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5 - 8

508

 

 

 

벤치에서 쉬고 있는 동안 레시아는 내 허벅지를 베며 행복해하고 있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며 내가 생각하고 있는 파이론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존재했다. 아무래도 잡화점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동향이 없어진 것은 확실하나, 이번엔 초능력자들을 무서워하는 동향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곳에서는 자신이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 숨기려는 모습이 보였다.

 

당연히 마나로 식별이 안 되는 초능력자들을 분간할 방법은 없지만, 마나의 축복을 받은 마법사로서, 마나를 이용한 상황파악과 전장파악에 익숙해진 나에겐, 사람들의 사소한 감정 하나가 뼈에 스며들도록 알아차리고 있었다.

 

“사람은 큰 힘을 가지게 되면 범죄에 써먹기도 하던가요?”

 

“주인이 사람이니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마왕이니 짐은 커다란 힘을 언제나 세계의 혼돈을 위해 사용하려고 했을 뿐이었지만, 선생이 이끌어준 덕에 이런 성격으로 잘도 마계를 이끌었으니 말이다. 그보다 이렇게 있으니 편안하니라. 매일 밤마다 이렇게 붙어서 자면 얼마나 편안한 삶이 될 수 있을지...그런데 왜 주인은 부인만 여럿인데 혼자서만 자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럼 눈을 떴을 때 잡화점 멤버들이 주변에서 같이 일어나라고요?”

 

“싫은 것이냐?”

 

당연히 싫지는 않지만...살짝 볼을 부풀린 레시아의 뺨을 살며시 내 오른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잡화점 멤버가 손만 잡고 잘 일이 없잖아요. 기회만 보면 습격을 하는 사람들이, 총공세로 들어오면 바로 엔딩이라고요. 그 전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는, 레시아는 시나와 사이가 나쁘잖아요. 서로 조금만 의견이 맞지 않아도 합동마법으로 제가 먼저 날아가기 싫어요. 눈을 감았을 때 잡화점이었는데, 눈을 뜨고 보니 파이론에 있는 분수대에 박혀버린 적도 많잖아요.”

 

레시아의 뺨에 살며시 놓여진 내 오른손에 살기가 띄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볼을 잡고 밀가루반죽처럼 늘리기 시작했다. 의외로 피부가 말랑말랑해서 재미있었는데, 레시아는 내 허벅지 위에서 난동을 부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야야! 아파! 아프다! 그만하거라!”

 

“반응이 재미있으니 조금만 더요.”

 

-쉬이익!

 

재미있는 반응을 더 보려고 장난을 치고 있지만, 어마어마한 풍압이 내 앞머리를 조금 잘라버리는 바람에 오른손을 빠르게 놔야만 했다. 장난치다가 죽을뻔한 사실은 언제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레시아는 자신의 왼뺨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주인은 매번 어린애 같아서 문제다! 고귀한 마왕의 볼을 잡아서 늘릴 생각을 하다니!”

 

“귀여우니 그런 거죠.”

 

“흥! 그런 말로 회유해봤자 소용없다. 짐은 마왕이니라. 언제나 다른 이들의 말을 듣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줄 알고,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는 그런...”

 

-쪽!

 

“냐아앗!”

 

본 모습이나 고양이일 때의 모습이나 저렇게 비명을 지르나?

 

“뭐, 뭘 한 것이냐?”

 

“볼에 키스를 한 것뿐인데요? 아파 보여서 사과의 의미로요.”

 

별다른 의미 없이 한 키스라고 할지라도, 레시아의 피부가 아직까지 내 입술에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부드럽고 따듯하게 감싸는 듯한 느낌이, 내 기분을 들뜨게 해줬지만, 곧바로 이성이 본능을 붙잡고 쓰레기통으로 처박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의 평온을 유지한 상태로 붉게 물든 레시아의 얼굴을 마주했다.

 

“주인은 정말 여자에게 강한 건지 약한 건지 모르겠노라.”

 

“레시아가 남자에게 약한 게 아닐까요?”

 

“시끄럽다! 짐은 마왕이니라! 한 없이 강해져야 하는 존재이니라!”

 

귀엽게 화를 내는 레시아를 상대하다가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들이 전부 나와 레시아를 쳐다보면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당연히 그 사이에서 원한과 저주를 퍼붓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레시아. 아무래도 이곳에서 오래 쉬었으니 다른 곳도 가보죠. 마트라는 장소가 있긴 한데. 300년 후의 어떤 건물이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그러지. 짐도 때마침 배가 고팠으니 장을 보는 것이 현명하도다.”

 

4분 정도를 걸어 대형마트라고 적혀있는 장소에 가보니,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각자 물품을 바퀴가 달린 이상한 바구니에 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화폐는 300년전이나 300년후나 바뀐 것이 없으니 상관은 없지만, 마도구로 제작되어있는 얇은 카드 한 장을 주니, 어딘가로 긁어버리고 거스름돈도 주지 않았다.

 

“신기하네요.”

 

“무엇이 말인가?”

 

“저 카드 한 장으로 수많은 물품을 살 수 있다는 거요. 수많은 재화를 담고 움직이기는 어렵고, 분실의 여지가 있으니 저렇게 카드를 사용해서 간편하게 다닐 수 있잖아요.”

 

신기한 물건은 원리가 알면 더욱 신기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부르는 것이 값이라는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무엇을 찍어서 인식을 시키면, 자동으로 값이 나오는 형식인가보다.

 

“300년후라는 시간에서 활동하기 전에, 어느 정도까지 발전을 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네요...레시아? 레시아? 어디 있어요?”

 

고개를 둘러보며 쇼핑에 사용하는 카트를 움직이며 레시아를 찾고 있었는데, 식품코너에서 느닷없이 사람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먹을 것을 올리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편안하게 앉은 레시아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흐음? 고기는 너무 가공되어 목에 넘어가지지는 않지만, 이 소스는 확실히 맛이 있군. 소녀여? 이 소스의 이름은 무엇인가?”

 

“마, 마요네즈 드레싱이옵니다! 마왕님!”

 

대체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오늘 식품코너에 마왕이 강림했다는 소문으로 떠들썩 하기 전에, 사태를 수습하러 카트를 질질 끌며 입을 열었다.

 

“레시아. 주변 사람들의 무릎을 꿇게 하는 건 아니죠!”

 

“하지만 이들은 손님이 왕이라고 했노라. 짐은 이미 마왕이니, 짐을 대접하고 싶다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서 확실하게 대하라고 했을 뿐이다. 그나저나 이 소시지는 맛있으니 이걸 사면 될 것 같노라.”

 

비엔나 소시지? 어디서 나온 소시지야?

그보다 마왕이 무슨 손님은 왕 타령이야.

 

그래도 레시아가 마음에 드는 먹거리가 있으면 5봉투씩 거침없이 집어넣었고, 그럴 때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소리치는 직원들과,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주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확인하는 사람들.

 

그런 시선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레시아의 발걸음은 당당하기만 했다. 아예 이곳 환경에서 모두 적응이 다 된 것처럼 보이는 레시아와는 달리, 나는 아직도 근, 현대식의 구조물이나, 유통상황을 마나로 식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일 뿐.

 

“그런데 주인. 이 모든 물품을 공짜로 얻는 방법이라면, 이 카트 통째로 잡화점에 텔레포트를 시키면 되지 않는가?”

 

“그러면 이곳에서는 재고가 부족하게 되죠. 그리고 사방팔방에 감시를 목적으로 한 카메라가 둥둥 떠있잖아요.”

 

“카메라 따위 속일 수 있다.”

 

“도덕적으로 살아가시죠.”

 

“짐은 마왕이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를 않아요...

 

“어차피 오늘 하루 절 독점하겠다고 했으니, 제 말을 잘 들으면 마사지라도 해 드릴게요.”

 

“마, 마사지? 짐의 몸을 구석구석 만지겠다는 소리인가?”

 

양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면서도 뭔가 기대하듯이 반짝이는 붉은 눈을 향해 소리쳤다.

 

“어떤 인간이 마사지를 그딴 식으로 해석하냐!”

 

그저 어깨를 주물러주거나 두드리거나 그런 거 밖에 안 할 예정이지만, 레시아의 상상에는 이미 선을 넘어가버린 것처럼 보였다. 계산을 전부 다 하고 매장에 배치되어있는 전송 마법으로 손쉽게 보낼 수 있는 기술력으로 보아, 마법사는 전문직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레시아. 전송마법으로 잡화점까지 물품을 보내주세요.”

 

“이 마법진은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

 

“저렇게 공용으로 사용하게 만드는 것은 보안이 취약할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짐이 보기에는 보안이 튼튼한 것처럼 보이다만?”

 

“저희는 눈에 가장 띄면 안 되는 사람들이니까요. 게다가 보안이 아무리 튼튼해도 뚫을 수 있는 사람은 다 뚫고 다녀요. 그보다 기록에 남기는 것도 좀 그렇고...”

 

“주인의 말대로 하겠노라. 그전에 잠시...”

 

레시아가 내 손을 깍지를 끼며 붙잡기까지는 의도를 전혀 몰랐지만, 내 안에 있던 에너지와 주변에 있던 마나를 끌어 모아, 공간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뽑혀나간 터라 살짝 현기증이 일어났지만, 두 다리가 쓰러지지 않고 지탱해준 덕분에,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이걸로 먹거리가 가득 넘치겠군. 정말 다행스럽게도 300년이 지난 재화를 사용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옛날에 선생이 왔을 때는 재화를 사용할 수 없어서, 도둑질을 밥 먹듯이 했던 때가 떠오르는군.”

 

“레시아도 도둑질을 했어요?”

 

“아니. 선생이 모조리 다 가져왔다. 음식부터 옷, 심지어 장작이 필요하다고 남의 수레까지 훔쳤었지.”

 

아니! 수레까지 훔친 적 없거든! 이상한 이야기로 각색하지마!

 

“그 간사하고 사악하면서도 냉철한 그 모습을 감명 깊게 봤노라. 그나저나 이상하군...”

 

“뭐가요?”

 

“때때로 주인이 선생과 자주 겹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요? 저처럼 착한 사람이 간사하고 사악하면서도 냉철한 모습을 보여준 일이 없잖아요?”

 

하지만 레시아는 고개를 좌우로 작게 흔들고, 진지하게 눈을 마주하면서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짐은 주인이 잡화점을 시작할 때부터 지켜봐 온 유일무이한 존재이니라. 그러니 짐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 혹시...”

 

“혹시?”

 

설마 레시아가 릴리스처럼 자각하기 시작한 건가?

 

“선생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네?

아니...독백으로 하는 게 아니라.

 

“네?”

 

“선생도 최소 60년의 세월 동안, 다른 여자와 눈이 마주쳐서 자손을 남겼다면 이야기는 잘 이어지는 것. 그 증거로 주인과 선생의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는 공통점과, 마나의 성질까지 같은 것이라면, 주인이야 말로 선생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럴싸한 레시아의 결론을 듣고 어이가 지금 지옥으로 가려고 했지만, 간신히 붙잡아 머릿속으로 집어넣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뭐, 내가 선생으로 밝혀지든 아니든, 지금처럼 행복한 시간이 많이 흘렀으면 좋겠지만...

 

-타앙!

 

“모두 멈춰! 지금부터 움직이는 녀석들은 다 쏴버리겠어!”

 

마법공학으로 이루어진 소총을 하늘 위로 발포함과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와서 강도 짓을 하는 건 드문 이야기인데, 대략 6인으로 구성된 남자와 4명으로 이루어진 여자 강도가, 구역을 장악하기라도 하듯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레시아와 나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눈에 별로 띄지 않도록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쳐 못보고 지나가는 것처럼 3명이 지나가고, 다른 한 명이 우리를 알아챈 듯이 총구를 겨누면서 소리쳤다.

 

“너희들도 엎드려! 데이트는 끝났어!”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레시아의 흥미만 더 돋구고 있었을 뿐.

레시아가 먼저 움직이는 것을 막지 못한 나는, 눈 앞에 있는 참상을 그대로 목격해야 했다.

 

파드득!하고 물건이 부셔지는 소리는 레시아의 하얀 손이, 소총을 부러뜨리면서 남자의 가슴을 팔꿈치로 힘껏 후려쳐, 가슴뼈까지 부러지게 하는 소리였다. 두 소리가 동시에 겹쳐서 나올 정도로 상당히 빠른 대치를 시작으로, 나 또한 몸을 움직여서 레시아의 뒤를 노리는 강도를 제압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짐은 마왕이기에 총구와 칼을 겨누는 자들은 윤허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너희들은 짐에게 적대심을 보였으니, 너무 불쌍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구나?”

 

어마어마한 고통에 비명밖에 지르지 못하는 남자와 그걸 깔보듯이 말하는 레시아에게, 다른 8명이 마탄을 발포했지만, 레시아가 두르고 있는 마기는 우습다는 듯이, 모조리 상쇄하거나 흡수하고 말았다.

 

“괴, 괴물이야! 여기에 괴물이! 커헉!”

 

“괴물은 나약한 민간인을 괴롭히는 너희들이 아닐까? 총을 들어서 죽일 각오가 되어있다면, 더 위험한 녀석들에게 죽을 각오도 되어있겠지?”

 

3명째 제압을 한 내가 조용히 말하자, 한 여자 강도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손으로, 총을 나에게 겨누기만 했다. 이들은 전문적으로 범죄를 일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제까지만 해도 선량했던 민간인이었던 것.

 

이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천장에서 구멍 하나가 뚫리더니 춤추듯 내려오는 레인의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꺼림칙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서 그런지, 목소리가 살짝 묻히는 감이 있지만, 내용전달에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카일 씨와 마왕님께서는 이 지역에서 이탈해주세요. 곧 특수수사관들과 미화원들이 죄다 집결할 테니까요.”

 

특수수사관이나 미화원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레인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레시아를 내 옆으로 불렀다.

 

“나중에 전부 이야기 해줘야 한다.”

 

“그럼요!”

 

 

레시아와 내 발 밑에 마법진이 생긴 이후로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지만, 그 사이에서도 레인은 샤프를 꺼내, 샤프심으로 마탄을 상쇄하면서 전송이 완료될 때까지 지켜줬다.

=============================================================================================

내일부터는 기술배우러 가야하네요...

글은 어찌 되려나...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약속

지켜지지 않을 약속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진씨를 화장하고 나오는 길에서였다. 알게 된지 일 년밖에 안돼서인지 장례식에 온 몇 안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낯설었다. 거의 빛바랜 양복을 입고 있었고 거의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녀는 점자 도서관에서 일을 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시각 장애인 남자친구를 사귄 이후로는 그곳에서 일을 하는 것이 일종의 사명감처럼 보일 정도였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감각이 엄청 예민해진대요.” 어느 날 수진씨가 말했다. 손에는 ‘예쁘게 말하기.’ 따위의 책이 몇 권 들려 있었고, 처음 보는 반지를 끼고 있었다. “준호씨는 목소리에 예민할 테니까.”하고 말 끝을 흐리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수진씨처럼 웃고 싶어서 거울을 보고 연습해온 표정이었다. 입꼬리를 쭉 늘리고 광대를 올린다. 이가 고르지 않은 탓에 입술은 꾹 다문 채로였다.

 

 

수진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막 남자친구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영화처럼 물 잔을 떨어뜨려 깨트린다거나, 벨소리에서 정체 모를 불안감 따위를 느꼈다거나 하는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수진이가 그만..” 하는 수진이 어머님의 울먹임에 방금 먹은 파스타가 속에서 어지럽게 얹혔다. 꼭 알러지 약을 다섯 개쯤 삼켰을 때만큼의 몽롱함이 위액과 함께 목을 타고 올라왔다.

 

 

장례식장에 가는 택시 안에서 그동안 한 번도 바르지 않은 립스틱을 꺼냈다.

 

 

“이거 소연씨 쓸래? 예전에 선물 받은 건데 한 번도 안 썼어. 나랑 안 어울리기도 하고, 어차피 준호씨 만날 때는 안 바르니까.”

수진씨의 손에는 ‘MAC’이라고 적힌 립스틱이 들려있었다. 그것은 반년쯤 전에 나온 리미티드 에디션이기도 했고, 며칠 전 갖고 싶은 색이라고 SNS에 적어놨던 것이기도 했다. 그날 수진씨는 삶의 공평하지 않음에 대해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은 사람들과 그들이 포기해야만 했을 많은 것들에 관해서였다. 반쯤은 끄덕거리면서, 반쯤은 “응”소리를 내면서 듣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제야 수진씨는 목을 가다듬고 “나 준호씨한테 프러포즈 받았어.”하고 말했다. 그리곤 예쁘게 웃었다. “축하해.” 나는 그녀가 어떤 대답을 했을지 표정으로 먼저 알았다. 그녀는 이미 눈이 보이지 않는 남편과 살게 되면서 겪을 모든 고단함들을 감싸 안을 각오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문장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수진씨의 웃음은 내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사랑. 그 자체였다.

 

 

장례식장에 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그날 하다만 ‘삶의 공평하지 않음’에 대해 생각했다. 왜 하필이면 둘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 이제야 겨우 삶의 고단함을 함께 할 사람이 생겼는데, 대체 왜.

 

 

결혼식은 올리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그 대신 부모님과 주변 사람 몇몇을 불러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꼭 와서 축하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옆에 앉은 준호씨는 감긴 눈꺼풀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 웃는 얼굴이 꼭 수진씨를 닮아서 괜히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꼭 갈게. 꼭 갈게요. 준호씨”

그날 나는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접시 세트를 골랐다. 식탁 앞에 앉아있는 준호씨와 그런 준호씨를 보면서 웃고 있을 수진씨의 표정을 상상하면서.

 

 

나는 그들이 나눴을 수많은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에 관해 생각했다. 휴일이면 한 시간씩 걷는 걸 좋아하는 수진씨를 위해 신혼집은 공원 근처로 잡았다고 했는데, 추석 연휴가 길어서 신혼여행은 그때 가면 좋겠다고 했는데, 같이 할 수 있는 취미를 찾겠다고 했는데.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5 - 7

507

 

 

 

아리엘이 만족한 얼굴로 카페에 파르페를 만끽하고 있는 시간에, 잡화점에서 내가 없어진 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할지 알고 싶지 않았다. 분명 모든 공간을 뜯어내면서 살기가 가득 찬 모습으로 만날 생각을 하니, 공포라는 단어가 실체가 된 기분이겠지. 파르페가 바닥까지 드러나면서 내 스푼도 멈췄다. 이제 아리엘을 그만 떠먹여줘도 된다는 해방감이, 내 왼팔의 노동을 중단시키고 창밖에 있는 구름이나 봤다.

 

“오빠는 나보다 구름이 더 좋아?”

 

“아직까지 사람이 있어서 그러는 건 이해하겠다만, 요즘 뭐냐? 욕구불만이냐?”

 

“그런 거지. 느닷없이 이곳으로 눈을 떠서, 그나마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하나는 사건을 일으킨 주 범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너무 늦게 온 바람에 이미 결혼을 했으니까.”

 

“약 300년간 갇혀있었으니 선택을 해야만 했겠지.”

 

좋아하는 사람을 300년간 기다릴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거야 말로 전설 속에서나 내려올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이겠지만, 애석하게도 빅터는 그런 주인공이 아니었고, 아리엘 또한 히로인이 아니다.

 

인간의 수명은 역시나 짧고 강렬하게 빛나는 것이지만, 아리엘의 경우에는 몽마라서 얼마나 더 오래 살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빅터가 눈에 아른거려서 괴로워?”

 

“그야 당연하지. 내 목숨을 처음으로 구해준 사람인데.”

 

“마법 기동반도 만나고 싶긴 하지?”

 

“그러니까 카일 오빠...아니, 카일 씨의 잡화점에 있으면서, 원래 있어야 할 시간대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거잖아요.”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비워지자, 아리엘은 평상시처럼 미소를 거의 짓지 않는 냉철한 눈을 띄기 시작했다. 본래 남들이 보기 좋도록 입가에 미소가 있는 경우는 없지만, 과거의 쓴맛이 뇌에 각인되어 쓴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은 안쓰러웠다.

 

“왜요? 뭐라도 묻었어요?”

 

뚫어져라 보고 있는 시선을 감지하고 노을과 같은 눈을 마주하며 나에게 물었지만, 태연하게 고개를 돌리며 나는 말한다.

 

“아니. 아까 전보다는 더 나아서...그 밝은 모드는 나에게 하지 마라. 악몽을 꾸고 싶지는 않으니까.”

 

“저는 몽마라서 카일 씨의 꿈에 들어갈 수 있는데요? 거기서도 노닥거리는 상황을 연출하면 카일 씨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야 살려달라고 너에게 빌겠지.”

 

“풋! 푸후훗! 살려달라고 빌겠다니! 그게 뭐에요?”

 

어디가 웃음 포인트였는지 모르겠다만, 아버지의 말을 빌리자면 여자는 웃는 것이 가장 예쁘다고 했다. 잡화점에서도 별로 웃지 않았던 녀석이 이곳에 와서 웃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다 먹었으면 자리에서 빨리 일어나자.”

 

“여기에 온지 1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돌아가요?”

 

“‘1시간도 안 됐는데’가 아니라 벌써 1시간 씩이나 이곳에 있었다...”

 

-파아앙!

 

“...고.”

 

이곳에 있는 종업원이나, 카페에서 노닥거리던 커플이나, 시원한 곳을 찾아온 다른 손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부서진 문을 보며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른 것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문은 열고 들어오는 거라고! 부스는 게 아니라!”

 

“호오? 주인은 지금 아리엘과 노닥거리면서 파르페가 넘어가는 것이더냐?”

 

오늘의 레시아는 극대노를 한 듯한 표정이었는데, 레시아 옆에 있던 잡화점 멤버의 표정을 보거니와, 무사히 넘길 수 없는 하루를 보내게 될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데드 엔딩이 벌어진다면 내가 이곳에서 처신을 잘못하기 때문이겠지.

 

“우선 주인을 좀 포박하고 느긋하게 이야기나 해볼까?”

 

발걸음 하나하나가 주변의 공기와 시간을 붙잡아 놓기라도 하듯, 숨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사람이 용감하게 나서서, “이곳에 폭발음이 들렸어요!”라고 경비대를 불러야 할 텐데. 밖에 있는 사람조차 잡화점 멤버들의 위압감에 휘말려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느닷없이 날아온 검은 사슬은 보고도 피할 수 없지만, 그간 세린에게 너무 많이 맞아서 지금은 어디서 날아오는지 몰라도, 몸이 자연스럽게 피하는 경지까지 올라가버렸다. 몸의 감각이 너무 예민하게 올라가버린 터라, 사슬이 튀어나오기 전에 그 장소에서 마법진이 펼쳐지는 소리나, 사슬이 공기를 가를 때 나타나는 미세한 파장까지 감지하면서, 가게에 있는 창문을 깨고 뛰쳐나갔다.

 

루시피나가 마법으로 고쳐주겠지?

 

“거기서라!”

 

뛰쳐나간 창문에서 레시아가 연보라 빛의 물결과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검은 드레스에는 갑옷이 장착되기 시작하면서, 초승달처럼 생긴 사브르를 들고 마기를 휘날렸다. 예리하게 날아오는 마기가 내 옷을 스치지도 못하고, 옆에 장사를 하고 있던 사람의 모자를 베어버려도,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계속 장사를 하고 있었다.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죠!”

 

“짐에겐 그런 야전규범이 없다!”

 

허공에 떠다니다시피 날아와서 검을 내려쳤지만, 레시아의 검을 맨손으로 받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니, 양손바닥으로 양면을 붙잡고 고정을 시켰다.

 

“역시 주인이로군. 짐의 검을 정면으로 받아낼 생각을 하지 않다니.”

 

“아니. 평범한 사람이라도 검을 맨손으로 받아내는 발상은 못하거든요?”

 

어마어마한 힘이 억누르고 있는 동안, 근섬유를 보강하기 위해 내 안에 있는 에너지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로 가득 찼다기 보단, 웃는 얼굴 때문에 오랜만에 힘을 휘두를 수 있어서 좋은 건지, 너무 화가 나서 이성이 마비됐는지 분간이 안되었다.

 

“감히 짐과 다른 이들을 버리고 아리엘과 파르페를 먹으러 가다니? 이번 내기는 짐이 이겼으니 오늘 하루는 주인을 마음껏 독점할 수 있노라.”

 

그래서 시나가 같이 쫓아오지 않고 레시아 혼자만 쫓아왔군. 게다가 기쁜 얼굴의 의미가 저거였고.

 

“그러니, 이번엔 각오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인이 울어도 짐의 공격은 끝나지 않..”

 

“우선 좀 평범하게 알려줘야 할 거 아니에요. 가게가 부셔지고 저 장사꾼이 모자가 벗겨져서 대머리인 걸 들켜버려서, 저 사람의 정신이 붕괴해버리는 상황까지 왔잖아요.”

 

“그래도! 아리엘이 먼저 주인을 빼돌리지 않았다면 전부 좋은 결과가 남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저항을 그만둔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으로 붕괴할 일은 없겠지.”

 

“그보다 손목에 힘주지 마시죠. 이대로 그냥 잘라버릴 생각이에요?”

 

“주인은 양쪽으로 잘려나가면, 재생해서 2명으로 분할하지 않던가?”

 

“내가 플라나리아냐!”

 

다시 상황이 진정되었을 때. 레시아는 검과 갑옷을 집어넣고 드레스가 아닌 다른 옷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마법 하나만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거야 말로, 실생활에 적용되면 가장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스커트 차림으로 당당하게 내 앞에 다가와서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자. 주인은 어서 짐을 따라오도록 하거라. 이곳에는 좋은 여관이 있는 모양이니까.”

 

“그런 옷 입고 여관부터 들리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합니다만?”

 

“그럼 뭘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설마 이곳에서 육포를?”

 

“왜 육포를 먹는다는 전제로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건데요! 얼마나 육포를 좋아하는 거야!”

 

어쩌다 보니, 과거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명감보단, 30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얼마나 많은 오락이 있는지 관람을 하고 체험을 하게 되는 기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솔직히 목걸이에 봉인 되어있는 존재가 누군지도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놀기만 하게 될 줄은...

 

같이 걸어가면서도 레시아는 끈적거릴 정도로 내 옆에 달라붙어서, 발을 맞추기 시작했을 무렵...

 

“어째서 레시아의 키와 제 키가 거의 비슷한 거에요? 그것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은데요?”

 

“그야 주인의 키가 작기 때문이니라. 그래도 그 편이 귀여워서 보기 좋다.”

 

지금의 레시아는 20대 초중반의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왜 주변사람들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하지 않고 우리를 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노라.”

 

“그거 100%로 레시아 때문이니까요.”

 

기초적으로 타락의 마왕이기 때문에 남들을 모두 타락에 물들이는 효과가 있다고 하지만, 정신방어가 약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구분할 필요 없이 넋이라도 나간 듯 침을 흘리고 있었다. 죽는 것보다 더 심한 경우라고 레시아가 말했으니, 레시아에게 있어선 최악의 사태라고 봐야 하는 걸까?

 

그 외에는 레시아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있을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레시아. 저번에 힘이 안정화가 되어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 별 일 없다면서요?”

 

“그건 주인과 페어링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지, 지금은 꽤 불안정한 상태이니라. 짐이 레인을 만나고 가장 놀랬던 점이야 말로, 정신방어는 평범하면서도 짐을 보고 죽거나 극악의 경우에 침을 흘리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아니. 불안정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거라면, 저와 지금 단 둘이 있기 때문에 긴장한 거 아니에요? 그러면 감정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힘을 흩뿌리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내 한 마디에 레시아가 돌같이 굳어버려서,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다가, 레시아에게 오른팔이 뜯길뻔한 충격을 받았다. 제대로 붙어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기보단, 머리에서는 이미 단어가 완성되어 소리지르는 것이 먼저.

 

“왜 당겨요!”

 

“그럴 리가 없다...”

 

“네?”

 

“무슨 소리에요?”라고 말하며 레시아의 얼굴을 살피려고 하는데. 푹 숙여진 레시아의 고개가 느닷없이 들리는 바람에, 내 턱이 부셔질 듯한 충격을 받으며 뒤로 넘어지고 싶어도, 레시아가 팔을 굳건하게 잡아 지탱하고 있었으니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 그럴 리가 없다! 지, 짐이 긴장이라니! 짐은 13대 마왕을 탈취하기 위한 생사의 경계에서도 아주 조금이나마 긴장을 한 것 이외에는, 60년 이상을 살아온 인생에서 단 한번도 없노라! 그래, 그렇지. 짐은 긴장하지 않았다! 주인과 단 둘이 옆에 붙어있다고 해서, 쉽게 긴장하는 마왕이 아니니라! 김장! 그래 주인은 김장이라는 말을 잘못 말한 것뿐일 것이다.”

 

“누가 긴장과 김장을 잘못 말해요!”

 

레시아의 몸이 뻣뻣하게 굳은 것은 나에게도 좋지 않으니, 잠깐이나마 쉴 수 있는 벤치에 앉자고 말했다.

 

“생각을 해보니...레시아?”

 

“뭐, 뭔가? 주인?”

 

“제대로 된 연애는 해본 적 없죠?”

 

“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짐은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마계를 통합하기 위한 여정을 했으니까!”

 

한숨이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말인가...

어처구니 없게도 그걸 지시한 게 나였으니까.

 

내 무릎...아니, 정확하게는 허벅지 위에 레시아 머리를 올려놓으면서 눕혔다.

 

“잠깐? 주인? 무엇을?”

 

“조금이라도 긴장을 푸시라고 이러는 거잖아요.”

 

매우 당황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레시아는 당황한 붉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는가?”

 

“보라고 하세요. 보고 싶으면...애초에 절 잡아먹을 듯이 소리친 것은 레시아인데, 이런 거에는 약하나 보네요?”

 

“가, 갑작스럽게 이런 상황이 되면, 짐도 부끄럽단 말이다.”

 

 

무심코 귀여운 나머지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레시아의 긴장을 풀고 있다는 확신이라면, 주변에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레시아를 데리고 나갈 때는 긴장을 시켜선 안 된다는 경험이 머리에 각인되기 전에, 귀엽게 응석을 부리고 있는 레시아를 상대해줬다.

=============================================================================================

26일부터는 국비지원을 받는 기술을 배우러 가는데...

컨디션에 따라 글이 어떻게 쓰여질지는 잘 모르겠네요.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무게

무게
결혼을 가볍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인생이 온통 가벼운 탓이었다. 사실대로 털어놓자면 ‘이 정도 좋아하면 결혼해도 되겠다.’ 라거나, ‘같이 살면 심심하진 않겠네. 그냥 결혼할까.’ 하는 마음을 가진 적도 있다. 여기서 내가 간과한 단 한 가지 문제는 나를 사랑한 사람들도 인생을 가볍게 생각할 거라는 착각이었다. 어째서인지 나는 그런 착각 속에 살았다. 모두의 인생이 값어치 없이 떠다니는 부유물 같을 거라고, 사실은 우주에 하릴없이 떠있는 지구나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나 한낱 가벼운 환상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삼십여 년을 충실히 그 환상 속에 살았다. 문득 무거워져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내게 남은 것은 가벼운 인간관계와 가벼운 지갑과 가벼운 섹스, 가볍다 못해 좀 아파 보이는 체중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생에 처음으로 무거운 것이 생겼다. 윤이었다.
.
윤은 자주 나의 가벼움을 탓했다.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가벼움이나, 당신의 얼굴이, 작은 버릇들이, 목소리가 좋아서 미치겠다고 말하는 그런 가벼움 들을. 그것들은 매일 밤 윤의 싸늘한 온도 앞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모든 언어가 무게를 갖게 된 것이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윤이 물었다. 나를 무겁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녀는 나의 가벼움을 닮지 않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을 결코 이길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종종 우리 둘이 가진 무게에 관해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차이에 관한 생각이었다. 그녀는 결코 나를 떠올리지 않는다. 떠오를 수 없는 나는 매일 밤 윤의 품 안에서 한없이 가라앉았다. 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잠결에도 목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어깨에 묻는다. 그것은 그녀의 버릇이었다. 안길 때마다 어깨에 얼굴을 묻는 바람에, 그녀는 결코 볼 수 없을 그녀의 정수리를 자주 본다. 나는 그 사실이 못내 뿌듯했다. 그리고 그 뿌듯함이 일종의 사랑일 거라고 믿었다. 사랑해요. 윤의 정수리에 대고 속삭인다. 애초에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침대에 누워 그녀가 내게 가지고 있을 어떠한 애정을 상상하는 일은 부질없는 환상이 마구잡이로 더해진 바램이었다. 혹은 꿈에 더 가까운 일이거나. 마주 앉아 맥 앤 치즈와 로제 파스타를 먹던 날 나는 결혼을 다짐했다. 물론 ‘이 정도 좋아하면 결혼해도 되겠다.’ 라거나, ‘같이 살면 심심하진 않겠네. 그냥 결혼할까.’ 따위의 마음은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충실하게도 윤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마도, 생이 주는 무게를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다. 당신이 잘 하면. 윤이 포크로 맥 앤 치즈를 둘둘 감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의 가벼움을 탓하고 있다. 엄지발가락으로 그녀의 발등을 지긋이 눌렀다. 가벼움을 탓하고 있는 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5 - 6

506

 

 

 

잡화점에서 항상 고민을 하는 것이 있다면, 세계를 지키는 사명보다는 지금 당장 내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 당연히 가화만사성을 철칙으로 하는 나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상황에, 현실적으로 시각을 옮긴다면 집안의 평화는 무슨 나 하나 지키지도 못했다.

 

“그러면 지금부터 제 1대 주인 쟁탈전을 실시한다.”

 

나를 상품화한 쟁탈전이라서 놀랐다고 생각했지만, 저항할 틈도 없이 구석에 묶어놓고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입까지 막아버렸다. 게다가 혹시라도 혀를 깨물어서 죽지 않도록, 입 안에 뭔가 집어넣어놓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기도가 막혀서 죽을 위험이 더 높지 않을까? 애당초에 혀 깨물어 죽는 것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니까.

 

차라리 이빨 사이에 청산가리라도 심어놓는 게 더 좋을 지경이다.

 

“그러면 주인을 쟁탈하기 위해 첫 번째로 해야 할 게임을 고르도록!”

 

시나가 옆에서 상자를 들고 있고, 루시피나가 그 안에서 종이 한 장을 뽑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일의 근원이라면 이 시간대에 살고 있을만한 후손을 위해서라나 뭐라나?

 

얼굴도 모르고 어디서 사는지도 모르는 후손을 위해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당연히 그건 아니지만 레시아는 이 기회에 뭔가 쐐기를 박으려는 듯한 거침없는 행동력을 보여줬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누군가가 봉인 되어있을 법한 목거리에 시선을 돌렸을 때.

 

“카일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하지만 인기가 많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닌가 봐요.”

 

노을 빛을 머금은 듯한 아리엘은 수수한 표정으로 내 앞에 쪼그려 앉아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리저리 살피는 아리엘의 얼굴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은색의 머리카락들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동안, 아리엘은 나에게 한마디 던지기 시작했는데...

 

“카일 씨. 우리 거래 하나 하지 않을래요?”

 

거래라면 여기서 날 풀어주는 건가?

 

“카일 씨의 성격이라면 분명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해요. 카일 씨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고, 제가 원하는 것도 단 하나니까요. 만약 거래에 응하겠다면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거래를 무작정 응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입이 막혀있어서 “듣고 생각해볼게.”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리엘을 제외하고, 남은 6명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제가 요구할 것은 저랑 데이트나 하러 가요. 오늘 하루는 제가 카일 씨를 독점하겠지만, 적어도 저 6명에게 붙잡혀서 고문을 당하는 것보단 자유로울 거라 생각해요.”

 

데이트라니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하지만 지금 이 요구를 듣지 않는다면, 정말 저 6명 중 하나에게 고문을 당할 테니, 아리엘이 내 몸을 붙잡고 마나를 일으켜서 다른 곳으로 공간이동을 했다. 시야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어디 나무에라도 걸렸는지, 아직 땅과 나의 거리는 멀기만 했고 아리엘이 뒤에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잠깐만 참으세요. 입을 먼저 풀어줄게요.”

 

내가 도망치는 것을 방지해서 손과 발을 먼저 풀지 않고, 입을 먼저 풀어주는 아리엘의 행동에 대해 치밀함을 느꼈지만, 드디어 마리아가 내 입에 쑤셔 넣은 기묘한 물체를 뱉어내고서야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다.

 

“푸하앗! 후욱! 후욱! 풀어주려면 손과 발을 먼저 풀어줘야지.”

 

“그러면 카일 씨 도망가잖아요?”

 

“안 도망가. 애초에 데이트라니? 뜬금없는 제안을 네가 하는 이유는 뭔데?”

 

“제가 근처에서 맛있는 카페를 발견했는데 커플이면 50%나 할인을 한다고 해서요. 게다가 다른 남자를 꼬시는 것은 제 성격에도 안 맞고, 기왕이면 아는 사람과 같이 가서 먹는 게 더 맛있을 것 같아서요.”

 

다른 남자를 꼬시는 것이 성격에 안 맞는 게 아니라 어색하다는 거겠지.

 

“그보다 입에서 튀어나온 건 뭐에요?”

 

“몰라. 마리아가 내 입에다 느닷없이 집어넣길래 확인도 못했어.”

 

내 타액으로 질척거리는 정체불명의 물체를 아리엘이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내 눈이 고장이 안 났다면 분명 저건...

 

“왜 카일 씨 입에서 스타킹이 튀어나오는 거에요?”

 

분명 아침에는 저 연한 갈색의 스타킹을 신었을 터인데,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맨발이었던 이유가 저거였던가.

 

“그야 마리아가 집어넣었으니까.”

 

“변태.”

 

시원스럽게 내가 대답을 했더니, 아리엘은 정색을 하며 위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억울함이 내 머리 끝까지 채워져서, 문장을 만들자마자 기관총처럼 쏟아 부었다.

 

“나는 피해자야! 그런 말은 오히려 가해자에게 해야지! 마리아에게 그 차가운 얼굴로 변태라고 말하라고!”

 

“무시무시하네요. 카일 씨도...항상 다른 멤버들에게 스킨쉽이나 대쉬를 안 받아서, 그래도 신사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보니 다른 의미로 신사가 맞네요. 뿌리가 깊은 신사 말이죠.”

 

“뭐가 뿌리가 깊은 신사야! 그리고 손과 발은 풀어줘야 할 거 아냐!”

 

“아뇨. 저는 하드하게 당하는 것이 취향인 카일 씨를 존중하는 면에서, 일부러 기어오라고 풀어주지 않는 거에요.”

 

누가 하드하게 당하는 것이 취향이야?

 

“웃기지 말고 풀어!”

 

“혹시 제 스타킹도 원하세요? 이 자리에서 벗어서 입에 넣어드릴까요?”

 

“누가 그걸 원하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해방이야!”

 

“욕망으로부터?”

 

“손과 발을 좀 풀어! 누가 욕망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냐고! 지금 상황에서 그런걸 바라는 녀석은 없어!”

 

겨우겨우 설득을 해서 손과 발이 자유로워졌지만, 아리엘은 나를 놀려먹은 것이 기분 좋은 듯 조용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릴리스 밑에 있는 애들은 다 저러지 않던데? 청순하고 가련한 외모 안에는 소악마가 꿈틀거리고 있다니.

 

“그런데 카일 씨. 후손들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요?”

 

아리엘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질문은 머릿속을 감고 있었다.

 

“그야 궁금하지. 하지만 100년도 아니고 300년의 세월이 흘렀으면, 내 핏줄도 세계 어딘가에 많이 퍼져있을 거야. 내 집안은 애초에 단명을 하는 저주가 걸렸거나, 역마살이 있어서 방랑을 해야 하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거든, 그냥 평범하게 아주 약간 오래 살면서, 손자를 보고 세상을 떠나시는 분이 많아. 뭐...내가 잡화점의 주인이 된 그 순간부터는, 내 부모님이 나를 버렸지만...”

 

“잡화점 하나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버려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리엘의 머리 위로, 내 손이 올라가서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그때 당시...아니, 지금의 잡화점도 솔직히 오는 사람마다 이상한 녀석들 뿐이잖아. 초기에는 사신이 찾아와서 꽃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나. 지금 마왕인 웨어울프는 마물을 전문적으로 학살하는 여기사에게 큐피트의 화살이 잘못 박혀서 난리를 쳤고, 날 해부하려고 탐내고 있는 역병의사나, 기묘하게 생긴 할머니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은 적도 있어. 대부분 레시아가 맨 처음부터 있어줬기 때문에, 그런 위기들을 많이 넘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면 마왕님이나 다른 멤버의 대쉬를 받아주지 않는 이유가 뭐에요?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면 남자가 먼저 권유를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나 아리엘이 말한 의도는 알고 있어도, 잡화점 멤버들에게 습격을 당했던 트라우마가 머릿속에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온 몸에 식은땀이 분수처럼 분출되고 있었다.

 

“잡화점 멤버는 기본횟수가 일반인과 다르거든...행동만 다르지 그것도 거의 전쟁터야. 사람이 두, 세 번 정도는 쓰러져야 겨우겨우 끝난다고. 맨 처음에 레시아가 습격을 했을 때도 내 삶의 마지막이 그때인 줄 알았어. 포식을 당하는 동물들의 기분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고? 결국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해서 살아남은 거지.”

 

“그래요? 다른 멤버들에게 들었을 때는 전부 카일 씨에게 당했다고 설명하던데?”

 

“가끔가다 기억에 없는 부분이 있는데, 나도 모르는 내가 있나 보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카일 씨가 수인척 하는 공이라고 하잖아요.”

 

“시끄러워. 아무튼 파이론에 있는 카페야?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쪽이 맞아?”

 

2층으로 이루어진 카페라니.

300년전과는 다르게 바닥과 카운터에 광이 나는 진귀한 경험을 보고 있었다. 너무 깨끗하게 관리를 해서 비어있는 테이블에서도 먼지 하나 없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카페 안에 들어가서는 아리엘이 느닷없이 팔짱을 끼는 바람에, 내 몸이 왼쪽으로 살짝 기울여졌다.

 

“카일 오빠? 뭐 먹을까?”

 

아리엘의 말 한마디에 내 몸이 석상으로 되는 줄 알았다. 메두사의 눈이라도 마주쳤는지 입이 떠지지 않았는데, 아리엘의 표정을 보니 “연인인척을 하지 않으면, 아까 마리아가 했던 것을 이곳에서 집행하겠다.”라고 하는듯한 살벌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 그래. 우선 테이블에 앉고 생각을 하도록 하자. 그리 급하지 않잖아? 그렇지?”

 

“응!”

 

평상시에 침착하고 냉정했던 아이가 밝게 웃으면서 귀엽게 보이기 위해, 텐션을 높여서 말하는 모습에 넋을 잃을 뻔했다. 귀여운 것도 귀여운 거고, 옷도 잘 입고 와서 앞에 프릴이 달려있는 셔츠와 빨간 리본이 걸린 것도 그렇고, 소매에도 프릴이 달려서 손을 작게 보이는 듯하면서도 가련한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도 그렇지만...

 

내가 가장 놀랬던 것은 불과 3분전까지만 해도 “카일 씨?”라고 정중하게 불렀던 애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카일 오빠!”라고 부르니, 주변에서 나를 신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들마저 마주한 것 같았다.

 

“저기. 아리엘.”

 

“왜? 오빠?”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가슴속에 불덩이라도 심어져서 괴로웠기에 시원한 음료를 대충 고르기로 했고, 겨우겨우 이성을 유지하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그 태세는 뭐야?”

 

“이거? 이렇게 밝고 명랑하게 대해주면 괴로워하는 녀석이 마법 기동반에 있었거든!”

 

아 그래?

그보다 바로 옆자리에 꼭 붙어서 초근거리로 마주할 줄은 몰랐다. 귀여웠다기 보단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해야 할까? 아리엘이 시야에 들어오면 손쉽게 다른 곳으로 돌리기가 어려웠다.

 

“카일 오빠? 아리엘은 이 쵸코 파르페가 먹고 싶은데?”

 

귀가 충격을 먹었나 보다. 지금 내 뇌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사이에, “이거 하나 주세요!”라는 말을 들은 점원이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다른 곳으로 나아간 사이에...

 

“카일 씨? 뭐 하는 거에요?”

 

다시 평소처럼 냉철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항의할 게 많은지 아까 전부터

 

“너의 극악무도한 이미지 체인지에 뇌가 현실을 부정하고, 어이가 지옥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겨우겨우 막고 있다. 왜? 뭐? 싸울 거냐?”

 

“쵸코 파르페 2인분 나왔습니다.”

 

“카일 오빠! 같이 먹자! 물론 오빠가 먹여줄 거지?”

 

파르페를 소환하는 것도 아니고 뭐 이리 빠르게 나오는 건지. 그보다 더 가관인 것은 아리엘의 빛보다 빠른 태세전환속도에 어이가 다시 지옥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쵸코 파르페라고 할지라도, 파르페에 쵸코 시럽과, 초콜렛으로 이루어진 과자, 바나나 딸기 포도 등 여러 과일을 장식하고 있었으나, 2인분인 주제에 파르페는 하나고 스푼은 2개.

 

“아~”

 

어미에게 먹이를 받아먹으려는 새끼 새마냥, 입을 벌리고 눈을 감으며 자신에게 달콤함을 기다리고 있는 아리엘을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아이언 클로를 할 수 없는 노릇이니, 한 스푼 뜨고 입에 넣어줬다.

 

“후으으! 맛있어!”

 

아리엘의 기뻐하는 얼굴이 퍼지자마자, 다른 테이블에서 “오빠? 왜 저 애 쳐다봐?”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맛있냐?”

 

나도 한 입을 떠먹으려고 스푼을 움직였는데, 손목을 내리치면서 강아지에게 주의를 주듯 눈이 매서워졌다.

 

“뭐 하는 거야? 훈육이라도 하는 거냐?”

 

“오빠도 참~ 아리엘이 떠먹여줄게~”

 

그러고는 왼손으로 내 뒷목을 거칠게 잡아 고정을 시키더니, “오른손에 있는 스푼에 쵸코 파르페가 올려진 상태로, 아리엘이 “자. 아~”라는 주문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심이 없는 표정을 할 수 있다는 게 더 놀라웠지만, 이미 내 입은 아리엘의 주문 때문에 개방된 상태였고, 파르페가 입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내가 입을 벌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달콤한 크림과 쵸코가 퍼져나가는 것뿐이지만, 오히려 기분은 더 들뜨고 좋았으니...

 

“맛있지? 오빠?”

 

“그, 그래. 맛있네.”

 

 

경직되었던 나의 긴장은 쵸코 파르페로 인해 풀리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아리엘이 권유한 데이트에 잘 따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이 시간대라면 분명 누구 한 명에게 붙잡혀서 새로운 트라우마가 생성될 시간대니까. 아리엘에게 고맙다는 말을 직접 하는 것은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

아리엘의 태세전환 속도는 불과 0.3초만에 이루어지는 거시여따!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인사

나는 인사하는 일이 낯설다. 집을 나서고 들어설 때 누군가에게 그것을 알리는 행위는 특히 그렇다. 막연히 부모 없이 자란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인사를 할 일도, 이유도, 사람도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집을 비우고 채우는 일은 인사 대신 날카로운 현관문 소리가 대신했다. 정의 내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후천성 인사 결핍증 정도가 될까. 차가운 냉기가 감도는 방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차가운 공기가, 사람들 속에서 겨우 데워 놓은 심장의 온기를 식히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발병한 후천성 인사 결핍증은 입대를 하고 나서도,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다른 안 좋은 습관들은 어찌어찌 고쳤는데, 이것만은 도저히 고쳐지질 않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면서 “안녕하세요.”하거나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 “왔어?”하는 일을 상상하면 알러지처럼 코끝이 먼저 간질거렸다. 그런 의미로 그녀는 내게 참 곤혹스러운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면서 몇 번이나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하고 악수를 하게 만들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와 손을 잡는 일은 왠지 코가 간지럽거나, 불편하지가 않았다.
.
조금 더 나아가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안아주는 사이가 되었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싸웠어도, 더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만나면 일단 안아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자고 했다. 그 장난 같은 약속은 어느새 우리 사이에 가장 중요한 약속이 되었다. 헤어지는 날에도 서로를 끌어안았으니, 어느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는지 구태여 설명하지는 않겠다. 덕분에 아직도 그녀의 허리가 가지는 감촉이나, 어깨의 모양, 머리칼의 향기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았다. 아, 인사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이었다.
.
그녀가 내가 가진 후천성 인사 결핍증을 근본적으로 낫게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헤어지고 말하는 인사에서는 현관문 소리를 닮은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 언젠가 어디선가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의 우리는 다시 한 번 서로를 꽉 안아주게 될까.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완벽

오른 편에서 그녀가 글을 쓰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지겹게도 나를 괴롭히는 마른기침 때문이었다. 시선이 가닿은 곳에는 책꽂이가 놓여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파란 커버의 책 한 권이 눈에 꽂혔다. ‘완벽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랑.’ 나는 책을 읽지도 않고서 완벽하지 않은 것들과 그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해 제멋대로 생각했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 여덟 글자가 빼곡하게 채워진 느낌이 꽤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나는 완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잘나지 않은 외모, 크지 않은 키는 물론이거니와. 글을 써도 결코 공책의 귀퉁이까지 채우는 법이 없고, 글은 몇 번의 퇴고를 거치고 나서야 공개할만한 것이 됐다. 한참을 글을 쓰던 그녀는 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검지 끝으로 본인의 호흡을 따라가면서 작게 읽는 버릇은 그녀와 내가 가진 거의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연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모습이 우스워요. 본인이 쓴 글을 세 번을 연달아 읽은 그녀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과하게 힘이 들어간 모습은 늘 우습고, 힘이 들어갔다는 말과 완벽하다는 말은 같지 않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아마도, 글에 그런 내용이 있다거나 혹은 글을 쓰는 동안에 연필을 쥔 손을 보고 떠올린 생각이겠거니 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꽉 끼는 구두와 목 끝까지 잠근 와이셔츠, 스프레이로 고정시켜 놓은 머리칼이 그녀의 연필 앞에서 초라해진다.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5 - 5

505

 

 

 

레인은 자기가 차고 있는 목걸이를 내 손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놓고는, 내가 마시고 있었던 허브티를 자기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아직 다 마시지도 못했는데 그 뜨거운걸 거침없이 들이키다가, 어마어마한 기세로 내뿜으며 “얼굴이 뚫리는 줄 알았네.”라고 물어보는 행동에 한숨만 나왔지만, 목걸이를 보면서 한가지 느낀 거라면 이 안에 누군가가 잠들어 있다는 것.

 

“예전에는 비니스 여신이 잠들어있었는데, 이 안에 누가 잠들어있는 거지?”

 

이번엔 제발 이상한 여신이 튀어나와서 날 괴롭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나에게 넘겼다.

 

“오라버니?”

 

“시나.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내 형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기분이야. 그냥 원래대로 부르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나저나 이 목걸이는?”

 

“네가 봉인을 풀 수 있다면 풀어보라는 거야. 예전에 비니스의 목걸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의 여신 비니스가 봉인 되었는데, 지금은 누가 봉인 되었든 비니스의 목걸이가 아니란 소리지.”

 

정확한 명칭을 알고 싶었지만 내 감정마법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신들을 봉인하는 도구니까, 어마어마하게 좋은 등급을 지닌 물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안에는 복잡한 수식들과 장치로 설계되어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곳의 창조주가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들을 가두기 위한 것입니다. 가끔가다 강력한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검을 겨누면, 그 안에서 가둬 반성을 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저도 하나 가지고 있기에 알 수 있습니다.”

 

시나는 자신의 목걸이를 보여주며 다른 형태이지만, 한 가운데에 박혀있는 보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백금으로 이루어진 목줄과 밑으로 내려가면서, 커다란 자물쇠처럼 생긴 팔각모양 한 가운데에 보석이 박혀있었고, 시나가 들고 있던 것은 양 옆에 날개라도 달린듯한 장식물이었다.

 

뭐라 설명하긴 힘들지만, 황금 딱정벌레 한 가운데에 보석이라도 박혀있는 기분이다. 이게 미이라를 만들 때 쓰는 곤충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시나는 나에게 다시 주면서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저는 이 차원의 창조주가 아니기에, 지금 이 안에 있는 신을 풀어주기엔 힘듭니다. 이곳에 관여를 하려면 절차가 따라야 하지만, 절차를 따르게 되면 저는 다른 차원 건너온 신비롭고 귀여운 창조신이 아닌, 길에 걸어 다니는 일반 여신이 되기 때문이죠.”

 

“...네 입으로 신비롭고 귀여운이라는 수식어가...”

 

“오라버니?”

 

“알았어! 태클 안 걸게! 그러니 호칭으로 날 부르지마!”

 

칼 같이 들어오는 시나의 말에 베일뻔하면서도, 아이리스의 표정을 살펴보니 날 이 세상 쓰레기로 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정말 변태네요.”

 

“웃기지마. 그리고 나는 21세라고! 아저씨라 부르지마!”

 

“앞에 3이 빠졌잖아요!”

 

“이 꼬마가 진짜! 레인! 이 꼬마 관리 안 할래!”

 

“꼬마라뇨! 저는 어엿한 숙녀...”

 

“시끄러! 이 꼬마가!”

 

“뭐라고요? 이 아저씨가!”

 

“아저씨 아니라고 했지!”

 

아리엘과 편안하게 대화하고 있던 레인을 부르면서까지, 내 앞에 있는 꼬마를 치워주길 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살짝 보다가 “사이가 좋으시네요.”라고 웃은 뒤에 루시피나가 가져온 쿠키를 집어먹고 있는 모습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만...

 

“제길...저런 꼬마를 상대할 때마다 고혈압으로 죽을 것 같아.”

 

흔들의자에 앉아서 화를 다스리기 위해 명상을 좀 하려고 했지만, 루시피나가 쿠키를 가지고 오면서 달콤한 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 신랑. 아~”

 

다른 사람들의 눈이 레이저로 변한 순간에도, 루시피나는 본래 드래곤이라서 그런지 주변 분위기 변화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쿠키를 먹여주려고 했다.

 

“루시피나. 제 손으로 집어 머...읍!”

 

뭔가 입 속으로 거칠게 들어갔다 싶었더니 쿠키였다. 쿠키가 안에서 부드럽게 으깨지는 걸 보면 기묘할 수는 있어도 맛있으니 상관없다. 촉촉하게 으깨지는 쿠키라...

 

“그보다 아저씨는 얼마나 많은 여자를 꼬시고 다니는 거에요? 무릎 위에 앉아있는 소녀는 또 누구고요?”

 

“소녀라니. 짐은 한때 마왕이었노라. 13대 마왕이며 타락의 표식을 지닌 절대적인 군주...”

 

“아이 깜짝이야! 이게 뭐야!”

 

“냐아앗!”

 

언제 올라온 거야! 사람 놀라게!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레시아를 다른 의자에 앉혔다. 어떻게 생각하면 임시조치라고 하지만 15세로 시간을 거꾸로 먹은 레시아가 항의하기 시작했다.

 

“주인! 무슨 짓이냐! 기껏 좋은 분위기로 같이 붙어있었는데!”

 

“뭐가 좋은 분위기야! 너무 자연스러워서 암살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고요!”

 

이러니 내가 이곳에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지.

 

“저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데 13대 마왕이에요?”

 

“그렇다. 짐이 13대 마왕 레프리시아이니라. 겉모습에는 속지 말고 똑바로 봤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대는 아이니스처럼 마나를 잘 다루지 못하나 보다.”

 

“제 조상님에 대해 알고 계세요? 저의 조상님은 어떤 분이죠? 정말 자서전에 나와있는 업적을 다 이루신분인가요?”

 

자서전? 업적?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아이리스가 나에게 책을 건네며

 

“자. 보세요.”

 

이상한 그림일기 같은 책을 나에게 건넸지만, 300년 지난 것 치고는 관리상태가 꽤 좋았다. 감정마법으로 주변을 훑어본 결과, 300년이 지난 물품은 맞지만 제목부터 이미 내용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을 전하는 소녀 아이니스의 일대기?”

 

이 녀석은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부수러 오는 사신과 같은 존재인데. 이건 각색을 넘어서 창조하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이 안에서 내가 어떻게 나오는데?”

 

“변태로요.”

 

“돌아가면 그 빌어먹을 은발을 다 쥐어 뜯어버려야지.

 

너무 빠른 페이스로 대화가 오고 가니 한 박자 쉬기로 하자. 레인은 루니아 누나에게 백장미를 받고 돌아갈 생각인지 잡화점 밖을 나가려고 하고 있을 무렵. 아이리스도 레인을 따라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래서 주인이 왜 소녀가 취향인지 알아야겠다.”

 

“무슨 헛소리를 당차게 하는 거에요. 그런 말을 하면 루시피나까지 폴리모프로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변하잖아요.”

 

마나를 집중하던 루시피나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법을 취소한 듯이, 응집된 마나를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상한 헛소리를 해서 팔찌를 채울 생각하지 말고, 이 안에 있던 봉인이나 풀어야 하는 방법을 생각해야죠. 아니면 잡화점 어딘가에 집어넣었을 때 풀릴지도 모르겠군요. 당분간 3층에서 보관하고 자료조사를 합시다.”

 

어찌 생각하면 레인에게 자서전을 읽고 힌트나 달라고 하면 괜찮겠지만, 그러면 내 인생이 한 방향으로 고정되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하기로 하자.

 

“주인. 궁금한 것이 있다.”

 

“뭔데요?”

 

“지금까지 일의 진행을 보아 우리들에게 들려온 소문이 없지 않는가?”

 

“당연히 저희는 300년 뒤로 날아가버린 여행자니까요. 아니면 미아라고 하는 게 맞나?”

 

레시아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좋은 향이 가까이 나기 시작하면서, 내 귀에 이상현상을 체크했다.

 

-할짝!

 

“우앗! 놀랬잖아요! 뭐하고 있는 거에요!”

 

불의의 습격이라는 것은 언제나 온몸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야 당연히 주인이 짐의 말을 듣지 않으니 귀를 핥은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을 부를 때 귀를 핥지 않잖아요. 그리고 저는 제대로 대꾸했고요.”

 

“아니. 주인의 생각이 뇌로 가기 전에 척추반사로 말이 튀어나왔노라. 짐이 의도한대로 나와야 할 대답은 그게 아니니, 답이 정해져 있기에 주인이 제대로 짐을 상대하기 전까지는 귀를 계속 핥는 형벌을 내리노라. 하암...”

 

“핥지마!”

 

레시아의 빨간 혀가 내 귓속까지 들어가기 전에 어깨를 밀어서 거리를 벌렸다. 레시아가 말한 의도라면 분명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힘을 쓰고 있으니, 엘티노스의 봉인을 풀어주려고 천계에 가다가 레이베리아에게 쫓겨나고, 마계는 이미 인간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는 그냥 우리대로 알아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이 목걸이에 담겨있는 기이한 존재의 봉인을 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음...레시아가 원하는 답은 그냥 세상을 다 쪼개버리자는 건가요?”

 

“짐의 말을 듣기나 하는 것인가!”

 

어린 소녀가 소리치는 거라도 마왕이라서 그런지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에 대해 소문이 들려오지 않으니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려주려는 의도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주인이 행한 일은 비밀리의 자서전에만 담겨있을 뿐이지만, 주인의 후손들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제 후손이요? 음...그거 참 이상하네요.”

 

“어째서 그리 무관심한 태도인가? 주인과 짐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이 얼마나 강인한지 보고 싶지 않는 것인가? 영웅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마계에서 군단장을 할지도 모른다. 혹은 짐의 성품을 이어받아 마계를 탈환하려고 하겠지.”

 

“그렇긴 하겠네요. 나중에 레인에게 물어보세요. 후손들이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혹은 후레쉬맨이 되어서 돌아올지도 모르겠네요.”

 

생각을 해보니 내 후손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카렌은 무슨 일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혹시 레인이라는 자도 주인의 후손이 아닌 것인가?”

 

“그건 아닐 거에요. 레인은 아마 고아출신에 개조수술을 받은 듯한 그런 이미지니까요. 전 적어도 300년전에는 부모님이 다 살아계셨어요.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후손들은 대부분 ‘하프’라는 말이 수식어로 붙어서 다니겠죠.”

 

잡화점 멤버들만 따지자면 정상적인 후손은 태어나지 않고, 특별한 후손들이 이리저리 솟아날 테니까. 진짜로 후손을 찾는 여행을 한다면, 천계와 마계도 다 들려야 하고, 드라고니스까지 찾아가서 난동을 부려야 한다.

 

몽마의 특질을 이어받은 후손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뭐 사실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아서 후손을 찾는 것은 나중에 시간이 남았을 때나 하려던 것인데, 애석하게도 정말 우주멀리 사라져서 나중에 후레쉬맨으로 되어 돌아오는 게 아닐지 더 걱정스럽다.

 

루니아 누나의 경우에는...

무지개 푸드라던가 약에 저항이 없는 후손이 나타나겠지.

 

“주인? 그러니 후손을 이곳에서 만들고 미래지향적인 자산을 만드는 것이 좋지 않는가?”

 

“냥캣에게만 허용할 수 없습니다. 마스터 저에게도...”

 

“기다려! 잠깐만! 둘 다 진정하세요!”

 

나는 어디 공룡테마파크에서 나올법한 자세로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레시아와 시나를 다른 곳에 앉혀놓고는 양팔을 벌리면서 두 눈을 마주보며 진압하고 있는 사이에, 지금쯤 은팔찌를 얼마나 차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내고 있을 때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에요.”

 

“하지만 사랑에는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은팔찌라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짐이 더 위험하다.”

 

“그러니 마스터는 안전합니다.”

 

“뭐가 안전해! 제 3자가 보면 위험하다니까!”

 

 

후손은 궁금하지만 레시아와 시나의 현재모습은 상당히 위험하니까, 오늘도 전력을 다해 저 두 명과 말씨름을 해야만 했다.

=============================================================================================

로스트 아크 하다가 늦었어요.

이제서야 루테란 에피소드는 다 끝났고 해적때려잡으러 가는...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경계

경계.
윤은 가지고 온 셔츠를 완전히 입지도, 벗지도 않은 상태로 어깨 위에 걸쳐놓았다. 그 모습이 꼭 가을 같아서 괜히 코끝이 간지러웠다. 어깨에 나비가 수놓아진 셔츠는 아마도 내가 사준 것이었다. 머리칼은 조금 더 길어져서 어깨를 덮었고, 치마는 복숭아뼈 언저리까지 닿았다. 오랜만이에요. 윤은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있었다. 뜨거운 계절에 연애를 한 탓에 매번 차가운 음료를 마시던 사람이었다. 계절처럼 뚜렷한 분명한 변화가 우리 둘 사이에 있다. 요즘은 자주 경계에 대해 생각한다. 작게는 그녀와 나 사이에 있을 어떤 경계, 조금 더 나아가서는 서른 번째 맞고 있는 여름과 겨울의 경계, 조금 더 나아간 곳에서 다시 한 발짝 나아가서는, 처음 맞는 스물아홉과 서른의 경계,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온 열병까지. 경계는 종종 열병을 동반한다.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온통 쏟아진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뜨거운 손, 발이 환절기만 되면 더 뜨거워지곤 하는 것이다. 그녀의 어깨에 앉은 나비도 마찬가지다. 번데기로부터 갈라져 나오는 동안 인내했을 많은 열병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날개는 언제나 화려한 무늬를 한다. 초라한 나의 서른이 그녀의 어깨 앞에서 번데기처럼 바스락 소리를 낸다.
.
옆 테이블의 진동벨이 시끄럽게 울었다. 하필이면 카페의 노래가 멈춘 순간이었다. 그제야 잊고 있던 공통점 하나가 생각났다. 굳이 ‘우리는 청각이 예민한 사람들이었지.’하고 떠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올린 것이다. 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시니컬한 표정에 나는 어쩐지 안도를 느꼈다. 온통 변한 것들 사이에서 발견한 변하지 않은 것은 이토록 안정을 준다. 우리는 커피를 사이에 두고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시곗바늘은 4시 59분과 5시 정각의 경계에 걸려있다. 시곗바늘은 정직하게 경계 너머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다. 그 우직함이 부러워지는 순간 5시가 되었다. 그러고보니 우스운 짓도 참 많이 했었다. 예를 들어 매일 저녁 5시 26분이면 그녀에게 케이크 이모티콘과 함께 생일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단순히 5월 26일이 윤의 생일이어서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었다. 기억이 가진 힘은 무섭다. 한 번 떠올리기 시작하면 기어코 비슷한 것들을 끄집어낸다. 눈앞에 윤이 있음에도 나는 경계 너머로 과거의 우리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윤에게 잘 지냈느냐고 묻지 않았다. 잘 지냈다고 해도, 그러지 못했다고 해도 썩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조용한 가운데 마른 기침이 하지 못한 말처럼 터졌다. 참았던 것이 터지면 더 격렬한 법이다. 나는 겨우 기침 같은 소리로 그녀에게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렸다. 쏟아지는 것들은 커피로도 삼켜지지 않을 때가 있다. “미안.” 급히 커피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목구멍으로 쏟아진다. 그녀는 입술만 쭉 당겨 웃으며 마른기침은 서른의 경계를 넘으면서 응당 앓아야 하는 열병이라고 말했다. 그리곤 약을 챙겨 먹어도 왠지 낫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윤의 얼굴을 본다. 여전히 마른 뺨과 빨갛게 바른 입술, 나비가 수놓아진 셔츠를 입은 그녀는 어느새 서른이 되어 있었다.
.
감각을 연필 끝처럼 날카롭게 세운다는 이유로 종종 밥을 굶던 우리는 슬슬 매미소리가 사라지거나, 떨어진 은행 냄새로 가을이 온 것을 먼저 알았다. 그쯤의 우리는 은행나무가 즐비한 거리를 자주 걸었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시를 적는 것이 우리가 가진 모든 행복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시를 적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은 헤어진 날부터 그랬노라고 멋쩍게 내게 털어놨다.
.
“그리움도 매미처럼 철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때만 시달리게.” 헤어지던 날 윤이 말했다. 매미소리가 들리지 않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횡단보도를 건너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그것은 언젠가 헤어진 여자친구의 "당신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더라구." 따위의 말 때문에 생긴, 일종의 강박이었다. 횡단보도가 끝나고 뒷모습이 일식집 너머로 사라지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제야 과거의 사람이 느꼈을 길고 가라앉은 새벽의 일부를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다.
.
우리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콜록 콜록하고, 마른 기침을 했다. 어쩐지 오래 앓을 것 같은 열병은 경계를 넘어서도 한참을 계속될 것 같았다.

글 이어보기

초3 프란치스카의 공개일기

독서토론 캠프 [2017. 0917. 일]

숭례문 학당이라는 모임에서 진행하는 독서토론 캠프에 참가했다.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책을 미리 읽어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독서록도 썼다. 나는 아이들이 많고 공간도 넓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생각보다 좁은 곳에서 참석자가 10명 정도밖에 안 되는 소규모 독서토론 모임이었다. 

 

독서캠프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파트는 "글쓰기는 ______다"였다. 내가 참석자 중에서 빈 칸에 들어갈 말을 제일 많이 골랐다. 선생님께서 내가 이름짓기 여왕이라고 칭찬을 하셨다. 나는 _____안에 '꽃을 찾아 헤매는 꿀벌, 레고, 생각'이라고 말했다. '꽃을 찾아 해매는 꿀벌'을 생각한 이유는 꿀벌도 가끔은 꽃을 못 찾는 것처럼 우리들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꿀벌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꽃을 찾는 것처럼 우리도 결국은 정답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레고'라고 얘기한 까닭은 글쓰기를 완성하려면 한줄 한줄 레고를 쌓듯이 생각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생각'은 우리가 생각을 해야 글쓰기를 할수 있어서이다. 

 

내가 한 달에 두 번씩 친구들과 하고 있는 '비밀책장'과 비교하면 독서캠프가 더 괜찮다. 비밀책장에는 5명이 모여서 하는데 아이들이 너무 장난을 많이 치고 시끄럽게 하고, 내가 말을 할 때 자꾸 끼어들어서  짜증난다. 독서캠프 친구들처럼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착하게 굴면 좋겠다.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고요

날카로운 소음이 날마다 들렸다.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베란다가 넓어서 마을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고 좋아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당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 세 달은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지금은 철근이 부딪히는 소리, 땅을 뚫는 소리 같은 것들이 진동한다. 날카로운 소음은 말 그대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집 전체를 흔들었다. 가끔은 선반에 올려놓은 책들이 쏟아지기도 했다. 마누라는 공사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애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고, 아랫동네가 재개발로 시끄러운 와중에 집을 비워둘 수 없다는 납득 안가는 이유로 나만 덜렁 유배되었다. 사실 처음 며칠은 좋았다. 유일한 취미인 바둑도 실컷 하고, 술도 진탕마셨다. 잔소리할 사람이 없으니 내 세상이 된 것만 같았다. 그때의 나는 이 재개발의 현장이 조금 시끄러울 뿐이라고. 편할 대로 생각해버렸으니까. 핸드폰 액정이 반짝인다. 진동이 울리고 있겠지만, 그것이 전화 때문인지 재개발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나는 핸드폰 액정에 낙인처럼 박힌 전화번호를 통해서 전화가 왔음을 알았다. “여보세요?”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 목소리가 귀에 닿지 않기 때문이었다. 왜 소리를 지르냐는 마누라의 바가지를 묵묵히 듣고, 아니 사실 거의 듣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충 알아듣기로는 “재개발이 끝나는 날이 십일월 첫째 주 목요일이래”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한숨이 나왔다. 물론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베란다를 통해서 날씨를 확인할 수 없었으므로, 오늘의 날씨를 검색했다. ‘신림 9동. 날씨 맑음’ 예보와는 다르게 비처럼 내리는 먼지를 피해 베란다 문을 닫아 놓은지 오늘부로 딱 넉 달이 되었다. 그곳에 놓아둔 물건들은 이미 오천년의 시간을 묵묵히 보낸 것처럼 흙먼지에 묻혀있었다.

“아따 성님 또 지것는디?.”
광주에서 올라온 현민은 중학교 시절엔 바둑 기사를 진지하게 꿈꿨다고 말했다. 실력이 비슷해서, 요즘에는 마누라보다 더 자주 마주 앉는 사람이기도 했다. 탁. 탁. 하고 바둑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후벼판다. 날카로운 소리가 점점 신경을 예민하게 만든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낙담하고 있었다. 단순히 이 만 원을 걸고 둔 내기 바둑을 세 판 내리 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 일 있어 부러?”
무디기로 소문난 현민도 나처럼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러다가 청각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소리를 지르는 현민을 보고 나서야 그런 걱정이 들었다. 바가지를 긁던 마누라의 목소리와 현민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에이 씨벌. 왜 소리는 지르고 지랄이냐.”
괜한 곳에 화풀이를 하고 일어선다. 싸우나라도 가서 몸이라도 담굴 작정이었다.
“성님 오늘 제가 한 잔 쏠라니까. 꼬막에 막걸리 어떠요?”
현민은 여전히 소리를 지른다.
.
“아, 글쎄 11월 2일이면 공사가 끝난다고 안 했는가?”
통화를 하던 현민이 역정을 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성격이 차분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내 생각에는 몇백 년 전에 그런 사람들 다 죽었다. 현민이 통화하는 동안 꼬막 몇 개를 집어먹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꼬막에 관한 소설을 읽었다. 단 두 명이 나오는 글이었는데, 소음 때문에 떠나는 남자에게도, 남겨진 여자에게도 공감하지 못했다.
“성님, 재개발 끝나는 날이 미뤄진다는디요?”
“뭐? 이 씨벌?”
날카로운 욕들은 꼬막집을 가득 채우고, 놀란 막걸리 잔들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다.
.
낮이 시끄러운 만큼 밤의 고요가 적막하게 사방을 덮었다. 소란스러움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사람들은 숨죽인 밤을 보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내 걸음걸이나 티비소리 따위의 것들로 이 고요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면 배란다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바깥이 꼭 유령도시 같았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불도 거의 켜지 않았다. 동네 전체가 소리 없이 정한 어떤 규칙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글 이어보기

독서와 열린 생각

비밀가족 by 최은영(2014)

 

안녕? 나는 오늘 [비밀가족]이란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거야. 비밀가족 책 이야기는 바로...>>

 

민후의 가족은 비밀을 말하지 않았어. 가장 큰 비밀은 아빠가 회사를 그만 둔 것이지. 아빠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셨어. 할머니가 알면 걱정하실까 봐 할머니 눈치 피해서 빵 집에서 일하는 거,  아빠 대신에 엄마가 잡지 회사에 취직해서 직원으로 일한 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혼을 할려고 할머니가 말도 없이 민후의 집에 오셔서 계속 머물렀다는 거야.이걸 왜 비밀로 해야 해? 거짓말 하면 안 되잖아! 민후는 "비밀" 이라는  말조차 싫어졌어. 그래서 민후는 갑작스럽게 응급실에 실려가는 아이디어로 가족들을 모이게 했어. 결국 민후는 아빠가 회사 그만두고 빵집을 준비한다는 엄청난 비밀을 말하게 되었어. 비밀은 꼭 말해야 된다는 규칙까지 세워. 앞으로 어떤 비밀이라도 꼭 말하는 가족이 된 스토리야. 

 

나는 비밀 가족에 대해서 읽다 보니까 좀 불편했어. 우선 비밀을 감추는 건 안 좋은 거니까! 또한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 민후가 아이디어를 낸 건 좋아. 하지만 아무리 가족을 모이게 하고 싶어도 응급실에 갑작스럽게 실려가서 가족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고 무척 걱정하게 하면서까지 모이게 한 것에는 반대야. 나라면 응급실에 실려가는 아이디어보다 책을 100권 넘게 읽어서 큰 상을 받거나 반에서 아슬아슬하게 회장으로 뽑히는 등 다른 기쁘고 좋은 방식을 썼을 것 같아. [비밀가족] 중에서 나는 민후 할머니가 "내가 여기 있어야 되겠다!" 라고 폭탄발표를 하는 장면이 제일 재미있었어. 삽화를 보면 할머니가 폭탄같은 얼굴로 말하고 소리도 폭탄처럼 크거든. 그림을 보며 깔깔대며 웃었어. 

 

나는 이 책이 내게 유용했다고 생각해.  왜 비밀이 있으면 불편한지를 알려줬으니까 말야. 

 

 

글 이어보기

단편적인

계절

계절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쉬운 계절이다. 챙겨야 할 것도 많고, 옷은 두꺼워진다.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면서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그가 준 립밤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방금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 번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괜히 건조하게 느껴지는 실내의 공기와 텁텁한 감자튀김이 거슬린다. 두 잔을 비우고 세 잔 째의 맥주를 시켰다. 그 사이에 입술은 조금 더 생기를 잃는다.
당신 입술에서는 맛있는 향기가 나
불현듯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문뜩 궁금해졌다. 그는 코가 맞닿을 거리에서 웃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 내가 되물었다. 응 달달한 것 같기도 하고, 과일향기 같기도 한데. 립밤에서 나는 향기일까? 그는 짧게 입을 맞추고 일어나 셔츠를 걸쳐 입으며 말했다. 내 입술에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 알 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나 립밤 안써. 내가 말했다. 그가 셔츠의 맨 윗단추를 채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다음날 그는 내게 립밤을 선물했다. 사과향이 나는 립밤이었다.

한 번 더 주머니와 핸드백 속을 살폈지만 그 어디에도 립밤은 없었다. 그를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물건을 나는 부주의 속에 잃어버린 것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쉬운 계절이다. 그가 그랬듯이.

글 이어보기

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5 - 4

504

 

 

 

루시피나와 릴리스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내가 여장한 모습을 보러 온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다행스럽게도 실베스 씨가 내 이름을 듣고 대화를 먼저 하자고 한 것이니, 느닷없이 기습으로 죽을 가능성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 그나마 실베스 씨는 나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을 갚기 위해 300년이라는 시절을 기다리지는 않겠지만, 내 앞에 검붉은 칠흑의 갑옷을 덕지덕지 붙여놓고, 어깨와 장갑, 부츠에는 닿기만 해도 피가 나올법한 날카로운 장식이 있었으니, 내가 알고 있었던 실베스 씨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줄 알았다.

 

“잡화점 주인. 오랜만에 만나는 군. 300년만에 만나는 건가?”

 

덤으로 목소리도 살짝 더 낮아졌는지, 날아드는 파리마저 짓눌러 죽일 정도로 분위기가 무거웠다. 온 몸에 중력이 4배정도 더 강하게 받는 것처럼 고개를 들기 힘들어도, 눈을 마주하며 실베스 씨에게 입을 열었다.

 

“실베스 씨는 마계의 군세를 모으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의문문을 빼도 될 만큼 직선적인 질문에 실베스 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거대한 입을 움직였다.

 

“긍지 높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말로, 마계에 도움이 되는 일이지. 인간은 싫어하지 않으나, 인간계를 침범해야 할만한 이유가 생겼다.”

 

“이유라면 천계의 존재 때문인가요? 아니면 몬스터들의 숲이 갈 곳을 잃었기 때문? 인간과 공생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영문을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인간들은 천계의 꼭두각시마냥 행동하고 있지. 이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라도 마계 근처에 있는 인간들은 우리 밑으로 두어야 한다네. 잡화점의 주인이라면 나와 같이 손을 잡아 도와줄 수 있겠나?”

 

“미안하게도 그건 불가능할 것 같아요. 일부러 레시아와 릴리스, 마리아를 용하게 죽이지 않고 돌려보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아니, 그것도 아니지. 일부러 레시아가 공격하라고 너에게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야 실베스 씨의 권위를 의심하는 마족이 없을뿐더러, 군세를 모으고 있으니 사기진작에도 좋겠죠.”

 

실베스 씨는 아무렇지도 않는 눈으로 보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책상을 내리찍으며 컵이 바닥에 떨어졌고, 속에서 감췄던 분노를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 앞에서 잡화점 멤버를 그 지경으로 만든 것 때문에 화가 나니까, 지금 한대 때려도 되요?”

 

“여기는 마왕성이라네. 그리고 지금 잡화점 주인의 실력으로는 개죽음을 당하겠지.”

 

“지금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고, 저도 머리가 있으니 지금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하는 것만 하겠지만, 다음에 다른 잡화점 멤버들에게 털 끝이라도 건드리면, 정벌이고 뭐고 그냥 세계를 지워버릴 테니 각오해두세요.”

 

“명심하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그 모습은...”

 

“아. 백장미 찍다가 바로 호출 받아서 오는 바람에 갈아입지 못했거든요.”

 

여장한 상태로 실베스 씨 앞에 서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나를 보면서 실베스 씨는 컵에 있던 정체불명의 액체를 들이키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를 보니 레베카가 생각나는군.”

 

“아니. 제발 저를 보면서 부인을 떠올리지 마세요.”

 

자괴감 들고 괴로우니까!

 

“레베카도 자신의 딸에게 고딕 롤리타를 입히고는 했는데.”

 

“떠올려야 할 대상이 잘못됐잖아요...”

 

옷을 입은 딸을 떠올려야지, 왜 옷을 입히는 아내를 떠올리는 걸까. 솔직히 말해서 둘 다 떠올려야 하는 것이 맞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라면 분명 옷을 입고 있는 쪽일 것이다.

 

“그래서 자네는 천계에 다녀온 건가?”

 

“네. 레이베리아가 추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정보들로 가득했는데, 문제는 엘티노스가 어디에 봉인되어있는지 그걸 알아야 해요. 그러니 몇 군대를 정복해서 인간을 장기말로 쓰거나 그런 건 솔직히 말리지는 않도록 하죠. 하지만 진짜 검을 겨눠야 할 곳은 천계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되도록이면 인간을 회유하고 설득을 했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모두 천계에게 조종 받고 있다면서요?”

 

“그래. 특히 초능력자인지 뭔지 하는 것들이 크나큰 위험이다. 그들은 마나를 따로 사용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기이한 힘을 발휘하지. 마계를 침범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과학이 서서히 발전함에 따라, 마법이 도태되었으니 이곳을 정화하는 방법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라네.”

 

300년이 지났으니 마법이 많이 잊혀졌다면 가능하겠지만, 마계의 결계를 인간이 깰 수 없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천계에서 부셔주겠죠. 지역도 정화해주고...그러면 마계는 난장판이 되는 건 시간문제니까. 천계를 먼저 노리는 게 맞아요. 인간은 설득과 회유로 최대한 관계로를 깎아먹지 말고, 천계나 견제하면서 엘티노스를 찾을 때까지는 시간을 좀 주세요.”

 

“그건 잘 될지 모르겠군. 하지만 자네의 말대로 최대한 노력하지.”

 

“노력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그렇게 해야 해요.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이 저도 대립하게 될지도 모르죠.”

 

“그렇군. 자네는 만일 천계와 마계, 같은 인간을 모두 적으로 돌린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실베스 씨의 질문은 세상 모두가 적이라고 치면 무엇이 남느냐는 말일까?

 

“모두가 적이 될 일은 없어요. 세상이 얼마나 살기 힘들든 자신의 편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고, 다른 말을 한 뒤에 실베스 씨 앞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건데요? 정말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을 마왕이라도 될 생각이에요?”

 

내 뒤에 있던 루시피나에게 다가가면서 실베스 씨에게 질문을 했는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발을 휘감아버렸다.

 

“필요하다면...”

 

폐가 갈아엎어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지 않고 루시피나의 도움으로 잡화점으로 귀환하고 나서 시야가 반전되자, 루시피나는 나의 표정을 보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저기...신랑? 괜찮아?”

 

저조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환기시키려고 고개를 들어, 루시피나에게 웃음을 보여주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씁쓸한 감각이 아직까지 남아있기에, 쓴웃음이 번지는 것은 붉은 눈에서 비쳐진 내 모습을 자각한 뒤였다.

 

“괜찮아요. 다만, 실베스 씨를 좀 막아서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어쩔 수 없이 천계와 마계에서 제 얼굴도장을 확실하게 찍었으니, 다른 곳에서 견제가 들어와도 이상할 것은 없겠죠. 그나마 다행이라면 손쉽게 건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거겠지만요.”

 

실베스 씨는 결국 내 말을 듣지 않고 어디선가 탈선할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마왕이니까.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닌 것은 레시아만 가능했다. 원래 마왕이라는 이름은 모든 생명체가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 그렇기에 실베스 씨는 본래 해야 할 일을 하겠지.

 

“기초가 탄탄한 마왕을 만나고 왔더니 속이 뒤집어질 것 같네요. 부상당했던 사람들의 몫을 때리지 못했는데.”

 

“너무 그러지 말거라. 주인. 애초에 짐도 마왕이었던 시절이 있으나, 주인을 만나서 짐의 길이 지연된 것뿐이니라. 인간계를 침범하려는 계획은 짐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위바위보로 한번 뺏었잖아요. 물론 그게 자작극이었다고 해도 침략에 성공해봤으면 됐지.”

 

술 게임으로 나라를 거는 지도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신랑...우리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마왕성에 대마법을 사용할까?”

 

“실베스 씨는 지금 상당히 강하잖아요. 당연히 제가 싸우지 않고 그냥 나온 이유는 실베스 씨에게 일방적으로 지기보단, 잡화점 멤버 어느 하나라도 진지하게 싸우면, 둘 다 치명상을 피할 수 없으니까요. 실베스 씨는 지금도 제가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사라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레시아에게 없던 마왕의 덕목은 잘 지키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마왕의 덕목? 그게 뭔데?”

 

붉은 빛의 머리카락이 흔들며 고개를 기울자, 하나같이 전부 바닥으로 쏟아질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상대를 항상 하찮게 생각하는 오만함이지. 힘을 믿고 오만에 빠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해. 긍지가 높아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겠지.”

 

그보다 이 여장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제 집어 던질 때도 된 것 같아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기...이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이곳에서 다 뭐하세요?”

 

“그야 옷을 갈아입는 것도 찍으려고 하죠오. 다음에는 이 옷으로 갈아입으면 되요오.”

 

“이것도 여성용이잖아요! 촬영 다 끝났다며!”

 

“오늘 밤은 기니까 천천히 즐겨요오!”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있거든요!”

 

루니아 누나가 연속촬영을 하려는 의지가 너무 곧아서 부러지기는커녕, 휘어지지도 않은 듯했다. 다시 20분동안 난동을 부리면서 겨우겨우 남자 옷으로 갈아입었고, 흔들의자에서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레인 오빠! 거기에 가면 안 된다니까요!”

 

“괜찮아. 우리가 가도 저기는 항상 열려있을 거야.”

 

“아니요! 그 미이라가 잡아먹을지도 모르잖아요! 게다가 그 안에는 예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레인 오빠를 홀리기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난 레인 오빠밖에 없는데!”

 

밖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오는지 몰라도, 이 안에서 레인을 홀릴만한 사람은 없다고 보는데, 그 녀석이 비춰진 시선은 남녀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그런 눈이니까.

 

어렵고 이상하게 꼬아 말했는데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레인은 그냥 괴짜란 소리다.

 

“잡화점의 문은 자동으로 열려서 정말 좋네요. 카일 씨.”

 

“무슨 일이냐?”

 

“오늘은 목걸이 자랑을 하려고 왔어요. 짠!”

 

“목걸이?...저거 비니스의 목걸이 아냐?”

 

강력한 여신마저 봉인해버리는 목걸이를 레인의 목에 걸려있는 걸 보면, 엘티노스 잡화점에 있던 모든 주인들은 저 목걸이를 한번씩 차본 것이 아닐까?

 

“어라? 미이라 아저씨? 어째서 붕대를 다 벗은 거에요?”

 

“붕대를 다 벗고 멀쩡하게 생긴 사람에게 미이라 아저씨라고 하지마. 나이 얼마 먹지 않았으니 다른 호칭으로 불러. 오빠라던가, 오라버니라던가, 좋은 건 많잖아?”

 

“할아버지.”

 

“너 맞고 싶어!”

 

“300년동안 미이라처럼 봉인 당했는데 할아버지라고 말하면 최소 200세정도 어리게 보는 거라고요? 기뻐하시죠?”

 

“그런 취급 하나도 안 기뻐!”

 

이래서 어린애들이 싫다니까.

 

“오라버니. 진정하세요.”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변한 시나가 내 손목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어마어마하게 무거워진 공기가 사방을 채워나갔는데, 오직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시나와 레인뿐이었고, 모두가 경악한 얼굴이었다. 아이리스의 얼굴을 바라보자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단어를 유추할 수 있을 만큼 또렷하게 움직였다.

 

[변태]

 

“...저기 시나. 대체 무슨 일이야.”

 

“마스터가 연하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토대로 모습과 호칭을 변경해보았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기 전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미 이상한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오라버니란 칭호는 마음에 드십니까?”

 

“그야 마음에 들긴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할 때가 아냐. 만약 너의 계략이 나에게 은팔찌와 발찌를 세트를 하이패스로 착용시켜주는 거라면 거의 성공했겠다.”

 

“낑낑...”

 

“하지 말라고!”

 

이 애는 아직 해가 떠있는 시간에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그 목걸이는 왜 가지고 온 거야. 자랑할 건 아닐 텐데?”

 

레인에게 물어보자.

 

“세린이 가져가라고 시켰어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목걸이를 벗어서 흔들의자 앞에 있는 책상에 놓았다. 봉인을 푸는 방법은 천계로 가거나 엘티노스가 잘 알고 있을 텐데. 이걸 그대로 천계에 다시 가져갈 수 없는 일이니...

 

“의뢰는 봉인을 풀어달라고?”

 

“아뇨. 저는 의뢰를 하지 않아요. 이걸 양도하러 온 것뿐이죠.”

 

 

환하게 웃고 있는 레인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

시나에게 오라버니 소리 들으면 무슨 기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