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7

441

 

 

 

아스모데우스의 색욕의 표식을 뺏어버리고 아공간 속에 넣어 숨겨 성에서 빠져 나왔다. 그래도 마계공작이라서 그런지 나의 진심이 담긴 주먹을 맞고도 살아 남았으니, 끝을 내고는 싶었지만 그건 레프리시아에게 맡기려고 했다. 빈사상태의 사냥감을 어린 아이에게 줘서 연습하라는 그런 마음으로...하지만 레프리시아는 그러지 않았다.

 

“나중에 제가 마왕까지 쓰러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면, 제가 직접 색욕의 공작을 뒤집으러 갈 거에요. 그러니 지금은 죽이지 않을 거에요. 선생님.”

 

“네가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다만, 저 녀석에게는 표식을 못 넘겨주겠으니까. 뺏어가고 싶으면 나에게 직접 찾아오라고 해야겠네.”

 

이제 슬슬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가기 위해 마계공작을 털어냈으면, 그에 맞는 전리품을 얻어갈 차례니까. 릴리스에게 이곳의 보물창고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 보물창고 안에 주워갈 것이 있으면 주워가는 것. 과거의 유물은 현재로 돌아갔을 때 얼마나 큰 값어치를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중에서 좋은 게 얻어걸리면 부가적인 이익을 챙길 수 있다.

 

사실 과거로 온 목적은 다름이 아닌 이것.

아스모데우스가 아니라 다른 마계공작이라던가, 아니면 다른 지역의 왕가로부터 보물을 빼돌려서, 미래로 올라가 값비싸게 파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레프리시아도 좋은 게 보이면 하나씩은 챙겨가거라. 나중에 마계공작이 될 릴리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 말이야.”

 

“네? 제가 마계공작이 된다고요?”

 

이런...스포일러가...

너무 들뜬 나머지 내 입이 자기 멋대로 움직였나 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얼버무릴 수 있는 상황이니 긴급하게 단어를 뽑아내서 말했다.

 

“아스모데우스에게 제약이 걸리고 저주가 걸린 이유는 언젠가는 네가 아스모데우스를 뛰어넘기 위해서겠지. 요즘 마계공작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강자들을 약화시키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기 위해서 세뇌를 엄청나게 걸고 있어. 지금은 너도 느껴봐서 알겠지만,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는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족쇄에서 지금 막 풀려나서 얼떨떨하겠지만, 나중에 힘을 사용할 때만큼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도굴꾼처럼 보물을 이리저리 고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릴리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표정으로부터 뭘 다짐했는지 계속해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티아가 아직도 텔레파시를 받지 않는 걸로 보아, 내가 지금 거주하고 있는 은거지에서 아스모데우스가 꿈으로 가둬버린 것처럼 계속 자고 있는 듯 보이는데.

 

“레프리시아는 골랐어?”

 

“이 돌이 예뻐서 이걸 골랐어요! 선생님!”

 

오묘하게 띄고 있는 짙은 보라빛의 보석.

윤회의 조각인가.

 

“나도 빨리 골라야겠네. 이제 돌아가서 밥을 먹어야 하니까.”

 

근처에 있는 아무 책이나 붙잡고는 몰래 금화를 몇 개 더 챙겼다. 아무래도 돈 없이 생활하는 건 나에게도 한계가 있고, 요즘 내가 나타나면 상인들이 견제를 하려고 하니까.

 

“자. 떠나자. 집에서 할 일이 좀 많으니까.”

 

집에서 할 일이 많은 이유라면 레프리시아의 훈련강도를 더욱 더 올리는 것과, 잠이 들어있는 티아를 깨우는 것도 존재하고, 내가 있어야 할 시간대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아무래도 지금은 색욕의 공작을 주먹 한방으로 죽지 않게 날려버리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 그 이후로 내가 레프리시아의 인생에 더 깊게 관여하면 안 되니까. 한쪽에 구멍이 뚫려서 의식을 잃은 아스모데우스가 나와 레프리시아를 마중 나왔으니 손으로 인사를 하고 저녁에 필요한 재료를 사서 은거지로 올라갔다.

 

물론 과정만 훑어본다면 굉장히 빠르고 평화로운 일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네가 대체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네? 아무런 말도 없길래...저도 자연스럽게 따라가도 되는 줄 알았죠.”

 

언제 실크드레스가 수복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옷을 입고 있는 릴리스가 은거지까지 따라와버렸다. 안 된다고 말하고는 싶었지만 레프리시아가 먼저 내 허리를 붙잡고는 입을 열었다.

 

“저 언니도 결국 갈 곳이 없는 거 아닐까요? 선생님께서 그 변태공작의 구속을 풀어주셨다면 자유의 몸이 된 것은 확실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 몸을 쉴 곳이 없다는 거잖아요. 게다가 마계공작의 표식 중 하나인 색욕의 표식을 선생님께서 들고 있으니까. 적어도 보내려면 그거라도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훈련만해서 몰랐지만 생각이 상당히 유연해졌구나.”

 

나는 레프리시아의 작은 손에 색욕의 표식을 쥐어줬다.

 

“그러면 릴리스가 이곳에 같이 있는 대신. 그리고 나는 곧 본래의 시간대로 가게 된다면, 릴리스가 레프리시아의 보호자이자 선생의 역할을 계속 이어나가는 조건으로 이곳에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아. 네가 만약에 마왕이 된다면 이 표식은 릴리스에게 건네주도록 해.”

 

“네! 선생님!”

 

붉은 눈이 나를 향해 밝게 비추는가 하더니, 곧 이어 릴리스를 비추고는 껴안으면서 “잘 부탁해! 언니!”라고 외쳤다. 서로가 어떤 유대로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천장에서 자고 있던 티아의 작은 머리를 일으키고, 새벽<Daybreak>을 흘려 보내기 시작했다. 비정상적으로 응축된 마나는 마법을 일으키기 위해 상대방이 일으킨 기적. 그렇다면 그 기적을 없애고 자연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새벽의 일이다.

 

“어라?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기억상실인척 하지마. 잡혀온 것이 아니니까.”

 

“카일! 나를 구하러 와줬구나!”

 

“아니, 잡혀오지 않았다고 말 했잖아.”

 

요리가 4인분으로 늘어나버렸으니 내가 고기를 지지고 볶는 양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리스는 레프리시아에게 적대의식을 가지거나, 다른 흑심을 품지는 않는 것 같으니 내가 지금 당장 떠나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 돌아갈 거야? 미래에 있는 티아가 어마어마하게 화가 난 것 같은데.”

 

“나도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지만, 지금은 저 둘이 지내는 모습을 좀 관찰하고 아무 이상 없다고 판단되면 돌아갈 거야. 그리고 내가 돌아가는 타이밍에 맞춰서 공간왜곡이나 그런 건 하지 말라고 전해주고.”

 

티아에게 간을 좀 보라고 고기를 건네줬고 그걸 제대로 받아먹는 티아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번졌다. 저녁식사는 나와 레프리시아만으로 충분히 시끄러웠다고 생각했는데, 릴리스까지 있어서 그런지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시끄러웠다.

 

아무런 말 없이 밥을 먹고 있었던 찰나에, 레프리시아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와 릴리스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마치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 같아서 기뻐요!”

 

그 말에 사례가 들릴뻔한 걸 어떻게든 넘기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이 분위기를 단숨에 제거하는 멘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내 이성이 제발 그런 짓은 참아달라면서 본능을 억누르고 있었으니까. 식사 시간이 쏜살같이 끝나고 대충 집어왔던 책을 읽고 있는 사이에, 릴리스와 레프리시아는 목욕을 하러 갔을 때였다.

 

“카일은 잠 안 와? 그 책을 보고 있으면?”

 

“나는 안 오는데? 책은 단순히 책이잖아? 여기서 뭐가 튀어나온...”

 

“키에에에에에에엑!”

 

-텁!

 

방금 내가 못 본걸 본 것 같은데. 책에서 사람 얼굴이 튀어나와서 비명을 지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건가? 사람이 지루해서 피곤해지려는 찰나에, 얼굴이 튀어나와 비명을 지르면서 깜짝 놀라게 하는 거.

 

티아는 내 머리 뒤로 숨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레프리시아와 릴리스는 다급하게 나오면서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라고 외쳤다. 따라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으니까 옷이나 제대로 입고 나와!”라고 호통을 쳤고, 그 둘은 쏜살같이 목욕탕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내가 책을 다시 열었을 때.

 

“키에에에에...아아아아아아악!!!”

 

얼굴이 다시 튀어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아이언 클로로 제압해서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군. 물리적인 충격에도 반응하는 걸 보아하니, 책에 잠들어있는 몬스터의 한 종류네. 일부러 지루하게 짝이 없는 내용으로 사람을 방심시킨 후에, 특정 페이지가 열리면 그 사람을 잡아먹는 방식인가?”

 

서서히 손에 힘이 더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책에 튀어나온 얼굴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티아는 “끝났어?”라고 말하면서 내 귀 바로 옆에서 나와 말하고 있었고, 티아에게 책을 펼치자 놀라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책의 파수꾼이 사라져서 그런지 이제 내용이 원상복구가 되기 시작했어. 마법식과 영창이 담겨있는 거라면 마도서가 틀림없네.”

 

나는 급하게 책을 닫고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왜 그래?”

 

“30초 안으로 세상을 멸망하는 마법이라도 들어있으면 어떻게 해?”

 

“그건 지나가는 할아버지에게도 배우는 마법이잖아. 궁금하니까 조금이라도 보고 있자? 응?”

 

“보고는 싶어도 이제 목욕이 다 끝났을 거야. 미래의 티아에게는 자세히 보여줄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라.”

 

“치사해!”

 

보물창고에 널려있는 것 중에 책을 집는다면 그것은 대부분 금단의 지식을 전파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리라. 그걸 공유해서 본다는 의미는 날아다니는 폭탄을 하나 더 만들어버리는 셈이니. 최대한 공유를 하면 안 된다는 것.

 

그나저나...이 책을 팔 수 없게 되었으니 수익은 없는 거구나.

 

“선생님! 목욕을 다 했으니 어서 씻으세요!”

 

제대로 된 잠옷을 입고 나온 릴리스와 레프리시아를 보며 안심하고는, 나도 목욕탕에 들어가서 씻을 준비를 하려고 했다. 안전하게 공간을 접착시켜서 문을 못 열도록 잠가버리고, 뜨거운 물이 받아진 커다란 목욕탕에 들어가, 지금까지 쌓여있는 피로가 몸 속에서 빠져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공간에서 다시 마도서를 꺼내고 그 마도서의 정체를 알기 위해 집중해서 보고 있을 때. 내용에서는 금서라고 지정될 만한 이유라고 한다면 ‘설화’라는 마약을 만드는 방법이 실려있었고, 그 뒤에는 심연의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알려진 사랑의 묘약마저 제조하는 방법이 존재했다.

 

“위험하군.”

 

“그러게요.”

 

......?

 

“너 어떻게 여기에 들어온 거야? 네가 무슨 디럭스 파이터냐?”

 

“저 멀리서 환영체를 만들어 놓은 것뿐인데요? 그보다 저를 구해준 보답을 은인에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요.”

 

환술사들은 환영체를 생성하고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지...

 

“분명 너에게 부탁을 하지 않았던가? 내가 사라지던 날에도 레프리시아의 보호자와 스승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라고, 그것이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연히 그것도 있지만...이건 제 개인적인 보답인 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좋지 않아.

겉으로는 항상 당황하지 않는 모습으로...

 

“마음만 받도록 하지. 그래 마음만 받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잖아.”

 

“제 마음을 받아주신다고요?”

 

“너 대체 어떻게 해석을 하면 내가 곤란해지는 상황만 창조하는 거냐! 당장 나가!”

 

피로를 풀려고 왔다가 오히려 피로만 쌓이는 목욕을 끝내고, 밤에 마법을 알려주는 역할은 릴리스가 하기로 했다. 레프리시아가 야간에 지도를 받고 있는 동안, 나는 바닥에서 천천히 눈을 감고 하루가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식의 경계에서 위화감이 느꼈을 때는 촛불이 전부 꺼져있는 상태에서, 창문의 틈으로는 달빛이 들어오고 있을 무렵. 침대에서는 레프리시아가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소리와...

 

“넌 거기서 뭐 하냐?”

 

요염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릴리스의 자안과 달빛에 반사되어 나에게 쏟아지는 듯한 은발. 나의 어처구니 없는 질문에도 오히려 미소를 띄면서 붉은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목욕탕에서 못한 답례를 여기서 하려고 해요.”

 

하지 말라고 해도 지금 당장 릴리스의 처지를 생각하면...

 

“확실히 너는 세분화를 하면 서큐버스였던가.”

 

몽마는 정기를 흡수해야 살아갈 수 있는 마족인데, 릴리스의 경우에는 남자를 습격하는 서큐버스였다.

 

“네. 맞아요. 저는 밤에 자고 있는 남자들을 습격하는 서큐버스. 그리고 당신은 나를 구해준 남자라는 거죠.”

 

레프리시아가 자고 있어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상, 목소리는 제대로 내지 못하고 속삭이는 목소리만 이리저리 오고 가고 있었다.

 

“그 동안 아스모데우스가 저를 통제하고 제어하면서 거의 굶주린 상태에요. 당신이 해준 따듯한 밥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당신의 극상의 정기가 탐나기 시작한 걸요?”

 

천천히 가까워지는 릴리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내 불평에 조용히 웃음소리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쿠쿡! 괜찮아요. 곧 행복한 기분이 원수가 아니라 은혜라고 생각해줄 테니까.”

=============================================================================================

안녕? 나는 킹 크림맨이라고 하고

다음 장면을 모조리 넘겨버릴 거야!

[애초에 쓰지도 않았습니다. 판사님.]

글 이어보기

편하게 쓰는 단편선

못된 여자

딱딱. 손끝을 두드린다. 툭툭.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따라라. 귓가로 지겨운 음악소리가 들린다. 벌써 수백 번은 들었던 노래다. 오죽하면 지금 저 노래 끊긴다고 한들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들릴 정도다. 이 노래는 재즈? 아마도 그런 분류이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블루스일지도 모르지. 눈을 뜨고 A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뒤집힌 A의 핸드폰에서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래를 끌까 손을 뻗었다. 하지만 A가 생각났다. 유난히 이런 노래를 좋아한단 말이지. A의 취향은 도통 모르겠다.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쏴아아. 노랫소리 사이로 샤워 소리가 들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귀를 기울였다.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가 오감을 자극하였다. 눈을 감고 A를 상상했다. 그 매혹적인 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쭉 뻗은 다리, 풍만한 가슴, 잘 빠진 골반까지. 무어 하나 아쉬울 게 없는 몸이었다. 몸만 본다면 누가 A를 40대로 볼까? 분명 그 누구도 A를 20대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내가 A의 남편이었다면 어떨까? 저 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겠지? 후우. 상상을 한 것만으로도 숨이 거칠어졌다. 온몸이 화끈거렸다. 여름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방이 덥게 느껴졌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후우. 숨을 내뱉자 온 몸의 피가 사타구니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저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순간이 싫다. A를 만나는 것은 좋다. 아니 좋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다. 황홀함.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 본 황홀함은 A였다. 하지만 그런 A와 함께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잡생각들이 싫다. 가령 아까 했던 생각처럼 말이다. 남편이라?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뭐하고 있어?”

눈을 뜨자 A가 보였다.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눈을 크게 뜨고 A를 바라보았다. 지고 있는 석양이 그녀를 비췄다. 그 탓일까? A의 살결이 곱게 빛나고 있었다. 촛불이 은은하게 밝혀주듯이 A가 나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A가 침대 위로 올라가 나를 바라보았다. 야릇한 눈빛과 은밀한 감각들이 이리 오라고 유혹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A에게 다가갔다.

“아. 미안 음악 좀 끄고.”

A가 핸드폰을 쥐고는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화면이 보이지 않도록 뒤집어 놓았다. 뒤집힌 핸드폰 틈 사이로 빛이 흘러나왔다. 누구에게 무어가 왔는지 핸드폰이 진동을 하며 빛을 토해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봐야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나였다.

A를 한손으로 끌어안았다. 살결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이 뇌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A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여유롭게 내 손짓에 몸을 맡겼다. 내 품안으로 들어와 다리로 내 허리를 감쌌다. 그 모습이 마치 뱀 같았다. 그물망 사이를 빠져나가는 뱀, 선과 악을 먹으라던 뱀과 똑같다.

A의 살결에 입술을 맞췄다. 짧은 신음소리가 들린다. 코끝으로 희미한 냄새가 느껴졌다. 숨을 들이마셨다. 스킨 냄새였다. 지긋한 중년 남성의 냄새. 목욕탕에 가면 매번 맡던 스킨 냄새와 똑같다.

 

늦은 밤. 눈을 뜨고 나니 텅 빈 천장이 보였다. 몸을 뒤척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위에 나 홀로 누워있었다. 손을 뻗어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퉁퉁. 침대를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갈 곳이 없는 손이 허공에서 맴돌자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후 A가 누워있는 쪽을 보자 작은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오늘 즐거웠고 또 보자.

여전히 미련 없는 쪽지였다. 쪽지를 내려놓고 A가 누워있던 자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지 않을까? 얼굴을 침대에 파묻었다. A의 냄새가 날 것 같았다. 희미하게라도 무어라도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느껴지는 것은 진한 밤꽃 냄새였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를 봐도 A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나 혼자였던 것 같다. 나 혼자 모텔로 와서, 나 혼자 사랑을 나눈 것처럼 보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주워 입었다. 옷을 다 입고 곧장 방을 나왔다.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밤 12시. 어쩌면 이 시간이라면 대중교통도 끊긴지 오래일 것이다. 다시 방으로 들어갈까 고민을 해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A가 없다면 더 이상 이 방에 있을 가치는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일행분 나가시던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아니요. 집에 가는 거예요.”

“이 시간에요?”

주인은 이어 내게 무어라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길로 문을 열고 나갔다.

집으로 가는 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새벽 2시. A에게 연락이라도 해볼까? 하다못해 문자라도 남겨놓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핸드폰에 A의 번호를 입력했다. 문자를 보내려고 타자를 치는 순간 A의 핸드폰이 떠올랐다. 뒤집혀있던 A의 핸드폰. 주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몸을 떨던 핸드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용일까?

A가 떠오른다. 조용한 거리가 A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아까 즐겼던 달콤한 시간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A는 지금쯤 무어를 하고 있을까? 이른 새벽, 방을 나갔다면 어디로 간 걸까? 집으로 간 걸까? 집에 가서 남편의 곁에서 잠을 자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곳으로 간 걸까? 다른 곳에서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내는 걸까? 눈을 질끈 감았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자.

우웅. 핸드폰 진동에 눈을 떴다. 핸드폰을 보자 B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지금 온 것은 아니었다. 시간을 보니 대략 4시간 정도 전에 왔던 문자였다. 아무래도 주인의 관심이 필요한 것은 내 핸드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수업시간에 나갔잖아.

로 시작된 문자가 대략 10통정도 이어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까 뒤이어 부재중 통화가 몇 개 남아 있었다. 조용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내가 수업시간에 나왔던가? 글쎄. 그다지 기억에 없었다. A에게 연락을 받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왔던 것은 기억난다. 하지만 그게 수업시간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애초에 관심도 없으니 기억할리 없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은 누구에게도 연락하고 싶지 않다. A에게 연락을 못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연락할 마음 따윈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가만 밤하늘 희미한 달빛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B와 만난 것은 다음날이었다. 점심시간 B가 내게 다가왔다. 학교 근처 음식점을 가자고 하기에 따라 나와 둘이서 밥을 먹으러 갔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어제?”

가게에 들어와 주문을 하자마자 B가 내게 물어보았다. 눈을 깜빡이고 B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잠시 생각해보다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그리고 보니 어제 문자가 왔었지. 또 까먹었나보다. 어젯밤 집으로 가서 A 생각을 하느라 깜빡했다.

“아 그거. 별 일 없었어.”

“그래? 근데 왜 갑자기 수업 시간에 나갔어? 그것 때문에 교수님께서도 뭐라 하시던데......”

“그래. 그렇구나.”

눈알을 굴렸다. A는 지금 무어를 하고 있을까? 밥은 먹었을까? 먹었다면 누구와 먹었을까? 손가락 끝을 튕겼다. 툭툭. 테이블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면 또 그 여자야?”

B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미간 사이가 좁아지면서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B는 유한히 A를 싫어했다. 무어가 그리 싫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건 B가 A를 심하게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처음 B에게 A 얘기를 했을 때 장기 밀매 업자는 아니냐고 추궁했다.

“뭐, 그런 거지.”

고개를 끄덕였다. B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딱히 B에게 숨길 생각은 없었다. 내가 나서서 A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B가 물어본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너도 징하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B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 시작인가? 지긋이 B를 쳐다보았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쒸익 쒸익. 오늘도 조용히 지나갈 생각은 없나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대단한 여자였다. 어찌 오지랖이 저리 넓은지 신기할 뿐이다.

“가능한 순간까지? "

“미쳤어? 농담하는 거지?”

미치지도 않았고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정상이고 굉장히 진지하게 답한 것이다. 진심이었다. 가능하다면 A를 만나고 싶었다. 아니 가능하지 않다면 가능하게 만들어서라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그렇다. 눈알을 굴렸다. A가 만나고 싶어졌다.

“아니. 대체 왜 그 여자한테 그렇게 목을 매다는 거야?”

“글쎄.”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겠네.”

B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쿵하는 소리가 들리자 점원이 움찔거렸다. 음식을 가져온 점원이 어색하게 음식을 내려놓았다. B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음식을 받고 ‘하하’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점원이 음식을 내려놓고 떠나자 곧장 내게 달려들었다.

“언제까지 이럴 건데? 그래봐야 얻는 게 뭐야? 생각해봐. 그 여자 남편도 있잖아. 좋게 얘기해봐야 장난감이야. 장난감. 심지어 장난감만도 못할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는 얘기였다. 무어 하나 틀린 얘기가 없었다. 포크를 들고 파스타를 집었다. 입을 벌리고 파스타를 한 입 먹었다. 매콤한 소스가 입안에서 퍼졌다. 후루룩. 넘어가는 목 넘김이 시원했다.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이 가게는 처음 먹어봤는데 생각보다 매웠다. 입안이 얼얼하게 달아올랐다. 물로 입안을 헹구며 A를 떠올렸다. A가 이곳에 온다면 좋아했을 텐데.

“생각해봐. 그렇게 만난다고 그 여자랑 네가 잘 될 것 같아?”

“아니.”

단칼에 대답하자 B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원하는 것 따윈 없어. 아무것도 얻지 못해도 좋아. 그렇게 잘 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아. 그저 그 사람이 날 원하면 갈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단지 그거면 난 만족해.”

“미친 거 아니야?”

B가 혀를 내둘렀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B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후 B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이따금씩 B가 나를 쳐다보았지만 계속 밥만 먹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가게를 나오자 핸드폰이 울렸다. 재빠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핸드폰을 꺼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핸드폰 화면을 보니 A에게서 온 문자가 보였다. 서둘러 핸드폰 잠금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화면은 서서히 커졌다.

-지금 만날 수 있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쨍한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낮이라. 낮에 불리는 건 또 처음이다. 게다가 평일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떠하리?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어디가? 수업 안 들어?”

지하철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B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돌려 B를 쳐다보았다. B가 손에 힘을 주자 어깨 위로 묵직함이 느껴졌다.

“오늘도 결석이면 위험하다고, 애초에 말이야. 너 출석도 아슬아슬하잖아.”

오른손을 들어 B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자 의외로 순순히 손을 놓았다. 더 이상 B는 내게 아무런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글쎄다. 미친 거지.”

몸을 돌렸다. B를 뒤로 하고 지하철역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만난다고 그 여자랑 네가 잘 될 것 같아?’

지하철로 향하는 동안 B의 말이 떠올랐다. 맞는 말이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A와 나의 관계는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득이 없는 관계였다. 어차피 끝은 이미 파탄으로 정해졌다. 내게 득은커녕 실만이 가득한 관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A를 원하고 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줄곧 A를 원했다.

 

처음 A를 만난 것은 작은 파티였다. 파티라고 했지만 사실 다과회 같은 거였다. 주최자가 아는 분이라 갔었는데 모르는 사람이 잔뜩 있고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구석에서 창문이나 보고 있었는데 A가 내게 다가왔다.

“심심한가봐요?”

“네?”

고개를 돌리자 A가 있었다. 처음 만난 A는 기묘했다. 단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 끌려갔다. 달이 지구에게 끌리듯이 나 또한 A에게 끌려갔다. 이유 따윈 없었다. 그냥 끌렸다. 굳이 말하라면 A라서 끌렸던 것이다.

그렇게 A를 만났다. 잠깐의 대화를 나눈 후 우리는 서로가 통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럼 나랑 같이 나갈래요?”

한참을 얘기하다가 A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때 왜 그랬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이라도 집에 갈까 생각했지만 A와 같이 나왔다. 처음 만났지만 모텔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어째서 내가 A를 안고 있는 건지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우리는 모텔로 들어가서 몸을 뒤섞었다.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서로를 원했다. 서로를 안고 서로를 느꼈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는 오늘까지 이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A를 떠올렸다. 나는 A에게 왜 이렇게 끌리는 걸까? 그 이유를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 동안 좋아했던 여자들은 이유가 있었다. 성격이 좋다던 지, 몸매가 좋다던지, 얼굴이 예쁘다던지, 하다못해 돈이라도 많다던지, 제각기 이유가 다 있었다. 그런데 A는 유독 다르다.

내가 A에게 끌리는 것에 이유 따윈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본능이었다. 생물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생존을 갈구하듯이 나 또한 A를 갈구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A에게 나는 무엇일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A에게 남편이 없었다면 내가 그 자리를 차지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생각해본 적 없다. 의문은 들지만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어차피 A의 곁에 머무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장난감도 좋다. 쓰고 버리는 휴지도 괜찮다. 심심풀이로 만나도 좋고, 진지하게 만나도 좋다. 어찌됐건 A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만족한다.

하지만 한번쯤은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당신에게 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현관문 앞에 서서 문을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그간 A를 알고 지낸지 꽤나 시간이 흘렀는데 A의 집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런 것이 그녀의 집은 내 집이 아니니까.

문을 두드리자 A가 나왔다. 일어날지 얼마 안됐는지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흘러내린 잠옷 사이로 하얀 살결이 보였다. A가 내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돌려 집안을 살펴보았다. 집안 가득 A의 흔적이 넘쳐났다. 책장에 A가 좋아하는 재즈 노래부터 식탁에는 A의 사진이 있었고 건조대에 A의 원피스가 걸려있었다.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뒷골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뭐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상한 감각은 온 몸을 휘감았다.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조금씩 그 감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질감……. 내가 느끼는 이 이상한 느낌인 이질감이다. 그러한 이질감은 내 존재 자체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이 순간 가장 어색한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였다. 그렇기에 이 집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얼른 나가라고.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문제 있어?”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커다란 A의 눈동자 사이로 내가 보였다. 내 모습을 A가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에게 나는 어떤 의미일까? 이토록 이질적인 나를 어째서 당신은 나를 만나고 있는 걸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A가 다가와 내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나를 끌어당겨 침대 위로 넘었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서로가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입을 맞추고, 타액을 교환했다. 옷을 벗기고 살결을 느끼며 탄성을 질렀다.

타오르는 A의 품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생각이든, 무슨 의미이든, 지금 A를 느낄 수 있었다. A의 곁에 있었고 A를 안고 있었다.

‘그렇게 만난다고 그 여자랑 네가 잘 될 것 같아?’

B의 말이 떠오른다. 잘 될 거라. 그딴 건 상관없다. A를 세게 끌어안았다. 귓가에 울리는 A의 신음소리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그렇게 점점 A에게 빠져들었다.

작가님, 오늘도 좋은 '글로' 세상과 소통해 보세요!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6

440

 

 

 

상대는 마계공작 중에 한 명으로 지금의 내가 상대하기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레프리시아를 내 허락도 없이 납치한 건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는 상대였다. 나는 과거 시간대에 있는 릴리스의 인도를 받아서, 아스모데우스가 거주하고 있는 성 앞에 도착했고 거대한 성문이 자동으로 천천히 열리는 것에 따라, 나 또한 천천히 성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안에서까지 레프리시아를 찾으려면 꽤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추적마법을 달아놓은 덕에 3층정도 높이에 있는 위치에서 감지가 되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올라가는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릴리스의 목소리였는데...

 

“그 아이는 당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인 거야?”

 

“소중하던 소중하지 않던 일단 그런 녀석에게 납치당한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어쩌다가 네가 협박을 받아서 그런 지경까지 되었는지는 나중에 물어보겠지만, 지금은 1분 1초가 아까우니까 빨리 올라가자고.”

 

앞에 있는 수많은 마계의 군병들이 내 앞에서 창을 내밀고 있었지만, 내 주변에 거대한 마기를 짙게 뿌리기 시작하자.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병사 일부분이 경직되어 굳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이 시간대의 마계는 약육강식이 철저하게 교육되던 시절이어서 정말 다행이네.”

 

내가 내뿜고 있는 마기의 양도 어마어마한 양인만큼, 일반 몬스터가 쉽게 다가설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흑색의 연기를 내 갑옷처럼 두르면서 앞으로 나아가도, 섣부르게 내 앞을 막아서는 몬스터나 마족이 없었고, 모두 나를 경계하지만 싸우고 싶지 않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그저 릴리스가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어서 정신을 차리고, 내 뒤를 바짝 쫓아가기 시작했다.

 

“당신은 인간인데 어떻게 마기를 몸 안에 품고도 멀쩡할 수 있는 거야?”

 

“기업비밀이야. 이런 게 바로 진보된 기술이라는 거지.”

 

굳이 지금 여기서 진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으니 아무런 말 대잔치로 대답했다. 2층을 올라갔을 무렵 집사 복장을 입고 있는 40대 남성이 서 있었다. 다만, 내 마기에 동조를 하듯이 자신도 거대한 마기를 내뿜으며 앞길을 막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신속하게 돌아가주시길 바랍니다. 릴리스는 아무래도 아스모데우스 님께 재교육을 받는 것이 좋겠군요?”

 

“너희들이야 말로 지금 늦지 않았으니 레프리시아를 돌려주지? 그리고 시대가 어느 때인데 교육을 협박과 제한을 걸어놓고 하는 거야?”

 

과거에도 집사를 뽑는 기준은 능력자가 되어야 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사람을 뽑는 것 같은데, 다른 건 둘째치고 이 느낌은 어디선가 많이 받은 적이 있다. 정갈한 옷과 침착한 태도와는 다르게 눈빛 안에서는 어마어마하게 광폭한 야수가 있는 기분.

 

“늑대인간이로군? 당신.”

 

“음? 늑대인간을 본적이 있는 건가? 입으로는 묻고 있지만 눈에서는 확신에 가깝군. 그러면 이런 모습으로 마주할 일도 없겠지!”

 

집사의 근육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고 입은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귀는 서서히 짐승의 귀로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늑대로 변하는 진화의 과정을 한 눈에 보여주듯 2초 정도의 변이가 끝나고, 날카로운 이빨과 송곳니를 드러내며 사냥감을 직시했다.

 

“내가 이런 모습으로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할 것을! 크크큭! 너희들 모두 저 세상으로 보내주마.”

 

거대한 늑대의 울음소리와 함께 2층에 있는 문이 전부 열리기 시작했다. 늑대 중에서도 가장 사납고 커다란 다이어 울프가 무리를 이끌고 있으니, 높이만 해도 2M로 보이는 늑대들이 주변에서 으르렁거렸다. 1:1이라면 적어도 누구 하나 죽지 않고 끝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티르빙을 꺼내서 오른손에 사브르를 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각을 좀 해봤는데, 이 공간에서 이런 늑대 6마리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좀 궁금하거든?”

 

“그건 네 알 바가 아니다 인간.”

 

뭐 확실히 내 알 바는 아니지.

이제 곧 2층에는 아무도 없게 될 테니까.

 

뒤쪽에 릴리스가 지켜만 보고 있는 이유라면, 아마 제대로 된 전투를 해본 적이 없어서겠지. 내 눈치를 보다가 오른쪽에서 뛰어드는 늑대의 발톱을 피하고, 사브르에 마나를 두르듯이 마기를 둘러서 그대로 내려쳤다. 달 모양의 곡선을 그린 검이 늑대의 거대한 머리를 후려쳤고, 반대방향으로 날아간 늑대는 “깨깽!”하는 소리와 함께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한 마리가 당할 무렵. 다른 쪽에서 두 마리가 도약으로 날아왔고, 그쪽으로 공방을 신경 쓰는 사이에 늑대인간은 비열하게 내 등에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주변에 날아드는 3개의 살기에 반응해서, 자연스럽게 시공의 눈을 개안하면서 시간이 거의 멈춘 듯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동안, 간결한 움직임으로 다이어 울프 2마리의 목과 머리를 관통시키고, 내 뒤에서 달려들었던 늑대인간을 무시한 사이에, 그 뒤에서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는 다이어 울프 한 마리의 몸통을 두 부위로 토막 내버렸다.

 

시공의 눈을 다시 닫고 뒤를 돌았을 때. 늑대인간에게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식은땀을 볼 수 있었다.

 

“이 괴물 같은 자식! 어떻게 그런 움직임이 가능한 거지! 완벽한 빈틈을 노리고 들어간 건데!”

 

“그쪽이 느리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봐? 애초에 내가 아는 여기사는 이런 움직임도 따라잡아서 내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다고. 아스모데우스와 싸울 때는 이 정도로 시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보다 괴물에게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좀 오묘한걸?”

 

“죽여! 당장!”

 

다시 날아드는 늑대들 사이로 그 늑대를 통솔하는 늑대인간이 내 빈틈을 보고 공격하기 전에, 루니아 누나의 비검인 ‘시공섬’을 나에게 맞춰서 계량했다. 마기를 거두고 검에 마나를 응축하면서 조용히 읊었다.

 

“시공단절.”

 

시공간에 실선 하나가 생겼을 무렵 공간은 그 실선을 따라 공간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실선의 영역으로 들어온 늑대들과 늑대인간은 부위가 천천히 나눠지기 시작했다. 시공간은 언제나 다시 돌아와서 수복을 하는 습성이 있지만, 애석하게도 저 늑대들에게는 그런 기능이 없나 보다.

 

“크아아아!”

 

고통이 만들어낸 단말마의 비명을 무시한 체 티르빙을 다시 귀걸이로 바꿨다. 루니아 누나의 비검은 정말 검술의 극을 자랑하는 것이고, 나의 경우에는 시공간술사라서 마법으로 이루어낸 마법검이라는 것이 차이지만.

 

어쨌든 처음 했는데 잘 되어서 다행이었다.

 

“아까 그 기술...시공간을 잘라버렸죠?”

 

릴리스가 전투가 끝난걸 확인하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건 왜?”

 

“이 대륙에서는 시공간술사 자체를 보기 힘든데 혹시 시간여행으로 이곳에 온 거에요?”

 

“그럴 리가.”

 

릴리스의 말을 부정하면서 3층으로 올라갔다. 여자의 감은 날카롭다고 하더니 릴리스는 계속해서 나를 놔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맨 처음에 당신이 나를 바라본 눈은 저를 아는 눈이었다고요? 게다가 아무리 아스모데우스에게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저를 단칼에 죽이지 않는 것도 모자라서 지배에서 풀어주셨잖아요.”

 

“그건 변덕일 뿐이야. 그리고 나는 아직 너를 신용하는 건 아니거든? 네가 아스모데우스를 좋아했던 싫어했던 간에, 지금은 이 상황이 마무리를 짓기 전까지는 나의 적이라는 범주에 너도 들어가 있는 거야. 그러니 빨리 3층으로 안내해.”

 

나의 말 한마디에 주눅이 들은 릴리스는 아무런 말 하지도 못하고, 3층으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3층에는 오히려 1층에서 볼 수 없었던 회랑으로 꾸민 복도. 그 앞에 있는 문을 보며 릴리스가 입을 열었다.

 

“저 앞에 아스모데우스의 방이에요.”

 

나는 신사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다.

정말로.

 

“이런 문이 안 열리네.”

 

“네? 문고리를 잡지도 않았으니 열리지 않...”

 

-파아앙!

 

“이제 열렸네.”

 

“어째서 발로 차서 여는 건가요. 당신은?”

 

릴리스가 나의 행동에 트집을 잡고 있었지만, 거대한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레프리시아의 모습이 내 눈에 먼저 띄었다. 이건 그냥 대놓고 ‘미끼를 물어달라’라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외에도 주변에 있는 함정으로 추정되는 장치가 5개.

 

“여기에 오면 대체적으로 하늘에서 뭐가 떨어지냐?”

 

릴리스를 바라보고 물어봐야 했다.

 

“하늘에서 뭐가 떨어진다니?”

 

“주변 환경을 둘러보았을 때 저 까마득한 천장에서, 뭔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듯이 이상한 마찰소리가 들리거든. 아니. 그냥 네가 직접 보는 것이 더 좋겠다.”

 

세발자국 정도 걷자. 침입자를 가두는 우리가 하늘 위에서 떨어지기 시작했고, 왼쪽으로 피했을 때는 발판이 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보이지 않는 뿜어져 나왔다. 그걸 피한다면 다음에는 그물이 떨어지고, 피하기 위해서 발 아래를 살펴보면 올가미가 있는 형식. 비살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함정들이 곳곳에서 나를 반겨줬지만, 마지막 짐승의 발목을 잡는 덫까지 박살낸 뒤에 침대의 앞으로 나아갔다.

 

마나로 눈을 강화해서 레프리시아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불결한 위화감이 감지되었고. 아공간에서 물고기를 꺼내 그 앞에서 해체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너도 슬슬 힘이 되돌아왔을 텐데 일일이 묻지 마라. 내 예상이지만 아스모데우스가 레프리시아를 꿈속에 가둬놓고 어딘가에 숨어있어. 너처럼 제약을 걸고 저주를 걸기에는 내가 돌파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는지, 아니면 레프리시아의 저항이 너무 심했는지 힘이 약해진 상태거든. 그거라면 확실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물고기의 심장과 간을 빼내고는 정령의 친화력은 시간을 이동해도 떨어지지 않으니, 불의 정령에게 부탁해서 심장과 간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고 2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챙그랑!

 

“마나 캐논!”

 

소리가 들리자마자 마나를 응축해서 그 지역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불가시마법이 풀려버린 아스모데우스는 잦은 상처와 얼굴에 멍이든 상태로 발견되었다.

 

“레프리시아를 납치하려고 했을 때. 꽤 애를 먹었나 보네. 얼굴에 멍까지 있는 걸로 봐선 말이야.”

 

“빌어먹을! 물고기의 내장을 태우다니! 제정신인가!”

 

여전히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에서는 거침없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솔로몬의 악마 중에 아스모데우스라는 동명 이인이 있는데. 혹시 몰라서 대천사 라파엘이 사용한 방법으로 물고기의 심장과 간을 태웠더니, 이 녀석도 성급하게 도망치려고 하다가 물건을 건드려서 위치가 발각된 것.

 

“확실히 물고기의 내장을 태우는 건 제정신이 아니지. 그런데 말이야.”

 

아스모데우스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려서 내 눈과 마주하게 했다.

 

“너야 말로 제정신이냐?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레프리시아를 납치하는 그 결과가 어떤지 알려주도록 하지.”

 

“어라? 여긴 어디지? 선생님? 뭐하세요?”

 

뒤에서는 릴리스가 레프리시아를 깨웠는지 잠에서 일어나자마자 나를 찾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곧 끝나니까.”

 

굳게 쥔 오른손에 마나를 과도하게 응축하기 시작했다. 새벽의 빛이 한 가득 차오르기 시작한 주먹과 내 눈을 직시한 아스모데우스는 기겁하면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아스모데우스에게 말했다.

 

“괜찮아. 살살 맞으면 안 아프겠지!”

 

-파아아앙!

 

“흐아아아악!”

 

혼신의 힘을 다해 아스모데우스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그대로 터져나가는 폭발을 뒤로, 아스모데우스는 커다란 비명과 함께 벽을 뚫고 성 밖으로 퇴장 당했다.

 

“멋지다...”

 

 

레프리시아와 같이 있던 릴리스가 작게 중얼거렸는데 신경 끄고 넘어갈 문제인 것 같다.

=============================================================================================

카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강해서 자주 굴러다녔는데...그 기반으로 성장을 해왔더니.

과거에 있는 카일이 괴물이 되어버렸어...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5

439

 

 

 

뭔가 하나에 이렇게 열중한 적이라도 있을까? 잡화점에서는 시간이 안 가서 많이 힘들었는데, 어린 레프리시아의 옆에서 계속 선생님 노릇을 하다 보니 3개월이라는 세월이 지나가버렸다. 당연히 그 3개월동안 꾸준하게 신체를 과거로 보내서 내 몸의 시간은 3개월 전의 그대로. 과거로 되돌아가기 전의 모습이라는 소리. 여기서 내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레시아의 성장속도였다. 마법과 체술이 대부분 나를 뛰어넘기 시작하는 것도 놀랍지만...

 

“선생님! 아무리 실전지향이라고 해도 너무 아프잖아요!”

 

내가 맨 처음에 레시아를 만났을 때는 10대 초반의 모습이었을 터인데, 이제 10대 중반을 넘어선 모습으로 나에게 항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린아이의 티는 벗어 던지고 성장을 하고 있는 건 좋은데. 대체 마족이란 건 뭘 먹으면 단기간 내에 성장을 하는 걸까? 내가 먹인 건 고기와 채소, 과일 밖에 없을 텐데. 저런 모습일지라도 나보다 나이를 많이 먹어서 원래는 저런 모습이어야 하는데, 영양분과 마기가 부족한 터라 몸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나만의 가설을 세워보았다.

 

“실전지향이라는 것은 언제나 연습할 때도 실전처럼 한다는 소리야.”

 

생각을 해보니 레시아가 나의 연습을 도와준다고 해놓고, 죽어라 때리거나 마법을 날린 것은 나 때문이었던 건가? 아무튼 아침에 있던 훈련은 여기까지로 하고, 사브르로 변형시킨 티르빙을 귀걸이로 되돌렸다.

 

“뭐. 이제 슬슬 되돌아가볼까?”

 

라고 했지만 뒤에서 순간적인 살기가 내 쪽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뒤를 돌고 있는 상태에서 급습한다는 거야말로 적절한 실전이라고는 하지만, 이제 익숙해지는 시공의 눈을 개안하고, 1초마저도 10분처럼 느껴지도록 늘어지는 시간 속에서, 레프리시아의 발차기를 피하고 아이언 클로를 사용했다.

 

시공의 눈을 해제하고 앞을 바라봤을 때는 레프리시아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아파아앗! 아파요!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선생님!”

 

“기습을 할 때는 살기를 드러내면 안 되지.”

 

20초 정도 집행을 한 뒤에 바닥에 내려놓았을 무렵. 레프리시아는 자신의 얼굴이 변형이 되었는지 아닌지 양손으로 더듬어서 확인하고 있었다.

 

“빨리 씻기나 해. 아침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네에~”

 

대답은 길게 하는 게 아닌데.

지금은 봐주도록 하자.

 

“그런데 선생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는 선생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레프리시아는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를 풀어 비단결과 같은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걸 보고 있을 틈도 없이, 지금까지 내 이름에 대해 절대적으로 안 물어본 아이가 느닷없이 그 질문을 던지니까. 머릿속에서는 상당히 바빠지기 시작했다.

 

“너는 지금 나를 그냥 사람취급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엄청나게 특수한 케이스의 시간여행자라고만 알아둬. 그래서 내 이름은 절대로 말해줄 수 없는 노릇이고, 파란 경찰박스로 시간을 여행하는 그 사람도 진짜 이름대신‘닥터’라는 이름을 쓰잖아? 그러니까 그냥 나를 부를 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돼.”

 

“하지만 이름으로 부르는 게 편하단 말이에요.”

 

“그냥 내가 내 이름을 까먹었다고 하자. 그러면 더 편하지 않을까? 시공간여행의 후유증으로 그런 거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야지.”

 

“알려주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지. 칫...”

 

그렇다고 알려주기에는 아직까지 위험성이 너무 크니까.

 

“카일도 정말 짓궂어. 3개월 전만해도 어디 딸 바보 마냥 손과 발이 시공의 폭풍으로 사라지는 멘트를 아낌없이 날렸는데.”

 

티아가 나무 위에서 훼방을 놓으며 그 내용은 내가 들을 때마다 우주 높이 이불을 차버리는 흑역사를 들춰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어린아이를 안심시켜야 하니까 그런 말을 한 건데. 그걸로 인해 현재 시간대에 있는 티아를 피해서 안전하게 복귀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빨리 돌아가고 싶은 거 아니었어? 얼마나 오래 있으려고? 이제 슬슬 과거의 마왕님을 독립시키고 빨리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지금 레프리시아는 티아를 인지할 수도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으니, 마음껏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고, 티아에게 대답을 할 때는 텔레파시로 보내야 했다.

 

[아직은 부족해. 이대로라면 그냥 내 옆에 붙어있기만 할 거야. 독립을 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할뿐더러 지금의 마계를 송두리째 바꿔버리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아.]

 

내가 너무 오래 있던 탓에 나를 의지하면서 자라온 레프리시아에게 질문했다.

 

“그나저나 너는 언제 마왕이 될 생각이야?”

 

“아. 그러고 보니 선생님과 같이 살려면 마왕이 되야 하는 거였죠?”

 

애초에 시공간술사가 과거에 오래 있어서 얻는 페널티는 없지만, 어릴 적에 레시아가 품었던 그 야망의 화살은 마계를 바꾸겠다는 그 장대하고 근엄한 목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나와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화살을 가리키고 있었다. 언젠가 사라지는 나를 영원히 붙잡아 놓으려는 듯이. 역으로 마왕만 되지 않으면 평생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어쩔 수 없이 빠른 재촉할 수 밖에 없는데.

 

“레프리시아. 사실 내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라고 말을 시작해도 마왕이 되는 게 아니라, 내 시간을 늘릴 방법을 찾아올 것 같으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시장에나 다녀와야겠군. 따라갈 거야? 아니면 집에 있을 거야?”

 

“씻고 싶으니 집에 있을 거에요. 그런데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저를 상대할 때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게 말이 되요?”

 

마나로 몸을 계속 청결하게 유지하고 있으니까. 레프리시아가 보기에는 싸우는 내내 땀도 흘리지 않는 괴물로 보였나 보다. 분명 레프리시아도 마법을 이용해서 몸을 청결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보다는 목욕을 하는 것이 피부에 더 좋다는 걸 알고 집에서 씻으러 가는 것뿐.

 

“아무에게 열어주지 말고, 만약 문을 부수고 들어온다면 싸울 생각하지 말고 도망가도록 해. 언제까지나 지금은 내가 알려준 방법을 사용하는 건 최후의 최후까지 가서야.”

 

“알았어요. 선생님. 잘 다녀오세요~”

 

여전히 붉은 눈으로 나에게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드는 레프리시아를 뒤로 한 체, 마을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인간 마을로 내려오는 이유야 레프리시아의 성장을 예측할 수 없어서 옷을 훔쳐...아니, 사려는 것이고, 지금쯤은 선물 하나 줘도 된다고 생각했다.

 

티아는 혹시라도 몰라서 레프리시아의 옆을 지켜달라고 부탁을 했고, 3개월째 애용하고 있는 긴 금색가발을 쓸어 넘기고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물건을 구매하려고 했을 무렵이었다. 위화감이 어느새 일을 하기 시작할 무렵...

 

“나야 사람들을 치워주면 계산을 안 하지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한 거 아닌가?”

 

“어떤 것이 너무한지 모르겠네요?”

 

적대인지 호의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릴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까지 10대 중반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긴 은발은 신비로움을 품고, 보라 빛 눈동자는 요염함을 품는다는 말이 적당할 정도로, 남자를 유혹하는 페로몬을 주변에 가득 뿜어내고 있는 몽마.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릴리스는 색욕의 표식을 가졌다고 했는데...

 

아스모데우스는 레시아를 자신의 반려로 삼아서, 자신의 귀중한 전력이 될 거라고 이야기한 걸로 보면, 릴리스는 성장하는 도중에 아스모데우스에게 붙잡혀서 이상한 사술에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마나로 강화된 눈에서는 릴리스 몸 속에 발견된 낙인이 하나와 이상한 기생충처럼 돌아다니는 저주들이 5개.

 

다행인 것은...그 낙인과 저주 때문에 릴리스가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란 걸 잘 알게 되었다. 꿈의 미로마저 설치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몽마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재를 족쇄와 사슬을 채워서 약하게 만들면 안 된다.

 

“당연히 너무하지. 초기에는 내 꿈에 침입하려고도 했었고, 결계도 3개월동안 72번을 건드렸고. 암살을 목적으로 한다면 나에게 집착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텐데?”

 

“그걸 다 알고 있었나 보네요? 저도 당신을 죽이려고 시도를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오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죽이라는 이유는...

아스모데우스의 명령이겠지.

 

“그래도 의문이 드네요. 당신과 같이 정신방어가 너무 높은 사람은 처음 만났는데, 어떻게 하면 그 귀여운 얼굴에서 꼴사나운 목소리가 나오게 하려면, 얼마나 제가 노력을 해야 할지.”

 

“나도 의문이 드는 것이 하나 있어. 네가 아스모데우스 밑에서 일한다는 거야.”

 

“그야 저는 아스모데우스의 약혼자니까요.”

 

약혼자?

 

“그렇군. 이해했어. 다만, 지금 나를 건드리면 가장 후회하게 될 거야.”

 

“애석하게도 저는 몽마중에서는 최상급에 속하...”

 

“마나 캐논.”

 

-파아앙!

 

누가 대사를 끝까지 다 하게 해준데?

선제 공격을 한 사람이 싸움을 지배하는 거지.

 

“이! 비겁한 인간!”

 

릴리스의 검은 실크드레스가 조금 흠이 난 상태로, 일부분은 찢겨져서 새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라? 살아있던가? 그보다 실크드레스는 옷이 잘 찢어지니까 입고 오지 말지. 아니면 저 곳에서 다른 옷이라도 입고 올래?”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릴리스는 오만상을 다 부리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릴리스의 허리에서 뽑아져 나온 사슬검이 나를 포위했지만, 티르빙을 뱀 조종자로 변형시켜서 6개의 사슬이 내 주변을 감싸면서 결계를 치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연약해 보인다는 핑계로 단독으로 나와서 날 처리할 생각을 하는 거라면...”

 

사슬검이 뱀 조종자의 사슬에 얽혀서 무용지물로 만든 상태로 릴리스의 앞에 천천히 걸어나가서, 주먹에 마나를 한 가득 담기 시작했다.

 

“큰 착각이야.”

 

겁을 먹은 이판사판으로 릴리스가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지만 가볍게 고개를 숙여서 피하고는 릴리스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바다색의 마나가 릴리스의 몸 속에서 휘젓고 있는 사이에, 아스모데우스가 걸어놓은 사술부터 조잡한 저주까지 모조리 다 제거하기 시작했고, 새벽빛을 담은 마나가 서서히 허공으로 올라갈 무렵. 모든 사슬을 전부 거두고 나를 가둔 결계까지 전부 날려보냈다.

 

“어라? 방금 나에게 무슨 짓을?”

 

“그야. 낙인도 해제하고 몸 안에 있는 기생충도 제거했고, 주변에 펼쳐진 결계도 싹 날려버렸지. 애석하게도 내가 마나로 눈을 강화하면 기묘한 것까지 꿰뚫어보기 시작하거든. 처음 너를 보았을 때 뭔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협박을 받아가면서 살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네.”

 

릴리스는 고개를 한차례 숙이다가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 아이도. 그렇게 될 거야.”

 

“그 아이?”

 

“당신이 지금 보호해주고 있는 아이 말이야! 이곳에서는 어차피 나는 시간을 끌고 있는 역할이었어. 그 동안 아스모데우스가 직접 그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했다고!”

 

릴리스로부터 실토를 받아낸 나는 다급한 마음에 티아에게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전혀 응답이 없었다. 지금의 티아는 아직까지 실력이 그리 높지 않다는 소리인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그렇군. 시아버지의 허락 없이 딸을 가져간 도둑놈의 최후는 항상 다 똑같던데. 그건 아스모데우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 그러니 릴리스.”

 

나를 직시하고 있는 릴리스의 몸이 작게 떨고 있었다.

 

나는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이라던가, 살의로 가득 찬 눈보다는 드디어 아스모데우스를 합법적으로 때려죽일 수 있다는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스모데우스에게 안내하도록 해.”

=============================================================================================

그나저나 아스모데우스에게 너무 미안하네요. 작가 입장에서는...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4

438

 

 

 

일이 뭔가 제대로 잘못 꼬인 것 같은데 그래도 레프리시아를 보호하는데 1차적으로 성공했다. 그래도 지금은 아스모데우스의 눈에 레프리시아가 포착된 이상, 처음에 마법을 가르쳐 준 것과는 180도 다른 실전지향형 마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기를 이용한 공격과 방어마법의 기초 그런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마기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내 방어마법을 부수기 시작하고 있지만 생각 외로 위력이 장난 아니었는데.

 

-파지직!

 

불과 4번의 공격으로 마법방패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강한 공격을 위해서 충전시간을 늘린다는 선택지는 좋지만.

 

“파쇄.<Smash>”

 

금이 가있는 마법방패가 내 앞에서 터져나가듯 아직까지 마기를 충전중인 레프리시아에게 수천의 조각이 되어 날아갔다. 공격중인 레시아가 다급하게 마법을 중지하고 몸을 웅크려서 눈을 감고 있었고. 아직까지 저 소심한 성격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상황에는 절망하지 말고 침착하게 다른 마법을 사용하라고 했잖아.”

 

“그, 그럴 틈이 어디 있어요! 선생님!”

 

“너는 마기를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어. 너의 의지가 강하게 발현되면 순식간에 창이 되고, 순식간에 방패가 될 수 있다는 걸 계속 생각해. 자신감 있게 나를 쓰러뜨릴 각오로 하란 거야. 그리고 충전시간이 너무 길어 그 마법을 위한 마기를 끌어 모으면서, 다른 마법을 항상 준비해.”

 

레프리시아는 화가 난 듯이 큰 소리를 외쳤다. 아무래도 지식이 계속 쌓이는 마족이라고 해도, 멀티 캐스팅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멀티 캐스팅이라는 건 대부분 사람들이 머릿속에 2가지, 혹은 3가지를 동시에 생각한다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거기에도 한가지 꼼수는 있는 법.

 

“수식을 이용하는 마법은 발동 단어를 말해야 가능하게 되어있고, 영창을 이용한 마법은 말에 힘을 담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지금 레프리시아가 배우고 있는 것은 이미지를 통한 마법이잖아?”

 

그러면 한곳에는 수식을 미리 써놓고 이미지를 그려놓은 뒤에, 그 두 개를 동시에 발현하는 것이야 말로 기만전술까지 가미된 전투방법. 마법으로 이용한 싸움은 상성과 마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걸 깨뜨리기 위해 기만전술이 필요한 것.

 

“아직까지 네가 마왕이 되어서 세상을 어떻게 하기에는 응용력과 자신감이 너무 부족해. 어째서 네가 겁을 먹을 필요가 있는 거야?”

 

“그, 그야...선생님이 저를 지켜주지 않고 어디론가 가버리니까요...제가 성장을 한다면 저를 떠날 거잖아요?”

 

나는 잠깐 말을 멈추고 울먹거리고 있는 레프리시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작고 여린 아이를 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 아이를 안심시키는 말을 고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선생님의 즐거움은 네가 성장을 해서, 바보 같은 마계를 뒤집어 엎어버리고 새로운 마왕이 되어주는 거라고? 어느 정도 성장하면 앞으로는 너의 길을 가는 거지만, 언제나 멀리서 너를 항상 지켜볼 거란다. 마왕이 될 녀석이 울보라서 정말 손이 많이 간다니까.”

 

숨죽여서 울고 있는 레프리시아를 눈물을 닦아주고, 레시아의 자존심을 올리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있을까? 라고 생각을 했는데. 마법을 이용하지 않은 체술을 가르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언제 돌아가지? 체술까지 다 알려주면 1~2주가 아니라 최소 2년은 잡고 가야 하는데?

 

“정말 고생이 많네? 프린세스 메이커는 잘 되어가고 있어?”

 

분명 결계마법에 탐지된 적이 없었는데? 내 머리 위에서는 기묘한 빛을 뿌리고 돌아다니는 티아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선생님? 허공은 왜 보고 있어요?”

 

“어? 아, 아니 아무것도.”

 

생각을 해보니.

요정은 순수한 동심을 가진 사람은 인지할 수 없다고 레시아가 말했었지?

 

[티아. 여긴 대체 어떻게 온 거야? 그리고 프린세스 메이커라고 하지마! 큐브도 없이 키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나는 이곳 시간대의 티아 메르세데스야. 미래에 있는 나에게 전달 받았거든. 지금 잡화점 안에는 카일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시간 잠금을 걸어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으니, 잡화점은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 해주려고 왔어. 그런데 의외네. 마왕님의 성장계기가 카일과 관련이 있다니 말이야.]

 

[그렇군. 예전에 내가 몽환의 숲으로 왔을 때.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나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답. 이라고는 말해주고 싶지만 언제나 시간적인 모순이 생겨나지 않도록, 카일이 돌아갈 때 이 기억은 지워지도록 설정되어있거든. 지금은 카일을 알고 도와줄 수는 있지만, 카일이 본래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면 지워져.]

 

나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그럼 지금 레프리시아에게도 그와 같이 해줄 수 있어? 내가 본래 시간대로 되돌아가면 나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도록 말이야.]

 

[그건 내가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카일의 존재 자체가 그렇게 만드는 거야. 카일은 시공간술사니까. 그러니 카일이 되돌아간다면 자연스럽게 카일과 만난 사람들은 그 기억이 지워지게 될 거야.]

 

그렇게 된다면 시간적인 모순이 나오지 않도록 자동으로 기억을 소거하는 건가. 그거라면 일단 한차례 안심이 되는군.

 

“선생님? 누가 있어요?”

 

“지금 우주인으로부터 전파를 받았...아니, 아무것도 아냐. 레프리시아의 소심한 성격을 고쳐줄 수 있는 훈련을 생각했거든.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 저녁을 만들고 있을 테니 씻고 잘 준비를 해.”

 

레프리시아와 같이 손잡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 따듯하게 데워진 물 안에 들어가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좁은 집에서, 주변에 식용으로 먹을 수 있는 풀. 그리고 나도 모르게 시장에서 훔쳐온 과일들. 그리고 레시아가 잡은 거 말고, 내가 잡아온 멧돼지 고기를 노릇하게 굽고 있었다.

 

“카일은 정말 치밀하네. 언제 자신이 사라지는 걸 알고 이름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시킨 거야?”

 

“그건 솔직히 우연이야. 과거에서 내 이름을 말하면 시간모순이 생겨나니까 조심하자는 차원이었지. 그런데 티아의 말을 들어보면 사라지는 것은 나에 대한 기억과 이름뿐이지, 어린 레프리시아를 보살펴준 선생이라는 존재는 어렴풋이 남아있게 해야 해. 여태까지 내가 알려준 것이 있는데 그걸 다 까먹어버리면 안 되니까.”

 

내가 돌아갔을 때는 리셋이 되면 안 된다. 레시아도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데모르테를 잃고 살아온 성장과정을 이야기 한 적이 없었는데, 내가 되돌아가면서 기억에 지워진 여파라고 볼 수 있으니까. 그래도 저렇게 성장을 시키기 위해 발판이 되어준 미래의 나에게...생각을 해보니 가위바위보에 대한 재앙은 내가 스스로 판 무덤이었구나.

 

“선생님? 뭐해요?”

 

“아무것도 아냐. 갈아입을 옷은 서랍장 안에 있으니까. 빨리 입어. 발가벗고 돌아다니면 감기 걸린다.

 

“네!”

 

뒤도 돌지 않고 요리에만 시선을 집중한 체 레프리시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옷도 당연히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훔쳐왔는데, 아공간을 이용한 도둑질은 아무래도 그 마을에는 없던 사례인가보다.

 

“선생님? 그런데 이 옷은 어디서 난 거에요? 과일도?”

 

“요정 여왕님께서 선물해주셨단다.”

 

“잠깐? 카일! 왜 나에게 뒤집어 씌우는 거야!”

 

내 어깨에 앉은 티아가 소리쳤다. 티아의 머리색상이 달밤에 물들어 은색을 내비치고 있는 동안, 티아의 몫은 몰래 따로 빼놔서 주방에 놓은 뒤에, 남은 음식들은 식탁에 가져갔다.

 

“우선 많이 먹어둬라. 레프리시아. 내일은 몸이 직접 굴러야 할 거야.”

 

“네?”

 

“마법에만 특화가 되면 상대를 제대로 이길 수 없어. 상대는 너보다 최소 3자리수 이상을 먼저 살아온 마계공작과 마왕이야. 그런데 그런 충전시간이 긴 마법으로 맞아주지도 않고, 가까이 가서 제압하기만 해도 손쉽게 지는 거야.”

 

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루 정도 배웠는데 벌써 이 정도까지 나아간 걸 보면, 무지하게 빠른 성장속도가 맞다. 실전지향으로 계속 가르쳐나간다면, 빠른 시일 안으로 상급마족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고, 내가 거기서 조금만 더 도와준다면 마계공작과 동급인 최상급 마족에 도달하는 것은 20일도 안 걸릴 것 같다.

 

체술까지 병행해서 알려주면 2년도 아니고 2개월만에, 그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최정상에 군림해있지 않을까? 그 중간과정에서 방해되는 녀석들은 전부 견제하면서 말이지.

 

“그러니 내일은 혹독하게 가르쳐주도록 하지. 물리적인 타격과 마법이 병행한 마계 CQC를!”

 

“마계 CQC? 그런 게 있어요?”

 

순진무구한 붉은 눈동자가 의아스러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분명 레시아에게 들었을 때는 마계 CQC라고 들었는데?

 

“뭐. 내가 아는 지인이 있다고 하더라. 아무튼 밥 먹고 푹 자둬. 내일은 상처가 좀 많아질지도 몰라.”

 

그러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산 주변에 있는 약초를 캐와야겠군.

 

“그런데 선생님? 오늘 아침에 그 마계공작과 싸우려고 했어요?”

 

나는 당연하듯이 입을 열었다.

 

“그야 널 건들이니까.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관심 있게 지켜보거든. 그 중에서 지금 가장 소중한 존재가 너야. 그러니까 너에게는 훈련할 때만큼은 절대로 적당하게 대할 수가 없어.”

 

그야 당연히 과거에는 나와 레프리시아. 그리고 과거 시간대에 있는 티아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래에 있는 티아가 광폭해지고 있는데?]

 

[티아도 물론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말해줘! 어째서 이게 다 공유가 되고 있는 거야!]

 

레프리시아는 내가 시장에서 훔쳐온...아니, 가져온 잠옷을 입은 상태로, 내 옆에 꼭 붙어서 눈을 감고 얼굴을 파묻었다.

 

“괜찮아요. 선생님...다 견뎌낼게요...그 대신 제가 마왕이 되면 소원하나 들어줄 거에요?”

 

옷에 파묻혀서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을지 몰라도 지금 레프리시아의 의지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그런데 마왕이 되면 소원을 들어달라니? 내가 그때까지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뭔데? 우선 들어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해보면 내가 알아서 판단을 할게.”

 

연보라 빛으로 가려진 작은 고개가 들어올려지면서 홍조를 띤 레프리시아가 말했다.

 

“제가 마왕이 되면...저랑 결혼해주세요. 제가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굳이 미래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만큼! 아주 많이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요!”

 

어린 소녀의 고백은 성장하면서 스스로 잊혀지기 마련이다.

미래로 가게 된다면, 이 혼약은 기억에서 없어지게 되는 셈이 되겠지.

그래서 지금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뭐. 그건 마왕이 되야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니까. 내가 사라지기 전에 마왕이 된다면, 그때는 너의 청혼을 받아들여줄게.”

 

이룰 수 없는 어린 소녀의 약속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언젠가는 그 마음이 과거에 있는 나에게 닿을 수 있도록...

 

“그럼 새끼손가락에 약속해주세요.”

 

작은 손이 불쑥 내 앞에 튀어나와 약속을 상징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나 또한 레프리시아의 작은 손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미래에 있는 티아가 폭주하고 있는데?]

 

[네가 티아를 좀 다독여 달라고!!!]

 

 

어째서인지 미래로 돌아가기가 두려워지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지도...

=============================================================================================

과거편을 얼마나 쓸지는 잘 모르겠네요.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3

437

 

 

 

어처구니 없게도 티아가 나를 과거로 내던져버리면서 막상 알아서 돌아오라고 연락을 받은 지 1주일이 지났을 무렵. 꾸준하게 신체를 과거로 돌려보내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과거 시간대에 있는 티아에게 따지면서 현재로 가는 방법이 있었지만, 지금 당장 내가 돌아가기에는 어린 레프리시아가 눈에 밟혔다. 혼자서 살아갈 힘을 넘어서 마왕의 길에 오르도록 하는 것이 이번에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음. 역시나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혼잣말을 늘어뜨리면서 초목이 모두 파괴되고 그을린 자국만 남은 장소를 바라보며, ‘내가 진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 멧돼지를 사냥하고 있는 게 맞는가?’라고 의문이 3번씩이나 반복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레프리시아와 함께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마기가 희미해져서 곧 사라진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나 때문에 몸 안에 누적되어있는 마기가 레프리시아를 성장시킨 것.

 

게다가….

 

“선생님! 멧돼지를 잡아왔어요!”

 

“멧돼지에게 무슨 마법을 날리면 그게 암흑물질로 되는 거냐.”

 

미다스의 사촌이라도 되는 마냥, 사냥을 하면 전부 암흑물질이 되어 돌아오기 시작했다. 만약 주기적으로 내 신체를 과거로 보내지 않았다면, 영양실조로 금방 시들어서 죽어버리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고 있겠지. 게다가 마계공작이 있는 인간마을에 보호자나 레프리시아를 가르칠 다른 선생님을 구할 이유는 없고, 레시아가 어느 정도 성장을 했을 경우 다른 마을에서 찾아주는 것이 좋다.

 

덤으로 그 마을에는 윤회의 조각을 얻을 수 있는 정보나, 아니면 과거에 있는 티아에게 찾아가서 현재로 돌려달라고 하면 좋은 계획이라고 볼 수 있지.

 

“그 멧돼지도 나중엔 네가 다 먹어라. 인간이 먹기에는 이미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니다.”

 

“선생님은 배 안고픈 거에요?”

 

“아사직전의 거지가 저걸 본다면 식욕이 사라져서 굶어 죽을 걸?”

 

암흑물질의 일부를 뜯어먹고도 아무렇지도 않는 레프리시아를 보면서 다시 생각을 했는데, 루니아 누나의 요리는 저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는 소리지? 예전에 레시아가 루니아 누나의 요리를 먹고 기절했었으니까.

 

“선생님?”

 

앞에 있는 레프리시아의 붉은 눈망울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면서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내리면서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나를 걱정하려고 하다니. 1억하고도 2천만년 더 걸리는 짓을...너는 지금 어떻게 혼자서 살아갈지 궁리를 잘 해둬야 해.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니까. 물론 네가 스스로 일어나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는 나나, 아니면 다른 보호자들이 알아서 돌봐줄 거라고 생각해.”

 

“선생님이 계속 곁에 있어주면 안 돼요?”

 

레프리시아의 작은 손은 여전히 바지자락을 잡고 불쌍하게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늘 말해왔듯이 나는 미래에서 건너왔어. 내가 미래로 가게 된다면 계속 같이 있어주지는 못해. 내가 나의 시간대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너를 보살펴주긴 할 거야.”

 

이렇게 말해주면서도 계속 같이 있어 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시아에게 제안을 했다.

 

“그럼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정하자.”

 

“가위바위보?”

 

아직 어린 시절이라서 가위바위보를 모르는 건가? 어쩔 수 없이 상세하게 나는 주먹을 쥐면서 가위바위보에 대한 규칙을 설명했다. 3가지 형태에 따라 물고 물리는 간단한 경쟁은 어린 레프리시아가 이해하는데 5초의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가위바위보야 말로 약자나 강자를 나누지 않고, 손만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한 투쟁이라는 거야. 지금의 나와 레프리시아의 전력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마법으로 대련을 한다면 십중팔구로 지게 되겠지만. 이런 가위바위보를 통해서 간단한 손 모양으로 날 이길 수 있다는 거지.”

 

“해볼게요. 그런데 뭘 정하는 거에요?”

 

레프리시아의 질문에 예약된 단어들을 입으로 내뱉었다.

 

“가위바위보에서 네가 이기면 너의 소원대로 어디에 가지 않고 계속 곁에 있을 거야. 다만, 내가 이긴다면 너는 빠른 시간 안으로 강해져서 날 뛰어 넘어야 해. 그렇든 그렇지 않든 나는 돌아갈 기회가 된다면 곧바로 사라질 거야.”

 

그렇게 가위바위보를 시작했고 작은 손이 가위를 냈을 때 나는 주먹을 내서 이겼다.

잠깐? 이겼어? 드디어 레시아에게 1승을 가져갔다고?

승률이 그나마 0%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올랐다니!

비록 어린 시절의 레시아지만 그래도 이긴 게 어디야!

 

“크크큭! 크하하하핫!”

 

기쁨에 통제되지 않는 나는 광소를 온 세상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사실 시작부터 약속을 지키지 않을 생각으로 멋대로 이야기 한 거지만, 졌을 때는 뭔가 수많은 대비책을 생각해야 했는데, 이겼으니까 그런 까다로운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상황을 봐서 내가 돌아가도 별 탈이 없을 정도로 레프리시아가 성장을 하면 그때 돌아간다.

 

“우으...”

 

“자. 레프리시아. 벌칙이야.”

 

“벌칙?”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그 사람은 벌칙을 받게 되어있지. 아까 내가 제안한 거하고는 별개의 내용이니까. 이건 꼭 참고하도록 해.”

 

나는 레프리시아의 볼을 꼬집으면서 살짝 늘렸다. 말랑말랑한 볼이 늘어나기 시작함에 따라 레프리시아의 목소리와 비명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아파! 아파요! 선생님! 아프다니까요!”

 

“매번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이렇게 당할 것이다! 어떠냐! 가위바위보에 무서움이!”

 

벌칙이 끝나자 빨개진 두 볼을 어루만지며 달래고 있는 레프리시아의 모습을 뒤로 하고, 슬슬 마을로 내려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마을로 내려가는 이유는 레프리시아에게 세상을 구경시켜준다는 목적보단, 지금 당장 돈을 구할 곳이 없어서 벌어들일 수단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한들 대체 뭘 하면서 돈을 벌지?”

 

“원래 산에서 허름한 집으로 거처를 삼은 이유는 자급자족을 하기 위함이 아닌가요? 선생님이라면 분명 욕심도 없고 수수하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애석하게도 인간은 욕구와 욕망에 이끌려 사는 동물이란다.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한 경우가 많지.”

 

레프리시아와 손을 잡고 마을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마법이야기라면 마법이야기, 사람에 대한 이야기나 세상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내가 일부러 피하고 있는 이야기라면 나에 관련된 모든 것. 마을에 있는 시장에는 정말 마계공작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부한 먹거리나 옷들이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를 섬기는 사람들은 보물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았는데, 마계공작의 영토라서 그 영향이 일반사람들에게도 끼치는 모양이다. 그걸로 사치를 하게 되고 유흥에 써버린다면 이 마을의 순환구조는 대략적으로 파악완료.

 

“이곳은 돈을 벌어먹고 살기에는 좀 힘든 구조였군. 정말 네 말대로 그냥 산에 올라가서 자급자족하고 사는 게 더 좋겠다.”

 

어쩔 수 없이 한 바퀴만 돌고 해산하려고 했을 때.

 

“혹시 여행자이신가요? 최근에 이상한 사람이 출몰한다고 들었는데?”

 

내 앞에는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주변에 있는 마을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으로 보아 나는 조용히 말했다.

 

“색욕의 공작인 아스모데우스로군.”

 

무의식적으로 레프리시아의 강하게 붙잡고 직시하게 시작했다. 하늘 빛의 눈동자와 짙은 푸른 색의 머리는 가르마를 한쪽으로 내고 앞머리를 빗어 올려서 고정이라도 시켰는지 광택이 나기 시작했다.

 

“설마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만으로도 눈치채시다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통 머리부터 조아리며 살려달라고 비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오해를 사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혹시나 딸 아이 앞이라고 허세를 부린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허세를 부리는 건 내 앞에 있는 상대의 빈틈을 만들기 위해서지.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허세를 부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그보다, 이 아이를 노리고 온 거라면 이곳이 사라져도 좋다는 생각을 좀 해둬야 할 거야? 너희들 마왕군은 어차피 오합지졸이니까.”

 

마왕군을 거론하자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은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희 마왕군에 대해서 잘 아시네요. 혹시라도 물어보는데 마족은 아니신 것 같고...?”

 

“인간은 맞아.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애는 마족이 맞지.”

 

“그런데도 인간이 마족을 기르시다니 꽤나 무섭겠네요. 마족은 언제 어디서든 지식이 쌓이기 시작하는 생물. 인간에 대한 추잡함이나 불결함에 대해 알게 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먹어 치우려고 할 것 같은데요? 마족의 힘의 원천은 남을 희생시키는 것이니까요.”

 

잔인하게 웃고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시선은 나에게서 레프리시아에게 옮겨졌다.

 

“어린 아가씨? 이런 인간 밑에 길들여지면 훌륭한 마족이 될 수 없단다.”

 

미묘하게 빛나고 있는 아스모데우스의 눈과 마주한 레프리시아는 급하게 내 다리 뒤에 숨었다.

 

“어라?”

 

“미안하게도 너의 매료를 뿌리치고 나에게 숨은 걸로 보아, 나에게 길들여져도 훌륭한 마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승리의 미소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승리는 이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보면 되겠지.

 

“설마 이런 시시한 말싸움으로 나에게 말을 걸은 거라면 무척이나 실망할 것 같은데. 아스모데우스. 나를 멈춰 세운 이유라도 있지 않던가?”

 

“멈춰 세운 이유는 언제까지나 장래가 유망한 그 어린 소녀를 제 밑으로 위함일 뿐.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제 매료에도 걸리지 않을 만큼 성장한 아이라면 더욱 더 탐이 나긴 하군요.”

 

탐이 난다는 것은 레프리시아가 나중에 마왕이 될 그릇이란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다는 건가? 확실히 지금 20대 중반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성이지만, 얼마나 살아왔는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오래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쪽은 이 아이의 잠재능력을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나 봐?”

 

“당연하죠. 제 매료를 피해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상급마족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라면 오히려 저의 반려가 되어, 저의 야망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죠.”

 

“반려? 난 그 결혼 반대인데?”

 

귀걸이에 있던 티르빙을 빼낸 뒤에 사브르로 변형시키고 아스모데우스에게 겨누며 말했다.

 

“시아버지에게 잘못 보이면 큰일난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나? 애초에 너 같은 녀석에게 이 아이를 맡길 바에, 서벌캣에게 던져서 새로운 프렌즈를 만들어주는 게 좋겠어.”

 

마계공작에게 이런 식으로 막 나가는 사람은 없겠지만...그래, 있다면 나 하나 뿐이겠지만,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레프리시아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싸울 준비를 하려고 하고 있었다. 상대도 나도 전력차이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섣부르게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 아스모데우스가 현명하다면 지금은 순순히 물러날 것이다.

 

굳게 다짐한 내 눈을 마주하며 한숨을 내쉰 아스모데우스 옆에,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서 나를 더 기겁하게 만들었다.

 

“아스모데우스 님. 슬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아. 릴리스 미안해. 친절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

 

 

달빛보다 요염한 기다란 은발, 남자가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보라 빛의 눈동자. 그런 릴리스가 내 앞에서 적대하며 아스모데우스에게 곁에 서 있었다.

=============================================================================================

레인보우식스 시즈하다 늦었어요.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48 - 2

436

 

 

 

인간계로 왔다는 증거로는 마나들이 나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 마나와 친화력이 뛰어난 몸이 내 주변으로 소용돌이를 치기 시작하면서, 돌아가는 방법도 듣지 못하고 과거에 온지 대략 1시간정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과거로 간다는 것은 의외로 위화감이 송곳처럼 온 몸을 찌르기 시작하는데, 그건 내가 과거를 섣불리 건드려서 미래를 바꾸면 안 되기 때문인데, 마티가 과거에서 얼마나 많이 고생을 했는지 나도 이제 슬슬 공감하고 있었다.

 

“마계에서 대체 얼마나 못 먹었길래, 빈 그릇이 천장을 받칠 새로운 기둥이 되어버린 거냐?”

 

성장기라고는 하지만 저 어린애의 뱃속에 다 들어갔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대략 50인분을 혼자서 처리하는 모습에 그나마 비상금으로 들고 온 20골드가 전부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어차피 나도 시공간술사라서 레시아 몰래 만든 아공간이 존재하긴 하는데, 거기에는 비상금과 루니아 누나의 폭주에 대비해서 갈아입을 남성용 옷이 있었다.

 

시공간술사는 3개의 시간대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으니, 현재 있던 재화를 과거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좋았다.

 

“배부르냐?”

 

“맛있어. 따듯해. 흐윽…!”

 

너무 맛있어서 우는 거냐. 이 나이에 있던 레프리시아는 얼마나 감수성이 풍부한 거야? 게다가 마나로 눈을 강화해서 상대의 마기를 체크해봐도 터무니 없이 작은 마기였다. 확실히 마계에서 나를 습격할 때도 마법이 아니라 몸을 던져서 습격을 해왔으니까. 마땅한 선생이 없다는 소리가 되겠군.

 

“내 생각으로는 네가 살아가는 것 중에 2가지 방법이 있어.”

 

“2가지?”

 

똘망똘망하게 나를 바라보는 붉은 눈을 가신 소녀에게 방향성을 제시했다.

 

“하나는 네가 제대로 살 수 있을 때까지 너를 가르칠 스승을 찾는 것. 지금 마계에는 네가 살기에는 너무 잔혹한 세상이야. 그 바보 같은 약육강식에서 어이없이 생명이 사라지는 꼴은 듣기만 해도 끔찍하니까. 두 번째는 너를 보호해줄 사람을 찾는 거야. 보호해줄 사람을 찾는다면 어떻게든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하고, 죽고 죽이는 삶에서 아주 살짝 떨어져서 지낼 수 있어. 어느 하나의 조건이라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꽤나 힘든 일이 되겠지.”

 

“오빠는 못하는 거에요?”

 

“그럼 당연...잠깐? 너 뭐라고?”

 

“오빠는 내 스승이나 보호자가 될 수 없냐고 물었는데...”

 

잠깐이나마 거대한 한숨 패키지가 내 머릿속으로 찾아와서 받아야 했다. 내가 실로 걱정하는 건 지금 레시아가 너무 순진하게 굴고 있다는 점에서, 이걸 바꿔야 할지 말아야 할지 꽤나 큰 고민이었다.

 

“내가 여기에 장기체류라도 가능했으면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나는 언제 어디서든 미래로 갈 수 있는 시간여행자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마족보다 더 잔인한 것은 인간이야. 인간 중에는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덜 나쁜 사람하고 또 다른 하나는 무지막지하게 나쁜 사람이지.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은 없어. 좋은 사람이라고 보이는 것은 그만한 메리트가 있기 때문에 본성을 숨기는 거야. 그 좋은 사람도 다른 타인이 봤을 때는 언제든지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단다.”

 

“그럼 오빠는 저에게 무슨 메리트가 있어서 좋게 보이는 거에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말 하나 안지는 건 여전하군.

 

“그렇네. 우선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줄 수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마계가 변해서 인간과 기술협력을 한다거나, 천계에 갑자기 쳐들어가서 휴전을 맺을 수만 있다면, 인간과 마계가 서로 싸우는 일을 멈추고, 마계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겠지. 만약 네가 마왕이 되어서 마계를 바꾸겠다고 할 수도 있잖아? 지금 마계는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어린 레프리시아는 작은 손에 들린 포크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설마 내가 마왕이 되라고 부추긴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만...

 

“지금 마계에 가장 큰 문제점은 마왕이라는 직책이 세습되는 구조라는 거지. 마왕은 인간계에 피해를 주고 용사와 여신이 그 마왕을 죽인다. 그러면 그 마왕의 후손은 인간에 대한 증오를 품고 마왕이 되어 다시 인간계에 피해를 준다.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는 원한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인간이 마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거나. 지금 있는 마왕을 탄핵하고 다른 마왕으로 바꾸거나. 그것뿐이네. 의외로 새로운 사람이 일을 더 잘하거든.”

 

무지한 지도자를 내몰아내고 새로운 지도자가 제대로 이끌어가는 세상에는 미래가 있는 법. 여전히 내 쪽으로 쏟아질 듯한 그릇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어. 카일? 들려?]

 

티아의 텔레파시가 부드럽게 내 머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시공간술사만 가능한 텔레파시인데. 제대로 작동하려나?]

 

[들리긴 해. 그래서 나는 언제 미래로 갈 수 있는 거야?]

 

[아. 그게 좀 문제가 생겼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에 설마 미래가 바뀌고 있다거나, 모순이 생겨서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건가?

 

[너무 급하게 과거로 보내버리는 바람에, 이곳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방법은 카일이 알아서 찾아야 할 것 같아.]

 

티아에게 들은 통보로는 내가 미아가 되어버렸다는 소리였다.

 

[아니. 네가 이쪽으로 와서 현재로 픽업한다는 경우도 있잖아?]

 

[부탁해!]

 

오늘따라 머리가 아파지려고 하는데 기분 탓은 아니겠지? 티아가 나를 이곳에 남겨놓은 이유가 있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는 법. 그렇게 되면 내가 어린 레프리시아를 잠깐이나마 돌봐주면서 현재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보호자나 너의 스승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이제서야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찾았거든.”

 

“이유?”

 

내가 있는 시간대에는 없지만 과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윤회의 조각을 찾아야 한다. 윤회의 조각은 뒤틀린 시간을 원상복구 시켜주는 물품. 혹은 자신에게 찾아온 시공간적 재앙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준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간 축을 원래대로 되돌려주는 물품이니까.

 

“윤회의 조각을 찾기 전까지는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 주기마다 내 신체를 과거로 백업해서 계속 이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 이곳에서 1분 1초라도 늙어서는 안 되니까.

 

“그러면 이제 슬슬 움직이자. 계속 앉아 있다가는 소가 되니까.”

 

“저는 소가 안 되는데요. 오빠.”

 

“그리고 그 오빠소리 하지마. 선생이라고 불러. 안 그래도 세간의 눈이 좋지 않는데 너라도 좀 협력해라.”

 

“알았어요. 선생님...”

 

그럼 이제 누구에게 윤회의 조각을 받아올 수 있을까? 시간의 여신에게 “어. 저 여기 잘못 왔는데 제발 좀 돌려보내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아 그러니? 돈 내놔.”라고 들을 것 같아서 가기가 싫다. 시간은 금이라는 소리가 있지만 그럴 바에는 30초안에 세계가 멸망하는 곳으로 떠나갔으면...

 

어쨌든 잠깐 임시거처로 쓸만한 집이라고 한다면, 인간과 마계 사이에 있는 색욕의 공작의 영지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과거에는 대체 누가 색욕의 공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시무시할 만큼의 마성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가 들었다. 한 번이라도 만나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걸을 정도. 생각을 해보면 이때 용사들도 너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 마을은 격전지가 될 거라 생각했다.

 

아까 어린 레프리시아에게 밥을 먹였던 이 마을이...

 

“그럼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임시 거처라도 만들어야겠군. 현재 색욕의 공작은 아스모데우스인가?”

 

소녀는 여전히 내 바지자락을 붙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해서 나는 연보라 빛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산으로 올라가자니 야생동물과 마물들이 들끓고 있어서 그 위치로 잡았는데, 이건 레시아의 훈련을 도와주는 것도 있고 다른 이들이 쉽게 접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내가 보이는 시야에서 활동하는 게 좋을 거다. 인간 마을 하나를 붙잡고 있는 색욕의 공작이 있는 곳은, 의외로 짐승 같은 사람들이 천지에 널려있으니까. 표식을 지닌 마계공작들이 그 성향과 동화하도록 주변을 자연스럽게 물들이는 것.”

 

생각을 해보니 내가 지금 이 모습으로 돌아다닌다면 기록에 너무 자세히 남겠구나.

 

여장은 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남자로 보일 만큼 중성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커다란 붉은 색상의 로브와 머리길이가 어깨까지 오는 블론드 색상의 가발을 착용했다. 변장을 하기 위해 일부는 숨겨놨는데, 확실히 챙겨오는 걸 잘 한 것 같다.

 

“멀리서 볼 때는 꽤나 헷갈리겠지?”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요? 선생님?”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지. 이런 모습이야 말로 상대방을 방심시키기 위함이야.”

 

본심은 과거의 내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있는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업은 시작되었으니까. 지금 당장 이 허름한 집부터 수리하도록 하자.”

 

마침 누군가가 쓰다 버린 듯한 집이 보여서, 조금만 보수를 하고 마법으로 결계를 펼친다면, 생활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레프리시아의 마법 향상을 위해 마법으로 나무를 자르라고 하고, 근력향상을 위해서 직접 도끼로 잘라보라고 시키려고 했지만, 지금은 너무 무리가 있어서 내 옆에 보조역할로 수행하는 것으로 눈감아줬다.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밤에는 레프리시아에게 마법을 알려주는 걸로 하고...외벽을 세웠다면 내부청소를 해야 하지만, 여태까지 잡화점을 청소해오면서 달인의 경지까지 올라가버린 나에겐, 지금 쌓여있는 고물덩어리나 쓰레기 더미는 좌표마법으로 옮기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말하는데, 너 혼자 있을 때는 아스모데우스 앞에서는 절대로 서면 안 된다.”

 

“그건 왜요?”

 

“당연한 걸 내 입에서 나오게 하지 마라. 매료를 당하니까 그렇지! 아직까지는 네 스스로가 자의적으로 풀 수 있는 정신력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해. 수상한 사람이 나쁜지 착한지를 떠나서 이상한 집으로 나도 모르게 따라 들어간다는 거야. 애초에 어린 아이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도 최악이지만...”

 

정신방어가 제대로 되지 않은 레프리시아인 것 같아서 노파심에 말을 해줬다.

 

“조심할게요. 선생님.”

 

또박또박 말을 잘 하는 레프리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다만, 계속해서 느끼는 위화감이라고 전해진다면, 현재의 레시아와 여기 과거에 있는 레프리시아의 압도적인 전력차이는 어떻게 된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지금 시간적인 모순을 낳는 결과가 되지 않을지.

 

“제발 내가 돌아갔을 때는 왠 괴물 하나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시간적인 모순이라면 티아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서 해결하도록 하자. 티아도 시공간술사이니까 그 시간대에서도 해결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잠깐 집도 지어서 피곤한 터라 낡은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데, 내 옆에 버젓이 누워서 올려다 보고 있었다. 레프리시아에게 “왜?”라고 물어보자.

 

“아뇨. 왠지 근처에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것도 있고 친숙한 기분이 들어서요.”

 

“마나의 축복을 받은 체질은 그 사람 주변에서 마나가 소용돌이치고 있지. 게다가 나는 마기와 신성력도 담을 수 있는 몸이니까. 마기마저 휘몰아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이곳은 인간계와 마계의 경계선이니까.”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상 부모도 없고 지탱할 사람도 없는 레프리시아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나라서, 지금 이렇게만 옆에 붙어있어도 심리적으로 많은 안정이 되고 있는 거다. 그 결과로는 누워서 2분정도 대화를 이어 나아가려고 했는데 편안하게 자고 있는 레프리시아의 얼굴. 어린 아이가 마계에서 풀이나 먹으면서, 살아남기 위해 발악을 하는 모습은 종족을 불문하고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

일어나자마자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