜히 코끝이 간지러웠다. 어깨에 나비가 수놓아진 셔츠는 아마도 내가 사준 것이었다. 머리칼은 조금 더 길어져서 어깨를 덮었고, 치마는 복숭아뼈 언저리까지 닿았다. 오랜만이에요. 윤은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있었다. 뜨거운 계절에 연애를 한 탓에 매번 차가운 음료를 마시던 사람이었다. 계절처럼 뚜렷한 분명한 변화가 우리 둘 사이에 있다. 요즘은 자주 경계에 대해 생각한다. 작게는 그녀와 나 사이에 있을 어떤 경계, 조금 더 나아가서는 서른 번째 맞고 있는 여름과 겨울의 경계, 조금 더 나아간 곳에서 다시 한 발짝 나아가서는, 처음 맞는 스물아홉과 서른의 경계,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온 열병까지. 경계는 종종 열병을 동반한다.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온통 쏟아진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뜨거운 손, 발이 환절기만 되면 더 뜨거워지곤 하는 것이다. 그녀의 어깨에 앉은 나비도 마찬가지다. 번데기로부터 갈라져 나오는 동안 인내했을 많은 열병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날개는 언제나 화려한 무늬를 한다. 초라한 나의 서른이 그녀의 어깨 앞에서 번데기처럼 바스락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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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테이블의 진동벨이 시끄럽게 울었다. 하필이면 카페의 노래가 멈춘 순간이었다. 그제야 잊고 있던 공통점 하나가 생각났다. 굳이 ‘우리는 청각이 예민한 사람들이었지.’하고 떠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이다. 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시니컬한 표정에 나는 어쩐지 안도를 느꼈다. 온통 변한 것들 사이에서 발견한 변하지 않은 것은 이토록 안정을 준다. 우리는 커피를 사이에 두고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시곗바늘은 4시 59분과 5시 정각의 경계에 걸려있다. 시곗바늘은 정직하게 경계 너머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다. 그 우직함이 부러워지는 순간 5시가 되었다. 그러고보니 우스운 짓도 참 많이 했었다. 예를 들어 매일 저녁 5시 26분이면 그녀에게 케이크 이모티콘과 함께 생일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단순히 5월 26일이 윤의 생일이어서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었다. 기억이 가진 힘은 무섭다. 한 번 떠올리기 시작하면 기어코 비슷한 것들을 끄집어낸다. 눈앞에 윤이 있음에도 나는 경계 너머로 과거의 우리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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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윤에게 잘 지냈느냐고 묻지 않았다. 잘 지냈다고 해도, 그러지 못했다고 해도 썩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조용한 가운데 마른 기침이 하지 못한 말처럼 터졌다. 참았던 것이 터지면 더 격렬한 법이다. 나는 겨우 기침 같은 소리로 그녀에게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렸다. 쏟아지는 것들은 커피로도 삼켜지지 않을 때가 있다. “미안.” 급히 커피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목구멍으로 쏟아진다. 그녀는 입술만 쭉 당겨 웃으며 마른기침은 서른의 경계를 넘으면서 응당 앓아야 하는 열병이라고 말했다. 그리곤 약을 챙겨 먹어도 왠지 낫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윤의 얼굴을 본다. 여전히 마른 뺨과 빨갛게 바른 입술, 나비가 수놓아진 셔츠를 입은 그녀는 어느새 서른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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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을 연필 끝처럼 날카롭게 세운다는 이유로 종종 밥을 굶던 우리는 슬슬 매미소리가 사라지거나, 떨어진 은행 냄새로 가을이 온 것을 먼저 알았다. 그쯤의 우리는 은행나무가 즐비한 거리를 자주 걸었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시를 적는 것이 우리가 가진 모든 행복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시를 적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은 헤어진 날부터 그랬노라고 멋쩍게 내게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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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도 매미처럼 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때만 시달리게.” 헤어지던 날 윤이 말했다. 매미소리가 들리지 않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횡단보도를 건너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그것은 언젠가 헤어진 여자친구의 "당신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더라구." 따위의 말 때문에 생긴, 일종의 강박이었다. 횡단보도가 끝나고 뒷모습이 일식집 너머로 사라지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제야 과거의 사람이 느꼈을 길고 가라앉은 새벽의 일부를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다.
.
우리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콜록 콜록하고, 마른 기침을 했다. 어쩐지 오래 앓을 것 같은 열병은 경계를 넘어서도 한참을 계속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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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고요

날카로운 소음이 날마다 들렸다.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베란다가 넓어서 마을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고 좋아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당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 세 달은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지금은 철근이 부딪히는 소리, 땅을 뚫는 소리 같은 것들이 진동한다. 날카로운 소음은 말 그대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집 전체를 흔들었다. 가끔은 선반에 올려놓은 책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마누라는 공사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애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고, 아랫동네가 재개발로 시끄러운 와중에 집을 비워둘 수 없다는 납득 안가는 이유로 나만 덜렁 유배되었다. 사실 처음 며칠은 좋았다. 유일한 취미인 바둑도 실컷 하고, 술도 진탕마셨다. 잔소리할 사람이 없으니 내 세상이 된 것만 같았다. 그때의 나는 이 재개발의 현장이 조금 시끄러울 뿐이라고. 편할 대로 생각해버렸으니까. 핸드폰 액정이 반짝인다. 진동이 울리고 있겠지만, 그것이 전화 때문인지 재개발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나는 핸드폰 액정에 낙인처럼 박힌 전화번호를 통해서 전화가 왔음을 알았다. “여보세요?”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 목소리가 귀에 닿지 않기 때문이었다. 왜 소리를 지르냐는 마누라의 바가지를 묵묵히 듣고, 아니 사실 거의 듣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충 알아듣기로는 “재개발이 끝나는 날이 십일월 첫째 주 목요일이래”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한숨이 나왔다. 물론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베란다를 통해서 날씨를 확인할 수 없었으므로, 오늘의 날씨를 검색했다. ‘신림 9동. 날씨 맑음’ 예보와는 다르게 비처럼 내리는 먼지를 피해 베란다 문을 닫아 놓은지 오늘부로 딱 넉 달이 되었다. 그곳에 놓아둔 물건들은 이미 오천년의 시간을 묵묵히 보낸 것처럼 흙먼지에 묻혀있었다.

“아따 성님 또 지것는디?.”
광주에서 올라온 현민은 중학교 시절엔 바둑 기사를 진지하게 꿈꿨다고 말했다. 실력이 비슷해서, 요즘에는 마누라보다 더 자주 마주 앉는 사람이기도 했다. 탁. 탁. 하고 바둑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후벼판다. 날카로운 소리가 점점 신경을 예민하게 만든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낙담하고 있었다. 단순히 이 만 원을 걸고 둔 내기 바둑을 세 판 내리 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 일 있어 부러?”
무디기로 소문난 현민도 나처럼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러다가 청각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소리를 지르는 현민을 보고 나서야 그런 걱정이 들었다. 바가지를 긁던 마누라의 목소리와 현민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에이 씨벌. 왜 소리는 지르고 지랄이냐.”
괜한 곳에 화풀이를 하고 일어선다. 싸우나라도 가서 몸이라도 담굴 작정이었다.
“성님 오늘 제가 한 잔 쏠라니까. 꼬막에 막걸리 어떠요?”
현민은 여전히 소리를 지른다.
.
“아, 글쎄 11월 2일이면 공사가 끝난다고 안 했는가?”
통화를 하던 현민이 역정을 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성격이 차분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내 생각에는 몇백 년 전에 그런 사람들 다 죽었다. 현민이 통화하는 동안 꼬막 몇 개를 집어먹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꼬막에 관한 소설을 읽었다. 단 두 명이 나오는 글이었는데, 소음 때문에 떠나는 남자에게도, 남겨진 여자에게도 공감하지 못했다.
“성님, 재개발 끝나는 날이 미뤄진다는디요?”
“뭐? 이 씨벌?”
날카로운 욕들은 꼬막집을 가득 채우고, 놀란 막걸리 잔들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다.
.
낮이 시끄러운 만큼 밤의 고요가 적막하게 사방을 덮었다. 소란스러움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사람들은 숨죽인 밤을 보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내 걸음걸이나 티비소리 따위의 것들로 이 고요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면 배란다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바깥이 꼭 유령도시 같았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불도 거의 켜지 않았다. 동네 전체가 소리 없이 정한 어떤 규칙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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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계절

계절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쉬운 계절이다. 챙겨야 할 것도 많고, 옷은 두꺼워진다.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면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그가 준 립밤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 번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괜히 건조하게 느껴지는 실내의 공기와 텁텁한 감자튀김이 거슬린다. 두 잔을 비우고 세 잔 째의 맥주를 시켰다. 그 사이에 입술은 조금 더 생기를 잃는다.
당신 입술에서는 맛있는 향기가 나
불현듯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문뜩 궁금해졌다. 그는 코가 맞닿을 거리에서 웃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 내가 되물었다. 응 달달한 것 같기도 하고, 과일향기 같기도 한데. 립밤에서 나는 향기일까? 그는 짧게 입을 맞추고 일어나 셔츠를 걸쳐 입으며 말했다. 내 입술에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 알 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 립밤 안써. 내가 말했다. 그가 셔츠의 맨 윗단추를 채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다음날 그는 내게 립밤을 선물했다. 사과향이 나는 립밤이었다.

한 번 더 주머니와 핸드백 속을 살폈지만 그 어디에도 립밤은 없었다. 그를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물건을 나는 부주의 속에 잃어버린 것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쉬운 계절이다. 그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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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5 - 4

504

 

 

 

루시피나와 릴리스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내가 여장한 모습을 보러 온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다행스럽게도 실베스 씨가 내 이름을 듣고 대화를 먼저 하자고 한 것이니, 느닷없이 기습으로 죽을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 그나마 실베스 씨는 나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을 갚기 위해 300년이라는 시절을 기다리지는 않겠지만, 내 앞에 검붉은 칠흑의 갑옷을 덕지덕지 붙여놓고, 어깨와 장갑, 부츠에는 닿기만 해도 피가 나올법한 날카로운 장식이 있었으니, 내가 알고 있었던 실베스 씨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줄 알았다.

 

“잡화점 주인. 오랜만에 만나는 군. 300년만에 만나는 건가?”

 

덤으로 목소리도 살짝 더 낮아졌는지, 날아드는 파리마저 짓눌러 죽일 정도로 분위기가 무거웠다. 온 몸에 중력이 4배정도 더 강하게 받는 것처럼 고개를 들기 힘들어도, 눈을 마주하며 실베스 씨에게 입을 열었다.

 

“실베스 씨는 마계의 군세를 모으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의문문을 빼도 될 만큼 직선적인 질문에 실베스 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거대한 입을 움직였다.

 

“긍지 높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말로, 마계에 도움이 되는 일이지. 인간은 싫어하지 않으나, 인간계를 침범해야 할만한 이유가 생겼다.”

 

“이유라면 천계의 존재 때문인가요? 아니면 몬스터들의 숲이 갈 곳을 잃었기 때문? 인간과 공생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영문을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인간들은 천계의 꼭두각시마냥 행동하고 있지. 이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라도 마계 근처에 있는 인간들은 우리 밑으로 두어야 한다네. 잡화점의 주인이라면 나와 같이 손을 잡아 도와줄 수 있겠나?”

 

“미안하게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아요. 일부러 레시아와 릴리스, 마리아를 용하게 죽이지 않고 돌려보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아니, 그것도 아니지. 일부러 레시아가 공격하라고 너에게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야 실베스 씨의 권위를 의심하는 마족이 없을뿐더러, 군세를 모으고 있으니 사기진작에도 좋겠죠.”

 

실베스 씨는 아무렇지도 않는 눈으로 보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책상을 내리찍으며 컵이 바닥에 떨어졌고, 속에서 감췄던 분노를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 앞에서 잡화점 멤버를 그 지경으로 만든 것 때문에 화가 나니까, 지금 한대 때려도 되요?”

 

“여기는 마왕성이라네. 그리고 지금 잡화점 주인의 실력으로는 개죽음을 당하겠지.”

 

“지금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고, 저도 머리가 있으니 지금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하는 것만 하겠지만, 다음에 다른 잡화점 멤버들에게 털 끝이라도 건드리면, 정벌이고 뭐고 그냥 세계를 지워버릴 테니 각오해두세요.”

 

“명심하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그 모습은...”

 

“아. 백장미 찍다가 바로 호출 받아서 오는 바람에 갈아입지 못했거든요.”

 

여장한 상태로 실베스 씨 앞에 서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나를 보면서 실베스 씨는 컵에 있던 정체불명의 액체를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를 보니 레베카가 생각나는군.”

 

“아니. 제발 저를 보면서 부인을 떠올리지 마세요.”

 

자괴감 들고 괴로우니까!

 

“레베카도 자신의 딸에게 고딕 롤리타를 입히고는 했는데.”

 

“떠올려야 할 대상이 잘못됐잖아요...”

 

옷을 입은 딸을 떠올려야지, 왜 옷을 입히는 아내를 떠올리는 걸까. 솔직히 말해서 둘 다 떠올려야 하는 것이 맞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라면 분명 옷을 입고 있는 쪽일 것이다.

 

“그래서 자네는 천계에 다녀온 건가?”

 

“네. 레이베리아가 추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정보들로 가득했는데, 문제는 엘티노스가 어디에 봉인되어있는지 그걸 알아야 해요. 그러니 몇 군대를 정복해서 인간을 장기말로 쓰거나 그런 건 솔직히 말리지는 않도록 하죠. 하지만 진짜 검을 겨눠야 할 곳은 천계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되도록이면 인간을 회유하고 설득을 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모두 천계에게 조종 받고 있다면서요?”

 

“그래. 특히 초능력자인지 뭔지 하는 것들이 크나큰 위험이다. 그들은 마나를 따로 사용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기이한 힘을 발휘하지. 마계를 침범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과학이 서서히 발전함에 따라, 마법이 도태되었으니 이곳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라네.”

 

300년이 지났으니 마법이 많이 잊혀졌다면 가능하겠지만, 마계의 결계를 인간이 깰 수 없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천계에서 부셔주겠죠. 지역도 정화해주고...그러면 마계는 난장판이 되는 건 시간문제니까. 천계를 먼저 노리는 게 맞아요. 인간은 설득과 회유로 최대한 관계로를 깎아먹지 말고, 천계나 견제하면서 엘티노스를 찾을 때까지는 시간을 좀 주세요.”

 

“그건 잘 될지 모르겠군. 하지만 자네의 말대로 최대한 노력하지.”

 

“노력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그렇게 해야 해요.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이 저도 대립하게 될지도 모르죠.”

 

“그렇군. 자네는 만일 천계와 마계, 같은 인간을 모두 적으로 돌린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실베스 씨의 질문은 세상 모두가 적이라고 치면 무엇이 남느냐는 말일까?

 

“모두가 적이 될 일은 없어요. 세상이 얼마나 살기 힘들든 자신의 편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고, 다른 말을 한 뒤에 실베스 씨 앞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데요? 정말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을 마왕이라도 될 생각이에요?”

 

내 뒤에 있던 루시피나에게 다가가면서 실베스 씨에게 질문을 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발을 휘감아버렸다.

 

“필요하다면...”

 

폐가 갈아엎어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지 않고 루시피나의 도움으로 잡화점으로 귀환하고 나서 시야가 반전되자, 루시피나는 나의 표정을 보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저기...신랑? 괜찮아?”

 

저조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환기시키려고 고개를 들어, 루시피나에게 웃음을 보여주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씁쓸한 감각이 아직까지 남아있기에, 쓴웃음이 번지는 것은 붉은 눈에서 비쳐진 내 모습을 자각한 뒤였다.

 

“괜찮아요. 다만, 실베스 씨를 좀 막아서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어쩔 수 없이 천계와 마계에서 제 얼굴도장을 확실하게 찍었으니, 다른 곳에서 견제가 들어와도 이상할 것은 없겠죠. 그나마 다행이라면 손쉽게 건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거겠지만요.”

 

실베스 씨는 결국 내 말을 듣지 않고 어디선가 탈선할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마왕이니까.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 것은 레시아만 가능했다. 원래 마왕이라는 이름은 모든 생명체가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 그렇기에 실베스 씨는 본래 해야 할 일을 하겠지.

 

“기초가 탄탄한 마왕을 만나고 왔더니 속이 뒤집어질 것 같네요. 부상당했던 사람들의 몫을 때리지 못했는데.”

 

“너무 그러지 말거라. 주인. 애초에 짐도 마왕이었던 시절이 있으나, 주인을 만나서 짐의 길이 지연된 것뿐이니라. 인간계를 침범하려는 계획은 짐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위바위보로 한번 뺏었잖아요. 물론 그게 자작극이었다고 해도 침략에 성공해봤으면 됐지.”

 

술 게임으로 나라를 거는 지도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신랑...우리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마왕성에 대마법을 사용할까?”

 

“실베스 씨는 지금 상당히 강하잖아요. 당연히 제가 싸우지 않고 그냥 나온 이유는 실베스 씨에게 일방적으로 지기보단, 잡화점 멤버 어느 하나라도 진지하게 싸우면, 둘 다 치명상을 피할 수 없으니까요. 실베스 씨는 지금도 제가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사라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레시아에게 없던 마왕의 덕목은 잘 지키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마왕의 덕목? 그게 뭔데?”

 

붉은 빛의 머리카락이 흔들며 고개를 기울자, 하나같이 전부 바닥으로 쏟아질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상대를 항상 하찮게 생각하는 오만함이지. 힘을 믿고 오만에 빠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해. 긍지가 높아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겠지.”

 

그보다 이 여장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제 집어 던질 때도 된 것 같아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기...이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이곳에서 다 뭐하세요?”

 

“그야 옷을 갈아입는 것도 찍으려고 하죠오. 다음에는 이 옷으로 갈아입으면 되요오.”

 

“이것도 여성용이잖아요! 촬영 다 끝났다며!”

 

“오늘 밤은 기니까 천천히 즐겨요오!”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있거든요!”

 

루니아 누나가 연속촬영을 하려는 의지가 너무 곧아서 부러지기는커녕, 휘어지지도 않은 듯했다. 다시 20분동안 난동을 부리면서 겨우겨우 남자 옷으로 갈아입었고, 흔들의자에서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레인 오빠! 거기에 가면 안 된다니까요!”

 

“괜찮아. 우리가 가도 저기는 항상 열려있을 거야.”

 

“아니요! 그 미이라가 잡아먹을지도 모르잖아요! 게다가 그 안에는 예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레인 오빠를 홀리기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난 레인 오빠밖에 없는데!”

 

밖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오는지 몰라도, 이 안에서 레인을 홀릴만한 사람은 없다고 보는데, 그 녀석이 비춰진 시선은 남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그런 눈이니까.

 

어렵고 이상하게 꼬아 말했는데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레인은 그냥 괴짜란 소리다.

 

“잡화점의 문은 자동으로 열려서 정말 좋네요. 카일 씨.”

 

“무슨 일이냐?”

 

“오늘은 목걸이 자랑을 하려고 왔어요. 짠!”

 

“목걸이?...저거 비니스의 목걸이 아냐?”

 

강력한 여신마저 봉인해버리는 목걸이를 레인의 목에 걸려있는 걸 보면, 엘티노스 잡화점에 있던 모든 주인들은 저 목걸이를 한번씩 차본 것이 아닐까?

 

“어라? 미이라 아저씨? 어째서 붕대를 다 벗은 거에요?”

 

“붕대를 다 벗고 멀쩡하게 생긴 사람에게 미이라 아저씨라고 하지마. 나이 얼마 먹지 않았으니 다른 호칭으로 불러. 오빠라던가, 오라버니라던가, 좋은 건 많잖아?”

 

“할아버지.”

 

“너 맞고 싶어!”

 

“300년동안 미이라처럼 봉인 당했는데 할아버지라고 말하면 최소 200세정도 어리게 보는 거라고요? 기뻐하시죠?”

 

“그런 취급 하나도 안 기뻐!”

 

이래서 어린애들이 싫다니까.

 

“오라버니. 진정하세요.”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변한 시나가 내 손목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어마어마하게 무거워진 공기가 사방을 채워나갔는데, 오직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시나와 레인뿐이었고, 모두가 경악한 얼굴이었다. 아이리스의 얼굴을 바라보자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단어를 유추할 수 있을 만큼 또렷하게 움직였다.

 

[변태]

 

“...저기 시나. 대체 무슨 일이야.”

 

“마스터가 연하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토대로 모습과 호칭을 변경해보았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기 전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미 이상한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오라버니란 칭호는 마음에 드십니까?”

 

“그야 마음에 들긴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할 때가 아냐. 만약 너의 계략이 나에게 은팔찌와 발찌를 세트를 하이패스로 착용시켜주는 거라면 거의 성공했겠다.”

 

“낑낑...”

 

“하지 말라고!”

 

이 애는 아직 해가 떠있는 시간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그 목걸이는 왜 가지고 온 거야. 자랑할 건 아닐 텐데?”

 

레인에게 물어보자.

 

“세린이 가져가라고 시켰어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목걸이를 벗어서 흔들의자 앞에 있는 책상에 놓았다. 봉인을 푸는 방법은 천계로 가거나 엘티노스가 잘 알고 있을 텐데. 이걸 그대로 천계에 다시 가져갈 수 없는 일이니...

 

“의뢰는 봉인을 풀어달라고?”

 

“아뇨. 저는 의뢰를 하지 않아요. 이걸 양도하러 온 것뿐이죠.”

 

 

환하게 웃고 있는 레인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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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에게 오라버니 소리 들으면 무슨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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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5 - 3

503

 

 

 

현실과 의식세계 심지어 꿈속까지 고통을 받는 기분을 알고 싶다면...아니, 알고 싶지도 않을 테지. 사람이 고통을 즐기게 되면 여러모로 위험하게 되니까. 애석하게도 인간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행동하는 동물이다. 오히려 쾌락을 쫓는 것이 사람이 아닐까? 지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원인인 세린이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 벌써부터 나자빠지면 어떻게 해?”

 

“벌써부터? 너는 벌써라는 개념을 어디로 말아먹은 것이 틀림 없어. 내가 너에게 일방적으로 5시간동아 두들겨 맞았는데, 지금쯤이면 사람이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너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멀리 왔으니까. 나에게 맡겼던 힘을 전부 가져간 이후부터 말이야. 일어나지 않으면 이 상태에서 밟아도 괜찮다는 얘기겠지?”

 

-콰지직!

 

“너 미쳤어! 그런 밟기는 벌레를 즉사시킬 때나 쓰는 거라고!”

 

여전히 내 몸은 “위험해!”라고 소리치듯이 내 몸을 다른 곳으로 구르게 만들었고, 거친 숨을 내쉬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어마어마한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고생하고 있지만, 지금은 내 안에 있던 힘을 이끌어내서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단검 한 자루만 들고 버티는 것만 했으니...

 

“기습을 당하는 원초적인 상태는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어. 지금 공격을 받은 횟수와 위력을 따졌을 때, 너는 이미 백 번을 넘게 죽었으니까. 거대한 힘을 지녔지만, 그 힘을 순식간에 끌어올려서 컨트롤 하는 것까지가 너무 느려.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해서 널 풀어주면 적어도 올빼미와 고양이가 마법으로 합공하기 전에 피할 수 있을 거야.”

 

“마나로 신체를 강화했을 때보다 집중력이 더 높아야 한다는 소리잖아.”

 

“차라리 시공간술사의 길을 걷고 있었던 시절이 더 편했겠지. 그러게 왜 3개의 자원을 합쳐버린다는 바보 같은 발상을 한 걸까.”

 

“내 선택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런 거 아냐. 그리고 가끔가다 생각하는 거지만, 잡화점이 화를 낼 때 팔과 다리가 느닷없이 튀어나와 이족 보행을 하고 있는데, 그건 네가 화나서 그런 거야?”

 

궁금한 것은 물어보도록 하자. 지금 훈련을 잠깐 쉬기 위해 수다를 떠는 것이지만, 내 말을 듣고 0.3초 뒤에 날아온 것은 답변대신 세린의 주먹이었다. 별이 6개정도 보일 듯 말듯하면서 무거운 목과 머리를 간신히 일으켰을 때. 화끈거리는 곳을 손에 대며, 어금니가 아직까지 제대로 정착해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죽을 뻔했잖아! 이 자식아!”

 

“그러게. 죽으라고 때렸는데 죽지 않아서 아쉽네.”

 

세린이 날 싫어하는 이유가 존재하긴 하지만, 무슨 이유로 싫어하는 지에 대해 알고는 싶었다. 하지만 그걸 물을 때마다 죽기 일보직전까지 구타를 당하거나, 정신이 파괴되기 전까지 매도를 당해야 하기 때문에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내가 만약에 세린의 입장에서 나를 볼 때는...음...

 

도저히 1도 모르겠군.

내가 저 녀석의 속을 어떻게 알아!

 

“아무리 굼벵이라도 6시간동안 맞는다면 꿈틀거리기라도 하던데, 너는 굼벵이보다 못한 거 아닐까?”

 

“굼벵이를 실제로 6시간동안 죽도록 때리면 죽는 거야. 꿈틀거리는 것은 요령을 터득했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리는 거라고. 분명 그 굼벵이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뭐가 잘못되었길래 죽어야만 하는지 한탄하고 있을 거라...아악!”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스트레스로 6시간이 아니라 6분안으로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세린은 내가 태클을 걸 때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일어설 수 있는 이유라면, 몸 안에 있는 에너지가 내 몸을 빠르게 회복시키기 때문이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6시간동안 연습을 하고 있는데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능숙하게 조종할 수 있을지. 내 힘의 100%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 세린도 답답해 하는 걸까? 그래도 지금 이렇게 무작정 맞는 것보단 다른 방향을 찾는 것이 더 좋기에, 자리에 주저 앉아서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포기야?”

 

“이 방법은 아냐. 무작정 사람을 때린다고 해서 고쳐지지 않으니까.”

 

노력을 해서 되지 않는 것은 안 하는 편이 더 좋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얻어가는 것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성장했다는 것과 안목이 길러지는 건 확실하니까.

 

“그래도 어느 위치에서 공격이 날아오는 지는 알 수 있겠어. 대부분의 사각은 다 알아차렸으니까.”

 

“대부분의 사각을 다 알아차렸다고 한들 반응하지 못하면 죽는 거야. 지금 이 대륙에 있는 정보들을 조합했을 때, 마왕 실베스는 이것보다 더 빠르다고?”

 

“빨라 봤자 얼마나 빠르겠어. 결국 노리고 오는 장소는 항상 같은 곳인데.”

 

의식을 되찾았을 때 눈을 뜬 것은 창문과 가까이 있는 흔들의자에서, 아리엘이 내 상태를 계속 살펴보듯이 멀뚱멀뚱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는 “어. 일어났다.”라는 말을 흘린 것을 보면, 오랫동안 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러도 대답이 없는 듯 보였다. 거의 혼수상태마냥 자고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내가 당한 것은 온 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두들겨 맞고 온 것뿐인데.

 

“의식세계에서 두들겨 맞았는데 여기까지 와서도 아프네!”

 

“그거야 루니아 언니가 카일 씨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상한 무지개를 먹고도 잘도 죽지 않았네요?”

 

“넌 내가 죽었으면 좋겠냐?”

 

“그건 아니지만, 목숨이 너무 질기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리엘도 누군가에게 물이 들기 시작한 걸까? 그래도 보통사람들이 나의 일대기를 보았을 때. 한가지 확실한 반응이라면 “와...저게 안 죽어?”라는 반응이겠지.

 

“아무튼 죽지 않는 기념으로 저 좀 도와주세요.”

 

“도와달라니? 대체 무엇...”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누군가가 나에게 하얀 고딕 롤리타의상을 입혀놨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저기. 여긴 어디에요?”

 

“루니아 언니가 카일 씨를 기절시키고 지금까지 백장미와 흑장미를 촬영한다고 이런 난리를 만들어냈어요.”

 

“그래도 한 나라의 왕으로 남장을 한 거야? 아마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빈약한 남장으로 대체 뭘 한다고요.”

 

다만, 내가 앉고 있는 흔들의자는 잡화점에서 가지고 온 것 같은데?

 

“이 의자는 대체 무슨 영문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그 의자에 바퀴가 달리기 시작하더니, 루니아 언니를 따라 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했어요.”

 

바퀴가 달려? 마차에나 있는 그 바퀴가?

 

“저기. 너의 상상력은 충만해서 좋지만, 흔들의자에게 느닷없이 바퀴가 달리지 않아. 만약 바퀴가 달린다면 마리오 씨가 타고 있는 카트에서 거북이를 발사하겠...”

 

-파지직!

 

“이런 망할! 어디서 날아온 거북이야! 거북이가 불쌍하지도 않아!”

 

이런 거 하나하나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으나, 다행인 것은 거북이껍질처럼 보이는 상자였을 뿐. 그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소리를 쳤지만 루니아 누나가 무서운 얼굴로 다그치기 시작했는데...

 

“여자애는 그런 험한 말투 쓰지 않아요오.”

 

“전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때찌 할 거에요오?”

 

“그거 사형선고잖아요. 루니아 누나가 살살 때린다고 해서 죽지 않으면 그게 기적이지...”

 

햇살이 내 혈관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편이 덜 고통스러울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선명하게 나뭇잎을 핥던가...

 

“그럼 오늘의 핵심 촬영으로 검은 고양이와 하얀 올빼미를 품은 사진을 찍도록 하죠오. 자연스럽게 놀면서 산뜻한 오후를 즐기는 소녀와 왕자의 모습이랄까요오? 아아, 너무 두근거려서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아요오!”

 

당장 폭발해서 폭사했으면...

 

“그러면 아리엘은 좀 더 가까이~”

 

“이것만 끝나면 모든 촬영이 마무리가 된데요...”

 

그런데 무슨 구경꾼들이 이렇게 많이 온 거야?

 

“저기. 한가지만...레인 이 녀석은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에요?”

 

저 멀리서 레인과 다른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을 보고 알아차렸지만, 저 녀석은 검은색 바바리코트인지 트렌치코트인지 잘 모르는 옷을 항상 입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나타나는 필기도구 및 이상한 물품들을 꺼내주기 시작했다.

 

“물품을 빌려주고 있답니다아.”

 

살아있는 잡화점인가? 레인이 입고 있는 것이 4차원 롱코트일까?

 

“여기까지 와서 왜 물품을 빌려주는데요?”

 

“그거야 화장까지 한 카일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오?”

 

마계에 가서 당장 깽판을 부려도 모자란 시간인데, 이런 곳에 소비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찍기 싫다고 화를 내도, 루니아 누나가 총 감독을 맡고 있는 이상. 빨리 촬영이 끝나길 빌어야 했는데...

 

“주인은 이제서야 일어났는가? 조만간 짐을 깨워주기 위해 옆에서 “냐양!”이라고 울면 일어날 것인가?”

 

“마왕이 옆에서 “냐앙”이라고 울면서 사람을 깨워준다는 말을 들으면, 이미지가 산산조각 나서 더 이상 붙일 것도 없을 것 같네요.”

 

“냥!”

 

“시나. 너는 올빼미인데.”

 

올빼미가 냥!하고 우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동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연락할 것. 극히 자연스럽게 놀고 있는 소녀를 찍고 싶은 모양이라도, 여장을 당한 남자에게 그런 걸 요구하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닐지.

 

그리고 아리엘의 경우에는 자신의 몸을 조이는듯한 바지가 잘 안 맞아서 불편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아리엘을 위로 올려다 보고 있는데, 상당히 빠른 소리로 찰칵거리기 시작하면서, 옆을 보니 무식하게 빠른 속도로 루니아 누나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리엘! 덮쳐요오!”

 

“아리엘이 무슨 맹수냐!”

 

30분동안 힘들게 촬영을 버텨가며 시계를 찾고 있는데, 분명 아침에 일어나서 6시간동안 세린에게 두들겨 맞는 것치고는,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아리엘. 내가 얼마나 자고 있었어?”

 

“카일 씨는 30분동안 자고 일어난 거에요.”

 

거기서 6시간이 현실은 30분이라는 건가? 아니면, 그 안에 있는 시간은 세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걸까? 확실히 무서운 것이 있다면 30분동안 흔들의자에 바퀴가 생성되어,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겠지.

 

무릎 위에 잠들어 있는 검은 고양이와 하얀 올빼미를 품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 모두가 촬영을 끝내고 쉬고 있을 때 릴리스는 내 뒤에서 끌어 안았다.

 

“정말 귀여워라~”

 

“잠깐. 어디서 나온 거야?”

 

“루시피나가 데려왔거든~”

 

“신랑!”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듯한 루시피나의 모습과는 달리, 현실적인 시점에서 제자리 달리기를 하면서 손을 흔들며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조금씩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분당 1m씩은 오는 것 같으니, 이 속도는 무려 죽은 나무늘보보다 분당 1m씩 빠르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루시피나는 왜 이곳에?”

 

“그야 신랑을 보러 왔지. 아아! 귀여워라!”

 

언제쯤 나는 이런 취급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화창한 오후가 지속되는 동안, 루니아 누나가 나와 루시피나, 릴리스의 모습을 보고 추가 촬영한다는 말을 내뱉기 전까진 마음 한 곳이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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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아크 CBT에 당첨이 안 됐네요.

...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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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목소리

목소리가 작은 영과 대화를 할 때면 나는 온 신경을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 집중해야만 했다. 사방에서 섞이는 소란으로부터 그녀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일은 꽤 즐거운 일이기도,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기도 했는데 사실은 그 행위 자체가 나로 하여금 그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임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바쁜 와중에 핸드폰이 운다. 아, 그러고 보니 그녀와 울음소리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동물의 울음소리를 왜 하필 '울음'이라고 명명했을까 하는 식의 미지근한 대화였다. 영과는 종종 그런 대화를 했다. 어원이라든가 기원이라든가 남들은 관심 없을 작은 단어 같은 것들에 관한 얘기. 전화번호를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영을 떠올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물음표를 붙였다. '웬일이야?'라는 물음이 나도 모르게 묻어 나온 것이다. 전화번호를 교환한 이후로 처음하는 통화였다. 전화번호를 줄 때나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눌 때도 결코 이렇게 갑작스럽게, 게다가 새벽 한시에 전화가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응. 뭐 해요?" 수화기를 통해 듣는 영의 온전한 목소리는 조금 더 다정할 때도, 조금 더 차가울 때도 있었다.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그녀의 목소리가 갖는 온도에 관해 생각을 했다. 처음 듣는 웃음소리, 처음 듣는 다정한 말들. "나는 원래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에요." 뜬금없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우리가 이틀 뒤에 만나기로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는 종종 별다른 목적 없이 만났다. 그리고 목적 없는 만남이 목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 하나에 기대어 영이 가지고 있을 애정 같은 것들을 굳이 상상해냈다. 차가운 가운데서도 따듯한 것 하나 정도는 품고 있을 거라고, 무책임하게 바랬다. 정신을 차리고 비참해지는 일이 반복되면서,나는 정신을 차리는 행위를 멈추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골목길을 서성이면서 곳곳에 떨어진 영의 목소리를 줍는다. 사랑일까. 하는 생각 때문에 어깨가 절로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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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장난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결과가 꽤 좋지 않은 것들이 있어.” 윤은 허공을 보고 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녀의 시선이 닿았을만한 곳에는 하얀 벽지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은 시선을 돌려 내게 눈을 맞추거나, 테이블 위에 멍청히 놓여진 커피잔을 보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뭘 보고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대화의 흐름을 끊기 싫었기 때문이다. 윤은 멍한 눈을 하고서도 용케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불장난이라거나, 따돌림 같은 것들.” 말을 하면서도 버릇처럼 왼쪽 어깨를 주물렀다. 불현듯 처음 그녀와 섹스하던 날이 떠올랐다. 커튼 사이로 떨어지는 달빛이 윤의 어깨를 비춘다. 그 정도의 불빛만으로도 충분히 보일 만큼 윤의 어깨는 딱 내 손바닥 크기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보기 싫지 않아요?” 윤이 물었다. 어쩐지 후후. 하는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아냐. 좋아.”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래, 그것은 그저 반사적인 대답이었다. “거짓말.” 그녀는 웃고 있었다. 어깨를 주무르던 손이 어느새 테이블 위에 놓여있다. 나뭇가지같이 마른 손가락이 따다닥 따다닥 하고 마른 소리를 낸다. “우리는 장난이 아니었음 좋겠는데.” 윤은 애매한 곳에서 말을 삼켰다. 나는 그녀의 장작 같은 손가락을 쥐었다. 그 뒤의 말이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손을 쥐어야만 했다. 만에 하나 윤의 삶을 태우려는 무언가가 다가온다면, 나는 기꺼이 온몸으로 그것을 막겠노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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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5 - 2

502

 

 

 

마계에 가는 방법은 간단한데 레시아에게 부탁을 하거나, 마물에게 마계로 가는 길을 물어보면 된다. 마계로 가는 것은 엘프의 숲으로 가는 것보다 더 낮은 난이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손쉽게 사람들도 찾아갈 수 있지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마기가 인간의 몸에 침식하기 때문. 처음에 레시아가 나왔을 때도 일반인이 레시아의 본 모습을 보면 죽거나 침을 흘리는 이유가 오러의 기초적인 재료가 마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 말을 왜 하고 있냐고 하는가 하면...

 

“자기는 어느 쪽이 좋아? 오른쪽? 왼쪽?”

 

“내가 분명 결계를 5중으로 치고 잤을 텐데 어떻게 꿈속으로 들어온 거야?”

 

릴리스에게 그대로 꿈속에 잡혀버렸다. 그것도 양 옆에 분신술을 쓰는 듯한 그런 기분일까? 오른쪽이 말을 끝내면 왼쪽이 말하기 시작하는 그런 구도. 잠을 자고 있다가 눈을 떴더니 이상한 집 안에서 양 옆에 릴리스가 누워있다면,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내 경우에는 기겁을 했다.

 

기겁한 이유라면 아까 전 내기에서 내가 졌는데 그대로 공약을 지키려는 집착이라고 해야 할까? 평소보다 더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보라 빛의 눈동자가 나를 빨아드리려고 하고 있었다. 우선 모르는 척을 하고 말을 해보자.

 

“그래서 지금 여기에 부른 이유가 뭔데?”

 

“내기에서 이겼으니까 같이 자는 거잖아?”

 

“오늘은 단기기억상실증이 걸려서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래? 그러면 그거대로...”

 

“하지마!”

 

레시아나 시나도 진정시키는데 20분이 걸린다면, 릴리스의 경우에는 본능이 이성을 누르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기 때문에 40분의 시간이 걸린다. 양 옆에 릴리스가 같이 붙은 상태로 귀를 달구면서 뇌에 침범하려는 걸 버텨야 하니까.

 

“본의 아니게 시행되는 거지만 이건 2차전이라고?”

 

“2차전은 무슨! 어떤 불합리한 내기를 할 생각이야!”

 

“오늘 밤이 다 지나는 동안 유혹을 참아내기?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글쎄? 다음날 말라비틀어져서 일어나지 않을까? 정말로 미이라가 되어버린다면 미순이도 올 거야.”

 

“그 미순이라는 녀석 진짜로 있는 거냐!”

 

하긴 묻고 싶은 것이 있긴 하니까 다른 말이라도 할 겸 시간을 때우도록 하자.

 

“그러고 보니 실베스에게 얼마나 당한 거야? 아까 다리의 상처만 봐도 심각해 보였는데?”

 

“당연히 그는 오랫동안 전투를 해서 노하우가 있으니까, 마왕이라는 자리가 더 어울렸을지도 몰라. 레프리시아의 경우에는 내정과 외교에 강하다면, 지금 실베스는 레시아가 닦아놓은 내정과 외교를 중심으로 전쟁을 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어.”

 

말하는 건 좋은데 릴리스의 손이 느닷없이 내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이거 참 궁금하네. 다른 이들은 릴리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 아니면 느닷없이 내 단추를 풀어버린 릴리스의 행동에 관심을 더 가질까?

 

3번째 단추가 풀리기 전에 단추를 푸는 손을 잡으려 했지만, 왼쪽에 누워있던 릴리스가 이미 내 팔을 베개로 쓰고 있었다.

 

“게다가 마신의 옥좌에 앉았다면 실베스는 거대한 파괴의 욕구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할 거야. 레프리시아는 저주처럼 걸려있는 전대 마왕들의 욕구들을 모두 타락시켜서 바꿔놨기 때문에 면역이라고 보면 되겠지만, 만약 이성을 조금만 늦게 차렸으면 레프리시아가 죽었을지도 몰라.”

 

“레시아와 실베스 씨에게 무슨 차이가 있길래 그렇게 많이 벌어지는 거야?”

 

“말 그대로 레프리시아는 전대 마왕의 욕구를 모르고 자유롭게 방랑하고 있는 상태라면, 실베스의 경우에는 저주에 빠져서 더욱 강인한 힘을 추구하며 살아왔다는 거지. 게다가 3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실베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아.”

 

오른편에 있던 릴리스가 한숨을 내쉬면서 내 웃옷의 상의를 점거하려고 하기 전에, 어떻게든 이곳 미로를 탈출하기 위한 생각만 하기로 했...

 

“후우~”

 

“히익!”

 

는데 릴리스의 화산과 같은 뜨거운 숨결이 뇌와 가슴속을 지피기 시작하면서, 어쩌다 보니 점점 본능이 이성보다 더 커지게 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다른 걸 생각하자. 다른 거. 그래 세계평화라던가...음. 그 다음은 다른 생각이 전혀 안 나네.

 

“귀하고 얼굴이 새빨간데?”

 

“시끄러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여자에게 압도당하는 나의 인생이 된 이유가, 루니아 누나 때문이라고 하면 되는 것일까? 그 바보 같은 백장미인지 뭔지 때문에 이 지경까지 왔다면 정말 커다란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은 다른 사람들과 많이 자는 것 같은데, 나하고만 같이 안 잤잖아?”

 

“그거야 레시아와 사이가 안 좋으니까. 다음에 일어나면 분명 레시아가 내 눈 앞에서 어마어마한 마법을 사용할 거라고.”

 

“레프리시아와 사이가 안 좋다라...확실히 그럴 만도 할 거야.”

 

쓸쓸해 보이는 릴리스의 말에 이번엔 왼쪽으로 돌아보았다.

 

“레프리시아가 좋아하는 선생님은 내 은인이니까. 서로 연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야. 여자들은 좋아하는 남자가 하나라면 그 남자를 빼앗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그러니 예전에는 레프리시아가 땅꼬마였던 시절에, 신체적인 우의를 강점으로 먼저 빼앗으려고 했지.”

 

그래서 나는 과거에서 자다가 습격을 받은 거냐.

 

“그래도 선생님의 존재는 상당히 대단했어. 정신방어와 자기관리가 너무 뚜렷한 거였지. 그때는 몽마들의 여왕자리가 아니었어도, 나 나름대로 서큐버스라서 자신감은 있었으니 내 남자로 된 줄 알았는데, 다음날에도 평소와 같이 레프리시아와 나에 대한 애정이 동등한 거야.”

 

그거야 과거에 오래 속박당할 수는 없으니까.

 

릴리스가 말하는 것마다 머릿속에는 문장이 만들어졌는데, 절대로 입밖에 내뱉지 말라고 머리가 명령한다. 쓸쓸해 보이는 눈과 얼굴이 마주했을 때도 심장이 가속하고 있지만, 차분하게 냉정히 다른 대답을 했으니.

 

“결정적으로 무엇 때문에 레시아와 사이가 틀어진 거야?”

 

“선생님을 찾지 말라고 했어. 다른 우상을 찾으려는 가련한 모습은 마왕의 본보기가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레프리시아는 반발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사이가 멀어지게 된 거야.”

 

“지금도 찾지 말라고 설득하고 있어?”

 

“말할 기회가 없지만, 대화를 나눈다면 찾지 말라고 할 거야.”

 

“어째서?”

 

릴리스들이 양 옆에서 꼭 껴 앉은 체 내 귓가로 동시에 속삭였다.

 

“지금은 내 옆에 있으니까.”

 

***

 

킹 크림존이 빠르게 지나간 아침은 기력이 공중분해 당해서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한번 같이 잔 남자는 기억하고 있는 릴리스가, 과거에 나를 알아보고도 끈질기게 달라붙지 않고 멀리서 지켜만 본 이유라면, 레시아와 사이가 좋지도 않은데 자신이 찍어둔 사람을 빼앗기는 것이 가장 싫어해서, 릴리스가 나와 레시아의 사이가 많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는 것.

 

마치 간사한 뱀과 같은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

 

“아아~ 기분 좋게 잘 잤다~ 자기도 잘 잤어?”

 

매우 행복해 보이는 릴리스가 거의 죽어가려는 나를 보며 인사했다.

 

“너. 지금 내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이 나오냐?”

 

“꿈의 미로에서 짜릿하게 잘 보낸 것 같던데?”

 

“끊임없는 고문을 받는 줄 알았다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쾌락으로 인한 고문이니까. 내가 거기서 살려달란 말을 몇 번이나 외쳤는데도, 릴리스는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분위기에 심취된 나머지...아니,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나중에 트라우마로 남기고 싶지 않아.

 

아무튼 알게 모르게 릴리스는 나의 대한 정체를 비밀로 하고 있었으니, 선생님과 관련되어 주의사항을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지.

 

“주인? 아침부터 왜 기어 다니는 것인가? 혹시 인간에서 지렁이로 종족이 바뀌는 이상현상을 체험하고 있는 건가?”

 

검은 고양이가 내 속을 뒤집어놓기 위해 도발하는 건지, 진짜로 걱정해서 묻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아이언 클로를 사용할 힘도 없어서 약이 필요하다고만 말했다.

 

“약인가? 그렇군. 그러면 머나먼 행성에서 추출한 테라진은 어떤가? 주인에게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슨 탈다림이세요?”

 

“짐의 꼬리가 주인의 손보다 잘 싸운다.”

 

“헛소리 그만하고 활력이 회복되는 그런 약이나 가져와요!”

 

“주인은 정기가 이미 한 가득 빨린 터라 활력이나 그런 건 소용이 없노라. 그건 그렇고 릴리스.”

 

레시아가 릴리스 앞에 천천히 움직이더니, 예전처럼 다시 싸우려고 하는 게 아닐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여전히 침묵이 감도는 이 한 가운데에서, 레시아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어떤 플레이를 했는지 짐에게 공유를...냐아아아아아앗!”

 

“무슨 플레이 공유야! 이 정신 나간 고양이가! 나중에 실시간으로 공개처형도 하겠다! 이 녀석아!”

 

“아프다! 아프단 말이다! 놓아라! 짐이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시끄러워!”

 

뜬금없는 한마디에 분노에 몸을 받기며 검은 고양이 머리를 한 손으로 집어 들고 아이언 클로를 시전했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바닥에 널브러진 레시아가 목소리가 묻힌 상태로 입을 열었으니.

 

“그래서 지금은 기운이 좀 나는가?”

 

“뭐. 덕분에요.”

 

릴리스가 멀리서 숨죽여 웃는 동안 루니아 누나가 내 앞에 무지개 약을 줬다. 느긋한 웃음으로 다가와 햇살에 비치는 금색의 파도처럼 흐르는 긴 머리가 마치, 금색의 사신을 연상하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분위기다. 뭐든 것을 꿰뚫는 듯한 붉은 시선과 마주했을 때, 루니아 누나의 입술이 움직였다.

 

“마셔요오.”

 

“네?”

 

“원샤앗~”

 

“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에요오?”

 

“네?”

 

저런 건 어디서 배우고 온 거야?

 

“루니아 누나. 저는 약을 달라했지 독극물을 달라한 적은 없어요. 그보다 이 무지개 약은 상처에 발라서 죽이는 용도와 마셔서 사람의 식도를 태우는 용도가 있나 보네요? 그리고 왜 분유병에다가 담아서 준거에요? 그거나 좀 물어봅시다.”

 

“누나 무릎 위에서 카일이 얌전하게 약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오~”

 

“웃기지마! 누가 이 약을 먹을 것 같아! 분유병에 들어가 있어도 그게 정상적이었으면 먹긴 했겠지만, 무지개 약은 아냐! 무지개 다리를 건너게 하고 싶어!”

 

“빨리 마셔야 쑥쑥 자라난답니다아?”

 

“내 키는 이게 끝이란 말이야! 으웁!”

 

강제로 루니아 누나에게 붙잡혀 분유병에 있던 무지개 약을 마시는 동안,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하고 있는지 하얀 방이 가득 매워진 장소에 도착했다.

 

“솔직히 물어보자 세린. 여기 무슨 체크포인트 같은 곳이야? 내가 쓰러질 때마다 이곳에 오는 것처럼 보이는데?”

 

“오기 싫으면 오지 말던가!”

 

“아니, 물어본 의도와 그에 따른 대답이 전혀 다른 방향이잖아.”

 

이번에 세린은 여전히 날개 옷과 같이 하늘빛 하란복을 입고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계량을 좀 했는지 치마가 짧고 소매가 길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수수하다고 봐야 할까?

 

“엘티노스에 대한 일은 들었어. 레이베리아에게 강제 퇴장을 당했다면서?”

 

“천계에서 퇴출당했지. 본래 천계에서 돌아다니면 안 되는 몸이긴 하지만, 레이베리아가 그렇게까지 정색을 하면서 보낼 줄은...”

 

“그야 당연하지. 그녀의 계획을 네가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잖아.”

 

하지만 그게 무슨 계획인지 모른다는 게 걸린다. 봉인 당한 엘티노스가 어디에 갇혀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레이베리아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다라.”

 

여전히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지만, 우선 실베스 씨를 만나고 해결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다.

 

“너는 그 몸으로 지금의 마왕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 강대했던 타락의 마왕도 죽을 뻔했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아니. 이번에는 아냐. 지금 상태로 너를 보내면 늑대들의 소화리스트로 너의 신체 부위가 들어갈지도 모르지. 그러니 단련을 시켜주도록 하겠어.”

 

 

카린이 지니고 있던 특유의 신비로움도 관찰이 끝났는지, 세린에게 뿜어져 나오는 묘한 신비가 이내 살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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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세계와 현실세계에서 동시에 고통을 받고 있는 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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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5 - 1

501

 

천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진짜가 아니기를 빌고 있지만,

내 눈으로 진실과 마주하기에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레이베리아가 적대하며 쏘아보고 있는 눈에는

머지않아 바보 같은 결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레이베리아와 대면한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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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와 만나기를 요구했던 말을 던지자마자 레이베리아로부터 천계에서 추방당했다. 추방당하는 속도가 빛보다 빨라서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버린 줄 알았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 추방당한 것은 잘된 일이 아니었다. 다른 여신도 만나봐야 할 것이고 정보를 더 수집해야 하던 찰나에 튕겨나갔으니까. 그래도 가장 다행인 것은 추방을 당해도 천계에 다시 갈 수 있다.

 

“레이베리아의 권능이 한 가득 올라가있어.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우리스가 이 사실에 대해 모르는 걸까?”

 

“마스터. 샤이어로부터 연락이 닿았습니다. 천계에 이동하지 않아도 그나마...”

 

“아니. 샤이어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라고 하세요. 이미 엘티노스의 밑에서 배우고 있던 시절 때문에 감시 당하고 있을 것 같기도 해서...”

 

문제는 레이베리아가 천계에서 추방시키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 그건 아우리스 여신이 가지고 있어야 할 권한이지 않을까? 혹은 회의를 열어서 대다수의 찬성을 통한 강력한 형벌이기도 하고, 보통 인간은 그냥 추방할 권리가 있을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시나와 동화를 해서 신격화를 이룬 상태였는데, 곧바로 추방을 시킬 정도니 이렇게 생각하면 꽤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쉬지 않고 마계로 이동하기로 하면서, 레시아와 릴리스, 마리아의 교섭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잡화점을 들렸지만, 모두 만신창이인 상태로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먼저 띄었다.

 

“아. 주인인가? 늦었군. 뭐...짐이 빨리 온 이유라면 교섭을 하려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실베스가 기습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마왕이 되고 나서 무식한 속도가 더해지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더군.”

 

“그래도 긍지가 높아서 우리를 놔준 모양이다. 카일이여. 어라? 얼굴이 왜 그런가?”

 

“평소보다 무서운데 자기야? 교섭에 실패한 건 미안하지만...어쩔 수 없...”

 

“아니.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에요. 조만간 실베스는 제가 찾아가도록 하죠. 레시아와 마리아, 릴리스는 상처치료부터 해두세요. 잡화점에는 비약이 많으니 그걸 이용하면 되니까. 조금 있다가 정보 교환을 하도록 할게요.”

 

흔들의자에 앉아서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무서운 표정을 지었던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자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공격을 받고 왔다는데, 그 사실에 열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저 셋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유는 아마 따로 있겠지.

 

실베스는 긍지가 높은 늑대인간이 기초로 한 마왕이기에, 전 마왕에 대한 예의로 한번 살려준 것처럼 보였지만, 그걸로 빚을 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기 주인? 등에 있는 상처에 손이 닿지 않으니, 약이라도 발라주지 않겠나?”

 

레시아는 뒤에 있는 드레스의 지퍼를 풀은 상태로 나에게 호소를 하기 시작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했는데, 날카롭게 할퀴고 간 발톱자국이 눈에 들어오고 나서, 나도 모르게 레시아의 바로 뒤까지 뛰어와야 했다.

 

“이렇게 크게 다쳤으면 좀 말이라도 하라고요! 엘릭서 가져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요!”

 

등을 거의 파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출혈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고 자세히 보니 레시아 주변에는 핏물이 계속해서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경상으로 생각했지만 생각했더니 치명상이라고 봐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리 서두를 필요 없다. 짐은 마왕이다.”

 

“전 마왕이잖아요. 지금은 마왕이 아니에요.”

 

“...아무튼 적어도 주인보다는 튼튼한 몸이니라.”

 

“급소에 맞으면 전부 죽어요. 다치고 왔을 때 제발 좀 어디가 어떻다고 이야기를 좀 하세요!”

 

“그, 뭐냐...미안하군. 앞으로는 제대로 말할 테니 화내지 말거라...”

 

마나로 감지해서 상처부위에 엘릭서를 뿌리자마자, 레시아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아픈 건 맞겠지만 꿋꿋하게 버티면서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는 레시아의 노력이 가상하기 때문에, 혹시 몰라 루니아 누나 특제 약을 꺼내기로 했다.

 

“잠깐만! 주인! 그 불경한 약을 왜 꺼내느냐!”

 

“그야. 이걸 바르면 빠르게 회복하니까요.”

 

“아니. 그 약은 아까우니 주인이 발라야 하지 않는...냐아아아아아아앗!”

 

어마어마한 비명소리가 전세계로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처부위에 직접 엘릭서를 발라도 굳게 닫혔던 입이, 순식간에 벌어지면서 거대한 포효를 만들었기에, 그 주변에 있던 동식물들이 너무 깜짝 놀라서, 나무가 뿌리를 들어 자리를 이동했고, 잡초 또한 모두 땅속으로 들어갔으며, 고양이들이 사방팔방에 몰려와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지금 창문 밖으로 벌어진 모든 일을 그대로 표현했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나무가 뿌리를 들고 잡화점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란 것.

 

“흐으윽...아프지 않는가...주인...”

 

울먹거리는 말투로 나를 돌아보면서 항의하는 레시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역시 마왕출신이라서 그런지 기절하지는 않았네요. 그나마 장하다고 볼 수 있어요.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으니 드레스를 올려드리죠.”

 

“처, 첩은 잠깐이나마 다른 일이 있는지 보고 오겠다.”

“아! 맞아! 나도 꿈의 미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을...”

 

“거기 두 사람 멈추시죠.”

 

내 말에 경직이라도 당하듯 발이 멈춘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상태를 살펴봤을 때. 마리아는 배 부분에 중상, 릴리스는 왼쪽 허벅지에 중상을 입었는지 다리를 절고 있었다.

 

“당장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 레시아도 도와주세요.”

 

“싫다! 첩은 아픈 게 싫으니 놓아라!”

“이건 많이 먹고 씻고 푹 자면 회복할 상처라고? 그 무지개 약은 치워줘!”

 

다시 2명의 비명이 잡화점 주변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이번엔 근처에 있던 구름이 이곳을 지나가지 않고 돌아서 가는 기괴한 현상을 보게 되었다.

 

“대부분의 상처는 다 아물었으니 이제 바쁜 일이든 감기에 대해 대처를 하던 알아서 하세요.”

 

내가 입을 열자 억울한 듯 눈물을 한 가득 머금고 나에게 소리치는 마리아.

 

“너무하지 않는가! 여린 소녀의 상처가 난 배를 약을 바른 손으로 막 쓰다듬다니!”

 

“그럼 다치지 말란 말이에요.”

 

퉁명스럽게 대답을 한 뒤에 릴리스를 보니까,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이상한 스위치라도 켜졌는가에 대해 한층 걱정하게 만들었지만, 릴리스가 나에게 던진 말은 이러하였다.

 

“자기, 평소와는 너무 적극적이야.”

 

“그럼 너도 다치지 말라고.”

 

“평상시에 다치고 온다면 이렇게 다정하게 되는 거네?”

 

“다음에 다치고 오면 루니아 누나의 약물이 한 가득 있는 욕조로 집어 던질 줄 알아.”

 

이런저런 소리를 듣고 받아 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이정표를 생각했는데...

 

“다음은 제가 마계로 갈게요. 천계로는 가지 마시고 실베스 씨와 이야기를 좀 하는 편이 좋겠어요.”

 

“하지만 짐은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아까처럼 큰 상처를 남겼노라...”

 

“늑대들은 자기보다 서열이 위에 있지 않으면, 무조건 듣지 않으려고 해요. 그러니 실베스 씨와 이야기를 하려면, 제가 마계로 직접 가서 마왕을 무너뜨리는 방법밖에 보이지 않네요.”

 

잡화점 내부를 청소하면서 말하는 거지만, 레시아도 이기지 못한 실베스 씨를 이길 수나 있을까? 아니면 다른 꾀를 생각해서 그를 압도해야 한다. 레인이 천계로 올라갈 방법은 많지는 않으나, 마계로 가기 전에 레인의 얼굴을 보도록 하자.

 

-스르륵.

 

얼굴 근처에 있는 붕대가 헐거워지기 시작했다. 남은 붕대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면서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고, 마나를 감지해서 보는 것이 아닌 시신경을 통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붕대가 전부 풀렸으니 이제 미이라에서 벗어났네.”

 

“오! 주인의 종족이 언데드에서 인간으로 변했노라.”

 

“언데드로 변한 적은 단 한번도 없거든요!”

 

레시아에게 큰 소리를 치자마자 시나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고 나서, 마주하며 입을 열기를...

 

“마스터. 저도 청소를 돕겠습니다. 저런 냥캣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저라도 확실하게 도움이 되어드려야...”

 

“뭣이라! 이 비둘기가!”

 

“올빼미입니다.”

 

“지금은 인간의 모습이지 않는가!”

 

서로 티격태격 싸우고 있는 사이에 릴리스는 카운터 뒤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흐응~ 이런 기분이구나.”

 

“뭐가?”

 

“자기는 항상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까지 일하고 잠을 적게 잔단 말이지?”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그게 왜?”라고 되돌려줬더니.

 

“아니. 피로가 많이 쌓였을 것 같아서.”

 

이번엔 불길한 기분이 가시화가 되어 음흉한 오러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잠을 잘 때는 결계를 5중으로 강화하며 자도록 하자.

 

지금은 다른 일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데...

엘티노스를 풀어준다면 대부분이 해결 될 것이라 생각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엘티노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지만.

 

“엘티노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그걸 추적할만한 방법이 있을까요?”

 

손에 있는 빗자루는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머리는 꽤 복잡한 생각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어느새 하얀 공간으로 가득 채워진 장소에서, 여전히 카린의 모습을 한 세린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 마음에 든 거야?”

 

“아니. 하지만 지금 대세는 이런 모습이잖아?”

 

글뿐이라서 지금의 모습이 대세라고 말해도 그려줄 사람은 없어.

 

“나를 불러낸 이유라면?”

 

“그야 당연히 엘티노스를 찾으려는 너의 헛된 생각이 나의 잠을 깨웠기 때문에, 나름대로 힌트를 주려고 하고 있어.”

 

세린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별로 즐겁지 않아 보인다. 언제나 화가 나있는 무서운 눈과 걱정을 해주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공격적인 말투.

 

“엘티노스가 나를 깨웠을 때의 마력은 확실히 알고 있어. 그러니 물품을 만든다면 엘티노스를 찾을 수 있는 마나 탐지기가 되어줄 거야.”

 

“잡화점에 있는 물품으로 어떻게든 이용해서 찾으라는 거로군. 하지만 애석하게도 엘티노스는 상급신이잖아?”

 

“엘티노스는 인간인 상태에서 승천을 한 경우이기 때문에, 신성력을 이용해서 권능을 부리고, 마나를 사용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 그러니까...”

 

말끝에 힘없이 늘어지는 세린의 마지막 문장을 내가 채웠다.

 

“엘티노스는 꼭 구해낼 거야. 그리고 너도 봤듯이 다음 주인을 어디서 만나야 할지 결정이나 해둬.”

 

세린이 가엽게 보여서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올리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위, 아래가 반전이 되면서 검은 나무 바닥과 나를 내려다보는 레시아와 시나를 보고,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세린! 이 녀석! 나를 또 바닥에 패대기를 쳤겠다! 당장 나와! 이 자식아!”

 

인성을 따지자면 엘티노스보단 세린이 위인가?

 

결국 나를 뜯어말리는 레시아와 시나 때문이더라도 화를 삭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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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화까지 갈수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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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선생님께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선생님. 혹시 제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불편함이 없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 이상의 호칭을 알지 못하므로 편지에서는 선생님이라고 표기하겠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제 말을 편견 없이 들어주실 것 같아서 이 편지를 보냅니다. 아 제 말은, 선생님이라면 저를 완벽하게 미친 사람 취급해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이 편지를 보낸다는 뜻입니다. 흔히 누군가에게 ‘가장 무서운 게 뭐냐’고 물으면 귀신이라던가, 생활고라던가, 혼자 있을 때 울리는 초인종 소리 같은 것들을 털어놓기 마련입니다. 선생님은 혹시 그런 것들이 있으신지요? 아아, 세상에는 이렇게 무서운 것들이 가득한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나의 상황이라니. 정말 끔찍합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제가 겪고 있는 몇 가지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문제들 때문입니다. 불 꺼진 방에 앉아 다섯 시간씩 글을 쓰다 보면, 감각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서 공기가 창문에 달라붙는 소리라거나 살갗을 건드리는 햇빛의 온도, 아무도 없을 책상 아래 어두운 곳에서 들리는 신음소리 같은 것들이 느껴지곤 하는 겁니다. 선생님, 저의 이런 상태들이 짐작이나 가십니까? 착각일 것이 분명한 그 느낌들은 저의 손가락 끝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저는 그것을 ‘글에 미친 순간’이라고 부릅니다. 혹시 의학적으로 이런 증상을 설명할 방법이 있는지요?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저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반쯤은 미친 상태로 글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며칠 만에 키보드에서 손을 떼었을 때 화자가 누군가를 죽이고 시체를 처리하는 장면을 적고 있었습니다. 아아, 저는 양치질을 하고 차게 식은 밥을 먹은 뒤에 빈 그릇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하면서도 방에 널브러져 있을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와, 짓지도 않은 죄가 주는 죄책감에 내내 눈물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선생님! 혹시 저의 이런 상태에 대해 기존 사례든, 의학적인 용어든, 어떤 방법이든 간에 정의 내리실 수 있겠습니까? 아아 저는 방금 전에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사람을 죽였노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아니요 이번에는 정말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저는 그의 머리를 잘라내는 동안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를 미행하고, 집으로 침입해서 그의 인생을 끝장내는 동안, 분명히 저의 부인과 내연관계를 유지해오던 불륜남일 거라고 확신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결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저는 어째서 왼손 약지에 끼워진 빵 포장끈이 결혼반지였다고 착각한 걸까요? 선생님. 지금도 그의 머리가 옆에서 저의 죄를 속삭이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혹시 저의 증상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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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500화 특집

Out Story

 

모든 게 끝나고 잊혀진 시간 속에 잠들어있는 잡화점은 정지장에 갇힌 상태로 끊임없는 꿈을 꾸게 되었다. 바라보고 있는 달 토끼들은 잡화점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같은 유전자로 이루어진 호문쿨루스 또한 자신의 본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잡화점은 봉인 당해버렸고, 결과적으로 유랑극단의 각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유랑극단에도 치명적인 피해가 있었으니, 사회자가 소멸되어버린 탓에, 각본가 하나만 남게 되었고, 어릿광대와 맹수 조련사는 유랑극단을 배신하고 빠져 나왔으니, 각본가는 사회자 없이는 각본을 쓸 수 없기에 유랑극단 또한 붕괴 당했다는 걸로 결론이 났다.

 

다만, 아직까지 세상에는 적이 많으니. 천계의 수상한 움직임은 오직 엘티노스만 알고 있으리라.

-각본가가 쓴 듯한 각본의 일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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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와 천계, 그리고 인간계의 커다란 재앙이 사라지고, 우주에 떠 있는 달 토끼와 호문쿨루스는 잠을 얼마나 안 잤는지 눈 밑에 다크서클의 영토가 볼까지 내려갈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커다란 에너지 반응과 함께 잡화점이 시간상 잠겨버렸기에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는 모르는 상황.

 

달의 기술력으로 계산을 하며 예측을 했을 때는 희망적인 시간은 5개월정도로 잡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주인님께서 최소 5개월동안 정지장에 꼼짝없이….”

“그래? 막상 잡화점이 잠겨버렸으니 씁쓸하네. 그래서 희망사항을 버리고 얼마나 오래 걸릴 것 같아?”

 

나는 달 토끼에게 물어봤더니 돌아온 답은 이렇다.

 

“아마. 2년정도 걸릴 것 같아요.”

“아버지를 2년동안 못 만나는 건가…….”

 

옆에서 청초하고 장난끼가 많았던 여자애마저 한숨을 쉴 정도였으니, 카일이 퍼드린 영향력이야 말로 어마어마한 모양. 세린을 깨우고 내가 잡화점을 맨 처음 열었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잡화점의 주인을 보았을 때 카일만한 녀석도 없었는데.

 

“그런데 엘티노스 씨? 천계에서 일하라고 부르지 않아요?”

 

연분홍 빛의 귀가 솟아오르면서 한 질문이 그것뿐이더냐?

뭐 좋아. 그거 정도는 답해줄 수 있지.

 

“천계에서 일하라고 부르긴 해. 인간계가 난장판이 되어버렸고 잡화점은 작동불가능. 게다가 13대 마왕이 움직이지 못하는 시점에서, 마계가 비어버렸으니 마계도 엉망진창이 될 위기로 봉착할 거야. 그래도 실베스가 내 말에 따라서 마신의 옥좌를 향해 시험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결론이 나오겠지.”

 

시간이 흐르면 모든 이들의 상처가 아물고 약이 될 수는 없는 노릇. 이렇게 의지하는 생각도 지긋지긋하다.

 

“하우…달에 오는 것도 힘드네.”

“페어리 퀸이 이곳에 올 줄은 몰랐네.”

“엘티노스? 당신이야 말로 이곳에 왜 있는 거죠?”

 

손바닥보다 작은 날파리만 한 것이 나에게 존칭으로 부르지 않다니. 아니, 지금은 바쁘니까 그 정도까지는 용서하기로 할까? 금발의 머리카락이 달에 가까이 있기에 은발로 서서히 변하는 페어리들의 여왕. 티아 메르세데스가 커다란 눈으로 쳐다보며 질문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당신도 카일을 노리고 있는 건가요? 미안하지만 카일은 제가 접수할거에요?”

“누가 누굴 노려? 카린의 모습이라면 마음이 없지는 않다만, 그래도 나는 남자와 여자를 구별할 수 있다고. 너야 말로 임자 있는 녀석을 납치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음흉한 계획 같은 거나 세우지마.”

 

카일이 대체 뭐길래 주변에 여자들이 저렇게 몰려올까? 나는 남자답게 여자와 만나려면, 사전계획에 시간을 들이면서 미끼까지 물기를 기다리기까지 고생하고 있는데. 카일의 경우에는 노리고 있는 여자가 더 많을 정도로 이상한 녀석이다. 나도 카일의 인생으로 태어났다면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엘티노스?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아?”

“아니. 난 지극히 남자로서 해야 할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보다 너는 카일이 왜 좋은 거냐? 그거나 물어보자.”

“그야 귀엽잖아. 가지고 놀기 딱 좋은 정도?”

 

장난감 취급을 받고 있는 거냐.

무슨 인생이 그래?

어쨌든 욕망이 가득 찬 티아의 눈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서는 불쌍해 보일 정도로 처량한 모습의 카일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의식과 무의식을 다루는 상급신이기에, 무심코 보고야 말았지만 눈을 뜨고 볼 수 없었으니, 지금 티아의 무의식에서는 생크림 범벅이 된 카일을 묶어놓고 전부 핥고 있는 동안, 나는 눈을 다시 돌려서 꺼림칙한 것과는 달리, 카일을 걱정하고 있는 카렌이라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카일이 걱정된다고 한들 이곳에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너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 거지?”

“잘 모르겠네요. 달에 조용히 살아갈까 생각하고 있어요.”

“숨어서 살기에는 네 재능이 너무 아까워. 네 아버지처럼 용병이나 뛰는 게 어때? 호문쿨루스라서 달에 올라가 정기적으로 메인터넌스만 받는다면, 그 상태에서 영구적으로 살 수 있잖아. 카일의 수명과는 다르게 너는 별일 없으면 열 번째 천년기까지 살 수 있어. 그때 동안 루니아를 뛰어넘을 만한 검사가 되어봐라.”

 

인재는 계속해서 굴려야 늘어나니까. 앞으로 300년동안 유지할 수 있는 인재를 만들어야 한다면, 내가 본래 행해왔던 마법의 대중화를 더욱 간편하게 만들어야 하겠지.

 

“그럼 나는 가볼 테니까. 티아는 날 좀 따라와. 상담할 게 있으니까.”

“상담? 설마 그런 말하고 뒷골목에서 날 꼬신다거나?”

“나는 임자 있는 사람은 건들이지 않아. 애초에 상급신이 되면서 어느 정도는 청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청렴이 다 죽었어? 예전에 인간으로 활동했을 때 장로 드래곤의 부인을 뺏어간 거 생각 안나?”

 

제길. 저 녀석은 뭔데 저런 것까지 다 기억하냐?

 

“그때는 혈기왕성했던 시절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남자라면 로망이 있는데. 레드 드래곤의 폴리모프가 가장 뛰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고, 그 경우에는 내가 꼬신 것보단 나의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고 반한 쪽이 더 나빠.”

“인간과 드래곤이 서로 싸우는데, 제 3자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양쪽을 모조리 박살내는 모습을 본다면 나라도 반할 거야. 그래 그건 인정할게. 그래서 상담할 내용은?”

 

리베리티아 고원으로 좌표를 잡아 천천히 걸어가자, 달의 내부에서 리베리티아 고원이 연결된 것처럼 풍경이 이어졌다. 풍경이 단숨에 바뀌고 뒤를 돌아봤을 때는, 달에 있는 건물 내부는 찾아볼 수 없고, 고원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나무 하나만 존재했으니, 나는 그곳에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최근에 내가 보았을 때는 직접 영향을 주는 천계의 영향이 너무 커.”

“언제나 인간의 편에서 좋은 일을 하다간, 천계와 마계가 전부 붕괴될 거야?”

“그래도 인간계의 주인은 인간이 되어야 해. 언제까지 창조주 앞에서 인형처럼 움직이게 만들 수는 없지.”

“창조주도 너의 계획을 알고 있어?”

 

작은 요정은 정신 사납게 이리저리 날고 있었지만, 내가 계획하고 있는 정보는 저 녀석에게 처음 공개하는 중.

 

“당연히 모르지. 내 계획은 인간이 스스로 독립하기를 바라는 것뿐이니까. 종교를 서서히 줄여나가는 것과 더불어,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순수한 발전을 하게 만드는 것뿐이야. 왕가에 휘둘리는 인간들이 없고, 특수한 힘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거지.”

“그런 어린 애와 같은 꿈을 아직도 꾸고 있을 줄이야. 뭐, 그런 편이 엘티노스답긴 하네. 불가능이 있으면 가능할 때까지 노력하는 모습. 카일과 전혀 다른 면이 있어서 나름대로 귀엽기는 해.”

 

이 날파리가 지금 상급신에게 귀엽다고?

지금은 바쁘니까 넘어가주지.

 

“그래서 창조주에게 권한을 조금 이어받아 몇몇 인간들의 유전자를 살짝 변형시키려고 하고 있어.”

“하지만 발전의 끝에는 언제나 멸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 강해지면 주목을 받아버리니까.”

“괜찮아. 현재진행형이니까. 조금씩이나마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능력을 사용하는 이른바 ‘초능력자’들이 늘어나고 있어.”

“또 멋대로 한 거야?”

 

요정은 경악했다.

자신이 들은 뉘앙스로는 “내가 앞으로 이런 걸 할 거다.”였으나, 내가 이미 말을 뱉어버린 이후로는 “나는 이미 이 일을 진행 중이다.”라고 개념이 교체된 순간이었으니까.

 

“다른 여신들은 전부 모르지? 그보다 대체 누구에게?”

“우선 옛 카멜롯에 있던 역사학원장 ‘토리스 베르트리히’에게 사이코 메트리를 선물했지. 실제로 유전변형으로 인한 능력발현 실험이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야. 지금은 베르트리히 가문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찾기가 좀 곤란한 상황이 있지만 그 가문을 중심으로 세대와 자손이 계속해서 번영하고 있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거야? 만약 다른 여신들에게 발견이라도 되면, 이 일에 대해 어떻게 해결할 거냐고!”

“두 번씩이나 강조해서 내 신경을 긁지마. 당연히 알아서 되겠지. 지금은 마나를 이용하지 않아서 불경스러운 힘이라고 천대받을지 몰라도 괜찮을 거야. 역경이 있으면 더욱 억세지는 것이 인간이니까.”

 

지금 당장은 내 걱정부터 해야 할 차례니까.

이런 일을 해서 좋게 볼 신은 1명도 없다.

 

“그래서 나에게 부탁한 일은 뭐야? 카일에 관한 거야? 아니면 엘티노스에 관한 거야?”

“둘 다야. 첫 번째로 파이론에다가 카일의 묘지를 미리 만들어놔. 타입캡슐이라고 속이고 백장미를 1호집부터 앞으로 찍을 것들 전부.”

“그런 이유라도 있어?”

 

나는 투명한 필름을 주머니에서 꺼낸 뒤에 티아에게 주며 말했다.

 

“이게 17호집 백장미에 끼어져 있어야 해. 정확한 메시지는 주지 않았지만 이거야 말로 도움을 구할 수 있게 엮일만한 계기가 될 거야.”

“17호집? 그건 없잖아?”

“달에서 받아왔는데 요즘은 특수처리로 사람처럼 만들더라고, 네가 좋아하는 만화가인 루나 선생의 최신작이니까. 꼭 이곳에 필름을 끼어 넣어라.”

“30번만 정독하고 하도록 하지. 그런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메시지를 집어넣어도, 의미심장한 물건을 보내도 될까?”

“그 녀석은 천운이 타고나서 알아서 할 거야. 어떤 불리한 상황도 뒤집을 수 있는 발상의 천재잖아?”

“으흠? 너무 잘 만든 거 아냐? 카일이 충격을 먹겠는데?”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그러면 약속이 있으니 천계로 올라가도록 하지.”

“약속이라면?”

“개인적인 사생활이야. 남자의 일정을 일일이 확인하지 말라고?”

 

***

 

“엘티노스 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세요?”

“아무것도 아냐. 샤이어.”

“어제 다녀간 발키리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길. 들켰군.”

 

사실 여자생각하기에는 머리가 바쁘기 때문에, 그냥 샤이어의 질문을 멈추도록 거짓말을 했다.

 

“어쨌든 마계로부터 밀서가 들어왔는데 실베스가 14대 마왕으로 되었다는 소식이에요. 마계의 군세는 더욱 더 밀집이 되기 시작할 것이고, 천계와 전면전을 할 날만 머지 않았군요.”

“최대한 천계와 마계가 전쟁을 하면서 인간계에 신경을 끄도록 만들어야지. 마왕이 교체되기 시작하자마자 마물들을 몰아내기 위해, 프리트론의 릴리 기사단을 중심으로 몬스터들이 배회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어. 인간계 곳곳에서도 전쟁이 발발하기 시작할 거야.”

 

세대가 교체 되면서 긍지를 높게 사는 늑대인간의 수장인 실베스라면, 인간들과 싸우면서도 자비를 바라는 적을 가차없이 죽이지는 않으리라. 전쟁은 피할 수 없지만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 초능력자들의 세상이 오기에는 너무 약하고 볼품없으니.

 

“저는 아직까지 엘티노스 님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아요. 인간들이 우리들로부터 독립하면, 결국 신앙이 쌓이지 않아서 천계가 힘들어 질 것 같은데요?”

“샤이어. 나의 큰 그림은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공존하며 살아가는 거야. 신이라는 이름도 꽤나 지루한 거라고, 언제까지 자만하면서 인간을 무시하고, 마물이 불결하다고 경멸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엘티노스 잡화점에는 내가 바라는 이상이 실현되고 있다고. 카일도 그렇고 그 주변에 있는 녀석도 그렇고, 전부 편견을 가지지 않고 잘 살아가는 모습에 가능성을 찾은 거야. 그러니 초능력자를 대두시켜서 힘을 끌어올리고, 천계와 마계, 그리고 인간계가 동등한 힘으로 협약을 맺는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귀찮은 일의 60%가 줄어들지.”

 

그래야 내가 여자를 꼬시는 시간이 많이 늘어나니까.

……본심은 그게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바라고 있는 멋진 남자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연구에 매진하는 사이에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샤이어가 내 집을 떠나고 나서 다른 일을 처리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상향을 상상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이 일을 잘 하고 있는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면, 근처에 있는 이웃을 관찰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 언제나 사소한 불길함은 내 근처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진실을 꿰뚫는 여신인 레이베리아가 나를 찾아왔다.

 

“엘티노스? 요즘 자주 성역 밖으로 나오지 않는데 무슨 일 있는 겁니까?”

“그야 집안에서 뒹굴기 바쁘기 때문이지. 이곳에 찾아올 정도로 한가하다면 차라도 한잔 하겠나?”

 

작고 아담한 육체이지만, 부드러운 실크로 몸 전체를 가린 여신은 내가 반갑지 않나 보다. 그 이유라면 영체가 아니라 인간인 상태로 승천하여 상급신이 된 것이기에, 레이베리아는 내가 인간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레이베리아는 자신을 숭배한 인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좋지 않게 평가를 하고 있으니 그 이유는 모두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레이비스 가문도 거짓말을 하지만 자신에게만 진실을 말하는 거라서 봐주는 건지.

 

“요즘 기이한 인간이 포착되고 있다는 심판자의 말이 자주 올라오고 있습니다. 피로 이어지는 능력도 그렇고, 영혼으로 이어지는 능력도 그렇고, 월식의 파편으로 힘을 이어받는 것도 이상했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이 마나를 사용하지 않아도 능력을 사용하고 있더군요.”

“그렇군. 좀 이상하네.”

 

싸늘한 냉기가 솟구쳐 오르는 단어가 레이베리아 입으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시치미 때지 마시죠. 당신이 인간들을 개조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감히 저에게 거짓말을 하시려고 하다니.”

“그러게? 그렇다고 해서 무슨 문재라도 되는 건가?”

“당신은 지금 스스로 천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 그건 너의 오만한 생각이 불러온 오역일 뿐이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모든 생명들이 공존을 이루며 살 수 있게 되는 발판이 될 수 있다고.”

“애석하게도 인간들은 자기 종족 이외에 공존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카일의 경우에는 특수한 경우일 뿐. 대다수의 인간들은 전혀 그렇지 않지요. 인간으로 살아온 당신이 그 사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지 않나요? 아니면 신으로 너무 오래 생활한 나머지 인간성이 다 없어진 것입니까?”

“인간에 대해 함부로 짓거리지 마라! 레이베리아! 인간은 천계와 마계가 생각하는 것처럼 약한 존재가 아니야! 나야 말로 천계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어째서 내 앞길을 방해하려고 하는 거지!”

 

앞에 있는 여신이 한숨을 내쉬면서 뭔가 번쩍이기 시작하더니, 내 몸이 어느새 반대편으로 날아가선 바닥을 기어야만 했다.

 

“망할…. 힘이 안 들어가다니….”

“한 때 비니스를 봉인했던 장신구였죠. 당신에게 이걸 쓸 줄은 몰랐는데. 정말 유감이에요.”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내 힘을 모조리 흡수한다면, 이번엔 내 존재를 흡수하려고 들겠지. 절대적인 봉인을 가동하는 목걸이라서 그런지, 터무니 없는 외통수에 당해버렸다.

 

그런 와중에도 뭐가 그리 기쁜지, 레이베리아는 조소를 띠며 천천히 작은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각본에 어긋나는 사람은 살려주는 타입이 아니지만, 당신은 상급신이라서 죽일 수 없으니 얌전히 잠이나 자고 있으시죠?”

“그렇군. 거짓말을 싫어한다는 진실의 여신은 사실 거짓말쟁이라니…….”

“진실은 언제나 위험하고 무거운 법. 거짓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법이랍니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마지막 소리가 이런 거라니….

 

어둠이 나를 삼키면서 누군가가 나를 깨워줄 때까지 잠을 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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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진실을 꿰고 그 뒤에 있는 일을 적을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각본을 쓰기에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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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4 - 8

500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지만 천계로 먼저 가서 엘티노스를 구한다고 결정한지 1시간이 흘렀을까? 잠깐 자리를 비워서 루시피나에게 잡화점을 맡기고, 시간의 흐름이 비정상적인 천계에 시나와 같이 입성하기 시작했을 무렵. 레시아의 경우 마리아와 릴리스를 이끌고 마계로 가서 상황을 보기로 했다. 시나와 동화가 될 필요는 없었으나 지금은 시나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동화를 했고, 걸어 나아가는 다리가 힘들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발키리와 심판자들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보다 이곳에는 영체가 전혀 없잖아?”

 

예전에는 영체가 주변에 많아서 몰려다니고, 천사가 나타나면 그곳으로 전부 집결해서 신의 복음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분명 예전에 시나와 동화해서 올라갔을 때도 영체들이 나에게 몰려들었지만...

 

[시나. 샤이어는 어느 쪽에 있어?]

 

[아마, 전에 엘티노스가 살았던 영역에 있으리라 봅니다. 아직까지는 감지가 되지 않지만, 감지가 되면 표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손과 다리에는 붕대가 다 풀렸지만, 여전히 얼굴 쪽에는 붕대가 풀리지 않아 답답할 지경이다. 주변에는 마나가 없기에 시나가 대신 눈이 되어주면서, 주변에 있는 지형과 형체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지만, 언제까지 나는 눈을 볼 수 없는 걸까? 혹시 이 눈은 어디 마을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만화경 사륜...

 

[마스터. 그런 눈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이상한 상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길. 이래서 동화를 하면 멋대로 생각할 수 없다니까. 무엇보다 생각이나 상상은 그 사람의 자유니까 하나하나 지적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헛된 마음가짐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듭니다.]

 

[내가 한 것은 헛된 마음가짐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냥 장난으로 생각했던 것이 나태하다는 진단을 받아버렸다. 지금은 엘티노스가 갇혀있는 이유를 알고 있을만한 신이 아우리스나 비니스, 데모르테, 레이베리아, 샤이어정도.

 

“이유는 알 수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또 이상한 걸로 붙잡히지 않았으면 좋겠네. 창조주마저 엘티노스를 봐줄 수 없는 중범죄라면 뭐가 있을까?”

 

혼잣말을 하면서 비어있는 공터마냥 휑한 장소를 걸어나가 샤이어를 발견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곳에 미이라가 출몰하다니! 분명 이것도 창조주께서 노하신 것이 틀림없어!”

 

“난 미이라가 아냐. 그리고 샤이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잡화점의 주인이라고 하면 알아듣나?”

 

“잡화점의 주인? 설마 카일 씨가! 그래서 정부인 람파시나 님께서 이곳에 계시나요?”

 

“나와 동화를 하고 있긴 한데...”

 

내가 알고 있는 정보에 불순물이 끼어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텔레파시를 보냈다.

 

[정부는 대체 또 뭐야?]

 

[그런 냥캣과 달리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저는 정실부인이 맞지 않습니까? 그녀들보다 유일하게 오랫동안 동화할 수 있고, 리스크도 없으니 몸과 마음이 잘 맞는다는 뜻이며, 궁합도 잘 맞는 증거이니 매번 샤이어에게 세뇌했습니다.]

 

[세뇌!?]

 

[아뇨. 실언했군요.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샤이어가 시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시나가 세뇌를 할 정도로 화가 난 것일까? 분명 둘이 천계에 상황으로 이야기 하는 동안, 느닷없이 샤이어가 나와 시나의 관계를 두고 무슨 말을 했음이 틀림없다.

 

“아하! 그렇군요. 그보다 이곳에 온 이유는 안에서 듣도록 합시다. 최근 여신들이 너무 무서워서 이곳에서 잘못 말하면 엘티노스 님처럼 끌려갈 수 있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이고 전에 엘티노스가 있던 집 안으로 들어갔더니...

 

“꺄악! 미이라다!”

 

하긴 천사들은 미이라를 그리 많이 본 적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곳에 왜 여천사가 있는 거지?

 

“죄송합니다. 잠깐 옷 좀 갈아 입히고 보낼게요.”

 

이 녀석...엘티노스에게 무슨 교육을 받은 거야?

 

“갑자기 찾아와서 놀랬지만 이곳은 잡화점처럼, 자동으로 물건을 정리하는 기능이 있으니 편하게 계세요.”

 

천계에서 편하게 있으라고 해도 지금은 1초라도 빨리 본론에 들어가고 싶었다. 마음이 성급해지면서도 그걸 파악하고 다스리려는 내 심리상태에, 시나가 도와주는 듯이 천천히 진정이 되어가면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엘티노스는 뭐하다가 붙잡힌 거야? 낙서라도 했어?”

 

“낙서정도면 붙잡을 이유는 없지만, 레이베리아 여신님께서 직접 죄를 물어 붙잡은 걸로 알고 있어요.”

 

“직접 죄를 물었다고? 이번엔 무슨 일로?”

 

“지금 14대 마왕과 긴밀이 손잡은 이유 하나로 집어넣었다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겠지요. 그래서 저도 엘티노스 님을 도와 조사하려고 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끌려가던 엘티노스 님께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상급신의 권위에 올라와서도 후드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샤이어였지만, 목소리에서 들려오는 분함과 억울함은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니 제발 저희를 도와주세요. 레이베리아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건 그렇네. 하지만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을 상대하기엔, 나도 직접 대면하기가 버거워. 차라리 샤이어를 만나기 전에 레이베리아를 만났으면 좀 더 많은 정보를 유추해서,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텐데. 이런 사실까지 알아버렸으니 지금은 레이베리아를 만나면 안 되겠네. 그러면 지금 엘티노스는 어디에 있지?”

 

“천계에 있는 감옥은 탈출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레이베리아 여신님의 성역에서 봉인 당하시고 있을 겁니다.”

 

“레이베리아에게 봉인까지 당했다고?”

 

좀 더 중요한 정보를 알아낸 건가? 하지만 천계에서는 무의미한 싸움을 방지하기 위해, 상호간의 힘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으로 보면, 레이베리아가 엘티노스의 비밀들을 전부 알고 있는 것이 아닐 테고, 무슨 영문으로 붙잡았는지가 더 의문인데.

 

“그렇다면 직접 갈 수 밖에 없나?”

 

“아뇨! 그러지 마세요! 카일 님마저 잡히면 미래가 없습니다.”

 

“하긴, 내 존재는 지금 이곳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지. 당장 내일 걱정을 해야 하는 내가, 300년씩이나 뛰어넘어가면서 일을 해결해야 할 줄은 몰랐지만, 그러면 지금은 엘티노스 씨를 빼오는 것조차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내가 직접 시나와 신격화를 해서 레이베리아와 만날 수 밖에 없겠네.”

 

“신격화를 하시려고요? 그러면 이곳에 또 한바탕 난리가 날 텐데.”

 

“난리가 나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 아우리스 여신은 어디 있지?”

 

“지금은 아우리스 여신님마저 부재중입니다.”

 

뭔가 묘하군.

엄청나게 이상해.

신성 아우리온이 살아있는데 아우리스 여신이 부재중이라고? 지상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자리에 없는 것조차 이상하게 여겨야 한다.

 

“나는 레이베리아와 이야기를 하고 올 테니, 만일을 대비해서 근처에 대기하고 있으면 돼. 만일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가 평범하다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좀 골치가 아픈 것뿐이겠지.

 

***

 

레이베리아의 성역 안에는 별 다른 심판자와 발키리가 없었는데, 그런 점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보통 여신이 들어간 성역 안에는 수많은 영체와 심판자, 발키리들이 머물고 있기 마련. 언젠가 마계에서 공세를 이끌고 올 때, 최우선으로 보호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라곤 하나. 레이베리아의 주변에는 그 수가 매우 적었다.

 

만나러 왔으니 손님이 왔다는 것은 알려줘야 하겠지만, 가장 어처구니 없는 경우라면...

 

“내가 온 걸 알고 있었잖아?”

 

문이 크게 열려있는 것이 함정에 제 발로 찾아가는 기분이다.

그래도 호랑이 굴에 들어갔을 때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만, 지금은 호랑이 굴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도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내가 걸을 때마다 울려 퍼지는 음향이 난반사가 되어 다시 내 귀로 울릴 때. 문은 서서히 닫히기 시작하고 옥좌 위에서 레이베리아는 눈을 감은 체 작은 입술을 움직였다.

 

“잘 왔어요. 카일. 머나먼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어요.”

 

“머나먼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니?”

 

신격화가 되어서 눈보다 하얀 머리로 바뀌고, 붕대로 감겨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알 수 없어도, 레이베리아는 내가 누구인지 어느 시간대에서 왔는지 알고 있나 보다.

 

“속마음을 읽지 못하게 신격화를 하셨으니, 지금 안에 있는 분은 창조의 여신인 람파시나 님이로군요. 확실히 다른 차원의 여신은 이곳에서 힘을 제대로 내기가 어렵긴 하죠. 그나저나 이곳에 온 이유라면 엘티노스 때문인가요?”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그렇지만, 지금은 본론으로 바로 가기는 싫고 몇 가지 이야기를 해줬으면 해.”

 

“뭔가요?”

 

“이곳에는 초능력자들이 많이 있던데 그건 천계에서 진행한 일 중에 하나야?”

 

“‘당연히 아닙니다.’라고 해도 믿지는 않으시겠지요.”

 

“아냐. 믿어.”

 

그러자 레이베리아는 조용히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실크로 자신의 몸을 가리며, 머리 위로 흐트러지고 있는 밝은 금색의 머리카락들이 몰아치듯 일어났지만, 미소는 여전히 따듯하게 맞이하면서 입을 열기를...

 

“그러면 제가 한 말은 믿으셔야 할 겁니다. 좀 충격적일지는 몰라도...이 모든 것은 엘티노스가 꾸민 일입니다.”

 

엘티노스가?

 

“엘티노스의 본래 의의는 마법을 쉽고 간편하게 사용함으로써,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고 모든 이들에게 편리함을 주는 것. 그로 인해 카일이 없는 기나긴 300년간 ‘초능력자’라는 인간을 만들게 됩니다. 지금은 그 세대가 살아남을수록 더욱 강력한 초능력자가 탄생하게 되고, 천계와 마계에서 가장 주시하고 있는 것은 ‘레인’이라는 남자였죠.”

 

“그 녀석과 엘티노스가 무슨 관계라도 있나요?”

 

“엘티노스는 천계와 마계로부터 인간계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티르라는 연금술사가 왜 사람을 호문쿨루스로 전부 교체하려고 했는지 이해가 간다면서요. 필요 이상으로 인간계에 천계와 마계가 규약을 어기고 영향력을 너무 많이 끼친다는 이유로, 초능력자를 이용해서 천계와 마계를 모두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죠.”

 

분명 아이리스의 말로는 초능력자야 말로 천계에 피해를 줄 수 없다고 들었는데.

내 의문을 간파한 듯 레이베리아는 차분하게 말을 다시 열었다.

 

“당연히 지금 초능력자는 특정 일부만 빼고는 천계에 피해를 전혀 줄 수 없습니다. 사실 엘티노스의 프로젝트 ‘미화원’을 동의한 것이야 말로, 인간은 언젠가 천계의 힘을 보태기 위해 싸워야 하며 강화를 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천계까지 무너뜨릴만한 비밀병기를 생산하는 것이었죠.”

 

레인의 능력을 생각했을 때.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게다가 잡화점의 주인이니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이 어떻게 작용하는 가에 대해 상상을 하면, 종말 하나는 확실할 정도로 끔찍한 미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천계와 마계가 군세를 모아서 인간계로 동시에 쳐들어가려고 하는 거군? 모든 인간을 전멸시키기 위해서. 하지만 그런 일을 하려면 좀 더 시간을 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시간을 들이면 저희가 죽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애초에 신성 아우리온의 규모가 크니 초능력자가 나와도?”

 

“아뇨. 그건 무른 생각이에요. 지금은 편리함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신들에 대한 경외와 신앙이 점점 사라지고 있지요. 점점 풍족해지기 시작하면서 균형을 파괴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인간들의 세상이 오게 될 거에요. 그 전에 모든 인간을 전멸시키고 다시 재창조를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건 현명한 게 아냐. 엘티노스와 이야기를 하게 해줘. 진정한 해결책은 언제나 그 사람의 머리 속에 있을 테니까.”

 

레이베리아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역시 당신도...저의 말을 믿지 않는군요.”

 

 

레이베리아의 사소한 약속을 어긴 대가로 커다란 비수가 가슴에 꽂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무슨 일인지는 서로 이야기를 해봐야 알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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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어쩌다가 이게 이렇게 되었죠?<-니가 모르면 어떻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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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알루미늄 포일

태는 종종 가슴이 답답해올 때면 삼년 전 김밥을 먹다 함께 삼킨 포일 쪼가리를 떠올렸다. 그 납작한 것은 독하게도 식도 어딘가에 달라붙어 끈질기게도 남아있다- 같은 걱정이 마음 한 켠을 떠나질 않는 것이다. 평소에는 생각나지도 않던 것이 꼭 가슴 언저리나 목구멍이 간질한 환절기만 되면 떠올랐다. 뭐랄까. 꼭 윤같이. 이미 많은 날이 지났고, 사실은 그녀의 얼굴이나 목소리 같은 것들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어째서인지 희미한 형체 같은 것들은 끈질기게도 남아 완전히 지워지지 못한 채로 태의 삶을 서성이는 것이다. 알러지 약을 삼키면서 베란다를 본다. 아니 베란다 구석에 놓여 있는 분홍색 우산을 본다. 펼쳐진지 적어도 일년은 됐을 우산은 삶의 목적을 잃은 채로 무덤 아닌 곳에 시체처럼 놓여 있다. 그는 평생 동안 우산을 버린다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으레 우산이라는 것은 잃어버리거나, 새로운 것에 밀려 조금 더 구석으로 구석으로 밀려날 뿐 구태여 버리지 않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분홍색 우산 위로는 검은색 장우산이 하나, 투명 장우산이 또 하나 걸려있다. 생각해보니 그것들이 있음에도 버리지 못하는 분홍색 우산은 윤이 선물해준 것이었다.
.
굳이 윤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낼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가슴 언저리나 목구멍이 간질 한 것처럼, 말하자면 불가항력의 무언가가 자꾸만 윤을 끄집어냈다. 간단한 저녁을 차려먹고 식탁에 앉아서 윤에 관한 것들을 하얀 종이 위에 적었다. 가장 처음으로 적은 것은 그녀의 이름이었다. 수 없이 불렀을 이름이 낯선 울림으로 종이 위에 놓였다. 가운데에 윤의 이름을 적은 뒤에는 그녀에 관한 것들을 적었다. 좋아하던 것, 함께 하기로 했던 것, 싫어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할 행동, 그녀가 좋아하는 맥주 같은 것들. 막막하게 펼쳐져 있던 공백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줄었다. 종이는 곧 윤으로 가득 차서 애초에 적고 싶었던 것들은 적지도 못하고 말았다.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잊고 있던 것들을 먼저 적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낯선 기분으로 한때는 익숙했을 윤을 읽었다.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린다. 그 시절 하지 못한 말들이 재채기처럼 목에 걸렸다. 윤은 여전히 삼 년 전 삼킨 포일 쪼가리처럼 답답하게 태의 가슴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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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윤은 결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물의 결이나 이불의 결, 살의 결을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따라가다보면 한없이 안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윤은 흐르는 것은 흐르는 대로. 따위의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나 그것은 도처에 널려 있을 무책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윤은 삶의 결을, 그러니까 흐름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수 많은 결 중에서도 나무가 가지고 있는 결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특유의 결은 아무리 쓸어도 결코 흩어지지 않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어쩌면 그녀가 닮고 싶었을 삶의 자세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단단한 흐름이 그녀가 나무를 사랑하는 이유였다. 처음 윤의 자취방에 초대받았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어쩐지 예상했던 모습이었다. 원목으로 된 식탁과 그릇, 책장에서 윤의 냄새가 난다. 종을 알 수 없는 진한 갈색의 나무냄새였다.
.
윤의 마른 등은 나무를 닮았다. 그녀로부터 뻗어나온 가지가 거울을 사이에 두고서 가만히 내게 손짓했다. 종종 선풍기 앞에 앉아 가만히 흔들리는 가지들을 보고 있자면, 어쩌면 언젠가는 윤이 나무가 돼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결말이 보이는 반전영화를 꿋꿋히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나쁜 예감이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그녀의 살결을 손가락 끝으로 만졌다. 다행히 그녀가 가진 결은 손가락을 따라서 이리저리 어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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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수수께끼

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영영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그 실없는 한마디가 끝내 유언이 되고 만 것이다. 숨이 넘어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동안 태가 살아왔을,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삶과 미처 알지 못한 삶에 대해 곱씹었다. 엄숙한 태도로 그의 감겨있는 눈꺼풀과 평생 연필을 쥐어왔을 손가락을 번갈아 본다. 벗이 남긴 마지막 숙제를 이행하는 무거운 의무감이 나를 그렇게 행동하게끔 만들었다. 그 행위는 태가 남긴 서적들을 읽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졌다. 나는 책 밖의 태가 가진 고민의 일부와, 서적을 통해 미화된 일들의 미화되지 않은 부분을 안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들을 알고, 증오했던 사람들을 안다. 안다는 것은 무섭다. 한 사람에 대해 그만큼 자세히 알게 되면 그의 삶을 주관적인 잣대 없이 제대로 판단할 수 없어지곤 하는 것이다. 내게는 지금 눈을 감은 태가 그랬다. 누군가 내게 "그는 좋은 사람이었습니까?"라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태가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점과, 나 또한 그 사실이 싫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가 가진 공통점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상한 공통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수수께끼를 내듯이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리는 버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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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러니까 태와 나는 사람들이 질색하는 그 '침묵이 가지는 무게'를 좋아했다. 그들이 짓는 표정과 입안을 맴도는 간지러움. 비밀을 알고 있다는 쾌감과 사람들이 맞췄을 때, 혹은 맞추지 못했을 때 느끼는 쾌감 따위가 모두 포함된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 태가 입을 열어 대답을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호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시 내게 입을 열어 '세 번째 서랍'에 관해 해명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의문들은 그의 침묵과 함께 영영 가라앉았다. "세 번째 서랍을 봐." 수수께끼 같은 그의 마지막 과제를 곱씹었다. 가장 어려운 과제를 무책임하게 던진 그는 우리가 좋아하던 침묵과 고요의 세상으로 영영 떠났다. 병원과 그의 작업실, 집, 서점, 학교 등 태의 온기가 조금이라도 스며있는 곳의 모든 서랍장을 열어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수수께끼는 그렇게 잊혀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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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가 아무도 모르게 작성한 새로운 소설의 원고를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당혹스럽게도 원고는 세 번째 서랍이라는 카페에서 발견되었다. 그런 이름의 카페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뿐더러, 그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부산 작은 카페에 원고를 숨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고약한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희열과 숨겨진 원고를 드디어 발견해냈다는 성취감보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아내느라 무던히도 애써야만 했다. 원고는 아주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그때의 나는 그의 마지막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세 번째 서랍’이라는 키워드를 여러 방면으로 해석하던 중이었다. 외국어로 시작해서 언어학, 암호학, 서랍의 어원 등을 뒤적거리다가 부산 ‘세 번째 서랍 카페’의 포스팅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처음에는 설마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자꾸만 카페 간판이 눈에 밟혔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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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원고는 삼 년 전 이맘때쯤 카페에 도착했다고 했다. 태가 사망하기 이틀 전이었다. 카페의 주인은 별다른 귀띔을 듣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원고를 버려야 할지, 간직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카페 구석진 찬장 어딘가에 넣어두고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했다. 아, 나는 부산행 케이티엑스 표를 손에 쥐고 태의 무책임함을 욕했다. 마지막 유작이 될 원고를 한 번도 보지 못 한 사람의 손에 무턱대고 넘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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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는 총 400페이지 분량으로 처음 포장된 상태. 그러니까 태의 꼼꼼하지 못 한 손으로 포장되었을 서류봉투 안에 그대로 들어있었다. 파란 청 멜빵바지의 카페의 주인은 “이것도 인연인데, 원한다면 카페에서 천천히 읽다가 올라가도 좋다”고 말했다. 몹시 지쳐있기도 했고, 거절할 이유 따위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무엇보다 한시라도 빨리 그의 유작을 읽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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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의 첫 장에는 내가, 그러니까 말 그대로 ‘내’가 부산에 있는 어느 카페에 전화를 거는 장면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지금 입은 옷과 같은 옷을 입은 ‘나’는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그 원고를 보관하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떨리는 손으로 몇 페이지를 넘겼다. 원고 속에 카페 주인은 파란 청 멜빵바지를 입고 ‘이것도 인연인데, 원한다면 카페에서 천천히 읽다가 올라가도 좋다’고 말했다. 거기까지 읽고는 원고를 덮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반 잔을 단숨에 삼키고 눈을 감았다. 그는 죽기 전에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라도 갖게 된 걸까. 그가 남긴 가장 큰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생각한 지금, 나는 평생에 걸쳐서도 풀 수 없는 더 거대한 수수께끼를 눈앞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