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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in

동화 속 미로를 헤매는 기분, 브뤼헤

■ 동화 속 미로를 헤매는 기분, 브뤼헤

 

 

벨기에는 정말 나에게 생소했다. 워낙 유럽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했지만 그 안에 벨기에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영국에서 유럽으로 통하는 기착지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 그곳에서 4박 5일을 보낼거라는 내게 대부분의 지나가는 여행객들은 벨기에에서 그렇게 할 게 많나? 하는 의아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 돌이켜 만약 여행하던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과감히 숙박을 일주일 혹은 이주일쯤 늘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깝지 않은,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 벨기에였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벨기에의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켜 준 곳이 브뤼헤였다.

 

 

 

 

 

 

브뤼셀 센트럴 역에서 기차타고 40여분 달리니 브뤼헤에 도착했다. 벨기에에서 머문 4일 중 두번째 도착한 브뤼헤였다.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과 한번 갔었는데, 그날따라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우산이나 우비라도 사려던 우리의 계획은 품절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고, 아쉬운 마음에 역 안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만 마시고 브뤼셀로 발길을 돌려야했다. 아마 혼자였다면 나는 비를 맞고 돌아다녔겠지만, 일행들과 함께 그렇게 하기엔 쉽지 않았다.

 

일행들이 벨기에에서 먼저 빠져나가고 난 후 혼자남은 나는 브뤼헤를 못 가보고 발길을 돌리는 게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벨기에를 빠져나갈때 개시하려던 유레일을 며칠 앞당겨 과감히 개시한 후 브뤼헤로 향했다. 브뤼헤 기차역에서 마르크트 광장으로 향하는 길은 내게 미로와도 같았다. 한적하고 조용한 브뤼헤의 거리는 그저 골목골목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정처없이 두 시간 정도 걷는 동안, 사실 길을 찾지 못해 헤매었지만, 조금 더 이 조용한 거리를 걷고 싶어졌다.

 

 

 

│ 머무름이 행복한 브뤼헤의 길거리

 

 

│ 어느 평범한 가정집 선반에 장식돼 있던 정다운 백조들.

 

 

이때쯤 유럽은 가을 옷으로 한참 가을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었다. 그래선지 시선을 돌리는 곳곳에서 성숙하게 익어가는 푸르름을 만날 수 있었다. 브뤼헤를 소개하는 관광지도에는 벨기에 안에서 그 어느 곳보다 로맨틱한 도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아마도 벨기에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에서 갈라져 나온 설명글이 아닐까 싶다. 7세기경 플랑드르인에 의해 세워졌다는 브뤼헤는 바다와 연결된 유리한 입지조건을 기반으로 베네치아, 카탈루냐의 상인들이 올리브유, 오렌지, 포도주, 다이아몬드 등을 거래하면서 상공업과 무역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13세기에는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명성을 떨친 곳도 바로 브뤼헤였다. 도시를 둘러싸고 관통하는 운하는 멋드러진 풍경을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보트를 타고 브뤼헤를 즐기는 사람들도 쉽게 만나볼 수 있었다. 그들이 신나서 다리 위의 우리에게 손을 흔들면, 다리 위 우리들 역시 환호로 화답해 주었다. 나는 그것이 브뤼헤가 가진 로맨틱이 아닐까 생각했다. 연인과 함께하기에 좋은 로맨틱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보트와 다리 위에서 여행자들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조용한 거리를 걷는 동안 나의 여행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ㅣ 더없이 로맨틱한 브뤼헤

 

 

ㅣ 보트를 타고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 "우리 보트 탄다! 부럽지~!" "야~ 니네 재밌겠다!!!"

 

 

처음 브뤼헤에 도착했을 때는 마르크트 광장을 먼저 찾고 거기부터 시작해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미로 같은 브뤼헤는 만만하지 않았다. 방향을 잡았는가 싶으면 또 길을 헤맸고, 같은 건물과 골목을 뱅글뱅글 돌다가 익숙해졌다 싶으면 새로운 골목길이 나타나 구미를 당겼다. 그러다보니 목적지를 상실한 채 눈에 보이는 데로 내 발길이 가고 싶은 곳으로 마구 걸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빗물을 머금은 가을 바람이 조금 쌀쌀하게 느껴질 때쯤 나는 크리스마스를 분주하게 준비하는 작은 상점 앞에 서 있었다. 아직은 때이른 10월 말, 어쩌면 앞으로 유럽을 여행하며 만나게 될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에 한껏 녹아들 수 있을 것만 같은 두근거림이 다가오고 있었다.

 

 

 

 

 

 

 

 

 

 

 

 

 

 

 

 

 

 

 

 

 

 

 

 

 ㅣ 크리스마스 상점에서 만난 산타들과 호두까기 인형

 

 

브뤼헤의 아름다움은 백조를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몸으로 다가왔다. 백조의 도시임을 인증하듯 내 앞에 펼쳐진 사랑의 호수에는 브뤼헤 시에서 소유한 백조들이 천진난만하게 여행자들의 시선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사랑의 호수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꿈이 있는 사람이 이 호수를 찾으면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시(詩)가 전해지는 곳이다. 백조들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으니 그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백조의 날갯짓이 인생에 지친 영혼들에게 위로가 되어 주길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ㅣ 사랑의 호수

 

 ㅣ 브뤼헤의 상징인 브뤼헤 소유의 백조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 생활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내 눈 앞에 펼쳐진 브뤼헤의 풍경은 마치 작은 보물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을 때 느껴지는 설렘과도 같았다. 길을 잃고 무작정 헤매는 시간 마저도 소중하게 느껴질 만큼 아기자기한 브뤼헤는 벨기에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곳이든 여행을 할 때마다 그 도시, 그 나라만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을 때 작게 나마 남아있던 두려움은 물러가고 그 자리를 만족감이 대신 채우곤 한다. 게다가 낯선 여행자와의 다정스러운 한 토막 수다는 그 여행지를 즐거움으로 남겨준다. 내게는 브뤼헤가 그랬다. 사랑의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작은 다리 위에 서 있었더니 터키에서 온 여행자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서로 사진을 찍어 주고는 어설픈 영어로 시덥잖은 수다를 떨며 걷다가 우리는 나란히 서서 길을 잃고 말았다. 서로 갈 곳을 잃고 지도를 들여다보면서도 우리는 낄낄거리고 웃어댔다. 네 번째, 아니 다섯 번째 서로 길 잃어 버린 횟수를 자랑 삼아 늘어놓던 우리 앞에 커다란 하얀 대문이 나타났다. 그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번뜩이며 하얀 대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수다를 떨던 시간보다 조금 더 길게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ㅣ 바닥을 노랗게 물들인 낙엽마저도 고요한 베긴회 수도원

 

 

 

카메라 셔터를 눌러야겠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한 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한참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 피해가 갈까 걸음 걸음이 조심스러운 곳이었다. 하얀 대문 밖에서는 백조를 구경하는 여행자들의 크고 작은 소리들이 연달아 들려왔지만 대문 안쪽 세계에는 짙은 고요가 깔려있었다. 바스락 거리는 낙엽 뒹구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문득 내가 홀로 여행을 떠나온 이유가 떠올랐다. 곁에 선 터키 여행자의 눈빛을 보아하니 그도 자신만의 깊은 세계로 끌려들어간 것 같았다. 유쾌하고 조금은 다정했던 수다를 뒤로 하고 우리는 베긴회 수도원을 마지막으로 서로의 길로 헤어졌다. 건강한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브뤼헤 역에서 출발한지 네 시간쯤 흘러 내 머리 속에는 마르크트 광장에 대한 목표의식이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브뤼헤 역에 내릴 때만해도 꽤 많이 보였던 여행자들의 모습도 잃어버린지 오래고, 길도 방향도 송두리째 잃어버려서 오히려 브뤼헤 역으론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조금씩 드리워질 때쯤이었다. 내 눈앞에  성모마리아 교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에 더욱 충실한 성모마리아 교회를 가볍게 구경하고 뒷문으로 나와서 보니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이 눈가에 맺힌다. 이곳에서 십 년, 이십 년을 살고 싶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ㅣ 눈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브뤼헤 마을 풍경

 

 

브뤼헤의 물길을 벗삼아 잠시간 걷자니 점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뤼헤 역에서 스치듯 지나쳤던 그 많은 여행자들의 목소리 같았다. 그제야 나는 여행자들의 행렬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들의 발길을 따라 마르크트 광장으로 향했다. 브뤼헤에 도착해 터키 여행자를 제외하고는 줄곧 정적 속에 있다 보니 마르크트 광장에 모여 한껏 수다를 떠는 여행자들과 동네 주민들의 소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내가 헤매고 다닌 4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다 여기에 모여있던 모양이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프랑스에서 독립을 쟁취하는 데 일조한 얀 브레델과 피테르 드 코니크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어느 도시를 여행하던 광장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유럽에서 광장은 굉장히 중요한 길잡이가 돼주곤 한다. 중세시대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번화가이자 도시 중심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이다. 그 도시의 광장에 도착하면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보여줄 수 있는 동상이나 건물들도 광장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오래된 교회는 물론 시청사나 종탑, 길드 건물을 비롯해 여행 가이드 책에서 소개하는 건물 등은 대부분 광장만 도착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광장을 가장 먼저 찾고 그 바깥으로 반경을 넓히면서 여행하는 편이다. 비록 나는 여정의 가장 마지막에서야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ㅣ 4시간 만에 도착한 마르크트 광장

 

 ㅣ 브뤼헤 마르크트 광장으로 향하는 길. 세련된 느낌이 물씬 풍긴다.

 

ㅣ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펍의 맥주벽과 캔디 제조 장인들.

 

 ㅣ 시선을 강탈해 가는 플랑드르 주청사

 

 

마르크트 광장에 도착해서 내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366개의 계단을 올라 브뤼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종루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종루에 올라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 별 의미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이유는 종루까지도 멋스럽게 어우러진 모습이야 말로 진짜 그 도시의 매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종루에 오르면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그러나 브뤼헤는 달랐다. 내 두 발로 구석구석 걸어다녀보니 한눈에 내려다 보면 어떤 모습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위풍당당하고도 씩씩한 발걸음으로 종루로 향했다.

 

 

 

 ㅣ아쉬움을 안겨 준 종루                           

            

 

종루 앞에는 이미 많은 여행자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주고 받으며 웅성웅성하는 그들을 뒤로 하고 문이 닫힌 티켓 박스를 지나 입장하는 줄에 당당하게 가서 섰다. 이때 나는 알아차렸어야 했다. 내 앞에 서 있는 여행자들이 순서대로 퇴짜를 맞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줄줄이 화가 난 여행자들이 줄에서 이탈하여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그때, 티켓을 검사하는 남자 직원이 너무나 단호하게 "NO"를 외치는 것이었다. 단호박을 백개쯤은 드신 듯, 칼로 무를 자르듯 냉정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NO"를 들으니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앞에 서 있던 여행자들의 무리에 뭉쳐지게 됐고, 우리는 단체로 "WHY?"를 돌림노래라도 부를 기세로 외쳐댔다. 그럼에도 들려온 대답은 "절대안됨"이었다. 허탈하게 종루 벽에 기대어 갈길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 앞으로 한 일본인 커플이 종루에 입장했다. 그 커플을 바라보는 우리 (종루에서 쫓겨난 여행자들과 나)는 내심 그들이 우리와 같이 내동댕이 쳐질 것을 기대했지만,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들은 종루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을 목격한 우리들은 또 다시 우르르 몰려가 돌림노래로 "WHY?"를 외쳤다. 그러자 문지기 아저씨는 숨을 깊이 내쉬고는 말했다. "쟤들은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온 애들이야." 그 말에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던 우리들은 "아!"하는 짧은 탄식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일화였지만, 그럼 진작에 예약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씁쓸함과 366개의 계단을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경험이기도 했다.

 

종루를 포기한 후 내 발길은 커피숍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한끼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커피 한잔 마시며 느긋하게 마르크트 광장에서의 활기찬 시간을 만끽했다. 아쉬움은 아쉬움이지만 덕분에 다음에 한번 더 갈 핑계가 생겼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향긋한 커피에 취해 브뤼헤의 넉넉한 분위기에 취해 한참을 시간을 보낸 뒤, 브뤼헤 역으로 돌아 나오는 길은 또 다시 미로찾기 였다. 분명히 여행 정보 센터 직원에게 길을 물었고, 내 지도 그림까지 그려주며 친절히 설명해 준 덕분에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지도를 보고도 엉뚱한 길로 빠져버린 것이었다. 차도 없고, 사람은 더 없고, 지나가는 개나 고양이 한 마리도 없는 골목길을 홀로 40여분 간 돌아돌아 겨우 브뤼헤 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나 골목골목이 매우 정취있고 아름다웠으므로, 이렇게 보석을 찾는 듯한 기분의 미로찾기라면 백번은 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도착해서부터 나올때까지 미로 속을 헤매야 했지만 운하에 둘러싸인 유유자적한 브뤼헤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어서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중에 조용히 장기간 글작업 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브뤼헤에서 터를 잡고 숨쉬듯이 글을 쓰고 싶은 곳이었다.

 

 

 

 

 

 

                                                                                               + 브뤼헤 가는 길

                                                                                                        기차: 브뤼셀 센트럴 역에서 40분 소요.

                                                                                                       

                                                                                                        브뤼헤 역 - 마르크트 광장은 도보 20분.

                                                                                                        급히 둘러본다면 2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소규모의 도시이다.

 

                                                                                                        특별히 여행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면

                                                                                                        2~3일쯤 쉬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브뤼헤 즐기기

                                                                                                       나와 같이 자신이 지독한 길치라고 생각한다면 

                                                                                                       겸허히 마음을 비울 것을 추천.

                                                                                                       구글맵이든 종이 지도이든 뭔갈 들여다보며

                                                                                                       목적지만을 찾는 여행을 하기엔 아까운 도시.

                                                                                                       눈에 담고 가슴에 담아야 할 것이 너무 많은 여행지이므로

                                                                                                       보물찾기하는 심정으로 골목골목을 다니는 편이

                                                                                                       브뤼헤에서 선사하는 진한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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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떤 여행

[안녕,어떤여행] D+05 반짝반짝 빛나는

 

믿을 수 없지만, 오늘이 라파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내일 아침 일찍 대망의 우유니로 떠나는데, 기분이 왜 이렇지? 첫 정이 무섭다고, 라파즈에 정이 듬뿍 들어버렸다. 가이드북에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 후기에도 그렇고 라파즈는 치안이 나빠서 우유니로 가기 위한 관문에 지나지 않지만, 내가 이틀 동안 겪은 라파즈는 그야말로 매혹적인 도시였다. 이 도시의 혼잡함과 소란스러움 마저 참 좋다.

 

오늘은 일찍 일어난 김에 8시 전에 아침을 먹고 엄빠와 페이스톡을 하고 S와 오랜만에 카톡도 했다. 내가 오기 직전에 남미를 여행한 전혜빈은 또 다른 오혜영인 서현진과 여행을 했다고 한다. 도밍고 아저씨에게 세탁할 옷들을 맡기고 (짐이 터질 것 같은데도 왜 입을 옷이 없을까) 영어를 잘하는 아마도 주인인 언니에게 왜 나를 픽업하러 나오지 않았는지 물어봤다. 언니는 처음 듣는 얘기라며 당황하더니, 확인을 해보곤 내가 탄 비행기가 일찍 도착해서라고 한다. 아, 드디어 궁금증이 풀렸다. 그래서 별 문제는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고 했다. (근데 분명히 나는 제대로 된 시간을 알려준 것 같은데)

 

산프란시스코 성당을 향하는 길, 마스크를 꺼낸 후 자물쇠가 잘못 잠기게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1분 정도 후에 깨닫고 바로 돌아갔지만 그새 자물쇠는 사라지고 없었다. 떨어뜨린 게 자물쇠라서 다행이다, 정말. 산프란시스코 성당 앞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는데 (완만한 경사지만 지이이이인짜 숨이 찬다) 인디오 여자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물론, Si! 알고 보니 그녀는 촐리타 (여자 레슬러... 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유명인) 글로리아였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서정적인 하엔 거리를 찾아 육교를 건너니 계단이, 계단이! 라파즈, 이러기냐! 무리하지 않도록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데 그런다고 무리가 되지 않을 리가 없다. 어쨌든 하엔 거리는 꼭 독일 퓌센 같은 느낌의 짧은 골목이었고 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해가 나와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메 뽀드리아 또마르 우나 뽀또? 이걸 달달 외워서 한 번 써먹어 봤다, 히히.

 

아침을 거하게 먹은 탓에 아직 배가 고프진 않아 다시 육교를 지나 이번엔 빨간 케이블카를 타러 가기로 했다. 오렌지 주스 한 잔을 사 먹고, 자, 또 등산이다! 하하! 그래도 어제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오랜만에 한국인 여자들을 만났다. 첫날 한국인 남자 둘을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 한국인이다. 물론 인사는 하지 못했다. 미국인들처럼 스몰토크를 하는 문화면 모를까, 이상한 여자 취급을 당할 게 뻔하니까. 빨간 케이블카는 노란 케이블카와는 또 다른 느낌인데, 둘 중 한 개만 탈 수 있다면 빨간 케이블카를 조금 더 추천한다. 정상에 오르면 엘 알토 해발 4,095m다. 하하. 스케일 한 번 대단하다.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타는데, 한 아저씨와 자꾸 동선이 겹치는데 아저씨가 자꾸 양보를 해주셨다. 아저씨는 주황색 작업복을 입고 계셨는데, 케이블카 안에서 신나게 촬영을 하다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얌전히 앉아있었다. 함부로 동정하는 건 나쁜 일이다. 하지만 예의를 지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케이블카는 관광용이기 이전에 그들의 교통수단이다. 아침에 나오면서 이세타졸을 먹는 걸 잊어버려서인지 손과 발이 내내 저리더니 이제 얼굴까지 저리고 얼얼했다. 마침 눈 앞에 약국이 보여서 소로체를 한 알 샀다. 라파즈 때문이냐고 묻길래, Si. 신기하게도 약을 먹고 나니 저린 증상이 싹 가셨다.  저림도 고산병 증상이었나 보다.

 

올라갈 땐 힘들었는데 내려가는 건 금방이다. 이제 배가 고파서 현대화된 재래시장 렌자에 갔다. 현지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다. 마침 사람들이 엄-청 많은 피데오 식당이 있어서 줄을 섰다. 피데오는 뭐랄까, 쇼트 파스타 같은 느낌의 면 요리 위에 달걀이나 소시지, 실판초 같은 걸 올려 먹는 건데, 실판초는 어제 먹어서 소시지로 주문했다. 20여 명의 현지인 사이 유일한 외국인 나! 똑같이 소스를 뿌려서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기대했던 팟타이 류의 볶음면 맛은 아니었지만, 나름 먹을만했다. 가격은 단 돈 3볼! 오렌지주스보다 싸다! 약 540원 정도! 너무 좋다.

 

마녀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보라색 판초를 샀다. 왠지 더 깎아야 했을 것 같지만 나는 흥정에는 영 재능이 없다. 비가 뚝뚝 떨어져서 카메라는 백팩에 넣고 우산과 고프로만 꺼냈다. 환전을 백불 더 하고 암푸 거리를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라파즈를 떠나는 게 왠지 아쉬웠다. 사가르나가 거리를 내려가다 목도 마르고 비도 많이 와서 카페로 몸을 피신했다. 유창한 영어를 하는 직원이 있는, 전형적인 서양 백패커스들의 아지트 같은 느낌의. 그래도 3층 창가에 앉아 비 오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마신 스타후르츠 주스는 맛있었다. 다시 비 오는 거리로 나와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쉬운 마음에 고프로를 손에 꽉 쥐고, 그 혼잡함 속을 뚫고 걸었다. 나를 놀라게 했던 총성의 정체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위 한 번 과격하다, 이 동네. 우리나라 촛불 좀 가르쳐주고 싶네.

 

숙소에 들어가 계속 쉬다 해가 지면 나갈 생각이었는데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모르는 상태라, 숙소 앞 모퉁이에 파는 빵 같은 걸 좀 사다 놓을 생각으로 밖으로 나갔더니 문을 안 열었다. 이 아줌마들은 통 나랑 타이밍이 안 맞다니까! 근처에 큰 재래시장이 있다고 해서 주머니에 열쇠랑 휴대폰, 고프로만 넣고 길을 나섰다. 어느새 다시 해가 떴고 시장은 별 거 없었다. 허탕만 치고 대학교 쪽 노점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마땅한 음식을 찾지 못한 오르막길 끝에서 중국 음식점을 발견했다. 아, 쌀밥이 먹고 싶었다. 내내 밀가루나 고기만 먹은 터라 속이 불편한 거 아닐까? 좋아, 선택했어! 노점 음식을 살 생각이었던 터라 주머니엔 20볼만 있었고 14볼짜리 후라이드 치킨 한 조각이 올라간 볶음밥을 시켰다. 그리고 나는 정신없이, 그야말로 푸드 파이터처럼 밥을 먹었다. 음, 배가 고팠던 거구나. 그리고 늘 생각하지만 중국인에게선 상냥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도 맛있는 쌀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은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7월 16일 대로는 그야말로 불금 직전이었고, 나는 들어가는 길에 물 한 통을 샀다. 그리고 모퉁이 노점이 문을 연 것을 발견했다. 이런 타이밍! 대체 뭘 파는 것인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니 두 분 중 한 분이 내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셨다. "살테냐?" 살 거냐고 묻는 게 아니고, 살테냐라는 볼리비아 음식이냐고 물은 거다. "노, 블라블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직 얼마냐고 묻는 걸 못 외워서 영어로 얼마냐고 묻지 못 알아들으시길래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꺼내 보여주더니 용케 알아듣고 "꽈트로" 라며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이신다. 잔돈이 모자라 얼른 방으로 뛰어들어가 동전을 가지고 나와 빵을 하나 샀다. 방금 먹방을 제대로 찍고 난 터라 야식으로 먹을 생각이었다.

 

밤에 혼자 다니지 않는 것은 여자 혼자 다니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 중 하나다. 그것이 설사 매우 안전한 도시라고 하더라도. 나는 라파즈가 그리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외진 킬리킬리 전망대에 가기 위해 숙소 리셉션에 택시를 불러 달라고 했다. 전망대까지 왕복하는데 35볼, 그렇게 저렴하진 않지만 또 그렇게 비싸진 않은 가격. 한참 기다려 택시를 타는데 모퉁이 노점 아줌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준다. 나도 안녕! 하고 손을 흔들었다.

 

킬리킬리 전망대는 기대 이상이었다. 별들이 점점이 박힌 것 같은 꿈같은 세상! 이렇게 아름다운 야경이라니! 말도 안 된다. 도저히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아름다운 야경, 내가 본 야경 베스트 안에 들 법했다. 10분 정도만 보고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20분 넘게 머물렀고 드라이버에겐 3볼을 더 챙겨줬다. 내려오는 택시 안에서 정말 부끄럽지만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눈물이 찔끔 났다. 파묵칼레의 선셋 이후 두 번째다, 이런 감정은. 그냥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느껴졌을 보석 같은 도시, 라파즈! 안녕, 차오! 야식으로 사다 놓은 빵은 그야말로 우리로 치면 왕만두 같은 것이었는데 배가 꺼지질 않아 반 정도밖에 못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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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모이다_

힘들때면, 꿈이 나를 일으켰다.

 

 

희망이 없다고 느꼈을 때, 나는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졌을 때,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을 때.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건 다름아닌

늘 희망을 이야기하고 꿈을 꾸며 늘 당차게 살았던 나의 지난날의 일기들이었다. 

 

일기장을 펼쳐 부지런히 그동안 나의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읽어내려갔고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을 때.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면서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늦은 밤, 나는 글이 쓰고 싶어졌고 바로 노트북을 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지 적어내려가기 시작했고 그 글은 나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희망을 갖고 꿈을 꾸기 시작한다. 

비록,

늦었다고 생각했었던 지난날의 불완전한 생각들과 마주할 나에게 두렵다고 포기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넌 할 수 있다고 희망을 가져도 된다고

노력하면 반드시 너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그 날이 올 거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을 믿고 굳건하게 너의 그 길을 걸어가라고 응원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