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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청소

 

 

 

 

    방 청소엔 도통 소질이 없는 편이지만, 늘어놓았던 것들을 모조리 다 치워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잔뜩 더러워진 책상을 닦다 보면 지워도 지워도 도통 깨끗해지지 않는 흔적들이 발견된다. 오기가 생겨 힘을 주어 빡빡 닦아보지만, 소용이 없다. 털어내고 또 털어내고 먼지는 계속 쌓인다. 그럴 땐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세상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참 많다. 스물이 갓 넘은 어떤 날엔 "다 잘 될거야"라 말하는 것이 참 쉬웠는데, 이제는 너무나도 조심스럽다. 대부분의 일들은 시간이 해결해 주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있기 마련이라는 걸, 서른이 된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다.

 

  보통의 어른이 몽상가로 살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결코 끝나지 않는 대청소 대신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정리정돈하는 정도의 일상적인 청소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애써 지우려하지 않고 기념으로 삼거나 내려앉는 먼지를 용납하는 일이 습관이 되면, 어린 시절의 우리를 눈물 짓게 했던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지워버려야 할 골칫거리나 싸워서 이겨야 할 상대가 되지 못한다. 어쩌면 어른이라는 존재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이성이 아니라, 마침내 세상 모든 것들의 '제 자리'를 용납할 수 있는 관용을 지니게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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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엄마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은 즐겁다

 

 

 

 

    엄마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은 즐겁다.

 

  "나이 먹어도 마음은 똑같아. 엄마도 옛날엔…" 언제나 같은 방식. 그럼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몸을 엄마 쪽으로 돌린다. '어디 한번 얘기해 봐, 내가 다 들어줄게' 라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거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모든 걸 이해하게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엄마'라는 이름표를 지우고, 그녀를 세 글자 독립적인 이름을 가진 여자로 생각하려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나는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할 뿐이다. "그렇구나, 엄마도 그랬어?" 정도가 반응의 최대치다.

 

  친구와 대화를 할 때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격하게 감정이입을 하고, 심지어는 친구가 처한 그 상황에 나 자신을 대입시키기까지 한다. 잔뜩 부풀려진 상상 속에서 나는 친구처럼 큰 길가에 홀로 멍하니 서 있기도, 차가운 카페모카를 가장 아끼던 치마에 쏟아 쩔쩔매면서도 앞에 앉은 잘생긴 남자를 힐끔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의 말은 그냥 듣는다. 색이 바랜 사진 속에 함께 뛰어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늘 즐겁지만, 싱겁게 끝이 나고 만다. 엄마는 이야기하고, 나는 듣는다. 그런 뒤에 언제나 생각한다. 옛날 생각을 하면 엄마는 늘 아련하겠구나.

 

  엄마의 시시콜콜한 기억들에 대해 전부 곱씹어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일까. 좋아하는 일본 작가의 책 속에서 내 또래의 딸은 뿌연 안개 속에 쌓인 듯한 분위기를 가진 엄마와 정말 '친구'가 된 것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낮에 홀로 외출했던 엄마가 돌아오는 길에 머그컵을 딱 한 개만 사왔다고 하여 서운해하지도 않는다. 그녀 또한 '엄마'라는 이름표를 완전히 떼어버리지는 못했을테지만, 적어도 엄마와 진짜 '친구'가 될 마음가짐은 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늘 엄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왔는데, 사실 별로 자신은 없다. 몸집이 나보다 훨씬 작아진 엄마 품에 안겨 밤마다 강아지마냥 낑낑거리고, 그걸 인생 최대의 낙으로 삼는 내가 '정말 친구인 엄마'를 원할 수 있을까.

 

 

 

* 본문 속에 언급된 책 : 요시모토 바나나, 『안녕 시모키타자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