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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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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고를 필요도 없다. 마법에 영창을 시작하지도 않는 마법의 지배자라는 이명. 그 이름에 걸맞게 켈모리아의 손 끝에서는 마법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빛에 눈을 빼앗긴 다면 곧이어 찾아올 화염으로 뒤섞인 창에 맞는 것이고, 서투르게 움직이면 다른 마법이 몸을 덮치겠지. 나를 상대할 때는 그런 잔재주는 통하지 않았으니.

 

볼펜처럼 보이는 특이한 기구로 뒷부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Oh Yeeeeees!

 

언젠가 이것도 음성을 좀 바꿔줘야 할 텐데.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아. 기초마법이라던가 그런 건 카일에게 전혀 닿질 않네. 설령 맞는다고 해도 항마의 축복이 지켜줄 테니까. 이런 마법은 가장 비효율적이라는 걸까?”

 

지루한 표정의 켈모리아의 몸에서 바다 빛의 파도가 몰아치기 시작했고, 나도 바다 빛의 파도를 허공에서 만들어냈다. 서로 새벽<Daybreak>을 사용하면서 어느 쪽의 마나가 더 빨리 소비되는지 자웅을 겨루는 것은 결코 아니며...

 

-파앙!

 

내 볼을 스쳐나간 마탄이 순수한 힘겨루기에 방해를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더러운 짓도 할 수 있는 것은 쾌락주의자의 특권이 아니다. 본래 켈모리아의 성격이 좀 비정상적으로 현실적인 시각인 것뿐. 곧 죽게 생겼는데 이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

 

나도 용병시절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꾀를 꾸민 것처럼...평범하게 이기는 것이 지루하거나 볼품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발상부터 기발하지 않으면 저쪽에게 밀린다.

 

“그러면 죽지 않게 조심하라고?”

 

“보통 촌각을 다투는 싸움에서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을 텐데!”

 

급격한 파동을 쏘아 보내는 켈모리아의 손을 피하면서 생각을 했지만, 켈모리아의 새벽을 상쇄하는 걸로 마나를 전부 소진하고 있는 반면, 나와 다르게 다른 마법을 사용할 정도로 여유가 넘쳐난다는 소리.

 

켈모리아의 경우에는 마나도 그렇고 마법도 그렇고 역시 정면대결은 위험하구나. 그렇다면 나는 좀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이야! 루시피나!”

 

“대화재의 시!”

 

거대한 불길이 나와 켈모리아를 뒤덮기 시작했다. 나 혼자의 마나로 켈모리아의 새벽을 견뎌낼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마나를 빌리는 것이 유효한 방법. 당황한 표정으로 대부분의 마나가 소비 되면서, 켈모리아 근처의 마나가 대폭 감소했다.

 

““대화재의 시는 카멜롯 전역을 태워도 이상할 리가 없는 광역마법. 그 마법을 켈모리아 혼자 집중해서 막아낸다면, 상대적으로 이쪽이 우위를 점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은 최악의 악수를 꺼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뒤에서 불길을 조종하는 루시피나에게 이상이 생긴 듯이 식은 땀을 흘리며 동요했다. 붉은 두 눈빛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다급하게 외치기를...

 

“신랑! 도망쳐!”

 

“블랙홀!”

 

우주에 있어야 할 것이 왜 내 앞에 있는 거냐! 시공간 마법으로 조종해낸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염력으로 압축해서 제어하는 거라면, 내가 손을 댈 수 없는 노릇인데. 어마어마한 속도로 흡입하는 검은 구멍은, 중앙에서 뻥 뚫린 체 희생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기, 흙, 나뭇잎을 먹으며 점점 몸을 키워나가고, 곧이어 돌을 들어서 삼키는 만행까지 보여주고 있으니, 기프트피어스를 들고 블랙홀을 향해 눌렀다.

 

-Oh Yeaaaaaaah!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목소리를 빨리 바꾸고 싶은 마음에, 버튼을 강하게 짓누르며 블랙홀의 크기를 줄였다. 새벽을 전개하면서도 블랙홀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칠 정도면 지금쯤 강물에 흘러내려와 바다를 이루고 있겠지.

 

마법사를 마법으로 이기려고 하는 내 잘못인가?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 검을 들고 돌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에 대한 대비는 이미 끝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은 어디에 있는 걸까?

 

방금 전에 우주에서 날아왔던 거대한 괴수를 찢어놓았던 그 빛이 켈모리아에게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지금 당장 루나와 이야기 할 방법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잠깐?

그걸 왜 남에게 부탁을 하는 거지?

오히려 내가 새로 만들면 되는 것을?

 

“그럼 계속해서 가볼까?”

 

전방에서 모습이 사라졌다. 옆과 뒤쪽에서 소름 치는 것과 동시에 티르빙을 검으로 만들어서 방어했다. 방어자세에서도 거대한 충격이 오고 갔는데, 새벽<Daybreak>이 여전히 출렁이며 다가왔고, 켈모리아의 신체에서 푸른 전류가 튀기 시작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걸 실감했다.

 

“터치!”

 

장난스럽게 나를 살짝 치고 갔지만 비스듬하게 몸을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보 같은 마법소녀 옷 앞에 포인트로 달려있던 거대한 리본이 까맣게 그을리며 날아가버렸다.

 

“어라? 왜 변신이 풀리지 않는 거지?”

 

“그야 저는 마법소녀가 아니라 다른 이들 때문에 불행하게 여장을 당한 거니까. 여전히 내 성별에 대해 헷갈린다고 한다면, 지금 당장 외우는 게 좋을 거야. 잡화점의 주인은 남자라고.”

 

“어머나? 몰랐어. 너무 잘 어울려서 말이지.”

 

“그래서 잠깐 부탁인데 새벽을 꺼줄 수는 없을까? 옷을 좀 갈아입고 싶거든.”

 

켈모리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장한 옷으로는 너무 하늘하늘 거리기도 하고, 너무 예쁜 것을 치중했는지 굽이 살짝 높은 신발이니 힘들었다. 서로 바다 빛의 마나가 허공으로 사라지고, 잠깐 동안 옷을 갈아입었는데 검은 면바지와 검은 가죽외투를 입었다.

 

“여전히 검은 거 좋아하네? 집에 그거 밖에 없는 거 아냐?”

 

“그나마 검은 색이 무난하거든.”

 

다른 곳에 공간이동을 하면서 켈모리아는 말을 걸어오는 여유를 보였지만, 지금 구두나 부츠가 아니라 가벼운 신발을 신었으니, 근접전에서도 어느 정도 보안이 되겠지.

 

“아리엘을 되돌린다면 어떻게 할 거야?”

 

왜 느닷없이 저런 질문을 하는 거지?

 

“글쎄. 적어도 다른 사람이 보호해줄 때까지는 데리고 있는 것이 맞지만, 이미 적임자를 찾아서 내가 데리고 있을 필요는 없어 보여. 그러니 이제 질문이 끝났다면 그 이상한 번개마법을 사용해도 괜찮아.”

 

“그래? 너무 여유가 넘치는데?”

 

다시 빛의 속도처럼 움직이는 푸른 스파크가 켈모리아가 지나간 길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흔적과 자취를 남기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 벌써부터 손바닥이 날아왔지만 시공의 눈을 개안한 뒤에, 날아오는 손바닥의 팔을 옆으로 빗겨 쳤다.

 

“빛의 속도로 움직여도 프레임단위로 늘려버린다면, 사람의 눈으로 직시할 수 있을 만큼 느려진다고!”

 

새벽을 휘두른 주먹이 켈모리아의 복부를 강타했고, 주먹에 남아있는 미약한 힘의 반동으로 자연스럽게 왼쪽 주먹으로 이동하며 정권을 내질렀다. 오른손으로 막아내기 위해 얼굴을 가린 켈모리아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저 뒤로 날아가고 나서, 붉은 구두의 굽이 날아가면서 바닥을 스크래치 냈다.

 

“시공간술사에 대한 개념은 아무래도 카일 쪽이 제대로 잡고 있는 것 같아.”

 

“좋은 스승 때문이지.”

 

그리고 서서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시공의 눈을 개안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내 몸은 안 좋아지니. 시공의 눈을 닫고 상황을 살펴봤지만 내가 주먹을 강타하는 동안, 켈모리아에겐 그 어떠한 치명타도 되지 않았다.

 

“복부는 바람마법을 이용해서 쿠션을 만들어 닿지 않게 하고, 정권을 막았던 손바닥에는 이미 새벽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마법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군.”

 

“정답. 나는 육체강화마법이 특기인 언니하고 옛날부터 많이 싸웠거든. 근접전에는 오히려 이쪽이 환영하고 있지.”

 

켈모리아는 나의 해답에 빨간펜으로 “참! 잘했어요!”라고 써주고 싶은 모양인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투시에 마법을 만드는 행위는 제대로 미친 행위 중에 하나지만, 지금은 미친척하고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어라? 마나를 그렇게 많이 사용해도 되는 거야? 마법사들은 단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작지만 효율을 중시하는데?”

 

“때로는 도박이 필요한 법이지. 요즘 인생에 도박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겠어?”

 

“그래도 지금 사용할 마법은 마나가 너무 많이 들겠네? 시전하다가 쓰러질 것 같은데?”

 

그건 사용하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마나와 더불어 내 안에 있는 신성력과 마기마저 모조리 섞을 거니까.

 

“신랑! 그러면 안 돼! 마법에 기초되는 자원은 한가지씩이라고! 그렇게 마구자비로 넣으면 폭주가 일어날 거야!”

 

루시피나가 저 뒤에서 소리치며 말리려고 했지만, 켈모리아의 사심이 가득한 결계가 루시피나의 앞길을 막았다.

 

“그러면 도박을 해보도록 해?”

 

“오히려 이 시간을 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모든 자원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것은 엘티노스의 자서전에도 쓰여져 있는데, 손쉽게 말해 마법사, 사제, 흑마법사 세 명이 모이면 가능한 자살행위라고 했다. 폭주로 인한 거대한 폭발은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모조리 태워나가고, 소멸시키면서 지도를 바꿀 정도이지만, 성공적으로 융합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버틸만한 마법을 만들거나, 신적인 보물들을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나의 경우에는 3가지의 자원을 중재하기 위해, 티르빙을 롱기누스의 창으로 변형시키면서, 내 앞에 태양보다 밝은 듯한 거대한 빛의 구체를 내리 찍었다. 티르빙으로 인해 검은 색으로 물들었던 창은, 빛의 구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하얗게 탈색하기 시작했고, 그걸 잡고 있던 내 몸마저 빛이 나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3개의 자원이 섞여 조화를 이루면,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게 되는 독자적인 에너지라니.”

 

황홀하게 보고 있는 켈모리아 앞에 창 끝을 겨누며 발동언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황혼<Dusk>”

 

거대한 빛은 창 끝에서 순식간에 뿜어져 나와, 켈모리아의 마법방패와 복부, 그 뒤에 있는 결계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검은 거대괴수의 몸까지 뚫어내면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켈모리아는 자신의 복부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분명 막았을...”

 

“새벽으로 몸을 두르면서 막아내도 소용 없어. 이미 신을 뛰어넘는 에너지니까. 엘티노스 자서전에도 없던 정보야. 3가지의 자원이 뭉치면 이런 일이 되는 거지. 과거로 회귀마법을 사용할 거면, 내가 롱기누스로 흡수하기 전에 갔어야지.”

 

힘 없이 축 늘어진 켈모리아는 외견상 아무런 상처가 없지만, 롱기누스는 상대의 영혼을 꿰뚫고 부수는 힘. 지금은 황혼의 힘을 이어받아 상대의 본질마저 부순 것이다.

 

“더 이상의 회귀는 없어. 그 지루한 일생에서 쾌락주의자밖에 될 수 없었던 저주받은 나날도 이제 끝이야. 이제 환생 같은 건 불가능 할 테니까.”

 

본래의 모습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이 내 몸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윽! 쿠학! 콜록! 콜록!”

 

입에 비릿하면서도 끈적이는 짠맛. 이미 유혈을 토해내고 주위를 둘러볼 틈도 없이 시야가 흐려지고, 온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위험하다며 생각하지도 않았던 행동을 인간이 해냈다.

 

다만, 그 대가는 톡톡히 치르고 있는데.

몸이 많이 피폐해진 터라, 지금 당장 안정을 취하고 쉬어도 얼마 못살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이런 거 사용하지 말아야지...”

 

온 몸의 마나가 제대로 모이지 않고, 롱기누스의 창은 다시 귀걸이 형태로 바뀌어 버렸다. 정말 한 순간. 3개의 자원이 합쳐져서 새로운 자원을 만들고, 롱기누스로 그 힘을 흡수했을 때. 지식과 이해가 초월범위까지 닿아있었고, 한정적으로 창조신과 버금가는 힘을 얻었다.

 

태초에는 마나와 신성력, 마기가 모두 합쳐졌다는 최초의 발상이,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가버렸다. 그리고 켈모리아를 공격했던 그 순간, 그녀의 과거 회귀는 100번 이상 이루어낸 업적이야 말로 아리엘의 탄생이었으며, 아리엘을 자신의 밑으로 두고 싶은 이유라면 단순한 변덕이었겠지.

 

서서히 싸늘해지는 켈모리아의 얼굴에서는 오히려 웃음이 피어 올랐다.

 

“회귀도 못하고 환생도 불가능하다. 그럼 이 지루한 저주에서 겨우 해방될 수 있는 거구나.”

 

 

존재가 소멸한다는 의미는 죽어서 가죽을 남고,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잊혀져 버린다는 소리. 그런 잔혹한 죽음 앞에서도 서서히 사라지는 자신의 손을 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내 머릿속은 수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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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일격필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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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3. 어중간해진다는 건

 

눈길 돌리는 곳마다 풍경이 아롱아롱 흐리다. 미겔은 이를 깔리마(Kalima)라고 불렀다. 언제부터일진 알 수 없지만, 사하라 사막이 제 몸을 동남풍에 조금씩 벗겨가며 섬을 감싸 왔다. 란사로테 섬에 내리면서, 카나리아 제도가 유럽보다 아프리카에 가깝다는 걸 실감했다. 스페인 내륙으로부터는 약 1,000km이지만 모로코로부터는 불과 100km 남짓이라는 걸 말이다.

 

우리가 숙소로 머문 곳은 티아구아다.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작은 시골 마을이다. 가옥은 대부분 1층이며 어디나 하얀 외벽에 초록색 대문을 달았다. 허허벌판 사막에 구멍이 숭숭 뚫린 화산암이 흔하다. 18, 19세기에 화산폭발로 섬의 상당 지형이 바뀌었다는데 지금도 활화산이다. 그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이 섬으로 몰려들고 있지만, 아마 이 마을은 연중 어느 때라도 외지인이 한 자리 수에 그칠 것만 같은 그런 조용한 동네다.

 

숙소 주인장 카를로스 아저씨는 필요한 게 있으면 대문에서 “카를로스, 카를로스”라고 부르기만 하란다. 주변에는 산책로와 농업 박물관이 있다며 꼭 한 번 찾아가보라고 일러줬다. 다음날, 동네 한 바퀴 돌 겸 자연스레 농업 박물관을 찾아갔다. 1840년부터 지금까지 쓰이는 실제 농가라고 한다. 집안 곳곳에 닭과 병아리가 돌아다니고 외양간에는 낙타와 염소가 여물을 먹는다. 그 옛날 농가의 살림살이와 건물 내외부 구조와 환경 등을 그대로 뒀다. 곳곳에 걸린 액자에는 마을의 지난 역사가 흑백으로 담겼는데 오래 머물진 않았다. 지금의 바깥 풍경과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농가 한편에는 와인 양조장이 자리했다. 주변 포도밭에서 직접 수확하여 만든 와인이다. 바람이 강하고 비가 잘 내리지 않아 농사짓기가 쉽지 않은 섬이다. 포도 재배 방법이 다른 곳과 사뭇 다른 이유다. 여기서는 포도나무를 비옥한 화산재 토양에 묻고 그 주변에 돌담을 쌓는다. 이 돌담을 소코(Zoco)라고 하는데, 바람이 습기를 거둬가는 것을 막는다. 와인 시음을 권하기에 화이트 와인을 부탁했다. 술을 잘 알지 못함에도 텁텁한 기운 하나 없는 깔끔한 뒷맛이 한동안 기억에 남았다.

 

사실 술보다도 곁들여 나온 다과에 더 눈길이 갔다. 모호(Mojo)라는 카나리아 제도 특유의 소스와 함께 크래커에 치즈를 얹었다. 치즈도 여기서 직접 기르는 염소로부터 나왔다. 모호(Mojo)는 크게 붉은색을 띄는 모호 로호(Mojo Rojo)와 초록색을 띄는 모호 베르데(Mojo Verde)로 나뉜다. 모호 로호에는 파프리카 가루, 토마토, 홍고추 등이 들어가는 반면, 모호 베르데는 아보카도, 고수, 청고추 등 푸른색 채소와 허브로 만들어진다. 여기서는 보통 감자를 소금물에 껍질째 삶아서 모호에 찍어 먹는데, 파파스 아루가다스(Papas Arrugadas)라고 카나리아 제도의 전통 음식이란다.

 

미겔은 자신이 꿈꾸던 휴일이란다. 몇 찾아오지 않는 조용한 농가, 햇살 따듯한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며 한낮을 보내는 것 말이다. 아마 마을 분들은 박물관이 아니라 누구네 농가로 부를 것만 같다. 우리도 관광객이 아니라 옆동네에서 이따금 마실 오는 이웃으로 생각할지도.

 

한낮의 열기가 수그러들 쯤, 박물관을 나서 다시 동네산보를 이어갔다. 한 두 개의 언덕을 빼고는 나무도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 펼쳐졌다. 고개만 돌리면 해안에 자리한 이웃 마을도 눈에 훤히 들어왔다.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디서 굽이치는지도 말이다. 사실 길을 벗어나도 별다른 장애물이 없어 어디로 걸으나 마찬가지였다. 그간 여러 사람이 다녀서 땅이 조금 더 탄탄할 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미겔이 문득 자신이 점점 아웃사이더가 되어간다고 말했다. 히피가 되겠다고 선언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마드리드의 다른 친구들은 그럴 듯한 가정을 꾸리고 번듯한 직장을 다닌단다. 그에 비해 자신은 마흔이 넘도록 부동산, 잡지, 자전거, 관광홍보 등 이리저리 일을 옮겨가다가 출퇴근 개념을 상실한 프리랜서로 굳어지고 있단다. 이어서 그는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아마 이런저런 여러 분야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을 거라고 뒤이었다. 취미라고 하기에도 뭐하고 직업으로 삼기에도 애매한 지점에 말이다.

 

그럼에도 미겔은 다시 돌아가도 똑같을 거라고 말한다. 그때그때마다 괜찮은 선택을 했다며. 알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럴 수 있다고. 가만 보면 어중간한 경계에 놓여 있는 이들은 나름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그럴듯한 시기에 그럴듯한 배경으로 졸업과 취직, 결혼을 이어가며 사회에 자리 붙여가는 사람들의 비슷비슷한 굴곡보다는 그 다채로운 빛깔이 좀 더 넓게 퍼져 있을 것만 같다.

 

 

어느덧 하얀 달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며 깔리마가 붉게 물들었다. 한낮이나 한밤보다는 이런 시간이 더 아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낮이 밤이 서로에게 고이 스며들어가는 시간에,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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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6

474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내 뼈가 부러졌는지 확인하기 전에, 남자로 다시 되돌아갔으니 확인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바보 같은 마법소녀 옷은 왜 남자일 때 입어야 하는 가?’에 대해선 양피지 80장 분량의 논문이 필요할 정도로 고찰을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간단한 티셔츠와 바지 위에, 뼈로 이루어진 경갑을 입고 있는 상태. 그런데 나더러 프릴이 바보같이 달린 저 옷을 입으라고?

 

절대로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을 할 수 없어요. 엘티노스 씨도 그렇고 이걸 입는 건 루니아 누나가 입어야 할 정도로 기묘한 옷이니까요. 어째서 제가 이걸 입어야 하는지 타당한 이유를 말하면 생각만 해보도록 하죠.”

 

“그야. 아리엘의 정신을 번쩍 차리기 위해서는 네가 여장을 하고 있어야 하거든.”

 

“무슨 근거에요!”

 

내 여장과 아리엘이 제정신으로 되돌아오는 거와 무슨 상관이길래?

 

“뭐. 애석하게도 아리엘의 생각으로는 네가 평상시에 있는 모습보다는, 여장한 모습이 가장 반응을 이끌어내기 쉽기도 하고, 그때마다 폭주해서 너를 인형이라던가 애완동물로 만들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냐?”

 

“아니. 폭주한 사실까지는 알고 있는데...잠깐만? 생각해보니 아리엘은 루니아 누나보다 더 한 애였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롱기누스로 제거할까요?”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살려서 지금 아리엘을 살려놓는다면, 언젠가 나의 평화와 평온을 단숨에 때려부수는 위험인물로 머리에서 지정했지만, 엘티노스의 일리 있는 말과 나를 썩어버린 사과를 보듯이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저 애를 살리는 게 목적이라며? 그런데 롱기누스로 대뜸 죽이면 되겠냐? 그리고 아리엘은 살아있는 편이 가장 좋다면서, 저 안에 있는 세피르라던가 저 뒤에 있는 신수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그렇긴 하죠...잠깐? 신수요?”

 

“삑삑!”

 

“으아악! 젤나가 맙소사! 엘티노스 씨! 혼종이에요! 혼종이 나타났어요! 지금 당장 아둔의 창에 연락해서 첫 번째 자손을 이쪽으로 좀 불러주세요! 아니면 그냥 아몬이라도 괜찮으니까 제발 저 존재를 공허속으로...잠깐? 저게 신수라고요?”

 

아까 전의 공격적인 성향과는 달리 느긋하게 엘티노스 어깨에 올라오면서,“삑삑!”하고 울기 시작했다. 그 뒤에 하얀 뱀이 따라오면서 의기양양한 어조로 내 귀를 때렸다.

 

“어떻습니까? 카일 씨. 제가 저 기이한 뱁새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하하!”

 

“자, 잘했어. 그런데 어떻게 친구가 된 거야?”

 

“아. 그건 말이죠. 저번에 잡화점에 갔을 때 기괴한 하얀 책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불쏘시개로 사용할까? 생각해서 미리 삼켜놨었는데, 때 마침 저 뱁새가 절 추격해와서 그 책들로 공격하기 위해 뱉었는데, 알고 보니 카일 씨가 여장해서 찍혀있는 백장미라는 책이...으아아아아악!”

 

머리와 꼬리를 붙잡고 이제 찢어져라 늘리고 있었다. 나의 분노로는 하얀 뱀을 찢을 수 없는 걸까? 고무처럼 쭉쭉 늘어나는 기괴한 느낌에, 땅바닥에 냅다 던져버리고는 왼발을 빠르게 움직여서 뱀의 머리를 밟고 천천히 생각했다.

이 녀석을 대체 어떻게 제거해야 하지?

 

“아, 아무튼! 그 책 때문에 제정신을 찾았는지 도와주겠다고 따라온 거에요!”

 

백장미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는 말이 내 귀에 흘러 들어왔고, 허탈한 감각이 머리에서 한숨으로 치환해버리는 놀라운 기적이 시행되는 순간, 내가 여장을 하면 아리엘의 정신이 되돌아온다는 그 말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기 보단 저 신수는 맨 정신인 것 같던데?”

 

“삑삑!”

 

“이건 대체 뭐라는 거냐?”

 

하얀 뱁새가 울고 있어서 하얀 뱀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빨리 여장을 하지 않으면 근육질 몸매로 코브라 트위스트를 걸어버리겠다고 하는데요?”

 

그게 신수가 할 소리냐?

 

“사건이 이렇게 심각한데 제가 여장을 한다는 그런 여유가 어디에 있나요?”

 

천천히 저 옷으로부터 떨어지는 거다. 머리에서는 타당할 정도로 당연한 말을 잡아 늘려서 시간을 최대한 벌고, 말과는 다르게 행동으로는 점점 아무도 모르게 멀리 멀리 떨어지는 것.

 

“게다가 저는 잡화점의 주인으로 조만간 잡화점을 열어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그렇게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이런 바보 같은 일 때문에, 지금 해야 하는 아리엘의 구출작전을 이렇게 소홀히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지금은 모두가...”

 

“주인. 그 뒤로 도망간다면 루시피나와 루니아가 제압을 하고 옷을 갈아 입힐 것을 명하겠노라.

 

제길. 레시아가 벌써 눈치를 챈 건가?

 

“하하핫! 제가 왜 도망을 간다고 생각하나요?”

 

태연하게...모두를 속이는 행동과 여유로...1초라도 긴장이 늦춰지면 그때가 찬스다.

 

“저는 잠깐 물을 마시기 위해 잡화점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이에요.”

 

“물통은 마스터의 허리 쪽에 있지 않습니까?”

 

“내 물통은 비어있...”

 

“마스터의 물통은 아직까지 70%용량이 저장되어있습니다.”

 

...이거 어쩔 수 없겠는데?

 

“크하핫! 이것이 나의 도주경로...”

 

***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른 반사속도와 타이밍 때문에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지금은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분위기에도 꼭 그렇게 여장을 시켜야만 했을까? 지금 내 주변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루니아 누나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지만, 이 분노를 과연 누구에게 풀어야만 할까?

 

지금 이 분노는 천 개의 태양보다 더 뜨겁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 같은...

 

“역시 주인이로군. 그 전에 이 고양이 귀도 착용한다면...냐아아아앗!”

 

순식간에 검은 고양이의 귀를 낚아채서 잡아 늘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비명과 앞발로 이리저리 휘둘러 할퀴려고 했지만, 이리저리 울리는 레시아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천히 그리고 터져나올 것만 같은 분노를 짓누르며 소리를 냈다.

 

“무슨 고양이 귀를 착용해요? 절 여기서 얼마나 더 비참한 꼴로 만드시려고? 나중에 돌아오게 된다면 레시아를 교육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주인은 그렇게 안 봤는데 짐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니.”

 

“네? 느닷없이 짜증나게 무슨 소리죠?”

 

“짐을 교육한다면 그래도 단 둘만 있을 때 느긋한 밤이 좋...냐아아아앗!”

 

뭘 착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거에 레프리시아를 교육할 때처럼 훈계를 하겠다는 소리다. 지금에 와서 그게 통할지 잘 모르겠지만...

 

“마스터. 냥캣 말고 저를 먼저 교육시켜주시죠. 가급적이면 상냥하게...”

 

-덥썩! 꽈아아아악!

 

“너도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생각하는 교육과는 거리가 좀 머니까 조용히 해.”

 

“마스터. 여전히 아이언 클로는 아픕니다. 그러니 좀 풀어주시죠.”

 

세상의 멸망이 눈 앞에 찾아와도 농담을 할 줄은...

 

“그런데 지금 이 모습으로 아리엘에게 붙잡힌다면, 무시무시한 일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오?”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루니아 누나가 입을 열자. 천천히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으로는 역시 지금 당장 롱기누스를 사용해서...

 

“아니. 내가 만든 봉인 장치에 들어가면 어차피 둘 다 의식을 잃게 될 거야. 그 안에서 제 2차 창작물이 나올법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그런데 공간이 협소한 곳에서 여장한 남자와 여자 둘만 있다니. 의외로 부럽네.”

 

“뭐가 부러워요? 저는 재능을 다 포기하는데.”

 

“재능이 아니라 마법만 포기하겠지. 그래도 마나를 끌어 모으는 체질은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 언제라도 마왕에게 부탁하면 다시 마나의 활로를 열 수 있을 거야.”

 

“그 전에 페어링이 끊어지게 되면 레시아와 시나는...”

 

검은 고양이와 하얀 올빼미를 바라보며 걱정하는 것이 있었으니.

 

“걱정 말거라 주인. 짐과 비둘기는...”

 

“올빼미 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다 똑같지 않는가?”

 

“다릅니다.”

 

이래서 내가 걱정한다는 거야. 내가 없으면 죽어라 싸울 것 같으니까. 지금 하얀 올빼미와 검은 고양이가 서로 파문의 호흡을 하고 있는데, 내가 없으면 이제 누가 말리냔 말이지...

 

“모두 싸우면 안 돼요오. 사이 좋게 지내셔야죠오? 화해의 기념으로 제가 만든 쿠키를...”

 

“아니다! 루니아! 우린 배도 고프지 않고 싸우지도 않았노라!”

“그 기괴한 무지개 빛 음식은 머나먼 시공 속으로 던져버리시길 바랍니다.”

 

당분간은 나 없이도 잘 지낼 것 같지만, 사역마가 아니게 되면 레시아는 다시 마계로 가야하고, 시나의 경우에는 본래의 차원으로 되돌아가거나, 천계에서 머물고 있겠지만...지금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할까?

 

아무래도 저 둘 때문에 느긋함이 옮았는지, 별 쓸 때 없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본래의 일에 집중을 하자면, 핑크 빛의 바보 같은 마법소녀 복장으로 여장을 해서, 아리엘의 의식을 차리냐 마느냐 실험을 좀 하다가, 엘티노스가 만든 석상으로 유인해서 같이 들어간다.

 

“누가 보면 무식한 자폭공격을 그대로 실현하는 줄 알겠네요.”

 

“그런 자폭공격을 먼저 생각한 게 너야.”

 

지금쯤이면 카멜롯에 있는 모든 괴수들이 자고 있을까? 슬슬 시간이 되었으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티노스 씨. 행운 좀 빌어줘요. 신이잖아요.”

 

“얼마나 많은 여자에게 둘러 쌓이려고 내가 행운을 빌어주냐? 시끄럽고 빨리 해결이나 하러 가.”

 

엘티노스의 어처구니 없는 대답을 듣고 한숨을 내쉬며, 카멜롯으로 다시 향하고 있을 무렵.

 

“마법학원 쪽으로 이동하는 걸 보니, 결계가 해제 된 건가?”

 

작은 뱁새는 조그마한 몸집으로 내 주변을 계속 날아다니면서, 길을 알려주고는 있었는데 마법학원 방향으로 나를 계속 이끌면서, 정신 사나울 정도로 “삑삑!”이라는 소리만 계속 울려 퍼졌다.

 

“알았어. 지금 가고 있잖아. 대체 뭐가 그리 바쁘길래?”

 

“어서 와. 카일. 어라? 지금은 마법소녀 복장이네? 나를 위한 걸까?”

 

생글생글하게 웃고 있는 켈모리아가 정면에 서서 맞이해주고 있었다. 붉은 색 드레스는 흠집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계 안에서 잘 지냈으리라 생각했지만, 왜 지금 결계에서 나왔을까?

 

“반 강제로 입혀진 것뿐이지 너를 위한 건 아냐.”

 

“그래? 그래서 지금은 아리엘을 봉인하러 온 건가? 그거 정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감동의 장면인걸?”

 

지금은 켈모리아를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다른 계획이 무산이 되는 걸까?

 

“그보다 괜찮을까? 아리엘은 마신이 되어서 그나마 저주가 발동하지 않고 있지만, 마족이 되면 곧바로 저주가 발동할 거야?”

 

“저주라고? 정말 쓸 때 없이 저주를 잘 사용하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저주인데? 아니면 내가 직접 포장까지 뜯어야 확인이 가능하던가?”

 

켈모리아의 저주마법은 어처구니 없게도 너무 강한 건 사실. 아리엘을 봉인시키는 것과 동시에 죽거나 내 목숨을 위협하는 저주를 걸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리엘을 봉인하기 전에 새벽<Daybreak>으로 정화하고 난 다음인가?

 

엘티노스가 만들어준 석상 안에서도 발동되는 저주라면 귀찮아지니까.

그걸 알고 켈모리아는 지금...

 

“그렇네. 날 죽이기 위해 나타난 거군.”

 

“카일의 새벽은 모든 것을 해제해버리는 무자비한 능력이잖아? 의도적으로 응집된 마나를 해제한다면, 당연히 내가 걸어놓은 저주마법까지 해제하겠지. 하지만 아리엘은 마신에서 되돌아오면 저주가 발동되어야 내가 좀 더 편해지거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죽일 수 밖에 없지. 노아스!”

 

“이프리트! 실피드!”

 

땅의 정령왕을 소환하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프리트와 실피드를 불렀다.

 

“이프리트. 실피드. 정령왕의 일은 너희들끼리 해결하도록 해. 나는 저 앞에 있는 이상한 쾌락주의자에게 한방 먹이고 와야 하니까.”

 

“한방 먹이고 오다니? 카일 씨도 정말 대담하시...아야야야야!”

 

 

전투 전에 실피드가 쓸 때 없는 농담을 하자마자, 아이언 클로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는데, 되도록이면 진지한 부분에서 농담으로 무마시키려는 행동은 눈치껏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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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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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3 프란치스카의 공개일기

광명동굴 나들이 [2017.0716. 일]

* 무척이나 더운 날 우리 가족은 집에서 가까운 광명동굴로 나들이를 갔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시로 적으려 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동굴테마파크 광명동굴은 

1910년 한국이 일본에 주권을 빼앗겨 앓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 남자들에게 강제로 이 동굴에서

금, 은을 구하라고 해서 광부들이 열심히 일해 만들어 졌다네. 

  

처음 광명동굴에 갔을 때는 차가 막혀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광명동굴을 못 갔지만 이제는 갔다오니 속이 시원하네.

밖은 너무 더웠지만 동굴은 냉장고처럼 시원했다네.

 

광명동굴에는 아름다운 것과 신기한 게 많았다네. 

레이저 쇼를 보며 와와~ 소리를 질렀다네. 시원한 폭포소리는 내 속을 뻥하고 뚫어 주었다네.

무시무시한 용은 길이가 40미터가 넘는다네. 천장에서 또로록 떨어지는 물을 받아 엄마에게 확 뿌렸다네.

물고기들이 특히 제일 신기 했다네.

손을 집어 넣어서 물고기들을 만졌을 때에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할 정도로 황홀했다네. 

 

광명동굴을 갔을 때 내 기분은 너무나도 행복했다네.

이처럼 동굴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

다음에는 어른이 되어 와서 와인동굴에서 꼭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네~

(고백하자면 와인을 세 모금 마셨다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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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5

473

 

 

 

사람의 한마디로 많은 것이 엇갈리기 시작한다면, 지금의 상황도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이유. 그 이유야 말로 나와 아리엘이 같이 봉인 된다는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휘두른 검은 고양이가 큰 소리로 내 머리 위에서 외쳤다.

 

“혼자서 들여보내면 되는 것 아닌가? 차라리 시공의 눈을 개안해서 아리엘을 유인한 다음에...”

 

“그걸 시도하려고 했는데, 시공간의 흐름을 볼 수 있어도 그건 신들에게는 무시할 수 있는 분야겠죠. 그 전에 아리엘에게 붙잡히면 모든지 끝날 테니, 제가 아리엘에게 붙잡히는 미끼로 그 안에 들어간다면, 제가 없는 동안 밑에 있는 검은 존재...아마도 세피르가 폭주를 할 것 같으니, 그것만이라도 제대로 막아낸다면 그 다음은 알아서 풀릴 거에요.”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은 겨우 하루를 벌었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곳에서 기습적으로 공격이 들어온 몬스터들을 다시 카멜롯에 귀환시켜버렸고, 저곳은 정말로 괴물들의 본거지가 되어버린 이상, 마법학원에 있는 결계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 지금은 무너지지 않기를 원하고 있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켈모리아가 고생을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마스터.”

 

하얀 올빼미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내 시선을 옮겼다.

 

“그 봉인하는 곳에 들어가면 마스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야. 뭐...똑같이 봉인 되는 거지. 아리엘이 각성하기 전으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가니까, 나도 아마 마법을 발현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해. 사역마에 대한 링크도 전부 다 잘려나갈 거고, 시공간 마법까지 열어놨던 저의 마법들은 모조리 봉인 되겠죠. 아니면 두 번 다시 사용하지 못하거나.”

 

이런 충격적인 말을 담담하게 해서 좋지 않은 이유라면, 주변에서 충격을 너무 크게 받는 것일까? 내 입장에서는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준 거지만, 검은 고양이는 나를 바라만 보면서 아무런 말도 못했고, 시나야 말로 충격의 늪에 빠졌다고 볼 정도로 뚫어져라 응시만 할 뿐이었다.

 

“어. 그러니까...그렇게 충격 받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그럴 줄 알고 사역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연이 닿을 수 있게, 이런 반지들을 모조리 선물했다는 그 사실은 잊으면 안 되죠.”

 

“그래도 지금까지의 주인의 재능과 잠재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높았노라! 신의 영역에 가까운 한계까지 인간의 몸으로 제대로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마신 하나를 봉인하기 위해서는 크나큰 위험이 따르잖아요. 세상이 쑥대밭으로 되기 전에 사람 하나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거에요. 게다가 제가 언제 죽는다고 했어요? 지금까지 쌓여있던 마법을 모두 포기하고 평화로운 삶을 되찾는 게 중요하죠.”

 

지금 생각한 것 중에서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소한의 피해를 입으면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할 수 있는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죽는 것도 아니고 엘티노스의 말처럼 돌아갈 수 있으니까. 이 일이 완전하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

 

이거야 말로 베스트 아닌가?

다른 사람이 보면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겠네.

...물론 100%확률로 감동하지 않겠지만.

 

“주인. 다시 생각해보거라. 짐이라면 주인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노라. 오히려 지금 아리엘을 살리기 위해 주인이 이렇게 고군분투를 할 이유가 있는가?”

 

“만일 봉인이 풀려서 본연의 아리엘로 되돌아간다면, 켈모리아가 기습을 해도 가볍게 받아 칠 수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영혼부터 이미 다른 아이라서 봉인에서 막 깨어나도 힘이 없는 저와 달리, 아리엘은 마신이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거에요.”

 

그러면 이제 슬슬 엘티노스 씨에게 연락할 차례인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너희들은 아침드라마 찍기 바쁜 거냐? 그보다 남자가 한번 마음을 먹었다는데 그 주변에 있는 여자들은 밀어줘야지.”

 

연락하기도 전에 뒤편에서 심드렁한 소리와 함께, 심판자와 발키리의 호위를 받고 하늘에서 강림하는 상급신...이라기 보단 그냥 아저씨처럼 옷을 입은 엘티노스 씨를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천계에서 성녀의 그릇에 담겨 우아하게 강림하는 여신들과는 달리, 정말 자유로운 신이 아닐 수 없었다.

 

“엘티노스 씨.”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상에 내려올 수 있는 것인가?”

 

반가운 나의 어조와는 정 반대로 경계하면서 따지는 듯한 어조로 레시아가 입을 열자. 엘티노스는 머리를 긁으면서 한탄하고 있었다.

 

“그야. 허락 받았으니까.“마신 때문에 난장판 될 것 같으니 제가 잠깐 내려가서 확인 좀 하겠습니다.”라고 창조주님께 간청해서 이곳까지 내려왔다. 꼬마 마왕.”

 

“짐은 꼬마 마왕이 아니니라! 이 대륙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시끄러워. 지금의 카일...아니, 지금은 카린으로 말해줘야 하나? 아무튼 카린이 마음이 넓어서 계속 설득하고 있었지, 나 같았으면 때려서라도 말을 듣게 만들었어.”

 

“저기. 엘티노스 씨. 그래도 여자를 때린다는 거는...”

 

“입술로 때렸지.”

 

아. 그렇군. 깊게 파고 들지 말자.

은근슬쩍 내 볼에 자신의 입술을 들이 밀려고 하는 엘티노스 씨의 얼굴을 붙잡고, 연락하기도 전에 나에게 먼저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제가 연락할 때 봉인할 물건만 내려 보내주시면 될 텐데, 지금 이곳에 온 이유는...?”

 

“네가 아리엘과 동귀어진으로 봉인되면 그 밑에 폭주하는 애를 내가 막아야 하니까. 켈모리아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영웅행세를 하기 전에, 내가 직접 막아내야 하지 않겠냐? 게다가 저 밑에는 세피르라는 녀석과 더불어 아르트리옴도 같이 있으니까. 정확하게 보자면 저 검은 존재가 아르트리옴이야.”

 

“그 마신 아르트리옴이요?”

 

“정확하게는 아리엘의 다른 인격. 창조된 마신이라고도 하지만, 실제 모습은 아리엘의 부정적인 인격이 저곳에 다 보였다고 생각하면 돼. 지금은 겉으로 날아다니며 모두를 재우는 아리엘이 통솔하고 있지만, 여기서 문제로 모든 감정을 제어하는 이성이 사라지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본능에 몸을 맡겨서 미쳐 날뛰겠죠. 아! 그래서 폭주를 하게 되는구나! 그런데 세피르는 왜 저 안에 융합한 거에요?”

 

엘티노스는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보고도, 모든 이들의 생각을 모조리 읽어내어 단서를 찾는 기묘한 행위를 했고, 명확한 해답을 전수해주는 것이야 말로 방정식에 대입하듯 쉽게 알려주고 이해를 시켜줬다.

 

지금이 전쟁 중인 줄도 모르고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서 엘티노스에게 질문을 하자. 가여운 얼굴을 하면서 카멜롯을 바라보더니 한마디를 했다.

 

“그야 아리엘이 좋아서 구해주려고 한 거 아니냐. 그러다가 잘못 되어서 부정적인 감정에 먹혀버린 거지. 너도 뇌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굴려서 제대로 된 대답을 알아내려고 고민 좀 해봐라.”

 

엘티노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굵은 손가락이 내 이마를 살짝 밀치면서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확실하게 모든 것을 상황정리를 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는 엘티노스의 모습을 보자, 그의 전성기 시절에 어떻게 세상의 멸망으로부터 지켜냈는지, 그의 일면을 아주 조금 엿본 것처럼 가슴 한편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자신감이 솟구쳤다.

 

“어차피 아리엘은 네가 끌고 들어가서 봉인한다는 건 변하지 않지만, 이제부터 그 주변에 대해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리도록 하지. 모두 전선에서 전부 물러나게 해. 아니, 차라리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으라고 전해줘. 검은 높새바람도 듣고 있지? 내가 있는 지점에 동상도 떨어뜨리면서 전선에서 이탈하라는 방송과 텔레파시를 부탁해. 아마 내 이름으로 말을 하면 좀 이상하니까. 지금 잡화점의 주인인 카일의 이름을 대면서 모두 철수시켜.”

 

“잠깐만요! 제 이름을 대면서 철수를 시키다니!”

 

“그럼 영희를 시킬까?”

 

“그건 또 무슨 말...아니, 잠깐 그 시답지 않는 개그로 댁이 먼저 죽을래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나의 자신감과 감동을 물어내!

 

“너도 이제 슬슬 카린의 모습에서 되돌아와. 아리엘과 정면에서 대결하려면 거대한 마나를 품는 여성의 몸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날렵하고 빠른 움직임을 할 수 있는 남자의 몸으로 싸워야 할 거야. 어차피 마나라고는 람파시나가 모조리 다 사용하는 바람에, 거덜나버렸으니까 슬슬 그 모습으로 이루어내야 할 목표를 완료했다고 생각해.”

 

시나가 카멜롯 일대의 과거를 안리아스의 수정구로 녹화하면서, 나의 마나를 거의 다 사용했다는 것까지 말하지 않고 다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웅이라는 이름은 어딜 가서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대신. 남자로 돌아갈 때 이 옷이나 입어라.”

 

“이게 무슨 옷인데요?”

 

“그야 당연히 마법소녀의 옷이지.”

 

“남자가 여성용 옷을 입고 뭐하라고!!!”

 

엘티노스는 능글맞게 검은 고양이와 하얀 올빼미에게 다가가더니, 조용한 말로 속삭이고 있었는데, 나의 강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청력으로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렇군. 일리가 있는 말이로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군요.”

 

음흉하게 웃는 듯한 고양이의 얼굴. 그리고 뭔가 납득을 해버린 듯한 시나의 대답에 불길함을 한 가득 껴안고 있었다.

 

“주인. 남자의 모습으로 입기 싫으면 지금의 모습으로 입어도 상관이 없다.”

 

“어째서 제가 그 옷을 입는다는 전재로 되는 건데요?”

 

“다만, 마스터가 여성의 모습으로 봉인이 된다면, 봉인이 풀렸을 때는 남은 일생을 그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이걸 지금 당장 마스터에게 입힐 것이며, 남자로 입을 것이지 여자로 입을 것인지 결정해주시길 바랍니다.”

 

이건 또 무슨 협박이야?

지금 전쟁하고 있는 중 맞지?

그런데 나는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여장을 할지, 여성으로 살지에 대한 선택지를 해야 하냐고? 도대체 어떤 사람이 싸우기 전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먼저 걱정해야 하냐고!

 

...나밖에 없나?

 

“왜 이게 이렇게 된 거에요?”

 

정확한 이유는 엘티노스가 잘 알고 있을 테니, 혹시라도 이게 다른 작전의 개요라고 생각되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면 내가 어느 정도 납득을 하고 사약 먹는 기분으로 여장이라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이것은 모두 작전이니까.”라는 마음으로 합리화를 하면서 나를 자살 직전으로 내몰지 않기 위해서...

 

“전쟁 중에 찍는 카일의 여장이라고 한다면, 백장미에서도 베스트니까. 백장미의 모토는 언제나‘자연스러움에서 묻어 나오는 리얼리티.’라고 하잖아? 그래서 어떤 녀석이 계속 도촬을 하는 거고.”

 

“그 빌어먹을 잡지 하나 때문에 나를 망칠 셈이야! 그리고 누구야! 도촬하는 녀석!”

 

“자자. 시끄럽고 여자로 살기 싫다면 여장을 하면 되잖아. 빨리 옷이나 갈아입고 나를 찾아오도록 해. 당연히 사역마와 더불어 지금 저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레드 드래곤과 여기사도 포함하고.”

 

저 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레드 드래곤과 여기사?”

 

“신라아아아앙!”

“카리이이이인!”

 

“망할!”

 

이미 속도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떨어지고 있는 여자 둘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빨리 명계로 가는 방법 중 하나일 터. 나는 몇 번이나 이런 불행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 다음에는 어디서? 언제?

 

“나에게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정말적인 외침을 무시하고 어마어마한 충격이 내 온몸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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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사 엘티노스가 등장했다.

효과는 미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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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1. 사전에 사과를

 

‘그란 카나리아로 이사했다. 남는 방이 하나 있다. 온다면 환영이다.’

 

“한국사람이구나?”

“아니, 스페인 사람.”

“오, 스페인 사람은 또 어떻게 만났대?”

 

글쎄, 복숭아랄까. 자세한 날짜나 장소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복숭아만큼은 확실하다. 5년 전, 여름방학을 틈타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그 어딘가다. 작은 개울 하나가 흘렀고, 미겔은 씻고 있던 복숭아 하나를 내게 건넸다. 별 말 없이 열흘 가량을 동행하고는 그는 회사로, 나는 학교로 복귀했다. 그 후로는 아주 이따금씩 이메일로 서로의 근황을 짤막하게 나눴다. 회사를 이직했다거나, 만나는 사람이 있다거나, 나라 경제가 망해가고 있다거나 등등.

 

3개월을 답했다. 무비자 체류 기한을 넘길 수는 없으니까. 다만, 왜 떠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그냥' 혹은 '답답해서'다. 또 다른 월급살이를 하루빨리 찾아 연명해야 하는 일시적 백수에게는 아마 사치에 가까울 것이다.  게다가 휴양지라니... 

​사실 어떻게든 그럴듯한 추임새를 넣어보려 했는데, 허사였다. 목적이라는 게 애초에 만들어진다기 보다는 나타나는 쪽에 더욱 가까운 건지도. 아무튼 주변에서는 부럽다고만 하는데, 속내는 썩 그렇지 않다. 솔직해질수록 여행은 힐링보다는 도피나 망각을 닮아갔고 결국엔 ‘하아, 모르겠다’로 끝마쳤다.

 

제1식: 케이준 치킨을 곁들은 감자샐러드, 데친 야채와 밥을 곁들인 삼계찜, 라임향 리코타치즈 무스케이크, 버터, 소프트 롤빵.

제2식: 훈제 치킨 슬라이스를 곁들인 샐러드, 굴소스를 곁들인 에그누들과 생강소스 곁들인 볶은 닭고기, 오예스 초코렛 파이, 버터, 호밀롤빵.

 

하릴없이 기내식 리플렛을 읽다가 괜한 문구에 눈길이 머문다. ‘메뉴에서 뭔가 부족하면 우리는 사전에 사과드립니다.’ 재료가 부족해지기 전에 미리 사과를 드린다는 이야기인가 싶어 몇 번을 재차 읽었다. 맞다. 수면부족이 틀림없다. 기압차에 따른 두뇌활동 둔화인지도.

 

왼편에는 지젝을 연상케 하는 외모의 러시아 아저씨가 이륙할 때부터 잠에 시달렸다. 심지어 포크를 쥔 채 식사를 하다가도 꾸벅꾸벅 졸았다. 앞좌석에 닿을 것만 같은 아저씨 뱃살을 옆눈으로 흘끔 훔쳐보다 생각도 않던 화장실이 간절해졌다. 서울에서 모스크바, 모스크바에서 마드리드, 마드리드에서 그란 카나리아. 거진 하루에 가까운 이동 시간 동안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여행을 떠나기 3일 전 타로를 펼쳤다. 딱히 기대할 바도 없지만, 궁금한 건 궁금하니까. 흐름을 살펴보니, 바보카드가 눈에 띈다. 구름 하나 없는 화창한 날씨, 어느 젊은이가 절벽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는다. 소풍일까. 표정도 해맑고 몸짓도 가볍다. 아마 나는 곧 그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문을 열어젖힐 것이다. 신선한 만큼 무모한, 또는 무모한 만큼 신선한 문을.

 

대학교 때 어느 교수님은 자신이 겪은 혹은 지켜본 짤막한 일화를 거의 매수업마다 들려주셨는데,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인생은 어떤 거창한 게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 뒤바뀐다고.

다행히 마드리드행 비행기에서는 옆자리가 비어 있는 창가 쪽에 앉았다. 이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가 금세 점점이 박힌 무수한 불빛으로 넘실거렸다. 도시 하나 하나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주황색 열대어처럼 그란 카나리아를 향해 헤엄친다. 어찌 될지 모르지만, 아니, 모르기 때문에 일단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랄까. 나뿐만 아니라, 미겔을 비롯하여 이 떠남에 연루된 모든 이들에게도.

    

​하늘에는 별자리를 그려볼 만큼 무수한 별들이 오래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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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무늬

#2. 파도를 세어보는 시간

 

언제부턴가 바다 가까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이따금 마음 한 편 허전할 때 파도 소리 하나둘 세어보는 밤바다의 풍경을 말이다. 도시인으로서는 누구나 한 번쯤 품을만한 낭만일 것이다. 공항을 떠나는 차 안에서 혹시나 해 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미겔은 대문에서 걸어서 5분이면 해변이 나온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그저 어느 작은 해변일 줄 알았는데 큰 오산이었다.

 

골목 하나, 정말로 집 앞에서 골목 하나만 돌면 바다가 보였다. 라스 칸테라스 해변이다. 도시와 바로 붙어 있을뿐더러, 한겨울에도 15도 이하로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따듯한 날씨 덕에 북유럽 사람들이 많이 찾는단다. 3km 정도 길이의 해변 산책로에는 서핑, 일광욕, 거리 악사, 모래 조각 작품, 노천카페의 수다 등 해변의 고즈넉한 여유가 줄줄이 이어졌다.

 

가까이 살펴보면 해변은 ‘La Puntilla’, ‘Playa Grande’, ‘Playa Chica’, ‘Peña la Vieja’, ‘Puntabrava’, ‘La Cícer’ 등 다섯 곳으로 나뉘어 있다. 풍경이 눈에 익을 때쯤에는 저마다의 개성을 찾는 재미를 들렸다. 가령, ‘Peña la Vieja’에는 썩 괜찮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지, ‘La Cícer’의 파도는 다른 데보다 조금 더 거세네, 거리 음악은 ‘La Puntilla’에서 듣는 게 편하지 라는 식으로.

 

이 해변의 또 다른 특색은 ‘La Barra’로 불리는 화산암 위주의 암초 지형이다. 해안으로부터 일정 거리 떨어져서 길게 늘어져 있는데, 큰 파도를 막아줄뿐더러 물놀이하는 이들이 바다 멀리 떠내려가는 걸 잡아준다. 아마 글로벌 비영리단체 환경교육재단으로부터 해양 안전, 환경 관리, 수질 등을 기준으로 선정하는 ‘블루플래그’를 받는 데 있어서 꽤 큰 공헌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어린아이부터 주름 가득한 노인까지 누구나 편히 바다에 몸을 적시며 머물렀다.

 

저녁 무렵에는 해변 왼편 끝에 자리한 대강당까지 걷곤 했다. 라스 팔마스에서 태어난 테너 알프레도 크라우스를 기념하는 클래식 공연장이다. 오스카 투스케가 건축했다는데 등대를 닮았다. 처음에는 멀리서 건물 경관조명을 보고는 실제 등대인 줄 알고 찾아갔을 정도다. 대강당 주변을 서성이다 도시에 땅거미가 내려앉고 불빛이 점점이 모일 때면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파도를 세는 게 일상이 되어 갔다. 어딘가를 나서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해변을 곁에 뒀다. 대부분 흐린 날이었고 바람은 비스듬히 불어왔다. 파도가 부서지고 다시 밀려오는 걸 세어보며 섬의 저녁을 맞이했다. 가만히 귀기울이면, 섬이 무어라 말을 건네올 것만 같았다.

 

섬으로 떠나면서, 프랑수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종종 머릿속에 떠올렸다. 소년원을 빠져나와 길 아닌 길을 끝없이 달음박질하던 앙투안을 따라가 보려 애썼다. 그렇게 다다른 어느 해변, 앙투안은 바닷물에 몇 걸음 적시고는 이내 곧 돌아섰다. 아무 말 없이 카메라를 응시하던 그의 눈빛이 깊숙이 번진다. 라스 칸테라스 해변을 홀로 묵묵히 걷다 보면, 때로 그날 앙투안이 마주한 파도가 여기에도 찾아왔을까 싶어 마음이 괜스레 일렁이다 먹먹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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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Think & Write

김약국의 딸들 by 박경리 (1962)

책을 읽던지 영화를 보던지 역사를 만나든 간에 나는 항상 '현재성'에 집착하는 습관이 있다. So what? 현재 나에게 그 사건과 스토리는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나? 곰곰 생각해 보게 하는 매개체로 여기고 있다. 이 책에 대해서 두 가지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나는 변동기에 놓여 있는 나, 두 번째는 종교에 대한 태도. 

 

#변화, 과도기: 전통적인 유교질서가 무너지고 원시적인 형태로나마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하던 과도기. 전통적인 여성상과 더불어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여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던 과도기. 미래를 준비한 신여성 용빈과 용혜는 운명에 맞서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고 있으나 여자에게 결혼이 인생의 전부라는 전통성에 붙잡혔던 다른 딸들은 운명에 스러져 갔다. 다만 자본주의 요체인 '돈'을 관통한 첫째 용숙이는 천박하게나마 잘(?) 살아가고 있다. 고지식하고 운마저 따르지 않았던 김약국은 망했고 비열하나마 약삭빠르게 움직였던 정국주는 번창한다. 

 

자꾸만 4차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잘 모르기 때문에 자주 들리고 무지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책을 읽어볼까? 확실히 변동기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대표되던 3차 혁명도 겨우 따라가고 있는데 이제 4차 혁명을 대비하여 아이를 준비시켜야 하는 부모가 되었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이제 지식과 정보에 대한 분석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암기보다 '균형과 유연성'이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Wall E] 애니메이션을 봐도 지식의 범위와 분석의 속도를 인간이 인공지능을 따라갈 수가 없다. 다만 인공지능에게 일을 시키는 주체는 인간이다. 무엇을 위해 분석할 것이며 어떤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지식이 필요한가? Artificial intelligence(AI)가 아니라 Intelligent Assistant (IA)로 활용하는 능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시대가 바뀌고 있다. 운명에 굴복하기 보다 미래에 대한 통찰력으로 유연하게 살아가야 한다. 용옥과 용빈의 차이는 바로 '교육'이었다. 이제 그 키워드는 무엇일까? 유발 하라리 책과 토마스 프리드먼 [늦어서 고마워] 책을 둘 다 한 번 읽어봐야겠다. 다소 관점이 다를 지도?

 

#비참함을 이겨내는 힘, 종교?: 이 책을 읽으며 용빈과 홍섭, 용옥의 종교에 대한 헌신을 짚어보게 된다. 용빈은 신자이나 의문을 품는다. 그렇다고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어찌보면 이 모든 운명을 혼자 힘으로 껴안고 가고 있는지도 모르지. 부르조아 홍섭은 용빈도 인정한 독실한 신자이다. 하지만 나약함으로 표현된다. 현상을 바꿀 용기가 없다. 지금의 자신을 굳이 벗어날 필요가 없다. 용옥은 처참한 현실을 종교로 극복하려 애쓴다. 결국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지만 말이다. 종교에 대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현실의 비참함에 순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동물농장]에서 조지 오웰도 그를 빗대어 까마귀 'Moses'를 잠시 등장시키기도 한다. 현체제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 시련은 신이 나를 시험하기 위해, 내가 극복할 만큼의 시련만 주시므로 이겨내야 한다, 견뎌내야 한다, 또는 감사히 받아야 한다'. 일제강점도 신의 뜻이었다는 둥 하는 정신나간 종교인들처럼 말이다. 용옥은 딱 그 표본이다. 어디를 봐도 비참하기 짝이 없지만 꾹 참는다. 이겨내려고 한다. 불평 하나 없이 모든 것을 십자가로 여기고 예수님처럼 그 십자가를 힘들지만 기꺼이 지려고 한다.

 

"며칠 후, 가독도 앞바다에 가라앉는 산강호는 인영되었다. 용옥의 시체는 말짱하였다. 이상하게도 말짱하였다. 다만 아이를 껴안고 있는 손이 떨어지지 않아서 시체를 모래밭에다 나르는 인부들이 애를 먹었다. 겨우 아이와 용옥의 시체를 떼어냈을 때 십자가 하나가 모래 위에 떨어졌다(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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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열린 생각

[톰 소여의 모험] 캐릭터 소개

안녕, 친구들아? 나는 오늘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캐릭터를

소개할거야. 먼저 메인 캐릭터는 폴리 이모, 톰, 허크야. 그리고 다른

캐릭터는 조, 인디언 조, 머프 포터 등이 있어.

 

제일 먼저 소개할 캐릭터는 이 소설의 핵심 주인공, 바로 제목에도 나오는

톰이야. 톰은 개구쟁이 남자야. 톰은 폴리 이모가 화를 내고 소리를 쳐도

장난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개구장이야. 톰에게는 베키라는 여자 친구가

있어. 그 다음으로 소개할 캐릭터는 폴리 이모야. 톰의 죽은 엄마가 폴리

이모의 여동생이라 폴리 이모는 톰을 소중하게 생각해. 그렇지만 톰이 너무 너무 장난 꾸러기라서 생활을 어렵게 이겨냈어. 다음은 허크야. 허크의 엄마는 사고로 돌아 가셨고 아빠는 술주정뱅이야. 그래서 학교도, 교회 주일학교도 가지 않는 허크를 엄마들은 싫어하는데 남자 아이들은 허크를 부러워 한대. 그래서 톰은 허크와 아주 잘 어울려. 또한 조도 톰의 친구야. 조는 별 할말이 없으니~ 다음 주인공으로 넘어 갈게. 다음 캐릭터는 바로 머프 포터 아저씨야. 포터 아저씨는 늘 술에 취해 있지만 아이들한테 착하게 굴어줘. 머프 포터는 항상 칼을 들고 다니며, 늘 술에 취해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꾸 까먹는단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캐릭터는 인디언 조야. 인디언 조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그 사람은 의사 로빈슨을 죽인 아주 나쁜 악당이라구. 결국은 동굴에 갇혀 죽지만 톰과 허크는 그 때까지 인디언 조가 무서워 늘 피해 다닐 정도로 위험했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머프 포터 아저씨야. 왜냐하면 술 때문에 자꾸 까먹는게 재미있고 아이들을 사랑해 주기 때문이야. 내 톰 소여의 모험 캐릭터 소개는 끝! 다음에 또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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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노스 잡화점 이야기

이야기 52 - 4

472

 

 

 

작전상 후퇴라는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상대해야 하는 적이 미지의 생물인 뱁새인간이었으니까. 지금은 3명도 제대로 제압할 수 없는 가운데에 내가 돌아가보니, 거대한 T-렉스가 검은색 그림자에 뒤집어 씌워진 체 난동을 부렸다. 여기에는 분명 공룡이 멸종한 걸 뛰어 넘어서 보이지도 않는 생물인데, 한쪽 전선은 거의 쥬라기인지 백악기인지처럼 되어버렸고, 다른 한 곳은 몬스터들이 모두 그림자에 잠식이 되어 붉은 눈만 살벌하게 띄고 있었다.

 

마왕군의 30만과 바퀴벌레보다 많은 용사들이 합쳐져서 그 군세를 막아내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처치를 해도 그림자 속에서 다시 튀어나온다는 소리였다. 이렇게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데, 밤이라도 되는 순간 끔찍한 악몽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선에는 시나가 필요할 지경이고, 검은 존재는 전선을 넘어 계속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가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사람의 그림자를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대로 가면 하루도 못 버틸 거야. 생각보다 가장 극단적인 해결방법이 필요할지도 몰라.”

 

말하자마자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바라보니, 시나의 올빼미 눈이 무언의 압박을 담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말만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내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말은 안 했잖아.”

 

“아뇨. 마스터라면 결국 저희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리아와 릴리스를 찾아가는 거겠죠.”

 

“마리아와 릴리스를 찾는다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아리엘의 의식세계로 가서 침식되지 않게 하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스터의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재워서 검은 존재의 먹이를 제공하고 있는 행동부터 막으실 거니까요.”

 

시나마저 생각하고 있는 방법이라면 소용없겠구나. 잘못되면 개죽음을 당할 수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켈모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상황에서 아리엘을 봉인하지 못했다는 소리라면, 어디선가 기회를 엿보고 있거나 자신마저 당했다는 소리일 텐데. 시나가 안리아스의 수정구로 과거를 녹화했으니, 저곳이 싸우던 말던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하자.

 

“어이. 주인. 지금 전투하고 있는데 그걸 보고 있는 여유가 있는가?”

 

레시아가 붉은 말 위에서 검은 고양이의 모습으로 지휘를 하고 있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뭐라 하려다가, 상황이 급박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대신 가슴을 태워가는 어처구니 없는 기분은 한숨으로 승화하겠지.

 

“명확하게 알아야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붉은 말은 어디서 구한 거에요? 만약 그게 여포가 그토록 찾고 있던 적토마라면 정말 가만 안 둬요?”

 

“묵시록의 기사 중 전쟁<War>에게 빌린 거다. 안심하거라.”

 

“전쟁의 기사? 그 4명의 기사요?”

 

7개의 죄악과 묵시록의 기사. 그리고 때에 따라 칭하는 번외적인 직위가 1개이니까, 12마계공작이 전부 참여한 건가? 자세히 보면 적토마가 아니라 피로 칠한듯한 가죽과, 탄탄한 근육 위에 판금으로 된 갑옷을 입혀준 상태. 눈에서는 살의가 가득 차고 이 말은 왠지 사람을 뜯어 먹을 것 같은 공포심을 유발했다.

 

“어...그렇군요. 뭐 어쨌든 지금은 레시아도 같이 이걸 보도록 하죠.”

 

마법학원 안에는 찍히지 않았으니 그 주변에 있는 환경은, 아무런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는 모습. 그 이후에는 아리엘이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검은 날개가 펼쳐지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아리엘이 각성하기 전에는 마법학교 쪽에 결계가 펼쳐지지 않는 것을 보아, 지금은 켈모리아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상황.

 

“지금 의식을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올빼미가...아니, 비둘기가 말한 것처럼.”

 

“잠깐만요. 냥캣. 제대로 부르다가 일부러 틀리게 부르는 이유는 뭡니까?”

 

방금 전에 제대로 시나의 모습에 대해 맞췄지만, 정정을 하면서 다시 비둘기로 말한 레시아는 시나의 항의를 무시하고 질문에 답했다.

 

“검은 존재 밖으로 벗어났을 때는 침식이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하고 있었으니 마법 기동반에 있는 자들은 모두 안전하다. 하지만 퍼지는 속도를 보아하니 이곳 전체를 뒤엎는 것은 앞으로 하루 정도 남은 것 갔노라.”

 

“그래도 켈모리아가 펼친 그 결계 안에는 검은 존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 켈모리아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보면 되죠. 어쩌면 애석하게도 켈모리아를 살려놔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거나. 생각을 해보니 그녀는 엘티노스를 뛰어넘는 영웅이 되고 싶어했으니, 지금 이 상황에서도 영웅놀이를 할지도 모르겠네요.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고 싶어 할 테니, 세피르로 추정되는 검은 존재가 이 세계를 모두 뒤엎는다면 해결하러 나설지도?”

 

“하지만 이 검은 존재에서 태어난 괴물들은?”

 

“그건 아리엘이 생각으로 창조해낸 괴물들이겠죠. 정확히는 생각 속에 있어야 했던 괴물들이 다른 차원에서 뽑혀 나왔지만, 이 세계로 강제소환 된 터라 형체가 아직까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걸 거에요. 마침 저기에 몽골리안 데스웜처럼 보이는 거대한 지렁이가 땅 밑에서도 나오고 있으나,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서 전부 검은 그림자로 덥혀있는 상태에요.”

 

검은 고양이가 저 멀리 둘러보고는 다시 한번 이야기를 했다.

 

“그럼 저들은 아직까지 짐이 통솔할 수 있다는 소리로군?”

 

“네?”

 

아. 마왕은 마물들의 왕이라서?

 

“냐아아아아아아앙!”

 

고양이 목소리에서 울려 퍼지는 충격파를 0.2초간 듣고 곧바로 귀를 막기 위해 손이 올라갔다. 어처구니 없게도 지금은 마신이 있어도 검은 존재 안에서만 통제가 가능한지,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의 경우에는 모두 카멜롯으로 사라지듯 되돌아가고 있었다.

 

“역시나 짐의 예상대로다. 이 세계에 넘어오면서 모든 몬스터들의 통솔은 짐이 붙잡고 있으니 말이지. 하지만 카멜롯으로 가면 짐보다는 더 위에 있는 존재가 통제권을 붙잡는 모양이다.”

 

“그럼 레시아는 저 안에 들어가면 마신의 부하로 들어가게 되는 건가요?”

 

“짐과 주인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데, 저런 마신의 밑에 들어갈 것 같은가? 이미 짐은 주인의 남편이자...”

 

“아내겠죠...”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나와 이미 사역마로 계약 되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마신이 레시아를 통솔할 수 없고 나만 할 수 있다는 거니까. 페어링이 이어져있는 동안에는 마신과 더불어 레시아까지 난동을 부리지 않는다는 소리.

 

계속해서 안리아스 수정구를 보고 있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검은 괴수들이 모조리 카멜롯으로 향했고, 안리아스 수정구를 해독한 결과는 전혀 좋지 않았다.

 

“결국 마법학원 안으로 들어가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 거 같네요. 아리엘이 카멜롯으로 돌아오고 있는 모든 괴수를 재우길 바라면서, 마리아와 릴리스에게 꿈의 미로로 사람들을 전부 집어넣으라고 해주세요.”

 

“하지만 그곳은 서큐버스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납치하는 곳이 아닌가?”

 

“생명체들이 잠에 빠져들면 검은 존재는 그 생명체의 몸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갉아먹는 거라고 보고 있으니까요.”

 

“증거는?”

 

“제가 멀쩡하게 깨어있었을 때는 침식을 안 당했잖아요.”

 

결국 몸이 검은 색으로 물들이는 그 작업은, 사람들의 의식이라고 해야 할지, 영혼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영적인 에너지가 약해지면서 침식한다.

 

“주인의 안일한 생각 때문에 상상하지도 못하는 변수에 당하는 경우도 있지 않는가?”

 

“그럼 그때 생각하는 걸로 하죠. 살아있는 한 언제든지 변수는 만들어지니까.”

 

“그 변수에 죽으면 어찌할 것인가? 주인은 아직 짐의 의뢰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같이 짐의 선생님을 찾기로 한 그 일 말이다.”

 

“그 사람 할아버지 되어있어서 죽어있을 지도 모르는데, 굳이 찾을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그야 당연하지 않는가. 짐과 주인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 말이다.”

 

과거에서 내가 레프리시아에게 너무 강한 이미지를 보여준 부작용이, 현재에 이르러서 나타나게 된 것일까?

 

-구그그그그그...

 

“레시아. 묘한 울림이 하늘에서 들리지 않아요? 마치 대기가 울고 있는 소리인데?”

 

“주인이 카린으로 변하니 그런 쓸 때 없는 소녀감성적인 말이 나오는 건가?”

 

“제가 말하는 게 다 쓸 때 없다고 하기 전에 좀 들어보기나 하세요.”

 

설마 레시아의 목소리가 저 우주 밖에 나가는 경우는 없겠...

 

“주인? 저 하늘에 있는 커다란 눈은 무엇인가?”

 

“아. 잊고 있었는데 아마 달에서 대치하고 있었던 괴수인가 보네요. 이제 저게 추락이라도 하게 된다면, 어디서 많이 보았을 법한 멸망시나리오를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 그대로 운석이 이곳으로 충돌하는 기괴한 장면임과 동시에, 마신이고 뭐고 초고속으로 모든 생명체가 종말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진귀한 장면 말이지.

 

“저거라면 루나가 알아서 해줄 것이니라.”

 

“알아서 해준다고요? 저 운석처럼 떨어지는 괴수를 무슨 수로 격퇴할 생각이에요? 하늘에서 빛 줄기라도 내리지 않는 한 저건...”

 

-콰아아아아아앙!

 

오늘 정말이지 바보 같은 소리를 한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괴수의 중앙을 뚫고 갈갈이 찢어버리는 광선 하나가 지상으로 내리 찍히자 마자, 거대한 폭발과 함께 카멜롯의 일부 땅덩어리를 등분시켜버리는 파괴력을 보여줬다. 완전히 땅이 녹아 내리면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는 붉은 땅을 보며, 저 하늘 위를 바라보았지만 저 멀리서는 루나가 미소를 짓고 있을 거란 모습에 소름 끼치기 시작했다.

 

달 토끼의 기술력은 대체 어디까지일지.

 

“하늘에서 광선이 내려온 것을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마스터.”

 

“헛소리였는데 그게 진짜로 되어버린 거야. 생각만 하면 이루어지는 그런 편리한 것이 아니니 그렇게 우러러보면 안 돼.”

 

하얀 올빼미가 내 왼쪽 어깨에서 점점 얼굴을 들이밀며 부담감을 주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올빼미의 이마를 살짝 두드려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 거대한 괴물이 깨져나간 후유증으로 작은 별똥별이 되어 사방에 흩어지고 말았으니, 나중에 저 조각을 모아서 구슬로 완전히 완성시키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 당사자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리 찍어버려야지.

 

아니! 바보 같은 일은 이제 그만 생각해!

현실이 되면 어떻게 하려는 거냐! 카일!...지금은 카린을 외쳤어야 했던가?

 

“그래도 한시름을 놨으니 다행인가...가장 커다란 적을 격퇴했으니까요.”

 

“격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일시적인 조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그림자 괴수들은 어디선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나타나니, 짐이 가장 골치 아픈 이유 중에 하나이니라. 그러니 엘티노스가 말한 그 아이언 메이든인지 동상인지 하는 것을 직접 받아온 뒤에, 아리엘을 가둬놓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데...주인은 설마 그것에 대한 작전을 안 세웠다고 하지는 않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붉은 눈을 지닌 고양이가 쏘아봤지만, 거기에 위축되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당연히 다 세웠죠. 제가 미끼가 되어서 아리엘과 같이 그 동상에 들어가면 될 겁니다. 다만, 제가 없을 때 폭주해버리는 검은 존재를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달렸죠.”

 

 

그 태연한 말 한마디에 레시아와 시나의 눈초리가 더더욱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시나의 작은 목소리로는 “결국...마스터는 무리를 하는 제안을 생각하신 건가...”라며 한탄해 하고, 검은 고양이는 말 없이 나에게 어퍼컷을 휘두르기 위해, 마기를 오른손 고양이 앞발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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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그라운드 하느라 늦었어요.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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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생각을 담다

아들에게...

아들아.

네가 세상의 빛을 보기 전부터, 아빤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첫 심장소리를 들으며, 심장이 온전함에 감사했고,

손과 발 사진을 보며, 손가락, 발가락 갯수를 세어 보았고,

얼굴모습을 보며, 눈, 코, 입이 엄마, 아빠를 닮은 거 같아 너무나 행복했단다.

네가 아직 엄마 뱃속에 있을때, 아빤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서 기도했단다.

당신이 보내주신 우리 아이가, 이 세상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도록...

그렇게 엄마, 아빠는 너를 낳았단다.

 

엄마와의 연결선이었던 탯줄을 떼고, 엄마 젖을 먹고, 우유를 먹고, 이유식을 먹으면서...

누웠다, 엎드렸다, 고개를 들었다, 네 발로 기었다, 비틀 비틀 위태롭게 서 있다가,

한 발, 한 발 내딛게 되고, 이제는 이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기 까지...

엄마, 아빠는 하루에도 몇번씩 가슴이 철렁하고,  그 배로 감사하며 살아 오고 있단다.

 

더 맛있는거 주지 못함에 미안하고, 더 좋은 장난감 사주지 못함에 또 미안하고,

더 재밌는 책 사 주지 못함에 늘 미안한 엄마 아빠란다.

 

아들아, 아빠는 네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단다.

하지만, 그전에 '행복'이 무엇인지를 느끼기를 바란단다.

돈, 명예, 권력등의 외적요인이 행복의 필요조건도 아니요, 척도도 아님을 깨닫기를 바란다.

이러한 것들은 '세상'이 너에게 강요하는 가식적인 행복임을 알기를 바란다.

행복은 너에게 이미 있음을 느끼거라.

세상이 판단할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는 그런 '행복'이 이미 네 안에 있음을 깨달아라.

네 안에 이미 주어진, 숨겨져 있는 그 '행복'을 조금 더 빨리 발견하여 소유하기를 아빠는 기도한다.

 

아들아, 아빠는 너에게 멋진 세상,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멋지지만도, 아름답지만도 않단다.

그리고 이미 네가 '행복'을 손에 쥐고 있다 할지라도, 때론 이 '행복'이 마치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을 순간들이 많을 것이다. 아니, 사실 눈에 보이는 순간보다 사라져 찾게 되는 순간들이 훨 많을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명심하거라. 이미 네가 소유한 그 '행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너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을 뿐이다.

네가 조금만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면 금방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리에 있을 것이란다.

아빤, 그러한 순간에 네가 고개를 좌우로 돌릴 수 있는 용기와 여유가 있기를 바란단다.

일곱번 넘어지면 여덟번 일어난다는 누군가처럼, 넘어지면 무릎 탁탁 털면서 웃음한번 짓고 다시 걸어가길 바란다.

 

모든 생물에는 다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이유가 있단다.

아빠는 네가 그 이유를 최대한 빨리 발견하고 깨닫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단다.

그래서 하루 하루를 그냥 흘러가듯 보내지만 말고, 의미 있는 시간들이 되기를 원한단다.

삶의 길의 방향을 정하고, 그 길끝에 기다리고 있을 너의 그 무언가를 위해 정진하길 바란다.

때로는 그 길이 직선이기도 하고, 꼬불 꼬불 돌아가기도 하고, 무수한 장애물들이 놓여 있을지라도,

가끔, 이 길이 맞나 싶을 만큼 길을 잃어 헤매고 있을때에도,

너를 믿고, 너를 보내신 이를 믿고, 이 길을 처음부터 너와 동행하고 계시는 그 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손을 잡고 다시 힘찬 한걸음을 내딛기를 기도한다.

 

아들아, 세상에는 너 혼자가 아님을 명심하거라.

네가 원하든 원치 않던, 니 옆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음을 기억하거라.

그들이 너에게 선한 사람 일수도, 악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너는 그들 모두에게 선하기를 아빠는 바란다.

왜냐면, 너를 보내신 이도 너에게, 그들 모두에게 선하기 때문이란다.

너의 선함을 받는 그들이 선하면, 너의 선함을 감사히 받을 것이고,

그들이 악하다면, 너의 선함은 더욱 빛을 발하여, 그들의 악함을 덮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아.

이전에는 네가 있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네가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단다.

이런 엄마, 아빠의 마음을 늘 생각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그러니, 효도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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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

사랑

“일종의 편린이지, 인생 자체가. 무엇 하나 완성된 게 없이.”

 

2년 만에 만난 그녀는 눈에 띄게 수척해 있었다. 몇 년의 시간이 얼굴에 사정없이 폭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것 같았다. 2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언니, 동생으로, 같은 과 동기로서 친하게 지내다가, 대학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서로를 잊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연락이 온 그녀는 퇴근 시간에 맞춰 내가 다니는 회사 앞으로 나오겠다고 했다. 회사를 나서다가, 하마터면 그녀를 못 알아볼 뻔 했다. 수척해진 모습에, 그녀답지 않은 회색 빛 촌스러운 의상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항상 밝고 자신감에 넘치고 아름다워, ‘태양의 여자’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연신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나까지도 불안해졌다. 대체 그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야. 내 인생은 아이러니야.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너도 들으면 웃을 거야.”

 

그녀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맥주 한잔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언니가 이렇게 술을 잘 마셨나. 전화 벨소리가 울리는 데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우리 출판사에 삽화를 그리기로 새로 계약한 사람이 있어서 환영의 의미로 팀 사람들과 조촐하게 회식을 했어. 미대생이라 그런지, 얼굴도 말끔하게 생긴 게 진짜 예쁘장하더라고. 근데 그 꼬마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로르까 시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거야.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로르까를 말이야. …아, 잠깐만.”

 

그녀는 계속되는 벨소리에 핸드폰을 집어 들어, 대충 ‘알았어, 신경 쓰지 마’등 무미건조한 말투로 몇 마디를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안, 짜증나는 전화가 계속 오네. 암튼, 아니 글쎄, 그 꼬마가 로르까 시를 읽고 그림 그린 것도 있다는 거야. 그러다가 어느 새 다들 집에 갔는지 우리 둘만 남게 됐어. 그래서 술도 취했겠다, ‘로르까풍 회화 작품’을 보여 달라고 했지. 그렇게 그날 그 애네 집에 가서 자게 됐어. 작품이 어땠는지는 기억도 안 나. 근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뭔가 이상한 거야. 한번 와본 곳 같은 거야. 문에 달린 장식이며, 천장 등이며…, 언젠가 본 것 같은. 그래서 꼬마한테 장난스레 물어봤지. 꿈속에서 한번 와본 것 같다고. 그랬더니, 그 애 표정이 약간 이상해지는 거야. 그러더니, ‘저 기억 안 나요?’ 이러는 거 있지. 그제야 그 애를 만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게 생각이 났어. 웃기지 않냐?”

 

그녀가 말하고 있는 사이에 채워 놓은 맥주잔을 그녀는 다시 단숨에 들이켰다. 별로 웃기진 않았다. 대학 다닐 때도 워낙 인기가 좋았던 그녀는 많은 남자와 교제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교제했던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과 잠자리를 했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혐오스러웠고, 아름다운 그녀가 자신의 진가를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일정부분은 통쾌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같이 잤던 남자들 이마에 표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잤던 사람과 안 잤던 사람을 구별하고 그게 몇 번을 잤는지도 알 수 있게끔 하는 거야. 아니다, 차라리 남자들 가슴에 내 이름을 문신해놨으면 좋겠다. 그럼 그 사람의 셔츠 속 가슴을 들여다보며, ‘아, 네가 잃어버린 과거의 나를 아는 구나’하는 거지.”

 

그 순간 내 핸드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손으로 집으며 그녀를 얼핏 보자, 받으면 서운해 할 것 같았다. 나는 벨소리가 안 나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나에게 사랑은 제로 칼로리 콜라와 같은 거야. 강렬한 느낌에 끌려 마시고 또 마시지만, 그건 나에게 절대 아무것도 채워주지 않아. 제로 칼로리인 걸 알고, 그렇기 때문에 마시려고 했던 건데, 나는 그게 기적처럼 날 풍성하게 채워줄 듯 계속 마셔. 그렇게 배는 부르고 점점 목은 따가워지는데, 나는 콜라를 마시기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아. 이 콜라만 마시면 될 것 같았는데. 그런 느낌 이해하겠니? 끊임없이 갈망하는데, 절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말하자면, 제로 칼로리의 비애지, 내 사랑은. 잉여쾌락일 수도 있고, 잉여가치, 잉여환상…….”

 

자기 연민에 가득 찬 그녀의 연애 이야기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시켜놓은 풍성한 안주는 우리 둘 다 별로 손을 대지 않은 관계로 풍성한 그대로였다. 그렇게 속을 채우고 싶다면, 안주라도 먹지.

 

우리가 있는 호프집에선 금방이라도 천장에서 바퀴벌레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날려도 전혀 놀라지 않을 만큼 허름하고 어두운 데다가 습기가 가득 차 있는 불쾌한 환경이었다. 회사 앞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아니, 지구상에 이런 곳이 존재하는 지도 몰랐다. 나는 안주에도, 그렇다고 술에도 손이 안 가고 그나마 물만 괜찮게 여겨, 물만 마셨다. 그녀는 열심히 말하면서도 틈틈이 술을 들이켰다. 그녀 혼자 술잔을 비워댔고, 술을 잘 하진 못하는지 눈에 띄게 취해가고 있었다. 난 그저 그녀의 얘기를 대강 듣고 술잔이 비지 않게끔 채워주면서, 부재중으로 택배기사가 앞집에 대신 맡겨놓았을 카메라를 빨리 찾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생리할 때가 됐는데, 계속 안 하더라고. 임신했구나 하고, 누가 애 아빠일까 생각해봤는데, 딱히 적당한 사람이 없더라고. 그래도 별로 상관없었어. 왠지 내가 무언가 해냈다는 느낌, 내 안이 따뜻하게 가득 채워졌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신성한 느낌마저 들더라고. 그래서 일부러 병원을 가지 않고 한 달을 더 넘기고 또 한 달을 넘기고……, 그렇게 반년을 넘겼어. 병원에 가면 현실을 직시하고 수술을 감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배가 별로 불러오질 않는 거야. 한참을 고민하다가 산부인과를 갔지. …아씨, 이거 진짜 시끄럽게 하네!”

 

그녀는 벨소리 나는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팽개쳤다. 오늘 처음 만났을 때 불안하게 떨리던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술에 취해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근데 말이야, 병원에서 뭐라는 줄 알아? 내가……, 글쎄, 폐경이라는 거야. 스물아홉 밖에 안 됐는데.”

 

그녀는 애초에 울음을 참을 생각도 없었는지, 그때부터 격렬하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아들, 딸 다 낳고 기른 오십 살 중년부인도 아니고 스물아홉에 무슨 폐경이냐고 물었더니, 의사는 담담하게 ‘요즘 뉴스에도 간혹 나오고 하는데, 환경 호르몬 영향 때문, 어쩌고’하는 거야. 약으로 치유가 될 확률이 50%이상인데, 문제는 내가 너무 늦게 왔다는 거야. 잘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약을 먹어보자고 하더라.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칼슘제도 먹자고 하더라고. 혹시 올지 모를 골다공증 때문에. 이게 말이나 되니? 진이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많아서 이렇게 벌을 받은 걸까?”

 

그녀는 마치 상처 받은 들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다소 충격적이고 그녀가 받았을 고통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나,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하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표현대로 정말 벌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에겐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아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헛것을 가졌던 거지, 나를 갉아먹은. 누군가와 살을 부빈 시간이 많을수록 나는 점점 없어지고, 마침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숨 사이사이 먼지가 되어버린거야.”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저 그녀의 다분히 문학적인 발언에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이제는, 내가, 사라져, 버린 거야.”

 

 

 

아마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나는 얼마간 멍하니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던히 놀랐지만, 나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술값을 계산하고 나왔다. 어떻게 그 곳을 빠져나와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기억나는 건, 다음 날 아침, 전날의 일이 몇 년의 일처럼 낯설게 느껴졌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에게서도 그 후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퇴근 후에 호프집을 다시 찾아보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시간이 1년 정도 흐른 뒤였다. 학교 후배에게서 들은 얘기로는, 그녀가 독일로 가서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후배는 그 독일인이 호모 같은데다가, 그녀 또한 예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살이 많이 찌고 여러모로 굉장히 상했다고 했다. 대학 때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제야 궁금해졌다. 그때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던 걸까? 그럼, 나는 예전 모습이 남았던 그녀를 본 마지막 증인인 걸까? 대체 나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듣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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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

철봉을 해야 해

 

며칠 전부터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들렀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목도 일자형으로 변형되었고 허리도 요추가 약간 디스크라고, 의사가 말했다. 오래 한 자리에 앉아있는 사무직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그런 거라고 했다. 어깨 활짝 피고, 허리 곧추 세우고, 다리 꼬지 말고 바르게 앉으면, 괜찮을 거라 했다. 나는 의사에게 몸의 오른편이 특히나 아프다고 했다. 목부터 허리, 심할 땐 발목까지. 의사는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어깨를 펴고 두 팔을 내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의사는 내 오른 팔을 들어 살펴보더니, 이게 다 편 거냐고 물었다. 그제야 내 오른 팔이 굽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알고는 있었는데 그러려니 했다. 팔을 활짝 펴야 되는 일이라는 걸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불편하진 않았다. 아니, 불편했던 적이 한번 있었다. 중학교 2학년, 체육시간에 배구로 시험을 볼 때였다. 토스를 할 때 팔이 펴지지 않아 엉뚱한 방향으로 자꾸 공이 날아갔다. 연습해도 잘 되지 않아 성적도 B를 받았던 것 같다. 그때 말고는 별로 생각나는 게 없다. 옷 살 때 내 팔이 유독 짧은 것 같이 느껴질 때가 간혹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체구가 작아 팔도 그런가보다 했다.

 

의사는 도수치료와 운동을 권했다. 엑스레이를 봐도 뼈에는 이상이 없었고, 팔이 안 펴지는 건 어릴 적 자기도 모르게 다친 이후에 팔을 안쪽으로 굽히다보니 힘줄이 짧아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목과 어깨로 이어지는 근육에 긴장을 더하고 몸의 균형이 깨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도수 치료 내내 나는 고통스러웠고 평소에 아파야 했던 걸 짧은 시간에 몰아서 아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치료가 통증의 집합인가, 여길 정도로 시원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치료사는 도수 치료 후 나에게 적합한 운동으로 아령을 좌우 교대로 한쪽씩 들면서 곧게 걸으라 했다. 왼손으로 아령을 들 때는 아픈 줄 몰랐는데, 오른 손으로 아령을 들고 걸을 때는 팔꿈치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내 팔 안에 탄력성 없는 고무줄 하나가 힘겹게 늘어나는 것 같았다. 치료사는 내 오른 팔이 치료 이후에도 완벽하게 펴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신 허리 근육을 단련시키면 굽어진 팔로 인해 몸의 균형이 깨지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물론 오른 팔에 대한 스트레칭도 적절히 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팔이 펴지지 않는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오른 팔이, 치료사의 말을 들은 뒤로 불편하게 느껴지면서 슬프기도 했다. 어제와 같은 팔인데,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마치 ‘당신은 언젠가는 죽습니다’라는 당연한 말을 들었는데, 문득 내가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고 슬픈 것처럼. 이제 오른 팔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영생을 꿈 꿨던 진시황처럼 오른 팔, 너를 펴보리라.

 

어떻게 하면 팔을 펼 수 있을까. 우선 치료사가 알려준 아령을 들고 걷는 연습을 했다. 남동생 아령 3kg를 집 안에서 좌우 교대로 들고 걸어 다녔다. 한 10분쯤 했을까, 아랫집 아줌마가 엄마 핸드폰으로 쿵쾅거린다고 무슨 일 있냐고 문자를 보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집 근처 놀이터의 철봉이었다. 철봉에 매달린다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일은 없을 테니깐. 그렇게 나는 철봉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낮에 방문한 놀이터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몇몇이 뛰어다녔다. 내가 놀이터로 진입하자 아이들 보호자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날 흘끔 쳐다봤다. 내가 여자라 그런지 한번 쳐다봤을 뿐 별 반응은 없었다. 나는 곧장 철봉 쪽으로 갔다. 내 키에 적정한 철봉 바에 매달렸다. 매달리자마자 팔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3초, 5초 정도 짧게나마 철봉에 매달리기를 10회 했다. 매달릴 때마다 오른 팔꿈치의 힘줄 하나가 늘어나면서 팔 전체에 날카로운 통증을 남겼다. 10회를 하고 쉬고 있는데, 양쪽 손바닥도 아려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하다가 한번만 더 해보기로 했다. 철봉에 매달리자마자 손바닥이 아려서 도로 내려왔다. 팔에 근력이 없다보니 벌써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죽지 마!”

 

갑자기 등 뒤로 누가 소리치는 게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어떤 검은 옷을 입은 아저씨 한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나한테 얘기한 건가? 그리고 아이들하고 아줌마들은 언제 사라진 거지? 아저씨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학생, 죽지 마!”

 

나한테 하는 말이 맞았다. 내가 죽으려는 것처럼 보였나? 아저씨가 술을 마셨나? 뭔진 모르겠지만, 저 아저씨 이상해! 나는  아저씨가 쫓아올까봐 미친 듯이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기 직전 뒤를 돌아봤지만 아저씨는 전혀 쫓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나의 극적인 등장에 놀라, 무슨 일이 있냐고 했다.

 

“아니, 어떤 아저씨가, 나는 죽으려는 게 아닌데, 죽지 말라고, 막 소리를 지르더라고.”

 

거친 숨을 그대로 내뱉으며 대답했다. 엄마는 뭔 말이냐고 다시 한 번 말해보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내 팔이 나도 모르게 구부러져서는 안 펴지는 게, 내가 죽으려는 생각이 없는데 죽으려는 절망적인 사람으로 보였다는 게 서글퍼졌다.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누군가 나를 꿇어앉히기라도 하듯 엄청난 무게에 눌려, 대문 앞에 그대로 앉았다.