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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떤 여행

[안녕,어떤여행] D+05 반짝반짝 빛나는

 

믿을 수 없지만, 오늘이 라파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내일 아침 일찍 대망의 우유니로 떠나는데, 기분이 왜 이렇지? 첫 정이 무섭다고, 라파즈에 정이 듬뿍 들어버렸다. 가이드북에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 후기에도 그렇고 라파즈는 치안이 나빠서 우유니로 가기 위한 관문에 지나지 않지만, 내가 이틀 동안 겪은 라파즈는 그야말로 매혹적인 도시였다. 이 도시의 혼잡함과 소란스러움 마저 참 좋다.

 

오늘은 일찍 일어난 김에 8시 전에 아침을 먹고 엄빠와 페이스톡을 하고 S와 오랜만에 카톡도 했다. 내가 오기 직전에 남미를 여행한 전혜빈은 또 다른 오혜영인 서현진과 여행을 했다고 한다. 도밍고 아저씨에게 세탁할 옷들을 맡기고 (짐이 터질 것 같은데도 왜 입을 옷이 없을까) 영어를 잘하는 아마도 주인인 언니에게 왜 나를 픽업하러 나오지 않았는지 물어봤다. 언니는 처음 듣는 얘기라며 당황하더니, 확인을 해보곤 내가 탄 비행기가 일찍 도착해서라고 한다. 아, 드디어 궁금증이 풀렸다. 그래서 별 문제는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고 했다. (근데 분명히 나는 제대로 된 시간을 알려준 것 같은데)

 

산프란시스코 성당을 향하는 길, 마스크를 꺼낸 후 자물쇠가 잘못 잠기게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1분 정도 후에 깨닫고 바로 돌아갔지만 그새 자물쇠는 사라지고 없었다. 떨어뜨린 게 자물쇠라서 다행이다, 정말. 산프란시스코 성당 앞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는데 (완만한 경사지만 지이이이인짜 숨이 찬다) 인디오 여자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물론, Si! 알고 보니 그녀는 촐리타 (여자 레슬러... 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유명인) 글로리아였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서정적인 하엔 거리를 찾아 육교를 건너니 계단이, 계단이! 라파즈, 이러기냐! 무리하지 않도록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데 그런다고 무리가 되지 않을 리가 없다. 어쨌든 하엔 거리는 꼭 독일 퓌센 같은 느낌의 짧은 골목이었고 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해가 나와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메 뽀드리아 또마르 우나 뽀또? 이걸 달달 외워서 한 번 써먹어 봤다, 히히.

 

아침을 거하게 먹은 탓에 아직 배가 고프진 않아 다시 육교를 지나 이번엔 빨간 케이블카를 타러 가기로 했다. 오렌지 주스 한 잔을 사 먹고, 자, 또 등산이다! 하하! 그래도 어제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오랜만에 한국인 여자들을 만났다. 첫날 한국인 남자 둘을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 한국인이다. 물론 인사는 하지 못했다. 미국인들처럼 스몰토크를 하는 문화면 모를까, 이상한 여자 취급을 당할 게 뻔하니까. 빨간 케이블카는 노란 케이블카와는 또 다른 느낌인데, 둘 중 한 개만 탈 수 있다면 빨간 케이블카를 조금 더 추천한다. 정상에 오르면 엘 알토 해발 4,095m다. 하하. 스케일 한 번 대단하다.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타는데, 한 아저씨와 자꾸 동선이 겹치는데 아저씨가 자꾸 양보를 해주셨다. 아저씨는 주황색 작업복을 입고 계셨는데, 케이블카 안에서 신나게 촬영을 하다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는데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얌전히 앉아있었다. 함부로 동정하는 건 나쁜 일이다. 하지만 예의를 지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케이블카는 관광용이기 이전에 그들의 교통수단이다. 아침에 나오면서 이세타졸을 먹는 걸 잊어버려서인지 손과 발이 내내 저리더니 이제 얼굴까지 저리고 얼얼했다. 마침 눈 앞에 약국이 보여서 소로체를 한 알 샀다. 라파즈 때문이냐고 묻길래, Si. 신기하게도 약을 먹고 나니 저린 증상이 싹 가셨다.  저림도 고산병 증상이었나 보다.

 

올라갈 땐 힘들었는데 내려가는 건 금방이다. 이제 배가 고파서 현대화된 재래시장 렌자에 갔다. 현지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다. 마침 사람들이 엄-청 많은 피데오 식당이 있어서 줄을 섰다. 피데오는 뭐랄까, 쇼트 파스타 같은 느낌의 면 요리 위에 달걀이나 소시지, 실판초 같은 걸 올려 먹는 건데, 실판초는 어제 먹어서 소시지로 주문했다. 20여 명의 현지인 사이 유일한 외국인 나! 똑같이 소스를 뿌려서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기대했던 팟타이 류의 볶음면 맛은 아니었지만, 나름 먹을만했다. 가격은 단 돈 3볼! 오렌지주스보다 싸다! 약 540원 정도! 너무 좋다.

 

마녀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보라색 판초를 샀다. 왠지 더 깎아야 했을 것 같지만 나는 흥정에는 영 재능이 없다. 비가 뚝뚝 떨어져서 카메라는 백팩에 넣고 우산과 고프로만 꺼냈다. 환전을 백불 더 하고 암푸 거리를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라파즈를 떠나는 게 왠지 아쉬웠다. 사가르나가 거리를 내려가다 목도 마르고 비도 많이 와서 카페로 몸을 피신했다. 유창한 영어를 하는 직원이 있는, 전형적인 서양 백패커스들의 아지트 같은 느낌의. 그래도 3층 창가에 앉아 비 오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마신 스타후르츠 주스는 맛있었다. 다시 비 오는 거리로 나와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쉬운 마음에 고프로를 손에 꽉 쥐고, 그 혼잡함 속을 뚫고 걸었다. 나를 놀라게 했던 총성의 정체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위 한 번 과격하다, 이 동네. 우리나라 촛불 좀 가르쳐주고 싶네.

 

숙소에 들어가 계속 쉬다 해가 지면 나갈 생각이었는데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모르는 상태라, 숙소 앞 모퉁이에 파는 빵 같은 걸 좀 사다 놓을 생각으로 밖으로 나갔더니 문을 안 열었다. 이 아줌마들은 통 나랑 타이밍이 안 맞다니까! 근처에 큰 재래시장이 있다고 해서 주머니에 열쇠랑 휴대폰, 고프로만 넣고 길을 나섰다. 어느새 다시 해가 떴고 시장은 별 거 없었다. 허탕만 치고 대학교 쪽 노점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마땅한 음식을 찾지 못한 오르막길 끝에서 중국 음식점을 발견했다. 아, 쌀밥이 먹고 싶었다. 내내 밀가루나 고기만 먹은 터라 속이 불편한 거 아닐까? 좋아, 선택했어! 노점 음식을 살 생각이었던 터라 주머니엔 20볼만 있었고 14볼짜리 후라이드 치킨 한 조각이 올라간 볶음밥을 시켰다. 그리고 나는 정신없이, 그야말로 푸드 파이터처럼 밥을 먹었다. 음, 배가 고팠던 거구나. 그리고 늘 생각하지만 중국인에게선 상냥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도 맛있는 쌀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늦은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7월 16일 대로는 그야말로 불금 직전이었고, 나는 들어가는 길에 물 한 통을 샀다. 그리고 모퉁이 노점이 문을 연 것을 발견했다. 이런 타이밍! 대체 뭘 파는 것인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니 두 분 중 한 분이 내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셨다. "살테냐?" 살 거냐고 묻는 게 아니고, 살테냐라는 볼리비아 음식이냐고 물은 거다. "노, 블라블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아직 얼마냐고 묻는 걸 못 외워서 영어로 얼마냐고 묻지 못 알아들으시길래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꺼내 보여주더니 용케 알아듣고 "꽈트로" 라며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이신다. 잔돈이 모자라 얼른 방으로 뛰어들어가 동전을 가지고 나와 빵을 하나 샀다. 방금 먹방을 제대로 찍고 난 터라 야식으로 먹을 생각이었다.

 

밤에 혼자 다니지 않는 것은 여자 혼자 다니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 중 하나다. 그것이 설사 매우 안전한 도시라고 하더라도. 나는 라파즈가 그리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외진 킬리킬리 전망대에 가기 위해 숙소 리셉션에 택시를 불러 달라고 했다. 전망대까지 왕복하는데 35볼, 그렇게 저렴하진 않지만 또 그렇게 비싸진 않은 가격. 한참 기다려 택시를 타는데 모퉁이 노점 아줌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준다. 나도 안녕! 하고 손을 흔들었다.

 

킬리킬리 전망대는 기대 이상이었다. 별들이 점점이 박힌 것 같은 꿈같은 세상! 이렇게 아름다운 야경이라니! 말도 안 된다. 도저히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아름다운 야경, 내가 본 야경 베스트 안에 들 법했다. 10분 정도만 보고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20분 넘게 머물렀고 드라이버에겐 3볼을 더 챙겨줬다. 내려오는 택시 안에서 정말 부끄럽지만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눈물이 찔끔 났다. 파묵칼레의 선셋 이후 두 번째다, 이런 감정은. 그냥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느껴졌을 보석 같은 도시, 라파즈! 안녕, 차오! 야식으로 사다 놓은 빵은 그야말로 우리로 치면 왕만두 같은 것이었는데 배가 꺼지질 않아 반 정도밖에 못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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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모이다_

힘들때면, 꿈이 나를 일으켰다.

 

 

희망이 없다고 느꼈을 때, 나는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졌을 때,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을 때.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건 다름아닌

늘 희망을 이야기하고 꿈을 꾸며 늘 당차게 살았던 나의 지난날의 일기들이었다. 

 

일기장을 펼쳐 부지런히 그동안 나의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읽어내려갔고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을 때.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면서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늦은 밤, 나는 글이 쓰고 싶어졌고 바로 노트북을 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지 적어내려가기 시작했고 그 글은 나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희망을 갖고 꿈을 꾸기 시작한다. 

비록,

늦었다고 생각했었던 지난날의 불완전한 생각들과 마주할 나에게 두렵다고 포기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넌 할 수 있다고 희망을 가져도 된다고

노력하면 반드시 너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그 날이 올 거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을 믿고 굳건하게 너의 그 길을 걸어가라고 응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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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떤 여행

[안녕,어떤여행] D+04 아름다운 나의 도시

 

오늘은 해보고 싶은 일들이 좀 있어서 부지런히 움직이기로 했다. 어김없이 맛있는 아침을 먹는데, 갑자기 햇살이 비추면서 너무 행복해졌다. 누구라도 붙잡고 "저 지금 행복해요!"라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 그렇지만 얌전하게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걱정했던 두통은 아주 미미하다. 하지만 나는 그리 오래 행복하진 못했다. 킬리킬리 전망대를 내일 밤에 택시나 우버로 다녀올 생각이라서 라이카코타 전망대는 낮에 다녀오기로 했는데, 마침 숙소 근처라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최단거리 길은 뭔가 복잡해서 큰길로 가는 두 번째 경로를 선택했는데, 덕분에 운동 자-알 했다. 10분이면 될 길을 30분은 족히 걸은 듯했다. 몇 번이나 물어가면서. 그래도 (스페인어지만) 친절하게 대답해준 아주머니와 여학생들 덕분에 기뻤다.

 

라이카코타에 서자, 일단 드는 생각은 숙소가 코 앞이라는 사실이었고 감탄은 두 번째였다. 무슨 연유로 이 높은 산속 분지에 저렇게 달동네를 만들고 살아가는 걸까. 붉은 지붕들이 빼곡하게 산비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난 아무래도 이 도시, 라파즈가 좋은 것 같다. 이래서 첫 정이 무섭다. 비교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나쁜 공기 때문에 쉴 새 없이 콧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뇨제 덕분에 화장실도 급해 숙소에 들르기로 했다. 내려오기는 분명 쉬웠을 계단은, 오르기엔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숨이 턱까지, 아니, 머리까지 차올랐다. 한국에서도 운동부족인 내가 산소가 부족한 여기서 계단을 오르고 있으니, 고통도 2배다. 거의 울먹이며 숙소로 돌아와 일단 쇼파에 드러누웠다. 괜찮았던 두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1시 30분에 떠나는 달의 계곡 시티투어에 참가하고 싶어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들어오면서 눈여겨보아둔 샌드위치 가게에 들러 샌드위치와 딸기주스를 먹었다. 13볼, 약 2천원에 아보카도가 듬뿍 든 샌드위치였다. 하지만 과식은 금물이라, 조금만 먹었다. 샌드위치를 먹고 나왔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정말 총소리였다. 이 대낮에? 총이라고? 오마이갓! 숙소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걸까! 일단은 목에 걸고 다니던 카메라를 백팩에 넣고 소리가 들리는 큰길 말고 아래쪽 길을 따라 걸었다.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계속 총소리가 나는데 누구 하나 당황하지 않고 가던 길을 가길래, 나도 의연하게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사실 스페인어가 됐다면 이유라도 물어볼 텐데, 여러모로 언어 장벽을 실감하는 여행이다.

 

시티투어 버스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설마 이거 나 혼자 가는 건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백인 남자 한 명이 탔고 출발 직전이 일본인 가족이 마지막으로 탔다. 백인 남자는 분명히 영어권 나라에서 온 것 같은데, 영어를 쓰고 싶지 않다고 단호히 말해서 더 이상 말을 걸진 않았다. 흥. 일본인 가족은 사진을 찍어주면서 물어보니 나고야에서 왔다고 했다. 쳇, 하필이면 나고야여서 할 말이 없었다. 달의 계곡은 꽤 근사했고, 가는 길에 라파즈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해발 3,000미터 지점을 지나서 산소를 많~이 마셔두라고 했다. 맙소사! 기분 탓인지 정말 숨 쉬기가 편한 것 같기도 하고. 달의 계곡은 달의 표면처럼 생긴 지형 탓에 붙은 이름. 후에 갈 칠레 산페드로 아타카마에도 동일한 이름의 계곡이 있다. 이런 계곡은 왜 생겼는지 궁금했지만, 영어가 짧아 관뒀다. 난 점점 의기소침 중이다.

 

다시 라파즈 시티로 돌아와서는 이 도시의 명물인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원래 계획은 내일이었는데 시간도 남았고 다행히 체력도 남았다. 가이드가 노란 케이블카가 제일 가깝다고 알려주는데, 4블럭인가를 가야 한다고. 일단 출발하는데, 맞게 가는 건지 알 수가 있나! 결국 아주 가파른 언덕 앞에서 이 길이 틀리면 정말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예쁘게 웃는 언니(혹은 동생)에게 "텔레페리코!"를 외쳤다. 뭐라 설명을 하더니 내가 못 알아듣는 걸 알자 따라오라며 갑자기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아, 너무 고마워! 나도 씩씩하게 언덕을 올라야지......!

 

아, 근데 또 언덕이. 마침 텔레페리코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알겠어, 알겠어, 혼자 가볼게!" 했더니 "정말? 정말 괜찮아? 여기서 더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꺾어야 해!"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언니. 내가 절대 언니 따라가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에요, 방금 그 언덕을 내려온 언니가 다시 올라가는 게 너무 미안해서 그래요. "그라시아스!" 유일하게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스페인어를 크게 소리쳤다. 고마워요, 예쁜 언니. 다음 언덕에선 결국 남의 집 대문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숨은 차고 심장은 날뛰고 다리는 천근만근, 마치 몸에 추를 매달고 걷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더 가보자! 하고 힘을 내보기로 한다. 마침내 평지가 나오고 공원은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 평화로운 공원을 지나, 예쁜 언니가 일러준 대로 오른쪽으로 꺾자 드디어 케이블카 정류장이! 만세!

 

케이블카는 지하철을 만들 수 없는 라파즈 지형의 특성을 고려해 고안해낸 대중교통인데, 해발 4,000미터쯤 되는 산꼭대기와 아래쪽을 연결해준다. 내 기분으로는 케이블카 타러 가다 먼저 죽겠구나, 싶었지만. 3볼을 내고 일단 상행선을 탔다. 아, 정말 그 고생을 하길 잘했구나 싶었다. 라파즈가 이렇게 큰 도시였다니! 아래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도시가 그곳에 있었다. 이 도시은 가난한 사람일수록 산 위에 산다는데, 꼭대기 정류장은 왠지 분위기가 좀 별로였다. 기분 탓인가? 다시 제일 아래까지 내려가 본다. 그리고 원래 탔던 중간 정류장으로 올라가 걸어서 언덕을 내려가기로 한다. 노점에서 5볼짜리 오렌지 주스를 사 먹었다. 천원도 안 하는데, 물도 시럽도 없는 즉석 주스! 오예! 숙소까진 다시 걸어서 가야 하는데 조금 걷다가 안 되겠어서 큰 맘먹고 택시를 탔다. 숙소 바로 옆 큰 호텔 이름을 말하고 흥정도 없이 출발! 트래픽잼이 장난 아니다, 이 도시는. 그래도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고, 요금은 12볼. 예상했던 범위 내라서 기꺼이 지불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는데, 마땅히 먹을 곳을 찾지 못해 리셉션에 물어보니 산프란치스코 광장 근처의 고려 대상 중 하나였던 호텔 라 카소나의 레스토랑을 추천한다. 거기 말고 가까운 데는 없냐니 오전에 내가 죽을 뻔했던 계단 옆 식당을 추천해준다. 호기롭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6시부터 영업한다고, 30분 남아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난 이제 좀 지쳤거든. 볼리비아식 슈니첼은 꽤 맛있었지만 양이 많아서 많이 먹질 못했고 크림이 올라간 비엔나를 기대하고 시킨 비엔나는 (식당 이름도 비엔나였다) 웨이터 아저씨가 꼬냑이라고 말해줬는데 제대로 못 알아듣고 (또) Si, si라고 해놓곤 나오고 나서 알코올이냐고 물어봐서 아저씨도 나도 당황. "네, 네, 술 주세요!" 결국 카푸치노로 바꿔주셨다. 비엔나는 꽤나 수준 높은 다이닝 레스토랑이었다. 즉, 내가 스니커즈를 신고 갈 곳은 아니었단 말이다, 하하.

 

힝. 저녁을 먹고 나오니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진다. 하루 종일 흐리다 맑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우기에서 건기로 넘어가는 시점이라 어쩔 수 없나 보다. 열심히 뛰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컴퓨터로 외장하드에 사진을 백업하고 졸음이 몰려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시차 때문인지 (내 몸은 그런 거 모르는 줄 알았는데?) 새벽에 깨서는 다시 잠이 들질 않는다.

 

+ 참, 댈러스에서 카메라를 떨어트렸다. 그 충격으로 렌즈캡이 밀려들어가 UV 필터를 산산조각 냈다. 다행히 렌즈는 무사하다. 필터는 이런 용도로 쓰는 거구나아!

++ 참, 총소리는 무슨 시위 중에 시위대가 공중으로 공포탄을 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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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떤 여행

[안녕,어떤여행] D+03 해발 3,700m에서

 

새벽 5시에 도착해놓고는 그래도 아침은 먹겠다고 또 꾸역꾸역 8시 즈음 일어난다. 아침 식사는 따뜻한 빵과 진짜 맛있는 버터와 수제 오렌지 마멀레이드, 요거트, 치즈, 햄, 과일, 스크램블에그 등이 푸짐하게 제공되고 커피나 코카티 중 선택할 수 있는데 나는 주저 없이 코카티를 외쳤다. 아침을 먹은 후엔 다시 기절. 사실 첫날은 계속 자려고 했는데,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새어들어오는 빛 때문에 도저히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뜨거운 물로 씻으면 산소를 더 필요로 하게 해서 고산병을 악화시킨다고 하는데,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씻는 나는 감기 걸리는 게 더 무서워 그냥 원래 씻는 온도로 씻었다. (나는 감기 예방에는 뜨거운 물로 하는 샤워와 프로폴리스가 최고라고 맹신한다) 어차피 온도도 내 맘대로 맞춰지지 않았다.

 

오후 2시 즈음, 산프란시스코 성당으로 가보기로 한다. 원래 사가르나가 거리 쪽 숙소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지금 묵는 호텔에 꽂히는 바람에... 뭐 그래도 덕분에 그 근처에서만 있었음 못 봤을 풍경들을 많이 봤으니 됐다. 거리는 무척 번잡했고 소란했다. 이 익숙한 느낌은 뭐지? 필리핀, 딱 그쯤 되겠다. 참을성 없이 울려대는 클락션 소리, 코를 찌르는 매연, 아무데서나 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 그들의 피부색, 식민지풍의 건물들. 인디오 아줌마들의 패션만 아니라면, 여기가 동남아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슬프게도 생각보다 새롭지 않았고 기쁘게도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산프란시스코 성당 앞 광장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여행자 거리라는 사가르나가 거리를 향해 올라갔다. 일단 환전을 좀 해야 했는데, 으잉, 환전소가 눈에 보이질 않는다. 헤매고 다니며 마녀시장까지 다 구경하고, 결국 여행사에 들어가 환전소를 물어보니 "바로 옆에" 라고. 아, 민망해라. 환전은 1달러에 695볼리비아노. 100달러를 환전했다. 아직 물가에 대한 감이 없어서 얼마나 쓸 수 있는 건진 모르겠다. 슬슬 배가 고파오는데 내가 마침 암푸 거리에 있길래(?) 가이드북에 나온 모짜렐라 피자라는 식당을 가볼까 하는데, 또 마침 바로 눈앞에 그 식당 2호점이 보였다. 피자는 댈러스에서 바로 직전에 먹은 터라, 로제 파스타와 딸기주스를 시켰다. 토핑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소스와 면만 있는데, 이게 뭐라고 또 이렇게 맛있냐.

 

슬슬 체력이 고갈되고(뭐 했다고?) 해도 지려고 해서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마침 네일샵이 보였다. 비행기 몇 번 탔다고 악건성 중에서도 악건성인 내 피부는 난리가 났는데, 특히 손가락의 큐티클은 난리법석이었다. 기세 좋게 네일샵에 들어갔는데, 아차, 나는 스페인어를 1도 못했다. 번역기를 돌려도 의사소통이 안 되고. 결국 5볼짜리 매니큐어만 바르고 끝났다... 그 마저도 다 까짐. 천원도 안 하는 거였으니까 맘 쓰지 말자, 헷! 숙소로 돌아오니 미친 듯이 잠이 쏟아져 대강 얼굴만 씻고 잠이 들었는데 밤 12시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잠이 깬 뒤로 두통이 시작됐다. 시간마다 타이레놀도 먹고 고산병약도 먹었지만 결국 새벽 4시까지 편두통은 계속 되었다. 그래도 소화계통으로 탈이 안 난 게 다행이랄까. 그래도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겨우 다시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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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이라는 감정

차분한 일상

**차분한 일상
나의 하루는 의미 없이 흐른다.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시간을 잘게 쪼개어 쓸 줄 모른다. 아니,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다. 뼛속까지 나태한 나라는 인간은 핸드폰을 붙잡고 있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하는 등의 늘어진 일상만이 익숙하다. 어느 하나 생산적인 일이 없고 어느 하나 가치 있어 뵈지 않는다. 어쩐지 낙오자 같아서 우울해졌다.
그럴 때, 나는 나로써 깊어지는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말도 안 되는 포장 안으로 숨어든다. 겉보기만 좋은 빈 선물 곽처럼 안은 텅텅 비었으면서, 번지르르한 말들로 내 가치를 세우려고 한다. 나는 나를 공격하는 수많은 것들로부터 나라는 사람을 그렇게 지켜냈다. 어느 시점이 되면 의미 없이 부서질 방패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 방패 안에서 위로 받지 못할 것을 알지만, 누군가 저 방패를 제치고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기대라는 게 마음을 깎아먹는다는 걸 알면서도, 희망이란 이름으로 포장한다. 희망이라는 이름마저 저버리면 내 모든 삶이 버림받은 것처럼 처절할까봐.


<의연한 척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 멀어질까봐. 폭풍 속에서도 굳건해 보이는 내 모습에 누군가 감동하지 않을까. 그걸로 내 삶이 조금 더 가치 있어 보이지 않을까 위로한다.
고작 내 삶은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 처참한 비명을 혀끝에 달랑달랑 매달고 있으면서, 천근같은 한숨을 목 끝에 꾹꾹 밀어 넣고 있으면서. 입 밖으론 보기 좋은 말만 해댄다. 그런 게 나를 더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걸 알지만, 사람들은 그런 걸 더 좋아한다. 눈물을 쏟아내는 사람보다 혼자 감내하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을 더 멋지다 생각한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한다는 건 어렵다. 아마 영원히 어린아이일지도 모르는 우리는. 어른이라는 책임감에 쉽게 말할 수 없다. 나는 아직 자라지 못했다고. 그래서 두렵고 도망치고 울고 싶다고. 내 지금이라도 당장 메마른 입술을 가르고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다고.

 

.....이렇듯 언제나 차분하고 고요하게 하루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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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한, 밤의 기록

가을, 햇살이 울던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이렇게 전해드리게 되어 죄송한 마음입니다.'

며칠 전, 시집 한 권과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원고지 모양의 편지지에 자필로 눌러쓴 시인의 편지였다. 지난가을 초입에 독립출판을 주제로 한 프리마켓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시인이 파는 엽서 몇 장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엽서에 문제가 있어 다시 보내준다고 했다. 재인쇄 후 연락한다길래 잊어버린 채 몇 주를 기다렸다. 엽서가 결국 제대로 인쇄되지 못해 편지와 함께 시집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저 문장을 보자 마음 속 덮어두었던 감정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들과 청평으로 여행을 갔다. 전날 밤, 별이 빽빽이 박힌 하늘을 봤다. 그렇게 많은 별은 오랜만이었다. 또 우연히 혼자서만 두 번의 별똥별을 봤다.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 시각이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말에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는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오빠랑 차를 몰고 천천히 내려갔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우린 말이 없었다. 

자지 않으려고 했지만, 차에서 깊은 잠이 들었다. 심해 속으로 몸이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꿈도 없는 맑은 잠을 잤다. 지방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 댁에 들렸다. 할머니 댁은 꽤 분주했다. 살아생전 할머니를 도우셨던 요양사분이 집을 정리하고 계셨고, 할머니 친구분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고모는 내려오고 있냐, 너희는 어디서 왔냐, 집은 어떻게 정리할 거냐 등 참 사소하고 평소 오지랖이라고 느꼈던 질문에 정신없이 대답했다. 그 와중에 창가에 햇빛을 보면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인형이 눈에 띈다. "너거 할머니 저거 참 좋아했는데. 매일 춤을 추댄다고."

할머니는 저 친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멀리 있어 신경 쓰지 못해 미안하다는 자식들의 뻔한 레퍼토리가 머리 속에서 웅웅 맴돈다. 우리도 그랬구나. 

 

장례식장 입구 모니터엔 할머니 이름과 함께 나를 포함한 가족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상복을 갈아입고, 손님을 받으며 점점 실감했다. 3일의 장례는 정신없이 진행되었다. 장례 동안 여러 번의 충격이 여진처럼 밀려왔지만 흔들리지 않고 꽤  잘 버텼다. 손님들은 올 때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유에 대해 수백 번을 물었고 아버지는 수백 번을 답했다. 손님맞이를 하다 이튿날, 입관식이 있었다. 몇달 만에 마주하는 할머니였다. 평소 같은 얼굴에 깊은 잠을 주무시듯 미동이 없었다. 할머니의 품에 노잣돈을 넣고 식어버린 다리를 꾹꾹 주물렀다. 고모는 할머니 생신상에 미역국 몇 번 올리지 못했다고 오열했다. 울음 섞인 장송곡이 장례식장에 메아리처럼 울린다. 고모의 울음을 이어받아 다음 입관식에서 옆집 가족의 울음이 메들리처럼 이어진다. 

 

장례의 중반쯤, 큰어머니는 그러셨다. 앞으로 울 날이 더 많다고 계속해서 죽상으로 있는 건 아니라고. 사촌 언니는 지난 추석 때 할머니와의 통화를 잊지 못했다. 반갑게 통화 후 끊으면서 할머니는 '한 달 후에 보자'는 말을 남겼다. 거짓말처럼 한 달 후 모두가 모였다. 몇 년을 보지 못했던 친인척을 다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지막으로 화장터에서 한 줌 재로 남은 할머니를 마주하며 보내드렸다. 화장터 옆 칸에는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다. 화구로 들어가는 관을 붙잡고 붙잡는다. 화장 후 제를 지내며 3일 동안 우리를 도운 병원 측 장의사는 한마디로 장례의 끝을 알렸다. "저희 OO병원 장례식장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이 다음에도 저희 병원을 찾아달라는 뜻으로 들리는 건 뭘까. 노래방에서 1시간이 끝나고 조심히 돌아가라는 멘트가 생각난다. 장의사의 마음이 이해도 되고 3일간의 식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말라가는 눈물 자국 위에 웃음이 피식 났다. 

 

장례를 마치고, 할머니 사진과 유골함을 들고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3일 전 집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왔음에도 매캐한 냄새가 집안을 채웠다. 허전한 빈 침대, 말라버린 고추, 가지, 호박들, 주인없는 마당에 나른한 잠을 자는 길고양이들. 사진을 들고 마당 한 바퀴를 죽 돌았다. 집을 나오는데 담벼락에 개나리를 발견했다. 새롭게 싹이 나는 것도 있었고, 활짝 핀 뒤 지고 있는 꽃도 있었다.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아 코끝이 시큰한 계절이었다. 

 

할머니는 잠자리에서 조용히 떠나셨다. 할머니는 가난한 가정에서 부모 곁을 떠나 어릴 적부터 대감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자라왔다. 그 집에서 몸이 조금 불편한 둘째 아들과 결혼하여 남매를 낳았다. 새벽같이 밥을 하고 집안을 돌보되 본인의 위치는 숨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작은 것에도 만족하며 과한 행복감을 표현하셨다. 힘들게 자란 만큼 우리에게도 그런 점을 요구했다. 윗사람 혹은 남자 어른에겐 '네'만 하고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 남자가 위다. 어릴 땐 그런 말들과 요구가 참 싫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의 그러한 삶이 가엽다. 그만큼 효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이 많이 허하다. 첫 월급으로 사드린 신발도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시는지. 더 드리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할머니의 눈가엔 항상 눈물이 말라 있었다. 할머니의 시선 끝에 머문 먼 산을 보며 고향을 떠올리는 걸까. 어린 시절을 그리는 걸까. 거친 손바닥을 한 번이라도 더 쓸어볼걸, 할머니가 가자는 곳 한 번 더 갈걸. 할머니의 모습이 잔상이 되어 맴돈다. 

 

지금 내 마음이, 시인이 보낸 편지의 첫 문장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이렇게 마음을 표현하여 참 죄송할 따름이다. 장례가 다 끝나고 서울에 올라와서 쉬는데, 아이폰에서 옛날 사진이 떴다. 아이폰은 '몇 년 전' 사진들을 가끔 보여주곤 한다. 거기에서 할머니와 생신 때마다 가던 여행 사진이 보였다. 가을 억새와 함께 가족은 환하게 웃고 있다. 

 

할머니는 잔치국수를 참 잘 말아주셨다. 라면보다 간단히 만드셨다. 어릴 적 할머니 손에서 컸다. 자고 일어났는데 엄마가 없어 펑펑 울었다. 할머니는 달래주면서 얼른 잔치 국수를 말아주셨다. 참 편하고 맛있게 먹던 그 음식은 손이 많이 간다. 채소를 하나씩 다듬어서 일일이 볶고 육수도 따로 내야 하고, 면도 따로 삶아야 한다. 그만큼 정성을 필요로 한다. 매일 할머니의 마음과 손길을 먹고 살았다. 지금 그 잔치국수가 어느 때보다 너무 그립다.

볕 좋은 날에 떠난 할머니가 그곳에선 매일 잔치 같은 나날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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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떤 여행

[안녕,어떤여행] D+02 남미 도착

 

생각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아침을 먹어야지, 진짜 American breakfast다. 빵, 씨리얼,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 정도의. 그래도 셀프로 구워 먹는 와플과 블루베리 요거트가 제법 맛있었다. 예의 위염 때문에 과식은 자제 중인데 먹다 보니 금세 배가 차올랐다. 방으로 돌아오니 약간의 두통과 메스꺼움이 있어서 조금 더 자려고 했지만 잠이 들진 않았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씻고 짐을 다시 정리하는데, 가방이 닫히질 않아 또 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다. 마이애미로 가는 비행기는 오후 5시 10분인데, 체크아웃에 맞춰 셔틀은 오후 1시로 신청했다. 혹은 신청당했다. 사십 분 정도 시간이 남아서 바깥 구경을 나섰는데 그냥 도로 옆이라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쇼핑몰이 옆에 있다는 베스트 웨스턴으로 갈 걸 그랬나? 그래도 룸은 맘에 들었으니까 됐어.

 

공기에도 냄새가 있다는 말을 실감한다. 이곳에선 미국 냄새가 난다. 미군 캠프에서 일할 당시에 맡았던 냄새가 여기서 똑같이 난다. 그리운 봉덕동, 그리고 미묘하게 뉴질랜드의 냄새도 난다. 정갈한 인도도, 도로 옆인데도 풀 냄새가 나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영어권 사람들에게선 같은 냄새가 나는 걸까. 혹시 내겐 마늘 냄새가 날까? 나는 한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말이다.

 

미국에선 계속해서 어리버리함의 연속이다. 일단 출국 전까지 터미널이 정해지지 않아, 일단 같은 셔틀을 탄 남자와 함께 터미널 B에서 내렸다. 무작정 게이트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A 어쩌고 저쩌고라는데 되묻고도 못 알아들어서 그냥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입국장으로 가려고 하니 되돌아 가란다. 체크인을 안 했단다. 아, 우리가 생각하는 체크인 카운터와 완전 다른 모습의 체크인 키오스크가 몇 대 있었다. 키오스크에 갔더니 뭔가 문제가 있는지 직원에게 문의하란다. 또 어리버리하게 직원에게 갔더니 엄청 답답해하며 처리를 해준다. 입국장에 들어가는 보안검색은 엄청 까다로워서 신발까지 벗어야 했고 터질 듯한 백팩을 열고 검사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래도 아저씨들은 모두 사람 좋게 웃어준다.)

 

알고 보니 A 어쩌고 저쩌고는 A24 게이트였고 스카이링크를 타고 터미널 A로 이동했다.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나 식당을 찾아 헤매다 밀가루를 피해 보고자 아시안 요리를 파는 식당에 갔는데 직원의 불친절함 +남동생의 미국 피자 타령 +치명적인 피자 냄새 때문에 결국 캘리포니아 피자를 파는 식당으로 갔다. 두 시간 동안 피자를 먹고 일기를 쓰는 동안 직원이 계속 나를 체크(?)해줬는데, 계산을 할 때 팁이 낯설어 카드를 냈더니 음식값만 결제되고 영수증을 가져다준다. 거기에 팁을 적는 란이 있어 3달러를 적고 기다리는데 계산이 끝났다고... 엥, 그럼 팁은 언제 주는 거죠? 버벅거리며 일단 그냥 나왔는데, 그냥 현금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나오면 되는 거였을까? 아무튼 짠순이 코리안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후에 영수증에 팁을 체크해두면 추가로 결제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이애미에서는 환승 시간이 짧은데, 십오 분 연착이란다. 오 마이갓! 거기다 삼십 분 더 연착. 망했다. 연착된 비행기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므로 일단은 자기로 한다. 마이애미에 도착한 시간은 9시 30분, 라파즈로 가는 항공편 탑승 시간은 9시 20분부터. 방송으로는 계속 환승 고객을 위해 양보해달라고 하는데 다들 빨리 내리려고 난리였다. 겨우겨우 비행기에서 내리니 9시 40분, 내리자마자 마이애미로 가는 게이트 물어보니 다행히 같은 터미널이다. 부지런히 D20을 향해 걷는데 라스트콜로 내 이름이 불린다. 마침내 옆에 걷던 부부도 함께 불려서 셋이 엄청 뛰어 겨우 마지막으로 탑승할 수 있었다. 만약에 탑승을 못했다면... 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라파즈로 가는 비행편은 하루에 한 편이다. 일본인 여자 두 명과 함께한 일곱 시간의 비행은 열두 시간 비행 못지않게 힘들었다. 각종 약 덕분에 잠은 미친 듯이 쏟아지는데, 자리가 너무 불편했다. 안고 있는 카메라는 또 얼마나 성가신지, 이럴 땐 내가 왜 널 데리고 왔을까 싶다.

 

무사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도 해발 3,700m의 라파즈에 도착은 했는데, 입국 심사가 원활히 진행된 것에 반해 호텔에서 보내기로 한 드라이버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호객하러 나온 택시 아저씨가 호텔로 전화해 뭐라고 얘기하더니 나보고 스페인어를 할 수 있냐고 묻길래 영어밖에 못한다고 했더니 (영어를 할 수 있는 게 맞긴 한 건가 싶지만) 전화를 끊고는 "택시 타고 오래" 란다. 그리고 뭔가 시간과 관련한 설명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 들었다. 라파즈는 택시 강도 후기도 있고 외교부 문자에도 콕 집어 택시 조심하라고 해서 일부러 픽업을 신청한 건데 꼼짝없이 택시를 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른 아저씨의 택시를 타고 숙소 바우처를 보여주고 몇 번이나 확인을 하고 요금도 15달러(픽업은 16달러였다)라고 확인을 하고 택시를 탔다. 그리고 호텔에 전화해준 아저씨는 그제야 전화를 사용한 돈을 달라고 했다. 그냥 1달러짜리 한 장을 줘버렸다.

 

새벽의 라파즈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꽤 돌아다니고 있었고 택시는 롤러코스터 수준의 경사를 달렸다. 무사히 호텔 앞에 도착했고 택시 아저씨에게도 1달러의 팁을 더해 16달러를 줬다. 이건 진심으로 무사함에 대한 감사의 팁이었다. 리셉션의 아저씨는 영어를 정말 1도 못해서 대강 숙박부를 작성하고 아침 식사 시간만 확인하고 곧장 침대로 뛰어들었다. 종일 이동만 하며 하루를 보냈다. 역시 남미는 멀고도 먼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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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떤 여행

[안녕,어떤여행] D+01 남미는 멀다.

 

미리미리 준비한다고 했지만 결국 떠나기 직전 아침에서야 마무리된 짐싸기. 그런데 필요한 짐을 다 담고 나니 캐리어가 닫히질 않았다. 결국 짐을 하나씩 빼고 또 빼고. 그래도 결국 22킬로그램이나 되는 캐리어와 어깨가 빠질 것 같은 백팩을 짊어지고 아슬아슬하게 동대구 복합환승센터에 도착해서 예약해둔 리무진에 탑승했다. 2시 조금 넘어 인천공항에 도착해 위비뱅크와 써니뱅크로 신청해둔 달러를 찾고 커피앳홈에 갔더니 무료 음료는 커피만 된다고 해서 오랜만에 라떼를 마셨는데 마시자마자 위가 아파와서 반만 마셨다. 그 좋아하는 라떼도 마음껏 못 마시다니, 쳇. 지난 오년 반의 회사 생활이 내게 남긴 것은 고작 이런 것뿐이다. 슬슬 체크인을 하러 갔더니 아직 카운터가 열리지도 않았는데도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열두 시간이 넘는 비행이라 복도석에 앉고 싶었는데 사전에 좌석 지정을 하려니 10만원 가까이 추가로 줘야 가능해서 일찍 체크인하는 걸 노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망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 뒤로도 어마어마하게 줄이 서기 시작해 나는 무사히 복도석을 잡을 수 있었다.

 

명가의 뜰에서 제육볶음이랑 늦은 점심을 먹는데 왜 이렇게 서글픈지 모르겠다. 오랜만의 혼자 출국이라 영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사실 이번엔 준비하면서 너무 힘든 나머지 진심으로 내가 왜 여행을 가겠다고 했는지 후회를 했다. 누가 가라고 시킨 것도 아닌 데 가기 싫어서 죽겠는 마음.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항공권 예약들. 간다, 그래! 동생 넷북을 빌려가려고 했는데 넷북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포기하고 동생 몰래 동생 외장하드를 챙긴 터였다. 그런데 공항으로 오는 길에 메모리 카드 리더기가 없다는 사실과 함께 선글라스를 두고 왔다는 사실도 덤으로 깨달았다. 면세점에서 직원의 추천으로 선글라스 하나를 충동적으로 샀고 가까스로 리더기도 구입했다. 언제나처럼 바쁘게 아시아나 라운지에 들러 면세품 정리를 하고 양치하고 비행기에 타니, 아, 엄마한테 전화를 안 했네? 일단은 가자.

 

얼마 전 칸쿤에 다녀온 친구의 후기도 그렇고 아메리칸 에어라인은 악평이 자자해서 걱정했는데, 새로 도입한 기종이라더니 시설은 굉장히 좋았다. 자리도 화장실이 보이는 중간 복도석이고 옆엔 한국인 남자 둘이 일행이라 자리를 비켜줄 필요도 없어 보였다. 참, 나는 누가 봐도 한국인이고 VOD도 한국어로 설정해두고 있었는데 내 옆의 남자는 굳이 내게 "sorry" 라고 영어로 말을 했다. 무슨 심리일까? 웰컴 음악은 굉장히 신나는 팝이었고 기내 안전 영상은 상당히 트렌디했으며 승무원들은 난동을 부렸다간 그대로 등짝을 때릴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서비스는 실로 쿨-했다. 나는 주로 아시아와 중동 항공사를 이용했기 때문에 상당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약 열두 시간의 비행은 아무리 시설이 좋고 자리가 좋아도 힘들다. 비즈니스나 퍼스트를 타면 얘기가 좀 달라질까? 간식으로 제공된 라면을 포함해 세 번의 기내식을 받았고 모두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만 먹었다. 그럼에도 배가 빵빵해서 힘들었다. 잠은 거의 자질 못했는데 다리가 짧은 건지 의자가 높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발이 바닥에 딱 붙지 못해 내내 다리가 불편했다. (후에 유독 AA항공의 좌석이 높다는 걸 알았다, 나의 짧은 다리 탓만은 아니었던 걸로.)

 

12일 저녁 6시 30분에 출국을 했는데, 댈러스에 도착하니 12일 저녁 5시였다. 과거로 왔네? 우와, 신기해! 시차가 이렇게 많이 나는 나라는 처음이라서 괜히 신기했다, 촌스럽게. 댈러스에 도착해서는 미리 미국 입국 과정 공부를 좀 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사람들을 따라서 움직이면 되지만, 이게 입국 심사인지 세관 심사인지 알 수 없어 어리버리하게 굴었다. 키오스크로 세관 신고서를 작성하고 세관 심사를 받는데, 뭐라고 묻는데 못 알아들어서 어버버하고 있으니 "과일?" 하고 한국어로 물어봤다. 하하. 미국 입국 과정은 그야말로 줄 서기의 연속이었다. 마지막 과정은 (아마도) 입국 심사였는데, 하루만 머물고 볼리비아에 간다니 "오, 볼리비아. 좋은 여행 되렴." 하고 쿨하게 입국 도장을 찍어주었다. 어리버리하게 굴었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수월하게 입국했다. 휴.

 

공항 근처 지역인 어빙의 호텔을 예약해뒀는데 무료 공항 셔틀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아 출국 직전까지 애를 태웠다. 결국 부킹닷컴 측에 문의해 공항에 도착해 숙소로 전화를 하라는 답을 얻었다. 전화? 전화라고? 원래 전화를 싫어하는데, 거기다 영어로 전화라니, 눈앞이 깜깜했다. 입국장은 완전 심플해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공중전화도 없었다. 와이파이 신호도 안 잡혀서, 결국 휴대폰 국제 전화로 숙소에 전화를 걸었었다. 대강 말을 하고 대강 알아듣고 끊은 후 내키는 대로 가다 보니 호텔 셔틀 타는 곳이 보이길래 무작정 기다렸더니 셔틀이 왔다. 하, 언제나처럼 눈치와 운빨로 살아남았다.

 

숙소 체크인을 하면서 저녁 식사할 곳을 물어보니 오 분 정도 걸어가면 식당이 있고 배달을 시킬 수도 있다고 했는데, 나가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었고 배가 별로 안 고픈데 배달은 최소 금액이 있는 데다 전화하기 것도 싫어서 그냥 호텔 로비에서 파는 냉동 마카로니앤치즈를 간단히 먹기로 했다. 미국에 왔으면 쇼파에 누워 맥앤치즈 정도는 먹어줘야지? 숙소는 꽤 좋았다. 침실과 거실이 따로 있는 스위트룸이 기본 객실이었는데 꽤 깨끗하고 아늑했다.

 

8시가 조금 넘자 미친 듯이 졸리기 시작했는데 출국하기 전에 부모님께 전화를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엄마랑 통화 가능한 시간이 될 때까지 버티다, 결국 10시 반에 엄마랑 페이스톡을 하고 잠들었다. 침대는 너무 푹신했는데, 너무 피곤하다 보니 자꾸 깼다. 깨서 더 잘 수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잠드는 행복을 만끽했다. 단, 층간소음이 좀 있어서 위층의 쿵쿵 거리는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고 도로 쪽에 위치해 차가 쌩쌩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지만 나는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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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떤 여행

[안녕,어떤여행] D-Day 여행의 시작

 

꿈에 그리던 남미

페루·볼리비아·칠레·아르헨티나·브라질

덤으로 뉴욕

어쩌다 도쿄까지

 

 

갑작스럽게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되지 않아 꽤 곤혹스러운 시간을 가진 끝에 어렵게 구한 직장이었다. 5년 5개월 동안의 회사 생활은 취업 준비생 시절이 그리웠을 만큼 힘들었다. 업무는 괜찮았지만, 그 업무를 제외한 모든 것이 나를 힘들게 했다. 늘 퇴사의 꿈을 품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직장인처럼 버티고 버텨가던 중, 자의반 타의반 좋은 조건으로 회사를 그만 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직 의사를 밝혔다.

남미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남들은 몇 달씩 준비해서 가는 여행을 단 2주 만에 준비해서 떠났다. 조금 쉬다가 출발하고 싶었지만, 물 찬 우유니를 보려면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준비를 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며칠 동안 앓아눕기도 했다.  숨 가쁘게 준비를 마치고 보니, 어느덧 떠나는 날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여행은 '덜컥' 시작되었다.

 

자아를 찾겠다거나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거나 그런 거창한 이유나 목적은 없었다. 그런 꿈을 꿀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회사를 그만뒀으니 어디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내게는 좀 기계적인 선택이었다. 가슴이 부풀지도 않았고 설레지도 않았다,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냥 떠나야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의무인양 나는 떠났다.

여행을 하는 동안도 나는 그랬다. 흔히 회사를 관두고 꿈을 찾아 떠나온 여행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풍부한 영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계획한 대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이었다, 회사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듯.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기에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았고,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겪었고, 또 지쳐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여행기는 다소 드라마틱한 모험을 기대한 사람들에겐 아주 시시하고 심심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무미건조한 기록이 누군가에겐 꿈의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그 기록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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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모이다_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다는 건

2000년, 12월 초.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떠나왔을 때,

'과연 뉴질랜드라는 낯선 땅에서 적응하며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보다는, 그저 설레고 마냥 기분 좋았던 어렸던 나에게 환상을 심어줬었지. 

한국은 추운 겨울이었던 12월이 뉴질랜드에서는 여름이라는 것도 마냥 신기했고,

길거리에는 동양인보다 서양인이 당연히 많았던, 조금은 아니 많이 낯설었던 뉴질랜드의 삶이 시작되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어떤 환상적인 일들이 일어날까? 늘 기대했던 나에게 큰 시련이 다가온 것은, 

영어의 A도 모르고 무작정 학교부터 입학한 것이었다. 

언어의 장벽은 생각보다 굉장히 큰 벽이었고,

그 벽을 뛰어넘기엔 의지가 없었던 나에게 낯선 외국인들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자꾸 말을 걸어오는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으면 영어가 빨리 늘었을텐데

파란 눈동자를 가진 그들의 눈을 보고 있으면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내가 하는 말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면 어쩌나 쓸데없는 걱정에 도망만 쳤던 나.

결국, 영어를 배우기 좋은 환경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한국인들끼리만 어울리며 영어를 소홀히 했었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뉴질랜드에서 살면 현지인처럼 영어 진짜 잘 하겠어요~"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현지인처럼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어 한 마디 못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답니다. 얼마나 노력을 했고, 얼마나 공부를 했느냐에 따라 틀려요~ 오래 살았다고 해서 무조건 영어를 잘 하는 건 아니예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부터라도 노력하면 유창한 영어실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2017년 12월 초, 

17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뉴질랜드의 여름은 여전히 아름답고 예쁘다. 

바닷가에 놀러가기 딱 좋은 요즘, 언제 바다 놀러가지? 생각에 들떠있다. 

영어공부는 늘 해야하는 일, 여전히 영어는 어렵지만 사는 데 지장없으면 됐지, 뭐. 

 

이제 2017년도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저 이 순간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가자. 

지금 이 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