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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차마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봄이라기에는 덥고 여름이라기에는 모호한 날씨다. 오랜만에 같이 저녁이나 먹자는 메시지에 태연스레 답장을 보내고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가던 걸음을 시외버스 터미널로 바꾸는 맘이 설렌다. 그저 잠깐 보는 건데도 이리 기다려진다. 당신은 알까? 이런 내 마음을,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그리 북적이지도 한산하지도 않은 터미널에 도착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대략 10분 정도, 시원한 음료수라도 사려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건강을 챙기는 당신에게 커피보다는 차가 좋을 테다. 똑같은 시원한 음료 두 개를 사서 대합실 의자에 앉았다.

 

‘아직도 꽤 남았네.’

 

꽤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지만 당신을 기다리는 나에게는 참기 힘들 만큼 긴 시간이다. 순간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연락하면서, 막상 약속을 잡고 기다리는 시간은 왜 이리도 초조한지 모르겠다. 시계를 보다가 목을 쭉- 빼고 들어오는 버스 확인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어. 왔다!”

 

나도 모르게 반갑게 중얼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출구로 나오는 당신을 발견하고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내가 건네는 음료수를 받으며 씩- 웃는 당신이 너무도 좋다. 그 시원한 미소에 반했는데 매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서 있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참 무심하게도 말한다.

 

“뭘 그리 빤히 봐? 그렇게 보고 싶었어?”

 

“어. 무진장 보고 싶었어.”

 

당신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장난스레 웃는다. 내 말이 진심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짜식!”

 

“아. 머리 헝클어져!”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며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들킬까, 불편해 할까, 내 마음을 숨겼다. 당신은 그저 픽- 웃고는 내가 준 음료수를 따서 한모금 넘긴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을래?”

 

걸음을 떼며 문득 새로 생긴 식당이 떠올랐다. 얼마 전 친구와 갔을 때 잔잔한 분위기에 맛도 제법 괜찮았었다. 그 녀석은 여친하고 올 거라며 자랑을 했지만, 난 당신하고 가보고 싶다.

 

“시내에 새로 생긴 식당이 있는데...”

 

내 말에 당신은 미안한 눈치로 말을 꺼낸다.

 

“근처에서 먹자. 나 금방 다시 가야돼서, 미안하다.”

 

“아냐. 할 수 없지 뭐.”

 

정말 잠깐 들린 모양이다. 한창 바쁜 시기라고 하더니 괜히 내가 피곤하게 하는 게 아닌가 신경이 쓰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터미널을 나와 근처에 자주 가던 식당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면서 중요한 건 메뉴가 아니라고, 같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며 되뇌었다.

 

“많이 바쁜가봐?”

 

“응. 월말이기도 하고, 곧 여름이니까. 넌, 하고 있는 일은 괜찮고?”

 

“뭐. 나야 항상 괜찮지.”

 

서로의 일상에서 있었던 평범한 대화가 오고 간다. 하지만 그 평범한 대화가 나에게는 한동안의 버팀목이 될 것이다. 당신이 없는 일상에서 당신이 보내는 일상을 상상하며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진통제 말이다.

 

 

* * *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나고 다시 터미널이다. 표를 끊고 편의점에서 산 캔 커피를 손에 하나씩 들고 나란히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1시간 전에는 버스가 오기를 그렇게 기다렸는데 지금은 버스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버스가 오면 당신은 떠날 테니 말이다.

 

“밥 잘 챙겨먹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내가 애도 아니고, 별 걱정을 다해.”

 

투덜거리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내 어깨를 당겨 안으며 또 머리를 흩뜨린다. 그때 버스가 들어오고 당신은 내 어깨를 두어번 다독이더니 버스로 걸어간다. 난 그 등에 대고 애써 담담하게 말한다.

 

“조심해서 가.”

 

슬쩍 돌아보며 웃는 그 얼굴을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싶다. 승객을 태운 버스의 문이 닫히고 창가에 앉아 있는 당신을 한 번 더 바라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고 당신은 또 씩- 웃는다. 마주 웃고 있지만 가슴 한구석은 짠하다. 버스가 떠나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하아.”

 

참 허전하다. 내일이 되면 또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갈 걸 알면서도, 이 한순간의 허전함은 정말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니. 2년 전 당신이 이직(移職)하고 한동안 그리움과 외로움에 허덕이다, 일상 속에 희석된 허전함이, 당신이 왔다가는 그 순간 다시 떠오르는 걸 테다.

 

희끄무레하게 어두운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뗐다. 한 손을 들어 괜히 머리를 매만진다. 이제 애도 아닌데 난 당신에게는 언제나 그저 이웃집 동생일 뿐이겠지. 괜히 서글프다. 어쩌다 말도 못할 사람한테 반해서 이러는 걸까? 멋대로 반해버린 내 자신이 밉다.

 

* * *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다가 문득 네가 한 대답이 떠오른다.

 

- 어. 무진장 보고 싶었어. -

 

보고 싶으면 놀러오면 될 텐데 왜 한 번도 오지 않을까 싶다. 설마 내가 곤란할 까봐 그러나 싶다가도 내가 곤란할 이유가 있나 싶은 의문이 든다.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다. 겉보기와 달리 넌 참 여리고 예민했다. 그걸 처음 알게 된 게 3년 전이다.

 

무더운 한여름,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신문을 가지러 현관문을 열었다가 코를 찌르는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이웃집 문 앞에 아침마다 배달되는 우유가 쌓여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휴가라도 간 건가 싶었다. 신문만 집어서 얼른 문을 닫으려는데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조심스레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안에서 낑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나 고양이가 내는 소리였다. 설마 집안에 반려 동물을 방치하고 며칠이나 집을 비운건가 싶었다. 참으로 무심한 인간이라고 속으로 혀를 차며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문 앞으로 다가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역시 사람은 없는 건가?’

 

망설이다 무심결에 돌린 문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순간 멈칫하다가 문틈으로 빠져나온 작은 주둥이에 한숨을 쉬었다. 그대로 쭈그려 앉은 내 시야에 방안에 쓰러져 있는 남학생이 보였다. 사람이 없는 게 아니었다. 작은 강아지는 내 옷소매를 있는 힘껏 물고 잡아당겼다.

 

방안에 들어가서 살핀 너의 상태는 심한 탈진이었다. 응급실에서 정신을 차린 넌 실연이라고 말했다. 몇 년이나 짝사랑한 사람에게 실연당했다고 말이다. 그래서 몇날 며칠을 정신없이 울었다고 말이다. 그러는 네 모습이 참 가엽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직 어리구나 싶기도 했다.

 

- 쿡.

 

‘네가 안 오면 내가 보러 오면 되니까.’

 

어두운 차창에 가느다란 빗줄기가 스쳤다. 네가 이미 집에 도착했기를, 비를 맞고 있지 않기를 바라며 잠시 눈을 붙였다. 가녀린 빗소리가 부드럽게 귓가를 맴돈다. 그에 아직도 어리고 여린 네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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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雜

까마귀 엄마

 

까마귀 엄마

 

“응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어디서 들리는 걸까?

 

“응애”

 

대답이라도 하듯이 다시 들려오는 울음소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찾아가 본다.

 

-폴짝폴짝...푸드덕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잘 짜여진 대바구니가 놓여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하얗고 보드라운 천에 갓난아기가 싸여 있었다. 늙은 까마귀는 바구니의 손잡이 위에 앉아 가만히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아기의 새파란 하늘빛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까마귀를 향해 웃었다.

 

아기의 그 새파란 눈을 가만히 마주보던 까마귀는 훌쩍 날아가더니 어디선가 새알을 하나 가져와 아기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아주 조금씩, 혹시나 아기가 먹다가 체할까 조심스레 흘려 넣었다. 그렇게 한 알, 두 알, 마지막 세 번째 알을 가져왔을 때 아기는 까마귀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마치 자신의 것인지 안다는 양 달라는 듯이 내밀어진 그 작은 손에 까마귀는 구멍을 뚫은 세번째 알을 쥐어주었다.

 

그 이후 까마귀는 자신이 보모라도 된 양 아기를 돌보았다. 시간이 흘러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까마귀는 나는 법을 잊어버렸다. 아기가 자라 옹알이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까마귀는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아기가 더 이상 옹알이가 아닌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까마귀도 사람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 *

 

“저쪽이다 잡아!”

 

남자가 가리키는 곳에는 하얀 천이 나풀거리며 잔디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하얀 천을 뒤집어 쓴 까마귀가 도망치고 있었다.

 

“이놈의 까마귀가 어디 감히 여사제님의 옷을 훔치는 거냐!”

 

“거기 서라. 옷 도둑놈아!”

 

- 퍼억!

 

입에 물고 있던 옷이 나부끼다 눈앞을 가리자 까마귀는 결국 나무에 부딪쳐 나뒹굴었다. 그런 까마귀를 둘러싸는 사람들, 손에 뜰채를 든 사람도 보이고 몽둥이를 든 사람도 있었다.

 

“좋았어! 어디 맛 좀 봐라!”

 

“저놈 봐. 저 와중에도 입에 문 옷은 안 놓는데?!”

 

“그래봐야 독 안에 든 쥐야! 날지도 못하는 것 같잖아?!”

 

몽둥이가 막 까마귀를 내려치려는 찰나! 갑자기 앙칼진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둬! 우리 엄마한테 뭐하는 짓이야!”

 

주변 덤불에서 갑자기 달려 나와 몽둥이를 휘두르던 남자에게 달려든 건 작은 소녀였다.

 

“이 꼬마가 뭐라고 하는 거야! 저 까마귀가 네 엄마라고?”

 

소녀에게 밀쳐진 남자는 소녀를 밀어냈다. 소녀는 까마귀 앞을 막아섰다. 마치 까마귀를 지키겠다는 듯이 말이다.

 

“까마귀보고 엄마라니. 실성한 거 아냐?”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근처 마을에 사는 아이인가?”

 

갑자기 나타난 소녀와 소녀가 한 말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한 여인이 다가왔다. 새하얀 사제복에 하얀 피부, 밝은 금발의 기품이 느껴지는 온화한 표정의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소녀와 까마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마치 소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궁금하다는 눈이었다.

 

소녀의 등 뒤에서 사람들을 주시하며 움츠린 까마귀.

그런 까마귀를 지키겠다는 듯이 가로막고 있는 소녀.

그리고 신중한 눈빛으로 까마귀와 소녀를 살피는 여인.

 

“아이야, 그 까마귀가 어찌 너의 엄마란 것이지? 너는 인간이고 네 뒤에 있는 것은 까마귀인데. 까마귀가 인간인 너를 낳았다는 거니?”

 

“날 낳은 게 누구인지는 몰라요. 하지만 날 키워준 건 내 뒤에 있는 엄마라고요!”

 

소녀의 대답에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녀의 말대로라면 저 까마귀가 소녀를 돌봐주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저 늙은 까마귀가 어린 소녀를 키웠다는 말은 그리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엄마라고? 까마귀가 아니라?”

 

“그래요! 엄마에요! 엄마. 그렇지? 엄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왜 아무 말도 안하는 거야?!”

 

소녀의 말에 까마귀는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여인의 눈에는 어쩐지 곤란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결국 참다못한 소녀가 까마귀를 돌아보고는 재차 불러댔다.

 

“엄마. 왜 아무 말도 안 해! 뭐라고 말 좀 해봐!”

 

그 모습에 여인은 까마귀를 바라보며 말을 건네었다.

 

“혹시 이 아이가 곤란할까봐 그러는 건가요?”

 

그런 여인의 모습에 까마귀는 주저하듯이 고개를 주춤거렸다. 여인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여인의 근처에서 보다 못한 사람들이 뜰채를 휘두르며 나서려고 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게 되었다. 까마귀의 부리가 움직이고 그 부리에서 나온 건 '까악'거리는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허스키하고 거칠지만 분명 사람의 말이었다.

 

“그야 곤란하니까. 난 당신들의 옷을 훔쳤고, 난 까마귀이니까. 당신들은 이 아이를 나에게서 떼어놓을지도 모르니까.”

 

아이를 떼어놓을지도 모른다니. 이건 정말 엄마가 아이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무슨 소리야. 이 사람들이 엄마와 나를 왜 떼어놔! 그리고 이 옷 아직 입을 만한데 옷은 왜 훔쳤어? 나중에 낡은 옷 내놓을 때 하나 가져오면 된다니까! 왜 그랬어?”

 

울먹거리는 소녀의 말에 까마귀가 한 대답은 사람들의 손에 들린 뜰채와 몽둥이를 내려놓게 만들었다.

 

“오늘이 너를 만난 지 12년이 되는 날이니까. 깨끗하고 좋은걸 주고 싶었어.”

 

까마귀는 소녀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싶었던 거였다. 그래서 신전에서 빨아 널어놓은 옷 중에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가져가려 했는데. 그 옷이 하필 여사제의 사제복이라 사람들에게 쫓기게 된 것이다.

 

‘정말로 저 까마귀가 이 아이의 엄마구나. 신이시여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거군요.’

 

“저 옷은 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사제복이니까요. 하지만 깨끗하고 좋은 옷이라면 다른 것도 있어요. 그러니 나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여인의 말에 아이는 까마귀를 품에 안은 채 여전히 경계하며 두리번거렸다. 까마귀는 여인에게 정말이냐는 듯이 되물었다.

 

“우릴 해치지 않을 거야? 이 아이를 뺏어가지 않을 거야?”

 

“네. 약속하죠. 당신들을 해치지도 떼어놓지도 않겠습니다.”

 

* * *

 

여사제를 따라 신전의 복도를 걷던 소녀는 열려진 문 앞에 멈춰 섰다. 소녀가 멈춘 곳은 신전의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는 어머 어마한 양의 책들이 있었고 소녀와 까마귀는 처음 보는 책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책장 사이를 누비며 책을 뺐다 넣었다하며 구경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여사제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까마귀는 소녀에게 글을 가르친 적이 없다고 하였고 소녀도 글을 배운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소녀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글자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쓰기도 하고 읽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에 여사제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고 수도의 대신전에 까마귀와 소녀의 일을 보고했다.

 

얼마 후 대신전에서 보낸 사제와 마법사 길드에서 보낸 마스터들이 신전을 방문했다. 그들은 까마귀와 소녀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내린 결론은 아마도 이것이 누군가의 마법일 가능성이 크다는 추측이었다. 그 마법이 신성마법인지 마법사의 마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녀에게 걸린 마법이 소녀를 발견한 까마귀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그로 인해 까마귀는 소녀와 함께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날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과 소녀는 마법으로 인해 굳이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 많은 것들을 알 수 있게 되고 익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갓난아기에게 이런 마법을 걸어 숲속에 버려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소녀와 까마귀는 서로에게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저 늙은 까마귀가 정말로 소녀의 어미가 되었다는 것. 그것만큼은 그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사제의 배려로 신전에서 지내게 된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사제가 되길 원했다. 그날 까마귀가 여사제의 옷을 훔친 것이 마치 미래에 대한 예언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여사제는 소녀가 사제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소녀가 20살이 되어 여인이 되던 날 성인식과 함께 정식 사제가 되었다. 소녀의 사제명은 ‘도노두아’ 이곳의 말로는 ‘축복받은 아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여사제는 까마귀에게도 이름을 주었다. ‘카르두아’ ‘축복받은 까마귀’ 라고 말이다.

 

* * *

 

“엄마. 저 다녀올게요.”

 

카르두아를 향해 웃는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새하얀 정식 사제복을 입고 환하게 웃는 여인이었다. 카르두아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그 눈은 그때처럼 새파란 하늘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보고 싶을 거야.”

 

보고 싶을 거라는 말에 도노두아는 환하게 웃으며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도노두아는 내심 아쉬웠다. 같이 갈수 있다면 좋을 텐데. 대신전에서는 까마귀를 들일 수 없다하여 도노두아만 가게 된 것이다.

 

“응. 나도.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올게요. 사제 신고만 하고 바로 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도노두아는 카르두아를 안고 있는 여사제에게도 인사를 건네었다.

 

“다녀올게요. 스승님.”

 

마차에 올라탄 도노두아는 신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카르두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카르두아 역시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도노두아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치 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듯이. 절대로 잊을 수 없다는 듯이.

 

* * *

 

도노두아가 정식 여사제 신고를 위해 수도의 대신전으로 간지 며칠쯤 되었을까. 여사제는 창가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카르두아를 보았다.

 

“카르두아? 뭐하는 거야?”

 

“나는 법을 떠올리고 있어.”

 

그 말에 여사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날수 있어? 당신 못 날잖아?”

 

“날수 있게 될 거야.”

 

최근 들어 신전의 수도사들이 요즘 들어 창가에서 날갯짓을 하는 카르두아를 자주 보았다고 했다. 그게 나는 연습을 하는 거였을까? 도노두아를 보러가기 위해서? 여사제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재차 물었다.

 

“날수 있게 되면 어딜 가려고?”

 

“보러 갈 거야. 내 아이.”

 

“기다리면 올 텐데?”

 

“안 돼. 늦어.”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늦다니? 무슨 뜻일까? 그러고 보니 수련사들이 최근 들어 카르두아가 가끔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다고도 하였다. 여사제는 정말 불안했다. 카르두아가 날게 되면 그대로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을까봐. 도노두아가 슬퍼하게 될까봐.

 

* * *

 

“스승님. 저 왔어요. 다녀왔어요.”

 

신전 도서관의 문이 열리며 도노두아가 뛰어 들어왔다. 여사제는 읽고 있던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는 어딘가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도노두아를 반겨주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엄마가 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스승님도요.”

 

도노두아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사제를 그런 그녀를 보며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스승님. 그런데 엄마는요? 아까부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어디 계신 거예요?”

 

여사제는 살포시 한숨을 쉬며 슬픈 표정으로 도노두아를 바라보았다.

 

“도노두아. 카르두아는 돌아갔어요.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여사제의 말에 도노두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무슨...말씀이세요? 엄마가 돌아가다니요? 어디로요? 어디로 가셨는데요?”

 

새파란 하늘빛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하얀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여사제는 마음이 아팠다. 갓난아기 때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을 모녀를 이렇게 헤어지게 한 게 마치 자신의 잘못 같았다. 대신전에 한번이라도 더 부탁해 볼 것을...카르두아를 새장에 넣어서라도 같이 보낼 것을...괜스레 자신의 잘못 같았다.

 

“도노두아. 어제 카르두아는 숲속을 향해서 날아갔어요. 혹시나 해서 방문도 창문도 덧문까지 다 닫아두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자신의 몸집만한 석상으로 덧문까지 부셔버리고는 날아갔어요. 미안해요. 도노두아. 미안해요.”

 

도노두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자신의 엄마가 자신을 잊은 채 숲속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오늘이 도노두아의 20번째 생일인데. 자신의 생일날 항상 옆에 있어주던 엄마가 더 이상 자신의 곁에 없는 것이다.

 

도노두아는 그 자리에서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잊은 채 날아가 버린 엄마를 원망하며 그리워하며 한참을 울었다. 문득 신전 앞마당이 소란스러워졌다. 뒤이어 한 수련사가 도서관으로 황급히 들어오며 말했다.

 

“여사제님. 도노두아. 카르두아가 돌아왔어요! 지금 앞마당에...”

 

수련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노두아는 이미 일어서서 앞마당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자신을 잊었다고 생각한 엄마가 돌아온 것이다. 잊은 줄 알았는데 안 올 줄 알았는데. 너무나 보고 싶었던 엄마가 돌아온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최고이자 가장 사랑하는 엄마였다.

 

환하게 햇살이 비치는 신전 앞마당. 그곳에 카르두아가 있었다. 많이 지쳐 보이는 모습으로 부리에는 커다란 대바구니를 물고는 그렇게 지쳐 쓰러져 있었다. 도노두아는 카르두아를 품안에 안아들었다. 도노두아의 품에서 카르두아는 아끼고 아껴두었던 마지막 말을 꺼냈다.

 

“사랑하는 내 아이. 네가 먹어 버린 게 내 마지막 알이었지만 괜찮아. 네가 내 아이니까. 내 사랑하는 아이. 20번째 생일 축하해.”

 

늙은 까마귀 카르두아는 그 말을 끝으로 사랑하는 아이의 품안에서 마지막 숨을 쉬었다. 카르두아가 가져온 대바구니에는 20송이의 새하얀 장미가 담겨있었다. 20송이 순백의 장미는 아침 이슬을 머금은 채 찬란한 햇빛 아래 너무나 아름답고 향기롭게 빛나고 있었다. 카르두아를 안은 도노두아의 새파란 하늘빛 눈에서는 눈물이 반짝이며 흘러내렸다. 마치 아름다운 보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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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나쁜놈, 못된놈

 

나쁜 놈, 못된 놈

 

오전 9시. 노트북과 핸드폰, 열쇠를 챙겨들고 방을 나섰다. 문을 잠그고 가벼운 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바로 아래층의 302호 문 앞이다. 언제나처럼 익숙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 띵동.

 

문이 열리고 역시나 내 예상대로 익숙한 모습이 보인다. 부스스한 머리에 잠이 덜 깬 얼굴, 어제도 뒤척이다가 늦게 잠든 게 분명했다. 작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까지 한다. 그 모습이 어린아이 마냥 귀엽다.

 

“어제도 늦게 잤어?”

 

“응. 나 씻고 나올게.”

 

당신은 졸린 얼굴로 눈까지 부비며 그대로 화장실로 향한다. 난 그런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테이블 위에 노트북과 폰을 내려놓았다.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주스를 꺼내서 컵에 따랐다. 그리고 작은 주전자에 물을 받아 물을 끓인다. 씻고 나오면 분명히 커피부터 찾을 테니 말이다.

 

‘얼마나 됐더라.’

 

반년 가까이 된 거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씻고 간단하게 챙겨서 이곳으로 내려온다. 그럼 당신은 여전히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날 반겨준다. 당신이 씻는 동안 나는 간단하게 아침을 준비하고, 부글부글- 물이 끓는다. 빈 컵에 작은 아메리카노 스틱을 뜯어서 넣고 불을 끈 뒤 물을 부었다.

 

“향은 좋아.”

 

하지만 난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컵의 절반 정도를 채운 뒤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컵에 넣었다. 컵이 가득 찰만큼, 한 10개는 넣은 거 같다. 얼음이 컵에 부딪히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 와중에도 입매는 나도 모르게 싱긋거리고 있다. 매일 반복되고 있는 이 일상이 싫지가 않다.

 

테이블 위에 간단한 아침식사를 차려놓으니, 그 앞에 앉은 당신이 말간 얼굴로 생글거리며 웃는다. 입안에 고소하게 구운 빵을 한입 우물거리며 종알거린다.

 

“아침 잠 방해받는 건 별로지만, 그래도 네가 아침 차려주는 건 좋네.”

 

“아침에 방해받기 싫으면 일찍 일어나. 침대에서 폰 만지작거리며 늦게 자지 말고.”

 

“시이-러!”

 

그리고는 히죽- 웃는다. 꼭 말괄량이 동생 같다.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며, 농담도 하고, 평소와 같은 아침식사가 끝나면,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펴고 서로 마주 앉는다. 약간은 즐겁게 모니터를 바라보는 당신은 아마도 웹툰을 보고 있는 걸 테다. 살풋- 웃음을 지어내고 어제 저장해둔 리포트를 열었다.

 

한참 자료를 찾고 리포트를 작성하는 중에 익숙한 자판소리가 들렸다. 눈을 힐끗 돌려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의 어린아이 같던 모습은 없다. 당신의 눈은 모니터를 응시한 채 차분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빨라졌다, 느려졌다, 간혹 멈추기도 한다.

 

‘옆에서 불러도 모르겠네.’

 

빤히 쳐다보아도 모를 것이다. 아니. 이미 빤히 쳐다보고 있지만, 전혀 모르는 눈치다. 평소에는 그렇게 소녀 같은 당신이 일에 집중하는 그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실감하게 되는 그 거리감에, 시간의 차이에 가슴이 저려온다.

 

그래. 그런 걸 테다. 나에게 예뻐 보여야 할 이유도, 내가 남자로 보일 이유도 없기에, 언제나 그렇게 부스스한 차림으로 아무런 경계도 없이 문을 열어주는 거겠지.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매번 이렇게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기가 힘들다.

 

문득 내 시선이 느껴진 걸까? 시선을 돌려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아무것도 아냐. 아. 누나 얼음 더 줄까?”

 

“응!”

 

컵 두 개를 들고 일어나 싱크대에 놓고, 냉장고를 열어 주스와 얼음을 꺼냈다. 등 뒤에서는 다시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자리에 앉으며 얼음이 가득 담긴 컵을 건네주니, 양손을 뻗어서 생글거리며 받는다. 컵을 잡아든 그 손이 참 작고 희다.

 

“고마워.”

 

차가운 얼음 하나를 입에 물고, 다시 모니터를 향하는 당신의 표정이 바뀐다. 태연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으면서 갑자기 궁금해졌다. 여태 내가 본 당신의 표정은 웃거나, 졸리거나, 일할 때의 표정 말고는 없다.

 

‘울거나 화내는 건 못 봤어.’

 

내 시선은 모니터 속의 자료에 가있지만, 머릿속의 뇌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신도 울까? 크게 소리 내어 울기도 할까? 죽을 만큼 울기도 할까?

 

당신도 화를 낼까?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낼까? 미친 듯이 화를 내기도 할까?

 

왜 갑자기 그런 당신의 모습이 궁금하지? 왜 그런 당신의 모습이 보고 싶지?

 

울며, 화내며, 감정이 무너져 내린 당신이 보고 싶다.

 

그리고 그런 당신이 갖고 싶다.

 

나 정말 나쁜 놈이다. 나 정말 못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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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奇

비밀의 화원

 

비밀의 화원

 

“저기는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알겠지?”

 

소녀의 말에 소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소녀가 얘기해주지 않아도 소년은 이 저택에서 일하게 된 첫날 시종장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후원에 있는 화원에는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별 다른 반응이 없는 소년의 모습에 소녀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콧소리를 냈다.

 

“흐응.”

 

소녀가 들어가지 말라며 엄포를 놓은 후원의 화원은 거대한 돔 형태로 전체가 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져 있다. 소녀의 모친인 귀부인이 살아생전 가장 좋아했던 장소로 그녀 자신과 딸 이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장소이다. 심지어 귀부인 자신의 남편이자 소녀의 부친인 백작조차도 말이다.

 

반응이 시원찮은 소년의 모습에 소녀는 입매를 슬며시 말아 올리며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소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소년은 흠칫거리며 눈동자를 굴려 새하얀 조각 인형 같은 옆모습을 흘끗거렸다. 소년의 시선을 느꼈는지 소녀는 시선을 마주하며 간지럽게 속삭였다.

 

“들어가면 엄청 혼내줄 거야.”

 

소년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내용보다 귓가에서 느껴지는 소녀의 숨결과 달콤한 목소리에 당황한 것이다. 놀라서 동그래진 눈 아래로 새빨갛게 물든 소년의 양 볼을 보며 소녀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소녀의 새빨간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위험하리만치 반짝거렸다. 마치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눈빛이었다.

 

늦은 밤. 잠이 깬 소년은 문득 목이 마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 앉아 간이침대 옆에 높인 주전자를 들어 물을 마시려했으나. 주전자는 텅텅 비어 있었다. 소년은 주전자를 들고 조용히 방을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주전자를 채우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로 나온 소년은 창문으로 쏟아지는 밝은 달빛에 고개를 돌렸다.

 

밤하늘에 둥그렇게 뜬 보름달이 보였다. 정원에는 노란 달빛이 잔디 위로 푸르스름한 그림자를 띠우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소년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내 뭔가 발견한 듯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얇은 잠옷 위에 하늘거리는 가운을 걸친 소녀가 정원에 있었다. 소녀는 소년이 바라보는 정원을 가로질러 후원으로 향했다. 소년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소녀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그러다 소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소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주전자를 바라보며 정신을 차렸다. 소년은 괜히 멋쩍은 듯이 코를 씰룩이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왜 이런 늦은 시간에 후원엘 가는 거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대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소녀의 아침 식사를 챙겨들고 방으로 들어선 소년에게 소녀는 잠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다가왔다. 얇은 잠옷 너머로 비치는 소녀의 뽀얀 속살에 소년은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어제 봤지?”

 

“뭐, 뭘. 말입니까?”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소년의 반응에 소녀는 그저 키득거리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았다. 소년은 잔뜩 긴장한 채 소녀의 앞에 아침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소녀가 식사를 하는 동안 소년은 그 옆에서 바짝 굳은 자세로 그녀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렸나?’

 

소년의 그런 의문 속에서 소녀의 아침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소녀가 입가를 닦고 일어나는 동안 소년은 빈 접시를 옮겨 담은 뒤 방을 나왔다. 빈 접시를 부엌에 가져다주고 난 뒤에 소년에게 남은 건 오늘 아침 도착한 우편물 분류 및 각종 잡다한 심부름이었다.

 

어린 소년이 할 만한 잡다한 모든 일은 당연히 소년의 몫이라는 듯이 돌아오는 상황에 쉬지도 못하고 오전 내내 바쁘게 뛰어다녀야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잠깐 쉴 틈이 생긴 소년은 본관과 별관 사이의 작은 마당에서 목을 주무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푸른 하늘에 포근해 보이는 새하얀 뭉게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따뜻한 햇살을 머금은 바람은 소년에게 상쾌함을 날라다 주었다. 하늘을 향해 답답함을 내쉬어 날려 보낸 소년은 목과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조금이나마 개운해진 몸으로 다시 제 할 일을 하러 가려던 소년은 문득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온실에 시선이 멈췄다. 그 화원이었다. 시종장도 소녀도 들어가지 말라던 그 화원이었다.

 

‘위험한 거라도 있는 걸까?’

 

위험한 게 있다면 어린 소녀 혼자서 제 맘대로 드나들 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것도 그리 늦은 야밤에 말이다. 그런데 왜 들어가지 말라는 걸까? 뭔가 봐서는 안 되는 거라도 있는 걸까?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투명한 유리의 화원으로 다가갔다.

 

- 끼익.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가지 말라고 해놓고 정작 문을 잠그지 않다니. 소년은 이런 모순이 어디 있나 싶었다. 열린 문 사이로 고개만 들이밀고 두리번거리는 소년의 코에 달콤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짙은 단향에 소년은 주춤거리며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햇살을 가득 머금은 유리 화원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꽃이었다. 크고 화려한 꽃, 풍성하고 요염한 꽃, 단아하고 탐스러운 꽃, 작고 앙증맞은 꽃. 꽃. 꽃. 꽃...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온통 꽃뿐이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소년은 경고도 잊은 채 넋을 놓고 천천히 화원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소년의 입에서는 연신 감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꽃에 정신이 팔려버린 소년은 자신의 등 뒤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들어오면 혼내 준다고 했는데.”

 

“아, 아가씨?!”

 

화들짝 놀란 소년이 고개를 돌리니 소녀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앙증맞은 입술로 웃고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소녀의 미소에 주눅이 든 소년은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손을 내밀어 펼쳤다. 소녀의 손바닥에는 작은 Fortune Cookie가 놓여있었다.

 

“이거 먹어. 그럼 용서해줄게.”

 

행운의 면죄부라는 생각에 소년은 망설임 없이 소녀의 손에서 쿠키를 낚아채 입안에 집어넣었다. 바삭한 쿠키가 부스러지며 안에 있던 고소한 견과류가 씹혔다. 행운의 쪽지 대신 넣어 만든 건가 보다.

 

- 아작. 아작.

 

소년이 쿠키를 완전히 다 먹은 것을 확인한 소녀는 옆으로 비켜서며 유리 화원의 문을 가리켰다. 마치 그만 나가보라는 듯이 점잖은 태도였다.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원을 나왔다.

 

그날 밤. 소년은 무언가 간지러운 느낌에 잠에서 깼다. 소년은 잠에 취한 멍한 눈으로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내 가슴께 부근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소년은 불안한 눈으로 옷깃을 들춰보았다. 딱히 이상한 건 없었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자꾸 간지러웠다.

 

‘뭐지? 옷 안에 뭐가 들어갔나?’

 

소년은 옷 안에 머리카락이나 먼지라도 들어간 건가 싶어 웃옷을 벗어 털었다. 탈탈탈- 소리가 날만큼 세차게 털어낸 소년은 다시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어느새 간지러움은 사라져있었다. 소년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소년은 눈을 뜨자마자 주전자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목이 너무 말랐던 것이다. 얼마나 갈증이 심했는지 반이 넘게 차 있던 주전자를 쉬지도 않고 텅텅 비워버렸다. 소년은 그제야 좀 갈증이 가셨는지 창문을 열어 방을 환기시키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우편물을 분류하고 전달한 뒤 잡화점과 서점, 식료품점을 들리며 필요한 물건을 주문해두고 돌아오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소년은 빵은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스프를 마셔버리고는 우물로 향했다. 우물에서 막 길어 올린 시원하고 차가운 물을 정신없이 마셔대는 소년의 모습에 다들 걱정스레 수군거렸다.

 

“더위라도 먹은 거 아냐?”

 

“에이. 지금이 한여름도 아니고 화창한 봄에 더위라니.”

 

“저거 괜찮은 거 맞아? 어디 아픈 거 아냐?”

 

최근 며칠 사이 소년은 음식은 거의 먹지 않으면서 틈만 나면 물만 마셔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다들 수군대며 셔츠 앞섶이 다 젖도록 물을 마셔대는 소년을 힐끔거렸다. 이제 막 16살이 된 소년의 아직 앳된 가슴팍에 젖은 셔츠가 달라붙어 어딘가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반백의 시종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다들 뭘 멀뚱거리며 서있어. 어서 제자리로 가.”

 

그 호통에 숨도 안 쉬고 물을 마시던 소년도 축축해진 셔츠 앞섶을 털어내며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나이 지긋한 시종장은 그런 소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몸을 돌려 본관으로 향했다.

 

그날 밤. 소년은 부엌에서 주전자에 물을 채우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그때 그 쿠키를 받아먹었던 그날부터인 게 분명하다고. 내일 소녀에게 꼭 물어봐야겠다고 말이다. 대체 그 쿠키의 정체가 뭐였는지. 그렇게 생각하며 물을 마시던 소년은 주전자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금방 채운 주전자의 물은 소년이 부엌을 나서기도 전에 비어버린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수시로 몰려드는 갈증에 소년은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고 잠도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밤만 되면 명치부근이 가려워져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소년의 피부는 더욱 매끈하고 탱탱해졌고 안색은 더 말갛게 바뀌고 있었다. 마치 물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듯이 말이다. 소년은 비어버린 주전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터덜터덜 걸어서 마당에 있는 우물로 향했다.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어 올린 소년은 두레박 째로 물을 마셨다.

 

소년의 턱과 목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옷 앞섶을 적셨다. 소년은 그것도 모른 채 다시 물을 길어 올리고, 마시고, 다시 두레박을 내리고, 올리고...거의 새벽까지 그렇게 물을 마신 소년은 그제야 겨우 참을 만큼 해소된 갈증에 간신히 잠을 청하러 방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소녀의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 대기하고 있던 소년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아가씨.”

 

“왜?”

 

“그때 저한테 주신 쿠키 말인데요.”

 

“응. 그 쿠키가 왜?”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당당한 모습에 소년은 어쩔까 망설였다. 괜히 소녀를 의심했다가 자칫해서 오해라도 사게 되면 쫓겨나는 걸로는 안 끝날 것 같았다. 소년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뇨. 왜 포춘 쿠키에 쪽지가 없었나 해서요.”

 

소년의 말에 소녀는 진분홍 입술을 말아 올리며 나직하게 대꾸했다.

 

“쪽지보다 더 좋은 걸 넣어줬잖아.”

 

소녀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식사를 마저 했다. 그런 소녀의 뒤에서 소년은 내심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왜 자꾸 목이 마르고 간지럽냔 말입니다?!’

 

역시 수상했다. 소녀가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데. 대놓고 묻기에는 소년이 훨씬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소년은 일하면서 물을 마시면서 머리를 굴렸다. 대체 그 쿠키 안에 있던 게 무엇이었는지. 어찌해야 이 갈증과 간지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어디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지.

 

‘역시. 그 화원이 수상해. 뭔가 있는 거야.’

 

해가 저물고 집안의 인기척이 잦아들면서 보름달이 밤하늘에 떠올랐다. 소년은 쿠키를 받아먹은 한 달 만에 다시 유리 화원의 문 앞에 멈춰섰다. 혹여나 그날처럼 소녀가 오지 않을까 싶어 근처에 숨어 지켜보았지만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숨어 있던 소년은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 끼익.

 

역시나 잠겨있지 않았다. 소년은 살금살금 걸음을 죽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한밤중인데도 화원 안은 밝았다. 커다란 만월의 빛이 유리를 통해 더욱 환하게 비춰 들어오는 듯했다. 짙게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에 취해버릴 것 같았다. 소년은 머리를 내저으며 주변을 살피면서 화원 깊숙이 들어갔다.

 

노랗게 반짝이는 달빛 아래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달콤한 향은 달빛을 따라 흐르는 듯이 화원 안을 가득 메워 숨을 쉴 때마다 폐를 들락날락거렸다. 결국 향에 취해버린 소년은 홀리기라도 한 듯이 화원의 중앙에 서서 꽃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금실 은실로 자아낸 달빛을 반사시키듯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았다.

 

그런 귀한 꽃들을 감상하던 소년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바로 정면에 있는 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은은한 푸른빛을 머금은 꽃잎은 겹겹이 펼쳐져 풍성했고 꽃을 받치고 있는 줄기는 매끈하게 내려와 뽀얀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꽃을 피운 소년은 물빛 곱슬머리에 짙푸른 눈을 한 채 뽀얀 나체를 드러내고 앉아있었다.

 

“이...이게. 무슨...?”

 

소년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경악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사방을 둘러보니 꽃 하나에 소년 하나였다. 하나 같이 앳되고 뽀얀 나체를 드러낸 아름다운 소년들이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을 피운 채 앉아있었다. 그 광경에 불길한 기운이 스쳐지나간 듯 소년의 등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도망쳐야했다.

 

‘나가야 돼. 여기서. 이 저택에서!’

 

뒤돌아선 소년은 한걸음도 떼지 못한 채 주저앉아버렸다. 어느새 온 건지 소녀가 웃으며 서 있었다. 소녀는 주저앉은 채 뒤로 기는 소년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속삭였다.

 

“도망가려고? 여기서 나가면 죽을 텐데?”

 

새하얗게 질린 소년의 뺨으로 소녀의 손이 다가왔다. 소녀는 다정하고 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리며 미소 지었다. 소년의 이성은 일어나라고 도망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으나. 다리가 풀려버려 도무지 일어설 수가 없었다. 소녀는 겁에 질린 연녹색 눈을 들여다보며 소년의 명치부근을 어루만졌다. 소년이 밤마다 가려워했던 부위였다.

 

“어떤 꽃이 필지 궁금하지 않아?”

 

“아. 안. 궁금해요. ㅅ...살려줘요.”

 

소년의 애원에 소녀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프지 않을 거야. 죽지도 않을 거고. 여기서 나와 함께 사는 거야.”

 

소년의 심장부근에서 어깨로 움직이는 소녀의 손을 따라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소년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싱싱하고 푸른 줄기가 소녀의 손을 따라 뻗어 나왔다. 어느새 소년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 뻗은 줄기의 끝에 작게 꽃봉오리가 맺혔다. 소년의 시선이 그 꽃봉오리에서 멈췄다.

 

“아. 어, 어째서? 왜?”

 

“울지 마. 울면 말라버려. 시든단 말이야.”

 

소녀의 마지막 말에 소년의 눈에 공포가 스멀거리며 차올랐다. 말라버리면 시든다. 그럼 정말로 죽을 것이다. 소년은 안간힘을 쓰며 몸 밖으로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 소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어린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말했다.

 

“괜찮아. 볕이 좋은 곳에 앉게 해줄게. 물도 꼬박꼬박 줄 거고. 혼자가 아니니까 외롭지도 않을 거야.”

 

소녀의 붉은 눈이 소년의 연녹색 눈을 들여다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희고 가느다란 팔이 다가와 소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소녀는 슬며시 고개를 올려 소년이 피워낸 꽃을 바라보았다.

 

“역시. 예쁠 줄 알았어.”

 

소녀의 작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자아내고, 소년의 귓가에 맴도는 소녀의 목소리에서 가슴 설레는 희열이 퍼져 나왔다. 소년은 차마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겨우 돌려 꽃을 바라보았다. 방금 피어난 싱그러운 꽃이 소년의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옅은 레몬빛을 띤 연녹색의 동그란 꽃잎이 서로 촘촘하게 겹치며 피어있다. 청초하고 탐스런 꽃은 달을 향해 달콤한 향을 뿜어냈다. 소녀는 더 없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소년을 꼬옥 안은 채 그 꽃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년은 그런 소녀의 품에서 울지도 못한 채 그저 멍한 눈으로 자신이 피워낸 꽃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믿지 못할 현실을 부정하듯이 말이다.

 

화원을 뒤덮은 투명한 유리 너머로 금가루와 같은 달빛이 흘러들어왔다. 따스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달빛은 기묘하고 아름다운 화원을 비추었다. 마치 아무도 보아선 안 될 것을 그 혼자 감상하는 듯이...

 

 

“저기는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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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고양이와 담배

 

고양이와 담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세훈은 2층 난간에 기대어 창가 앞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늦봄의 나른한 오후 햇살 아래 아직 어린 새끼고양이 두 마리와 자현이 잠들어 있었다. 고양이 마냥 잠들어 있는 자현의 모습은 보고 있기만 해도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고양이가 세 마리가 된 거 같군.’

 

“쿡-.”

 

보송보송한 털뭉치 두 마리를 안고 잠든 자현의 뺨 위로 보드라운 금빛 햇살이 맺혔다. 그녀의 어깨와 등 뒤로 흘러내린 새까만 머리에는 까맣게 하얗게 빛나는 햇빛이 망울졌다. 자현의 모습이 비친 세훈의 눈에는 조금씩 갈증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무방비하잖아.’

 

세훈이 쓰는 1층과 자현이 쓰는 2층 사이에는 난간이 있는 계단뿐이었다. 그럼에도 자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마냥 천진한 얼굴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방도 아닌 거실에서 말이다. 세훈의 입가에 걸려있는 조금 가벼우면서도 어딘지 나른한 미소가 사라졌다.

 

‘녹아버리겠군.’

 

천천히 자현의 곁에 다가와 멈춘 세훈은 그대로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그 기척에 자현의 품에 안겨 있던 고양들이 귀를 쫑긋거렸다. 하지만 일어나기는 귀찮은지 더 웅크리기만 했다.

 

동그랗고 뽀얀 자현의 이마에 세훈의 손끝이 가 닿았다. 살며시 이마를 어루만지던 손은 닿을 듯 말 듯 조심스레 내려와 눈에 가 닿는다. 평온하게 감겨 있는 눈은 새까만 속눈썹을 드리운 채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잠들어 있는 그녀의 눈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꿈에도 고양이와 있으려나.’

 

세훈은 살며시 웃으며 다정하게 자현의 눈가를 매만졌다. 손끝에 닿는 촉감은 노곤하게 따스하고 부드럽게 매끈했다. 세훈의 손이 마치 홀린 것 마냥 말랑한 볼을 지나 자현의 입가로 향했다. 작고 부드러운 입술에 세훈의 손이 닿았을 때 감겨있던 자현의 눈꺼풀이 살포시 열렸다. 자현은 잠이 덜 깬 듯 웅얼거리며 세훈을 손을 밀어냈다.

 

“담배냄새.”

 

자현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그제야 고양이들도 자현의 품에서 빠져나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을 보던 세훈은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담배를 괜히 피웠군.”

 

자현이 조금 무심한 얼굴로 세훈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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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奇

비밀 일기장

 

비밀 일기장

 

아직 짐정리가 끝나지 않은 그의 서재로 들어선 그녀는 정리하다만 박스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밝게 웃으며 박스 하나를 밀어 책장 옆으로 옮긴 뒤 책을 꺼내 꽂기 시작했다. 그의 정리방법이야 익히 알고 있으니 대신 정리해주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자기가 와서 마저 하겠다고 했지만, 여기만 정리하면 다 끝나니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 정리를 하다가 문득 서재를 두리번거렸다. 곧 도착할 웨딩사진을 어디에 걸까 찾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비어있는 벽들을 보며 어찌 꾸밀지 고민하던 그녀는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반가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 띵동!

 

“아. 왔나보다.”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가던 그녀는 발에 치이는 박스에 잠시 휘청거렸다. 그에 박스가 쓰러지며 안에 들어있던 책들이 쏟아졌지만, 일단은 반가운 택배가 먼저였다. 책이 가득한 박스에 부딪힌 발을 살살 털며, 현관문으로 다가가 택배를 받았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웨딩사진이었다.

 

앨범은 물론 크기별로 액자에 맞춘 사진도 들어있었다. 그녀는 앨범을 잡고 잠시 고민했다. 먼저 한번 볼까? 아니면 그가 오면 같이 볼까? 행복한 얼굴로 망설이던 그녀는 앨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다시 그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의 정리가 다 끝내 놓고 그가 오면 웨딩사진을 걸 생각이었다.

 

아까 쏟아진 책들을 다시 차곡차곡 쌓던 그녀의 눈에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는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한손에 쏙- 잡히는 아담한 크기였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커버는 짙푸른 색의 두꺼운 양장이었다. 그의 집에 자주 놀러가고 서재 구경도 했었지만 이건 처음 보는 책이었다.

 

“최근에 산건가?”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았다. 책이 아니라 앨범이나 노트인 모양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설이던 그녀는 조심스레 그 파란 책을 펼쳤다. 한 장, 두 장, 천천히 넘겨보았지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손때가 묻고 모서리가 매끈한 걸로 봐서는 새로 산 건 아니었다.

 

“잊고 안 쓴 건가?”

 

그녀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손에 든 빈 노트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불쑥 손이 튀어나와 그 파란 노트를 잡아챘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였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놀랬잖아. 왜 이리 일찍 왔어?”

 

그는 아무런 말없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난히 무심한 그 눈빛에 그녀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머뭇거렸다. 그의 입매가 곱게 말려 올라가고 다정한 미소를 그려냈다.

 

“당신 도와주려고 일찍 왔지. 여긴 내가 정리할게. 나가서 쉬어.”

 

그는 파란 노트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서 일으켰다. 그의 행동에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마지못해 거실로 나갔다. 그녀가 거실에서 쉬며 아까 받은 택배 상자를 정리하는 동안, 그는 서재의 문을 닫고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정리를 끝내버렸다.

 

* * *

 

계절이 바뀌고, 그 파란 노트에 대한 기억이 흐려질 무렵. 그녀는 점심을 먹고 청소를 하려고 서재로 들어섰다. 책상을 닦고 책장의 먼지를 터는데 무언가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파란 노트였다, 표지도 두꺼워 쉽게 떨어질 책도 아니고, 허술하게 꽂혀있지도 않았다.

 

“흐음-.”

 

그녀는 묘한 기분에 물끄러미 짙푸른 책을 내려다보았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책을 낚아채던 그의 손과, 낯설 만큼 무심했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책을 집어든 그녀는 의심이 더욱 깊어지는 걸 느꼈다. 책의 표지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이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는데.”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노트에 왜 자물쇠까지 채워둔 걸까? 새파란 표지를 빤히 노려보던 그녀는 곧 책상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분명 어딘가에 열쇠가 있을 테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있을 테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물쇠까지 채울 이유가 없지 않는가?

 

‘이제 남도 아닌데.’

 

보지 못하게 자물쇠까지 걸어두니 더 수상했다. 왠지 꼭 봐야할 것 같은 의지까지 생겼다. 서재 안의 모든 서랍을 뒤지고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 중 하나만 남았다. 열쇠구멍이 있는 서랍에 바로 옆 칸에서 찾아낸 열쇠를 꽂으려는 찰나 현관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몇 시지?’

 

열쇠를 원래의 위치에 넣고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6시 30분. 걸레를 손에 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재를 나왔다.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퇴근한 그를 반겨주었다.

 

* * *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리고, 곤하게 잠든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천천히 이불을 걷고 방을 나와 서재로 향했다. 까치발로 서재에 들어선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먼저 찾은 열쇠를 꺼내 서랍을 열었다.

 

- 찰칵.

 

서랍 안을 더듬는 그녀의 손끝에 작은 금속의 물체가 닿았다. 직감적으로 열쇠라는 걸 느낀 그녀는 곧장 잡아서 꺼냈다. 시리도록 반짝이는 은빛의 작은 열쇠였다. 녹슬고 오래되어 보이는 자물쇠의 짝이 맞을까 싶었다. 그녀는 그 열쇠를 쥐고 그 파란 노트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여기 있다.’

 

작고 오래된 자물쇠에 작고 반짝이는 열쇠를 끼워 살짝 돌렸다.

 

- 달칵.

 

자물쇠가 열렸다. 그녀는 자물쇠와 열쇠를 책장(冊欌) 한쪽에 내려놓고 책을 펼쳤다. 역시 아무것도 없는 백지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그녀는 눈썹을 찌푸렸다. 짜증스레 종이를 넘기던 그녀의 손끝에서 일순 따끔한 통증이 전달되었다.

 

“아야!”

 

종이에 베여 피가 망울지고 있었다. 손끝을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작을 멈추었다. 베이면서 스며든 그녀의 피가 비어있는 백지에 퍼져나갔다. 그녀의 손끝에 망울져있던 피가 종이 위로 한방울 떨어지며 점점 더 붉게 물들였다.

 

“어?”

 

- 살려줘. 살려줘. 여보. 내가 잘못했어. 이젠 안 그럴게. 제발. -

 

- 아냐.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진짜야. 아무것도 못 봤다고. -

 

- 안 돼. 이러지마. 응?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그러니까...아악! -

 

계속해서 이어지는 절규와 비명과 애절한 외침. 노랗게 바래어 얼룩덜룩한 종이 위에 붉은 피는 한없이 퍼져나가며 처참한 광경을 그려냈다. 종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주체할 수 없는 공포감이 피어올랐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그녀를 붙잡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억울하다고, 위험하다고, 살려달라고, 머릿속에, 귓가에, 눈앞에,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맴돌았다. 겁에 질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등에 누군가가 닿았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 안자고 여기서 뭐해?”

 

그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익숙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한참이나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번쩍 드는 생각에 손에 들린 노트를 바라보았다. 백지였다. 아까의 그 핏자국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 피식.

 

멍한 얼굴로 굳어버린 그녀를 보며 그는 실없는 미소로 파란 노트를 낚아챘다.

 

“하여간, 궁금한 걸 그리 못 참아서, 이거 그냥 빈 노트야.”

 

그는 보란 듯이 노트를 들어 펼치며 파라락- 종이를 넘겼다. 그의 말대로 깨끗하게 비어 있는 백지뿐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모습에 그는 한숨을 쉬며 노트를 그대로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잡으며 달랬다.

 

“우리 자기, 몽유병은 아닐 테고, 악몽이라도 꾼 거야?”

 

악몽? 꿈이라고? 그러기에는 그녀의 손끝에 아리한 통증이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그만 나갑시다. 자야지 내일 또 눈을 뜰 거 아닙니까? 부인.”

 

“으, 응.”

 

그녀는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머뭇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조용히 서재를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기척에, 책상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펼쳐져 있는 그 파란 노트에 붉은 핏자국이 떠올랐다.

 

- 어서와. 기다리고 있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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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너라는 이름의 중독

 

너라는 이름의 중독

 

봄이 오고 가로수에 벚꽃이 피면 네가 생각난다.

매해 봄마다 벚꽃 보러가자며 노래를 불렀던 네가.

그때마다 다음에 가자며 미루고 미루었던 내가.

 

여름이 오고 햇볕이 좋은 날에는 네가 생각난다.

매해 여름 이번 휴가는 계곡으로 가자고 하던 네가.

그때마다 바다가 더 좋다며 바다로 갔던 내가.

 

가을이 오고 하얀 갈대꽃이 피면 네가 생각난다.

매해 가을마다 갈대 보러 가자고 하던 네가.

그때마다 피곤하다며 PC방으로 갔던 내가.

 

겨울이 오고 새하얀 첫눈이 내리면 네가 생각난다.

매해 겨울 새하얀 설경을 보러 가자고 하던 네가.

그때마다 춥다며 가기 싫다고 했던 내가.

 

왜 그랬을까?

벚꽃을 보러 가자던 네 말은 사람 북적대는 벚꽃 축제를 보러가자는 게 아니라

조용한 밤 벚꽃이 가득 핀 거리를 그저 나와 함께 걷고 싶었던 것뿐이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계곡으로 가자던 네 말은 푸른 잎이 우거진 숲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그저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싶었던 것뿐이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갈대꽃을 보러 가자던 네 말은 새하얀 갈대밭 사이를 내 손을 잡고

그저 나와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뿐이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눈을 보러 가자던 네 말은 어디선가 열리는 눈 축제를 보러가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주머니에 네 손을 넣고 소복이 내리는 첫눈을 나와 함께 맞이하고 싶었던 것뿐이었을 텐데.

 

그 몇 년의 시간 동안 나는 왜 항상 미루기만 했을까?

왜 아쉬움을 숨기며 웃는 네 미소에 그대로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네가 옆에 없는 지금에서야 너에게 중독된 나를 느끼며

그저 아무런 말없이 웃어주던 너의 미소에 행복해 하던 나를 떠올려 본다.

 

내가 행복했던 만큼 너도 행복했을까? 아니면 나 혼자 느꼈던 행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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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奇

또 다른 나

또 다른 나

 

“어? 너 저 위에서 내려오고 있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나 저 밑에서 올라오고 있었는데?”

 

횡단보도 건너 언덕길에서 내려오던 소영이가 날 보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난 방금 집에서 나와 횡단보도 쪽으로 올라오고 있던 중인데 말이다. 소영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상하다는 얼굴로 뒤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저 위에서 분명히 너 봤는데. 옷도 똑같고 불러도 대답도 안 하더니.”

 

“별일이야. 나 간다. 낼 봐.”

 

“어. 응. 그래 낼 학교에서 보자.”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소영이를 뒤로 하고 난 건너편의 슈퍼로 들어갔다. 엄마가 시킨 두부와 계란, 애호박을 산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소영이가 한 말은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고 기억해 두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20살 대학생이 되었다. 그 날은 전공 수업을 마치고 채플 수업을 듣기 위해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산학협력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앞 시간 채플이 끝나고 정문이 열렸다. 먼저 마치고 나오는 사람 중에 아는 얼굴이 보였다. 난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어? 너 방금 채플 수업 듣고 나오지 않았어?”

 

날 발견하고 다가온 선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는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에요. 선배. 저 지금 들으러 가는 중인데. 이제는 후배도 못 알아봐요?”

 

그 말에 옆에 있던 친구들이 키득거리며 웃었고 선배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내가 잘못 봤나보다. 그보다 이따 저녁때 동아리 회식 있는 거 알지?”

 

“네. 근데 저 6시까지 수업이라서 좀 늦을 거 같아요. 장소 확정되면 문자 좀 보내주세요.”

 

“그래. 수업 잘 듣고. 졸지 말고. 이따 보자.”

 

“네.”

 

선배는 졸지 말라고 했지만 자고로 채플 수업은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는 시간이다. 난 무대에서 기도를 하든지 공연을 하든지 졸음으로 시작해 졸음으로 끝난 채플 수업을 마쳤다. 뒤이어 전공수업까지 마치고 문자를 확인 한 뒤 선배가 알려준 장소로 갔다. 그 날 낮의 일은 저녁 때 회식의 즐거움에 까맣게 다 잊고 말았다.

 

그리고 내 나이 30이 되던 해. 난 평범한 직장에 평범한 연애를 하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랬기에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던 그 날이 이렇게 끔찍한 일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소영이의 말을 선배의 말을 흘려 넘기는 것이 아닌데. 후회스럽다.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해서 업무준비를 하던 나에게 입사동기인 지현언니가 오더니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혜영씨. 괜찮아?”

 

“예? 뭐가요?”

 

“응? 아까 같은 버스 탔는데 안색이 엄청 창백하더라고. 나도 사람들 틈에 끼여 있어서 보고만 있었는데. 결국 몇 정거장 못 가서 내렸잖아. 지금 보니 괜찮은 거 같네. 혜영씨 멀미했나보다.”

 

“언니. 저 오늘 지하철 타고 왔는데요.”

 

언니는 내 대답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 혜영씨 맞는데. 옷도 같고 머리도 같은데. 아닌가? 불렀을 때 살짝 뒤돌아 본 것도 같은데.”

 

“그냥 닮은 사람인가보죠. 옷이야 비슷한 옷들도 많고 머리도 뭐. 이런 머리가 한 둘도 아닐 테고.”

 

“그런가?”

 

“그럼요. 아님 제가 쌍둥이게요? 저 오늘 지하철 타고 왔다니까요. 언니가 잘 못 본 거예요.”

 

그렇게 난 또 한 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그 날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점심시간 오전 업무를 마무리 하느라 조금 늦게 밥을 먹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나에게 같은 부서의 최대리에게 그 날의 두 번째 목격담을 들을 수 있었다.

 

“어? 혜영씨 아까 밥 먹고 또 먹으러 가?”

 

“예? 무슨 소리세요. 대리님. 저 오전 업무가 좀 늦게 끝나서 지금 내려가는 건데요.”

 

“어? 아까 1층 로비에서 들어오는 걸 봤는데. 밥 먹고 들어오는 거 아니었어?”

 

“저 출근하고 1층에 내려간 적이 없는데요. 이제 점심 먹으려고 내려가는 거라니까요. 그러는 대리님이야 말로 또 어딜 가시는데요?”

 

“아. 난 담배 사오는 걸 깜빡해서. 내가 잘못 봤나?”

 

그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함과 동시에 내 핸드폰이 울렸다. 난 폰을 받아서 식당에 먼저 간 동료들에게 내가 먹을 메뉴를 부탁했다. 나와 같이 1층에 내린 최대리는 여전히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1층 로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최대리는 곧 머리를 긁적이며 담배를 사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때 이 경고라도 들었어야 하는데. 난 역시나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퇴근 후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서 난 내 어린 시절부터 내 주변을 맴돌았던 그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중에 가로등이 없는 짧은 골목길이 있었다. 근처 창문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전부인 20걸음 남짓한 골목길이었다. 그 길의 맞은편에서 한 여자가 마주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오늘 저녁은 뭘까? 하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길의 가운데. 정확히 10걸음을 남겨두고 그 여자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다. 난 여자에게 밀쳐져 벽에 부딪히며 여자와 벽 사이에 끼게 되었다. 그때 가슴 한 구석에서부터 서늘하게 퍼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 본 곳에는 차가운 칼날이 내 피부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박혀있었다.

 

“어...?”

 

어째서인지 피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실감나지 않았던 거겠지. 내가 사라져 가는 것이.

고개를 들어 날 찌른 여자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안색에 알게 모르게 나와 닮은 이목구비.

나와 비슷한 옷차림에 내 또래 여자. 그녀는 날 보며 희열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내가 되는 거야. 이제 내 것이 되는 거야.”

 

무슨 말이지? 춥다. 싸늘한 한기는 점점 더 퍼져가고 내 체온이 식어갈수록 그녀의 모습은 뚜렷해진다.

흐릿하던 실루엣도 희미하던 이목구비도 옅어서 잘 보이지도 않던 그녀의 그림자까지.

반면에 나의 그림자가 옅어져가는 게 보였다.

 

“그래도 하나 알려줄까?”

 

“무엇을...?”

 

“오늘을 잘 기억해둬. 내가 네가 된 이 날을. 앞으로 태어날지.

혹은 이미 태어났을지 모를 또 다른 네가 너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이날을...”

 

그 말을 끝으로 난 모든 것을 잃었고 정신을 차린 난 어디인지 모를 곳을 헤매고 있었다.

한 손에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간 그 칼을 쥐고서....

 

그 날 난 나를 찾아온 또 다른 나에게 나의 일상을 뺏겼고 난 또 다른 나를 찾아 그 일상을 뺏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있을 자리도, 나의 존재도, 나의 가치도, 아무것도 되찾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해. 나로 남기 위해. 난 또 다른 나를 찾아 낼 것이다. 반드시.

그리고 바로 당신일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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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그와 그녀

 

그와 그녀

 

입술부터 시작해 천천히 입안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키스.

그 나른하고도 부드러운 감촉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면서 가늘게 뜬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와 달리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차분하고 날렵한 눈에는 담담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 그녀 역시 보란 듯이 태연한 눈으로 맞받아쳤다.

 

‘결국 떠나지도 못하면서 바보 같아.’

 

그는 그저 그녀의 직장 상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함께 가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차갑고도 달콤한 키스의 끝에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고 그녀는 시선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내일 아침 새로 오는 담당에게 인수인계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같이 가줘서 고마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건네는 고맙다는 말에 그녀는 순간 울컥하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혹여나 그런 표정을 들킬까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리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 찰칵.

 

“바래다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문을 닫으며 거절하고 돌아서는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한 심정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안도와 아쉬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끼며 엘리베이터를 탄 그녀는 한쪽 벽에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다 힘없이 웃었다.

 

- 피식.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정문을 나서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가로등 불빛만이 비칠 뿐 달도 별도 구름 뒤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무심결에 내뱉은 얕은 한숨은 뽀얀 입김이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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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奇

공중전화

 

공중전화

 

학원을 마치고 어두운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드리워진 골목길에는 지나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매일 다니는 길이라 혼자 걷고 있다는 게 그리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면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졸려. 얼른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작게 하품을 하며 오르막길로 들어섰다. 왼편에는 빌라의 담장이 있고 오른편에는 모 회사의 기숙사 담장이 있는 길이었다. 오르막길을 반쯤 올랐을 때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기숙사 정문 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불이 꺼진 건물과 가로등 옆에 공중전화 박스가 보였다.

 

그 박스 안에 누군가가 이쪽을 바라보며 통화 중이었다. 난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에 다시 눈을 돌려 그 공중전화 박스를 바라보았다.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가로등 불빛 아래 박스 안에서 통화를 하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 내가 잘못 봤나?’

 

이상했다. 정문 안의 마당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공중전화 박스를 나왔다면 어딘가 걸어가고 있는 그림자라도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고개를 돌렸던 단 몇 초? 그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나? 난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며칠 뒤, 같은 시간 학원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그 길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난 다시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공중전화 박스에 그때 본 그 사람이 또 있었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 며칠 전에도 여기서 똑같이 저 사람 봤는데...”

 

“응? 아무도 없는데?”

 

“어? 저기 공중전화 박스에 있잖아.”

 

“없는데. 너 누구 말하는 거야?”

 

난 고개를 돌려 공중전화 박스를 바라보았다. 비어있었다. 그 길을 지나는 내내 난 분명히 봤다며 중얼거렸고, 친구는 재차 아무도 없었다고 날 타박했다. 그 이후로는 꼬박꼬박 학원 차를 타고 다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던 학원도 그만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었다. 헛것이겠지만, 아닐 수도 있는 걸, 그리 빤히 보며 무심히 지나치다니 싶다.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겁이 늘어난 게 아닐까 싶다. 고등학생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던 공포영화를 지금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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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약속 : 約束 : Promise

 

약속 : 約束 : Promise

 

너랑 나랑 우리 둘이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나한테 시집오는 거다?!”

 

“응응. 랑이는 율이한테 시집 갈 거야.”

 

따스한 봄날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에서 했던 약속.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마주잡고 베실거리며 했던 어린 날의 약속.

.

.

.

커다란 창문에 굵은 빗방울이 맺히고 여름장마가 시작되던 날.

회색빛 구름처럼 창백한 얼굴로 얕은 숨을 내쉬던 너.

 

“미안해. 율아.”

 

“미안하면 빨리 나아. 그래야 나한테 시집 올 거 아냐.”

 

내 말에 그저 희미하게 미소 짓던 너.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달이 얼굴을 내밀고 마지막 빗방울이 반짝이며 떨어지던 그날 밤.

너의 모래시계를 채우고 있던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지고 너의 시간이 멈춰버렸어.

 

이렇게 너만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내게 전해진 한권의 노트. 모서리가 닳아 뭉툭해진 그 노트에는 아름다운 소녀시절을 병실에서 보내야했던 너의 소박한 바람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어. 너를 떠올리며 한장 한장...네가 남긴 노트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난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지.

.

.

.

살랑이는 봄바람을 맞으며 나들이를 가고 싶다고

쨍쨍한 여름 햇살 아래 비키니를 입어보고 싶다고

시원한 가을 하늘을 보며 낙엽을 밟아보고 싶다고

20살의 크리스마스에 나와 함께 첫눈을 맞고 싶다고

 

눈물에 살짝 번진 마지막 장에는...나와 한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고

.

.

.

이듬해 성인의 날.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부드러운 햇살이 알록달록한 유리창으로 스며들어와 작은 교회 안을 비추고

난 너를 안은 채 나이든 신부님 앞에서 약속해. 평생 널 잊지 않겠다고, 너를 사랑하겠다고.

준비한 반지 하나를 내 왼손 약지에 끼우고 다른 하나는 너의 유골함에 담아.

내 숨이 다하는 날 너의 손에 끼우겠다고 약속해.

 

봄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오는 날 바람을 따라 내게 와줘.

구름 한 점 없이 무더운 여름날에는 너를 보러 바다로 갈게.

새파란 하늘에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우리 함께 낙엽을 밟으며 걷자.

 

그리고 새까만 밤하늘에 새하얀 첫눈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에는 날 보러 와야 해.

내가 널 잊지 않도록, 내 꿈에라도 날 보러 와줘.

 

언제나 널 기억하고 널 사랑하며 네 몫까지 살아갈게.

넌 날 잊지 말고 그곳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날 기다려줘.

내가 널 만나러가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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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2. 유명세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여기저기 사방으로 허리를 굽히며 꾸벅- 인사를 하고, 매니저 형을 따라 차에 올라타면 몸은 이미 알아서 늘어져버린다.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힘없이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불타오르는 금요일을 외치며 즐거운 얼굴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또래다.

 

“좋겠다.”

 

무심결에 나온 중얼거림에 매니저 형이 쓰게 웃는다. 그래. 나도 안다. 배부른 소리라는 걸. 하지만 진심이다. 원 없이 사랑받고, 원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난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저들이 부럽다. 고개를 돌려 머리를 뒤로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나직한 자동차 소음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렇게나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그렇게나 원하던 일이었는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아니. 왜 점점 행복해지지 못할까? 왜 점점 더 힘들고, 점점 더 외롭고, 점점 더 후회가 될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었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행복하지 못 할까?

 

“신후야. 다 왔다.”

 

어깨를 흔드는 기척에 눈을 뜨고 차에서 내렸다. 형은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었다. 가득 찬 쇼핑백 5~6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이서 양손에 나눠들고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열고 들고 온 쇼핑백을 내려놓은 형은 조금 걱정스레 한번 훑어보았다.

 

“뜯을 때 조심하고, 푹 쉬어라.”

 

“네. 형도 조심해서 가요.”

 

문이 닫히고 혼자 남은 집은 고요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옷을 벗어두고 적당히 따듯한 물에 몸을 담갔다. 피식- 우스웠다. 쇼핑백 안에 든 건 전부 팬레터와 선물인데. 뜯을 때 조심하라는 말을 들어야 하다니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웃음이 난다.

 

“하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고,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사람이란, 인간이란, 누군가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만큼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주 당연한 것임에도 난 날이 갈수록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필시, 저 중에도 선물 아닌 선물이 섞여 있겠지.’

 

악플과 소문과 안티와 스토커에게 시달려야하는, 적어도 내가 바란 건 이런 생활은 아니었다. 난 그저 같이 서고 싶었고, 같이 하고 싶었는데, 왜 나만 남았을까? 넌 어디로 가버리고 나만 남았을까? 내가 인정받고 싶은 사람은 너 하나였는데, 넌 왜 내 옆에 없는 걸까?

 

멍하니 욕조에 늘어져 하얀 타일이 가득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 똑. 똑.

 

샤워기에서 하나 둘 물방울이 떨어졌다. 규칙적인 물방울 소리와 옅게 퍼져나가는 동심원, 천장의 새하얀 타일들, 그대로 있다가는 욕조에서 잠들어버릴 것 같았다. 머리를 흔들어 몽롱한 정신을 깨우고 욕실을 나왔다. 대충 물기를 닦고 침실로 가려는 걸음을 멈췄다.

 

- 툭.

 

현관에 놓아둔 쇼핑백 하나가 쓰러졌다. 한숨을 쉬고 걸음을 돌렸다. 쓰러진 쇼핑백을 세우고, 방바닥으로 쏟아진 자잘한 선물상자와 편지봉투를 주워 담았다. 손에 뭉쳐 잡은 봉투 중에 하나가 미끄러져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명한 보라색 봉투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집어 들었다.

 

“뭐야?”

 

발신자는 비어있고, 수신자에는 주소도 없이 내 이름만 적혀있다. 딱 봐도 수상하다. 분명히 또 이상한 혈서나, 욕지거리나, 괴상한 그런 게 들어있겠지. 그런 생각과 달리, 풀칠도 안 된 봉투 안에서 나온 건 새하얀 종이였다.

 

마법의 질문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어떤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행운의 편지도 아니고, 이게 뭐야?”

 

이건 또 무슨 신종 장난인가 싶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온다. 약 올리는 건가? 목을 타고 울컥하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은 내 상황에서는 너무나 유치하고 악질적인 장난이었다. 점점 늘어가는 헛소문에, 안티에, 악플에, 있던 팬마저 잃어가고 있는 나한테는 말이다.

 

“유명해지고 싶으냐고?”

 

괜히 그 사람하고 얽히는 게 아니었다. 무반응이 답이라며 입 다무는 게 아니었다.

 

‘이미 늦어버렸지만.’

 

처음으로 터진 스캔들에 그동안 쌓아온 게 이리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허무하게 말이야.’

 

그래서 더 보고 싶다. 다른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날 믿어줄 네가 너무도 보고 싶다.

 

“주소가 없다는 건 직접 갖다 넣은 거겠지?”

 

봉투와 종이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펜을 꺼냈다. 내가 적은 답을 보면, 이걸 보낸 사람은 뭐라고 생각할까? 쓴웃음이 나온다. 내가 이걸 왜 적고 있나 싶으면서도, 적어도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싶다. 억울한 헛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선가 내 소식을 듣고 있을 너만은 알아주면 좋겠다.

 

* * *

 

“내려가고 있어요. 이제 1층이에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통화를 종료했다. 문을 나서기 전, 잠깐 걸음을 멈추고 우편함에 봉투를 넣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가져갈 것이다. 어제와 같은 곳, 내 스케줄을 알고 있다면, 어디선가 날 보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반응이 궁금하지만, 확인할 수는 없겠지. 아쉽네.’

 

문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 * *

 

어두운 밤. 건물의 모든 불이 꺼지고, 문이 잠기고, 셔터가 내려갔다.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푸른 어둠속에 한줄기 보랏빛 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실려 우편함 밖으로 빠져나온 봉투가 열리고, 새하얀 종이가 환하게 빛을 낸다. 질문 아래 적힌 답이 어둠보다 더 진하고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 네. 거짓된 모습이 아닌 진실된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어둠속에서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2016년 6월 26일. 신문과 잡지, 온라인이 온통 하나의 기사로 화제가 되고 있다.

 

<< K양과 S군의 진실 게임 >>

 

어제 오후 S군은 작년 연말부터 계속해서 열애설과 결별설이 오가며 구설수에 오르던 K양과 스캔들에 관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S군은 K양과의 열애설은 근거 없는 소문이며, 서로 사적인 친분도 없는 사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스캔들을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을 노린 양측 소속사의 제재 아래, 두 당사자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게 된 거라며, S군 자신은 물론이고 K양도 피해자라고 밝혔다. 이에 S군의 입장표명에 소속사는 그런 적이 없다고 입장을 밝힌 반면, K양측의 소속사는 아직 입장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S군은 소속사와의 계약이 만료되는 오늘 이후, 휴식기를 가진 뒤 홀로서기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S군의 진실 고백에 팬들은 차라리 잘됐다고 홀가분하게 벗어나라는 응원이 대다수이며, 안티들의 경우는 이것도 짜고 치는 거 아니냐며 믿지 않는 분위기이다. 소속사와 좋지 않게 끝낸 S군의 향후 행방이 걱정되는 가운데...[하략].

 

* * *

 

그 한번의 인터뷰에서 모든 걸 털어놓고, 다음날 바로 가방을 챙겨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숨 돌릴 틈도 없었던 생활에서 벗어나, 가보고 싶었던 곳,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혼자서 바람처럼, 쿡-. 그래. 유치하지만, 바람처럼 그렇게 떠돌았다. 이국적인 거리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길을 걸었다.

 

일상적인 거리와 일상적인 풍경과 그 속에서 일상적으로 오가는 사람들 속에 섞여, 목적지 없이 돌아다녔다. 가끔은 너와 함께 왔다면, 내 옆에 네가 있다면, 네가 그리워지는 만큼, 더 많은 걸 보고, 더 많은 걸 들었다. 그렇게 1년을 떠돌며, 소문에서, 안티에서, 악플에서 벗어나 5년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공항에 네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 많은 인파속에서 단번에 널 찾을 수 있었다.

 

그대로 달려가 널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네 손이 내 등을 토닥인다. 네가 울먹이며 미소한다.

 

“나도 네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네가 다시 내게 와주었다. 이제는 절대 놓지 않아. 너와 멀어지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다. 네 옆에서, 네 손을 잡고, 너와 함께 걸으며, 너와 함께 할 테다. 다른 그 누구보다 너만 날 알아주고, 날 믿어주고, 날 바라봐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세상 모두보다 너 하나면 충분하니까.

 

* * *

 

창밖에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창가에서는 네가 건반을 치며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네 눈은 그때처럼 반짝였고, 너의 허밍[humming]은 여전히 간지럽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든 컵을 들고 옆에 앉았다.

 

“어때?”

 

양손으로 머그컵을 받아들며, 생긋- 웃는다.

 

“좋아. 봄날에 내리는 눈송이 같은 느낌?”

 

“그래서. 가사는 떠오르십니까?”

 

“흠...좀 기다려 주시죠?”

 

결국 서로 마주보며 웃고 만다. 내가 만든 멜로디에 네가 가사를 붙이고, 그걸 함께 부르고, 나와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일상. 비록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더 이상 거짓된 내 모습에 시달리지 않고, 우리가 함께한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만으로 나에게는 이미 충분하다.

 

세상 모두가 아닌, 너 하나면 돼.

 

마법의 질문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어떤 식으로 유명해지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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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奇

새하얀 꿈

 

새하얀 꿈

 

17살 어느 날.

 

“계세요~?”

 

방안에 있던 난 내 방문을 열고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바깥에서부터 환하게 비춰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셨다.

 

그 빛 속에서 현관에 서있는 사람이 흰 저고리에 흰 바지를 입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환하게 비춰드는 빛에 얼굴만은 보이지 않았다.

.

.

.

잠에서 깨고 꿈을 꾼 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그날이 17살 겨울방학 때였고, 1월 중순이었다는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것도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꿈만은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날 오후 난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장에 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신을 염하기 전에 할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영안실로 들어가셨다.

빈 장례식장에 홀로 앉아 있던 난 아침에 내가 꾼 꿈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새하얗고 눈부시던 빛과 하얀 한복을 위아래로 입고 있던 아저씨.

 

영안실에서 나온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편하게 쉬신 것 같다며 웃고 계셨다고 했다.

 

향을 피우고 상복을 입고 곧 도착 할 다른 형제들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에게 난 아침에 꾼 꿈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꿈같은 걸 믿지 않는 아버지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나도 그저 그런 꿈이었나 보다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3일 내내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맡았던 짙은 향내 때문일까?

출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결국 심하게 탈이 낙 말았다.

그런 내 엄지손가락을 아버지가 바늘로 따주시고 나서야 탈이 난 것을 모두 내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나 지난 뒤 나는 어머니에게 그 날 내가 꾼 꿈을 말했다.

다 듣고 난 어머니께서 하신 말에 난 그 꿈이 할아버지를 마중 나온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휴. 가시는 길에 큰손녀 어루만지고 가셨나 보네. 그래서 네가 탈이 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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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벚꽃 같은 그대

 

벚꽃 같은 그대

 

땅 위에는 하얀 벚꽃 잎이 깔려있고 머리 위에는 달빛에 새하얗게 빛나는 벚꽃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달빛 아래 벚꽃을 밟으며, 벚꽃을 올려다보며, 사뿐사뿐~ 나풀나풀~ 걷는 여인을 한 사내가 조용히 뒤따른다.

 

바람에 벚꽃 잎이 흩날리고, 바람에 여인의 새까만 머리가 살랑거린다.

흩날리는 꽃잎처럼 춤추듯 걷는 여인을 사내는 아련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따라 걷는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빙글. 사내의 말에 몸을 돌리는 여인의 벚꽃 같은 옷자락이 나풀거린다.

여인의 고운 얼굴은 밤하늘의 달 마냥 환하게 미소 짓는다.

 

“좋아요. 너무나 아름답고...좋아요.”

 

벚꽃이 좋다는 것일까? 그녀를 뒤따르는 사내가 좋다는 것일까? 아니면 둘 다 일까?

벚꽃이 아름답다는 것일까? 그녀를 뒤따르는 사내가 아름답다는 것일까? 이것도 둘 다 일까?

 

그녀의 말에 사내의 단정한 입매가 ‘못 말리겠군요.’라는 듯이 미소 짓는다.

앞서가는 여인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에 사내의 옅은 옷자락이 펄럭 거린다.

 

여인은 바람에 날리며 떨어지는 벚꽃 잎을 향해 손을 뻗어보지만

꽃잎은 매정하게도 여인의 손을 스쳐 떨어져 내린다.

 

그 모습을 보던 사내가 다가와 여인의 양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살며시 감싸 잡는다.

그 위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벚꽃 잎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는다.

 

여인은 기쁜 듯이 손을 포개어 꽃잎을 덮고 잠시 눈을 감더니 곧 입김을 불어 꽃잎을 날려 보낸다.

사내가 살풋- 웃더니 여인에게 묻는다.

 

“소원이라도 비셨습니까?”

 

“네. 꼭 이뤄달라고 빌었어요.”

 

“무엇을 비셨습니까?”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보는 사내를 마주보던 여인이 짓궂게 웃는다.

 

“안 가르쳐 줄래요.”

 

빙글. 여인은 다시 몸을 돌려 저만치 사뿐사뿐 꽃잎 위로 걸어간다.

그런 여인의 뒤를 사내는 조용히 웃으며 다시 따라 걸어간다.

 

* * *

 

가로등 불빛에 붉은 빛을 띠며, 달빛에 창백한 빛을 띠며 벚꽃 잎이 바람에 하늘거리며 흩날린다.

그 벚꽃 길을 새까만 머리를 흩날리며 걸어가는 여자를 남자는 느긋하게 걸으며 따라간다.

 

“예쁘다.”

 

빙글. 몸을 돌리는 여자 주변으로 바람결에 흩날리던 벚꽃 잎이 휘감긴다.

그녀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생긋 웃는다.

 

“그거 알아?”

 

“뭔데?”

 

살짝 미소 지으며 되묻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떨어지는 벚꽃 잎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꽃잎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가 픽- 웃더니 다가와 여자의 양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가만히 감싸 잡는다.

그 손 위로 벚꽃 잎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는다.

 

여자는 조금 놀란 듯 감탄한 듯 멈칫하더니 손을 포개고 잠시 눈을 감는다.

잠시 후 살며시 눈을 뜬 여자는 입김을 불어 벚꽃 잎을 날려 보내고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데.”

 

“뭘 빌었는데?”

 

묘한 미소를 짓던 여자는 빙글. 몸을 돌리고 몇 걸음 걸어가더니 가로등 아래에서 멈춰 선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벚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향해 돌아선다.

 

“안 가르쳐죠.”

 

여자의 말에 조금 맥 빠진 듯이 웃던 남자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간다.

남자는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안 가르쳐줘도 괜찮아. 나도 같은 걸 빌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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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질문

01. 저녁식사

* 이글의 소재가 되는 마법의 질문은 실제로 1997년 아서 아론 박사의 실험 자료입니다.

단, 글의 내용은 저의 창작물입니다.

마법의 질문

이 세상의 누구와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누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겠습니까?

 

“이게 뭐야?”

 

우편함에서 꺼내온 우편물 사이로 보랏빛 편지봉투가 보여서 그대로 뜯었다. 새하얀 종이에는 엉뚱한 질문만 적혀있었다. 수신인은 분명히 내 이름이 맞는데 우표도 없고, 발신자도 없다.

 

“유치하게 마법의 질문이라니.”

 

피식- 웃으며 그대로 책상에 올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촤아- 내리는 물줄기 아래에서 문득 끝내지 못한 저녁식사가 떠올랐다. 쓴웃음이 나왔다. 샴푸를 짜서 젖은 머리에 비볐다. 뭉실뭉실 거품이 생겨난다. 그에 따라 아직도 씻어내지 못한 미련이 머리를 뒤덮는다.

 

‘그렇게 가버리다니.’

 

서운하고 화도 났다. 그럼에도 보고 싶었다. 생애 단 하나뿐인 친구였기에 평생 옆에 있을 줄 알았다. 그날 그렇게 나가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떠난 것이다. 유학을 핑계로, 멀리 떠난 것이다. 시원한 물줄기를 따라 거품이 씻겨 내려간다.

 

거품에 미련까지 묻어서 씻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그렇게 훌쩍 떠나버린 친구를 잊을 수 있게 말이다. 연락도 받지 않고, 메일에 답장도 하지 않는 그 녀석을 잊을 수 있게, 야속한 그 우정에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말이다.

 

한숨을 내쉬고 샤워를 끝낸 뒤 욕실을 나왔다. 대충 물기를 닦아낸 몸에 수건을 두르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대체 누가 이런 편지를 보내서 날 심란하게 만드는 건가 싶다. 보라색 봉투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발신인은...? 이상하다. 분명 발신인이 비어있고 수신인에 내 이름이 있었는데 바뀌어 있었다.

 

“수신자가 비어있어?”

 

명하니 봉투를 바라보았다. 마치 수신인을 채워 넣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눈을 돌려 그 마법의 질문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종이에 적혀 있는 그 질문의 첫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세상 누구와도...’

 

한참동안 첫 구절을 바라보다가 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뭐라고 적을까 망설이고 망설이다 한자 한자, 천천히 적어 넣었다. 질문의 아래 빈 여백에, 봉투의 비어있는 수신인에, 또렷하게 적어 넣었다. 더 이상 누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쩌면?’이라는 희망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커튼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방안을 비추고, 잔잔한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보랏빛 봉투에 달빛이 닿는 순간, 허공으로 떠오른 봉투가 열리고 새하얀 종이에 달빛이 반사되었다. 그녀가 적어 넣은 대답이 달빛에 은은하게 반짝이며 드러났다.

 

- 항상 옆에 있을 거라고, 떠나지 않을 거라고,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된 내 가장 소중한 사람 -

 

종이가 봉투 안으로 들어가고, 한줄기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봉투를 휘감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 훗. 답변 접수. 확인했습니다. -

 

보랏빛 봉투는 달빛에 녹아내리듯, 스며들며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에 빗방울 튕기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신발 안은 이미 축축하게 습기가 찬 상태였다. 찝찝하고 피곤했다. 얼른 가서 씻고 싶은 생각뿐이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 길 건너에 있는 한 레스토랑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간판을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횡단보호를 건넜다. 함께 끝내지 못했던 저녁식사, 이 세상 누구라도 초대할 수 있는 기회, 뒤늦게야 알게 된 너의 마음, 너에게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 쏟아져 내리는 이 비처럼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길을 건넌 내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강서원?”

 

급히 돌아보는 얼굴이 낯익다. 나처럼 놀란 얼굴로 우산을 든 채 네가 서 있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 빗물 고인 차도로 차가 달리는 소리, 이 공간에, 이 길 위에, 너와 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망설이는 너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저녁 먹었어? 괜찮으면 여기서 먹고 가지 않을래?”

 

묘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말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의 비 덕분인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젖은 우산은 로비의 우산꽂이 꽂고, 점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커다란 창밖으로 비가 내리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 같이 비쳐진다.

 

우연일까? 그날과 똑같은 자리다. 어째서인지 넌 똑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막상 마주앉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너도, 나도, 가끔 시선을 돌려 창밖만 응시할 뿐이다. 그저 끝내지 못한 과제를 끝내기 위한 것처럼, 서로 아무런 말없이 식사만 했다.

 

결국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저녁식사가 끝났다.

 

가게를 나와 우산을 펼치고 조용히 돌아서는 넌 그날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다. 난 우산을 펴는 것도 잊은 채 너를 따라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네 등에 대고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가지마.”

 

네 걸음이 멈췄다.

 

“가지마. 서원아.”

 

차가운 빗줄기가 몸을 적셨다. 멈칫거리던 네가 뒤돌아본다.

 

“가지마. 가지마. 서원아.”

 

커다랗게 떠진 네 눈에 비에 젖어 울고 있는 내가 비친다. 네 손에서 떨어진 우산이 빙그르르 돈다. 우산을 놓은 네 손이 나를 잡고 끌어당긴다. 나를 품에 안은 네가 그제야 겨우 꺼낸 한마디.

 

“사랑해.”

 

그리고 내가 꺼낸 한마디.

 

“사랑해.”

 

너에게 안긴 채 맞은 비는 시원하고 포근했다.

 

* * *

 

창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젖은 옷 대신에 커다란 수건을 둘둘 말고 쭈그려 앉아서 네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머그컵에 따뜻한 물이 쪼르륵- 담기고,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엣취-.”

 

어느새 다가온 넌 따뜻한 컵을 건네며 작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컵을 받으며 슬쩍 흘겨보았다.

 

“못됐어. 연락도 안 받고, 답장도 안하고.”

 

비죽거리며 나온 불평에 넌 옅은 미소로 빤히 시선을 맞춰온다.

 

“계속 친구로 남을 자신이 없었어.”

 

볼이 화끈했다.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네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중얼거렸다.

 

“바보야. 친구 같은 연인도 있잖아.”

 

“그러게.”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수건에 싸여 안긴 너의 품은 여전히 포근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너의 체취는 달콤하게 퍼지는 코코아 향기만큼이나 행복하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함께 하고 싶다.

 

마법의 질문

이 세상의 누구와도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누구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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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奇

골목길을 돌면

 

골목길을 돌면

 

‘저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아주 가끔 강변도로를 지날 때면 불쑥 이런 생각이 들고는 한다.

저 어두운 강물 건너에는 내가 아는 그런 세상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세상일까?

 

‘어차피 답은 빤한데 말이야.’

 

강 건너 저편이나 지금 내가 있는 이편이나 뻔하고 빤한 세상.

별다를 것도 없고 특이할 것도 없는 세상.

 

‘그래도 아주 가끔은 묘하단 말이지.’

 

멍~하니 저 검은 강물 너머에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 건너에는 어쩌면 내가 모르는 그런 세상이 있지 않을까하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흔히 말하는 이질적인 느낌. 마치 어린아이가 생애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 때 느끼는 그런 막연한 호기심과 설레임과 두려움.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살아가는 게 바빠서 가슴 한구석에 가라앉아 잊어버린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 쓸데없는 망상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릴 때가 되었다. 내가 내린 택시에는 또 다른 손님이 자리를 잡았다.

난 횡단보도에 서서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택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아...춥다.”

 

중얼거리는 내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내 머리에는 아까의 망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골목길, 다리, 건너편...그런 곳이 이계와 이어져있다는 건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실제로 있을 리가 없는...’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피식- 거렸다.

그런 소설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글쎄? 이런 지겨운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에휴. 뭔 한심한 생각인지.’

 

그렇게 정신을 차린 난 내가 걷고 있는 골목길이 내가 알던 그 길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아보았다.

 

“어? 잘못 왔나?”

 

다시 되돌아가려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이건 잘못 온 정도가 아니다.

내가 걸어 온 방향도 내가 걸어가던 방향도 옆으로 새는 골목 없이 쭉 뻗어 있는데 끝이 안 보인다.

 

“뭐야?”

 

더 이상한 건 길 양옆의 집들에 불이 다 꺼져 있는데도 길은 훤하게 보인다는 거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을 알게 되자 겁이 났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앞을 봤다.

 

‘어쩌면 저 끝까지 가면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 또각또각...

 

인적도 없고 가로등도 없는 골목길에 내 구두소리만 홀로 울리기 시작했다.

 

‘제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골목길이 끝나기를 바라면 대체 얼마나 걸었을까?

발뒤꿈치는 얼얼 해오고 볼이 얼얼한 걸 봐서는 눈물도 나는 것 같다.

 

‘엄마...’

 

이건 본능인가보다. 나도 모르게 엄마 생각이 난다. 그때 저 앞에 누군가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저기요. 잠시 만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쫓아가 불렀다. 뒤돌아보는 남자 앞에 멈춰선 나는 가빠지는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에요? 제가 길을 잘못 든 거 같은데...”

 

나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리더니 다시 걸어갔다.

난 그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 다시 쫓아가 붙잡았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냐니까요? 예?”

 

“...”

 

올려다보는 나와 한참 눈싸움을 하던 남자는 곧 손을 들어 내 등 뒤를 가리켰다.

 

“앞으로 10보, 좌로 7보, 우로 5보, 뒤로 돌아 3보, 다시 우로 8보, 뒤로 2보, 좌로 4보.”

 

“예?”

 

남자의 대답에 여긴 샛길 하나 없는 골목인데 대체 무슨 소리냐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본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숨을 들이켰다.

 

‘맙소사! 왜 지나오면서 전혀 보지 못한 거지?’

 

“이게 무슨?!”

 

여태껏 걸어오면서 전혀 보지 못했는데. 너무나 또렷하게 보이는 수많은 골목에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있자 남자는 다시 한 번 길을 알려주었다.

 

“앞으로 10보, 좌로 7보, 우로 5보, 뒤로 돌아 3보, 다시 우로 8보, 뒤로 2보, 좌로 4보. 그러면 다시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골목길을 돌아 걸을 때는 함부로 한 눈 팔지 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나를 두고 남자는 다시 쭉 뻗은 골목길을 말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난 내 기억력이 그렇게 좋았나 싶을 만큼 남자가 알려준 대로 정확히 세면서 걸었다. 그 남자는 마치 내 보폭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좌, 우, 앞, 뒤의 방향에는 해당되는 골목길이 딱 맞게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게 너무나도 낯익은 골목으로 돌아오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눈물이 나왔다.

덕분에 난 코를 훌쩍이며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누굴까?’

 

그날 밤 잠자리에 든 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남자를 궁금해 하다 잠이 들었고 결국 꿈까지 꾸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무슨 내용의 꿈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난 그 이후로 골목길과 다리를 지날 때는 절대 그런 망상 따위를 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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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모음집:愛

어느 비오는 날

 

어느 비오는 날

 

우중충하게 흐린 하늘에서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갑자기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에 길을 가던 사람들은 머리 위로 가방이며 신문을 들어 올리고 달린다.

 

- 쏴~와~

 

비를 피해 달리는 사람들 중에 회색의 트렌치코트를 함께 뒤집어쓰고 있는 남녀가 보였다.

정확히는 남자가 자신이 입고 있는 옷깃의 한 쪽을 여자의 머리 위로 둘러서 우산처럼 비를 막아주고 있었다.

 

새까만 긴 생머리에 붉은 타이트 스커트를 입었고 새하얀 블라우스에는 심플하면서도 독특한 목걸이를 매치했다.

검은 테일러드 자켓에 누드 톤의 힐을 신은 여자의 차림은 모던하면서도 화려하다.

 

남자는 선이 날렵한 네이비 색상의 슈트 안에 옅은 하늘색 셔츠와 검은색의 폭이 좁은 넥타이를 매치했다.

이 빗속에서 여자를 감싸주고 있는 콜드 그레이 색상의 트렌치코트 차림이 단정하면서도 도시적인 느낌이다.

 

비를 피하기 위해 이 남녀가 선택한 곳은 어느 작은 카페의 차양. 그 차양 아래에서도 남자는 여자에게 빗물이 튀지 않게 자신의 옷깃을 잡은 채 한쪽 팔로 감싸 안듯이 비를 막아주고 있었다. 어느새 남자의 옷에서는 비에 젖은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 향 때문일까? 어쩐지 여자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아요.”

 

“어차피 젖었는데요. 그냥 이대로 있죠.”

 

남자는 힐을 신고도 자신의 어깨 높이 밖에 안 되는 여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살며시 웃었다.

여자에게서 나는 향긋한 샴푸 냄새? 아니면 비누 향일까?

 

그런 남자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듯 여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금방 안 그칠 것 같은데요.”

 

“아. 그러게요.”

 

남자가 옷깃을 잡은 채 비를 막고 있던 한쪽 팔을 그대로 굽혀서 여자의 어깨를 안았다.

남자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여자는 꽤 당황한 얼굴이다.

 

“정말 쏙 들어오네요.”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남자의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저음에 여자는 목 언저리까지 벌게졌다.

여자는 뾰루퉁한 목소리로 새침하게 말했다.

 

“내가 작은 게 아니에요. 당신이 큰 거라고요.”

 

어쩐지 뒤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남자의 짓궂은 웃음에 여자는 벌게진 얼굴을 푹 숙였다.

남자는 그런 모습이 더 사랑스럽다는 듯이 좀 더 살며시 꼭 안아주었다.

 

“좋은데요.”

 

잠시 후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지기 시작하더니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이 환하게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순식간에 맑아진 하늘을 여자는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여자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비에 젖은 트렌치코트를 벗어 한쪽 팔에 걸치고는 여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여자는 이내 살풋- 미소 지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 부드럽고 상쾌한 햇살 속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