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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쓰는 편지

...중에서

- 그럼 제가 물어볼게요.
물어 봐.
- 인생이란 뭘까요?
글쎄.
- 안다는 거예요? 모른다는 거예요?
네가 욕실에 물을 뿌려두고 그 가운데에 서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마도.
- 물을 뿌려요?
그래. 넌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물기가 말라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지.
- 그게 무슨 소리에요?
가만히 서서 물방울이 증발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잖아.
- 그런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서서 몇 분이 지나도록 넌 별 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할 테니까.
- 그렇겠죠.
하지만 실제로 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경험하고 보고 있는 거지.
- 요점이 뭐에요?
네 인생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그래서 너는 매순간 너의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지지. 하지만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면 깨닫게 되는 거야. 물기가 얼마나 사라졌는지, 네가 창문을 열어뒀는지 아닌지. 우리가 지금 인생을 논하는 건 마치 거대한 건축물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보며 전체를 맞히려는 것과 같아. 네가 지금 현재를 바라보며 너의 인생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네가 뭘 할 수 있을까?
- 몰라서 물어보잖아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지. 하나는 지금처럼 계속 너의 모든 것을 의심하며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알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과 커다란 무언가가 내려다보일 그 날이 올 때까지 묵묵히 너의 길을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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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B

 

 

 

B급 코드가 수면 위로 올라온 지 몇 년이 지났다. 과거 B급은 다소 그늘진 성향을 드러내는 의미로 통용되었지만, 지금은 가벼움과 웃음, 반전이라는 요소가 전면에 드러나 있다. 이는 비주류에 대한 대중 일반의 시각의 변화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도 하나의 취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된 것. 가요계는 물론이거니와 광고계, 영화계 등 문화 산업 전반에, B급 문화는 이미 확산해 있다. 음지에 머물러 있던 마이너 문화가 양지로 끌어내진 것이다. 이제 병맛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너무 진지하고 어두운 현실 속에서 사람들을 웃게 해줄 수 있는 유희의 대상의 위치를 갖는다.

 

재미는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저마다의 피로에 지친 사람들은 더는 문화를 콧대 높은 사람들이 독점하는 예술로서 대하려 하지 않는 듯하다. 남들과의 경쟁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세계에서 번쩍이는 스펙으로 자신을 고급화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불편함을 잔뜩 축적해두고 사는 우리에게, 싼 티를 간판으로 내건 B급 문화는 꽁꽁 감춰두었던 욕망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내숭에 길들여진 양반들이 저잣거리 사당패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자꾸만 곁눈질로 훔쳐보게 되는 것처럼.

 

B급 문화의 가볍고 고급스럽지 못한 모양새 때문에, 그것이 속 빈 강정처럼 아무 내용이 없다고 지레 짐작해서는 안 된다. B라는 알파벳의 어감 때문에, 그것이 A의 하위 혹은 A가 되지 못한 어떤 것처럼 여겨지기 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B급 문화는 형식적인 틀에 갇힌 A가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조명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 그것은 다양한 문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 대중들을 위해 존재해야 할 필수요소이기도 하다. A와 다른 것으로서의 B, 이것이 B급 문화가 나아가는 방향이다.

 

90년대를 주름잡았던 홍콩 배우 주성치의 영화는 영화관보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훨씬 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보고 싶지만 왠지 나 혼자 봐야 할 것 같았던, B급 문화에 대한 이중모션에서 마이너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단지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남들의 평균에 맞추려 겉으로는 내색하기 힘든 것들을 마이너라는 단어로 묶어야 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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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The Color of Love

 

 

 

 

“이렇게 계속 공연을 하고 연말도 같이 보내고. 연말에 같이 보내면 연초도 같이 보내니까, 그렇게 지내면서 같이 살길 바라는...”

 

늦은 밤,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왕십리 극장을 찾은 멤버 J가 꺼낸 말이다.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같이 지내고. 그렇게 같이 살고.

 

요즘 그 사람들이 내 일상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던 참이었다. 우리가 만나는 그 몇 시간, 때로는 몇 분, 몇 초가 될 수도 있는 그 짧은 순간에만 반짝 생각나는 게 아니라,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나의 어떤 시공간 안에서도 드문드문, 이 사람들이 내 삶에 큰 힘을 주고 있구나 싶을 때가 많다. J의 말처럼 함께 지내고 있다는 기분, 같이 산다는 느낌을 나는 이미 만끽하고 있는 듯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재작년, 이별 후 16년 만에 돌아와 2018년, 18년 만에 정규 앨범을 발매한 그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었다.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마지막 프로젝트. 지난 1월 특별시사회에서 멤버들은 20주년이 참 금방 지나간 것 같다고 말했다.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동시에 다섯 명의 눈빛에는 우리가 참 많은 것들을 함께 해나갔다는 자부심도 서려 있었다. 그리고 21주년을 맞이한 새해 역시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서로에 대한 믿음도 느낄 수 있었다.

 

실 관람은 벌써 8번째. 참 신기한 게, 영화를 볼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장면도 다르고 느끼는 감정도 미묘하게 다르다. 오늘은 정해진 상영 기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걸 체감해서인지, 그래서 혹시 이제 이 사랑스런 영화를 못 보게 되면 어떡하나 싶어서 그랬는지, 여하튼 이상하게 눈물이 많이 났다. 스킵하거나 쉬어가는 트랙이 하나도 없을 만큼 훌륭한 정규앨범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한 편의 서사로 담아낸 20주년 콘서트를 커다란 무대에서 치를 수 있었던 것도 다 너희 덕분이라며, 매 순간의 공을 우리에게 토스하는 그들이 참 고마웠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볼 때면 한없이 순수한 눈빛이 되는 그들과 나의 모습이 좋았다. 우리의 이야기가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도 자랑스러웠다. 진심으로, 내가 그들의 팬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고 또 행복했다.

 

점심시간과 그 외 여유시간을 몽땅 빼내 영화를 보고 곧바로 회사로 뛰어 들어가는 길. 내 눈은 쉴 새 없이 상영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머리는 내가 예매할 수 있는 회차가 얼마나 남아있나 계산하기에 바빴다.

 

팬의 하루는 누구보다 빠르고 치열하게 돌아간다. 해야 할 일이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넘치기 때문이다. 나름 떳떳한 팬이 되고 싶다는 욕심에, 현업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꽤나 애를 쓰다 보니 더더욱 정신이 없다. 시간을 쪼개고 관심을 쪼개며 할 일을 조금씩 처리해나가다 보면 벌써 밤이고 새벽이다.

 

덕질을 다시 시작하고 난 뒤 몸과 마음에 피로가 이끼처럼 덕지덕지 끼어있는 게 사실이지만, 누적된 수고로움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나는 지난 1년 간 그 이유가 뭘까 골몰했다. 그리고 결국 찾아낸 답은 이거다. 어릴 때 가장 한스러웠던 건, 내게는 뭔가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속한 시스템 안에서 무언가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걸 느끼면서도 방 안에서 혼자 씩씩대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잠들 수밖에 없는 어린애였고, 심지어 그들의 마지막 무대를 지켜보면서도 엉엉 우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꼬꼬마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내가 집중하고 노력을 기울이면 조금이나마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들이 허다하다. 작게는 어떤 분야의 순위, 조금 더 크게는 수상여부나 상의 명칭이 바뀐다. 불합리한 일들에는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 가수 혹은 내가 속한 팬덤에 따라붙는 수식어도 변한다. 요즘의 덕질은 가수와 팬이 함께 어떤 연작(聯作)을 만들어가는 작품활동 같다. 그만큼 팬이 할 수 있는 것, 바꿀 수 있는 것이 많다. 그래서 더더욱 책임감이 생긴다. 내가 팬이기 때문에.

 

사무실에 돌아와 회의를 하고 업무에 집중하다 문득 시계를 보니 4시 15분, 나는 극장에 전화를 걸어 영화의 종영일이 결정되어 있는지, 영화 편성은 어떤 기준에 따르는지에 대해 문의했다. 약간의 어필과 부탁도 실어 보냈다. 하루라도 더 이 영화가 극장에 걸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며.

 

우리는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가게 될까. 미래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지만, 아마 어려운 일이 생겨도 다시 또 손잡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전보다 덜 화려할 수도 있고, 더 험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곁에 있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앞에 있는 상대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본다면, 우린 우리만의 색으로 또 다른 계절을 그리며 함께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당신들의 걸음이 빠르든 느리든, 보폭을 맞춰 걷는 것이 내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같이 울 준비가 되어 있고 함께 웃을 마음이 갖추어져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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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편지

하얀 겨울

 

 

 

하얀 겨울이었다. 갓 태어난 그녀의 눈에는 그것이 눈인지 먼지인지 구분될 필요가 없었다. 온 몸에 치닫는 감각만 상대하기에도 버거웠던, 한 아기의 어떤 날에 대한 이야기다.

 

따뜻한 자궁 안으로부터 차가운 병원 침대로 꺼내졌다가 이윽고 도착한 곳, 아기의 그 세 번째 장소를 사람들은 집이라 불렀다. 초가에 들어서며 아기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이 날의 주인공이어야 함을 느꼈다. 한껏 동그랗게 뜬 눈을 굴리던 그녀는, 그러나 아구구구- 소리와 함께 바닥에 눕혀졌다. 산모가 너무 약해졌어. 어떡하누. 눕혀 눕혀. 뱃속에서 잠영하던 시절처럼 웅웅거리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들만 귓가를 맴돌았다. 소리가 잘 들린다는 것과 말을 잘 알아듣는다는 건 다른 일이구나, 그녀는 한참 뒤 이 날을 회상하며 확신했다.

 

산모가 너무 약해졌다고 했지, 그럼 아기는 너무 강했던 걸까. 내 자리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는 그녀는, 방구석 한 편을 지정석으로 썼던 그 날의 행운을 잊을 수 없었다. 잠이 올 만도 했는데 아기는 웬일인지 잠들지 않았다. 어른이 된 그녀는 태어난 지 며칠 만에 경험하기엔 그 운이 너무 빨랐다며 웃었다. 성급한 행운을 거머쥔 아기는 모두에게 잊힌 채로 꼬박 하루 동안 방치되었다. 한참이 지난 뒤 낯선 우는 소리를 알아챈 어떤 어른이 자리를 살펴보았을 때, 아기의 등에는 커다랗게, 화마가 다녀간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아기는 빨간 등을 가진 여자로 자라서 말했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몸에 남아있는 자국처럼 마음에도 혼연히 남아 있다고. 버려졌던 그 몇 시간, 며칠의 기억이 평생을 방랑하게 한다고. 그 날은 집이라는 장소를 자신이 머무를 곳으로 생각하지 못한 채 살게 될 어떤 여자가 처음으로 등을 뉘인 날이었다. 하얀 겨울이었다.

 

 

 

겨울에 태어난 내 어머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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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한, 밤의 기록

남 같지 않은, 사사로운 감정이 얽힌 관계, 친구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이 사람과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지금은 너무 우습다. 그때의 너와 나는 프레임 속에서 참 어색하고 낯간지러웠다. 

 

눈떠보니 어느새 4개월 차가 넘었던 회사 생활. 우리 팀에 신입이 들어왔다. 이력서를 봐도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우리 팀에서 유일한 여자였던 나에게 굳이 차 문까지 닫아줬다. 넌 예의가 몸에 배어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더 꼴사나웠을까. 참 유별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지능 못지않게 각잡힌 생활과 웃음기 없던 너의 표정. 너의 포커페이스로 제나이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1년이 지나도 어색함이 감돌았다. 동료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니었다. 동갑내기였지만 다른 또래 직원들보다 너와 친해지는 시간은 오래 걸렸다. 지금와서 들은 말이지만 그때 넌 이미 우리가 친했다고 생각했단다. 당시, 일할 땐 편했지만 둘이 남겨지면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어색한 빈틈이 싫어 할말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다 단둘이 외근을 가고 식사를 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팀장에 대한 너의 생각을 처음 들었다. 너도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너도 '같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또래 직원들과 우린 거의 매일 술 한잔, 그 이상을 기울이며 닭발, 곱창, 회사를 맛보고 즐기고 뜯었다. 

 

적립식 통장보다 더 빠르게 쌓여가는 스트레스에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 날 너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친구"

일할 땐 우연이라도 손끝이 닿을까봐 거리를 두고 격을 차렸다. 그런 우리가 동료를 끝내고 친구가 되었다. 친구가 되니  동료 때보다 트러블은 더 많았다. 너는 스스럼없이 장난을 참 많이 쳤고 난 참 잘도 속았다. 화가 나 눈물이 나던 날도 있었다. 화해의 악수는 몇 번이나 했던지, 널 몇 번이나 때렸는지 이제 기억도 안 난다. 그만큼 추억이 쌓여갔다. 그때쯤 나는 약간 우리의 관계에 혼동이 왔다. 친구나 되자고 시작한 관계에서 연인으로 질릴 만큼 만나 끝낸 관계가 몇 번 있었다. 그래서 예전엔 서로 다른 염색체 사이에 친구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주변에서도 뻔한 멘트가 들렸다. 

"너희 둘이 그냥 사귀어. 언제 사귀니?" 

너와 나는 자연스러운 재치로 흘려넘기고 언제나 친구 관계를 운운했다. 그런데도 너는 매너와 장난이 적당히 양념된  행동으로 날 헷갈리게 했다. 여중, 여고를 나와 쉽게 선을 넘지 않는 나에겐 낯설었다. 여사친도 적지 않게 있는 너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들과 다 함께 가까운 근교로 여행을 떠났다. 아직은 어색한 반말을 편한 척 주고받았다. 새벽녘, 동료들에게 별을 보러 가자고 졸랐다. 달을 보는 걸 좋아하던 너는 별을 보고 오랜만에 천진한 웃음을 보였다. 술기운도 있었는지 넌 잘 하지 않던 말도 했다.

"별 진짜 많다. 별 따줄까?"  

손발이 사라지는 말에 난 귀를 씻어냈다. 돗자리를 아스팔트 바닥에 깔고 추위와 별을 안주로 소주 한 잔씩 기울였다. 소주병 아래에 핸드폰 빛을 조명삼아 불을 밝혔다. 라섹으로 눈부심에 약해진 터라 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너는 손으로 내 눈을 가려주었다. 그러던 와중 동료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평소 아니라고 한 사람도 잘 맞는다면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누가 봐도 우리에게 한 말이었다.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그땐 한번 쯤 이런 친구를 만나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무수한 연상의 사랑에 지친 참이었고, 매섭게 겨울바람이 다가오던 시절이었다. 

 

네가 우연히 던진 말에는 시가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 우리의 화살은 서로를 조금씩 빗나갔다. 그럴수록 난 점점 막역해지는 이 관계가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 날의 만남이 내 과거의 생각을 일깨웠다. 친구나 되자고 서로의 친구들을 소개했다. 사실, 처음의 목적은 나의 모태쏠로 친구 B의 솔로 탈출을 위해서였다. 그 친구가 소개팅은 어색하다며 다 같이 밥이나 먹자고 제안했다. 그 모임이 반복되면서 우린 친해졌고 넌 내 친구 A에게 관심을 가졌다. 나에게도 썸인듯 아닌듯한 친구가 생겼다. 그런데도 너와 친구 A의 관계에 더 신경이 쓰였다. 둘 다 나에게 가장 최측근이었다. 너는 버릇처럼 여자친구가 생기면 너와 연락을 자주 못할 거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네가 같은 염색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민을 애초부터 하지 않도록. 그래서 난 둘은 절대 안 된다고, 다 같이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때쯤 나의 썸남과 미묘하게 감정이 틀어지고 있었다. 잘 돼 가는 너와 친구 A를 보며 생긴 열등감도 없지 않았다. 이런 대화가 반복되자 너는 나를 푹 찔렀다.

"너 나 좋아했어? 이제 나 좀 풀어줘." 

 

내가 구속했는지 부터 먼저 생각했다. 평소 우린 장난처럼 주인과 강아지와 같은 역할놀이를 했다. 절대 변태적 성향은 아니다. 넌 내 앞에서 포커페이스를 풀고 모든 감정을 다 드러냈다. 스스로 널 비글이라고 칭했다. 우린 갑자기 만나 끌리는 데로 먹고, 보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내 마음대로 굴어도 너는 다 받아줬다. 그러던 와중 그 말을 들으니 사고가 정지했다. '내가 너를 좋아했던가?' 나마져도 나에게 의심이 들었다. 난 내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니 너와 다니는 일에 즐거웠다고 답했다. 사랑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싫은 게 내 마음이야."

 

이어서, "내가 당긴다고 올 것도 아니잖아."고 답했다. 너는 막역한 친구가 될수록 다른 관계로 발전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는 백번 맞는 말만 했다. 그리고, 내 친구 역시 우리의 시간들을 알기에 너와 관계발전에 망설였다. 너와 친구, 사이에 낀 나, 갈등은 깊어졌다. 난 너무 이기적이라 불편한 감정이 싫었다. 너와 내 친구가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기를 빌었다. 결국 너와 내 친구의 이야기는 시작되지 못했다. 

"안된다고 한 건데 내가 괜한 짓 했지. 안 만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너의 모진 말에 난 면목이 없었다. 며칠 동안 연락을 안 하고 있었다. 넌 아무렇지 않게 먼저 다가왔다. 평소처럼. 

 

회사 다닐 때부터 네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믿고 따르던 사수가 건강상의 문제로 그만뒀고 난 혼자 남았다. 사수가 그만두자 무능력한 사람이 팀장이 되었다. 난 팀장의 몫까지 하느라 지쳐갔다. 그럴 때마다 너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었다. 원래는 직무가 달라 외근 때 말고는 도움받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넌 내 일거리를 차곡차곡 정리해주면서 언제나 뒤에 있었다. 늘어가는 나의 투정도 꾸준히 들어주었다. 사회에 나오고 다닌 첫 회사였다. 사회경험이 많던 넌 큰 힘이 되었다. 간과 쓸개를 빼도 회사를 나오면 역적이 되는 세상이다. 그동안의 고생이 무색하게 쫓겨나듯 나온 회사에 후폭풍이 더욱 심했다. 그럴 때마다 넌 내 자존감을 올려줬다. 너의 과거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넌  '네가 최고다, 예쁘다, 넌 어디 가든 잘할 거야'라고 툭툭 던지듯 말했다. 너도 나에게 너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쭙잖은 나의 위로에도 고마워했다. 

"1년 동안 이 회사에서 뭘 했나 싶어도 널 만나서 다행이야. 네가 좋은가 봐 친구로서."

매일 티격태격해도 너의 그 말에 고마웠다. 그래서 너와 친구 A의 일에 더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시 둘이 연락할까 봐 난 아직도 걱정한다. 정말 난 못돼빠졌다. 

 

이젠 정말 편한 사이가 되었다. 너와 같은 소파에 다리를 엉켜 누워도 아무렇지 않다. 주변의 부추김에 혹시라도 너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좋은 친구를 잃기는 싫다. 그래서 더욱 너의 연애가 늦춰졌으면 한다. 못된 심보다. 이 사사로운 감정이 얽힌 복잡한 관계가 가끔은 지친다. 이제는 너를 내 욕심으로부터 놓으려고 이 글을 쓴다. 넌 최근에 이런 말을 했다. 
"평생은 없어. 우리 관계도 평생 가지는 않을 거야. 죽어서라도."

평생이란 단어는 참 무모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금 여유가 생긴 이 시간에 감사하며 살 것이다. 우리가 평생은 아니더라도 좋은 친구로 오래 남고 싶다. 너도나도 언젠가 좋은 사람 만나겠지. 최근 꿈에서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너를 봤고 너는 나에게 그를 소개했다. 내가 버릇처럼 "내가 모르는 사람과 만나"라고 한 말이 이뤄져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이기적이다. 그래도 참 잘 어울렸다.  

 

모든 일에 끙끙대며 안절부절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친오빠는 '미움받을 용기'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책에선 '난 단점 투성이 이야'고 생각한다면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만든 것이라 한다. 나 역시 나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내가 이기적이기에 우정이란 이름으로 너에게 모질게 굴어도 괜찮다고. 어쩌면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이 스쳐 갔거나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관계를 깨기 싫어 나를 속이는 걸지도 모른다. 저 드라마 속 뻔한 남사친, 여사친처럼. 

 

인생이 뻔하지 않아서 '기대, 미래, 예측불허' 와 같은 단어가 생기지 않을까? 지금은 우리의 관계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너의 존재를 소중히 하며 너의 아픔을 더 달래주고 싶다. 내가 위로받은 시간만큼, 내가 가진 미안함만큼 너에게 보답하고 싶다. 아주 명확하면서도 아직 애매모호한 관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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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단상(斷想)

개와 늑대의 시간...해커

<필자의 보안단상(斷想)은 말 그대로 보안에 관한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입니다. 보안에 관해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작업입니다> 

 

'해질 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 이때는 선도 악도 모두 붉을 뿐이다.’

 

2007년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개와 늑대의 시간」 마지막회에서 주인공 이수현(이준기 분)의 마지막 나래이션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낮도 밤도 아닌, 경계가 모호한 시간을 뜻한다. 해질 녘과 해뜰 녘 빛이 사라지는 황혼의 시간과 다시 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박명(薄明)의 시간대를 말한다. 프랑스 남부 지역 양치기들이 해질 녘, 멀리 보이는 것이 기르는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하기 힘든 어둑어둑한 시간을 이르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친구인지 ,적인지, 진실인지, 위선인지 구별하기 힘든, 모호한 순간이라는 의미로 표현되기도 한다.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려 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어려운 모호함은 우리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선거철이면 정치인들이 남발하는 표심잡기용 공약에서 지역발전, 국가발전이라는 의미심장한 비전의 선포, 그 이면엔 오로지 당선만을 기대하는, 자기자신의 영달을 위한 욕망이 더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그들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경계가 모호한 개와 늑대의 시간과 닮았다. 공감은 사람과 사람 사이, 행복을 잇는 디딤돌 같은 말이지만, 거짓 공감으로 사람을 유인해 속이고 갈취하는 사기꾼들의 접근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어스름이 완전히 걷혀야 기르던 개인지 늑대인지 드러나듯, 사기꾼들도 그 실체가 드러나야 모호함이 비로소 걷힌다. 걷힌 모호함 뒤엔 기르던 개는 처참히 죽어 있고, 늑대가 있을 뿐이겠지만

 

이론과 분석은 사후적 판단이고 두려움 속에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아닌 하나의 지점에 정지된 영역이다. 살아 숨쉬는 긴장감 넘치는 현실에선 매 순간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모호함의 연속이다. 특히, 수많은 거래와 투자결정을 해야 하는 사업가는 한 순간의 결정으로 회사와 개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 사업가들은 수없이 맞닥뜨리는 ‘모호함들’을 극복하며 나아간다.

 

해커…일반인들에겐 아직도 그리 밝게 다가오는 단어는 아니다. IT의 어두운 이면에서 개인이나 기업, 더 나아가 국가기관을 침투, 비밀을 유출하고 악의적으로 이익을 좇는 이미지로 일반인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배경엔 사이버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해커라는 이름이 언론에 많이 노출된 탓도 있을 것이다.

 

사실 해커는 정보보호 분야의 전방위에 필요한 핵심 자원이다.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은 사이버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해커를 양성하고 고도의 해킹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해커는 범죄의 유혹을 따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사회안전을 보호하는 수호자의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렇게 빛과 어둠을 동시에 가진 해커가 세상을 안전하게 지키는 빛을 선택하게 하는 제도도 있다. 바로 ‘버그바운티(Bug bounty)’같은.

 

버그바운티는 내부 보안 전문가가 아닌 외부에서 소프트웨어나 서비스에 대한 취약점을 찾아낸 사람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기업들은 버그바운티를 통해 자사 제품과 서비스의 취약성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보안위협에 대응한 능력 향상을 꾀하고, 보안 취약점을 개선하여 더 안전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아 이익창출의 기회로 삼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버그바운티가 아직 사회 전반으로 확산돼 있지 않다. 공기관과 일부 보안기업 그리고 대기업에서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대다수 기업은 버그바운티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소프트웨어의 역설계 문제, 약관위반 문제 그리고 지나친 경쟁으로 불법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걱정으로 기업들이 내는 반대 목소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버그바운티를 통해 보안취약점 개선과 품질향상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순기능도 고려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누구나 자신의 재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해커들이 자유롭게 능력을 펼치고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지 못한다면, 자기가 설 무대를 잃은 그들은 방패가 아닌 창을 선택할 지도 모른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새벽녘과 해질녘의 시간이다. 태양을 기꺼이 맞이하는 새벽녘을 택할 것인지 어둠을 기다리는 황혼을 선택할 것인지는 기업과 정부의 몫이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시간, 나에게 다가오는 저 그림자가 나의 행복과 우리사회의 안전을 지켜 줄 충직한 파수견으로 다가올 것인지, 안녕과 질서를 해할 늑대로 다가올 것인지는 그 시간을 맞이 할 우리의 준비가 얼마나 성숙되어 있는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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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전 직장상사를 저주하며

나에게 형이라 불리고 싶지만

깍듯한 예의를 중시하며

공과사를 구분하고 싶어하는

감정기복이 제멋대로인

전 회사, ​직장 상사 'ㅈ'

 

지난 30개월 간 나를 향해

날을 세운 그의 검은 채찍은

날이 흐리면 무릎이 쑤시듯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다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

게으르다. 멍청하다. 모자르다. 능력이 그것밖에. 넌 안되겠다.

이런 말을 하기도 싫고, 내게 이득이 되는 것이 없음에도

널 자극해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하는 말이다.

모욕, 모멸감을 느껴 자존감이 무너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말이다.

그러므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의 문제다.

욕설과 폭력은 목적에 따라, 원인에 따라, 정당화 될 수 있다.

(직장 내 선후배 관계에서 이러한 논리가 옳다고 내세우는건 이해하기 어렵다)

 

모름은 죄다. 발전해야한다.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휴일에도, 멈춰있어서는 안된다.

명절에 쉬는 동안 회사를 위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공부를 했는지 궁금하다.

월급에는 휴일수당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고있나.

그 돈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쉬면서도 회사 생각을 하라고 주는 것이다.

 

노력을 했더라도 결과물이 좋지 못하면 노력을 잘못한 것이다.

노력을 잘해야지 열심히해서는 소용이 없다.

노력을 했는데 결과가 없다는 것은 패배자들의 핑계와 변명이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도 좋았던 것이고,

결과가 나쁘면 과정도 나빴던 것이다.

 

저녁 6시에 일을 주더라도

내일 아침 9시에 보고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다.

내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고 싶어서 해야 한다.

 

회사가 돈을 그냥 주는 게 아니다.

너가 돈을 받는 만큼 일을 한다고 생각하냐.

너가 받는 돈은 내가 주는 것이다.

 

네가 나가면 어디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3년은 채워야 경력으로 받아주지

지금 그걸로는 어림도 없다.

 

못버티고 나가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다

그 사람들의 인성이 잘못되었다

저런 사람들은 어딜가서도 안될 것이다
왕따는 당하는 사람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남의 물건을 뺴앗는 아이는 얼마나 갖고 싶어서 그랬겠어

(학창시절 자신이 왕따시키고, 갈취한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이야기하며 미화시킨다)

 

점심시간에 밥먹으면서 왜 말을 안하는거야

점심먹고나서 혼자 있을 때 말안하고 쉬면되지

직원들이 다 모이는 게 점심시간밖에 없는데

굳이 꼭 이 시간에 말을 안해야겠냐

 

(문구점에서 업무에 필요한 포스트잇을 구매하려는데)

그거 네 돈으로 사는 건 아깝니?

 

여직원들에게 스킨쉽한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으며, 앞으로 하지 않겠다.

 

목적에 따라 여러명의 여자를 몰래 만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예를들면 공부 잘하고 외모가 떨어지는 여자,

공부 못하고 외모가 이상형인 여자,

그럭저럭인데 돈이 많은 여자

세 여자를 만나면 각 사람마다 뛰어난 것에서 만족을 얻고,

부족한 것을 강요하지 않아도 되니 서로 스트레스 안받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팀장이 여직원을 포함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

 

직장이 아닌 대학선후배로 만났으면 나와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며 착각하던 '그'는
'왜' 사람들이 떠나가는지 깨닫지 못하고 남 탓으로 돌리기에 급급했다

 

이 글을 읽는다면 또 아니라고 하겠지. 양쪽 의견을 다 들어봐야 한다며 손바닥 뒤집듯 태세전환하겠지.

말과 행동이 모순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사람이 먼저라고 하겠지.

하고 싶다던 입양은 그 아이가 더 큰 상처를 받지 않도록 제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속승진한 36살 젊은 팀장의 '능력'과 '간사함'은

회사의 성장을 바라는 대표의 눈만 가렸을 뿐

추악하고 역겨운 '인성'은 덮을 수 없었다


한 조직의 막내로

'그'와 30개월이란 시간을 보내며

보이지 않던 자본주의로 빚어진 사회를

온 몸으로 또렷히 보고, 느끼고, 배웠다.

 

 

사무치게 아팠고

아직 가슴이 미어온다

 

내가 그에게 내리는 벌은

그에게만은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던 것과

그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를 살며 행복하다.

 

인과응보.

달게 받기를.

불행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