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어보기

단편모음집

home - 설거지(1)

그릇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적막한 거실 사이의 빈틈을 메꾼다. 손이 벌겋게 달아 오를 때 까지 뜨거운 물로 그릇들을 씻고 또 씻어내었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을 땐 항상 설거지한다. 언제였나 내가 그녀에게 제일 좋아하는 청소가 무엇이냐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넘기며 설거지를 좋아한다고 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집중할 수 있는 일이라 좋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무슨 뜻이고 어떤 이유인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그녀와 나는 한집에서 이불을 나누며 같이 동침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자주 다투었고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말 대신 설거지를 했다. 삭막한 세상에 설거지 소리만 가득 찬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말을 곱씹는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 게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을까. 그렇게 추운 바람이 불고 서로의 사이에서도 바람이 불었고 그녀는 또 설거지를 묵묵히 했다. 화가 난 나는 점퍼와 라이터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고 찬 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불이 꺼질 때까지 불고 또 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땐 그녀는 여전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좁은 어깨가 떨리는 것을 보았고 나는 그녀 옆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를 보았다.? 

울고 있었다. 

뜨거운 온수로 인해 손은 시뻘겋게 달아 올라있었다. 설거지는 끝낸 지 오래였지만 물은 여전히 흘렀고 그녀는 울고 있었고 손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막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목구멍에 누가 알사탕을 끼워 넣은 것처럼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가녀린 어깨를 움츠리며 소리 없이 울었다. 난 소리가 나지 않았고 그녀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 오랜만에 글을 쓰로 왔습니다 ^^_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8 - 6

536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한다면 오랫동안 살아온 생명체에게 가는 것이 맞다. 니드호그에게 가는 것은 언제나 명분이고, 가이로안 씨와 메이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것. 루시피나의 아버지인 드래곤 로드에게 가는 일은 아무래도 꺼려진다. 분명 오자마자 장의어른 타이틀을 내걸고, “손녀는 잘 지내고 있는데 너희들이 힘을 내주지 않으면, 시간적 모순이 일어나니 제발 부탁한다.”라며, 의미심장한 협박을 들여놓을 테니까.

 

어떻게 보면, 루시피나도 나와 같이 잠자리를 드는 것에 명분을 얻은 셈이구나.

레시아도 그렇고...

 

“아빠?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혹시 나도 멤버에 껴있어?”

 

어쨌든 20대 초반의 흑발을 지닌 미녀가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듯이, 짙은 다크서클이 모두 사라질 것만 같은 편안한 얼굴로 응석을 부렸다.

 

“아냐. 니드호그. 그나저나,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긴 하네.”

 

“응. 그런데 아빠 안에 있는 존재와, 머리 위에 있는 검은 고양이는? 첩?”

 

첩이라는 단어에 레시아의 머리에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어이. 용족 꼬마여. 짐을 그리 화나게 하지 말지어다.”

 

검은 고양이가 으름장 놓는 것을 뒤에 있는 다프네와 레오파드도 보았는데. 가끔가다 생각하는 거지만...

 

“너희들은 왜 또 드라고니스에 있는 거야? 스토커야?”

 

“그거야! 당신의 파트너가 이쪽까지 끌고 왔기 때문이잖아!”

 

이번에도 레시아가 조정을 잘못했는지. 아니면, 그냥 데려오고 싶어서 데리고 온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오파드는 눈을 반짝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긴, 이곳은 용기사을 육성하기 위한 장소이지만,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마법에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마법사의 길이 목적이라면, 이런 곳이 있으니 향후에 배움의 터를 고를 때, 이곳으로 하라고 추천하는 거야.”

 

얼떨결에 변명 아닌 변명을 해버렸지만, 베가프의 후손이라면 머릿속에 어느 곳이 더 좋은지, 알아차리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확인해야 할 일은 금방금방 처리를 해야 하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도록 하자.

 

“니드호그. 한가지만 물어볼게.”

 

“유랑극단이라도 부활했어?”

 

내심 당황했다.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하기도 전에, 답을 해버리는 니드호그의 말. 흑색의 비단결처럼 번뜩이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던, 나의 손이 일순간 멈춰버렸다. 그러고는 피식하고 웃으며 “맞네.”라며 말을 흘렸다.

 

“예상한 거야?”

 

“예상했어. 어차피 이곳에는 귀찮은 어린애들 가르치는 것밖에 없고, 마법으로는 이미 모든 것을 통달했는데, 심심해서 아빠를 좀 조사했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와서 말이야. 과거로부터 시작된 비범한 기행에, 시간적인 오차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어마어마한 유랑극단과 투쟁을 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워서.”

 

레시아와 시나는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니드호그가 숨겨둔 비장의 카드의 존재를 알아차렸으니까.

 

“엘티노스를 너무 맹신하는 건 소용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에게 해결방법이 있어. 조금이나마 다른 길을 걸어가면 될 거야. 살짝 비틀어진다면 유랑극단도, 이 바보 같은 전쟁도 끝날 수 있어.”

 

“하지만 사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거든.”

 

“뭐처럼 딸이 적절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아빠는 정말 고집이 강하네. 지금 다른 사람들이 보는 눈 앞에서도, 그 고집을 꺾어 나만 바라보게 만들고 싶을 정도야.”

 

“내 고집은 아다만티움이라 부러질지언정 꺾이지는 않는단다. 그리고 딸아이가 아버지를 탐하다니?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현재진행형으로 뻗어나가고 있든?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은 그리 성장하지 않았구나.”

 

“애정결핍이라서 그래.”라고 말한 뒤. 다시 내 무릎 위에서 고개를 돌려, 내 배쪽을 바라보고는 편안한 한숨을 내쉬었다.

 

레시아는 머리 위에서 부럽다는 오러를 이리저리 내뿜고 있었고, 시나도 내 안에서 [마스터. 당장 저 오만 방자한 여식을 파문해버리세요.]라며 부추기고 있었다.

 

“그 전에 물어볼 것이 있어. 니드호그.”

 

우응?하고 니드호그가 반응을 했다. 내 코트에 얼굴을 힘껏 비비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별 신경 쓰지 않고 입을 천천히 열었다.

 

“지금 유랑극단의 일원이 얼마나 돼?”

 

“각본가, 사회자, 어릿광대, 인형사 총 4명. 맹수 조련사는 다행히 아빠가 여자로 되었을 때, 마음을 고쳐먹어서 설득하기 힘든 것 같고. 핵심인물 외에 유랑극단의 일원이 5천 2백명. 관객 13만명 이상. 지금도 매번 늘어나고 있는 거야. 당연히, 딥웹에서 모두 해킹을 했지.”

 

딥 웹?

오늘따라

 

“바다에서도 표면상 우리가 보이는 것과 다른 심해가 있지 않는가?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는 네트워크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장소가 있는데, 그걸 딥 웹이라고 부른다. 그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사고, 팔 수는 있지만 유랑극단이 그곳을 이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노라.”

 

“어릿광대의 짓이겠죠. 그 녀석은 자신이 삼은 표적을 죽이고, 모든 능력을 흡수하니까요.”

 

레시아가 내 머리카락을 작은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건 짐도 알고 있노라. 주인의 두개골 안에 있는 이건 무엇인가? 우동인가?”

 

“그럼 정확하게 뭘 말씀하시고 싶으신데요?”

 

“관객이 13만명과 일원이 5천2백이라는 사실이다. 딥 웹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지? 그럼 그 모든 일원이 딥 웹을 사용하는 일원이란 소리다.”

 

“많이 위험한 거에요?”

 

그러자 이번엔 내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왠지 기분이 상했다.

 

“그 안에 가득 차오른 것은 야쿠루트라도 되는 것인가? 헬리코박터 프로젝트를 주인의 두개골 속에서 하기 전에 잘 알아들을지어다. 딥 웹을 이용하는 목적이야 말로 불법과 관련된 일이 대다수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유랑극단을 모집하는 일이야 말로 수면 밖에서 할 수 없는 행위다. 하지만 지금 관객이 13만명과 일원이 5천2백이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유랑극단과 뜻을 같이하는 자가 적어도 13만 5천 2백이라는 소리니라. 2만대군도 많아서 눈에 가늠하기도 힘든데 13만명씩이나 있는 거다. 문제는 그 13만명 모두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딥 웹을 이용하는 정체불명의 권력자거나, 범죄조직, 해커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것이지. 짐의 말을 말미암아 무슨 뜻인지 아는 것인가?”

 

사람의 머리가 왜 야쿠루트로 되어있는 건데? 적어도 연상퀴즈를 하려면 생각할 시간을 좀 주던가?

 

이번엔 아무 말 하지 않고 결론을 도출하는데 20초라는 시간을 소비했다. 그리고 두뇌가 추론한 결론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딥 웹을 이용하는 1명의 회원이, 기존 1명이 아니라 대다수의 단체를 거느리고 있는, 단체장이라는 거죠?”

 

“13만명 이상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13만이라는 숫자는 어느 사이에 130만명이 될 수 있고, 1300만명이 될 수 있다는 소리가 된다. 거기에 유명한 귀족과 정치인까지 유랑극단의 소속이라면, 지금쯤 비밀리에 사도교들 마냥 집회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노라. 어쩌면 우리는 유랑극단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간대에 들어서서,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뒷일은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숨가쁜 현실에 베어나가리라.”

 

예언을 읊듯 레시아의 목소리가 끝이 나고, 니드호그는 여전히 내 무릎 위에서 응석을 부리고 있는 와중에도, 머릿속에 회전축은 계속 돌아간다. 그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뿐더러, 지금은 저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300년 전에는 유랑극단의 존재를 그나마 와해시킨 세력이 있었지만, 지금은 견제 받을 세력도 없고 물주고 햇빛 주면 잘 자라나는 잡초마냥, 무성하게 자라나버려서 어디부터 건드려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시대를 잘못 온 거야.”

 

니드호그는 무관심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러니까. 뭐.”

 

나는 담담하게 니드호그의 말을 받아 쳤다.

시대를 잘못 온들 그건 내 탓일 뿐이다. 어차피 해결할 방법은 수많은 방법이 있는데, 형편과 제약, 그리고 내 후손을 생각하기에, 어처구니 없는 계획은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지우는 거다. 손익에 관계없이 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이 대륙을 멸망전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나의 시대가 아닌, 후손들이 자라나고 번창해야 할 시대.

그러니 나는 최대한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사회자와 인형사가 새로 왔어. 그 외에 어떤 미친 녀석들이 영입될지도 몰라. 이곳에 찾아와서 잘못 왔다는 생각은 수도 없이 많이 했어. 지금 당장이라도 바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과 준비를 하면, 돌아갈 수 있으나...이미 늦었어.”

 

“나를 만나버렸으니까.”

 

니드호그는 쓸쓸하게 입을 열었다.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으면, 후손에 대한 명확한 증거 없이 스쳐 지나갈 수 있겠으나 루시피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러니 니드호그를 만나고 이 세계를 지키기로 마음먹었을 뿐.

 

게다가 저 뒤에서 신기하게 견학하고 있는 베가프의 후손도 만나버렸으니, 내 친구의 후손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마스터. 우리에겐 대체 어떤 수단이 있는 겁니까?]

 

마음속으로 결단을 내리자. 시나는 의도라도 한 듯 타이밍 좋게 말을 걸어왔다.

 

[수단은 많지만 모두 희생을 감내해야 해. 처음에는 무대 자체를 박살내자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허용하지 않아. 주연배우를 모두 제거해야만 해. 그게 가장 최선의 방법이겠지.]

 

[제거라고 함은?]

 

[당연히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그 일을 포기하도록 유도하거나. 두 번 다시 그 일을 진행할 수 없도록 해야 해. 그래서 내려진 결단이라면...]

 

[결단이라면?]

 

각본가를 제거하는 수 밖에 없다.

더 나아가 차기 각본가가 나오지 않도록 예방까지 하면서, 각본을 모두 불태워야 그 바보 같은 일을 안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각본가를 처리하죠.”

 

“주인의 입에서 누군가를 처리하자고 말할 때마다 섬뜩하게 그지 없군.”

 

레시아는 투덜거렸지만 내심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

 

“하지만, 유랑극단은 너무 커버렸다. 각본가의 존재는 대체 어디서 찾을 것인가?”

 

“아뇨. 각본가는 이미 천계에 있어요. 어릿광대가 레이베리아라고 죄다 실토를 했으니까요.”

 

엘티노스를 만나러 온 나를 내친 것도, 어릿광대가 실토한 내용에는 레이베리아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레이베리아의 각본 중. 천마전쟁에 관련된 소식은 모두 눈속임. 유랑극단의 일이 최대한 늦게 알려지기를 기도했다.

 

“드디어 주인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하는군.”

 

그리고 천계로 진입할 수 없는 난, 레이베리아에게 있어선 최고의 골치덩어리가 사라지게 된 것이지.

 

“엘티노스도 지금쯤 천계에 가야 하는데,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가끔가다 샤이어에게 부탁을 하고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천계에 갈 방법이 없다면, 아버지는 평생 각본가를 처리하지 못해.”

 

니드호그는 내 말에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우르륵 무너지는 순간도 있지만, 태연하게 니드호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으니.

 

“적어도 이 아버지는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단다.”

 

“그럼 오늘밤 아버지가 여장을...”

 

“차라리 나더러 세계를 재창조하라고 해라.”

 

신경 써서 자상한 말을 했더니, 니드호그의 욕망에 가득 찬 한마디를 잘라야 했다.

 

“흐응. 쉽지 않네.”

 

 

부드럽고 듣기 좋은 노곤한 목소리를 흘려보낸 니드호그는 잠에 빠졌다.

=============================================================================================

피곤함의 두통...

너무 싫은 것...

글 이어보기

짧은 글 모음집:奇

시궁창 같은 현실, 꿈같은 허상

가파른 오르막길에 자리한 달동네, 그 곳의 가장 꼭대기 계단 옆이 우리 집이었다. 해도 뜨기 전의 이른 새벽이 되면 어머니는 이미 집을 나서고 계신다. 우유배달, 신문배달, 낮에는 식당 설거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신다. 나와 여동생의 학비 그리고 우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악착같이 일을 하셨다.

 

어머니가 어떻게 벌어온 돈인지 알기에 나와 여동생은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성적도 좋았고 학교에서의 평판도 좋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학교를 다닐 수 있을지 항상 불안해야했다. 잊을 만하면 술냄새와 담배에 찌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나서 어머니가 숨겨둔 돈뭉치를 찾아내는 그 인간 때문에…

 

그날은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던 중이었다.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뛰어서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다시 한 번 비명이 들렸다. 급히 뛰어가는 눈앞에 문을 열고 나온 아버지와 마주쳤다. 그 인간의 눈동자가 심히 떨리고 있었다.

 

손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팔꿈치 아래까지 시뻘건 피가 흥건했다. 그대로 도망치는 그 인간을 쫓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쓰러진 여동생과 어머니, 바닥에 고여 있는 피, 급히 119를 불렀지만 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난 목격자나 피해자가 아닌 용의자가 되었다.

 

내가 아니라고, 어머니와 여동생을 죽인 건 내가 아니라 그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하지만 그 인간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잡히지를 않았고, 목격자도 없었다. 게다가 경찰은 사건을 빨리 끝내고 싶은 눈치였다. 끝까지 부인했지만 소용없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외쳐도 소용없었다. 돈 없고 힘없는 게 죄였다.

 

살인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나날은 희망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잘 뿐이다. 순식간에 타버리고 시커멓게 남은 재처럼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그렇게 숨만 쉬며 살았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하지만, 억울하다. 너무도!

 

“이봐, 편지다.”

 

“편지?”

 

교도관이 내미는 편지를 받아서 뜯었다. 새하얀 편지지에는 <D프로젝트 : 초대장> 이라는 말이 제일 먼저 적혀있었다. 초대장이라니, 잘못 온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적힌 이름은 분명 내 이름이었다. 죄수번호와 이름은 분명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갈 수도 없는 나를 말이다.

 

“대체 D프로젝트가 뭐야?”

 

퉁명스레 중얼거려도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다. 편지지에도 자세한 내용 없이 그저 ‘당신에게 두 번째 인생을 드립니다.’라고만 되어있을 뿐이다. 두 번째 인생,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내 결백을 밝혀서 여기서 나가 새출발을 하게 해주겠다는 건지, 아니면…모르겠다. 다른 건 생각나지 않는다.

 

“두 번째 인생…”

 

가능할까? 그런 게? 나에게도 아직 기회라는 희망이 있는 걸까?

 

초대장에 서명을 하고 편지에 지명되어있는 교도관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불안하고 들뜬 맘으로 기다렸다. 누군가 날 찾아올까,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얼마나 걸릴까, 새출발을 하게 된다면 뭘 할까, 공부를 다시 할 수 있을까, 수십, 수백, 수천, 수만의 생각이 돌풍이 되어 휘몰아친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삼일…일주일, 열흘, 보름이 지나 한 달이 되었을 즈음. 어쩌면 그저 누군가의 장난이거나 헛된 기대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깊어졌다. 기대와 희망은 불신으로 얼룩져버렸다. 역시 나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새겼다.

 

이미 진작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고약한 장난에 울분이 생기는 걸 보면 그래도 미련이 남았던가 보다. 쓴물이 입 안 가득 퍼지는 기분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사형 집행날짜가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 문득 나를 위해 슬퍼해줄 사람은 없지만, 먼저 떠난 어머니와 여동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눈이 가려진 채 몇 년을 보낸 철창 안에서 나왔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울리는 복도를 지나고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이대로 죽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아득한 정신으로 이제 곧 어머니와 여동생을 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오빠. 오빠-!”

 

어딘가 앙칼진 반가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떴다? 죽지 않은 건가?’

 

눈앞에는 새초롬한 표정의 여동생이 교복을 입고서 팔짱을 끼고 눈을 흘기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더 자면 지각이거든~?”

 

내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덩달아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동생을 빤히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혼자 사용하기에 적당한 크기의 방, 발치에는 깔끔한 옷장과 서랍장에 전신거울이 있고, 여동생이 서있는 뒤로는 책장과 책상, 방문이 보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앉아있는 푹신한 침대!

 

침대의 왼편은 넓은 창문이 있고 옅은 하늘색의 얇은 커튼 너머로 햇살이 눈부시게 비춰든다.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아니면 여기가 천국인 건 아닐까?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고 어머니를 찾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서 부엌을 들여다본 순간 몸이 굳었다. 어머니가 단정한 차림으로 앞치마를 두르고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오빠, 왜 그래? 어디 아파?”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여동생의 호들갑에 어머니가 놀란 얼굴로 뒤돌아보았고, 등 뒤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냐? 무슨 일이야?”

 

“아빠, 오빠가 아까부터 이상해. 꼭 넋 나간 사람 같아.”

 

천천히 고개를 돌린 시야에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 나를 그 지옥으로 떨어뜨린 사람, 나의 아버지.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손에는 아침신문이 들려있고, 안경을 낀 얼굴은 언제나 도박과 술, 담배에 찌든 모습이 아니었다. 너그럽고 온화한, 전혀 다른 분위기라 당혹스러웠다.

 

“괜찮은 거냐?”

 

혀가, 입술이 제대로 움직여주지를 않는다. 겨우 떠올린 대답을 간신히 내뱉었다.

 

“괘, 괜찮아요. 그냥, 그…악몽을 꿨어요.”

 

황급히 계단을 뛰어올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뒤쫓아 온 여동생의 재촉에 얼떨떨한 상태로 씻고 나와서 교복을 입고 가방을 챙겼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여동생과 나란히 집을 나왔다. 작은 마당이 있는 붉은 벽돌 담장의 2층 가정주택, 주변의 집들도 비슷하게 생겼다.

 

“오빠, 늦었어. 뛰어.”

 

“어? 응.”

 

상쾌하다. 보고 싶었던 여동생과 나란히 달리는 아침이 너무도 상쾌하다.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신나게 달리며 웃는 나를 보고 여동생은 다시 한 번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교문이 닫히기 직전,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교실에 들어서자 다들 익숙하게 인사를 건네며 반겨주었다.

 

꿈꿔왔던, 바라고 바래왔던 하루하루를 보내며 생각했다. 이게 나의 인생이라고, 이게 바로 나의 두 번째 인생이라고, 그 이전의 것은 악몽이었다고, 두 번 다시 그런 인생을 살지는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행복하고 즐겁게 열심히 살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 * *

 

투명한 뚜껑이 덮여있는 캡슐의 안에 한 남성이 누워있다. 캡슐 옆에는 작은 모니터와 입력장치가 연결되어 있다. 하얀 가운을 입은 한 여성이 긴장한 티가 팍팍 나는 남성 인턴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캡슐 옆면에 있는 명패는 안에 있는 사람의 신상정보에요. 이 사람은…누명을 쓴 사형수였군요.”

 

여자의 말에 남자의 입모양이 아-하고 작게 움직인다. 그때 삑- 소리가 나며 캡슐과 연결된 모니터가 깜빡거린다. 여자와 남자는 작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까만 화면에 녹색의 글자가 나타났다.

 

[ O.K ]

 

짧지만 확실한 의사전달, 여자가 설명하지 않아도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가상세계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걸 말이다. 하긴,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느니, 바라마지 않던 이상향에서 한번의 인생을 더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다.

 

비록 그 이상향이 허상일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사실을 모른다면 그에게는 진실이 되지 않을까?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8 - 5

535

 

 

 

전송된 곳은 어디인지 모르는 옥상, 싸늘한 칼 바람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디부터 잘못 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생각의 늪지대에 잠수를 하고 있는 기분, 이러다가 익사라도 하지 않을까? 아니, 익사를 했다면 이미 10번은 더 죽었으리라.

 

“저기. 카린 님? 어릿광대라니? 웨인즈 씨는 어떻게 된 거야?”

 

아직까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내 뒤에서 떠드는 테일즈.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마법사라서 정신은 성숙했을 거라 봤는데, 고생은 하지 않고 곱게 자란 것처럼 보인다. 하긴, 이곳은 노예제도도 없는 것처럼 보였고,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살아가고 있는 장소.

 

암묵적인 신분제도라고 부자와 서민뿐이다. 게다가 전쟁을 하지 않았다면 저런 반응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나는 300년전의 인간.

절대로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도플갱어를 통해 자신이 비추어진 사람은 모두 죽었겠지. 어차피 어릿광대녀석이 살려주지 않을 거야. 그전에 너희들은 대체 왜 따라 온 거야?”

 

“그거야, 저 앞에 있는 신사분이 우리까지 구해줬으니까 그렇지! 아니 마왕님이었던가?”

 

레밍즈는 상황을 그나마 인지하고 머릿속에서 정리하려고 했다만, 지금 내 직감상으론 아주 초기단계부터 추측하고 있겠지.

 

“레시아. 비상사태에요. 계약서를 찢고 저를 본래 모습으로 되돌려요.”

 

레시아는 나의 뒷모습만 봤지만, “알았다.”라는 말과 함께 종이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통각과 현기증으로부터 몸이 굽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고통도 익숙한 나머지, 난간을 잡고 버티면 기절하지 않는 복서들처럼 꿋꿋하게 일어날 수 있다.

 

“짐도 오랜만에 돌아왔구나. 남자의 몸은 잡다한 생각으로 불편하군. 오히려 이 편이 더 상쾌하고 자연스럽노라.”

 

어느 사이에 소녀였던 사람이 청년으로, 청년이었던 사람이 소녀로 변해버렸으니, 테일즈와 레밍즈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아무 말도 못했다. 어쨌든 멍하니 있는 저 둘을 내버려두고, 시나까지 나와서 눈과 같이 내려온 소녀가 내 옆에 붙었으니, 3명이서 회의를 조촐하게 진행을 하도록 하자.

 

“마스터. 비상사태라 하심은?”

 

“이번 천계와 마계의 전쟁이 조작되었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걸 유도한 게 유랑극단일 가능성도 커. 사회자도 새로 구해왔다고 하고, 새로운 멤버도 고용하고 있다고 보면, 아직까지는 초동조치를 취할 수 있을 거야.”

 

“자, 잠깐만? 너희 셋이 이야기 하지마! 우리는 뭐가 되는데?”

 

그리고 나는 냉철하게 판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웨인즈로 변장한 어릿광대에게 속아 넘어갔다. 그건 피해자이지만, 어릿광대는 월식이라는 존재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살려놓은 걸 보면, 유랑극단의 멤버가 되려고 했을 거야. 어차피 연기로 속이는 건 어릿광대가 잘 하니까.”

 

말을 끝마치고 결심을 하자. 환도가 튀어나와 그 둘을 향해 걸어갔다.

 

“자, 잠깐? 무슨 짓이야!”

“우, 우리를 죽이려는 거야?”

 

구태여 말하지만...

 

“우리도 마법사야! 반항도 못하고 죽을 거 같아?”

“지금 당장이라도 불덩이를 맞기 싫으면 멈춰!”

 

“나는 멋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아.”

 

조잡한 마법이 나를 해하려고 했지만, 상관없이 빛의 방패 하나가 수호하기 위해 나타났다. 게다가 나는 저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키려는 것뿐. 어릿광대의 말에 오염이라도 당했을 것 같으니, 현실을 자각시켜주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하얀 실선은 그들의 옷을 살짝 긁으면서 지나갔다. 그리고 팔뚝에 있는 움막을 표현한 듯한 붉고, 푸른 물감을 사용한 문신. 이미 이들은 유랑극단에 초대를 받아버렸다.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은 없게 된 것을 깨닫고, 검을 허공에 분해시키고 빈손으로 레시아에게 걸어갔다.

 

“이제 어쩔 생각인가? 주인이 말하던 초동조치를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레시아의 말대로 언제나 초동조치를 하기 위해, 만에 하나 작은 확인을 했을 뿐이지만, 하얗고 여린 팔뚝에 유랑극단을 표기하는 문양을 보고, 정신을 놓으며 절망에 빠질뻔했다.

 

“정말 뭐야! 터무니 없어!”

 

본래 죽이려고 했지만 살려줬더니, 뒤에 있는 레밍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사람들의 생각은 남들보다 언제나 자신이 우선순위로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도가 지나치지 않을까 경계를 했는데.

 

“이건 웨인즈가 직접 새겨줬어! 웨인즈를 만나서 우리들만의 표식으로 갖자고! 하지만 네가 전부 빼앗아간 거야! 네가 우리들의 일상을 망쳤다고! 웨인즈는 살아있어!”

 

뻔뻔함에도 정도가 있지만, 저들은 웨인즈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니, 좀 더 나아가서 일부러 웨인즈라는 가명을 이용해, 그들에게 접촉한 어릿광대의 잘못이다.

 

그들이 얼마간의 유대를 쌓았는지 몰라도, 지금은 내가 증오스러운 것일까? 아니면 혼란이 머리에 가득 차서 스트레스를 풀어야만 할까? 그러나 레시아와 시나, 그리고 테일즈까지 그녀를 보고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테일즈.”

 

“네.”

 

소년은 무덤덤하게 내 말을 받았다.

 

“그 팔뚝에 있는 건 스티커로군.”

 

“맞아요. 이 스티커는 웨인즈가 어린애는 문신을 할 수 없으니, 떨어지지 않는 스티커를 준다고 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그 사람이 웨인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설마...둘이 사기를 쳐서 우리를 농락해왔다는 혐의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죠?”

 

요즘 어린애들은 영리해서 탈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300년 뒤의 어린애들은 의심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나와 어릿광대가 사기를 쳤다면, 이런 자리에 내가 오지도 않았을 거야.”

 

말 그대로 어릿광대가 날 부르는 일도 없었으리라. 만약 어릿광대와 같은 편이었다면, 오히려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어릿광대는 보고만 하고, 나는 다른 한 구석에서 사건을 벌일 준비를 했겠지. 지금부터 과거로 돌아가 평화롭게 조용히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사건은 해결하고 가야 후손들이 잘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다.

 

“다프네와 레오파드였지?”

 

“......”

“......”

 

둘이 실명으로 불렸다. 자신을 속일지도 모른다는 남자에게 불리는 호명이란,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겠지. 하지만 나 또한 밝혀서 그나마 없던 신뢰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내 이름은 카일이다. 엘티노스 잡화점의 주인이지. 의뢰가 필요한 것은 너희들일 터. 그러니 의뢰 내용을 말해보거라.”

 

양 옆에 레시아와 시나는 차분히 지켜보기만 했고, 다프네와 레오파드는 서로 눈치만 보다가 결정을 했는지 입을 열었다.

 

“이 문양을 지워줘.”

 

“받아들이지.”

 

시나와 레시아가 각각 두 사람의 팔을 붙잡고 저주를 풀었다. 하나는 빛에 그을려서 끔찍한 고통을 받아야 했고, 다른 하나는 살이 문드러져서 떨어져 나갔다. 끔찍한 고통의 비명은 하늘이 닿을 정도로 울렸지만, 엘릭서를 몇 방울 떨어뜨리니, 살이 급속도로 재생했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간단하게 제거했다.

 

“마법까지 쓸 필요는 없다. 이 문양은 단언하지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레시아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도록 하죠.”

 

“하지만, 아무래도 유랑극단에 ‘인형사’를 받아들인 듯 하구나.”

 

사브누아가 300년까지 살아 움직일 수는 없다.

그러면 또 다른 인형사라는 소리일까?

 

“사회자에 인형사. 나중엔 곡예사도 나오고 별 이상한 애들이 다 나오겠네요.”

 

상황은 내가 예상한 것을 뛰어넘어 악화된 상태. 어쩌면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일은 너무 많이 진행되었을까? 아직까지도 고통에 시달리는지 이를 악물고 서있는 다프네는, 상의에 입었던 운동복 하나를 벗어 던지자, 정중하게 보이는 검은 여성용 정장이 눈에 띄었다. 어쩐지 운동복을 살짝 베었을 때, 뭔가 무겁다고 생각했더니.

 

“도련님. 이제 다 되었습니다. 그만 돌아가시죠.”

 

“아냐. 아직이야. 다프네. 조금만 더 기다려. 나는 저 사람에게 확인할 것이 있어.”

 

 

확인이라는 말에 다프네와 더불어 우리 3명도가 궁금증에 빠졌다. 소년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엘티노스 잡화점이라면 내 할아버지께서 이야기 해주신 게 있어. 게다가 카일이라는 이름은 우리 조상님의 친구였다는 것도! 그러니, 그 이름을 잘 기억하다가 만날지도 모르니, 잘 처신하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제서야 만났다고!”

 

“너희 조상님의 이름이 뭐지?”

 

내가 물어봤더니 그 소년은 자신의 자랑인 듯 입을 열었다.

 

“베가프. 신성 아우리온의 위대한 교황. 그리고 나는 아우리온 공화국의 바티스트 아우리온의 차남. 레오파드 아우리온이야.”

 

신성 아우리온이. 아우리온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이름을 장식할 성으로 이어받았다는 소리인가?

 

“언제 교황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친구는 잡화점이나 힘겹게 운영하고 있는데, 내가 떠밀어준 상승곡선을 그리며 마지막까지 출세를 하다니.”

 

어째서 베가프의 후손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아마, 교황으로 취임한 이후에는 신탁이 내려진 성녀나 후보생 중 하나가 교황의 아이를 품는 규칙이 있다. 대주교까지는 여자들과 몸을 섞으면 안 되지만. 아마, 베가프 입장에서는 여신이 내린 선물이 아니라, 처음으로 여신에게 배신당한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순수한 청년이니까.

 

“만나서 반갑군. 레오파드 아우리온. 하지만 이곳에서 공화국의 수도까지는 꽤 멀어.”

 

“나는 파이론에 땅 하나를 사두고 집을 지어 생활하고 있으니까. 애초에 신성력이나 종교에는 관심이 없어서, 세상에 열악한 직업 중 하나인 마법사의 길을 걷고 있는 거야.”

 

“베가프가 알면 꽤 대견하다고 생각하겠군.”

 

레오파드의 말을 듣고 머리에 스쳐 지나간 감상을 말하자.

 

“정말이야?”

 

마치 어린애가 긍정을 바라는 듯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베가프도 나처럼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갔어. 뼈아픈 시련이 그리 만들었지만, 어쨌든 어린아이 치고는 꽤 당돌하군.”

 

지금까지는 ‘어린애는 역시 어린애인가?’했는데, 영악한 소년 내 칭찬에 살며시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가 영악하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더 나아지는 건 아니란다. 충고 한마디 하겠지만 어릿광대의 독은 선동과 연기 그 자체야. 어릿광대에게 접촉을 당하면 당할수록 정신방어에 따라, 짧으면 30분만에 어릿광대에게 농락당할 수도 있지. 그나마 감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너는 그래도 아직까지 선동과 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거야.”

 

“그러면 어릿광대를 구별하는 방법이 있나요?”

 

“아니. 솔직히 도플갱어라는 몬스터를 구별하려면 꽤 힘들어. 게다가 월식의 힘을 이어받았으니 정글에 있는 뱀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해.”

 

나도 가면이 없었다면 큰일날 뻔했다.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세계를 하나 창조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게도, 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보류대상이 되었으니까. 유랑극단이 부활한 시점부터 또 다른 해결방법을 찾아야 한다.

 

“니드호그에게 가봐야겠네요. 드라고니스로 당장 가도록 하죠.”

 

내 결정이 떨어지자마자 레시아가 공간이동 마법을 펼쳤고, 시나는 내 몸 속에 동화한 상태로 같이 이동했다.

 

 

일이 잡히지 않을 때는 역사의 산 증인을 만나고 이야기해야지.

=============================================================================================

많이 추으니 조심하세요.

글 이어보기

발레타

발레타 1-(1)

불규칙한 해안선 넘어로 바다를 향해 길쭉하게 돌출된 스케베라스산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모래색과 가까운 거친 느낌의 산, 바다와 함께 지난 세월을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힘차게 물살을 가르는 성 안나호 갑판에 서서 발레트는 그 산을 응시했다.
로도스 섬을 나온 후 8년간의 방랑끝에 간신히 오게 된 곳.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없었던 비통한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로도스 공반전 이후, 1530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몰타 섬의 영주권을 내어 주기까지
성 요한 기사단은 8년간 지중해상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시칠리아 섬을 위한 보루로 자신들을 이용하는 것을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근거지없이 더이상 기사단이 존립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사단장 필리프 드 릴라당은 카를 5세의 정치적 이용이 뻔히 보이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사단을 이끌고 지중해의 중앙 몰타로 향했다.
발레트는 로도스 섬을 나오던 날을 떠올렸다.
오스만의 쉴레이만과 기사단장 릴라당간의 긴 협상 끝에 성 요한 기사단은 200년간 그들이 지켰던 곳을 떠났다.
둔탁한 북소리가 울리고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성 요한 기사단원들은 십자가 깃발을 들고 당당히 걸었다.
그들은 끝까지 위엄을 잃지 않았고 오스만 군대는 예우를 보였다.
눈을 감은 채 몇 분이 지났을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의 눈이 떠지고 과거는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뒤를 돌아보니 기사단장 릴라당이 서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나.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더군."
"아, 잠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장님"

 

발레트는 자신의 생각이 들킨 것 마냥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릴라당은 바다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말을 이어갔다.

 

"8년 만이군."
"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나. 로도스를 떠나온지 말이야."

 

발레트는 대답 대신 릴라당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코와 그 밑으로 우직하게 닫힌 입술이 보였다.
강인한 인상 뒤로 그의 눈은 바다 넘어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 했다.

 

"앞으로 더 힘들어 질걸세."
"알고 있습니다."
"우린 뒤로 물러날 곳이 없네, 반드시 이 섬을 지켜내야만 해.
 그 어느 곳에서도 이제 대의는 찾아볼 수 없네. 신념은 사라졌어.
 군주들은 오직 영토 확장에만 관심이 있고
 지중해는 그들 머리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야.
 우리는 지금 지중해의 한복판으로 가고 있는 걸세.
 오스만의 끝없는 야망을 여기서 끊어야 하네."

 

로도스 섬을 떠난 후 릴라당은 유럽의 군주들을 만나 기사단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해 주기를 청원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군수 물자를 조달해 주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군주들은 지중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루살렘 해방을 위해 십자가 깃발 아래 하나로 뭉쳤던 신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1500년대 초의 유럽 군주들은 성지 탈환같은 팔레스타인 문제는 고리타분하게 여겼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왕권 강화였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도 성 요한 기사단은 로도스 섬 공방전 이후에도 유럽 전역으로 흩어지지 않고 8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근거지를 찾아 헤맸다.
그들은 기사 정신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봉건 시대 마지막 기사들이었다.
십자가 앞에 맹세한 신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발레트는 릴라당의 강인한 옆얼굴을 응시하며 힘주어 말했다.

 

"성 요한 기사단에 제 남은 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몰타는 로도스와 같지 않을 겁니다."

 

릴라당은 발레트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흰 수염으로 뒤덮힌 그의 얼굴은 8년간의 떠돌이 생활을 증명하듯 피곤하고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주름 잡힌 두 눈에선 여전히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자 릴라당은 발레트의 곁을 떠났다.
뱃머리는 마르삼세트항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스케베라스산 옆, 움푹 들어간 모양의 마르삼세트는 지중해의 모든 배들이 모이는 몰타 최대의 항구였다.
크고 작은 상선들과 돛이 여러 개인 대형 갈레온선이 보였다.
발레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덥지근한 지중해의 공기가 그의 폐 깊숙이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몰타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성 안나호는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멈춰섰다.
발레트는 지중해의 중앙, 몰타에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8 - 4

534

 

 

 

사람이 많이 놀라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인간만이 살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달라. 이 말은 엘티노스가 행하려는 계획과 일치했다. 아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만, 한가지 문제점은 웨인즈라는 사내가 레이베리아에게 선택 받았다.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몰라도, 사실상 내 적이나 다름이 없을 텐데.

 

“인간만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는 범위라면?”

 

“오직 인간만이 있는 세상을 말하는 겁니다. 몬스터라는 개념도 없고 오직 인간들만이 존재하는 세상.”

 

나에게는 디스토피아였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잡화점 멤버가 대부분 사라지는 삶을 사는 것과 다를 게 없고, 내 기준이 아닌 공통의 기준점으로 보았을 때, 몬스터가 있으니 경제요인 때문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점이 있다는 것.

 

새로운 일자리는 계속 있지만, 300년 뒤에 몬스터가 사라지지 않아서, 아직까지 모험가를 찾는 인터넷 게시판이 많이 떠돌아다닌다. 이는 마리아와 같이 확인한 결과로 엘프들이 있어야지만 즐길 수 있는 관광명소라던가, ‘극한직업! 고블린 부족장편’과 같이 어처구니 없는 것들마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누가 고블린 부족장으로 직업을 삼은 걸까?

 

“인간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말은 나에게 넌센스야. 마리아에게 부탁을 해서 너희들만 차원이동을 시켜줄 수 있지만, 검은 달의 여왕에게 맹약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네.”

 

웨인즈는 안경을 번뜩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이 안경 밖으로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아뇨. 저희는 잡화점 주인에게 빚을 많이 지지 않고, ‘협력’을 통한 일의 성취를 얻고자 하는 바입니다. 지금 그 말을 그대로 이행하게 되면, 저희 3명의 의뢰만 성공하게 되겠지만, 이곳에 남아있는 마법사들은요?”

 

“그때는 나에게 직접 찾아오라 해야겠지. 나는 인류의 방패라던가 그런 거창한 사람이 아냐. 잡화점의 주인일 뿐이라고. 잡화점 알지? 그냥 잡다한 물건들 싼 가격처럼 내놓은 다음에 비싸게 바가지 씌우는 거. 그게 바로 나야.”

 

고작 잡화점 주인이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내 기분에 따라서 하고 안하고가 결정된다. 그전에 나는 이들을 만나고 결정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의뢰 내용만 듣고 빠져 나와도 별 상관없는 일이다.

 

애초에 레이베리아의 사자가 되어 나를 만난다는 그 자체부터, 뭔가 기묘하게 잘 맞지 않는 부분이지만 아마 저 두 명도, 천사던, 여신이던, 마족이던 누구에게 힘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마법사이면서도 천계, 마계를 대표하는 싸움꾼들.

 

모두가 책상에 앉아서 숨죽이고 나와 웨인즈의 대화만 듣고 있었다. 실질적인 계획도 없을뿐더러 인간만 있는다고 해서, 세상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몬스터가 없어진 그 날, 그리워하며 씁쓸한 입맛을 다시다가, 그렇게 잊고 적응해서 세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뿐.

 

“하긴, 공존을 좋아하시는 카린 님께는 반감을 살 수 있는 말이군요. 인간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은, ‘지금 인연을 모두 다 끊고 우리에게 오라.’라는 말이니까요.”

 

“잘 아니까 다행이군.”

 

“그러면, 의뢰 내용을 바꾸겠습니다. 인간들이 주인이 되는 세계. 그거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정정해야 할 것이 있다.

이 남자와 엘티노스의 뜻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엘티노스는 인간들이 천계와 마계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힘을 길러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천계와 마계를 몰살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능력자라는 존재를 만들어 인간의 세력을 강화하고, 상대적으로 커졌으니 지금 천계와 인간의 세력을 줄이기 위해 견제를 하는 거고, 이미 엘티노스와 모든 입이 다 맞춰진 마계에서는 그러는 척 하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웨인즈는 인간이 모든 생물의 중심이 되어 움직이겠다고 하는 소리이니, 몬스터나 천계, 마계도 모조리 파괴할 심산으로 활동하려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저희들이 막 나가자는 건 아닙니다. 단계라는 것이 있지요. 그 과정에서 카린 님의 힘이 꼭 필요한 것뿐입니다.”

 

냉소하고 계산적이며 높낮이가 없는 어조. 그리고 차갑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눈.

 

“세계를 창조할 수 있지만, 인간의 한계로는 그 능력이 제한되어있죠. 그러니 누군가는 창조신이 되면 그만입니다. 새로운 신이 되어서 지금 눌러 앉아있는 창조신을 배척하면, 그야 말로 인간을 위한...”

 

“억지로군.”

 

더 이상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네가 한 소리를 비슷하게 한 녀석이 있었지. 자신이 초월체가 되어 창조신을 공격하기 위해, 억지로 시간 축마저 엇나가게 하는 시건방진 녀석 말이야.”

 

분노가 힘껏 솟아오르니 감당할 수 없는 듯, 내 몸이 작게 떨리는 것쯤은 알았지만, 이 말만큼은 해야 했다.

 

“잡화점의 주인이 하는 일은 세상을 바꾸는 게 아냐. 나도 천계와 마계가 이번 일로 난장판을 부리길래, 세계를 억지로 혼돈에 빠뜨려서 천계, 마계 그리고 중간계가 하나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려고 했지. 그래서 너희들을 만나러 온 것뿐인데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군. 인간들만이 있는 세상이니, 인간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니. 네가 하는 소리는 전부 이상향일 뿐이야.”

 

“인간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뭐가 그리 나쁘다는 겁니까?”

 

“너는 레이베리아의 사도잖아. 능력을 이어받았다면서? 아냐. 너는 기만자야. 진짜 웨인즈는 어디에 있지?”

 

진짜 웨인즈가 어디 있냐는 말에, 테일즈와 레밍즈, 그리고 레시아마저 동요하기 시작했다. 혹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영 모를지도 모르겠다만,

 

“깜빡 잊고 있었어. 네가 준 물건에 대해서.”

 

회색코트를 손에 넣고 물건을 빼냈다.

오래 전에 받아냈던 어릿광대의 가면.

지금 300년이 지난 미래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헤? 어디서부터 안 믿었던 거지? 자기야? 레이베리아의 사도라는 점부터?”

 

“아니. 네가 나와 레시아의 본질을 꿰뚫었을 때부터. 그리고, 레이베리아의 능력이 레이베리아에게 먹힐 리가 없잖아?”

 

“처음부터 나를 안 믿고 추려나가면서 속을 떠봤다는 거네? 역시 우리 자기밖에 없어!”

 

다른 인격이 그를 조종하듯, 침착하고 냉철한 사람이 웃고, 떠들며 목소리 톤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속아넘어가는 척하면서도 위화감이 들었더니, 내 앞에는 지금 각본대로 움직이는 듯한 어릿광대가 있었을 뿐.

 

“뭐? 웨인즈가 아냐?”

 

듣고 있던 레밍즈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테일즈는 일단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

 

하지만 웨인즈의 품속에서 나와 비슷한 하얀 가면이 서로 공명하듯 빛이 일어났다. 히죽히죽 웃는 사내의 얼굴로부터 나타난 불길함.

 

“유랑극단이 부활했군. 사회자를 어디선가 찾았나?”

 

“맞아. 멤버를 모집하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이 세계는 우리와 맞지 않아서 이주하려고 했지만, 자기가 내가 떠나는 걸 붙잡는다니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사건, 사고를 터트려야 하지 않을까? 그보다 굉장히 귀여워졌다! 각본가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도플갱어는 ‘월식’이라는 포식자의 표본이 된지 오래. 300년이 지난 시점으로, 어릿광대는 하나의 월식이라고 불려도 될 정도다. 솔직하게 지금 내 심정은 다행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더 나아가 지금 유랑극단을 제거하는 거야 말로 마땅했지만...

 

“언제나 자기에게 항상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자기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 게다가 이번 유랑극단은 사회자가 오고 나서 새로운 멤버를 또 모집하고 있거든! 레밍즈와 테일즈도 올래? 그보다 본명이 뭐였지? 분명 다프네와 레오파드였던가?”

 

“그걸 어떻게!”

 

“어째서 알고 있는 거지?”

 

이미 적의가 가득 찬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어릿광대를 쫓아내고 싶었겠지만, 도발과 심리전에 일가견 하는 어릿광대는 300년 전에도 못 당해냈다.

 

“요즘은 보안이 강해서 좀 어렵긴 하더라고. 그래도 도플갱어를 얕보면 안 되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얼굴을 빌려서 살아왔으니, 수많은 역사와 지식이 모두 나에게 흡수된다. 정말 멋지지 않아?”

 

“웨인즈 씨도 죽였나 보네.”

 

담담하게 내가 입을 열자, 레시아와 어릿광대를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시나도 내 안에서 놀랐는데 내 안에서 분노가 태동하고 있으니, 내 감정에 예민한 시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마스터.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알고는 있다.

지금 이곳에서 어릿광대를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혀서 돌려보내야 하지만, 어릿광대는 뱀. 궁지에 몰리면 독니를 드러낸다. 얄팍한 한 수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면, 알면서도 억지로 풀어줘야 하는 것이 있다.

 

“레시아. 마기를 거둬요.”

 

“주인.”

 

이런 상황에서도 레시아는 몰래 공격을 준비하려고 했다. 내 이름을 불러서 반박하려고 했던 것도 잠시. 이내 체념을 하며 살기를 풀었다. 내가 알아차릴 정도로 너무 적나라해서, 어릿광대는 방심한 척하면서도 결정타를 던질 준비가 되었겠지. 그러나 의도한대로 흘러가주지 않으니, 어릿광대는 하얀 가면을 천천히 쓰고 입을 열었다.

 

“자기는 정말 눈치가 빨라. 너무 빨라서 빛이라도 따라잡지 못하겠지. 그래서 나는 꼭 자기가 유랑극단에 와줬으면 좋겠어.”

 

유혹이라면 유혹이다.

자신에게 와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자는 말.

더 나아가서 모든 세상이 광기에 미쳤을 때, 우리는 그 정상에서 웃고 떠들며 지켜보자는 거겠지.

 

“미안하게도 그 제안은 거절할게. 300년전에도 그 이후에도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아. 너희들의 바퀴를 부수고, 움막을 다 찢어놓을 때까지 멈추지 않겠어.”

 

“그래? 그렇구나! 흐음~! 역시 자기는 어울려주지 않는구나.”

 

독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입을 벌린다.

그것은 바로 사냥을 할 때.

 

번뜩이는 단검이 날아왔지만 레시아가 도와주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시나가 즉각 반응하여 왼쪽으로 흘러가듯 몸을 비틀고, 동시에 어릿광대 가면을 향해 레프트 훅을 먹였다.

 

-파앙!

 

예전에 쇼콜라에게 맞아가면서 배운 격투술이, 지금 이 몸에 새겨져 있을 줄은 몰랐으나, 본래 시간대로 되돌아간다면 그녀에게 먼저 찾아가 고맙다고 해두자.

 

“크하아악!”

 

이번엔 웨인즈가 결계 밖으로 튕겨나갔다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모두 볼 것이라 예상했지만, 레시아가 이미 다른 결계를 씌워놨다. 남은 마기를 돌려서 결계를 쳐놨으니, 지금 어릿광대에는 퇴로도 없는 싸움.

 

“이런...방심했나?”

 

극심한 격통을 겪고 있는 어릿광대는 힘겹게 내뱉었다.

 

시나와 나의 시너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월식과는 극상성의 관계. 침식하는 빛으로 몇 번 더 맞는다면, 어릿광대는 소멸해버리고 말겠지. 유랑극단이 인원을 선동해서 모집하기 전에, 한 명이라도 더 줄이려고 했다.

 

그런데...

 

내 귓가에서 누군가가 일어서더니 빠른 동작으로 뭔가 날렸다. 공기를 찢고 날아가는 투사체는, 내가 피하면 테일즈가 맞기 때문에 피하지 않고 붙잡았는데, 아직까지 생크림이 남아있는 포크.

 

“당연히 내가 아니라 자기가 말이야! 꺄하하하핫!”

 

 

미치광이처럼 웃는 포인트가 완전히 반전이었다. 분위기가 전혀 다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저 멀리서 레시아의 결계를 먹어 치우는 검은 뱀과 유쾌하게 빠져나갔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시민들이 모두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레시아가 이미 내 밑에 마법진을 펼쳐줬고, 남아있던 2명도 공간이동 마법진에 몸을 맡긴 체, 다른 건물 옥상으로 전송되었다.

=============================================================================================

유랑극단 부활절...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8 - 3

533

 

 

 

커피숍에 들어서면서 존재감을 지우는 마법은 해제하고, 우리를 만날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내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되었으니, 그 곳에는 양복의 차림의 사내와, 편한 활동복을 입고 있는 소년, 운동복만 입고 껌을 씹는 듯이 입을 움직이는 여성.

 

3명중. 소년이 나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여기야. 여기.”

 

이 사람들이 그 마법사들이라니. 레인의 말을 들었을 때는 중년 아저씨 5명이 와서, 우중충한 분위기를 낼 줄만 알았는데. 카페 분위기가 쌀쌀한 날씨와는 다르게 포근했고, 느긋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에 맞춰서 한발자국씩 걸어나갔다.

 

“당신들인가요? 저를 보자고 하는 사람이?”

 

“맞아. 카린. 개인적인 너의 팬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원래 백발이구나~ 좋은 작품이 나올지도 모르겠네.”

 

운동복을 입고 있는 여성의 눈빛이 밝아지기 시작했는데, 너무 밝아서 저 멀리 떨어져있는 베델기우스를 보는 기분. 저 눈은 루나에게 많이 봐왔던 눈빛 중 하나다.

 

“당신은 만화가군요.”

 

“어라! 어떻게 알았어?”

 

갑작스럽게 당황한 눈을 하며 놀란 여성. 그냥 떠봤는데 월척으로 낚아 올렸다.

 

“찍었습니다.”

 

“감이 좋구나. 흐응~ 나는 또 내 만화가 드디어 유명해진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텐션이 낮아지는 걸 보아하니, 루나보다 정신건강상태는 나빠 보였다. 아무래도 무명이긴 할 테니, 지뢰밭에 발을 들인 실수를 다른 화제로 돌려야 했는데, 뭔가 안심한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었다. 따로 뭔가 걱정거리가도 있었던 걸까?

 

“저, 그 뭐냐. 소녀만화 같은 거 잘 그리시게 생겼네요.”

 

“어, 어? 어! 그, 그럼. 내가 사, 사람은 잘 그리지. 그, 그래...”

 

예의상 소녀만화를 꺼냈지만, 정색하거나 당황한 기색으로 배틀장르나, 다른 장르의 만화를 쓰고 있지 않고, 사람을 잘 그린다는 말을 한 거보면 이 사람 나름대로 특이한 구석이 있나 보다.

 

“레밍즈가 그리는 건 굉장하게 야...으부붑!”

 

거침없이 뭔가 이야기 하려는 소년의 입 속에 레밍즈라고 불렸던 여성의 주먹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어마어마한 난장판이 내 눈앞에 벌어졌다. 위에 있던 커피잔들은 싹 다 날아갔지만, 양복을 입은 회사원처럼 보이는 사내가 손을 뻗어 아슬아슬하게 염력을 사용했고, 지금 이렇게 시끄럽게 떠드는데도 다른 손님들이 우리 주변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걸 보면, 매우 작은 규모의 결계가 작용하는 듯했다.

 

“내가 그 소리 하지 말랬지! 앙? 그리고! 너 아직 청소년인데 그런 건 어떻게 보고 다니는 거야!” 

 

“으우욱! 우그그극!”

 

이 혼돈 비스무리한 잡탕밥 같은 분위기를 어떻게 넘기는 것이 좋을지. 뜬금없이 레시아는 내 앞에 잠깐 서더니.

 

“짐과 주인은 지금 갈 곳이 따로 예정되어있기 때문에 바쁜 몸이니 빨리 이야기 하거라. 대놓고 바보 같은 짓을 한다면 이만 가도록 하지.”

 

누가 마왕 아니랄까봐, 분위기마저 싹 전멸시키는 차가운 음색이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진정시켰고, 연갈색 옷을 입은 남자는 둥근 안경을 살짝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염치없이 굴었던 점에 대해 죄송합니다. 제가 대표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보다 저는 웨인즈, 그리고 저 소년은 테일즈, 저기 청소년 관람불가만화나 그리고 있는 백수는 아까 들었다시피 레밍즈라고 합니다.”

 

“야! 누가 백수야! 나는 편집장이라고!”

 

제대로 된 직업이 있는 사람에게 왜 백수라고 하는 걸까.

그런데 이름이 좀 이상하다.

 

“혹시 그거 가명이세요?”

 

차분하게 말하는 회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저희들은 서로를 잘 아는 마법사동지이기 때문에, 네트워크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을 그대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카린 님은 마리아라는 닉네임을 사용하시고 계신가요?”

 

“아뇨. 그건 다른 사람의 계정이에요. 저는 그냥 카린이라고 부르세요.”

 

어차피 이 이름도 나에겐 닉네임에 가까우니까. 진짜 이름은 카일이고 21세 건장한 청년이다. 라고 소개를 하고 싶었으나, 그런 말을 듣고 당황하기 전에 거짓말이라며 웃겠지.

 

“단도직입적으로 카린 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카린 님께서 품고 계시는 그 힘은 어떻게 얻으셨으며, 그 활용도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 그건...”

 

300년전에 최후의 발악으로 켈모리아에게 황혼을 사용하기 위해, 몸 안에 각자 떨어져 있었던 신성력과 마나, 마기를 전부 합쳐버렸다. 그 과정에서 몸에 강한 부담과 극단적으로 수명이 줄어들긴 했어도, 나중에 아리엘과 같이 봉인됨으로써, 나는 지금까지 배웠던 마법을 모조리 초기화 시켜버리고, 몸에 있는 마나의 활로들조차 모두 초기화 해버렸으니, 지금 겨우겨우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는 시나와 레시아가 자기 멋대로 뽑아서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사역마의 연은 끊어졌어도 이상하게 내 자원을 멋대로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그게 자연스러워서 가만히 놔뒀지만...

 

“주인은 짐의 마나 창고다. 너희들의 계획에 주인의 힘이 필요하다고 들었나니, 주인에게 위험부담이 되는 일이라면, 천계와 마계족속들보다 너희들 먼저 몰살시켜주도록 하지.”

 

“아까부터 잘난 듯이 카린 님 앞에서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당신 평범한 사람은 아니군요?”

 

소년의 입에서 주먹을 빼낸 뒤에, 손수건으로 자신의 주먹을 닦고 있었던 레밍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겁도 없이 레시아 앞에 다가간 뒤에 눈을 치켜 뜨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정적이 20초 흘렀을까?

레시아와 시나 말고 또 싸우는 사람이 탄생하게 되는 걸까?

정적을 깨는 시한폭탄이 터지고 나보니...

 

“카린 님하고 어떤 사이에요? 그보다 남자친구 맞죠? 카린 님 많이 어려 보이는데 주로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진도는? 키스는 해봤어요? 혹시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했다거나? 어쩌면 고속도로를 타고 공항에 먼저 도착했다거나? 조금만 자세히 알려주시면 저의 창작에 도움이 될 거 같은데?”

 

질문의 수준이 윈디 메르아 뺨치는 무자비한 총공세였다.

 

그보다 인터뷰하지마.

다 부셔버리기 전에.

 

내 심정을 다 읽었는지 사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그럼 저 둘은 저대로 놔두고 우리끼리만 상의하죠. 우리라고 한다면 저와 테일즈, 그리고 카린 당신입니다.”

 

뭔가 호칭을 부를 때마다 제 3자를 다루듯이 부르는 것 같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나는 신비로운 제 3자에 속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받아들이는 것은 받아들이고, 배척할 것은 배척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나는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요. 어디 말씀해보세요. 무슨 계획인지. 제 안에 있는 힘은 어떻게 쓰실 것인지.”

 

그러자 회사원으로 보이는 사내의 안경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번뜩이는 안경너머의 날카로운 눈을 관측한 순간, 내가 괜한 소리를 했는지 싶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는 소리는 다음과 같았으니.

 

“우선 저희는 카린 님을 보호대상으로 여기고 언제 어디선지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그 모습으로 비추었을 때, 카린 님은 아직 본래의 모습이 아니군요. 그 모습은 거짓된 모습이 확실합니다.”

 

새삼스레 놀랄 것도 없지만, 이 남자의 안목은 매우 정확했다.

 

“분명 그 모습은 어처구니 없게 여성체로 변한 것이지만, 사실은 남성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 뻔해 보이는 답변을 마련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참으로 기대되는 군요. 제 궁금증을 날려줄 만한 명쾌한 답안은 없습니까?”

 

나는 속을 떠보기로 했다.

그저 찍는 것은 용서하지 않고, 오히려 경멸할 대상임을 암시했다.

 

그러자...

 

“저는 염력을 사용하고 있지만, 초능력자이기 전에 마법사입니다만,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은 레이베리아 님으로부터 직접 받았으니, 지금 제가 보기엔 카린 님은 사뭇 다른 남성의 느낌이 강합니다. 저희를 바라볼 때의 눈빛은 같은 또래의 소녀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이지요.”

 

매섭게 분석하는 눈은 떡잎부터 노란 녀석들만 가능한 일이니, 아직까지 인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저는 몇 가지 가설을 새웠습니다. 우선 소녀만화라는 점을 일부러 이야기 한 것. 그리고 야한 만화를 그리고 있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동요하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체념한 모습. 그 모습은 그 어린 나이에 찾아볼 수 없으니, 그 나이 연령대하고는 맞지 않으며, 오히려 많이 봐왔다는 듯이 넘어가는 눈빛을 보인 즉, 수많은 사람들을 봐온 경험자라는 뜻이지요.”

 

그렇지만 아직 일부의 추측일 뿐.

그게 정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의 본질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모든 사람들의 경험이나 양식의 차이에 따라, 남자다운 여자일 수도, 여자다운 남자일 수도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 성별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잘 모릅니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 같이 날카롭게 지적하는 웨인즈. 말을 이어나가는 것이 매서워 보였다.

 

“그건 당신의 파트너와의 사이겠지요. 제가 보기엔 긴밀한 사이로 보입니다만, 짧은 시간으로 이루어진 유대는 아닙니다.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느닷없이 대변하는 자발적인 모습. 그 모습에는 무언가 숨기려는 것을 나타내고 있지요.”

 

“숨기려는 모습이라?”

 

내가 장단을 맞춰주니 흥에 겨운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숨기려는 모습은 현재 주인인 카린 님의 상태가 불안정하니, 자신이 직접 나서서 보호를 해야겠다는 모습. 그것으로 유추를 하자면 2가지의 경우가 있으니, 하나는 당신의 성별과 나이가 뒤바뀌었기 때문에, 설령 우리가 흑심을 품고 당신을 납치하거나, 강제로 빼앗는 등의 저질적인 일을 막기 위함, 또 다른 하나는 실제로 연약하고 나약한 상태의 카린 님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 우리를 견제해서 친분을 쌓지 못하기 위함이겠죠.”

 

놀랍게도 전자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니까.

이 남자는 실로 위험한 남자였다. 찍었다고 생각을 하면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놀랍게도 그 두 가지 추측이 전부 다 맞는 이야기일 뿐.

 

그러니, 나는 일부러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자가 맞아. 나는 사실 이런 모습으로 있어선 안 되는 몸이지. 그보다 웨인즈 씨는 대단하네.”

 

“별 말씀을...본래 레이베리아 님으로부터 당신을 막으라는 사명이 있었으니까요.”

 

말 그대로 이 남자 또한 레이베리아의 신탁을 받아, 나를 막고 저지하라는 사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가 레이베리아를 막을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레이베리아 님은 본질을 꿰뚫고, 다음을 내다보는 천리안의 여신. 하지만, 그 천리안은 자신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나 봅니다.”

 

웨인즈는 목이 타는지 식은 찻잔을 단숨에 들이키며 목을 축였다. 이야기를 많이 한 거 같아서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본질을 꿰뚫는 권능을 인간에게 주는 것으로, 자신이 불리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레이베리아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은 자신을 따르는 신하에게도 전해진다. 하지만, 그 신하가 너무 월등하게 능력이 높은 나머지, 자신의 여신에게도 관측이 가능하다는 소리인가?”

 

“말 그대로 저는 염력을 사용하니까요. 카린 님이 사실 21세의 청년이라는 본질은 이미 꿰뚫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나의 진실된 모습을 봐주는 사람이 생겼다.

오오! 정말 참으로 뿌듯한 일...

 

“그래도 그 모습이 귀여우니, 저기 있는 마왕님은 그대로 있길 바라는 것이겠죠.”

 

이었는데 너무 꿰뚫어봐서 내가 더 당황할 지경이었다.

 

레시아가 마왕인 것까지 꿰뚫어보는 사내.

웨인즈라는 인터넷상의 닉네임을 쓰기에는 아까운 사람이긴 했다.

오히려, 이런 사람과 잡화점 운영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분명 크나큰 소득으로 돌아왔겠으나, 나는 성급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당신의 의뢰는?”

 

그러자, 웨인즈는 기다렸다는 듯이 즉답을 했으니.

 

“인간만이 살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주십시오.”

 

웨인즈의 번뜩이는 녹색의 빛이 나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런데 왜 커피숍에서 차를 파는 거지?

=============================================================================================

미안해요...술을 마셔서 개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