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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10

"그렇게 걸어도 정말 괜찮으세요?
동이 틀 무렵, 크레누가 잠에서 깨기 전에 두 사람은 조용히 집을 나섰다.
"괜찮다니까, 조금 쉬면 될거야."
"나디아한테 칼은 왜 안 보여 주셨어요?
로메가스는 곁눈질로 발레트를 슬쩍 보면서 넌지시 물었다.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괴로워하는 나디아의 얼굴이 발레트의 머리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또... 라고 했어.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 정찰병을 잡지 못했으니 시종과 연결짓는 건 어렵게 됐어요."
로메가스는 발레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며 그를 부축했다.
"당분간은 오스만과 접선하지 못할거야. 다행인건 우리는 시종의 정체를 알지만 시종은 기사단 중 누구에게 들켰는지 몰라. 시종이 첩자일까? 아니면 중간 하수인일까? 보키아와는 관련이 없는 걸까? 그 증거를 찾아내야 해!"
발레트는 걸음을 멈추고 작은 숨을 내뱉었다. 꿰맨 부위가 걸을 때마다 아파왔다.
"며칠 후에 임디나에서 큰 연회가 있잖아요. 기사단도 초대를 받았어요. 그때가 기회일지 몰라요."
"오늘은 쉬면서 생각을 해보자. 지금은 좀 누워야겠어."
두 사람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사단 숙소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미로같은 임디나의 좁은 골목에 서서히 아침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발레트와 로메가스가 집을 떠난 후 나디아는 가슴에 숨겨둔 작은 칼을 꺼냈다. 그녀의 시간은 고조 섬에서 멈춰있었다. 어머니와 오빠에 대한 죄책감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은 지난 5년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날은 생생하게 다가왔다.
칼에 찔린 발레트를 보았을 때 그녀안에 멈춰있던 시간이 깨어났다. 불타는 고향 마을의 한복판에 나디아는 서 있었다. 죽음은 무시무시한 칼을 휘두르며 그녀에게로 돌진했다. 고막을 찌르는 듯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아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죽음의 그늘에 드리워진 채 남겨진 자의 삶은 빈 껍데기 뿐이었다. 길게 뻗쳐진 손아귀는 그녀의 목을 짓눌렀다. 나디아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을 옥죄는 형체없는 실체와 마주했다.
나디아는 처음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15살의 어린 소녀가 혼자라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깊고 어두운 곳에서 몸을 웅크린 채 누군가를 기다리며 소녀는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나디아는 소녀에게로 다가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따뜻하게 꼭 안아주었다.
나디아는 오빠가 준 칼에 소중히 입을 맞췄다. 그녀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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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0 - 11

563

 

 

 

“명계로 가죠.”

 

늦은 아침에 일어나 내 생각을 알렸다. 그 말을 듣고 레시아와 시나는 멍하니 날 보고만 있었고, 루시피나는 찻잔에 차가 넘치는 줄 모르고 계속 들이 부었다. 마리아의 입에서는 레몬 맛 사탕이 미끄러지듯 빠져 나왔고, 루니아 누나가 내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어, 어째서인가요오! 아직 우리가 찍어야 할 백장미들이 많이 있잖아요오!”

 

“잠깐만! 그만 흔들어요! 어깨가 부셔지겠어!”

 

조용히 말하고 싶어도 고통으로 인해 데시벨이 올라가는 중이다. 노래 음역대가 약간 높은 내 목소리는 어느덧 한계를 돌파하여, 메조소프라노까지 치솟고 우주를 뚫고 가기 전에, 루비아가 루니아 누나를 뜯어 말렸다.

 

“언니. 그 이상 흔들면 카일의 어깨가 분자단위로 쪼개져요.”

 

“그치만! 그치만 루비아! 카일이 더 이상 백장미를 찍지 않는다고 하잖아요오!”

 

저기 있는 자매를 보았을 때 누가 언니고 동생인지 분별이 안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어깨가 진짜로 분자단위가 되어 온 우주에 흩어질뻔한 일이니까. 그리 오랫동안 생각하지 말자. 언제부턴가 백장미를 찍지 않으면 충격을 받아서 루비아에게 안겨 우는...척을 하는 게 버릇이 된 건가?

 

매번 흘깃 보고 있는 루니아 누나의 붉은 눈이 유난히 섬뜩하게 보였다.

 

“지금 카일 씨는 어떻게 하면 명계에서 촬영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니 안심하세요.”

 

“그, 그래! 맞아! 명계에서도 백장미를 촬영하는 거에요오! 저승으로 가는 스틱스 강 앞에서 찍으면 매우 몽환적인 분위기가 되니까 좋은 필름이...”

 

“누가 미쳤다고 거기까지 가서 여장을 할까 보냐!”

 

나를 소리지르는 만드는 재주를 지닌 자매였다. 아까 전에도 아파서 소리를 질렀는데, 태클을 걸기 위해 있는 힘껏 질러버렸다. 뭐, 중요한 것은 그 저주받을 백장미를 찍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염라대왕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가 되리라.

 

염라대왕이라는 자는 명계에 유일무이한 심판자도 된다. 사람의 업보는 일평생 쌓이고,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데.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하나하나가 전부 쌓인다. 나는 염라대왕 앞에 선다면 편히 환생을 하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니라 가는 방향을 찾는 거다.

 

“마스터. 명계와 사키엘의 문은 어떻게 연결하실 생각입니까?”

 

“나야 항상 다녀왔었잖아.”

 

루니아 누나의 음식이 명계로 가는 티켓이니까.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것만 수십 번이며, 루니아 누나가 요리를 계속 한다면 명계가 제 2의 고향이 될 뻔했다. 그 정도로 친숙하기에, 사키엘의 문을 연다면 명계가 나와 마중 나오리라 생각했다.

 

“기다리거라.”

 

검은 고양이의 말이 내 발을 붙잡았다. 고개까지 돌리게 만드는 근엄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으니...

 

“주인이 명계에 갔을 때는 의식만 갔기에 별 탈 없이 돌아온 것뿐이지. 산 사람의 몸으로 가면 곧바로 육신이 소멸하게 된다. 그러니 맨몸으로 들어가는 것보단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하지 않는가?”

 

“그래도 육체와 정신이 따로 분리된 상태로 오래있으면 위험하다고요?”

 

게다가 사람이 정신을 차리게 되면 말 그대로 밧줄에 묶여서 올라오게 되는 기분인데, 더 오래있겠다고 버티다가 밧줄을 끊어먹기라도 한다면, 영원히 현실세계로 못 돌아가게 되는 거다.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이득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대로 지금은 죽기 싫으니 레시아 말대로 다른 방법을 찾자. 명계에 살아서 들어가는데 육체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방법이라...

 

죽은 사람만 갈 수 있는 공간에 산사람을 끼워 맞출만한 규칙이 없는 건가? 예외적인 방법이 있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 끝에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인? 왜 2층으로 올라가는가?”

 

예전에는 위험한 물건이 있어서 폭발할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건드리지도 못했다면, 이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설령 지도 밖으로 날아갈만한 물품이더라도 사용하게 되어버렸다. 나는 상당히 효율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잡화점 물품마다 품고 있는 강력한 독에 중독된 것이 아닐지...

 

세린에게 정신적인 검사를 요청해봐야겠다.

 

그러나 현재에 충실한 나는, 보류할 것은 안드로메다로 택배 붙여버리고 명계로 가는 참신한 물품을 고르기 시작했다.

 

“과거 엘티노스도 명계에 가봤다고 하는데, 분명 죽어서 가는 방법이 아니라 살아서 가는 방법을 채택했을 거에요. 그것도 자신과 같이 여행하던 모든 사람들하고 갔다는 가설 하에, 거대한 힘을 지닌 물품을 사용했을 텐데...”

 

문제는...

 

“음. 잘 모르겠네요.”

 

잡동사니들이 한 가득 쌓여있는데 그 중에 어떤 물품이 명계로 가는 물품인가? 혹은 명계로 갈 때 진짜 도움은 주기나 할까? 거대한 의심의 산이 내 앞을 가로막고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 받는 기분이다.

 

아까 전에 신경 쓰지도 않았던 “섣부르게 건드리다간 다 날아간다.”라는 경고메시지가 머리 속에서 강강수월래를 하고 있으니, 미약하게나마 손끝이 살살 떨리기 시작하면서, 레시아를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어느 거에요?”

 

“짐이 어찌 아는가?”

 

“마왕이잖아요.”

 

“짐은 강대한 마왕이나 아는 것만 안다. 마족은 살아생전에 자동으로 지식이 쌓이긴 하지만, 이런 잡동사니를 쌓아놓으면 엘티노스도 찾아와서 뭔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물품들은 레시아도 모르는 것들 투성이란 소리구나. 이름이나 어떤 효과가 있는지 설명조차 되지 않는 물품이 대다수라, 건드려서 사고가 터져봐야 아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만일 이것들이 연쇄작용을 한다면...잡화점을 제외한 모든 것이 먼지로 되돌아갈지도 모르겠으나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명계에 가서 염라대왕을 만난다고 한들 무슨 이유로 설득을 시킬 것인가? 아직 주인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란으로 티타늄을 부수려는 격이다.”

 

“그건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니에요?”

 

“짐이 던졌을 때 계란으로 바위를 폭발시켰기 때문이니라.”

 

어떻게 던져야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

 

그래도 레시아가 지적한 말처럼 사전준비가 아무것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짜고짜 명계의 최고 권위자를 무모하게 만나러 가겠다고 했으니, 만일 이 소식을 들은 저승사자가 있다면 소식을 들은 시점으로 24시간 내내 웃다가 3번정도는 질식사로 죽을 만큼 재미있는 말이다.

 

주변을 잘 둘러보면 아마 있을지도 모르지...

 

“그것도 미쳐 생각하지 못했네요. 지금 인간계와 천계, 마계가 뒤섞여서 잘 살아가다가, 유랑극단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날아간다고 한들, 명계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고 오히려 일거리만 늘어나게 될 테니 말이죠. 게다가 선악과 거짓말의 유무를 판단하는 염라대왕 앞에 제안을 하려면, 심증보단 확고한 물증이 필요할 지경이에요.”

 

보통 어린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가 누가 착한 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를 한번에 구별할 수 있는 능력자라면, 염라대왕은 누가 착한 영혼인지, 나쁜 영혼인지를 한 순간에 판별하여 형벌 밑바닥까지 구겨 넣는 능력자다.

 

염라대왕 앞에서는 모든 영혼들이 분리수거 당하기도 하고, 산 사람이 무턱대고 찾아와서 ‘내 말 좀 들어 보이소!’라고 소리쳐봤자 개죽음만 당하리라.

 

“굉장하네요.”

 

감탄사가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왔다. 하얀 올빼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고, 어느 사이에 도착한 윈디 메르아가 잡동사니 산 안에서 물건을 마음대로 만지작거리고 있는 시간에, 검은 고양이가 “무엇이 말인가?”라고 유일하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질문을 받은 입장이니 경쾌하게 입을 열도록 하자.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명계가 비상이 걸리거나 제약이 걸릴만한 일은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잖아요. 살아생전에 마족을 소환하는 경우도 있고, 신탁을 받아 신과 여신을 마주하는 경우가 있지만, 명계의 존재들은 오직 죽어서만 볼 수 있으니 말이죠.”

 

인간계는 인간들이 중점으로 살아가지만, 마계에 있는 마물들이 인간계로 빠져 나와 몬스터까지 공존하며 산다. 천계는 신과 여신, 창조주와 더불어 신탁으로 이어지거나, 신과 여신에게 선택을 받은 자만이 천사나 발키리가 될 수 있고, 그 이전에는 하얀 구체상태로 떠돌게 된다.

 

마계는 말 그대로 마물들의 세계로 다양한 종족들이 거기서 투쟁을 벌이며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었으나, 마왕의 통치와 마계공작 12명의 통솔아래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있지만, 아직까지도 야생상태의 몬스터들이 많이 있는 편이다. 300년이 지난 지금 시대에는 실베스 씨가 마왕이며, 그리티스 씨에게 들어본 바로는 천계와 전면전을 시작했다는 정보를 받았다.

 

조용한 이유라면, 아마도 눈에 띄는 곳에서 싸우면 난장판이 되니까, 서로 구역을 정해놓고 싸우고 있으리라 본다.

 

그럼 명계는 어떨까?

그나마 요약해서 설명한 인간계, 천계, 마계와는 다르게 명계에는 염라대왕이 있고, 망각의 샘물이 있고, 뱃사공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그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오직 내 뇌에서 나온 추측일 뿐이다.

 

진실의 여부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인간들 중에서 그 장소에 잠깐 다녀온 자들이 있으니, 이름도 거룩한 대마법사 엘티노스와 그의 동료들이다. 자서전에서는 죽을 수 없는 불사의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 명계에 한번 가서 염라대왕에게 부탁을 했다고 하는데.

 

가장 놀란 것은 그 엘티노스가 부탁을 했다는 점이다.

 

언제나 어디 동내 건달 아저씨마냥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서 제발 저주를 지워달라고 부탁을 했으니, 세상이 7개 조각으로 등분된다고 한들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농담은 이 정도로 하고, 염라대왕을 만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 적혀있다.

위험한 일과 나는 멀리 떨어져야 할 관계이지만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지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니 꽤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내가 성장하기 위해선 위험한 절벽도 극복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데...

 

“주인! 위험하다!”

 

“네?”

 

-피이이이이이잉!

 

귓가에 울리는 고주파가 쓸 때 없는 독백을 하지 말라며 뇌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알지도 못하는 초음파 공격한방에 모두가 귀를 부여잡고 쓰러지거나, 애석하게도 동물로 변신하고 있던 레시아와 시나는 귀를 제대로 막지도 못한 체 바닥에 쓰러져서 뒹굴기만 했고, 윈디는 바람을 이용해서 소리를 차단했는지, 혼자 멀쩡하게 돌아다니며 나에게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 들리는 게 함정이지...

 

“아아악! 빨리 꺼! 끄라고! 윈디!”

 

나의 비통한 외침은 거대한 굉음을 뚫고 간신히 뻗어나갔는데, 고개만 갸웃거리면서 호박 빛의 눈동자를 깜빡였다. 아까 내가 서술했던 것 중에 바람을 이용해서 소리를 차단했다고 말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도 소리쳐서 막으려고 했다니...

 

 

그날 이후 300년이 지난 미래에서 표류하고 있는 잡화점에 날아온 신문으로, ‘우주적 존재의 외침!’이라는 타이틀의 신문이 사방팔방에 퍼져나가고야 말았다. 멸망의 신호탄이라고 공포에 떠는 사람들의 표정이 창문을 통해 훤히 잘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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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에선 명계로 가겠네요.

저도 과로사를 한다면 명계로 가겠죠.

 

...그래도 첫월급을 받았으니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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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0 - 10

562

 

 

 

환영마법으로 특정인물만 속이려고 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사실 행여나 내가 없을 때의 행동방침에 대해 잡화점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고 내가 회유를 당하지 않았으나 납치를 당했을 경우, 다른 곳에서 시선을 이끌고 그리티스 씨나 시나에게 부탁해 내 위치를 찾고 구출하는 것. 내가 회유를 당하거나 세뇌를 당해 적의 편으로 돌아설 경우 즉시 말살하라는 방침이었다.

 

그렇게 다짐을 했었으며, 마리아가 내 그림자에 숨어서 다닌 것은 잡화점 멤버 쪽에서 나 몰래 보험을 들여놓은 셈이 되었으니까. 다만, 이 작전의 주요목적은 리제로트가 레이베리아에게 탈출소식을 알리고, 다른 방향에서 레시아가 사고를 터트린다면, 유랑극단이나 그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시나가 그 틈에 천계로 들어가서 상황을 훑어보며 나에게 보고를 해야 하지만...

 

“늦어서 걱정이네.”

 

5시간째 도착하지 않은 시나가 걱정되어 잠을 못 자고 있었다. 당연히 지금은 새벽 2시라서 잡화점을 운영해야 하니까 잘 수 없다는 말이 제대로 된 설명이지만, 사실상 손님이 오건 말건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고 싶었다. 뭐, 루비아에게 맡기고 자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카렌의 기억은 서서히 복구가 되어가려고 해도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걱정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리제로트나 레이베리아가 너무 손쉽게 놔준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생각의 늪에서 질식상태까지 다가가도 좀처럼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예측할 수도 없고,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했지만...뭘 알아야 찾던 말던 하지.

 

결과적으로 우리들에게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만큼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렇게까지 크진 않았다. 시나만 무사히 귀환을 해준다면 말이다.

 

“아무래도 천계에 잠입을 해야 할 거 같아요.”

 

“아서라. 주인은 충동적으로 일을 그르칠 생각인가?”

 

“일을 그르치진 않아요. 다만, 걱정이 되는 것뿐인데...”

 

“흐응? 주인은 그 비둘기가 더 마음에 가는 건가?”

 

그리고 잠깐 동안의 정적. 검은 고양이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중얼거렸다.

 

“짐에게도 그 비둘기의 공백이 느껴지는군. 아무리 마왕이라도 익숙하지 않는 것은 예민하게 감지하는 듯 하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천계에 찾아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거라. 그 비둘기는 짐이 인정한 라이벌이니 말이다.”

 

“라이벌로 인정하신 거에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시, 시끄럽다!”

 

검은 고양이가 다급하게 소리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귀여워서 쓰다듬고 싶으나 지금은 자제하도록 하자.

 

-손님 받아라!

 

잡화점은 오늘 전체적인 점검이 있을 예정인데, 대체 세린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알림음을 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따져야겠다. 손님은커녕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온 시나였지만, 무사히 도착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에서 느닷없이 미소가 사라지는 듯한 소식을 접해버렸다.

 

“마스터. 늦어서 죄송합니다. 수색해야 할 곳이 너무 넓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정보도 없었고 그 어떠한 장소에서도 다른 여신이나 신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샤이어도 실종이 되었고 창조신마저 자리가 비어있었습니다.”

 

창조신마저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 사실에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천계에 레이베리아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 되는 건가? 엘티노스 어딘가 숨어있으니 때가 되면 알아서 오겠지만, 아우리스는커녕 창조신마저 사라지게 된 원인부터 추측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 많던 신이 안드로메다로 출장 간다고 메시지를 남기지 않지 않는가?

 

그렇다면...

 

“창조신마저 봉인 당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나마 안전한 곳은 명계인가...”

 

마계는 마왕이 다스리고, 천계는 최종적으로 창조주가 보살핀다. 하지만 창조주가 만들어도 독자적인 권력으로 질서를 지키는 세계가 바로 명계인데, 명계에 있는 염라대왕이 천계에 올라가지 못하는 영혼들을 거두어 여러 생물로 환생하게 도와준다.

 

당연히 죄값이 있다면 그것부터 치르게 되지만, 엘티노스의 자서전에는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그나저나 이 양반은 인간이었던 시절에 명계도 완주하고 온 건가? 스케일이 너무 크잖아?

 

“마스터.”

 

하얀 올빼미가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깃털을 쓸어 내리면서 머리 안에 있는 주판을 이리저리 치기 시작했고, 계산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비어있는 왼손에 검은 고양이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주인. 저 비둘기만 쓰다듬지 말고...”

 

“올빼미 입니다.”

 

“어쨌든! 짐도 어서 귀여워하거라!”

 

어떤 마왕이 자신을 보며 “나를 귀여워해라! 명령이다!”라고 소리친다면 제보를 해주길 바란다. 레시아가 특수한 케이스인지, 요즘 마왕이 하나같이 전부 나사가 빠졌는지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아무리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하지만 응석을 너무 부린다. 레시아가 응석을 부리던, 시나가 더 적극적으로 귀여움을 받기 위해 다가가던, 계산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했다. 언제나 늘 그랬듯 생각의 늪에 또 잠기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머리까지 담그고 초마다 1M씩 떨어지고 있었다.

 

2M...3M...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나는 눈을 감았다.

 

어느 관점으로 관찰해야 할까?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생각을 하면 그 끝에는 결론이 도출되기 마련. 언제까지나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려나갔을 때, 정신을 차려보면 결승선을 통과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지 않는가? 명계로 가려면 반정도 죽은 상태에서 딸아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게다가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위험도가 매우 높다.

 

그러면 명계를 살아서 가야만 하겠지.

살아서 명계로 가야 할 방법은 거의 없다고 하지만, 분명 엘티노스는 인간시절에 다녀온 기억이 있다. 자세한 방법이 자서전에 기술되지 않았기에 지금부터는 가설이 난무하는 실험대라고 보면 된다.

 

명계를 살아서 가기 위한 방법.

뱃사공을 이곳에 부르는 방법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명계로 가는 문을 수색하는 것뿐이다. 세 번째가 있을까? 있으리라 본다. 엘티노스에게 부탁해서 명계에 잠깐 산책을 나간다고 말하면, 분명 엘티노스는 “뭐 이러 정신 나간 녀석이 다 있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도 꽤 효율이 높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력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데, 역시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는 명계의 문을 찾아야만 하는가?

 

“사키엘의 문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가죠.”

 

“응?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마스터?”

 

잠깐? 시간이 얼마나 지났길래 내 이불자리에 레시아와 시나가 양 옆에 있는 거지?

 

“언제나의...”

 

“언제나가 아니잖아요! 젤나가 헛기침하는 소리 좀 하지 마요!”

 

“그래도 추운 겨울이니 꼭 붙어서 자는 게 좋지 않는가? 게다가 생각을 너무 오래했노라. 새벽 6시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생각을 하니, 결국 우리가 직접 이불도 펴주고 같이 붙어서 얼어 죽지 않게 도와주고 있지 않는가?”

 

잡화점에서 얼어 죽는 게 도롱뇽이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가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입니다만? 온도를 조절해주는 마법진이 날아간다면 모를까?

 

양 옆에서 샌드위치처럼 눌러오고 있으니 불편하긴 불편했다. 다만 수면 잠옷을 입은 것만으로도 불편함이 서서히 녹고 편안함이 오래 지속될 예정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꼭 있다. 이놈의 시선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선처리라고 말해봤자 아주 기초적인 건데, 고개를 어딜 돌리며 자야 하는지 모른다는 소리다. 레시아 쪽으로 돌리다간 시나가 삐치고, 시나 쪽으로 보다간 레시아가 뒤에서 마법을 날린다.

 

그러니 나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천장만 뻐끔뻐끔 바라만 보는 붕어가 되어보자. 머리는 이미 잉어와 대화하고 있다. 앞으로의 대화는 잉어와 붕어만 써지겠지.

 

“주인?”

“마스터?”

 

“붕어.”

 

-파악! 퍼억!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충격이 배와 가슴을 각각 강타하자, 몸 속에서 거칠게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기침을 했다. 다급하게 반쯤 일어서서 두 사람을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하는 거에요!”

 

“주인이 뜬금없이 붕어병에 걸린 줄 알았다. 실로 위험한 전염병이지 않는가? 붕어병에 감염되어 증상이 나오기 시작할 때. 때리면 치유되는 병이라 하여 절차에 따라 주인을 때려보았다. 어떤가?”

 

“뭐가 ‘어떤가?’에요! 한 순간에 요단강을 건너 스틱스 강까지 날아갈 뻔했는데! 그리고 시나!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잘도 데미지를 줬겠다?”

 

“저는 마스터를 존중하고 보필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붕어병에 대한 치료를 조사하던 중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토대로 절차에 따라 마스터를 때렸습니다. 치료를 위함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를 한다면 아마 수백 번 고쳐 죽어서 넋이 없으리라 생각하다만...

 

“아무튼 다음 계획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가?”

 

“아뇨. 처음부터 다 틀어져서 새로 짜야 할 거 같아요. 레이베리아가 설마 창조신까지 날려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엿장수에게 찾아가면 다시 얻어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창조신이 얼마나 약하길래 자신이 죽을 뻔했던 사건마저도, 내가 해결했기에 넘어가던 상황까지 있었다. 창조신이 그저 이름만 드높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면, 이곳을 창조했을 때의 거대한 힘은 어떻게 써먹은 걸까?

 

“창조신부터 찾는 건 하지 말죠. 어쩌면 구해도 별 소득이 없을 테니까요.”

 

“이제 슬슬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저희들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면, 가장 취약할 때 노리고 오겠지요.”

 

가장 취약할 때 노리고 온다.

모든 생물은 잠을 자고 있을 때 무방비 상태가 되곤 한다. 하지만, 잡화점이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으니, 그 다음으로 취약한 부분을 찾는 것이 일이니까...

 

“외출할 때 앞으로 최소 2인 1조로 다니는 것을 권장하는 바입니다. 두 분은 다른 잡화점 멤버에게도 전해주시고, 윈디 메르아에게도 알려주세요.”

 

-부스럭 부스럭...

 

어라? 이불 위에서 뭐가 움직...

 

“카일 씨? 저에게 뭘 알려줘요?”

 

“우아아아아아악!”

 

-댕!

 

잠깐 5초동안 정신이 방전되었다가 눈을 떠보니, 윈디는 반대편으로 날아가 처박혀 있었고, 나는 어느 사이에 일어서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였다. 오른손에 프라이팬이 있는 걸 보아하니, 총알도 막는 내구도로 윈디를 홈런 시킨 모양이다.

 

바람의 정령왕이니 살았으리라 생각했는데, 데미지가 너무 큰 탓인지 한동안 작은 경련을 일으키며 고통의 신음을 길게 흘리고 있는 윈디 메르아. 과민반응을 한 내가 더 미안한 나머지 왼쪽 검지손가락으로 머리를 살짝 긁어 내렸다.

 

“저기. 윈디? 살아있지? 괜찮은 거야?”

 

나의 안부인사를 들은 레시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지금의 내 행동이 너무 쓸 때 없어 보인 거겠지.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레시아의 작은 입이 열렸다.

 

“주인. 프라이팬으로 만루홈런을 날렸는데 괜찮은 거냐고 물어본들 응답할 리가 없다. 그 전에 난폭한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는가?”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기억용량이 떨어져서요.”

 

“아무래도 주인의 램을 32기가바이트로 바꿔야 할지어다.”

 

 

어째서 뇌 속에 그런 게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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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저는 다시 출발지점을 밟은 듯 합니다...

[월화수목금금금 야근 에디션이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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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0 - 9

561

 

 

집에 풍선을 달아 하늘을 나는 것도 솔직히 말해 정상범위가 아니지만, 6층이나 되는 건물을 로켓을 달아 날아 올리는 그 자체도 말이 더 안 된다. 차라리 어디 타임로드처럼 파란박스 상태로 다니던가? 300년이 지난 지금도 시공간마법에 대해 밝혀진 것이 거의 없는 상태인가? 하긴 유일하게 사용할 줄 알던 인간들이 전부 힘을 잃어버렸으니, 페어리들의 여왕인 티아 메르세데스에게 교육을 받아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차라리 개구리가 말하는 게 더 높을 지경이니까. 그래도 레인의 도움을 받아 극적인 탈출을 했으니, 레시아를 빠르게 찾아 지원을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꼭 잡화점이 로켓마냥 날아다녀야만 할까? 그보다 분명 5층건물이라 들었는데?

 

“너는 무슨 이유로 층수가 바뀌는 거야? 3층만 있어도 대부분의 물품을 다 넣을 수 있는데? 그거 몰라? 잡화점의 안과 밖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 안이 더 넓다고. 6층까지 만들 정도로 좁지 않아.”

 

“카린 씨는 낭만을 모르네요. 하긴 지금은 아리따운 소녀의 모습으로 변해버려서 그런가요?”

 

“죽을래?”

 

명계에서 뱃사공을 하고 있는 딸에게 보내버릴라 보다. 기괴한 가면을 쓰고 히히하며 웃는 레인은 밖의 상황을 지켜보려고 하는지 창문을 열었다. 거친 바람이 잡화점 안을 다 휘젓고 다니는데, 어처구니 없는 건 정문을 열자 밑에 바로 건물 지붕이 보인다는 점과, 그래도 우리는 바닥에 붙어서 정문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얼마를 개조를 해야 저런 잡화점이 되는 걸까?

 

나중에 손님에게 대중교통서비스까지 운행해주려는 건가? 신나는 잡화점버스라는 식으로?

 

레인의 손에선 잡화점의 기둥을 붙잡고 있고, 손에는 황금빛이 꺼질 줄을 모르고 계속 나아갔다. 무기물에 해당하는 것들을 세상의 이치와 전혀 관계없이 무기로 만들어버리는 능력. 능력도 능력이지만 레인의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이 하나의 또 다른 무기로 만들어냈다.

 

“그런데...마리아? 아직 기억을 못 찾은 아이들을 이용해서, 사탕을 먹는 행동은 자제해주시죠?”

 

뒤에는 이미 받들어 모셔지고 있는 검은 달의 여왕이 존재했다. 잡화점에서 공백으로 덮어씌워진 소녀들의 기억을 다시 복구하고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리니 아직까지 작업이 완료되지 않은 아이들을 멋대로 조종하고 앉아있는 중이다. 기억을 복구하는 것에 있어선 망각의 샘물로 인해 덧씌워진 부분만 벗겨내면 되지만, 작업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일부의 기억이 날아가는 부작용이나, 자아가 다른 방향으로 삐뚤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시간이 좀 걸린다는 의미는 그것인데...

 

“한 사람의 기억을 복구하는데 20분씩이 걸리니까. 현재 30명정도 되는 사람을 죄다 복구해야 하니 지루해서 죽어버릴 지경이다! 그나마 꽃밭에서 놀아보는 것도 첩의 소원이었으니 지금이라도 넘어가달라!”

 

“아주 멋대로 난리를 치시는군요.”

 

한숨밖에 나지 않았다.

뇌를 포크로 직접 찌르는 고통이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을 무렵. 화재에 휩싸인 도시가 붉게 발광하는 야경이 시야에 비춰졌다. 그리고 그 화재의 한 가운데에는 검은 고양이 하나가 지나가더니 그 뒤로 지나가는 모든 것이 다 붕괴되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건물 하나마저 검은 고양이 근처에 도달하지 못하고 소멸하며, 남은 건물 잔해 하나도 남김없이 날려보냈다.

 

그저 검은 고양이 하나가 모든 것을 어둠으로 잠식해버린다. 저게 13대 마왕의 클래스라면 클래스라고 설명하는 게 맞겠지. 기존에 있는 마왕보다 너무 월등한 능력을 자랑하는 만큼, 모든 것이 다 무너져내려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 범위는 너무 포괄적이라서 대륙 전체가 무너져내려도 할 말이 없으나, 지금 레시아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게다가 각개격파를 하겠다던 레이베리아의 말과는 달리, 잡화점 멤버가 뭉치고 다니며 레시아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옛날에 마왕을 실수로 불렀다는 죄책감이 이제서야 나타나는가?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저게 당연하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레인. 여기서 나는 내린다.”

 

“어라? 카린 씨! 낙하산은 가져가야죠!”

 

낙하산은 필요 없지. 레시아가 받아줄 테니까.

잡화점 정문을 거침없이 뛰어내리자 검은 고양이의 모습은 어느 사이에, 위압과 카리스마가 넘치는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바뀌어있었다. 연보라 빛 머리카락과 더불어 붉은 눈은 지나오던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는 사실보다 더 강한 인상을 줬고, 근엄한 모습과는 달리 모든 이들을 매료하는 외모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주인은 어지간히 하늘을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짐은 비록 마왕이지만 하늘에서 무턱대고 떨어지는 사람을 자주 받아주지 않는다.”

 

레시아의 손에 검은 빛의 마법진이 나타나면서, 중력가속도를 타고 떨어지는 내 몸이 일순 천천히 흐르듯 땅에 내려가고 있을 때. 레시아는 두 팔을 뻗어 나를 살며시 받아줬다. 내 두 발이 땅바닥에 닫자마자 레시아에게 질문을 했다.

 

“시나는요?”

 

“천계에 입성했다. 그 전에 Yee.T 보드게임으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집중하겠다는 계획은 하지 않는 것인가?”

 

“하고 싶어요?”

 

“짐이 1등인 것이 당연하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구나. 아무튼 이 상황에 대해 수습을 할 준비를 해보도록 하자. 수습의 준비는 간단하게 없었던 일로 돌리면 그만이다. 없었던 일을 하기 위해 실행하려면 시간을 역행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아직 내가 불가능하니 레시아는 실제로 부수지 않고 눈속임을 시행했다.

 

레시아가 검게 덮고 있는 것은 파괴의 상징이 아니라, 환영 마법 중에 하나인데 보통 기상날씨를 알려주기 위해 비추는 용도로 사용한다면, 레시아는 아무래도 매우 강한 마왕이라서 한 평면이 아니라, 3차원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게다가 일반인들은 모두 이 상황에 대해 알 리가 없다. 그러니 지금 우리를 막으러 오는 자들은 거의 초능력자나 유랑극단 중에서도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간부들뿐이지.”

 

“복잡한 절차인데 잘 하시네요. 보통 일반인들이 평범한 삶과 같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환영과 그 외에 존재들은 불타고 종말이 찾아오는 환영을 동시에 구현하다니.”

 

“뭐. 이 정도면 간단하다. 잊었는가? 짐은 꽤나 강한 마왕이니라. 저런 절차가 2%정도 오차 나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마나 역류가 시작되긴 하겠지만, 그 이전에 마나역류의 조짐이 보이면 곧바로 캔슬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이런 괴물 같은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이유라고 한다면, 짐 옆에는 유능한 마나 창고가 붙어있기 때문이니라.”

 

마왕치고는 너무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뒷머리까지 쓸어 내리기를 반복하니, 이제서야 내가 뭘 바라는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이제 본 모습으로 좀 바꿔주시죠. 볼일은 다 끝났으니까.”

 

이제 본래의 성별과 나이대로 돌아갈 시간이고, 잡화점의 주인인 카일로 되돌아갈 시간이다. 이제 이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건 사양하고 싶다. 가급적이면 영원히...

 

레시아가 손바닥을 마주치자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거대한 현기증이 일어나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본래의 모습, 본래의 성별로 되돌아가 있었다. 뭐 키는 한결같이 170은 못 넘는다고 해도, 변하기 전의 남성용 옷을 입고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자.

 

“그런데 이곳까지 오면서 유랑극단의 간부나 다른 초능력자들을 본 적이 없나요?”

 

“없다. 무식하게 조용해서 짐도 의문을 표하고 있노라.”

 

루니아 누나와 루비아도 레시아를 호위해서 왔다고 하지만, 그 어떤 적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레이베리아에게 정보가 흘러 들어간 것처럼 보였는데, 이곳에 먼저 도착해서 레시아와 싸워도 이상하지 않게 시간이 많이 흐른 뒤다.

 

빈집털이를 하기엔 잡화점 멤버들보다 잡화점이 더 강해서 불가능하고, 기습을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차단이 된다. 이 일을 벌써 알아차리고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까?

 

“설마 저들이 간파라도 한 것일까요? 이 환영마법이 보이는 사람들만 수색해내는 것에 대해 말이죠.”

 

“레이베리아라면 간파를 할 수 있어도 지금 한 명이 걸려든 것처럼 보이노라.”

 

“한 명이요?”

 

1명이라면 어릿광대일까?

맹수 조련사는 아직 유랑극단 가입유무에 대해 모르고, 리제로트라면 월터와 항상 같이 다니니까 2명이 되야 한다. 우선 가능성으로 가장 높은 건 어릿광대나 레이베리아인데, 장막을 거두는 순간 의외에 여성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이 현상은 거대한 마기가 안개처럼 퍼지는 환영마법이라니! 마법학파도 이제 머지않아 부흥하게 될...어라? 걷혔다. 어라라!”

 

밝은 회색 빛의 롱 웨이브가 달빛에 비춰졌고, 나를 바라보는 호박 빛의 눈동자가 반가운 기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300년 전에는 봉인된 이후에 한번도 못 보던 바람의 정령왕.

 

윈디 메르아가 내 눈앞에 곧바로 나타났...

 

“꺄아! 카일 씨! 너무 오랜만이잖아요! 300년 만인가? 500만년 만인가? 반가워요! 안아주세요! 쓰다듬어주세요! 아이언 클로 해주세요오오...으갸아아아악!”

 

“만나자마자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제발 진정하라고!”

 

본 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반가운 얼굴을 보자마자 하는 일이 아이언 클로로 상대를 잠재우는 일이었다. 아니나다를까 변하지 않는 윈디의 모습으로 인해 머리에 두통이 서서히 몰려왔다.

 

“이번엔 무슨 캐릭터로 유희를 즐기는지 설명해주실까?”

 

“아뇨. 이 세상은 마법사라는 직업이 도태되어있고 마법공학자가 큰 인기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바람의 마법사가 되어 세계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직까지 마법은 크나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 이런 곳에 있었죠. 그나저나 죽은 줄만 알았던 카일 씨를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기적인 거 같네요! 그 동안 왜 저와 이프리트를 부르지 않으셨나요? 네?”

 

이거 설명하기에는 말이 길어질 테니 요약해서 이야기했다.

 

“그렇군요. 원래 300년전에 있어야 할 카일 씨가 멈춘 시간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 반동으로 가속된 시간 속에서 표류를 했더니, 이곳에 도착했다는 소리가 되네요. 그리고 유랑극단이 일을 벌이는데 아직까지 살아남은 자들이 있기도 하고요?”

 

“맞아.”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 윈디를 보며 적어도 두통이 완화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다만...

 

“잠깐? 윈디. 너는 그럼 이곳에 떠돌아다니면서 유랑극단이 살아있다는 것도 몰랐단 거네?”

 

“바람을 속일 정도로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인가 보죠. 그런데 카일 씨? 생각보다 많이 바뀌었네요? 에너지의 흐름이라던가 상태 같은 거 말이에요. 이 정도의 힘이라면 저를 트럭 3대에 가득 채워서 소환하실 수 있으실 텐데?”

 

지금 충전되고 있는 창조주의 에너지를 말하는 건가? 아직까지 불안전하게 마기와 마나가 합쳐지기 시작했지만, 신성력까지 모이면 더 강력한 에너지로 돌변하여 내 체내에 깃들게 된다. 다만, 인간의 그릇으로는 그 힘을 버티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사용할 수 있는 것들만 조금씩 조금씩 찾아서 쓰는 중이다.

 

“마법이라기보단 신에 가까운 힘인데, 너를 트럭 3대에 가득 채워서 소환하다간, 내가 트럭 3대에 죽은 상태로 장례식장에 가겠다.”

 

정령왕을 소환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뛰어난 정령사가 해야 할 일이지. 사실상 이프리트나 실피드인 윈디 메르아는 내가 소환해서 만난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유희를 즐기다가 어쩌다 보니 만나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이곳 근처에 유랑극단이나 너처럼 그 환영마법에 반응한 사람이 근처에 있어?”

 

 

조급한 마음에 다시 주제를 돌려서 윈디에게 질문을 돌리니, 좌우로 고개를 휘저은 윈디가 “아니요. 없었어요.”라며 부정을 표시했다. 아무래도 인생은 내 멋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저쪽에서 속임수를 간파하고 나를 따로 추적하지 않은 모양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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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말도 일나가네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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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9

거리도 잠든 깊은 밤, 검은 두 실루엣이 동쪽 해안가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디아가 본 게 확실할까요? 배교한 아랍인일 수도 있어요."
발레트의 뒤를 따르며 로메가스는 의심쩍은 어투로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나디아가 봤다는 초승달형의 칼이 마음에 걸려. 배교한 아랍인이 그것도 어부가 그런 칼을 갖고 다닐리가 없잖아."
발레트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던 나디아를 떠올렸다.
"그냥 장식품이 아닐까요?"
"말도 안돼. 귀족도 아니고 바다에서 그물질하는 어부가 장식으로 그런 칼을 찬다고? 보키아 시종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상해. 귀족의 시종과 어부가 뒷골목에서 만날 일이 있을까?"
발레트는 걸음을 멈추고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어부가 정말 오스만 정찰병일까요?"
"아직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정찰병이라면 오늘 밤 항구를 통해서 반드시 몰타를 빠져나갈거야."
두 사람은 스케베라스산 밑의 마르사 해안에 도착하자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바다는 잠잠했고 파도 소리만이 해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발레트는 바위에 등을 대고 모래 위에 앉았다. 한밤의 해안은 적막했고 축축한 공기가 그들의 주변을 둘러쌌다. 발레트는 작은 어떤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 주의를 기울여 어둠 속을 주시했다. 밤의 차가운 기운이 그들의 몸에 스며들 때쯤, 서로의 숨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미세하게 들렸다. 발레트는 바위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검은 물결 사이로 쪽배가 노를 저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한 사내가 비탈길을 내려와 재빠르게 바다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발레트는 곧바로 뛰쳐나가 달리는 사내의 어깨를 잡아챘다. 사내의 몸이 돌려지는 것과 동시에 칼이 휘둘러졌고 발레트는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뒤이어 달려온 로메가스가 손쓸 새도 없이 모든게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내는 이미 바다에 뛰어들어 엄청난 속도로 헤엄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로메가스가 뒤에서 발레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오스만 정찰병이 맞았어!"
발레트는 배를 움켜진 채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얼마나 다친 거에요? 어디 좀 봐요."
로메가스는 상처를 보기위해 무릎을 꿇었다. 발레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괜찮아, 깊이 배이진 않았어. 엄청난 속도였어! 훈련받은 군인만이 할 수 있는.. 아주 민첩해. 나디아가 본 게 사실이었어! 로메가스!"
발레트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빠르긴 했지만 어두워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요. 오스만쪽 사람이 확실할까요?"
발레트는 아무말없이 사내가 떨어뜨린 초승달 모양의 칼을 로메가스에게 건넸다.
"곧 시종에게 얘기가 들어갈거야."

 

 

탕!탕!탕! 고요한 밤을 방해하는 둔탁한 바깥 소리에 나디아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탕!탕!탕! 거센 소리가 이어지자 나디아는 베게밑에서 칼을 빼내 옷안에 숨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누구시죠?"
"나디아, 문 좀 열어줘요! 로메가스에요."
다급한 로메가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디아는 급히 문빗장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나디아,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우선 눕힐 곳이 필요해요."
허리를 반쯤 굽히고 로메가스에게 기대어 있는 발레트를 보자 나디아는 손을 입에 갖다 대고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나디아, 어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나디아를 향해 로메가스가 재촉하며 말했다.
"이리로요."
나디아는 1층의 자신의 방으로 앞장서 갔다. 발레트를 침대에 눕인 후 로메가스는 나디아에게 럼과 물, 깨끗한 천을 부탁했다. 상처는 깊진 않았지만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위치였다.
"나디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을 잡아줄래요?"
나디아는 떨리는 손으로 발레트의 발을 붙잡았다. 그녀는 발레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작할게요."
로메가스는 먼저 발레트에게 럼을 마시게 한 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상처 부위에 럼을 부었다.

 

"이만하길 정말 다행이에요. 조금만 빗겨났어도... 어휴.. "
로메가스는 피가 묻은 손을 닦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마워, 로메가스."
발레트는 몸을 일으켜 피 묻은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일어나시면 안되요."
로메가스는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발레트를 저지하며 말했다.
"크레누씨가 일어나기 전에 여길 나가야 해."
발레트가 힘겹게 겉옷을 걸치려 할 때 문이 열리고 나디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발레트를 다시 침대에 앉힌 후 수프 접시를 내밀었다.
"감자 수프에요, 몸이 따뜻해질 거에요."
나디아는 로메가스에게도 접시를 건넸다.
"고마워요, 나디아. 크레누씨는..."
"아저씨는 잠잘 땐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주무세요."
나디아는 걱정 말라는 듯 수프 그릇에 눈길을 주었다.
"나디아, 정말 고마워요. 기사단 숙소로는 갈 수가 없었어요. 발레트님이 다치신 걸 단장님이 아시는 날엔..."
로메가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봐, 로메가스.. 난 괜찮다니까.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말하지 말라구."
발레트는 얼굴을 찡그린 로메가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디아는 발레트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전한 경솔한 말로 인해 발레트가 다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물밀듯이 차올랐다. 그의 피 묻은 셔츠는 5년 전 지옥같던 순간으로 그녀를 데려다 놓았다. 나디아는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어부가...아니었던 거죠... 내가 한말 때문에 당신이 다쳤어요..."
나디아는 여전히 발레트를 보지 못한 채로 괴로운 듯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나디아,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오히려 당신 덕분에 더 큰일을 막을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거에요. 상처는 신경쓰지 말아요. 조금 긁힌 것 뿐이니까."
발레트는 부드럽게 말하며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로메가스에게도 어서 먹어보라고 권했다.
"난... 난 당신이 다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 때문에 누군가가 또... 나 때문에..."
나디아는 혼란스러운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몸을 떨었고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초조해 보였다.  발레트는 그릇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나 나디아 앞으로 갔다.
"나디아, 날 봐요. 어제로 시간을 다시 돌린다해도 당신이 본 것을 내게 얘기하는게 옳아요. 절대로 당신 때문에 다친게 아니에요. 내가 방심한 거에요. 난 정말 괜찮아요. 이렇게 바로 걸을 수도 있잖아요."
발레트는 따뜻한 눈빛으로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망울은 눈물이 고인 채 떨리고 있었다. 나디아는 발레트의 얼굴을 가까스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트는 연신 괜찮다고 말하며 방안을 이리저리 걸었다. 나디아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피 묻은 셔츠와 초승달 모양의 칼은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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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0 - 8

560

 

 

 

리제로트의 능력은 상대의 자의식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망각의 샘물마냥 덮어씌우고 새로운 명령을 집어넣는 것이니, 이제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을 무렵. 리제로트를 위한 함정이 다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은 여전히 존재했다. 세상에 문제가 없었다면 그 세상이 잘못될 정도로 많은 문제점들. 리제로트가 언제 올지 나를 포함한 6명은 추측의 도가니에 빠져만 있었다. 저녁을 줄 때 한번 나타난다는 추측이 있고, 하룻동안 굶어도 사람은 죽지 않기 때문에 안 온다는 추측도 난무했다. 급기야 토론대회까지 열리면서 장식되어있는 또 다른 인형들은 우리들의 모습을 소리 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간식을 줄 때 올 거라니까요!”

 

“아니! 분명 예쁜 옷을 입히려고 할 때 들어올 거야!”

 

뭐. 저 2개는 추가된 추측으로 생각해두자. 아무리 쓸 때 없이 난발을 해도, 다다익선이라는 말답게 많이 있으면 좋은 것뿐이니까. 결국 제대로 된 생각을 기대하지 말자. 마나가 천천히 모이고 있는 동안, 어처구니 없게도 정신연령이 평균 10대 초반의 그룹 사이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5명이 이야기 하는 흐름에서 벗어나, 레이베리아의 힘이 어쩌다가 이렇게 커졌는가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생각해봐라.

 

300년전에는 아우리스 여신도 함부로 싸우지 않던 타락의 마왕 레프리시아를 각개격파로 부술 생각을 한다는 의미는, 힘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어마어마한 성장이 가능했다는 소리가 된다. 아주 간단한 추측인데 내가 좀 더 똑똑하고 힘세면, “이런 게 가능하지 않을까?”하고 멋대로 저지르게 된다.

 

게다가 300년 뒤에는 이 대륙을 다스리는 여신인 아우리스와 생명의 여신 비니스, 운명의 여신 데모르테가 없는 이상.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천계에 있는 사람은 의식과 무의식을 다스리는 엘티노스와 빛의 추종자인 샤이어 둘 뿐이다. 하지만 엘티노스도 레이베리아에게 한바탕 봉인되어 먹통이 된 적이 있었고, 샤이어는 지금까지 시나와 소통을 하는지 안 하는지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 그렇다면 지금 이 대륙에 가장 강한 여신은 레이베리아가 된다는 소리인가?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응? 뭘?”

 

뜬금없이 내 앞에 앉아서 똘망똘망하게 눈으로 쳐다보는 소녀. 그보다 이름도 제대로 못 물어봤는데...

 

“사탕 중에 어떤 맛이 가장 좋으냐고 물어본 거야.”

 

“뭐, 질문의 방향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라 했으니 어쩔 수 없네.”

 

“첩은 레몬 맛 사탕이다! 그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지!”

 

당돌한 목소리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내 뒤에서 당당하게 서 있으면서도 레몬 맛 사탕이 좋다더니 포도 맛 사탕을 깨물고 있는 소녀. 정확히는 성인여성이지만 키가 작고 몸이 아담해서 자주 착각을 일으킨다. 연한 초콜릿 피부는 여김 없이 핥으면 녹는 게 걱정될 정도로 부드러워 보였다. 언제나 어른스럽게 보이기 위해 회색 원피스를 입고 베이지 색상의 롱 코트를 입었지만, 뒷머리를 짧은 것처럼 보이도록 묶어버린 헤어스타일 덕에 더 어린애처럼 보였다.

 

“마리아!? 여긴 어떻게 온 거에요!”

 

“음? 첩은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카일...아, 지금은 카린인가? 어쨌든 그림자 속에 몰래 숨어서 상황을 좀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잡화점의 공동재산인 카일을 적의 손에 넘겨준다는 그 자체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니라.”

 

마리아가 내 그림자에 숨어서 이곳까지 몰래 잠입했다는 소리가 되는데, 그 사실을 당연히 모르고 있었으니 어안이벙벙해서 방방을 타고 있는 기분이다. 음...다음부터 이런 표현은 쓰지 말아야지.

 

“그나저나 아까 전엔 잘 봐뒀다. 은근히 그런 취미가 있을 줄은 상상도...”

 

“취미라고 하지 마시죠? 나 나름대로 필사적인 각오로 이들을 정신차리게 한 거니까.”

 

키득키득하고 웃는 마리아는 다시 뒷짐을 쥐며 빙글하고 돌았다. 자연스럽게 롱코트가 살짝 펄럭이며 내 앞으로 나왔다.

 

“과연. 자의식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그저 덮어씌워 명령만 다르게 내렸다는 건가? 예상하지도 못했지만 이걸 초능력이라고 부르기엔, 약간 고차원적인 기술이라 본다. 첩도 다른 사람의 정신에 침투하거나 덮어씌우기 위해선 까다로운 절차를 걸쳐야 하지만,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약간 오래 걸리나, 기존의 기억을 덮어씌우고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라...하긴 카린은 기존의 기억을 덮어씌우기엔 정신방어를 뚫기 힘들겠지. 인간의 눈은 아무리 오래 떠봐야 보통 1분도 넘기기 힘들다. 카린의 경우에는 7시간동안 눈싸움을 해야만 하는데, 오히려 이쪽에서 감아버리면 그만이니 효력이 없을 터. 따라서 망각의 샘물로 기존의 기억을 덮어씌우고 새로운 명령만 내린다는 선택지를 내렸다고 해석이 된다. 어떤가? 정신계열에 통달한 첩의 설명이?”

 

흑안을 반짝이며 만면의 미소가 퍼졌다. 뭔지 몰라도 어려운 설명을 한 거 같으니 박수를 치고 있는 소녀들과 아마 벙쪄있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고마워요. 마리아왜건?”

 

마리아의 설명이 너무 많아서 요약을 하자면, 리제로트의 능력은 내가 처음부터 언급한 그대로 기억을 덮어씌우고 새로운 명령을 내리는 타입의 세뇌에 가깝고, 눈을 마주해야 한다는 리제로트의 제약으론, 나의 정신방어를 뚫으려면 7시간동안 눈을 깜빡이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그래서 고안한 편법이 망각의 생물로 내 기억을 덮어씌우고, 새로운 명령을 걸어 인형으로 만든다는 거겠지.

 

요약을 해도 분량이 길어지니 어쩔 수 없지만, 5명말고도 이 방안에 있는 모든 인형들 전부, 새로운 명령이 쓰여져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는데, 리제로트가 말만하면 아마 움직이고 날뛰기 시작하리라.

 

“마리아가 여기에 있다는 건 레시아도 제 위치를 알고 있다는 소리네요?”

 

“그렇지. 하지만 적의 책략을 이용하는 것이야 말로 마왕군의 특기다. 비록 마왕님께선 수많은 인간들을 공포로 몰아가고 계시지만, 레이베리아인지 뭔지 하는 여신을 강림시키기 위해서 연극을 벌이고 있지. 게다가 지금쯤이면 레인이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니라. 그러니까 10초정도 남았군.”

 

“10초? 그 애가 어디 굴다리에서 사는 줄 알아요? 어찌 정확하게 10초안에 이곳에 도착하는 거에요?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레인이야 특이한 녀석이지 않는가. 잡화점 주인으로 링크가 걸린 카일이라면, 레인이 있는 잡화점 중추인격인 세린에게 감지가 되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3초정도 남았군.”

 

마리아가 3초라고 직시하는 시점부터 2초의 시간이 남았고, 1초가 지나고 있을 때 불길한 소리와 함께 굉음이 건물을 처절하게 흔들었다. 잘 지어진 콘크리트가 날아가고 먼지가 방을 한 가득 채워나가는데 나를 제외한 나머지가 탄성을 질렀다. 사람이 아니라 집 하나가 떨어졌는데 거대한 복층으로 이루어진 건물 앞에 간판으로 “엘티노스 잡화점”이라 쓰여졌다.

 

그 안에서 거칠게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항상 기괴한 검은 가면을 쓰고 나타나, 팔을 활짝 피며 소리를 지르는 남자.

 

“맘마미아! 이번엔 정확하게 운전했어! 듣고 있지!”

 

커다란 혼잣말이 모든 사람들을 밀쳐내듯 원맨쇼를 하고 있을 때. 두통을 느끼고 머리를 쥐어 잡은 내가 있었다.

 

“가끔 봐왔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능력이로군! 잡화점을 로켓으로 만들어서 날려보내는 미치광이라니! 첩이 이 세상을 지우지 않는 것이야 말로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배를 붙잡고 깔깔깔하며 웃어대고 있는 마리아. 세상이 멸망 당하지 않는 이유가 좀 이상하지 않나? 하나는 백장미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이고, 이번에 새로 갱신한 이유는 정신이 좀 이상함을 정직하게 뛰어넘는 사람이 재미있기 때문이라니...

 

“역시 내 주변사람들은 정상이 아냐...”

 

게다가 얼마나 기적적으로 착지를 했는지, 리제로트 때문에 인형처럼 되었다고 한들 살아있는 생명이었는데, 그 사이를 피해서 인명피해 하나도 없이 정확하게 착지했다. 크기가 작은 것도 아니고, 대각선으로 찍어서 내려왔으니, 아슬아슬하게 머리가 부딪치지 않았겠지.

 

“그나저나 여긴 어디에요? 인형의 집? 인형치고는 너무 생생한데요?”

 

“사람이야.”

 

“아하!”하고 이해하는 레인. 어라? 이건 원래 정상인 범주에서 이해하면 안 되는 거잖아? 보통사람들이라면 놀라야 정상일 텐데? 뇌를 뜯어서 검사를 해봐야 하나?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건데?

 

레인에게 있어선 모든 것이 호기심천국인지 가까이 가서 볼을 찌르기도 하고,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거부감 없이 행동하는 그 자체야 말로 정상은 아니었다. 저걸 보고 정상이라고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래서 이 애들은 못 구하나요? 이대로 있으면 위험할 거 같은데. 딱 봐도 이제 천장이 붕괴하기까지 5분밖에 남지 않았다고요? 아까 착지하면서 불길한 소리가 났는데 예상으로는 이곳 기둥이 좀 약하긴 한 거 같아요.”

 

“이곳의 기둥은 날아오는 로켓 잡화점을 막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는 게 정상 아냐? 집이 천장에서 떨어졌는데 얼마나 놀라겠어!”

 

“음. 그런가요? 뭐 그건 대충 넘어가죠.”

 

자기 집에 이상한 잡화점이 하늘에서 내려와 괴멸시키고 간다는 그 자체를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그나저나 기프트피어스를 만드셨네요?”

 

“그야. 족쇄에 걸려있는 마법적인 처리를 해제하기 위해서지. 그보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전부 초능력자라서 나도 데려가고 싶지만, 하나하나 옮기기엔 너무 힘들지 않을까?”

 

“그렇네요. 카일...아니, 지금은 카린 씨라고 해야 하나요?”

 

“나는 이곳의 인형이 아니거든?”

 

“그럼 오란 씨로?”

 

“이름 가지고 장난칠래?”

 

바쁜 상황이 아니었다면 정강이를 차버렸겠지만, 망망대해만큼 넓은 인내심으로 한차례 넘어갔다. 급박한 상황이라면 지금쯤 리제로트와 다른 사람들이 이곳에 들이닥친다는 소식인데, 마리아는 고개를 까딱이기 시작하더니, 앉아서 숨만 쉬던 사람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마리아? 뭘 한 거에요?”

 

“뭐긴. 명령한 거다. 텅 비어버린 백지 같은 정신상태라 오히려 침투가 쉬워서 말이지. 이 아이들을 구출한다면 기꺼이 첩이 데려가겠다만?”

 

“다음 숙주로 누구 삼을지 고르면 안 되요.”

 

“쳇.”

 

선의에 감추어진 본심을 내가 말하자 마리아는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문을 막으려고 했을 무렵. 레인의 손에 나와 비슷한 모양의 볼펜을 닮은 무언가를 꺼내며 눌렀다.

 

-Oh! Yeeeeeeeees!

 

300년 뒤의 기프트피어스는 변함없다고 생각했지만, 초능력을 주로 사용하는 레인의 입장에선 기프트피어스를 사용하는 게 좀 신선했다. 마나를 사용할 줄 안다고 한들 마법이 아니라 신체능력을 강화하는 것밖에 없을 터.

 

“네가 가진 기프트피어스는 마법수식이나 마법진이 없잖아?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그거요? 스포일러에요.”

 

가끔가다 생각하는 거지만 한 대씩은 때려도 되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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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당신은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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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0 - 7

559

 

 

아직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을까? 불안한 생각은 오히려 독이 되니까, 생각을 그만두고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그건 저 앞에 있는 인형들과 뭐가 다를까? 자신의 목숨이나 처지가 상대방의 손에 좌우가 된다고 한들, 지루함은 언제나 중립을 지켜오며 여러 사람을 괴롭히는데 타고난 모양이다. 지루함이 머리를 4박자로 콕콕 찌르는데, 조만간 30분도 되지 않아 외계어로 적혀있다면, 그 날이 아마 내 생에 마지막으로 이성이 끊어져버린 기념일로 기록되겠지.

 

“숨만 쉴 줄 아는 건가?”

 

납치되었는지 좋아서 왔다가 감금당했는지 동기와 원인이 알 수 없는 소녀들. 그 이전에 귀여운 소년이 없는 걸로 보아, 리제로트가 살아 숨쉬는 귀여운 인형을 원하는 정도가 도를 넘어서서, 생각의 발상을 잘못된 방향으로 한 게 분명하다. 루니아 누나도 분명 귀여운 걸 너무 좋아한 나머지 남녀노소불문하고 폭주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리제로트가 저렇게 어린 여자애들을 인형으로 만드는 이유는 뭘까?

 

나중에 저걸로 침공을 하는 걸까? 아니면 저 중에 우주로 나가서 태양에 물을 부어버리는 실험을 해주는 걸까? 어쩌면 전 세계에 소녀들이 가득 차버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는 중인 걸까?

 

아무리 내가 바보 같은 상상을 해서 역경과 고난의 발판이 되어버렸다고 하지만, 저 3개중에 1mg정도 가능성이 있는 건 첫 번째가 되겠지. 꽤 무시무시할 거 같은 타이틀을 가지고 올지도 모르겠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 소녀들의 침공’과 같은 기괴한 제목으로 시작해서, 내가 과연 태클을 걸 타이밍이 얼마나 많은지 숫자로 세어봐도 괜찮을 것 같다.

 

이제 장난은 그만두고 반응실험을 좀 해보자. 어려지고 성별이 바뀌어버린 몸이라, 손가락마저 연하고 가느다란 것 같지만, 그건 내 손가락이니 탓하지 말고 다른 소녀의 볼을 살짝 찔러봤다.

 

어차피 족쇄의 범위는 방 전체로 잡혀있는지 좀 길었는데, 내가 아무리 이동을 해도 장난을 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적대심을 드러내고 싶긴 하지만, 등에 가벼운 액세서리마냥 걸려있는 대검에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는 과정을 직접 당할 것 같으니, 이건 잠깐 패스를 하고...

 

밖에서 뛰어 놀고 있는 레시아를 위해 뭘 하느냐가 우선이다. 위치를 알려야 구조가 될 확률이 높아지니, 지금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이 힘으로 뭘 하느냐? 요란하게 난리를 치려면 이곳에 불을 붙이는 게 가장 현명한데. 그 이유는 불이 나면 시선이 끌리니까. 그러니 조그마한 불을 붙...

 

-촤아아악!

 

어디서 양동이를 구했는지 몰라도 머리에 물을 뿌려줘서 정말 고맙군...덕분에 뭐라고 태클을 걸어야 하는데 그것마저 싹 씻겨나갔다. 아직 불도 나오지 않고 집중하려는 사이에 어떻게 알고 뿌렸을까?

 

개나 소나 길에 걸어 다니는 잡초까지 전부 내 독백을 읽더니, 감정과 자의식이 없는 소녀들마저 내 독백을 읽는 건가? 꽤 웃기네. 너무 재미있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불을...

 

-촤아아악!

 

뭐...불이라는 단어만 써...

 

-촤아아악!

 

“그만 뿌려! 뭐가 그렇게 불만이...”

 

-촤아아악!

 

4콤보씩이나 맞고 정신을 차리는 건 힘든 일이니, 숨 좀 고르도록 하자. 어차피 불 이야기만 안 하면...

 

-촤아아악!

 

“아오 저것들을 다 불질러버릴 수도 없...”

 

-촤아아악!

 

“제발 좀 그만둬! 나에게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

 

-촤아아악!

 

“그래...내가 졌다...”

 

살아가면서 맞아야 할 물벼락은 이곳에서 다 맞았다고 생각하자. 어찌되었든 다른 기획으로 넘어가기 전에 수건을 줬으면 좋겠는데?

 

“물을 뿌렸어도 수건은 줘야 하는 거 아냐?”

 

역시 묵묵부답으로 아무런 말도 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뭐로 닦아내야 하는지도 모르겠으니 남아있는 힘으로 수건이나 만들어야 할까?

 

-할짝.

 

“뭐야? 누가 핥았어? 자, 잠깐만!?”

 

볼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다른 인형이 나에게 가까이 붙으면서 핥아내기 시작했다. 그건 둘째치고 5명이나 가까이 붙어서 핥는 건 무슨 상황일까? 너무 적극적인 태도로 달라붙어서 이쪽에서 당황했다.

 

“너희들이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아니, 잠깐만...힉! 핥지마! 그만둬! 그만둬 주세요! 제발! 그마아안!”

 

물만 보면 핥다니. 사막에서 조난당한 사람도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리제로트가 자의식을 날리며 명령만 내리는 인형으로 만드는데, 생존의 욕구에 대해선 어떻게 처리를 하는 거지? 아직까지도 달라붙으며 물방울을 핥고 있는 소녀들을 가만히 관찰했다.

 

저 인형들에게 내려진 명령이 과연 무엇인가? 이 영역까지 생각을 하면서 추측을 시작하면 하루는커녕 1개월이 지나도 모자랄 판이다. 까면 깔수록 더 튀어나오는 양파마냥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의문이 사방에서 생겨나는 기괴한 상황에서, 나에게 너무 붙어있는 사람을 떨쳐내고 거리를 벌렸다. 어차피 내가 도망갈 거리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망각의 샘물이 리제로트에게 받은 명령을 지울 수 있다면?

 

“이것도 꽤 자극적인 실험이 되겠네.”

 

생각의 불빛이 번뜩이자마자 행동으로 바로 옮겼다. 수분이 원하면 주는 게 답이지만 설마 내 몸까지 제공할 줄은 몰랐는데. 그냥 약간 과도할 정도의 스킨십이라 생각하고 망각의 샘물을 내 머리 위에 뿌렸다. 병은 땅바닥에 힘없이 떨어지며 구르고, 주변에 있던 소녀들은 다시 다가와 이번엔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꽉 붙잡기까지 했다.

 

내가 탈출하려고 별 짓을 다하고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에 가장 빌어먹을 방법이 분명했으니까. 5분정도. 단 5분이 50분이 되는 지옥 같은 경험이었다. 다행이라면 5분동안 핥고 있는 와중에 모두가 실이 끊어진 것처럼 쓰러져서, 팔과 얼굴만 피해를 입었고 나머지는 멀쩡했는데, 다음부터 ‘핥는다.’라는 단어를 가벼이 여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하게도 살아있긴 하네...”

 

어마어마한 물기 때문에 늘어진 옷을 다시 원래대로 고쳐 입고, 이들이 깨어나기 전에 일을 진행하기로 하자. 족쇄를 푸는 것은 간단하지 않지만 푸는 도구를 만드는 것은 매우 간단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을까? 나의 오랜 친구 기프트피어스를 창조하면 되는 일이다.

 

창조까진 아니고 복제품을 만드는 일에 해당하지만, 그래도 초기에 많이 사용한만큼, 도구에 대한 이해는 충분히 높으니까. 내 몸 안에서 창조주와 동등한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되기 전에, 서둘러서 형태와 틀을 잡고 기능을 부여하는 마법진과 수식을 새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도면처럼 나와있는 기프트피어스의 모습. 서서히 갖춰지고 있는 외형을 보며 쾌재를 부르는 미소가 자연스레 걸렸다. 아마 기프트피어스를 다 만들면 1/10도 남지 않은 용량이지만, 족쇄에 걸려있는 마법을 풀어내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그 이후로 마법처리가 되지 않은 그냥 족쇄로, 주변에 퍼져있는 마나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메우게 되고, 마나를 이용한 마법이라 화력은 이전보다 떨어지겠지만, 따로 신성력이나 마기를 구할 방법이 없다.

 

“그래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창조마법은 사용하지 못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과거에 봉인을 한번 당하고 모든 마법이 다 사라졌을 텐데...내 생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건, 그나마 친화력이 높으니까, 마나 자체를 움직여서 고정을 하거나 움직임을 방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게 염력이고 염동력이지 뭘...

 

“이미지로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사는 이래서 좋다니까?”

 

마나의 효율과 힘의 출력이 극악이더라도, 어차피 나는 마나와 매우 친하니까!

이른바 베스트 프랜드다. 저번에 어디선가 나에게 “너는 마나와 가장 친한 프랜즈로구나!”라고 들은 적은...없긴 하지만, 마나를 조종한 트릭 몇 가지는 가능하니까. 내가 배운 마법이 리셋이 되어버리고 마나의 활로를 뚫지 못했지만, 의지만으로 주변의 마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쯤은 가능하다.

 

그럼 모든 게 전부 해결...

 

“어라? 여긴 어디에요?”

“눈을 떠보니 이상한 곳에...”

“엄마? 엄마는 어디 있어?”

 

되지 않았다.

 

우선, 좋은 소식이라면 리제로트의 능력은 상대의 기억을 덮어 씌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지닌 초능력이고, 나쁜 소식이라면 망각의 샘물이 희석이 되는 바람에, 아주 적절하게 리제로트가 덮어 씌운 기억‘만’지워버렸다는 소식이다. 너무 절묘한 나머지 더 이상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후유증도 따로 보이지 않았고 이제 5명중에 한 명이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면, 리제로트의 관심을 한 가득 받을 일만 남은 건가?

 

제길.

극단적으로 저 애들을 모두 죽일 수 없는 일이니, 고민을 하기 전에 “크흠!”하고 헛기침을 하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소리를 냈으니 생소한 환경에 예민해진 사람들은 나를 보았고, 그 중에 나보다 작은 어린아이가 입을 열었다.

 

“언니는 누구야?”

 

순간 ‘오빠라고 부르라고!’라며 소리칠뻔했으나, 빠른 상황판단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은 마리아에 의해 바뀌어진 모습이었지...

 

“나는...”

 

아오 제길...

 

“카린이야...”

 

인생은 썩었어...

 

“우아! 인형 같아!”

 

“살도 부드럽고~”

 

아니,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건가? 아까 전만해도 낯선 환경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과는 달리, 내가 먼저 이름을 말하자 화목한 분위기로 변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제 3의 물결이 20초 안으로 당돌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서서히 누그러져가는 분위기를 다시 긴장이라는 이름으로 탄탄하게 조일 때다.

 

“지금 우리는 잡혀있는 거야. 너희들은 바로 도망가도 다시 붙잡을 거라서 방치해놓는 거고, 내 경우에는 최악의 위험분자라고 지칭하고 이런 족쇄를 만들어 놓은 거지.”

 

“그래? 언니는 이 족쇄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네?”

 

“어? 어. 당연하지. 하지만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이 족쇄를...”

 

-뚜드득! 탱강!

 

......?

 

“자, 잠깐만? 지금 뭘 한 거야?”

 

“응? 잡아서 뜯었는데?”

 

지금 일어난 일을 내가 설명을 하자면, 나보다 작은 체구를 지닌 소녀가 족쇄를 바라보더니,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길래 동의를 했지만, 안 될 거라고 말하려던 찰나에 작은 두 손으로 그 단단한 족쇄를 종이를 찢듯 시원하게 부셔버렸다. 저런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동으로 나와버린 멘트였다.

 

“잠깐만? 그럼 너는 초능력자야?”

 

“응! 나는 자동차도 들 수 있어!”

 

“저도...초능력자 인데요...”

 

그 외에 남은 3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초능력자라고 간접적으로 밝혔다. 리제로트가 말한 인형이 설마 전부 초능력자라는 소리가 되는 건가? 계속해서 돌아가는 머릿속의 수레바퀴가 멈췄다.

 

“그러면 너희들은 어떻게 이곳에 온 거야?”

 

“기억이 안나.”

 

내 예상보다 좀 강하게 효과가 나타났나? 어찌되었든 이 5명과 함께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어떤 계획을 세워야만 하는 걸까? 우선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며 5명에게 진실을 전했다. 그리고...

 

“세뇌가 뭐야?”

 

“어...남을 조종하기 위한 준비단계라고 해야 하나?”

 

“남을 왜 조종해?”

 

“음. 자신이 편해지려고.”

 

“왜 편해지려고 해?

 

“그거야 움직이면 귀찮으니까.”

 

“왜 귀찮아?”

 

“그, 그건 자고 일어나면 피곤하고 지치고 그러잖아?”

 

“왜?”

 

“제발 그만 좀 물어봐 이 왜가리야...”

 

대략 이런 흐름으로 무한의 질문을 받아야 했다. 아무래도 지금 내 정신연령과 현재 내가 상대하고 있는 소녀들의 평균 정신연령에 차이를 극심하게 느끼고 있으니, 저들이 눈높이를 높일 수 없기에, 내가 눈높이를 낮췄다.

 

“그럼 숨바꼭질이라 생각하자. 너희들은 아까 자리에 가만히 서서 인형처럼 있는 거야.”

 

“인형? 인형놀이야?”

 

키가 나보다 살짝 큰 소녀가 눈을 크게 뜨면서 물었다. 그보다 10대 후반으로 보이는데 어째서 너는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 나는 분명 키가 작은 소녀에게 눈을 맞추며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그래. 단 가만히 무표정하게 있어야 해. 그리고 리제로트가 들어오게 된다면 그때부터 우리가 술래가 되면서 그 애를 잡는 거야. 그럼 나중에 내가 밖에서 사탕을 줄게.”

 

“응! 알았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고,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리도록 하자. 리제로트가 이곳에 왔을 때 놀란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생각에, 마음속에선 웃음 꽃이 만개하여 가슴 한 가득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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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서 손이 자동으로 쓰고 있는데...

보면 볼 수록 이게 대체 무슨 개판인지...

집 오면 평균 새벽 2시인 경우가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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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0 - 6

558

 

 

 

압승을 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한들, 이겼다고 말한다면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카렌은 세린이 회복시키면서 서서히 깨어날 것이고, 리제로트는 망연자실을 한 체 돌아가기만 하면 될 뿐. 그렇게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느닷없이 폭주한 월터에게 휘말리기 전까지는...

 

옛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승리했을 때 방심하면 크게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내 기억으로는 리제로트가 월터에게 뭔가 발라주는 즉시, 공허한 인형의 눈에서 붉은 빛이 일렁이던 찰나, 기적적으로 반응을 하면서 막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어디인지 모르고 내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후였을 뿐. 주변에는 예쁘장하게 옷을 입은 인형들이 옹기종기 모여 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고작 립스틱 하나 칠했다고 그런 바보 같은 참사가 벌어지는가에 대해 웃음만 나오리라 생각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고작 립스틱 칠했다고 바보 같은 참사가 내 눈앞에서 벌어졌으니, 지금 이러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온 몸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는데 움직일 때마다 뼈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 눈을 뜨셨군요.”

 

“그래서...여긴 어디야?”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평범하게 일어났냐고 물어보는 리제로트. 내가 보여준 기행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아프다고 난리를 치며 반 송장이 되어있어야 하는 데미지일지라도, 침착하게 어디냐고 묻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았나 보다.

 

“그야 제 별장이죠. 그리고 이곳은 인형들을 모아놓은 방이고요.”

 

“그래? 그럼 이제 족쇄 좀 풀어줄래?”

 

“그건 안 돼요. 당신의 가치를 알아버렸으니 더 이상 풀어줄 수가 없는걸요.”

 

내 가치를 알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족쇄부터 풀어달라고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럼 인형이 되어주세요.”

 

“그냥 날 죽여라.”

 

정중하게 말했지만 거절당했으니 비협조적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치를 알았다는 그 점은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더니, 머릿속에서는 매번 회전하는 생각의 바퀴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할 무렵. 그 해답을 그냥 말해주듯이 리제로트는 시원시원하게 입 밖으로 열었다.

 

“당신을 붙잡았더니. 지금 세계는 혼돈의 도가니로 변해버렸어요. 300년 전에 있던 마왕이 재림해버렸고, 잡화점의 주인을 따르던 모든 이들이 폭주하기 시작했죠. 그나마 아쿠아리움에 마법을 잘 아는 사람들을 뽑아, 텔레파시를 방해하는 마법진을 설치한 것이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아요.”

 

신의 한 수?

하긴, 천천히 생각을 해보면 아쿠아리움으로 가자는 제안은 리제로트의 선택을 한 거니까. 내가 리제로트의 돌발행동을 예상했던 것만큼, 리제로트 또한 나의 행동패턴에 대해 많이 분석을 한 모양이다. 생각 외로 끈질긴 치킨레이스의 승리자가 나타나지 않은 걸 보아, 오늘의 운세는 믿지 말아야 할 족속일지도 모르지.

 

“다른 이들을 유일하게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잡화점의 주인 뿐인데, 만약 당신이 저의 인형이 된다면, 커다란 분노를 떠안고 저는 죽어야겠죠. 어차피 마지막 제안도 거절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요.”

 

어차피 시한폭탄을 짊어졌으니 나더러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본들, 내가 대답할 말은 한가지 길로 따라갈 뿐이다.

 

“그러면 빨리 풀어주던가?”

 

날 풀어주면 다른 잡화점 멤버들의 폭주는 일시적으로 안정을 되찾을지라도, 곧 이어 개화를 하듯 피어 오르는 적대심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소리일까? 모든 것은 어디부터 비틀어졌는지 몰라도, 나는 빠져나갈 구멍은 꼭 파놓고 싸운다. 리제로트도 비슷하긴 하지만 오히려 붙잡아야 하는 쪽은 리제로트고, 나는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일 뿐.

 

다만, 여긴 대체 어디길래 잡화점 멤버들이 나를 찾기 위해 난리를 쳐도, 지금까지 못 찾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인형사. 그럼 쓸 때 없는 일을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기 그지 없는 딱딱한 표정과 상대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이 정해진 대로 말을 하는 목소리. 너무 정감이 없는 여성의 목소리인지라 머리부터 입 밖으로 튀어나가기까지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레이베리아!”

 

“300년이 지난 미래는 어떠하지?”

 

격양된 기분 덕에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다, 아직 완치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시 비명을 지르는 몸. 입 밖으로 튀어나오던 것을 꾹 눌러 참느라 기분이 나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각본가는 자기 할 말만 했다.

 

“이 남자는 미래에 흉이 될 남자다.”

 

“지금은 여자니까.”

 

레이베리아의 권능은 진실을 꿰뚫어보는 것.

내가 남자인 것쯤은 이미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에 담배를 피우던 과거라도 알고 있으리라. 예시가 좀 바보 같아서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지만, 레이베리아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고, 리제로트는 알고 있어도 지금의 내 외견에 만족하듯 오히려 레이베리아를 차갑게 쏘아봤다.

 

“1주일 안에 길들이면 된다면서. 지금부터 훼방을 넣는다면 당신도 용서하지 않아.”

 

“그 남자인형 안에 신을 처벌할 수 있는 힘을 손에 쥐었다고 해서 기고만장 하지 않는 게 좋아. 하긴, 지금은 당신의 공이 크니까 잡화점의 인원들을 각개격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 그러니 1주일의 시간을 주는 거야. 허튼 수작을 부리지 말고 역할에 충실하도록.”

 

끝끝내 나를 싸늘하게 바라보고 나가는 레이베리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리제로트.

 

“뭐, 일단 내가 가장 불리하다는 사실은 잘 알겠어.”

 

그런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내 입은 버젓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뻔뻔하다면 뻔뻔하게 멋대로 짓거리는 입은 쉴 줄 몰랐으니까.

 

“어째서 네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몰라도, 레이베리아의 말이 맞는 건 확실해. 하지만 그건 듣고 싶기도 하네. 어째서 나를 살리기 위해 네가 노력을 해야 하는지 말이야. 고작 동성애자의 타이틀에 맞게 소녀의 몸을 원한다면...”

 

“아냐! 그게 아냐...”

 

쉴 줄 몰랐는데 다른 곳에서 소리치는 걸 들으면 나도 모르게 입이 멈춘다. 리제로트는 나를 무슨 수로 1주일 만에 자신의 것으로 예속시키는 가에 대해서, 1초도 남김 없이 치밀하게 생각을 해야 함에도 모자랄 판에, 어딘가 슬퍼 보이는 청안이 나를 내려다보며 작은 입술을 떨기 시작했다.

 

“다, 당신이 살아야...다음 계획을 진행할 수 있으니까.”

 

아직까지 아군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인지, 단순한 이기심에 억지를 부리는 건지 알 방도는 없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상황은 불리하다. 그 전에 내 발목을 채우고 있는 족쇄가 어떤 녀석인지 알아야 하는 게 먼저였는데, 지금쯤이면 붙어야 하는 뼈가 지금까지 안 붙고 있으니, 치유회복속도를 올려주는 에너지가 흩어지고 있는 중인가보다.

 

몸은 욱신거리고,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조만간 기억상실까지 걸려버린다면 최고의 나락을 보게 되리라. 최악의 상황이긴 하지만...설마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사고를 치겠...

 

“마셔. 이걸 마시면 살 수 있어.”

 

독백을 다 끝내지 않았는데, 내 시야에 리제로트의 작은 손과 무언가 담은 병이 끼어들었다. 마시면 살 수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연금술사가 만든 고가의 포션은 아니고, 짙은 검은색의 물이 “날 마시면 지옥의 나락으로 보내주지! 크하하핫!”하며 출렁이고 있었으니까.

 

“이게 뭔데?”

 

“망각의 샘물이야. 이건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어린애도 알고 있지. 기억을 잃게 되면 나의 것으로 교육하고 그 이후에는 당신도 살고, 나도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될 거야. 1주일이라는 시간이 남았어도, 정확하게는 이틀 정도 생각할 시간을 줄게.”

 

1주일이 이틀이 되는 마법을 겪고 앞에 있는 비약을 어찌 처리할지 고민했다. 마신다면 인형확정이고, 마시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먹이겠다는 소리인가? 신파극도 이렇게 막장으로 치닫는 경우가 없었을 텐데.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밥 먹듯이 내리는 걸까.

 

망각의 샘물도 2가지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포션을 만드는 연금술사가 재료를 잘못 넣으면 망각의 샘물이 되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명계에서 뱃사공 앞에 강이 있는데, 그 강 하류에는 망각의 샘이 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그 강 하류까지 도달하기 위해선 무궁무진한 시간이 걸리니, 시공간을 왜곡하는 존재들만 다녀올 수 있는 비밀장소다.

 

그러니 이 물은 90%의 확률로 연금술사가 제작한 포션이고, 모든 기억을 흩어지게 만들어 거대한 공간을 중앙에 만들어내는 경우다. 근데 10%의 확률로 진짜 망각의 샘물이라면 기억이고 뭐고 전부 날아가버린다.

 

복구?

못하지 당연히.

 

여전히 복잡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가, 지금 당장은 아무런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그대로 방에서 나가버렸다. 주변에 인형들이 리제로트가 나가자마자 모두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체들이겠지.

 

“너희도 마신 거야?”

 

말을 걸었다.

대답은 없음.

 

“그렇군. 너희들도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다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대답은 없음.

 

“그래서 리제로트가 너희들에게 이걸 마시라고 강요한 거지?”

 

또 다시 말을 걸었다.

결과적으로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렇군! 모든 것이...해결 될 리가 없잖아...”

 

아무리 몸이 아파도 한숨은 제대로 나왔다.

정신적으로 몰려도 혼잣말은 잘 나왔다.

 

아직까지 완전하게 패배한 것이 아닌 이상, 살아갈 방법은 분명히 있다고 자신한다. 지금도 분명 빠져나갈 구멍이 어딘가 있을 거야.

 

...아니면, 이런 것이 헛된 희망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은 활발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좋아한다.

언제까지나 힘들고, 지치고, 외롭고, 죽고 싶어할지라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무마하고, 웃고, 떠들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긍정적인 사고방식?

그건 그냥 미친 거다.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미 나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해도, 계속 자신을 속여 할 수 있다는 최면을 거는 것뿐.

 

현실은 그렇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결과가 나오고 난 뒤에 그런 일을 해도 바뀌지 않는다.

 

결국 그 뒤에 시간이 흘러야지 살았는가 죽었는가가 나오겠지.

문뜩 모든 어둠을 담은 듯한 액체를 보았다. 저게 생명수가 아니더라도 저걸 먹음으로 레이베리아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없겠지. 그 이전에 이틀의 시간을 줬으니 시간이 지나도 강제로 먹게 될 사약이다.

 

마시는 척 하면서 연기를 할까?

아니. 이곳은 인형의 방이기에 나를 감시하는 사람만 5명이 넘어간다.

 

족쇄를 풀을 방법을 찾을까?

그것도 기각. 레이베리아의 사술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니 억지로 풀다간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몰라.

 

리제로트를 설득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불가능하리라 본다.

 

커튼은 쳐져 있어서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레이베리아가 각개격파를 한다는 선언아래에 잡화점 멤버 걱정을 하는 시간을 좀 갖자. 어차피 내 걱정만 한들 바로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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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금금 야근 에디션 중입니다.

틈틈히 쓸게요...;

[정기적인 연재는 못할거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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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8

스케베라스산과 마주하는 빌구와 생리아 두 갑은 탁월한 전략적 요충지까지는 아니어도 몰타의 입구를 지키는 요새로서의 장점은 갖춘 곳이었다. 두 갑 사이는 헤엄쳐 건너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로 유사시 부교를 놓아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킬 수 있었고 두 갑의 바다 쪽 끝 지점을 쇠사슬로 봉쇄해 갤리선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도 있었다. 육지로 연결되는 성채와 생리아 서쪽 연안을 잘 방어한다면 오스만 대군도 쉽게 몰타를 공략하지는 못할 터였다.
탕!탕!탕!
빌구는 성채를 방비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땀이 비가 오듯 쏟아지는 한 낮에도 인부들은 돌을 나르느라 분주했다. 발레트는 크레누와 성채 지도를 보며 취약한 부분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카스티야 구역의 성벽이 미흡해 보입니다. 오스만이 허약한 부분을 알아채 포격을 계속 가한다면 성벽이 뚫리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펼쳐진 지도 위의 한 지점을 발레트가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빌구의 성채를 둘러보다 오래된 돌벽 사이로 작은 틈을 발견했다. 손바닥으로 벽을 치자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빌구의 성벽도 임디나 만큼이나 견고하지 못했다. 육지와 연결되는 이 성벽은 더 두껍게 보수되어야 했다.
"알겠소, 인부들을 몇 명 보내리다. 그런데 작업을 진행할 인력이 많이 부족하오. 날씨는 점점 더워지는데 현재 인원으로 기한까지 일을 마무리하는 것은 무리요."
크레누는 지도에 고개를 파묻은 채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보고 있는 발레트를 향해 말했다. 두 사람은 며칠 전부터 시작된 보수 공사로 빌구의 성벽 위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발레트는 고개를 들어 크레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상부에 보고할 테니 크레누씨가 필요한 인력을 보충해 주세요."
태양은 그들의 머리 위로 사정없이 내리쬐었고 저멀리 북아프리카의 뜨거운 바람이 성벽 위로 지치지 않고 불어오고 있었다. 발레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더위를 식혀줄 포도주가 간절하게 생각났다.
"나디아, 무슨 일이냐?"
크레누가 성벽을 올라오는 나디아를 반기며 말했다. 나디아는 큰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점심 식사 하셔야죠. 모두 먹을 수 있도록 넉넉히 챙겨 왔어요."
나디아의 깊고 오묘한 초록 눈동자는 햇살을 받아 더욱 반짝거렸다. 어두운 갈색 머리는 풍성하게 물결 쳐 흐르고 살짝 그을린 피부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당찬 면모를 보여주는 듯 했다.
"같이 드시겠어요?"
나디아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발레트에게 말을 건넸다.
"안그래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고마워요, 나디아."
발레트는 부드러운 말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디아는 발레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번졌다.
"자, 이쪽으로 와서 점심 먹지."
크레누가 인부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둥글게 앉아 나디아가 가져온 빵과 양젖으로 만든 치즈, 말린 과일, 포도주를 먹고 마셨다. 아침부터 계속된 보수 공사에 인부들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덮혀 있었지만 담소를 나누는 그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넘쳤다. 고단한 일상과 달리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여유로웠다.
8년간의 긴 방랑에서 발레트를 이끌었던 것은 신념이었다. 신께 한 맹세, 기사로서의 명예와 대의. 아니 어쩌면 신념이라 생각했지만 로도스 섬 공방전의 패배로 오스만을 향한 복수심이 그를 여기까지 오게 했는지도 몰랐다. 몰타의 성벽 위에서 소박한 점심을 먹으며 발레트는 오랜만에 그를 사로잡고 있는 상념에서 벗어나 현재를 온전히 즐겼다. 누군가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누군가는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로메가스는 인부들 사이에 앉아 그들과 어울리며 포도주를 금새 비웠다.
"몰타의 포도주는 신이 주신 선물이죠."
어느새 다가온 나디아가 포도주를 가득 채운 잔을 건넸다.
"포도주 한 모금에 삶은 더욱 풍요로워져요."
발레트는 잔을 받아 들어 포도주를 들이킨 후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굉장히 시적인 표현이네요. 삶의 풍요로움이라.."
나디아는 손에 턱을 괸 채 두 눈을 깜빡거리며 발레트의 말을 읊조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경계심 가득한 싸늘한 태도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은 수평선 너머 끝없이 펼쳐진 지중해로 가 있었다.
"여기서는 스케베라스산이 한눈에 보여요. 이렇게나 평온한데... 죽음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게 믿겨지나요? 절대로 도망칠 수 없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스케베라스산을 바라보았다. 금빛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스케베라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웅장했다. 인간이 만든 어떤 건축물보다도 장엄했으며 몇천 년동안 깊고 푸른 지중해와 맞서서 살아간 몰타인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척박한 환경과 잦은 외세의 침략에도 스케베라스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무수한 사람들이 이곳을 짓밟았지만 스케베라스는 변함없이 지중해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발레트는 쓸쓸함이 서려있는 나디아의 말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전 고조 출신이에요. 몰타 위쪽에 있는 작은 섬이죠. 15살에 몰타로 왔어요. 부모, 형제없이 거리를 떠돌던 절 아저씨가 딸같이 보살펴 주셨죠. 정말 좋은 분이에요. 말투는 좀 거칠지만."
여전히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디아는 침묵을 깼다. 발레트는 나디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툭툭 내뱉는 말이 이젠 정감있게 들려요. 인부들을 많이 생각하세요. 자신보다 더. 저기 봐요, 나디아."
한 뼘 떨어진 곳에서 인부들에게 크게 소리치고 있는 크레누를 보며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찰나의 순간 서로의 눈길은 마주쳤고 나디아의 초록 눈동자가 발레트의 눈속으로 들어왔다. 잠시 비췄던 슬픈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디아의 웃는 모습을 보자 발레트는 왠지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다.
"아까 성벽으로 오는 길에 보키아의 시종을 봤어요. 아저씨가 임디나 성채를 보수한 적이 있어서 시종 얼굴을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이 있어요."
나디아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녀의 초록 눈은 심각한 빛을 띄었다.
"이상한 것이요?"
발레트는 갑자기 변한 그녀의 눈빛을 주시하며 물었다.
"네, 그 시종이 어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부가 조금... 그는 몰타인 같지가 않았어요.
이곳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몰타인이 아니에요. 틀림없어요."
나디아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몰타로 이주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럴수도 있겠지만.. 허리춤에 찬 칼을 봤어요.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이곳에서는 쓰지 않는 칼이죠."
"칼을 차고 있었다.. 초승달 모양의.."
발레트는 나디아의 말을 되뇌었다.
"네, 잘못 봤을리가 없어요. 그건 절대 잊을 수 없는 거니까. 어부 옷차림을 한 외지인과 귀족의 시종이 뒷골목에서 만날 일이 있을까요?"
나디아는 발레트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눈을 바로 보았다.
"어부의 얼굴을 보았습니까?"
"옆모습만요. 중간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어요. 지나갈 때 시종과 눈이 마주쳤는데 뭐랄까... 아주 차가웠어요. 그 느낌이란..."
나디아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두 손으로 팔을 감쌌다. 그녀의 표정에서 언뜻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발레트는 나디아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승달 모양의 칼이라면 아랍인이나 투르­­크족이 쓰는 것인데.. 이슬람 노예 출신인가? 그렇다해도 어부가 그런 칼을 차고 있는 건 이상한데..'
"알려줘서 고마워요, 나디아."
"이상한 것이 맞죠?"
나디아는 조심스럽지만 확신에 찬 말투로 물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본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요. 크레누씨에게도."
발레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저도 그정도는 알아요."
나디아는 스케베라스산으로 눈을 돌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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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0 - 5

557

 

 

 

내 생에 최고의 바보 같은 일이라면 수많은 희생을 내면서까지, 아쿠아리움을 초토화시킨 일이라고 해야 하나? 거대한 해일은 피아구별 없이 모든 이들을 집어 삼켰고, 잠시나마 자유를 느낀 해양생물들은 육지를 뻗어나갔다. 아마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아쿠아리움이기에, 그 안에 들어있는 물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갔을 무렵. 보호막으로 감싸는 것과 동시에 사슬 검 중에 하나인‘뱀 조종자’를 사방에 묶어서 몸을 고정시켰으니, 충격과 휩쓸려나가는 건 어찌어찌 버텼어도, 숨을 가능한 오래 참아야 했고 옷이 젖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음부턴 보호막도 방수가 되는 걸로 사용해야 하나...”

 

이끼가 물에 젖으면 쳐지던데 지금 내 꼴도 그러겠지. 어차피 인형으로 바뀌어버린 사람인 만큼, 리제로트를 보호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고, 근처에 어떠한 인기척도 없으니 안심하려던 찰나에...

 

-챙강!

 

“하긴, 네가 남아있었지.”

 

천장에서 급습한 월터가 나를 바라보았다. 월터는 리제로트의 인형이지만 영혼이 있는 존재. 유일하게 허락한 감정은 분명이 있을 터였다. 허공에 흐느적거리는 뱀 그림자를 다시 휘두르며, 제 8의 머리까지 재정비를 하며 위치를 맞췄다.

 

그전에 머리수가 왜 늘어난 거지?

 

“같이 떠내려갔으니 외각을 찾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발상의 전환은 당신이 한 수 위인 건가?”

 

월터의 창백한 푸른 입술은 굳게 입에만 다물 뿐. 서서히 손을 올려 자세를 잡는 모습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뱀 조종자를 움직였다.

 

-촤르르르르륵! 카캉! 카가각!

 

월터의 주먹에 건틀릿 하나가 부딪치자 불꽃이 눈 앞에서 튀어 올랐고, 빠른 연계를 통해 나를 보호하던 사슬을 하나하나 끊으려고 하고 있을 무렵이다.

 

“아무래도 자신의 주인을 위험에 빠뜨린 것 때문에 화난 거 같네? 인형인 주제에 주먹에서 분노와 살기가 서려있어!”

 

자의식이 파괴된 인형은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살기도 내뿜지 않기 때문에 방어하는 입장에선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월터는 달랐다. 굳게 다문 입에 비해 눈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주인을 위험에 빠뜨리다니 용서 못해!’라고 울부짖었다. 인간은 자신에게 있어서 언제나 흑백논리를 벗어날 수 없다. 나에게 있어서 리제로트는 흑의 존재라고 한들, 월터의 입장에서 리제로트는 백의 존재일수도 있다.

 

그러기에 싸움은 더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 주변에 보호해줄 사람이 없으니, 시간을 끌어야만 하는 입장인데, 이곳에서 사고가 터지기라도 한다면 분명 그 녀석이 온다. 날카로운 발차기를 숙여서 피하는 동안, 공중에서 비정상적으로 몸을 꺾은 월터는 다른 발로 내려찍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2연격을 하는 것도 모자라, 내가 몸을 비틀어서 옆으로 이동하니, 그 상태로 3연격으로 옆차기를 감행했다.

 

뱀 조종자로 막아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공격과 함부로 속박하려고 들면, 오히려 엉키게 되는 위치에서 끊임없이 송곳처럼 찌르며 들어왔다. 이때만큼은 평화를 원하는 온화한 성격의 나라도, 전투로 인한 고양감이 온 몸에 자리잡아 어쩔 수 없이.

 

“확실히 매우 우수하군! 리제로트의 인형이여! 그렇다고 한들 너는 아직까지 멀었다!”

 

아무리 나라도 산전수전은 다 겪고 지내왔다. 설령 본 모습이 아닌 이런 연약한 모습으로 싸울지라도, 손쉽게 제압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기는커녕.

 

-휘이이이이이잉!

 

방금 전의 환도가 기괴한 형태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검날에 붙은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며 힘차게 회전하고 있는 모습. 손으로 통해 온몸으로 진동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야 말로 이런 상황에 가장 필요한 물건.

 

“자. 2페이즈다. 최선을 다해 망가지지 말라고?”

 

발을 박차며 튀어 오르면서도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좁혀온 거리에서 긴 다리를 뻗어 나를 제지할 수 있지만, 섣부르게 그런 판단을 하지 않고 거리를 벌리기 바빴다.

 

-카가가가가가각!

 

방금 전에 있어야 하던 월터의 자리에 땅이 깊숙하게 파여있었고, 돌아가는 톱날로 인해 땅이 불규칙하게 긁히고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휘이잉! 치이이익!

 

건틀릿을 단숨에 갈아버릴 듯한 환도를 휘두르며 힘겨루기를 했지만,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나를 마주하고도, 월터의 건틀릿이 서서히 깨져나가며 밀리는 경향을 보였다. 힘이 부족하면 다른 요인으로 내 힘을 더하면 된다. 나를 보조해줄 수 있는 걸로 보강을 하게 되면, 여린 소녀의 신체 같은 경우는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되는 것이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비록 이게 본 모습은 아닐지라도, 네가 상대하는 것은 여린 소녀와 다름이 없지. 그런데 리제로트를 지키는 최고의 인형이라는 자가 밀리는 것을 보아, 리제로트 또한 그리 대단한 인물은 아니군!”

 

말투가 바뀐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것도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수단일 테니까. 도발에 걸린 인형이라는 존재가 있을까? 지금 내 앞에 하나가 존재했다. 오른손에 거대한 마나들이 뭉치기 시작했을 때. 나 또한 검에 내 에너지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 일격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일격필살의 싸움에서는 언제나 승리를 거머쥐어왔지만, 항상 하는 일이라도 긴장되고 설레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월터! 그만둬!”

 

아무도 없는 아쿠아리움에 버젓이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목소리. 그것이 월터의 순간을 방심하게 만들었다만...월터는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리제로트의 명령을 무시하고, 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나도 물론 상쇄를 하기 위해 휘두를 뿐. 본능적으로 알게 된 거겠지. 앞으로 날 살려두면 리제로트에게 무슨 해를 끼칠지 모르는 위험분자라는 사실을.

 

“안 돼에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언제나 이런 후폭풍은 싫었다. 나에게 있어선 늘 일어났던 일이고 가장 안전하다던 잡화점 내부에서도 계속 일어났으니. 오랫동안 휩쓸려보면 요령이 생겨서 피해를 거의 없앨 수 있지만 월터의 경우에는 어떨까?

 

폭발에 휩쓸려버린 리제로트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던졌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로 만들어졌는지 사지가 멀쩡하고 흙먼지만 뒤집었을 뿐. 그래도 엉망이 된 정장으로 보아.

 

“인형치고는 매우 튼튼하네.”

 

살색으로 입혀진 살덩이들을 날렸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무런 데미지도 없었다. 그럼 피부 자체가 단단한 금속으로 되어있는 걸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유연하게 움직이는 거라면...

 

아니지. 지금은 나를 마주하고 있는 리제로트를 봐야 할 때인가?

 

“아무래도 제가 터무니 없는 인간을 제 인형으로 삼으려고 했나 보네요. 카린. 당신이야 말로 어릿광대가 말한 최고의 적이었어요.”

 

“카일이라고 부르지 않은 게 기이하네.”

 

“그야 당신의 모습은 카일과는 전혀 다르니까요. 겉모습이 아니에요. 지금의 당신은 안까지 뒤틀려버린 다른 자아에 불과하죠.”

 

“사람은 양면성이 모두 공존한다고 해. 그도 그럴 것이 흑이 있으면 백이 있고, 음이 있으면 양이 있는 거지. 평화와 평온을 바라는 카일이 있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바라는 카린일까?”

 

아무리 양면성이 존재한다고 한들 인격이 한 순간에 뒤바뀌어 기억을 잃는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범위 내에서 바뀌는 거니까. 언제나 특정한 계기로 사람이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평화와 평온을 바라는 주제에, 위험천만한 곳에 목을 잘도 들이민다고 했었으니까. 그렇다면 내 본 모습은 과언 어떤 것일까? 그거야 당연히...

 

“아니. 하나를 정하는 것이 아냐. 모두가 나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것도. 한 순간에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는 가운데에서도, 잔혹하게 웃으며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엘티노스 잡화점의 주인이라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나’이기에 가능한 거지!”

 

잡화점 주인이 되기도 전에 나는 항상 위험에 뛰어들었다. B급 용병시절에서도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지만, 하던 일은 전부 불법에 관련된 것들. 마약도 옮겨보고 내분을 일으키기 위해 잠입도 해보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사람도 죽여봤다. 그때도 나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일을 끝냈다는 성취감에 웃고 있었겠지.

 

나는 절대로 착한 사람이 아니다.

최근 들어 그 사실을 좀 까먹은 듯 하지만.

 

이번엔 월터와 격전을 벌이면서 그걸 다시 깨달았다.

 

아쿠아리움을 벗어나지 못한 생물들은 이곳에서 말라 죽어갔다. 이것 또한 나의 이기적인 행각에 벌어진 대참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오직 나는 나만 생각해서 희생을 치렀다.

 

“귀엽다거나 예쁘다고 함부로 손을 댄다면, 그에 합당한 벌은 확실히 있어야겠지. 하지만 리제로트? 우리 둘의 결투는 완전하게 뒤집어져서 깨졌으니, 나는 너에게 호감을 보여도 인형으로 만들지 아니하며, 너 또한 나의 호감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유랑극단에 나와 목숨을 끊지 않아도 돼. 그거라면 우리 둘은 확실히 더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지.”

 

“처음부터 당신은 이걸 노렸군요. 제 제안에 승낙을 했으면서도 제가 이런 사술을 부려올 것이라고 이미 계산하고 있었어요.”

 

나를 바라본 리제로트가 탐욕에 눈이 물들었을 무렵. 그것이 기억에 남아 잡화점에서 레시아에게 상의한 적이 있었다.

 

[만약 레시아가 저를 너무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라면 어쩌실 건가요?]

 

[주인을 취하기 위해서는 극적인 상황으로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최고지.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안전이 보장받고 있는 삶을 살고 있으나, 갑작스러운 공격에 매우 취약하여 구해주는 사람에겐 전적으로 신뢰를 가지게 된다. 주인 또한 그런 귀여운 모습으로 전투력이 어디까지 인지 가늠이 안 잡히지만, 보호욕구가 솟구치는 것은 당연지사. 필히 주인을 지켜야 하는 대상으로 볼 것이니라.]

 

[그러면 자작극을 벌여서라도 저에게 호감을 얻으려고 하겠네요?]

 

[주인을 속이려면 꽤 치밀한 자작극이 필요하겠지만, 그렇군. 우선 짐이라면 짐에게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주인과 같이 빠져나가면서 기꺼이 그 암살자를 격퇴한다면, 주인과 같이 다녀서 부적절한 패널티를 짊어짐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그 암살자를 격퇴했다는 사실에 주인은 크게 감동을 받으리라 본다. 사고가 터진다면 그 암살자가 주인을 인질로 잡고 인질극을 벌였을 때. 성공적으로 퇴치하는 것이라면 위험도가 매우 높지만, 그만큼 얻는 것이 더 많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레시아도 몰랐던 내 전투력으로 인해, 암살자는 나에게 부셔져 리제로트의 계획이 완벽하게 꼬여버렸다.

 

[리제로트가 그렇게 나올 것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짐은 운이 좋게도 인간보다는 오래 살아온 마왕이니라. 그 어떤 삶을 살아와도 인간만큼이나 처절하게 살았던 나날이 있지. 이미 한번 잃어서 소중한 것을 알았던 날도 반복되었으리라. 그런데 한낱 그런 계집의 생각을 읽고 꿰뚫지 못한다면, 그게 어찌 마왕이겠는가?]

 

맨 처음에는 레시아의 말을 의심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레시아의 말을 믿었고 그 결과가 내 눈앞에 벌어졌다. 역시나, 나에게는 강한 아군이 함께했으니 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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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죄송합니다.

인터넷이 복병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라도 회사를 통해서 올릴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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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0 - 4

556

 

 

 

그나마 안개가 낀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는 기분이다. 전투를 한바탕 해서 그런지 몰라도 평소의 나로 돌아온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지금까지 리제로트의 초능력에 영향이 좀 갔으리라 생각한다. 경위는 맨 처음 저녁 만찬에서 리제로트의 눈을 보았던 그날, 리제로트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면 그 독은 빠르게 침투해서 내 정신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으나, 애석하게도 나를 구해주려고 했던 계획이 역으로 내가 리제로트를 구해줬고, 최종적으로 월터가 암살자를 박살내야 했지만, 내가 박살을 내면서 리제로트의 계획이 꼬여버렸다.

 

특정 이벤트를 지나면 사람의 자의식을 파괴하게 되는데, 그거야 말로 리제로트에게 호감을 가게 된 순간이 아닐까? 어차피 리제로트는 미소녀에 돈도 많고, 똑똑하며, 붙임성도 좋아서 리제로트의 눈을 보면 단숨에 넘어가게 되어있다. 그럼 어린 달 토끼들은 어떻게 꼬인 걸까?

 

당연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관리자를 찾아줄 때까지, 지켜준다고 하고 선심을 쓰면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결국 인간형이란 인간형은 다 꼬여버렸으니, 리제로트를 자연스레 따르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인형이 되는 달 토끼들을 볼 수 있다.

 

사람이 구해지는 그 순간엔 그 사람을 믿고 따르게 되는데, 이번 함정은 제대로 잘 넘어가게 된 셈이다. 이런 모습으로 솔선수범해서 먼저 튀어나가는 성격인 줄은 몰랐다는 거겠지.

 

나는 리제로트로부터 등을 돌려 암살자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눈이 없고 심지어 말을 하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 파손되어있는 물품을 발견했다. 양손으로 주워담아 붙잡고 천천히 고치기 시작하자. 가루가 되어있던 마법공학 물품은 마스크 중에서 입에 끼기 좋은 구조였다.

 

“마나를 불어넣으면 해당사항에 맞춰서 소리를 내주는 장치인가...”

 

아까 분명 말을 했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게, 꺼림칙할 정도로 괴상한 목소리가 들렸으니, 피를 흘리고 쓰러진 암살자의 얼굴은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뭉개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 암살자는 소울칼리버에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절대적으로 평범한 사람의 단계는 아니었다.

 

“호문쿨루스 계획. 그렇군. 너도 호문쿨루스를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카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놨고.”

 

절대로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과 호문쿨루스의 차이점이라면 피를 흘리긴 하지만, 죽는 순간에는 곧바로 풍화되어 사라지는 게 호문쿨루스다. 내가 검으로 암살자의 목을 잘라내자 곧 먼지처럼 바람을 타고 흩어지니, 이런 암살자를 알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리제로트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 대강 알 것만 같았다.

 

“제가 호문쿨루스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들, 그 자가 호문쿨루스 인 것은 어떻게 알았죠? 죽이지 않고서는 모를 텐데?”

 

“사람이었으면 나와 몇 번 마주치고 도망갔을 테니까. 만약 네가 인형을 만들어 놓은 상태의 인간이었다면 곧바로 나에게 역습을 맞아 죽었을 거고, 기괴한 형태로 허리를 꺾어서 피한다거나, 이상한 움직임으로 맨 처음에 역습하지도 않았을 거야. 호문쿨루스는 인간의 결점을 어느 정도 해소한 상태니까. 고무처럼 매우 유연하고 값이 비싸겠지.”

 

“흐응. 제 능력에서 처음으로 벗어나는 인간이 되셨군요?”

 

“싸움만 시키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당하면서 살뻔했어.”

 

인간은 극적인 상황일 때 혹은 한계가 부딪쳤을 때야 말로, 포기하지 않는 한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오늘 기적적으로 내가 그것을 실행했고 성공을 했으니, 리제로트의 인형이 되는 이기적인 사례는 당분간 힘들 것이라 본다.

 

생각지도 못하게 승전보를 2번 울리는 쾌거를 마음속에 간직한 체, 한숨을 내쉬며 다 포기한듯한 리제로트의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질문은 나를 향해 뻗어 나아갔다.

 

“그러면 이제 데이트는...”

 

“아니. 데이트는 진행해야지.”

 

뜬금없이 목소리를 높여 “네?”라고 놀라는 리제로트.

 

“이건 이거고 노는 건 노는 거야. 어차피 네가 준비한 깜짝 이벤트는 저 암살자 하나겠지. 그보다 흥미로운 곳이 생겨서 그쪽으로 가볼까 해. 네가 정 가기 싫다면 나 혼자 가면 되는 거고.”

 

환도는 내 손에 창조되고 세계를 위해 환원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화사한 빛으로 내 주변에 퍼져나가는 이 에너지들은 다른 이들의 마나가 되고, 마기가 되며, 신성력으로 자리잡게 되겠지.

 

하늘로 올려다보았을 무렵, 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급하게 붙잡느라 오른손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하늘도 못 보게 하는 건가. 젠장...빨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 소녀로 살아가려니 신경 써야 할 점이 한 두 번이 아니잖아.

 

“큭...쿠쿳...”

 

옆에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아뇨...저의 의중을 대강 간파한 것치곤 담력이 꽤 크시네요. 언제 인형이 될지도 모르는데도 저와 놀아주시겠다니. 보통 적 앞에서도 잘 놀아주고 그런가요?”

 

“아니. 평상시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긴 하거든. 아쿠아리움이라던가, 바다인지 뭔지도 가보고 싶고. 내 평생 살아가면서 바닷가에 놀러 가는 것이 소원이었거든. 그리고 선언하는데 나는 너의 인형이 될 마음은 전혀 없어.”

 

그 놈의 바다가 뭔지 몰라서 잡화점 멤버가 날 바보취급 한 적은 없지 않아 있긴 했다. 하지만 겨울 바다는 볼 것이 없었는지 리제로트는 아쿠아리움에 가자는 말을 꺼냈다. 암살자로 인한 자작극에 대해 불문으로 취하는 나의 태도에 의구심이 들긴 하겠지. 리제로트가 만약 지게 되면 유랑극단에서 나오고, 자신의 목숨도 끊는다고 했었다. 다만, 그 말을 지킬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으나, 리제로트가 엉망으로 만든 오늘을 나는 부담 없이 즐기기로 했으니 상관 없겠지.

 

***

 

아쿠아리움에는 바다에 사는 동물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물은 파란색으로 빛이 나는 가운데 돌고래와 같이 떠돌아다니는 다이버가 손을 흔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나에 반응을 한 건지 주변에 있던 물고기들이 내 주변에 몰리기 시작했는데, 리제로트는 나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바라보는 어른의 미소를...

 

“잠깐만. 왜 네가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야?”

 

“아뇨. 저도 모르게 영락없이 잘 뛰어 노는 여자아이를 보는 것 같아서요.”

 

화사하게 짓고 있는 미소에 영락없이 태클을 걸어도, 솔직한 대답으로 뻗어 나오는 리제로트의 말. 그런 리제로트 말에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면 너는 뒤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잘 따르고 있는 거야?”

 

“이건 불가항력이에요. 저의 초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제 미모와 바른 품행이 그들을 사로잡는걸요?”

 

“미모는 그렇다고 쳐도 바른 품행은 다 죽은 거야? 양심의 일말이라도 있으면 그런 말을 내뱉는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태클을 거나 말거나 리제로트 주변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리제로트의 초능력과는 무관하게 월터와 리제로트를 보며 소근거리는 사람들. 내용은 다 들춰봐야 알겠지만 대부분 긍정적인 뒷담화에 가깝다. 내 경우에는 그나마 리제로트와 월터에게 가려진 터라,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지만...

 

-콩! 콩!

 

아무래도 해상동물들에겐 많은 인기도를 누리고 있는지, 상어 한 마리가 벽에 살짝 살짝 부딪치면서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만일 이 상어가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여기를 봐라 샤아!”라고 말하기나 할까? 고리타분한 생각을 벗어 던지고 전장을 다시 보도록 하자.

 

리제로트의 자작극에 선방은 제대로 했다.

리제로트의 능력에 당한 상태로 호감을 주지 않고, 나의 신념에 대해 관철을 했으니 능력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 하지만 이게 두 번, 세 번해서 걸릴지도 모르고, 어쩌면 잠복기가 있을지도 모르며, 혹은 상대가 거짓정보로 나를 안심시키는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

 

아쿠아리움에 있는 동물들이 불쌍하기만 했다. 누군가에게 갇혀서 살아가야 한다는 슬픔. 이 곳이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결국 바다보다 넓지 못하겠지.

 

“이 안에 있는 애들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리제로트에게 물어봤지만 날아오는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이미 관점의 차이부터 사고 방식까지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면서 겉으로는 놀고 있는 모습.

 

그런 격식에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이번 결투는 없던 걸로 할까?”

 

이제 재협상의 시작.

리제로트도 자신에게 유리할 줄만 알았던 게임이 이렇게 뒤집어질 줄은 몰랐으리라. 그러니 어떤 어필도 하지 않고 가만히 따라다니며 말해준 것뿐이겠지. 재협상을 해서 없던 걸로 치면 그나마 더 누그러진 분위기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아뇨. 계속 진행해요.”

라고 말하게 될

 

“그러죠. 불편하기도 했고 제가 일부러 망쳐놓은 것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그 바보 같은 결투 때문에 스킨십도 제대로 못하고 있고. 이번 내기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요즘 인생사는 제대로 되어먹는 일이 없다니까. 억지로 스킨십을 하지 말라고 거리를 떨어뜨려 다니긴 했었는데, 겨우 그거 하나 때문에 재협상을 할 여지가 있다는 거였나?

 

“그나마 잡화점의 주인을 보고 깨달았어요. 이 사람은 절대로 넘어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도 있고, 어째서 이런 사람을 유랑극단에서 제 1위험 인물로 지정했는지 이유를 알기도 했고, 게다가 어릿광대가 제가 자고 있는 새벽에 난리를 치며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이유도 말이죠.”

 

리제로트의 얼굴 빛이 체념으로 물들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긴 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어린애들은 다른 건가?

 

“방금 전에 저 아이들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드냐고 물어봤죠? 당연히 잘 지내고 있을 거에요. 아무런 의사도 없이 붙잡혀와서 먹을 것은 먹을 대로 먹고, 사람들의 괴성과 무례한 행동으로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도 잘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나마 적응을 해서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쯤.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전 생각을 해봤어요. 어떻게 하면 카일 씨를 망가뜨리고 새로운 인형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불길한 분위기가 스쳐 지나갔다.

 

“아쿠아리움에서 던진 질문. 당연히 카일 씨는 저의 답과 반대겠죠.”

 

매료가 되었다고 생각했더니 이미 초능력에 당해 인형이 되어버린 건가?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설마 반사하는 물체들을 통해서? 내 머리가 분석을 하는 동안, 리제로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아갔다.

 

“그러면, 이런 바보 같은 게임은 뒤집어버리고 제 멋대로 하면 되는 거였어요. 게다가 카일 씨가 제안한 것처럼 이 결투는 없던 걸로 하죠. 아니, 그 모습으로는 카린 양이라고 불러야 더 정확하겠죠?”

 

도발하며 웃는 리제로트의 눈엔 광기가 서려있었다. 가지지 못할 거라면 부셔버리겠다는 결의가 눈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팔짱을 끼면서 유리벽에 등을 기댔다.

 

“당신의 전투능력은 잘 봐왔지만, 좁은 구역에서 이 많은 사람들을 모두 뿌리칠 수 있을까요?”

 

“아니. 못하지.”

 

아무리 나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제압하려면, 레시아나 시나가 옆에 따라 붙어야 했다. 저 사람들을 죽이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얼떨결에 휩쓸려버린 민간인을 죽일 정도로 무자비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경고는 하겠어. 리제로트. 그 사람들을 풀어줘.”

 

“경고라고요? 지금 당신이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가 안 가시나요?”

 

“아니. 알고 있지. 지금 보이는 사람만 해도 족히 100명 이상은 되는데, 여태까지 진입하면서 반사된 물체들로 사람들과 마주했다면 300명도 더 넘어가리라 생각해. 다음을 위한 함정으로 나를 몰아갔다고 생각을 했겠지만 오산이야.”

 

일부러 아쿠아리움을 지정한 이유는 너의 생각을 물어보기 위함이 아니니까.

너의 생각은 아무래도 좋았다.

 

“결투도 다 뒤집어졌고 내가 얻을 것은 다 얻었지. 어쩌다 보니 이렇게까지 왔지만, 도주경로는 내가 원하던 그대로야.”

 

 

내 등 뒤에 유리가 서서히 금이 가면서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 뒤로 거대한 수압이 약해진 부분을 그대로 박살내면서, 거대한 해일이 나와 정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그대로 덮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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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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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0 - 3

555

 

 

 

얼마나 뛰었는지 기억조차 나지는 않는데, 멈춘 이유라면 명확하게 리제로트의 체력에 한계 때문이다. 나야 어떤 모습이든지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운동을 빼놓지 않았지만, 리제로트는 인형을 이용한 안정된 삶을 살아서 그런지, 자기 관리가 허술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체력적인 면에서는 매우 약했다.

 

“제발...윽! 그만 좀...! 뛰라고요!”

 

비상시에 도망을 갈 때는 월터가 공주님 안기로 리제로트를 옮겼는지 몰라도, 지금은 내가 옆에서 공주님 안기로 도망치지는 못하니까, 리제로트의 손목을 붙잡고 무작정 뛰었는데, 일부러 2분정도 더 뛰고 난 뒤에 리제로트의 손목을 풀어주자, 땅에 절을 하고 있는 금발의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당신은...어째서...우윽! 멀쩡한 거에요...!”

 

“운동을 하니까.”

 

리제로트의 삶에 있어서 인생에 가장 싫은 순간이 있다면, 그 중 하나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때까지 달렸다는 것이 될까? 사람이 오래 달릴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다리보단 폐활량 때문이다. 가슴속에서 어마어마한 열과 숨막히는 기분이 중첩으로 엉망으로 만들어서, 뇌에서는 제발 그만 좀 달리고 숨을 고르자고 협상을 내놓는다.

 

“대답이 안 되잖아요!”

 

“너도 운동하던가...”

 

지구력을 늘리기 위해선 운동을 하며 오래 달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꾸준하게 달려야만 1초정도 늘어난다면 매우 크게 늘어나는 거겠지.

 

“당신은 정말 막무가내군요. 도망치는 것은 좋지만 제 손목을 무작정끌어서 아프잖아요! 뭐, 그래도 절 구해줬으니 보답은 제대로 해드리죠. 저에게 호감 갔던 건 한번 무효로 처리해드릴까요?”

 

“아니. 나는 너에게 호감이 가서 구해준 게 아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 받으니까 그 원인을 잠깐 외각으로 이동시킨 거지. 그리고 난 너에게 단 한번도 호감간 적 없어.”

 

사람을 구하는 것에 있어서 호감이고 나발이고 전혀 없다. 순간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초적인 도덕관념. 그거 하나만으로도 관대한 것일뿐더러. 말 그대로 만약 리제로트를 그 장소에서 빼내지 않았다면, 사람이 많고 복합적인 그 건물에 부수적인 피해와 인명피해는 덤으로 가져가야 하는 셈이니까.

 

결국 보는 눈이 너무 많아져서 사건이 너무 커지게 된다.

그런 사건에 덩달아 나까지 휘말리고 싶은 경우는 죽어도 없기 때문에, 세간의 눈에는 리제로트와 관련이 있는 테러활동이라고 적혀야 한다.

 

“저는 분명 무의식적으로 구해주실 때. 호감이 갔다고 생각을 했지만, 단순하게 생각을 해보면 처음 보던 남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그 사람이 쓰러지면, 무심결에 도와주고 싶고 행동이 우선이라면 도와주게 된다는 거죠?”

 

“이해는 빠르네.”

 

그러니 이건 호감의 문제가 아니니까 넘어간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뭐야? 스토커? 혹시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다른 남자와 같이 다니니까 앙심을 품고 이런 일을 저지르는 걸까나?”

 

비아냥거리는 태도는 일부러 보이지 않았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 고의로 되지도 않는 소리를 했다.

 

“스토커가 만약 붙었다면 월터에게 찢겨나갔겠죠. 저래 보여도 꽤 우수한 인형이니까요.”

 

“인형?”

 

“네. 과거 인형의 신이라고 불리는 사브누아 베리타네시아 님은 비어버린 판도라의 상자 안에 연인의 영혼을 담아, 인형의 원동력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죠. 당연히 저 또한 비어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얻어 월터를 구속하고 있는 것뿐이랍니다. 비록 립스틱을 칠해줘야 간단한 대화를 입 밖으로 열지 못하는 인형이지만, 저는 그를 매우 신뢰하고 있어요.”

 

“그래서 누구의 영혼이지?”

 

“소녀의 비밀은 많아야 좋답니다? 물론, 당신이 여리고 귀여운 소녀의 모습 그대로 제 인형이 되어드린다면 그 비밀을 이야기 해드리죠.”

 

“이야기 하기 싫으면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해.”

 

누구의 영혼이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꽤 친애하던 사람의 영혼인 것처럼 보였다. 리제로트는 몇몇 사람들에게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지만, 혹시 월터에 지닌 영혼이 남자이기에, 다른 남자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거라면, 필히 가슴 아픈 과거를 지녔겠지. 약간은 슬픈듯한 눈빛에서 원래대로 자신만만하게 돌아오기까진 0.3초보다 더 짧은 시간이 걸렸다.

 

“혹시 불쌍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저걸 돌려 말하자면 호감이 가냐고 물어보는 건데...

 

“아니.”

 

당연히 아니다.

지금은 리제로트의 장난으로 카렌이 혼수상태 비슷한 거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절대적인 적의는 확실하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하루가 지나려면 시간은 많이 남았다. 그 전에, 연장까지 요청을 했으니 내일 새벽까지라고 봐야 하지만...

 

주변에 살기가 짙게 물들이자 내 몸은 자연스레 반응을 했다.

 

“너의 그 경호원이 그리 유능하지 않나 보네.”

 

“네? 그게 무슨 소리죠?”

 

리제로트가 전투에 취약하기에 월터라는 방패의 인형을 옆에 두고 있다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황금빛의 마탄은 리제로트에게 쏟아져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아앙!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환도를 급하게 만들어냈지만, 시간이 없으니 검집을 치켜세우며 몸을 웅크리고 충격에 대비했다. 그 결과는 처참하게도 벽 건너편까지 날아갔는지, 흐릿한 시선과 작렬하는 등의 고통. 다시 천천히 일어서서 정면에 있는 남자에게 살기를 뿌렸다.

 

리제로트는 이미 사색이 된 상태에서 몸을 떨고 있었는데, 그 자랑이던 초능력을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상대는 눈을 가린 맹인.

 

눈과 눈을 마주할 수 없는 상대야 말로, 리제로트의 가장 큰 적이 되리라.

 

“이유라도 알고 좀 구르자...큿!”

 

리제로트를 노리는 것은 맞지만, 그녀를 처리하는 것에 있어서 방해되는 존재가 나인 것은 제대로 집어낸 모양. 단검을 들고 날아드는 몸을 보고, 겨우 발검을 하여 힘겨루기로 동선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힘을 겨루면 내가 밀리기 때문에 옆으로 발을 옮기고 휘둘렀다.

 

단검은 나에게 닿지 않지만 환도는 암살자의 몸을 닿았으리라 생각했는데, 상대적으로 매우 긴 검의 궤도에 맞춰, 림보라도 하듯이 유연하게 허리를 거꾸로 휘기 시작했다. 정말 뼈가 없는 괴물을 암살자로 키워서 보내는 기관이 있는 건가?

 

애석하게도 다시 황금빛의 광선이 총구에서 솟아올랐고, 방패를 소환하기보단 온 몸으로 에너지를 퍼트려서, 반사신경과 운동신경을 극한으로 늘렸다. 어떻게 피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오감으로 감지하는 신체구조상 하나의 감각에 걸리기라도 하면, 본능적으로 몸은 움직이게 되어있다.

 

“리제로트! 월터를 불러!”

 

사실 월터는 어찌되었든 간에 나는 밀려서 패배하거나 심하면 죽을지도 모르겠으나, 끈임 없는 공방전을 벌여가면서 내 페이스를 되찾기 시작했다. 암살이라는 것은 잘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잘 죽이는 것이다. 시간을 끌면 이쪽이 유리하지.

 

숨을 고르려는 건지 전략을 구상하는 건지 가만히 멈추고 있는 암살자.

 

나는 검을 고쳐 잡고 입을 열었다.

 

“누가 보냈지?”

 

아무래도 상대는 맹인일 뿐만 아니라 말도 하지 못하는 걸까? 질문에 돌아오는 것은 꾸준히 맴돌고 있는 침묵뿐이었다.

 

“카린 씨! 날려버려요!”

 

정작 목숨을 노려지고 있는 리제로트는 나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분명 평탄한 구조로 이루어진 계획이라 생각했는데, 본의 아니게 어처구니 없는 형태로 깨져버렸다.

 

사실, 내 계획은 나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리제로트를 역이용하여, 나에게 빠지게끔 유도를 하는 것이 가장 큰 그림이었다. 관점을 달리한다면 리제로트가 나에게 호감을 얻어 스스로 인형을 만들기로 포기한다면, 아니...사실 나를 인형으로 더욱 만들려고 할 것 같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이런 바보 같은 싸움을 무효화 시키는 것에 있었다.

 

호감을 얻기 위해 공격하는 리제로트와 호감을 주지 않기 위해 방어하는 나의 싸움.

그 싸움 자체를 없는 셈으로 쳐도 나는 이미 받을 거 다 받았고 잃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리제로트가 나에게 호감이 가서 빠지도록 만들까? 방법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런 소녀의 모습으로 같은 동성과 연애를 하라고? 솔직히 말해서 가능은 하지만 하기가 좀 싫다.

 

싫은 이유야 당연히 귀찮기 때문이지.

 

어쨌든 이건 이거고...

 

-슈아악! 챙!

 

저건 저거다.

끊임없이 목숨이 줄타기 하듯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상황에서, 내 뇌가 잘 굴러가는지에 대해 잡생각을 좀 했더니 삼천포로 빠져서, 공격을 해야 하는 타이밍에 방어만 했다.

 

자세를 낮추고 양손으로 고쳐 잡아 빠르게 접근해서, 수직으로 베는 것이 가장 간단하지만, 어마어마한 힘과 속도가 붙는다면 굉장히 위협적인 공격수단...

 

-휘이익!

 

인데 저걸 그냥 피해버렸다. 암살자의 몸이 크게 움직여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딱 필요한 부분만 작게 몸을 움직여서 빠르게 회피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상대가 가지고 노는듯한 기분이다.

 

공격에 유효타가 없고 나는 방어와 흘리기만 하고 있으니, 서로에 대한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마탄이 날아들어도 상관 없이 온 몸에 보호막을 두르며 뛰쳐나가면 될 뿐.

 

고출력의 마탄만 맞지 않으면 내 몸이 튕겨나갈 일도 없다. 그리고 고출력의 마탄은 적어도 2초 이상은 마나를 모아야 하니, 2초미만의 공격으로 빠르게 치고 나아가면 되지만,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빠르게 도달하는 검기를 쏘아 보내면 되는 일이다.

 

“혈월!<Blood Moon>”

 

피빛의 초승달 하나를 그리자 마자 뛰쳐나가 암살자의 몸을 강타했다. 초기에 날 벽으로 날려 부딪치게 했지만, 이번엔 내가 암살자를 벽으로 날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뜨리는 것을 성공했으니까.

 

힘겹게 이긴 싸움은 아니다. 본래의 모습이라면 10초도 오래 걸리는 편. 정작 6분 이상을 끌어서 내리며 겨우겨우 제압했다. 내가 거칠게 몰아 쉬는 숨소리가 이제서야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죽은 건가요?”

 

느긋하게 입을 여는 리제로트. 하지만 암살자의 행동도 그렇고 월터가 놓치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네. 다 너의 자작극이야.”

 

“네. 맞아요. 잡화점 주인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 보려고 했답니다. 얼굴은 귀엽다고 하더라도 쓰임새가 무엇인지는 알아둬야 하니까요. 그래도 실제로 제가 저에게 암살의뢰를 해서 뛰어난 사람을 모집했다고 하지만, 설마 이렇게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금 뭐 하는 거죠?”

 

나는 마법공학으로 이루어진 총을 뺏고 천천히 지켜봤다.

황금빛의 마탄. 그건 하멀 씨의 고유마법 중 하나였으니까.

 

지금에 와서 권총을 자세히 보고 있는데 하멀 씨가 사용하는 마법진이 존재했다.

 

“이 세상은 마나만 있으면 마법공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마법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된다. 마법진과 마법수식이 적혀있는 마법공학으로 이루어진 물품이라면, 마나만 집어넣어도 사용할 수 있다.

 

한 때. 이 암살자가 하멀 씨의 후손이라던가, 망령이라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심안까지 터득한 암살자다. 하멀 씨의 후손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레이비스 가문이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누가 차기 당주인지 얼굴까지 확인해봤다.

 

이 사람은 레이비스 가문과 관계도 없고, 하멀 씨와 관계가 없지만...

권총을 만든 사람에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권총을 품속에 집어넣은 체, 차갑게 식어버린 머리를 이끌고 리제로트에게 걸어갔다.

 

“그렇네. 그러고 보니 나의 호감을 얻기 위해 자작극을 펼치는 것은 안 된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군. 그래서 이런 바보 같은 해프닝이 일어나버렸어. 어차피 너는 죽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믿고 있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러면 저를 경멸하실 건가요?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이제서야 저와 똑바로 마주해주시는 건가요?”

 

처음부터 이 녀석은 호감이고 뭐고 그런 건 없었다.

 

호감에 상관 없이 언제나 기습적으로 인형을 만들어버리면 그만.

 

어느 사이에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짙은 보라 빛의 눈동자와 대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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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강의를 재미있게 할 줄은 몰랐는데...

역시 특강 강사는 다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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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7

에스파냐의 국왕, 시칠리아의 섭정,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 귀하.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어 이곳 몰타 섬에 당도했습니다. 성 요한 기사단은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고 신앙의 적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지중해를 수호하는 것은 폐하께서 누구보다도 그 중요성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기사단이 이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폐하의 깊은 배려심을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성 요한 기사단장
필리프 드 라 릴라당

 

릴라당이 서신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기사단 예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발레트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방 안에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
"섬에 도착한 후로 이곳 지형을 파악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임디나는 방어 성채로 쓰기에는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릴라당은 의자에 등을 붙이며 발레트의 보고를 들을 자세를 취했다.
"우선 성벽이 견고하지 못합니다. 주민들을 다 수용할 공간도 부족합니다. 섬 중앙보다는 동쪽 항구에 요새를 신축하는 것이 적을 방어하기에 유리할 것 같습니다.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세우면 항구 전체를 통제할 수 있으니 오스만이 쉽게 방어선을 뚫을 수 없을 겁니다."
발레트는 며칠 동안 몰타를 둘러보며 생각한 바를 릴라당에게 전했다.
"음.. 일리가 있는 말이군."
릴라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몰타로 들어올 때 보았던 그 돌출된 산이 스케베라스 아닌가? 항구 사이에 있으니 요새를 건축하기에 적절한 위치인 것 같긴 하군. 분명히 오스만은 동쪽 항구를 목표로 할테니까."
"네, 그렇습니다. 섬 전체를 둘러봐도 서쪽 해안은 절벽으로 되어 있어 배를 정박할 수 없고 남쪽은 중심지와 멀어 매복을 당하거나 보급선 문제도 있으니 오스만은 심해항인 마르삼세트를 공략할 겁니다.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세워 항구를 우리가 통제해야 합니다."
발레트는 로도스 공방전을 경험한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 후 8년간을 지중해를 떠돌며 무슬림 적과 싸웠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지만 전투 경험과 지식은 누구보다도 풍부했다. 릴라당은 발레트의 판단을 신뢰했다.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은 잘 알겠네. 그러나 요새를 신축하려면 비용이 적잖이 들걸세. 위원회에서 비용을 문제 삼을 수도 있어. 이대로 가다간 기사단 운영 자금이 바닥을 보일 테니까."
릴라당이 카를 5세에게 서신을 쓴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섬의 영주권을 양도받아 기사단의 존립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운영 자금이 없다면 섬을 지킬 방도가 없었다. 기사단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병력과 무기, 식량같은 물자가 필요했다. 더군다나 요새까지 신축하려면 막대한 공사 비용이 들 터였다.
"기사단 위원회가 곧 열리네. 그 때 요새 신축건을 위원들에게 얘기해 보겠네."
"네, 단장님."

 


기사단 위원회는 다음 날 바로 소집되었다. 각 담당별 참모로 이루어진 위원회는 기사단의 모든 운영과 전략을 논의했다.
"요새를 신축하기에는 기사단의 자금이 많이 부족합니다. 새로운 곳에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현재로선 시기 상조인 듯 합니다."
릴라당이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신축하는 의안을 내놓자마자 자금을 맡고 있는 페르디가 반대 입장을 취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요새를 신축하는 것보다 이미 있는 요새의 성벽을 재방비하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 지금은 기사단의 상황이 안정되는 것이 더 우선입니다."
대부분의 위원들이 요새 신축건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유럽 전역의 지부와 교황님께 자금 요청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부금을 모아 달라 청원하면 비용이 어느 정도 마련되지 않겠소?"
릴라당이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말을 꺼냈다.
"기부금을 모은다 한들 신축 공사 비용을 다 충당하지는 못할 겁니다. 게다가 무기와 식량, 병사들의 급여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둘이 아닙니다. 지금은 기사단 내부가 안정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현재 기사단의 상황으로서는 위원들의 말이 옳았다. 릴라당은 기사단 내부와 외부를 모두 아울러야 했다.
"이건 어떻습니까?"
옥신각신하는 위원들의 말을 잠재운 건 전략 담당의 드발롱이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스케베라스산 앞에 두 개의 작은 갑이 있습니다. 두 갑 사이는 헤엄을 쳐서 갈 수 있는 거리지요. 이미 그곳은 성채가 있으니 바다 끝의 요새에 방비를 더 강화하면 될 겁니다. 스케베라스산에 도시와 요새를 신축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 것이고 동쪽 항에 위치해 있으니 요충지로서 괜찮은 차선 아니겠습니까?"
드발롱의 의견에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위원들은 동의한다는 듯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마를 짚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릴라당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드발롱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요. 다른 의견이 없다면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소."
릴라당은 미간을 찌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시종에게 발레트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발레트가 릴라당의 방에 도착했을 때 릴라당은 창 밖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발레트는 좁아진 릴라당의 어깨를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냈다.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릴라당은 창 밖의 풍경에서 눈을 거두어 발레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발레트, 자네 의견에 나도 찬성하는 바이나 비용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네. 요새 신축건은 기사단이 안정을 찾은 다음에 진행하는 것이 좋을 듯 싶어. 대신 임디나가 아닌 동쪽 항구의 갑으로 중심지를 옮기기로 결정했네. 곧 그곳의 요새를 재정비 할 걸세."
발레트는 위원회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사단의 안정도 중요하지만 오스만투르크에 맞서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지금은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였다. 발레트는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릴라당에게 말했다.
"단장님, 그렇지만 앞으로를 위해서는 스케베라스산에..."
"나도 자네 생각을 존중하지만 상황이 쉽지가 않아. 위원회의 결정을 따라주게."
릴라당은 발레트의 말을 자르며 의자에 앉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단장의 목소리에 발레트는 더이상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릴라당의 방을 나와 곧장 말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스케베라스산 앞의 작은 갑으로 빠르게 말을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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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60 - 2

554

 

 

 

오후 1시가 약간 지나고 있을 무렵. 저 멀리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건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그저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뿐. 시나가 없으니 백발이 아니라 코발트 블루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리는 동안, 어째서 남자일 때는 검은 머리가, 여자로 변할 때는 코발트 블루가 되는가에 대해 고찰을 좀 해야 했다.

 

아니, 솔직히 내 유전자가 남녀로 따졌을 때, 머리카락의 색상이 바뀌어있다는 건 내 유전자중에서 머리를 짙은 파랑으로 물드는 유전자가 잠재되어있다는 건데, 여자로 바뀌어서 그 유전자가 발현된 것인가? 내가 만약 생물시간에 수마의 유혹을 견뎌냈다면, 지식으로 대할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네. 무슨 생각을 해도 제대로 떠오르는 게 없으니까.”

 

“어떤 생각을 그리 하시는지요?”

 

여기 장르가 공포인가? 심장 하나가 날아갈 뻔했다.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으니까. 적어도 잡화점 멤버들은 내가 생각을 할 때마다, 방해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앞에 있는 소녀는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 그저 주어진 정보 이외엔 아무것도 모른다.

 

“상상하기 힘든 곳에서 튀어나오지 말아줄래?”

 

“쿠쿡! 당신 어제는 그리 쌀쌀맞더니 맹한 구석은 좀 있나 보네요?”

 

나를 대놓고 놀리는 저 소녀는 리제로트 라 캄베리. 유랑극단 소속의 인형사이며, 당연히 내 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인 면에서 본다면, 금빛의 애쉬 블론드와 더불어 맑은 하늘을 담은 푸른 눈동자. 하얀 밍크 코트와 하얀 벙어리 장갑을 끼고, 하얀 털 구두로 하얀 눈이 내린다면, 그것보다 더 잘 어울릴 수 밖에 없는 코디를 입고 왔다. 그 이외에 목도리를 하고 있는데, 목도리만큼은 기이하게도 다른 색상을 띄고 있는 걸 보아, 소중한 사람이 하나하나 정성스레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어쩌면 부모님 중에 한 명이 유산으로 남긴 물건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상당히 아프시거나.

추측은 여기까지, 현실로 들어보기 전까지는 언제나 예상은 예상일 뿐이다.

 

“흐응? 코발트 블루였어요?”

 

거리낌 없이 다가와서 화사하게 웃고는 내 머리색상에 언급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눈빛이나 분위기에서는 신기한 걸 본 듯,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을 걸고 있었지만, 나는 한숨을 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다리느라 추우니까 따듯한 곳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렇네요. 제가 좀 늦은 거 같아서 미안하기도 해요. 고양이 카페는 많이 들어갔으니, 오늘은 저곳으로 들려볼까요?”

 

벙어리 장갑이 가리키는 곳으로 보자, 거대한 건물 하나가 나를 맞이 했다. 상가건물이니까 그 안에는 다양한 목적을 지닌 간판이 많이 걸려있었는데, 그 중에서 옷 가게를 가리키는 듯한 모습. 옷 가게라고 하면 진절머리가 나는 판에, 또 옷을 사서 입을 생각을 하니 다음 미래가 참담하다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옷의 기능은 움직이기 편안하고 계절에 따라 적정온도를 유지하게 만들면 그만인 것. 그리고 옷 갈아입는 것에 트라우마가 걸릴 정도로 싫은 이유라면, 저주받아서 공허속으로 내던져도 모자랄 판에, 아직까지 이 세상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백장미 때문이다.

 

“나에게 거부권은 있어?”

 

“없죠. 가요!”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남자가 좀 거슬리긴 했어도, 리제로트 손에 억지로 끌려가는 나의 처량한 신세에 대해 불쌍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 건물 안에는 거대한 백화점까지 있었는데, 고속도로에 달리는 차마냥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옷 가게로 직진하더니 10분이 지났을까?

 

“흐흥♪ 흐흐흥♫”

 

어마어마한 양의 옷이 한 가득 쌓여가는 걸 느끼고 있었는데, 리제로트를 잘 아는 종업원인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는 탐욕이 가득한 시선으로 물들어있었는데, 리제로트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옷은 꺼내놓고 다 사는 타입일까? 직원들도 전혀 귀찮아 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200골드라? 흠. 카린? 이거 어때요?”

 

“너도 이제 날 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거냐...”

 

“그렇긴 하네요. 그래도 뭐, 저의 인형이 되면 새로운 이름을 지어드릴 테니, 임시적이나마 당신이 여성이었을 때의 사용했던 가명으로 불러드리죠.”

 

“제길. 어쨌든 그 옷은 왜? 너에게 잘 어울리냐고? 아. 잘 어울리긴 하네.”

 

“그래요? 고마워요. 칭찬이라고는 1도 담겨있지 않는 공허한 예의범절이네요. 그래도 빈말이라도 칭찬을 들었으니. 이거 입으세요.”

 

잠깐만 뭐라고?

 

“너의 옷을 사는 거잖아. 나는 이 옷만으로도 불편하고 귀찮아서 다른 옷으로 입고 싶지 않아. 게다가 이건 네가 카렌을 보냈을 때 덩달아 딸려온 거라고?”

 

어처구니 없는 건 얼마나 많은 인형을 소유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이즈에 딱 맞아서 기겁했다는 건 비밀이었다.

 

“소녀에게 코디란 것은 무기! 언제나 새로운 무기를 착용하고 시험하는 것이야 말로 여성의 도리라고요! 언제까지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고 있을 건가요? 제니퍼! 저 소녀를 도와 이 옷으로 갈아 입혀주세요.”

 

“기다려! 나에게 거부권을 좀 달란 말이야!”

 

제니퍼라고 불린 사람이 아마 옷 가게의 점장인 모양이다. 리제로트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알겠습니다. 리제로트님.”이라고 대답할 정도였으니까. 그래, 사람이 살다 보면 거부할 수 없는 순간이 있고, 도망치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잔혹한 현실도 있다고 하자. 하지만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

 

그러나 우악스러운 아줌마 파워라고 해야 할까? 자식을 보살피며 일도 하고 있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고 집안일의 프로마저 등극한 백전노장. 나 같은 것은 단숨에 제압한 뒤 능숙하게 옷을 벗기고 다시 입히기 시작했다. 오히려 루니아 누나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입히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려보니 리제로트가 골라준 옷으로 전부 뒤바뀌었다.

 

과거에 켈모리아에게 옷이 바뀌는 마법을 당한 이후로, 안경을 번뜩이며 나를 바라보고 흡족하게 웃고 있는 제니퍼의 미소가 날 당황시켰다. 다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단어가 내 입 밖으로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프, 프로시군요. 감사합니다.”

 

“오호호! 당연한 일인걸요. 그보다 리제로트님과 많이 친하신가 보네요?”

 

“아, 아뇨. 그리 친하지는 않아요.”

 

지금은 결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혈투를 벌이고 있답니다. 옷도 사주고, 친근하게 대해주고, 먹을 것도 사줄 예정이고 놀러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대로 호감을 줘서는 안되며 행여나 호감을 보일 경우에는 인형뽑기에 뽑혀서 나오는 인형마냥, 자의식이 없는 완전한 빈 껍데기가 되어야 할 터이니.

 

이런 생고문을 내가 왜 받아들였는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확실히 말해,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둘이 있는 동안 호감을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지만, 완전히 용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네요. 후훗!”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해서 웃고 있는 리제로트. 허나 저 웃음도 함정에 속한다. 상대와 놀 때, 상대가 웃으면 나도 모르게 전염되어 웃는 일이 있지 않는가? 그것을 노리는 거다. 허물없는 사이가 되면 그때부터 호감이 보이기 시작하며, 나는 철저하게 담을 쌓고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입장을 표현해야 하지만...

 

아까와도 말했듯이 나는 옷에 대한 트라우마가 없지 않아 있기에 기분이 좋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 호감을 사지 못했다는 의미겠지.

 

“좀 웃고 다니는 것이 어때요?”

 

“시끄러워.”

 

“튕기기는...”

 

“나는 튕기거나 그런 게 아니라 태클을 거는 캐릭터야. 하나부터 열까지 사소한 것은 넘어가지 않지.”

 

다른 말로 츤데레라고 하던데 확실하게 말해 나는 츤데레는 아니다. 태클을 거는 캐릭터 중 하나지. 만약 이게 정상적인 용사가 나오는 글이었다면, 나는 매번 잡화점 상인이 되어 용사에게 태클을 걸고 있는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으리라.

 

그거 왠지 좋아 보이는 배역인데?

 

“그러면 이제 옷도 다 입었으니 소녀다운 일을 하죠.”

 

“세상에 소녀다운 일이 있었던가?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일은 단 한번도 없을 텐데.”

 

“그러면 몸소 체험해보세요. 자.”

 

리제로트가 뜬금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걸 잡는다면 결국 나의 패배인가?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이 있기에 거절할 수가 없다. 잘도 이런 곤욕을 치르게 만드는 군.

 

“한가지 말해두지.”

 

“뭔가요?”

 

화사한 웃음으로 나의 쓴 소리를 다 받아 쳐낼듯한 방탄미소.

 

“나는 네가 무서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상황을 이용하는 것도 그렇고 하나하나 눈짓과 몸짓에 모두 계산이 되어 들어가고 있는 모습. 절대로 10대 청소년이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겉모습은 따라 할 수 있지만, 리제로트의 머릿속에서는 그 행동을 취함으로써 사소한 득과 실까지 전부 계산에 집어 넣었다.

 

단지 하루도 주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그려진 시뮬레이션대로 내가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유로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그걸 아시면서도 저와 같이 다니시다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서 저에게 푹 빠지셔서 인형이 되세요. 그러면 영원히 함께 지낼 수 있으니까.”

 

호감이라는 것은 매우 간단한 정의로 이루어진다. 그냥 그 상대방이 상대적으로 좋게만 여겨지면 된다. 그런 예시라면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라고만 말해도 그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증거랑 뭐가 다른가?

 

다만, 내 눈에 각인된 카렌의 모습이 떠오르자, 모든 잡생각은 물러가고 머리는 냉정하게 식어갔다. 단순히 손만 잡는 것만으로는 호감을 띄는 경우가 없으니, 잡기 위해 뻗으려는 그 순간...

 

-콰지직! 챙그랑!

 

유리가 깨져나가면서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누군가가 나타났다.

 

“목표를 찾았다.”

 

민첩한 몸놀림으로 무언가 휘두르는 것을 보자마자 리제로트의 손을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신도 당황했는지 “꺄악!”하고 비명을 질렀으나, 지금은 승부에 관련 없이 사고가 터져버린 상황. 암살자로 보이는 사람은 리제로트를 향해 단검 하나를 던졌지만, 내 쪽으로 당길 것을 알았는지 마법공학으로 이루어진 듯한 권총 하나를 나에게 겨눴다.

 

아니.

매우 익숙한 흑색권총에 황금빛의 마법수식과 마법진이 난잡하게 그려진 물건.

예전 하멀 씨가 쓰던 권총 그대로였다.

 

“리제로트! 숙여!”

 

내 말에 즉각 반응하여 내 뒤에 숙였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빛으로 이루어진 방패를 소환했다.

 

-파앙! 콰지직!

 

“크읏!”

 

정면으로 받아들이지 말걸 그랬나?

팔에는 어마어마한 통증과 거대한 충격으로 넘어질 뻔한 것을 겨우겨우 버텼다. 다만, 빛의 방패가 깨져나가기 직전이라는 것을 보면, 하멀 씨보다 더한 두 번째 마탄은 버틸 수가 없겠지.

 

남자의 목소리는 음성변조를 통해 잘 알아들을 수 없도록 깨져있었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 모습으로는 나 자신은 지킬 수 있지만, 과연 리제로트를 죽도록 놔두는 것이 현명할까?

 

“다, 당신...어째서 저를...?”

 

“착각하지마. 딱히 너를 위해서 이러는 게 아냐. 지금 이곳에는 민간인도 껴있어. 멋대로 다른 사람까지 죽는 건 내 눈으로 볼 수는 없지.”

 

이건 리제로트에 대한 호감의 문제가 아니라, 이브센티아에서 나로 인해 멋대로 죽어간 사람들 때문에 태어난 죄. 그리고 내 행동은 오늘도 여김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해 멋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다만, 저 암살자는 리제로트. 너를 노리는 거 같지만 말이야.”

 

표정이 어둡지만 굳은 의지가 하늘색 빛 청안이 번뜩이더니, 잔뜩 화난 소녀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월터어!”

 

이곳은 여성용 의류점이라 리제로트의 경호원이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천장을 뚫고 멋지게 나타나 자신에게 내릴 명령을 기다렸다. 그 전에, 저 천장은 벽돌로 되어있지 않았나?

 

“저 빌어처먹을 암살자를 당장 도륙내세요!”

 

 

자신의 입으로는 소녀다운 일을 하자고 했던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소녀가 담기에는 과격한 말이 튀어나오자 마자, 암살자와 월터는 서로 격돌을 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 우린 빠져나가기 위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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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날 기숙사로 이사 예정이라...그 날은 글을 쓸 수 있을지 없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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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6

나디아는 스케베라스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마구 흩날렸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덮고 있던 머릿수건이 스스륵 풀려 눈깜짝할 사이에 위로 높게 올랐다가 그대로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나디아는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작은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빰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푸른 지중해는 나디아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픈 상처였다. 그녀의 마음 속 한 부분은 5년 전 바다의 물결에 쓸려가 다시는 채워지지 못할 터였다.
나디아는 아비규환이었던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마을은 불태워지고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닥치는대로 칼을 휘둘렀다. 끔찍한 비명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 날뛰는 짐승들, 곳곳에 엎어진 시체들과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가는 여자들, 비열한 미소를 지닌 악랄한 그들의 얼굴.
삶의 터전이었던 고조 섬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간신히 살아서 섬을 탈출한 사람들은 불타는 마을을 바라보며 숨죽여 울었다. 어머니는 나디아와 오빠를 지키려다 해적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나디아, 절대 뒤를 돌아보지마! 뛰어!"
칼 한 자루를 쥐어 주며 오빠는 나디아를 떠밀고 뒷문을 닫았다. 오빠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죽임을 당했거나 해적의 손에 붙들려 노예 시장으로 팔려 갔을 것이었다.
불타는 마을 한가운데 그녀가 서 있다. 죽음의 공포로 가득한 곳. 하얀 터번을 두르고 초승달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극악무도한 해적의 얼굴!
"악!!"
소리를 지르며 나디아는 깨어났다. 매일 밤 같은 꿈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나디아는 오빠가 준 칼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 그녀는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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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5

"이곳은 뭔가 음습하네요."
칼 손잡이를 손에서 놓치 않은 채 로메가스는 주변을 연신 경계하며 걸었다.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야. 로메가스, 다를 거 없다구."
발레트가 로메가스의 어깨를 툭 치자 로메가스의 칼이 칼집에서 반쯤 빠져나왔다.
"하하하, 놀라기는."
발레트는 로메가스의 놀란 표정에 웃음을 터뜨리며 앞을 가리켰다.
"음.. 여긴 것 같은데?"
몰타 섬의 모든 건물은 모래색과 같은 석회암으로 만들어져 섬의 일부처럼 보였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 갈 만한 좁은 골목은 미로처럼 얽혀 있어 한번 방향을 잃으면 출구를 찾기 어려웠다. 성벽을 연상케 하는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발레트와 로메가스 외에는 어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발레트는 어느 집의 녹색 대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앳된 여자 얼굴이 반쯤 보였다.
"누구시죠?"
날이 선 목소리와 함께 경계하는 눈빛이 쫓아왔다.
"성 요한 기사단의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입니다. 이쪽은 제 부하기사 로메가스. 크레누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앳된 얼굴과 대조되는 깊고 오묘한 초록 눈동자가 발레트의 눈에 잠시 머물렀다 기사단의 십자가 망토로 옮겨갔다.
"무슨 일로?"
"요새 건축에 관해 크레누씨와 나눌 얘기가 있어요."
여자는 허리춤에 찬 발레트의 칼에 시선을 주더니 아무 말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문을 마저 열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허름한 외관과 다르게 안락한 공간이 나타났다. 불을 피운 아궁이 위에는 작은 냄비가 올려져 있었고 식탁에는 작은 체구의 남자가 홀로 앉아 식사 중이었다.
"무슨 일이요."
자신의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불쾌한 듯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고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보에몬 크레누씨입니까?"
"그렇소만."
"성 요한 기사단의 발레트라고 합니다.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건설할 계획인데 이 섬에서 축성 기술자인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더군요."
"스케베라스산? 난 관심없소."
크레누는 여전히 발레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음식을 먹는데 열중했다.
"오스만투르크에 대비해 요새를 만들어야 합니다. 스케베레스산은 해협에 돌출되어 있어 요새화 하기에 최적의 장소에요. 그곳에 성벽을 쌓으면 오스만은 쉽게 섬을 공략할 수 없을 겁니다."
발레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발레트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외지인인 당신이 우리보다 이 섬을 잘 안다고 생각하나요? 2천년 전부터 이곳은 늘 다른 민족의 침략을 받아왔어요. 우리는 늘 약탈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죠. 이 섬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죠?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나요? 이곳이 침략 당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외지인인 당신이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발레트는 그녀의 거침없는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 자신에게는 이 몰타 섬을 오스만투르크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몰타 사람들에게 그들은 갑자기 나타나 섬을 휘젓고 다니는 외지인에 불과했다. 그제서야 그녀의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우리는 몰타 출신도 아니고 이 섬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외지인이니까요. 우리가 해야 할 일에만 너무 빠져 있었나 봅니다. 몰타와 이곳 사람들을 알아가고 같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어요. 크레누씨에 대한 얘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와서 요새를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경솔하게 행동한 것 같군요. 무례하게 들렸다면 사과드립니다."
발레트의 정중하고 진심어린 사과에 오히려 놀란 그녀였다. 기사단은 유럽 귀족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레 알고 있던 터였다. 발레트도 프랑스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거만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깊고 오묘한 초록 눈을 가진 그녀의 경계 가득한 눈빛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나디아, 손님들을 오래 서 있게 한 것 같구나. 두 분 여기로 앉으시죠. 식사 하시겠습니까?"
크레누는 비로소 발레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는 접시를 한쪽으로 치우며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나디아, 두 분께 포도주 한 잔씩 드리거라."
나디아는 포도주를 가득 채운 잔을 발레트와 로메가스 앞에 놓았다.
"감사합니다."
발레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디아의 격양된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스케베라스산이 있는 해협은 매우 복잡한 해안선을 갖고 있소. 변덕스러운 바람 때문에 갈레온선이 정박하기란 쉽지 않지. 그곳에 요새를 세워 적의 침략에 대비한다면 몰타를 쉽게 공략할 수는 없을 거요. 하지만 스케베라스산에 성벽을 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지대도 높을 뿐더러 흙이 아니라 돌로 이루어진 산이라 인력과 장비가 많이 드는 대규모 공사가 될거요."
크레누는 흰 수염이 난 아래턱을 만지며 말했다. 그는 불같은 성미를 지녔지만 사람의 본성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와 스케베라스산에 요새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 젊은 기사의 패기를 더 알아보고 싶었다. 크레누는 잠자코 발레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쉬운 작업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오스만의 이동 경로를 생각한다면 그곳에 성벽을 쌓고 요새화 하는 것이 몰타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면 오스만은 쉽게 성벽을 뚫을 수 없을 겁니다. 크레누씨를 찾아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발레트는 정확하게 몰타 섬의 지리적 이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섬 사람은 육지의 외지인을 달가워하지 않소. 그들은 잠시 들렸다가 떠나는 사람들이니까. 헌데 당신은 이곳을 쉽게 떠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
크레누는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식탁 위에 내려 놓은 후, 발레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은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크고 투박한 크레누의 손을 발레트는 힘껏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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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4

지각 변동으로 인해 시칠리아 섬에서 떨어져 나온 몰타는 지중해의 점이라 불릴 만큼 작은 섬이었다. 강도 없고 나무도 자라지 않는 이 삭막하고 척박한 땅에서 섬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했고 먹거리는 풍족하지 않았다. 여름에는 한 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온 몸이 타버릴 정도로 열기가 가득했고 식수도 구하기 어려워 동절기에 내린 비를 저장해서 사용했다.
또 마그레브 해안에 근거지를 둔 북아프리카 해적은 불시에 섬을 습격하여 약탈을 일삼았고 섬 주민들을 잡아 갤리선 노예로 팔아버렸다. 주민들은 늘 불안에 시달렸지만 섬은 방비에 취약했다. 옛 수도인 임디나는 높은 지대에 위치한 성채 도시였으나 방어벽이 견고하지 않았고 섬 주민들 모두 그곳에 대피하기에는 공간적 여유도 없었다.
섬을 한 바퀴 돌아보며 요새를 건설할 새로운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발레트였다.
"로메가스, 저 산을 봐. 섬을 방어하기에 저만한 장소가 또 있을까? 서쪽 해안은 가파른 절벽이라 배를 정박할 수 없고 남쪽 만은 중심과 멀어서 오스만은 분명히 동쪽 항구를 노릴거야. 저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요새를 만든다면 동쪽 연안은 우리 손에 있을 거고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어."
그들은 마르삼세트항에서 스케베라스산을 올려다보았다. 들쭉날쭉한 해안선 사이로 바다를 향해 돌출되어 있는 스케베라스산은 요새를 건설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장소였다. 오스만투르크가 몰타로 향할 때, 소아시아에서 서쪽으로, 곧 몰타의 동쪽편으로 방향을 잡을 테니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한다면 그들은 항구 전체를 장악할 수 있어 오스만 함대가 애를 먹을 게 분명했다. 또한 본국에서 수송되는 공급선을 차단할 수 있어 공방전이 길어진다면 전투를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다.
"확실히 이 섬은 동쪽 항구를 방어할 필요성이 있는 것 같아요."
로메가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단장님을 뵈어야겠어."
발레트는 임디나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기사단의 임시 숙소에 도착했을 때 릴라당은 자금 담당인 페르디와 함께 있었다. 페르디는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는데 릴라당의 미간이 좁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골치 아픈 보고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발레트는 새로운 요새에 관해 좀 더 알아본 후에 보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숙소를 나왔다.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일순간 멈춰졌다. 항구의 오래된 주점에서는 술과 땀냄새가 가득했다.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발레트와 로메가스를 뒤쫓았다. 두 사람이 구석진 자리에 앉자 주점은 다시 말소리로 뒤덥혔다. 여주인이 다가와 발레트와 로메가스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두 잔에 럼을 따랐다.
"이곳에 축성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발레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여주인에게 물었다.
" 축.. 뭐라구요?"
여주인이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성벽을 쌓는 것 말입니다."
"아, 알지요 그럼."
여주인은 몰타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말투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보에몬 크레누라고 괴팍한 성격의 양반이 있는데 임디나 외곽에 산다우.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찾으시우?"
여주인이 눈을 깜빡거리며 발레트앞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발레트는 대답 대신 입가에 미소를 띄어보였다.
"그 양반 성질머리는... 어휴... 아내 먼저 하늘로 보내고 양딸을 데리고 사는데...... "
여주인이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풀기 시작하자 발레트는 탁자에 술값을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뱃사람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크레누는 왜 찾는거요?"
의심 가득한 눈길로 사내는 발레트를 노려보았다. 발레트는 이곳 사람들과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나서려는 로메가스를 제지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성벽 공사로 상의할게 있소."
술에 약간 취한 듯한 사내는 발레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번에 들어온다던 기사단이군. 쳇!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붉은 얼굴의 사내는 발레트의 어깨를 밀치며 지나갔다.
발레트와 로메가스는 텁텁한 공기의 주점에서 나와 하늘을 올려보았다. 항구는 이미 어스름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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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3

몰타의 상업 귀족 보키아 가문은 비잔틴 시대부터 몰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지중해의 길목에 위치한 몰타에서 아시아와 유럽간 상업 활동으로 몰타 대부분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그는 사리분별이 빠른 사람이었다. 남부 이탈리아로 가는 상선을 해적이 불시에 습격하여 경제적 손실을 봤던 그가 해적을 견제할 수 있는 성 요한 기사단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당연했다.
"단장님의 명성은 극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로도스 섬은 쉴레이만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기사단장님의 지략과 신념에 탄복했습니다."
화려한 차림의 보키아가 미소를 머금고 릴라당에게 다가왔다. 매끈하게 정리된 콧수염은 그의 하얀 얼굴과 대조되어 더 도드라져 보였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기사단원들과 로도스 섬 주민들이 끝까지 힘을 합친 덕분입니다."
릴라당은 보키아의 손을 잡으며 정중히 말했다. 그의 말에는 조금의 더함도 없었다. 오랜 시간 바닷바람에 그의 손은 거칠어졌지만 곧은 의지의 눈빛은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 더욱 깊어 보였다. 릴라당은 뼛속까지 중세 기사 정신을 물려 받은 사람이었다. 보키아의 입에 발린 칭찬은 그에게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힘든 여정이었을테니 며칠간 쉬면서 여독을 푸시지요. 필요한 모든 것은 저희 쪽 사람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보키아가 옆의 시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아, 저기 소개해드릴 사람이 오는군요. 제 보좌관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입니다."
기사단 예복을 갖춰입고 성 요한 기사단의 십자가 망토를 두른 발레트가 예의를 갖추며 보키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180cm가 넘는 훤칠한 체격에 옅은 갈색 머리와 눈을 가진 30대 중반의 프랑스 귀족 청년이 보키아 앞에 서있었다. 신념이 깃든 눈동자였다. 십자가가 그려진 기사단 망토를 두른 넓은 어깨는 그의 신념을 뒷받침해 주는 듯 했다.
"흔들림없는 눈을 가졌군요."
보키아는 웃으며 그에게 포도주잔을 건넸다.
"항해는 어떠셨습니까?"
"다행히도 순항이었습니다."
"몰타의 바람은 고약하기로 소문이 났는데 기사단에게는 순순히 길을 내줬군요. 역시 신의 뜻인가 봅니다."
보키아는 세련된 태도와 유려한 말솜씨로 대화를 주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상대를 관찰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발레트는 잔을 위로 들어올렸다.
"신의 가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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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

발레타 1-2

몰타 섬 중앙에 있는 성채 도시 임디나는 몰타의 옛 수도로서 대대로 귀족들의 거주지였다. 모래색과 같은 돌벽으로 견고히 지어진 그 곳은 전형적인 중세풍 성채 도시로 높은 고지에 지어져 동쪽 연안의 항구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몰타의 유력 가문이자 임디나 성채의 주인인 보키아는 성 요한 기사단이 항구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막 받은 참이었다.
지중해의 길목에 위치한 몰타는 예로부터 여러 나라의 지배를 거쳤고 북아프리카 해적의 약탈에 늘 골머리를 앓는 실정이었다. 거기에다 북아프리카의 해적을 실질적으로 지원해주는 오스만투르크는 지중해의 전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호시탐탐 침략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오스만이 시칠리아 섬까지 세력을 뻗치는 것을 미리 막고자 떠돌이 생활 중인 성 요한 기사단에게 몰타 영주권을 양도했다. 시칠리아 남쪽에 위치한 몰타는 이슬람 세력이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꼭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성 요한 기사단장 릴라당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것은 몰타의 보키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스만투르크와 북아프리카 해적으로부터 몰타를 지키기 위해선 성 요한 기사단이 필요했다.
강렬한 햇빛 아래 지중해는 푸른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성루에서 한참이나 항구를 바라보던 보키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비토, 성 요한 기사단장에게 환영 인사를 전하게. 오늘 밤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말도 잊지 말고."

 

 

비잔틴과 아랍 양식이 혼합된 몰타 건축물은 지극히 이국적이었다. 기사단 예복에 망토를 두른 발레트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강렬한 햇빛과 푸른 지중해, 모래색의 성벽,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은 골목길,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색적인 언어와 적당히 그을린 건강한 피부색의 얼굴들.
많은 나라의 침략에 시달린 것과 달리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시장은 활기로 가득찼고,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이 가판대위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상인들은 큰 소리로 호객 행위를 하고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고 가격을 흥정했다.
발레트의 눈은 처음 보는 것인 마냥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났다. 8년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던 그의 삶이 다시 평온함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발레트 옆을 뛰어갔다. 그 중의 한 아이가 뒤를 돌아 발레트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안녕, 이름이 뭐니? 꼬마야."

 

발레트가 말을 걸자 아이는 수줍은 표정으로 웃더니 무리를 향해 다시 뛰어갔다. 발레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내리쬐는 강한 빛에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는 쌓아놓은 짚더미위에 걸터 앉았다. 햇빛, 공기, 바다, 과일, 생선, 짐을 한가득 등에 실은 나귀, 심지어 돌멩이까지도 그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발레트님! 발레트님!

 

부하 기사인 로메가스가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이, 로메가스."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로메가스가 얼굴에 땀을 훔치며 숨을 골랐다.

 

"그냥 구경 좀 하고 있었어."
"단장님께서 급히 찾으세요. 어서 가보셔야 해요."
"단장님이?"

 

발레트는 급하게 임디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