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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9

488

 

 

 

우리가 찾으려고 하면 불쑥 찾아와서 어처구니 없이 충격적인 말만 내뱉은 어릿광대의 행동이라면, 평소처럼 나에게 들러붙으려고 하는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릿광대가 다가가기도 전에, 레시아가 분노로 터지기 직전이었기에 추가적인 정보를 듣지 못하고 새벽이 넘어가버렸고, 그런 레시아를 달래기 위해 레시아가 잠드는 동안, 어마어마한 투정과 응석을 받아줘야만 했다.

 

그 결과가 지금 내 모습일까?

같은 이불 속에서 꿈지럭거리고 있는 레시아가 검은 고양이가 아닌, 인간형의 모습으로 내 옆에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편하게 숙면하기 위한 나의 계획이라면, 한풀이건 뭐던 일단 다 받아주고 자연스럽게 마왕성으로 보내는 거였는데...

 

10대 중반의 외형을 지닌 레시아.

카리스마보다는 거만함이 느껴지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에서는 그 거만함마저 귀여움으로 환원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이미지를 가진 여자애가 마왕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대략 60년정도는 살아왔다.

 

“선생님...가지...마세요...”

 

여전히 이별의 순간만큼은 잠꼬대로 기억을 하고 있는 모습에 애처롭기까지 보였는데, 만일 자신의 스승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괴물 같은 천재적인 녀석들 밖에 없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자신을 잠시나마 이끌어준 스승을 기억한다. 보통은 자신의 부모님이 되어야겠지만...

 

그나저나...

분명 잘 때 고양이 모습이었는데?

기묘하군.

 

“어라? 주인. 벌써 일어나는 건가? 아직도 해가 중천이니 조금 더 눈을 붙이는 것을 요구하노라.”

 

“왜 제가 더 자야 하는 거에요.”

 

“주인은 신부이니까. 짐의 아침키스로 일어나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거다.”

 

“뭐가 당연해요. 대체 그건 어느 마법소녀 세계관에서 나올법한 의식인데요? 아직도 잠꼬대하고 싶다면 레시아가 계속 자요. 영원히.”

 

엉망진창인 논리로 나에게 들이대고 있는 소녀는 마왕답지 않는 말을 자연스럽게 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조금이라도 방심하고 있으면, 말 그대로 농락당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터.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 여김 없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서...

 

-쪽!

 

“아침인사 대신 볼에 키스를 했어! 신랑!”

 

뒤에 다가오는 복병을 너무 늦게 눈치챘다. 태양과 같은 미소를 띠고 너무나도 상쾌한 얼굴로, 산뜻한 움직임과 함께 주방에 들어가는 루시피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볼에 여전히 따듯한 감촉이 남아있기에, 내 오른뺨을 가린 손은 뇌의 명령을 거치지 않고 움직였다. 온 몸이 너무 놀래서 경직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을 때.

 

-쪽!

 

“레시아! 뭐 하는 거에요!”

 

부스스한 붉은 눈을 하면서도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일명 ‘레시아 논리’를 앞장세웠다.

 

“옛말에 오른뺨을 맞으면 왼편으로 돌리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 오른쪽 볼에 키스를 받으면, 왼쪽 볼에도 키스를 받아야 하는 것이 이 세상에 정해진 법칙이니라.”

 

“그건 다른 성서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그 성서를 제멋대로 변이시켜서 이상한 혼종을 만들지 말라고요.”

 

“어째서 주인은 짐이나 다른 여성이 애정표현을 하는데도 싫다는 내색을 하는 건가?”

 

그거야 당연히...

 

“그...언젠가 보답을 해야 하잖아요. 한 가득 모아서...”

 

받은 것이 있다면 10배로 갚으라는 말이 있으니까. 잠깐 시선을 돌린 이유라면 내가 이런 말 하기에도 소름이 끼치기 때문이니까. 당연하게도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당장 멸망할 것만 같은 이 세상을 살려내는 것이니까. 평화가 온다면 언젠가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짝 치켜 뜬 눈을 하고 있는 레시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내 귀에 다 들릴 정도로 작게 입을 열었다.

 

“츤데레~”

 

“시끄러워요. 아이언 클로가 날아가기 전에.”

 

얄밉게도 살짝 웃으면서 “쿡쿡!”하고 웃는 소리까지 완벽할 정도로 요망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마스터.”

 

어디선가 시나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지금 머릿속에서 처리중인“기상할 때 존재하면 안 되는 가장 위험한 장소 TOP10”중에서 3위정도에 속하는 내 이불 속을 빠르게 들췄더니, 백은을 지닌 머리카락이 내 배를 거의 뒤덮고 있는 상태였다.

 

어째 무겁다고 생각했더니 컨디션이 안 좋은 게 아니라...

 

“비, 비둘기! 이 녀석! 어째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냐!”

 

“올빼미입니다. 냥캣. 그리고 오랜만에 마스터 곁에서 자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백은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했을 때.

 

-쪽!

 

“아니! 너도 하는 거냐!”

 

위화감과 긴장감이 내 목에 집중되어 왼손으로 목을 가렸을 때는, 이미 시나의 입술이 떠난 후였다.

 

“냥캣이 했으니 저도 못할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하지만 양쪽 볼은 이미 다른 2명이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에다 해야만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가장 사랑스러운가요?”

 

“사랑스럽고 아니고를 떠나서, 너희 둘은 나에게 애정을 보이는 것조차 전쟁이냐?”

 

“언젠가 마스터가 우리들에게 보상을 해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애정이란 마일리지를 하루에 2씩 차곡차곡 쌓으면, 제가 다치거나 병에 걸렸을 때, 약값이나 병원비로 거액의 애정이 나온다는 소리지요.”

 

“실비보험드는 소리하고 있네! 그전에 분신이 아니라 본체가 온 것 같은데, 밖에 있는 시간은 그럼 전부 멈춘 거야?”

 

시나는 다른 이야기로 빠지는 것을 눈치채고 건성으로 대답만 했다.

 

“멈춰있습니다. 제가 밖에서 시간을 억지로 움직여도, 3일 뒤에는 모든 공간이 다 날아갈 테니까요. 그건 그렇고, 저에게 대한 애정은 어떤 식으로 표현할 예정입니까? 그 예정된 날에 따라서 저도 예쁘게 마스터 앞에서 서고 싶으니까요.”

 

“마스터라니...이미 페어링도 되어있지 않은 사람에게...”

 

“그럼 서방님?”

 

시나의 눈이 번뜩하는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준비해온 단어. 그리고 살짝 수줍은 목소리가 가미되어 폭발적인 파괴력이 내 정신을 강타했다.

 

“마스터라 불러라 그냥. 잠깐 생각해보니까 그 호칭을 견뎌내기에는 손발의 내구도가 강하지 않아.”

 

“그럼 짐도 주인이라 부르지 말고 여보라고?”

 

“그러기엔 제 손발의 내구도가 강하지 않다고요. 만약 시공간의 저편으로 날아가는 제 손과 발을 어떻게 책임지실 거에요?”

 

“우서가 책임질 것이다.”

 

그럼 안 되잖아.

납치하는 스킬이 늘어서 이제 부위별로 납치하는 거냐?

 

“하아암~ 잘 잤다. 어라? 빛의 여신님도 이곳에 있네?”

 

릴리스의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는데, 레시아와 시나가 각각 오른쪽과 왼쪽 시야를 손바닥으로 막으면서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릴, 릴리스! 옷은 입고 자라고 하지 않았는가!”

“맞습니다. 그런 모습을 마스터에게 보이면 실례입니다.”

 

“하지만 잘 때 옷을 입고 자는 건 왠지 불편하지 않아? 적어도 실크로 된 이불을 감싸는 느낌을 제대로 알려면 맨 살이 최고라고? 부드럽고 꼭 안겨있는 기분이...

 

“시끄럽다! 당장 옷을 입어라! 색욕의 공작!”

“당장 옷을 입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정화하겠습니다!”

 

“알았다고요. 카일은 내가 어떻게 돌아다녀도 신경 쓰지 않고 멀쩡하게 말할 것 같은데.”

 

투정을 부리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릴리스의 목소리가 사라짐과 동시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두 눈은 광명을 찾은 듯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면서, 주변의 사물을 하나 둘씩 인지하기 시작했다.

 

“방금 뭐가 지나갔길래 제 눈을 가린 거에요?”

 

“제길. 릴리스 이 녀석. 몽마의 여왕이라서 그런 뇌쇄적인 몸으로 주인의 시선을 빼앗으려 하다니.”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서로 한마디씩 주고 받으면서 안심을 하고 있었으나, 무슨 일이 터졌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카일 씨? 잡화점에 있는 목욕탕은 너무 크네요?”

 

“어째서 너까지 이곳에 있는 거냐?”

 

“그야 당연히 밖에 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시간이 정지하게 되니까요. 이 사건이 해결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생활하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해서, 릴리스에게 이야기도 해보았고 세피르가 꿈의 미로를 관리하고 있으니, 밖의 상황을 알 수 있으니까요.”

 

잡화점을 밝게 비추는 빛에 반사되고 있는 자신의 은발을 신경 쓰면서 물기를 말리고 있었다. 임시거처로 활용만 한다고 하니 한숨을 쉬고 내 할말을 하기 시작했다.

 

“꿈의 미로는 현실세계와 영향을 전혀 안받는 거냐?”

 

“꿈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죠. 당연히 시간이 정지되면 꿈의 미로에 갇힌 사람들은 전부 사라지겠지만, 쉽게 말해 의식의 전송이 되지 않아서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니, 세피르의 연락을 받아서 지금은 모든 사람들의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소식이에요.”

 

꿈은 현실이 아니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나 공간이 날아가도 그 영향을 받지 않기에, 몽마는 한정적인 꿈의 공간에서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다는 소리로군. 그걸 이용하면 해결법은 보이지 않아도 시간을 벌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꿈과 같은 방법이다.

현실은 불가능하니까.

 

“어차피 지금은 3일안으로 시간을 찾아야 하니, 그 기간 동안 사고 치면 안 된다?”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아리엘은 볼을 부풀리면서 노을을 연상하게 만드는 눈이, 손을 대면 베일 정도로 날카롭게 변했다. 애써 시선을 돌려 레시아와 시나가 빤히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며, 두 사람을 보고“왜요?”라고 말하자...

 

“여전히 이상한 곳에서 마음이 너그럽지 않는가? 그렇게 한 명을 더 채워야 속이 풀리는 것인가?”

“마스터는 역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잘 알았으니 한 마디만 하자면, 그럴 의도는 전혀 없으니 안심하시죠.”

 

한숨을 내쉬면서 달래주려고 했는데...

 

“아니. 주인이 그럴 의도가 없어도...”

“방심하면 마스터가 당할 겁니다.”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은 루시피나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아리엘의 모습을 쫓아 눈이 이동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은 흡사 눈알이 튀어나와 그 방안까지 쫓아갈 기세였고, 일부러 내가 헛기침을 하면서 주변의 분위기를 바꿨다.

 

“지금의 문제는 시간을 되찾는 거잖아요?”

 

“하지만 주인. 사회자가 날려먹은 시간을 어떻게 찾아올 것인가? 그게 더 문제이지 않는가?”

 

애석하게도 날아간 시간을 찾는 방법은 없다고 보면 되지만, 어릿광대의 말을 듣고 힌트를 얻은 것이 있다.

 

“레시아. 어제 어릿광대가 하는 말을 들었죠?”

 

“그 증오스러운 도둑고양이의 말을 짐이 왜 들어야 하는가?”

 

고양이는 레시아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릿광대는 3일 뒤에 공간이 사라질 것이라고 알려줬잖아요.”

 

“확실히 그건 들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걸 집어볼 일이 있는가?”

 

가능성이 조금 있는 사실이라면...

 

“지금 사회자는 완벽하게 시간을 날리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날아간 것처럼 감추고 있다는 것이라 생각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그렇다면 마스터의 말씀은?”

 

“애초에 시나가 시간을 강제로 움직이는 것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시간을 완전히 날려먹었다면 시나와 티아마저 멈춰버려야 할 거야. 아니면 이 공간이 같이 사라져버리거나.”

 

하지만 시나는 외각에서 힘을 사용해 시간을 움직이고, 아직까지 시간의 개념을 지닌 어릿광대의 말을 보아. 시간을 몰래 빼돌리며 숨기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공간을 날릴 수 있으면 바로 날릴 것이지 왜 3일이 필요할까요? 사회자는 이미 검은 존재와 합쳐져서 신적인 존재를 뛰어넘었을 터인데?”

 

상급 신을 넘어 손가락만 움직여도 모든 것이 뒤바뀐다.

의지만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다시 태어날 정도의 힘이다.

하지만 공간을 지우는데 3일동안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적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할 것일 테니...

 

“만약에...아주 만약에...시간을 숨겨놓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어디일까요?”

 

 

내가 던진 질문에 레시아와 시나는 아무런 말도 안하고, 깊은 고민의 늪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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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새니까 피곤하네요.

워프레임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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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8

487

 

 

 

엽기적인 여장이 끝나고 난지 2시간정도가 흐른 뒤였다. 잡화점은 장사를 해야 하니까 비울 수 없다는 것은,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 방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부정적인 사고를 잡화점에게 쏟아 부어버렸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달래봐도,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적어도 가위바위보에 져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일보다 더 좋은 그 무언가...

 

-파지직!

 

내 밑에 책상이라도 있었는지 몸을 받아내지 못하고, 연약하게 부러져버린 나무의 잔재들이 주변 넓게 퍼졌다. 여전히 승률은 0%정도를 기록하고 있는데, 과거로 가서 어린 레시아에게 가위바위보를 이겼던 것을 생각하면 정확하게 0%는 아니지만, 1%가 안 될 정도로 승률이 처참하다.

 

“주인은 여전히 가위바위보를 잘 못하는군. 지금쯤이라면 벌써 수천, 수만 번의 목숨이 날아갔으리라 생각하노라.”

 

분명 1/3확률로 이기고, 지고, 비기는 것이 가능한 놀이에서, 이기는 것은 전혀 없고 지고 비긴 것만 있는지 나도 의문. 그보다, 내가 1년동안 레시아에게 무슨 사기라도 당하고 사는 게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아무튼 모두가 자고 레시아가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사이에, 마왕이라서 잠을 적게 자도 된다고 하지만, 잡화점에서는 항상 눈을 감고 자는 듯한 검은 고양이의 목소리가, 졸리지도 않는지 생생하게 내 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인은 왜 시간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지 잘 모르겠다. 짐이라면 잡화점을 뜯어고쳐서라도, 이 바보 같은 차원을 벗어나는 길을 물색했을 터인데, 주인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을 꺼리는 것인가?”

 

“차원이동에 대해서 레시아가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거 아니에요? 다른 장소로 가서 자원이 있다고 한들, 이곳처럼 마법이 발달되어있는 장소가 아닐지도 모르고, 이곳과 비슷한 곳이 아니라 전혀 맞지 않는 환경이라면, 거대한 중량에 못 이겨서 짓눌려버리거나, 원인도 모르는 병에 걸려서 죽어버리거나, 자기장이 너무 강하거나 약해서 몸에 이상현상이 올 수 있다고요?”

 

“짐은 마왕이니 괜찮다.”

 

“기본적으로 저부터 생각하고 발언하면 안 될까요?”

 

레시아도 이곳이 그리 싫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처럼 마왕의 입장이 옅고 인간과 함께 공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과를 얻어낸 장소도 많지 않으니까. 이곳이 살기 좋은 이유라면, 어처구니 없게도 내 앞에 있는 검은 고양이가 만들어낸 업적이다. 사실상 인간들은 마물에 대해 부정적인 틀로만 보고, 천계와 마계는 오래 전부터 싸워왔으니 인간이 천계의 편에 붙는 걸 기회로, 마족을 모조리 몰아낼 생각을 했으니까.

 

내가 모르는 시간 속에서 레시아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결정으로...당연히 그 방법이 좀 날로 먹는 방법이긴 했지만, 어쨌든 공존을 이루어낸 결과물을 모조리 버리고, 이 땅에서 벗어나 새로운 땅을 찾아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당연히 병적인 이유라던가 환경적인 면에서는 마리아가 비슷한 차원을 몇 개 알고 있다고 하니, 그곳으로 날아가도 상관은 없지만, 한 때 레프리시아의 선생님으로서 조금 더 노력을 하고 발상의 전환을 겪게 해주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생각을 좀 하죠. 시간을 없애도 시간을 찾으면 그만이잖아요?”

 

“없어진 시간을 어떻게 찾는가? 주인은 언제나 이상한 말을 한다. 나중에는 이상한 양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대체 왜 양이 나오는...아니. 진짜! 정말로! 재미없으니까! 제발 좀 그 바보 같은 말장난 그만해요!”

 

대체 누구에게 배워온 거냐.

누군지 몰라도 그 쓸 때 없는 말을 알려준 녀석의 혀부터 뽑아야지.

 

“그래서 주인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없지 않는가? 이곳은 결국 멸망하기 마련이니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좋다.”

 

“레시아의 선생님은 불가능한 문제가 있으면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라고 하던가요? 어떻게 마왕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웃기네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해버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 비아냥거리는 태도와 이미 모든 게 다 끝났으니, 뒤집어 엎어버리자는 모습을 보아하니 욱해서 나왔는데...

 

“주인. 선생에 대해서 거론하지 말거라.”

 

“정말 어처구니 없지 않아요? 아니면 레시아를 가르친 선생님의 교육방식이 잘못 됐거...”

 

-파아악!

 

내가 나를 욕하는 것도 웃겼지만, 레시아의 발톱이 내 옆에 있는 벽을 잘라버리면서, 어마어마한 살기를 뿜어냈다. 나를 거의 죽일뻔한 어릿광대를 처음 마주했을 때, 이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릴만한 양이 그대로 나에게 직격코스로 날아오고 있었는데, 사실상 지금까지 용사 중에 단 1명만 레시아 앞에 서 있는 이유를 알게 된 순간이다.

 

“선생에 대해서 거론하지 말지어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어떠한 분노보다 지금 것이 가장 컸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시아는 화만 낼 줄 아는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남의 생각까지 고려할 줄 아는 이상한 마왕이다.

 

“주인이 더 이상 짐의 선생을 모욕하지 않는다면, 짐도 주인의 생각에 맞춰서 불가능할 법한 시간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법을 생각하도록 하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곳을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곳이니라. 대부분 마물과 인간은 전쟁을 해야 하니 말이다. 기껏 찾아온 평화로운 삶을 부수는 것은 주인이 싫어하는 것인지 않는가?”

 

“그래도 냉정하게 거기까지 생각해주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저도 레시아의 선생님을 모욕하지 않도록 하죠.”

 

순순히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그러자 레시아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작은 앞발을 핥았다. 그 전에 자학을 하는 것은 내 스스로가 그만둬야 할 항목 중에 하나이기에, 계속해서 말한다면 어느 순간 자괴감이 들어서 인생살기 싫어지지.

 

“그런데 주인은 이런 일을 어째서 짐과 같이 해결하려고 하는가? 루시피나와 루니아, 마리아도 있노라. 오히려 시공간마법에 관련된 것은 티아라는 요정도 있다.”

 

“시공간에 문제가 생겼다면 오히려 티아가 이쪽으로 달려왔겠죠. 하지만 지금은 티아가 없다는 것을 보아, 티아가 있는 장소와 우리 쪽의 장소가 단절되어버린 거에요. 단순히 시간만 멈췄다면 티아가 나타날 수 있지만, 우리는 완전히 시간이 없어졌으니까요. 어렵게 말하면 우리는 완전한 3차원이 되어버린 것이며, 시간까지 같이 있는 티아의 공간은 4차원이란 소리에요.”

 

선은 1차원, 면은 2차원, 그리고 공간이 3차원이며, 시간까지 같이 있는 것이 4차원. 억지로 시나가 밖에서 우리를 움직일 수 있게 도와주고 있지만,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도 저 앞에 있는 동상처럼 멈춰버릴 것이다.

 

“4차원에 대해서는 모두가 생소하지 않는가? 시간축을 보면서 통제할 수 있는 자들은 없으니까.”

 

“마왕이 어떻게 그걸 알아요?”

 

“잊었느냐? 짐은 운이 좋게도 마왕이니라. 주인이 심심풀이로 마리아에게 잡다한 책을 받고 있으나, 사실은 짐이 그걸 먼저 읽고 주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인정하면, 그때야말로 주인이 읽을 수 있는 것이니라. 그보다 시간을 4차원으로 두는 것은 한가지의 예시일 뿐. 솔직히 짐도 모르는 좌표이기 때문에 설명할 방법이 없노라. 우리가 귀환마법을 사용하거나 좌표마법을 사용할 때도, 3차원을 기초로 하지 않는가? 만약 시간까지 가능했다면, 그것은 이미 시간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는 시간을 임시로 4차원의 마지막 부분으로 대입을 해서 해결해야겠지?”

 

무슨 마왕이 저래?

나중에 상대성 이론까지 나오는 거 아냐?

 

“대입을 해서 해결하던 아니던...아무튼 문제는 시간을 찾는 방법이겠죠? 그러면 이제 잡화점의 물품에 시간과 관련이 있는 것이 있어야 할 텐데. 모든 땅에 마나와 마기, 신성력을 합친 새로운 에너지로 한 가득 채운다거나.”

 

“그런 일을 하다간, 우리가 전부 죽어도 해결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하긴. 마법석도 못 이기고 다 부셔졌는데.

지금에 와서 증폭기라던가 제어장치로 어떻게 할 수 있을 만한 에너지가 아니지.

그렇다고 내가 희생하기에는 무리가 보인다.

 

아마 잡화점 멤버가 생각할 때.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할 방법은 2가지인데.

첫 번째는 각본가를 찾는다.

두 번째는 다른 공간에서 시간을 찾아서 쓴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 외각에서 시간을 움직이게 하는 시나에게 감사해야 할 지경이네요. 그런데 시나가 만약 시간을 움직이게 하지 않고 멈췄다면, 오히려 각본가도 같이 멈춰서 종말을 맞이했을 텐데. 유랑극단인지 뭔지 하는 애들은 생각이 있는 애들이래요?”

 

‘말 그대로 그냥 다같이 죽어버리자!’라고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졌다. 고민의 늪에 빠져서 한참을 허우적거렸을 때. 배에서 뭔가 기이한 압박감이 전해져서, 시야를 밑으로 내려다 보고 있자니, 검은 앞발을 이용해서 꾹꾹 누르면서 붉은 눈을 지닌 레시아가 올려다보았다.

 

“레시아. 그 모습으로 계속 있으니까 종종 자신이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고양이들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겐 이러지 않는다. 애초에 인간형으로 변하면 주인이 부담스러워서 긴장하지 않는가? 부부인데도 불구하고 붙어있어야 하는 모습은 동물형태라니.”

 

“인간형이라던가 동물형이 있다면, 마왕상태는 따로 있는 거에요?”

 

“기본적으로 인간형태가 1단계 변신이고, 짐의 경우에는 총 5단계까지 변신할 수 있다.”

 

아무리 변신합체 로봇이라도 5단계는 못해.

어떻게 변신을 하면 5단계까지 할 수 있냐?

어디 5층석탑이라도 되는 거냐?

 

“차고로 짐의 본 모습은 꽤나 흉측한 모습이니 보이고 싶지 않으니, 변신하라고 재촉하지 말지어다.”

 

“안 할게요.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라고는 안 해요.”

 

“그래야 짐의 신부지.”

 

“남자는 신랑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나는 남자이지만 여자에게 신부라고 불려지고 있는 게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새벽에, 느닷없이 잡화점에 노크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자동으로 움직이는 몸을 이끌었고, 내가 일어나려고 하자마자 레시아는 내 배에서 카운터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런 시간에 손님이 있다는 것은 당연해야 하지만, 워낙 사람이 잘 안 와서 그런지 내가 더 긴장이 되었을 무렵. 문은 자연스럽게 문고리가 비틀리고, 위에 있는 종은 손님이라고 확인했는지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여운 어릿광대가 왔습니다!”

 

당차게 들어온 어릿광대는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기나 긴 고민에 빠지는 동안, 어릿광대는 나와 레시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귀엽지 않으니 나가겠습니다!”

 

“아냐! 들어와! 나가지마!”

 

유랑극단의 한명인 어릿광대가 제 발로 찾아왔다는 뜻이라면, 무언가 전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 당연한 법.

 

“마침 찾고 있었는데 잘 되었군. 유랑극단 중에서 사회자가 시간을 날려먹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당연히 그것에 대해 찾아온 거야. 자기야.”

 

“그 호칭은 제발 한 명만 써줬으면 좋겠는데.”

 

릴리스도 나를 부를 때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어릿광대가 깔끔하게 3바퀴 돌고 정확하게, 나와 시선이 마주하며 멈춘 뒤에 건방진 목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첫 번째로 호칭을 바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왜냐하면 자기와 나는 운명의 붉은...소방용 도끼로 이루어져있는 걸!”

 

“운명의 소방용 도끼는 뭐냐? 우리의 운명은 화재를 진압하는 거냐?”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태클을 걸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는 어릿광대.

 

“앞으로 3일 뒤에는 공간이 사라질 거 같아. 그걸 전해주러 온 거야. 비록 이곳은 시간이 멈추고 있다고 해도, 억지로 시간을 움직이는 여신님에게는 반갑지 않는 소식이겠지?”

 

 

끔찍한 소식은 늘 예상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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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서 춥네요...

얼어죽을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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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7

486

 

 

 

세계는 멸망해도 나를 여장시키겠다라는 발상은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도, 제발 부탁이니 그 이상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나가 힘을 공급받기 위해 자신의 분신을 수거하려는 듯 어느 사이에 사라진 동안, 검을 들고 루니아 누나와 대치하고 있었다. 보통 검사에게 검을 드는 사람의 의도는 결투라고 생각하지만, 내 경우에는 날개 옷을 찢어서 태워버리겠다는 심산이었으니까.

 

“카일도 참. 그렇게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있지마세요오?”

 

“그 옷을 이 세상에서 분자단위로 만들어야 제 속이 좀 풀어질 것 같습니다만!”

 

저 옷을 이룬 실 하나를 절대로 남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카운터 위에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는 검은 고양이가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했다.

 

“어째서 주인은 그렇게까지 싫어하고 거절하는 것인가? 그냥 한번 입고 나서 벗으면 빨리 해결될 것을? 강아지가 장난감을 물고 있을 때 억지로 뺏으면 더욱 더 놓지 않는 법이니라. 그러니 반대로 생각하거라‘입어도 좋다.’라는 생각. 언제나 관점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남자에게 있어서 여장이 잘 어울리는 것 또한 기적이니라. 어째서 주인은 21세가 되면서도 루니아보다 키가 작고, 수염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피부가 매끈한 건가? 주인도 혹시 여자로 그려놓고 남자로 우겨서 남자가 된 케이스인건가?”

 

“여긴 글밖에 없으니까. 그리 자세하게 설명한다고 한들 우리의 존재에 대한 상상력을 더 불어넣는 것뿐이잖아요.”

 

결국 레시아는 나보고 입으라는 말을 고무줄처럼 늘린 것뿐이다. 여장을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즐거움을 선사해준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 사사로운 것보단 눈 앞에 당장 닥쳐온 위기에 집중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유랑극단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각본가를 찾거나 날아간 시간을 찾아야 하잖아요. 날아가버린 시간을 찾는다는 그 자체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제발 이런 거에 힘을 빼지 말자고요!”

 

나의 짜증이 섞인 외침이 잡화점에 울려 퍼져도, 주변에 있는 검은 나무가 다 흡수해서 들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귀가 꽉 막혀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루니아 누나는 여전히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고, 루시피나는 내 빈틈을 찾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카일이여. 첩이 생각한 바로는 그냥 입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마지막이 될 수 있다면 이 시간을 좀 더 즐겨야 한다.”

 

“마리아가 없는 동안 당한 게 얼만데 뭘 즐겨요! 이렇게 질긴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야! 손님 받아라!

 

이젠 손님을 알리는 종까지 나에게 시비를 거는 건가? 그보다 손님이 아니라 아리엘이잖아.

 

“어머나? 마왕님은 잡화점이 부활하자마자 이곳에서 쭉 쉬고 있는 거에요?”

 

“릴리스. 항상 성안에서만 박혀있는 줄 알았는데, 세상이 이렇게 되니 그대도 다른 몽마처럼 꿈의 미로에 인간이 없어서 직접 나온 것인가?”

 

색욕의 공작이라고 불리는 몽마들의 여왕. 릴리스. 아리엘과 같은 은발이지만, 물기를 머금은 보라 빛 눈동자가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살며시 입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는“아냐. 난 맛없어. 콜레스트롤 수치가 높다고!”라는 말을 자동으로 내뱉을 뻔했지만, 꾹 눌러 삼키고 꿈의 미로에 사람이 없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꿈의 미로는 사람의 의식을 붙잡아놓는 장소. 어처구니 없게도 모든 대륙에서 혼수상태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몽마들이 꿈의 미로로 안내하여, 영원히 정기를 흡수당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과 같다. 당연히 릴리스가 만든 꿈의 미로이기에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보이고 있지만, 천칭들의 모임에서 과장된 이야기이다.

 

최근 릴리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2일이나 3일정도 되면 알아서 풀어주는데, 꿈의 미로에 갇혔던 사람이 다시 자야 한다고 억지로 꿈나라에 가려는 기이한 노력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일을 안 한다는 문제점이 더 크긴 했다.

 

아무튼 꿈의 미로에 사람이 없는 이유라면, 지금은 마왕이 모든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포지션이라서 가둘 필요가 없어졌다고 하는 게 좋겠지.

 

형식상 지배이지만 일시적으로는 인간과 마물이 공존하는 형태다.

 

“제 방에 들어오고 싶다는 인간이 너무 많아서 말이죠. 당분간 이곳으로 몸을 대피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그보다 자기는 잘 있었어?”

 

천연덕스럽게 내 옆에 달라붙으면서 친근하게 대했지만, 찰나의 순간에 살기가 내 등을 찔렀고, 레시아가 못마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주인에게 붙지 말거라!”

 

“저도 반지를 받아서 잡화점의 멤버라고요? 카일을 독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그러기엔 릴리스가 독점하고 있잖아요.”

 

뒤에 있는 아리엘이 말하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빅터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내가 아리엘에게 말을 걸자. 아리엘은 나와 시선을 마주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뇨. 빅터를 찾았으니 다행이었는데 300년이 지난 시점이니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어차피 시간이 날아가버린 터라 신체나이가 정지된 상태에서 지냈어도, 오히려 300년동안 아무일 없었던 게 더 이상한 거에요. 게다가 빅터는 귀족이 협박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혼인을 했다고 하고...”

 

“이상한 거 물어봐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어차피 스트레스를 풀 요소는 많으니까요.”

 

아리엘이 과거의 연인을 포기하고 태연하게 있는 것은 자랑스러웠지만, 내심 걱정되는 것은 스트레스를 풀 요소가 많다는 말이었다.“스트레스가 한 가득 쌓였으니 각오해라.”라는 듯한 협박은 곧 현실이 되기 시작했는데.

 

“루니아 언니! 지금이에요!”

 

“와아~!”

 

“이런 망할!”

 

아리엘의 외침으로 순식간에 루시피나와 루니아가 점프를 하기 시작했고, 릴리스가 놔주질 않아 그 상태로 충돌이 일어났다. 번개가 번뜩거리는 시야반전과 사방에서 난잡하게 옷을 잡아당기는 기분. 그게 3분정도 지나면 내 옷이 어느새 바뀌어 있는 놀라운 마법이 아닌 마법을 경험하고 있었다.

 

“제길. 이번엔 날개 옷까지...”

 

“와아~ 선녀가 따로없네요오. 카일. 여기 좀 잠깐 보세요오.”

“신랑! 정말 잘 어울려!”

 

루시피나의 감탄이 내 가슴에 비수가 되어 심장을 가루로 만들고 있을 때. 루니아 누나는 어디서 꺼내왔는지 사진기를 내 앞에서 들이밀고 있었다. 너무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아래를 보니, 릴리스는 내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쉬는 모습이었다. 과거에서는 릴리스와 레시아가 같이 지냈으니까 사이가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릴리스.”

 

“왜 그래?”

 

“우선 제 허벅지를 만지는 것부터 그만해줄래요? 옷 위에서 만진다고 하지만 형용할 수 없는 수치심이 지금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으니까.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창문에다 내던질 거에요.”

 

요염한 손짓으로 쓰다듬고 있는 내 허벅지를 릴리스의 손부터 멈추게 한 뒤에 질문을 하도록 하자. 그래도 릴리스는 내 말에 순순히 알았다고 하면서 릴리스의 양손이 배쪽으로 가지런히 놓여졌다.

 

“예전에는 레시아와 어떤 관계였어요?”

 

질문이 이런 이유는 레시아에게 릴리스와의 과거를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마왕님이라...순진무구하고 귀여웠지. 지금은 자신을 떠난 선생님에게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겠다면서, 마왕이 된 이후에 선생님을 찾겠다고 했지만, 그 때 당시에는 질서가 바로잡혀있는 마계를 마왕이 다스려야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내가 극구 말린 결과가 이런 거지. 그 사람도 어째서 저 아이를 나에게 떠넘기고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빨리 지나가서 보통사람이라면 알지 못할 정도. 그러고 보니 내가 레시아의 선생님이었다는 말은 루시피나만 알고 있는 사실일 뿐. 레시아의 낚시질 때문에 말해버린 진실이지만, 그 사실을 루시피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지, 꼭꼭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선녀의 날개 옷을 입히니 정말 선녀이지 않는가? 카일이여.”

 

“이 가발은 대체 어디서 났는지가 더 궁금하지만, 자세한 건 안 물어볼게요. 그리고 마리아. 비어있는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사탕을 먹으면 안 되죠?”

 

레몬 맛 사탕인지 밝은 노란빛의 사탕을 입에서 빼고는“첩은 프로니까 괜찮다.”라고 말한 뒤에...

 

“레로레로레로레로...”

 

“그거 하지마!”

 

내 입에서 소리치게 만들었다.

 

아리엘은 루니아에게 도망치고 있는 모습을 보아, 남장을 당하기 싫어서 사방팔방에 뛰어다니고 있었고, 루시피나는 과자를 내 입에 넣어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검은 고양이는 엎드린 체 눈을 감고 있을 뿐.

 

내가 생각하라고 할 때는 엉뚱한 말을 하면서도, 정작 내가 바빠지거나 이런 일에 휘말리면 레시아가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생각해주기도 한다.

 

세상이 망해도 잡화점 안에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릴리스?”

 

“응?”

 

“지금 뭐해요?”

 

당연히 세상이 망해도 잡화점 안에만 있으면 하루에 한번 꼴로 사고가 터져서 문제지.

 

“그야 치마 안에 들어가려고 잠깐 들추고 있었는데?”

 

“거길 왜 들어가요! 두더지도 아니고!”

 

“괜찮아. 잠깐만 들어갔다가 30분 뒤에 나올 거니까.”

 

“제가 안 괜찮으니까 당장 손때요!”

 

그리고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솔직히 용병으로 일했던 것보다 더 힘들다.

 

“그렇군. 그거이니라!”

 

모두가 레시아의 외침에 전부 시간정지라도 당한 듯이, 고개를 돌려 검은 고양이에게 집중되어있었다. 카운터에서 날렵하게 내려온 한 마리의 맹수...처럼 보이는 고양이가,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입은 치마 속으로 들어...

 

“들어가지 마!”

 

“냐아아아아!”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가길래 3초만 더 늦었어도 큰일날 뻔했다. 그 사이에 아이언 클로가 잡아내서 레시아를 허공으로 인도하고 있었고, 방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했길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하다가 외치면서 뛰쳐나오는 톤과 비슷하게 외쳤는지 질문을 해야만 했다.

 

“대체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한 거에요?”

 

“그야 당연히 주인에게 붙어있는 이들보다, 더 가깝고도 친근하게 접촉할 수 있는 명당자리를 찾고 있었노라. 릴리스의 파렴치한 행동이 짐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으며, 짐은 단순한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마왕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의 치마폭에 감싸이며...니야아아아앗!”

 

남자의 치마폭에 감싸면 여자는 좋아하던가?

아니, 고양이는 좋아하던가?

 

“저는 여태까지 레시아가 이 상황에 대해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답을 내놓은 줄 알았더니, 지금 이 사람들 사이에 껴서 뭘 하려고 했던 거에요!”

 

“아프다! 아프다! 주인! 어째서 마법이 봉인 됐는데도 이렇게 아픈 것이냐! 놔라! 노아라!”

 

 

결국 레시아는 아이언 클로로 인해, 내 어깨 위에서 축 늘어진 상태로 가만히 있었지만, 여전히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레시아에게 언제쯤 말해야 할지,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가늠을 하며 기회를 뒤로 미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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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와서 뒤척이다가 아침에자서 늦었어요.

핳핳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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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6

485

 

 

 

잡화점에 돌아와서 눈 앞에 바로 닥쳐온 사건에 대해 신경을 쓴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가장 큰 오산이라고 보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만 신경을 쓰고 다른 이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뜩이나마 시간이 날아가버려서 멸망한다거나, 마네킹의 삶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 정지된 시간 속에서 유랑극단이 보고 싶은 것은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과 결과물이겠지.

 

각본가가 쓰는 예언 중에서는 나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도 빗나가거나, 틀어지는 방향으로 진행이 될 테니까. 아무튼 다시 잡화점으로 돌아오면서 레시아는 늘 그렇듯 마왕의 입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앞발이나 핥으면서 카운터 위에 올라와있고, 마리아와 루시피나는 루니아 누나가 요리하는 것을 전력으로 막고 있었다.

 

서로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이라도 이 사람들은 서로 싸우겠지.

 

“이런 편안한 기분도 오랜만이로다. 300년동안 본래의 마왕생활로 돌아가서, 무시무시한 용사들을 처리했기에 긴장을 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라. 그러니 주인. 오랜만에 쓰다듬어라.”

 

마왕인가?

아니면 고양이인가?

 

가끔 레시아를 보면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시작하는데, 고양이의 모습을 오랫동안 해와서 그런지, 마왕성에서 마족들을 이끄는 그런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보단, 이런 고양이 모습이 더 정감이 가기 시작했다. 오른손이 레시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에도, 고양이의 본성이 남아있는지 자신의 머리를 이리저리 비비면서,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고양이 입의 구조상 웃고 있는 얼굴처럼 양쪽 끝이 올라가있는 구조이지만, 지금은 잠깐의 행복을 느긋하게 즐기는 중이라고 본다.

 

“주인은 여전히 쓰다듬는 것이 능숙하군. 게다가 아리엘과 같이 봉인 되었을 때도 별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니라. 만약에 여자가 또 하나 늘었다면 마왕성 지하감옥에 가둔 다음,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양이 베기를 사용했노라.”

 

“제가 아리엘에게 수작을 걸기보단, 아리엘이 저에게 수작을 거는데요.”

 

“그래서 문제이니라. 남자인 주제에 여자에게 습격이나 받는다니, 그거야 말로 정말 꼴사나운 모습이 아닌가?”

 

가장 맨 처음에 습격한 건 레시아거든요?

 

“그런데 잡화점 안에는 시간에 관련된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시간에 관련된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과거로 갔을 당시에 잡화점 내부에서 시간이 멈췄었고, 티아만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돌아다녔지만, 잡화점 건물에서 외부와 내부를 중심으로 시간이 따로 흐르는 것이 맞겠지.

 

아직까지 잡화점의 미스터리가 전부 밝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에 대해선 잡화점에게 물어보거나, 엘티노스에게 물어봐야 하지만...천계와 인간계의 통로가 막혀버린 이상, 엘티노스에게 물어본다는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소거되었다.

 

“그나저나 비둘기가 그렇게 걱정되는 것인가?”

 

“비둘기가 아니라 올빼미입니다.”

 

머리 위에서 하얀 올빼미 하나가 내려오더니, 내 머리 위에 날카로운 발톱으로 착지하면서 말을 꺼냈다.

 

“다음부터 올 때는 내 머리 위에 착지하지 말아줘. 차라리 모자를 쓸 때 착지를 해주던가...”

 

“괜찮습니다. 마스터. 이 정도로 마스터의 모발은 튼튼하니까요.”

 

사무적인 어조로 말한들 지금 탈모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발톱이 균형을 잡기 위해,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 머리를 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시나가 잡화점에 왔다는 소리는 밖에 시간이 멈췄다는 소리인가?

 

“밖에서 우리가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도록 힘써주고 있다는 건 들었어. 여기에 왔다는 것은 지금 모든 시간이 정지했다는 소리지?”

 

머리 위에 있는 하얀 올빼미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 눈동자를 아무리 올려봐도, 마주할 수 없으니까, 시나가 앞쪽으로 구부려서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건 분신입니다. 마스터에게 힘을 공급받기 위해 잠깐 만들어냈지만, 마스터 안에 있는 에너지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이런 분신으로도 받아내기가 힘듭니다. 차라리 본체로 찾아와서 공급을 받는다면 좋겠지만, 다음에는 30체의 분신을 만들어서 공급받으러 오겠습니다.”

 

30체의 하얀 올빼미들이 이곳 저곳에서 날아든다고?

여기는 호그와트 마법 학교가 아냐.

잡화점이지.

 

“시나도 오자마자 하는 소리의 내용이 내 안에 있는 에너지구나.”

 

“하지만 마스터가 담아낸 그 에너지는 제가 방출하는 에너지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확실히 신성력과 마나, 마기를 합쳤으니까. 초창기에 창조주가 지녔던 힘과 같을지도 몰라. 시나는 다른 차원에서 창조주역할을 했으니까, 닮아있다는 것은 무리도 아닐 거야.”

 

내 말을 듣자 시나는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내 손에 쓰다듬어지고 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냥캣. 각본가는 찾으셨는지요?”

 

“아직이다. 의외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중이니라. 주인도 이렇게 잡화점에 도착했으니 슬슬 진행해야겠지.”

 

“다음계획이라뇨?”

 

여전히 내가 모르는 것들을 전부 담고 있는 판도라상자마냥, 레시아는 내 손길에서 벗어나 4발로 일어섰다.

 

“지금부터 유랑극단의 멤버인 맹수 조련사와 어릿광대를 잡을 것이다.”

 

어릿광대와 맹수 조련사를 잡는다니.

죽인다는 것보단 포획에 가까운 뉘앙스였다.

 

“같은 유랑극단의 단원들을 잡아서 고문이라도 하게요?”

 

“그런 포학한 방법으로 그 두 명이 말할 거라면 오히려 짐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살아가면서 가끔씩 봐온 것으로 보아, 그렇게 쉬울 정도로 유랑극단에 대한 정보를 말하는 자들이 아니기에, 미인계를 쓰는 작전으로 해야 할지도 모르지.”

 

그 말에 잠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미인계를 왜 그런 애들에게 사용하는지에 대해서도 그렇고, 누가 미인계를 사용하는 가에 대해서도 그렇고, 지금 당장 이것에 대해 반론을 하거나 막지 않는다면, 내 오래된 경험으로 예리해진 감각이 매우 위험하다고 알려줬으니까.

 

“미인계를 그 애들에게 왜 써요? 그보다 어떻게 써요?”

 

“그야 어릿광대는 주인을 맹목적으로 같은 부류에 넣으려고 하지 않는가? 맹수 조련사의 경우에는 카린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보아, 손쉽게 배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제가 그들과 마주해봐서 잘 알고 있지만, 우선 어릿광대는 제 안에 있는 월식이 사라져버린 이상, 그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저를 좋아하려고 들지 않아요.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오히려 공격해서 죽이고 힘을 흡수해가려는 포식자처럼 행동하려고 하는 거지, 어릿광대가 절 좋아한다는 의미는 절 죽이겠다는 의미와 같은 거라고요. 게다가 맹수 조련사의 행동은 여성 한정으로 매우 친절하게 대하지만, 친절한 것은 친절한 거고...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맹수들을 오히려 더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걸로 봐선, 쉽게 배신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보다 보통의 전투력으로 그 둘을 잡는다는 그 자체가 무리야.

 

“그러니 우선 시도라도 해야 한다.”

 

“시도는 무슨! 레시아! 그게 무리수라고 하는 거에요?”

 

“무리수? 그건 무슨 물이더냐? 아리수의 친구이냐?”

 

“지금 그런 말장난이 나오냐!”

 

“냐아아아아아! 어째서 아이언 클로는 변함 없이 강한 것이냐!”

 

있는 힘껏 아이언 클로를 하고 나서 오른손에 쥐가 살짝 나는 것 같았지만, 축 늘어져서 카운터에 쓰러져있는 레시아를 바라보며 시나는 천천히 이야기했다.

 

“냥캣의 작전에는 결점이 많아 보입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알아주는 것이 시나라서 다행...

 

“마스터가 착용할 여장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 말이죠.”

 

이라 생각했는데.

 

“너희들은 그냥 날 여장시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 아냐?”

 

“우선 고풍스러운 하늘색 바탕의 하란복장을 계량한 것과 더불어, 주변에는 연분홍 빛의 날개 옷으로...마스터? 아, 아픕니다. 아이언 클로는 그만해주세요. 분신이 아파합니다.”

 

“분신이 아파하던 말던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그런 이상한 여장은 안 할거니까. 그런 기묘한 물건을 만들려고 하지도...”

 

시나를 내 머리 위에서 때어낸 다음, 아이언 클로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훈계하려고 있는 사이에, 시선이 자연스레 주방으로 쏠렸을 무렵. 루니아 누나는 시나가 말한 대로 정확하게, 계량된 하란복장과 더불어 연분홍 빛의 날개 옷이 가지런하게 접혀있었고, 오른쪽 옆머리 일부를 이용해서 땋은 듯한 머리모양에, 뒤에는 연꽃이 활짝 핀듯한 머리핀이 존재했다.

 

이럴 때는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루니아 누나는 음식을 만드는 줄 알았더니, 주방에서 코스튬을 완성한 것일까?

 

내가 말을 잘 하다가 끊어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내 평생에 기억이 남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안 입어요. 집어 넣어요.”

 

“그래도 새로운 백장미 시즌을 맞이해야 하는 걸요오?”

 

“무슨 시즌이에요? 시간이 날아가버려서 세상이 망하게 생겼는데!”

 

무의식적으로 내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화를 내자, 내 왼손에 매달려있던 시나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마스터? 화를 내면서 힘을 주면 제가 더 아픕니다. 아이언 클로는 풀어주시고 이야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전히 사무적으로 이야기하는 터라 아픈지 안 아픈지, 감정은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았지만, 날개를 파드득거리면서 거대하고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두 다리가 허공을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시나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자 축 늘어져있는 레시아 옆에, 날개를 쭉 펴면서 땅에 축 늘어진 하얀 올빼미. 그 틈에 루니아 누나가 나긋나긋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내 손바닥을 보여주며 멈추라고 무의식적으로 행했다.

 

“마왕님의 작전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요오? 카일이 여장을 한다면 어릿광대가 넘어올지도 몰라요오?”

 

“넘어온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어릿광대도 백장미의 구독자이기도 하고...”

 

“그 빌어먹을 놈의 하얀 잡지는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거야!”

 

무심코 거친 말이 산발적으로 튀어나갔다. 그 놈의 백장미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다른 이들도 그렇고, 무심결에 다른 곳을 멸망시키는 곳도 그렇고, 백장미에 연관되어있는 사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여장으로 사람 하나를 꼬시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남자가 애초에 여장하고 미인계를 쓴다는 그 자체부터 아웃.

내 기준으로 하기 싫다는 의미다.

 

“어릿광대는 애초에 성별도 모르는 도플갱어인데, 여장을 해서 미인계를 쓴다고 해서 통할 리가 없죠.”

 

“아니. 반대로 생각해서 도플갱어는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하니, 짐은 이 작전이 제대로 먹힐 것이라 생각하니라...냐아아아아! 그만! 그만하거라! 귀는 언제나 설정이 민감하다고 하지 않았는가아아아!”

 

“시끄러워! 이 바보 같은 고양이야! 설정에서 좀 조정하면서 살던가!”

 

분노에 몸을 맡긴 체 검은 고양이의 귀를 잡아 늘려버린 뒤에, 내 등에서 느껴지는 영문도 모르는 분위기에 뒤를 돌아봤을 때, 루니아 누나가 곱게 접혀진 옷을 들고 있는 상태로, 당장이라도 나에게 입히려는 투기를 보이고 있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러는 걸 보면...

 

정신상태가 아다만티움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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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비정상적인...이 아니라 비범한 잡화점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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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5

484

 

 

 

레시아는 내 무릎 위에서 장대한 계획을 꾸미는 것 같지만, 인간을 통제한다면 언젠가는 각본가가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상대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각본가를 인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까? 그보다 왜 예전보다 더 찰싹 달라붙는 기분이 드는 걸까?

 

“저기. 레시아. 예전에는 이 정도로 달라붙지 않았잖아요.”

 

“주인에게 붙어있으니 꽤나 기분이 좋아서 말이다. 마나의 소용돌이가 쳤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포근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생각한다.”

 

“그건 연인 사이들이 서로 붙어있을 때 느껴지는 감정 아니에요?”

 

“주인과 짐은 부부이니라. 당연히 그 기분은 알지만 이건 좀 차별되는 기분이다. 마왕의 입장으로는 이 단어를 말하는 것이 바보처럼 보일지 몰라도, 구원을 받는다는 느낌이 강할 정도다.”

 

구원이라.

그런 말을 들으니 나와도 거리가 먼듯했다.

정확하게는 구원을 받는 입장보단, 구원을 해주는 입장이 되었으니까.

그런 무거운 생각 때문에 잠깐 머릿속에서 놓으려고 했는데, 끈질기게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 레시아의 팔이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고개도 철저하게 내 상체에 기대고 있으니, 떨어지라는 단어를 고르고 싶지만 은은한 향이 내 입을 봉쇄하듯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응석을 부리고 싶은 건지 아닌지 몰라도, 레시아에게 질문할 것은 또 한가지 있었으니.

 

“저기. 레시아. 얼마나 지났길래 계속해서 붙어있는 거에요? 제가 봤을 때는 상당히 오래된 것 같지만, 루니아 누나를 보았을 때는 전혀 달라진 적이 없어서 놀랬거든요.”

 

“그야. 당연히 그러겠지. 주인이 사라진 뒤로 300년의 시간이 멈춰있었으니까.”

 

뭐? 라고?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지금 제가 잘못들은 건가요? 300년이라뇨? 루니아 누나가 3번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치잖아요? 게다가 300년동안 절 기다려온 거에요?”

 

“맞다. 짐은 주인을 300년동안 쭉 기다려왔노라. 모든 인간들도 그렇고, 주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사회자의 농간에 모조리 당해왔으니까.”

 

그래서 천계에서는 지상으로 내려오지 아니하고, 시나가 이곳에 없어진 이유는 대략적으로 알 것 같았다.

 

“지금 사회자는 어디 있죠?”

 

질문에 레시아의 작은 손이 옷깃을 살짝 붙잡고 대답을 해줬다.

 

“주인이 사라지고 검은 존재를 토벌하기 위해 세피르라는 몽마를 분리시켰을 무렵. 또 다른 남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검은 존재와 융합해버렸고, 검은 존재는 모든 세상을 덮어버린 뒤로 이 세상의 존재들이 아닌, 시간을 먹어 치웠다고 해야겠지. 따라서 지금까지 죽을 사람은 죽지 않고, 신체의 노화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로 이 공간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럼 지금으로부터 1초 뒤에는...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겠네요?”

 

“300년의 시간이 지났으니, 아마 시간을 다시 되찾는다면 탄력을 크게 받아 단숨에 세상이 바뀔 것이니라.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은 0.001초도 지나지 않는 사실이 오히려 무섭긴 하군.”

 

시간이 멈추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시간은 멈춰있다는 소리는 모순처럼 들려왔다.

 

“그래도 뭐...300년동안 짐의 선생이라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인간 때문에 골치 아팠지만, 바람을 피우면 안 되는 걸 알기에 짐은 지금까지 기다려온 것이니라. 주인의 경우에는 짐이 바람을 피우면 아이언 클로가 아니라,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과거의 연을 모조리 끊을 줄 아는 남자이니까.”

 

“그것도 예전에 페어링을 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거에요?”

 

“아니. 페어링을 안 해도 알 정도로 오래 지냈으니 안다. 무엇보다 마왕을 상대로 청혼을 할 인간은 없기도 하고, 주인도 얼떨결에 짐과 같이 혼인을 했지만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받아들여주지 않았는가?”

 

그야.

일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싫은 내색을 할 시간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거절하지 않았던 내가 조금은 자랑스러웠다.

 

우선 잃어버린 시간부터 되찾는 것이 우선인가? 시간을 잃었다는 것은 곧 세계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하니까.

 

“그럼 지금 시나는 어디에 있는 거에요?”

 

“비둘기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곳을 유지시키고 있다. 창조주와 같은 권능을 가졌으니 유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언제 이곳이 무너질지는 모르지.”

 

세상에 혼돈과 광기만 있으면 우리는 즐겁다라는 것이 유랑극단의 신조였었는데, 지금 제대로 난리치고 있으니 이름 값은 하는 모양이지만, 지금 당장 시나를 불러오지 않으면 존재가 소멸할 것만 같은 불안함에 레시아에게 부탁했다.

 

“시나를 불러주세요. 300년동안 이곳을 유지하기만 해도 많이 지쳤을 거에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노라. 오늘 그 비둘기는 주인에게 부족한 힘을 보충하고 간 것 같으니 말이다.”

 

“그걸 어떻게 알...잠깐. 시나가 이곳으로 오면 시간이 멈춘다는 의미에요?”

 

시나가 밖에서 유지를 하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말하고 움직일 리는 없으니, 시간이 정지가 되면 시나가 부족한 힘을 나에게 채워간다는 뜻이 되는 거겠지.

 

“시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멈춘다. 그러니 비둘기가 밖에서 우리를 위해 힘써주는 동안, 각본가를 찾아서 이곳에 시간을 써야 한다는 소리지.”

 

시간을 쓰게 만든다.

각본가가 적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지는 건가?

 

“각본가의 능력은 우주를 뛰어넘는 능력이에요?”

 

“그렇다고 볼 수 있노라. 옛날에는 신이나 마왕이 가장 높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을 가볍게 능가하는 자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노라. 지금도 믿겨지지 않아서 부정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괴롭다.”

 

옛날에 용사는 여신의 부름을 받고 마왕을 타도했다.

하지만 마왕과 여신마저 손을 못쓰는 적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까?

 

그럼 마리아는 어디에 있는 거지?

 

“마리아는 다른 차원에 있다. 주인이 물어볼 것 같아서 미리 이야기를 하지만, 그 허무의 공작은 이미 이 세상을 멸망한 차원이라고 단정짓고 도망쳤지. 사실 주인이 오기 전에 잡화점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른 차원으로 몸을 피하자고 했지만, 짐은 주인이 오기 전까지는 안 가겠다고 버텼다.”

 

“누가 도망갔다는 거에요? 마왕님. 첩이 없는 동안 이상한 말을 지어내주지 마시겠어요?”

 

뒤에 앙칼진 목소리로 레시아에게 따지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짙은 밤하늘처럼 부드러운 눈동자로 내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입 안에 있던 사탕을 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오! 카일이여! 언제 봉인이 깨어난 것이더냐! 첩에게 알려줬다면 다른 차원으로 도피를 하려고 했을 터인데!”

 

“어이! 허무의 공작! 주인을 데리고 도피라니 무슨 소리더냐!”

 

시나가 없으니까 마리아와 말 싸움을 하려고 시도를 하는 레시아를 보며 알아차린 것은, 레시아는 시나가 없어서 많이 외롭나 보다.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과 대등하게 이야기 하거나 말 싸움을 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지. 애꿎은 마리아에게 이상한 누명을 씌워가면서 지루함을 없애려고 했다.

 

여전히 연한 초콜릿피부가 검은 원피스보다 눈에 띄는 마리아에게 입을 열었다.

 

“치마부분에 그렇게 레이스가 잔뜩 달리면 빨래하기 어렵지 않아요?”

 

“첩을 만나자마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거라. 레이스가 한 가득 달리면 귀엽지 않는가? 뒤에 이렇게 붉은 리본이 거대하게 달려있으면,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한 가득 나와서 좋은 것 같노라.”

 

“어린애 같은데요.”

 

“뭣이!”

 

마리아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허리를 살짝 구부리고, 오른손을 자신의 무릎에 지탱하면서 질문했다.

 

“이래도 어른스럽지 않다는 것이더냐?”

 

“거울 안 봐요?”

 

레시아는 “쿠쿠쿡!”하고 고개를 돌리며 웃고 있었고, 마리아는 분한 표정으로 “마왕님!”이라고 호통을 쳤지만, 그것도 잠시...

 

“뭐. 첩이 이 모습으로 있는 이유는 카일이 약간 소녀취향이 있으니 맞춰주는 것뿐이니라.”

 

“그거 위험한 발언이거든요? 그리고 저는 그런 취향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상한 은팔찌를 세트로 착용하고 싶지는 않아요.”

 

“괜찮다. 지금 이 숙주의 나이는 20세가 넘어가니 합법적으로 어른이니라.”

 

그런 발언이 더 무섭다고.

 

“마리아는 뭐하고 있었나요?”

 

마리아는 다시 허리를 펴고 양손을 팔짱을 끼더니,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목소리로 한 마디를 했다.

 

“그야 다른 차원에 있는 존재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었노라.”

 

“다른 존재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그만해요. 그런 거 끌고 오면 무시무시한 일이 더 벌어질 것 같아요.”

 

“그런가? 요그 소토스는 필요하지 않는 거로군?”

 

“불러오지 마!”

 

그걸 불러오면 설령 해결한다고 해도 더 크나큰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쨌든 창조신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무렵. 우리는 그 빌어먹을 각본가를 찾아내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놔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잡화점이 부활을 함과 동시에 시공간적으로 안전한 은신처가 생겼으니.

 

설령 밖에 있는 시간이 멈출지라도, 잡화점 안에만 있다면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시나는 나중에 잡화점 안에서 부르기로 할 테니, 시간이 멈출 것 같으면 잡화점으로 도망쳐주세요.”

 

“잡화점은 상당히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닌가? 시간이 멈춰도 그 안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무시무시하다. 어쩌면 짐이 못된 마음으로 마왕을 하고 있었다면, 언젠가 잡화점이 두발로 일어서서 한방에 날려버리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레시아는 내 무릎 위에 내려와서 땅을 밟았다. 이제 그나마 움직이는 인간들을 찾아 다녀야 할까? 지금 마왕에게 모든 땅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겠지만, 암묵적으로 인간을 지키고 있었던 레시아와 다른 차원을 계속해서 이동하면서 도움을 요청한 마리아에게, 잡화점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아늑한 안식처가 되겠지.

 

이제 잃어버린 시간을 어떻게 되찾아오는 가에 대해...

 

“그보다 검은 존재는 지금 사회자와 융합이 되어서 시간을 먹어 치웠다면, 사회자가 시간을 퇴장시킨 거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카일이여.”

 

서커스에서는 한번 퇴장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맨 마지막에 한번 얼굴을 비추기 위해 나온다. 하지만 맨 마지막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전부 사라진 뒤에 나타나겠지.

 

이곳에 있는 생명체는 언제쯤 퇴장시킬까?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아직까지 퇴장시킬 마음은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유랑극단은 대체 뭘 증명하고 싶은 걸까요?”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가? 주인. 역시 짐이 없으니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듯 하구나. 좋아. 짐이 주인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도록...”

 

“이상한 소리는 레시아가 하고 있는 거에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렇게까지 사회자는 검은 존재와 융합한 뒤에 시간을 퇴장시켜서 모든 존재를 멈추게 했어요. 물론 시나가 지금 밖에서 버텨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거지만, 그래도 좀 이상하지 않아요? 퇴장을 시킨다면 모든 것을 다 날려버려야 이로울 텐데. 지금은 우리가 이걸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고 싶은 행동이잖아요?”

 

사회자는 희생하면서까지 뭘 보고 싶은 걸까?

각본가는 그런 사회자에게 마지막까지 떠넘겨져서는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머릿속에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체 우리들은 아무 말없이 서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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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프레임은 머리 비우고 하기에 좋죠.

농사를 짓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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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4

483

 

 

 

잠깐의 휴식을 취하려고 했는데 루니아 누나는 초인적인 회복능력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나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금이 간 듯한, 혹은 부러진듯한 상체를 낑낑거리며 기어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맞는데, 몸에서 빛이 한번 휘감기 시작하더니 모든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에너지는 몸 속을 부수기도 하면서, 치유하기도 하는 것이 기묘했다. 이 에너지는 대체 뭐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까?‘신 재생 에너지’라고 부르기에는 바보 같고, 딱히 부를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구나. 카일의 몸 속에는 3개가 전부 합쳐진 에너지가 있는거군요오?”

 

“네. 뭐. 그렇죠. 그보다 레시아는 어디 있나요? 그 뭐냐 선생이라고 말하는 사람하고 말이죠. 애초에 루니아 누나를 이곳에 혼자 있는 이유가 뭐에요? 아니, 적어도 용사가 쳐들어온다면 부하라도 같이 넣어주지.”

 

“저에게는 의미가 없으니까요오. 카일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마왕님은 선생이라고 불리는 사람과 같이 동행하고 있는 것 같아요오. 카일이 돌아오기 전까지 견문을 넓히고 오겠다면서 마왕성을 비웠어.”

 

마왕성을 비우면 용사들이 거기에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

 

“어디 여행이라도 갔어요? 마왕이? 오늘 휴일이에요?”

 

“아니. 최근에 내가 용사들을 많이 막잖아요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제가 마왕님 대리역을 맡아버려서 지금까지 무패행진을 하고 있어요오.”

 

그러니까 지금 루니아 누나를 쓰러뜨리면 자연스럽게 마왕을 물리쳤다는 업적이 생기는 건가? 다른 곳의 마왕은 그렇지 않는데, 왜 이곳에 있는 마왕은 항상 자기 일에 관심이 없는 걸까?

 

“그나저나 카일에게 졌으니, 카일이야 말로 마왕을 토벌했다는 보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네요오.”

 

사뿐하게 다가와서 주는 것은 검은색 메달이었는데, 나는 용사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루니아 누나의 손가락부터 밀어서 보상을 거부했다. 찾아온 이유는 언제나 레시아의 얼굴을 보러 온 거니까.

 

“지금 시나는 어디 있는지 알아요? 루나라던가?”

 

“시나는 잘 모르겠고, 루나는 다른 지역에서 공연하고 있을 거에요오.”

 

“오늘 보름달 떠요?”

 

나긋나긋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자, 그 뒤로 금발이 물결을 치기 시작했다. 보름달이 뜬다는 것은 잡화점을 쉬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아무튼 루니아 누나는 잡화점으로 귀환하세요. 이런 일은 이제 더 이상 안 해도 되잖아요?”

 

“그래도 카일이 검은 메달을 가져가야. 제가 여기서 해방이 된답니다아. 루니아 누나는 어마어마한 저주를 받고 있기에, 이 검은 메달을 회수한다면 해방이 될 수 있어요오.”

 

대체 레시아는 무슨 일을 하길래 얼굴 보기 힘들까?

검은 중갑을 벗어 던지고 그 안에는 릴리 기사단 시절에 입었던 하얀 제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탈피라도 하듯 벗어 던진 중갑이 땅바닥에 처량할 정도로 굴러다니는 동안, 기지개를 피면서 자신의 일이 끝났다는 듯이 행복해 하고 있는 얼굴을 보며, 어마어마한 스타일을 지닌 몸매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내려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다른 질문을 하도록 했다.

 

“루니아 누나. 그 선생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본 기억은 있나요?”

 

“아. 만나봤죠. 확실히 카일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어요.”

 

“비슷해요?”

 

어릿광대라면 분명 내 모습과 똑같이 바꿀 텐데.

 

“비슷하지만 카일과 전혀 다르게 사람이 싹싹하다고 해야 할까아. 응석을 잘 받아준다고 해야 할까아. 아무튼 다정한 사람이었어요오.”

 

다정한 사람이라.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사람이 선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잘 알아야 하지 않나?

 

“저와 거의 반대네요.”

 

“아뇨. 비슷해요. 카일도 다른 사람에게 항상 다정하게 굴잖아요오?”

 

네? 누가 다정하게 굴어요?

그거 누구에요?

 

“다만, 그 사람의 경우에는 태양과 같은 다정함이라면, 카일은 달과 같은 다정함이라고 해야겠지요오. 항상 밝고 응석을 받아주고 다정한 것과는 다르게, 카일은 주변에서 은은하고 고요하게...특히 둘만 있을 때 부드럽게 감싸주는 그런 거요오.”

 

확실히 루니아 누나의 설명을 들어보니...

모르겠다.

 

아무튼 인간성이 밝고 좋은 사람이라는 건 확실한 건가.

 

“루니아 누나. 지금 당장 레시아를 좀 봐야 하는데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어라? 혹시 질투우?”

 

내 마음과 표정을 떠보려는 듯이 치켜 뜨며 말끝을 살짝 올렸다. 질투라고 해야 할까? 우선 질투라고 해두자.

 

“부정은 하지 않겠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게 있어요. 바보 같은 술자리로 가위바위보를 해서 인간들의 영토를 빼앗아간 것에 대해 할 말이 있으니까요.”

 

“그거 검은 메달을 천칭들의 모임에게 건네주면, 곧바로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지.

용사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지금 당장 만나서 이야기 할 것이 좀 있어요. 각본가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이 레시아라면, 빨리 해결해야 할 것부터 생기거든요.”

 

루니아 누나는 “각본가...”라고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내 앞에 손을 살짝 건넸다.

 

분명 손을 잡으라는 소리일 테니 잡았지만, 내 시야가 한 순간에 허공으로 이동하던 찰나, 온 몸은 부유공간에 떠도는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밑을 보니...

 

“저기. 여긴 어디에요?”

 

“하늘이죠오. 지금 당장 마왕님이 있는 곳으로 갈게요오.”

 

“저기. 루니아 누나.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공중에서 날아올라 어디까지 갈...아아아아악!”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이 생각났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한 명은 나를 보면서 소원을 3번 말하고 있겠지. 나는 그런 사람에게 찾아가서“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아!”라고 외치고 싶었다. 짧은 망상의 끝에는 어마어마한 충격이 그대로 전해질 것 같았지만, 루니아 누나는 속도를 줄이는 것과 동시에 나를 안전하게 안으며 안착했다.

 

“오늘 부로 이 세상의 빛을 영원히 못 볼뻔했어...”

 

땅에 발이 닿자마자 발바닥부터 허벅지까지 차례대로 힘이 방전되기 시작했고, 내 스스로가 땅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조금 행복했다.

 

“주인이 빨리 건강하게 돌아오길. 주인이 빨리 건강하게 돌아오길. 주인이 빨리...어라? 주인?”

 

연보라 빛을 지닌 소녀가 검은 드레스를 입은 체, 너무 놀라서 커져버린 붉은 두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째서 마왕이 별똥별을 보고 3번씩이나 소원을 빌고 있는 걸까?

 

“저기.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어도 이루어지지 않...”

 

“와아! 주인! 소원이 이루어졌노라!”

 

느닷없이 달려와서 안겼다는 것은 생각만큼 로망이 담겨있지 않았다. 레시아의 가냘픈 팔이 목을 제대로 후려치는 바람에 또 다시 이세상과 작별을 할 뻔했지만, 목뼈가 부러지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대체 어떤 남자가 여자가 급하게 껴안는다고 죽거나 다치냐고 물어보는데, 상대는 마왕이라서 힘 조절이 안 되면 충분히 부상을 당하거나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크로스 라인을 제대로 맞아서 헛기침이 나왔지만, 거기에 신경 쓰지 않고 레시아는 자신의 뺨을 사용해서 내 얼굴에 이리저리 비비고 있었다. 분명 인간형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고양이가 다 되어버린 걸까?

 

“주인! 봉인이 풀리자마자 짐을 만나러 온 거구나!”

 

“잡화점이 죽어가길래 그거 좀 살리고 오느라 늦었어요.”

 

“괜찮다. 어차피 짐의 계획대로 루니아에게 검은 메달을 뺏은 거 같아 다행이니라. 어쨌든 아직까지 루니아가 가지고 있다면 어서 검은 메달을 짐에게 양도하거라. 마왕이 시시하게 무너졌다는 소리가 들리면 안 되니까. 아니, 지금은 주인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 것인가?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라서 그런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기가 어렵구나. 그러면 수화를 하기로 하지.”

 

그리고 양팔과 양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나는 수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니까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소리 냈다.

 

“수화는 제가 모르니 그만하시고, 지금 그 선생이라는지 뭔지에 대해 어떻게 된 건지 알려주시겠어요?”

 

“응? 선생? 아. 그거 말인가?”

 

주변을 보았을 때 선생이라는 남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지만 레시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여전히 날 안고 있는 상태로 올려다보더니.

 

“선생이라는 이름을 내걸면 주인이 짐을 빨리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인은 의외로 질투심이 강하니까 말이다.”

 

잠깐?

나 월척 된 거야?

레시아의 장난에 걸려버린 건가?

 

“그럼. 인간의 땅을 모조리 점령한 건 어떻게 된 거에요?”

 

“그것도 주인이 짐을 빨리 찾아오게 만들기 위함. 짐은 주인과 오랫동안 페어링이 되어와서 알고 있노라. 평온과 평화를 바라는 주인은 무엇보다도 아무런 일이 없기를 빌며 조용히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이니까. 그 반대의 상황이 되면 거침없이 행동하는 사내가 되지. 그래도 지금은 인간의 땅덩어리들을 되돌려줄 마음이 없노라.”

 

“그건 왜요?”

 

레시아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유랑극단 때문이니라. 주인이 윤허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짐은 정복한 땅을 건네줄 생각은 전혀 없노라. 유랑극단은 지금 주인을 부여잡고 무언가를 할 생각이기에, 지금 당장 인간을 자유롭게 풀어주면, 예측하지도 못하는 위험이 있으니까.”

 

나는 잠깐 한숨을 돌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모두가 다 작정하고 선생에 대한 걸 저에게 거짓말 했다는 거에요?”

 

“아니. 그건 아니다. 선생이라고 자칭하고 짐을 찾아오는 이가 있었노라. 그 자는 유랑극단에 있던 각본가라는 녀석 때문에 조종 받고 있었지. 하지만 짐은 기억 속에서 없는 선생의 존재라고 할지라도,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구별할 수 있노라. 마왕이면서 선생을 따라 배운 것은,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외적인 면이 아니라, 내적인 면이라는 것을...그렇게 생각하면 주인은 선생과 많이 닮았노라. 평화가 깨졌을 때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한 거침없는 행동이...”

 

솔직히 아직까지 어린 마왕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많은 성장을 하는 바람에, 과거에 어렸던 레프리시아와는 전혀 다른 통찰력을 보여줬다. 루니아 누나는 속삭이는 듯한 바람이 새는 목소리로 “누나는 이만 쿨하게 가도록 할게요오! 카일 파이팅!”이라는 말을 남겼다.

 

왜 쿨하게 가는 거야.

이 타이밍에.

 

“그나저나 주인. 몸 안이 좀 이상하다. 보통 마나가 느껴져야 하는데?”

 

“아마. 켈모리아에게 한방 먹이려고 마법을 쓴 부작용일 거에요. 지금 제 몸에는 마나와 신성력, 마기가 한꺼번에 합쳐진 상태로 생성되고, 소비되고 있으니까요.”

 

레시아의 머리가 들썩이면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건 대체 무슨 말인가? 3개의 자원을 합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을 터인데? 그걸 성공했다는 소리인가?”

 

“성공했으니 안 날아갔지만, 봉인 되기 전까지는 제 몸이 날아갈 뻔했죠.”

 

생각대로 잘 되었지만 그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내 몸 하나만으로 받아냈기에, 수명이 단숨에 줄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줄어든 수명을 강제적으로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 봉인을 선택한 거고, 몸이 반동에 다 적응된다면 내 안에 있는 힘을 사용한다 한들, 수명이 느닷없이 2주만 남는 불상사가 나지 않을 거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을 짐의 허락도 없이 하다니! 주인은 여전히 위험한 일만 골라서 하는구나!”

 

호통이 내 귀에 따가울 정도로 날카롭게 들어왔다.

만약 호통이 예리한 칼이었다면, 내 귀는 갈기갈기 찢겨나갔겠지.

 

“그런데 유랑극단을 찾기 위해 모든 인간계의 땅을 점령했다는 거. 계획을 상세하게 들어봐도 될까요?”

 

 

레시아는 웃음이 가득한 미소를 띠며“좋아. 주인의 무릎에 앉아서 이야기 하도록 하지.”라는 뻔뻔한 요구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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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카메라 -잡화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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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3

482

 

 

 

아침이 밝아오면 해가 뜨기 마련이지만,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감았기에 중천에서 놀고 있는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봉인 한번 되었다가 잡화점에서 잠이 들었을 때,‘이것이 과연 꿈인가? 환상인가?’라고 착각하면서 신선한 기분이 들었고, 루시피나는 레시아가 없는 지금이야 말로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언제인지 몰라도 내 옆에서 조용히 자고 있었다.

 

분명 나는 루시피나를 재우고 1층 바닥에서 잤을 텐데. 어느 사이에 이렇게 되어있는 모습은 그리 놀랄 것도 아니지. 지금은 이것보다 더 놀랄만한 일들이 내 앞에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우선 심신을 안정시키고 루시피나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움직이기로 했다. 아직까지 조용한 잡화점의 내부에서 레시아를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사키엘의 문을 이용해서 그나마 기억에 있던 마왕성으로 직접 갈 예정이다. 본래 용사가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하지만, 내 경우에는 이미 혼인까지 한 사이가 아닌가?

 

어처구니 없게 당했다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갑작스러웠지만, 그래도 지금은 만나러 갈 수 있는 수단이 다양했다.

 

어차피 나는 용사가 아니라 잡화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사람 A라고 봐도 될 정도.

 

보통 평범한 사람 A가 물품을 들고 마왕성까지 찾아가 팔지는 않지만, 그래도 용사가 아니니까 직접적으로 싸우지는 않을 것이리라 믿어야지.

 

그래서 루시피나가 잠든 사이에 마왕성으로 출발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어머나? 카일~! 오랜만!”

 

마왕보다 더 극심한 최종보스가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것을 보며, 사키엘의 문을 다시 닫아 목숨을 보존하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내 멱살을 잡아챈 부드러운 손길이, 어마어마한 힘을 담아 저 멀리 반대쪽 벽으로 집어 던졌다. 내 시야가 잠깐 반전되어있는 사이에, 어마어마한 충격과 고통이 내 온몸을 쓸어 내리고 지나갔다.

 

“아프잖아요!”

 

“미안해. 카일을 오랜만에 보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그만...”

 

반대편에서는 릴리 기사단장 시절과는 정 반대로, 검은 중갑을 입고 밝게 웃은 금발의 여기사. 루니아 누나가 나를 바라보며 반겨줬다. 루니아 누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으면 남을 벽으로 집어 던지는 습관이 있는 건가? 여자를 울려서는 안 된다는 부모님의 말이 떠올랐지만, 루니아 누나를 울렸다간 다음 생에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대체 어떤 인간이 눈물을 감추기 위해 사람을 집어 던져요!”

 

마왕성에 울려 퍼지는 절규가 담긴 태클이 사방팔방으로 확산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시아라던가 마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특수한 장치라도 되어있는 장소라고 내 경험이 속삭이고 있는 사이에, 루니아 누나는 나에게 검을 던졌다. 그냥 주변에 있는 검 중에 하나를 던진 것 같은데...

 

“잠깐만요? 저는 싸우러 온 게 아니에요.”

 

“하지만 마왕님께서 시켰어요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상대를 하라고요오.”

 

“레시아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요?”

 

모든 직업이 평등하게 루니아 누나와 검을 주고 받으라고? 설마 마법사나 성직자도 검으로 싸워야 하는 거 아냐?

평등할 것이 따로 있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우선 검으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발상은 하지 않으시고 계시죠? 그것만 좀 물어보도록 할게요.”

 

“검사에게 있어서 검이란 삶과 같은 법. 검사에 대한 예의라면 말이 아니라 검으로 부딪치면서 알아가는 법이랍니다아? 루나의 만화책에서는 그렇게 적혀있었어요오.”

 

“그건 만화 이야기지 현실이 아니란 말이에요!”

 

얼떨결에 날아온 궤적을 눈으로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막아냈다. 이건 루니아 누나의 개인적인 시험이라고 봐도 좋은 건가? 마법을 다 잃어버린 나에게 남아있는 거라면 일반인보다 약간 더 튼튼하고 빠른 몸밖에 없다.

 

마나로 강화한 몸이 그립기 시작한 것은 3번째 검을 받아냈을 때부터, 팔이 저리기 시작하고 근육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흘려야 하는데, 그 흘리는 타이밍을 잘못 잡는 바람에 팔을 타고 내려와 다리까지 흔들렸다.

 

“얼굴이 자동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아하니 카일이 너무 약해진 거 아닌가요오?”

 

“루니아 누나는 대체 뭘 먹었길래 이렇게 강해요? 나중에 원펀치로 백신맨이라도 쓰러뜨릴 거에요?”

 

루니아 누나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옅게 붉혀진 홍조와 붉은 눈이, 장난은 여기까지라는 걸 알리기 시작했다. 보통 저런 경우에는 지는 순간 목숨은 나발이고 백장미에 찍힐 것 같았기에, 거리를 벌려서 자세를 다시 잡고 싶었다.

 

그럴 틈이라도 줬으면 좋겠는데 주지 않는 것이 문제지.

 

“마법이 없는데 절 상대할 수 있겠어요오? 카일?”

 

“무시하려고 해도 상대할 수 밖에 없잖아요!”

 

봉인에서 풀리고 난 다음 첫 대결이라고 하지만, 루니아 누나는 예전처럼 봐줄 마음은 전혀 없어 보였다. 사자도 토끼를 사냥할 때는 전력을 다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루니아 누나가 전력을 내보이면, 내가 가루가 되는 건 시간문제.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아무리 마나가 없어도 전투를 많이 했으니 몸에 익혀진 프로세서는 사라지지 않았으리라.

 

“저는 처음부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 거 기억하시나요?”

 

“그건 갑자기 왜요오?”

 

루니아 누나는 아무런 자세를 잡지 않고 느긋하게 질문을 되돌렸다.

 

“맨 처음부터 마법에 의지한 삶을 살아온 적이 없단 거에요. 루니아 누나를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지금은 이 검으로만 상대한다는 소리죠.”

 

“당연한 소리를 한 이유라면 혹시 그 소리와 정반대로, 그 안에 있는 마법공학 물품을 준비하는 시간을 벌 속셈은 아니겠지요오?”

 

내 허리춤 뒤로 몰래 움직이는 왼손이 경직되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아는 거지?

독심술이라도 쓰나?

 

“지금의 카일이라면 많이 약해진 상태인 만큼, 잔꾀를 많이 생각했겠지요오? 그래도 누나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랍니다아? 누나는 카일에 대한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오.”

 

“그거...참 무섭네요.”

 

자연에서 떠돌아다니는 야생동물을 멀리서 관찰하는 사람인가? 그래도 지금은 마음을 다 잡고 허리춤 뒤에 있던 물품을 꺼냈다.

 

“그건 뭐에요?”

 

“이거요? 안리아스의 수정구요.”

 

“마법공학 물품은 맞지만, 그건 녹음과 녹화가 되는 수정구잖아요오?”

 

“아니. 싸우기 전에 불편해서 빼려고 한 건데, 루니아 누나가 반정도 맞춰서 당황한 것뿐이에요.”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 필요 없는 물건은 바닥에 가지런히 놓았다. 곧바로 날아드는 참격을 옆으로 굴러서 피하자, 또 다른 연격이 내 눈 앞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시작도 하지 않고 휘두르는 것은 비겁한 것은 아니고, 언제나 적의 공격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발생하는 거니까. 오히려 루니아 누나의 행동은 현실적이고 현명하다고 해야 하나.

 

-카앙!

 

롱소드의 옆면으로 막아내기에는 휘두르는 힘이 너무 무겁다. 불꽃이 튀면서 내 눈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선명했지만, 정신차릴 틈도 없이 내 복부로 날아오는 찌르기를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도록 허리를 뒤로 젖혔다.

 

림보를 할 때는 이것보다 더 낮게 한 경우는 없었는데. 허리에 강한 통증과 살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그나마 살 수 있었던 나는, 발을 박차고 공중에서 뒤로 한 바퀴 돌면서 안착했다.

 

“여전히 몸이 유연하네요오?”

 

“루니아 누나의 공격은 여전히 피하기가 어렵네요.”

 

“그나저나 예전보다 더 빠르게 반응하는 거 같은데, 정말 약해진 거 맞나요오?”

 

“누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강해지고 약해져요? 여태까지 마법을 배우고 이용한 것은 상황을 손쉽게 해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요!”

 

오른손에 들려있는 롱소드를 휘두르지만, 루니아 누나가 발로 차버리는 바람에, 잡고 있던 손목이 날아가지 않으려면 검을 놔야 했다. 발에 차인 검은 높은 마왕성 천장에 박혀버리고, 그 이후로 날아 들은 루니아 누나의 검을 나도 모르게 붙잡아 저지하고 있었다.

 

보통은 잘려나가도 이상하지 않는 괴력.

하지만 붙잡고 있던 손에 하얀 빛이 발현하기 시작하면서, 검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장갑방어구가 되어주었다.

 

“카일? 언제 그 힘을 조절하기 시작한 거에요오?”

 

“위기의 순간에는 멋대로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게 사람이니까요!”

 

운이 좋게도, 위험한 순간에 내 몸 안을 이리저리 다니던 에너지들이, 오른손에 응집되기 시작하면서 기적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악력으로 깨져나간 루니아 누나의 롱소드가 공기 중으로 사방에 흩어지면서 터졌고, 그 빛은 천천히 검의 형태로 모양을 잡기 시작했다.

 

루니아 누나의 느긋한 표정은 사라지고 진지한 얼굴로 마주보며 말을 이어갔다.

 

“설마 2단계를 뛰어넘을 줄은 몰랐는데 카일의 성장은 예측할 수 없네요오. 각본가는 왜 카일에 대해 예측을 할 수 없는 걸까요오?”

 

“그걸 저에게 물어봐도 알 리가 없잖아요. 제가 각본가도 아닌데.”

 

루니아 누나는 자신의 등 뒤에 있던 붉은 색의 대검을 거칠게 뽑았다.

 

“미안하게도 누나는 봐주지 않을 거에요오.”

 

“미안하게도 누나를 봐주지는 않을 거에요.”

 

오른손에 광검을 들고 자리를 피하자마자, 거대한 구덩이가 내 발 밑에서 생성되었다. 어마어마한 흙먼지에 잠깐 몸이 가려지나 싶었더니, 흙먼지를 뚫고 튀어나오는 루니아 누나에게 검을 휘둘렀고, 붉은 대검과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부딪치려고 했을 때.

 

거의 통과하듯이 지나가버린 빛의 검은 루니아 누나의 검은 중갑을 강하게 타격했다. 당연히 나의 경우에는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줄 몰랐기 때문에, 그 상태로 루니아 공격이 직격으로 날아왔다는 의미.

 

서로 한방씩 주고 받았지만, 루니아 누나의 갑옷은 특수처리가 되어있는지 튕겨나간 것에 비해, 나는 옷 안에 있던 비상용 단검이 으스러지면서, 겨우겨우 상체가 두 동강나버리는 위험을 피했다.

 

“카악! 제길!”

 

아픈 건 아픈 거라 충격이 그대로 전해져서 왼쪽 어깨부터 갈비뼈까지 박살이 난듯한 고통은, 차라리 죽여달라고 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고, 루니아 누나도 입에 피를 흘리면서 당황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카, 카일? 아무리 진지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른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요오!”

 

“아니...검을 통과하고 타격할 줄은 몰랐으니까요...으극!”

 

말하는 것도 몸이 욱신거리기 시작하면서, 말을 아끼는 걸로 마음을 먹었을 무렵. 전투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루니아 누나는 천천히 다가가면서 입을 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카일은 방금 전에 검사의 길에서도 가장 높은 달인의 경지까지 올라갔답니다. 다만, 아직까지 힘을 다루는 것이 미숙한 것 같네요오.”

 

루니아 누나는 대검을 집어넣고 나를 잠깐 흘깃 하고 바라보더니...

 

“게다가 제가 공격받아본 것도 일생에 3번째네요오.”

 

“일생에 3번째라면 루니아 누나는 어디 무패전사라도 되는 건가요?”

 

일생에 3번밖에 맞지 않았다는 소리인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런 궁금증이 머리에서 지나갔기에, 본래 물어보려고 했던 레시아의 근황에 대한 질문이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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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대타 후에는 집에 돌아와서

아침 워프레임을 방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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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2

481

 

 

 

가위바위보로 세계정복이 가능하냐고 물어볼 때, 레시아를 보면 가능하다고 말을 하는 것만큼 잔인한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하얀 올빼미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남은 마나석으로 다시 사역마를 소환하려고 했지만, 시나를 다시 부른다는 보장도 없으며, 내 몸 속에서 생성되는 에너지는 기본적으로 마나가 아닌, 다른 새로운 무언가이기 때문에, 거대한 공명을 버티지 못하고 마나석이 깨져나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그것도 가격이 꽤 비싼 최상급 마나석임에도 불구하고...차라리 상급 마나석이 깨져나갔을 때부터 그만두는 거였는데, 지금 시세로는 잘 모르겠지만 대략 100골드 짜리가 하나씩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랑. 벌써 6번째야. 이제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내 옆에는 엘티노스가 작성한‘쉽고 간편한 사역마 소환’이라는 이름의 책이 놓여져 있었는데, 7가지 항목 중에 가장 첫 번째인 마나에 오류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그나마 시나를 찾아야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게다가 지금 당장 물어볼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지금 잡화점이 내뿜은 파동만으로 찾을 수 없는 거라면, 자신이 있어야 할 차원으로 돌아갔다는 결과만 남아있을 분이에요.”

 

“시나는 나름대로 천계에서 어떻게든 만나기 위해 시도라도 하지 않을까?”

 

“지금 천계에 있어요? 다른 차원이 아니라?”

 

“응.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있어. 마스터는 언제든지 돌아오시는 분이라고, 기다리는 사람이 1명이라도 남아있어야 한다면서 마왕님과 싸웠어.”

 

“레시아랑 싸웠다면, 레시아는 기다리지 않는 판단을 하고 자신의 업적을 세우러?”

 

그러자 루시피나는 나의 질문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서 부정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더니...

 

“마왕님은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야 말로 짐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2명씩이나 기다릴 필요 없으니 빵조각이나 주워먹으러 가라.”라는 말을 하다가 엄청나게 싸웠거든.”

 

언제 올지도 모르는 나를 독점하기 위해 싸웠다는 말밖에 들리지 않는군. 정말 서로 사이가 얼마나 안 좋아야 이렇게까지 틀어지는 걸까? 지금은 멤버들을 어느 정도 모으는 것이 최우선목표인가?

 

그 전에 호신용으로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하니까. 마법공학으로 이루어진 물품을 가지러 갔다.

 

“어라? 신랑? 티르빙은 어디있어?”

 

“티르빙은 지금 엘티노스가 만든 석상 안에서‘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결말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에 들고 오지 않았어요. 그간 티르빙을 사용하면서 안에 있는 인격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놨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먹어서, 그 안에서 평생 살아달라고 부탁했으니까요. 그러니 지금은 제가 당장 사용할 마법공학 물품이라던가, 제 안에 있는 포켓나이프 이외에 다른 무기가 필요해요.”

 

“음. 그런 문제라면 그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데? 신랑은 내가 지켜주면 되잖아?”

 

“만약 지켜주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에요. 아무리 루시피나라도 지금 레시아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드래곤과 마왕군이 격돌을 벌이게 되잖아요. 지금 당장이라도 사이가 틀어지면 안되며, 원활하게 관계를 복구해야지만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요.”

 

루시피나는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 우연히 눈이 마주친 것뿐.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잔인하게 들릴 것이다. 과거에 사이가 좋고 나쁨을 떠나서, 하나의 관계로 얽혀있는 것이야 말로 든든하고 안정적이었으니까. 그런 과거의 안심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현실에는 조금만 비틀거리면 끝나버린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들쑤시고 다녔다.

 

“1층 바닥에서 사역마를 소환하려고 했으니 실패한 걸지도 모르지만, 3층에서 하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으니. 지금은 이 물품을 들고 다니는 것이...”

 

“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아 깜짝이야! 이게 뭐야!”

 

하얀 뱀이 내 팔 위로 올라타면서 입을 열자마자, 머리를 붙잡고 다른 곳으로 내던져버렸다. 아무리 내가 모든 걸 잃어도 반응속도와 동작이 매우 빠르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 계기였고...

 

“아프잖아! 뭐 하는 짓이야!”

 

“아. 미안. 하얀 뱀. 네가 3층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면“저 나와요!”라던가“저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요.”라는 신호 정도는 줘야지.”

 

“깜짝 놀라서 날 던진 주제에 잘못을 떠넘기다니.”

 

고통을 인내하듯 끝부분에 가느다란 바람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얀 뱀이라면 뭐든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루시피나가 신기하듯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부 다 지켜봤지?”

 

“그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 당장 머리를 부딪쳐서 까먹은 거 같은데. 어떻게 보상할래?”

 

“그거 큰일이군. 그래도 다시 집어 던져서 뇌에 충격을 주면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기억이 날 때까지 던져줄까?”

 

“아니. 갑자기 다 기억이 났어. 그러니 던지지마.”

 

죄책감을 이용해서 협박을 할 생각이었지만, 그 의도를 파악한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 대화법이다. 하얀 뱀은 “흐음. 그렇네. 우선 이것부터 말해야 하나?”라면서 말하기를...

 

“마왕과 함께 있는 남자가 선생님이었다는 소리가 들렸어.”

 

레시아 옆에 남자가 있는 건 둘째치고 선생님이라니?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예전부터 찾아 다녔다는 소식에 나타났다고 하던데? 아니면 카일은 뭔가 잘 알고 있는 건가?”

 

지금 당장 해머로 내 머리를 내려쳐도 지금보다 멍할 수는 없을 거다. 레시아의 과거에서 영향력을 끼친 것은 나였지만, 시간적 모순을 만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시간의 파수꾼들인지 뭔지 하는 무시무시한 녀석들을 피하기 위해서, 조력자의 위치만 알려주고 모조리 삭제된 상태였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만 알고 있어. 그 선생이라는 존재가 대체 어떤 이유로 나타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짜인 것만큼은 확실해.”

 

만약 그 관계를 이용해서 레시아를 움직이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면, 이보다 더 비참한 상황은 없을 것이리라. 한시라도 빨리 레시아를 만나야 하겠지만, 문제는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형식상 용사라도 인정받아야 마왕인 레시아를 만날 수 있다는 것.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서 뉴런들이 난리치고 있어. 뇌세포 하나하나가 모조리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지끈거리는 두통은 나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과열되는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지금 누군가가 선생이라는 존재를 사칭하는 그것만으로도 열이 터지기 직전.

 

마음만 같았으면 당장 마왕성에 쳐들어가서 아이언 클로라도 날리고 싶은데, 그걸 못하니까 마음 속에서 불이 일어나 화재로 바뀌어버렸다. 아직까지 어린 마왕이기 때문에 여러 방면에서 취약하다는 소리인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아서 큰일이군.

 

“신랑이 그걸 어떻게 알아?”

 

“뭐가요?”

 

“마왕님 옆에 붙어있는 사람이, 마왕님께서 그토록 찾고 있었던 선생님이란 존재가 아니란 것을...”

 

적어도 하얀 뱀과 루시피나에게는 알려주기로 할까?

 

“그야 당연히. 제가 과거에서 레프리시아를 가르쳤으니까요. 예전에 제가 티아의 제안으로 과거에 한번 갔다 온 적이 있잖아요? 사실 어린 레프리시아를 만났었어요.”

 

루시피나의 눈이 하염없이 커지더니“정말이야?”라고 물어봤다. 고개를 내가 한차례 더 끄덕이니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는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왜 마왕에게는 이야기 하지 않았던 거야?”

 

하얀 뱀이 나에게 물어본 질문은 루시피나의 질문과 같았는지, 끄덕이는 고개에 맞춰서 붉은 파도를 그려 나아갔다.

 

“그야 나중에 말하려고 했어. 말하려고 했는데. 이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그보다 그때 당장 말하면 부작용이 있을 것 같았고, 그 뭐냐? 시간의 파수꾼인지 뭔지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난동부리면 저도 수습 못하니까요.”

 

“그래도 그건 말했어야지! 그렇다면 이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었잖아!”

 

루시피나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나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럴수록 해결책을 먼저 생각해야 일이 터져도, 늦지 않게 진압이 가능하니까.

 

“그러면 그 선생이라는 존재에 대해 루시피나가 조사 좀 해주세요.”

 

“조사를? 내가?”

 

“급한 거에요. 지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용의자가 좀 많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아낸다면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어요.”

 

루시피나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뱀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는 것은...

 

“그냥 지금 마왕을 만나러 가는 게 좋지 않아?”

 

“지금은 잡화점을 운영해야 하니까. 매번 하루에 한번씩 엘티노스 잡화점은 저녁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오픈이야. 움직인다면 아침 9시나 10시부터 시작해야 하며, 애석하게도 페어링이 다 끊어져서 부부의 연이 잘 이어져있다면, 마왕성에 아주 잠깐 들리는 것은 가능하겠네. 만나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나지 못하는 이유라면 레시아가 날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라는 존재를 사칭하고 있는 녀석 때문이다. 어린 레프리시아를 너무 정성스레 키운 탓인가? 차라리 절벽으로 밀어버리면서 강하게 키웠어야 했어.

 

“그런데 이상해.”

 

“이상하다니 어떤 것이?”

 

루시피나가 퉁명한 얼굴로 말하기를...

 

“마왕님은 선생님이란 말만 듣고 신랑을 거의 잊고 살듯이 살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신랑은 마왕님을 빼앗겼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초점으로 바라보고 있잖아.”

 

“아니. 질투를 하기 전에 지금 당장 벌어질 대참사가 걱정되어서...”

 

“그리고! 나에게도 좀 신경 써줬으면 좋겠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재회의 키스도 없고! 신랑에게 응석부리고 싶은데 분위기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토라진 모습이 귀엽다고 해도, 여기서 기름을 더 끼얹으면 무시무시한 재해가 될 테니까, 땅이 꺼지는 한숨을 억지로 삼킨 다음에, 지금은 오랜만에 만난 루시피나의 응석을 받아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일은 내일 아침에 다시 아침공기를 마시며 생각하면 되겠지.

 

“알았어요.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죠. 지금 당장 대책을 새워도 실행할 수 없을뿐더러, 오랜만에 만났으니 루시피나의 요리도 먹고 싶기도 하고.”

 

“음. 나는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겠군.”

 

신경 쓰는 척하면서 의도적으로 비켜주는 하얀 뱀의 눈을 보아하니, 마구니가 한 가득 들었다고 느꼈다. 뱀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유난히 능글맞다고 생각할 때. 루시피나는 언제 주방에서 다녀왔는지, 간단한 음식을 내 앞으로 가져와 행복한 얼굴로 말하기를...

 

“아~”

 

잘게 썰린 고기를 포크로 찍어서 나에게 가져다 줬다.

문제는 주방에 다녀와서 먹여주는 것까지 2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는데, 그 짧은 사이에 가능한 행동인가? 그 짧은 시간 안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니, 이건 드래곤이라서 가능한 걸까? 루시피나의 주부9단이 만들어낸 성과일까?

 

 

하지만 고기를 입안에 넣자마자 쓸 때 없는 생각은 사라지고, 맛있다는 단어만 머릿속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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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알바 대타라 오늘은 빨리 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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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3 - 1

480

 

사람의 부재가 이렇게 무서울 줄은 몰랐는데.

모든 것이 해결해서 포근한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더니.

다시 사건이 터져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어떤 것이 잘못이 되었든 간에, 지금은 레시아를 만나는 것이 먼저일까?

-레빗과 함께 잡화점에서 나간 아리엘의 뒷모습을 본 카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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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한바탕 다시 꼬이기 시작하면서 영문도 모르고 아무도 없는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2층과 3층에 있었던 위험한 물품이나 봉인지정으로 삼았던 것들은 시간이 지나자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잡화점은 사람이 마법을 쓰던 쓰지 않던, 자원을 흡수해서 유지를 하니까 상관 없다고 해도, 지금 당장 큰일난 것은 이제 나 혼자니까...

 

밤에 어떤 녀석이 와도 혼자서 막아낼 자신이 없다는 것과 더불어, 마족에 귀에는 슬슬 잡화점이 운영한다는 말이 오고 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 뒤에 있는 것에 초점을 둔다면, 각본에 쓰여있었기에 레시아는 인간을 침공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말 그대로 마왕이 인간계를 정복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해 내 눈으로 보고 잘 알 정도.

 

여태까지 잘 지내고 있던 레시아가 무슨 변심으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레시아라면...그 삐뚤어진 마왕이라면 각본이든 운명이든 모든 것을 뛰어넘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건 그렇고 사건 하나 때문에 이 지경까지 될 줄이야.”

 

혼잣말을 내뱉고 있었는데 문에서 노크가 아니라 거칠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뭐냐. 그러니까? 남들이 말할 때 시즌2의 시작이라는 녀석이냐? 아직 시즌 1도 끝나지 않았는데 말이지.

 

“그렇게 두드리지 말고 제대로 열면 얼마나 좋아. 알았으니 열어준다고! 밤에는 영업하는데 왜 안 열어주는 거야?”

 

새로 단장을 해도 삐걱거리는 문의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내 앞에 양손이 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붉은 두 눈이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비춰지고, 달을 가린 구름이 때마침 자리를 비켜준 덕에 나는 거수자라고 생각하고 저항하려 했지만, 은은하게 비춰진 얼굴이 내 행동을 막았다.

 

“신랑!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루시피나? 아. 그러고 보니 잡화점이 탈피를 하면서 방출한 마나 때문에 먼저 깨달은 거군요?”

 

눈에는 물길을 머금고 볼에 흐르는 눈물이 내 옷의 일부를 적시고 있을 때, 나는 그녀의 귀환을 맨 처음으로 맞이해줬다.

 

“다행이에요. 루시피나가 무사했다면 모두 무사했다는 거니까.”

 

“그야. 모두 무사하지. 하지만 신랑이 봉인되고 나서 모두다 뿔뿔이 흩어졌어. 애석하게도 잡화점은 인간이 관리해야 한다는 법칙이 있으니까. 우리가 신랑을 대신할 수 없었다는 거야.”

 

“하지만, 그 안에서 사는 것은 가능했을 거 아니에요?”

 

“그게. 신랑의 존재가 없어지고 나서, 곧바로 잡화점이 모두를 방출해버렸거든.”

 

잡화점은 살아있는 존재니까.

규칙을 위해서 모두 내쫓아버린 것 같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행방은 알고 있어?”

 

힘없이 고개를 저으면서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다른 사람부터 찾는 것이 문제인가? 다 모으면 신룡이 소환되는 건 아니겠지? 그 전에 혹시 각본가라는 말에 대해 아는 거라도 있어요?”

 

“각본가? 그건 마리아가 찾고 있을 거야. 적어도 별의 아이는 각본가가 아니라는 결론까지 도출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와 신랑 단둘이란 소리지?”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대화능력을 보아하니 제가 아는 루시피나가 맞네요. 우선 들어오시기나 하세요.”

 

잡화점 안에 조심스럽게 발을 딛는 루시피나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없을 때 이 잡화점은 무슨 일을 한 걸까?

 

“베니와 팔랑크스는 어디있나요?”

 

“베니는 잡화점의 대결계를 운용하는 핵으로 돌아갔고, 팔랑크스는 검은 존재를 지우고 나서 엘티노스와 같이 천계로 돌아갔어.”

 

천계로 돌아갔구나.

아! 그렇지!

 

“지금 레시아는 왜 인간계를 침공한 거에요?”

 

“그건 아마 신랑이 없기 때문일 거야. 마왕님께서 자신이 인간계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때. 신랑과 사역마로 계약해서 침공이 뒤로 미루어졌다고 했으니까. 이 잡화점을 같이 운영하는 것이 신랑의 소원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페어링도 다 끊어져버렸고 마왕이 본연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면서, 지금은 각본가가 남겨놓은 내용에 맞춰지고 있는 거래. 아마 엔딩은...”

 

“용사가 레시아를 죽이고 세상은 다시 혼돈에서 멀어지는 거겠죠.”

 

그럼 지금까지 진행은 내가 1년간 늦춰버린 건가. 어차피 유랑극단이라는 녀석들은 이 세상이 난장판으로 되는 거야말로 삶의 낙이라고 할 테니까.

 

“지금 용사는 얼마나 왔는데요?”

 

“그게. 루니아마저 마왕군에 붙으니까. 모든 용사가 전부 나가 떨어지는 바람에, 마왕군이 백전백승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야.”

 

이건 또 무슨...

그래서 레빗이 아리엘을 데리고 간 건가?

 

“그러면 지금 이렇게 만나는 것은 몰래 만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마왕이라고 해도 드래곤이나 정령처럼 비등하거나 높은 존재에는 절대적인 통치권이 없으니까. 게다가 설령 내가 마왕군이라고 해도 지금 당장 신랑에게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해.”

 

내 품에 안겨서 얼굴을 묻고 있는 루시피나의 행동이 기쁘지만, 지금 이렇게 인간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상황이 아닐까?

 

용사라.

항상 용사와 마왕이 있는 이야기에서는 마왕이 다양한 방법으로 제거당하는 방법밖에 없던 걸로 기억했다. 물론 일부 이야기에서는 더 크나큰 적과 맞서기 위해 마왕과 용사가 힘을 합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다시 마왕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용사의 숙명이다.

 

하지만 엘티노스는 마왕을 처치하지 않고 때려서 겁준 것만으로도 마왕군이 와해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 이 우정반지가...어쩌다 보니 결혼반지의 의미로 되어버렸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 레시아를 만나기에는 나에겐 마법이라는 그 자체가 봉인되어버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아이언 클로를 하고 싶었지만, 내가 스스로 내 몸을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만...

 

“루시피나는 예전처럼 잡화점에서 살 건가요?”

 

“임시거처로 만들어야겠지. 그런데 신랑? 몸은 괜찮아? 여전히 3개의 자원이 합쳐진 상태로 몸을 배회하고 있는데? 부셔지는 것은 아닐까?”

 

“처음에는 반동이 심하게 왔지만, 그래도 익숙해지니 괜찮은 것 같아요. 지금은 아무런 일도 없이 온 몸을 회전하고 있지만, 이건 제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는 터라.”

 

“그렇구나...”

 

황혼<Dusk>을 사용했을 때. 내 몸은 상당히 망가져있었다. 곧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무자비한 상태. 사실 황혼을 사용하고 나서 강 건너에 계신 부모님을 만났다.

 

...아니. 아직 부모님 살아계시지.

무시무시한 허상이구나.

 

익숙해지니 괜찮다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 무식한 발언일까? 그 힘을 사용해서 곧 죽을 뻔하고 봉인이 되어 겨우 리셋을 시켰으니 살만하니까 이런 말이 머리에서 자동으로 나왔는데, 루시피나는 여전히 걱정된다는 얼굴과 청순한 이미지가 시너지를 이루다 보니 눈을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었다.

 

“신랑은 무리하면 안 돼. 지금 당장이라도 마왕님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신랑뿐이니까. 나도 이렇게 인간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싫어.”

 

“루시피나.”

 

진드기처럼 달라붙은 루시피나는 잠깐 떨어지더니 밝은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에 왔으니 먹을 거라도 만들어줄게! 많이 배고프겠다!”

 

식당으로 몸을 옮긴 루시피나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 카운터 앞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나를 우연히 앞에 있는 거울로 통해 알 수 있었다. 각본가는 뭘 노리고 있는 걸까?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원하는 것일까?

 

“사회자도 있다고 했는데 대체 그 작자들은 무슨 능력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네. 어릿광대와 맹수 조련사는 충분히 만나봤지만, 각본가와 사회자는 모습을 아예 드러낸 적도 없으니, 모든 것들이 각본가가 쓰여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면, 지금 내가 이렇게 된 것도 각본가가 쓴 그대로일까? 아니면, 유일하게 각본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걸까?”

 

아마. 내 생각에는 각본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예전에 맹수 조련사에게 한방 먹였을 때. 각본에 쓰여져 있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더 정확하게 카일이 각본을 거스르는 건가, 카린이 각본을 거스르는 건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이번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데, 지금 당장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은 있나요?”

 

“그게...애석하게도 인간과 마족이 공존을 하지 않는 것뿐이지, 인간을 마구자비로 죽이거나 그런 건 아니었거든.”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마왕님과 각 나라에 있는 지도자들이 각자 나라를 걸고 가위바위보를 하다가 모두 이기는 바람에, 마왕의 침공이 모두 완료가 된 것뿐이니까.”

 

잠, 잠깐? 뭐요?

가위바위보?

근데 나라를 걸었다고?

제정신이냐!!!

 

“제정신인가요? 그 인간들?”

 

“술 내기에서 마왕님이 전부 이기는 바람에, 나라의 각 상징을 모두 뺏어버렸어. 그러니까 지금까지 용사들이 그 나라의 상징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거고.”

 

그럴 바에 가위바위보를 하지 말지! 그나저나 그런 바보 같은 꾀에 잘도 넘어가버렸잖아? 애초에 술내기에 나라를 거는 멍청이들이 세상에 어디 있어!

 

“내가 과거에서 가위바위보란 걸 알려주지 않아야 했었는데...”

 

내가 과거에 행한 일 때문에 현재 이런 나비효과까지 불러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면 이 주변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뭐에요?”

 

“그건 마왕님께서 전부 떠나라고 했거든. 지금은 신성 아우리온 근처에서 사람들이 보호를 받으면서 살고 있어.”

 

그러면 지금 이곳은 마왕군의 영토로군.

사람이 보이지 않고 이제 종종 몬스터를 손님으로 받아야 하는 건가? 가장 불행하게도 돈은 어떻게 벌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딸랑딸랑~!

 

“인간! 오랜만이다! 그 동안 잘 지냈나!”

 

“코볼트냐. 나는 잘 지냈는데. 너는 왜 혼자야? 보통은 때로 몰려와서 난장판을 부리는 것이 정상인데?”

 

여전히 작은 사람 비슷하게 생긴 녀석은 카운터까지 기어올라와 입을 열었다.

 

“이곳 잡화점에 물품을 사야 하는데 최근에 없어서 존재를 잊었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유 한 컵을 내놓아라!”

 

나는 근처에 있는 우유를 꺼내 컵에다 따라줬다.

 

“코볼트. 묻고 싶은 게 있어. 지금은 인간과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큰일나는 거 아냐?”

 

“큰일나지만 걸리지 않으면 범죄가 아니다!”

 

걸리면 범죄란 소리잖아.

 

“걸리지 않게 조심하도록 해라.”

 

“인간도 조심해라! 대부분 마족은 인간들을 보면 습격을 하니까!”

 

“습격이라니? 죽이기라도 한다는 건가?”

 

“아니. 어깨동무를 하고 기차놀이를 한다.”

 

 

이곳은 정말 어딘가 잘못 되었어. 각본가가 이상한 걸 쓰고 있는 거 아냐? 그걸 습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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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2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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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11

479

 

 

 

봉인이 되었다가 풀려나면 무슨 기분이냐고 물어봐도, 그냥 자다 일어난 기분과 매우 흡사하다. 다른 점이라면 봉인을 한다는 의미는 냉동인간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그 대상의 힘이 매우 강해서 나중에 처리를 하겠다는 의미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힘까지 같이 봉인하니까 다음 절차는 필요 없다. 대부분 나에게 모든 것을 앗아가고, 정작 아리엘은 신격화가 풀려버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식사를 해도 돈은 내가 8을 내고 아리엘이 2를 낸 미묘한 기분이다.

 

확실하게 5:5로 냈으면 페어링은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자랑스러운 정신방어하나만 살아있다는 사실에, 살아갈 희망이 생기긴 하고 있다. 저 멀리 있는 조그마한 별을 바라보면서, 아직까지 세상은 살만하다고 헛된 생각이 기대어 겨우겨우 마음을 잡았는데.

 

“애초에 기대를 하면 배신을 당하는 법이에요.”

 

“뭐냐. 늑대 개 뭐시기 하는 그거냐? 뜬금없이 남의 독백을 읽고 반응하는 건 그만둬줄래? 게다가 너의 한마디가 너무 뜬금없어서 위화감이 저 멀리서 눈치를 보고 있잖아.”

 

내가 상세하게 태클을 걸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뭐가 불만인지 계속해서 입안에 있는 내용이 아리엘의 고운 입술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나저나 여긴 대체 어디에요?”

 

“그러게. 그걸 알았다면 이상한 독백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될 텐데.”

 

머릿속에 기억 되어있는 풍경으로 보아 이곳은 리베리티아 고원과 매우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고는 지금 하늘이 검붉은 이유가 뭘까? 항상 이런 우중충한 하늘은 사람의 불길함을 +5정도 해주는 그런 경우가 있는데, 이 하늘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마계에서 인간계로 침공한 건가?”

 

정기적으로 놀고 먹고 자는 용사들이 없도록 침공을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싸움이 아니라 수수깨끼를 풀면 마족들은 알아서 돌아가준다. 다만, 아무리 마계에서 인간계로 침공했다고 해도, 검붉은 하늘은 본 기억이 없지만...

 

“대체 뭐가 잘못 되었는지 모르겠네.”

 

별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레시아가 마음을 잡고 정말 인간을 모두 학살하기 위해 공격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해결하기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도 다른 판타지의 주인공처럼 마왕에게 검을 뽑겠지. 비록 모든 능력이 봉인 당해서 내 안주머니에 있는 단검이 모든 것.

 

지금은 아리엘에게 의존하면서 내 몸을 보호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리베리티아 고원이니까 근처에 프리트론이 있다는 소리라는 거야. 근처에는 페어리들이 살고 있는 숲도 존재하고, 너는 세피르를 불러봐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야 하니까.”

 

아리엘이 세피르를 부르기 시작하듯 텔레파시에 집중하는 동안, 다른 곳에 흔적을 찾고 있었다. 위화감이라는 것은 언제나 평상시와 다르면 생기는 것이기에, 철저하게 둘러보고 차이점을 밝혀내지 못하면 안되니까.

 

“세피르와 연락이 되었어요. 그보다...카멜롯에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고.”

 

“그거야 잘 되었네.”

 

잘 된 것치곤 아리엘의 목소리가 그리 밝지는 않았다.

 

“뭐야? 또 무슨 일인데?”

 

“지금 세피르의 말로는 잡화점에 있는 인원들을 데리고, 모든 대륙이 전부 마왕에게 굴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요?”

 

...

 

“아직도 봉인 당한 상태인가? 나는 잘 테니까 밖에서 보자.”

 

“무슨 헛소리를 밥 넘어가듯이 하는 거에요! 당장 일어나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을 때, 아리엘은 어느 사이엔가 내 다리를 짓밟았다. 힘 조절을 했으니 뼈가 나간다거나 근육이 뭉개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아팠기에 소리를 지르고 내 오른쪽 다리를 부여잡아 달래주고 있었다.

 

대체 이번엔 레시아가 뭘 어떻게 했길래?

시나는 왜 안 말린 거야?

 

“우선 잡화점부터 찾아보자. 이게 대체 무슨 난장판인지 알아내야겠어.”

 

“잡화점까지 가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세피르에게 연락하면 바로 마계로 갈 수 있으니까.”

 

“지금 레시아를 만나면 분명 다짜고짜 화를 낼 것 같거든, 생각할 시간이 잠깐 필요해. 페어링도 끊어진 상태라서 레시아를 소유한 주인이 아니라, 진짜 인간과 마왕의 관계니까.”

 

“그래도 결혼했잖아요?”

 

모든 싸움 중에서 부부싸움이 가장 무서운 법이란다. 하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아리엘은 중얼거리면서 내 말을 따라 세피르는 부르지 않기로 했나 보다. 마계가 인간계를 침공해서 성공을 했다면, 지금의 삶은 어떠한지 사람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극단적이지만 내 기준점에서 양호하다면, 1개월 뒤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왕군은 마계로 다시 갈 것이다.

 

그렇게 프리트론으로 천천히 이동하면서 나아갔을 땐, 세상이 내 기대를 완전히 배신이라도 하듯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거대한 폐허가 자리잡았다.

 

“제길...이건 또 무슨 일이야...”

 

레시아를 의심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레시아는 내가 없는 동안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마족들이 인간계를 침공했다고 하고, 같이 협공할 수 있는 그런 모습도 존재하니까. 어쩌면 아리엘이 거론한 사회자와 각본가 때문에 유랑극단이 난장판을 벌이는 모습이겠지.

 

그 증거는 아리엘과 내가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

 

“아리엘. 잡화점으로 갈 수 있지? 그곳으로 공간이동 좀 부탁해.”

 

“아. 네. 알았어요.”

 

거대한 빛에 둘러 쌓이며 내 시야를 바꾼다. 예전에는 자주 느꼈던 감각이었지만, 지금은 남을 의지해야만 경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마음 한편으로는 쓸쓸했지만 아리엘이“도착했어요.”라는 말을 하자마자, 내 눈이 담아낸 풍경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게 잡화점이야...폐허야...”

 

덤으로 파이론에 있던 마을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낡아빠진 잡화점 하나만 예전에 인간이 살았었다는 기록을 남겨주듯이, 자리 한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내가 정문 앞에 다가가자마자 삐걱거리는 문이 천천히 열리다가, 남은 부분이 썩어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안에는 사람이 살았었다는 흔적과 완전히 비어버린 물품들, 그리고 완전히 썩거나 부패해버린 물건들...

 

“얼마나 지난 거야?”

 

시공간술사의 길마저 끊어졌으니 제대로 된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슨 북두신권의 구세주도 아니고, 이런 세기말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모르는 찰나에, 이 집을 지키고 있던 베니와 팔랑크스도 모조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2층에가면, 3층에가면 있어야 하는 물품이 모조리 사라진 상태.

 

아니, 사라졌다기 보단 보관을 할 수 없기에 잡화점에서 자체적으로, 다른 공간으로 보내고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켜온 듯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잡화점에 있던 벽난로를 천천히 쓸어주면서 미안한 감정만 들었다.

 

“아무리 꺾여도 정도 것 꺾여야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거람...”

 

천천히 쓸어주고 있을 때. 잡화점 자체에서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본래 주인의 마나를 일부 먹고 살아가서 그런지, 촛불이 암흑과 거미줄을 치워버리고 썩어 문드러진 나무바닥의 틈을 매워 검은 광택이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흡수해도 강대한 힘이 들어온다는 창조신과 동등한 마나라서 그런지, 예전모습을 찾기 시작한 잡화점에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서, 당황해 하는 아리엘을 데리고 잡화점 밖으로 탈출했다.

 

“잡화점이 왜 저래요!”

 

“주인이 밥 줘서 기쁜지 탈피하려고 하는 거 같아!”

 

“탈피요? 잡화점이 살아있는 생명체도 아니고 탈피를 어떻게 해요!”

 

“잡화점은 살아있거든!”

 

거의 다 죽어가던 잡화점은 시리얼을 먹고 호랑이기운이 솟아나는 것처럼, 거대한 울부짖음처럼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파장과 진동과 더불어, 서서히 밝게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보통 잡화점이 반정도 때려 부셔지면, 마나 공급을 3시간정도 해야 고칠 수 있는데, 3분도 안 돼서 느닷없이 멀쩡한 상태로 돌아왔으니, 아리엘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마법사의 길이 끊어진 거 맞아요? 아직까지 마나를 운용할 줄 아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아냐. 3개의 자원이 합쳐진 에너지원은 상당히 강해서, 나도 모르게 발산한 에너지를 먹고 다시 기운을 차린 거 같아. 지금은 촉매와 마법수식이 붙여진 마법도구라면, 나도 사용할 수 있겠네.”

 

그러면 마법공학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만, 기프트피어스라도 있는 게 다행인가? 그나저나 페어링이 끊어졌으니 그 누구에게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잡화점이 다시 돌아왔으니 파장을 감지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오겠지만, 10분을 기다려도 3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묘하네.

기분이...

 

“밤에 영업을 한다면 누군가가 올라나?”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심술궂은 표정으로 카운터 위에 앉아있는 아리엘의 대답을 듣고 납득해버렸다. 미래에 있는 일은 그 누구도 예지할 수 없으니까. 데모르테의 방도 3층에 그대로 있는지 확인을 해보기로 하고, 1층에 아리엘을 그대로 놔둔 체 천천히 올라갔다.

 

사키엘의 문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3층에는 천계와 관련된 다른 물품이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앙에 놓여있는 사키엘의 문 우측 벽에는 데모르테의 방이 있었지만, 쓰지 않는 방을 오래 놔둘 수 없었는지 폐기가 된 것처럼 보였다.

 

데모르테의 방뿐만이 아니라, 루나가 살았었던 지하 1층의 문과 카운터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간도 자체폐기를 한 이유라면,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기 위함이 아닐까?

 

“2층이건 3층이건 다 비슷비슷하네. 누군가가 털어간 것도 아니고...대부분의 물품이 모두 사라져버렸어.”

 

어쩌면 어릿광대의 소행일까?

지금 당장 나를 가장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릿광대뿐이니까.

 

“유랑극단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 검은 높새바람은 이 대륙에 없겠지?”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내 의도는 너에게 해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잡화점의 멤버였다면 내 말을 받아서 불꽃 슛을 날렸을 거라고.”

 

“제가 통키도 아니고 어떻게 날려요? 받는 입장에서는 죽잖아요?”

 

그렇게 투덜거리며 아리엘 나름대로 생각을 하는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빅터에게 안 달려가냐?”

 

“생각하란 사람이 누군데요! 기껏 도와주고 있는데 갑자기 빅터 이야기는 왜 나와요!”

 

빅터 이야기만 꺼내면 불이 붙네.

 

“아. 좋은 생각이 안 나요. 카일 씨. 여장해주세요.”

 

“내가 여장을 한다는 것과 너의 발상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거냐? 무리수 던지지 말고 제대로 생각이나 해. 그런데 세피르와 연락이 닿았으면 레시아가 어떤 상황인지 볼 수 있는 거 아냐?”

 

“그런데 세피르의 말로는 하얀 올빼미와 함께 인간들을 포로로 잡고 있다고 하는데요?”

 

“가면 갈수록 정말 난장판이네.”

 

-딸랑딸랑~

 

손님을 알리는 종이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영업시간이 아니고 왠 토끼하나가 찾아왔다. 오른손에는 거대한 당근을 들고 넓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황야의 무법자가 생각날법한 분위기.

 

“여. 형씨. 안녕하신가?”

 

“넌 뭐야. 이상한 나라에 가는 건 사절인데.”

 

“어라? 레빗이잖아요?”

 

“음? 소녀여. 돌아와서 다행이군. 릴리스 님으로부터 널 데리러 오라는 말이 있었다네. 요즘 마왕님께서 인간과 마족이 같이 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시니까.”

 

레시아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오히려 마왕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움직이고 있는 건가?

 

“이봐. 토끼.”

 

“레빗이라네.”

 

“‘ㅐ’를 ‘ㅔ’로 바꾼 것뿐이지 소리 나는 것은 똑같으니까 그냥 토끼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냐?”

 

“안 된다네. 나의 자아정체성을 존중해주게.”

 

저 썩을 토끼를 석쇠에 올려놓고 돌려버릴라.

 

“지금 레시아. 아니, 마왕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내 질문에 토끼는 모자를 살짝 툭 올려서 붉은 눈을 마주하더니, 진지하게 멋들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각본에 쓰여있기 때문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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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집에서 돌아오고 난 뒤에 써서 늦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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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10

478

 

 

 

사실 30분이라는 시간이 많을 정도로 이곳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자세히 생각을 해보면 내가 이미 꿈이라고 인식을 하는 시점부터 일어나게 되어있으니까. 평상시에도 자다가 꿈이라는 걸 인식하자마자 모두 일어나게 되지 않는가? 당연히 거기서도 일어날 수 없다면 완벽하게 몽마를 원망해야지.

 

그러므로 지금 아리엘의 존재가 깨어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꿈의 주도권을 네가 잡고 있으니 일어나지 못하는 거잖아. 그리 간단한 거였는데 아주 가까운 문제점을 배제할 뻔했네.”

 

“저도 이곳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모르니 어쩔 수 없잖아요. 25분남았어요.”

 

“그 전에 너와 내가 봉인 되었는데 어째서 내 꿈으로 네가 이송이 되는 거야?”

 

“천성적인 본능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리엘의 대답은 자신의 이성과는 관계 없이 내 꿈으로 들어왔다는 소리를 하려는 모양이다. 자신도 난감한 얼굴로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오히려 내가 한숨을 쉬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몽마로 바꾸는 건 켈모리아가 한 실수 중에 가장 큰 실수일거야. 그전에 세피르를 아르트리옴과 분리시키는 걸 먼저 해야 할 텐데...”

 

“세피르가? 아르트리옴과 합쳐지다뇨?”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카멜롯 지하에 있는 검은 존재가 너의 다른 인격으로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지만, 세피르가 그 안에 뛰어들어가서 뭘 했는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이야기 해주는 걸 까먹었어.”

 

만약 세피르를 제대로 구출한다면 나부터 구해달라는 소리를 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봉인되기 전에 말하지 못한 게 너무 많았을까? 솔직히 봉인이 해제된 기념으로 루니아 누나가 요리하는 것은 막아달라는 말도 해야 했고, 잡화점 청소는 아침에 꼭 한번씩 해야 한다는 것과, 마당청소를 할 때는 요즘 많이 더우니까 물을 뿌려가면서 해야 한다는 것도...

 

아직까지 너무 많은 일이 남아있는데, 이별이라는 것이 정말 무섭긴 하나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적은 없었는데, 머릿속에서는 분명 떠나갈 사람은 떠나가고 올 사람은 온다는 생각을 확실하게 하고 있던 내가, 돌아올 수 있는 짧은 이별에 이렇게 안절부절 할 정도라니.

 

지금은 아리엘이 불안해 하니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가기 위해 6번째 양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이 안에서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니?”

 

“메에~”

 

“아니. 몽마가 있으니 내가 스스로 못나간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그러니 몽마를 먼저 현실로 내보내야 내가 나갈 수 있을 거 아냐?”

 

“메에?”

 

지금 이 양의 울음소리와 사람이 대화할 때 목소리 톤을 비교했을 때.“그래서?”라는 말과 매우 흡사했다. 이 양은 지금 나와 별다른 이야기를 하기 싫다는 듯이, 울타리를 넘어가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 대체 다른 양들은 다 넘어가는 울타리를 6번째 양은 못 올라가는 이유가 뭘까?

 

“그러니까 울타리에 있을 때 제대로 점프나 뛰라고! 이 망할 양아!”

 

나도 모르게 6번째 양을 걷어차버렸다. 마법과 마나를 운용할 수 없는 내 몸은 그저 일반인보다 아주 살짝 조금 아픈 발차기. 하지만 양은 발로 차이자마자 거대한 울음소리와 함께 죽기살기로 도망치면서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어라? 뛰어넘었다.”

 

“메에.”

 

저 안에 다른 양들이 나와서 6번째 양을 맞이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자. 아리엘은 허탈한 웃음소리와 함께 말하기를...

 

“카일 씨. 의외로 난폭하네요.”

 

“조용히 해.”

 

“그래도 조금만 뒤에서 밀어주면 저 멀리 도약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게 정답인가 봐요.”

 

조금만 밀어준다는 그 말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양을 보고 있자니 내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는 것 같아, 다시 뒤를 돌면서 탈출할 궁리를 위해 바닥에 누웠다.

 

“뭐하세요?”

 

“혹시 몰라? 이러고 자고 있으면 현실에서는 봉인이 풀린 상태로 깨어날지?”

 

“방금 전까지 제가 방해가 되어서 꿈에 못 깨어난다는 말은 누가 했던가요?”

 

“그러니 내 말은 혹시 모르냐는 말이야. 세상에는 조금만 밀어줘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천지야.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알아서 하겠지.”라고 방치를 한다면, 그 순간부터 저 6번째 양처럼 멀리 떨어지고 도태되는 존재로 전락하지.”

 

아리엘의 말이 사라진 것으로 보면 켈모리아에게 많이 밀려졌을 것이다. 학원의 비서가 되어가고 마족이 되어가면서, 그리고 얼떨결에 미스 카멜롯까지 되어가면서, 혼자인 줄 알았던 사람이 쭉 둘러본다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는 걸 깨닫는 것.

 

당연히 나도 똑같다.

너무 밀려서 절벽으로 떨어질 뻔했다만 그 경험이 양식이 되었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널 밀어줄 테니 이곳에서 빨리 나가자.”

 

“네? 밀어준다니?”

 

“내가 이곳에서 잠이 들 때 키스만 하도록 해. 다른 거 하면 정말로 때린다?”

 

“푸훗! 보통 그런 상황은 반대 아닌가요?”

 

“시끄러워. 이건 어쩔 수 없는 협력일 뿐이니. 나도 머릿속에서 거대한 내적 갈등과 지금 당장이라도 내 초자아가 당장 그 말을 철회하라고 울부짖고 있단 말이야. 제길...아리엘은 대체 얼마나 어장을 부풀려야 만족하는 거냐.”

 

“카일 씨야 말로 얼마나 많은 하렘인원을 만들어야 만족할 건가요?”

 

음...아리엘에게 이렇게 들어서 할 말이 없지만, 내 경우에는 의도한 것이 아니라 사고로 인해 어쩌다 보니 생성되었다고 해야 하나. 생각을 해보면 정상적인 만남이 없다고 생각했다.

 

“싫으면 안 해도 돼. 아니 다시 생각을 해보니 좋아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뭔가 부작용이 가장 크게 일어날 거 같으니까.”

 

“부작용이 뭔가요? 사람을 약물 취급하지 말아줄래요?”

 

내 오른쪽 귀에 걸린 티르빙을 만지작거리며 잠깐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티르빙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야! 안본 사이에 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를 꼬신 거야? 형씨는 정말 능력자구나?”

 

아마 이런 말을 했겠...

 

“잠깐?! 티르빙 너 지금 말했냐!”

 

귀걸이에서 오랜만에 불빛이 들어오면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호쾌하게 들려오는 어린 음성은 지금 당장 들려오고 있었다.

 

“이 공간은 영적인 에너지까지 모아주고 있으니까, 지금 당장 갈기갈기 찢어진 내 영혼을 일시적으로 용접했다는 의미겠지.”

 

“그보다! 그 동안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체 뭐야?”

 

“그야 내 영혼은 네가 힘을 사용할 때마다 갈기갈기 찢어지거든. 어느 순간 형씨와 이야기 하지 못하고 사라져서 많이 놀랐다고 생각하는데?”

 

1년간의 공백으로 지금 티르빙이 말하는 사실에 매우 놀라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티르빙을 내가 사용할수록 영혼이 찢겨진다는 소식은 몰랐는데, 그걸 왜 먼저 말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걸 먼저 이야기 하지 않았던 거야?”

 

“그야. 형씨는 항상 사건과 사고가 터졌으니까, 주춤할 시간도 없는데 그런 말을 해서 성장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 안 그래?”

 

내 얼굴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이 어울릴까? 아니면 오랜만에 만났으니 반가운 얼굴이 어울릴까?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할 테니, 티르빙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내가 이곳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까, 내 마나를 흡수하고 이곳에서 본 모습으로 돌아와봐.”

 

“지금? 오랜만에 해볼까나?”

 

흔쾌히 납득하면서 마나를 흡수하고 사람의 모습으로 성장한 티르빙이,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7세 남자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외투를 벗어서 티르빙에게 입혀주고 자신의 팔과 다리를 오랜만에 확인하고 있는 티르빙은, 기쁜 듯이 이리저리 점프를 하고 있었다.

 

“이야! 마지막 한 조각까지 흩어졌을 때는 두 번 다시는 이런 모습으로 될 줄은 몰랐는데, 지금은 이렇게 살아 움직이니까 인생을 다시 살고 싶어진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넌 그 안에서 계속 살면 되잖아. 어차피 나는 이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다루지 못하거든.”

 

“그런데 형씨. 궁금한 게 하나가 있는데? 잠깐 말해도 될까?”

 

“뭔데?”

 

오랜만에 나타나더니 궁금한 것은 많은지 질문을 마구자비로 하기 시작했다.

 

“저 뒤에 있는 어린애에게 손대는 건 범죄라고?”

 

“안 댔어! 그리고 진짜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잖아!”

 

티르빙도 아리엘을 의식했는지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아리엘을 잠깐 부를 겸.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고 본래 말하고 싶었던 것을 내뱉었다.

 

“지금 형씨 몸 안에 있는 거. 마나가 맞는 거야?”

 

“마나가 맞냐고 물어봐도 지금 내가 어떻게 들춰낼 수 없다만?”

 

“마나라고 보기에는 거대한 에너지가 담겨있는 거 같은데? 0.1%만 흡수해도 내가 붕괴될 뻔했다고?”

 

아리엘에게 물어볼 수 밖에 없던가?

 

“아리엘. 지금 눈을 강화해서 내가 어떤 마나를 지니고 있는지 알려주겠어?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도 티르빙이 내 마나를 흡수하고 변했으니까.”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구나. 이제 남에게 진단해달라고 할 정도로 낡은 건가?

 

“태양 빛처럼 백색광이네요. 조금만 쳐다봐도 실명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신성력은 백색인데 지금 카일 씨의 몸 안에 있는 것은 너무 눈이 부셔요.”

 

“무슨 소리야. 설마. 지금 3개의 자원에 내 몸 속에서 융합한 거야? 내가 핵융합 발전기냐? 아니면 누군가가 마법카드로 융합을 사용한 거야?”

 

“하지만 제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고요? 설마...신이 되어가는 거 아니에요?”

 

아니. 신이 되어가고 있는 현상으로 이런 경우는 없다. 천계는 신성력 하나로 이어져있으니까. 이렇게 융합이 된 경우는 창조신 이외에...시나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큰일이라면 이 몸으로는 그 거대한 에너지를 감당할 자신이 없고, 제대로만 사용할 줄 안다면 어마어마한 능력이 될지도 모른다.

 

당연히 지금 봉인이 풀려서 나가자마자 붕괴 당할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원래 이 안에 들어가 있으면 리셋이 되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마법도 페어링마저 전부 다 끊어졌지만, 마나마저 본래 상태로 돌아올 수 없나 보다.

 

“파워 업이 파워 업이 아닌듯한 파워 업은 난생 처음 들어봤네. 이러다 온 몸이 파업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형씨. 예나 지금이나 말장난은 최악이구만...”

 

티르빙이 나를 보며 안쓰러워 하는 표정을 지을 줄 몰랐는데...

 

“시끄러워! 아무튼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자. 그리고 티르빙은 그 안에 있으면 초기상태로 그 안에 계속 있을 수 있잖아? 그러니 우리 따라 밖에 나오지 말고 그 안에서 살라고?”

 

“음.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양들도 많이 있고. 그럼 길을 열어줄 테니 피를 줄래?”

 

티르빙은 활짝 웃으면서 백색의 단발이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르는 바람에 이끌리고 있을 때. 오른팔을 티르빙 쪽으로 건넸다. 어려 보여도 역시 물리는 건 상당히 아프고, 피를 목에 상쾌하게 넘겨가며 맛을 음미하는지 한동안 내 오른팔을 풀어주지 않았다. 강한 붉은 눈이 빛을 발하며 뜨자마자, 바닥에서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커다란 구멍이 나기 시작했고, 나와 아리엘은 멍하니 그 구멍 밑바닥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기 통과하면 체셔가 나오는 거냐?”

 

“엘리스와 더불어 이상한 나라에 빠지는 건 아닐까요?”

 

“둘 다 중얼거리지 말고 잘 가도록 해.”

 

 

나와 아리엘의 등을 살짝 떠미는 소리는 툭,하고 튀어나왔지만, 앞으로 떨어져야 할 깊이를 모르는 우리는 마음의 준비도 안 되었는데 떠밀어버린 티르빙을 저주하며, 거대한 비명소리와 함께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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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워프레임을 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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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9

477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시간은 열쇠가 아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 석상 안에서 언제 나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나와 아리엘은 빨리 문을 열리길 기다리면서 방금 전에 들었던 사회자와 각본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모든 것은 각본에 의해 지정된 전개라는 말을 켈모리아에게 들었다고 했다. 100번이상 회귀를 한 것도 결국 지루한 각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쾌락주의자의 이상행위라고 하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리고 켈모리아는 이번 싸움을 포기하는 행동을 취했다는 것이, 머릿속에 나타날 수 있는 결론.

 

그러면 지금까지 이것만 100회이상 일어난 일인가? 세계가 부셔지고 만들어지는 것이 100회이상이 아니라면 지금은 어떤 결말을 향해 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켈모리아의 경우에는 엘티노스를 넘어 영웅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을 테니, 실질적으로 주 목표가 영웅을 뛰어넘는 것. 부 목표가 반복되는 회귀를 부수는 것이 되겠지.

 

“꽤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어. 이 정도로 내 머리가 돌아가본 적은 처음이야. 각본가와 사회자라...유랑극단의 인원은 어릿광대, 맹수 조련사, 각본가, 사회자. 이렇게 4명이 있었지.”

 

“어릿광대와 맹수 조련사가 저희를 도와주는 이유도, 그저 각본에 그렇게 적혀있기 때문이라고 켈모리아가 말했어요. 그러니 지금은 이 봉인에서 빨리 풀려서 카일 씨와 해결하지 않으면...”

 

“해결? 미안하게도 나는 이제 이곳에서 나가면, 마법을 못쓰는 민간인으로 완벽하게 전직하게 된다고?”

 

“네? 그건 또 무슨 자다가 트롤의 허파가 빠지는 소리에요?”

 

트롤도 허파가 빠지면 생명이 위급하다고...

터무니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상황설명을 요구하는 주홍빛의 눈이 나를 쏘아봤다. 빠르게 고개를 돌린 아리엘의 은색비단은 아름다운 곡예를 하듯이 따라왔고, 숨길게 없는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 이곳은 엘티노스 씨가 만든 봉인장치야. 네가 가진 마신의 힘을 봉인하고 본래 마족으로 되돌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먹는 일이라고, 원래는 너를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던 속셈이었지만, 내가 이렇게 들어가면서 너는 마족으로 유지하며 위급상황에 곧바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도록 보존하는 것이며, 나의 경우에는 그 동안 잘 유지해왔던 모든 마법과 페어링, 어쩌면 모든 계약과 낙인이 사라지게 돼. 모든 것을 잃는다고 봐야 할 거야. 지금도 그 상태라서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은 너에게 의존하는 거라고.”

 

“그런...말도 안 되는...그럼 내가 카일 씨를 지배해서 여장을 시킬 수 있다는 소리인가요?”

 

“눈을 반짝이며 무시무시한 소리 하지마. 아무리 여름이라고 하지만 더위를 날리기 위해서 그런 소리를 한다면, 정말 귀신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아니, 솔직히 지금까지 만나온 것이 좀 많아서 귀신이 찾아와도 안부인사는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나를 여장시킨다는 말부터 계획, 행동, 범죄까지 모두 금지야.”

 

“칫!”

 

저런 고운 얼굴로 혀를 찰 줄이야.

그런데 의외로 잘 어울리는 건 뭘까? 귀엽다고 해야 하나?

무의식적으로 아리엘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면서 다시 허세가 2000%담긴 말을 내뱉었다.

 

“마법과 모든 계약을 잃었지만, 지금까지 겪어온 고생과 경험, 지식은 나의 가치가 되어주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나중에 모든 것을 잃어도 그리 걱정하지는 말아라. 살아갈 길은 궁리만 하면 어떻게든 나오니까. 지금 켈모리아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숨어있겠지.”

 

“숨어요?”

 

아리엘은 나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귀엽게 반응을 하고 있지만 그 눈에서는 분노가 아니라 슬퍼하는 눈을 하고 있었으니.

 

“나에게 묻지 말고 좀 머리 속으로 생각해. 켈모리아는 이번 카멜롯에서 어마어마한 일을 저질렀어. 그리고 이 사건은 검은 높새바람에 의해 천칭들의 모임이 주목을 하게 되면서, 지금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켈모리아를 당장이라도 화형을 시키지 못해 안달이 나겠지. 신인류에 이어서 유난히 세계의 평화가 자주 흔들리니 상당히 예민할거라고?”

 

비록 내가 엘티노스에게 한 소리 들었을 때의 첫 부분을 응용했지만, 아리엘은 그래도 자신을 받아줬던 켈모리아의 따듯한 모습에 더욱 마음이 끌리고 있나 보다. 이런 세계로 와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시원할 정도로 받아주고, 힘의 사용방법을 알려줬으니 부모를 생각하는 아이의 모습인 걸까.

 

“너도 아직 어리네. 빅터와 같이 다니려면 10년은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전 이미 어른이라고요. 머릿속에서는 이미 세상물정에 대해 다 알고 있고, 아직까지 지식이 쌓이고 있어요.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카일 씨를 습격할 수 있으니 잘 때 조심하시죠?”

 

“잡화점을 안 열어주면 되지.”

 

“릴리스와 같이 갈 건데요?”

 

결계 그리는 방법이 뭐였더라?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을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머리와 몸은 기억하고 있지만 정작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 결계를 그리기 위해선, 중급 이상의 마법석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여전히 강한 정신방어네요. 카일 씨는 저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야 당연하지. 네가 비록 몽마라서 남을 홀린다고 할지라도, 내 체질은 월식 때문에 뒤틀려버렸으니까. 뻔해 보이는 유혹이나 함정 같은 건 걸리지 않는다는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습을 받거나 습격을 받죠. 그것도 밤에.”

 

“마지막 단어를 강조해서 안 좋은 기억을 들쑤시지마.”

 

지금까지 당해왔던 것을 생각하기 싫으니, 빠르게 빠르게 기억을 덮어 눌렀다.

 

“그리고 너는 빅터와 잘 지내고 있는데 다른 남자에게 손을 대려고 하다니, 나의 경우에는 기혼자라고? 여자가 여러 남자에게 손을 뻗는 거 아냐.”

 

“그래도 그 발언 좀 이상하지 않아요?”

 

뜬금없이 날아온 아리엘의 발언에 한숨을 내쉬며 “뭐가?”라고 대답해줬다. 그래도 지금은 흥미진진하니 귀를 기울이며 듣고 있는데.

 

“카일 씨는 모두의 카일 씨잖아요? 그‘모두’에 저도 포함되어있는 거 아닌가요?”

 

“그럼 너는‘모두’의 아리엘이냐? 이상한 모두 다 같이 하는 마블을 할 거면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려.”

 

“제가 모아온 백장미에 싸인이나 하시죠?”

 

말뚝이 심장에 박힌 것같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저 말뿐인데 몸이 진짜로 아프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만 같았다.

 

“너도 그 이상한 흑장미인지 뭔지 찍고도 아무렇지 않는 거냐?”

 

“카일 씨가 백장미를 찍도록 협력하는 것뿐이니까요. 빅터는 이미 탄탄한 근육과 훈훈한 이미지를 띈 얼굴이 여장에 방해되지만, 카일 씨는 트릭스 씨와 비슷하게 최소한의 근육만으로 어마어마한 힘을 내면서도, 중성적인 외모에 의외로 여장이 잘 어울리는 몸을 지니셨으니까요. 만약 맨 처음에 카일 씨에게 구조가 되었다면, 저는 잡화점에 눌러 살면서 여장을 시킬 기회를 모색했겠죠.”

 

“너를 맨 처음에 구조한 것이 빅터라서 정말 다행이군.”

 

아리엘이 어설프게 남장해서 찍는 그 이상한 잡지는, 나를 백장미 찍게 만드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소리인가. 루니아 누나와 레이나 씨가 어떻게 애를 버려놨길래, 순수하고 착했던 시절의 아리엘이 그립기까지 하네. 어라? 손수건이 어디 있더라? 눈물이 나오려고 해.

 

“농담은 이 정도로 끝낼까요?”라고 자신의 치마를 툭툭 털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묻는 곳이 아니니 상관은 없지만, 이곳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도 찾은 것일까? 아리엘의 작은 고개는 나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6번째 양이 있는 장소라면 꿈의 세계라고 보면 편하겠네요. 어째서 엘티노스 씨가 카일 씨의 마법과 페어링을 모조리 소비시키면서, 저를 몽마로 남겨두려고 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어요.”

 

이제야 알았다는 소리는 지금까지 나와 대화를 하면서, 이곳을 어떻게 나가야 할지 궁리를 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냥 포기하고 시간이나 때울 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리엘은 서서히 자신의 명치부근에 손을 올리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옷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법학원의 교복이 아니라, 움직이기 편한 활동복.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나와 비슷하게 검은 바지와 회색으로 된 가죽외투. 외투 안에는 검은 블라우스가 자리잡고 있었다. 민무늬이기 때문에 아무런 특징도 없고, 수수한 모습의 차림으로 바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저기. 아무리 옷이 없다고 해도, 나처럼 스타일 없이 입으면 안 돼. 나의 경우에는 언제나 실용성을 우선시로 하기 때문에...”

 

“저도 실용성 우선인데요? 카일 씨의 옷을 복사하듯이 바꾼 이유라고 한다면, 마법학원의 복장은 치마가 짧아서 아슬아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증명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바꿔버린 것도 있어요.”

 

아리엘은 몽마니까 꿈의 세계에서는 힘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면 강한 의지로 이곳에서 깨어나고 싶다는 염원을 이루는 것이,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는 건가?

 

“제 힘은 아직까지 작용하니까. 카일 씨와 저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 거에요. 다만, 부작용이 있으니 미리 방지를 할까요? 아니면 부작용을 나중에 해소할까요?”

 

뭘지? 뭘 골라도 내가 손해인 것 같은 제안은?

 

“그 부작용이 무엇인지 알려줘야 그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지 않을까?”

 

대답을 들은 아리엘은 순간 눈빛이 요망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이미 느낌이 오기 시작했고, 어설픈 계략에 너무 어설프게 말려 들어가버린 나를 내가 저주하기 시작하며 귀는 마저 내용을 들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우선 둘 중에 하나를 고른다고 하셨으니, 설마 카일 씨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는 없고. 제 생각에는 이공간에서 깨어나려면 상당한 양의 정기가 필요한데? 어떻게 지불하실 건가요?”

 

정기를 어떻게 지불하냐고 물어봐도, 화폐처럼 꺼내서 줄 수도 없는 노릇인데,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면 어쩌잔 걸까? 치켜 뜨는 눈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낳았다.

 

“좋아. 다른 해결방안을 생각하자. 아무리 꿈속이라고 해도 너의 도움 말고 다른 방법으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네가 무리해서 힘을 사용해 이곳에서 꺼내준다는 말은 없는 걸로 하고, 나의 명석한 두뇌가 제대로 일하길 기대하면서 귀엽게 바라보는 포즈는 그만둬.”

 

합리적인 판단은 이쪽이 더 빨랐...

 

“30분이에요. 30분동안 못나가면 강제로 카일 씨의 정기를 흡수하고 밖으로 나갈 거에요. 게다가 지금은 약간 춥기도 하고, 릴리스가 눈에 불을 키고 카일 씨를 원하는 이유도 알고 싶고...”

 

다고 생각을 했는데, 느닷없이 떨어진 선전포고 때문에, 생각의 속도는 시공간을 뚫어버릴 정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채찍질을 해봐도 제대로 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리엘마저 나를 가볍게 여기면, 유일한 도피처인 꿈에서마저 6번째 양과 이별하고, 정기 공급소가 될 것만 같은 불안한 미래를 만들지 않기 위해...

 

이미 무시무시할 정도로 처참한 이명이 붙었는데, 창고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난잡한 별명이 붙었는데, 내가 그 흔한 감자도 아니고!

 

“우선 실험을 하자. 30분동안 할 게 많으니 좀 기다려.”

 

 

기발하지 않지만 아주 간단한 것부터 실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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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보다가 잠을 못자서 지금 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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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8

476

 

 

 

경우에는 이 싸움은 오래 끌고 최후의 최후까지 끌려갈지도 모르는 순간이지만, 켈모리아의 잘못된 판단으로 100배는 더 가까이 빠르게 단축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만, 내 수명도 왠지 모르게 100배 더 단축이 된 기분이 들었는데, 무시무시할 정도로 허약해진 몸에 어떤 보양식을 집어넣어도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잘난 엘티노스와 전설의 영웅을 넘겠다는 켈모리아가 3개의 자원을 합치는 일을 하지 않는 이유라면, 내가 몸으로 철저하게 체험중인 부작용 때문이겠지.

 

“신랑! 방금 그건 뭐야!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루시피나는 경악해서 달려오고 침착함을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다짜고짜 나를 붙잡아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24시간 전의 내 신체로 되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신과 밀접한 힘의 대가는 의외로 작았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형체가 사라져버린다거나, 몸이 붕괴해서 절명을 맞이한다거나, 젤나가가 되어 온 우주의 생명을 퍼트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잠깐? 마지막은 생각해보니 의외로 할만한 일 같은데?

 

“뭐. 지금이라도 쉬어두면 대략 2주 정도는 살 수 있을 것 같네요. 루시피나.”

 

“불길한 소리 하지 말고! 어째서 그런 무모한 일을 아무런 상의도 없이 하는 건데!”

 

“아니. 그야 느닷없이 떠올랐으니 상의할 틈도 없이 도박을 걸은 거죠. 우선 켈모리아의 존재를 지우기는 했는데 이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존재를 지운다는 것은 그에 합당한 대타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의 기억에서도 남아있지 않으며, 이사벨 씨에게 물어보면 여동생에 대한 추억이 없어져 있다.

 

“그런데 묘하네요. 분명 켈모리아에 대한 존재를 지웠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거지?”

 

당연히 제거를 담당한 내 기억에서도 지워져야 할 텐데. 어째서 지금 내 머릿속에 떠나가지 않는 것일까? 덤으로 어처구니 없게 일어서는 켈모리아의 몸은 주변을 둘러보며 상쾌하게 말했다.

 

“이야~ 정말 다행이야.”

 

“뭐가 다행이야! 방금 전까지 사라지기 위해서 입자화로 날아가고 있었는데!”

 

“응? 아. 그거? 다행히도 내 안에 있는 다른 존재만 날아간 것 같은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롱기누스의 창은 육체가 아닌 영혼을 파괴하는 힘. 그럼 잠깐 동안 다른 인격을 불러오면 되는 일이지 않을까? 유체이탈이라는 마법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니까.”

 

다른 인격?

아까부터 무슨 소리지?

 

“음. 확실히 기억이 안 나네? 분명 누군가가 날아간 것 같은데. 지금 당장 내 안에 어떤 마법이 사라졌느냐 하면, 그것도 기억이 안 나네?”

 

내가 롱기누스의 창으로 마법을 발동하기 전에, 켈모리아를 흉내 내는 누군가로 바꾼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 켈모리아 안에 받쳐주고 있는 어떠한 것은 사라졌지만, 대체 내가 뭘 지워버린 거지? 기억이 나지 않고 서야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궁금증을 풀려면 기억을 해야 하지만 전혀 나지 않는다.

 

“뭔지 몰라도 비열한 수를 써서 잠깐 동안 피했다는 건가.”

 

자세히 켈모리아의 몸을 살펴봐도 여전히 입자가 하늘 위로 승화하듯 올라가고 있지만, 실제로 몸에는 어떠한 이상현상도 보이지 않았다. 흙먼지로 더럽혀진 드레스를 가볍게 손으로 털면서 다음 마법을 준비하려고 할 때.

 

“음? 마법이 나오지 않아? 그렇구나! 근본적인 걸 부수고 지나가서 어쩔 수 없네. 이제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 되어버린 거구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켈모리아의 손 앞에는 어떠한 마법진도 나타나지 않았고, 마나 또한 뭉쳐지지 않았다. 황혼<Dusk>을 맞은 이후로 모든 마법이 사라진 켈모리아는 잠깐 고민하듯이 고개를 올려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고, 짧은 시간 안에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삶의 낙이 사라져버렸네. 이제 마법의 지배자라는 칭호도 없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거잖아?”

 

말은 저렇게 부정적으로 해도 켈모리아의 표정에서는 해방감을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마법에 관한 모든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 소유하는 것을 버리는 것으로 자신이 자유가 되었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허탈감일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아리엘에게 속박되었던 저주가 없어졌다는 소리이고, 노아스에게 걸려있던 저주도 풀렸는지 정령왕들이 있는 지역은 잠잠해졌다.

 

“신랑. 우선 돌아가자.”

 

루시피나의 품이 오늘따라 따듯하고 포근해서 의식을 잃어버릴 뻔했지만, 아직 내 일정은 끝나지 않았으니, 지금 저 멀리서 다가오는 아리엘을 보자마자, 루시피나에게 할 말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루시피나. 엘티노스가 만든 석상...지금 제 뒤에 소환해줄 수 있나요?”

 

“그 몸으로는 무리야! 차라리 내가 같이 봉인될게! 그러니 신랑은 내가 봉인에서 풀렸을 때만이라도 나를 맞이해줬으면 좋겠어.”

 

급하게 내 뒤에서 떠나는 루시피나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앉혔다.

 

“지금 그 석상이 수명이 얼마 안 남은 저에게 최고의 변수가 될 수 있는 거에요. 봉인에서 풀려나면 제 몸은 마법을 사용하기 전으로 리셋이 될 테니까. 수명이 단축되어버린 이 기이한 부작용도 같이 나아지겠죠.”

 

“신랑은 그걸 계산하고 그 바보 같은 자폭을 한 거야?”

 

“자폭이라니. 제대로 한방 먹였는데...”

 

루시피나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크다고 생각했는데, 뺨에서 흐르는 눈물을 살짝 닦아줬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는 나를 보고 안심을 한 건지. 아니면 나의 의지에 체념을 해버린 건지. 손바닥으로 자신의 남은 눈물을 훔쳐낸 루시피나의 얼굴은 나를 강하게 바라봤다.

 

울지 않으려는 거겠지만...

 

“그럼 잘 다녀와야 해.”

 

“잘 다녀올게요. 루시피나. 잡화점 멤버에게는 대신 전해주세요. 당분간 여행 좀 떠나고 온다고요. 그리고 카멜롯에서 벗어날 때 켈모리아도 같이...”

 

“알았어. 대신 꼭 돌아오는 거다?”

 

죽어야만 낫는 켈모리아의 쾌락주의는 마법이 사라지는 것으로 해결이 되었으니, 분노에 휘말려서 막말했던 그때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건 둘째치고 내 등 뒤에 석상이 열리면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검은 날개를 가진 아리엘은 노을을 연상하게 만드는 눈동자에선 여전히 나를 재우기 위해 다가가는 모습이었다.

 

양손을 뻗어서 나에게 다가오는 아리엘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한숨으로 푹푹 나오기 시작했는데, 내 뒤에 있는 석상에 아리엘과 같이 봉인이 된 이후에도, 밖에 있는 레시아와 시나가 잘 해줄지 의문이다.

 

“자. 낮잠시간이다.”

 

아리엘이 자각하지 않고 계속 나에게 다가왔을 무렵. 아리엘을 끌어당기면서 석상을 향해 몸을 뒤로 날렸다. 밖의 풍경은 그대로 닫혀나가면서 좋은 꿈을 꾸는 걸까?

 

“메~”

 

눈을 깜빡였더니 6번째 양이 내 앞에서 울타리를 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넘어가려고 했는데 무시무시할 정도로 잘 안 넘어간다고 해야 할까? 내 옆에는 오랜만에 키가 작은 아리엘이 누워있었다.

 

마신이 되어 난장판이 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밖에는 아리엘의 다른 인격을 제압하느라 고군분투를 하고 있겠지. 그래도 엘티노스가 직접 천계에서 내려왔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켈모리아는 나 때문에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봉인을 당하는 것뿐이니까. 나중에 레시아에게 다시 마법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하면 되겠지. 게다가 체질은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 마나는 금방금방 다시 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라? 카일 씨?”

 

“잘 잤어? 아리엘? 아니. 지금은 자고 있는 상태니까. 잘 자는 중이냐고 물어봐야 했나?”

 

“여긴 어디에요?”

 

“엘티노스가 만든 석상 안이야. 강제로 마신이 된 너를 되돌리고 있는 작업 중이지. 나의 경우에는 3개의 자원을 합친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들어온 거고.”

 

여전히 사태파악이 안 되어 주변을 둘러보는 소녀는 이윽고...

 

“그럼 현실은 카일 씨와 밀실 플레이를?”

 

“아냐.”

 

정색하면서까지 부정하게 만드는 건 아리엘을 상대하면서 처음이다.

 

“그나저나 켈모리아는 어떻게 됐죠? 분명 저는 켈모리아 때문에 폭주를 하긴 했지만...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누군가에 의해 단순히 농락당한 것뿐이지!”

 

흥분하면서 소리치고 있는 아리엘의 어깨를 억눌러가며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무섭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켈모리아는 살아있어. 그보다 농락이라고? 100번 이상 윤회를 거듭한 것과 지금까지 벌여온 일을 생각하면 혼자서 행한 것처럼 보이는데?”

 

“유랑극단이 남아있어요.”

 

유랑극단은 해체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릿광대와 맹수 조련사가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유랑극단은...”

 

“아직 각본가와 사회자가 남아있어요. 어릿광대와 맹수 조련사는 각본에 따라 움직이면서 방황하는 것뿐이지. 사실은 그 모든 게 계획된 거라고요!”

 

“설마 이렇게까지 오는데 각본대로라면, 지금 이렇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각본에 쓰여있다는 소리인가?”

 

아리엘의 굳은 표정을 보자마자, 나 또한 등 한줄기에 얼음 꽃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이 다음이 또 있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이 뭔가 잘못된다는 소리일까?

 

“봉인이 빨리 풀려야 밖의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눈을 감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다니.”

 

“그보다. 이곳에서 빨리 탈출해야죠!”

 

“탈출은 불가능해. 게다가 나가면 나는 마법을 전혀 못쓰는 사람으로 되돌아가.”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그러니까 아까 켈모리아와 싸운 내용을 더욱 상세하게 알려준 결과로, 아리엘의 고운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는 이러했다.

 

“미쳤어요! 신랄하게 자살을 택하는 경우는 또 뭐에요!”

 

“아니. 그래도 결과는 모두 좋았으니까. 살아있는...”

 

“카일 씨는 잡화점의 멤버들이 모두 기다리잖아요! 모든 것을 잃은 저와는 다르게!”

 

모든 것을 잃었다?

 

“혹시 네가 폭주를 해서 마법학원에 있는 사람들이라던가, 빅터 등. 다른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네...제 부주의로 모두 사라졌을 거에요. 마법 기동반은 저와 엇갈렸으니까 안전하다고 해도, 밀리아나 다른 사람들은...”

 

“그거라면 걱정하지마. 지금 밖에서는 너의 다른 인격...아르트리옴이라고 하는 게 더 빠른가? 그 녀석만 잘 해결되면 모두가 잠에서 깨어날 거야. 마법 기동반은 지금쯤 널 되돌리기 위해서, 잡화점 멤버와 합심해서 싸우고 있을 거고.”

 

“그럼 다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확실히 전부 죽지 않았어. 아니 죽었다는 것도 이상하지. 검은 존재에게 침식당하고 있지만 되돌아올 수 있는 상태라고 봐. 적어도 내가 마법을 버리기 이전에 봐왔던 상황이니까.”

 

“그럼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이 이곳까지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을 잃은 줄만 알았던 사람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 쌓여있는 문제는 많았는데, 그 중 하나가‘이곳에서 얼마 동안 있어야 해방이 될 수 있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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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때리다 늦었어요.

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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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7

475

 

 

 

숨을 고를 필요도 없다. 마법에 영창을 시작하지도 않는 마법의 지배자라는 이명. 그 이름에 걸맞게 켈모리아의 손 끝에서는 마법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빛에 눈을 빼앗긴 다면 곧이어 찾아올 화염으로 뒤섞인 창에 맞는 것이고, 서투르게 움직이면 다른 마법이 몸을 덮치겠지. 나를 상대할 때는 그런 잔재주는 통하지 않았으니.

 

볼펜처럼 보이는 특이한 기구로 뒷부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Oh Yeeeeees!

 

언젠가 이것도 음성을 좀 바꿔줘야 할 텐데.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아. 기초마법이라던가 그런 건 카일에게 전혀 닿질 않네. 설령 맞는다고 해도 항마의 축복이 지켜줄 테니까. 이런 마법은 가장 비효율적이라는 걸까?”

 

지루한 표정의 켈모리아의 몸에서 바다 빛의 파도가 몰아치기 시작했고, 나도 바다 빛의 파도를 허공에서 만들어냈다. 서로 새벽<Daybreak>을 사용하면서 어느 쪽의 마나가 더 빨리 소비되는지 자웅을 겨루는 것은 결코 아니며...

 

-파앙!

 

내 볼을 스쳐나간 마탄이 순수한 힘겨루기에 방해를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더러운 짓도 할 수 있는 것은 쾌락주의자의 특권이 아니다. 본래 켈모리아의 성격이 좀 비정상적으로 현실적인 시각인 것뿐. 곧 죽게 생겼는데 이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

 

나도 용병시절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꾀를 꾸민 것처럼...평범하게 이기는 것이 지루하거나 볼품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발상부터 기발하지 않으면 저쪽에게 밀린다.

 

“그러면 죽지 않게 조심하라고?”

 

“보통 촌각을 다투는 싸움에서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을 텐데!”

 

급격한 파동을 쏘아 보내는 켈모리아의 손을 피하면서 생각을 했지만, 켈모리아의 새벽을 상쇄하는 걸로 마나를 전부 소진하고 있는 반면, 나와 다르게 다른 마법을 사용할 정도로 여유가 넘쳐난다는 소리.

 

켈모리아의 경우에는 마나도 그렇고 마법도 그렇고 역시 정면대결은 위험하구나. 그렇다면 나는 좀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이야! 루시피나!”

 

“대화재의 시!”

 

거대한 불길이 나와 켈모리아를 뒤덮기 시작했다. 나 혼자의 마나로 켈모리아의 새벽을 견뎌낼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마나를 빌리는 것이 유효한 방법. 당황한 표정으로 대부분의 마나가 소비 되면서, 켈모리아 근처의 마나가 대폭 감소했다.

 

““대화재의 시는 카멜롯 전역을 태워도 이상할 리가 없는 광역마법. 그 마법을 켈모리아 혼자 집중해서 막아낸다면, 상대적으로 이쪽이 우위를 점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은 최악의 악수를 꺼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뒤에서 불길을 조종하는 루시피나에게 이상이 생긴 듯이 식은 땀을 흘리며 동요했다. 붉은 두 눈빛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다급하게 외치기를...

 

“신랑! 도망쳐!”

 

“블랙홀!”

 

우주에 있어야 할 것이 왜 내 앞에 있는 거냐! 시공간 마법으로 조종해낸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염력으로 압축해서 제어하는 거라면, 내가 손을 댈 수 없는 노릇인데. 어마어마한 속도로 흡입하는 검은 구멍은, 중앙에서 뻥 뚫린 체 희생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기, 흙, 나뭇잎을 먹으며 점점 몸을 키워나가고, 곧이어 돌을 들어서 삼키는 만행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기프트피어스를 들고 블랙홀을 향해 눌렀다.

 

-Oh Yeaaaaaaah!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목소리를 빨리 바꾸고 싶은 마음에, 버튼을 강하게 짓누르며 블랙홀의 크기를 줄였다. 새벽을 전개하면서도 블랙홀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칠 정도면 지금쯤 강물에 흘러내려와 바다를 이루고 있겠지.

 

마법사를 마법으로 이기려고 하는 내 잘못인가?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 검을 들고 돌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에 대한 대비는 이미 끝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은 어디에 있는 걸까?

 

방금 전에 우주에서 날아왔던 거대한 괴수를 찢어놓았던 그 빛이 켈모리아에게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지금 당장 루나와 이야기 할 방법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잠깐?

그걸 왜 남에게 부탁을 하는 거지?

오히려 내가 새로 만들면 되는 것을?

 

“그럼 계속해서 가볼까?”

 

전방에서 모습이 사라졌다. 옆과 뒤쪽에서 소름 치는 것과 동시에 티르빙을 검으로 만들어서 방어했다. 방어자세에서도 거대한 충격이 오고 갔는데, 새벽<Daybreak>이 여전히 출렁이며 다가왔고, 켈모리아의 신체에서 푸른 전류가 튀기 시작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걸 실감했다.

 

“터치!”

 

장난스럽게 나를 살짝 치고 갔지만 비스듬하게 몸을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보 같은 마법소녀 옷 앞에 포인트로 달려있던 거대한 리본이 까맣게 그을리며 날아가버렸다.

 

“어라? 왜 변신이 풀리지 않는 거지?”

 

“그야 저는 마법소녀가 아니라 다른 이들 때문에 불행하게 여장을 당한 거니까. 여전히 내 성별에 대해 헷갈린다고 한다면, 지금 당장 외우는 게 좋을 거야. 잡화점의 주인은 남자라고.”

 

“어머나? 몰랐어. 너무 잘 어울려서 말이지.”

 

“그래서 잠깐 부탁인데 새벽을 꺼줄 수는 없을까? 옷을 좀 갈아입고 싶거든.”

 

켈모리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장한 옷으로는 너무 하늘하늘 거리기도 하고, 너무 예쁜 것을 치중했는지 굽이 살짝 높은 신발이니 힘들었다. 서로 바다 빛의 마나가 허공으로 사라지고, 잠깐 동안 옷을 갈아입었는데 검은 면바지와 검은 가죽외투를 입었다.

 

“여전히 검은 거 좋아하네? 집에 그거 밖에 없는 거 아냐?”

 

“그나마 검은 색이 무난하거든.”

 

다른 곳에 공간이동을 하면서 켈모리아는 말을 걸어오는 여유를 보였지만, 지금 구두나 부츠가 아니라 가벼운 신발을 신었으니, 근접전에서도 어느 정도 보안이 되겠지.

 

“아리엘을 되돌린다면 어떻게 할 거야?”

 

왜 느닷없이 저런 질문을 하는 거지?

 

“글쎄. 적어도 다른 사람이 보호해줄 때까지는 데리고 있는 것이 맞지만, 이미 적임자를 찾아서 내가 데리고 있을 필요는 없어 보여. 그러니 이제 질문이 끝났다면 그 이상한 번개마법을 사용해도 괜찮아.”

 

“그래? 너무 여유가 넘치는데?”

 

다시 빛의 속도처럼 움직이는 푸른 스파크가 켈모리아가 지나간 길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흔적과 자취를 남기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 벌써부터 손바닥이 날아왔지만 시공의 눈을 개안한 뒤에, 날아오는 손바닥의 팔을 옆으로 빗겨 쳤다.

 

“빛의 속도로 움직여도 프레임단위로 늘려버린다면, 사람의 눈으로 직시할 수 있을 만큼 느려진다고!”

 

새벽을 휘두른 주먹이 켈모리아의 복부를 강타했고, 주먹에 남아있는 미약한 힘의 반동으로 자연스럽게 왼쪽 주먹으로 이동하며 정권을 내질렀다. 오른손으로 막아내기 위해 얼굴을 가린 켈모리아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저 뒤로 날아가고 나서, 붉은 구두의 굽이 날아가면서 바닥을 스크래치 냈다.

 

“시공간술사에 대한 개념은 아무래도 카일 쪽이 제대로 잡고 있는 것 같아.”

 

“좋은 스승 때문이지.”

 

그리고 서서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시공의 눈을 개안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내 몸은 안 좋아지니. 시공의 눈을 닫고 상황을 살펴봤지만 내가 주먹을 강타하는 동안, 켈모리아에겐 그 어떠한 치명타도 되지 않았다.

 

“복부는 바람마법을 이용해서 쿠션을 만들어 닿지 않게 하고, 정권을 막았던 손바닥에는 이미 새벽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마법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군.”

 

“정답. 나는 육체강화마법이 특기인 언니하고 옛날부터 많이 싸웠거든. 근접전에는 오히려 이쪽이 환영하고 있지.”

 

켈모리아는 나의 해답에 빨간펜으로 “참! 잘했어요!”라고 써주고 싶은 모양인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투시에 마법을 만드는 행위는 제대로 미친 행위 중에 하나지만, 지금은 미친척하고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어라? 마나를 그렇게 많이 사용해도 되는 거야? 마법사들은 단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작지만 효율을 중시하는데?”

 

“때로는 도박이 필요한 법이지. 요즘 인생에 도박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겠어?”

 

“그래도 지금 사용할 마법은 마나가 너무 많이 들겠네? 시전하다가 쓰러질 것 같은데?”

 

그건 사용하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마나와 더불어 내 안에 있는 신성력과 마기마저 모조리 섞을 거니까.

 

“신랑! 그러면 안 돼! 마법에 기초되는 자원은 한가지씩이라고! 그렇게 마구자비로 넣으면 폭주가 일어날 거야!”

 

루시피나가 저 뒤에서 소리치며 말리려고 했지만, 켈모리아의 사심이 가득한 결계가 루시피나의 앞길을 막았다.

 

“그러면 도박을 해보도록 해?”

 

“오히려 이 시간을 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모든 자원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것은 엘티노스의 자서전에도 쓰여져 있는데, 손쉽게 말해 마법사, 사제, 흑마법사 세 명이 모이면 가능한 자살행위라고 했다. 폭주로 인한 거대한 폭발은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모조리 태워나가고, 소멸시키면서 지도를 바꿀 정도이지만, 성공적으로 융합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버틸만한 마법을 만들거나, 신적인 보물들을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3가지의 자원을 중재하기 위해, 티르빙을 롱기누스의 창으로 변형시키면서, 내 앞에 태양보다 밝은 듯한 거대한 빛의 구체를 내리 찍었다. 티르빙으로 인해 검은 색으로 물들었던 창은, 빛의 구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하얗게 탈색하기 시작했고, 그걸 잡고 있던 내 몸마저 빛이 나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3개의 자원이 섞여 조화를 이루면,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게 되는 독자적인 에너지라니.”

 

황홀하게 보고 있는 켈모리아 앞에 창 끝을 겨누며 발동언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황혼<Dusk>”

 

거대한 빛은 창 끝에서 순식간에 뿜어져 나와, 켈모리아의 마법방패와 복부, 그 뒤에 있는 결계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검은 거대괴수의 몸까지 뚫어내면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켈모리아는 자신의 복부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분명 막았을...”

 

“새벽으로 몸을 두르면서 막아내도 소용 없어. 이미 신을 뛰어넘는 에너지니까. 엘티노스 자서전에도 없던 정보야. 3가지의 자원이 뭉치면 이런 일이 되는 거지. 과거로 회귀마법을 사용할 거면, 내가 롱기누스로 흡수하기 전에 갔어야지.”

 

힘 없이 축 늘어진 켈모리아는 외견상 아무런 상처가 없지만, 롱기누스는 상대의 영혼을 꿰뚫고 부수는 힘. 지금은 황혼의 힘을 이어받아 상대의 본질마저 부순 것이다.

 

“더 이상의 회귀는 없어. 그 지루한 일생에서 쾌락주의자밖에 될 수 없었던 저주받은 나날도 이제 끝이야. 이제 환생 같은 건 불가능 할 테니까.”

 

본래의 모습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이 내 몸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윽! 쿠학! 콜록! 콜록!”

 

입에 비릿하면서도 끈적이는 짠맛. 이미 유혈을 토해내고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이 시야가 흐려지고, 온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위험하다며 생각하지도 않았던 행동을 인간이 해냈다.

 

다만, 그 대가는 톡톡히 치르고 있는데.

몸이 많이 피폐해진 터라, 지금 당장 안정을 취하고 쉬어도 얼마 못살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이런 거 사용하지 말아야지...”

 

온 몸의 마나가 제대로 모이지 않고, 롱기누스의 창은 다시 귀걸이 형태로 바뀌어 버렸다. 정말 한 순간. 3개의 자원이 합쳐져서 새로운 자원을 만들고, 롱기누스로 그 힘을 흡수했을 때. 지식과 이해가 초월범위까지 닿아있었고, 한정적으로 창조신과 버금가는 힘을 얻었다.

 

태초에는 마나와 신성력, 마기가 모두 합쳐졌다는 최초의 발상이,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가버렸다. 그리고 켈모리아를 공격했던 그 순간, 그녀의 과거 회귀는 100번 이상 이루어낸 업적이야 말로 아리엘의 탄생이었으며, 아리엘을 자신의 밑으로 두고 싶은 이유라면 단순한 변덕이었겠지.

 

서서히 싸늘해지는 켈모리아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웃음이 피어 올랐다.

 

“회귀도 못하고 환생도 불가능하다. 그럼 이 지루한 저주에서 겨우 해방될 수 있는 거구나.”

 

 

존재가 소멸한다는 의미는 죽어서 가죽을 남고,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잊혀져 버린다는 소리. 그런 잔혹한 죽음 앞에서도 서서히 사라지는 자신의 손을 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내 머릿속은 수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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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일격필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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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6

474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내 뼈가 부러졌는지 확인하기 전에, 남자로 다시 되돌아갔으니 확인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바보 같은 마법소녀 옷은 왜 남자일 때 입어야 하는 가?’에 대해선 양피지 80장 분량의 논문이 필요할 정도로 고찰을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간단한 티셔츠와 바지 위에, 뼈로 이루어진 경갑을 입고 있는 상태. 그런데 나더러 프릴이 바보같이 달린 저 옷을 입으라고?

 

절대로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을 할 수 없어요. 엘티노스 씨도 그렇고 이걸 입는 건 루니아 누나가 입어야 할 정도로 기묘한 옷이니까요. 어째서 제가 이걸 입어야 하는지 타당한 이유를 말하면 생각만 해보도록 하죠.”

 

“그야. 아리엘의 정신을 번쩍 차리기 위해서는 네가 여장을 하고 있어야 하거든.”

 

“무슨 근거에요!”

 

내 여장과 아리엘이 제정신으로 되돌아오는 거와 무슨 상관이길래?

 

“뭐. 애석하게도 아리엘의 생각으로는 네가 평상시에 있는 모습보다는, 여장한 모습이 가장 반응을 이끌어내기 쉽기도 하고, 그때마다 폭주해서 너를 인형이라던가 애완동물로 만들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냐?”

 

“아니. 폭주한 사실까지는 알고 있는데...잠깐만? 생각해보니 아리엘은 루니아 누나보다 더 한 애였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롱기누스로 제거할까요?”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살려서 지금 아리엘을 살려놓는다면, 언젠가 나의 평화와 평온을 단숨에 때려부수는 위험인물로 머리에서 지정했지만, 엘티노스의 일리 있는 말과 나를 썩어버린 사과를 보듯이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저 애를 살리는 게 목적이라며? 그런데 롱기누스로 대뜸 죽이면 되겠냐? 그리고 아리엘은 살아있는 편이 가장 좋다면서, 저 안에 있는 세피르라던가 저 뒤에 있는 신수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그렇긴 하죠...잠깐? 신수요?”

 

“삑삑!”

 

“으아악! 젤나가 맙소사! 엘티노스 씨! 혼종이에요! 혼종이 나타났어요! 지금 당장 아둔의 창에 연락해서 첫 번째 자손을 이쪽으로 좀 불러주세요! 아니면 그냥 아몬이라도 괜찮으니까 제발 저 존재를 공허속으로...잠깐? 저게 신수라고요?”

 

아까 전의 공격적인 성향과는 달리 느긋하게 엘티노스 어깨에 올라오면서,“삑삑!”하고 울기 시작했다. 그 뒤에 하얀 뱀이 따라오면서 의기양양한 어조로 내 귀를 때렸다.

 

“어떻습니까? 카일 씨. 제가 저 기이한 뱁새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하하!”

 

“자, 잘했어. 그런데 어떻게 친구가 된 거야?”

 

“아. 그건 말이죠. 저번에 잡화점에 갔을 때 기괴한 하얀 책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불쏘시개로 사용할까? 생각해서 미리 삼켜놨었는데, 때 마침 저 뱁새가 절 추격해와서 그 책들로 공격하기 위해 뱉었는데, 알고 보니 카일 씨가 여장해서 찍혀있는 백장미라는 책이...으아아아아악!”

 

머리와 꼬리를 붙잡고 이제 찢어져라 늘리고 있었다. 나의 분노로는 하얀 뱀을 찢을 수 없는 걸까? 고무처럼 쭉쭉 늘어나는 기괴한 느낌에, 땅바닥에 냅다 던져버리고는 왼발을 빠르게 움직여서 뱀의 머리를 밟고 천천히 생각했다.

이 녀석을 대체 어떻게 제거해야 하지?

 

“아, 아무튼! 그 책 때문에 제정신을 찾았는지 도와주겠다고 따라온 거에요!”

 

백장미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는 말이 내 귀에 흘러 들어왔고, 허탈한 감각이 머리에서 한숨으로 치환해버리는 놀라운 기적이 시행되는 순간, 내가 여장을 하면 아리엘의 정신이 되돌아온다는 그 말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기 보단 저 신수는 맨 정신인 것 같던데?”

 

“삑삑!”

 

“이건 대체 뭐라는 거냐?”

 

하얀 뱁새가 울고 있어서 하얀 뱀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빨리 여장을 하지 않으면 근육질 몸매로 코브라 트위스트를 걸어버리겠다고 하는데요?”

 

그게 신수가 할 소리냐?

 

“사건이 이렇게 심각한데 제가 여장을 한다는 그런 여유가 어디에 있나요?”

 

천천히 저 옷으로부터 떨어지는 거다. 머리에서는 타당할 정도로 당연한 말을 잡아 늘려서 시간을 최대한 벌고, 말과는 다르게 행동으로는 점점 아무도 모르게 멀리 멀리 떨어지는 것.

 

“게다가 저는 잡화점의 주인으로 조만간 잡화점을 열어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그렇게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이런 바보 같은 일 때문에, 지금 해야 하는 아리엘의 구출작전을 이렇게 소홀히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지금은 모두가...”

 

“주인. 그 뒤로 도망간다면 루시피나와 루니아가 제압을 하고 옷을 갈아 입힐 것을 명하겠노라.

 

제길. 레시아가 벌써 눈치를 챈 건가?

 

“하하핫! 제가 왜 도망을 간다고 생각하나요?”

 

태연하게...모두를 속이는 행동과 여유로...1초라도 긴장이 늦춰지면 그때가 찬스다.

 

“저는 잠깐 물을 마시기 위해 잡화점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이에요.”

 

“물통은 마스터의 허리 쪽에 있지 않습니까?”

 

“내 물통은 비어있...”

 

“마스터의 물통은 아직까지 70%용량이 저장되어있습니다.”

 

...이거 어쩔 수 없겠는데?

 

“크하핫! 이것이 나의 도주경로...”

 

***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른 반사속도와 타이밍 때문에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지금은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분위기에도 꼭 그렇게 여장을 시켜야만 했을까? 지금 내 주변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루니아 누나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지만, 이 분노를 과연 누구에게 풀어야만 할까?

 

지금 이 분노는 천 개의 태양보다 더 뜨겁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 같은...

 

“역시 주인이로군. 그 전에 이 고양이 귀도 착용한다면...냐아아아앗!”

 

순식간에 검은 고양이의 귀를 낚아채서 잡아 늘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비명과 앞발로 이리저리 휘둘러 할퀴려고 했지만, 이리저리 울리는 레시아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천히 그리고 터져나올 것만 같은 분노를 짓누르며 소리를 냈다.

 

“무슨 고양이 귀를 착용해요? 절 여기서 얼마나 더 비참한 꼴로 만드시려고? 나중에 돌아오게 된다면 레시아를 교육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주인은 그렇게 안 봤는데 짐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니.”

 

“네? 느닷없이 짜증나게 무슨 소리죠?”

 

“짐을 교육한다면 그래도 단 둘만 있을 때 느긋한 밤이 좋...냐아아아앗!”

 

뭘 착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거에 레프리시아를 교육할 때처럼 훈계를 하겠다는 소리다. 지금에 와서 그게 통할지 잘 모르겠지만...

 

“마스터. 냥캣 말고 저를 먼저 교육시켜주시죠. 가급적이면 상냥하게...”

 

-덥썩! 꽈아아아악!

 

“너도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생각하는 교육과는 거리가 좀 머니까 조용히 해.”

 

“마스터. 여전히 아이언 클로는 아픕니다. 그러니 좀 풀어주시죠.”

 

세상의 멸망이 눈 앞에 찾아와도 농담을 할 줄은...

 

“그런데 지금 이 모습으로 아리엘에게 붙잡힌다면, 무시무시한 일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오?”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루니아 누나가 입을 열자. 천천히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으로는 역시 지금 당장 롱기누스를 사용해서...

 

“아니. 내가 만든 봉인 장치에 들어가면 어차피 둘 다 의식을 잃게 될 거야. 그 안에서 제 2차 창작물이 나올법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그런데 공간이 협소한 곳에서 여장한 남자와 여자 둘만 있다니. 의외로 부럽네.”

 

“뭐가 부러워요? 저는 재능을 다 포기하는데.”

 

“재능이 아니라 마법만 포기하겠지. 그래도 마나를 끌어 모으는 체질은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 언제라도 마왕에게 부탁하면 다시 마나의 활로를 열 수 있을 거야.”

 

“그 전에 페어링이 끊어지게 되면 레시아와 시나는...”

 

검은 고양이와 하얀 올빼미를 바라보며 걱정하는 것이 있었으니.

 

“걱정 말거라 주인. 짐과 비둘기는...”

 

“올빼미 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다 똑같지 않는가?”

 

“다릅니다.”

 

이래서 내가 걱정한다는 거야. 내가 없으면 죽어라 싸울 것 같으니까. 지금 하얀 올빼미와 검은 고양이가 서로 파문의 호흡을 하고 있는데, 내가 없으면 이제 누가 말리냔 말이지...

 

“모두 싸우면 안 돼요오. 사이 좋게 지내셔야죠오? 화해의 기념으로 제가 만든 쿠키를...”

 

“아니다! 루니아! 우린 배도 고프지 않고 싸우지도 않았노라!”

“그 기괴한 무지개 빛 음식은 머나먼 시공 속으로 던져버리시길 바랍니다.”

 

당분간은 나 없이도 잘 지낼 것 같지만, 사역마가 아니게 되면 레시아는 다시 마계로 가야하고, 시나의 경우에는 본래의 차원으로 되돌아가거나, 천계에서 머물고 있겠지만...지금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할까?

 

아무래도 저 둘 때문에 느긋함이 옮았는지, 별 쓸 때 없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본래의 일에 집중을 하자면, 핑크 빛의 바보 같은 마법소녀 복장으로 여장을 해서, 아리엘의 의식을 차리냐 마느냐 실험을 좀 하다가, 엘티노스가 만든 석상으로 유인해서 같이 들어간다.

 

“누가 보면 무식한 자폭공격을 그대로 실현하는 줄 알겠네요.”

 

“그런 자폭공격을 먼저 생각한 게 너야.”

 

지금쯤이면 카멜롯에 있는 모든 괴수들이 자고 있을까? 슬슬 시간이 되었으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티노스 씨. 행운 좀 빌어줘요. 신이잖아요.”

 

“얼마나 많은 여자에게 둘러 쌓이려고 내가 행운을 빌어주냐? 시끄럽고 빨리 해결이나 하러 가.”

 

엘티노스의 어처구니 없는 대답을 듣고 한숨을 내쉬며, 카멜롯으로 다시 향하고 있을 무렵.

 

“마법학원 쪽으로 이동하는 걸 보니, 결계가 해제 된 건가?”

 

작은 뱁새는 조그마한 몸집으로 내 주변을 계속 날아다니면서, 길을 알려주고는 있었는데 마법학원 방향으로 나를 계속 이끌면서, 정신 사나울 정도로 “삑삑!”이라는 소리만 계속 울려 퍼졌다.

 

“알았어. 지금 가고 있잖아. 대체 뭐가 그리 바쁘길래?”

 

“어서 와. 카일. 어라? 지금은 마법소녀 복장이네? 나를 위한 걸까?”

 

생글생글하게 웃고 있는 켈모리아가 정면에 서서 맞이해주고 있었다. 붉은 색 드레스는 흠집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계 안에서 잘 지냈으리라 생각했지만, 왜 지금 결계에서 나왔을까?

 

“반 강제로 입혀진 것뿐이지 너를 위한 건 아냐.”

 

“그래? 그래서 지금은 아리엘을 봉인하러 온 건가? 그거 정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감동의 장면인걸?”

 

지금은 켈모리아를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다른 계획이 무산이 되는 걸까?

 

“그보다 괜찮을까? 아리엘은 마신이 되어서 그나마 저주가 발동하지 않고 있지만, 마족이 되면 곧바로 저주가 발동할 거야?”

 

“저주라고? 정말 쓸 때 없이 저주를 잘 사용하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저주인데? 아니면 내가 직접 포장까지 뜯어야 확인이 가능하던가?”

 

켈모리아의 저주마법은 어처구니 없게도 너무 강한 건 사실. 아리엘을 봉인시키는 것과 동시에 죽거나 내 목숨을 위협하는 저주를 걸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리엘을 봉인하기 전에 새벽<Daybreak>으로 정화하고 난 다음인가?

 

엘티노스가 만들어준 석상 안에서도 발동되는 저주라면 귀찮아지니까.

그걸 알고 켈모리아는 지금...

 

“그렇네. 날 죽이기 위해 나타난 거군.”

 

“카일의 새벽은 모든 것을 해제해버리는 무자비한 능력이잖아? 의도적으로 응집된 마나를 해제한다면, 당연히 내가 걸어놓은 저주마법까지 해제하겠지. 하지만 아리엘은 마신에서 되돌아오면 저주가 발동되어야 내가 좀 더 편해지거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죽일 수 밖에 없지. 노아스!”

 

“이프리트! 실피드!”

 

땅의 정령왕을 소환하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프리트와 실피드를 불렀다.

 

“이프리트. 실피드. 정령왕의 일은 너희들끼리 해결하도록 해. 나는 저 앞에 있는 이상한 쾌락주의자에게 한방 먹이고 와야 하니까.”

 

“한방 먹이고 오다니? 카일 씨도 정말 대담하시...아야야야야!”

 

 

전투 전에 실피드가 쓸 때 없는 농담을 하자마자, 아이언 클로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는데, 되도록이면 진지한 부분에서 농담으로 무마시키려는 행동은 눈치껏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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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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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5

473

 

 

 

사람의 한마디로 많은 것이 엇갈리기 시작한다면, 지금의 상황도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이유. 그 이유야 말로 나와 아리엘이 같이 봉인 된다는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휘두른 검은 고양이가 큰 소리로 내 머리 위에서 외쳤다.

 

“혼자서 들여보내면 되는 것 아닌가? 차라리 시공의 눈을 개안해서 아리엘을 유인한 다음에...”

 

“그걸 시도하려고 했는데, 시공간의 흐름을 볼 수 있어도 그건 신들에게는 무시할 수 있는 분야겠죠. 그 전에 아리엘에게 붙잡히면 모든지 끝날 테니, 제가 아리엘에게 붙잡히는 미끼로 그 안에 들어간다면, 제가 없는 동안 밑에 있는 검은 존재...아마도 세피르가 폭주를 할 것 같으니, 그것만이라도 제대로 막아낸다면 그 다음은 알아서 풀릴 거에요.”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은 겨우 하루를 벌었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곳에서 기습적으로 공격이 들어온 몬스터들을 다시 카멜롯에 귀환시켜버렸고, 저곳은 정말로 괴물들의 본거지가 되어버린 이상, 마법학원에 있는 결계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 지금은 무너지지 않기를 원하고 있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켈모리아가 고생을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마스터.”

 

하얀 올빼미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내 시선을 옮겼다.

 

“그 봉인하는 곳에 들어가면 마스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야. 뭐...똑같이 봉인 되는 거지. 아리엘이 각성하기 전으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가니까, 나도 아마 마법을 발현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해. 사역마에 대한 링크도 전부 다 잘려나갈 거고, 시공간 마법까지 열어놨던 저의 마법들은 모조리 봉인 되겠죠. 아니면 두 번 다시 사용하지 못하거나.”

 

이런 충격적인 말을 담담하게 해서 좋지 않은 이유라면, 주변에서 충격을 너무 크게 받는 것일까? 내 입장에서는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준 거지만, 검은 고양이는 나를 바라만 보면서 아무런 말도 못했고, 시나야 말로 충격의 늪에 빠졌다고 볼 정도로 뚫어져라 응시만 할 뿐이었다.

 

“어. 그러니까...그렇게 충격 받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그럴 줄 알고 사역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연이 닿을 수 있게, 이런 반지들을 모조리 선물했다는 그 사실은 잊으면 안 되죠.”

 

“그래도 지금까지의 주인의 재능과 잠재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높았노라! 신의 영역에 가까운 한계까지 인간의 몸으로 제대로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마신 하나를 봉인하기 위해서는 크나큰 위험이 따르잖아요. 세상이 쑥대밭으로 되기 전에 사람 하나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거에요. 게다가 제가 언제 죽는다고 했어요? 지금까지 쌓여있던 마법을 모두 포기하고 평화로운 삶을 되찾는 게 중요하죠.”

 

지금 생각한 것 중에서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소한의 피해를 입으면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할 수 있는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죽는 것도 아니고 엘티노스의 말처럼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이 일이 완전하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

 

이거야 말로 베스트 아닌가?

다른 사람이 보면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겠네.

...물론 100%확률로 감동하지 않겠지만.

 

“주인. 다시 생각해보거라. 짐이라면 주인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노라. 오히려 지금 아리엘을 살리기 위해 주인이 이렇게 고군분투를 할 이유가 있는가?”

 

“만일 봉인이 풀려서 본연의 아리엘로 되돌아간다면, 켈모리아가 기습을 해도 가볍게 받아 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영혼부터 이미 다른 아이라서 봉인에서 막 깨어나도 힘이 없는 저와 달리, 아리엘은 마신이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거에요.”

 

그러면 이제 슬슬 엘티노스 씨에게 연락할 차례인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너희들은 아침드라마 찍기 바쁜 거냐? 그보다 남자가 한번 마음을 먹었다는데 그 주변에 있는 여자들은 밀어줘야지.”

 

연락하기도 전에 뒤편에서 심드렁한 소리와 함께, 심판자와 발키리의 호위를 받고 하늘에서 강림하는 상급신...이라기 보단 그냥 아저씨처럼 옷을 입은 엘티노스 씨를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천계에서 성녀의 그릇에 담겨 우아하게 강림하는 여신들과는 달리, 정말 자유로운 신이 아닐 수 없었다.

 

“엘티노스 씨.”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상에 내려올 수 있는 것인가?”

 

반가운 나의 어조와는 정 반대로 경계하면서 따지는 듯한 어조로 레시아가 입을 열자. 엘티노스는 머리를 긁으면서 한탄하고 있었다.

 

“그야. 허락 받았으니까.“마신 때문에 난장판 될 것 같으니 제가 잠깐 내려가서 확인 좀 하겠습니다.”라고 창조주님께 간청해서 이곳까지 내려왔다. 꼬마 마왕.”

 

“짐은 꼬마 마왕이 아니니라! 이 대륙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시끄러워. 지금의 카일...아니, 지금은 카린으로 말해줘야 하나? 아무튼 카린이 마음이 넓어서 계속 설득하고 있었지, 나 같았으면 때려서라도 말을 듣게 만들었어.”

 

“저기. 엘티노스 씨. 그래도 여자를 때린다는 거는...”

 

“입술로 때렸지.”

 

아. 그렇군. 깊게 파고 들지 말자.

은근슬쩍 내 볼에 자신의 입술을 들이 밀려고 하는 엘티노스 씨의 얼굴을 붙잡고, 연락하기도 전에 나에게 먼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제가 연락할 때 봉인할 물건만 내려 보내주시면 될 텐데, 지금 이곳에 온 이유는...?”

 

“네가 아리엘과 동귀어진으로 봉인되면 그 밑에 폭주하는 애를 내가 막아야 하니까. 켈모리아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영웅행세를 하기 전에, 내가 직접 막아내야 하지 않겠냐? 게다가 저 밑에는 세피르라는 녀석과 더불어 아르트리옴도 같이 있으니까. 정확하게 보자면 저 검은 존재가 아르트리옴이야.”

 

“그 마신 아르트리옴이요?”

 

“정확하게는 아리엘의 다른 인격. 창조된 마신이라고도 하지만, 실제 모습은 아리엘의 부정적인 인격이 저곳에 다 보였다고 생각하면 돼. 지금은 겉으로 날아다니며 모두를 재우는 아리엘이 통솔하고 있지만, 여기서 문제로 모든 감정을 제어하는 이성이 사라지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본능에 몸을 맡겨서 미쳐 날뛰겠죠. 아! 그래서 폭주를 하게 되는구나! 그런데 세피르는 왜 저 안에 융합한 거에요?”

 

엘티노스는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보고도, 모든 이들의 생각을 모조리 읽어내어 단서를 찾는 기묘한 행위를 했고, 명확한 해답을 전수해주는 것이야 말로 방정식에 대입하듯 쉽게 알려주고 이해를 시켜줬다.

 

지금이 전쟁 중인 줄도 모르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서 엘티노스에게 질문을 하자. 가여운 얼굴을 하면서 카멜롯을 바라보더니 한마디를 했다.

 

“그야 아리엘이 좋아서 구해주려고 한 거 아니냐. 그러다가 잘못 되어서 부정적인 감정에 먹혀버린 거지. 너도 뇌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굴려서 제대로 된 대답을 알아내려고 고민 좀 해봐라.”

 

엘티노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굵은 손가락이 내 이마를 살짝 밀치면서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확실하게 모든 것을 상황정리를 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는 엘티노스의 모습을 보자, 그의 전성기 시절에 어떻게 세상의 멸망으로부터 지켜냈는지, 그의 일면을 아주 조금 엿본 것처럼 가슴 한편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자신감이 솟구쳤다.

 

“어차피 아리엘은 네가 끌고 들어가서 봉인한다는 건 변하지 않지만, 이제부터 그 주변에 대해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리도록 하지. 모두 전선에서 전부 물러나게 해. 아니, 차라리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으라고 전해줘. 검은 높새바람도 듣고 있지? 내가 있는 지점에 동상도 떨어뜨리면서 전선에서 이탈하라는 방송과 텔레파시를 부탁해. 아마 내 이름으로 말을 하면 좀 이상하니까. 지금 잡화점의 주인인 카일의 이름을 대면서 모두 철수시켜.”

 

“잠깐만요! 제 이름을 대면서 철수를 시키다니!”

 

“그럼 영희를 시킬까?”

 

“그건 또 무슨 말...아니, 잠깐 그 시답지 않는 개그로 댁이 먼저 죽을래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나의 자신감과 감동을 물어내!

 

“너도 이제 슬슬 카린의 모습에서 되돌아와. 아리엘과 정면에서 대결하려면 거대한 마나를 품는 여성의 몸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날렵하고 빠른 움직임을 할 수 있는 남자의 몸으로 싸워야 할 거야. 어차피 마나라고는 람파시나가 모조리 다 사용하는 바람에, 거덜나버렸으니까 슬슬 그 모습으로 이루어내야 할 목표를 완료했다고 생각해.”

 

시나가 카멜롯 일대의 과거를 안리아스의 수정구로 녹화하면서, 나의 마나를 거의 다 사용했다는 것까지 말하지 않고 다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웅이라는 이름은 어딜 가서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대신. 남자로 돌아갈 때 이 옷이나 입어라.”

 

“이게 무슨 옷인데요?”

 

“그야 당연히 마법소녀의 옷이지.”

 

“남자가 여성용 옷을 입고 뭐하라고!!!”

 

엘티노스는 능글맞게 검은 고양이와 하얀 올빼미에게 다가가더니, 조용한 말로 속삭이고 있었는데, 나의 강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청력으로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렇군. 일리가 있는 말이로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군요.”

 

음흉하게 웃는 듯한 고양이의 얼굴. 그리고 뭔가 납득을 해버린 듯한 시나의 대답에 불길함을 한 가득 껴안고 있었다.

 

“주인. 남자의 모습으로 입기 싫으면 지금의 모습으로 입어도 상관이 없다.”

 

“어째서 제가 그 옷을 입는다는 전재로 되는 건데요?”

 

“다만, 마스터가 여성의 모습으로 봉인이 된다면, 봉인이 풀렸을 때는 남은 일생을 그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이걸 지금 당장 마스터에게 입힐 것이며, 남자로 입을 것이지 여자로 입을 것인지 결정해주시길 바랍니다.”

 

이건 또 무슨 협박이야?

지금 전쟁하고 있는 중 맞지?

그런데 나는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여장을 할지, 여성으로 살지에 대한 선택지를 해야 하냐고? 도대체 어떤 사람이 싸우기 전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먼저 걱정해야 하냐고!

 

...나밖에 없나?

 

“왜 이게 이렇게 된 거에요?”

 

정확한 이유는 엘티노스가 잘 알고 있을 테니, 혹시라도 이게 다른 작전의 개요라고 생각되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면 내가 어느 정도 납득을 하고 사약 먹는 기분으로 여장이라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이것은 모두 작전이니까.”라는 마음으로 합리화를 하면서 나를 자살 직전으로 내몰지 않기 위해서...

 

“전쟁 중에 찍는 카일의 여장이라고 한다면, 백장미에서도 베스트니까. 백장미의 모토는 언제나‘자연스러움에서 묻어 나오는 리얼리티.’라고 하잖아? 그래서 어떤 녀석이 계속 도촬을 하는 거고.”

 

“그 빌어먹을 잡지 하나 때문에 나를 망칠 셈이야! 그리고 누구야! 도촬하는 녀석!”

 

“자자. 시끄럽고 여자로 살기 싫다면 여장을 하면 되잖아. 빨리 옷이나 갈아입고 나를 찾아오도록 해. 당연히 사역마와 더불어 지금 저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레드 드래곤과 여기사도 포함하고.”

 

저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레드 드래곤과 여기사?”

 

“신라아아아앙!”

“카리이이이인!”

 

“망할!”

 

이미 속도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떨어지고 있는 여자 둘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빨리 명계로 가는 방법 중 하나일 터. 나는 몇 번이나 이런 불행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 다음에는 어디서? 언제?

 

“나에게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정말적인 외침을 무시하고 어마어마한 충격이 내 온몸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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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사 엘티노스가 등장했다.

효과는 미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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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4

472

 

 

 

작전상 후퇴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상대해야 하는 적이 미지의 생물인 뱁새인간이었으니까. 지금은 3명도 제대로 제압할 수 없는 가운데에 내가 돌아가보니, 거대한 T-렉스가 검은색 그림자에 뒤집어 씌워진 체 난동을 부렸다. 여기에는 분명 공룡이 멸종한 걸 뛰어 넘어서 보이지도 않는 생물인데, 한쪽 전선은 거의 쥬라기인지 백악기인지처럼 되어버렸고, 다른 한 곳은 몬스터들이 모두 그림자에 잠식이 되어 붉은 눈만 살벌하게 띄고 있었다.

 

마왕군의 30만과 바퀴벌레보다 많은 용사들이 합쳐져서 그 군세를 막아내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처치를 해도 그림자 속에서 다시 튀어나온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데, 밤이라도 되는 순간 끔찍한 악몽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선에는 시나가 필요할 지경이고, 검은 존재는 전선을 넘어 계속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가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사람의 그림자를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대로 가면 하루도 못 버틸 거야. 생각보다 가장 극단적인 해결방법이 필요할지도 몰라.”

 

말하자마자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바라보니, 시나의 올빼미 눈이 무언의 압박을 담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말만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내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말은 안 했잖아.”

 

“아뇨. 마스터라면 결국 저희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리아와 릴리스를 찾아가는 거겠죠.”

 

“마리아와 릴리스를 찾는다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아리엘의 의식세계로 가서 침식되지 않게 하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스터의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재워서 검은 존재의 먹이를 제공하고 있는 행동부터 막으실 거니까요.”

 

시나마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라면 소용없겠구나. 잘못되면 개죽음을 당할 수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켈모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상황에서 아리엘을 봉인하지 못했다는 소리라면, 어디선가 기회를 엿보고 있거나 자신마저 당했다는 소리일 텐데. 시나가 안리아스의 수정구로 과거를 녹화했으니, 저곳이 싸우던 말던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하자.

 

“어이. 주인. 지금 전투하고 있는데 그걸 보고 있는 여유가 있는가?”

 

레시아가 붉은 말 위에서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지휘를 하고 있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뭐라 하려다가, 상황이 급박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대신 가슴을 태워가는 어처구니 없는 기분은 한숨으로 승화하겠지.

 

“명확하게 알아야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붉은 말은 어디서 구한 거에요? 만약 그게 여포가 그토록 찾고 있던 적토마라면 정말 가만 안 둬요?”

 

“묵시록의 기사 중 전쟁<War>에게 빌린 거다. 안심하거라.”

 

“전쟁의 기사? 그 4명의 기사요?”

 

7개의 죄악과 묵시록의 기사. 그리고 때에 따라 칭하는 번외적인 직위가 1개이니까, 12마계공작이 전부 참여한 건가? 자세히 보면 적토마가 아니라 피로 칠한듯한 가죽과, 탄탄한 근육 위에 판금으로 된 갑옷을 입혀준 상태. 눈에서는 살의가 가득 차고 이 말은 왠지 사람을 뜯어 먹을 것 같은 공포심을 유발했다.

 

“어...그렇군요. 뭐 어쨌든 지금은 레시아도 같이 이걸 보도록 하죠.”

 

마법학원 안에는 찍히지 않았으니 그 주변에 있는 환경은, 아무런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는 모습. 그 이후에는 아리엘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검은 날개가 펼쳐지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아리엘이 각성하기 전에는 마법학교 쪽에 결계가 펼쳐지지 않는 것을 보아, 지금은 켈모리아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상황.

 

“지금 의식을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올빼미가...아니, 비둘기가 말한 것처럼.”

 

“잠깐만요. 냥캣. 제대로 부르다가 일부러 틀리게 부르는 이유는 뭡니까?”

 

방금 전에 제대로 시나의 모습에 대해 맞췄지만, 정정을 하면서 다시 비둘기로 말한 레시아는 시나의 항의를 무시하고 질문에 답했다.

 

“검은 존재 밖으로 벗어났을 때는 침식이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하고 있었으니 마법 기동반에 있는 자들은 모두 안전하다. 하지만 퍼지는 속도를 보아하니 이곳 전체를 뒤엎는 것은 앞으로 하루 정도 남은 것 갔노라.”

 

“그래도 켈모리아가 펼친 그 결계 안에는 검은 존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 켈모리아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보면 되죠. 어쩌면 애석하게도 켈모리아를 살려놔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거나. 생각을 해보니 그녀는 엘티노스를 뛰어넘는 영웅이 되고 싶어했으니, 지금 이 상황에서도 영웅놀이를 할지도 모르겠네요.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고 싶어 할 테니, 세피르로 추정되는 검은 존재가 이 세계를 모두 뒤엎는다면 해결하러 나설지도?”

 

“하지만 이 검은 존재에서 태어난 괴물들은?”

 

“그건 아리엘이 생각으로 창조해낸 괴물들이겠죠. 정확히는 생각 속에 있어야 했던 괴물들이 다른 차원에서 뽑혀 나왔지만, 이 세계로 강제소환 된 터라 형체가 아직까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걸 거에요. 마침 저기에 몽골리안 데스웜처럼 보이는 거대한 지렁이가 땅 밑에서도 나오고 있으나,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서 전부 검은 그림자로 덥혀있는 상태에요.”

 

검은 고양이가 저 멀리 둘러보고는 다시 한번 이야기를 했다.

 

“그럼 저들은 아직까지 짐이 통솔할 수 있다는 소리로군?”

 

“네?”

 

아. 마왕은 마물들의 왕이라서?

 

“냐아아아아아아앙!”

 

고양이 목소리에서 울려 퍼지는 충격파를 0.2초간 듣고 곧바로 귀를 막기 위해 손이 올라갔다. 어처구니 없게도 지금은 마신이 있어도 검은 존재 안에서만 통제가 가능한지,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의 경우에는 모두 카멜롯으로 사라지듯 되돌아가고 있었다.

 

“역시나 짐의 예상대로다. 이 세계에 넘어오면서 모든 몬스터들의 통솔은 짐이 붙잡고 있으니 말이지. 하지만 카멜롯으로 가면 짐보다는 더 위에 있는 존재가 통제권을 붙잡는 모양이다.”

 

“그럼 레시아는 저 안에 들어가면 마신의 부하로 들어가게 되는 건가요?”

 

“짐과 주인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데, 저런 마신의 밑에 들어갈 것 같은가? 이미 짐은 주인의 남편이자...”

 

“아내겠죠...”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나와 이미 사역마로 계약 되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마신이 레시아를 통솔할 수 없고 나만 할 수 있다는 거니까. 페어링이 이어져있는 동안에는 마신과 더불어 레시아까지 난동을 부리지 않는다는 소리.

 

계속해서 안리아스 수정구를 보고 있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검은 괴수들이 모조리 카멜롯으로 향했고, 안리아스 수정구를 해독한 결과는 전혀 좋지 않았다.

 

“결국 마법학원 안으로 들어가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거 같네요. 아리엘이 카멜롯으로 돌아오고 있는 모든 괴수를 재우길 바라면서, 마리아와 릴리스에게 꿈의 미로로 사람들을 전부 집어넣으라고 해주세요.”

 

“하지만 그곳은 서큐버스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납치하는 곳이 아닌가?”

 

“생명체들이 잠에 빠져들면 검은 존재는 그 생명체의 몸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갉아먹는 거라고 보고 있으니까요.”

 

“증거는?”

 

“제가 멀쩡하게 깨어있었을 때는 침식을 안 당했잖아요.”

 

결국 몸이 검은 색으로 물들이는 그 작업은, 사람들의 의식이라고 해야 할지, 영혼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영적인 에너지가 약해지면서 침식한다.

 

“주인의 안일한 생각 때문에 상상하지도 못하는 변수에 당하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그럼 그때 생각하는 걸로 하죠. 살아있는 한 언제든지 변수는 만들어지니까.”

 

“그 변수에 죽으면 어찌할 것인가? 주인은 아직 짐의 의뢰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같이 짐의 선생님을 찾기로 한 그 일 말이다.”

 

“그 사람 할아버지 되어있어서 죽어있을 지도 모르는데, 굳이 찾을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그야 당연하지 않는가. 짐과 주인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이다.”

 

과거에서 내가 레프리시아에게 너무 강한 이미지를 보여준 부작용이, 현재에 이르러서 나타나게 된 것일까?

 

-구그그그그그...

 

“레시아. 묘한 울림이 하늘에서 들리지 않아요? 마치 대기가 울고 있는 소리인데?”

 

“주인이 카린으로 변하니 그런 쓸 때 없는 소녀감성적인 말이 나오는 건가?”

 

“제가 말하는 게 다 쓸 때 없다고 하기 전에 좀 들어보기나 하세요.”

 

설마 레시아의 목소리가 저 우주 밖에 나가는 경우는 없겠...

 

“주인? 저 하늘에 있는 커다란 눈은 무엇인가?”

 

“아. 잊고 있었는데 아마 달에서 대치하고 있었던 괴수인가 보네요. 이제 저게 추락이라도 하게 된다면, 어디서 많이 보았을 법한 멸망시나리오를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 그대로 운석이 이곳으로 충돌하는 기괴한 장면임과 동시에, 마신이고 뭐고 초고속으로 모든 생명체가 종말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진귀한 장면 말이지.

 

“저거라면 루나가 알아서 해줄 것이니라.”

 

“알아서 해준다고요? 저 운석처럼 떨어지는 괴수를 무슨 수로 격퇴할 생각이에요? 하늘에서 빛 줄기라도 내리지 않는 한 저건...”

 

-콰아아아아아앙!

 

오늘 정말이지 바보 같은 소리를 한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괴수의 중앙을 뚫고 갈갈이 찢어버리는 광선 하나가 지상으로 내리 찍히자 마자, 거대한 폭발과 함께 카멜롯의 일부 땅덩어리를 등분시켜버리는 파괴력을 보여줬다. 완전히 땅이 녹아 내리면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는 붉은 땅을 보며, 저 하늘 위를 바라보았지만 저 멀리서는 루나가 미소를 짓고 있을 거란 모습에 소름 끼치기 시작했다.

 

달 토끼의 기술력은 대체 어디까지일지.

 

“하늘에서 광선이 내려온 것을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마스터.”

 

“헛소리였는데 그게 진짜로 되어버린 거야. 생각만 하면 이루어지는 그런 편리한 것이 아니니 그렇게 우러러보면 안 돼.”

 

하얀 올빼미가 내 왼쪽 어깨에서 점점 얼굴을 들이밀며 부담감을 주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올빼미의 이마를 살짝 두드려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 거대한 괴물이 깨져나간 후유증으로 작은 별똥별이 되어 사방에 흩어지고 말았으니, 나중에 저 조각을 모아서 구슬로 완전히 완성시키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 당사자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리 찍어버려야지.

 

아니! 바보 같은 일은 이제 그만 생각해!

현실이 되면 어떻게 하려는 거냐! 카일!...지금은 카린을 외쳤어야 했던가?

 

“그래도 한시름을 놨으니 다행인가...가장 커다란 적을 격퇴했으니까요.”

 

“격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일시적인 조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그림자 괴수들은 어디선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나타나니, 짐이 가장 골치 아픈 이유 중에 하나이니라. 그러니 엘티노스가 말한 그 아이언 메이든인지 동상인지 하는 것을 직접 받아온 뒤에, 아리엘을 가둬놓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데...주인은 설마 그것에 대한 작전을 안 세웠다고 하지는 않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붉은 눈을 지닌 고양이가 쏘아봤지만, 거기에 위축되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당연히 다 세웠죠. 제가 미끼가 되어서 아리엘과 같이 그 동상에 들어가면 될 겁니다. 다만, 제가 없을 때 폭주해버리는 검은 존재를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달렸죠.”

 

 

그 태연한 말 한마디에 레시아와 시나의 눈초리가 더더욱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시나의 작은 목소리로는 “결국...마스터는 무리를 하는 제안을 생각하신 건가...”라며 한탄해 하고, 검은 고양이는 말 없이 나에게 어퍼컷을 휘두르기 위해, 마기를 오른손 고양이 앞발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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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그라운드 하느라 늦었어요.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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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

사랑

“일종의 편린이지, 인생 자체가. 무엇 하나 완성된 게 없이.”

 

2년 만에 만난 그녀는 눈에 띄게 수척해 있었다. 몇 년의 시간이 얼굴에 사정없이 폭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것 같았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언니, 동생으로, 같은 과 동기로서 친하게 지내다가, 대학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서로를 잊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연락이 온 그녀는 퇴근 시간에 맞춰 내가 다니는 회사 앞으로 나오겠다고 했다. 회사를 나서다가, 하마터면 그녀를 못 알아볼 뻔 했다. 수척해진 모습에, 그녀답지 않은 회색 빛 촌스러운 의상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항상 밝고 자신감에 넘치고 아름다워, ‘태양의 여자’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연신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나까지도 불안해졌다. 대체 그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야. 내 인생은 아이러니야.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너도 들으면 웃을 거야.”

 

그녀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맥주 한잔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언니가 이렇게 술을 잘 마셨나. 전화 벨소리가 울리는 데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출판사에 삽화를 그리기로 새로 계약한 사람이 있어서 환영의 의미로 팀 사람들과 조촐하게 회식을 했어. 미대생이라 그런지, 얼굴도 말끔하게 생긴 게 진짜 예쁘장하더라고. 근데 그 꼬마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로르까 시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로르까를 말이야. …아, 잠깐만.”

 

그녀는 계속되는 벨소리에 핸드폰을 집어 들어, 대충 ‘알았어, 신경 쓰지 마’등 무미건조한 말투로 몇 마디를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안, 짜증나는 전화가 계속 오네. 암튼, 아니 글쎄, 그 꼬마가 로르까 시를 읽고 그림 그린 것도 있다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새 다들 집에 갔는지 우리 둘만 남게 됐어. 그래서 술도 취했겠다, ‘로르까풍 회화 작품’을 보여 달라고 했지. 그렇게 그날 그 애네 집에 가서 자게 됐어. 작품이 어땠는지는 기억도 안 나. 근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뭔가 이상한 거야. 한번 와본 곳 같은 거야. 문에 달린 장식이며, 천장 등이며…, 언젠가 본 것 같은. 그래서 꼬마한테 장난스레 물어봤지. 꿈속에서 한번 와본 것 같다고. 그랬더니, 그 애 표정이 약간 이상해지는 거야. 그러더니, ‘저 기억 안 나요?’ 이러는 거 있지. 그제야 그 애를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게 생각이 났어. 웃기지 않냐?”

 

그녀가 말하고 있는 사이에 채워 놓은 맥주잔을 그녀는 다시 단숨에 들이켰다. 별로 웃기진 않았다. 대학 다닐 때도 워낙 인기가 좋았던 그녀는 많은 남자와 교제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교제했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과 잠자리를 했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혐오스러웠고, 아름다운 그녀가 자신의 진가를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일정부분은 통쾌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같이 잤던 남자들 이마에 표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잤던 사람과 안 잤던 사람을 구별하고 그게 몇 번을 잤는지도 알 수 있게끔 하는 거야. 아니다, 차라리 남자들 가슴에 내 이름을 문신해놨으면 좋겠다. 그럼 그 사람의 셔츠 속 가슴을 들여다보며, ‘아, 네가 잃어버린 과거의 나를 아는 구나’하는 거지.”

 

그 순간 내 핸드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손으로 집으며 그녀를 얼핏 보자, 받으면 서운해 할 것 같았다. 나는 벨소리가 안 나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나에게 사랑은 제로 칼로리 콜라와 같은 거야. 강렬한 느낌에 끌려 마시고 또 마시지만, 그건 나에게 절대 아무것도 채워주지 않아. 제로 칼로리인 걸 알고, 그렇기 때문에 마시려고 했던 건데, 나는 그게 기적처럼 날 풍성하게 채워줄 듯 계속 마셔. 그렇게 배는 부르고 점점 목은 따가워지는데, 나는 콜라를 마시기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아. 이 콜라만 마시면 될 것 같았는데. 그런 느낌 이해하겠니? 끊임없이 갈망하는데, 절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말하자면, 제로 칼로리의 비애지, 내 사랑은. 잉여쾌락일 수도 있고, 잉여가치, 잉여환상…….”

 

자기 연민에 가득 찬 그녀의 연애 이야기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시켜놓은 풍성한 안주는 우리 둘 다 별로 손을 대지 않은 관계로 풍성한 그대로였다. 그렇게 속을 채우고 싶다면, 안주라도 먹지.

 

우리가 있는 호프집에선 금방이라도 천장에서 바퀴벌레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날려도 전혀 놀라지 않을 만큼 허름하고 어두운 데다가 습기가 가득 차 있는 불쾌한 환경이었다. 회사 앞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아니, 지구상에 이런 곳이 존재하는 지도 몰랐다. 나는 안주에도, 그렇다고 술에도 손이 안 가고 그나마 물만 괜찮게 여겨, 물만 마셨다. 그녀는 열심히 말하면서도 틈틈이 술을 들이켰다. 그녀 혼자 술잔을 비워댔고, 술을 잘 하진 못하는지 눈에 띄게 취해가고 있었다. 난 그저 그녀의 얘기를 대강 듣고 술잔이 비지 않게끔 채워주면서, 부재중으로 택배기사가 앞집에 대신 맡겨놓았을 카메라를 빨리 찾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생리할 때가 됐는데, 계속 안 하더라고. 임신했구나 하고, 누가 애 아빠일까 생각해봤는데, 딱히 적당한 사람이 없더라고. 그래도 별로 상관없었어. 왠지 내가 무언가 해냈다는 느낌, 내 안이 따뜻하게 가득 채워졌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신성한 느낌마저 들더라고. 그래서 일부러 병원을 가지 않고 한 달을 더 넘기고 또 한 달을 넘기고……, 그렇게 반년을 넘겼어. 병원에 가면 현실을 직시하고 수술을 감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배가 별로 불러오질 않는 거야. 한참을 고민하다가 산부인과를 갔지. …아씨, 이거 진짜 시끄럽게 하네!”

 

그녀는 벨소리 나는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팽개쳤다. 오늘 처음 만났을 때 불안하게 떨리던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술에 취해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병원에서 뭐라는 줄 알아? 내가……, 글쎄, 폐경이라는 거야. 스물아홉 밖에 안 됐는데.”

 

그녀는 애초에 울음을 참을 생각도 없었는지, 그때부터 격렬하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아들, 딸 다 낳고 기른 오십 살 중년부인도 아니고 스물아홉에 무슨 폐경이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담담하게 ‘요즘 뉴스에도 간혹 나오고 하는데, 환경 호르몬 영향 때문, 어쩌고’하는 거야. 약으로 치유가 될 확률이 50%이상인데, 문제는 내가 너무 늦게 왔다는 거야. 잘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약을 먹어보자고 하더라.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칼슘제도 먹자고 하더라고. 혹시 올지 모를 골다공증 때문에. 이게 말이나 되니? 진이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많아서 이렇게 벌을 받은 걸까?”

 

그녀는 마치 상처 받은 들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다소 충격적이고 그녀가 받았을 고통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나,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하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표현대로 정말 벌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에겐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헛것을 가졌던 거지, 나를 갉아먹은. 누군가와 살을 부빈 시간이 많을수록 나는 점점 없어지고, 마침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숨 사이사이 먼지가 되어버린거야.”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저 그녀의 다분히 문학적인 발언에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이제는, 내가, 사라져, 버린 거야.”

 

 

 

아마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얼마간 멍하니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던히 놀랐지만, 나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술값을 계산하고 나왔다. 어떻게 그 곳을 빠져나와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기억나는 건, 다음 날 아침, 전날의 일이 몇 년의 일처럼 낯설게 느껴졌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에게서도 그 후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퇴근 후에 호프집을 다시 찾아보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시간이 1년 정도 흐른 뒤였다. 학교 후배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그녀가 독일로 가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후배는 그 독일인이 호모 같은데다가, 그녀 또한 예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살이 많이 찌고 여러모로 굉장히 상했다고 했다. 대학 때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제야 궁금해졌다. 그때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던 걸까? 그럼, 나는 예전 모습이 남았던 그녀를 본 마지막 증인인 걸까? 대체 나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듣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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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

철봉을 해야 해

 

며칠 전부터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들렀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목도 일자형으로 변형되었고 허리도 요추가 약간 디스크라고, 의사가 말했다. 오래 한 자리에 앉아있는 사무직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그런 거라고 했다. 어깨 활짝 피고, 허리 곧추 세우고, 다리 꼬지 말고 바르게 앉으면, 괜찮을 거라 했다. 나는 의사에게 몸의 오른편이 특히나 아프다고 했다. 목부터 허리, 심할 땐 발목까지. 의사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어깨를 펴고 두 팔을 내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의사는 내 오른 팔을 들어 살펴보더니, 이게 다 편 거냐고 물었다. 그제야 내 오른 팔이 굽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알고는 있었는데 그러려니 했다. 팔을 활짝 펴야 되는 일이라는 걸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불편하진 않았다. 아니, 불편했던 적이 한번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체육시간에 배구로 시험을 볼 때였다. 토스를 할 때 팔이 펴지지 않아 엉뚱한 방향으로 자꾸 공이 날아갔다. 연습해도 잘 되지 않아 성적도 B를 받았던 것 같다. 그때 말고는 별로 생각나는 게 없다. 옷 살 때 내 팔이 유독 짧은 것 같이 느껴질 때가 간혹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체구가 작아 팔도 그런가보다 했다.

 

의사는 도수치료와 운동을 권했다. 엑스레이를 봐도 뼈에는 이상이 없었고, 팔이 안 펴지는 건 어릴 적 자기도 모르게 다친 이후에 팔을 안쪽으로 굽히다보니 힘줄이 짧아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목과 어깨로 이어지는 근육에 긴장을 더하고 몸의 균형이 깨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도수 치료 내내 나는 고통스러웠고 평소에 아파야 했던 걸 짧은 시간에 몰아서 아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치료가 통증의 집합인가, 여길 정도로 시원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치료사는 도수 치료 후 나에게 적합한 운동으로 아령을 좌우 교대로 한쪽씩 들면서 곧게 걸으라 했다. 왼손으로 아령을 들 때는 아픈 줄 몰랐는데, 오른 손으로 아령을 들고 걸을 때는 팔꿈치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내 팔 안에 탄력성 없는 고무줄 하나가 힘겹게 늘어나는 것 같았다. 치료사는 내 오른 팔이 치료 이후에도 완벽하게 펴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신 허리 근육을 단련시키면 굽어진 팔로 인해 몸의 균형이 깨지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물론 오른 팔에 대한 스트레칭도 적절히 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팔이 펴지지 않는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오른 팔이, 치료사의 말을 들은 뒤로 불편하게 느껴지면서 슬프기도 했다. 어제와 같은 팔인데,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마치 ‘당신은 언젠가는 죽습니다’라는 당연한 말을 들었는데, 문득 내가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슬픈 것처럼. 이제 오른 팔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영생을 꿈 꿨던 진시황처럼 오른 팔, 너를 펴보리라.

 

어떻게 하면 팔을 펼 수 있을까. 우선 치료사가 알려준 아령을 들고 걷는 연습을 했다. 남동생 아령 3kg를 집 안에서 좌우 교대로 들고 걸어 다녔다. 한 10분쯤 했을까, 아랫집 아줌마가 엄마 핸드폰으로 쿵쾅거린다고 무슨 일 있냐고 문자를 보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집 근처 놀이터의 철봉이었다. 철봉에 매달린다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일은 없을 테니깐. 그렇게 나는 철봉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낮에 방문한 놀이터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몇몇이 뛰어다녔다. 내가 놀이터로 진입하자 아이들 보호자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날 흘끔 쳐다봤다. 내가 여자라 그런지 한번 쳐다봤을 뿐 별 반응은 없었다. 나는 곧장 철봉 쪽으로 갔다. 내 키에 적정한 철봉 바에 매달렸다. 매달리자마자 팔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3초, 5초 정도 짧게나마 철봉에 매달리기를 10회 했다. 매달릴 때마다 오른 팔꿈치의 힘줄 하나가 늘어나면서 팔 전체에 날카로운 통증을 남겼다. 10회를 하고 쉬고 있는데, 양쪽 손바닥도 아려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하다가 한번만 더 해보기로 했다. 철봉에 매달리자마자 손바닥이 아려서 도로 내려왔다. 팔에 근력이 없다보니 벌써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죽지 마!”

 

갑자기 등 뒤로 누가 소리치는 게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어떤 검은 옷을 입은 아저씨 한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나한테 얘기한 건가? 그리고 아이들하고 아줌마들은 언제 사라진 거지? 아저씨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학생, 죽지 마!”

 

나한테 하는 말이 맞았다. 내가 죽으려는 것처럼 보였나? 아저씨가 술을 마셨나? 뭔진 모르겠지만, 저 아저씨 이상해! 나는  아저씨가 쫓아올까봐 미친 듯이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기 직전 뒤를 돌아봤지만 아저씨는 전혀 쫓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나의 극적인 등장에 놀라, 무슨 일이 있냐고 했다.

 

“아니, 어떤 아저씨가, 나는 죽으려는 게 아닌데, 죽지 말라고, 막 소리를 지르더라고.”

 

거친 숨을 그대로 내뱉으며 대답했다. 엄마는 뭔 말이냐고 다시 한 번 말해보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내 팔이 나도 모르게 구부러져서는 안 펴지는 게, 내가 죽으려는 생각이 없는데 죽으려는 절망적인 사람으로 보였다는 게 서글퍼졌다.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누군가 나를 꿇어앉히기라도 하듯 엄청난 무게에 눌려, 대문 앞에 그대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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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

아직은,

그녀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남자는 잠든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창백한 새벽빛이 여자의 얼굴을 더욱 하얗게 만들어, 기력이 쇠한 환자처럼 보였다. 입가에 생긴 주름은 언제부터였을까.

지난 밤 저녁 식사를 하고, 매번 그러던 대로, 자주 들르던 모텔을 찾았다. 방에 들어오고 얼마 안 있어 침대 맡에 앉은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남자의 움직임을 쫓으며 노려보았다.

“나를 무시하는 거니?”

등 뒤에서 들리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뒤를 돌아봤다.

“뭐라고?”

“아니, 어떻게 내가 경쟁 PT에서 떨어졌다는데, 위로 한 마디 안 해줄 수가 있어? 내가 그 PT 때문에 한 달을 꼬박 고생한 걸 잘 알면서.”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뭘 놓친 거지? 식사하면서 경쟁 PT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도 함께 안타까워한 것 같은데. 뭘 더 했어야 했나?

“미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마음과는 다르게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여자가 화가 나서 내뱉는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여자의 이야기 속 다양한 화제가 다 남자와 상관있는 것 같진 않았다. 한참동안 말을 하던 여자는 그 사이에 스스로 화가 누그러져, 평소의 나긋한 어조로 “당신이 나를 존중했으면 해.”라고 했다. 남자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여자를 걱정하는 마음은 저녁 식사를 할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자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연인들의 익숙한 행동 패턴. 우리는 이렇게 별 거 아닌 일로 날 세우고 화해하고 잠드는 건가. 언제부터? 개별성을 가졌던 우리가 언제부터 이름이 필요 없는 흔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된 것일까.

오년 전 처음 만난 여자는 생명력 그 자체였다. 살아갈 날을 많이 가진 사람이 온 몸으로 여과 없이 품어내는 싱그러운 생기, 남자는 여자의 생기에 끌렸다. 자신의 기억으로 오년 전의 남자 또한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때 여자는 남자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렀고 남자는 그게 자신의 매력을 한층 높이는 것 같이 들리곤 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알려줄 것들이 더 많았고 여자는 그런 남자에게 사랑 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여자는 남자를 선생님으로 부르지 않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존중 받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좋은 아내가 되었을 테지만, 아이를 원치 않는 나와 결국 헤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어둡고 나약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실망했을 수도, 지금도 이렇게 나에게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것처럼.

그녀의 생기에 반했던 나는? 그녀 가까이에서, 지금보다 더 강렬하게 그녀의 생기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겠지. 지난 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어디 있는 걸까, 한숨을 내쉬면서. 지금 우리는? 이제 한계에 다다른 거 아닐까?

먼 데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사이렌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다시 멀어진다. 여자가 뒤척이다가 남자에게 다가와 남자를 품에 안는다. 여자의 체온이 남자에게 전해져온다. 햇빛이 좀 더 밝아져 여자를 환하게 비춘다. 그래,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